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윤지영 [9월 월례발표회]

?[2012년 9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d?construction du phallogocentrisme)
발표자:?윤지영(서울시립대) 회원

 

놀리면 상처받는다

후기: 한길석( 한철연 교육부장)

 

 

지난 9월 21일 (금) 5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에서는 윤지영 (서울 시립대) 선생의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d?construction du phallogocentrisme)”라는 논문을 가지고 월례발표회를 진행했다. 참석자는 7명이었는데 행사 관계자와 비관계자의 비율은 대략 50대 50이었다. 남녀 성비로 따지면 2대 5로 여성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따라서 머릿수를 기준으로 볼 때 논전은 이미 남성팀의 필패. 갑자기 가족오락관의 공정한 성비가 부러워지는 상황이다.

윤지영 선생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온지 얼마 안 된 분으로 고국에서 자신의 박사논문에 담은 생각을 학문 동지들과 나눌 수 없는 답답증에 시달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자리가 한철연 월례 발표회인데, 월례 발표회는 원래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 지 오래라 더 답답해지지나 않았으려나? 이번 자리는 참석율을 높이려고 발표문을 미리 공개했으나 회원들은 여전히 공사다망한 관계로다가 대표 선수들만 입장하게 됐다. 순전히 주관적인 분석이지만 아무래도 제목이 너무 ‘쎄서’ 남성들의 기운이 승한 한철연에서는 초큼 거북살스러웠으려나? 무섭기두 하구. 평자 또한 제목에서부터 야코 죽고 들어갔다.

ⓒ박영미

이 발표문은 기존 철학자들의 생각을 충실히 읽어내고 해석하는 ‘독후감’류의 논문 형식에서 벗어나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언어로 서양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한국 학계의 경직된 도제식 학문 태도에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발표문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자. 윤지영 선생의 글은 서구 전통 철학의 사유 방식에 대한 비판과 개조를 촉구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춤추는 사유”를 제안한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의 주류 전통 철학은 동일성 사유 방식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것을 이분법적 위계 관계로 분류함으로써 전개되었다. 이 글은 주류 철학의 이분법적 위계 관계가 “새로운 개념화” 전략에 의해 비판적으로 구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발표자는 “인식론적 백색화 작업(blanchitude ?pist?mique), 발기성 로고스(logos erectile), 전 방위적 시점의 무와 빈칸으로서의 팔루스 ( phallus comme vide en surplomb), 전율하는 공허와 무로서의 언어 양식(langage comme vide vibrant), 사건성으로서의 의미화 작업(sens-?v?nement), 유희하는 몸(corps-joueur),얼굴 형상의 탈구(d?visag?isation),주체의 유동화 (fluctuation subjectivante), 이멘Hymen 경제학의 해체 (d?shym?nisation), 하이브리드성(hybridit?)이란 개념 창출 작업” 등으로 나열하면서 글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용어들은 거의 윤지영 선생 본인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발표자는 서구 철학적 인식 주체가 자랑하는 특유의 객관성 및 보편성이 사실은 “몸으로 상징되는 정념, 충동, 리비도, 정동 에너지들을 지우고 은폐하는 행위”로서의 백색화 작업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백색의 이면에는 다양한 색깔의 질적 속성들이 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면적 현실을 폭로함으로써 서구 중심적 인식틀을 깨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발표자는 전망한다.

또한 발표자는 전통 철학에서 강조하는 로고스가 유동적 사유를 제한한다고 비판한다. 유연성이 결여된 사유는 자신의 관점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로고스의 폭력성을 “발기성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발표자는 발기성 로고스의 기운이 여성적인 것과의 비판적 대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 여성적인 것은 “여성의 본질성과 실체성을 상정하는 토대주의적 관점에서 발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기성 로고스와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일 듯하다.

서구 철학은 자기의 질적 특색을 지우는 백색화 작업을 통해 시점의 내용성을 비움으로써 모든 시점을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내용 없는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시점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방위적 시점의 무(vide en surplomb)”의 시점은 “타자를 일방적으로 포섭, 축소, 환원하고자” 한다. 발표자는 이 폭력성으로부터의 구제가 “전율하는 무로서의 언어”를 창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남근 중심적 언어가 질서를 부여하고 판별, 분류하는 판관으로서의 언어였다면, 새로운 언어 형식은 의미의 실험성을 재시도하는 놀이의 장이다.” 구제는 끊임없이 전개되는 비판적 언어 놀이 과정에서 그때그때마다 경험되는 순간이다.

ⓒ박영미

논평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이 글은 동일성 논리에 기초하고 있는 위계적 사유의 폭력이 서구 철학의 전통을 지배하고 있음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서구 철학 전통에 대한 비판적 독해의 얼개만을 간략하게 나열했다는 데에 있다. 차라리 발표자가 제시한 여러 가지 구제적 개념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해서 논의를 전개했다면 좀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았는가 싶다. 예를 들어 인식론적 백색화의 맨얼굴을 계보학적 작업을 통해 폭로한다든가, 남근적 사유가 생활세계의 근저에 어떻게 정착되고 내밀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등의 논의 말이다. 물론 이 글이 완성된 단편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장편 저술을 위해 아이디어를 정리한 것이라면 평자의 이러한 염려는 괜한 잔소리일 뿐이겠다.

또 하나 해묵은 의문을 들어보겠다. ‘인식이 과연 실천을 담보해주는가’라는 것이다. 분명히 아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지만, 문득 큰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 이른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실천적 개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전통적 사유에 대항해 비판적 인식의 유희를 펼치는 것은 사유의 타성을 교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과 해체의 유희는 유희로 끝나버릴 수 있다. 해체놀이의 현장에서는 법열에 전율할 수는 있지만, 놀이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이 깨달음의 기쁨을 지속시키기란 쉽지 않다. 해체적 사유의 유희라는 인식론적 전략은 개인에게는 상당한 혁명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개인적 앎의 혁명을 이웃과 함께하고 사회로 외화시키는 것은 유희적 사유로서의 인식 전략만으로는 힘에 부쳐 보인다. “주류적 인식 틀이 가진 한계를 날카로이 드러내며 이에 저항하는 정치적 인식론”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인식의 정치’를 전개하는 우리는 언제나 ‘인식의 정치’ 너머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이 글이 박사논문을 축약한 것이어서 발표문 자체에는 정밀한 논의 보다는 문제 의식과 기본 입장을 전개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적 상황에서의 ‘인식론적 백색화 작업’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가 진행된다면 좋겠다는 제안에 대해 발표자는 긍정적으로 반응해줬다. 말놀이적 해체작업은 인식론적 작업에 기운 것은 아닌가라는 논평자의 비판에 대해 발표자는 말놀이적 해체작업 자체가 이미 실천적 행위이기 때문에 인식론적 작업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는 입장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논평자는 여전히 이런 입장의 실효성을 미심쩍어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합리적 담론 형식이 지니고 있는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 말놀이적 해체작업으로 대항하는 것은 토론합리주의에 대한 메타비판으로서 상당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체 놀이가 기대하는 정치적 효과는 말놀이적 해체 작업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산출될 수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뭥미’라든가 ‘잘났네, 그래서 어쩌라고?’ 식의 어리둥절 반 비아냥 반의 반응을 야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앞보다는 뒤의 반응이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해악을 가져올 수 있다. 말놀이의 골계가 내적 성찰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비웃음으로 경험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는 것이다. 말놀이라는 해체적 작업이 인식적 차원에서의 남근은 해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의지적 차원의 남근은 비합리적이게도 더욱 곤두서게 만들 수도 있다. 너무 지나친 비관주의가 아니냐고? 하지만 남근중심주의는 단지 생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결코 비관주의라고만 볼 수는 없다. 남근성은 인간의 정신 속에 오래도록 자리하여 사회 제도, 개인의 습벽으로 굳어졌다. 나쁜 습관은 안다고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 새로운 인식과 그에 걸맞는 대안적 행위의 지속적 실천이 뒤따라야 고쳐질까 말까하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사회와 개인의 무의식 속에 속속들이 깃든 저 남근성의 업장이 의식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말놀이로 과연 씻어질까? 정리하자면, 말놀이적 해체 작업이 신선하기는 해도 그것을 전가의 보도로 삼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논평자의 바램이다. 오늘의 교훈, 놀리면 상처받는다.

 

 

안산의 헤겔; 이방인과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한철연 교육강좌]-③

[한철연 교육강좌]-③

3강 안산의 헤겔; 이방인과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

강사: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후기: 한길석(한철연 교육분과장)

 

한철연 교육부 강좌가 어느덧 세 번째에 접어들었다. 이번 강좌는 ‘안산의 헤겔; 이방인과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졌다. 강의에는 열 여섯 명 남짓의 수강생들이 참여하였다.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강좌를 맡은 이정은 교수는 한국 사회가 문화적 소수자와 다수자 간의 문화 충돌이 일어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남북 분단에서 비롯된 새터민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대부분의 새터민은 이념에 대한 반발보다는 생계를 이유로 이주를 감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녀왔던 정체성(이념, 가치관, 생활양식 등)이 폄훼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서구에서 다문화주의는 근대 국민(민족)국가가 등장한 이후 발생한다. 새로 재편된 근대국가의 틀 속에서 새로운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일 언어에 의한 국민 교육이 요구됐다. 획일적 국민 교육은 사회통합에는 기여했지만, 소수 집단의 문화가 훼손되는 현상을 낳았다. 결국 다문화주의는 소수 문화의 존중이라는 문제 의식에서 형성된 것이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논의는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이민국가들에서 활발하다. 이들 국가에서는 다양한 문화 집단의 정체성을 권리 보호의 문제로 변환시켰다.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에 기초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은 각 집단에 고유한 문화적 선택권을 보호해주는 제도적 여건을 제공한다는 이점을 지닌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지배권을 쥐고 있는 다수 집단이 소수자 문화를 관용적으로 포용함으로써 마침내 동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또한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의도하지 않게 소수자들의 처지를 불리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수 문화자가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되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다수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 때문에 최근 서유럽에서는 상호문화주의적 입장이 등장하고 있다.

