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단편소설 ? 생명과 그 적대자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 ? 생명과 그 적대자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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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여정은 인생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 장미나무를 심어 놓으면 가지가 솟아 잎은 무성해지고 찬란한 꽃이 피울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꽃은 시들고 잎은 마를 것이다. 인생이라는 이름도 장미의 이름과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마흔여섯 개의 염색체를 가진 생식세포는 오만 종의 유전자 쌍을 토대로 자기를 형성해 간다. 너는 나의 아들이지만 너와 나는 같지 않다. 신비한 어떤 기제가 있어, 각자 정보를 선택한 대로 자기를 만들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장미의 유전자를 읽는 것은 인간의 유전자를 읽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장미의 유전자는 몇 쌍일까? 일곱 쌍? 아니면 여덟 쌍 정도? 완두콩의 염색체가 여섯 쌍이니, 장미는 적어도 완두콩보다는 더 복잡한 염색체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완두콩에는 없는 여러 가지 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미를 그 장미로 만드는 것은, 장미가 가진 유전자 정보뿐만 아니라 토질의 성분에도 달려있다. 장미는 뿌리가 흡수하는 자양분을 토대로 자기를 완성할 준비를 할 것이다. 자양분이 많다면 키도 더 클 것이고 꽃도 많이 필 것이다.

이곳 지표는 마사토이다. 나는 이 땅에 구덩이를 파고 깨끗한 황토흙을 채웠다. 황토 속에는 장미와 내 육체를 구성하는 성분들이 들어있다. 탄소, 질소, 산소 등. 이 장미는 번성하지는 못할지라도 건강할 것이다. 나는 이 장미가 무성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키가 크지 않아도 좋다. 아, 흰 장미라면 더 좋았을 것을. 역시 무덤가에는 색깔 있는 장미보다는 흰 장미가 더 어울릴 것이다.

네 엄마 무덤에는 국화를 심었다. 그때도 이렇게 황토를 복토해 국화를 심었다. 네 엄마는 살만큼 살았다. 네 엄마 무덤에는 국화가 무난하다. 명이 다해 죽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너는 네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평화로워 보이는 국화로는 충분하지 않다. 네 무덤에는 장미가 적절하다. 너는 만개한 한 때를 살았다. 그러나 너의 죽음은 평온하고 자연이 만들어 낸 죽음이 아니었다. 저 바다의 죽음과 같은 격렬한 죽음이었다. 네 무덤에는 장미가 적당하다. 다른 식물들보다 더 격렬하게 사는 장미가 적당하다. 맹렬하게 꽃 피우는 것도 그렇고, 가을이 오기 전에 꽃이 시드는 것도 그렇다.

장미나무를 심는 것이 어쩌면 내 생 최후의 노동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내 생을 모두 타인의 노동에 맡겨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들아. 내가 이 장미꽃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모든 정열을 다 써버리고 시드는 때의 장미 잎과 같다.

그러나 장미와 나는 다른 데가 있다. 내 육체는 쇠잔해 가는데, 정신은 이리도 청명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정확히 들을 수 있다. 내 정신, 기억력은 여전하다.

너는 네 삶의 목표가 있었나? 너는 회사일, 그리고 출근하기 전과 퇴근 후에는 농사일에 매달렸다. 너의 인생을 계획하거나 돌아볼 틈이 있었을까?

네가 살아있을 때 나는 너를 위해 장미를 심어주지 못했다. 아! 장미를 보며 네 생을 계획하렴, 하고 네게 말 할 수만 있다면… 이제나마 나는 너를 위해 장미를 심는다.

나의 육체는 장미와 비슷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우주 안에 어디 새로운 것이 있을쏘냐. 다 같이 흙이라는 한 고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름 붙여진 것들의 허망함이여!

의사의 말처럼 죽는 순간 나의 뇌는 전기신호를 멈출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과 죽어있다는 차이는 뇌의 전기신호 여부이다. 그러나 죽는 순간 나는 죽음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를 진단한 의사가 하는 말들, 심히 걱정스러운지 진단결과를 내게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 의사의 토막말들을 나는 재조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약이 할아버지에게 잘 듣지 않는군요.”

“어째서 그런가?”

“할아버지의 몸이라는 기계가…… 그러니까 모든 기계는 쓰면 낡기 마련이잖아요? 약효가 좋지 않은 이유도 그런 거지요. 낡은 기계에 기름을 칠해도 삐걱거리잖아요?”

의사는 대단히 말을 조심했다. 나를 실망시키려 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경우에는 표정관리를 잘 해야만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의사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런 기계로 나는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얼마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죠. 하느님이나 할 수 있죠. 약이 잘 듣지 않는 것으로 봐서 몸이 쇠약해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죠.”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네 무덤가에 장미를 심는 일이다.

안순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는 다시 짐차를 몰고 돌아갔다.

“할아버지, 씩씩하게 장미 잘 심고 돌아가세요. 먹감나무 묘목 가지고 내일 다시 올게요,”

국밥을 먹다가 안순옥이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렇게 국밥 잡수실 돈은 어디서 나세요? 아드님? 아니면 젊어서 돈을 많이 벌어놓으셨어요?”

“젊었을 때야 많이 벌었지. 그러나 지금 쓰는 돈은 내가 번 것이 아닐세.”

“그럼 누가 번 돈이에요?”

“아들이 남긴 유산.”

안순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아들이 간척회사 농장에 다니다가 사고로 죽었어. 보상금을 내게도 조금 주었지. 지금 내가 쓰는 돈도……”

안순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유 할아버지, 내가 괜한 질문을 했나봐요. 그렇다고 식사하시면서 우시면 어떡해요? 진정하세요, 할아버지.”

눈물처럼 신비한 것이 또 있더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감정이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 변하는 현상이 눈물이다. 그러나 나의 육체가 없다면 보이지 않는 감정도 없다. 나의 이 마른 몸에서 눈물이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정신이 느낀 것이 생리적으로 표현될 때 눈물이 된다.

육체가 쇠잔한데도 정신이 말짱한 것이 신비이듯, 육체가 쇠잔해도 젊은 여인을 보면 웃음이 날 듯 반갑다는 것도 신비스럽다. 내 기억의 저편 어느 한 구석에 웃음 한 자락이 붙어있어, 내가 보는 대상에 따라 과거 활발했던 내 육체가 만들어 내었던 웃음처럼 반가운 기억을 일깨우는 것일 게다. 눈물과 웃음은 모두 기억이라는 정신이 육체를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노쇠하고 말라비틀어진 내 육체는 상황에 따라서 과거 내 육체가 경험했던 것을 복사해 낸다.

나는 장날마다 다릿목에 묘목장수가 좌판을 벌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농사짓는 일이 힘들어지면서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묘목장수는 우럭포 등, 말린 생선도 함께 팔고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쉬엄쉬엄 걸어서 다릿목에 도착했다. 묘목을 파는 여인은 나를 기억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묘목을 늘어놓은 곳으로 다가가 무릎을 구부려 않았다. 여인이 물었다.

▲ ⓒ프레시안(김하영)

“할아버지, 묘목 사시게요?”

“흰 장미 한그루 사고 싶은데.”

“흰 장미는 오늘 없고요, 혹시 꼭 필요하시다면 다음 장날 제가 가지고 나올 수도 있어요. 명함 드릴 테니 전화 주시겠어요?”

명함을 보고야 그녀의 이름이 안순옥이고, 집이 고북에 있는 무진농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 장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내가 다음 장날 다시 나올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거든. 오늘 가지고 나온 장미는 무슨 색깔인가?”

“잡종이지요. 빨간 색도 피우고 노란 색도 피울 거예요.”

“좋네, 장미 한 그루 싸 주게.”

안순옥은 나무를 싸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참 특별하시네요. 과일나무를 심으시다가, 이제는 장미까지… 묘목을 사 가는 노인들은 가끔 있지만…”

“노인들이 과일나무라…… 그 나무 열매 따먹을 때까지 살라는 보장도 없는데 과일나무를 심는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인가?”

안순옥이 감탄을 섞은, 높은 소리를 내었다.

“스피노자! 할아버지, 공부 많이 하셨네요?”

“내가 예전에 수원 농림학교를 다녔거든. 내 선생이 후에 농림장관도 하고 그랬어. 그 선생한테 들은 말인데 갑자기 기억나네 그려.”

“와아, 인텔리셨네요? 그럼 할아버지는 젊어서 직업은 뭐였어요?”

“농사지었지.”

“공부하신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셨네요?”

“선친께서 내가 대처로 나가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지. 험한 세상이니 몸 사리고 집에 있으라고……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았지.”

“염라대왕도 부러워했겠네. 어디에서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 수 있어요? 어디에서 사세요?”

“갈마리.”

원래의 마을 이름은 갈매, 쪽빛 강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일정 때 마을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갈마리가 되었다. 목마를 갈, 말 마 자를 붙여 갈마리라 했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자 호사가들이 나서 마을 이름에 뜻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돌곳이 형국이 물을 찾는 목마른 말 머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새로 지은 이름이 옛 이름을 당할까? 어디를 파나 물 잘 나오지, 황토에 거름 주면 농사 잘 되지, 사람 살기 좋은 땅이었다. 농사지을 땅 없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바닷물만 쫓아다녀도 배불렀다는 말이 있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는 누구나 먹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땅 없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맨몸으로 바다에 가서 먹을 것을 벌어왔다. 큰 시내와 바다가 만나는 곳은 갈맷빛 그것이었다. 간척하기 전 까지는 그 이름이 적당했다.

생도둑놈들이다. 한 바다를 ‘내 것이다’라고 울타리 치는 놈들이 도둑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름붙일 수 없는 것에 네 것 내 것으로 이름붙이다니!

간척사업을 한 뒤로는 목마를 갈, 말 마, 갈마라는 지명이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돌곳이 뻘, 기름져 만물이 살아 움직이던 물기 먹은 저 갯벌은 시체처럼 황폐해졌다. 햇볕에 굳은 갯벌 흙은 돌덩이처럼 차디차다. 농사지을 곳이라야 간척지의 일부분 정도 뿐, 나머지는 썩은 물로 차 있다.

나는 농부였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도수 어부이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터 아래, 고기들이 먹이를 찾는 곳에 주낙을 놓을라 치면 바구니 가득 고기를 잡았다. 한바다 가득 물이 들어찬 꿈꾸기 여러 번이었다. 간척되기 이전의 바다를 꿈꾸고 일어나면 항상 목마르듯 슬픔이 차오르곤 했다.

나는 신화를 믿는다. 바다에서 생명이 태어났으며,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신화는 이처럼 인간의 자궁을 두 곳으로 지목했다.

바다, 인간의 자궁도 죽을 수 있다는 증거가 저 간척지이다. 저 바다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다. 격렬한 죽음이다. 바다 속 만물이 일어나 죽음에 저항하다가 껍질만 남기고 전멸했다. 커다란 죽음 자체이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너를 담당한 의사가 내게 말했다.

“뇌사라는 것을 설명 드리기가 어렵군요. 뇌사란 곧 의사가 진단하는 죽음이에요. 뇌가 전기신호를 멈추었다 것은 인간이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너의 심장은 아직 따뜻한데 의사는 네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 너를 집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뇌사 이후 마흔 여덟 시간이 지나면 영안실로 모셔야 합니다.”

나는 너를 집에서 임종하도록 해야 했다. 태어난 곳에서 죽어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 신앙이었다. 그리고 여기 양지바른 곳에 너를 묻었다. 내가 너를 묻었기로서니 정말 너를 묻었을까?

네 무덤을 밟듯이 장미의 뿌리를 밟는다.

장미를 비닐봉지에 넣어 주며, ‘이 장미는 뿌리가 실해서 잘 살 것’이라는 안순옥의 말을 이어 내가 물었다.

“그래, 자네의 뿌리는 어디인고?”

“그게 무슨 말이예요, 할아버지?”

“그러니까, 자네 고향을 물은 거네.”

“뿌리가 왜 고향 이예요?”

“나는 고향 사람들, 특히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한 거네. 갈마리에서 살던 사람들 중에는 농토 없이 바다에다 뿌리를 두고 살던 사람들이 많았거든. 그런 사람들은 바다가 간척지가 되자 마을을 떠났지. 일정 때 소작하던 땅을 잃고 유리하던 사람들처럼 자궁을 떠난 사람들의 곤궁한 삶을 아네. 자기 삶의 자양분을 빨아대는 곳, 그곳이 고향이요 자궁이 아니겠나?”

