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2)[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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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산속 움막으로 쫓겨 가다.
몸이 아프거나 외로울 때는 어머니가 끓여주던 미역국이 먹고 싶다. 싱싱한 생선과 생미역을 넣고 끓인 뜨거운 국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면서 힘이 솟았다. 어머니는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면서 안쓰러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미역국에서는 언제나 어머니의 냄새가 났다.
행복한 일상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에게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어머니이다. 할머니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시냐는 질문을 자주 했다. 그 질문 뒤에는 “김선생도 아(아이)가 있제?”라는 또 다른 질문이 꼭 이어 나왔다.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얼굴도 알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수많은 마음 속 옹이 중의 하나였다.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소문은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갔고, 가끔씩 호기심으로 소문의 진위를 탐색하기 위해 오던 이웃들의 발길도 끊겼다. 할머니와 어머니 둘이서 살던 집은 세상 속의 섬이었다. 두 사람은 말을 잃어갔고, 하루 종일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음이 기정사실화 되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살고 있던 집을 강제로 빼앗기다시피 팔고, 동네 뒷산 기슭에 있는 허물어져가는 움막 같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은 밤이 되면 더 무섭고 추웠다. 짐승의 울음소리도 무서웠지만, 누군가 와서 해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깊이 잠들 수도 없었다.
19살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초여름이었지만 부둥켜 안고 잠을 잤다. 산속 움막은 계절과 관계없이 밤만 되면 서늘한 바람이 여기저기서 들어왔고, 혹시 잠이 깊이 들었을 때, 누군가 와서 딸을 해칠까봐 어머니는 깊은 잠을 자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과 태어날 아이에 대한 불안감에서 할머니는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냈다.
움막 주위 어디에도 물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왔지만, 한센병에 걸린 할머니가 물가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씻을 물도 마실 물도 움막 가까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산속에 흐르는 물줄기 가까이에 갈까봐 멀리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이 많은 시간을 피해서 새벽이나 저녁 무렵에만 우물로 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용케 알고 쫓아와 두레박을 뺏고 물통을 발로 차며 우물가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옷고름이 찢어진 채로 빈 물통을 들고 와 통곡하는 날이 많았다.
이래도 부모는 병든 자식이
그렇게도 좋을까
우물에 물을 뜨러 가시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레박을 빼앗기며
양철통을 발로 차이고
온갖 학대와 멸시와 천대를 받고
돌아오면 모녀간에 부둥켜안고 울어
눈도 붓고 얼굴도 부었네.
<내 인생길> 부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다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숨결이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벌레도 풀의 이슬을 먹고 사는데, 나는 사람이다 하고 소리 질렀다. 나는 벌레도 아인기라.”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할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떨어져 내리더니 코끝에 걸쳐 있는 안경알에 고였다.
할머니는 스스로를 사람도 아니고 벌레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이라고 했다.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살 수 없는 한센인은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한하운, <나>)”과 같은 존재였다. “다만, 억겁을 두고 나누고 또 나누어도 많이 남을 벌(<나>)”받은 존재인 것이다.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한하운, <삶>)”라는 처절한 싶은 현실뿐이었다.
한센병에 걸린 자신으로 인하여 어머니가 겪는 고통은 할머니에게 자신의 병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벌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들판으로(<내 인생길>)” 내달려도 마음의 고통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돌에 채이고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는 한센병의 진행을 도왔다. 병은 몸을 조금씩 잠식해왔지만, 뱃속의 아이 때문에 시중에 떠도는 약은 아무 거나 먹을 수 없었다. 한센병에 좋다고 인정된 약은 너무 비싸 사 먹을 수 없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절망이라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왔다. “차라리 이 땅위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내 인생길>)” 자신으로 인해 곤궁한 삶을 사는 어머니를 보면서 할머니의 마음은 병들어 갔다. “배는 불러오제, 끼니거리도 구하기 힘들제, 우리 어무이는 온 산을 헤매고 다니며 산나물이고 열매고 갖고 와서 나 먹이기 바쁜기라.” 할머니의 숨결이 다시 가빠졌다. 눈시울은 붉게 물들고 맞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살아 있는데, 죽은 사람처럼 먹지도 마시지도 씻지도 못하고, 사람 가까이에 갈 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은 사는 것일까? 죽는 것일까?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현재 살아 있지만,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지난날을 말로 다 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눈물과 떨림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6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차라리 자기가 없었더라면, 어머니는 가족이 함께 살던 큰 집에서 넉넉한 생활을 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임신만 하지 않았더라도 어머니 곁을 떠났을 것이고, 그러면 어머니가 좀더 편안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회한도 컸다.