상호문화주의는 1990년대 초 독일 및 오스트리아 등의 서유럽 선진국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견해이다. 이들 국가는 이민국가가 아니라 단일 민족국가적 특성을 강조하면서 이민자 정착에 대한 제도적 조치를 회피해왔던 다문화주의 정책의 후진국이었다. 그렇지만 이민자 2세, 3세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들 국가에서도 다문화주의적 정책이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 등의 연구자들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보다는 상호문화주의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상호문화주의는 각 집단이 보유한 문화의 동등한 위치를 강조한다. 이 입장에는 주도 문화 및 중심 문화라는 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도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동화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상호문화주의도 문화 집단 간의 통일을 지향한다. 하지만 이 통일은 각 문화 집단의 고유성을 인정하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문화적 통일은 문화 집단 간의 긴장과 갈등을 함축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상호문화주의가 지향하는 문화적 통일은 헤겔의 변증법적 통일의 형식을 활용하고 있다. 물론 헤겔 철학 내부에는, 특히 그의 역사철학에는 오리엔탈리즘의 흔적이 강하다. 하지만 헤겔 철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사고 형식이 문화적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강렬한 영감을 제공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헤겔은 자기 이해는 타자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이러한 발상은 상호문화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각 문화 집단은 이방인을 통해 자신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이방의 문화와 자기 문화 간의 갈등적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은 면에서 볼 때 헤겔의 철학은 오늘날 제기되는 문화적 다원주의 문제의 해결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해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3강 후기

안산에 헤겔이 없었습니다. 헤겔에 대한 좀 더 깊은 철학적 강의였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헤겔 이론과 외국인 노동자 간의 관계가 조금 끼워맞춘 듯해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설명해 주시려다 보니 몇 부분 빠진 내용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열정적인 강의 무척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상호문화 교육이라는 언뜻 보면 이상적이어 보이는 이론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일의 선례를 통해 이 이론을 실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문화적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 고민들로 연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덧 우리 곁에 다가온 다른 피부색, 다른 언어의 이방인들이 단순한 ‘타인’이 아닌, 우리 외부의 또 다른 ‘우리’일 수 있다는 생각의 단초를 얻었습니다.

다문화국가(이민국가)의 현 사회상을 잘 짚어줘서 좋았으나 문제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현실 측면이 이야기가 안 돼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이 이렇게까지 현실 문제의 해결 방안의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점이 큰 수확이다. 상호문화주의라는 개념이 반갑다.

매 강의가 1시간 30분으로 소화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듯 합니다. 2시간 강의에 중간 10분 휴식하는 걸로 하는 것이 좋을 듯.

한국의 다문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강의였음.

내실있는 강연 잘 들었습니다. 이주민 노동자 자녀가 빈곤의 악순환 당하는 일이 가슴 아픕니다.

1, 2강에 비해 이론적인 측면의 접근을 하셨던 것 같은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이러한 방향의 강의가 도움되는 것 같습니다.

착취의 공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마르크스 [한철연 교육강좌]-②

[한철연 교육강좌]-②

착취의 공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마르크스

강사: 이재유(건국대 외래교수)
후기: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지난 4월 1일 한철연 교육부의 두 번째 강좌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첫 번째 강좌보다 적었지만 첫 날보다는 열띤 분위기로 강의 및 토론이 진행되었다. 두 번째 강좌는 이재유 회원(건국대 외래교수)의 “착취의 공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마르크스”였다. 강의 초반에는 비교적 가라앉은 분위기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강의의 열의가 살아나고 있었다.

이재유 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그의 강의는 ‘communism’의 해석 문제에서 시작했다. 흔히 이 용어를 ‘공산주의’로 번역하는데, 이 번역 용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본다면 공공을 위해 공동으로 생산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도 공산주의적 방식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동기는 다르지만 겉으로만 본다면- 모두를 위해 공동으로 생산하는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communism’을 번역하지 않고 ‘코뮤니즘’으로 표기하자는 제안도 있다.

마르크스의 의도에서 보자면 공산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생계가 자본의 논리에 구속돼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구속에서 해방된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라고 규정했다. 그에게 공산주의 사회란 모든 개인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여건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유가 핵심 문제로 부각된다. 마르크스에게 자유란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으며 착취하지도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런 자유 상태에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는 수평적인 평등 관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자유와 평등은 대립적 관계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동근원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는 노동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구현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노동이란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누리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공산주의는 억압된 노동의 해방을 지향하면서 여러 활동과 제도를 제안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착취와 억압의 요소가 뿌리 박혀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산주의적 체제와 제도가 완비된다 하더라도, 착취와 억압의 생활 양식을 바꾸지 않는 한 공산주의적 이상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재유 회원은 이러한 현실의 예로 가정 내에 뿌리 박혀있는 여성 착취의 문제를 제시했다. 가정 내에 남성이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형태가 지속되는 한 우리의 내면에 뿌리박힌 착취 의식은 사라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착취와 억압의 삶은 가정 영역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곳곳에 박혀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일상 생활 영역에서의 착취를 제거하는 활동에 나서야 한다. 가정 내의 여성 착취 문제를 해결하고, 누군가의 희생을 간접적으로 강요하게 되는 생활 구조를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노동자의 임금을 높이고 기본 소득을 지급한다고 해서 착취의 생활 문화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높은 임금과 기본 소득의 취득은 이웃에 대한 연대감 대신 사적 삶의 풍요를 지향하는 욕망을 키운다. 이런 사회 운동은 공적 연대감 대신 오히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의식을 조장한다.

강의 이후 30분 간 토론을 한 후 질의 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수강생들은 다양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고민의 수준을 높이고 있었다.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수강생 후기

자본주의 모순에만 집중하지 말고 현실적인 공산주의 이행 방안, 공산주의의 문제점 등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

특정 철학자의 사상과 이념을 소개하는 강의를 기대했는데 그것보다는 강연자의 해석에 충실한 강의였던 것 같다. 이론서를 읽고 싶은 충동을 만들어 준다.

쉽게 풀어 설명해준 강의였다.

늦어서 제대로 못들었지만 집중도는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자유로운 각 개인들이 연합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민주노총이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마르크스에 대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착취를 같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교훈적인 강의였다.

일요일 마다 대형 교회에서 하듯이 오늘과 같은 강의로 전국에서 철학 강의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

일반론 위주의 강의로 진행되어 치열한 고민과 토론 거리를 주는데에는 미흡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에 관한 자각은 어려운 문제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듯 하여 희망을 갖는다.

계급 모순이 풀리면, 성적 모순도 풀릴 것이라고 하는 주장들을 이제까지 들어왔는데 이번 강의는 그것을 뒤집은 내용이어서 매우 흥미로웠고 공감도 많이 했다.

가사노동의 생산 노동 비용이 임금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페미니즘 운동의 단초가 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생활 속에서 코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노력과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맑스에 대한 또다른 관점을 보여준 강의였다. 강의와 토론, 질의 응답 모두 즐거웠다.

사회 개혁에 대한 필요성은 절감하지만 그것이 공산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긴 하다. 실패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사례들이 있는 만큼 더 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철학의 현실적 접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뢰즈의 행복론: 행복한 인생의 조건[한철연 교육강좌]-①

[한철연 교육강좌]-①

들뢰즈의 행복론: 행복한 인생의 조건

강사: 이성백(서울시립대학 교수)
후기: 한 길 석(한철연 교육분과장)

 

 

새 봄과 더불어 한철연 교육부 강좌가 시작되었다. 2012년 3월 25일 “들뢰즈의 행복론: 행복한 인생의 조건”이라는 주제로 시작된 한철연 교육부 강좌는 총 25명의 수강생과 더불어 힘차게 출발했다. 강의 전 김성민 회장의 인사말과 이순웅 연구협력위원장의 소개말 등으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다. 25명의 수강생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6개의 조로 나뉘었다.

수강생들의 구성은 다양했다. 연령은 20대에서 60대까지, 직업은 무직자, 대학생, 대학원생, 사서, 시민 활동가, 직장인, 프로그래머 등의 분포를 보였다. 이전 교육부 강좌를 이수한 이들도 몇몇 있었다.

강의는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은 2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첫 번째 강의는 이성백 서울 시립대 교수의 행복론이었다. 이성백 교수는 서양 철학 전통에서 전개한 행복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행복은 이성적 삶을 추구하면서 성취되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고 한다. 이는 행복의 성취 과정에서 감성적 욕망을 배제하는 경향을 초래했다.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나 에피쿠로스 학파의 ‘아타락시아’ 개념도 따지고 보면 모두 욕망을 절제하고 이성적 삶을 추구함으로써 행복에 이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경향은 철학적 행복론에서 합리주의적 행복론이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조배준 한철연 회원

그러나 들뢰즈의 행복론은 감성과 욕망의 경험에 주목한다. 행복은 감성과 욕망을 경험하는 강도에 달려있으며, 행복은 소망하던 욕망이 충족되는 강렬한 순간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풍부히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능력과 기술의 함양이 필요하다고 한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다양한 욕구들이 아름답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는 미학적 존재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욕구를 삶 속에서 아름답게 조형하는 미학적 존재의 기술이 아무리 탁월하게 갖춰진다고 해서 우리 모두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불안정은 개인의 행복한 삶을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의 행복은 사회적 행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회적 행복을 구현시키는 방법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혁명이라는 사건은 가장 극적이다. 혁명은 개인의 감성적 요구를 가장 강렬하게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혁명은 기존의 답답하고 억압적인 틀을 깨고 새로운 사회적 활력이 용솟음치도록 만든다. 이 순간 각 개인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고 있음을 강렬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강의가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후, 각 조는 강의에 관련한 조별 토론을 30여 분 간 진행했다. 염려와는 달리 수강생들은 열심히 토론했으며, 토론 이후 이어진 질의 및 응답 시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6시 무렵, 예정된 프로그램을 마치고 첫 날을 기념한 뒷풀이 자리로 이동했으며, 몇몇은 두 번째 뒷풀이까지 자리를 함께 했다.

 

ⓒ조배준 한철연 회원

내 안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길[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한 마리의 귀뚜라미?

날씨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한낮이라도 웃옷을 걸치지 않으면 서늘함이 느껴지는 계절인데, 할머니의 방문 앞에 귀뚜라미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꼼짝을 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마루를 손으로 살짝 두드려도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그날 아픈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할머니를 찾아갔기 때문인지 그 귀뚜라미 한 마리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김선생이가? 안 들어오고 그서 뭐하노?” “귀뚜라미가 꼼짝을 안 하네요. 얼어 죽었을까요?” 나의 물음에 할머니는 크게 웃었다.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언제나 소리 없이 얼굴만 웃었는데, 그날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공기를 가볍게 날리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내 주변의 공기들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웃음이었다.

