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는[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설렘과 기쁨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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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기억은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그 날로 돌아갔다. 할머니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눈은 고통의 기억이었다. 떠돌이 약장수에게 속아 한센인 집단촌으로 갈 때 눈길을 걸어갔던 기억을 고통스럽게 떠 올렸었다. 하지만 꽃이 가득했던 교정과 고향마을은 이제 하얀 눈이 마을을 뒤덮은 설날 아침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설렘과 기쁨 그 자체였다. 대문을 나서면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길가 곳곳에 피어 있었고,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던 것이 꽃과 나무였다. 산속에 버려져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사투를 벌일 때의 나무들은 할머니가 넘어야 했던 장애물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무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던 휴식처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기억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오래된 시간 속의 사물에 대한 기억은 이미지로 남는다. 그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정신 속에 살아남아 기억의 주인과 함께 태어나고 늙어가며 사라져간다. 즉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물이 반복하여 만나고 그 만남이 생의 전환점과 연관되어 있다면 기억은 이중의 잠금장치를 한다. 가장 오래된 기억이 뒤에 만난 기억에 의해 묻혀 잊히게 되는 것이다. 꽃과 나무 그리고 눈은 할머니의 유년기를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들이지만, 그 이후 할머니가 경험한 고통들에 의해 원초적인 기억은 사라졌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할머니를 들뜨고 행복하게 했던 기억들이 발병 후 이어지는 고난 속에서 기억 저 너머로 아득히 사라지고, 행복했던 기억의 자리에는 고통스럽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이별과 회한의 기억들이 자리 잡았다. 그 기억들은 너무나 단단하고 야멸치게 할머니의 삶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고통의 기억들을 걷어내고 행복하고 설레던 그 시절로 할머니는 돌아가고 있었다. 60여 년 동안 열리지 않는 문 안에 유폐되어 있던 그 기억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년기의 기억을 하나하나씩 읊조리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작은 심장박동이 나에게로 옮겨와 나는 온 몸이 떨리는 긴장 속에서 할머니가 읊조리는 시를 받아 적었다.

소록도 설경(출처: 블로그southern-se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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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아침에

 

정월 초하룻날 설날이 되었다

잠에서 눈을 떠

창문을 열고 보니 폭설이 내려서

온 바다를 흰눈이 덮었고

은빛 찬란함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더라.

눈 내리는 날에 가장 좋아하던

우리 집 바둑이는 천지를 돌아다니며

뒹구르며 좋아하며 짖는 그 소리가

노래같이 들리더라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랍더라.

장독 위에는 소복소복 쌓인 눈이

연꽃같이 희고 아름다웠더라

대밭의 댓잎에서는 흰눈이

소복소복 쌓여서 칼끝과 같이

쪼삑쪼삑 하였더라.

소나무에도 많은 눈이 쌓여서

목화같이 보이기도 하고

눈꽃같이도 아름다웠고

좋게 보이더라.

우리 집 지붕 끝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보기에 경치가 좋았더라.

나는 설날의 음식과 떡국으로 차려서

아랫마을의 할머니 집으로

세배를 나섰더니 눈 속에서

길을 몰라 헤맬 때

바둑이가 내 앞에 뛰어와서

길을 인도하였더라.

그 후에 사랑하는 임과 함께

큰 눈덩이를 만들어 굴리고

눈사람을 만들어

머리에는 고깔을 씌우고

임과 둘이서 어깨 손을 얹어

사진을 찍으며 기뻐하였더라.

그리고 눈덩이를 만들어

서로 던지며 때리며 싸움이 벌어져

어린아이 같은 동심으로

돌아갔더라.

넘어지며 엎어지며 미끄러질 때마다

사랑하는 그대의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우리의 정으로 더 깊이 들더라.

팔십 평생을 살아도

눈 나리는 이 날이

잊혀 지지 않고

옛 추억이 그립더라.

눈 나리는 어느 날.

-<눈 내리는 날> 전문-

 

시 <눈 내리는 날>은 할머니의 10번째 시이다. 이 시 속의 바다는 아이를 남겨두고 돌아오면서 자살을 기도하던 예전의 바다 대신 흰 눈이 뒤덮어 은빛으로 빛나는 눈부신 바다이다. “그거는 바다가 아인기라. 얼매나 눈이 왔는지 바다가 안 보이더라” 어린 시절 보았던 눈 온 날 아침의 바다는 할머니에게 은빛으로 빛나는 기억이었다.

