학생인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학생인권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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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뿌리 자르기]

학생인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학생인권 문제 -?

글: 김성우 (상지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느 곳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정치 상태가 충만한 전개에 도달한 경우에 인간은 사유와 의식 속에서만이 아니고 현실과 삶 속에서도 (천상과 지상의) 이중적인 존재를 영위한다. 인간은 자신을 공동 존재(공적인 시민)로 여기는 정치 공동체 속에 살면서, (동시에) 단지 사적인 개인으로서 활동하며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취급하고 자신도 단순한 수단의 역할로 강등되어 낯선 권력의 장난감이 되는 시민(부르주아) 사회 속에 살고 있다.”(맑스, 『유태인의 문제』)

학생도 인간이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관련해서 “체벌을 전면 금지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두발 및 복장을 자율화하고, 강제적인 야간 자율학습을 폐지시키는 내용이 인권조례의 골자가 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학교생활 규정을 만드는 데 학생이 주인이 돼야 하는데 그동안 학생들은 자신이 동의한 적이 없는 규정에 의해 규제를 받아왔으나 학생들이 입법 과정에 참여할 경우 그만큼 자율규제 능력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자유주의는 로크 이후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체와 재산의 자유를 지닌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자유주의자는 일례로 종부세 부당성을 강조하는 등 재산의 자유는 늘 강조되면서도 재산권의 기초가 되는 더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는 특히 군대와 학교에서 규율이라는 이름아래 권위주의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것을 용인한다는 점에서 극히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제정준비중인 경기도학생인권조례안은「헌법」 제31조,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교육기본법」 제12조 및 제13조, 「초ㆍ중등교육법」 제18조의4에 근거하여 학생인권이 학교교육과정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인권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학생인권이라 함은 「헌법」 및 법률에서 보장하거나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등 대한민국이 가입?비준한 국제인권조약 및 국제관습법에서 인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 중 학생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말한다.

본래 인권은 ‘인간’의 자연적 권리라는 점에서 주로 근대의 정치철학과 법철학에서 논의되었고, 기본권은 이 자연적 권리가 국가의 실정법체계에 편입되어 헌법적 가치를 지니게 된 것으로, 근대적 국민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포괄하는 용어로 헌법 담론에서 주로 쓰인다.

이러한 인권개념의 철학적 기초는 서구 근대의 자연법론과 사회계약론이다. 자연법론에 따를 때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부의 권리를 당연히 지니고 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1776년 미국 버지니아 인권선언 그리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이러한 근대의 자연권 개념을 실정법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불가능한 신성불가침한 권리들”을 엄숙히 선언하면서(전문),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생존한다”(제 1조)고 천명한다.

기본권이라는 표현은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에서 비롯되는데, 기본권 개념은 “자연권에 기초를 두고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여러 자유와 권리에 관한 규범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본권은 자연적 인간의 권리와 근대적 국민국가의 국민의 권리를 동시에 담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학계와 헌법재판소도 이런 맥락에서 기본권을 사용하고 있다.(박성철, 『헌법줄게 새법다오』)

이번의 학생인권조례안은 학생도 인간이고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기본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조례안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부터 군사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학생인권이 부당하게 침해당했던 현실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근대의 법적이고 정치척인 담론에서 지극히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인권과 기본권의 회복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상식 이상의 의미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70% 이상의 교사들이 이 조례안에 대해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주로 학생인권을 존중하면 학습 분위기가 저해되거나 학생지도가 어려워지고 학교 단위의 자율성이 침해될 것이라는 우려를 이유로 제시한다.

그런데 교사들의 우려 뒤에는 학생을 ‘피교육자’, ‘약자’, ‘지시를 따라야 할 자’, ‘보호의 대상’, ‘미성숙한 자’ 등으로 보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는 교사를 비롯한 교육 관계자들이 ‘학생인권’ 자체를 교권에 대한 도전이나 교권침해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시대 이후로 생성된 권위주의의 영향으로 학교에서도 권위주의가 지배적인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 준다. 이런 문화에서 학생지도는 일방적 통제나 지시, 타율과 획일성을 그 원리로 삼게 된다.

