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부활을 꿈꾸며, 레닌 재장전![청춘의 서재]

*『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이재원 외 옮김, 마티, 2010.)를 청년들에게 소개합니다.(편집자)

청춘의 서재, 그 무기력한 나날들

내 청춘의 날들과 그 서재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어리고 여린 마음에 처음 접하게 된 세상의 현실은 낯설고 두려워서 무언가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항상 주변을 배회하며 주저하기만 했다. 현실에 저항하는 투쟁의 현장과 현실에 안주해 승리를 쟁취하려는 성공의 길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했다.

그때 내가 선택한 방식은 그 갈림길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일이었다. 데카르트와 후설,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철학자들과의 만남은 그러한 선택의 과정을 유예하고 지연시켜주는 편리한 나름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연된 과정은 결국 상처가 되어 항상 나를 괴롭혔다. 철학에 대한 회의, 삶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나를 갉아먹고 있었고, 지금도 역시 ‘왜 철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와 계속해서 어떤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망의 상실, 진리 해체의 시대

뒤로 물러나 있던 나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은 어느덧 점차 비슷해져 갔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열기는 자본주의를 뒤엎는 운동으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논의들이 이어졌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힘 앞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전망은 상실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은 모든 진리에 대한 추구를 ‘전체주의’라는 유령을 앞세워 폐기처분해 버렸다. 진리를 앞세워 세계에 대한 정치적 기획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결국 현실 사회주의처럼 전체주의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 인식이 이 시대의 일반적인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공산주의를 언급하면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라는 수식어를 덧붙이며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심을 드러낸다.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는 아름답고 그럴듯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상일 뿐이며, 더구나 독재를 옹호하고 실현시킨 전체주의일 뿐이라는 반응이 되풀이 된다.

맑스를 접하게 되면서 철학과 실천에 대해 고민하게 됐지만, 나도 여전히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언급할 때면 민감해져서 두려움과 주저함이 되살아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마도 맑스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정작 20세기 초반에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을 참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에 대한 외면이 나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레닌’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혁명’과 ‘공산주의’라는 말들을 애써 감추며, 현실에 정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제 급진적인 전망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 그리고는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에 충실한 채,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명목으로 급진성은 잠시 접어둔다. 다시 ‘그럼에도’ 분명 모두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라는 선택을 통해 어느새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게 된다는 것을.

왜 다시 레닌인가?

『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마티, 2010)
『레닌 재장전』을 읽으면서 내가 지닌 두려움과 불만족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우선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는 데 뒤따를 엄청난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이 두려움으로 표출된 것이다. 또한 철학을 정치와 결합할 수 없었던 나의 무능력이 불만족의 또 다른 원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레닌으로의 복귀’를 논하는 이 책 속에서 철학과 정치가 접합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공동 편저자인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나에게 철학과 정치가 연결되는 새로운 길로 읽혀진다.

“상황에 개입하겠다는 레닌의 결단”, 즉 “필요한 타협을 하고 현실적인 요구에 이론을 맞추려는 실용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모든 기회주의적 타협을 물리치고, 오직 일이관지하는 급진적 입장(이를 통해서만 우리의 개입이 상황의 배치를 바꿀 수 있는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을 채택한다는 의미에서”(22-23쪽) 개입한다는 레닌의 결정. 더구나 이러한 정치적 개입은 단지 현실 정치라는 흙탕물 속에 뛰어들겠다는 식의 결정은 아니다. 오히려 ‘진리의 정치’(바디우), 혹은 ‘당파성’(레닌)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전략적 개입이다.

특히 ‘철학에서의 레닌’을 논하는 이 책의 2부는 레닌이 어떻게 철학을 통해 정치에 개입해 들어갔는지를 시사해 준다는 점에서 더 관심이 간다. 헤겔 『논리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화하는 레닌의 접근방식은 정치에 개입하려는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대상의 본질 속에 자리한 모순에 대한 연구”(187쪽)인 변증법을 통해 위기의 시대를 통찰하고 구체적 상황에 개입해 들어가는 레닌의 자세는 여전히 우리가 뒤따라야 하는 길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레닌의 ‘전위당’ 개념이 지닌 엘리트적 모습에서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권위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는 레닌의 당파성이란 결국에는 이론적 독단을 옹호하려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폄하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순수한 입장을 정치라는 구체적 정세 속에 유지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글턴의 말대로, “순수한 혁명에 대한 희망 속에서만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러한 순수한 혁명을 보지 못할 것”(96쪽)이다.

전위와 엘리트는 다른 개념이다. “엘리트는 자기 영속적인데 반해 전위는 자기 파괴적이다. 전위는 변동이 심한 문화적, 정치적 발전 조건에서 출현한다. 전위는 이질성이 낳은 존재이다. 꼭 우월한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물질적 환경 때문에 일군의 사람들이 아직 일반적으로 명백하지 않은 특정한 현실을 ‘미리’ 포착할 수 있는 상황 또한 전위를 낳는다. 이들은 자신이 지닌 보다 특권적인 문화적 위치 때문에 전위가 될 수도 있지만, 정확히 그 반대의 이유, 곧 억압의 대상이자 그 억압에 맞서는 투사라고 하는 그들만의 경험 때문에 전위가 되기도 한다.”(85쪽)

결국 레닌이 말하는 정치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되는 침입”(240쪽)의 과정이며, 그의 “전략적 사유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든 그러한 사건과의 관련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250쪽) 따라서 전위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대해,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해, 일어날 사건에 대해 준비하는”(241쪽) 일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니 우리는 과연 이러한 정치를 준비하고 있는가? 다니엘 벤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훈계는 지금의 우리 상황을 잘 보여준다. “레닌주의를 피상적으로 비방하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는 당의 억압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으로써 그들은 사실 그 모든 타당성들에 대한 논의를 공허하게 만들며 의견토론의 장을 축소시켜 결국 그 어느 누구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공동의 결정도 없이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있은 후에 모든 사람들은 그저 원래대로 남게 될 뿐이며 어떠한 실천도 공유할 수 없기에 생성 중에 있는 반대 입장의 유효성을 검증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해지는 것이다.”(253쪽)

벤사이드의 말대로, “당(운동, 조직, 연맹, 당 등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이 없는 정치란 대부분의 경우 정치 없는 정치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럴 경우 철학은 “미학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결국 정치적인 것을 억압”(253쪽)하는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레닌을 재장전하는 청춘의 부활을 꿈꾸며

아마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저 갈림길에서 주저하고 흔들릴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내 주저함의 원인을 알게 된 이상, 준비해 나갈 것이다. 이미 청춘은 무기력하게 흘러갔지만, 선택의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그 선택을 오랫동안 지연시켜왔던 만큼 어떤 의미에서 난 제대로 청춘을 살아온 것이 아니기에, 이제야 비로소 새 청춘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침 내가 몸담고 있는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21살의 청춘이다. 물론 그 청춘의 선택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청춘이 다 지나가버리기 전에 ‘급진성’의 부활을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레닌 재장전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철학이 정치의 길을 열어주는 방식을 모색해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이야기일까? 아무튼 난 레닌처럼 ‘꿈을 꾸련다. 그리고는 역시 흠칫 놀란다.’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갈림길-노신의 글에서 나의 길을 묻다[청춘의 서재]

첫 번째 인연.

내가 처음 노신을 만난 것은 어린이 세계 문학 전집류에서였다. 세계 명작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실어 놓은 것이었는데, 거기에서 만난 노신의 《아Q정전》은 12세 무렵의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위인 이야긴 줄 알고 빼들었다가 바보짓만 일삼는 인물의 이야기임을 깨닫고 이내 내팽개쳤다. 고전을 알아보기에는 아직 어렸나 보다. 노신의 의도를 짐작하게 된 이후에도 ‘아Q’와는 여전히 서먹서먹하다.

‘강철의 노신’

틀어진 사이가 회복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리영희 교수의 중재로 노신과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리영희 교수는 당시 내게 큰 감동을 주고 있었기에 그가 훌륭하다고 추천하는 노신의 책도 당연히 좋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펼쳐든 책이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였다. 노신의 잡감문(雜感文)을 엮은 이 책에서 나는 노신을 ‘멍청이의 전기 작가’가 아닌 ‘강철의 작가’로 만나게 되었다. 반어적 독설을 무기로 사회 모순에 꿋꿋한 붓끝을 펼치는 노신의 글에 나는 매료되었다. ‘강철의 정의’를 우선했던 당시의 나에게 노신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수세에 몰린 수구 세력들을 ‘물에 빠진 개’에 비유하면서 그런 개는 동정할 것이 아니라 다시는 물지 못하도록 ‘두들겨 패야 한다’고 했다(‘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강철의 노신’이 던진 이 말은 나에게 반민주세력을 뿌리 뽑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민주화 이후의 우리 사회의 앞길을 잡아줄 나침반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보다 깊은 노신’을 만나지는 못했다. 노신은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민중에 대한 회의와 비판의 소회도 밝히고 있었지만,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했을 뿐이었다.

‘희망’의 정체

‘강철의 정의’만으로는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았다. ‘굳건한 도덕’이 미래의 희망을 구현해준다고 주장할수록 사람들은 떠나갔다. 우리는 외로워졌고 절망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옳다고는 했지만, 함께 길을 걷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차츰 그들은 우리를 달래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어느새 ‘용서와 화합’을 이야기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들이 ‘물에 빠진 개’로 보였다. 민중은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올바른 길을 간다는 것이 과거의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민중’과 ‘사람들’은 사라지고, 어느새 내 앞에는 ‘개’들만 한 무더기였다. 독재자들만이 ‘암흑’인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암흑’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핍박받던 어린 양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폭군에게 당하는 선량한 이들이기도 하지만, ‘남의 고통을 자신의 오락으로 삼으면서(‘폭군의 신민’)’ 타인을 잡아먹는 이들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꿈은 이제 ‘대한민국 1%’였고, 그들의 덕담은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였다. 그들은 독재자를 버리고 CEO를 섬기기 시작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 희망은 나를 배반했다. 희망은 절망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몸서리쳤다. 세상이 미웠고, 나는 온종일 화가 나 있었다. 알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앞길은 ‘암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희망’의 허망함

사람과 삶이 온통 ‘암흑’이었던 것은 노신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쳤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다면 마치 끝없는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 자신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다. …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적막이었다. 그 적막감은 하루하루 자라났고, 독사처럼 내 영혼을 감아왔다.”(《외침》중 머리말)

이 ‘적막감’이 당시 내 분노의 정체였다. 그때 문득 펼쳐 본 책이 노신의 ?고향?이었다. 거기서 노신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말하는 소위 희망이란 것도 또한 내 손으로 친히 만든 우상이 아닌가. …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대지에 난 길과 같은 것이다. 애당초 땅 위에는 길이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섣부른 희망을 지표로 하여 우상으로 삼은 것이 잘못이었다. 애당초 삶은 불인(不仁)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광막한 대지와 같아서 ‘불인’과 ‘선량’이라는 협소한 말로는 도저히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로는 정의롭지만 때로는 추악하다. 그래서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절망스럽기도 한 것이다.