오래 전에 마주쳤던 사물은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거나 희미해진 채로 기억된다. 이때의 사물은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이미지로 남게 되는데, 은빛의 바다 이미지는 살아야 할 의미를 상실하고 죽음을 시도했던 바다의 기억을 뭉개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꿈을 키우며 뛰어 놀았던 울산 앞바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실제로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려도 바다를 뒤덮지는 못한다. 바다의 색깔조차 바꾸지 못한다. 어쩌면 할머니가 은빛 바다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백사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나는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할머니의 얼굴에 피어나는 행복감을 논리적이며 건조한 이성의 언어로 파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기억이 있다. 몇 살쯤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었다. 눈길을 걸어 학교 운동장에 갔을 때, 그 곳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바다가 있었다. 나는 그 바다 위를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고, 강아지도 나를 따라 폴짝폴짝 뛰어 다녔다.

아무도 없는 그 곳을 뛰어다니며 강아지와 놀던 어린 나는 마치 그림 속의 풍경처럼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어른이 되고 세상사에 지칠 때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기억 속의 나를 멀리서 바라보며 위안을 받곤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나의 기억을 사실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없고,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없었으며 가족 중 그 누구도 어린 나를 아침 일찍 학교에 가게 내버려둔 적이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이 조목조목 아무리 많은 증거를 들이대며 나의 기억이 거짓이라고 논리적으로 말해도 따뜻하고 포근한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은 숨어 있는 진실처럼 나에게는 비밀스러운 기쁨이 되었다. 할머니의 시를 들으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연꽃같이 희고 아름답게

 

할머니는 오래 전의 눈 내린 날 정경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눈이 내려앉은 대나무 잎, 마치 목화처럼 보이는 눈 쌓인 소나무, 눈이 녹아서 흘러내리다 얼어붙은 처마 끝 고드름까지 그 모든 정경을 마치 오늘 아침에 본 것처럼 이야기했다. “눈이 그렇게 많이 왔는데 설날 세배를 혼자 가셨어요?” “흠흠흠”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어깨를 웅크리며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쪼끔만 기다리면 같이 갈긴데 내가 그냥 나섰제.” “그래서 길을 잃으셨어요?” “뭐 길을 잃었겠노. 눈이 하도 마니 와 놔서 좀 낯설기도 하고 강아지가 하도 날뛰니까 쫓아가다 딴 길로 가기도 하고 그랬제” 말하는 내내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할머니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 <눈 내리는 날>에서 눈에 띠는 것은 마쓰시타와의 추억이었다. 할머니가 시에 묘사하는 눈 오는 날의 정경이나 있었던 일은 분명 마쓰시타를 만나기 이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 가서는 마치 눈이 많이 온 그날 마쓰시타를 만나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함께 만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마쓰시타는 허무와 고통의 얼굴로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쓰시타와의 기억은 언제나 분명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눈 내리는 날의 빛나는 정경과 함께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기억이 포개어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질문했다. “마쓰시타와 눈사람도 만들었어요?” “응, 참 많이 엎어졌다. 그때마다 일으켜 주는 게 좋아서 또 엎어지고 했제”

눈 오는 날 마쓰시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과 마쓰시타와의 기억이 하나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마쓰시타와의 사이에 있었던 아픈 기억이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에 의해 조금씩 덮여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으며 보냈던 유년의 기억들이 발병 후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의해 시간 저 너머에 은폐되어 있다가 조금씩 모습을 내미는 것처럼 고통의 기억들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게 아닐까?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눈 오는 날의 기억은 ‘사랑하는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정으로 더 깊이 들’던 행복의 시간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팔십 평생을 살아도 잊히지 않는 그리운 시간으로 할머니의 사랑은 돌아오고 있었다. 이전에 구술했던 시에서 보였던 고통과 회한의 기억 대신 연꽃같이 희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운지, 앙망, 전땅크…

 

요즘 인터넷 상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말들이다. 이는 극우적 인터넷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이하 일베)’를 중심이 펴져나가는 인터넷 비속어들이다. 일베는 특정인에 대한 악플과 극우적 콘텐츠 생산으로 최근 여러 언론에서도 조명을 받고 있는 화제의 커뮤니티다. 운지는 고 노무현대통령을 죽음을 모TV광고에 빗대 조롱하는 것이며, 앙망은 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사형선고 이후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에 나오는 단어로 이를 고 김대중 전대통령을 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 전땅크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격상시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용어는 50~60대의 보수층이 아닌 10~2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인터넷을 넘어 일상적인 비속어로 자리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커뮤니티의 규모가 커지면서 단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정치인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넘어 독재찬양,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 외국인, 노동에 대한 혐오와 극단적 지역감정을 내보이며 파시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로 여겨지고 개별적 인성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악플의 수준을 넘어 이들이 뉴라이트나 조갑제 등 극우적 인사들의 인식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내용들을 생산하는 사이트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머를 빙자하여 인기를 끌면서 상당한 규모로 성장함에 따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일베저장소 사이트 캡처(http://www.ilbe.com/)

