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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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운지, 앙망, 전땅크…

 

요즘 인터넷 상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말들이다. 이는 극우적 인터넷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이하 일베)’를 중심이 펴져나가는 인터넷 비속어들이다. 일베는 특정인에 대한 악플과 극우적 콘텐츠 생산으로 최근 여러 언론에서도 조명을 받고 있는 화제의 커뮤니티다. 운지는 고 노무현대통령을 죽음을 모TV광고에 빗대 조롱하는 것이며, 앙망은 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사형선고 이후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에 나오는 단어로 이를 고 김대중 전대통령을 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 전땅크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격상시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용어는 50~60대의 보수층이 아닌 10~2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인터넷을 넘어 일상적인 비속어로 자리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커뮤니티의 규모가 커지면서 단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정치인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넘어 독재찬양,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 외국인, 노동에 대한 혐오와 극단적 지역감정을 내보이며 파시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로 여겨지고 개별적 인성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악플의 수준을 넘어 이들이 뉴라이트나 조갑제 등 극우적 인사들의 인식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내용들을 생산하는 사이트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머를 빙자하여 인기를 끌면서 상당한 규모로 성장함에 따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일베저장소 사이트 캡처(http://www.ilbe.com/)

 

10~20대의 보수화는 IMF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이슈였지만 최근 나타나는 이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90년대의 젊은 층의 보수화는 개별적 생존의 문제에서 비롯되어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양상을 뛰었다면, 2010년대의 보수화는 집단적 불안감 속에서 그것이 뭉쳐지고 파괴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민주적 의사과정이나 저항을 경멸하고 강렬한 리더십을 원하는 측면에서 파시즘의 초기 모습과 상당히 닮아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한국사회와 자본주의가 던져주는 무한경쟁과 낙오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이를 제압할 강력한 권위에 대한 추앙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사회계약론이 자연상태나 전쟁상태에 대한 불안감을 기초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근대사회계약론의 모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자연상태와 주권에 대한 해석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연상태가 전쟁상태를 유발할 수 있고 이를 방지하기위해 초월적 권력을 만들어야한다는 점은 홉스, 로크, 루소 등 근대사회계약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사회계약론의 요지는 개인은 계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고 초월적 권위에 스스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근대사회계약론에서 주목해야하는 점은 과연 실제 계약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개별의 보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초월적 권위에 의지하려한다는 점이다. 대개 개인은 자신의 보존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서 사회적 계약 속으로 들어가고 또 주권은 자신의 외부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함으로써 개인을 포섭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계약은 개인적 욕구와 그 자발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과 주권 사이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사회계약으로 인한 초월적 권위에 대한 인정이 개인이 주권에 포섭된 형식이 아니라 자발적 형태를 띠게 될 때 이는 파시즘으로 흘러갈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둘 간의 긴장관계는 종속으로 변한다.

 

출처: 블로그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lo9956&logNo=10153502640&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주권은 자연상태에 대한 공포를 매개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데 기존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자연상태는 북한과 관련된 전쟁, 적화통일과 같은 것이었고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확대 생산되어 왔다. 이러한 자연상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민으로 하여금 추상적 공포를 제시해왔다. 그 반면에 21세기 한국사회가 개인에 던지는 자연상태의 공포는 개인의 보존을 직접 위협하는 미시적 공포다. 개인적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 9%를 넘어서는 청년실업, 그나마 있는 직장들은 비정규직인 상황과 사회에서의 대화단절은 젊고 어린 학생들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추상적 공포는 젊은이로 하여금 그 실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여유를 주지만 개인의 실존과 관련된 공포는 이러한 상상력을 제한시킨다. 기존 한국에서 던져졌던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미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기성층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오지만 경제적, 사회적 인정과 관련된 공포는 젊은 층에게 훨씬 더 큰 위협을 안겨준다. 이러한 공포가 건강한 비판과 저항으로 나타나 경우도 많고 이를 20~30대의 대략적 정치적 성향이나 인터넷의 대부분 여론에서 확인 할 수 있으나 그 반대급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좌절 속에서 파국과 폭력적 권위를 기대하는 젊은 여론이 인터넷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일베’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일반적 용어와 다르게 사용된다. 민주화는 패배, 반대, 무엇에 당함 등의 의미를 지니고 산업화는 승리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는 인터넷공간을 넘어서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주화는 비속어 사용되고 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나는 것을 ‘민주화 당했다’고 표현한다. 민주화가 이렇게 경멸당하면서 반대급부로 ‘전땅크’는 추앙받는다. 이러한 ‘일베’의 회원은 100만여 명에 이르고 동시접속자는 2만여 명에 다 달한다. 이들은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적 커뮤니티에 쉽게 안착하지 못한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 응어리를 비뚤어진 형태로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이다. ‘일베’의 언어의 특징은 반말과 욕설이다. ‘일베’에서는 경어를 사용하면 욕설이 빗발친다. 그런데 이는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사회적 대화가 단절된 이들의 일종의 방언이다. ‘말할 수 없는 사회’에 그들은 가장 공격적인 대화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들끼리 공인한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를 통해 인정욕을 충족한다.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처럼 익명성 속으로 숨지 않고 정치적 조직화까지 꽤하고 있다. 파시즘은 이성적 영역이나 기존 기득층을 기반으로 하기보다 감성과 무산층을 기반으로 한다. 뉴라이트보다 일베가 더욱 우려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지난 대선의 결과를 단순한 세대대결로만 해석할 경우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집단적 불안감이 표출할 수 있는 폭력성에 대해 둔감해 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희망이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젊은 세대는 저항을 선택할 수 있지만 역으로 파시즘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한다. 20대의 투표는 30~40대의 투표와 다르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저항의식도, 사회정의에 대한 부채의식도 3040세대에 비하면 훨씬 흐리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실존적 입장에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박근혜정부의 독선이나 유신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이러한 자발적 파시즘이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매체를 매개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연예인에 대한 악플이나 음란성 등의 이유로 일베를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해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일 뿐이다. 공유될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은 일그러지기 쉽다. 이러한 감성을 위로받는 형태와 장소가 인터넷의 극우적 커뮤니티라는 것은 그들에게 일상 속에서 휴식과 위로가 될 공간이 제공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분노와 불안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오프라인에 만들어져야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젊은 파시스트들의 등장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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