광막한 대지에 ‘희망’이라는 길은 아무데도 없다. 가고 오는 가운데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가운데 수많은 길이 갈라져 나가니, 어느 길이 ‘희망’이고 어느 길이 ‘절망’이 될지는 걸어봐야 안다. 길은 길일 뿐 더 이상 ‘희망’도 ‘지표’도 될 수 없다. 오히려 걸어가면서 ‘희망’으로 삼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걷는 ‘현재’에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뿐, 신기루 같은 미래의 ‘희망’이 내 걷는 행위의 지주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곧게 뻗은 저 외길을 ‘희망’이라 부르며 걸어오다가, 길 없는 대지와 수많은 갈림길에 절망하고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이다. 오직 ‘강철의 길’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오직 ‘희망’일 뿐이라거나, ‘절망’의 얼굴만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암흑’의 복잡성

사람들은 단지 두려웠을 뿐이다.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 ‘부자’의 주문도 외우고, ‘1%’의 주문도 외우면서 ‘CEO’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것을 나는 ‘절망’이라 하고 ‘배반’이라 몰아세우며 그들의 참모습으로 고정시켰다.

나는 어떠한가? 나도 그들 사이에 ‘살아가고 있었고 살고 있다’. ‘강철의 정의’를 주장했던 나도 그 바닥에서는 ‘성공’하고 싶어 했고, ‘그곳의 1%’가 되고 싶어 했으며, 상징자본을 탐내고 있었다. 사회 비판을 통해 ‘명망의 재력’을 갖추는 것. 이러한 ‘암흑’의 욕구가 나에게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그러한 ‘암흑’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 또한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암흑’은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었다. 돌아보니 ‘신념의 곧은 외길’은 굽이굽이 갈라진 길들이었고, 앞도 마찬가지였다. 내 갈 길은 더 이상 없어 보였다. 나는 맥이 다 빠져 주저앉았다.

노신은 이렇게 속삭였다. “묵적 선생은 갈림길 앞에서 슬피 울며 돌아섰다고 하지만 나라면 결코 울며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 갈림길 초입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숨 자고 나서 걸어갈 만한 길을 골라 발걸음을 내딛겠습니다.”

지금은 한숨 자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참호를 파고 들어가 담배도 피우고,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와 미술전도 하면서’(《루쉰의 편지》) 내 안팎에 자리 잡은 ‘암흑’을 곰곰이 숙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전진하다가 또 한 숨 자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두렵기는 하다. 저 아득한 어둠이, 내 안의 이 무한한 암흑이 나를 삼켜버릴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 어둠을 응시하고, ‘암흑’을 ‘애독해 가면서’ 굳건히 살아가고자 한다. 그게 노신이 내게 준 가르침이다.

노파심에서의 사족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구하는 이를 구인(救人)이라고 한다. 노신은 내게 구인이다. 그러나 그가 책 속에만 있었다면 구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삶과 나의 삶이 공명하는 연이 닿았기에 그가 구인일 수 있었다. 모든 이에게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궁하면 통하는지, 자기 삶에 위기가 왔을 때 간혹 영감을 주는 글이나 사람들이 인연을 맺는 경우들이 있다.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질문하는 진지한 노력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참된 만남을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 노신의 글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반어와 냉소적인 문체, 당대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과문함이 그와의 만남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나의 마음에서 그의 심정을 짐작해 보는 과정을 조금씩 진행하다 보면, 그의 삶이 나와 공명하면서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였는데도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 글들도 있다. 허나 인연이 닿으면 글이 절실해진다. 아직 닿지 않았을 뿐이니, 조금 더 기다려주기를. 곁을 주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만나기 마련이다.

단순히 ‘사회적 교제를 위한 교양’을 위해서라거나, 진보적 감흥을 잠시 보조해 주는 ‘진보에세이’로서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좋은 벗이 소모되는 모습을 보는 건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한길석(한국철학사상연구회, 충북대 강사) /

태권V,2천년 역사의 한(漢)을 풀다[청춘의 서재]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비아북)를 청년들에게 소개합니다.(편집자)/

?씬 레드라인? vs.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한 장면

1 vs. 100,000 즉 10만 대 1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숫자일까? 정확한 사실인지 아닌지 잘은 모르겠지만, 옛날 어느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다. 옛날 한국내전 즉 6.25 전쟁 때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 가운데 실제로 인명을 살상하거나 상해를 입힌 총탄의 숫자가 10만발 당 ‘하나’ 라고 한다. 처음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숫자였다. 아마 허공에 대고 기관총을 난사했을 때 지나가던 참새 한 마리가 적중하여 떨어질 확률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도대체 전쟁 중에 어떻게 사격을 하였기에 이런 숫자가 가능할까?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알고 난 지금 오히려 나는 이 숫자도 과장이 아닐까 싶다. 과연 누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정확한 조준을 하고 사격을 할 수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도 뻔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인데, 왜 10만대 1이라는 숫자가 그렇게도 이해할 수 없는 비율의 숫자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준 영화가 있다. 바로 ?씬 레드라인?이란 영화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쟁’이란, 빗발치는 포탄과 귓가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총탄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돌격하는 영웅들로 가득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병사들은 먼지 속을 군화발로 누비며 용감하게 진격해 들어간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적진 속에 남겨진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은 용감하게 돌진한다.

영화 [씬 레드라인](1999)의 한 장면

그런데 미국의 영화철학자라 불리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씬 레드라인?의 병사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군이 점령한 고지를 계속 탈환하라는 대령의 명령에 불복하는 대위, 게다가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은 엄폐물 뒤에 찰싹 누워서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고개를 들고 죽음이 보이는 고지로 용감하게 진격해 나갈 수 있을까?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그렇게도 흔히 보았던 장면들이 실제로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인가를 아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현실’이란 아직도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어서 그런 것일까? ‘현실’을 보기 위해 다시 영화를 보아야만 하는 우리들의 ‘감각’이란 것이 참으로 우습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전쟁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공자님은 볼 일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나는 동양 고전, 그것도 2,000년이 넘는 아주 먼 옛날의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읽는 책들은 대개가 다 고매하다. ?논어?도 그렇고, ?맹자?도 그렇고 하나같이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상하게 행동하고 고상하게 말한다. 그래서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하며 공자(孔子)나 맹자(孟子), 노자(老子)나 장자(莊子)를 속으로 조롱하곤 했다.

제후를 만나러 가서 연회 중에 화장실에 갔다가 휴지가 없어서 황당한 경우에 처한 공자, 기다랗게 늘어진 하이얀 수염이 국그릇에 빠져 꺼내어 말리느라 고생하는 노자. 이런 상상을 하다보면 결국 그들도 나와 같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사람이고, 우리가 늘 하는 고민을 똑같이 하며 살다간 사람이 아닐까 상상한다. 결혼한 후엔 소크라테스처럼 공자님도 부인에게 바가지 꽤나 긁히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런 순진한 상상도 사실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자 당시에는 우리가 흔히 먹는 품종을 개량한 쌀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쌀’(米)이 오늘날의 기장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상상’을 위해서도 상당한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도대체 그네들은 뭘 입고, 뭘 먹고, 어떻게 살았을까?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님은 ‘볼 일’을 어떻게 해결하며 살았을까?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자질구레한 것처럼 보이는 그네들의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자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모른 채 ?논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거꾸로 과거 선인(先人)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이해할 때 ?논어?든, ?노자?든 더욱 살갑고 친근하게 이해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날아라 태권 V?에서 ?한(漢)나라 이야기?까지

어릴 적부터 만화를 즐겨 읽어 온 내게 우스꽝스런 일이 있었다. 어느 때엔 오전에, 또 어느 때엔 저녁 무렵에, 또 어느 때엔 밤늦은 시각에, 그것도 어떤 때는 체육복 차림으로, 또 어떤 때는 양복 차림으로 만화방에 들어서는 내게 어느 날 만화방 주인 아주머니가 물었다. “도대체 뭐 하는 분이세요?”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뭐 하는 사람 같아요? 저, 대학에서 강의합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비아북

고교 시절에는 만화방에서 생물선생님과 만난 적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모른 척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일에 몰두했다. 이현세와 황미나는 가장 즐겨보던 만화가였다. 그렇게 만화는 살아가는 재미였고, 일상이었다. 만화를 좋아하게 된 건 어릴 적에 본 최초의 한국애니메이션 영화 ?날아라 태권 V?를 본 이후였다. 난 아직도 가끔씩 ?전자인간 337?의 삽입곡 “아람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그러던 차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만화를 다시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과거를 새롭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하나의 창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옛날 중국의 삶의 모습, 2천 년 전의 모습도 이렇게 눈으로 볼 수는 없을까? 대만 출신의 만화가 채지충의 만화는 왠지 억지로 꾸민 듯한 외모 때문에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다. 비록 수준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내게는 2% 부족한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를 펴든 순간 그간의 기다림은 단순에 풀리고 말았다. 책을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책을 읽는 내내 눈과 손과 입술이 함께 움직였다. 넘기는 페이지마다 어느 그림 하나, 어느 대사 하나도 놓칠 수 없는 흥분과 쾌감을 주었다. 처음엔 감탄으로 읽다가 나중엔 화가 나기까지 했다. 한 젊은 만화가의 손끝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漢) 나라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것을 보며, 부러움과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김태권, 2천 년 ‘한’(漢)의 역사를 풀다

?한나라 이야기?는 기원전 238년 진시황(秦始皇)이 스무 살이 되던 해로부터 시작한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는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현대 역사학의 성과까지 동원하면서 김태권은 ‘권력 앞에서 개인의 고독’이라는 주제를 추적해 간다. ?진시황과 이사?를 다룬 1권에서부터 ?항우와 유방?을 다룬 2권, 그리고 ?조조와 유비?(10권)까지 다룰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의 매력은 이런 역사를 재미있는 만화로 소개한 데에 있지 않다. “독자 여러분은 한니발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영화나 그림에서 튜더 시대의 판금 갑옷을 입은 한니발이 포병부대를 지휘한다면, 여러분은 짜증을 낼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때의 복장을 한 항우나 유방을 보아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전국시대 말의 유물을 토대로 복식을 고증하면, 그게 더 낯설어 보일 것이다.” 고 하며 그 낯설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태권은 진시황을 비롯하여 이사, 한비자, 항우, 유방 등등 출연하는 모든 인물들의 복식과 장식, 전쟁의 상황 묘사나 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비아북

기 등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한 나라 때의 화상석에서부터 후대의 자료까지 최대한 실증과 고증된 자료를 통해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단지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다. 각종 역사서와 역사 연구서를 통해 중요한 사건, 대화의 의미와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렇게 볼 때 ?한나라 이야기?는 재미로 보는 만화를 넘어서 새로운 ‘사기’, 새로운 ‘한서’, 더 나아가 새로운 ‘삼국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만화라는 장르는 이제 어린이들이나 보는 장남감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같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예술인이 있는 것처럼, 김태권은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고대의 역사, 살과 피로 이루어져 부대끼고 싸우며 우정을 나누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건조한 문자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살아 숨쉬듯이 꿈틀거리는 형상들을 통해서.