 

10~20대의 보수화는 IMF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이슈였지만 최근 나타나는 이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90년대의 젊은 층의 보수화는 개별적 생존의 문제에서 비롯되어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양상을 뛰었다면, 2010년대의 보수화는 집단적 불안감 속에서 그것이 뭉쳐지고 파괴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민주적 의사과정이나 저항을 경멸하고 강렬한 리더십을 원하는 측면에서 파시즘의 초기 모습과 상당히 닮아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한국사회와 자본주의가 던져주는 무한경쟁과 낙오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이를 제압할 강력한 권위에 대한 추앙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사회계약론이 자연상태나 전쟁상태에 대한 불안감을 기초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근대사회계약론의 모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자연상태와 주권에 대한 해석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연상태가 전쟁상태를 유발할 수 있고 이를 방지하기위해 초월적 권력을 만들어야한다는 점은 홉스, 로크, 루소 등 근대사회계약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사회계약론의 요지는 개인은 계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고 초월적 권위에 스스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근대사회계약론에서 주목해야하는 점은 과연 실제 계약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개별의 보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초월적 권위에 의지하려한다는 점이다. 대개 개인은 자신의 보존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서 사회적 계약 속으로 들어가고 또 주권은 자신의 외부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함으로써 개인을 포섭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계약은 개인적 욕구와 그 자발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과 주권 사이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사회계약으로 인한 초월적 권위에 대한 인정이 개인이 주권에 포섭된 형식이 아니라 자발적 형태를 띠게 될 때 이는 파시즘으로 흘러갈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둘 간의 긴장관계는 종속으로 변한다.

 

출처: 블로그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lo9956&logNo=10153502640&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주권은 자연상태에 대한 공포를 매개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데 기존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자연상태는 북한과 관련된 전쟁, 적화통일과 같은 것이었고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확대 생산되어 왔다. 이러한 자연상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민으로 하여금 추상적 공포를 제시해왔다. 그 반면에 21세기 한국사회가 개인에 던지는 자연상태의 공포는 개인의 보존을 직접 위협하는 미시적 공포다. 개인적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 9%를 넘어서는 청년실업, 그나마 있는 직장들은 비정규직인 상황과 사회에서의 대화단절은 젊고 어린 학생들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추상적 공포는 젊은이로 하여금 그 실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여유를 주지만 개인의 실존과 관련된 공포는 이러한 상상력을 제한시킨다. 기존 한국에서 던져졌던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미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기성층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오지만 경제적, 사회적 인정과 관련된 공포는 젊은 층에게 훨씬 더 큰 위협을 안겨준다. 이러한 공포가 건강한 비판과 저항으로 나타나 경우도 많고 이를 20~30대의 대략적 정치적 성향이나 인터넷의 대부분 여론에서 확인 할 수 있으나 그 반대급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좌절 속에서 파국과 폭력적 권위를 기대하는 젊은 여론이 인터넷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일베’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일반적 용어와 다르게 사용된다. 민주화는 패배, 반대, 무엇에 당함 등의 의미를 지니고 산업화는 승리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는 인터넷공간을 넘어서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주화는 비속어 사용되고 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나는 것을 ‘민주화 당했다’고 표현한다. 민주화가 이렇게 경멸당하면서 반대급부로 ‘전땅크’는 추앙받는다. 이러한 ‘일베’의 회원은 100만여 명에 이르고 동시접속자는 2만여 명에 다 달한다. 이들은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적 커뮤니티에 쉽게 안착하지 못한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 응어리를 비뚤어진 형태로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이다. ‘일베’의 언어의 특징은 반말과 욕설이다. ‘일베’에서는 경어를 사용하면 욕설이 빗발친다. 그런데 이는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사회적 대화가 단절된 이들의 일종의 방언이다. ‘말할 수 없는 사회’에 그들은 가장 공격적인 대화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들끼리 공인한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를 통해 인정욕을 충족한다.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처럼 익명성 속으로 숨지 않고 정치적 조직화까지 꽤하고 있다. 파시즘은 이성적 영역이나 기존 기득층을 기반으로 하기보다 감성과 무산층을 기반으로 한다. 뉴라이트보다 일베가 더욱 우려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지난 대선의 결과를 단순한 세대대결로만 해석할 경우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집단적 불안감이 표출할 수 있는 폭력성에 대해 둔감해 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희망이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젊은 세대는 저항을 선택할 수 있지만 역으로 파시즘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한다. 20대의 투표는 30~40대의 투표와 다르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저항의식도, 사회정의에 대한 부채의식도 3040세대에 비하면 훨씬 흐리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실존적 입장에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박근혜정부의 독선이나 유신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이러한 자발적 파시즘이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매체를 매개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연예인에 대한 악플이나 음란성 등의 이유로 일베를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해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일 뿐이다. 공유될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은 일그러지기 쉽다. 이러한 감성을 위로받는 형태와 장소가 인터넷의 극우적 커뮤니티라는 것은 그들에게 일상 속에서 휴식과 위로가 될 공간이 제공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분노와 불안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오프라인에 만들어져야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젊은 파시스트들의 등장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될 수 있다.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

