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말해요…[2013년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학생들이 말해요…[2013년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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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떡처럼 맛있는 철학하기 – 이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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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엄마가 18세의 철학캠프를 추천해 주었을 땐 어렸을 때 읽어본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하고 18세 학생들을 위한 수업이고 또 결정적으로 캠프를 간다는 말에 신나게 신청했다.

사실 처음에는 어렵고 딱딱한 철학을 어릴 적 한번쯤은 읽어본 그리스신화를 통해 이야기한다고 18살 학생들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 첫날 강의를 들으러 갔을 때 내가 처음에 의문점을 가졌던, “학생들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단박에 깨 버렸다. 강의의 수준이 생각보다 너무 높았고 학생들의 질문하는 수준이라던가, 자신의 주장을 말할 때 나는 속으로 ‘내가 오기엔 수준이 너무 높구나.’ 싶었다. 내가 철학에 관심이 있고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창피할 정도였다. 사실 첫 강의가 끝나고 여기를 계속 와야 하나, 그냥 다니지 말까 싶었는데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음 강의내용을 공부하고 가면 내 주장을 펼칠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강의를 이해할 수는 있겠다 싶은 마음에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과연 뭐가 핵심일까 생각해봤다. 지금 후기를 쓰면서 느낀 거지만 매 강의마다 내주는 과제물의 완성도에 대한 경쟁심이 있었던 것 같다. 난 원래 적극적으로 책을 찾아서 예습을 해가고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데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논술문도 잘 쓰려고 노력해봤고 선생님의 칭찬도 받고 싶었고, 나름 칭찬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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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끝나고 캠프만을 남겨두었을 때. 무척 기대했다. 거기서의 강의내용은 어떨지, ‘나는 철학자다.’ 는 어떻게 진행될지, 거기서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논산 상상마당에 도착하자마자 “역시 상상마당” 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준 이쁜 건물들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강당에서 방 배정을 받았을 때 방애들끼리 어색할 거 같아서 내가 먼저 장난을 걸면서 조금씩 친해졌다. 두 개의 강의를 더 듣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레크리에이션을 마치고 내가 기대하던 ’나는 철학자다‘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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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자다의 주제는 지금까지 들었던 강의내용들을 가지고 형식에 상관없이 주제를 뽑아내어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 조는 캠프에서 들은 강의중 하나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주제로 뮤지컬을 만들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어느 정도 공부하고 온지라 시작은 매우 순조로웠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시나리오가 주제에 맞지 않아서 밤을 새운 끝에 완성을 했다. 그리고 발표일 당일. 다른 조들의 작품성을 보고 우승은 못할 거 같아 우리가 준비한 것 만 보여주자고 생각하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물론 우승은 다른 팀이 가져갔지만 우리 조는 만족하며 잘 끝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버스에 타기 직전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정말로 장관 이였다. 모두 사진을 찍고 이리저리 놀다가 집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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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철학이라는 장르는 오래되어 딱딱해진 쑥떡 같은 맛이다. 철학책들이 단어도 어렵고 풀어서 나온 책이 많이 없다보니 읽기가 힘든 반면 소설책, 문학책들은 달콤한 케이크 같은 맛이다. 요즘에야 많이 단어들을 풀어서 쓴 철학책들이 많지만 아직까지도 어렵다는 편견이 많다. 그런데 꼭 오래되어 딱딱해진 쑥떡이 맛이 없기만 할까? 쑥떡도 쑥떡 나름의 맛이 잇기 마련이다. 이번 철학캠프는 ‘철학’ 이라는 딱딱한 쑥떡을 ‘신화’라는 주제로 데우기도 하고 꿀에 바르기도 해서 좀 더 맛있게 먹게 해준 것 같다. 많은 인연들을 만나게 해주고 매주 기대되는 방학을 만들어준 상상마당과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그리고 2조 친구들에게 고맙단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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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나, 철학하는 나 – 소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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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롯한 열여덟 살의 청춘들에게는 저마다 별처럼 빛나는 꿈이 있다. 그 꿈을 향한 도전이 값지면 값질수록 많은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이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힐 수도 있지만 그럴 때 일수록 어려움을 이겨내는 용기와 힘이 필요하다. 운명이 부여한 시련의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지혜와 의지를 보여준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운명의 필연적 법칙에 굴복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선택한 대가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대응을 고찰해 봄으로써 우리 청소년들은 고난에 굴하지 않는 자유의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나온 교수님들과 함께 소통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저의 후기는 조금 남다를 수 있습니다. 철학 강의에 대해 대부분의 청강자 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한 예를 들며 최대한 철학적으로 후기를 써내려가곤 합니다. 하지만 어떤 강의에 대한 흐름보다는 저만의 색다른 깨달음으로 승화시켜서 후기를 쓰는 것은 본래의 제 스타일이므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온라인 신문사인 프레시안에 게재된 (함께 들었던) 몇몇 학생들의 후기를 보니 다들 생각이 깊고 훌륭한 작문능력을 구사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칠칠맞게 저만의 기록물도 잊어버렸고 벌써 2주가 되어가는 시점이어서 그들보다 더 길고 생생하게 쓰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짧고 굵게나마 당시를 회상하며 깨달았던 점 혹은 그 강의들로부터 제가 얻을 수 있었던 점들에 대해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날(2013.1.2)의 제목은 ‘보다 자유롭게 꿈꾸기 위해(오이디푸스왕: 운명의 시련)’이었습니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알고도 그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에 맞서 그것을 훤히 밝혀 드러내는 오이디푸스의 실존과 자유정신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처음에는 ‘실존과 자유정신’이라는 가장 핵심적이었던 강의 속 주제에 대해 ‘뭐 별거 있을까. 내가 아는 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와 같은 식으로 단순히 생각했지만 계속 강의를 듣다보니 점차 그 생각이 바뀌어 갔습니다. 당시 느꼈던 주제의 핵심은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이었습니다. 고통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영웅적인 자세를 갖고 살아가야겠다는 다짐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제대로 된 이룸을 위해서라면 죽음마저도 (최후의 순간까지)두려워하지 않았던 오이디푸스의 자신감을 보고 저 자신에 대해 한 번 되돌아보며 더 자신 있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날(2013.1.9)의 주제는 ‘우리가 사랑에 눈뜰 때(에로스와 프시케: 사랑의 시련)’이었습니다. 사랑의 신 에로스와 인간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사랑의 신화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성급한 열정과 단순한 욕망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한 사랑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와 준비가 필요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연인들의 완전한 합일은 그저 결혼을 통한 가정의 수립이라는 관점에서만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를 통해 성숙한 사랑, 진정한 합일의 의미를 생각해봤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랑’이라 하면 단순히 ‘남녀가 애정행위를 하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만 강의를 들은 뒤에는 처음의 그 생각이 정말 단순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좀 더 폭넓은 관점으로 ‘사랑’을 바라보는 법을 익힐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날 이후로 180도 달라진 사랑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셋째 날(2013.1.16)의 주제는 ‘나의 존재감 드러내기(테세우스: 자기 증명의 시련)’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네 번의 강의 중 가장 적극적으로 (수업이 아닌)소통해주셨던 강의로 기억에 남습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첫 장을 장식하는 테세우스는 그리스 건국의 시조입니다. 그러나 그의 출발은 미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는 먼 친척이자 자신의 우상인 헤라클레스를 본받아 모험의 길을 나섭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공동체 속에 편입되기를 갈망하는 외부자의 강박과 아버지의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는 아들의 초조함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업적을 통한 자기 증명과 그것의 ‘말로’에 대해 성찰해봤습니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이야기, 좀 더 구체적으로 저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일종의 ‘나를 찾기 위한 스토리텔링의 동반자 내지 교훈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18세를 위한 철학캠프[강의]가 왜 신화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것인지도 (이 강의를 통해 제대로)알 수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신화의)정의’에서 도출된 것 이었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세계와 사물에 대한 궁금증을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들을 통해 풀어낸 이야기’로서, ‘논리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이며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신화의 중요한 네 가지 원리인 ‘반복’, ‘확대’. ‘재생산’, ‘유명’은 철학과 유사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언젠가 다시 철학을 공부할 때에도 신화와 함께 해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넷째 날(2013.1.23)의 주제는 ‘모험 속에서 나를 찾다(오디세이아: 모험의 시련)’이었습니다. 주제처럼 ‘모험의 의미’가 강조된 강의였습니다. 물론 모험의 의미는 한 사람이 간단히 정의내릴 수 없는 문제이지만 저만의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개인적인 생각으로)’모험’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 강화시키기 위해 신화 속 인물들이 썼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공통된 핵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모험을 떠난 뒤에는 ‘변화’가 생기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저도 모험의 경험이 있어 쉽게 공감이 가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험을 통해 ‘변화’를 경험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라웠습니다. 저도 앞으로 모험의 기회가 생기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 모험에서 깨달아갈 점을 생각하며 그 모험을 즐길 생각입니다.?

매주 한 번씩 도합 네 번의 강의를 들으면서 지금의[청춘의] 시기가 대학이라는 하나의 목적만 가지고 살아가도록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매번 강사님들께서 자신이 원하는 일, 가슴 뛰는 일을 하기위해서는 당장 앞에 보이는 대학만을 보지 말고 꿈을 찾으라는 식으로 강조하셔서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저 자신의 가슴 속에 품었던 혹은 품고 있는 꿈을 향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를 자세를 취하면서 하루하루 꿈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철학적으로 해볼 수 있었던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매주 한 번씩 신화 속 철학이야기를 들은 뒤인 1월 26일(토요일)과 1월 27일(금요일)에는 짧게나마 교육효과를 더 확실시하기 위해서였는지 논산 KT&G상상마당으로 1박2일간의 캠프를 떠났습니다. 처음엔 캠프를 이루고 있는 주요 내용이 ‘철학’인지라 약간 막막했었지만 막상 캠프에 가보니 철학이라는 학문이 나와 관련이 많은 학문이라는 것을 각인 받았을 정도로 흥미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캠프일정 중 있었던 골든벨 대회에서 저희 팀이 1등을 했었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도 기쁩니다. 조원 모두가 최선을 다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캠프에서는 등수보다도 캠프참가자 모두가 열심히 참여했느냐가 훨씬 중요하지만 그 동안 배웠던 내용을 기대 이상으로 많이 맞추었다는 것에서 스스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머지않은 훗날, 고대사 속 우리나라의 위상을 통해 (외교, 교육적으로)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인 저에게 있어 이번 캠프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알아온 역사와 철학과의 긴밀성이 그 때 제가 [훗날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할 한국사 알림이로 활동하게 될 때]역사 뿐만 아니라 철학을 접목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또 한 번의 연결고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캠프운영을 위해 도움을 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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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고 싶은 철학캠프 – 이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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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솔직히 주제가 철학이라는 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거의 엄마가 수업을 들어보라는 식으로 어쩔 수 없이 오게 됐는데, 첫 강의를 듣자마자 제가 흔히 알던 고리타분한 철학, 심오한 철학 등등 그런 선입견을 깨게 된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수강한 사람들이 분위기가 좋아서 수업할 때 지루하고 어색하지 않아서 좋았고 마지막 캠프강의 때는 아쉽기까지 했네요. 정말 많은 것을 얻어가고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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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퍼의철학 – 정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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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철학 캠프는 솔직히 많은 기대를 하고 갔다. 나는 진로도 철학과 쪽으로 잡았고, 요즘 철학책을 읽으며 공부도 하고 있던 시기라 이 철학캠프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참여하였다. 역시 캠프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처음 강의부터 매우 흥미로웠고, 특히 두 번째 강의는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비물질적인 것(감정)에 대한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더 좋았다. 처음에 이 철학캠프 일정지를 보았을 때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아이라 지식도 많지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터라 매일 졸면서 돈 낭비라도 할까봐 근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의외로 신화는 재미있었고 스펙타클했다. 그리고 이 캠프에서 가장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논술이었다. 나는 외고에 다니는지라 우리 학교에서는 글을 매우 못 쓰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이 캠프에서는 나의 글에 대해 칭찬을 많이 받았다.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조차 상 한번 못타봤던 나에게는 신세계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철학이라는 분야가 내가 좋아하고 배경지식도 많은 터라 학교나 백일장에서 썼을 때보다 더 잘 썼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확률이 높다. 여하튼 이 논술과 비평 프로그램은 매우 괜찮았던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논의를 펼칠 수 있는 장이었으며, 문제점 또한 찾을 수 있는 매우 뜻 깊은 활동이었다.