?제자백가?와 갖가지 중국 고전을 만화화한 채지충의 고전만화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조선의 역사를 비주얼로 창조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제 일본인이면서 로마를 노래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있듯이, 한국인이지만 ?사기?, ?한서?, ?삼국지?의 세계를 새롭게 역사화하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를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재미는 기본이다. 아마도 소장하여 물려줄 만한 책은 이런 것이 아닐까? 특히 학업에 지친 젊은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김시천(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

구보씨 소통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비가 온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세상이 안개 속처럼 뿌옇다. 이제 봄이 오려는가. 촉촉하게 땅이 젖고 마음도 따라 젖는다. 구보씨는 비를 맞으며 잠시 걸어본다. 참 좋구나, 혼잣말을 되뇌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구보씨의 얼굴에 작은 빗방울들이 싱그럽게 와 닿는다.

 

비오는 걸 유난히 좋아하던 친구가 생각난다. 비만 오면 마냥 나가 뛰어다녔다. 장가가서 아이들을 낳은 뒤론 애들과 함께 빗속을 누볐다. 아이들도 아빠를 닮아 비를 좋아했다. 어지간한 날씨면 웃통을 벗어던지고 아이들과 빗속에서 물총싸움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강사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 처가 식구들을 따라 캐다나로 이민을 가 버렸다. 하긴, 그 친구에겐 그곳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비가 왜 그렇게 좋은데?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느닷없는 질문에 그 친구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듯이 닦다 말고 구보씨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냥. 비 맞으면 좋잖아?

구보씨가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 그 친구의 표정 때문이었을 거다. 거기에는 더 이상의 추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이야 다르다지만 예전의 구보씨에겐 비 맞는 것도 비 오는 것도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질척질척한 골목길과 스산하고 축축한 날씨가 뭐 그리 좋단 말인가. 구보씨는 빗속으로 뛰어나가려는 충동을 느껴본 적도, 그러한 충동을 느끼는 심정을 진정 이해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구보씨는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수긍했던 셈이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수긍을 한다? 언뜻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적지 않은 법이다.

물론 이유를 따져 보지 못할 까닭은 없다. 이 경우엔 아마 진정성의 전달이 큰 역할을 했을 거다. 구보씨는 비 맞기를 좋아하는 심정을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그 친구가 정말 비 맞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앎도 일종의 이해가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하면서 수긍한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대부분의 강제에도 이해가 수반된다고 해야 한다. 가령, 총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는 강도를 생각해 보라. 이런 상황에서 지갑을 털리는 사람은 강도짓을 하는 이가 내게 총을 쏠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 처지를 받아들이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이 상황을 수긍한다고 할 수 있는가?

강도짓이 성립하기 위해서도 이해는 필요하다. 상대방이 강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강도 노릇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강도를 당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강도짓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게다가 그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수긍하는 경우도 있다.

“구보야, 네 말은 앞뒤가 안 맞아. 강도의 경우에도 진정성이 있을 수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강도짓을 수긍할 수 있는 건 아니라구. 근데 넌 좀 전에 네 친구에겐 진정성이 있어서 수긍할 수 있다고 했거든.”

Y였다면, 이런 식으로 끼어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Y는 오늘 나타나지 않는다. 곁에 없어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니, 그녀는 정녕 무서운 존재다 싶다.

그러나 구보씨가 보기에 Y와 같은 생각은 다분히 직선적이다. 진정성이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진정성이라는 말에는, 뭐랄까, 스스로가 어떤 사태의 참된 원천이 된다는 뜻, 그런 의미에서의 진짜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강도의 진정성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어색하게 들린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강도짓의 참된 원천이 된다는 건 어째 좀 이상하지 않은가. 강도짓을 하는 사람은 보통 이러저러한 외적 이유 때문에 강도짓을 한다. 정말 그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의 본래 모습에서 우러나 강도짓을 하는 것이라면 그땐 강도의 진정성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일까?

구보씨가 친구의 표정에서 받았던 것은, 아, 이건 진짜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건 어떻게든 전달되는 법이다. 무릇 소통의 기본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얼마 전에 구보씨는 소통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런 주제가 요즘 자주 거론되는 건 ‘소통 부재’라는 지적이 잔소리가 되어버리다시피 한 작금의 현실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학회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을 질타하는 소리가 높았다.

정치나 정권의 차원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이 어렵다는 불평은 이 사회에 차고 넘친다. 아마 말이 부족한 탓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제각기 자기 말만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면서 모두들 듣는 미덕을 상찬(賞讚)하고 들어줄 귀를 요구하기만 한다.

각자의 처지와 됨됨이가 다른 만큼, 거기에서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소리들이 공명(共鳴)에 이르지 못하고 불협(不協)을 깔아뭉개는 불도저 소리로 커가거나 체념의 침묵으로 잦아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모든 일이 진정성이 없거나 부족해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진정성이라는 게 결국은 공명을 일으키기 마련인 어떤 내면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수많은 미사여구보다 단 한 마디의 진정성 어린 외침이 더 큰 울림을 낳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런 진정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공명하기 위해서는 같은 구조나 얼개가 필요하다.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고 현악기의 줄이 서로 공명하듯이 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진정성은 여럿이 공유하는 그 무엇에 바탕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나만의 것이란 사실 진정한 것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독특하고 다른 것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공통의 지반 위에 서 있을 때만이 아닐까. 그렇다면 구보씨가 친구에게서 느꼈던 그 진정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라는 그 막연한 것이었을까?

―빠빵~

갑자기 뒤에서 크락션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구보씨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얘, 구보야! 웬일이니? 이렇게 비를 맞고… 어서 타.”

Y다. 차창 밖으로 내민 얼굴에서 터져 나오는 쨍하는 목소리. 이번엔 진짜다.
“어머, 이 머리 좀 봐. 다 젖었네. 또 웬 청승이니?”

“Y야, 넌 꼭 내가 무슨 중요한 생각을 할라치면 나타나서 훼방을 놓더라.”

“중요한 생각? 그게 뭔데?”

“지금 막 공통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어. 사람들이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공통의 그 무엇…”

“공통적인 것? 중요한 것?”

“응,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

“뭘 말하는 거야, 돈?”

“뭐야?”

“아니야? 그럼, 사랑?”

“이그,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운전이나 잘 해.”

“걱정 말고 그 손이나 좀 내려. 그렇게 팔을 창에 괴고 있으면 그쪽 백밀러가 안 보인다구. 그리구 소통에서 중요한 거라면서 돈이나 사랑을 생각하지 않으면 대체 뭘 생각한다는 거야? 니들은 그래서 안 된다니까. 정작 중요한 건 빼놓고 고상한 척 하면 누가 알아준대? 그래서 소통에 실패하는 거라구.”

“내가 말하는 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공통적인 걸 얘기하는 거야. 설사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수긍하고 용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

“글쎄, 누가 뭐래? 돈이나 사랑이 그런 거야. 서로 다른 물건으로 바꿀 수 있는 공통적인 게 돈이잖아. 서로 이해는 못해도 거래는 되거든. 사랑도 그래. 서로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순 있거든. 그리고 사랑만큼 소통에 핵심적인 게 어딨어?”

“그렇지만…”

“거 봐. 할 말 없지? 니들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 그래야 소통이 된다구.”

“잠깐, Y야, 정말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담 그건 왜 그렇지?”

“쯔쯧, 구보야, 전에 너도 나한테 얘기한 적 있잖아.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끝 장면. 젊은 브래드 피트가 매력적으로 나왔던 그 영화 말이야. 말썽을 피우던 둘째 아들이 죽고 나서 아버지인 목사가 설교 때 말하던 거. 우리는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우리가 잘 모르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우리를 이어주고 엮어주는 것…”

구보씨는 ‘그래. Y, 너와 나처럼 말이지?’라고 습관처럼 대꾸하려다가, 멋쩍게 그냥 웃었다.

하긴, Y말이 맞는지도 몰라. 돈과 사랑이라…소통과 공통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려면 이걸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 돈이나 사랑이 소통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 어떤 돈과 어떤 사랑이 소통을 가로막기도 하는지…그건 그렇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친구와 나와의 관계는 뭐였지?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었을까?

구보씨는 다시 차창에 손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창 밖에는 아직도 뿌연 안개비가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문성원(부산대) /

구보씨 웹진을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새해다. 그리고 새달이다. 물론 새날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새롭다. 흐르는 시간은 우리에게 새 것을, 새로움을 준다. 구보씨는 새해를 맞아 새삼스레 눈을 껌벅대면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낡음이란 무엇인가? 낡음 또는 늙음은 어디서 오는가? 낡음이란 가두어진 시간이다. 새로움이 밖에서 온다면, 낡음은 안에서 쌓여간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렇다. 생각해 보라.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어떤 경계를 가진 유한한 것이 자신의 밖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아닌가.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 무한한 존재에겐 엄밀히 말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한계를 가진 포착에서, 불완전한 포착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무한한 시간이라는 발상은 불가피하게 역설을 수반한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무엇을 원하든 상관없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죽으면 그뿐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과 똑같이 다시 살아 우리가 원하는 바가 성취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어차피 무한한 시간 아닌가. 그런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면 된다. 무한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무한과 시간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은 유한함의 소산이다.

어떻든 새로움과 낡음은 안과 밖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존재는 자기 안에 시간을 가두며 그래서 낡아간다. 안에서부터 새록새록 솟아나오는 새로움이라는 것도 있지 않느냐고? 아니, 없다. 엄밀히 말해, 그런 것은 없다.

생각해 보라. 안에서 비롯하는 새로움이라면 이미 안에 있던 것이고, 따라서 진정 새로운 것일 순 없지 않겠는가.

물론 자기동일성의 어떤 원리가 순차적이고 계기적으로 전개될 수 있고, 그래서 그 하나하나의 단계가 새로워 보일 수 있다. 이를테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는 변화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마저 외부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일어난다. 또 그 변화가 새로워 보이는 것은 자기동일성의 원리 전체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각 단계에 국한된 입장에서이다. 나뭇잎이 돋는 것은 헐벗은 나무의 견지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이지, 나무 자체의 자기동일성이라는 견지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새해 벽두부터 이렇게 따분한 얘기를 하다니, 구보씨가 시나브로 이상해진 걸까?