안순옥이 눈을 작게 하고는 말했다.

“간척회사에서는 지방 사람들 일터를 많이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던데요? 신문에도 났었어요.”

나는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아, 수만 명 일터를 빼앗고, 몇 십 명 일터를 준다는 것이 대수야?”

“수만 명이라뇨?”

“도수어업이라고, 그러니까 배나 특별한 도구 없이 간단한 농기구를 들고 바다로 가서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저 바다를 끼고 도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었네. 바다가 간척지가 되자 그 몇 만 명이 하루아침에 할 일을 잃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네. 뿌리, 자양분을 빨아들일 땅을 잃어버린 꼴이지, 그 사람들이나 나 모두.”

내 나름대로 심각한 이야기였으나, 안순옥이 꺄드득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그러면 제 고향은 장터네요? 저는 장바닥에 뿌리를 두고 살거든요. 이건 농담이고, 제 고향은 고북, 무진농장이예요. 농토 한 떼기 없는 그곳에서 태어났죠. 간척지 옆이예요. 전에는 경치가 아주 좋았어요. 지금은 삭막함 그 자체죠. 비행기가 농약이라도 뿌릴라 치면 빨래 걷으랴, 장독 덮으랴, 숨도 못 쉬고 살죠.”

“아버지가 무진농장을 운영하시는가?”

“아뇨, 조경 노동자였죠, 나무에 깔려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저런, 그럼 묘목은 누가 키우나? 누구하고 사나?”

“동생하고 함께 살죠. 묘목은 여기 저기 농장에서 받아오죠.”

나는 장미 나무를 받아들었으나 무엇인가 그냥 가기가 섭섭했다. ‘스피노자!’라고 소리치던, 그 활짝 웃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아니면 내 기억 저편에서 나와 함께 웃고 슬퍼했던 고향사람의 뿌리 잃은 모습을 안순옥에게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어섰다 않았다 하기를 반복한 후에 말했다.

“자네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노망든 노인이라고 하지는 말게. 일본에서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직업이 있다고 하네. 대개 노인들이 이야기하고, 젊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식이라네.”

안순옥이 두 손뼉을 부딪쳐 ‘짝’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아하, 제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어 드릴까요?”

“아니, 더 있네. 내가 점심을 살 테니, 나하고 이야기함세.”

그리고 무진농장이라고 쓰인 짐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또, 내가 갈마리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하네. 택시비 낼 테니 자네 차로 나를 갈마리까지 태워다 주지 않겠나?”

안순옥이 웃으며 말했다.

“어렵지 않아요. 점심은 어차피 먹어야 되고, 조금 있으면 동생이 잠시 교대해 주러 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노인한테 대접해야지 오히려 얻어먹어서 되겠어요?”

“돈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되네. 나는 조금 지나면 이제 돈 쓸 일도 없어.”

우리는 장날마다 문을 여는 국밥집으로 가서 마주 앉았다.

그녀는 장사하면서 늦깎이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배움에 미련이 있다고 했다.

“제 법명이 능인이었어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스님이었다는 게야, 아니면 보살계를 받았다는 거야?”

그녀가 간단히 자신의 이력을 설명했다. 승가대학을 다닐 때 모친이 죽었다. 문제는 젖먹이 동생이었다. 부친도 몸이 불편해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환속했다. 동생을 돌보며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운전하며 장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예 이 길로 나섰다. 크게 욕심 부리지 않으면 두 식구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기 동생이 한창 공부할 나이인데 장사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젊은 시절, 중이 걸머지는 배낭에 주목했다. 암울한 시대였다. 항상 떠나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떠날 수 없었다. 부모를 모셔야 하고, 너를 키워야 했다.

나의 부친, 너의 조부의 임종을 기억한다. 한의사가 왕진 왔다가 돌아간 후 부친은 “칠성판을 가져오너라”, 하고는 그 위에 누웠다. 임종까지 열흘 동안, 가족들은 그의 머리맡에 앉아, 죽음과 싸우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떤 불평도 없이 끙끙거리다가도, 네가 방에 들어서면, “아가, 이리 오너라. 와서 네 찬 손으로 내 뜨거운 이마를 식혀주련?”이라고 말했지. 200여 개의 만장이 그의 운구 행렬을 앞서 갔다.

나도 그런 식의 임종을 맞이하고 싶었다.

국밥집을 나와 찻집에 앉자, 안순옥이 장미를 화제로 꺼내었다.

“장미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뭘까?”

“처녀성.”

나는 작지 않은 나이의 여성이 로맨틱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속으로 감탄하며, 장미의 부드러운 꽃잎과 여인의 은밀한 속살을 비교해 보았다.

“적절한 상징이로군. 그러나 해석이 필요하네.”

“어느 면에서요?”

“실패한 생명의 상징이랄까, 억지로 이어붙이자면 자궁이 더 좋을 듯하네. 생명을 잉태해야 할 곳, 그러나 실패한 자궁, 매번 생리를 하는 처녀의 자궁, 그리고 씨를 맺지 못하는 장미 꽃.”

간척회사는 바다라고 하는 이 처녀지에 새로운 농토를 만들겠다고 했다. 독재자는 그 회사 회장에게, “당신이 경제 대통령이요”라고 말하며, 조상들의 생명이었으되 후손들의 생명일 바다의 전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저 바다는 처녀지가 아니었다. 거대한 생명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이들의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는 이들의 위장적 수사가 ‘처녀지’였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났어도, 그리고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지라도 바다의 죽음은 아직도 나에게 모호함 자체이다.

짐차를 운전해 오면서 안순옥이 말했다.

“아드님은 몇 살에 사고를 당했어요?”

“……마흔 아홉.”

안순옥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내 나이였네. 무슨 일을 하시다가, 어떤 이유로……”

“간척농장에서 트럭을 운전했지. 농산물이나 부산물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지. 일찍 죽은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큰 이유는 배운 게 없어 험한 일을 한 탓이겠지. 하나 더 꼽으라면 탕떼기라고 해서, 트럭 한 차 짐 실어 나르면 딱지 하나를 주는 식으루다 작업하는거지. 아이는 돈을 더 벌고 싶어 무리했을지도 몰라. 노동을 적대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더 뛰라고 말한 사람들이 이 아이를 죽인 셈 아니겠나. 내 아들은 그 회사 회장보다 훨씬 먼저 갔지. 그 회장은 이곳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했거든. 도서관을 볼 때마다 생각되는 것은, 사람들이 합의 하에 어떤 일을 한다면 저처럼 생색낼 필요도, 회장이 떼돈 벌 이유도 없을 것이야. 회장은 여행할 때에도 간호원을 대동했다지? 그는 자기가 가진 특권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었겠지.”

뒷말은 나의 혼잣말이었다. 나는 잠깐 옆에서 누가 듣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안순옥의 말이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정말 죽음까지도 공평한 것이 아니네요?”

죽음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서 다르다. 결코 공평하지 않다.

나는 특권을 누리는 삶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죽을 때 누군가가 손이라도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

누구의 위로도 없이 혼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싫다. 네가 살아있어, 내 죽음을 지켜보아 주었더라면……

그렇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안순옥에게 제안했다.

“자네, 무진농장에 농토도 없이 쓰러져가는 집 한 채 뿐이라면 우리 집으로 이사 오지 않겠나? 소지주였던 부친 덕분에 집이 널찍하네. 밭도 작지 않네. 자네 알다시피, 밭에는 감나무를 심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감나무를 더 심세나. 감나무 농사는 자네가 짓고, 수익도 가지게나. 대신 나를 돌봐 주고, 임종 시 손을 잡아주는 거야.”

“좋아요, 할아버지. 점잖으시고 지적이신 데다가, 잘 생기셨으니 맘에 들어요. 하하 농담이고요, 저도 감나무 농사지어서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다면 좋죠. 또 노인 돌보는 거야 제게 이력이 났죠. 부친의 경우도, 그리고 예전에 절에서 스승님 돌보는 것도 그랬죠. 상품 가치가 높은 먹감나무를 심어요, 우리. 내일 당장 심어요. 민주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 임종 하실 때 손을 꼭 잡아 드릴게요.” 하고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황혼이다. 저 빛은 잠시 후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이다. 나 역시 곧 사라지겠지. 내가 죽으면 내 육체의 주인은 내가 아닐 것이다. 나는 타인들의 몫, 타인들의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는 타인들의 입장에서만 회자될 것이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나면 어둠이 시작되듯이, 나에 대한 타인들의 평가도 또한 사라질 것이다.

잘 있어라.

한국과 미국 1프로가 일으킨 쿠데타를 막자! 강은희의『위험한 거래』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한국과 미국 1프로가 일으킨 쿠데타를 막자!

– 강은희 저,『위험한 거래, 한미FTA의 베일을 벗긴다, 』-
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강은희 책은 쉽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 되어야만 이 나라 서민이 살 수 있습니다.” “한미에프티에이 어려운데 누가 알아요? 누가 관심 갖겠어요?”

내가 둘레 분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한미매국협정은 사실 어렵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한미매국협정 하면 우선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든다. 전문가들만이 다루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미매국협정 때문에 당신들이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볼 것이 불을 보듯 한데도 그렇다.
강은희 지음, 『한미FTA의 베일을 벗긴다 위험한 거래』, 책이 있는 마을, 2012.
강은희는 많은 사람들이 한미매국협정을 어려워 한다는 사실을 크게 의식한 듯하다. 강은희는 1장과 2장에서 먹거리 문제를 다뤘다. 독자들이 한미매국협정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배려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1장에서 강은희는 재벌이 먹거리 시장, 즉 골목상권까지 차지하려는 사실을 정확히 다룬다. 재벌이 전국 편의점 대다수를 차지한다. 골목에 있던 구멍가게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대신에 재벌 편의점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재벌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소업체들이 편의점에 삼각김밥등을 댄다. 삼각김밥은 중소업체가 창조한 상품이다. 재벌들은 편의점에서 잘 팔리는 상품을 자체 생산한다. 많은 중소업체들이 망한다. 재벌은 또 그치지 않는다. 카길, 몬산토로부터 값싸게 질 낮은 먹거리 재료를 사 온다. 그 재료에는 유전자변형 식품도 들어있다. 재벌들은 최소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내려고 안달한다. 이 땅 사람들 건강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강은희는 재벌이 먹거리 시장을 흙탕물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국 재벌이 한미매국협정을 왜 옹호하는 지를 아주 쉽게 독자한테 알려준다. 이 땅 서민들이 질 나쁜 먹거리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알려준다.

서민들은 앞으로 비싼 의료비를 어찌 감당해야 하나?