일박이일 캠프에 대해 말한다면 소수로 짜여진 조별활동과 조별 기숙 생활이 좋았던 것 같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말을 트거나 생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조별로 다니고 생활하면서 조별멤버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었고, 짧은 시간 동안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번잡하게 여러 사람과 면대하고 활동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면 분명 가벼운 인연에서 끝났을 것이다. 또 만족스러웠던 것은 캠프 진행자 최원혁 지도자 분이 정말 재미있었다. 힙합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랩퍼인 최원혁 선생님에게 더 호감이 갔고, 진행도 매우 훌륭히 해주셔서 즐거운 캠프가 되었던 것 같다.

만약에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4기가 개설된다면 꼭 다시 참여하고 싶고 5기까지도 참여하고 싶다. 정말 알차게 잘 짜여진 교육 강의 겸 캠프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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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에도 오고 싶은 철학캠프 – 조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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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신문광고에서 봤었다. 신문 1/4쯤 크기정도로 <18세를 위한 철학캠프에 초대합니다>라고 적혀진 문구였다. 철학과를 희망하고 철학이라는 학문에 관심 있는 나로서는 ‘혹’했다. 게다가 그리스 로마신화와 관련해서 철학을 풀어낸다니. 소녀감성을 지닌 나는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엄마를 충동질했다. “엄마, 나 이거 해보고 싶어.” 18살, 예비 고3에게 홍대의 문은 그때 열렸다. 너무 충동적으로. 그 뒤로 홍대 가는데 걸리는 시간과 내가 고3이라는 압박과 길치라는 사실과 개학 전날이 캠프가 끝나는 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방바닥을 허우적거려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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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버스는 나를 떠났다. 신청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첫날 강의를 들으러 갔다. 경기도 광주 촌에서 홍대까지는 3시간이 걸렸고 상상마당 코앞에서 40분을 헤맸고(…만세 내 길치 정신!) 첫날 화려하게 지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재밌고 흥미로웠다. 어렵게 철학자 이름을 꺼내면서 ‘이 사람은 어떤 철학자고 어떤 연구를 했다’의 나열식 교육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 철학자와 그의 연구가 등장하는 수준이고 주로 신화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또 철학이 아닌 것도 아니다. 확실히 철학적이다. 운명에 대한 생각, 사랑에 대한 관점, 자아를 찾는 여행, 진정한 모험에 대한 고찰, 신화와 철학의 관계, 그리고 영화에 응용되는 철학까지.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게 도와준다. 철학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얼마나 우리 일상에 친근감 있는 학문인지 깨달은 것 같아서 확신이 생겼다. 난 철학을 하고 싶다. 이미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그것을, 의미를 찾는 그것을, 행동을 되새김질할 수 있게 도와주고, 상상력과 생각을 풍부하게 하는 그것을 공부하고 싶다.

캠프는 더 재밌었다. 낯을 조금 가리는 나는 캠프가 매우 많이 걱정되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처음 보는 애들과도 친해지고 조를 이루고 새벽까지 자지 않고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신이 났다. 비록 상은 받지 못했지만 잠을 안자도 지치지 않고 공부하면서도 이렇게 신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철학을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재구성한 다른 조의 발표가 너무 좋아서 인정하게 되었다. 등수를 매기고 한 줄로 세우는 학교 교육과 다르게 보상받지 않아도 즐거운 공부다. 선생님들과도 미래에 대한 이야기, 진로, 진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들보다 나는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다양한 지역, 다양한 학교, 다양한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좁은 촌인 광주에서 나고 자란 내게 세계를 넓혀주었다. 19살이 된 나는 동생들이 더 많았는데,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멋있었다.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공부하기 위해 이런 캠프에 참가하고 꿈을 꾸는 동생들이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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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기대와 염려와 응원을 등에 업는 수험생이 되는 해 겨울. 내 세상은 더 넓어졌고 생각은 깊어지고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보았다. 1박2일 캠프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새로운 의욕이 생겼다. 언젠가 다른 곳에서 캠프에서 만난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다시 마주하고 싶다. 나도 멋지게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서. 철학뿐만 아니라, 아주 많이 큰 ‘무엇’을 배우고 간다. 선생님들, 수능 끝나고 20살에 다시 와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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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갈면 봄이 오리라![철학자의 서재]

칼을 갈면 봄이 오리라![철학자의 서재]

황종희의 <명이대방록>

진보성(대진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지금은 잠시 몸을 추스르고 기다릴 때

 

사람은 누구나 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에는 움츠리고 다음에 곧 찾아올 따뜻한 봄을 기다리게 된다. 내가 볼 때 대부분 사람들은 이 시간 동안 몸과 정신이 성장한다. 이 말을 규명할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나의 경험이 그렇고 내 주변인들과 감각적으로 교유한 결과가 그렇다.

2012년 말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대선이 끝나게 되면 유권자의 반은 내가 지지한 후보가 ‘됐다’는 일종의 안도감에 기뻐하고 나머지 반은 심할 경우 ‘멘붕’ 상태로 스스로를 방치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희망과 절망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종류의 안경을 쓴 사람이건 간에 곧 이 안경도 다시 벗어던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서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뽑은 사람이 됐으면 돼서 그만이고, 안 됐으면 안 됐기 때문에 그만’이라는 식의 생각은 일개 정치인에게 나의 삶 전체를 맡기고 나중에 찾아가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위험한 태도다. 우리는 어떤 정치인을 일단 선출하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가 포함된 집단의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유권자들의 희망과 절망의 태도는 맹목적인 희망이 되고, 더 무거운 절망이 된다.

그 동안의 역사에서 봐왔듯이 어떤 권력도 국민의 동의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고 판단하면 모든 정책과 행보는 정치권력의 자의적 판단에 두고 민중이라는 정치적 대상은 일상이라는 사회의 영역 안에 철저히 가두어 버린다.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강을 만들어 절연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선거 때만 민주’라는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아직 달성된 적 없는 민주라는 개념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선거만 끝나면 민주주의를 잠깐 경험했다는 찰나의 환희를 기억하며 축제를 마무리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 민주주의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당선자에게 정치적 기반은 주었지만 아직 권력의 전부를 양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은 당선자를 지지했던 사람이나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 모두 정치권의 행보를 찬찬히 지켜봐야 할 입장에 있다. 비판적 성찰을 통해 그가 민주적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지 간을 봐야 한다. ‘대통합’이라는 말, 마치 어린 백성이 전제군주의 즉위식을 희망에 들뜬 마음으로 축하하듯 다함께 힘을 모으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아직도 대한민국이 왕조국가인가? 국민 모두 선거 국면에 휘둘려졌던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정치권에 대한 비판과 감시의 능력을 내적으로 고양시킬 때이다.

황종희의 역저 <명이대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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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지음, 김덕균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그런 면에서 17세기 중국의 대학자 황종희(黃宗羲, 1610~1695)가 쓴 <명이대방록(明夷待訪綠)>(황종희 지음, 김덕균 옮김, 한길사 펴냄)은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명말청초라는 시대적 혼란기를 살다 간 황종희가 존재론적 의미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히 규정한 후 그것을 기반으로 정치에 대한 원칙론적 견해를 풀어낸 정치사상서이다. 중국의 근현대 사상가들이 극찬한 책이고 황종희를 두고 ‘중국의 루소’라고 명명하기도 했지만 간혹 비현실적인 책이라는 비판도 들었다. 그만큼 저술 당시와 이후 오랜 시간을 두고 평가될 만큼 파격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이기도 하다.

물론 <명이대방록>에는 현대의 사회ㆍ정치 상황과의 괴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황종희가 가졌던 문제의식과 날카로운 통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부분이 분명 많이 있다. 특히 이 책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저자의 태도는 바로 권력에 대한 칼날 같은 비판의 날을 항상 꼿꼿이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황종희가 이 책을 썼을 당시 중국의 내부 상황은, 한족이었던 명왕조가 이민족인 청왕조로 교체되던 시기였고 패망으로 치닫던 명왕조의 부조리한 상황과 사회 전반의 모순이 표면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해 원칙적인 대안 의미를 제시하고 방책을 주장하는 내용이 많다.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에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자신의 염원은 물론, 그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와 정치, 경제 부분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담았다.

책 제목에 보이는 ‘명이(明夷)’라는 말은 <주역> 64괘(卦) 중 하나로서 36번째 위치하는 ‘명이괘(明夷卦)’에서 따온 말이다. 이 괘의 모양새는 땅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 坤上) 에, 해와 빛을 상징하는 ‘이(離)’가 아래(?, 離下)에 위치한다. ‘명이’라는 말은 땅 아래에 해가 있는 형상이니 밝은 태양이 땅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明入地中 明夷”) 괘의 의미는 “빛이 가려지면 현자의 명철함이 해를 입어 어려움에 처하게 되니 이 상황을 잘 파악하고 정도를 지켜 참고 인내하며 재능을 감추고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효사(爻辭)가 상징하는 의미 중에는, 절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인내하면서 저항 세력끼리 은밀한 규합을 이루고 옳지 못한 권력에서 벗어나야 하며 바르지 못한 정치는 결국 망한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명이대방록>의 구성은 정치개혁론이 주를 이룬다. 원군(原君)·원신(原臣)·원법(原法) 등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의 지배력을 상징하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 법이라는 국가운영 근거에 대한 원칙적인 개혁론을 전개한다. 이런 면에서 황종희는 민중의 혁명성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던 맹자(孟子)를 닮았다.

