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지난번에는 빛이 보여주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그림자 이야기를 해 보자. 그렇다, 2005년 꽤 늦은 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림자가 건네는 이야기에 붙들려 이 사진을 찍었다.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는지? 웬 사내와 여자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정도? 마주 선 여인이 꽃이라도 들고 있는 듯 보이니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은 아닐까? 그런데 사내는 손에 틀림없이 휴대 전화로 보이는 걸 들고 있다. ‘작업’을 거는 중일지도 모른다. 작업의 진도가 무난하게 흘러가 이제 막 여자 전화번호라도 얻게 된 건 아닐까.

그러나 사실 그림자의 주인은 두 사람 모두 여자였다. 게다가 둘은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저 제 할 일 하며 제 갈 길을 가던 낯선 타인들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거의 나란히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프레임 속에 들어왔을 뿐이다.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나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상은 비스듬히 비치는 오후 햇살이 그린 그림자를 핑계로 우리가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사진이 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반영일 뿐이다. 심지어 그 반영조차도 왜곡되고 굴절되기 십상이다. 때로는 빛이 굴절하고 때로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감상자의 주관적 소망이나 편견에 의해 제멋대로 곡해되기도 한다. 사진을 재현으로만 보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사진이 보여주는 반영은 때로 허망한 것이니까.

일찍이 장자는 그림자 이야기로 우리가 집착하는 현실의 삶 또한 허망한 것일지 모른다고 암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아까는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추고, 아까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서는군요. 어쩌면 그렇게도 지조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럴까? 내가 의지하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림자는 허망한 존재다. 실체가 아니기 떄문이다. 그런데 그림자의 그림자인 망양(罔兩)은 허망〔罔〕이 두 번〔兩〕 겹쳐 있는 존재니, ‘허망하고 또 허망한〔罔而又罔〕’ 존재다. 그림자가 실체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망양은 그림자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는 존재일 뿐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한다. 망양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림자는 실체이다. 그런데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도 더 이상 실체가 아니라 허망한 존재다. 장자는 그림자의 그림자를 통해서 그림자는 물론이고 실체 또한 허망한 것임을 밝힌다. 꿈속의 꿈을 통해 꿈의 허망함을 각성시키고 다시 대각(大覺)을 통해 현실조차도 사실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태연히 한 장자였으니.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왜 사진을 찍는 걸까?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철학) /

오늘은 나, 내일은 너[카메라 옵스큐라]

골목은 침울하다. 일상조차 변변히 흐르지 못할 만치 생동의 기운이 점점 쇠해가는 탓이다. 그러니 작은 화초나 아이들, 햇볕 한뼘처럼 사소한 생기의 편린들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달리 보일 수밖에. 사진을 시작한 후로 몇 차례나 옛 동네의 임종을 했건만 그 쇠락의 면면은 항상 처연한 기시감(旣視感)을 몰고 온다. 병증의 악화 정도만 다를 뿐 소멸의 압박은 늙은 골목 어디에서나 감지되기에, 그 이미지들에 감도는 불길함도 하릴없다.

기억하기에, ‘마카브르(Macabre)’라 불리던 중세 유럽의 회화작품들에도 비슷한 불길함이 흘렀다. 해골이나 시체처럼 칙칙한 오브제를 포함하는 그림들은 모든 인간의 숙명적 종국을 은유하면서 ‘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가르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매개로 피안에 대한 염원을 일깨우고,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강화하려던 것이다. 지극히 중세다운 그림인 셈인데, 그 훈계가 페스트의 참혹한 기억 등을 염두에 둘 때 생각보다 효과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우아하게 빛나는 신성을 위해 고해(苦海)의 현세가 가벼이 부정됨은 마뜩찮지만, 사신(死神)의 흔적들이 어쨌거나 삶(영생)을 향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래서, 마카브르는 죽음이 삶에 닿는 역설이다.

골목의 이미지 또한 유사한 역설이지만, 구질구질한 골목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그 자리에 들어설 ‘이 편한 세상’ 따위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그 역설은 온통 스러지는 것들의 이미지가 생존에 관해 절절한 이야기를 하는 데 있다.

재개발은 그 주체인 자본과 국가 권력의 측면에서 때려 부수는 일(타나토스)과 새로 짓는 일(에로스)이 하나됨이다. 부수거나 짓거나 어차피 거시적인 자본 증식의 일환일 뿐이고 양자의 유기적 결합이야말로 그 증식에 더욱 효과적이다. 아울러 그 과정 전체는 권력이 의도하는 도시재개발의 실천이다. 그러나 그 맞은편에서 양자는 철저히 분리된다. 타나토스의 저주와 에로스의 축복은 서로 다른 이들의 몫이어서 철거의 대상과 건축의 수혜자는 다르다. 어떤 이는 새집에 깃드는 행복이나 투기의 성취를 누리지만, 주거와 생활의 공간 전체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잔혹한 흑마술은 오로지 가장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집중된다.

이들은 대개 노인으로 그 낡은 담벼락이나 지붕들처럼 수십년을 그곳에 머물러 왔다. 공간의 소멸은 그토록 익숙한 삶의 터전과 이웃들, 그 속에서 형성된 인간 관계, 생활의 습관, 일상의 전개 방식 등이 일거에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는 삶의 기반과 양식의 소멸이며, 정체성의 파괴다. 골목과 옛동네의 무도한 궤멸이 철거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직접적인 폭력성을 넘어 소리없는 홀로코스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 창출보다는 투기로 성장해 온 건설 자본들의 비루한 연명, 마치 염습(殮襲) 같은 도시의 미화가 저 학살을 댓가로 치를 가치가 있는가?

철거가 시작된 동네에서 옛집 근처를 배회하는 이들은 자기 육신의 주변을 서성이는 살아 있는 영혼이 되지만, 이들의 안식은 또 다른 늙은 동네에서만 허락된다. 사라진 골목들은 남은 골목들에게 가장 비관적인 뉘앙스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이병태 /

오후의 표지(標識) [카메라 옵스큐라]

텅 빈 골목길은 때로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빈 방이 생각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텅 빈 골목을 찍은 사진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런 사진을 본 사람들이 말한다. “도대체 뭘 찍은 거야?”

오후의 표지(標識), 2007, 통의동의 막다른 곳, Contax G1
이 사진은 경복궁 서쪽 통의동의 어느 골목길 막다른 곳을 찍은 것이다. 당신 눈길이 하늘을 향해 잔가지를 뻗은 나무에 먼저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주 피사체는 텅 빈 벽에 비친 오후 햇살이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배경에 있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없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아주 맑은 겨울날이었기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선명한데다 이단으로 된 벽 때문에 굵다란 화살표가 땅을 향해 단숨에 내리꽂히는 듯한 그림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 제목을 ‘오후의 표지’라 했다.

같은 곳을 여러 차례 지나다녔지만 사진을 찍던 저 순간처럼 빛이 비치지 않을 때, 통의동 이 막다른 골목은 눈길을 끌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텅 빈 벽뿐이었다. 같은 장소지만 빛이 없는 빈 벽은 참으로 초라했다. 저 순간은 그래서 ‘빛나는’ 순간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기에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구나 하고 체념하는 골목길, 막다른 공간에서 저런 장면을 만나는 일은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사진을 찍으면서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참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게 많다는 걸 어떻게 알까?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사진기를 들고 여러 해를 어슬렁거리면서 나는 숨바꼭질을 하는 술래 같다는 생각도 했다. 두리번거리다 보면 숨죽여 꼭꼭 숨어 있던 사물이 혹은 어떤 공간이 내 앞에 불쑥 튀어나와서는 말을 거는 순간이 있다. 아쉽게도 대체로 그 순간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짧다. 하지만 말을 거는 그 순간, 피사체는 놀랍게도 아주 커다랗게 도드라져 내 앞에 우뚝 선다. 그래, 찰칵! 숨어 있던 친구를 발견한 술래가 “찾았다!” 외치는 소리하고 똑같다.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

뭘 찍어요?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기 들고 뒷골목 헤매길 만 6년, 햇수로 8년째 접어듭니다. 비슷하게 영혼이 고장난 동행이 있어 긴 방랑에 지치기는커녕 더욱 기꺼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적을 갖고 골목을 헤맨 것은 분명 아닙니다만 어쨌든 허튼짓의 흔적들과 이야기가 남아 이렇게 ‘카메라 옵스큐라’에 담습니다.