“꼭 그렇진 않아. 넌 원래 좀 이상했다구.”

Y도 달라지진 않았다. 사람이 새로워지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난 니네 철학자들이 추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무한이라는 말도 그래. 세상이 무한이 어딨니? 그건 그냥 추상일 뿐야. 그냥 생각에 불과한 거라구. 그런 걸 시간에 견줘서 이러쿵저러쿵 하면 뭘하니? 그럴 시간에 뭔가 생산적인 걸 해 봐. 아님, 차라리 잠을 자든지.”

“허, Y야, 너도 추상이 얼마나 중요한진 잘 알잖아. 0을 생각해 봐. 세상에 0이라는 건 없어. 무(無)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렇지만 0이나 무라는 개념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문명은 불가능했을 거라구. 무한도 그래. 무한이라는 개념이 없이 미적분이 가능했겠어?”

“난 그런 수학적 개념을 말하는 게 아냐. 니들이 쓸데없이 우리 삶에 끌어들여 고생시키는 추상적 개념들을 얘기하는 거라구.”

“그게 뭐가 달라. 수학도 얼핏 보면 이상해 보여. 현대수학은 더 그래. 집합론 같은 걸 보라구. 너도 괴델이니 칸토르니 하는 수학자 얘기는 들어 봤잖아. 무한은 현대 집합론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야. 알랭 바디우 같은 철학자는 현대 집합론에서 주요 개념들을 빌려와. 안과 밖, 시간 따위의 얘기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구.”

“그렇지만 철학은 수학이 아니잖아. 그렇게 엄밀하지도 않고 말이야. 내가 보기에 니들은 여기저기서 개념을 가져다 제멋대로 이용하는 것 같아.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대지만 실제로는 괜한 문제를 만들어내거나 오히려 더 엉키게 하고.”

“후.. 그런 건 철학자들도 흔히 하는 얘기야. 철학의 논란거리고 반성거리지. 하지만 Y야, 새해 초부터 그런 걸루 골치 썩이진 말자. 내 얘기의 요지는 새로움이란 항상 밖에서 온다는 거야. 그러니까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거지.”

“거봐. 니들 얘기는 결론이 먼저 나 있잖아. 철학이 이데올로기라는 건 구보 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구. 미리 답을 정해 놓고 거기 맞는 얘기들을 꿰맞추는 거잖아.”

“크, Y야, 그런 면이 있겠지.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야. 내 말의 취지는 바로 그런 폐쇄성을 넘어서자는 거거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자고 하는데, 거기다 대놓고 그건 결론이 먼저 나 있는 폐쇄적인 거라고 공격하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잖아.”

“개방성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도 얼마든지 있어. 개방적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야. 한미 FTA를 생각해 봐. 개방성을 내세우는 건 대체로 약한 측을 잡아먹으려는 힘센 놈들의 수법인 거야.”

“하하… 그것두 그렇지. 하지만 Y야, 폐쇄적인 태도로는 힘센 놈들을 이겨낼 수가 없어. 그놈들이 원하는 대로 개방해서는 안 되지만, 밖으로 향한 문을 걸어 닫아서는 안 되는 거야. 사실은 걸어 닫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걸어 닫는다고 생각할 뿐이지. 수학의 불완전성 정리가 보여주는 것도, 그걸 원용한 바디우의 철학이 내세우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점이야. 이렇게 바깥과의 관계가 불가피한 이상, 끝까지 안과 자기만을 고집할 순 없다구. 그런 안과 자기동일성은 낡은 것이 되고 결국 사멸하게 되지. 사멸이라는 방식으로 변화를 겪게 되는 거야. 어차피 밖과 관계하는 이상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문제는 어떻게 변화하느냐일 뿐이야. 고집스럽게 죽어갈 것이냐, 개방적으로 새로워질 것이냐 그것이 문제라구.”

“대체 뭘 얘기하고 싶은 거야? 소련? 북한?”

“뭐, 그렇게 거창한 데까지 갈 필요도 없어. 매사가 그렇다구. 이를테면 너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구보야, 착각하지 마. 난 너랑 아무 관계도 아니거든.”

“그런 게 바로 무관계, 즉 규정되지 않은 무한한 관계라는 거야. 이루지 못할 게 아무것도 없는 관계지, 후훗…”

“얘 좀 봐, 진짜 웃겨…”

“실은 내가 어제 문용식이라는 친구가 쓴 책을 읽었거든. 왜, 나우콤과 아프리카 방송 사장 있지? 촛불시위 때 구속되는 바람에 화제가 되기도 했고, 얼마 전 대기업이 소매업에 뛰어드는 문제로 정용진인가 하는 재벌2세와 트위터에서 논란을 벌였던 그 사람 말이야.

예전에 알던 친군데, 자기가 책을 냈다고 이-메일을 보냈더군. 아니, 사장님이라면서 책도 한 권 보내주면 안 되나,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사 봤지. 그간 어떻게 지냈나 궁금해서 말이야. 이전에 학생운동하다가 감옥살이도 여러 번 했어. 컴퓨터하곤 전혀 무관했던 그런 사람이 인터넷 회사의 사장을 한다는 것도 신기하잖아.

어떻든 난 흥미롭게 읽었어. 고생도 많이 하고, 또 노력도 많이 했더군. 나 같은 먹물하고는 전혀 다른 삶이라고 할까… 20대의 절반을 감옥살이로 보내곤 선배의 간청과 밥벌이 때문에 이런 쪽에 발을 디디게 됐다는데, 처음엔 전문지식이 부족하고 문화적 배경도 달라 따돌림도 꽤 받았나 봐.

그렇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결국 인정을 받게 되었대. 그러나 IMF를 겪은 데다 인터넷 때문에 pc통신 사업이 위기에 빠지는 바람에, 지금부터 10년쯤 전엔 나우콤이라는 회사의 한 해 적자가 50억쯤이었다는군. 그때 이 친구가 사장이 되어 처음 한 일이 밖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거야.

우선 조직의 ‘순혈주의’를 깨서 외부에서 경력을 쌓고 들어온 직원을 30%까지 늘려가고, 직원들이 다른 회사 사람들을 만나 외부와 경험을 교환하도록 했다고 해. 물론 이렇게 밖으로 눈을 돌린다고 자기를 완전히 다 내준 건 아니지. pc통신 때부터 쌓아온 기본 기술력을 인터넷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환시켜 인터넷 개인방송인 ‘아프리카’(afreeca)를 시작한 거야. 그리고 이게 성공한 거지.

물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문용식과 나우콤에 있는 건 아니야. 바깥과 새로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지. 밖의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부는 낡고 쇠퇴하기 마련이야. 그걸 우린 보통 늙는다고 하지. 전에도 말했지만, 늙음이란 새로움에 대처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줄어들어가는 걸 가리킨다구.”

“구보야, 잠깐.”

“아, 미안. 내 말이 너무 길었지? 그렇지만 한 마디만 더 할께.”

“꼭 그래야 돼? 나랑 별 상관없는 얘기 같은데…”

“Y야, 이건 너하고도 깊은 관계가 있는 거야. 왜냐구? 이 구보랑 관련된 일이니까. 넌 나랑 무한한 관계 속에 있잖아, ㅎㅎ…

실은 이 웹진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어서 그래. 뭐, 너도 봤으니까 잘 알 거야. 이 웹진은 우리로선 새로운 시도야. 적어도 철학 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 새로움이 충분치 못하다 싶어.

그래서 얘긴데, 여기서도 필자를 30% 정도는 외부에서 끌어오는 것이 어떨까. 동호회면 몰라도 웹진에 필자를 한 단체 소속으로 국한시킨다는 것은 정말 잘 어울리지 않는 일 같아.”

“글쎄, 하지만 지금 상태면 누가 여기에 기꺼이 글 쓰려 할까?”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지. 난 그 성공 여부가 이 웹진이 지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봐. 조로(早老)해서 화석화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그렇지만 그거 새로움이나 개방성에 대한 맹신 아냐? 얄팍한 새로움보다는 지조 있는 충실함이 더 중요한 거잖아.”

“물론 그래. 하지만 그것보단 지조 있는 새로움이 더 좋잖아. 나와 너의 관계처럼 말이야. 어, Y야,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못 보던 표정이지? 거 봐, 구보야. 새로운 게 다 좋은 건 아니라구.”

문성원(부산대) /

구보씨 겨울을 맞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아뿔싸, 벌써 11월이다. 세월은 나이만큼의 속도로 간다더니, 구보씨도 제법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심장의 박동이 늦어지고 몸이 느려지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라 한다.

포유동물의 평생에 걸친 심장 박동 수는 생쥐건 코끼리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고 들었다. 코끼리가 생쥐보다 오래 살지만, 생쥐의 생체 리듬이 코끼리에 비해 빠르고, 그런 만큼 생쥐의 하루는 코끼리의 하루에 비해 길다는 얘기다.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루 종일 골목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았어도 해는 뉘엿뉘엿 한참이나 서쪽 산에 걸려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보다는 기억할 만한 새로움이 별로 없는 것이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여겨지는 더 큰 이유겠다. 큰 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시간은 지낼 때에는 지루하지만, 막상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어디 기억이 멈출 이정표나 매듭도 없이 초라하게 접혀 버린다. 반면에, 낯선 곳에서 긴장하여 지낸 나날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평탄한 삶과 충일(充溢)한 삶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어떻든 새로움과 낯섦에 대한 감수성과 호기심을 잃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늙음이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무언가 새로운 것에, 또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 보려 하다가도, 에이, 뭐 다 마찬가지겠지, 별 다른 게 있겠어, 하고 돌아서버리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 그게 늙는다는 징표가 아닐까. 그것은 내부의 힘이 쇠잔(衰殘)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얘, 구보야. 너 또 혼자 청승이구나. 웬 일이니, 이 좋은 곳에까지 와서.”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걷고 있던 구보씨의 어깨를 Y가 탁 친다. 그러고 보니 Y는 확실히 젊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넘치지 않는가.

“너는 내가 무슨 생각 좀 할라치면 꼭 방해더라. 이래서야 어떻게 괜찮은 생각이 나오겠니. Y, 넌 한국의 철학을 훼방 놓고 있는 거야.”

“풋, 그런 철학은 백번 훼방 놔도 괜찮아. 철학이 무슨 사진틀 같은 거니? 폼 잡고 인상 쓰고 있으면 나오게?”