황종희는 <명이대방록> 서두에서 맹자가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해진다”(一治一亂)고 한 말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고 하며, “왜 삼대(三代) 이후에는 혼란만 있었고 다스려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있다. 황종희는 또 다른 저서 <맹자사설(孟子師說)>(이혜경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그 원인을 통치자에게 돌리면서 통치자가 ‘불인(不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인은 의서(醫書)에 기(氣)가 관통하지 않아 ‘손발이 마비된 것’을 말한다고 정자(程子)가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해서 불인한 통치자는 백성,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의 독락을 획책하다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통치자이다. 기론과 관련하여 황종희는 “기가 운행하는 모든 것은 동체(同體)”라는 우주론적 해석으로 확대한다. 바로 맹자의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근거하는 것이다.

황종희는 인간이 자기의 ‘개인적인 것(自私)’과 ‘주관적인 이기심(自利)’으로 나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통치자인 군주가 공리(公利)를 추구하게 되면 오히려 개개인들의 자사와 자리를 만족시키며 승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최고 권력을 가진 자가 사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종희는 “천하에 큰 해가 되는 것은 군주뿐”이라고 했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군주는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자로서 그 존재가치가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군주는 객이고, 백성이 주인이다

황종희는 ‘원군(原君)’ 편에서 고대 성왕(聖王)이라고 불리는 통치자들을 거론하면서 “옛날에는 천하의 백성이 주인이고, 군주가 객이 되어 무릇 군주는 일생 동안 천하를 위해 경영했는데,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 백성이 객이 되어서 무릇 천하의 어느 곳도 평안하지 못한 것은 군주만을 위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군객민주(君客民主)’라는 슬로건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 동양의 유가 정치철학에서 보이던 전형적인 ‘군주민본(君主民本)’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현대의 민주와는 거리가 있지만 기존의 민본과는 차별되는 급진적 민본주의로서 ‘민주적 민본’이라 부를 만하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기존에 있던 아래의 것과 위의 것을 전도시킨다. 이미 황종희는 이자성의 농민봉기군에 의한 명왕조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민중의 힘을 무시하고서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는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황종희의 급진적 민본주의가 당시로서 파격적인 면을 분명 갖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정치개혁과 사회 재편성의 주인공은 합리적인 엘리트로서 자신과 같은 사족계층이 담당해야 한다는 의식도 노출한다. 이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가 지닌 태생적 한계성에 의해 국민의 실질적 주권행사는 시기적으로 분할되어 한정되어 있고 여전히 정치적 주체는 따로 있다. <명이대방록>의 관점을 현대에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한계점이고 그 연장선에서 똑같은 고민이 현대에도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황종희는 ‘원신(原臣)’ 편에서 잘못된 통치 권력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사실 청왕조는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펴서 그들을 양지로 끌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황종희는 청왕조의 지속적인 요청에 어떠한 관직도 수행하지 않았다. 과거 명나라에 대한 지조를 지키는 면도 있었지만 <명이대방록>이 명왕조의 회복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쓴 저술임을 생각하면, 그의 이런 생각은 자신이 정치적 노선에 진출하는 것과 그 당위성, 그리고 물러나 처신할 때의 합당함을 증명하는 출처의리(出處義理)와 관계가 있다.

황종희는 명태조가 맹자의 “민이 귀하고 다음이 사직이고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는 말을 폐기하고 재상까지 폐지했던 사실에서 환관이 득세하여 사족 계급은 물론 백성까지 고통스럽게 만든 상황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었다. 학교, 서리, 환관에 대해 언급한 편에서 그의 이런 생각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바라는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며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을 통해 지식인으로서 현실의 모순과 잘못된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도(正道)를 회복하는 입장에서 ‘너희들이 알고 있던 그것은 원래는 이런 것이야’라고 외치는 듯하다. 물론 구호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주장과 정밀한 근거를 갖추고 있기에 비중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황종희는 명왕조의 유산을 지니고 있던 지식인이었지만 청왕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자로 기억될 수 있던 점은 바로 어떠한 권력에도 협조하지 않고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정치권을 가만두지 않고 간섭해야만 하는 유학자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던 점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사대부로서 가지고 있던 책임감은 황종희가 말한 민주를 놓고 보면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개념의 측면에서 민주의 주체는 사회구성원 개인들이 그 적임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정치권에 대한 태도는 매우 당당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황종희가 당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참여에 있어 실질적으로 제외되었지만 끊임없이 지배 권력에 대해 견제하고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던 점은, 현대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지만 또 소외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정치권과 관련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 조언하는 바가 크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민주사회를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현재의 우리는 과연 황종희가 말한 ‘군객민주’의 그 민주조차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 든다. 황종희가 경제개혁론에서 주장했던 지방분권적 통치는 민 자체의 의식이 개선되거나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던 주장이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의식이나 개인의 정치참여에 대한 의식도가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정치권에 대해 생각하고 발언하며 자기 삶의 자유와 여가를 확장하는 기회를 유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파가 모든 것을 움츠리게 만드는 이때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은 비록 시기적 간극이 넓은 책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오히려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다. 현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명이의 시기에 새로운 개혁의 시대를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기에 절실하게 필요한 책이 될 것이고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공(公)’의 시대를 앞당기기 위한 의식의 지침서로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될 것이다.

지금 혹 봄을 기다리는 동안 정말 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명이괘’의 풀이처럼 그럴 때일수록 ‘연대’와 ‘의지’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의 묘(妙)를 느껴야 할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연대하고 의지해야 할 것이 민중과 민중이라는 점이다. 정치권과 권력은 비판의 대상이지 평생 단심(丹心)으로 종사(從事)할 대상이 아니다. 지지하고 응원했지만 권력을 획득한 정치권력에게는 그 순간부터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야 한다. 황종희처럼 말이다. 지금은 모두 그 칼날을 갈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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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범죄자=짐승’? 당신도 폭력의 공모자![철학자의 서재]

‘외국인 범죄자=짐승’? 당신도 폭력의 공모자![철학자의 서재]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

조주영(서울시립대학교 박사 과정)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1.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별다른 일 없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친구를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날이었기에 수다도 금세 시들해졌고, 우리는 각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그만 집에 가는 게 좋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만 난데없이 눈물이 났다.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우는 나를 보며 친구는 몹시 당황했고,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눈물의 이유를 찾아야 할 텐데, 이유라고 할 만한 게 당최 없는 것이다.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애꿎은 책을 탓했다. 책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짜증도 나고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난 거라고,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만들어냈다.

그때 읽고 있던 책이 바로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펴냄)이다. ‘최악의 저자 상’을 받을 정도로 문체가 까다롭기로 악명이 자자한 버틀러이니만큼, 책이 어려워서 짜증이 났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질질 짜면 어떻게 하냐는 둥, 서른 넘어 주책이라는 둥 핀잔을 주고받으며, 나와 친구는 그렇게 그 순간을 넘겼다.

그런 일이 있었던 지도 벌써 며칠이다. 그 사이 어찌어찌 마지막 장까지 넘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삶>은 이해불가인 채로 있다. 그럼에도 감히, 그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울었던 그날, 하필 읽고 있던 책이 그 책이었고, 책을 덮기 전 “삶이 애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할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65쪽)”라는 문장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고, 눈물이 터져 나온 건 아마도 그 순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2.

그 문장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울컥하게 만든 것일까? 겨우겨우 책을 읽고 난 뒤 이걸 확 던져버릴까 하다가 마침 그 일이 생각나서, 그 문장을 다시 찾아보았다. 삶이 애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할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자격”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때문인 것 같다.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 같아”라든가, “내가 과연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걸까?”라고 말할 때처럼, 어떤 자질이나 능력, 조건 등을 평가할 때 “자격”이라는 낱말을 쓰는 게 아니던가? 혹시나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자격(資格)
【명사】
1.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
2.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거나 일정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나 능력.

역시, 생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다. “자격”이라는 낱말은 “과연 그럴 만한가?”를 물을 때 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펴냄). ⓒ경성대학교출판부

그래서인지 “삶으로서의 자격”이라는 구절이 영 마뜩치 않다. 삶에 대해 자격을 운운하는 게 과연 말이나 되는가? 삶의 자격을 따지는 것은 누군가의 삶은 살 만한 삶이고 누군가의 삶은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 자체는 가능할 수 있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묻는 것, 그것이 삶으로서의 자격을 따지는 거라면, 삶에 대해 자격 운운하는 것도 말은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 삶에 대해 자격을 논할 수 있다고 치자. 어떤 삶이 자격을 갖춘 삶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판단의 권위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너에게는 삶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너의 삶은 살 만한 삶이 아니다. 너는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은 누가 갖는 것인가? 그러한 “자격”을 갖춘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 내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상황을 그려보았다. 나만의 상상이니 조금은 낯간지러워도 남에게 귀감을 주는 삶으로 평판이 자자한 그런 상황을 떠올릴 수도 있으련만, 한낱 가십거리밖에 안 되고 있는 그런 상황이 먼저 떠오른다. “걔 아직도 여전하다며?” “어머 어머, 그 나이 처먹도록 뭐 하고 살았다니?” 수군수군 수군수군.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큰 죄를 지었다거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면서도 누군가 내 삶을 비웃지는 않을까,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꾸 나쁜 쪽으로 생각이 빠진다.

아마도 스스로가 “일반적인 삶의 패턴“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에 “일반적인 삶의 패턴”이라고 할 만한 게 과연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평범한 삶, 보통의 삶이라고 여겨지는 삶의 모델은 분명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사회지표를 나타내는 통계청 자료만 봐도 어떤 삶이 보통의 삶인지가 금방 드러난다. 2012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평균 여성”은 29.1세에 결혼을 하고, 30대 초반에 첫 아이를 낳는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5세~29세가 71.4퍼센트로 가장 높고, 30세~39세는 “결혼·육아 등으로” 55퍼센트 대 수준으로 크게 하락하였다가 40대 초반부터 다시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여성인구가 증가한다.

“평균 여성”의 삶에 비추어 보자면, 30대 초반인 나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한 명 키우고 있어야 하며,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거나 휴직을 한 상태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집에서 용돈을 받아쓰는 처지였다. 지금이야 생활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고 있지만, 매달 40만 원의 월세는 아직도 부모님께 의존하고 있다. 아이는커녕 아직 결혼도 안 했고 향후 몇 년 안에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평균 여성”의 삶에서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진 것 같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자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괴감을 키우고 스스로 위축된다. 삶에 떳떳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이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내가 꿈꾸는 “다른 삶”을 위한 준비 기간이 긴 것뿐이라고 자위해보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내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그 “다른 삶”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함을 들키기 싫어 괜히 센 척을 해본다. 내 삶이 아무리 비루해도, 그건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뭐람! 너나 잘 하세요!

3.

“자격”이란 말에 너무 발끈한 나머지, 정작 <불확실한 삶> 얘기를 못했다. 이 책은 버틀러가 2001년에 일어났던 전대미문의 사건인 9.11 이후에 쓴 다섯 편의 논문을 묶은 것이다. 9.11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매스컴을 통해 사건의 현장을 본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도 충격공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폭력으로 기억되고 있다.

