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의 탯줄을 자르지 마라! -자연과 자본 [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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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뿌리 자르기]

감성의 탯줄을 자르지 마라!

– 자연과 자본 –

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감성의 거주 공간으로서의 자연

우리는 자연과 매개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둠벙은 생명의 물줄기를 품고 있다가 논과 밭에 물을 대주는 공간이다. 둠벙은 나의 어릴 적 놀이터이자 학습장이고 휴식의 공간이자 타인과 만나는 교류의 공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둠벙은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운동하기 때문에 썩지 않고 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산출한다. 이렇듯 둠벙은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물질(Materie)의 공간이다. 인간의 측면에서 산과 강이나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둠벙은 결국 인간과 자연을 매개해 주는 물질이다.

물질(hyle, materia) 개념은 나무를 뜻하는 ‘Holz’에서 비롯되며, 일상적으로 ‘이브의 나무’, ‘뱀의 나무’, ‘출생의 맹아’로서의 자연(mater, natura), 어머니(Mutter)의 어원이 된다. 즉 자연은 인간에게 어머니(Mutter)의 탯줄과 같은 것이다. 나아가 만상의 자연(physis, 自然)이란 ‘사물들이 스스로(自), 그러한(然)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 물질이 정신 또는 생명과 대조적인 개념임에 반해, 자연(physis)의 일차적 의미는 ‘성장’이다. 그러므로 ‘성장’을 의미하는 자연은 정지와 죽음보다는 생명과 운동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자연의 파괴는 생명의 공간을 파괴하는 것이다.

정신이 거주할 자리가 문학, 예술, 역사, 종교라고 한다면, 감성이 거주할 자리는 자연이라 할 수 있다. 희랍 최초의 종교시인 헤시오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을 위해 대지는 풍성한 식량을 산출하고, 언덕 위에선 참나무가 그의 꼭대기에선 상수리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그 가운데 줄기엔 벌레가 모인다; 그들의 양들은 푹신한 양모를 기르고, 그들의 아내는 자신들을 닮은 아이를 배며…”

이 인용문에서는 인간 행위와 자연 사이에 공감적(共感的) 관계가 드러난다. 감성이 거주할 자리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자연과의 공감적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공감의 물질적 공간의 파괴, 이것은 휴식의 공간,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생명의 여백을 메워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휴식(休息)은 사람(人)과 나무(木)가 같이 숨을 쉬는(息)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대강 사업, 홍익 재단의 성미산 파괴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공감적 관계인 자연과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밀레투스학파에게 있어 이러한 생각은 물활론으로 드러나며, 불교에서는 인연(因緣) 사상으로 집약된다.

자연과의 공감적 관계의 회복

오늘날 인간과 자연의 문제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문제가 전인류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것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근대 자연관을 들 수 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러한 근대의 정신은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는 자연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데, 이때 계몽주의는 인간 주체의 해방과 자연 지배를 동일시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동일성 원리’(das Prinzip der Identit?t)는 자연과 사회 가운데서 주체와 같지 않은 다른 모든 것을 동일한 하나의 형식으로 포섭하여 주체와 같게 만들려는 지배원리의 정신적 형식이다. 동일성 원리는 “사물은 언제나 동일한 것, 즉 지배의 대상이라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왜냐하면 주체가 자연을 자기동일성의 표준, 즉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맞춰 측정할 수 있도록 자연을 객체의 지위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동반하면서 자연에 의해 인간이 무제한적으로 지배받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사회적 속박에 처하게 했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지배는 필연적으로 기술과 노동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적 구성이 위계적으로 체계화되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지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적인 자연을 억압하게 된다.

내적 자연에 대한 지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오디세이 신화는 계몽주의라는 역사적 과정의 필연성을 드러낸다. 즉 사이렌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을 돛대에 밧줄로 묶은 오디세이의 행위는 ‘감각의 통제’를 시도하는 계몽적 이성의 전형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나타내는 인간의 내적 자연이란 육체와 환상, 욕구와 감정 등을 의미한다. 이제 자연에 대한 지배는 내적 자연에 대한 자기 통제, 즉 감성적인 것의 억압, 육체와 본능의 길들임으로 내면화된다. 이렇듯 이성에 대한 신뢰를 넘어 그것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은 인간과 자연의 화해 불가능함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아도르노는 이성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험 또는 감성을 구출하는 것이 동일성 원리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계몽주의의 폭력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임을 제시한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탈출의 공간을 열어 놓을 수 있는 단초를 “미감적 동일성(?sthetische Identit?t)”에서 찾는다. 여기서 아도르노는 단순히 이성에 대한 감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이성과 감성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는 개념이 ‘미감적 동일성’인데, 이는 여전히 동일성의 원리이기 때문에 감각적 질료라는 측면에서 혼란스러움을 통일하면서, 동시에 미감적 동일성이기 때문에 감성(Sinnlichkeit)을 억압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자신이 제시하는 ‘미감적 동일성’의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칸트와 프로이트를 대조시켜 본다. 그 핵심은 양자 모두 공통적으로 미적 경험의 원천을 주관적 원리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와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전자는 욕구 능력의 부정을 통해, 후자는 욕구 능력의 긍정을 통해 미학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욕구 능력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칸트는 ‘무관심적 만족’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칸트의 이론은 욕구 충족 이론으로서의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안티테제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칸트가 “최초로 미감적 반응이 직접적인 욕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고 평가한다.