“그래도 Y야, 궁리하고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여기 운문사(雲門寺)의 마당도 봐.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뜨락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거든. 단풍 한 잎사귀, 낙엽 한 장에도 한 해의 햇살과 나무의 공력(功力)이 깃들어 있으니까 말이야.”

“구보야, 그러니까 하는 얘기라구. 이렇게 멋진 가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 바엔 한 해의 햇살이 다 무슨 소용이니?”

 

“누가 아니래? 나두 충분히 즐기고 있다구. 다만 그 즐기는 방식이 좀 다를 뿐이야. 넌 사색의 즐거움이라는 것두 모르냐? 주변의 정경(情景)에 어우러지는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리듬, 여기에 스스로를 맡기는 거야. 그게 바로 사유(思遊), 곧 사유(思惟)의 즐김이라구.”

“후훗, 그러시구나. 그럼, 어디 그 즐김에 나도 좀 동참시켜 줘 봐. 왜 그런 말도 있잖아. 혼자만 즐기면 무슨 재민겨.”

“헤… 막상 그렇게 나오니까 좀 당황스럽군. 사실은 별 생각 안 했어. 늙음과 벌거벗음에 대해 막 생각하려던 참이었거든.”

“윽, 또 벌거벗음이야? 넌 질리지도 않니? 여름에야 더워서 그랬다 쳐. 하지만 이제 쌀쌀한 바람이 분 지도 한참인데, 아직도 벌거벗는 타령이니? 쯔쯧…”

“Y야,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요즘이야말로 벌거벗음의 계절이거든. 저 떨어지는 낙엽들을 좀 봐. 저게 벌거벗는 게 아니면 또 무엇이겠어? 저 벌거벗음은 말이야, 이를테면 미련 없는 털어냄이고 버림이야. 그것을 통한 일종의 초월이지. 다른 단계로, 다른 국면으로 건너간다는 뜻에서 말이야. 그래서 이제 빛이 바래고 색이 변한 잎들의 모습이 저토록 아름다운 걸 거야. 그건 이제 다가올 벌거벗음이라는 겉보기의 부정성(否定性)에 바쳐진 자연의 경의(敬意)가 아닐까 해.”

 

“하여튼 너네는 참 갖다 붙이긴 잘 한다. 거기 초월이 왜 나오니?”

“사실, 그 초월이란 게 중요한 거야. 벌거벗음과 초월은 직결되니까 말이야. 옷을 입거나 감싸는 건 현재의 차원을 지키고 확충하는 거잖아. 반면에 벌거벗음은 현존의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그건 단순한 결핍 이상의 것이 되는 거야. 벌거벗음은 단지 옷이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잎사귀들을 다 떨어낸 나목(裸木)을 생각해 봐. 그 벌거벗음이 잎사귀의 결핍에 불과한 걸까?”

“봄이 되면 잎사귀가 또 나잖아. 옷을 벗은 사람들은 옷을 또 입을 거고. 대체 거기 무슨 초월이 있다는 거야?”

“Y야, 그게 똑 같은 잎사귀는 아니잖아. 단순히 옷을 벗은 게 아닌 벌거벗음을 당한 사람들이나 벌거벗음을 택한 사람들이 이후에 똑 같은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것도 아닐 테고. 내 말은, 벌거벗음이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갖는다는 거야. 그건 현재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한계 밖을 지시한다는 거지. 잎을 떨궈낸 나무의 처지를 생각해 봐. 그 나무는 이제 나이테의 단단한 부분에 자리 잡은 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거야.”

“피이, 그게 무슨 초월이야. 그냥 다음 단계지.”

“음냐, Y야, 초월은 뭐 그렇게 거창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管掌)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지. 초월이란 말이 원래 그런 거잖아. 초월(超越), 넘어서 건너가는 것.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런 걸 준비한다는 얘기지. 그래서 벌거벗음은 생명의 견지에서 보면 에로틱한 거야.”

“에로틱? 초월에다 에로틱까지? 에구, 구보야, 드디어 네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어, 뭐가 이상해? 원래 벌거벗음은 에로틱한 거잖아. 중요한 건 에로틱에 초월의 의미가 담긴다는 점이야. 근데 이것도 좀 살펴보면 진부한 얘기거든. 플라톤 시절부터 에로스는 현실을 넘어감을 뜻했잖아. 게다가 바타이유를 생각해 봐. 바타이유에게서 에로스는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걸 가리켜. 애당초 성(性)이라는 게 개체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개체를 창출하는 행위와 관련되는 거 아냐? 그럴려면 벌거벗어야 한다구. 옷 입은 채, 즉 자기를 단단하게 감싸고 고수한 채 새로움을 창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얼씨구, 점점…”

“그리구 말이야, Y야, 에로틱이 매혹적인 이유는 바로 이 새로움에 있는 거야. 새로움이란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또 위험하고 낯선 것이기도 하거든. 매혹은 그 위험의 반대급부야. 우리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건 사랑이 매혹이기 때문이지만, 거꾸로 매혹적이지 않으면 위험을 감내하지 않을 것이기에 사랑에는 매혹의 향기가 있는 것이란 말이지. 벌거벗음도 마찬가지야. 벌거벗는 것은 위험을 수반하거든.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피부를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그것은 또한 매혹적일 수 있는 거야.”

“아서라, 구보야. 네가 벗는 건 전혀 매력적이지 않거든.”

“실은 바로 그게 문제야. 그게 늙음의 문제거든. 늙음은 이제 위험의 감내와 어울리지 않게 되었음을 뜻한다구. 벌거벗음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벌거벗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은 새로움을 향한 지향을 접게 된다는 뜻이야. 늙음이 보수(保守)와 또는 수구(守舊)와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이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정도의 문제야. 정말로 새로움과의 관계가 고갈된다면 그건 생명이 다함을, 즉 죽음을 뜻하는 것일 테니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 전까지는 새로움의 추구를, 벌거벗음과 마주함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어. 내가 나이 들어서 새삼스럽게 누드모델을 하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런 면에 대한 자기 강제의 고려가 있었던 거라구.”

“….”

“Y야, 너 드디어 내 말에 감복했구나. 이제 토를 달지 않는 것을 보니…”

“응? 뭐라구? 아, 미안, 잠시 딴 데 정신이 팔려서 네 말을 못 들었어. 걷다 보니 어느새 소나무 길이네. 맞아, 여기가 유명한 운문사의 소나무 길이구나. 예전에 유홍준이 아낙네의 늘씬한 벗은 다리랑 견주었던 그 소나무 길이지, 아마. 그러나저러나 어쩌냐, 구보야. 이 소나무들은 잎을 떨구지 않으니 말이야. 벌거벗질 않으니 초월하군 무관한 나무겠네. 그런데, 왜 유홍준은 이 나무들을 에로틱하다고 하면서 그 작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을까. 하여튼 오징어는 말려도 사내들은 못 말린다니까.”

 

문성원(부산대, 철학) /

구보씨 여전히 누드를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아뿔싸, 벌써 11월이다. 세월은 나이만큼의 속도로 간다더니, 구보씨도 제법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심장의 박동이 늦어지고 몸이 느려지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라 한다.

포유동물의 평생에 걸친 심장 박동 수는 생쥐건 코끼리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고 들었다. 코끼리가 생쥐보다 오래 살지만, 생쥐의 생체 리듬이 코끼리에 비해 빠르고, 그런 만큼 생쥐의 하루는 코끼리의 하루에 비해 길다는 얘기다.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루 종일 골목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았어도 해는 뉘엿뉘엿 한참이나 서쪽 산에 걸려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보다는 기억할 만한 새로움이 별로 없는 것이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여겨지는 더 큰 이유겠다. 큰 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시간은 지낼 때에는 지루하지만, 막상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어디 기억이 멈출 이정표나 매듭도 없이 초라하게 접혀 버린다. 반면에, 낯선 곳에서 긴장하여 지낸 나날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평탄한 삶과 충일(充溢)한 삶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어떻든 새로움과 낯섦에 대한 감수성과 호기심을 잃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늙음이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무언가 새로운 것에, 또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 보려 하다가도, 에이, 뭐 다 마찬가지겠지, 별 다른 게 있겠어, 하고 돌아서버리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 그게 늙는다는 징표가 아닐까. 그것은 내부의 힘이 쇠잔(衰殘)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얘, 구보야. 너 또 혼자 청승이구나. 웬 일이니, 이 좋은 곳에까지 와서.”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걷고 있던 구보씨의 어깨를 Y가 탁 친다. 그러고 보니 Y는 확실히 젊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넘치지 않는가.

“너는 내가 무슨 생각 좀 할라치면 꼭 방해더라. 이래서야 어떻게 괜찮은 생각이 나오겠니. Y, 넌 한국의 철학을 훼방 놓고 있는 거야.”

“풋, 그런 철학은 백번 훼방 놔도 괜찮아. 철학이 무슨 사진틀 같은 거니? 폼 잡고 인상 쓰고 있으면 나오게?”

“그래도 Y야, 궁리하고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여기 운문사(雲門寺)의 마당도 봐.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뜨락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거든. 단풍 한 잎사귀, 낙엽 한 장에도 한 해의 햇살과 나무의 공력(功力)이 깃들어 있으니까 말이야.”

“구보야, 그러니까 하는 얘기라구. 이렇게 멋진 가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 바엔 한 해의 햇살이 다 무슨 소용이니?”

 

“누가 아니래? 나두 충분히 즐기고 있다구. 다만 그 즐기는 방식이 좀 다를 뿐이야. 넌 사색의 즐거움이라는 것두 모르냐? 주변의 정경(情景)에 어우러지는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리듬, 여기에 스스로를 맡기는 거야. 그게 바로 사유(思遊), 곧 사유(思惟)의 즐김이라구.”

“후훗, 그러시구나. 그럼, 어디 그 즐김에 나도 좀 동참시켜 줘 봐. 왜 그런 말도 있잖아. 혼자만 즐기면 무슨 재민겨.”

“헤… 막상 그렇게 나오니까 좀 당황스럽군. 사실은 별 생각 안 했어. 늙음과 벌거벗음에 대해 막 생각하려던 참이었거든.”

“윽, 또 벌거벗음이야? 넌 질리지도 않니? 여름에야 더워서 그랬다 쳐. 하지만 이제 쌀쌀한 바람이 분 지도 한참인데, 아직도 벌거벗는 타령이니? 쯔쯧…”

“Y야,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요즘이야말로 벌거벗음의 계절이거든. 저 떨어지는 낙엽들을 좀 봐. 저게 벌거벗는 게 아니면 또 무엇이겠어? 저 벌거벗음은 말이야, 이를테면 미련 없는 털어냄이고 버림이야. 그것을 통한 일종의 초월이지. 다른 단계로, 다른 국면으로 건너간다는 뜻에서 말이야. 그래서 이제 빛이 바래고 색이 변한 잎들의 모습이 저토록 아름다운 걸 거야. 그건 이제 다가올 벌거벗음이라는 겉보기의 부정성(否定性)에 바쳐진 자연의 경의(敬意)가 아닐까 해.”