 

‘위내시경 한국 4만원, 미국 100만원. 대장내시경 한국 5만원, 미국 160만원. 맹장수술 한국 30만원, 미국 900만원. 승모판치환술 한국 180만원, 미국 5700만원. 슬관절치환술 한국 50만원, 미국 6600만원’(마포의료생협 소식지, 2011년 3월)

지금 한국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전 세계의 국민건강보험제도와 견주어 볼 때 상당히 좋은 제도이다. 더 보완할 점이 있지만 좋은 제도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최근에 피부과에 간 적이 있다. 병원에서 진찰 받고 주사 맞는데 한 5천원 냈다. 약국에서 3일치 약 사는데 한 3천 원 냈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적은 돈을 냈다. 위 인용 글에서 보듯이 미국에서는 현실적으로 꿈 꿀 수 없는 일이다. 3일치 약 값이 3천원인 까닭은 그 약이 복제약이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약이었다면 몇 배 더 비쌀 것이다. 열 배 이상 비싼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맹장수술 받는데 40만원이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다르다. 900만원에서 2000만원 사이이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 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10년, 20년, 30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맹장 수술비가 미국 수준이 될 것이다. 내가 늙어서 겪게 될 현실이다. 우리 자식들이 겪게 될 현실이다. 한미매국협정이 시작되었으니 의료민영화는 이루어질 것이고 약값과 의료비가 오르는 것은 서럽지만 일어날 사건이다. 그렇다고 병 없이 살 수 있을까? 질 나쁜 먹거리를 먹는 서민들이 병 없이 살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산에서 땔감을 구하는 노인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우리 집에서 겨울에 내는 도시가스비가 한 달에 13만원이다. 우리보다 집이 더 큰 경우에는 당연히 도시가스비가 더 나올 것이다. 생활비가 넉넉하지 않은 노인들에게 한 달 13만원은 큰돈이다. 그래서 노인들 중에는 도시가스를 쓰지 않고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그나마 전기세가 적게 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 되지 않고 지속되면 노인들이 겨울에 전기장판조차도 쓰실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최근 1년 사이에 전기세가 두 번이나 올랐다. “최근 한국전력공사는 전기요금 인상안을 또다시 제출했다. 벌서 일년 사이에 세 번째다. 한국전력공사 이사회는 지난 5월 16일 전기요금을 평균 13.1%에 달하는 인상안을 의결한 뒤 지식경제부에 제출했다. 작년 2011년 8월과 12월에 각각 4.5%와 4.9%를 인상한 뒤 5개월 만에 또다시 인상안을 제출한 것이다.”(226쪽)한미매국협정이 시작 되었으니 한전 민영화가 서서히 이루어질 것이다. 전기세가 오르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오르는 폭도 더 가파를 것이다. 전기세가 너무 오르면 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이 88만원세대들도 겨울에 난방비를 아끼려고 산에서 땔감을 구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21세기에 바로 이 땅에서 20세기 초중반, 19세기 이 전에 일어났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계삼은 말한다. “석유가 이제 한 세대만 지나면 완전히 끊어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어디 있겠습니까.”(<작은책> 2012년 3월호, 94쪽) 앞으로 30년 또는 40년 뒤에는 석유자원이 지구상에서 바닥날 것이다. 만약 이 말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전기세는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를 것이다. 2003년 폭염 때 프랑스에서는 노약자 약 1만5천명이 돌아가시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름 폭염 때 전기세 아끼려고 에어컨 설치 못하는 노인, 에어컨이 있어도 틀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한미매국협정은 재앙이다.

한국 헌법은 개밥의 도토리일까?맞다. 한국 헌법은 개밥의 도토리이다. 미국 주법이 제일 힘세다. 한미매국협정문은 그 다음으로 힘세다. “대법원이 2007년 1월 12일 법무부에 보낸 의견서를 보면 ISD 제도의 문제점은 주권의 침해 가능성, 중개청구 대상에 사법부의 재판이 포함되는 문제, 국가의 공공정책 왜곡 문제, 중재절차의 투명성 문제, ISD가 주로 미국투자자들의 보호 장치로 기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143 – 144쪽) 그래서 몇 몇 뜻있는 사람들은 한미매국협정 국회 날치기 통과를 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ISD 즉투자자 국가 소송제는 이 땅 서민들한테 재앙이다. 나라를 뛰어넘는 자본이 국제분쟁위원회에 이 나라 전기, 철도, 수도 등등에 관련해서 한국을 상대로 제소하면 백이면 백 한국 정부가 저들에게 벌금을 물어줘야 한다. 저들에게 한국 헌법을 들이대면 저들은 비웃을 것이다.

“ISD는 미국투자자들의 손실을 보존해주기 위해 국가의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 부어야 하고 국가의 복지정책에 심각한 재정적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중재재판’을 담당하는 세계은행은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국제금융기구이다. 중재 결과는 대부분 투자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외국 사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145쪽) 한미매국협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될 때 민주당(2012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87명 가운데 47명은 출판기념회 참석했다. 민주노동당과 일부 민주당 국회의원만이 한나라당(2012년 새누리당) 국회의원과 몸싸움을 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김선동은 온 몸을 던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노무현과 이명박은 윤봉길 의사한테서 회초리 맞아야 한다

 

▲ 위험한 거래, 강은희 지음, 책이 있는 마을 펴냄

농업을 우습게 본 노무현과 이명박은 윤봉길 의사한테서 회초리 맞으면서 배워야 한다. 나라를 뛰어넘는 식량자본 카길과 몬산토가 윤봉길 선생 말을 더 잘 따른다. 서럽고도 슬픈 현실이다. 억장이 무너진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만 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식량품을 비롯하여 의복 주옥의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공업의 원료까지 하나도 농업생산에 기대지 않은 것이 없느니만치 농민은 세상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 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농민의 세상은 무궁무진합니다.”-윤봉길 의사의 ‘농민독본’ 중에서- (‘고인돌’출판사 사장인 정낙묵 명함에서 다시 가져옴)

일본은 다른 나라와 무역 협정 맺을 때 일본 농업을 확실히 보호한다. 라고 송기호는 말했다. 한국은 일본한테서 배워야 한다.

우리 아버지한테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내가 어린이(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논에서 거머리 잡는 방법이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다르다. 일본 사람은 깡통을 허리에 매고 잡은 거머리를 깡통에 넣는다. 한국 사람은 (잠시 아버지가 웃으며 말을 멈춘다.) 잡은 거머리를 같은 논 저 쪽으로 던진다. 저 쪽으로 휙 던진다.

지금 한국 땅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되지 않고는 절대로 복지정책을 펼 수 없다. 경제 민주화를 이룰 수도 없다. 그런데도 한미매국협정이 이번 대선에서 쟁점도 되지 못한다.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 이정희만이 홀로 한미매국협정 폐기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2012년 4.11 총선 전에는 전국에서 들끓었던 한미매국협정 반대시위가 지금은 왜? 일어나지 않을까. 이 땅 진보정당 책임이 크다. 이 땅 시민단체 책임이 크다. 이 땅 지식인, 언론인 책임이 크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한미FTA의 베일을 벗긴다 위험한 거래』이 책을 많은 사람이 읽자. 한미매국협정이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한테 이 책을 선물하자.

한미매국협정을 폐기해야 한다. 폐기한 후 천천히 연구해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다시 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천덕꾸러기처럼 무시당해 온 이 땅 농민을 구해야 한다. 나라를 뛰어넘는 자본으로부터 이 땅 공공부문을 지켜내야 한다. 그들로부터 이 땅 99프로를 지켜내야 한다.

2003년 폭염 때 프랑스에서 노약자 약 1만5천명이 돌아가신 사건을 잊지 말자!

한국 자살률이 2012년 지금 세계 1위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한국에서 한미매국협정 이제 시작이다!

 

 

비극에서 희망을 줍는 광대, 안병대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 [청춘의 서재]

 

어두운 무대 한 귀퉁이, 비탄에 잠긴 여배우가 핀 조명을 받으며 주저앉아 있다. 삶의 전부라 여겼던 연인과 이별한 뒤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보인다. 힘없이 혼잣말을 내뱉던 여배우는 점차 분노와 허탈감, 애증과 모멸감에 몸을 떨며 격앙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격한 대사를 토해내다 끝내 실신하는 장면이 이 연극의 절정이다. 나는 여배우로 분장한 딸의 눈에서 순간 ‘번쩍!’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배우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안 돼.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야지.. 조바심으로 입이 마른다. 절규하며 쓰러진 여배우, 그리고 암전.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이어지고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끝내 눈물 흘리지 않은 채 슬픔과 고통의 연기를 해낸 딸이 자랑스러웠다.

 

청년 ‘햄릿’을 만나 평생의 인연 ‘셰익스피어’를 끼고 살다.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 안병대 씨의 말처럼 ‘연극은 지독한 중독’이다. 무대 중독에 빠져 지내던 딸과 가슴 졸이며 함께 울고 웃었던 어미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 어린 십대의 딸이 혹독한 연습을 견뎌내며 수없이 오르내리던 무대, 그것은 땀과 눈물과 고행을 거쳐 새롭게 탄생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기적 같은 체험이었다. 한바탕 꿈을 꾸듯이 나를 잊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펼치고 나면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져 내리는 무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곳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날개 없이도 날아다닐 수 있는 꿈과 상상의 세계이다. 그 무대에 서 본 이, 그 무대를 만들고 꾸민 이, 무대에서 함께 호흡해본 모든 이들은 기꺼이 이 중독에 함께 빠져든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주며 조용한 발걸음을 이끈 저자는 어느새 훌쩍 무대 위로 뛰어올라 광대로 변신해 있었다.

이 책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독한 인연은 운명’인가 보다

안병대 씨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시절 야학활동을 하며 만난 ‘햄릿’은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에 금방 잡히지도 않았고, 연하기도 강하기도 달기도 쓰기도 떫기도 맵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날 이후 30년 동안 껴안고 산 셰익스피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독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햄릿’을 만나 처음 맛 본 인생의 온갖 맛과 냄새와 감촉은 청년 안병대에게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으로 각인되었을지 모른다. 유한하고 변덕스런 인간과의 첫사랑이 아닌 자기 생애의 첫 궤적을 뚫고 들어온 강렬한 체험이기 때문에. 나무 주걱으로 엉덩이를 맞아가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땀과 눈물로 익히고 올라선 소녀의 첫 무대, 나의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헌납해 버린 문고판 명작선 50권과의 만남, ‘햄릿’을 만난 저자의 떨림이 나의 추억 속에서도 파문을 일으킨다.

 

원형극장의 회전 무대 관람하듯 입체적인 내용 전개, ‘희망’의 다른 이름, 셰익스피어 비극

저자는 셰익스피어에게 고리타분한 학술적 접근으로 다가서지 않고 400년이란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연출가이자, 배우, 작가, 관객의 입장에서 친근하게 소개한다. 특히 ‘성격 비극’이라 명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세계로 이끌면서 황홀하고 거친, 그렇지만 발을 빼고 싶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숲으로 과감히 이끈다.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독자에게 저자의 이 같은 시도는 매우 참신하고 친근하다. 마치 무대 전체가 회전하는 원형 극장에 앉아 무대의 뒷면까지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관객의 속마음을 꿰뚫는 노련한 솜씨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중세 연극에 빠져들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또 다른 이름의 희망이다’라는 프롤로그의 소제목에서 저자가 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몰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총 37편의 희곡, 4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를 남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 중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4편의 비극을 추려낸 저자는 꿈을 빌어 셰익스피어의 말을 옮긴다.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완전한 선이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언제나 선이 이길 수는 없다” 지뢰처럼 널린 악에 의해 선도 함께 폭발하고 폐허가 된 우주는 새로운 선의 질서로 다시 세워진다는 셰익스피어의 법칙을 전하면서 저자는 선이 제물로 바쳐지는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토록 강렬한 비극의 세계가 슬프지만 우울하지 않고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어서 비극에 사로잡힌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비극이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본 것인가, 악한 존재로 본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이끌고 저자는 다시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직접 답을 찾아보라고.

 

‘햄릿’, 중세를 걷어내고 고통스런 인간의 삶 투영하다

‘햄릿’은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론의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엄숙한 소명을 스스로 짊어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114쪽)였던 ‘햄릿’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진실인가를 묻는 자였다. ‘햄릿’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서 세상의 악에 맞서 복수를 꿈꾸다 허망하게 쓰러지는 유약한 청춘으로 그려진다. 그는 세상도, 여자도 모두 역겨울 뿐만 아니라 복수를 꿈꾸더라도 마음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완벽주의자이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뇌하기만 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그는 그대로 중세시대의 인간이며, 셰익스피어 자신이기도 하다. 16세기 중세의 화두는 ‘신’에 맞서는 ‘인간’의 성찰이 아니었는가. “마음속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엉뚱한 생각일랑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마라.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시비판단은 삼가야 한다”(83쪽)는 ‘플로니어스’의 대사가 운명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는 ‘햄릿’을 조롱한다. ‘햄릿’은 인간의 비극이 ‘신’과 ‘인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원형이다. 저자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고통의 삶이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의 삶 자체라고 덧붙인다.

 

‘죽이고 사랑하리라’ 핏빛 사랑의 파국, 천성만 남은 ‘왕’과 ‘광대’는 다를 바 없다

“앞으로는 슬픔이 사랑에 따르리라

사랑은 의심에 사로잡혀

시초는 달콤해도 끝내는 쓴맛으로 변하리라” (<비너스와 아도니스> 1136-1138행)

비너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죽음을 맞은 아도니스가 자줏빛 아네모네로 핀 것을 보고 비너스가 한 예언이다. 불멸의 사랑을 꿈꾸는 모든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저주는 없을 것이다.