사진 찍는 ‘철학도’들의 수다라서 주로 사진과 피사체, 촬영과 감상, 혹은 사진 너머에 대한 철학적 수상들이며, 당연히 그간 얻은 이미지도 함께 합니다.

프롤로그 ; “뭘 찍어요?”

대개는 재개발 예정이거나 진행 중인 옛 동네 골목들을 돌면서 사진을 찍는데, 이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뭘 찍어요?”다. 사실 이 물음의 함축은 맥락에 따라서 꽤나 복합적이다. 주변의 지인들이 그렇게 묻는다면 가벼운 호기심 때문인지라 대답 또한 가볍다. 너무 가벼워서 그때그때 뭐라 대답했는지 사실 기억도 나질 않는다.

부담스러운 경우는 촬영 중 골목의 주인들(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에 있어야 할 생존의 이유가 있는 이들)이 그렇게 물어 올 때다. 호기심, 의심, 경계, 적대, 심지어 기대와 욕망 등 복잡한 정서적 반응이 때론 강하게 감지되기도 하거니와 어쨌거나 그 시공간의 이방인으로서 위축될 수밖에 없어서 늘 곤혹스럽다.

그나마 마음 편히 대답할 수 있는 경우는 사람들이 별반 경계심 없이, 때론 미소와 함께 조용히 물어 올 때다. 이 허름한 골목에 애써 뭐 찍을 게 있냐며. 왠지 고마운 마음에 공손히 답하긴 하지만, 대개 “꽃이 예뻐서요.”처럼 어정쩡한 것이 되고 만다.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그렇고, 침묵할 수도 없어서다. 그렇다고 고스란히 거짓말은 아닌 게 딱히 꽃이 아니더라도 분명 눈을 끄는 피사체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전에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의 골목은 언뜻 뒤숭숭하고 침침해 보이지만 몇 번을 되풀이해서 다녀도 늘 새롭다. 길의 너비며 방향, 이어짐과 막다름, 담벼락의 빛깔과 재질, 집과 계단의 모양새, 텃밭과 화분, 그리고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정경은 또 날씨와 계절, 아침과 오후, 사람들의 필요와 취향 등 수없이 많은 변항들의 함수다. 그렇기에 매순간 어떻게 다른 광경으로 다가올지 그 어떤 예단도 용납하지 않는다. 몇 년을 곱씹어도 버릇처럼 골목에 다시 접어드는 것은 이 공간이 피사체로서 또 성찰의 단초로서 항상 새롭고 묵직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동네 골목이 갖는 이 경탄할 만한 면모는 기실 피맺힌 그 탄생과 소멸의 역사가 낳은 부산물이다. 이 골목들은 처음부터 권력의 통제와 기획 하에 형성되지 않았다. 이른바 저임금 노동력으로서 도시에 유입된 사람들이 일제시대의 토막촌, 전후의 판자촌을 중심으로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며, 서툴고 거친 합의와 치열한 삶이 창조한 미증유의 자율적 건축공간이다.

집이 들어설 자리를 비켜 길이 났으니 곧을 리 없고 또 그 길을 비켜 다른 집이 들어섰기에 집모양새가 반듯할 리 없다. 몇 번의 대선과 총선이 지나가면서 언발에 오줌 누는 권력의 생색내기를 제외하곤, 어떤 지원과 배려도 없이 수백 수천만 그 주인들이 자신들의 생존만큼이나 힘겹게 수십년간 고치고 가꿔온 것이다.

이름도 취지도 쌍스러운 서울의 르네‘쌍’스 따위가 아니더라도 골목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학살되고 있었다. 그 주인들과 함께. 몇 년간의 출사가 어쩌면 골목들에 대한 조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겨울엔 기어이 그 주인들의 진짜 장례식에 다녀오고 말았다.

내일 또 나는 골목에 간다. 그 임종을 위해. 또 혹시 모를 심폐소생을 위해.

이병태 / admin@admin.com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2002년 개봉한 영화에는 175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예쁜 여주인공 기네스 펠트로가 등장한다. 뭐 이렇게 예쁘고 날씬한 배우들이 헐리웃에만 있나? 우리나라에도 널렸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 여성의 유전적 특성상 175센티미터의 키를 자랑하는 이는 거의 없다. 대신 날씬한 여성들은 많은 편이다. 특히 학회 분과에서 같이 공부하는 후배들은 뭘 먹고 사는지 하늘하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세미나를 하고 나면 왠지 모를 우울감에 시달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나와 비슷한 40대의 넉넉한 체형도 얼마든지 널렸다. 아이 한 둘 낳고 운동량 부족한 주부들에게 운동이 왠말인가? 남편 직장보내고, 집안 살림에 재테크에 아이 학원 챙겨 보내기까지. 핑계같지만 정말 시간이 없다. 티비에 나오는 유명한 의사들의 말씀. 체중감량을 원한다면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라. 그걸 누가 모르나? 그래서 나를 비롯한 전세계의 주부들은 다이어트 식품에 주목한다. 이쯤에서 이야기의 대상폭을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현대인으로 넓히는 것이 좋겠다. 사실 다이어트니 살빼기니 하는 것들은 문명화된 삶의 고질적인 현대병 아닌가.에 나오는 조에족이 다이어트 식품 찾는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현대인은 바쁘다. 학생은 학생대로 바쁘고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바쁘고 주부는 주부대로 바쁘다. 황혼을 느긋하게 즐겨야 하는 노인들도 요즘은 생계를 위해서 바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늘씬하고 예쁜 여성을 이 영화에서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 잭 블랙에게만 그렇게 보인다는 설정이다. 영화에서 실제 여주인공의 모습은 136킬로그램의 여성이다. 그런데 잭 블랙에게는 그 여성이 완벽한 여신의 모습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최고의 몸매를 가진 여자와만 데이트를 하려는 잭 블랙은 번번이 연애에 실패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자기의욕고취 전문가를 만나 최면에 걸리고 만다. 전문가는 잭 블랙에게 여성의 외모가 아닌 내면만을 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만난 여성이 너무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기네스 펠트로였던 것이다. 그는 애인이 앉는 의자가 박살이 나고 속옷 가게에서 고른 팬티가 낙하산만 해도 개의치 않았다. 눈 앞의 애인이 너무나도 날씬하고 예쁜데 뭐 그런 사소한 일들이 대수이겠는가.

뚱뚱한 = 못생긴

그런데 사랑에 위기가 닥친다. 잭 블랙이 최면에서 깨어나 버린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남성 여러분은 어찌하시겠는가?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장담 못할 것들이 영화에서의 해피엔딩이다. 특히나 여성에게 현실은 더더욱 암울하다. 2006년 개봉한 한국영화에서 주인공 김아중은 암울한 현실의 상징 그 자체이다. 믿었던 애인에게 사기 당하고 결국 자살의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주인공은 성형을 선택한다. 그녀가 여러 번의 연애에 실패한 이유는 단 하나 뚱뚱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뚱뚱하다’와 ‘못생겼다’는 결코 동의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동급의 가치로 둘을 연관지어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이목구비가 남들에 비해 좀 뚜렷하지 못하고 비율이 안 맞아 못생겼을지라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타고 난 걸 어쩌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요즘은 곱게 바라보아 주지 않는다. 돈만 주면 성형외과에서 어느 정도는 잡아주니. 하지만 뚱뚱한건 도대체 동정받을 만하지도 않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못생겼다는 덤까지 받는다.