-비정기 간행물 <숨>-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많이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쓴다. 며칠을 고민했다. 사랑하는 안해가 이 글을 읽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주책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다 사실인 것을. 나는 어린이(초등)학교 2학년 시기를 인천에서 보냈다. 하루는 어둑 어둑한 밤에 아버지가 나와 두 살 위인 형을 데리고 논 부근 물가로 가셨다. 자전거 뒤에 다라이를 싣고 가셨다. 그 다라이에는 불에 그을려 검게 탄 개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개를 더 작은 크기로 토막내기 위해서 논가 물 있는 곳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신 것이다.

집에 왔더니 어머니가 이미 개고기 요리할 준비를 해 두셨다. 어머니가 개고기 토막을 큰 솥에 넣고 부글 부글 끓이시는데 냄새가 참 좋았다. 된장냄새와 함께 구수한 개고기 냄새가 참 좋았다. 요리가 다 되었는지 어머니가 개고기 덩어리를 하나씩 꺼내어 칼로 잘게 썰어주셨다. 우리 식구는 한 점 한 점 맛나게 먹었다. 나도 맛나게 먹었다. 참 맛 있었다.

그 뒤로도 집에서 개고기를 몇 번 먹었다. 커서는 보신탕 집에서 지인들과 어울려 먹었다. 나름 친한 분을 내가 초대해서 함께 보신탕을 먹곤 했다. 최근 까지도 나는 보신탕을 먹었다. 숨이라는 무크지를 읽고 깊이 생각을 해봤다. 그 동안 내가 보신탕을 먹은 개인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 <숨> 2권에 나와서 더 더욱 그랬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도올 김용옥교수 책을 열정적으로 읽었다.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간절한 마음으로 그 분 책을 사서 읽었다. 그 분 책에서 보신탕 이야기가 나왔다. 청나라 위안 스카이 이야기를 곁들여서 보신탕 이야기를 했다. 88 올림픽 한다고 줏대없이 보신탕 집을 단속하지 말고 자신있게 전통 음식인 보신탕을 먹으라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신탕 집이 보양탕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음성화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당시 존경하던 석학이 보신탕을 자신있게 먹으라는 말을 들으니 나는 뿌듯했다. 나 자신이 보신탕을 먹는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녔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한테도 보신탕은 반만년 역사가 이루어낸 훌륭한 전통 음식이라는 말까지 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보신탕 문화는 야만적이라는 비난이 너무도 몰상식한 말이라고 힘주어 비판하기도 했다. 그이는 문화 상대주의를 모르는 몰상식한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비판을 하면서 말이다. 의사들이 수술환자에게 수술 부위가 빨리 아물도록 보신탕을 권한다는 아버님 말씀도 내가 보신탕 신봉자가 되게 하였다.