1주 1표라는 비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을 원리고 삼고 있는 기업마저도 팀제니 리더십이니 하며 수평적 조직구성에 힘쓰고 있는데도 미래의 민주시민을 길러내고 민주주의의 중심장이 되어야 할 학교는 여전히 수직적인 관리방식을 선호하고 있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 것인가? 왜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학생을 삶의 주체나 헌법적 권리주체로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일례로 ‘나이어린’ 학생들에게 체벌을 금지하거나 두발과 복장의 자유를 부여하거나 야간학습 및 보충수업에 대해 선택권을 주고 휴대전화를 소지할 자유를 주고 집회의 자유를 주면 학교운영이 힘들어지고 나라의 법질서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의 두 얼굴을 한 공교육

원래 프랑스 혁명 이후에 공교육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새로운 공교육의 방식을 규정한 사람은 백과전서파의 철학자 콩도르세이다. 그에 의하면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며,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 ‘교수의 자유’, ‘학습의 자유’가 모두 다 중요하며 이는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한 모든 권리로서의 인권’과 마찬가지로 옹호되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일본이나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처음에는 근대화 조기달성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주의가 지배하였고 현재는 선진화라는 명분 아래 자유주의를 여기에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국가주의는 국가관리형 관리 시스템과 암기식 위주의 강압적 학습이라는 정형을 낳았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국가주의는 대중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개방적 자유주의로 전환되지만 이는 소비자/수용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허울을 쓴 채 교육내용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기존의 국가주의적 암기식 교육보다 개방된 교육의 질이 더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주게 된다. 거기다가 무너진 권위와 자유주의의 바람은 학생지도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교실이 붕괴되고 교권이 무너지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국가주의적 획일화는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자유주의적 획일화에 의한 출세주의, 실용주의 및 소비주의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후자가 은밀하게 전 사회구성원의 건전한 이성을 마비시키고 개방과 소비자주의라는 미명 하에 학력의 저하를 초래하고 초중등의 공교육을 파괴하고 고등교육의 교양교육과 인문학을 움츠러들게 하였다.

교육의 국가주의나 자유주의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구의 근대성의 전체화/개별화라는 단일적 구조의 다른 양태일 뿐이다. 마치 정치에서 자유주의와 전체주의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쌍둥이인 것처럼.

인권에도 종류가 있다

로크의 자유주의 인권 개념은 수학에서 추상적으로 동일적인 단위(하나)를 전제하듯이 사회에서 추상적으로 동일적인 단위인 개인을 전제하고 있다. 개인에 해당하는 라틴어 인디비둠(individuum)은 원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원인 아톰(atom)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인 기본 단위를 의미한다. 단순 관념의 순열과 조합을 통해 복합 관념이 만들어지듯이 개인들이 기계적으로 합쳐져서 사회가 생성된다. 이때 개인은 수의 하나와 마찬가지로 동질적인 추상적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개인은 형식적으로 동등한 자유롭고 평등한 성격을 부여받는다.

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세계가 바로 로크가 말하는 ‘자연상태’이다. ‘자연상태’는 아직 정치사회(로크는 이 정치사회, 즉 국가를 시민사회와 동일시한다)를 형성하기 이전의 사회다. 이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나 천부적으로,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로크의 자유주의 인권사상은 분명히 개인을 전통과 권위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자로 상정했다는 면에서 인류의 보편적 성취의 한 단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변증법적 시각에서 보면 이는 아직 추상적 단계(헤겔)이고 기만적 단계(마르크스)이다. 자연상태가 추상적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거꾸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결과를 원인으로 잘못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크의 ‘자연상태’란 국가로부터 논리적으로 추상화한 결과이지 국가의 선행원인이 아닌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보비오의 말대로 “자유주의 국가 이론의 형성 순서는 (실제 역사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최초의 가설적인 자유의 상태를 이론적인 출발점으로 설정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로웠다고 전제한 뒤 지배자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사회인 하나의 정치 사회의 형성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권 이론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실제 진행 방향을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 즉 역사적으로 결과인 것을 시발 또는 선행상태로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한편 로크는 시민사회를 정치사회, 즉 국가와 동일시한다. 이는 그가 시민사회의 경제적 측면과 국가의 공론적(더 나아가서는 인륜적인 이념적) 차원을 혼동하여 그 각각의 특성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 이점은 그가 국가형성의 목적을 재산보호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을 혼동하고 있으며 정치를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삼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와 ‘공민’을 혼동하고 있다. 로크는 공동 존재로서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공민’과 사적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욕망기계’(들뢰즈와 가타리)로서의 ‘부르주아 시민’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구분의 상태가 헤겔이 말하는 ‘직접성’의 단계이다. 이러한 직접성이 가장 잘 드러난 개념이 ‘인격’이다. 인격은 수의 단위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동일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공민이나 시민이 ‘법적인 주체와 대상’의 추상화된 직접성의 형태로서 제시된 것이 자유주의적 인격 개념이 된다.