 

“하여튼 너네는 참 갖다 붙이긴 잘 한다. 거기 초월이 왜 나오니?”

“사실, 그 초월이란 게 중요한 거야. 벌거벗음과 초월은 직결되니까 말이야. 옷을 입거나 감싸는 건 현재의 차원을 지키고 확충하는 거잖아. 반면에 벌거벗음은 현존의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그건 단순한 결핍 이상의 것이 되는 거야. 벌거벗음은 단지 옷이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잎사귀들을 다 떨어낸 나목(裸木)을 생각해 봐. 그 벌거벗음이 잎사귀의 결핍에 불과한 걸까?”

“봄이 되면 잎사귀가 또 나잖아. 옷을 벗은 사람들은 옷을 또 입을 거고. 대체 거기 무슨 초월이 있다는 거야?”

“Y야, 그게 똑 같은 잎사귀는 아니잖아. 단순히 옷을 벗은 게 아닌 벌거벗음을 당한 사람들이나 벌거벗음을 택한 사람들이 이후에 똑 같은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것도 아닐 테고. 내 말은, 벌거벗음이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갖는다는 거야. 그건 현재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한계 밖을 지시한다는 거지. 잎을 떨궈낸 나무의 처지를 생각해 봐. 그 나무는 이제 나이테의 단단한 부분에 자리 잡은 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거야.”

“피이, 그게 무슨 초월이야. 그냥 다음 단계지.”

“음냐, Y야, 초월은 뭐 그렇게 거창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管掌)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지. 초월이란 말이 원래 그런 거잖아. 초월(超越), 넘어서 건너가는 것.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런 걸 준비한다는 얘기지. 그래서 벌거벗음은 생명의 견지에서 보면 에로틱한 거야.”

“에로틱? 초월에다 에로틱까지? 에구, 구보야, 드디어 네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어, 뭐가 이상해? 원래 벌거벗음은 에로틱한 거잖아. 중요한 건 에로틱에 초월의 의미가 담긴다는 점이야. 근데 이것도 좀 살펴보면 진부한 얘기거든. 플라톤 시절부터 에로스는 현실을 넘어감을 뜻했잖아. 게다가 바타이유를 생각해 봐. 바타이유에게서 에로스는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걸 가리켜. 애당초 성(性)이라는 게 개체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개체를 창출하는 행위와 관련되는 거 아냐? 그럴려면 벌거벗어야 한다구. 옷 입은 채, 즉 자기를 단단하게 감싸고 고수한 채 새로움을 창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얼씨구, 점점…”

“그리구 말이야, Y야, 에로틱이 매혹적인 이유는 바로 이 새로움에 있는 거야. 새로움이란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또 위험하고 낯선 것이기도 하거든. 매혹은 그 위험의 반대급부야. 우리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건 사랑이 매혹이기 때문이지만, 거꾸로 매혹적이지 않으면 위험을 감내하지 않을 것이기에 사랑에는 매혹의 향기가 있는 것이란 말이지. 벌거벗음도 마찬가지야. 벌거벗는 것은 위험을 수반하거든.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피부를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그것은 또한 매혹적일 수 있는 거야.”

“아서라, 구보야. 네가 벗는 건 전혀 매력적이지 않거든.”

“실은 바로 그게 문제야. 그게 늙음의 문제거든. 늙음은 이제 위험의 감내와 어울리지 않게 되었음을 뜻한다구. 벌거벗음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벌거벗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은 새로움을 향한 지향을 접게 된다는 뜻이야. 늙음이 보수(保守)와 또는 수구(守舊)와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이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정도의 문제야. 정말로 새로움과의 관계가 고갈된다면 그건 생명이 다함을, 즉 죽음을 뜻하는 것일 테니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 전까지는 새로움의 추구를, 벌거벗음과 마주함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어. 내가 나이 들어서 새삼스럽게 누드모델을 하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런 면에 대한 자기 강제의 고려가 있었던 거라구.”

“….”

“Y야, 너 드디어 내 말에 감복했구나. 이제 토를 달지 않는 것을 보니…”

“응? 뭐라구? 아, 미안, 잠시 딴 데 정신이 팔려서 네 말을 못 들었어. 걷다 보니 어느새 소나무 길이네. 맞아, 여기가 유명한 운문사의 소나무 길이구나. 예전에 유홍준이 아낙네의 늘씬한 벗은 다리랑 견주었던 그 소나무 길이지, 아마. 그러나저러나 어쩌냐, 구보야. 이 소나무들은 잎을 떨구지 않으니 말이야. 벌거벗질 않으니 초월하군 무관한 나무겠네. 그런데, 왜 유홍준은 이 나무들을 에로틱하다고 하면서 그 작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을까. 하여튼 오징어는 말려도 사내들은 못 말린다니까.”

 

문성원(부산대, 철학) /

구보씨, 계속 누드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는 검소한 편이다. 눈에 띄는 사치(奢侈)라고 할 만한 건 평생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형편도 못 되지만, 그럴 마음이 생겼던 때도 거의 없지 싶다. 그거야 철학자라면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더구나 구보씨처럼 근검절약이 강조되었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말이다. 사치란 일종의 염치없음을 범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고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염치없음. 레비나스 식으로 말한다면 뻔뻔한 찬탈(簒奪)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근래에는 구보씨에게 자그만 사치라고 할 만한 습관이 생겼다. 한 호텔 목욕탕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다. 요금이야 만원이 채 안 되고 그것도 이러저런 할인을 받으면 5000원 남짓이니까 별 것 아니지만, 어떻든 시설이나 분위기로 보면 일반 목욕탕과 격이 다르다. 무엇보다 천장이 높고 돔 형식의 유리로 되어 있어, 실내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적다. 채광이 자연스레 잘 되고 목욕탕 안에 김이 서리지 않는다. 더구나 노천탕도 있어 그렇게 춥지 않은 날이면 발가벗고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

 

구보씨는 발가벗고 활보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한동안 이곳에 자주 들락거렸다. 무언가를 걸치는 게 아니라 벗어던지고 누릴 수 있는 사치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최고의 사치란 이렇게 발가벗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물과 공기와 햇볕 아래 자유로운 몸과 감각. 구보씨는 긴 의자에 발가벗은 몸을 누이고 눈을 감는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온 몸의 피부가 한 장의 눈꺼풀 같다.

이것이 사치인 이유는, 이러한 누림에는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건이 많건 적건 간에 배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 이 같은 발가벗음은 가짜일 수 있다. 목욕탕 안에서의 발가벗음은 진정 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욕탕이라는 시설과 장소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목욕탕 안의 사람들은 발가벗은 채 당당할 수 있다. 이때의 발가벗음은 벗겨냄이 아니라 덧붙임이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은 때를 벗겨내지만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박탈의 느낌을 수반하는 벌거벗음이 있다. 옷 입은 자들 앞에서, 옷 입은 자들의 장소와 그들의 시선 앞에서 벗고 있을 때가 그렇다. ‘벌거벗은 생명’. 근자에 유행하는 조르조 아감벤의 용어가 여기에 적절하다. 이런 벌거벗음은 갖추어야 할 것이 박탈되었음을 보여주는 부(負)의 표시다. 한 사회의 규칙, 제도, 권리 따위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지시하는 게 이런 벌거벗음이다. 옷 입은 자들은 이렇게 벌거벗은 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상성(正常性)을 확보해낸다.

이때의 벌거벗음은 무방비의 취약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털을 깎고 이빨을 뽑아버린 짐승의 모습과도 같다. 그 벌거벗음은 위험에 대해 직접 노출되어 있음을 뜻한다. 털 없는 피부 말고는 외부의 시선과 공격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벌거벗은 자는 움츠리고 두려워하며, 무엇보다 수치심을 느낀다.

벌거벗음과 수치심 사이에는 벌거벗음을 감싸는 관념들의 피륙이 있다. 이 관념들은 맨 몸뚱이의 취약함을 감추고 가리는 장치들과 관계하여 짜인다. 그러니까 수치심은 우리의 취약함을 헤집는 시선과 관련이 있다. 수치를 모르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 지경에 놓여 있는지 모르는 자다. 도덕이란 우리의 취약함을 보완하여 덮는 속옷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이 찢기거나 헤졌을 때 우리가 강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수치심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돌아보는 눈에 희망을 걸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치심을 통해 취약함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물론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돌아본다면 그런 생각이야말로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수치란 아마도 인간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옷 입은 이들은 벌거벗은 자들을 놓고 그들이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벌거벗겨 놓은 경우라 해도 말이다. 그들은 옷을 입고 싶어 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수치심을 없애고자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옷 입은 자들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문을 할 때 대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벌거벗기기인 것은, 고문을 당하는 이가 스스로 무력하며 박탈당했음을 절감하게 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사실상 노예의 처지에 있음을 확인시키고 저항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해서다.

그러니 스스로 옷을 벗어던지는 자들이 나타나면 옷 입은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옷이 그저 짜인 피륙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벗겨질 수 있는 것임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옷을 벗어던지며 벌이는 시위가 때로 위력적인 것은 그래서이다. 실제로 박탈당하고 있고 실제로 벌거벗기고 있는 자들이 겉치레에 불과한 옷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사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그런 걸 발본적(radical) 파르헤지아라고 해요.”

“파르헤지아라면 진실한 말하기라는 뜻인가요?“

“그렇죠. 알다시피 푸코가 말년에 자주 썼던 용어지요. 나는 그걸 ‘노출’과 관련해서 쓰고 있어요. 스스로를 과감히 드러내는 것, 자신의 박탈당한 처지를 보여주는 건, 단순히 취약함에 노정되는 수동적인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형성하는 능동적 계기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감벤처럼 벌거벗음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는 건 옳지 않아요.”

사진: Dina Al-Kassim

“그런데 디나, 당신이 예로 든 요하네스버그 부근의 나체 시위는 결국 실패로 끝난 것 아닌가요? 잠시 동안만 불도저가 집을 허물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고, 결국 그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고 새로 지어준 집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았나요? 그건 당신 말대로 일종의 스캔들이었을 뿐 아닌가요?”

“그렇지만은 않아요. 비록 당장의 저항은 잦아들었지만, 그 스캔들의 의미는 계속 남거든요. 그들은 대중 앞에서 수치를 범한 셈이고, 그건 그들과 그들의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요. 그 여자들은 힘들고 고통스런 나날들을 겪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사회의 통념화한 이야기 질서 속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구성해 나갈 바탕이 될 수 있어요. 적어도 그녀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체험했잖아요. 그 적나라한 노출은 자기 성찰의 조건이 될 거예요. 생각으로만 하는 성찰이 아닌 삶으로 꾸려지는 성찰 말이지요.”