<숨>, 더불어숨 출판사, 2009.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 작은나무카페가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 말이다. 그 카페에서 숨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다. 그때는 내가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숨> 1권과 2권을 사서 집에서 쉬엄 쉬엄 읽었다. 안해가 요즈음 그런다. 내가 숨을 읽더니 여덟 번이나 그랬단다. “에이, 이 책 읽다 보면 앞으로는 보신탕 못 먹겠네.” 지인과 보신탕 빨리 한 번 푸짐하게 사 먹고 보신탕과 영원히 이별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수 없었다. 숨에서 개와 관련된 글을 읽고 숨에 나온 이쁜 개 사진을 본 내가 더는 보신탕을 먹을 수 없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개를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내가 지금 개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것 같다.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길렀다. 아버지가 강아지를 사 오셨다. 아버지는 어떤 강아지를 사오시던지 강아지 이름을 재동이라고 지으셨다. 재동이는 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내게 안기곤 했다. 혀로 내 손을 내 얼굴을 빨곤 했다. 아직도 재동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재동이 혀의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고, 재동이 선한 눈빛이 어른거리고, 재동이가 달려올 때 내는 핵핵거리는 소리가 바로 지금 들리는 듯하다. 재동이를 안을 때 느꼈던 따스한 체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뚜렷이.

우리 아버지가 네 형제에게 그랬듯이 나도 우리 딸 쌍둥이에게 보신탕을 먹게 했다. 어린 우리 쌍둥이가 보신탕도 먹을 줄 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부모로써 쌍둥이한테 미안하다. 큰 죄를 지었다. 앞으로는 쌍둥이에게 보신탕 먹을 기회를 만들어 주지 말아야겠다. 숨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내 글을 읽고 충격 받으실 것을 생각하면 내가 겁난다. 무안하다. 그래도 돌이켜 보니 내 주변에서 긍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잘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아버님이 약 15년 전부터 보신탕을 드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절에 다니시면서 차츰 개고기를 끊으셨단다. 우리 안해도 약 3년 전부터 보신탕을 먹지 않았다. 이제 나만 안 먹으면 된다. 다행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참 살기 힘든 곳이다. 불량한 사장 때문에 파업하는 일꾼들이 많다. 그 분들 삶은 참 팍팍하다. 하지만 <숨>이라는 책을 읽고는 그 분들이 그래도 동물들보다는 낫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동물들은 파업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부당한 짓을 해대는 인간을 상대로 시위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늘은 2010. 9. 21. 한가위 연휴 날이다. 내 삶에서 작은 혁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내게 다짐한다. 앞으로는 절대로 보신탕 먹지 말자. 앞으로는 되도록 고기 식사를 줄이자. 앞으로는 되도록 적게 먹자. 달님 저를 굽어 살피소서.

해님 제 가슴을 뜨겁게 해 주소서.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출간 기념 특강

기묘한 미술로 삐딱한 철학 하기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출간 기념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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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개요

 

인공의 눈을 벗어버린 “진짜 눈”으로 명화를 다시 보다

그 철학적 정체와, 외침의 감각을!

우리는 미술에서 무엇을 철학할 수 있는가?

고흐의 ?구두 한 켤레?를 두고 존재론을 사유한 하이데거,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에 내재된 남성적 시선을 파헤치는 여성 철학자, ?세한도?에 담긴 불굴의 정신을 읽으려는 시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은 철학을 낳은 미술 작품들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책입니다. 하지만, 미술 작품의 신비스러운 비밀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림의 감각적 충격과 느낌에 언어를 부여해서 그림이 스스로 말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철학자의 말을 거친 미술 작품은 화랑의 고고한 자리에서 나와 일상의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합니다.

나를 찾고 세계를 치유하려는 철학자의 삶과 고전 사상을 다채로운 미술 작품을 통해 성찰하면서 여러분도 행복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를 발견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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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자 : 서영화(한신대 외래교수), 전호근(경희대 교수), 이현재(서울시립대 교수)
주관 및 진행 : 정독도서관
후원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알렙 출판사
기간 : 2013년 4월 8일 – 2013년 4월 22일(매주 월), 총 3회
시간 : 오후 7시 – 9시(1시간 30분 강의, 30분 질의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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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리큘럼
1강 4월 8일 철학이 말하는 구두, 예술이 말하는 구두
고흐의 구두와 하이데거-서영화(한신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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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4월 15일 ?세한도?를 읽는다는 것!
김정희와 사마천 그리고 공자-전호근(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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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4월 22일 그래도 정복은 불가능하다!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과 여성의 몸-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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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시대정신을 통찰하고 현실 모순을 변혁하는 철학자 지식공동체입니다. 나아가 한국적 실천철학의 모형을 구현하며 더불어 철학의 대중화 사업을 위해 시대와 소통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은 독립?중도?심층의 모토 아래 ‘관점 있는 뉴스’, ‘깊이 있는 분석’ 기사를 만들어내는 시민지향적 독립 언론입니다.?