저 멀리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던 건 선정적으로 보도를 한 언론의 탓도 크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다른 이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의 변덕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12쪽)”이 그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도 분명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든 예기치 못한 폭력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나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고, 그로 인해 나는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슬픔에 젖게 만들기도 한다.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버틀러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슬픔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며,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논문 중 특히 2장의 논문 ‘폭력, 애도, 정치’에서 그 주장이 강하게 드러난다. 어떤 슬픔은 국가적으로 인정받고 확장되는 반면, 어떤 슬픔은 사유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세계 무역 센터의 희생자들은 말 그대로 “무고한 희생자”로 애도되고 신성하게 된다. 반면 미국의 “공정한 전쟁”에서 살해된 이들은 알려지지 않고, 따라서 애도되지 않는다. 애도될 수도 없다.

어떤 삶은 애도할 만한 것이고, 어떤 삶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인가? 누구의 삶이 삶다운 삶인가? 목적의 왕국의 성원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할진데, 어째서 누군가는 애도되고 누군가는 애도 받지 못하는 걸까?

“세계 무역 센터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에 겪었던 일에 대한 복잡다단한 보도는 영혼을 압도하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 보도는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강렬한 동일시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서사들이 어떤 인간화하는 효과를 갖는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통해 내가 의미하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서사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사람들과 나란히 사라진 삶 역시 인간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보도들이 그 장면을 무대화하고 그러한 애도가능성 안에서 ‘인간’을 확립하는 서사적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터넷에 올라오고 주로 이메일 접촉을 통해 유포되었던 몇몇 보도를 제외한다면 어딘가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된 아랍인들의 삶을 다룬 서사를 공적 매체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애도할 수 있는 삶이 어떤 조건하에서 확립되고 유지되는지, 어떤 배제의 논리를 통해서, 그리고 어떤 삭제와 탈명사화(denominalization)의 실천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69~70쪽)”

이런 대답이 가능할 것 같다. 애도가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애도가 차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배타적인 “인간” 개념을 생산하고 유지시킨다.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에 대한 반응과,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가하는 차별만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특히 그 범죄가 살인 등의 강력 범죄였을 경우 그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묘사된다. 특정 개인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외국인 범죄”로 기술됨으로써 불특정 외국인에 대한 불안과 분노가 가중된다. 특히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 비슷한 인종의 사람들은 모두 “한층 강화된 감시의 대상이 된다(71쪽).”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애도될 수 없기에 인간이 아니며, 인간이 아니기에 애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불안과 공포를 쉽게 그들에게 돌릴 수 있다.

“그 결과 아무런 형태도 없는 인종차별주의, ‘자기-방어‘의 요청에 의해 합리화되는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게 된다.(71쪽)”

4.

예기치 못한 폭력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 자체로 공포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인간 존재의 한 측면이 드러나게 됐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상처받기 쉽다는 사실이다. 신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살아가면서 상처를 피해가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상처받기 쉽다는 취약성,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는 이 취약성이 우리를 “우리”로 묶어주는 건 아닐까? 이 취약성으로부터 배타적이지 않은 “인간” 개념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나는 “평균적인 삶”에서 먼 삶을 산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고백했다. “자격”이라는 단어에 너무 꽂힌 나머지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상상의 나래도 펼쳤다. 하지만 그때 그 눈물의 의미를 이제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 어쩌면 삶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피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취약성, 폭력에 대한 공포.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훅 밀려온 것이다.

언제든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 그러나 애도될 수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에, 그 삶에 폭력이 가해진다고 한들 그것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자기-방어’의 요청에 의해 합리화되는 인종차별주의”가 쉽게 만연하듯이 말이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폭력을 당했는데 나의 삶이 삶다운 삶이 아니어서 그 폭력이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분명 폭력을 당했는데, 누구도 내가 당한 폭력에 대해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을 해보자. 끔찍하지 않은가!

이런 공포와 슬픔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무기력해지는데, 버틀러는 바로 그 슬픔을 정치를 위한 자원으로 만들자고 말한다.

“슬픔이 전시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열거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제공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의식적인 설명을 종종 방해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자율적이고 강한 자신감에 차 있다는 바로 그 생각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50쪽)”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나 자신이 결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나의 운명이 당신의 운명과 근원적으로나 최종적으로나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를 횡단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반대 논증을 할 수 없는 관계성이다(49~50쪽).” 이러한 관계성,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관계적 끈(49쪽)”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인간 공통의 취약성”이다.

인간 공통의 취약성은 “나”의 형성에 선행하는 조건, “우리가 붙잡고 논쟁할 수 없는, 처음부터 우리는 벌거벗은 상태였다는 조건이다.(61쪽)” 이와 같은 조건으로서의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윤리적인 책임감, 즉 “우리가 직접 겪은 것과 같은 폭력으로부터 다른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하게 만들 원칙(60쪽)”이 나오는 것이다. 슬픔이 정치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슬픔을 통해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버틀러는 자신이 제안하고자 한 것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폭력과 공모하는 우리, 상실에 대한 우리의 취약성과 그 결과로서의 애도의 과제, 이런 조건에서 공동체의 토대를 찾는 것, 이 모두와 연관이 있는 정치적 삶의 차원을 고려하자(45쪽)”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슬픔이 정말 정치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속 시원히 대답까지 해주면 좋으련만, 버틀러는 역시나 친절하지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 다른 사유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의 슬픔, 나의 불안, 나의 공포, 이 모두가 떨쳐버릴 수 없는 나의 취약성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을 외면하거나 제쳐두는 대신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그것이 다른 사유를 위한 첫걸음일 테니까.

<철학자의 서재>가 강연으로 다시 태어납니다[ⓔ시대와철학알림]

?<철학자의 서재>가 강연으로 다시 태어납니다[ⓔ시대와철학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는 강남논현도서관과 함께, 매월 한 권의 고전을 같이 읽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2월과 3월의 책과 주제를 공지합니다. 책으로만 만나는 <철학자의 서재>에서 강연으로 만나는 <철학자의 서재>를 기대합니다.

일상에 지친 당신을 위한 책 천국 <철학자의 서재>

1강 2/26 (화)
주제 :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도서 : 헤겔의 ”역사 속의 이성”
강연 : 김성우 교수

2강 3/19 (화)
주제 : 착한 시민이 괴물이 되는 악의 평범함
도서 :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강연 : 한길석 교수

– 날짜 : 1강-2/26(화), 2강-3/19(화)
– 시간 : 저녁 7시~9시
– 대상 : 관심있는 분 누구나 30명
– 장소 : 논현정보도서관 3층 강의실 (학동역 6번출구)
– 문의 : 02-515-1178

* 매월 찰학자와 함께 한권의 책을 읽습니다. 읽어 오시지 않더라고 수강 가능합니다.

 

 

<아람누리도서관> 청춘의 고전 1 : 예술과 인문학이 만났을 때 [ⓔ시대와철학알림]

?<아람누리도서관> 청춘의 고전 1 : 예술과 인문학이 만났을 때 [ⓔ시대와철학알림]

 

경기도 고양시 아람누리 도서관에서 <청춘의 고전>시즌1편 중 몇 편을 선정해 다시 강연을 합니다.

경기도 고양시 아람누리 도서관은 <예술 특성화 도서관>이라고?하며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을 시도한 <청춘의 고전> 강연을?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날이 유명해져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강연 시리즈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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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태영(한철연 회원, 교육강좌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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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한 죽음과 처절한 죽음스콧 니어링은 중년 나이까지 교수로서 열정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 사람이다. 늙어서는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서 자연 속에서 농사지으며 살아간 사람이다. 100세까지 모래 살다가 스스로 밥 굶고 죽은 사람이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한없이 살다간 사람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한을 안고 자살하신 분들이 구천을 헤매신다. 한국이 오이시디 국가 가운데서 자살률이 2위와 큰 차이나는 1위이다. 전 세계에서는 1, 2위와 비슷한 3위이다.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31.4명이다. 2007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자살방지위원회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나는 꼴이라고 말이다. 60대 자살률은 그 두 배이다. 이 분들의 죽음은 스콧 니어링의 죽음과 너무나 대조된다. 이 분들의 죽음을 기억해 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분들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사회 구성원을 챙겨주지 못한 병든 사회가 죽인 살인이다. 이분들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생각할 때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오건호 지음, 책세상 펴냄

국민연금은 생명줄이다.국민연금이 단단했다면 우리나라 60대 자살률이 참혹한 수준으로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국민연금 혜택을 많이 받아야할 서민들이 국민연금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서민들이 오히려 국민연금에 강하게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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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여러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높은 소득 재분배의 효과를 지닌 사회복지의 기둥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연금에 가장 많이 저항하는 저소득,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국민연금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일게다.’(8, 9쪽)

국민연금은 생명체이다.국민연금 정책은 완벽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다. 큰 틀은 정해졌지만 운영방식은 5년에 한 번씩 바꿀 수 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이 국민연금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국민연금이 이룰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60대 자살률 수치도 달라질 것이다.

사보험 연금은 1천원 내고 850원 받는다. 국민연금은 1천원 내고 2천원에서 2천 5백원 사이 받는다. 우리나라가 스웨덴 수준 되면 2천 5백원 받을 것이고, 지금처럼 우리나라가 사회복지정책을 확고하게 펼치지 못하면 2천원 받을 것이다. 아니 2천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대부분 납부한 보험료보다 2배 이상의 연금액을 수령한다.’(76쪽)‘심각한 일은 대다수 국민이 국민연금과 사보험 중 사보험이 가입자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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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사보험보다 유리한 점은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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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민연금의 연금수령액은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실질가치로 지급된다. 이는 사보험의 연금액 기준과 다른 중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어 필자가 계속 국민연금에 가입한다면, 62세가 되는 2027년(서평자 주: 2033년부터 연금 개시자는 65세부터)부터 매월 43만 원을 받을 예정이다.’ ‘국민연금에서 밝히는 미래 연금액 43만 원은 사보험의 137만 원과 동일한 금액이다.’(60,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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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에서 덧붙일 내용이 있다. 이 책을 쓴 오건호는 62세부터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오건호보다 몇 살 더 어린 세대는 2033년부터 연금 개시 나이가 65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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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지속가능한가?