“그런 얘긴 얼핏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죽음의 위협을 체험한 노예가 그 위협 앞에 전율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삶을 뚜렷이 의식하게 된다는 이야기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노출과 수치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말하자면, 대상화와 거리두기를 통한 자기의식의 계기가 마련된다는 건데, 그렇다고 죽음의 위협을 체험한 모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수치의 경험이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이죠.”

“그렇담, 당신이 말하는 노출에 의미부여를 하는 데 큰 제한이 있을 법해요. 헤겔의 경우 노예에서 더 중요하고 적극적인 계기는 노동이잖아요. 그런 거에 해당하는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내가 말하는 노출의 특성은 적극성에 있어요. 헤겔에서의 위협처럼 그렇게 주어지는 게 아니죠. 그래서 노출은 말하기와, 파르헤지아와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문제도 이런 말하기의 주체적인 면을 놓치고 있다는 거구요. 버틀러는 이 노출을 응답이나 책임과 관련지어요.”

“버틀러라면, 주디스 버틀러 말이죠?”

“예, 주디스는 제 선생님이었어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응답이나 책임이라면 레비나스 용언데…하긴 버틀러는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 같은 말도 차용해서 씁디다만…”

“네. 노출은 상처입기 쉬움을 무릅쓰는 행위죠.”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상처입기 쉬움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죠. 옷을 입고 있더라도 말예요. 그건 단지 일시적으로나 미봉적으로 우리의 피부를 가리고 있을 뿐이고, 그래도 상처입기 쉬움은 항존하죠. 그러니까 옷은 우리의 피부를 가리면서 우리가 상처입기 쉽다는 사태를 가리고 있는 거구요. 레비나스라면 ‘노출’이 이러한 사태를 깨우쳐주고 거기에 응답하게 한다는 데 동의할 거예요.”

“그래요. 저도 레비나스가 노출과 벌거벗음에 대해서 많이 논의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어요. 언제 그런 얘길 좀 나누죠.”

“예. 근데, 이번엔 부산에 어떤 일로 오셨나요? 지난번에 다녀가신 지 몇 달이 채 안 되었는데…”

“아, 이번엔 부산국제영화제 구경 왔어요. 캘리포니아 대학의 학생들 몇 명 하구 같이요. 저랑 공부하는 한국학생들도 좀 있거든요. 영화제 오시면 혹 극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렇군요. 전 부산에 살면서도 가기가 쉽지 않던데… 역시 제3세계 영화를 주로 보시겠죠? 그런데, 참, 이 목욕탕엔…?”

“네, 여기가 좋다는 얘기 듣고 잠시 쉬러 왔어요.”

“어, 그런데, 여긴 남탕인데, 어떻게 들어오셨죠? 어라, 그러고 보니 다 벗고 계시네. 음마, 나두…어, 저기 Y도 있네. 그럼, 여기가 여탕이야?”

구보씨는 흠찟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목욕탕 의자에 누운 채 잠시 졸았나 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십여 분 잔 듯했다. 에이, 그런 꿈은 조금 더 꾸어도 괜찮은데… 구보씨는 못내 아쉬워하며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문성원(부산대,철학) /

구보씨,다시 누드를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구보씨가 벗는 걸 좋아하긴 해도 아무 때나 벗고 다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옷에 크게 신경을 쓰지도 못하는데, 그건 구보씨가 구(舊)세대라서 그런지 모른다. 구보씨가 자랄 때만 해도 단정함 이상으로 옷차림에 관심을 갖는 건 그리 칭찬 받을 일이 못 되었다. 옷을 잘 차려 입고 다닌다는 말은 겉치레를 앞세운다는 뜻, 내면이 실(實)하지 못하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다 못살던 때의 얘기다, 라고 하면 분명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있다. 근검절약의 강조야 물자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항상 있기 마련인 도덕의 기본메뉴다. 내면의 가치 운운하는 것은 그 이면(裏面)의 보완물 격이다. 그런 가치가 실제로 있느냐 하는 건 천당이 실제로 있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선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있다. 겉으로 차려 입지 못하는 형편이라면 내면의 옷이라도 입혀야 하지 않겠는가.

구보씨가 옷차림에 짐짓 무관심한 것에는 그런 ‘문명’의 세례 탓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의 옷차림 때문에 그 사람에게 끌린다는 건 일종의 현혹(眩惑)일 뿐이다. 우리는 겉모습에 놀아나서는 안 되고, 화려한 치장 밑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구보씨가 자꾸 누드를 내세우는 데에는 이런 구시대의 교육이, 다시 말해 산업화 이전의 낡은 이데올로기가 한 몫을 하는 것은 아닐까.

겉은 가짜고 속이 진짜다, 라는 건 본질주의의 구태(舊態)다, 라고 해도 거기엔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겉과 속을 나누고 현상과 본질을 나누어 생각하는 데에는 사태를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그건 본질이 그 이름에 걸맞은 것일 때의 얘기다. 그 본질이라는 게 실재(實在)가 아니라 누군가의 편익(便益)에 봉사하는 것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본질이라고 내세운 것에 이미 이해관계가 묻어 있다면 어찌 하겠는가. 삶의 의미, 역사의 의미, 의미의 의미 따위가 바로 그런 것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당신네 철학자들이 제시해 줘야 하는 게 그런 삶의 의미 같은 것 아냐?”

학교의 구내식당에서 만난 한 선생님이 반쯤은 힐난이 섞인 듯, 또 반쯤은 도움을 바라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들어 머리가 부쩍 더 세버린 그 선생님은 이제는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도 잘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밥을 떠올리는 숟가락에도 별 의욕이 없어 보였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다 양파 껍질 같은 거지.”

구보씨는 요령 있게 발을 빼고 싶었다. 사람들은 과연 삶의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거나 좌절하는가. 그렇기보다는, 일상의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애꿎게 그 탓을 ‘삶의 의미’에 돌리는 것이 아닌가. 마음먹은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든지, 경제적으로 쪼들린다든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따위가 대부분 실제 원인이지 않은가.

구보씨는 짐 자무쉬의 최근 영화 ?리미츠 어브 컨트롤?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그 영화에선 거의 말이 없는 한 흑인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킬러다. 그 남자는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길에 여러 경로를 거치고 여러 사람을 만난다. 영화 속에서 비행기도 타고 기차도 타며 트럭도 탄다. 그런데 그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작은 트럭의 뒷면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 있다.

“LA VIDA NO VALE NADA”(인생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영화 [리미츠 어브 컨트롤]의 한 장면

“그 영화 첫머리엔 랭보의 시구가 나와요. ?취한 배?의 앞부분. ‘유유한 강들로 접어들자 이젠 선원들 없이도 될 것 같았어…’ 암튼 재미있어요.”

“구보 선생이 추천하는 영화는 대개 졸리더라구. 이 영화도 그렇겠지?”

“뭐, 보기에 따라선… 어떻든 영화니까요.”

“야한 장면도 있어?”

“누드 씬이 있긴 한데, 야하진 않아요.”

“그래?”

“요새야 누드라는 게 별 거 없잖아요. 그래선지 이 영화에선 투명한 비닐 옷만 걸친 여자가 나와요. 그 여자가 다 벗기도 하죠. 그게 그거니까… 차이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건지도 몰라요.”

“일종의 허무야?”

“글쎄요, 허무도 여러 종류니까요. 게다가 순수한 허무란 건 없잖아요. 이 영화에서도 킬러가 결국 목표를 달성하거든요. 좀 황당한 방식으로긴 하지만…”

“황당한 방식?”

“예. 상식적인 인과성을 뛰어넘어서요. 무장한 부하들이 밖에서 지키고 있는 건물 안의 보스를 죽여야 하는데, 어느 순간 킬러가 그냥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어떻게 들어 왔냐고 물으니까, ‘상상력’을 통해서라고 대답하죠. 뭐, 어차피 영화니까요. 어떤 걸 바라느냐는 게, 그 바라는 걸 표현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영환 허무주의적인 건 아니에요. 오히려 원하는 바가 있다는 걸 강력하게 보여 주죠.”

“그럼 말이야, 구보 선생. 원하는 게 이뤄질 수 없는 경우는 어떤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면 말이지. 그건 허무 아니야?”

“영화에서 말예요?”

“아니, 영화에서건 현실에서건.”

“글쎄요, 바라는 데 이뤄질 수 없는 건 허무라기보다 슬픔이겠죠.”

“슬픔? 슬픔이라…”

그 선생님은 좀 어두워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서 꼭 슬픔으로 귀착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때로 분노하고 미워하기도 하니까. 그런 게 힘에 부치고 아무 소용없다고 여겨질 때 찾아오는 게 슬픔일 거다. 장애를 물리치려는 반응의 표출이 분노라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에 부딪혀 나타나는 위축의 느낌이 슬픔인 셈이다. 물론 순수한 슬픔은 찾기 어렵다. 많은 경우 슬픔은 분노와 섞여 저주나 원망 따위를 낳는다.

슬픔이 진해지고 무거워지면 이루고자 했던 목표마저 삼켜버린다. 그래서 그것은 자칫, 있지도 않은 허무와 만날 수 있다. 그럴 때 그것은 치명적인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그러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대부분의 병이 상한 몸의 회복을 위해 휴식과 안정을 강요하는 것이듯이, 과도하지 않은 대부분의 슬픔도 장애와 손실에서 물러서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게 한다.

반면에 허무주의에는 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다. 허무주의는 파괴적 공격의 일환이다. 문제는 그 공격이 전방위적(全方位的)이라는 데 있다. 허무주의는 세상에 만연한 가식(假飾)과 위장(僞裝)을 들춰내지만, 수명이 다한 가치와 의미들뿐 아니라 때로 이제 막 자라나는 싹마저 짓밟는다. 허무주의자는 황량한 폐허가 이루어낸 평등의 지평에서 위안을 찾고자 한다. 세상이 허무(虛無)하다면 더 이상 억울해 할 필요도, 더 이상 구차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그래, 우리 구보 선생은 어떤가. 요즘 즐겁게 잘 지내지?”

마주 앉은 선생님이 수저를 내려놓고 입 주위를 닦으며 묻는다. 어느새 이 양반도 이제 예순이 가까운 나이다.

“웬걸요. 저야 늘 슬프죠.”

구보씨는 멋쩍게 웃는다.

“그게 뭔 말이야? 요새 뭐하고 사는데?”