“어제 밤에 그리 울더라. 그런데 니는 보이나? 나는 안 보여서 어디 간 줄 알았네. 인자 앞도 잘 안 보인다.” 할머니는 백내장으로 시야가 맑지 못하다. 밤새 울던 귀뚜라미가 방문 앞 마루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할머니는 그렇게 큰 소리로 웃었던 것이다. 눈 앞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때, 나도 그렇게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을까?

감기는 낫지 않고 있는데 날씨가 계속 추워지자 할머니의 눈에는 눈곱이 떨어지는 날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날따라 할머니의 눈에는 커다란 눈곱이 매달려 있었지만, 그마저도 전혀 감각을 못 느끼고 있었다. 나환자들의 친구로 불리는 폴 브랜드는 고통을 신이 준 선물이라고 했다. 폴은 오랫동안 한센인들을 돌보고 치료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여 병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는 그들을 보며 고통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통이 꼭 몸의 감각에 의해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견뎌야 하는 마음의 고통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 탓인지 그날따라 할머니의 모습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날이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바늘에 찔리는 것과 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2. 고향의 가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상념에 잠겨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할머니였다. “김선생, 집에 뭔 일 있나?” “아뇨” “왜 말이 없노?” 나는 할머니에게 당신 때문에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말을 할 수 없노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이상하게 당신의 고통이 나에게로 옮겨 와 내가 너무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매주 당신을 마주 하고 앉는 이 시간이 이제 너무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속였다. 웃으면서 “가을이 오니 심란하네요.”하며 가을 탓으로 돌렸다. “하이구, 니도 가을 타나?” “왜요? 저도 여자인데요.” 우리 둘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렇다. 할머니도 여자고 나도 여자이다.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마음속에 비밀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비밀이 불쑥불쑥 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수다스러워지거나 말이 없어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제가 어릴 적에요, 나무가 요술을 부리는 줄 알았어요.” “왜? 나무가 니보고 뭐라카더나?” “그게 아니고, 나뭇잎이 색깔이 변하잖아요. 그것도 이상한데 어떤 것은 빨갛고 어떤 것은 노랗긴 한데 안 예쁜 것도 있고, 신기하잖아요.” “니는 그런 것도 아직 기억하나?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옛날에는 기억이 다문다문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인자는 어릴 때는 없고 그냥 한 덩어리로 기억이 남아 있다.”

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기만 하더라

산천초목에는 붉은 물 든 단풍들이

장관이더라.

한 고개 내려와 보니

은행나무 잎에는

노리고도 노란 색깔 위에

황금빛을 나타내며

흐르는 잎마다 주워서 책 속에 넣던

옛 추억이 떠오르네.

뒤돌아보니 금수화꽃은

우리 한반도 지도처럼

차분하게도 피어 있더라.

온 들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길에도 피어 색색가지로

자기를 나타내며

뽐을 내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교만해 보이더라.

-부분-

할머니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유난히 나무가 많고 꽃이 많았다.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올 때마다 나무가 다르게 보였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할머니는 그 풍경이 좋아서 계단마다 서서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때로는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얼마나 좋은지 심심하면 계단에 갔제.” 학교는 배움터이자 놀이터였다.

할머니 기억 속의 고향 가을은 황금빛이었다. 황금빛 은행나무, 나지막이 피어 있는 금수화(금당화) 등은 많은 시간이 지나도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자연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기억이 있다. 시간의 벽 속에 갇혀 원래의 모습 그대로 기억되어 있는데, 할머니에게 고향의 가을은 변하지 않는 기억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기억들은 잊혀지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어 현재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삶의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마쓰시타, 어머니 그리고 아들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의 삶을 고통 속에 빠지게 했다면, 어린 시절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에게 삶의 휴식을 주고 있었다.

 

3. 고통의 강을 건너?

처음 썼던 시에서 자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이 밤도 뒹구르며/몸부림칠 때/눈물이 강이 되어/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면,에서 자연은 할머니에게 행복했던 시간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꽃도 많고…. 가을이 되어도 코스모스는 있는 기라.” 60여 년 전에 피었던 코스모스는 할머니 집 마당 앞 공터에도 피어 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코스모스는 같은 코스모스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들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거나 그 의미가 퇴색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은 고통이 되거나 행복이 된다. 할머니에게 기억은 고통이자 행복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삶은 어떤 양상을 지닐까?

살아가면서 생활의 규칙이나 법은 그대로 지키면 되지만 마음은 지킨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또렷하게 각인되어 현재의 삶을 고통 속에 머무르게 한다.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내 마음이지만 내가 다스릴 수 없고, 자꾸 떠오르는 기억을 지울 수도 없다.

잃어버린 것, 가지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며 마음이 슬퍼할 때, 나에게 남겨진 것을 생각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상처나 고통 같은 단어는 없어지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현재 남겨진 것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불행과 나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들의 면면을 들여다 볼 때 고통과 슬픔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진정한 부정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부정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며 그 과정은 험난하다. 혼란과 고통의 바다에서 스스로 삶의 중심을 잡고 희망의 키를 돌려야 하지만, 당장 살아나가야 하는 시간들은 눈앞에 있고,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할머니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몸으로 낳은 두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고,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딸 하나를 가슴으로 낳아 키웠다.

눈을 뜨면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돼지우리를 치우고 닭을 기르며 계란을 팔아 생을 이어갔다. 아무도 상처 주지 않았지만 삶 자체가 상처가 되는 시간들이었다. 누구에게나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스스로 받는 상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처는 더 깊이 파고들어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한 채 휘몰아치는 시간의 강을 건너 할머니는 이제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고향의 자연으로부터 쉼터를 발견하고 있었다. 9번 째 시에서 할머니는 비로소 행복했던 유년의 시간을 찾고 있었다. 할머니는 혼란과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4. 유년의 기억 속으로?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이 낯설고 힘들지라도 자신을 오랜 시간 동안 어둠속에 가두었던 고통과 상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면, 오히려 그 얼굴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이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로 다가올 때, 상실했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지금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을 통하여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또 다른 자기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운동장 옆에는

전부 벚꽃나무가 줄을 서서

너무나도 아름답더라.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부분-

할머니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병과 타인의 질시 같은 오염된 기억이 아니라 순수하고 맑은 유년의 기억이었다. 고통과 상처는 우리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오만과 교만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우리는 고통으로 아파하고 잃어버린 것으로 절망한다. 그러나 고통과 상실로 다시 일어서기도 한다. 고통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가장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고통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므로 마치 가뭄에 뿌리가 타들어가는 아픔을 이기고 싹을 틔우는 잡초처럼 우리를 강하게 단련시킨다. 할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들을 떠나보내고 어머니를 여의는 고통과 슬픔의 강을 건너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첫발을 디디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차라리 탈선했으면 싶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원진호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사교육 부담을 가져오는 입시전쟁

이 책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시민단체가 ‘등대지기 학교’라는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09년 4-5월에 <시사IN>에 중계한 내용을 단행본으로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교육 평론가 이범, 영어교육 전문가 이남수, 이우학교 교감 이수광, 사이버대학교 상담학부 교수 신을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조기숙, 인고 서원 대표 허아람,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송인수 등 총 일곱 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강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강의식 문체를 사용하며 현장의 반응도 기록하고 있어 독자가 마치 청중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 만큼 이 책은 주제에 비해 생동감 있고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 밝힌 바 ‘아이들을 스스로 공부하는 창의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동시에 사교육 부담을 가져오는 입시전쟁을 끝장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이남수, 신을진, 허아람의 강의는 주로 전자의 취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범, 이수광, 조기숙의 강의는 주로 후자에 초점을 맞춘 강의였다. 마지막으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공동대표인 송인수의 강의는 이 운동의 존재가치와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사교육비가 GDP의 10%임에도 공부 못하는 나라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매우 부담스럽고 부끄러웠다. 왜냐면 바로 내가 무지막지한 사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을 벗어난 학습을 사교육이라 정의한다면 외국 학교에 보내 아이를 공부시키는 것만큼 확실한 사교육이 있겠는가? 내가 바로 자식들을 외국에 보내 교육을 시키고 있는 장본인이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송구스럽고 부담스러웠다. 특히 송인수 대표의 세상을 바꾸는 순서에 나는 제1영역, 제4영역에 속하는 부류인데, 이 부류는 현 교육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새로운 정책을 갈망하면서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자구책을 세우는 경우로 현실주의자라 칭한다. 이 부분에서 발가벗은 임금님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또한 읽는 내내 답답하였다. 조기숙 교수의 강의에 밝힌 바, 최다 수업시간, 최고의 사교육비, 공교육비가 GDP의 4.5%, 사교육비가 GDP의 10%임에도 국가경쟁력, 대학경쟁력, 국민의 행복지수가 모두 낮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해 200명이상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자살을 하며, 자살이 10대 사망 원인 중 교통사고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는 현실이다. 또한 현 정부의 공교육 강화정책이 사교육과 경쟁하고, 결국에 가서는 사교육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시골의 대표 고등학교가 서울의 유명 영어강사를 초빙하여 특강을 하고 결국 학생들의 영어성적이 늘었다는 것이 공교육의 사교육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방과 후 수업과 활동이 사교육비 비용을 줄였다고는 하나 사교육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방과 후 수업을 경험하고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느낀 부모가 64%나 된다지 않나. 또한 돈 있는 집안의 학생들은 아예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경험은 사회, 경제문제를 도외시 한 채 교육문제만 따로 떼어 정책과 제도적 접근만을 하는 것으로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도시와 부자에게 날개 달아주는 사교육

이렇듯 부끄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면서 이 분들이 제시하는 핵심은 두 가지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핵심은 대학입시에 있고 대학입시문제의 핵심은 한국의 사회경제모순과 철저히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은 학벌사회, 대학서열주의, 그리고 유교적 과거제의 전통 등이 결국 대학입시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인생이 바뀐다는 신화 이면에는 일등주의, 획일주의, 물질만능주의라는 가치가 내재화 되어 있다. 사회양극화, 경제불평등, 공정치 못한 사회라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학생과 학부모를 더욱 경쟁으로 내 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쟁구도 하에서는 시골은 도시에, 빈자는 부자에게 패할 수밖에 없다. 사교육이 도시와 부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꼴이다. 이 책에서 강사들은 현실을 분석하고 다양한 정책과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꼼꼼히 그것들을 읽다보면 그래도 현 수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강사들은 특히 아이의 적성을 파악 못 하고 스스로의 가치부재 혹은 혼란으로 우왕좌왕하는 부모의 모습을 지적한다. ‘엄마표’ 영어교육 전문가 이남수는 알파맘과 베타맘 사이에 끼어있는 주변맘의 혼란스러움을 분석하였다. 이우학교 교감이신 이수광은 부모의 여섯 가지 유형을 예로 들면서 위로는 탈주형, 질주형이 있고, 좋은 방향으로 역방형, 유목형이 있는데 문제는 그 사이에 낀 동화형, 순응형이 우리의 대다수 모습이라 지적한다.