‘가장 뜨거운 쟁점은 재정추계 기간이었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설정한 재정추계 기간 70년이 지나치게 길다고 비판했다.’ ‘외국의 재정추계 기간은 60~75년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연금의 역사가 짧고 연금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환경이 급속히 변하는 곳에서는 가능한 한 기간을 짧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민주노총의 주장이다. 민주노총은 신규 가입자의 가입 연령(24~27세)과 평균수명(84세)을 고려할 때 60년이면 재정추계 기간으로 충분하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10년이라는 차이가 왜 이렇게 중요한가?’‘만약 재정추계를 60년으로 설정한다면, 국민연금 재정안정화를 위한 필요보험료율은 정부안에 비해 3.1%P 낮아진다. 즉 정부가 급여율 60%를 유지하기 위해 제시한 필요보험료율 19.85%가 16.75%로 줄어들고, 급여율을 50%(서평자 주: 2008년 50프로에서 매년 0.5% 인하하여 2028년 급여율 40%로 낮추기로 확정)로 인하할 경우 필요보험료율은 15.9%에서 12.8%로 더욱 완화된다.’(100, 101쪽)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민주노총 주장대로 재정추계를 70년이 아니라 60년으로 설정한다면 국민연금 재정이 바닥나는 예상 시점이 더 늦춰질 것이다. 가입자가 내야할 보험료율도 낮아질 것이다. 국민연금 고갈 시점에 의해서 느끼는 일반인들 두려움도 많이 누그러뜨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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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가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출산율은 너무 낮다. 세상살이가 팍팍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재정을 단단하게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더 높아져야 한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팍팍한 사회에서 그 누가 아이를 많이 낳고 싶겠는가. 이 사회에서 복지정책이 잘 펼쳐지면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국민연금이 든든하게 이 사회 구성원 노후를 지켜준다면 또한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높이면 국민연금 재정은 더 든든해질 것이다. 보험료율 9프로를 선진국처럼 18프로로 높여갈 필요가 있다. 천천히 높여갈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선 가입자 당사자가 싫어할 수 있다. 직장가입자는 국민연금 보험료 절반을 기업주가 내 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주들이 크게 저항할 것이다. 기업주들은 노동자 노후가 편해져야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국민연금 수익비가 높아서 국민연금 재정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사회적으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4대강 사업처럼 해만 끼치는 행정에 많은 예산을 쓰는 일을 없애야 할 것이다. 남북화해를 이루어 국방비에 들어가는 예산을 줄이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납세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이루어진 부자감세를 원래 수준으로 돌려놔야 한다. 더하여 부자증세를 이뤄내야 한다. 그 다음 사회 전체 구성원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부자증세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다른 구성원들도 세금 더 내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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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과 기초 노령연금

2007년에 노무현 정부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프로로 낮췄다. 국민연금 보험금을 낮췄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기초노령 연금을 만들었다. 65세 이상 노인 70프로가 기초노령 연금으로 월 9만 4천 6백원을 받는다. 박근혜가 대통령 공약으로 65세 이상 모든 노인들이 기초노령 연금으로 20만원 받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박근혜는 대통령 당선 된 후에 국민연금 기금 일부의 돈으로 모자라는 기초노령연금 재정을 메우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올바른 길이 아니다. 2011년 국민연금 1인당 수급액이 월 26만 원이다. 공무원연금의 12% 수준이고, 사학연금의 9% 수준이다. 그걸 헐어서 기초 노령연금 재원으로 쓴다? 너무 황당하다. 2011년 공무원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18만 원이다. 거액의 퇴직수당을 제외한 수급액이 이 정도이다. 2009년 군인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35만 원이다. 2011년 사립학교교직원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98만원이다. 민주당은 특수직연금 받는 사람도 기초노령연금 20만원 받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홍헌호는 민주당 주장을 비판한다. 나도 홍헌호 주장에 동의한다. 특수직연금 대상자는 국민연금 대상자보다 높은 액수의 연금을 받는다. 굳이 그 분들이 기초노령연금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은 모자라는 재정을 국민세금으로 메운다. 국민연금은 이 세 연금보다 관련 당사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공평성 차원에서 옳지 않다. 아직 고령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당장은 국민연금에 쌓인 돈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몇 십 년 뒤에 국민연금 받을 대상자가 압도적으로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국민연금 기금에서 돈을 빼 내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 아랫돌 빼내서 윗돌 막으려 하면 그 집은 반드시 무너진다. 장기적으로는 적자로 돌아설 수도 있는 국민연금에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할 때가 닥친다. 이명박 정부 때 부자감세 했던 것을 원래 위치로 되돌려서 기초노령연금 재정을 메워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낮춰서 기초노령 연금을 만든 것을 생각하면 국민연금 기금 중 일부를 기초노령연금으로 쓴다는 말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이 책이 지닌 약점과 강점이 책은 2006년에 나온 책이다. 국민연금 운영방식은 5년에 한 번씩 바뀐다. 2013년 에도 국민연금 운영방식이 바뀔 것이다. 그럼 이 책이 나온 뒤에 두 번 운영방식이 바뀐다. 이 책이 바뀐 운영방식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한계이다. 가장 큰 한계는 이 책에서 오건호가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을 모두 합칠 것을 과감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말하기 어려운 점은 있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 오건호가 이 책 고쳐서 다시 내게 된다면 국민연금하나로 운동을 다뤄주길 기도한다. 오건호가 건강보험하나로 운동 펼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지닌 강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국민연금의 큰 틀을 이 책은 알려주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왜 연대임금인 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왜 서민들이 국민연금을 들어야 하는 지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2004년에 일어난 국민연금 반대 운동에 대해서 글쓴이 오건호는 반대만 하지 않는다. 일부 내용은 옳다고 인정한다. 물론 틀린 내용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말한다. 정부가 잘못한 내용도 차분하게 짚어낸다.이 책은 얇다. 값도 싸다. 5천 9백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한 권씩 사 읽기를 권한다. 바뀐 내용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아직 국민연금 가입하지 않고서 사보험 연금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우선 이 책을 꼭 사 읽기 바란다. 아직 국민연금 가입하지 않은 서민은 반드시 이 책 사 읽기 바란다. 이 책이 널리 읽히면 60대 자살률이 많이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하시는 분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책값은 단 돈 5천 9백원이다.

법륜, 침묵의 법을 부활시키지 말라[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법륜, 침묵의 법을 부활시키지 말라[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윤지영(명지대 강사)

 

법륜의 말은 구토를 일으킨다. 자신의 우울증의 근간이 가족 내 성폭력에서 기인하며 그 안에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뒤엉켜 있음을 어렵게 토로한 이에게 법륜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법륜의 손쉬운 답에 대한 비판에 앞서, 먼저 내담자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 짧은 글귀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시작해야 한다.

▲ ⓒ뉴시스

내담자의 글귀는 근친상간 성폭력의 복잡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잘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생존기반이며 심리적, 물질적 쉼터이자 안전망이라 여기던 가정이 한순간에 위협적 공간으로 바뀌었을 때, 심리적 물리적 약자인 아이는 이 상황을 감내하거나, 아니면 폭로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감당하기 힘든 진실 앞에서 아이의 발언은 헛소리나 망상, 쓸데없는 이야기로 치부되어 간과되어진다. 왜냐하면 여태껏 우리는 가족에 대한 신화를 통해 행복의 패러다임을 정초해 왔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단위가 폐쇄적 불소통의 장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란 공적 영역과 분리되어야할 내밀한 사적 영역이자 혈연으로 맺어진 비영리적 자연적, 순리적 관계로 이상화됨으로써, 가족 구조 내의 위계성과 폭력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함구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친상간 성폭력에 대해 폭로하는 이는 영구한 단위여야 할 가족을 해체해 버리는 내부적 위협 요소로 인식되어진다. 그러하기에 가족 구조 내에 산재한 불편한 진실을 건드리는 이의 발화 위상은 내동댕이쳐져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내담자는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 발화할 기회조차 박탈되어 침묵 속에 방치되어야 했다. 아버지의 가해와 어머니의 방관 속에서 내담자는 행복과 위로의 원천으로 이상화된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현실적 가족의 피폐함의 간극 안에서 혼동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긴 침묵과 자기 혐오로 점철된 시간의 강을 건너 어렵게 말하기 시작한 내담자는 다시금 가족들이 그녀에게 강요했던 침묵의 법이 법륜에 의해 부활되었음을 볼 것이다.

침묵의 법에 의해 봉인되었던 뒤엉킨 고통과 몸의 기억들을 망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법륜의 요지다. 마약중독의 예로 시작되는 그의 글은 마약 중독의 원인을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읽어내는 단순함을 보인다. 납치와 강제적 마약 투여란 폭력적 실태에 노출된 개인이 어떻게 그 엄청난 트라우마를 감당하며 생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심층적 분석없이 마약중독이라 결과물만을 보고 이를 개인의 의지 부족이라 진단하는 것은 스스로가 제시한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왜 상습적 마약 복용을 통해 그가 도피하고자 하는 고통은 무엇이며 그 고통은 단순히 생리학적 뇌의 일부분의 중독 현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 신체적 상흔을 스스로가 자해하는 방식은 아닌지 등에 대한 질문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대로 된 트라우마의 예에 대한 이해도도 없이 법륜은 마약 중독에서 근친상간 성폭행의 문제로 이야기를 비약해 버린다.

고통의 원인을 찾기 보다, 그 고통을 키워낸 자신을 다스리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란 해법은 모든 폭력 양상을 개인의 마인드 컨트롤의 문제로 축소해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성폭행은 하나의 망상일뿐이며 피해자 자신의 정신수양 문제로 극복가능한단 법륜의 말은 억압과 차별 메커니즘을 정당화하는 보수 담론이다.세상은 아무래도 안바뀌니 당한 너가 입다물고 없었던 일로 쳐라는 논리는 고통의 개인화를 통해 구조적 폭력성을 은폐한다. 즉 억압의 부조리성을 폭로하는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보다,부조리에 분노하는 이를 망상가로 만들어 침묵케 하는 것이 여태껏 폭압적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방식아니었는가? 더없이 기득권 유지적 발언을 수양으로 포장하지말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직시,그 감당하기 힘들고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이다. 어디서 고통이 기인한 지도 모른 채, 어떻게 고통을 넘어설 수 있다고 여기는가. 그것이야말로 고통을 더욱 더 비대하게 키우는 도피의 방식일 뿐이다.

아버지의 사죄와 반성, 어머니의 방조에 대한 설명을 내담자는 필요로 한다. 물론 이러한 정면충돌의 방식에서 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개인적 가족사의 특이성에 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폭력 양상이 구조적인 가족의 위계질서에서 발생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근친상간 성폭력이 빈번히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은폐되어져 버리고 마는가. 왜 어머니는 방관자가 될 수 밖에 없었나, 이는 경제적 의존성과 생존 기반의 물적 토대를 남편이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는가. 가족은 왜 해체되어선 안되는가. 피해자와 방관자, 가해자란 뒤틀린 관계성이 가족이란 이름 아래 유지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바로 내담자가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아닌가.

다시 말해 내담자가 겪은 이 트라우마가 미친 몇몇 개인의 가족사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신비화가 강화될 수록 가족 내의 부조리와 폭력 현상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륜은 고통의 기억과 몸을 속세의 헛된 망상으로 치부하는 초월적 태도로써 내담자가 수십년간 고투해 오던 실존적 고통과 몸부림을 헛된 몸에 새겨진 망상더미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더욱 키우게 할 수 있는 상담 방식이다.

나아가 권력을 지닌 이-아버지가 어떠한 일을 저질러도 하위주체인 자식은 그저 감사하란 말은 권력 구조의 폭력양상을 재생산하게할뿐이다.구조에 내재한 부조리 자체를 허상으로 만듦으로써 세상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고통어린 비명들을 비가시화하는것은 종교적 해탈이 아니라 폭력적 수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구조적 폭력 구도를 건드리기 보다, 개인적 차원의 마인드 컨트롤로 구원을 찾으라는 말은, 아직도 이 사회가 가족 신화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가족은 신비롭고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공적 영역의 분리를 통해 신성화되어야 하고 침묵되어야 할 성전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거하고 일상의 미시 정치학이 발휘되고 협상되고 갈등이 발생하는 공간이 바로 가정이다. 이 가정 내의 폭력이 사회적 폭력의 일부이며 가족이란 사적 단위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가족이 지옥이 되었을 때 대안적 공동체가 폭력 구도에 노출된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비명과 고함에 귀기울일 지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법륜의 말은 고통의 초월이란 종교적 맥락에서 읽혀야 하며,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는 다른 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묻겠다. 그 초월이란 위치의 강요가 과연 내담자와 같이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또한번의 침묵의 법의 시행이며 그들을 자신 안으로 유폐시키는 감금 방식이라 생각하진 않는가.