이 ‘인격’ 개념과 ‘개인’ 개념이 차이가 나는 것은 법적인 것과의 연관성 여부이다. 자연 상태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재산보존을 위해 통치 계약을 통해 국가로 들어가서 자신들이 신탁한 그 대표자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인정받는 ‘권리’를 지닌 법적 주체이자 ‘책무’를 지닌 법적 주체이자 대상인 법적인 개인이 된다. 이 법적 개인이 바로 인격이다.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한 역설적인 장치가 바로 인격이다.

인격은 권리를 위해 자유를 제한한다는 자유주의의 딜레마를 잘 드러내주는 개념이다. 더 나가 로크 인권 개념의 중심줄기는 역시 재산권이다. 그는 생명과 자유와 자산을 모두 재산이라고 부르며 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서 국가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그의 권리 개념은 분명히 재산권에 편중되어 있다. 그에게는 ‘시민’과 ‘인격’은 존재하지만 ‘공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헤겔은 로크의 권리와 인격 개념의 추상성을 지적하는 반면에 마르크스는 그 개념의 이중성, 즉 기만성(인간성 소외와 억압)을 폭로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절대로 인권이라는 개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부르주아적 권리 개념을 비판한 것이지 권리 일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권에 대한 오해하게 된 이유는 경제적 자유를 대표하는 재산권과 사상과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리보호를 중시하는 시민권 개념의 차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인권의 탄생이래로 시민권을 주창하는 인권의 민주주의의 담론은 재산권중심의 인권담론과 갈등과 충돌을 일으켜 왔다. “재산권과 인권의 긴장은 바로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의 탄생부터 느껴져 왔다. 17세기 올리버 크롬웰은 그 당시 평등한 법적 권리에 관한 급진적 개념을 지지하던 수평파 운동과 대결해야 했다.”(Bowles & Gintins, Democracy and Capitalism) 이런 점을 파악하려면 오늘날 자유주의적인 권리 중심적인 학파들 내부에서도 재산권을 중시하는 노직 류의 자유지상주의와 약자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중시하는 롤즈 류의 수정자유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학생들의 인권은 모두 소중하다

경기도학생인권조례안은 기본적으로 자유권을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자유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 학교관계자들은 여전히 권위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우리 헌법에서 가장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권리마저 부정하고 있다.

자유주의를 좌파라고 한다면 우리 한국에서 권위주의적 수구 외에는 모두 좌파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학교는 민주화 이전의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이다. 토플러가 말한 대로 기업이 100마일로 뛴다면 학교는 5마일 이하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학생들도 인간으로서 권리의 주체이고 삶의 주체라는 단순한 이 사실을 부정하지 말자. 시민으로서의 그들에게 기본적인 자유권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도 존재하므로 공민으로서 그들의 사회권 보장에도 적극 힘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조례안에 장애학생이나 이주민이나 다문화 가정의 학생 그리고 성적소수자 학생이나 빈곤층의 학생 등을 고려한 조항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지도의 어려움이라는 명분 아래 주로 자유권이 쟁점화되면서 이러한 조항들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인간답게 교육받을 수 있게 해야 하며 학교가 차별의 기원지가 아니라 차별을 사라지게 하는 출발지가 될 수 있도록 문화적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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