‘죽이고 사랑하리라’는 ‘오셀로’의 소제목은 비너스의 저주보다 더 짙고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긴다. 사랑 자체가 인간을 짧은 행복과 긴 슬픔, 그리고 때때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걷어치운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질투와 의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 ‘오셀로’, 한순간의 광기에 휩싸여 평생토록 사랑한 아내를 목 졸라 죽인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98~1990)가 문득 겹쳐진다.

흑인 장군이었던 ‘오셀로’의 불같은 성격이 지고지순한 백인 아내 ‘데스데모나’와의 역설적인 사랑을 비극으로 몰아갔지만, 오히려 이들의 파격적인 사랑을 등불 삼아 현대인의 얕고, 약은 사랑을 들추어보게 된다. 나이도, 신분도, 조건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끝내 간교한 ‘이아고’에 의해 파멸의 쓴맛을 보았지만 21세기의 사랑은 시작부터 달콤하지도, 조건을 뛰어넘지도 않기에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이어진다. 쓴맛을 보지 않는 사랑의 씁쓸함이 더 오래 남는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파탄에 빠지는 가장 불우한 왕 ‘리어 왕’이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사랑하는 부모에 비해 효도하는 자식이 턱없이 희소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오죽 충성스런 신하, 효도하는 자식이 없었으면 ‘충효’라는 덕목을 유교의 첫째가는 가치로 내세웠을까하는 삐딱한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백두난발을 하고 광풍 속을 미쳐 날뛰는 ‘리어 왕’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오래 오래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한 희망을 보는 듯해 서글퍼졌다. ‘늙음’은 약한 인간을 더욱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데, 그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리어 왕’은 마음의 눈을 갖지 못하고 나이 먹은 댓가를 가혹하게 받은 셈이다.

“모든 것을 다 주고 타고난 천성만 남았으니, 왕이나 광대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195쪽)라고 조롱하는 광대의 목소리, “노인이 쓰러지면 젊은이가 일어서는 법이지”(206쪽)라고 내뱉는 에드먼드의 대사가 인생의 비정함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숨도 멎지 않은 부모의 곁에서 물려받은 재산 다툼으로 혈안이 된 자식들을 보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양의 ‘양심’과 이리의 ‘욕망’을 지닌 나약한 인간, 무사는 시대를 바꾸고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

어느새 ‘맥베스’를 공연하는 극장으로 우리를 인도한 저자는 셰익스피어와의 대화로 압도해나간다.

 

셰익스피어에게 묻는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쩔 수가 없답니다.”

또 묻는다.

“희망은 없습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양심이 있습니다.”

악마 맥베스가 웃는다. (269쪽)

 

저자는 또 맥베스에게 묻는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것인가요?”

“양심은 양처럼 온순하고 욕망은 이리처럼 사납소” (276쪽)

왕의 살해에 동참하여 함께 손에 피를 묻혔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 “인생이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무대 위에 있는 동안은 뽐내고 떠들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한 것”이라고 읊조린다. 인간의 생에 대한 통찰이 저절로 묻어나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가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무대 위에서 뽐내며 떠드는 인간의 유형을 ‘무사’와 ‘광대’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무사는 세상을 움직이나 광대는 무사를 움직인다. 무사는 시대를 바꾸지만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는 말로 에필로그를 장식한 저자, 그는 진정한 ‘광대’를 꿈꾸는 자이며, 위대한 ‘광대’였던 셰익스피어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참담한 비극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광대’

인간을 꿈의 세계로 이끄는 무대, 그 무대를 제멋대로 활보하며 주인공을 빛나게도 하고, 날카로운 유머와 조롱을 날리며 관객을 손안에서 쥐락펴락하는 ‘광대’. 세상을 무대로 삼고, 인간을 배우이자 관객으로 삼아 4백년을 죽지 않고 살아가는 광대 셰익스피어를 만나게 한 또 한 사람의 광대, 그는 저자이다. 무겁고 암울하고 참담한 비극을 소재로 한 무대를 순회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보게 한 저자의 수고로움이 광대에 버금간다.

주인공인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여자들을 등장시켜 페미니스트들을 열 받게 했을 법한 중세인 셰익스피어의 한계는 동시대 조선에서 횡행하던 ‘여인잔혹사’를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중세도, 근대도, 현대도 한참 지난 21세기 한국에서, 강요된 술 접대와 성 접대로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배우의 속절없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과연 몇 등급의 비극에 속하는지 셰익스피어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 여배우의 복수는 ‘햄릿’의 복수보다 더 실현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이집트의 독재자 ‘카다피’를 보면 아직도 세상은 ‘무사’의 차지인 것만 같고, 일본이 당한 참혹한 비극 앞에서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설여진다. 이 악물고, 두 눈 질끈 감고 버텨도 더욱 모질고 독해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장악하는 비극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어 기어이 ‘희망’을 끄집어내라고 말해 주는 셰익스피어가 그립다.

[공지사항]10월 26일 이준모 선생님 강연- 생태위기와 체계철학의 변증법적 지양

 

이준모 선생님의 강연을 10월 26일에 개최합니다[공지사항]

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한결 서늘해진 바람결이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10월에는 월례발표회 대신 8월 예정이었던 이준모 선생님의 초청강연을 개최합니다.
강연주제는 <생태위기와 체계철학의 변증법적 지양>으로 이준모 선생님의 오랜 문제의식과 연구성과가 강연에 담아질 것입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배우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래에서 강연개요와 이준모 선생님의 약력& 저서를 안내합니다.
그리고 강연 당일 현장에서 최근 출간된 <이준모 생태학 총서>를 할인된 가격에 판매합니다.
?강연일시: 10월 26일 금요일 오후 5시 30분
?강연장소: 태복빌딩 2층 강의실(한철연 연구실 건물 2층)
?강연주제 : 생태위기와 체계철학의 변증법적 지양 ? 동학의 방법적 지평에서
?강연개요 : 오늘날 생태적 종말의 위기는 농성 노동의 논리가 상공성 노동의 논리로 전이된 역사와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생명체들이 살아가려면 자연의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철학사적 반성과 전환이 필요하다. 이 강연은 자연과 인간의 생태적 상응성을 드러내는 생태노동의 관점에서 헤겔 철학의 지배적 주체성의 논리를 자연의 주체성의 논리로 지양하고, 성리학의 노동의 논리를 반성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지양과 반성은 동학의 방법적 지평에서 조명된 것이다.
?이준모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튀빙겐 대학 및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신학, 철학, 교육학을 연구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교육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 8월까지 한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자문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저술 소개
? 〈Zwischen Tradition und Universalit?t(전통과 보편 사이에서)〉 (1985, 프랑크푸르트)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시대의 철학체계는 그 시대 자연과 인간의 관계, 곧 인간이 자연에 가한 노동의 양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필자의 가설을 동양철학 특히 성리학을 중심으로 논증한 저술이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
? <노동의 철학과 인간교육>(한신대출판부, 1990)
필자의 위의 가설을 서양 근대철학에 비판적으로 적용하여, 루소, 칸트, 셸링, 헤겔의 철학에서 노동의 논리와 교육의 논리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육철학 방법을 모색하였다.
? <밀알의 노동과 공진화(共進化)의 교육>(한국신학연구소, 1994)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의 노동이 자연의 노동(밀알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데서 기인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독일 근대철학, 서구 신과학 운동, 그리고 동학사상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밀알노동의 변증법을 동서 철학사에 적용함으로써 생태학적 민중교육학의 방법과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 <생태학적 교육학>(시대와 민중, 1996)
헤겔 철학, 특히특히 『정신현상학』의 총체적 사유체계가 지닌 원환적(圓環的) 폐쇄성과 그 논리를 비판한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을 헤겔 철학에 적용하여 열린 총체성(한울)과 개체 존엄성으로 되살려냄으로써 개체가 총체적 개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교육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 <생태적 인간>(다산글방, 2000)
1990년대에 쓴 11편의 글을 엮은 논문집으로, 생태적 위기가 재생의 전환점이 되려면 서구의 이성이 도달한 두 계기, 곧 지배주의적이며 자기집중적인 자기의식과 첨단 과학기술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자기집중적 자기의식은 나―자기성―자연의 분산적 자기의식으로 변화하고, 첨단의 기술은 동양의 농사 철학이 간직해 온 자연의 생명노동 범주와 만나야 한다는 것을 철학?교육학?종교학?노동의 측면에서 피력하고 있다. 동서고금의 인문학 자료를 토대로 생태노동의 논리가 반성되고 있다.
? <이준모 생태학 총서>(문사철, 2012)
이상에서 소개한 저자의 저술을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하고 새롭게 편집하여 주제별로 재출간하는 시리즈이다. 2012년 7월 현재, 제1권 『생태철학』, 제2권 『종교생태학』, 제3권 『생태교육철학』, 제4권 『생태노동』이 출간되었다. 추후 제5권 『생태노동과 우주진화』, 제6권 『생태교육학』, 제7권 『노동의 철학과 인간교육』, 제8권 『무엇을 할 것인가』(가제)가 출간될 예정이다.

4월 월례발표회에 많은 참석부탁드립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4월 월례발표회를 알려드립니다.
4월 월례발표는 학위논문 발표입니다.
발표자 이지영 선생님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스피노자에서 개체의 실존 역량과 공동체>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따스한 봄날 오후 많이 참석하셔서 새로운 논문 주제를 토론하며 함께 공유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번 발표는 발제-논평-토론이라는 기존 발표 형식을 벗어나서 발제 없이 사회자가 논문의 내용을 모두 숙지한 후 발표자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논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월례발표회 최초로 시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관심과 응원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발표자: 이지영(광운대)
사회자: 이병창(전 동아대)
제목: <스피노자 공동체론에서 차이와 자유의 문제>
일시: 4월 20일 금요일 오후 5시 30분
장소: 한철연 제1세미나실

“본 논문은 스피노자에게 있어 공동체 안에서의 차이가 자유의 문제와 필수불가결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에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개체는 신 즉 자연이 부여한 자연권을 가진다. 스피노자는 이 자연권을 자연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간 본질로서의 코나투스라고 부른다. 인간의 경우, 이 권리는 신의 힘을 인간이 신과 함께 내재적으로 분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다른 존재에게 양도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코나투스로서의 자연권, 자기의 역량에 따라 살 권리는 사람에 따라 각기 서로 다르게 표현된다. 서로 다른 본성에 따라 살 권리가 각각의 개체에게 있다는 것은 인간이 타고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 등의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보자면 공동체의 안전과 존속을 위해 살인, 강도, 폭력 등의 반-사회적 행위들을 금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국가 공동체의 절대적 힘을 주장한 홉스의 자연권 사상과는 그 토대에서부터 서로 다른 것으로서, 스피노자의 공동체는 반-사회적 행위 외에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종류의 자유는 스피노자에게 공동체의 존재 이유임에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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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와 시민불복종의 문제[고전은 숨쉰다]

이기백(정암학당 연구원) 

시민불복종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역설.
공자는 “나이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 싶어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논어 위정편 4장)”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 나이에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 받고 독배를 든다. 과연 그는 그런 극형을 선고받을 만큼 뭔가 심각하게 법도를 어건 것일까? 그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 죄목으로 봐서는 그가 윤리적· 종교적인 면에서 심각하게 법도를 어겼다는 혐의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 죄목은 구실이고, 그가 기소된 진짜 이유는 당시 집권을 한 민주정권의 정적들 중 일부를 이들이 젊은 시절에 소크라테스가 교육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유력하게 제시되곤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죄목이 부당하다고 여겨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하고자 했고, 또한 선고 후에도 크리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심원들의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생각을 넌지시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크리톤≫ 50c, 54c). 하지만 그는 친구인 크리톤의 탈옥 권유를 물리치고 독배를 든다. 그가 탈옥을 거부한 이유는 ≪크리톤≫에서 접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와 법의 명령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견해를 제시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악법, 즉 정의롭지 못한 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철학자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변론≫에서는 악법은 단호히 지키지 않을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접하게 된다. 이를테면 아테네 법이 철학하는 것을 금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이에 불복종하고 철학함을 그의 사명으로 부여한 신에게 복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준다. 그리하여 그는 시민불복종과 관련해 ‘소크라테스의 역설’이라 해도 좋을 큰 논란거리를 후세에 남겼다.
그가 보여준 일견 모순된 측면들은 그를 완고한 준법정신의 화신으로, 혹은 시민불복종의 선구로 해석되게 했고, 전문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의 수준에서도 격론을 불러일으켜 왔다. 과연 소크라테스의 실제 입장은 무엇일까? 그는 시민불복종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그는 악법이나 악한 법적 명령도 지켜야 한다는 보는 것인가, 아닌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사전에 없다

악법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악법도 법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악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명시적으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음을 보여주는 전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그는 당시 아테네 법이 악법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크리톤≫ 54c).
그는 자신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법이 아니라 배심원들의 잘못된 판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건 훗날 누군가가 ≪크리톤≫의 일부 내용을 참작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가 ‘악법도 법이다’ 혹은 ‘악법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지켜야 한다고 본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크리톤≫과 ≪변론≫은 이런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일차적인 자료일 뿐 아니라, 우리가 왜 국가와 법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있는가 하는 정치철학적 혹은 법철학적 문제 뿐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위의 두 대화편을 악법 즉 정의롭지 못한 법이나 그런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초점을 맞춰 살펴볼 것이다.