미디어에 비치는 뚱뚱한 여성 혹은 남성을 떠올려보자. 뭔가 성격이나 직업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고 결코 주인공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프로그램들이 최근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살빼기 프로젝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부들의 시청이 많은 아침 방송에서 단편적으로 편성하던 프로그램들이었는데 최근엔 케이블 티비를 필두로 살빼기 프로젝트 그 자체가 목적인 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외국 케이블 채널에선 이미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들이었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었다.

초고도 비만인들을 선정해서 운동 과정과 살이 빠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눈물이 나는 감동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얼마 전 우연히 케이블 티비에서 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초고도 비만일 때의 실물크기 사진을 세워놓고 쉽게 사람 모습이 떨어져 나가게 설치해 놓았다. 20킬로그램을 뺀 비만 여성이 그 사진을 뚫고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모두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그 옆에는 빨래비누를 20킬로그램만큼 쌓아 놓고 그 만큼이 여성의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그 빨래비누만큼의 부피, 지금의 몸보다 컸던 과거의 사진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몸에서 불필요했던 부분들이 빠져나간 것이다. 다시 말해 내 것이 아닌 것들이 나에게서 나갔다.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인류는 모두 내 것이 아닌 것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구분했다.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분리되어 순수한 영혼이 되었다. 이러한 영혼은 불멸성을 가지며 분리불가능하고 파괴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는 이 세상 어떤 자연 만물과도 다르지 않는 성질을 지닌 것으로 설명된다.

근대의 자연학에서 보면 신체는 수학적으로 양화될 수 있으며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데카르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기계적 운동이며, 이 운동은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생명체와 비생명체, 유기체와 무기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신체든 자연사물이든 자연법칙에 따르는 기계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 이후 근대 세계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육체와 육체의 분리

그러나 현대 또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데카르트의 인간에 대한 설명에 역사적인 획을 긋는다. 데카르트의 영혼과 신체는 다시 결합한다.에서 기계족들이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을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육체만 살려 놓고 인간을 사육하니 오래 살지를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가상공간이 매트릭스이고 거기에서 인간은 정신활동을 하며 통 속에 있는 육체를 지속시킨다. 결국 인간이라는 특별한 존재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서는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육체와 육체가 분리되는 경험을 우리는 하고 있다. 긴장은 하지 마시라. 피와 살이 튀는 하드고어 영화에서 보는 육체의 분리는 아니니.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쯤이라도 해본 사람, 뱃살 대신 초콜릿 복근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 모두 육체의 분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내 안에 있는 지방은 전적으로 질이 나쁘고 결코 나와 화해할 수 없는 내 안의 나이다. 내 안에 너는 있을지 몰라도 내 안에 있는 지방은 존재하지만 존재할 자리가 없다.

내게서 분리되어야 하는 나는 자본주의와 대단히 친숙하다. 자본주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드는데도 무척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라지게 하는데도 훌륭한 도움을 주고 있다. 스마트폰 앱은 전국의 맛집을 친절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깔끔한 시설에 가격마저 저렴한 피트니스 클럽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나보다는 내안의 나를 더 사랑한다. 이제 미디어는 눈부신 배우들만 영상에 담지 않는다. 자기 몸을 부담스러워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담아낸다.

미디어는 거식증에 걸린 해골같은 모델들도 담아내고 어린나이에 뱃살공주가 된 초등학생도 담아내며 20~30킬로그램씩 눈에 띄게 살을 제거할 수 있는 초고도비만의 사람들도 담는다. 왜냐하면 모두 훌륭한 시청률과 광고료를 보장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몸무게를 밝히며 카메라 앞에 나선다. 나 역시 오늘도 내 안의 나를 내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휴먼다큐를 찍는다. 물론 감독은 자본주의 선생이다.

강지은(건국대 강사) /

당신은 친절하신가요?[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1. 당신은 은행원입니다. 주 업무는 대출상담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대출 조건에 맞지 않는 할머니 한 분이 당신을 곤란하게 하고 있네요. 수입, 담보 등 대출 규정을 말씀드려도 막무가내로 대출을 해 달라고 조르고 있어요. 상황이 어려운 건 알겠지만, 규정에 맞지 않는데 저라고 도리가 있겠어요? 그러니까요 할머니, 제발 다른데 가서 알아보시라고요!!!

#2. 당신은 운전 중입니다. 마침 신호 대기 중이라서 차도 한 가운데에 서 있지요. 그런데 맞은편 인도가 좀 소란스러운 것 같아요. 한 여자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지 도와 줄 사람을 찾고 있는 듯해요. 아니나 다를까, 뒤따라 온 한 무리의 남자들―서넛은 되는 것 같아요―이 여자를 잡아 마구 때리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냥 가던 길을 가고 싶어요.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의 일에 연루되는 건 귀찮기만 할 뿐이잖아요? 그런데 이놈의 신호가 참 기네요. 또다시 도망친 여자가 이번에는 당신 쪽으로 달려오는 것 같아요. 당신은 차 문이 잠기었는지 다시 확인을 합니다. 아, 마침 신호가 바뀌었어요. 재빨리 여기를 벗어나야겠어요.

#3.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아침부터 누군가 당신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지난 번 운전 중에 보았던 그 여자가 결국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군요. 경찰들은 당신이 유일한 목격자이니, 증인 출석을 해 달라고 하고 있어요. 용의자는 있는데 물증이 없다나요? 다른 목격자들도 있을 텐데, 경찰은 왜 하필 당신을 찾아왔을까요. 당신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귀찮고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아, 마침 어린 시절 친구가 고향에 한 번 내려오라고 전부터 전화며 편지며 해대던 게 생각났어요. 그래요,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서 며칠 푹 쉬다 오는 것도 괜찮겠어요.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위의 상황에 처한 인물은 해원. 위의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해원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신경 쓸 생각도 없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그런 인물이다. 이런 저런 상황이 복잡하던 차에 거의 해고 통보와도 다름없는 휴가를 받게 된 해원은 고향에 잠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마침 친구 복남이 오래 전부터 고향에 한 번 내려오라며 전화며 편지며 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원은 고향 무도에 가게 되고, 친구 복남의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타인의 외면으로 질서가 유지되는 섬, 무도

복남, 복남의 딸, 복남의 남편(만종), 복남의 시동생, 복남의 시고모, 그 외에 친인척 관계로 여겨지는 할머니들 세 분, 치매에 걸려 하루 종일 이름 모를 풀만 씹어대시는 할아버지 한 분, 이렇게 아홉 명이 무도에 남아 있는 사람들 전부이다. 이 섬에서 해원이 목격하는 것은 시동생의 성적 학대와 남편 만종의 폭력, 그리고 마을의 모든 중노동을 견디며 살고 있는 복남의 삶이다. 사실 복남이 해원에게 그토록 고향에 한 번 내려오라고 사정했던 이유도, 복남에게 있어 해원은 섬을 떠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외부의 끈이었기 때문이다. 복남은 중노동과 학대, 폭력, 멸시 등 모든 억압을 참고 살아왔지만, 자신의 딸이 만종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자 딸을 위해 섬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실제로 딸이 성폭행을 당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딸이 유난히 아빠에게 집착을 하고, “가슴이 커야 남자한테 사랑받는다”는 식의 말을 하는 등, 복남이 의심 할 만 한 정황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해원은 복남의 의심에 대해 “너 미쳤니?”라고 말하며 사실을 확인해보려 하지 않고, 도시로 데려다 달라는 복남의 부탁에 대해 ‘도시에서의 삶도 여기랑 별반 다르지 않으며, 떠나는 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복남을 억압, 착취, 이용하는 마을의 질서가 해원의 방관으로 유지되는 순간이다.

