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사업 그리고 자본과 환경 – 자연과 자본 [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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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뿌리 자르기]

4대강 사업 그리고 자본과 환경

– 자연과 자본 –

글: 강경표(중앙대 박사과정수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거짓말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최소한 우리 중 일부는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으며, 그렇게 믿고 살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것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뿐이다. 헌법 어디에도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헌법 119조 1항에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강력한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그릇된 믿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결합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슬그머니 민주주의의 어깨를 밟고 일어선 자본주의까지 이러한 그릇된 믿음 뒤에는 우리의 교육, 거대언론사, 대기업이 있어왔고, 현재에는 자본주의 전도사 노릇을 하는 이명박정부가 자리하고 있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유한한 자원을 완전한 정보를 가진 이기적인 사람들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 나눠 갖는 것이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은 “보이지 않는 손”이 조절한다. 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도 중학교 과정 정도만 알아도 대강은 이해한다.

그러나 문제는 완전한 정보를 소유한 사람과 “보이지 않는 손에 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며,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구세주도 없다.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소유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합리적인 믿음에 근거한 시장 경제 원리는 자본주의의 신앙과 같다.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면 언제나 확실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따위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보 수준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보자.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구세주를 기다려 볼만도 하다. 그러나 정보가 부족할 때 우리는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불완전한 정보를 가진 사람들끼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서로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며 협의하여 무언가를 결정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우리의 실생활에 있어 경제 활동은 시장경제의 원리가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듣고 협의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보이지 않는 손”따위를 기다리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원래 가격에 의한 자율적 결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념을 철통같이 신봉하며 시장경제 원리를 부르짖는 이명박정부도 “보이지 않는 손”을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나서서 결정을 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한다. 바로 4대강 사업이 그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대통령이 결정했다. 따라라. 다 너희를 위한 일이다. 내가 곧 너희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공유지의 비극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4대강

환경문제를 설명하는 몇 가지 이론 중에 특히 국가가 소유한 공유지 문제를 다룰 때에는「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이론이 있다. 1968년에 게렛 하딘에 의해 발표된 이 이론은 환경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목초지에서 각각의 개인은 가능한 많은 가축을 기르려고 한다. 결국 개인의 이익 증대를 위해 공유지는 황폐화되며 공유지의 자유는 모두에게 파멸만을 가져온다는 것이 이 이론의 골자다.

우리의 4대강에도 이 이론은 적용되었다. 4대강 사업을 위해 국가의 공유지인 하천 둔치에서 농사를 전면 금지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국가 공유지에서 농사를 짓는 행위를 막는 것은 공유지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한 공유지의 비극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명박정부의 4대강 사업 자체에 있다.

공유지 비극 이론은 게임이론이다.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을 게임이론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공용의 목초지가 있다고 가정을 하고 이 목초지에서 한 철 동안 잘 먹여 키울 수 있는 가축의 상한선을 X라고 하자. 목동은 A와B 둘뿐이라고 가정하면 2인 게임을 만들 수 있다. 게임의 룰은 협동전략과 배반전략이 있을 뿐이다. 이 게임에서 협동전략은 각각의 목동이 X/2마리의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다.

반면 배반 전략은 이윤을 남기고 팔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고 그 숫자는 X/2보다 크다. 두 목동이 각각 X/2마리에 가축만을 풀어 놓으면, 각각은 10단위의 이윤을 얻고, 반면 둘 모두가 배반전략을 선택하면 둘 다 아무런 이윤을 얻을 수 없다. 만일 한명은 X/2마리만 풀어 놓고, 다른 한명은 원하는 만큼 많은 가축을 방목한다면 그 배반자는 11단위의 이윤을 얻고 상대방은 -1의 보상을 받는다. 두 목동이 각각 배반 전략을 사용한다면 각자의 이득은 0이 된다.

우리는 A와B 목동 모두가 협동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이기적인 개인은 배반전략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공유지는 황폐화되고 만다는 것이 공유지 비극 이론을 게임이론으로 재구성했을 때의 결과이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국가의 강력한 규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이론은 공유지를 점유해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도 쉽게 적용이 되며, 이러한 논리에 의한 국가 규제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4대강 사업과 같은 규제의 주체가 되어야 할 국가가 나서서 하는 공유지 사업에도 이러한 이론이 적용될 수 있을까?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가 나서서 공유지의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면, 사실 해답은 없다.