 

≪크리톤≫과 ≪변론≫에서 상충되는 측면들
≪크리톤≫과 ≪변론≫에서 시민불복종 문제와 관련해 상충된 것으로 보이는 점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크리톤≫ 자체 내에서 그런 점을 짚어보고, ≪크리톤≫과 ≪변론≫ 사이에서도 그런 점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크리톤≫은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가 등장하는 지점(50a6)을 중심으로 전반부(46b-49e)와 후반부(50a-53a)가 구분된다. 후반부는 특히 복종의 의무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여기서도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법률과 국가가 시민을 어린이와 노예에 비유하여 연설하는 대목이다(50c-51c). 그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조국이 무언가를 겪어내라고 지시하면 두들겨 맞는 것이든 투옥되는 것이든 잠자코 겪어내야 하며, 조국이 당신을 전쟁터로 이끌어 당신이 부상을 당하거나 죽게 되더라도 지시사항을 이행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나라와 조국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하거나, 아니면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51b-c).

여기서 ‘…무엇이든 이행하든가 아니면…설득해야 한다’는 구절은 해석하기에 따라 시민불복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위 인용문은 국가와 법의 명령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렇게 이해되는 게 옳다면 소크라테스는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철학자가 된다.

그러나 ≪크리톤≫ 전반부에는 후반부와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는 정의의 원칙들이 제시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정의의 원칙은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49b)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는 상충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변론≫에서도 ≪크리톤≫ 후반부와 다른 논조를 접하게 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고발자들은 철학하는 일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을 그만둔다는 조건 아래 배심원들이 자신을 석방해주되 계속 철학을 하다가 붙잡히면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조건으로 자신을 석방하고자 한다면 배심원들보다는 철학함을 자신의 사명으로 부여한 신에게 복종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29c-d).
소크라테스가 해온 철학적 활동은 사람들이 몸이나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혼이 훌륭하게 되도록 혼에 대해서 마음을 쓰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런 일 말고 “다른 일을 하진 않을 것이며, 설령 몇 번이고 죽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30a-c)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대해선 단호히 복종을 거부할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목숨보다도 철학을 더 귀하게 여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배심원들이 그를 석방해주되 철학을 금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철학을 금하는 법적 명령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복종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단지 가정적 상황이다. 그리고 아테네의 재판 절차상 현실적으로는 배심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을 금하는 조건으로 석방을 제의할 수도 그런 판결을 내릴 수도 없었다.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이런 점을 주목하여 소크라테스가 시민불복종의 한 사례를 보여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편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 금지령의 예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크게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예가 가정적 상황 속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여기서 분명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현실 속에서 그가 크게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단호히 복종을 거부했으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의지는 ≪변론≫의 또 다른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과두정의 주요 인물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를 한때 교육시킨 바 있다고 해서 과두정을 옹호하는 인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30인 과두정권의 명령을 거부한 일도 있었다.
이 정권이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부당하게 사형에 처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포함해 다섯 사람에게 그를 연행해 오도록 지시했을 때, 그는 이 일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아 연행에 가담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일을 회고하며 배심원들에게 “만약 그 정권이 빨리 무너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이 일로 해서 처형되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32c-d).

이 예도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시민불복종의 사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시민불복종이 성립하려면 30인 과두정권이 적법하게 집권하고 적법하게 명령을 내렸다고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정권이 적법하게 집권하거나 적법하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레온의 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적법성 여부와 상관없이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는 단호하게 복종을 거부했으리라는 것이다. 실상 그는 레온의 연행이 불법적인 일이어서가 아니라 정의롭지 못하고 불경건한 것이어서 명령을 거부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시민불복종과 관련해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모습 찾기
적어도 ≪변론≫의 두 예와 ≪크리톤≫ 전반부에서 나오는 정의의 원칙은 소크라테스가 악법을 지켜선 안 된다는 입장, 즉 시민불복종의 입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크리톤≫ 후반부에 나타난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의 입장 즉 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준법을 중시하는 입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크리톤≫ 후반부가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이 부분의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를 소크라테스의 대변자처럼 봄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될 때, 같은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대화편의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왜 달라졌는가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점을 피하는 한 가지 방식은 후반부에서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의 견해를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법률과 국가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웨이스가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법률과 국가가 등장하는 후반부를 탈옥을 권유하는 크리톤을 설득하기 위한 ‘고상한 거짓말’ 즉 한갓 수사적 연설로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은 크리톤이 이해력이 부족하고 비철학적이어서 소크라테스가 그와 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크리톤을 철학적 논의가 불가능한 인물로 보는 것이나, 소크라테스가 단지 설득만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 과연 옳은지는 의문이다. 소피스트들을 상대로 논쟁하는 때에는 이들의 논리를 역으로 이용해 설득만을 위한 논의를 전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크리톤≫과 같은 플라톤의 초기대화편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웨이스의 해석에서는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단절적으로 보는데 이것도 적절한 이해로 보이지 않는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소크라테스가 전반부에서 정의의 원칙에 관한 논의를 한 후에 후반부에서 그 원칙들에 근거해서 탈옥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관계를 웨이스처럼 단절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 사이에도 큰 관점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가 시민불복종의 옹호자로서 일관된 모습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선 소크라테스를 시민불복종을 부정하는 철학자로 보는 해석부터 검토해보기로 한다.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크리톤≫의 전반부에 나오는 정의의 원칙도 ≪변론≫의 두 예도 시민불복종의 예가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특히 정의의 원칙을 철저한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까지 한다. 이런 해석은 일단 수긍이 잘 안 간다. 왜냐하면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셈이 되니 말이다.

그러나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소크라테스가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롭지 못한 짓이 아니라 정의로운 일로 보았다고 해석한다. 법이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준법 자체는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 다 철저한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두 부분 사이에 상충되는 점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준법 자체를 정의로운 것으로 보고,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법에 복종하는 것까지 정의로운 것으로 보았다는 그들의 해석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변론≫의 두 예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적법하게 내려진 명령이라 하더라도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는 단호히 불복종할 의지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 불복종 행위를 할 철학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 1권의 논의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에게 “그러나 그들(통치자들)이 제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스림을 받는 이들로서는 이행해야만 하고, 또한 이게 정의로운 것이겠군요?”하고 묻는다. 이 물음은 옳게 제정되지 못한 법, 곧 정의롭지 못한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를 묻는 것인데, 논의 맥락을 볼 때 소크라테스는 이 물음에 대해 부정적 답을 갖고 있다.
즉 정의롭지 못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롭지 않은 것이라면 그로서는 불복종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 된다. 그러니까 ≪변론≫과 ≪국가≫의 예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크리톤≫의 정의의 원칙도 시민불복종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그러면 브릭하우스나 스미스와 달리 소크라테스를 시민불복종의 옹호자로 보고, 웨이스와 달리 ≪크리톤≫의 전후반의 논의에 단절이 없다고 볼 때 이 대화편의 후반부는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크라우트는 ≪크리톤≫의 후반부에서 준법을 가장 강력하게 강조한 부분(50c-51c)이 “나라와 조국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복종)하거나, 아니면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51b-c)는 결론에 이르고 있음을 중시한다. 설득이라는 선택지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법에 대한 불복종의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반부에서 언급된 또 하나의 정의의 원칙, 즉 “합의한 것들은 이행해야 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란 원칙도 중시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라는 단서는 불복종의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크라우트의 견해는 주목할 만한 견해이긴 하나 그와 관련해 많은 논란이 있어서 여기서는 그 논의로 들어가는 것은 생략하고, 그 대신 기존의 해석과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크리톤≫의 후반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가 “신이든 인간이든 더 훌륭한 자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나쁘고 수치스런 것이라는 점을 나는 알고 있다”(≪변론≫ 29b)는 말을 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인용문에서 더 훌륭한 자에는 신과 인간에 더하여 법률이나 국가도 포함될 수 있을 텐데, 이들의 명령들이 서로 상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소크라테스는 더 상위의 훌륭한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변론≫에선 재판과정에서 철학할 것을 지시한 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철학을 금하는 법적 명령(배심원들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의 기로에서, 그는 주저 없이 법적 명령에 불복종하고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쪽을 택하고자 했다. 여기서 신의 명령이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위해 법적 명령에 불복하고자 했다기보다, 철학함이라는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을 단순히 철학하는 일보다는 비판적 사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차원으로 확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크리톤≫에서는 법이나 국가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이 상정되어 있지 않다. 이 대화편의 후반부를 이해할 때 이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는 국가나 법의 명령이 무엇이든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법의 명령과 신의 명령이 상충되는 경우에도 오직 법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크리톤≫에서는 국가나 법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이 상정될 상황이 아니어서 준법이 강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크리톤≫에서는 왜 신의 명령이 상정되지 않은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크리톤≫의 상황은 ≪변론≫의 상황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미 재판에서 그는 국가의 법적 명령에 복종하기보다는 철학하라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했고, 몇 번을 죽게 된다 하더라도 철학을 그만둘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는 그가 사형에 처해진다 해도 철학을 그만둘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그 결과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는 사형 대신 해외 추방형을 택할 수도 있었고, 이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도 원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거부했다. 추방되어 신의 명령대로 철학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변론≫37c-38b).―≪크리톤≫에서는 탈옥해서 다른 나라로 갈 경우 철학하며 지낼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가 나온다―그러니 이제 그에게 남은 길은 법정의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친구인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하지만,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혹 탈옥이 신의 뜻이라고 그가 생각했다면 ≪크리톤≫에서도 법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탈옥하라는 명령)이 상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명령이 상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탈옥이 신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이 점은 이 대화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확인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신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니, 그대로 하세나.”라는 말로 탈옥 반대 논변을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시민불복종론에서 본 소크라테스의 탈옥 문제
끝으로 오늘날의 시민불복종론에 입각해보다면,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거부하고 독배를 든 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요건으로 거론하는 것을 정리해보면, 불복종은 공개적, 비폭력적, 양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불복종자는 처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소크라테스는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롤즈가 말하는 요건들은 당연히 수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요건들은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이해하는 데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변론≫에서 보는 재판 상황에서 그가 한 이야기에 따를 경우, 법정이 그를 석방시켜주되 철학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면, 그는 그 명령에 불복종했을 것이다. 우선 그는 불복종행위로서 철학하는 일을 일반범죄자처럼 은밀하게 하지 않고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했을 것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불복종의 자세는 레온에 대한 부당한 체포 명령과 관련해서 그가 실제로 보여주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변론≫의 두 예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에 맞게 불복종 행위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 철학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옳지 않은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점은 ≪크리톤≫에서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사형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50c, 54c), 탈옥을 거부하고 그 판결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탈옥을 거부한 것을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에 비춰서 검토해 보자. 그 요건들에 비춰볼 때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 감옥에 있던 소크라테스가 법정의 판결에 불복종하고 탈옥을 했다면 그것은 시민불복종이라고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 그 일은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해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교도관에게 뇌물을 써서 감옥을 나오고 변장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양심적인 것으로 보기도 힘들뿐더러, 그렇게 탈옥하는 그에게는 처벌을 받으려는 의지가 있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탈옥해 해외로 간다는 것은 아테네 법정에서 내리는 일체의 법적 처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탈옥했다면 그는 일반 범죄자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시민불복종자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법정의 사형판결에 불복종하여 탈옥을 감행하지 않은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롭지 못한 판결에 복종하여 독배를 들고 탈옥을 거부했다고 해서 그를 시민불복종의 옹호자가 아니라고 본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는 분명 시민불복종의 선구라 할 수 있다. 다만 롤즈도 그랬듯이 그는 시민불복종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4. 아테네 몰락기 민주정의 타락과 공포정치화