무도에서는 법도 효력이 없다. 복남은 해원의 도움 없이 마을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복남의 계획은 이내 발각이 되고, 복남은 섬을 떠나기도 전에 만종에게 붙잡히고 만다. 바닷가에서 마을까지 질질 끌려오면서 복남은 만종에게 계속 구타를 당하고, 누구 하나 이를 말리는 사람은 없다. 보다 못한 딸이 아빠에게 매달리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고, 그러던 중 내던져진 딸은 돌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만다. 사건을 조사하러 경찰이 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놀다 넘어진 것이라고 둘러대며 오히려 복남이 돈을 훔쳐 달아나려 했다고 고발한다.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 본 해원도 자신은 그 시간에 자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경찰을 돌려보낸다. 무도에서는 법도 무용지물, 부정의로부터 복남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복남은 태양을 노려보다 복수의 ‘낫’을 든다.

방관도 죄다

무도에서 복남에 대한 폭력 및 모든 학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그것을 정당화하는 마을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엔 남자가 있어야 한다.”, “여자는 남자의 그늘에서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것이다.”, 등등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마을의 할머니들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마을의 유일한 남자인 만종 형제를 떠받들면서 복남을 억압?착취한다. 어떻게 보면, 마을에서 만종 형제는 일종의 신이요, 할머니들은 신을 모시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집단이고, 복남은 그 피해자인 것이다. 복남은 해원을 통해 그 억압구조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해원의 방관과 무시로 그것은 좌절되었다. 딸의 죽음은 복남에게 자신을 보호해 줄 사회적 장치 또한 없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딸이 죽은 후 여느 때처럼, 아니 여느 때보다 더 일을 많이 하던 복남이 감자를 캐던 손을 멈추고 한동안 태양을 노려보다가, “너무 참으면 병난다”고 태양이 그랬다면서 자신에게 “가해자”였던 마을 사람들에게 낫을 휘두르는 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남의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억압을 당해오던 한 사람이, 자신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달리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믿었던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심지어 어떤 사회적?법적 장치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즉 복남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과연 칼을 빼들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만일 해원이 복남의 말을 들어주었더라면, 만일 해원이 경찰에게 딸의 죽음에 대해 목격한 그대로 말해주었더라면, 복남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인 복남은 이제 해원을 쫓는다. 난 이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난 잘못한 것도 없고 그저 보고 있었을 뿐인데 왜 나까지 죽이려 하는 거냐고 원망하는 해원의 물음에 복남은 대답한다. “넌 너무 불친절해.”

넌 너무 불친절해.

무도에는 가해자인 마을 주민들이 있었고, 피해자인 복남이 있었다. 타지에서 온 해원은 그 구도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복남을 외면하는 순간 그녀 역시 가해자가 되었다. 어떤 부정의가 저질러지고 있을 때, 그것을 방관하는 것은 그 부정의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일조하는 것이다. 부정의를 방관하는 것, 그것은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만큼이나 나쁘다. 그 구도 속에 나는 없다고,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부정의의 피해는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부정의를 방관하는 순간, 나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다.

서울로 돌아온 해원은 경찰서를 찾아가 용의자를 지목한다. 영화 초반 폭행 치사 사건의 범인을 밝혀낼 수 있도록 증언을 해 준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 끼어드는 것도, 누군가가 내 삶에 끼어드는 것도 싫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삶에 끼어들고 연루되는 것은 싫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버섯처럼 툭 튀어나온 홀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의 삶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나와 상관없는 일,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도에서 살아남은 해원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

미용 성형, 외모지상주의? 자기 배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현대 사회에서 몸은 문화를 전달하는 하나의 매체로 활용된다. 먹는 것, 입는 것, 사회적 의사소통 장치로서의 제스처, 보디랭귀지를 표현하는 것 등의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신체 튜닝’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미용성형은 외모지상주의의 산물”이라는 여성주의 비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압구정동에 가본 일이 있는가? “성형은 압구정으로!”이라는 광고 문구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선 성형외과들은 이 시대 성형에 대한 우리의 행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슈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대세였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 모두는 성형은 자연성에 위배되는 인위성이고 비정상성이라고 그래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혹 성형을 하더라도 드러내놓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보톡스, 턱 깎는 수술, 눈 트임 수술, 코 높이기, 가슴 성형 등의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비만 치료, 피부 관리, 날씬한 몸, 다이어트, 거식증, 폭식증 등의 단어 역시도 익숙하며, 이들은 오히려 현대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개념인 것처럼 이해된다. 얼굴을, 몸을 고치는 데 얼마가 들었다는 이야기부터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더 고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흉이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내 애인이 성형을 한다면 혹은 하였다면, 내 기분이 어떠한가?”는 질문이 심심치 않게 T.V. 버라이어티 쇼에 등장하였지만, 이제 이런 질문들은 식상하다. 성형을 하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고,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로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몸은 이제 더 이상 주어진 대로 그저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을 이용하여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 흡입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여대생의 이야기, 쌍꺼풀 수술 이후 부작용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했다는 어느 여자 승무원의 이야기도 심각한 수준에서 논의되지 않고 그저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기 배려로서의 미용 성형

한 두 해 전, 몸짱 열풍을 일으킨 아줌마가 있었다. 주인공은 결혼 10년 차이며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삼십대 후반의 여성이다. 그 나이 대에 유지하기 어려운 신체적 조건인 162센티의 키에 50킬로그램의 몸무게, 게다가 탄탄한 근육을 지닌 몸매는 그 여성을 ‘봄날 아줌마’‘몸짱 아줌마’로 호칭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중년에도 20대의 몸매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로 지어졌다는 ‘봄날 아줌마’의 호칭은 한 때 전국을 강타한 화제의 이름으로 떠올랐다.

잘 관리된 몸짱 아줌마의 몸매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감탄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 사회에 몸매 관리 열풍을 일으키며 지방 흡입 수술, 유방 확대 수술 같은 몸매 관리 열풍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되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서 자기 관리를 잘한 주체적인 여성의 전형으로도 이해되었다. 젊음을 유지하거나 회복함으로써 단지 노화된 얼굴에 대한 거부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재기획하는 주체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처럼 얼굴 가꾸기, 외모 만들기 등이 하나의 트랜드가 되어 버린 지금, 성형을 단지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기 위한 욕망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미용 성형의 문제는 단지 외모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꽤나 설득력 있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의 사람들은 성형을 여성들이 자아와 맺는 관계성과 관련된 실천이라는 것에 입각한다. 미용 성형을 예뻐지기 위함으로만 이해하면서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실제로 성형을 하는 여성들의 삶과 몸의 서사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거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성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기쁨과 설레임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단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 몸을 혹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날 위해 무언가를 투자하는 것이며 나만을 위해 계획하고 돈을 쓰는 것이라는 주체적 의식이 담겨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미용 성형을 자기 주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용 성형을 하는 여성들이 구사해내는 다양한 서사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들은 몸을 자신이 배려해야 하는 일차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소비문화의 담론 안에서 성형을 통해서 자기를 사랑하며 주체적으로 인식할 줄 아는 여성들이며, 이들이야말로 당당한 자기 배려를 하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신체 변형 행위 자체를 무조건 혐오하던 전통적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미용 성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담론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속에서 성형을 하는 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을 이해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모습으로 재현하기 위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하는 하나의 새로운 긍정적인 담론 구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응의 몸짓인 미용성형

미용 성형이 그것을 선택하는 자아에게 자신감과 주체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고 보고 미용 성형을 선택하는 여성들의 구체적인 경험과 서사에 주목해보는 것은 미용 성형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통찰 지점을 준다. 하지만 이 같은 입장은 몸을 주체 스스로가 온전히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쟁적이다. 미용 성형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유와 수술 선택이 과연 전적으로 개인 내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미용성형이 진정한 주체성의 발현인지 등의 문제는 좀 더 꼼꼼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성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외모는 어디에서 오는가? 외모의 기준 역시도 스스로의 내면에서 산출되는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아무리 그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외부적 압력의 또 다른 방식일 뿐이며, 그것에 저항하거나 대항하는 몸짓이 아니다. 수잔 보르도는 미용 성형에 대한 자기 배려 담론이 여전히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외모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적한다. 사실 많은 여성들이 못생겼다고 간주되는 외모로부터 벗어나고 늙어서 도태되었다고 여겨지는 외모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외모를 성취함으로써 자신감, 자기 배려의 느낌 같은 것을 받으며 심리적 쾌락을 갖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미용 성형을 통해 얻게 된다는 허구적이고 불안정한 자기 주체성일 뿐이다.