나는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보다 부모가 더 문제고 교육자체보다 사회가 더 문제라는 사실이다. 부모가 평생 공부할 자세가 안 되었다면? 부모가 성찰하고 분투하고, 연대하고 소통하지 않는 삶을 사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올바른 공부를 지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안 되면 아무리 공교육이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어도 우리의 아이는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사고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단선적 사고방식의 오류에 빠지고, ‘그래서 어쩌라구?’ 라는 반발에 부딪칠 수 있다. 그러나 사교육의 문제는 결국 부모와 어른, 사회의 문제라는 의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사교육과 공교육, 연대는 불가능할까?

나는 사실 사교육과 공교육의 대결구도가 악과 선의 구도로 가는 것은 반대한다. 일등주의, 하나의 가치만 중시하는 획일주의를 조장하는 체계가 잘못된 것이라 인정한다면 사교육이나 공교육은 똑같은 선상에서 평가될 대상일 뿐이다. 잘못된 가치를 조장하는 사교육이 나쁘다면 그런 사교육을 닮아가는 공교육도 나쁘다. 공교육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키워주는 사교육은 다안성 측면에서 옳다. 공교육의 고유한 영역인 바른 품성을 갖는 인성과 인권교육을 중시하는 것은 옳다. 그런 측면에서 사교육과 공교육은 반목하고 경쟁할 수 있는 존재지만 연대의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연대가 주류가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망은 하지 말자. 정상을 향해 일렬로 빽빽하게 서 있는 주류의 시스템은 그 사이와 경계에서 휘젓고 다니는 소수의 연대세력에 의해 부조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을 향해 서 있는 모든 이가 어느 순간 뒤로 돌아 자신들 앞에 펼쳐진 드넓은 대양을 보게 된다면 정상에서 온갖 폼을 다 재고 있던 그 허무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깃발을 내리지 않겠는가! 너무 낭만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 책의 여는 글에서는 그런 자신감이 묻어나있다. 또한 이 책의 저자인 일곱 분의 강사들 면면이 참으로 뛰어난 사교육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또한 진정한 공교육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벌써 저자들 속에 모종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분들이 있기에 각성된 대중이 모이고 이들이 세상을 개혁하는 소수가 될 것이라 확신해 본다.

 

우리 아이들이 탈선아가 되었으면…

특히, 인디고서점 허아람 대표의 글은 나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강의 속에 소개된 책들을 모두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여 책장에 꽂아놓고 저걸 언제 읽어야지 노려볼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책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방법이 인디고서점의 활동에 녹아있음을 느꼈다고나 할까.

시골에 사는 나는 줄곧 이런 생각을 해 왔다. ‘강남의 아이들처럼 따라 하면 우린 백전백패다. 우린 뭔가 다른 모습으로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의 근거는 처지와 환경이 다른 우리가 강남의 부모들의 가치관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된다. 어떻게 우리 시골아이들을 창의력 있고 리더쉽이 뛰어난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 나는 책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읽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전자는 후자에게 많은 것들을 금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문고전 독서였다.’ 내가 속해 있는 ‘책익는마을’도 사교육 좀 했으면 싶다. 그야말로 사회적 사교육!, 아이들에게 책 사주고 읽으라고만 하는 사교육이 아니라 우리가 독서가가 되고 멘토가 되어 그들과 같이 해 줄 수 있는, 친구이며 스승이며 선배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지배계급이 되어 자기 삶에 매몰되지 말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그들과 맞장을 뜰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키워주는 것 말이다.

그런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이수광 교감의 강의에서 요즘 아이들 유형이라는 내용이 있다. 제도적 학습능력과 지적 호기심이라는 변수에 따라 체제순응형인 똑똑이, 체제동의형인 엄친아, 그리고 체제무감각인 잠돌이, 그리고 제도권 공부는 못 하지만 지적호기심은 왕성한 탈선아가 있단다. 이에 근거해서 우리 아이들이 탈선아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그것을 보장하는 부모의 역할, 사회의 역할이 있었으면 한다. ‘책익는 마을’의 사회적 기여도 이런 맥락에서 설계되었으면 한다.

‘세상의 변화는 중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주변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중심을 무너뜨린다. 우리 시골아이들에게 중심으로 가라는 것은 맨주먹인 채 전쟁터로 내모는 것과 같다. 주변에서 놀게 하자. 그야말로 탈선하게 하자. 물론 이 말은 내말이 아니다. 이우학교 이수광교감의 인용글이다.

‘줄을 벗어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 줄 것이다.’

이 말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나, 바로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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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첫째 글로서 <굿바이 사교육>(이범 외 지음, 시사 IN 펴냄)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꼼수로 사라져버린 대학 등록금 인하[썩은 뿌리 자르기]

꼼수로 사라져버린 대학 등록금 인하[썩은 뿌리 자르기]?

권혜림(건대신문사 편집장)

?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취직도 그렇겠지만,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바로 ‘반값등록금’이다.

2011년 반값등록금 열풍이 분 탓인지 최근 등록금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졌다. 지난해 감사원은 감사 결과에 의해 사립대의 12.7% 명목 등록금 인하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에 교과부 이주호 장관과 대학교육협의회는 5% 인하를 약속했다.

올해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방학 중 등록금심의위원회가 끝난 후 등록금을 인하를 발표했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와 교과부의 방향에 따라 대부분의 지방대나 국립대는 정부가 권고한 5% 인하를 지켰다. 특히 부실대로 선정된 대학들의 인하폭이 비교적 높았다. 상명대는 7%, 추계예대는 10%의 등록금을 인하했다.

이렇게 ‘인하’라는 말만 놓고 보면 학생들에겐 더없이 기쁜 소식이지만 막상 파헤쳐보면 그렇지 않다. 서울 소재 사립대학에서 등록금을 5% 이상 내린 대학은 10여 곳에 불과하다. 대부분 서로의 눈치를 보다 연세대 2.3%, 고려대 2%, 서강대 2.4% 등 3% 미만의 인하에 그쳤기 때문이다.

대학교

인하율

대학교

인하율

추계예술대

10

성신여대

2

시립대

50

한성대

5

명지대

5

연세대

2.3

한국예술종합학교

5

동덕여대

5

고려대

2

이화여대

3.5

광운대

2

서울과학기술대

6.6

중앙대

2.3

성균관대

2

서울여대

5

건국대

2.5

한양대

2

동국대

2.2

한국외대

2.2

서울대

5

서강대

2.4

총신대

5

삼육대

3

홍익대

1.5

숭실대

3.2

숙명여대

4

상명대

7

총신대

5

?

장학금 확충, 그 진실은?

?

표면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대학들이 2012년도 등록금을 인하했다. 하지만 등록금 ‘인하’라는 명목아래 대학들의 다양한 ‘꼼수’도 더불어 드러났다. 등록금 인하 폭이 크지 않은 학교들은 장학금을 확충해 인하율+α의 효과가 있어 실제로는 5%에 가까운 인하율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장학금을 확충하는 방법이 학생 스스로가 체감하기에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대학들의 말이다.

올해 연세대는 장학금을 52억, 고려대는 40억원 이상을 확보했고, 이화여대는 49억원을 확충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장학금을 확충했다지만 되려 성적장학금은 줄었고, 대학원생의 등록금은 대부분 동결되었으며, 정규 수업일수를 줄이고 계절학기를 확대하는 학교가 생겼다.

정부에서 등록금 인하를 위해 지원한 1조 7천 500억 원 중 7천 500억 원은 각 대학교에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형태로 지급이 됐다. 또 7천 5백억 원은 개별 대학들이 등록금을 인하했거나 장학금을 더 많이 확충했다던가 하는 노력에 따라 매칭 펀드 방식으로 주게 되어있다.

연세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올해 1학기 장학금 대상자였지만 2월 초, 학교로부터 장학금 대상자에서 제외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연세대는 대학등록금이 2.3% 인하됨에 따라 배정된 대학배정장학금이 기존 액수 대비 70% 대폭 삭감되었다고 해명했다. 이는 명목등록금을 5% 미만으로 인하하는 대신 장학금을 확충한다는 학교의 주장과 상반된다. 이에 학생들의 반발이 커지자, 학교 측은 취소를 통보한 학생들에게 원래대로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3.2%를 인하한 숭실대도 가계곤란장학금 확충에 따라 성적장학금을 지난해 대비 80%를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재학생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반발이 거세져 성적장학금을 증액하기로 한 바 있다.

?수업일수 줄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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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는 올해 1학기부터 한 학기 전체 16주의 수업 주수를 15주로 1주 줄였다. 올해 등록금 인하율이 2%인 것을 감안해볼 때, 오히려 등록금은 지난해보다 인상 것으로 볼 수 있다.

학생들은 이런 학교를 향해 등록금 인하로 인해 줄어든 등록금 수입을 메우기 위한 ‘꼼수’라고 지적하며, 이럴 바에는 차라리 등록금 인하 철회하고 수업을 제대로 듣는 것이 더 낫다고 항변했다. 광운대도 마찬가지로 학기당 16주로 배정된 수업일수를 15주로 1주씩 줄였다. 대신 계절학기를 확대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렇게 되면 비싼 계절학기 등록금 때문에 혜택은커녕 2% 인하 금액보다 학생들은 훨씬 손해를 보게 된다. 일부 대학에서 이러한 방법을 통해 수입 감소분을 충당해 등록금 인하를 무색케 하고 있어 학생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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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비ㆍ연구비ㆍ교양강의 축소

▲ ⓒ 건대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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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등록금을 인하한 후 수입의 감소를 메우기 위한 기막힌 방법들이 등장했다. 올해 5.1%의 등록금 인하를 한 청주대학교의 경우 지난해 43억 9,800만 원이었던 실험실습비를 올해 30억7700만 원으로 줄여 학생들로부터 수업내용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원성을 샀다. 청주대에서는 또한 교수와 직원의 상여금을 대폭 삭감해 등록금 인하의 출혈을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그대로 전가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이화여대는 연구비를 6억 9천만 원 축소 편성했으며 고려대는 실험실습비 3억 7천만 원을 줄였고, 학생 경비 예산도 20억 넘게 축소했다. 모두 교육 여건과 학생 복지에 직결되는 비용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충남에 위치한 한 대학은 등록금을 인하하면서 지난해까지 무료로 운행하던 셔틀버스 비용을 유료로 전환했다. 이 학교의 경우 하루 평균 5,000여명의 학생과 교직원이 셔틀버스로 등하교하기 때문에 버스 요금만으로도 등록금 인하로 인한 수입 감소를 충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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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강의 줄이고 시간강사 내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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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부 대학에서는 시간강사가 맡았던 교양수업을 축소하면서 시간강사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 이에 따라 교양수업이 줄어 전체적인 수강인원이 늘면서 강의실이 콩나물시루가 돼 학생들의 원성 또한 커졌다.