 

확실히 옛날의 위대한 말들은 그 후에도 울림이 있다. 안도키데스(Andokides)는 여전히 대담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사사로운 일에 몰두하는 자들에 의해서 폴리스가 보다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폴리스는 공공의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대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알키비아테스 논박(adv. Alkib.)] 2)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당시 주로 누가 공공의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셈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즉 대단한 애국심이 있는 양 보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들에 대한 불신이 크게 환기되었다고는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이미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나랏 것을 훔쳐(klepptein ta d?mosia) 부자가 되려 한다는 험담을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담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마저도 종종 연단에 오르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분명 그는 아테네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한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공직을 맡으면서 거액의 재산을 빼돌렸는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자신을 언제라도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정 하에서 연설가들 내지 선동가들은 변론을 해주거나 반대로 입 다물고 침묵해주는 방식으로 큰돈을 벌어 들였다. 말하자면 연단에는 황금이 묻혀 있었다.(chrysoun theros to b?ma)(아리스토파네스의 [복을 주는 신(plut.)] 377ff) 그들은 연설을 통해 손에 넣은 공직이나 군사 혹은 외교상의 직책을 이용하여 특히 아테네의 패권이 강대했던 시절에는 여러 동맹국들로부터 수많은 선물들을, 재판 당사자로부터는 뇌물을 받아 챙겼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국고에 까지 직접 손을 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무능력하고 수입은 없지만 욕심은 유별난 보통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이러한 소득은 그저 현란한 것으로만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랏돈을 가로 채 부를 축적한 자, 신전과 무덤 그리고 친구마저도 탈취하는 그 자들이란 모반과 위증을 일삼고 거짓선서를 해대는 재판관들이고, 뇌물에 놀아나는 관리들’이었다.(플루타르코스의 [계율집-정치편(rei publ. ger. praec.)] 26) 어쨌든 온갖 종류의 부패가 아테네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재무관으로 있으면서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재무관이자 연설가였던 뤼쿠르고스(Lykourgos)도 그 한 사례이다. 아테네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당파가 있었는데 그 당파가 이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에 의해서 매수된 상태였다고 하니 당시 아테네의 부패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기원전 524-480년)

 

그리고 소송에서도 원고든 피고든 그 권력과 재력이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판결이 내려졌다. 하물며 이피크라테스(Iphikrates)라는 자는 사형 죄에 해당하는 고소를 당했음에도 젊고 건장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와 재판정을 둘러싸게 한 후 단검을 슬쩍 내보이는 방식으로 재판관을 위협하여 무죄를 언도받기도 하였다.(Polyainos III, 9, 15) 그런데 이러한 횡포는 정치적 강자들끼리의 다툼에서 특히 더 기승을 부렸다. 이를테면 이름난 연설가가 선동적이고도 위협적인 연설로 정적을 고발하면 민중들은 그 연설에 압도되어 그 연설가를 진정한 애국자, 정치가로 여기기 십상이었고 또 연설가들은 민중들에게 상대 정적들에 대한 분노를 불러 일으켜 자신들이 저지른 부패를 은폐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안전한 방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찍이 니키아스(Nikias)는 시칠리아 해전에서 병사들 전체가 몰사의 위기를 맞았음에도 적시의 후퇴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그가 아테네로 돌아가 철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기소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동포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의 손에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의 최정예 부대가 궤멸당한 것이다. 연설가들과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놀아나는 시민들의 이러한 무분별과 광기는 이처럼 수많은 장군들과 책임 있는 자들의 결의를 무디게 하고 결단을 주저하게 하였다. 전쟁 대신 평화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한 정황에서조차 나라가 혼란스러워야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보다 더 잘 누릴 수 있다고 여긴 일부 아테네 사람들 때문에 전쟁이 계속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중상모략과 정당한 고소가 구분되기 힘들게 되자 아테네인들 서로의 불신은 극에 달해 급기야 고소는 또 다른 고소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소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건강의 표시로까지 여겨졌다. 그 과정에서 규정을 바르게 적용하여 제대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공직자 전체가 끊임없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재무관의 직책에 맡으면서 어떤 비리도 저지르지 않았던 뤼쿠르고스조차 고소를 당하자 노환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자신을 소명하고자 마차에 실려 평의회당에 출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소인은 메네사이크모스(Menesaichmos)라는 자 한 명뿐이었다. 결국 뤼쿠르고스는 이 자의 고소를 논박한 후 빈사의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도 메네사이크모스가 다시 그를 고소하자, 시민들은 그들 스스로 화환과 상을 수여했던 뤼쿠르고스였음에도 그 대신 그의 아들들을 감옥에 쳐 넣었다. 그 후 그들에 대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진지한 경고가 있고서야 아들들은 간신히 석방되었다.

뤼쿠르고스(Lykurgos 기원전 338-326년)의독어역본 표지

그런데 국가는 오히려 이러한 제도의 개선은커녕 전면적인 운용을 위해 중상모략가 내지 무고자((sykophant?s : 소송을 직업적으로 일삼는 자)의 위세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대집단의 역할을 자임했다. 즉 밀고가 정식 직업으로서 승인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이 국가도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스파이에 의존한 것만큼이나 이러한 보조 수단에 의지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 이 폴리스는 스페인의 왕위와 같이 어느 신격화 된 것, 즉 일탈을 막는 것이라면 어떠한 과감한 수단도 불사하는 종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일탈 상태가 계속 될 경우 그러한 수단을 통한 통치가 불가피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테네 위주의 이 국가주의적 이념은 정상적인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뚤어져 있었다. 그리고 국가에 의해 조장된 이러한 공포정치는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제반 사회적 병폐를 공공연히 용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공포정치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기원전 431년) 후 100년 동안 아테네에서 하나같이 그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게다가 이 공포정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후계자 시대에는 로마인들에게까지 만연되어있었다. 밀고와 무고를 일삼는 직업이 어떠한 부끄러움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임을 한 국가가 인정한다면, 어떠한 시대, 어떠한 민족에서도 이런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국가는 그들을 찾아내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중세를 걸쳐 이러한 일을 명백하게 직업으로 인정하고 시민 모두를 그 감시 하에 둔 것은 그리스 민주정뿐이었고 게다가 그것이 완전한 상태로까지 나타난 것 또한 오직 아테네 민주정뿐이었다. 그러나 아테네 하층민들로서는 이러한 일에 대해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할 것까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처지와 사정은 물론 기분에도 부합하는 것이어서 이미 마음속으로 모두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섬의 소송의 증인이야. 밀고자이자 염탐꾼이지. 쥐구멍 파는 것은 사양해. 나는 이미 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밀고로 살아오고 있으니까.” 이렇게 아리스토파네스의 [새(Aves)](1423행 이하)의 등장인물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쨌든 희극 작가들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밀고자라고 하는 인물을 마음껏 희화화해 주려는 유혹과 즐거움을 그들은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무고를 일삼는 자들은 모두 애국자처럼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폴리스와 “현행법”을 보위하는 자로 여겼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 무리가 주로 염탐하고 있었던 것은 일단 명분상 시민들이 국가의 요구에 충분히 응하고 있는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횡포를 재제할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무고자가 자기가 고소한 소송에서 적어도 배심원의 5분의 1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을 경우 그는 1000 드라크마를 벌금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그가 제기한 소송건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경우에도 1000 드라크마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배심원 재판에서 5분의 1의 찬동자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 무고자는 벌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경우에도 통상 지불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버티었다. 뤼시아스(Lysias)의 시대에 그러한 미납액이 연체되어 1만 드라크마나 되었던 자(아고라토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배심원으로서 출석하고, 민회에도 얼굴을 내밀면서 여전히 모든 종류의 나랏일과 관련한 소송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끊임없이 이런 무고자들의 포위공격을 받고 있었다. 니키아스는 일생동안 무고자를 두려워해 늘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와 그가 이끈 군대의 운명에 얼마나 중대한 결정을 미쳤는가는 이미 말한 바가 있다. 크세노폰(Xenophon)의 저작에 나타나는 훌륭한 남자의 모범인 이스코마코스(Ischomachos) 또한 종종 밀고당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배울만한 것은 소크라테스(Sokrates)가 이스코마코스처럼 박해받고 있던 크리톤(Kriton)에게 던진 아래와 같은 근사한 충고이다. “무고자를 막아 줄 사람을 돈으로 끌어들여라.”(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Memor.)] II, 9, 1) 다행히도 크리톤은 무고자를 막아줄 사람으로서 아르케다모스(Archedamos)라고 하는 인물을 찾아냈다. 이 남자는 무고자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무고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크리톤과 그의 친구들은 다 그를 의지하고 존경하였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이 아르케다모스 같은 유용한 무뢰한을 자신들의 식탁에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주정을 뒤엎고 권력을 잡은 30인 참주들은 다수의 무고자를 잡아 사형에 처했지만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이내 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첩보자들을 이용해 의도된 목적을 완전하게 달성했는데 그것은 이 첩보자들이 이 기관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세뇌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아테네에서 무고에 의한 소송건은 그 성격과 목적이 달랐다. 즉, 무고자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소송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소송 당사자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금품을 대가로 상호협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테오크리네스(Theokrines)는 친 형제의 살해자들로부터 금품을 받고 소송을 철회하고 있다.(데모스테네스의 [테오크라테스 논박(in Theocrin.)] p. 1331) 그러니까 폴리스가 달성한 것은 일종의 악취 즉 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 죄를 범한 사람들 내지 선동정치가들과 그 배후에 있는 무고자들과의 거래와 타협 같은 것들이었다. 이 악취 가득한 행태들은 공공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가장 뛰어난 상당수의 시민들로 하여금 공공 생활로부터 남몰래 혹은 공공연하게 등을 돌리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안전책이었지만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추첨으로 어떤 직무에 선택된 사람이 최종 합격을 위한 심사(dokimasia)를 받아야할 경우 무고자는 즉시 그 개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권이 생기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무엇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평생 그런 짓을 하며 삶을 영위했다. 그래서 이 무고자 집단은 끊임없이 사람들 곁에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무고에 대해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착실한 사람들은 무고를 당하면 어떻게든 힘을 다해 소송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고, 무고자들 또한 소송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막상 소송에 말려 들어갔을 경우 소송 경비에서 기소인의 몫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적절히 사전에 타협을 해 소송을 중도에 취하하게 했을 경우에는 별도의 금품을 뜯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소송이 진행된 후 무고자가 그것을 철회했을 경우에는 1000 드라크마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 돈 또한 그 희생자에 의해서 몰래 충분히 벌충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무고자는 소송을 계속했다. 고령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신을 모독하였다는 협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 또한 아마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낼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에우보이아)로 피해 마케도니아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그는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보낸 편지에다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알키노오스(Alkinoos)의 정원과 같이 무화과(sykon)가 우거진 마을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발음의 유사성을 토대로 무화과(sykon)로 무고자(sykophant?s)를 비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년)

그런데 아테네는 이런 종류의 무고자들을 조력자로 이용하면서 어쨌든 국가 기구로서 존속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생명력의 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어떠한 범죄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위협, 국가의 안보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의심되었고 그에 따라 소송의 성격이 정치적인 것으로 급변하는 경향이 자주 있었다. 또 국가는 그리스인 본래의 종교로까지 추켜세워졌던 터라 형벌 또한 가장 신성한 것을 훼손한 대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형벌이 비정상적으로 엄중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벌금형과 시민권 박탈과 함께 형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사형이 전혀 중대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서마저 적용되는 일도 생겨났다. 이처럼 폴리스는 때때로 광분상태에서 판단력도 없이 형벌을 쓸데없이 휘둘렀다. 이런 까닭에 가끔 누가 보더라도 국가에 대한 명명백백한 범죄라고 인정될만한 사건이 생겼을 경우에는 재판의 엄정성에 대한 본때라도 보이려는 듯 그 범죄 혐의자에게 국가에 대한 모반죄를 씌워 가장 엄한 벌로 처벌하였다.

