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가 학교에 질문하는 것 – 학생인권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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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뿌리 자르기]

학생인권조례가 학교에 질문하는 것

– 학생인권 문제 –

 

글: 조영선(경인고 교사)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두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소극적으로는 ‘학교현장과 맞지 않다.’는 견해부터 ‘교권침해 우려’, 적극적으로는 ‘촛불 홍위병을 만들려는가’까지 반론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인권’은 보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일까? 학생인권조례는 정말로 학교를 망칠 만한 것인가? 이런 반론은 학생인권조례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합당한 것인가?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권고하는 내용은 보편적인 인권과 헌법에 보장된 권리에 비추어 학생들에게 신체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생활규정의 폐지’, ‘체벌과 모욕적인 발언 금지’, ‘집회와 시위의 자유 보장’ 등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생활규정의 폐지’와 ‘체벌과 모욕적인 발언 금지’가 학교질서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라는 의견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학교의 질서가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생활규정’과 ‘체벌과 모욕적인 언행’으로 유지되어왔음을 의미한다. 즉, 서로의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해 있어야 할 생활규정이 사실은 학교의 억압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혹시 걸리지 않을까?’ 긴장하며 학교에 오게 하는 교문지도는 교칙을 잘 지키는 학생에게도 학교에 대한 반감을 일으킨다. 교사가 학생의 잘못을 가르쳐주겠다는 이유로 체벌을 하면서 동급생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학교폭력예방 교육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학생들의 폭력을 예방하는 교육을 하는 교사들이 학생에게 폭력의 한 형태인 체벌을 실시해서는, 그 교육이 효력을 거둘 수 없다는뜻이다. 이런 억압적인 장치들이 겉으로는 학교의 권위를 지켜주는 것 같아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 교육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는 교권 침해다?

어떤 교사가 담임에게 욕하는 카페를 만드는 아이들에게 인권의 이름으로 비행의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라고 말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 학생들은 왜 담임을 욕하는 카페를 만들었을까? 학생지도를 하다보면 학생의 의견과 반(反)하게 교육적으로 지도해야 할 경우가 있다.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지도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권의 이름으로 대부분의 경우 동의는커녕 체벌 등의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학생들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낼 통로가 없다보니 학생들이 음성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카페를 만들고, 그것이 음성적이다보니 ‘인신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적인 지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즉 학생과 교사의 의사소통이 보다 현실화되면 음성적으로 교권을 침해하는 사각지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혹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면 ‘공식적으로 너희들의 의견을 내지 않고 이렇게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교육할 수 있다. 즉 학생인권조례는 오히려 교권존중의 바탕이 될 것이다. ‘너희들의 권리를 보장받는 만큼 너희도 교사, 학부모 등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라’고 가르칠 수 있는 근거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지도하려고 하다보면 학생의 진정한 ‘동의’ 없이 무엇을 교육하기 어려워진다. 학생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교사는 다양한 수업 방법을 구안할 수밖에 없고 교육과정이 아닌 서로가 참여하는 교육 속에서 교사와 학생이 그 의미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입시 위주, 지식 교과 위주의 교육 과정이 침해해왔던 교사의 교육과정 편성권 및 평가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는 미성숙한 학생들을 촛불 홍위병을 만들려는 것이다?

사회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정치에 참여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친다. 특히 자신의 생활과 관련된 지역 사회의 정치에 참여하여 의정활동을 참관하고 의견을 내고 지방 선거에서 후보의 공약을 비교해보는 것이 교과서에 제시된 학습활동이다. 자신의 기본적인 생활과 관련된 학교의 여러 규정의 제정 과정에 참여하고 토론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민주시민 교육이다.

그런데 미래의 민주 시민이 될 학생들에게 유엔 아동권리협약과 헌법이 보장한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특정한 정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인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특정 정치 이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개별적으로 미성숙한 학생들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미성숙한 어른들도 많다. 즉 성숙과 미성숙은 나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경험과 사고의 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미성숙한 존재를 성숙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타인과의 의사소통 훈련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는 유의미한 경험들을 전화할 수 있는 시도의 기회를 박탈하고 금지함으로써 학생의 성숙을 지연시키고 있다.

이 사회가 학생인권조례를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는 학생들의 다양한 시도와 그로 인한 사고의 확장을 인정하는 가운데 대화하고 토론할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학생들이 현재 학교의 지도에 반항해왔던 이유는 학생지도 방식이 교사나 학교에 따라 너무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가장 많은 반발을 사왔던 두발 지도의 기준은 ‘학생답게’였고 체벌의 기준은 ‘교육적으로 필요할 때’였다. 이러한 모호한 기준 속에 진행되어온 학생 지도는 지도의 권위를 잃고 폭력만을 남기게 되었고 학생들은 이에 반항하여 지도를 거부하거나 태업하는 형태로 저항해왔던 것이다. 즉 불합리한 지도 관행에 발목을 잡혀 정말 필요한 권위조차 짓밟히게 된 상황인 것이다.

두발 지도의 근본은 타인의 신체적 자유를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체벌의 근본 역시 ‘잘못이 있다면’ 폭력으로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적인 입시 지도의 근본은 ‘나를 위해서라면’ 남을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질서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사들을 존중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힘센 교사들이 학생들의 잘못을 체벌로 다스리듯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 약한 학생들과 심지어 어린 여교사들의 교육적 행위에도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입시에 들어가지 않는 수업 정도는 간단히 무시하는 것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기 때문에 딴짓과 태업을 일삼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현 교육에 진정으로 질문하는 것들

지금까지 학교가 권위를 유지해왔던 방식은 피교육자의 기본적인 인권을 제한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두발과 용의복장 지도는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감시의 시선에 학생들의 몸을 조아리게 만들었고 , 체벌은 권력자의 폭력은 합법적일 수 있다는 공권력의 이치를 가르쳐왔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러한 철학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개인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아 관리하는 형식이 교육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채찍과 당근이라는 행동주의적 방식이 인간을 진정으로 교육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보호와 참여 중 어느 것이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가?’

‘진정한 권위를 위해 권력은 필요한가?’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는 사실 이런 토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렇듯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가 지금까지 수월성 교육에 밀려 뒷전이었던 인간과 교육에 대한 물음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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