이재원 단편소설-오래된 빈 무덤[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오래된 빈 무덤[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채 차도와 인도에 늘어서 있던 전투경찰들이 물러가자, 팽팽했던 긴장이 사라졌다. 눈에 불을 켠 채 경찰과 대치하던 유가족들과 젊은 사람들이 빈소 겸 숙소로 사용하는 건물, 엉성한 포장을 들추고 들어갔다. 밤을 지새운 탓에 눈을 붙이려는 것이다.

함께 온 백발의 이 선생이 서 교수, 김 시인과 둘러서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플라톤의 농담을 번안하며, 속으로 웃었다. ‘백발만큼이나 현명하지!’

핸드마이크를 든 사람이 추모 미사를 올린다고 했다. 백발의 신부가 강론을 시작한 미사 텐트로 가서, 비닐 천을 깐 바닥에 앉았다.

“안식 후 첫 날 사람들이 제사지낸 스승의 묘를 찾았다. 스승은 억울하게 죽었다. 스승에게 애정을 가진 이들은 무덤이 멀리 있는데도 벌써 눈이 붉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되 무덤은 사람이 들어갈 만 한 동굴을 만들고 문을 대신해 큰 바위로 빗장을 지르는 양식이었다.

무덤의 문이 열려있었다. 한두 사람이 옮길 만 한 돌이 아니었다. 스승의 시신은 거기 없었다. 기어이 비자연적인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에게 뿌리박힌 믿음이 있다. 언제부터 생긴 믿음인지 모른다. 비자연적인 현상은 비자연적인 현상을 부른다. 억울하게 죽은 자에게는 비자연적인 현상이 따른다. 사람들이 믿는 논리적 귀결은 빈 무덤이다.”

신부는 한참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2009년 1월 20일 아침, 서울 한복판에서 건물 옥상 위 망루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는 참혹한 현장을 중계하던 인터넷 방송 앵커의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뉴시스

남일당 앞, 백열등 몇 개를 켠 무대를 차린 문화패가 공연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백발이 많았다. 문화패가 공연을 시작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사회자가 이교수의 손을 잡아 무대 앞으로 이끌었다. 사회자는 무엇인가 보는 눈이 있었다. 노래패의 연주가 흘러나오자, 미리 맞춘 듯 왈츠가 이어졌다. 백발이 성성한 여교수의 동작이 경쾌함에 놀랐다. 왈츠의 음악은 박수로 화답하는 관중들의 소음을 뚫고 마치 한적한 산속에 앉아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 때도 이런 느낌이었나? 충신 되기도 거부하고 가족을 위해 산천을 떠돌던 한 인간이 한적한 산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간도 멈춰버린듯 했던 그 곳, 최 군의 무덤 봉분을 만드는 뒤켠에 앉아있었던 1985년 겨울, 월계리(月桂理)로 거슬러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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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쪽방에서 홍제동 유진상가 앞 까지는 족히 40여분 거리였다. 오늘 하루 일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십 명,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영하의 날씨도 일하려는 사람들을 막지 못했다. 사람들을 빼곡히 태운 봉고차 한 대가 유진상가 앞에 섰다. 나는 조수 대에 탄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최 군이다’. 그 역시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차에서 내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혀?”

악수하며 내가 말했다.

“목수.”

“타.”

누군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연장가방을 든 채 비집고 차에 올랐다. 최 군이 말했다.

“우리 같은 늠이야 이런데서 밖에 만날 디가 읇다야만, 대학생이 되었다며 웬일이냐?”

나는 대답대신 되물었다.

“반장이야?”

옆 사람이 말했다.

“군기반장이요, 군기반장. 말 잘 들으쇼.”

겨울 해는 벌써 사라졌다. 어둑하니 땅거미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 날 일 끝난 후, 평창동 택지개발 축대 거푸집작업 현장 함바에 마주 앉았다. 막걸리 잔을 앞에 둔 채, 자기자랑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그의 말은 처연한 것인지 자조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없도록 이중적이었다.

“별스럽지 않은 여자지만 함께 끼구 자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여자가 가족 없이 혼자 큰 티 안내구 아픈 노인네 보살핀다.”

“노인네가 아파? 어버지? 어머니? 누가 편찮으신데?”

“아버지, 시굴서는 술 한 잔도 안하던 양반이, 금호동 올라와서는 허구헌날 마시더니, 저 새파란 나이에 풍이다.”

고향에서는 제법 탁탁한 살림을 일구던 그의 부친은 제법 넓은 땅을 씨 한 톨 안 남기고 모두 팔아 서울로 이주했다. 큰 아들을 감옥에서 빼 내기 위해서라는 둥, 이주를 둘러 싼 소문이 무성했다. 최 군의 말에 의하면 친척에게 뜯기고 고향 사람에게 사기 당한 아버지는 시골 땅 판 돈으로 금호동에 간신히 가게 방 겸 방 하나 딸린 판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의 형은 중앙 체육관 페터급 챔프였다. 그도 덩달아 중앙체육관에 다녔다. 그가 가장 즐겁게 이야기하는 대목이라서 알 수 있다. 그 때가 그에게는 호시절이었다.

낮에 그가 반장에게 말했다.

“내 고향 친구여. 대학생이여, 대학생. 계속 일 시켜줘.”

우리보다 한창 연배인 반장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팔자가 풀렸다. 반장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네모도 깔아’, 하면 최 군이 와서 일 요령을 알려주었다. 다시 반장이 와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판네루 대’, 하면 다시 최 군이 와서 일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 말을 달았다.

“여기서 일하는 애덜 다 신당동 패거리여. 나는 목수루 왔지만, 반장은 신당동에서는 내 아우 뻘이여. 아무 걱정말구 시키는대루 혀.”

십 수 살이나 나이 많은 동생을 두고 있는 그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주먹잽이였다. 반장 말에 토를 다는 인간은 그로부터 즉시 응징 당했다. 그가 앙앙대는 사람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아채 뒤집어 날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를 뜯어 말리는 시늉을 했고, 응징당한 사람은 고분고분해졌다.

최 군 덕분에 나는 연탄난로가 확확 달아오르는 커다란 군용 텐트 숙소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이면 저녁마다 함바에서 막걸리 한 사발 곁들이는 것도 여반사였다. 그는 주인을 향해, “어이, 이거 내 앞으로 달아놔”, 하고는 내 밥상에 막걸리 두어 병 안겨주었다. 나는 한껏 일에 버팅겼다. 달포가 지나자, 반장이 시키는 것도 무엇이든 최 군 도움 없이 할 수 있었다.

최 군과 손을 맞춰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힘도 좋고 일하는 요령도 좋았다. 삼육 패널 두 장을 힘도 안들이고 어깨에 메어 날랐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통에 일찌감치 할당량을 마치면, 그는 “가자”, 하고는 함바로 들어갔다. 해가 잔뜩 남았는데도 우리는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나 택지조성 축대 일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방학이 다 해, 학교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리도 일이 맞아 떨어지는지, 마침 철 늦게 온 구정이라서 학교 돌아갈 시점과 간조 날이 엇비슷했다.

일찍 간조한 후, 그가 이끄는 대로 커다란 연장가방을 든 채 옥수동으로 향했다.

버스 종점에서 내리자 최 군이, “뭘 좀 사야겠어, 걔가 고기를 좋아해” 라고 말하고는 어둑한 상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그가 말했다.

“이제 반 왔다잉. 한 참 더 걸어가야 혀”, 하고는 길 옆 어느 집 문을 열었다.

그의 집은 내가 상상했던 판잣집은 아니었다. 벽돌 골조에 슬레이트집이었다. 부친도 상태가 그리 나쁜 편으로 보이지 않았다. 말도 잘 했다. 그의 새댁은 수줍음을 많이 타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큼지막한 몸을 하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보여주고는 어디로 숨었다.

최 군을 따라 공동 수도 깐으로 갔다. 그는 돼지고기를 씻어 잘게 잘라 냄비에 담았다. 생선은 비늘을 제거하고 배를 가른 다음 깨끗이 씻어 토막을 치 다른 냄비에 담았다. 최 군이 멀뚱해 하는 나를 향해 말했다.

“쟈는 이런 거 못 혀. 친척 집에서 눈칫밥 먹고 컸을텐디 왜 이런 것두 못허는지 모르겄어. 그런디 아버지 옆에는 항상 붙어있어.”

최 군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것들을 들고 부엌(이라야 우습게 친 차양막) 으로 들어갔다. 소리를 죽인 최 군의 우렁우렁한 소리가 밖으로까지 들렸다.

“돼지고기는 고추장으로 비벼서 연탄에 올리면 되어. 생선은… 무를 이렇게…” 하고는 도마 소리가 들렸다. 최군에게 응답하는 새댁의 목소리는 분명하지는 않았으나, 다정다감한 것만은 분명했다.

밥상에서 그의 부친이 말했다.

“나 평생 용산 시장에서 지게 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더군.”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최 군의 동생도 있었다. 모친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서 저자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식사를 끝낸 후, 짐 보따리를 든 채 다시 그의 손에 이끌려 산을 넘었다. 그는 이 길을 매일 왕복해서 로드 웍을 했다고 말했다.

“실력이여, 실력. 한 두 방 맞는 것은 문제도 아녀. 노렸다가 날릴 수 있을라먼 하체거덩, 하체. 하체 단련은 로드 웍이거덩. 지금도 맞고 살지 않는 이유가 이거지 이거.”

이것이란 그의 허벅지였다.

“츰에는 맞구 다니지 말라구, 절대루 객지 와서 맞구 다니지 말라구 갈켜주었지. 형은 빵잽이여. 허구헌 날 빵이여.”

복싱을 배우게 해준 형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로도 들리고, 무책임한 형을 원망하는 이야기로도 들렸다.

어느 산등성이에서 그가 저 아래 보이는 커다란 돔 형 건물을 가리켰다.

“저게 장충체육관이여. 저기 서는 게 꿈이었는디, 이게 안 따라주는 거여, 이게.”

그는 자기 눈을 가리켰다. 그의 한 쪽 눈은 시력이 없다. 체력과 깡이 있으나 상대를 가격할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따라서 랭킹에 오른다거나 프로가 되기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눈 때문에 그의 별명은 어원도 의미도 알 수 없는 ‘눈깔멩이리’였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나와 같은 학년이 없었다. 그의 집과는 근거리였으므로 우리는 초등 중등을 함께 걸어 다녔다. 군것질은 그의 몫이었다. 그에게 백리 사탕을 살 돈은 항상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이름도 모르는 ‘나쇼날’ 라디오니, ‘딸라 장수’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친척이 있어, 서울에서 그런 장사를 한다고 했다. 마침 이 고장을 덮친 해일의 원인과 영향, 태풍의 원인과 그 길목에 대해서도 자상히 알고 있었다. ‘나쇼날’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일 터였다.