뤼쿠르고스의 레오크라테스(Leokrates)에 대한 논박 연설은 그와 같은 모반죄를 덮어씌우기 위한 대표적인 고소 사례들 중의 하나이다. 신성모독에 대한 고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들을 모욕하고 또 신들의 존재를 의심한 것에 대한 폴리스의 보복과 실제로 그 신들의 윤리적, 신학적 용렬성 사이에 존재하는 우스꽝스러운 불균형은 아테네 이외에 일찍이 어디에서도 존재한 적이 없다. 이런 종류의 단죄 방식이 만일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환상(phantasia)’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 그것은 아테네의 재판관들이 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판결만을 내리고 있었다거나 또 당시의 유력자들이 광분상태에서 제멋대로 내린 판단이 거의 없었다고 가정할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명심해야 할 것은 소송의 수단으로서 시민에 대한 잔인한 고문이 아테네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포키온(phokion)편 35) 이 고문은 노예를 고문하던 주인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 유사물이었으나 사실 그것은 페리클레스 이래 아테네 그 자체가 견지하고 있었던 이념 ? 즉 아테네 제국주의와 민주정의 결합 ? 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했다. 아테네는 일단 자신의 국가주의적 이해와 관련된 사안의 경우 그것을 혐의지우거나 적발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다 승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5.?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다음에 계속)

 

 

최초 여성해방론자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의 주제 [Q 선생의 閑談]

[Q 선생의 閑談]

최초 여성해방론자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의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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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규성 (e-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이화여대 교수)

1922년(26세) 김원주(一葉 金元周, 1896∼1971, 평남 용강출신)는 「일체의 世慾을 斷하고」라는 글을 통해 “슬프고 아프던 때는 사라져 버렸다”고 선언하고, 자신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를 통렬히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결의를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내 인격을 후욕(?辱)하고 내 이름을 더럽히던 속상(俗尙)에서 나는 뛰어나왔다. 나는 지금 인생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허영도 다 ? 버렸다. 나의 행동을 변호해 줄로 믿었던 소위 재래의 모든 전통적 사상을 파괴한다는 사회주의자 무리에서도 나는 뛰어나왔다. 아! 나는 절실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개인주의!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 말인가? 나를 이제부터 살리고 나를 완성해줄 이는 오직 신개인주의 밖에 없다. 나를 완성하자. 그리고 내 자아 가운데서 엄숙한 인생을 창조하자.”
김원주는 1920년 도쿄 영화(英和)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여 그해 4월 재산이 있었던 남편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해방 잡지 『신여자』를 4호까지 발행한다. 남편 이노익(李老翊)과의 결혼(1918년∼1921, 4년간)은 김원주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 없는 무의미한 생활이었다. 여성이 주체가 되어 만든 최초의 잡지는 무의미한 생활의 청산(자유이혼)과 이로 인한 재정결핍으로 좌절된다. 그 후 김원주는 경제적 독립을 여성해방의 선결조건으로 절감한다. 당시 일본의 다이쇼(大正) 생명주의 시기에 민주주의와 여성해방론과 연관하여 유미주의적 개인주의 사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여성해방론은 스웨덴의 엘렌 케이(Ellen Key)의 진화론적 모성주의와 아동보호론을 배경으로한 ‘연애의 자유(freedom of love)’가 거친 ‘자유연애(free love)’로 중국과 한국에 유포되었다. 김원주를 비롯한 당시 신여성들은 엘렌 케이의 개인의 존엄성에 바탕한 연애론에서 인격존중에 의거한 연애와 충실한 사랑이 없는 결혼의 무의미성 및 자유이혼론을 수용했다. 이러한 사상은 봉건적 가부장 문화를 배경으로 한 조기 강제결혼을 비인간적인 처사로 인식하게 했으며, 여성의 자각적 주체성을 모색하게 했다.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 1896∼1971)
그는 일본 유학을 통해 두 가지 개인주의 사조(엘렌 케이의 합리적 개인주의와 오스카 와일드류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의 흥기를 목격한 것으로 보이며, 도쿄에서 김명순과 동거하다가 귀국한 노월 임장화(蘆月 林長和)와 1923년 경부터 1925년까지 동거생활을 한다. 김원주는 이른바 자본주의적인 경쟁적 개인주의가 아닌 내적 인격의 형성을 지향하는 개인주의를 지향한다. 예술지상주의적 개인주의 철학을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보들레르, 쇼펜하우어, 니체 등을 통해 수용한 임장화와의 만남을 통해 그와 공유하는 개인주의를 심화한다. 김원주의 개인주의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장화의 사상과 연계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임장화의 사상이 그의 고백체 소설 전체가 그렇듯 관능성과 퇴폐성을 보여주는 반면, 김원주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완성을 위한 강한 의지적 노력을 보여준다. 임장화가 순간적 감각인상에 몰입하거나 부르주아적 규범에서 탈출하려는 분열된 자아를 향유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김원주는 엘렌 케이의 영향으로 보이는 ‘영육일치(靈肉一致, unity of soul and senses)’의 정신에 바탕하여 자아의 형성과 구원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원래 서구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는 인상주의 영향 아래 사적인 감각인상에 몰입하거나 기성제도성에서 탈주하려는 개별성(singularity)을 절대시하기 때문에 자폐적 나르시즘이라는 비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개인주의도 멋부리기(댄디즘)나 반항적 글쓰기를 통해 나름의 사회적 소통을 추구했다. 김원주는 스스로 ‘영원한 저주’로 본 ‘서러움’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사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격존중’의 시대’가 도래하는 ‘때’에 ‘충실’한 태도를 갖고자 한다. 그는 고백을 담은 서간체 형식의 글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사회적 소통을 찾는다. 김원주는 근대적 산업체제에서 나온 효용주의적(utilitarian)인 개인주의나 집단적 실천이 아닌 인격적 관계의 확산을 통한 보편적 유대의 길을 찾는다. “인생이 개인주의적 사상에서 다 ? 같이 완성되고 세계가 한없이 자유롭고 아름답게 될 때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고 향락하기 위하여 남의 생활을 간섭치 않으며 또는 자기의 생명과 인격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남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히 여길 때가 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적 확신은 예술지상주의의 주요 특징인 내적 자기분열의 고뇌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파괴적 소외를 극복하고 이를 지배하는 결단을 동반한다. 이 결단은 “자기 생명가운데 남의 생명을 발견하며 남의 인격가운데 자기 인격의 존엄을 보게 될 거인적 개인주의 시대가 올 것을 믿는” 역사적인 결의가 된다. 김원주의 신개인주의는 유미주의적 개인주의가 갖는 유아론적 성향을 벗어나려는 예술 정치학을 포함한다.
김원주의 ‘거인적 개인주의’는 ‘나의 부드러운 정서’와 ‘내 본성에 깊이 파묻힌 겸양’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설움 쌓인 한 줄기 희망’으로, ‘따듯한 한 줄기 일광’으로 받아들인다. 서구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나타나듯 부르주아의 산업주의와 가부장적 규범주의에 반항하는 탈주행위가 주는 악마적 자기 파괴성을 동반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반항적 탈주의 강도가 약할 때는 부르주아에게 귀여운 응석받이가 되었다가 도를 넘을 때는 퇴출과 감옥행을 겪는다(오스카 와일드).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자기소외를 관능적으로 즐기는 퇴폐성과 부르주아적 도덕규범에 저항하는 악마성에 집착하거나, 내적 망명을 택하여 신비주의 철학에 몰입하거나, 현실을 떠나 부랑(浮浪) 지식인이 되거나 예술프로레타리아가 된다. 근대적 합리적 자아의 이면에 있는 가공할 분열성이 낭만주의적 유미주의에서 새어 나왔다. 가장 무서운 허무주의는 랭보(A. Rimbaud)의 도망이다. 랭보, 그는 어떤 인간이었는가? ? 신경쇠약자, 하릴없는 건달패, 갈 데까지 심성이 비뚤어진 위험인물, 떠도는 어학선생, 길거리 장사꾼, 써커스단의 인부, 부두노동자, 농장의 날품팔이, 선원, 네델란드 군대의 지원병, 기사, 탐험가, 잡상인 따위로 지내다가 아프리카 어디에서 전염병에 걸려 마르쎄유의 어느 구호병원에서 한 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37세의 나이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 사나이.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개인의 존엄을 함몰시키는 산업사회에 대한 저항은 세계상실과 인본주의적 자아의 상실을 특징으로 갖는다. 세계는 허공에 떠있고 당당한 계몽적 주체성은 죽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술지상주의가 경험한 세계와 인간의 종말은 근대산업의 분업체계가 낳은 산물이었으며, 그들 이전 선배들의 고상한 낭만주의가 뿌린 씨앗의 결과였다.

나혜석(1896~1948)
김원주의 지적 동료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해방의 기치를 들었던 여류인사들 가운데 김명순은 정신병에 걸려 일본 정신병원에서 객사하고 아들은 자살한다. 나혜석은 이혼을 당하고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고향에 큰 농장이 있었던 임장화는 1920년에서 25년까지 5년간 지적 활동을 하다가 잠적하여 그의 생몰연대도 불확실하다. 이들은 자유로운 사랑의 주체성을 사회해방의 신호로 인식했으며, 그 결과 온갖 추문과 함께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임장화는 동인지 『영대靈臺』의 원고료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도 받았다(당시 문인들 사이에서는 원고료와 술값을 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원주가 신개인주의를 분명히 내걸며 추문을 퍼뜨리는 지성계를 통렬히 비난한 것도 자유이혼론에 따라 남편 이노익과 이혼한 직후의 일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자아의 형성과 구원을 향한 의지를 확인한다. 의지는 ‘외로운 나’와 ‘충실한 생활’을 연결한다. 이러한 삶은 ‘형극이 많고 도정이 먼’ ‘순례의 길’이다. “나는 가슴을 헤치고 넘치는 기쁨으로써 인생을 맞아들이겠다. […] 인생은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잔혹하였다. 소녀시대에 부모를 잃고 형제를 영별한 나는 철모르게 청춘시대를 맞아 개성의 눈 뜰 새도 없이 나한테 아버지뻘이나 되는 이와 이해 없는 결혼을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차차 개성의 눈을 뜨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때에는 나는 단연히 이때 애인도 돈도 없이 앞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단지 대담한 일만 하였다. 그러나 요행히 모 잡지사 경영인의 호의로 지금까지 생활비만은 얻어 쓰게 되었다.”
이러한 궁핍의 위협에도 김원주는 ‘완전한 사랑의 경지’를 ‘신생’의 ‘지평선’으로 바라본다. “나의 가슴을 쓰리게 하던 전반생은 자취도 없이 다 ? 사라져버렸다. 나의 청춘을 완전한 사랑의 경지로 인도해줄 한 줄기 빛이 무한한 지평선 위를 빛 날리며 나에게 신생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아 ? 미쁜(진실한) 신생의 길이여. 나는 그대의 가르침을 어김없이 지키리라.”
개인주의의 진정한 자아완성은 완전한 사랑의 경지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노선은 1923년 만공선사(滿空禪師)의 법문을 듣고 감동받고, 1933년 수덕사 덕숭산문(德崇山門)에 입문하게 되는 예후가 된다. 그 사이 1928년에는 『불교佛敎』의 필진으로 활약하던 중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불교이론에도 조예가 있었던 백성욱과 만나 동거하게 되면서 불교의 ‘절대적 사랑’,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는 사랑’의 이념을 심화하여 종교적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조실부모한 서러움과 함께 사물의 무상함과 무근거함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1920년 『신여자』의 발간 이전부터 그를 떠나지 않는 제2의 천성이었다. 입센의 노라가 당시 신여성에게는 여성이면서도 진정한 독립적 인간성을 집약하고 있는 해방의 모델이었다. 김원주는 「노라」(1922)에서 ‘우리 조선 여자 사회에 나타난’ ‘노라라는 여성’은 ‘잠을 깨어 자기의 의식을 분명히 알게’하는 ‘새벽빛’이다. ‘각성치 않은 노라’는 ‘인문 발달상에 방해가 되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이 사회는 고만한 암흑한 지옥’이 된다. 김원주는 ‘우리 여자 사회도 무수한 노라가 쏟아져 나오길 충심으로’ 바란다. 김원주의 노라가 동양의 일엽선사로 변화되는 것은 무상과 자아완성에 대한 관심 속에 이미 그 징후가 있었다. 이는 오스카 와일드가 서구 신비주의 철학과 장자(莊子)의 ‘지인무기(至人無己, 초인은 자기가 없다)’의 철학을 선호한 것과 유사성을 갖는다.