전임교수의 강의를 늘리고 강사의 강의를 줄이는 대학도 존재한다. 서강대는 2.4% 등록금을 인하 방침을 발표 한 뒤 전임교수의 강의 시간을 주당 6시간에서 최대 9시간으로 늘렸다.

또 한 예로, 건국대 서울캠퍼스에서는 지난 3월 15일, 학생총회가 열렸다. 1,892명의 학생들이 모여 성사된 학생총회에서는 등록금이 2.5% 인하되면서 축소된 교양강의의 수를 원상복귀 시켜달라는 안건이 포함돼있었다. 또 2학점이었던 교양을 3학점으로 올린 것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을 의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이에 학교 측은 전임교원 강의 수를 늘리기 위해 시간강사의 수를 줄이다보니 교양수업이 줄어들었다며 해명한 바 있다. 이러한 전임교수의 수업시간 확대에 따라 시간강사들은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강의 시간에 따라 임금을 받는 시간강사의 경우 전임교수의 수업이 많아지게 되면 당장 실업자 신세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학교에서 ‘등록금 인하’라는 이름 뒤에 다양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학교 측의 이러한 꼼수는 법적 처벌 대상이 아니다. 학생들은 단지 등록금 싸게 낸 만큼 질 떨어진 교육을 받거나 또 다른 추가비용을 내게 돼 등록금 인하 뒤에 숨겨진 꼼수에 고통 받고 있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 발만 구르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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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예속의 썩은 뿌리[썩은 뿌리 자르기]

폭력과 예속의 썩은 뿌리

최 지 현(건국대 철학과 학부)

#. 1

이웃집에 사는 형과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큰 사거리를 지나면서 유독 눈에 띠는 것은 핵 안보 정상회의와 관련한 현수막이었다. 정상회의가 열리는 양일간 하루는 짝수 번호 차만, 다른 하루는 홀수 번호 차만 다니라는 것이었다. 눈을 돌려보니 지나가는 버스들에도 그런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저 정상회의를 사람들은 정말 원하는 걸까? 그런다 해도 저런 사소한 부분에까지도 정부에서 제재를 해야 되나… 만약 사람들이 원한다 해도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정말 정상회의가 시작되면, G20회의 때처럼 또 한바탕 난리 나겠네…’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다. 봄이 오려는 듯, 오지 않는 요즘, 안 그래도 싱숭생숭한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퇴근하고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형과 만나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형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요즘의 여러 사회 이슈들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너 그거 아냐? S사에서 휴대폰 담합했던 거 있잖아.” “아, 그때 인터넷에서 봤어요. 양심도 없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뭐 회사가 다 그렇지. 양심적인 회사가 어디 있어. 그런데 그거 때문에 손해가 클 것 같으니까, 소비자보호원을 상대로 소송 낸다던데.” “와, 그것까지는 몰랐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어떻게 말이 되요?” “왜,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가 크니까.” 얼마 전 인턴을 마치고, 정식 직원으로 한 회사에 입사한 형은 부쩍 나에게 아저씨들 같은 말이 늘어놓았다. 너처럼 생각해서 회사 취직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회사 들어가서는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여전히 S사의 소송이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서라지만, 명백한 자신들의 잘못인데도… 어느덧 이야기는 제주도 해군기지에까지 넘어갔다.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목소리
“그 누구지, 어떤 여자가 해적기지라고 했다며? 꼭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들이 그러더라. 군대 가면 사람 죽이는 법 배워오는 것 아니냐고 하고, 군대에 가면 예의범절을 배워오는 거지…” “맞잖아요. 군대에서 가르치는 건 그거죠. 전쟁 났을 때, 사람 어떻게 죽이나… 표현이 좀 그래서 그렇지. 또 해적기지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죠….” “그래, 너도 군대 안 갔다 왔잖아. 군대 가서 그렇게 해봐라. 너는 살아서 못 돌아온다.” 형은 어느 정도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참 어려운 말이었다. 군대식의 예의범절이 통용되는 사회, 그리고 그렇게 해야 제대로 되었다고 말하는 사회. 그리고 강정마을. 인터넷 뉴스로 강정마을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착잡했다. 얼마 전 제주도에 갔을 때 들렸던 4.3 평화 박물관에서 들었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평화를 염원하는 섬, 하지만 평화는 언제나 지연되고 있는 섬, 오히려 대부분의 주민들이 폭력에 노출되어왔던 섬. 그 역사는 다시 또 반복되고 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그저 달려가고 싶었지만, 일상에 얽매여 가지 못한다는 용기 없는 나를 다시 느끼면서, 꽤나 따뜻해서 여느 봄 저녁 같았던 그 저녁은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비틀어놓았다.

#. 2

썩은 뿌리 자르기. 과연 어떤 뿌리를 잘라야 할까 고민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한, 두 가지의 쟁점, 그리고 무수한 이슈들이 있고, 그 중 하나를 다루어 볼까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한, 두 가지의 이슈만을 다루기에, 그것들은 뿌리가 아니었으며, 뿌리를 보여주거나 가리키지도 못했다. 그것들보다는 더 근본적인 것, 그것이 뿌리가 아닌가.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그 뿌리는 일반적인 뿌리, 즉 하나나 두개의 큰 덩어리로 이루어진 그런 뿌리는 아닌 것 같다. 땅 속에 있는 또 한 그루의 나무와 같이, 무수한 줄기와 같은 뿌리들로 이루어진 뿌리이며, 그 무수한 뿌리들 서로는 서로와 만나면서 새로운 뿌리가 되어 그것 전체의 변화의 과정을 이끄는 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개의 썩어있는 뿌리에 대하여 시급하고,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뿌리는 그것과 만날 수 있는 모든 뿌리들을 부정적으로 변형시키고 전체의 변화 또한 그렇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 그 혼란스러웠던 저녁은 나에게 그러한 썩어있는 뿌리 중 하나가 무엇인지에 대해 넌지시 단초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 뿌리는 바로 폭력과 예속이 한데 뒤엉켜서 보기 흉하게 썩어있는 뿌리였다.
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발파를 막으려는 시민에게 경찰이 망치로 상해를 입혔다
폭력은 일반적으로 관계로부터 기인한다는 기본적인 특성을 갖는다. ‘A가 B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폭력이라는 행위에는 주체인 A와 피해자, 혹은 대상인 B가 필요하며, 폭력이라는 행위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의 일종의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 혹은 다른 어떠한 것과 어떠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계로부터 오는 폭력역시 일정 부분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내(주체 나)가 나에게 실망감에 젖어 나(대상 나)에게 행하는 폭력,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가족들과 나, 혹은 친구들과 나, 선생님과 나와 같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폭력, 인간이 처음으로 접하는 폭력은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이 커지면서 동시에 폭력의 규모도 함께 확대된다. 집단(또래들의 무리, 공동체, 국가…)과 나 사이의 폭력, 집단과 집단 사이의 폭력. 이러한 점에서 폭력은 일상적인 측면 역시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측면의 폭력, 즉 작은 규모의 폭력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사회 전반에 공공연하게 폭력이 퍼지거나, 커다란 규모의 거시적 폭력이 발생하는 것 역시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폭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작은 규모의 미시적 폭력은 물론이고, 거시적이고 큰 규모의 폭력조차 모두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폭력이 작은 규모의 폭력일 때 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갖고 해결해야 하는데, 실제적으로 그렇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들과 일상 속에서 일종의 분노감과 폭력을 교육받으면서 폭력에 훈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미시적인 폭력에 충분히 젖어있기 때문에 거시적인 폭력이 만연하게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 사회 전반에는 폭력이 일종의 당연한 것으로조차 되어버린 것 같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이는 나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의 폭력이 세게 최고 수준이 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청소년과 선생으로 대표되는 어른 혹은 학교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우리 사회는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해야 할 정도이며, 그리고 그것마저도 찬반으로 나뉘어 치열한 정치싸움을 할 정도로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 일면에서 당연시 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최근 이슈가 되었던 학교 폭력 문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어른들이 행하고 있는 폭력이 그대로 청소년들에게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며칠 전, 강정마을에서는 구럼비 바위 폭파를 위한 화약의 유입을 막기 위해 시위자들이 서로 손을 잡은 채 팔에 PVC 파이프를 끼고 인간띠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를 진압하는 경찰은 3시간이 지체되었다는 이유로 PVC 파이프를 부수고 시위자들을 연행하기 위해 현장책임자는 파이프 위에 망치질을 해댔다. 이는 거의 몸에 대고 그냥 망치질을 한 것과 다름없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치질을 해대는 당사자는 어떠한 당혹감 없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거침없이 망치질을 해댔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비무장 상태의 비폭력 시위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그 모습은 아마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또 한편으로, 우리 사회에 폭력이 쉽게 만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사회가 다른 곳보다도 유달리 더 끈끈한 관계성을 중시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우리 사회가 강조하는 관계성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성이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사실 우리 사회가 강조하는 관계는 그다지 건강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계성은 여러 부분에서 예속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또 편한 군 생활을 위해서 소위 ‘알아서 기어야 하는’ 아부와 아첨의 관계가 일상 속에서 필요하며 실제로 그것이 만연한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라는 점은 사람들이 예속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예속의 관계는 폭력과 악순환을 이룬다. 폭력이 인간관계를 예속에 종속시키면, 예속은 폭력이 일어나기 더 쉬운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러한 폭력은 다시 사람들의 관계 사이에서 더 강한 예속을 만들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왜 S사는 그런 비상식적인 소송을 준비하는 것일까? S사는 단순히 그 소송을 통해 손해에 대한 피해보상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피해보상을 받든 받지 못하든 상관없이, 소비자보호원에게 그들이 쉽게 견딜 수 없을 일정한 위협을 주고, 그것으로 스스로 예속 관계를 형성하여, 앞으로 자신들이 폭력을 휘두르기 더 편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비슷한 경우에도 소비자보호원은 쉽사리 그 사실을 공개하거나 고발하지 못하게 되면서, 기업 환경적으로는 하나의 장애물이 없어져 그들의 힘을 쉽게 휘두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에 공공연하게 폭력이 만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폭력과 예속의 악순환은 그러한 폭력에 쉽사리 저항할 수 없도록 사람들의 의지를 스스로 꺾게 만든다. 이 결과, 스피노자가 제기했듯,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어딘가에 예속되려고 하는 현상이 우리 사회에도 나타나며, 폭력과 예속은 ‘원만한 관계’라는 일종의 ‘좋은 말’로 수식되어 사람들을 속이며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 3