잘 생긴 외모, 못생긴 외모의 구분은 누가 마련하는 것인가? 키가 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의식, 뚱뚱함과 날씬함의 상반된 가치, 이들은 누구의 권력과 연결되어 있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못생김, 작은 키, 뚱뚱함을 열등감으로 느끼는가? 왜 외모가 항상 우리의 자신감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어디로부터 부여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채로 아름다운 외모를 찾는 것을 자기를 위한 투자라고 간주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를 지닌다.

왜냐하면 성형 미용을 통해 획득된 외모는 일시적인 자신감일 수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여성을 몸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성별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는 가부장적 권력을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미용 성형을 선택하는 많은 여성들이 느끼는 자신감, 자기 배려라는 효과는 진정한 자기 사랑, 자기 배려가 아니라 가부장 사회가 부여하는 단일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향해 끝없이 질주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심리일 뿐은 아닌가? 또한 그것은 가부장제 의해 통제되는 억압적 쾌락이며 거짓 주체성일 뿐인 것은 아닌가?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

키스방, 성 서비스의 경계를 협상하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하이-테크 서비스/하이-터치 서비스

지구화와 함께 도시의 노동은 생산자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강남 테헤란로의 주요 건물들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법률, 금융, 광고, 컨설팅, 의료, 회계와 같은 서비스업의 간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생산자 서비스업에 초점을 맞추는 이러한 관점은 성별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는 서비스업의 또 다른 측면들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노인 돌보미, 베이비시터, 가사 도우미, 마사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상당수의 여성들은 성 서비스업이라는 고도의 신체적 접촉이 요구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맥다웰은 여성들의 서비스 노동이 갖는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해 하이-테크 서비스(high-tech service)와 하이-터치 서비스(high-touch service)개념을 구분하였다. 전자가 생산 서비스와 관련된 전문 기술, 지식 노동의 특징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육체적, 정서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소비자 서비스 노동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하이-터치 서비스는 오늘날 여성의 노동에서 여성의 몸 뿐 아니라 몸 위에 작용하고 있는 친밀 감정, 성적 판타지, 사회적 욕망까지도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하이-터치 서비스”의 부상과 함께 사람들은 육체적, 감정적, 성적 친밀성이 시장에서 거래될 수 없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국가나 자치 기구에 의해 주도되었던 사회복지 사업은 가사 혹은 돌봄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서비스 노동으로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마사지 업종의 출현은 긴밀한 신체적 혹은 성적 접촉을 전제로 하는 서비스가 시장에서 거래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의 접촉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성 서비스업 특히 직접적인 성기 접촉을 포함하는 매춘은 거래되어도 좋은 것인가? 키스방은 매춘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키스방과 성적 욕망의 경계 협상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필자는 최근 확대되고 있는 키스방 서비스에 주목하고자 한다. 키스방에 대한 분석은 성적 욕망이 경제, 법률, 도덕이 정해놓은 성 서비스의 경계를 어떻게 협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유흥가 및 대학가 주변 어디든 키스방 전단지가 난무한다. 잘 아시다시피 노래방이 노래를 할 수 있는 룸과 시설을 대여하는 업종이라면, 키스방은 주로 남성 고객이 젊은 여성 매니저와 제한된 성적 접촉 특히 키스를 즐길 수 있도록 주선하고 이를 위한 룸과 시설을 제공하는 업종이다.

우선 키스방의 등장은 사람들이 국가적 혹은 사회적 제도에 의해 규정된 성 서비스의 경계를 어떻게 피해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시행과 함께 한국의 법은 직접적인 성교 및 유사 성행위를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 노동이 불법적인 것임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그러나 성 서비스의 거래는 종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업주들은 법망을 피하면서 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는데 이중에 하나가 바로 키스방이다. 업주들은 법의 단속을 피해가기 위해서라도 직접적인 성교가 금지되어 있음을 고객에게 공식적으로 분명히 알리고 있다.

둘째로 키스방 서비스는 경제위기 이후 업주들과 구매자들이 성적 욕망의 실현방식을 어떻게 협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업주들은 키스방 확대가 저렴한 이용료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매춘이나 대딸방이 한 타임에 7-8만원, 안마시술소가 16-18만원임을 감안할 때 4만원하는 키스방은 저렴하다는 것이다.

셋째로 키스방의 확장은 남성 고객의 성적인 욕망이 반드시 성교라는 하드코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가벼운 신체 접촉, 연애감정 등 점차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터넷 포털 웹사이트 Daum의 “지식”코너에서 “왜 키스방을 선호하는가”를 묻는 한 네티즌의 질문에 닉네임 Amat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달고 있다. “남성 또는 여성의 욕구가 오르가즘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님말 그대로 해당업소를 찾으면 되지만, 사람마다 개개인의 취향은 모두 다릅니다. 성인물의 장르도, 새도-매저키즘(SM), 페티시, 갱배앵(Gang-Bang) 등 다양하죠.”

마지막으로 키스방의 등장은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여성들의 생활고 및 소비 욕망이 순결주의와 어떤 방식으로 타협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생활고로 인해 혹은 값비싼 소비재를 사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 여성들은 매춘과 달리 키스방 서비스가 남성의 성기를 만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 성관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순결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준다고 말한다. 한 인터뷰에서 매니저 박양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여자들 치고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키스로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규범의 잣대만을 들이댈 것인가?

그렇다면 성적 친밀성을 사고 파는 하이-터치 서비스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오랫동안 사회이론가들은 성 서비스뿐 아니라 친밀성 자체가 상품화되는 것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이들은 전통적 도덕의 관점에 따라 친밀성과 경제적 거래를 서로 대립적인 영역으로 구분하고 서로 다른 원리가 작동하는 두 영역이 상호 교차될 때 무질서, 혼란 그리고 도덕적 타락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경제 전문가들은 “가정”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면서 시장의 팽창이 친밀한 사적 관계를 냉혹하게 손상시켰다고 비판하였으며, 최근 비판이론가 레미 리프킨은 “‘초자본주의(hypercapitalism)’의 세계는 돈과 정보의 즉각적인 전달과 함께 본래의 인간적 관계를 위한 시장거래의 대용을 악화시키고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매춘을 비판하는 반-매춘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왜 특히 성 서비스가 상품화되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이유 역시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들은 여성들이 매춘과 같은 하이-터치 서비스에서 일방적인 쇼핑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친절함이나 우정과 같은 친밀성과 달리 성적인 친밀성의 거래는 특히 경제적, 문화적 권력을 갖지 못한 여성에게 강요되고 있으며 특히 매춘은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착취의 극단적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혼 중개업에서 룸살롱, 와인 바 혹은 키스방에 이르는 다양한 성적 거래들이 매춘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조건 하에서 특정 성 거래가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허용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성적 욕망의 거래가 어떻게 협상되어왔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이 관점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성교가 있든 없든 모든 성적 친밀성의 거래가 비난되고 불법화되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의 인터뷰에서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성기에 직접 자극을 주지 않는다는 법의 맹점을 이용해 윤락업소가 자극 아이템만 바꿔 늘어 가는 실정에서 돈을 내고 여성에게 육체적 향응을 받는 모든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계 협상의 방식과 전략들

그러나 문제는 성적 욕망이 혹은 현실적으로 협상되고 있다는 데 있다. 성 서비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성적 욕망의 경계가 어떻게 협상되는지, 키스방의 등장과 함께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젤라이저의 참신한 제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에 따르면 다양한 친밀성의 경계는 어떤 관계에서 어떤 매개물에 의해 무엇이 거래되는가에 따라 부단히 구분되고 협상되어왔다. 즉 사적 관계에서든 시장적 관계에서든 친밀성은 항상 거래의 논리와 함께 했지만 사람들은 관계, 매개, 거래의 매치에 따라 친밀성 관계의 다양한 종류를 구분하는 데 몰두해 왔으며 그 구분법에 따라 특정한 친밀성의 거래를 인정하거나 비난해 왔다.