수덕사
표면상의 차이로 보면 김원주의 생애와 사상은 대체로 『신여자』발간기(1920∼1921)의 여성해방론, 『신여자』 폐간 후 여성해방론과 연계된 신개인주의론과 불교적 자아론(1922∼1933), 덕숭산문에서의 수도시기(1933∼1960), 그리고 다시 문예활동을 시작하여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던 임장화나 다른 신여성들과는 달리 김원주의 생애에는 무정한 세상과 서러움을 이기는 창조에의 포부가 일관된 흐름으로 있다. 그의 자아는 인격적 사랑과 예술을 형성하는 창조적 활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불교에 입문해서 존재의 극치에서 만나는 무(無)는 창조성으로 가득한 우주적 자아의 본체이다. 우연이지만 그의 스승 만공선사의 법명은 ‘가득 찬 공[滿空]’으로 일엽선사는 이 개념을 자신의 불가적 세계상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충만의 철학은 빔을 통과해서 도달된다. 빔은 우주 삼라만상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한다. 우주가 부처[佛]인 바, ‘님’인 부처를 향한 사랑이란 다름 아닌 우주와의 일치이다. 잃어버린 세계, 분열된 자아는 우주와의 일치에서 회복되고 구원된다. 사바세계 속에서의 애욕의 대립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의 합일에서 비로소 통일된다. 대립의 통일, 이것이 사랑의 절대적 이념이다. 일엽선사는 과거 자신의 연애가 비록 거기에 사랑의 이념이 불완전한 형태로 현현되어 있었지만 상대적 대립을 면치 못한 미로였다고 판단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되찾는 사랑에서 무대립의 평안과 자유를 얻었다고 선언했다. 여성해방과 신개인주의 철학은 충만과 공의 철학에서 그 완성을 보게 된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평안과 자유 그리고 창조는 대립의 초극에서 결실에 도달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세계지혜는 그에게 차가운 세계였던 겨울 ‘밤’의 여로를 통과한 것이다.
김원주의 님을 향한 사랑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함께 20세기 한국 불교철학의 두 금자탑이다. 한용운의 절대적 사랑은 부재 가운데서 애달픈 동경의 이념으로 작용하고, 사회적 실천을 요구하는 반면, 김원주의 절대적 사랑은 침묵 속의 선 수련을 통한 자각의 순간에 현전한다. 이러한 차이는 이른바 1920년대 연애담론이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전략이라는 정치적 자장(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를 통한 문화적 동화정책) 속에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원주와 그의 동료들은 개인주의 특유의 비정치적 사고를 고집한데에도 기인한다. 그들의 실천은 추한 외부세계로부터 내부로 망명한 개인의 상상력과 문예활동을 통해 조선의 상황을 구제한다는 예술 정치학이었다. 동학혁명에 두 번이나 가담했던 한용운은 민중과의 평등한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변혁을 지향한다. 이에 비해 김원주의 개인주의적 사고는 봉건유습에 저항하는 저항성을 갖지만 식민지 상황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냉담했다. 그는 유미주의적인 실존적 퇴폐성과 분리되지 않는 문예활동을 현실을 고통으로 경험하고 이를 초극할 수 있는 새로운 자아의 창조로 나아가는, 선가(禪家)의 용어로는 ‘향상(向上)’의 길에 주력했다.


김원주는「단장斷腸」(1927)에서 화자인 나를 통해 임장화의 퇴폐적 감각을 연상시키는 발언을 하고 있다. “아!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이 고통을 어찌 차마 견디나. 아! 모두 잊어버리자. 무슨 기억이고, 생각이고 하여서는 무엇하랴. 그저 모두들 모르고, 모두들 잊어버리고, 그저 어제 모양으로 혼몽 천지로 지냈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나 같은 놈은 내 정신, 내 의식만 돌아오면 쓰리고 아리고, 매운 고통뿐이니 ……. 아아, 술 가운데 세상도, 사회도, 집도, 나도, 고통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아무것도 없는 오직 술 가운데만 살고 싶어라.” 세계의 실재성이 가하는 자아 분열적 고통은 세계를 혼몽 천지로 보고 싶어 하는 유아론적 공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내적 착시가 보는 환상 세계에는 구체적 감정들의 기복이 없다. 여성해방론에서는 영육을 갖춘 인격의 독립성이 세계의 본질적 존재로 격상되었지만, 이제 나는 세계 밖으로 축출된 비본질적인 우연적 존재로 격하된다. 퇴폐적 관점을 상징하는 술은 세계의 실재성을 파괴하는 무기이지만, 세계를 붕괴시킨 대가로 건실한 인간적 주체의 파멸이 다가 온다. 김원주는 서구 근대성에 잠재된 그리고 결국 낭만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통해 드러난 이러한 허무주의적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 술이 맨 정신으로 세계를 환상으로 보는 불교적 자아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절대적 사랑의 자아에서는 세계는 거울에 비친 영상으로 경험되고 감정들은 순화된다.
이상의 맥락에서 볼 때 김원주의 사상은 (1) 여성해방론 (2)신개인주의론 (3) 만공(滿空)의 철학으로 나누어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관된 관심은 개인주의와 개인의 창조적 완성이다. 그리고 개인은 사랑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진화에 의해 성숙한다. 사랑은 오늘의 인류가 아직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한 심연으로 남아있다. 사랑은 김원주에게 아마도 누구에게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대립의 고통을 구성하게 하는 어렴풋한 선험적 이념이며, 따라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찾게 하여 구체적으로 구성하게 하는 상상력의 원천일 것이다. 사랑은 미망의 원천이자 이로부터의 해방의 추동력이다.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박영균(한철연 기조부장)

 

증오를 부추기는 세상

 

2012년 여름과 초가을, 한국 사회는 온통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대외적으로 한국 사회는 이명박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기점으로 하여 반일감정에 휩싸여 있으며 대내적으로는 ‘묻지마 살인’과 ‘성폭행’이라는 흉악범들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여기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사건에는 사람들에게 공분을 자아낼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분’이 ‘증오의 정치’를 생산할 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보존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해치는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때, 그것에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분노가 특정 범죄자들, 특정 인물에 대한 ‘제거 또는 살해의 욕망’으로 전화할 때, 그것은 ‘위험’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 ‘위험’은 결코 ‘작은 위험’이 아니다. 그것은 흉악범죄가 지닌 위험보다 훨씬 위험한, 근본적인 위험이다. 이런 위험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된 박근혜의원은 “흉악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저지른 사람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 사형제는 필요하다”고 출입기자 오찬에서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이어 새누리당 박인숙의원은 재범 가능성이 큰 상습적 성범죄자에 대해서 물리적 거세를 실시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그리하여 흉악범들에 대한 분노는 그들에 대한 제거의 욕망으로 이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합리적인 토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나주 초등학생 납치 성폭행 사건 피의자 고아무개 씨가 2일 고개를 떨군 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그러나 이런 선의 절대성에 근거한 ‘제거의 욕망’은 본질적인 물음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이런 흉악범들을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면 범죄는 사라질 수 있는가이다. 그들은 모든 죄의 원인을 몇몇 흉악범들에게 돌린다. 그들이 보기에 범죄는 범죄를 저지른 자 안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애초 인간이 아닌 ‘괴물들’만을 제거하면 사회는 마치 깨끗해질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암세포를 돌려내면 암은 사라지기도 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암세포를 돌려낸다고 암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암세포를 이겨낼 수 있는 우리의 신체, 사회적 환경이다. 사회가 흉악범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와 같은 암세포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눈에 즉자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즉물성에 빠져 ‘혐오’를 증오로 바꾸어 놓고 있다.

‘악’에 대한 정당한 ‘분노’는 정의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는 ‘혐오의 감정’을 근거한 ‘분노’가 되어 버릴 때, 그것은 오히려 더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복수’는 정의의 감정에서 나온다. 하지만 악을 제거하고자 했던 복수의 감정이 오히려 자신을 더 흉측한 괴물로 만들어버리면서 ‘복수의 악순환’을 낳는 것처럼 그것은 ‘악’을 먹고 자라는 더 근본적인 ‘악’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증오의 정치학과 노예의 도덕

 

정념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스피노자는 이미 이와 같은 ‘악’의 악순환을 사유했었다. 그는 ‘원인에 대한 무지’가 부정적 정서에 근거한 악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문제는 이 악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정념에 붙잡혀, 이 ‘악’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현재의 정념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형제’와 같은 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그것을 처벌할 수 있는 더 강력한 권력을 요구한다.

최근 한 연예인(배우, 김규리)은 자신의 트위터에 “신체절단형 난 반댈세~ 유신이 부활하면 아무나 멍에 씌워 절단해버릴 수 있을 것 같음. 무서워~~”라는 글을 남겼다. 민주통합당도 박근혜의 사형제 옹호 발언에 대해서 유신정권 시절 ‘인혁당’으로 몰아 사형을 집행했던 과거의 역사에 들추어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이에 대해 ‘웬 뜬금없는 이야기냐’는 식으로 민주통합당을 몰아붙였다. 사실, 이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다. 하나는 흉악범에 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정치범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전쟁’, ‘범죄에 대한 전쟁’ 등, ‘?에 대한 전쟁’이라는 모토로 표현되는, 어떤 특정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 없는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식이었다. 박정희 구데타 정권은 ‘북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전두환 구데타 정권은 ‘범죄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면서 이에 대한 청산 작업을 벌였다. 유신독재시절에 정적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것도, 사회정화를 내세우며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런 ‘악에 대한 전쟁’이었다.

만일 독재를 만들어낸 것이 대중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악의 제거’라는 ‘선(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바디우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사이비 선에 대한 열정일 뿐이다. 그것은 실상, 선을 추구하는 정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확히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를 보라. 그들이 선교하는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신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옥’이라는 형벌의 참혹성에 대한 공포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폭력범죄자’들에 대한 공분 또한 정확히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물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포를 통해서 생산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보다 거대한, 근본적인 악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를 지배하는 권력’에 나를 위탁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보았듯이 폭군은 이와 같은 슬픔의 정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슬픈 정념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은 그것을 권력에 위탁시킴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켜버린다. 따라서 김규리의 이야기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권력은 ‘악’을 먹고 자라난다. 그들은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강화하며 법을 신성화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군주제의 커다란 비밀과 그것의 근본적인 관심은 인간들을 속박할 때 이용하는 공포를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하면서 인간들을 속이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예속이 마치 자신들의 안녕이기라도 하듯이 예속을 위해서 투쟁한다.”

 

지배의 정치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분단 문제가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와 대립으로, 지역 간의 갈등과 분열로 비화하는 것 또한, 바로 이와 같은 ‘증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북’을 악으로 불러내며 그것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파시스트적 권력을 만들어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거대한 권력이 되어버린 기독교는 ‘예수 믿어. 안 그러면 지옥 가!’라는 공포를 통해서 교회 내에서의 유일권력을 만들어냈으며 그 권력을 만들어준 대중은 스스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부정적 정서’와 ‘정념’의 포로가 되어 주인을 위해 싸운다. 따라서 문제는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해방과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투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투쟁은 단순히 부정의와 싸우는 것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아차’ 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그 스스로를 속이면서 빠져드는 ‘정념들’과의 투쟁 또한 요구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선’으로 포장하는 ‘정의’가 아니라 ‘정의’ 그 자체, ‘선’ 그 자체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나(대중) 자신의 성찰이자 권력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삐딱하게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은 나의 슬픈 영혼을 부추겨 그들의 지배적인 힘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고해의 삶에서 얻는 상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지배의 정치학은 우리의 고통을 파먹고 살며 우리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며 그 잔혹한 삶의 고통이 유발하는 분노의 정념을 파먹고 자라난다. 따라서 지배의 정치학은 나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나 자신의 밖을 향해, 타자에 대한 공격과 원한으로부터 출발한다. 민주주의가 가진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때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는, 5년 전에 그랬듯이 한편으로, ‘민생이니 사회통합이니’하면서 노무현-김대중-전태일기념사업회를 방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의 강력한 권력을 환기시키는 이중의 행보가 지닌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을 배신하고 또 다시 대중들 스스로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