이러한 모습을 갖고 있는 폭력과 예속이라는 썩은 뿌리는 우리 사회가 시급하고도 확실하게 제거해야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썩은 뿌리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로서 사회 곳곳의 현상들에 퍼져있기에 당장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당황스럽기도 하다. 여전히 이 정도의 단순한 분석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폭력과 예속을 제대로 이해하기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해결책조차 낼 수 있을지 고민조차 든다. 다만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는 것에 위로를 갖는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더 풀어나가야 할지, 이 생각 앞에서 더욱 마음이 급해진다. 여전히 공부에 미진하고 사유에도 미숙하기에, 더욱 공부와 사유에 매진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구보씨, 렛미인을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렛미인을 말하다

문성원(부산대)

세상일이 뜻 같지 않다. 요즘은 매사가 그렇다. 하긴 모든 일이 뜻대로 될 바에야 굳이 뜻이 필요하겠는가.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기에, 우정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리라. 이 좋은 봄날에 웬 허접한 소리냐고? 글쎄 말이다. 구보씨 딴에는 선거 뒤끝의 착잡한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구보씨가 사는 남쪽 동네엔 어제까지 흐드러지던 벚꽃이 이제 꽃잎을 하냥 떨구는 중이다. 저 꽃잎 하나하나에도 뜻이 있을까? 문득 구보씨는 생각해 본다. 꽃잎들에 얹히는 저 햇살과 향기를 나르는 저 바람에도? 그래,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뜻은 인간의 뜻과는 상관이 없을 터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뜻이라는 표현을 앞세워 세상 속으로 교묘히 파고든다.

뜻이라는 말은 같아도 그 뜻은 다르다. 인간의 뜻과 자연의 뜻이 다르고, 너의 뜻과 나의 뜻이 다르다. 그러나 원체 뜻이란 나를 통하여서야 그 뜻함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모르는 뜻은 엮이지도 풀리지도 못하니 내게 뜻으로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뜻이 있다 싶으면 나름으로 짐작하고 해석하기 마련이다. 그 덕택에 뜻은 곧잘 오해된다.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이 실제로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도 가설을 세우고 설명을 하려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뇌생리학이 밝혀 놓은 바에 따르면, 우리의 좌뇌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그럴 듯한 설명을 찾아 늘어놓는다.

우뇌와 좌뇌를 잇는 뇌량(腦梁)이 분리된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우뇌에 주어진 정보가 좌뇌에 제공되지 않는다. 가령 오른쪽 뇌와 연결된 시야에 “웃어보세요”라는 쪽지를 보여주면 이 사람은 거기에 따라 웃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왜 웃는지 모르는 채 자신이 웃는다는 사실만 의식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지금 왜 웃고 있나요?” 라고 물어보면, 그는(정확히 말해 그 사람의 좌뇌는) 모른다고 하지 않고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낸다. “당신이 재미있어서요.”라고 답하는 식이다.

 

틀린 답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가장 그럴듯한 답을 찾아 제시한다. 어차피 우리가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면, 이렇게 주어진 한계 내에서 가설을 만들고 이론을 찾는 것이, 미지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효과적으로 살아가는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움은 제한적이다. 또 부작용도 있다. 신화적 세계관의 역할이나 문제점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삶에서 신화나 신화와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뜻으로 얽힌 우리의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신화적 면모를 갖는다. 넓게 보면, 불명료한 사안에 뜻을 제공해 주는 이야기의 얼개가 곧 신화다. 세상이 한층 복잡한 것은 이런 신화적 뜻의 세계가 여럿이고 또 그런 세계들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나름의 세계를 갖는데, 그런 세계에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 포함된다. 여러 뜻들에 대한 해석이 내 뜻의 재료가 된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 읽기는 우리 마음의 일부다. 덕분에, 우리의 삶은 부분적인 이해와 부분적인 오해들로 얽혀 있다.

그러니 세상일이 뜻대로 잘 될 리 없다. 우리의 시도는 무수한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해석의 얼개를 수선하고 뜻의 가닥들을 다시 풀어 엮는다. 내가 받아들인 자연의 뜻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뜻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나의 세계는 매번 개축되고 그때마다 다른 세계의 요소가 내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사정이 좋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럼 나쁠 경우에는 어떤가?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뜻을 세계에 덮어씌우려 한다. 제 뜻이 아닌 내 뜻을 앞세워 세상을 해석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그런 뜻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다른 세계의 요소를 받아들이려 한다. 수용의 거름망이 그만큼 강고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밖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건 무조건 좋고 안의 세계를 고수하려드는 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고집스러움이라고 다 해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제나 소재에 대한 구보씨의 작은 고집, 이를테면 요즘 들어 반쯤 장난스레 드러내는 뱀파이어 영화에 대한 고집 따위는 그런 대로 봐줄만 한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구보씨는 <렛미인>이라는 뱀파이어 영화가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살기의 방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글쎄, 어느 쪽이겠는가?

<렛미인>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독특하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에 따르면, 원래 이 뱀파이어의 정체는 소녀가 아니라 거세된 소년이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분화한 성적 매력이 나타나기 전 연약한 모습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도 소설 속에선 명확히 드러나는 아동성애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건 짚고 넘어가자. 아동성애 도착(페도필)은 무력하고 핍박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면서도 쉽게 지배욕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잘 나타난다.

그런데 <렛미인>의 소녀(또는 소년) 엘리는 뱀파이어다. 연약해 보이지만 실상은 초인간적 존재다. 물론 흡혈의 어두운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것을 기꺼워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피를 필요로 할 뿐이다. 이 어쩔 수 없음이라는 조건은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호응한다.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가련한 존재,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중적 존재가 뱀파이어 엘리다.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의 한 장면
이 뱀파이어 소녀 엘리와 가까워지는 건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소년 오스카다. 둔하고 약한 오스카는 힘이 지배하는 또래의 세계에서 기를 펴지 못한다. 영화에선 가냘픈 금발의 소년으로 나오지만 원래 소설에선 뚱뚱한 아이로 묘사되어 있다. 돼지 소리를 내보라고 놀림을 당하는 것은 그 탓이다. 그런데 이 오스카는 바보처럼 착하기만 하지 않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 그는 밤에 아파트 정원으로 칼을 품고 나가 애꿎은 나무를 찌른다. 가상의 응징인 셈이다.

이 가상이 현실이 될 수는 없을까? 오스카의 뜻이 실현될 수는 없을까? 그건 나름으로 정의의 구현일 텐데 말이다. 엘리는 당하기만 하지 말라고 오스카를 부추긴다.

“받은 만큼 돌려줘. 더 세게. 그래야 걔네들은 그만 둘 거야.”

“하지만…걔들이…”

“그 때엔 내가 도와줄게. 나는 그럴 수 있어.”

오스카는 이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대응을 하고 아이들은 움찔한다. 브라보!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만만할 손가. 뜻밖에 한방 먹은 악동들은 더 크고 더 폭력적인 지원군을 부르고, 오스카는 속절없이 극한의 궁지에 몰린다. 이때 엘리가 나타나 섬뜩할 만큼 충격적인 폭력의 응징을 가한다. 그것은 어쩌면 정의로워 보인다. 핍박을 당하는 약한 자를 돕는 응징. 피의, 어둠의 응징. 여기서 뱀파이어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영어판 포스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LET THE RIGHT ONE IN.” 이것은 정의로운 뱀파이어의 탄생인가?

오스카는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걸 안다. 선택의 여지는 있다.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못하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어둠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장치다. 오스카가 엘리를 초대하는 것은 왜일까? 초대 받지 못한 채 오스카의 방으로 들어온 엘리는 온 몸에서 피를 흘린다. 정수리에서도 눈에서도 피가 스며나온다. 이 모습을 본 오스칼은 황급히 초대의 말을 내뱉고 엘리를 껴안는다.

“넌 누구니?” “난 너와 같아.”

“…. 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아.”

“하지만 그럴 힘이 있다면 그러고 싶어 해. 복수를 위해서. 그렇지?”

“그래.”

“내가 해. 내가 해야 하니까.”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
물론 오스칼이 엘리를 좋아하게 된 건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걸 알기 전부터다. 그러니까 엘리를 받아들이는 건 어떤 이해관계나 바람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일 수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듯, 사랑은 모든 것을 넘어서므로. 그러나 이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렛미인>에는 뱀파이어 엘리를 사랑하는 또 한 사람이 나온다. 호칸이라는 인물이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이 사내는 엘리가 마실 피를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러다 붙잡힐 위험에 처하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자기 얼굴에 염산을 붓는다. 엘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마지막 죽어가면서까지 그는 자신의 피를 엘리에게 준다.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엘리는 백년 넘게 계속 12살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호칸이 있었을까? 오스카가 트렁크에 담긴 엘리를 기차에 싣고 함께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또 한 사람의 호칸이 되리라는 걸 강하게 시사한다.

무릇 뱀파이어란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산물이다. 엘리와 같은 뱀파이어 역시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살기의 한 방편이다. 우리는 뜻대로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찾고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대가가 따를 수 있음을 어렴풋하게 예감한다. 그것이 우리의 거의 모든 신화가 해피엔딩을 보장하지 않는 여운을 진하게 남기는 이유다. 뜻이 여럿인 세상을 뜻대로 사는 손쉽고 안락한 길은 없지 않을까.

그렇지, Y? 구보씨는 웬일인지 한동안 소식이 없는 Y의 속뜻을 헤아리며 혼자 멋쩍게 물어보았다.