예를 들어 미국의 법은 성 서비스가 결혼 관계 내에서 이루어질 때 혹은 혼외 관계라도 그것이 다이아몬드 반지와 같이 돈과는 다른 상징적 매개물을 통해 교환될 때는 허용하였다. 상업적 관계 역시 세부적으로 구분되었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향응(treating)”이란 노동계급의 여성이 애인 뿐 아니라 초면인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성적 행위에 대한 댓가로 재정적인 보조와 증여를 받는 것이었다. 젤라이저에 따르면 향응 역시 결혼 관계 밖에서 진행되는 친밀성의 거래형태이지만 사람들은 이들이 받는 대가가 돈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점에 주목했고 이를 통해 허용적인 향응과 불법적인 매춘을 구분했다고 한다.

키스방이 제기하는 협상의 문제는?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키스방은 상업적 관계에서 선물이 아닌 돈을 매개로 성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키스방은 성교가 아니라 키스와 같은 가벼운 육체적 접촉과 연애관계에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춘과 구분될 수 있다. 키스방의 서비스는 대딸방의 서비스와도 구분된다. 대딸방이 손을 통한 성기접촉을 제공한다면 키스방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유사 성행위도 금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키스방의 등장과 함께 협상되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은 매춘이나 대딸방과는 구분되는 키스방에서의 성서비스를 사회적으로 허용할 것인가이다.

물론 키스방의 협상 전략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키스방의 법적 허용을 반대하는 법조계, 언론계, 여성계의 담론은 키스방이 매춘이나 대딸방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키스방 서비스가 결국 성교와 다름없는 행위임을 강조하기 위해 키스방에서 성교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키스방을 매춘과 구분하고자 하는 업주들과 고객들은 키스방은 매춘과 다른 “건전한” 거래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협상 전략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이 문제에 대답하기보다는 키스방이 성 서비스의 경계를 협상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유교적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지구화가 교차하고 있는 도시공간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성적 친밀성 거래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이를 허용할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관습적 한계 내에서 친밀성의 거래방식, 매개물, 관계의 매칭을 새롭게 협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

모성 신화, 그 불편함에 대하여[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무한 경쟁 시대의 모성

왜 나는 요즘 여성주의(페미니즘)에 시큰둥하는가? 여성주의의 가치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패배주의에 빠졌기 때문에? 여성주의에 힘을 보탰던 진보의 목소리를 사그라지게 만든 지금의 상황 때문에? 미래를 짊어질 젊은 층이 스펙 쌓기에 여념 없고 정치적인 무관심을 넘어서서 아예 보수화되는 듯한 모습이 목도되기 때문에? 혹은 여성주의를 못난 여성들의 푸념거리로 치부해 버리는 냉소주의가 만연하기 때문에?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막연한 낙관주의적 열정이 시들어버린 지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무기력감이 여전한 즈음이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길고 더웠다. 가마솥 더위, 불볕 더위, 찜통 더위에 부엌에서 가스불을 켜고 매일 밥해 먹는 것은 무엇보다도 끔찍한 일이었다. 당장 부엌문을 닫아 집안 살림 다 팽개치고 북극이든 남극이든 줄행랑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예전에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집 제목인 『밥벌이의 지겨움』이 나에게는 정말 엄마 노릇하기, 주부 노릇하기의 지겨움으로 다가 왔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이 삼복 더위에 어땠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어머니상은 언제나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 자신을 지워가면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감수하는 엄마이다. 이러한 어머니상은 당당한 현대 여성의 모습이 주류인 이 시대에 박물관에나 전시되고 말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자립적으로 성장한 현대 여성들은 이러한 어머니와 다른 것일까? 희생의 대명사였던 전통적 어머니와 자식 교육에 올인하는 요즘의 현대 엄마들은 모성에서 과연 차이가 있을까? 무한 경쟁 시대, 자식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 현대의 엄마들은 더 지독한 모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 모성 이데올로기는 표나지 않은 채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막강한 모성 이데올로기는 미래를 바꿔 보려고 몸부림치는 여성주의자들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철옹성, 산성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무한 경쟁 시대, 내 자식만 잘되고 남의 자식은 어떻게 되더라고 상관없다는 막가파식의 모성 이데올로기가 나를 숨막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한 모성을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나는 주변에서 별로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강한 모성과 강한 엄마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살벌한 경쟁의 시대, 그리고 무능한 엄마를 질타하는 사회.

나는 왠지 엄마가 주인공이거나 제목인 것은 나도 모르게 외면해 버리고 마는 의식적, 무의식적 습성이 있다. 나도 모르게 ‘엄마’라는 상표로 포장된 많은 드라마, 소설, 영화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 왜일까? 이러한 것들이 모성 신화를 부추길 것이 뻔해서, 왠지 ‘엄마’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눈물샘에 자극되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에? 누구나 다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다 엄마가 있는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엄마는 영원한 소재가 되고 있다.

잃어버린 모성 신화를 찾아서

작년 2009년 인터넷에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이 은밀하게 독자들에게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소설의 경우, 출판사들이 앞다퉈 베스트셀러를 만들려고 요란한 광고를 해 대는 것과는 달리, 독자들 스스로가 자기 고백, 고해 성사 식으로 『엄마를 부탁해』를 읽은 소감을 인터넷에 토해 낸다는 것이다. 이런 입소문을 타고 조용히 『엄마를 부탁해』는 100만부를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기사가 영 마땅치가 않았다.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커녕, 이 소설에 열광하는 독자들의 미묘한 심리가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떤 마음의 뒤틀림이 있었다. 흥! ‘엄마’라는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상징이 우리의 정서를 어떻게 뒤흔들고 있는 것일까….. 하는 꽁한 마음이 있었다. 그 후로도 나는 그 책을 읽지 않고 계속 피해 다녔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 책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있었던 것일까? 왜 나 혼자서 그 책에 대한 일종의 마녀사냥(?)을 해대고 있었던 것일까?

예전에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은 기억이 있다. 문단에서는 신경숙 특유의 지독히도 섬세하고 내면을 긁는 문체를 놀라와 했다. 나는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는 그다지 감응을 얻지 못했는데, 우연히 손에 넣은 『외딴 방』을 읽고서는 신경숙의 또 다른 신선한 충격과 감동의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가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 방학 때 미뤄 놓았던 숙제를 해 내야 하는 의무감에서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드디어 손에 넣고 읽기 시작했다. 내가 산 책은 벌써 137쇄를 거듭하고 있었으니, 137만부 이상 팔려 나갔다는 소리가 된다.

이 책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한 줄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한다. 1인칭인나, 3인칭인 그, 그녀가 아니라, 2인칭 ‘너’가 등장함으로써 일단 독자의 호흡을 확 밀어 당긴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개월째다.”로 시작해,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로 막을 내린다. 소설 속에서 엄마는 아버지, 장남, 장녀 등 가족들의 무관심과 방치로 이미 실종된,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다만 가족들의 기억의 편린 속에서만 엄마는 아련하게 혹은 선명하게 떠올려질 뿐이었다.