알렙출판사

알렙은 ‘언제나 시작’이란 뜻을 갖고서, 나눔과 느낌이 있는 인문 사회 교양 서적을 만들어 나가는 출판사입니다. 펴낸 책으로는 <철학자의 서재 1, 2>, <청춘의 고전>, <언지록> 등이 있습니다.?

정독도서관

정독도서관은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북촌에 위치하며, 사계절 아름다운 넓은 정원에 풍부한 장서와 다양한 인문학 강좌로 언제나 나를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시민 모두의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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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노동이야기]- ⑤

인간의 대지[노동이야기]- ⑤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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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도의 품삯으로 고정되다

아파트 주차장 공사 현장이다. 바닥 슬래브에 이미 기둥(하스라)을 심었다. 양 옆 지상에 노출되는 주차장 거푸집을 완성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공장에서 하스라를 완성한 형태로 가져와서는 크레인으로 들어올려, 제 자리에 심고 난 후 슬래브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남은 부분은 램프(지하 주차장 자동차 길)로, 앞으로의 공사 순서는 다음과 같다. 지상에서 보(하리)와 슬래브를 짜,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완성된 형틀에 이어 짜 맞춘다. 하리와 슬래브를 바닥에서 짜서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다는 발상은 아주 새로운 노동 방식으로, 크레인이 널리 보급되면서 시작되었다. 자재를 일일이 사람이 들어 올려 짜 맞추던 예전 방식에 비해 공기가 무척 단축된다.?

오늘 새벽, 목수 일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 용역에 갔다. 소장이 말했다.?

“십만 원 받고 목수 조공 갈래요? 내일은 팀(목수) 보내 줄 테니 …”

나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떡였다. 서울 용역에서 철근공이라는 성정동 사람과 나, 둘이서 현장에 ‘팔려’ 나갔다. 철근공은 나이가 많았다. 그는 평생 철근 공을 했으나, 일당 1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그는 ‘늙어서 (누가 써주지 않는다)’라고 했다. 현장에 기존 팀원 7명이 있었다. 현장은 산세 좋고 주변은 탁 트인 남향이었다. 지세가 사람을 편하게 하는가보다. 마음도 쾌적했다. 광 씨가 지휘를 하고, 김 군, 성정동, 나를 포함한 네 명이 하리 통을 짰다. 현장에서 치수 표준은 mm단위이다. 7400길이에 높이 450의 하리 통이다.

ⅰ) 90 각재(오비끼)를 600 길이로 잘라, 900 간격으로 바닥에 배열한다.

ⅱ) 90×50 각재(투바이)를 올려 ⅰ)과 못으로 고정한 후, 이음새를 50×50 각재로 연결한다.

ⅲ) 각 파이프를 1 위에 올려, 움직이지 않도록 파이프 양 옆에 빗 못으로 박아준다.

ⅳ) 400으로 자른 합판을 ⅱ)의 위에 올려, 투바이에 30만 물리도록 작은 못으로 박은 후, 굵은 못(8cm)을 ⅰ)과 ⅱ) 부분에 겹쳐 박는다. 반대쪽도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 때 합판 양 끝 부분을 투바이에서 80이 남도록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 80 부분을 이미 완성된 슬래브 하리에 올려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ⅴ) 눕힌 양 모서리에 45cm×120cm 폼을 7장 올려붙인다.

ⅵ) 3cm 삼각형 멩끼를 ⅳ)의 안쪽 아래, 코너 부분에 박는다.

ⅶ) 패널 아래쪽에 구멍을 뚫은 다음 6번 반생이를 꽂아놓는다. 철근 작업 후 반생이를 조일 것이다.

 

못 박기 시작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팔목이 아팠다. 오래 일을 안 한 탓에 근육이 놀랬다. 굵은 못이 나뭇굉이에 걸려 잘 들어가지 않았다. 두 손으로 망치질하는데, 성정동이 말했다. “거 뭐야, 두 손으로, 츳…”

괘씸했다. 두 손으로 못 박는 기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손 망치질은 콘크리트 못 등 단단한 곳에 못 박을 때 요긴하다. 이 기술은 절 지으며, 한 자짜리 대못을 함마로 때려 박을 때 익혔다. 두 손으로 망치질 하는 목수는 드물다.

처음에는 김 군을 “애기야”라고 불렀다. 고등학교 막 졸업한 앳된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출산을 앞 둔 애기아빠였다. ‘애기가 애기를 낳는군.’ 그가 하리 통 밖에서 안으로 손을 넣어 멩끼를 박았다. 그것이 무척 불편한 자세이다. 내가 하리 통 속으로 들어가서 박았다.