아도르노가 주장하듯이 동일성 원리를 그 핵심으로 하여 운영되는 자본주의적 체계에서 마침내 “질(質)을 상실한 자연은 양(量)에 의해 분할된 혼란스러운 단순한 ‘소재’로 격하되고 전능한 자아는 단순한 ‘가짐’(haben), 즉 ‘추상적 동일성’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욕구하는 인간은 소유하는 인간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무관심적 만족”은 소유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안티테제가 된다. 체제라는 외부에서 강제된 욕구, 즉 소유욕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대립되는 것이다.

칸트는 무관심한 만족으로 취미판단을 규정하는데, 이는 어떤 이해관계도 없는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타인도 동일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위해

우리는 근대의 자연관 자체를 시대적 상황에 맞게 재설정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도르노에게 계몽의 자기 파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주체성 자체가 이미 지배와 억압의 산물이며 계몽의 변증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맑스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지배와 착취로부터 벗어날 잠재력을 보았다.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통일은 노동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자연을 단순히 인간의 활동을 위한 매개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의 자기 매개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세 차원, 즉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차원과 노동, 그리고 감각이라는 차원을 통해 맑스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 설정을 인간의 자기실현이나 자연의 자기 운동 중 어느 한쪽으로도 환원시키지 않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은, 칸트에 따르면 미감적 만족에서 얻는 쾌락(Lust)와 감각적 만족에서 얻는 즐거움(das Angenhme)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고, 아도르노에 따르면 그것은 칸트의 이러한 취미 판단의 구분을 통합시킨 미감적 동일성의 실현이다.

만약 우리가 ‘감각(Sinn)’을 정신적 감각(생각, 지각)과 실천적 감각(의지, 사랑)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이성 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넓은 의미로 사용된 감각은 칸트적 의미에서처럼 단순히 대상의 ‘수용’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은 대상에 작용하여 대상의 의미를 드러낸다. 음악은 인간에게 음악적 감각을 일깨운다. 하지만 아름다운 음악도 비음악적 귀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붕괴된 핵심적인 원인은 자본주의적 체제에 있다. 이러한 체제에서 인간의 감각은 소유라는 감각적 취향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감각이 풍부해지는 범위만큼 감각의 대상도 풍부한 의미(Sinn)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과 인간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감각을 소유 감각으로 환원시키는 사회에 대한 지양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려 볼 수 있는 더 나은 사회는 맑스가 말하듯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지닌 풍부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사회일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감각과 대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실현된다.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맺음에서 자연을 자신의 비유기적 몸으로 본다면, 인간의 감각은 대상을 통해 풍부해질 것이고 인간의 감각이 풍부해지는 만큼 자연도 억압에서 풀려나 인간과 자연이 통일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연이 인간의 지배에서 부활하면 자연은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 미학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인간의 감각이 보다 풍부하게 발전한다는 것은 자연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동일성으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고자 할 때는 가치법칙의 총체성이 개별 주체에 선행하여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치법칙이라는 도구적 이성이 다른 무엇보다 선행하며 이것이 사회 현실의 총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 사회, 자연의 문제는 분리되어 고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만의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자연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자연을 ‘죽여서’ 자연과 생명의 순환을 끊어버리려고 하는 우리 시대의 욕망이 불러들일 파국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려고 할까.

막무가내식 토건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명박 정부에 의해 저질러지는 역사적?민중적?생태적 과오인 4대강 사업, 아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운하사업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사회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이 시대가 훈육한 욕망의 작동 방식으로 다시 세계와 자연을 규제하고 욕망하는 우리의 존재양식을 되돌아보자. 그리고 아직 살아 숨 쉬는 우리 안의 자연, 풍요로운 감성의 강에 깨끗한 물이 돌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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