우리의 현실에서 엄마는 언제나 당연히, 우리가 호출하면 금방 달려 와 줄 존재로 각인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엄마의 존재를 무시하고 망각한다. 엄마에 대한 이러한 미안함, 죄책감이 독자들을 다 한꺼번에 엄마의 실종 사건의 공범으로 만든다. 독자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엄마를 부탁해』를 한 번 손에 넣고 읽기 시작한 독자는 쉽게 책을 놓지 않는다. 이 독자들이 이 소설의 조용한 신드롬에 일조한 것이다.

이렇게 처연한 심정으로 이 소설을 읽었을 많은 다양한 독자들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좀 불편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엄마의 희생적이고 감동적인 모습보다는, 엄마를 희생양으로 삼아 만들어지는 ‘모성 신화’의 혐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하필 힘빠지는 이 시절에 ‘엄마를 부탁해!’ 일까 하는 짜증도 섞여 나왔다.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는 매우 강한 엄마이다. 현대의 젊은 유능한 엄마와 속성은 다르지만, 마치 가제트 형사처럼 부엌에서 뚝딱 어떠한 것도 만들어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 다만 가끔 끝없이 이어지는 농사일과 부엌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항아리 뚜껑들을 신나게 깨서 풀고, 헛돈 들여 다시 사는 일을 되풀이하기도 한다. 슬쩍 웃음이 나오는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소설을 읽은 후, 나는 『엄마를 부탁해』의 신드롬 현상을 조망하는 몇몇 평론들을 읽어 보았다. 이 소설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다소 엇갈렸다. 대체로 남성 평론가들은 이 소설 속의 감동어린 엄마의 모습을 그린 작가의 노고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반면에 여성 평론가들은 조금은 인색하게 엄마의 감동을 담거나, 엄마 바이러스, 엄마라는 유령, 엄마에 대한 비판적 읽기 등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서 모성의 의미를 재평가하였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서 이 책을 읽고 올린 독자들의 댓글을 대강 주욱 훑어 보았다. 이 소설의 그 엄청난 독자들의 반응을 일일이 다 점검할 수는 없었지만, 전반적인 기조는 알 듯도 했다. 이 책의 독자들은 누구인가? 그야말로 다양한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중년층 독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도 했다. 장남, 장녀인 중년층은 유년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눈물을 훌쩍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마도 장남 콤플렉스, 장녀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들이 불러낸 엄마 바이러스가 전염이 되어 엄마의 유령이 출몰하고 실종된 엄마를 애도하면서 자신 속 깊이 엄마에 대한 죄의식을 씻어 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모계 사회로의 회귀인가?

한국 사회 현대 여성의 모성성은 전통적인 어머니상과 결별했는가? 혹시 현대판 새로운 모성 신화가 창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우리는 엄마라는 유령을 신격화해서 모성 신화를 쓰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고달프고 힘든 삶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엄마를 희생양으로 삼는 교묘한 공범자들은 아닌가? 엄마라는 영원한 고향을 아우라로 만들어 엄마를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권이 무너진 사회 속에서 여전히 우리들은 누군가 의지하고픈 도피처를 찾는 것일까? 아버지 없는 사회에서 이제 대신 어머니를 내세우고 있는가? 그러나 이 방법은 좀 비겁한 것은 아닐까? 전통적인 어머니를 불러내, 그 어머니를 희생양으로 세우고 그 희생양 속에 죄의식을 떨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엄마를 부탁해』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피에타상의 성모마리아에 비유되는 어머니. 짐짓 모성 신화의 냄새가 나지 않은가. 불편하다. 성모마리아의 온화함 속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권위의 상징인 대타자를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이 피곤한 시대에 영원한 안식처로 인식되는 어머니 품! 고단한 일상 때문에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본능 회귀가 있는가?

왜 『엄마를 부탁해』에 많은 독자들이 빠져 드는가? 권위적인 아버지가 사라진 시대, 사람들은 뭔가 허전해 하는 것일까? 우리는 피에타상에 각인되어 있는 성모마리아, 희생의 화신인 어머니를 다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신드롬 현상에 심드렁하다. 새로운 모계 사회로 가고픈 대중들의 열망을 슬쩍 엿보았기 때문일까?

여성주의자들은 미래 어떤 사회를 희망하는가? 대중은 어떤 사회를 희망하는가? 여성주의자들은 가부장제가 하루바삐 멸망하기를 희망한다. 대중의 바람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고단함과 불안함을 보듬어 줄 새로운 권위인 대타자를 희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열망이 새로운 모계 사회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모계 사회로의 회귀! 여성주의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달갑지 않다.

시중에 여성주의자들은 모계사회로의 회귀를 반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듯하다. 이것은 전혀 오도된 일임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 드센 여성들의 이미지를 한껏 받고 있는 여성주의자들이 부권을 패스받아 새로운 강권한 모권 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고 생각한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나도 뜯어 말리고 싶다. 어떤 신화도 만들어내지 않는 사회, 어떤 우상도 내세우지 않는 사회, 이러한 사회가 진짜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아닐까?

여성주의에 시큰둥한 요즘, 그래도 나는 모계 사회로의 회귀를 꿈꾸지는 않는다.

연효숙(연세대) / adin@admin.com

‘OO녀’에 대한 ‘꼴페’의 단상[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요즘 여자애들 왜 이래?

전국민의 일촌화에 힘쓰는 모 사이트 뉴스 페이지에 가면 하루가 멀다 하고 남녀가 편을 갈라 싸운다. 남성들은 요즘 여성들이 자기들 편의에 따라 남녀평등을 부르짖었다가도 남성들에게 남성다움을 요구하는 이중인격자 된장녀 혹은 꼴페(꼴통 페미니스트의 줄임말)라고 비난하고, 여성들은 자신들이 직장생활 가사노동 육아까지 도맡아 하느라 괴로운데 남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비난한다.

만약 그 기사가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를 다룬 것이라면, 그 내용에 상관없이 댓글의 단골 메뉴는 군가산점제와 출산, 가사 분담, 명품과 된장녀 등이다.

이 싸움에 적극적인 건 남성 쪽인데, 남성들은 온갖 성폭력적 언어와 욕설까지 섞어가며 여성들을 이기적이고 개념 없고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최근에는 ‘OO녀’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젊은 여성에 대한 비난이 보다 강화되고 가시화되는 듯하다. 비난을 당하던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은 이제 특정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그 존재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된장녀, 루저녀, 군삼녀, 개똥녀, 발길질녀에 월드컵 열기를 타고 응원녀까지 도덕적 비난을 받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인터넷 뉴스와 게시판을 장식하고 있다. 기본적인 상식이나 예의를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인 피해를 주거나 (특히 남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젊은 여성들에 대해 사람들은 “요즘 여자애들 왜 이래?”라고 묻는다.

왜 젊은 (특히 비혼의) 여성들이 비난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단순히 여자들이 잘못을 더 많이 저지르기 때문일까? 혹시 이 현상의 이면에 다른 맥락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행위를 한 여성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성이라고 그만한 ‘나쁜 짓’을 안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응당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요즘 여자들한테 왜 이래?”

‘OO녀’ 비난: 성별화된 윤리

어떤 행위의 당사자가 남성일 경우에는 대체로 그 ‘악’의 수위가 높아서 법적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OO남’이라는 별명을 붙여 사회 구성원들이 도덕적 비난을 가할 필요성이 낮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잔혹한 살인사건의 가해자나 조직폭력 가담자들은 거의 남성이며,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가해자도 대부분 남성이다. 전 국민을 상대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정치인과 자본가도 대부분 남성이다.