그토록 식욕이 당기는 점심은 오랜만이었다. 평소에는 풋내 때문에 잘 먹지도 않던 봄채소 무침(김치)은 달디 달았다. 밥과 생선 두 토막, 국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식사 끝낸 후 현장 불 옆에 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팀원들이 왔다. 재료가 떨어져, 오전 작업이 끝이란다. 내일도 데마찌란다.

 

서울용역 소장이 4만 5천원을 주며 말했다.

“내일 꼭 나오세요, 그런데 목수 맞아요?”

“네.”

소장이 재차, “정말 목수 맞아요?” 라고 말했다. 나는, “옛날 목수, 오야지급, 다른 일 하다가 작년부터 목수일 하기 시작 했어요” 라고 덧붙였다. 소장이 다시, “내일 꼭 나와요, 나는 사람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아요, 한 현장만 보내요”, 라고 했다. “그거 좋네요.”

매일 이곳저곳 팔려 다니면 항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주변 환경이 익숙해 질 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밤새 잠을 설쳤다. 소장의 ‘목수 맞느냐’는 말이 스트레스를 주었다. 오랫동안 일 안한 탓에 복잡하게 현대화된 공정을 따라잡기 힘들다. 시스템 동바리 등, 작업해 보지 않은 일을 만나면 눈치껏 해야 한다. 말이 눈치껏이지, 누가 핀잔이라도 준다면 참고 일하기 어렵다. 밤 새 꿈을 꾸었다. 새벽에 일어나 생각했다. 먹고 사는 것이 이토록 힘든가?

아침 일찍, 서울 용역에 갔다. 전에 함께 일했던 김 씨를 만났다. 그의 말은 나를 더욱 겁먹게 만들었다. ‘현장에서 일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장이나 기사가 득달같이 용역회사에 전화한다. 왜 이런 목수도 아닌 사람을 보냈느냐… 그러면 온 동네가 시끄럽다. 자기도 어떤 사람 소개했다가 우세만 당했다.’

온양 터미널 현장에 여덟 명이 갔다. 어제 함께 일했던 평 반장과 씨와 이 씨도 함께 갔다. 지하 3층을 올리는 중이었다. 땅 속 깊숙한 곳에 현장이 있었다. 목수 작업은 깔끔했다. 그러나 일 분량이 많지 않았다. 하리 통을 다 만들어 올리고 땜빵만 남아 있었다. 땜빵도 30여 군데 뿐이었다. 여덟 사람이 일 할 분량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 몇 명이 사무실로 커피 마시러 갔다. 사무실 기사가 말하더란다. ‘목수 네 사람만 보내라 했는데, 이처럼 많이 왔느냐. 데스라 네 명만 올리겠다. 알아서 하라.’

함께 간 목수들이 웅성웅성 말이 많은 와중에 평 반장이 자기는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도 그 뒤에 줄을 섰다. 이 씨를 포함해 셋이 돌아왔다. 평 반장의 진단인 즉, 서울 용역 소장이 터미널 현장을 ‘잡으려고’ 시위차 목수를 많이 보냈다고 했다.

이 씨가 버스표를 샀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차 한 잔 하라고, 내 거처로 그들을 이끌었다. 길을 가면서, “회사에서 일해도 돈을 잘 받을 수 있느냐, 예전에는 돈 받기가 어려웠다”라고 물었다. 이 씨가 어두운 얼굴로, “돈 받기 어려우니까 다들 용역회사에 나가는 건데…” 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뻔 히 일당에서 10프로를 떼이며 용역회사에 나가 일 한다. 이 씨의 표정은 이런 사정에 대해 말하는 셈이다. 평 반장은 매일 일당을 지급하는 식으로 목수들을 데려다 쓴다고 했다.

평 반장은 한껏 내 거처를 부러워했다. 그는 1천만 원에 20만원 월세를 산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많은 돈을 굴린다. 적어도 목수 일당 서너 달을 줄 수 있는 돈이다.

평 반장이, 용역회사 거치지 말고 자기 팀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다. ‘그날그날 10만 원씩 주마, 곧 다음 현장으로 옮긴다, 그 때 돈을 올려 주겠다.’ 나는 늙은 철근공의 말을 생각했으며, 지방에 가서 일 할 경우 생기는 경비를 생각했다. 나도 평 반장에게 제안했다. ‘계단을 시켜다오.’ 계단은 일이 많은 대신 무거운 것을 나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육체의 부담이 적다. 이어 말했다. ‘대신 자주 와서 치수 잘 맞추고 있는지 질문하고 감독만 해 주라.’ 이 씨가 웃으며 말했다.