그는 원래 깡다구가 있었다. 중학교 때 어떤 아이와 붙었다. 시골 이이들 싸움질은 무척 드문 일이라서, 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상대 아이는 몸이 잽싸기로 유명했으며, 유일한 취미가 싸움이라서 항상 누군가를 골탕 먹이고 싶어 했다. 상대방은 싸움이 시작되었는데도 얼굴에 살짝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최 군이 먼저 코피가 터졌다. 코피 터지면 물러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그가 주먹을 쥐고 앞으로 왔다 뒤로 갔다, 하며 기회를 엿보는 통에 상대방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가 뒤로 주춤거리자, 상대가 앞으로 조끔씩 전진했다. 그가 싸움터에 있는 야트막한 무덤으로 조금씩 뒷걸음으로 올라갔다. 무심코 좇아가던 상대방이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가 무덤 중간쯤에서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토록 잔인한 아이들 싸움은 처음 보았다. 위에 올라탄 그가 막무가내로 상대방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 뒤로 아무도 그와 싸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꾼들이 슬슬 그를 피했다.

그는 중학교 미술선생에게 자주 칭찬을 들었다. 그의 그림이 항상 복도에 걸렸다. 리얼하달까, 이삭 줍는 여인 비슷하게, 굴 따는 여인 그림도 있었다. 나는 옛날 생각이 나서 그에게 물었다.

“그림 그리고 싶어 했잖아? 그 쪽에서는 해본 거 없어?”

“그림이랄 것은 없지만, 극장 간판 그리는 거 배웠다. 몇 년간 극장에서 잘 놀았지. 그러나 간판이 사양길이라서 밥 먹고 살 수 읎을 뿐만 아니라 저 판자집을 지켜야 했어.”

그가 다시 말했다.

“저 집 지키려고 별 짓 다 해봤다. 저기서 밀려나면 갈 데 읎으니께. 형 한테 들은 이야기다. 빵 살다가 고명한 사람헌티 들었것지.

거 옛날 사람 하나가, 충신 시켜줄테니 순장 당하라는 명령을 거절했다며? 나는 가족을 지켜야겠다, 충신 되는 것도 싫다. 데리고 산천을 떠돌지언정, 나는 가족을 지켜야겠다고 했다며?

내가 그런 심정이었다. 안강망이라고 아나? 예닐곱 명 타는 배인디, 겨울마다 가서 배 탔다. 그게 그물 내렸다가 걷으면 마구 술을 마시거등. 첨 배에 올랐을 때 멀미를 심하게 하니, 조금 봐 주더라구. 죽는 줄 알았지, 모든 걸 다 토하는겨. 그게 익숙해지구 시간이 지나자 애덜이 사람 잡는겨. 선원덜이 오락거리가 읎잖은감. 츰 온 사람 개나 고양이 데리고 놀기지 뭐. 어떻게든 우그려뜨려 가지구 노는거여. 어떤 영감이 그러데. 죽기 아니면 살기루다가 걔들한티 뎀벼야지,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겨.”

그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려 흔들며 말했다.

“이거루 살았다. 소주병 잇슈 마신 늠덜 서너 명이야 나 당할 수 있나? ”

그의 집에서 걷기 시작한지 한 참 만에 산을 건너, 길을 건너 신당동에 도착했다. 그가 어디로 시선을 고정하지 않은 채 말했다.

“한번 헐레?”

나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내가 이 동네 잘 알어.”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신당동에 도착자마자 그가 안내한 곳이 여인숙이었다. 그가 주인에게 말했다.

“내 친군디 대학생이여, 대학생.”

지금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그곳 거리의 광경이 선하다. 뒷골목 술집은 안주가 다양했다. 막걸리 앞에서는 나는 속없는 인간이다. 처음에는 이야기가 통했다. 막걸리 빈 병이 몇 개 되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건장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가 눈을 휘번덕 하더니만, 한 사람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짝 갈라진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되었다구? 뭐라구 아가기 놀리고 다녔어?”

멱살 잡힌 사람이 켁켁거리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함께 온 사람들이 그를 얼렜다. 한 참이 지나서야 멱살 잡혔던 사람이 말을 시작했다.

“서울 교통 운전수들이 데모를 시작했어. 오야지가 깨라구 해서 몇 명 갔지. 버스에서 내리는 족족 운전수들 개패듯 팼어. 덩치 좋고 대찬 놈이 덤벼들자, 형이 냅다 발로 찼다. 그 냥 기절하데…

살인나는 줄 알았다. 병원 데리고 갔는데, 불알 터졌대. 그래 형이 달려 간거야.

엊그제두 면회 갔다 왔어. 홍성 교도소로. 우량 판정 받을랴구 애쓴다 하더라구. 나는 잘못한 거 없어.”

최 군이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구 다녀? 머, 형이 잘못해서 달려갔다구? 느이덜이 한 짓이잖여. 느덜두 같이 사람 팬 거 아녀. 왜 형한티 뒤집어 씌우디끼 허냐? 드런 느무 깡패새끼덜, 옳게 살어 옳게…”

나는 술이 다 깨버렸다. 그의 이야기 중에, 자주 들었던 것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금호동에 재개발 계획이 있다. 부친 대신 자기도 그곳 재개발 협상 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은 중이다. 그가 말했다.

“나이만 먹었지, 무얼 알아야 조합에 들어가지. 갸덜이 나헌티 바라는 건 이거야, 이거.” 하며 그는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의 말을 듣자하면, 재개발 조합은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땅과 건물을 함께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문제는 땅 없이 건물 권리만 소유한 사람들이나, 세를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딱지를 준다 해도 아파트 입주는 불가능했다. 그 동네 사람들이 새로 짓는 아파트에 입주할 만 한 돈이 없었다. 그의 집은 건물 소유권만 있었다. 따라서 까딱 잘못되면 그냥 거리에 나않게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응답할 지식이 없었다. 내 관심이라야 학교에서는 기껏 책 읽는 시간, 책 몇 페이지 뿐이요, 그것 날아갈까봐 놀러 다니지도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방학에는 몇 푼 버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와 헤어진 후 몇 학기가 지났다. 자취집 주인이 시골에서 연락이 왔다며, 고향 송 군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송군에게 전화 했다.

“최군이 죽었어. 윌기리(월계기)로 와. 최 씨네 종산.”

“어떻게 죽었는데?”

“얼어죽었대.”

“이 날씨에?”

“그러게, 그렇게 이야기 들었어.”

그의 운구를 따라 온 사람은 몇 명뿐이었다. 산일 하는 사람, 친구 몇 명, 그리고 일을 주도하는 최 군의 사촌 형과 새댁, 동생이 전부였다.

작지 않은 몸집의, 수줍었던 새댁은 여전히 수줍음을 타는 듯 했다. 아무에게도 얼굴을 안 보여주려 작심한 듯, 고개를 무덤 앞 땅에 밖은 채 엎드려 있었다. 누가 몸을 들어 올려도, 몸을 흔들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그의 죽음이 무척 의심스러웠다. 그의 사촌에게 넌지시 물었다.

“형님, 어떻게 된 거예요?”

“때려 부순 집에서 안 나가겠다고, 텐트 치고 잤대. 그날 밤에 얼어 죽었대.”

그의 사촌으로부터는 더 이상 들을 말이 없었다. 그의 동생을 찾았다. 몇 년 새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묘지 봉분을 만드는 뒤편에서였다.

“저는 그 때 공장에 있었어요. 동네 사람들한테 들은 이야기예요. 철거반 수십 명이 떼거지로 몰려왔대요. 아랫 쪽은 포클레인이 부수고, 포클레인이 올라오지 못하는 언덕에는 함마를 든 사람들이…”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 가재도구가 나뒹구는 소리, 벽돌에 가해지는 함마 소리, 공간이 빈 벽돌의 울림…

입에 갈증이 났다. 나는 저 아래편에 놓인 술짝으로 걸어가 술을 들고 다시 올라왔다. 그가 다시 말했다.

“형이 발악을 했대요. 철거작업자 두들겨 패구, 경찰 두들겨 패구, 신사복 입은 사람들, 회사 사람들 쫓아가서 패구. 여러 사람들한테 짓밟혔대요. 철거원, 경찰, 회사 사람 할 거 없이 달려들어 형을 짓밟았대요.”

떠날 곳 없는 철거민들이 거기에서 밤샘을 했다. 그는 뭉개진 나무를 치우고 벽돌을 들어내 텐트를 치고 기어 들어갔다.

아침에 그가 일어나지 못했다. 소리도 없이 신음도 없이 죽었다. 경찰이 의사를 대동하고 왔다. 사인은 ‘동사’였다. 동네 사람들이 경찰과 의사에게 항의했다. 어제 최 군에게 몰매를 준 사람들을 조사해야 한다.

그의 부친이 말했다.

“월기리루 가. 늬덜까지 죽으까 무섭다. 몇 백 명 눈 깜작 안허구 죽이는 늠덜이다.”

최군은 자기가 지킨 것들의 댓가, 벽돌 슬레트 집 보상금을 써서 장지로 향했다.

묘지 봉분 작업하는 옆에 서있던 그의 사촌이 우리 있는 쪽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최군 동생에게 말했다.

“동상, 일허는 사람덜 뭘 좀 멕여야겠는디, 식당에다가 국밥이라도 시키까?”

최군의 동생이, “그러셔야죠”, 하고는 주머니 지갑을 뒤졌다.

김이 자욱한 함바에서 처음 마주 앉았을 때,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참 용케도 만났구만, 객지에서”, 라고 너스레를 떨던 그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마음의 손가락으로 저 멀리 산 능선을 따라 그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 참 후에야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언젠가 평창동에 간 일이 있었다. 밤늦게 모임이 끝나, 나는 이 선생 집에 가서 잠자기로 했다. 택시를 타자 이 선생이, “평창동”하고 말했다. 나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동네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동네를 돌아보았다. 이 선생 집은 빌딩과도 같았다. 집들이 모두 웅장했다. 동네는 깨끗했으며, 잘 다듬어져 있었다. 김을 풍기던 함바와 군용 텐트로 만들었던 숙소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발전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금호동의 개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강 물이 내려다보이는 수려한 그 곳을 돈 잘 버는 사람들이 그냥 놔 둘리 없다. 최 군이 금호동에 자리 잡은 것 자체가 비극의 씨앗이었다면, 그는 애초에 유랑하는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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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 출간 좌담회[ⓔ시대와철학알림]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 출간 좌담회[ⓔ시대와철학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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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2월 월례발표회는 이규성 선생님의 <한국현대철학사론> 출간 좌담회로 이루어집니다.

<한국현대철학사론>은 한국철학사의 공백기로 인식된 19세기 말 이후의 사상 흐름을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을 부제로 서술한 책입니다.

좌담회를 통해 한국현대철학을, 그리고 우리의 ‘지적 수동성’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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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이규성 선생님의 짧은 강연을 듣고, 사회자와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질문하고 토론합니다.

내용은 책의 ‘서문-성실성과 충실성’, ‘결론-운명과 이름’을 중심으로 합니다.