 

 

이재원 단편소설 ? 생명과 그 적대자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 ? 생명과 그 적대자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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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여정은 인생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 장미나무를 심어 놓으면 가지가 솟아 잎은 무성해지고 찬란한 꽃이 피울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꽃은 시들고 잎은 마를 것이다. 인생이라는 이름도 장미의 이름과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마흔여섯 개의 염색체를 가진 생식세포는 오만 종의 유전자 쌍을 토대로 자기를 형성해 간다. 너는 나의 아들이지만 너와 나는 같지 않다. 신비한 어떤 기제가 있어, 각자 정보를 선택한 대로 자기를 만들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장미의 유전자를 읽는 것은 인간의 유전자를 읽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장미의 유전자는 몇 쌍일까? 일곱 쌍? 아니면 여덟 쌍 정도? 완두콩의 염색체가 여섯 쌍이니, 장미는 적어도 완두콩보다는 더 복잡한 염색체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완두콩에는 없는 여러 가지 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미를 그 장미로 만드는 것은, 장미가 가진 유전자 정보뿐만 아니라 토질의 성분에도 달려있다. 장미는 뿌리가 흡수하는 자양분을 토대로 자기를 완성할 준비를 할 것이다. 자양분이 많다면 키도 더 클 것이고 꽃도 많이 필 것이다.

이곳 지표는 마사토이다. 나는 이 땅에 구덩이를 파고 깨끗한 황토흙을 채웠다. 황토 속에는 장미와 내 육체를 구성하는 성분들이 들어있다. 탄소, 질소, 산소 등. 이 장미는 번성하지는 못할지라도 건강할 것이다. 나는 이 장미가 무성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키가 크지 않아도 좋다. 아, 흰 장미라면 더 좋았을 것을. 역시 무덤가에는 색깔 있는 장미보다는 흰 장미가 더 어울릴 것이다.

네 엄마 무덤에는 국화를 심었다. 그때도 이렇게 황토를 복토해 국화를 심었다. 네 엄마는 살만큼 살았다. 네 엄마 무덤에는 국화가 무난하다. 명이 다해 죽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너는 네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평화로워 보이는 국화로는 충분하지 않다. 네 무덤에는 장미가 적절하다. 너는 만개한 한 때를 살았다. 그러나 너의 죽음은 평온하고 자연이 만들어 낸 죽음이 아니었다. 저 바다의 죽음과 같은 격렬한 죽음이었다. 네 무덤에는 장미가 적당하다. 다른 식물들보다 더 격렬하게 사는 장미가 적당하다. 맹렬하게 꽃 피우는 것도 그렇고, 가을이 오기 전에 꽃이 시드는 것도 그렇다.

장미나무를 심는 것이 어쩌면 내 생 최후의 노동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내 생을 모두 타인의 노동에 맡겨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들아. 내가 이 장미꽃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모든 정열을 다 써버리고 시드는 때의 장미 잎과 같다.

그러나 장미와 나는 다른 데가 있다. 내 육체는 쇠잔해 가는데, 정신은 이리도 청명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정확히 들을 수 있다. 내 정신, 기억력은 여전하다.

너는 네 삶의 목표가 있었나? 너는 회사일, 그리고 출근하기 전과 퇴근 후에는 농사일에 매달렸다. 너의 인생을 계획하거나 돌아볼 틈이 있었을까?

네가 살아있을 때 나는 너를 위해 장미를 심어주지 못했다. 아! 장미를 보며 네 생을 계획하렴, 하고 네게 말 할 수만 있다면… 이제나마 나는 너를 위해 장미를 심는다.

나의 육체는 장미와 비슷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우주 안에 어디 새로운 것이 있을쏘냐. 다 같이 흙이라는 한 고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름 붙여진 것들의 허망함이여!

의사의 말처럼 죽는 순간 나의 뇌는 전기신호를 멈출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과 죽어있다는 차이는 뇌의 전기신호 여부이다. 그러나 죽는 순간 나는 죽음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를 진단한 의사가 하는 말들, 심히 걱정스러운지 진단결과를 내게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 의사의 토막말들을 나는 재조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약이 할아버지에게 잘 듣지 않는군요.”

“어째서 그런가?”

“할아버지의 몸이라는 기계가…… 그러니까 모든 기계는 쓰면 낡기 마련이잖아요? 약효가 좋지 않은 이유도 그런 거지요. 낡은 기계에 기름을 칠해도 삐걱거리잖아요?”

의사는 대단히 말을 조심했다. 나를 실망시키려 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경우에는 표정관리를 잘 해야만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의사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런 기계로 나는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얼마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죠. 하느님이나 할 수 있죠. 약이 잘 듣지 않는 것으로 봐서 몸이 쇠약해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죠.”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네 무덤가에 장미를 심는 일이다.

안순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는 다시 짐차를 몰고 돌아갔다.

“할아버지, 씩씩하게 장미 잘 심고 돌아가세요. 먹감나무 묘목 가지고 내일 다시 올게요,”

국밥을 먹다가 안순옥이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렇게 국밥 잡수실 돈은 어디서 나세요? 아드님? 아니면 젊어서 돈을 많이 벌어놓으셨어요?”

“젊었을 때야 많이 벌었지. 그러나 지금 쓰는 돈은 내가 번 것이 아닐세.”

“그럼 누가 번 돈이에요?”

“아들이 남긴 유산.”

안순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아들이 간척회사 농장에 다니다가 사고로 죽었어. 보상금을 내게도 조금 주었지. 지금 내가 쓰는 돈도……”

안순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유 할아버지, 내가 괜한 질문을 했나봐요. 그렇다고 식사하시면서 우시면 어떡해요? 진정하세요, 할아버지.”

눈물처럼 신비한 것이 또 있더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감정이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 변하는 현상이 눈물이다. 그러나 나의 육체가 없다면 보이지 않는 감정도 없다. 나의 이 마른 몸에서 눈물이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정신이 느낀 것이 생리적으로 표현될 때 눈물이 된다.

육체가 쇠잔한데도 정신이 말짱한 것이 신비이듯, 육체가 쇠잔해도 젊은 여인을 보면 웃음이 날 듯 반갑다는 것도 신비스럽다. 내 기억의 저편 어느 한 구석에 웃음 한 자락이 붙어있어, 내가 보는 대상에 따라 과거 활발했던 내 육체가 만들어 내었던 웃음처럼 반가운 기억을 일깨우는 것일 게다. 눈물과 웃음은 모두 기억이라는 정신이 육체를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노쇠하고 말라비틀어진 내 육체는 상황에 따라서 과거 내 육체가 경험했던 것을 복사해 낸다.

나는 장날마다 다릿목에 묘목장수가 좌판을 벌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농사짓는 일이 힘들어지면서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묘목장수는 우럭포 등, 말린 생선도 함께 팔고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쉬엄쉬엄 걸어서 다릿목에 도착했다. 묘목을 파는 여인은 나를 기억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묘목을 늘어놓은 곳으로 다가가 무릎을 구부려 않았다. 여인이 물었다.

▲ ⓒ프레시안(김하영)

“할아버지, 묘목 사시게요?”

“흰 장미 한그루 사고 싶은데.”

“흰 장미는 오늘 없고요, 혹시 꼭 필요하시다면 다음 장날 제가 가지고 나올 수도 있어요. 명함 드릴 테니 전화 주시겠어요?”

명함을 보고야 그녀의 이름이 안순옥이고, 집이 고북에 있는 무진농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 장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내가 다음 장날 다시 나올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거든. 오늘 가지고 나온 장미는 무슨 색깔인가?”

“잡종이지요. 빨간 색도 피우고 노란 색도 피울 거예요.”

“좋네, 장미 한 그루 싸 주게.”

안순옥은 나무를 싸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참 특별하시네요. 과일나무를 심으시다가, 이제는 장미까지… 묘목을 사 가는 노인들은 가끔 있지만…”

“노인들이 과일나무라…… 그 나무 열매 따먹을 때까지 살라는 보장도 없는데 과일나무를 심는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인가?”

안순옥이 감탄을 섞은, 높은 소리를 내었다.

“스피노자! 할아버지, 공부 많이 하셨네요?”

“내가 예전에 수원 농림학교를 다녔거든. 내 선생이 후에 농림장관도 하고 그랬어. 그 선생한테 들은 말인데 갑자기 기억나네 그려.”

“와아, 인텔리셨네요? 그럼 할아버지는 젊어서 직업은 뭐였어요?”

“농사지었지.”

“공부하신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셨네요?”

“선친께서 내가 대처로 나가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지. 험한 세상이니 몸 사리고 집에 있으라고……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았지.”

“염라대왕도 부러워했겠네. 어디에서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 수 있어요? 어디에서 사세요?”

“갈마리.”

원래의 마을 이름은 갈매, 쪽빛 강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일정 때 마을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갈마리가 되었다. 목마를 갈, 말 마 자를 붙여 갈마리라 했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자 호사가들이 나서 마을 이름에 뜻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돌곳이 형국이 물을 찾는 목마른 말 머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새로 지은 이름이 옛 이름을 당할까? 어디를 파나 물 잘 나오지, 황토에 거름 주면 농사 잘 되지, 사람 살기 좋은 땅이었다. 농사지을 땅 없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바닷물만 쫓아다녀도 배불렀다는 말이 있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는 누구나 먹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땅 없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맨몸으로 바다에 가서 먹을 것을 벌어왔다. 큰 시내와 바다가 만나는 곳은 갈맷빛 그것이었다. 간척하기 전 까지는 그 이름이 적당했다.

생도둑놈들이다. 한 바다를 ‘내 것이다’라고 울타리 치는 놈들이 도둑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름붙일 수 없는 것에 네 것 내 것으로 이름붙이다니!

간척사업을 한 뒤로는 목마를 갈, 말 마, 갈마라는 지명이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돌곳이 뻘, 기름져 만물이 살아 움직이던 물기 먹은 저 갯벌은 시체처럼 황폐해졌다. 햇볕에 굳은 갯벌 흙은 돌덩이처럼 차디차다. 농사지을 곳이라야 간척지의 일부분 정도 뿐, 나머지는 썩은 물로 차 있다.

나는 농부였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도수 어부이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터 아래, 고기들이 먹이를 찾는 곳에 주낙을 놓을라 치면 바구니 가득 고기를 잡았다. 한바다 가득 물이 들어찬 꿈꾸기 여러 번이었다. 간척되기 이전의 바다를 꿈꾸고 일어나면 항상 목마르듯 슬픔이 차오르곤 했다.