환경을 자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원 할당에 도움을 주는 판단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에는 최소한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과 쾌락가치법(Hedonic Price Methods), 여행비용법(Travel Cost Method) 같은 것들이 있다.

비용편익분석은 소위 프로젝트 투자의 최적 수준을 연구하는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로부터 끌어낸 이익과 이 이익을 얻는 데 들어간 비용 사이의 차이를 극대화 하여 현재 들어간 비용보다 미래의 편익을 수학적 모델로 계산해 보는 것이다.

쾌락가치법은 시장이 존재하지 않고, 그에 따라 가치가 관찰될 수 없을 경우에 사회적 가치들을 평가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인데 전체 가치에 기여하는 각각의 속성들이 가진 가치를 통계적으로 이용한다. 예를 들어 공장 옆에 있는 집과 시골에 있는 집이 거래가 없어 시장 가격이 없다면 땅의 가치가 아닌 공기 오염도, 위치, 크기, 풍경 등 집 전체에 포함되는 각각의 속성들의 가치를 통계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여행비용법은 사람들이 어떤 자원에 도달하기 위해 여행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거리는 이용자에게 그 자원의 가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 기법은 사람들이 교외에서 자연을 향유하는 기쁨 같은 것을 평가하는 지표가 된다.

세 가지 방법 모두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경제에서만이라도 가치판단의 준거가 될 수 있는 기준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국가 수준 최대의 토목공사를 시행함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평가기준이 될 수 있는 비용편익분석 자료도 없고, 나머지 자료도 없다. 특이한 것은 4대강의 전신인 한반도대운하사업추진 때에는 잘못된 분석이긴 해도 비용편익분석과 뜬금없는 얘기지만 “대운하를 요트로 여행하면 즐거울 것”이라는 나름의 여행비용법 같은 이명박 대통령의 말 정도는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공유지의 비극은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경제적 이익을 위한 개발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명박정부가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공유지는 특정한 개인이나 사적 집단이 아니라,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의하여 소유되는 토지를 말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건설사의 이득을 위해 개발되거나 대통령의 의지 또는 정부의 논리에 의해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합의가 있을 때에만 신중한 절차를 거쳐 그 개발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공익을 내세우면서도 사실은 특정 건설사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위한 권력 행사를 하고 있다. 국회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에 목을 매는 이유가 대형건설사들에게 선거자금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시민일보 칼럼 2010.3.15). 언론의 주식 지분을 소유한 4대강 건설사는 16곳이고(미디어오늘 2010.3.24), 4대강 사업에 편승한 지자체들 또한 물놀이 전용보와 같은 막개발을 추진하고 있다(한겨레 2010.3.15).

민주적 합의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환경철학의 출발이다

자연에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없다. 더구나 자연에는 숨은 의도가 없으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학자들이 부족한 이론을 보충하기 위해 개발한 개념 장치에 불과하며, 사실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이면에는 특정한 이익을 가진 자들과 부의 재분배를 원하지 않는 자들, 더 많은 부를 얻고 싶은 자들의 협의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종의 은밀한 합의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손”일 뿐이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말이 없는 자연에 더해져 그 이익은 배가된다. 보이지도 않고 말도 없으니 자연이 그들 마음대로 하기에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대신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환경론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말한다. 때로는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기도 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인간에 불과하지만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을 대신하여 하는 말은 4대강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과 같은 거대 환경파괴사업을 할 때 우리는 국민적 협의 수준을 넘어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협의를 해야만 한다. 이때 민주적 협의가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때로는 자본주의가 자연을 모방한 경제 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본주의의 경쟁논리가 자연의 경쟁에서 왔다고 착각하는 이런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자연적 필연성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은 공생을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말하는 동물인 우리가 공생함에 있어 기본은 민주적 합의다. 민주적 합의야 말로 자연을 대신해 말하는 자, 즉 우리의 경제 절차이자 환경 철학의 출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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