느삼태 찾아 이산 저산 헤매던 어머니
무더운 8월 여름에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조금씩 나오던 젖도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아이는 언제나 배를 곯았다. 어쩌다 살갑게 지냈던 사람들이 아이 낳은 것을 알고 살짝 갖다 놓고 가는 양식이 유일한 끼니거리가 되는 날이 이어졌다. 산 아래 사람이 사는 세상은 해방이 되었다고 기쁨이 넘쳤지만, 산기슭 움막에는 적막만 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옷을 못 입혔제. 지도 산 목숨이라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는데, 젖이 안 나오는 기라.” 할머니는 이야기를 멈추고 긴 한숨을 쉬었다. “에미는 나병에 걸렸는데, 아는 괜찮더라. 참 우습제.” 많은 사람들이 전염될까봐 외면했는데, 정작 한몸으로 있었던 아이는 건강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찾아오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일본으로 급히 돌아갔다는 사실도 어렵게 찾아 온 친구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일본으로 가기 전에 할머니를 찾았노라고 친구는 전해주었다.
어쩌면 아이를 낳은 사실도 영원히 모를 것이라고 할머니는 짐작했다. 실제로 마쓰시타가 아이의 존재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할머니는 자신과 아이가 마쓰시타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자 병은 무서운 기세로 할머니를 덮쳤다.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산모와 제대로 울지도 않는 갓난 아기를 두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산을 헤매고 다녔다. 한센병에 좋다는 느삼태를 구하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렸다. “허리에는 노끈을 드리우고 약초 망태기는 어깨에 메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산 저산으로 헤매며(<어머니>)” 다녔다.
어머니는 오로지 느삼태를 구하기 위하여 어떤 날은 “엎어지고 넘어져” “머리 깨어 피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까치 밭길에 천 갈래 만 갈래 찢긴 옷”을 “바람에 휘날리”며 돌아오기도 했다. 느삼태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내 한이야 내 한이야”하며 통곡했다. 어머니의 통곡 소리는 지금도 할머니의 귓가를 맴돌고 있다.
사모곡과 할머니의 두통
어머니가 당했던 고통의 근원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는 “머리털 하나하나 뽑아서 어머니 신틀메를 삼아도, 뼈를 깎아 어머니 공덕탑을 세워도” 불효를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겼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6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할머니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가 한 편의 시로 재현되었다.
이 불효 여식
벌레만도 못한 인생
이것 무엇 보시고
당신께서는 그 높은 사랑
사랑으로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십니까.
팔십 평생 살며
어머니 앞에
딸자식 자랑거리가 못되어
많은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받아가며
어머니 앞에 황송할 뿐인
이것이 내 인생길입니다.
어머니
끝끝내 당신은
나를 두고 눈물로
황승길 가셨나요.
아,
어머니.
<어머니> 부분.
시 <어머니>를 읊고 나자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이마에 열기가 있었다. 놀라서 화장대 서랍을 열고 약을 찾았다. 서랍 안은 몇 권의 공책과 전화번호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수많은 약봉지 속에서 두통약과 해열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약을 찾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돌아앉은 채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할머니의 말을 듣기만 했다.
“내가 오늘날까지 이거, 묵어 있던 거 몸 밖에 꺼내어 뭐할 낀고 싶다.”
“우리 어무이는 참 고왔다. 아버지가 좀 일찍 돌아가시고 해도, 남긴 것도 있고 논도 있고 먹고 사는 데에 넉넉했다.”
“봐라, 김선생. 약 안 먹어도 된다. 옛날 생각해서 머리 아프다.”
“어제 밤에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더라. 마이(많이) 나서 마이 울었다. 그래 머리 아프다.”
할머니 옆에 가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웃는 것뿐이었다. 할머니를 만나면 시를 읊기 전까지는 내가 많은 말을 하지만, 할머니가 시를 들려주고 그것을 받아쓰기 시작하면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받아쓰는 내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할머니의 두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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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전호근 작 <벽>(2007)입니다.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