“그냥 책이나 읽고 있죠. 가끔 누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허허, 웬 누드? 누드라는 게 별 거 없다면서…”

“그러게 말예요. 혹시 그래도 아직 별 거 있는 누드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저기, ?누드모델?이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벌써 한 20년쯤 전 영환데, 그거 4시간짜리 DVD를 다시 봤어요. 늙수그레한 화가가 젊은 여자 모델을 벗겨놓고 계속 그리죠. 이렇게도 그리고, 저렇게도 그리고, 그러다 포기하고, 또 다시 그리고… 그런 과정이 4시간 동안 이어져요. 그런데 그렇게 지루하진 않아요.”

“그래서 그림은 완성하고?”

“그렇죠. 영화에선 완성하는 것으로 나와요. 물론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진 않죠. 화가는 그 그림을 벽 속에 넣고 발라버려요. 그리고 새로 그림을 그려 그걸 공개하죠. 진짜 그림은 영원히 숨겨진다는 얘긴데, 이런 아이디어는 사실 낡은 거죠. 발자크의 단편에서 따온 거라고 해요.”

“그게 다야?”

“그러니까요. 그게 다란 생각을 안 하게 하는 게 문제인 거죠. 겉치레를 다 벗겨내고 벌거벗은 몸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거예요. 영화하고 별개로 말이죠.”

“허허… 그래서 구보 선생은 뭘 좀 찾아냈어?”

“아직요. 찾아내면 말씀 드릴게요.”

“구보 선생도 진짜는 벽 속에 숨겨놓고 가짜만 말해 주려고?”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숨길 게 없으면서 숨기는 척 하는 것은 사기겠지만, 이미 숨겨진 것을 끝없이 찾아다녀야 하는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역시 사기일까. 구보씨는 그 선생님과 헤어져 혼자 걸으면서 생각했다. Y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렇다고 하겠지. 하지만 언젠가 그녀도 생각이 바뀔 날이 있을 거야.

실재(實在)와 우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과 어쩔 수 없는 어긋남이 있지만 그걸 향한 추구를 포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반복되는 진부함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달리 어떻게 하겠어? 문명의 확장 사이클이 요즘처럼 문제를 키워갈 때 내파(內破)의 싹이 눈에 띄게 자라지 못했다면, 반성의 수단으로 들이댈 수 있는 건 아마 이런 사고방식들일 거야. 그게 비루하게 현실을 쫓는 구차함이나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허무함보다는 낫지 않겠어?

벌거벗은 몸은 이런 모색의 메타포, 적어도 그 일부일 거야. 그렇더라도 오늘날의 누드에는 어떤 슬픔이 깔려 있어. 상업성에 물든 누드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지. 일종의 비타협적인 슬픔 같은 것, 그게 누드의 정체처럼 여겨지는 거야. 그건 왜일까. 구보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벌거벗은 하얀 몸뚱이를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문성원(부산대, 철학) /

구보씨 누드모델을 꿈꾸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더운 날씨다. 무덥고 갑갑하다. 훌훌 벗어던지고 싶은 때다. 구보씨가 딱히 여름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벗는 건 좋아한다. 아니, 그보다는 걸치고 입는 것을 그닥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렇다 보니, 이런 날씨에 집에 있을 때면 거의 벌거벗고 있을 때가 많다.

원래 인간은 열대 동물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퍼져가기 시작한 것은 대략 4, 5만 년 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 기간은 생물학적 변이가 일어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오늘날도 지구상에서 인간이 옷가지나 보온 장치 없이 살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니까, 온대(溫帶)인 우리네 환경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는 계절은 여름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물학적 본성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 여름인 셈이다. 자연스러움으로 잘 지낼 수 있는데 거기에 굳이 인위(人爲)를 덧붙일 필요는 없어, 라고 구보씨는 벗은 몸으로 생각해 본다.

인위는 과잉(過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특정한 목적에만 딱 들어맞는 것은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은 대부분 예기치 않은 문제들을 야기한다. 물론 인간의 문화는 그런 과잉의 자극으로 말미암아 발전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옷은 열대의 ‘털 없는 원숭이’ 출신인 인간이 그 활동 범위를 한대(寒帶) 지역으로까지 넓혀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막상 더운 계절에는 거추장스러워지는 것이 옷이다.

어찌 옷뿐이겠는가.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장치와 제도들이 그렇다. 거추장스러워지기만 하면 다행이다. 쉽게 억압적이 되어버린다. 인위의 질서가 자연스러움을 덮고 순응을 강요한다. 그렇게 하여 인위의 본성이 마련된다. 이제 자연은 낯선 것이 되고 만다. 아마존의 조에 족을 생각해 보라. TV 화면에 비친 그들의 벌거벗은 자연스러움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인위의 문명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신체 부위를 가리는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옷에 배어있는 인위의 질서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복식(服飾)에서다. 하지만 복식은 사극(史劇)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보씨는 옷차림새 때문에 대우가 달라지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요즘도 옷이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옷에 대한 태도는 사회 질서에 대한 태도를 함축한다. 히피들이 괜히 옷을 찢고 벗어던졌겠는가. 그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쉽게 찢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으며, 도리어 벗은 몸에 파고든다. 오늘의 실태를 보라. 몸짱 열풍을 거쳐 신체 부위 하나하나를 지배하는 촘촘한 시선. 꿀벅지니 빨래판 복근이니 하는 따위의 웃지 못 할 규정들이 판을 친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 들게 하며, 알몸까지 스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오늘날 전시된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다.

이런 세상에서 구보씨는 누드모델을 꿈꾼다. 물론 구보씨가 몸짱일 리는 없다. 빨래판 복근? 그의 배는 전통의 중년남자가 지닌 봉긋한 여유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 구보씨가 엉뚱한 꿈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본 영화 한 편 때문이었다.

?캐쉬백?이라는 제목의 영국 영화였다. 주인공 청년이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그 실연의 상처 가운데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졌던 것 같다. 세상이 정지된 속에서 자신만 움직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멈춰진 시간, 그 속에서 홀로 누리는 자유로움 ― 이것이 힘든 상황을 잠시나마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유머는 현실에 대한 이런 종류의 거리두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상상의 특권적 거리가 당장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비틀어보게 하고 그 틈에서 숨 쉴 수 있게 한다.

정작 구보씨에게 필이 꽂힌 것은 영화의 전개에 핵심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한 장면에서였다. 주인공 청년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난한 미술학도였는데, 실연을 당하고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처지에서 미술실기 수업에 들어왔다. 누드 데생 실습 시간이다. 당연히 누드모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누드모델이 머리가 백발인 할아버지였다. 몸매는 물론 몸짱과 거리가 한참 멀다. 그래도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다. 모델을 서면서 ‘뿌우윙’하고 방귀까지 뀐다.

“익스큐즈 미.”

영화 ‘캐쉬백’의 한 장면.

구보씨는 ‘익스큐즈 미’라는 표현이 그토록 적절하고도 미묘한 톤으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색함과 미안함, 뭐 그래도 생리현상인데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약간의 뻔뻔함까지 적절하게 담겨 있다. ‘뿌윙’. 그 시퀀스가 끝나기 전에 할아버지 모델은 다시 방귀 한 방을 날린다.

“익스큐즈 미.”

그래, 바로 저거야, 하고 구보씨는 생각했다. 누드모델이라고 꼭 잘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 오히려 필요한 것은 감춰져 있고 억압되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용기야.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약간의 용기 말이지. 그런 것만 있으면 누구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저렇게 할아버지도 모델을 설 수 있다면, 철학자에게 적절한 노후의 부업은 바로 누드모델이 아닐까. 모름지기 철학자란 은폐된 것을 파헤치고 드러낼 줄 알아야 하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쉽게 벌거벗지 못하는 까닭은 추워서가 아니다. 옷의 질서가 주는 안정을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다. Y도 예외가 아닌 것일까. 그만하면 멋진 몸매인데도 그녀는 노출을 싫어했다. 밝은 곳에서는 좀처럼 맨몸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구보씨가 갑자기 불을 켰을 때 알몸이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시트를 끌어당겼다.

“아깝다, Y야. 너야 말로 누드모델로 딱인데…”

구보의 농담을 Y가 차가운 시선으로 받는 바람에, 구보씨는 황급히 다시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넌 여전히 남성 위주의 시선으로 날 보는 거야. 난 그게 싫다구.”

“엉? 어차피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잖아.”

“그런 뜻이 아니거든. 대체 그게 철학자가 할 말이야? 니들은 항상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폭로니 탈은폐니 하고 떠든다구. 그러면서 실제로 이용당하고 유린당하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아.”

“아니, 그건 오버센스야. 내 얘긴 때로 불필요하고 억압적인 틀이나 감싸개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야. 인위적인 것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그런 반성에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말한 여자, 남자는 자연스러움 속에서의 얘기일 뿐이라구.”

구보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이런 식의 어설픈 변명이 그대로 통할 리 만무했다. 성(性)의 사회적 성격이니 젠더(gender)니 하는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벌거벗음 앞에서 공평치 않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잘못하다간 버티기 어려운 논란에 말려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스스로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수긍하느니만 못하다.

“자연스러운 남자와 여자는 없어.”

Y는 단호했다. 그렇다. 엄격히 말하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거벗어도 진짜 자연스러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니 더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만큼 우리는 더 더듬고 더 갈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하는 우리의 눈길과 손길이 그래서 더 절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도 니들의 속임수고 도피처야. 포착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 그 따위 말로 너네가 노리는 게 뭔지 생각해 봐. 결국은 눈에 보이는 문제를 덮고 회피하는 거야. 남자들이 여자의 몸이나 성을 노리개로 삼고 지배하는 현실, 그건 눈에 보이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문제를 놔두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 철학자들이 자꾸 외면당하는 거라구.”

“하하, Y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그런 면이 있겠지. 하지만 우리도 나름 진지하다구. 그리고 내가 누드를 얘기하는 건 성(性)의 대상화나 상품화, 그런 것 하곤 상관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네 말대로 히피들이 옷을 벗는 데에는 아마 진정성이 있을 거야. 그런데 누드모델은 좀 아니잖아. 그런 게 우리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겠어? 옷을 벗어던지는 용기라구? 그런 건 차라리 동물보호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누드 시위에서 찾는 게 나을 거야.”

“그럼, 넌 나보구 누드모델의 꿈을 포기하라는 거야?”

“꿈? 그런 게 꿈이라도 돼? 그건 그냥 자족적인 냉소거나 유머야. 네가 그랬잖아, 유머라는 게 현실에 초연한 척해서 위안을 얻는 거라구.”

이크. 구보씨는 이쯤 되면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벌거벗음에 대해 아직 할 말은 많지만, 이럴 때는 굳이 열을 올려가며 대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옷을 벗어젖히는 것만으로는 자연스럽게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라고 구보씨는 여전히 벌거벗은 몸뚱이로 생각해 본다.

문성원(부산대,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