나는 신화를 믿는다. 바다에서 생명이 태어났으며,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신화는 이처럼 인간의 자궁을 두 곳으로 지목했다.

바다, 인간의 자궁도 죽을 수 있다는 증거가 저 간척지이다. 저 바다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다. 격렬한 죽음이다. 바다 속 만물이 일어나 죽음에 저항하다가 껍질만 남기고 전멸했다. 커다란 죽음 자체이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너를 담당한 의사가 내게 말했다.

“뇌사라는 것을 설명 드리기가 어렵군요. 뇌사란 곧 의사가 진단하는 죽음이에요. 뇌가 전기신호를 멈추었다 것은 인간이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너의 심장은 아직 따뜻한데 의사는 네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 너를 집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뇌사 이후 마흔 여덟 시간이 지나면 영안실로 모셔야 합니다.”

나는 너를 집에서 임종하도록 해야 했다. 태어난 곳에서 죽어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 신앙이었다. 그리고 여기 양지바른 곳에 너를 묻었다. 내가 너를 묻었기로서니 정말 너를 묻었을까?

네 무덤을 밟듯이 장미의 뿌리를 밟는다.

장미를 비닐봉지에 넣어 주며, ‘이 장미는 뿌리가 실해서 잘 살 것’이라는 안순옥의 말을 이어 내가 물었다.

“그래, 자네의 뿌리는 어디인고?”

“그게 무슨 말이예요, 할아버지?”

“그러니까, 자네 고향을 물은 거네.”

“뿌리가 왜 고향 이예요?”

“나는 고향 사람들, 특히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한 거네. 갈마리에서 살던 사람들 중에는 농토 없이 바다에다 뿌리를 두고 살던 사람들이 많았거든. 그런 사람들은 바다가 간척지가 되자 마을을 떠났지. 일정 때 소작하던 땅을 잃고 유리하던 사람들처럼 자궁을 떠난 사람들의 곤궁한 삶을 아네. 자기 삶의 자양분을 빨아대는 곳, 그곳이 고향이요 자궁이 아니겠나?”

안순옥이 눈을 작게 하고는 말했다.

“간척회사에서는 지방 사람들 일터를 많이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던데요? 신문에도 났었어요.”

나는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아, 수만 명 일터를 빼앗고, 몇 십 명 일터를 준다는 것이 대수야?”

“수만 명이라뇨?”

“도수어업이라고, 그러니까 배나 특별한 도구 없이 간단한 농기구를 들고 바다로 가서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저 바다를 끼고 도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었네. 바다가 간척지가 되자 그 몇 만 명이 하루아침에 할 일을 잃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네. 뿌리, 자양분을 빨아들일 땅을 잃어버린 꼴이지, 그 사람들이나 나 모두.”

내 나름대로 심각한 이야기였으나, 안순옥이 꺄드득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그러면 제 고향은 장터네요? 저는 장바닥에 뿌리를 두고 살거든요. 이건 농담이고, 제 고향은 고북, 무진농장이예요. 농토 한 떼기 없는 그곳에서 태어났죠. 간척지 옆이예요. 전에는 경치가 아주 좋았어요. 지금은 삭막함 그 자체죠. 비행기가 농약이라도 뿌릴라 치면 빨래 걷으랴, 장독 덮으랴, 숨도 못 쉬고 살죠.”

“아버지가 무진농장을 운영하시는가?”

“아뇨, 조경 노동자였죠, 나무에 깔려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저런, 그럼 묘목은 누가 키우나? 누구하고 사나?”

“동생하고 함께 살죠. 묘목은 여기 저기 농장에서 받아오죠.”

나는 장미 나무를 받아들었으나 무엇인가 그냥 가기가 섭섭했다. ‘스피노자!’라고 소리치던, 그 활짝 웃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아니면 내 기억 저편에서 나와 함께 웃고 슬퍼했던 고향사람의 뿌리 잃은 모습을 안순옥에게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어섰다 않았다 하기를 반복한 후에 말했다.

“자네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노망든 노인이라고 하지는 말게. 일본에서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직업이 있다고 하네. 대개 노인들이 이야기하고, 젊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식이라네.”

안순옥이 두 손뼉을 부딪쳐 ‘짝’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아하, 제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어 드릴까요?”

“아니, 더 있네. 내가 점심을 살 테니, 나하고 이야기함세.”

그리고 무진농장이라고 쓰인 짐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또, 내가 갈마리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하네. 택시비 낼 테니 자네 차로 나를 갈마리까지 태워다 주지 않겠나?”

안순옥이 웃으며 말했다.

“어렵지 않아요. 점심은 어차피 먹어야 되고, 조금 있으면 동생이 잠시 교대해 주러 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노인한테 대접해야지 오히려 얻어먹어서 되겠어요?”

“돈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되네. 나는 조금 지나면 이제 돈 쓸 일도 없어.”

우리는 장날마다 문을 여는 국밥집으로 가서 마주 앉았다.

그녀는 장사하면서 늦깎이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배움에 미련이 있다고 했다.

“제 법명이 능인이었어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스님이었다는 게야, 아니면 보살계를 받았다는 거야?”

그녀가 간단히 자신의 이력을 설명했다. 승가대학을 다닐 때 모친이 죽었다. 문제는 젖먹이 동생이었다. 부친도 몸이 불편해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환속했다. 동생을 돌보며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운전하며 장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예 이 길로 나섰다. 크게 욕심 부리지 않으면 두 식구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기 동생이 한창 공부할 나이인데 장사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젊은 시절, 중이 걸머지는 배낭에 주목했다. 암울한 시대였다. 항상 떠나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떠날 수 없었다. 부모를 모셔야 하고, 너를 키워야 했다.

나의 부친, 너의 조부의 임종을 기억한다. 한의사가 왕진 왔다가 돌아간 후 부친은 “칠성판을 가져오너라”, 하고는 그 위에 누웠다. 임종까지 열흘 동안, 가족들은 그의 머리맡에 앉아, 죽음과 싸우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떤 불평도 없이 끙끙거리다가도, 네가 방에 들어서면, “아가, 이리 오너라. 와서 네 찬 손으로 내 뜨거운 이마를 식혀주련?”이라고 말했지. 200여 개의 만장이 그의 운구 행렬을 앞서 갔다.

나도 그런 식의 임종을 맞이하고 싶었다.

국밥집을 나와 찻집에 앉자, 안순옥이 장미를 화제로 꺼내었다.

“장미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뭘까?”

“처녀성.”

나는 작지 않은 나이의 여성이 로맨틱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속으로 감탄하며, 장미의 부드러운 꽃잎과 여인의 은밀한 속살을 비교해 보았다.

“적절한 상징이로군. 그러나 해석이 필요하네.”

“어느 면에서요?”

“실패한 생명의 상징이랄까, 억지로 이어붙이자면 자궁이 더 좋을 듯하네. 생명을 잉태해야 할 곳, 그러나 실패한 자궁, 매번 생리를 하는 처녀의 자궁, 그리고 씨를 맺지 못하는 장미 꽃.”

간척회사는 바다라고 하는 이 처녀지에 새로운 농토를 만들겠다고 했다. 독재자는 그 회사 회장에게, “당신이 경제 대통령이요”라고 말하며, 조상들의 생명이었으되 후손들의 생명일 바다의 전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저 바다는 처녀지가 아니었다. 거대한 생명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이들의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는 이들의 위장적 수사가 ‘처녀지’였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났어도, 그리고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지라도 바다의 죽음은 아직도 나에게 모호함 자체이다.

짐차를 운전해 오면서 안순옥이 말했다.

“아드님은 몇 살에 사고를 당했어요?”

“……마흔 아홉.”

안순옥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내 나이였네. 무슨 일을 하시다가, 어떤 이유로……”

“간척농장에서 트럭을 운전했지. 농산물이나 부산물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지. 일찍 죽은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큰 이유는 배운 게 없어 험한 일을 한 탓이겠지. 하나 더 꼽으라면 탕떼기라고 해서, 트럭 한 차 짐 실어 나르면 딱지 하나를 주는 식으루다 작업하는거지. 아이는 돈을 더 벌고 싶어 무리했을지도 몰라. 노동을 적대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더 뛰라고 말한 사람들이 이 아이를 죽인 셈 아니겠나. 내 아들은 그 회사 회장보다 훨씬 먼저 갔지. 그 회장은 이곳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했거든. 도서관을 볼 때마다 생각되는 것은, 사람들이 합의 하에 어떤 일을 한다면 저처럼 생색낼 필요도, 회장이 떼돈 벌 이유도 없을 것이야. 회장은 여행할 때에도 간호원을 대동했다지? 그는 자기가 가진 특권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었겠지.”

뒷말은 나의 혼잣말이었다. 나는 잠깐 옆에서 누가 듣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안순옥의 말이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정말 죽음까지도 공평한 것이 아니네요?”

죽음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서 다르다. 결코 공평하지 않다.

나는 특권을 누리는 삶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죽을 때 누군가가 손이라도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

누구의 위로도 없이 혼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싫다. 네가 살아있어, 내 죽음을 지켜보아 주었더라면……

그렇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안순옥에게 제안했다.

“자네, 무진농장에 농토도 없이 쓰러져가는 집 한 채 뿐이라면 우리 집으로 이사 오지 않겠나? 소지주였던 부친 덕분에 집이 널찍하네. 밭도 작지 않네. 자네 알다시피, 밭에는 감나무를 심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감나무를 더 심세나. 감나무 농사는 자네가 짓고, 수익도 가지게나. 대신 나를 돌봐 주고, 임종 시 손을 잡아주는 거야.”

“좋아요, 할아버지. 점잖으시고 지적이신 데다가, 잘 생기셨으니 맘에 들어요. 하하 농담이고요, 저도 감나무 농사지어서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다면 좋죠. 또 노인 돌보는 거야 제게 이력이 났죠. 부친의 경우도, 그리고 예전에 절에서 스승님 돌보는 것도 그랬죠. 상품 가치가 높은 먹감나무를 심어요, 우리. 내일 당장 심어요. 민주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 임종 하실 때 손을 꼭 잡아 드릴게요.” 하고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황혼이다. 저 빛은 잠시 후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이다. 나 역시 곧 사라지겠지. 내가 죽으면 내 육체의 주인은 내가 아닐 것이다. 나는 타인들의 몫, 타인들의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는 타인들의 입장에서만 회자될 것이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나면 어둠이 시작되듯이, 나에 대한 타인들의 평가도 또한 사라질 것이다.

잘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