이들 역시 강도 높은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법을 통해서 처벌을 할 수 있고 시민들이 나서기 전에 국가와 언론이 공론화를 하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들의 도덕적 비난이 처벌을 대신할 필요가 없게 된다.

실제로 문제가 되었던 OO녀들은 대부분 법적 처벌이 곤란한 행위를 했지만, 공공질서를 해하거나 우리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관습 또는 가치를 따르지 않은 경우이다. 개똥녀나 패륜녀가 그랬다.(*개똥녀 사건 당시인 2005년에는 처벌 근거가 없었다. 이제는 동물보호법에 따라 동물의 배설물을 치우는 것이 의무화되어 이를 어길 시 벌금을 물게 된다.)

하지만 발길질녀나 고양이 학대녀는 상황이 다르다. 남성이 벌건 대낮에 길거리에서 여성을 때리거나 임신한 여성에게 심각한 폭력을 휘둘러 유산에 이르게 한 사건들은 적지 않지만, ‘발길질녀’ 사건처럼 공론화되지도 않았고 사람들은 그 가해 남성에게 따로 별명을 붙여주지도 않았다. 또 많은 남성들이 고양이나 개와 같은 동물들을 심각하게 학대하고 죽이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지만, ‘고양이 학대남’이라는 말이 떠돌았던 적은 없었다.

법적 처벌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동일한 유형의 행위에 대해서 그 행위 주체의 성별에 따라 비난과 낙인찍기는 그 방식과 강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OO녀’ 현상을 법적 처벌이 불가능한 일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통해 처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어떤 행위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과 그 판단에 따른 비난의 방식이 이처럼 성별화되어 있다고 한다면, 필자가 당장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OO녀 현상을 여성의 변화와 이에 대한 남성들/남성적 사회의 반응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위 순종적이어서 그동안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젊은) 여성들의 비도덕적 행위가 상대적으로 큰 충격을 준다고 보는 것이다.

남자들의 비도덕적 행위는 워낙 빈번해서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지만, 남성에 비해 공공질서를 잘 지켜왔고 또 폭력과 관련해서는 주로 피해자였던 여성들이 규칙을 어기고 가해자가 되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여성이 가하는 ‘폭력’의 피해자가 남성일 경우, 남성들은 거의 공황에 빠지고 적극적이고 거칠게, 그리고 발 빠르게 이에 대응한다. 된장녀와 루저녀에 대한 비난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제 된장녀라는 말은 행위 당사자뿐 아니라 그와 비슷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여성들을 싸잡아 이르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된장녀와 루저녀는 OO녀의 유형 중 남녀 간의 대립적인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들인데, 이들의 죄목은 간단히 말해 ‘남성감정상해죄’이다.

이들의 ‘잘못’은 사실 불분명한데, 왜냐하면 방송에서 표현한 자신들의 생각이 불특정 다수의 남성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뿐,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거나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된장녀는 돈 많은 남자를 노골적으로 밝힌 죄, 루저녀는 남성의 외모를 능력과 결부시켜 평가한 죄 때문에 비난을 당했다.

페미니스트로서 이 여성들의 사고방식에 결코 동의할 수도 없고 남성들이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는 것은 이해할만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남성들의 반응은 사실 좀 호들갑스럽다. 텔레비전에서 남성들이 여성의 몸을 쇠고기 돼지고기처럼 부위별로 평가하고 여자는 예쁜 게 곧 착한 거라고 말하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예쁘기만 하면 왕자님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어리고 젊은 여성들을 거울 앞에 묶어두는 것은 가부장제이고, 그 거울에 비친 여성의 모습이 바로 된장녀 아닌가? 전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매일 겪어내는 일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도 되지 않는 말 몇 마디에 남성들은 상처를 받고 화가 나고 인격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보여주는 분노의 가장 큰 이유는 외모와 능력 면에서 이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그렇듯이) 특정한 젠더 역할과 이상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들의 분노가 정당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각종 OO녀들에 대한 비난의 이유가 아니라, 그런 현상이 최근 몇 년 간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사회문화적 혹은 심리적 맥락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여성/ 여성적인 것의 배제와 편집증적 남성 주체

OO녀 비난 현상은 단순히 여성들이 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거나 여성들의 비도덕적 행위가 사회 구성원들의 비난 말고는 달리 처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여성의 ‘타자화’와 관련된다.

여성의 타자화는 이중적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사회와 문화는 여성을 배제한 채로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되며, 나아가 이 가부장제 질서는 여성/여성적인 것이 남성/남성적인 것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자를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이 질서에서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여성으로서 존재해야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차이가 아니다. 이는 남성이 가진 것을 갖지 못했다는 의미이거나 또는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의 차이이다.

OO녀 현상은 최근의 일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들은 남성과 유사한 행위를 하고서도 늘 더 비난받고 낙인찍히며 나아가 특별한 이름을 부여받아왔다. 성을 판매하는 여성들은 타락한 ‘윤락녀’로 불려왔지만, 남성인 성구매자들에게는 어떤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다. 또 다른 양상도 있다. 똑같이 록밴드를 좋아해도 남자애들이 좋아하면 마니아, 여자애들이 좋아하면 그루피라고 한다. 스포츠 신문이나 자동차 관련 잡지들을 사서 읽는 남자들은 패션잡지를 읽는 여자들만큼 할 일 없고 생각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남자들이 술판을 벌여놓고 나라걱정을 하면 그저 뉴스에서 귀동냥 한 걸 그대로 읊어도 토론이지만, 여자들이 커피를 마시며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누고 덜어낼 때 그것은 쓸데없는 수다가 된다.

여성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문화적 현상들과 여성들의 욕망은 저급한 것으로 여겨져 온 것이다. 그것이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젠더 정체성으로부터 길러진 것이든 아니면 진정한 여성 고유의 것이든 또는 그 둘 사이에서 개별 여성들이 겪게 되는 갈등과 협상과정으로부터 선택된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여성들을 낙인찍거나 가치절하하는 것은 남성중심의 문화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최근에 좀 달라진 점이라면 소위 요즘 여성들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젊은 여성들은 더 이상 순종적이고 조신하고 착하지 않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했거나 독립하기를 원하며 자신의 성적 욕망을 표현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느라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만 하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달라진 여성들의 모습을 페미니스트 주체라고 일반화할 수도 없거니와 앞에서 본 OO녀들은 오히려 남성중심 문화의 폐해를 무의식적으로 모방한 경우라고 말 하는 게 오히려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라도 우리는 여성들이 ‘히스테리’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주장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였을 때 히스테리가 여성의 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자유롭게 말 할 수 없는 여성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히스테리아의 위치에 있었다. OO녀들의 욕망이 비록 ‘진정한’ 자기 욕망, 혹은 여성적 주체의 욕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들이 발화를 한다는 것은 분명 작은 변화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남성들은 이런 변화의 속도만큼 빠르게 변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변화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그동안 감춰져 있던 징후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편집증이다. 사실 편집증에 걸리는 것이 주로 남성이라는 점은 그렇게 유명하진 않다. 편집증은 과도한 나르시시즘의 극단적인 경우의 하나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망상을 갖는 증상을 보인다. OO녀 현상에서 어쩌면 남성들의 편집증적 징후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성들의 변화에 남성들은 과도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나르시시즘적인 남성 주체가 자기를 중심으로 구성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점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이 그 문화 자체를 위태롭게 할 때, 남성 주체는 그 주체의 자리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느낌으로써 엄청난 피해의식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그저 망상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대개의 남성들이 편집증적 징후를 보일 뿐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성들의 항의가 단지 몇몇 여성들에 대한 맹비난에서 그치지 않고, 남녀 모두에게 압박을 주는 젠더 정체성의 가부장적 규정들을 바꿔내자는 주장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것은 역시 너무 큰 바람인 것일까?

황주영(서울시립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