(미리 읽고 참여하고 싶으신 분들은 ympiao89@hanmail.net으로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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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한국현대철학사론-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이화여대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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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사회: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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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월 15일 오후 5시 태복빌딩 202호 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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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룬 한국 현대철학은 세계의 변화가 주는 생명의 위기, 그리고 착취와 억압이 주는 고난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위기와 고난은 이전의 친숙한 세계의 상실감으로 집약되며, 세계상실은 상실한 사람의 인격도 분열시켰다. 세계상실의 경험은 세계의 회복과 인격의 고결성을 사상의 핵심으로 정립하게 했다. 세계가 인간화되지 않는다면 세계는 나의 것이 아니다. 세태의 힘에 의해 분열된 인격은 나의 통일된 고결성이 아니라 둔감한 속물성이 되거나 불행한 의식이 된다. 고결성은 세계 극복과 함께 도덕적 실천을 요구했다. 동시에 이 실천은 사회적 실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문제 상황이 주는 고통과 소외는 그들로 하여금 진실로 체득된 주체적인 진리를 진리로 이해하게 했다. 그 진리는 고통의 심화에서 얻게 된 인류애와 대도(大道)로 표현된 우주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했으며, 그 진리는 행동을 통해 표현되어야 했다. 진리의 근거는 현대에서 의심받게 된 수학적 확실성을 확보하는 것에 있기보다는 주체적 진실성에 있었다. 현대 한국철학을 통해 우리는 고뇌하는 인생이 도달한 자유의 높이와 구체적 실천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들어가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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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 홈 하단에 이규성 교수님이 2012년 11월 26일에 이화학술원에서 책을 설명하신 동영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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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 분열되고 전치된 한국사회의 자화상②-[시대와 철학]

18대 대선, 분열되고 전치된 한국사회의 자화상②-[시대와 철학]

민주화의 역설, 증오의 정치에서 희망의 정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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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균(한철연 기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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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와 민주화의 대결, 민주화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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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이후,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유권자 인구 구성비의 변화’였다. 그것은 20-30대가 50대 이상보다 많았던 이전 선거들과 달리 이번 대선에는 최초로 20-30대에 비해 50대 이상의 인구 구성비가 약 2% 정도 높았던 선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던 2002년 대선과 비교해 보면 50대 6.2%와 60대 0.1% 상승으로, 전체 평균 3.15%가 오른 반면 20대(8.65%), 30대(4.95%), 40대(2.4%)는 전체 평균 5.33%로, 5.0%라는 투표율 상승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30대의 노무현-문재인 지지율 또한, 2002년에 비해 각각 8.0%, 8.3% 상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2년 대선에서는 단지 0.2% 차이로만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40대가 이번에는 무려 11.3%나 오른 11.5% 차이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따라서 애초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주력했던 높은 투표율과 젊은 세대의 결집이라는 선거 전략이 먹혀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는 패배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유권자의 인구 구성비 문제를 제기하거나 나이가 들면 보수화한다는 ‘연령효과’를 들면서 이후로는 보수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놓고 있다.

▲ ⓒ뉴시스

그러나 현재 486세대 중 50대에 속하는 50-53세는 50대 후반의 정치적 성향과 다르다. 이것은 나이가 들어가면 보수화하는 ‘연령효과’가 특정한 세대의 역사적 경험에 따른 ‘세대효과’에 의해 상쇄하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2002년 대선과 비교해 볼 때, 2012년 대선에서 20-30대뿐만 아니라 40대까지 더욱 좌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인구 구성비의 변화가 아니라 50대 이후가 이런 40대 이하의 좌로의 이동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우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89.9%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50대와 더불어 50대-60대는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대 간의 정치적 성향의 분열이며 이 분열의 기점이 되는 것은 40대 이하와 50대 이상이었다는 점이다. 40대 이하는 전체적으로 좌향좌를 했다면 50대 이상은 우향우를 했다. 여기서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은 소위 486세대이다. 486세대의 역사적인 정치적 경험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민주화’이다. 그들은 80대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좌향좌를 한 40대 이하와 우향우를 한 50대 이상 사이의 분열은 역사적으로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두 개의 역사적 경험을 보는 정치적 성향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분석들에는 이런 역사적 경험을 통한 분석이 없다. 이것은 이번 대선의 책임을 50대의 보수적 결집에서 찾는 경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50대의 보수적 결집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50대의 보수적 결집이 이번 대선 결과 그 자체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50대는 2002년 대선에서 17.8%(이회창 57.9% 대 노무현 40.1%)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면 이번 대선에서는 25.1%(박근혜 62.5% 대 문재인 37.4%)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이전 대선보다 7.3%나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20대, 30대, 40대가 각각 2002년 대선보다 8.0%, 8.3%, 11.3% 더 많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50대 이상의 보수화 경향이 40대 이하의 반(anti)보수적 경향을 압도했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60대 이상을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60대 이상은 박근혜 72.3% 대 문재인 27.3%로, 2002년 대선 당시 지지율 격차 28.6%(이회창 63.5% 대 노무현 34.9%)보다 무려 16.2%가 더 많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따라서 20-40대의 좌로의 상승률을 전체적으로 상쇄시키면서 박근혜 후보의 승리를 이끈 세대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50대가 아니라 60대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50대의 높은 투표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보아야 할 것은 다른 어떤 세대보다도 가장 높은 비율로 우향우를 한 60대 이상의 보수적 결집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 결과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은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두 개의 코드이며 ‘민주화’에 대한 ‘산업화’ 세대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민주화’에 대해서 집단적인 반란을 꾀한 것일까? 그것은 소위 87년 6.10 이후 진행되었던, ‘위로부터의 수동혁명’에 의한 민주화, 그리고 소위 486세대가 주도했던 김대중-노무현정권 시절의 민주화가 ‘산업화 세대’의 욕망을 민주화의 흐름 속으로 편입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민주화’는 결국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 및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기간에 진행되었던 ‘민주화’가 그들의 삶을 바꾸지 못한 그 결과로 나타난 ‘반동’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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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없는 사회, 증오심에 가득 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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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년 한겨레신문 기획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손수레로 1t 트럭보다 많은 폐지를 실어 나르는 ‘1t 리어카’ 정영배(56)씨.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정씨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운동 공로자에게는 보상을 해주는데 왜 자신처럼 평생 열심히 일하다 다치고 병든 이들은 충분히 돌봐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맞는 말이다. 특히, 그들은 1970년대 경제적 빈곤을 온 몸으로 때우고 살아온 세대이다. 1970년대 중반, 그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수출의 역군’으로, ‘산업화의 기수’로 바꾸면서 그 스스로 대한민국 국가 건설의 주체로 만들어왔다. 그것은 명백히 가해자 국가가 심어 놓은 환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동을 자본으로 바꾸어 경제 권력으로 바꾼 것은 국가였으며 그들은 그 국가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재벌이 대한민국의 최고위층 권력이 되어갈 때, 그들은 더욱더 가난해졌다. 하지만 그 때 유신독재국가는 그렇게 그들을 불러 세웠으며 그들 또한, 그 어려운 삶의 고통을 이 환상을 통해서 이겨냈다. 그 환상이 승리의 환호성으로 바뀐 것은 전두환 정권 때였다.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은 대한민국 사상 처음으로 무역수지를 적자에서 흑자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 당시의 경제성장률은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능가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1970년대였으며 그들은 전두환의 푸념과 달리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세워놓은 것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87년 6.10민주항쟁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주화는 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자유화와 더불어 ‘시장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우파 시장주의-신자유주의 좌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거쳐 온 그들이 40-50대가 되었을 때, 그리하여 비로소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안정적 삶의 기반을 찾고자 했을 때, 그들을 인내하게 하며 견디어 내게 했던 ‘미래’는 더욱더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다. 1997년 IMF는 ‘정리해고’의 광풍으로 되돌아왔으며 정보화 사회는 더 이상 구시대의 저임금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환상은 분노와 증오가 되었다. 내가 세운 나라, 내가 만든 경제적 풍요.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그것을 누리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그들을 원하지 않았다.

자동화와 정보화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잉여인간에 불과했다. 무너진 자존심. 그러나 다시 시작하기에 그들은 이미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화려한 쇼윈도를 펼쳐 놓은 상품들의 스펙타클한 세계를 즐기기에도 그들의 욕망은 너무 낡고 추했다. 1990년대 한국의 자본주의는 대중소비사회로 이동했으며 그 소비를 전유한 세대는 X세대였다. 대중가요의 주요한 소비층은 10대가 되었으며 문화적 감각의 향유 폭은 더욱더 넓어졌다. 어쩌면 그렇게 1970년대의 ‘산업화’ 세대의 반란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징후는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지하철 노약자 석에서 이루어지는 노인들의 젊은이에 대한 테러는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 대한민국’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더 많은 상품들 속에서 우리를 유혹하면서도 오직 능력 있는 자들, 스마트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세력은 다름은 김대중-노무현정권이었다. 따라서 노무현정권은 민주당과 함께 이미 청산되어야 할 역사적 구세력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정치는 여전히 한나라당(새누리당) 대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의 양당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무현정권의 실패와 더불어 ‘구 민주당 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는 급속히 떨어졌었다.

그러나 ‘노무현전대통령의 투신’과 민주노동당의 ‘진보단일후보’ 노선은 10% 내외의 지지율이라는 벼랑 끝에 서 있었던 구 민주당 세력을 기사회생시켰다. 지난 지자체와 총선에서 사람들은 진보단일후보가 아니었다면 구 민주당 세력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은 의회 진출에 성공했으며 나름대로 지자체에서도 성과를 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성공은 구 민주당 세력인 노무현정권에 대한 냉정한 정치적 평가와 청산에 대한 역사적 단절을 없애버리는 대가를 지불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투신’은 그에 대한 인간적 애도의 물결로 바뀌었으며 정치적 과오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사라졌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애도마저도 2011년 총선 직후 벌어진 통합진보당 사태는 소위 ‘진보’라는 세력에 대한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그것이 50대 이상의 결집을 불러왔다. 그들은 그 동안 ‘민주화’라는 명분 앞에서 밀리고 있었으나 그 이후 자신의 왜곡된 욕망과 ‘산업화’ 세대들의 ‘비도덕성’을 ‘증오심’에 근거한 정당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이번 대선 결과는 대한민국 사회가 극심한 정치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사실상 ‘계급이 없는 계급투표’, ‘여성이 없는 여성투표’로 귀결되었다.

노후의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노인들, 하우스푸어-렌트푸어인 50대들은 그들의 생존적 불안감을 ‘민주화세력’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무상보육, 무상급식’과 같은 ‘보편적 인권’의 권리에 오히려 분노했으며 새누리당이 제시하는 허구적인 ‘차별적인 복지’의 구호에 말려들었다. 또한, 가부장제적인 한국 사회에서 온갖 고난을 감내하며 청춘을 보냈으나 ‘민주화’와 더불어 여성의 권리에 눈뜨기 시작한 여성들은 박근혜후보의 여성대통령 구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20대 여성은 감성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산업화 시대’의 여성이 지니고 있는 정서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40대와 50대의 여성은 충분히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못한 한국의 남성들과 달리 박근혜의 ‘여성’대통령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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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