“참 어렵네.”

 

2. 돈 떼어먹고 도망간 두목노동자

 

오전에는 하스라 통을 마저 끝낸 후, 오후에는 슬래브를 짰다. 슬래브 칫수 가로 7400, 세로 3600 넓이의 슬라 13개를 짜야 한다.

ⅰ) 바닥에 6m 강관 파이프 두 개를 깔고, 6번 반생이 네 개를 그 아래에 끼워놓는다.

ⅱ) 시다 오비끼를 3000으로 9개를 잘라, 강관 파이프에 적정 간격으로 배열한다.

ⅲ) 시다 오비끼 양 옆과 중간에 900×500 각재와 사각 파이프를 올린 후, 가네(직각)를 만든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직각이 틀어지면 슬래브 짜 맞춤이 어려워진다.

ⅳ) 이 위에 합판 을 300씩 밀어낸 다음, 각재 위에 못으로 고정한다.

ⅴ) 합판(세로 910, 가로 1820) 세 장을 세로로 늘어놓고, 870으로 잘라 붙이면 3600이 된다. 이어서 합판 아홉 장과 합판 땜빵 12를 끼워 넣으면 7400이 된다. 이 과정에서 반생이를 합판 위로 올려 빼 놔야 한다. 그래야만 반생이에 크레인 고리를 걸어, 들어 올릴 수 있다.

 

?이재원

오늘 노동자들의 화제는 단연 돈 떼어먹고 도망간 ‘창수’라는 목수 오야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현 씨가 도망간 오야지를 변명했다. 창수 씨는 매일 하청회사(협력회사라 부른다)에 데스라(일일 공수)를 올렸다. 인원수만 올렸다. 그런데 하청회사가 돈 계산하면서 갑자기 일 한 노동자 명단을 내어놓으라 했다. 창수가 명단이 없다고 하자, 하청회사가 돈을 안 주었고, 창수 씨만 독박 쓰고 도망갔다는 것이 요지였다. 새빨간 거짓이지만, 참고 분석해 보면 이렇다.

ⅰ) 건축법 상 원청회사가 협력회사에 일감을 주면, 협력회사는 도급(재하청)을 주어서는 안된다. 원청회사는 관리자만 두고 있다.

ⅱ) 하청회사도 건축 담당 기사와 관리자만 고용하고 오야지들에게 재 하청을 준다.

ⅲ) 목수를 투입하는 큰 오야지가 따로 있다. 그가 재하청업자이다. 큰 오야지는 평 씨처럼, 여러 명의 두목노동자를 불러 일을 시킨다. 창수 씨는 작은 규모의 재 하청업자였다.

 

창수 씨의 경우,

ⅰ) 하청회사가 창수 씨로부터 데스라를 받을 때 노동자 명단이 아니라 인원수만 받았다면, 애저녁에 돈을 떼어먹으려 한 짓이다. 임금 못 받은 노동자가 노동부로 가서 하소연한다 해도 일 한 증거가 없으니, 노동부에서도 막막할 것이다.

ⅱ) 창수 씨가 회사 데스라에 노동자 명단을 올렸다면, 그는 돈 받아 도망갈 셈이었다.

둘 다 동일한 원인이 있다. 하청과 재하청의 고리가 그것이다. 그런데 다시 의문점이 더 생긴다. 창수 씨는 어떻게 하청회사에서 노임을 한꺼번에 받아, 개별 노동자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했을까? 그리고 원청회사는 왜 이것을 묵인했을까?

도급노동을 주지 말라는 법도 애매하기 그지없다. 이를테면 특허 노동의 경우는 도급노동을 허용한다. 또한 누군가 내부 고발해서 도급노동을 하청 준 것으로 법정에 섰다 하자. 재하청 준 협력회사는 벌금을 내는 것으로 끝이다. 임금을 못 주었다 치자. 하청 업자는 ‘돈이 없어서 못 주었다, 돈 벌어서 임금 주겠다, 지금까지 받은 돈은 자재비 등등에 썼다’, 라고 하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하청회사는 유한 책임만 지고 있다. 공사에서 손해 보았다면 자기 돈을 털어 보상할 이유가 없다. 하청회사에 중요한 것은 공사에 대한 책임뿐이지 임금이 아니다. 또, 하청회사가 재 도급 업자에게 임금을 준 것도 애매하다.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진다면, ‘관례상 오야지에게 노동자들 임금을 주어왔다, 오야지가 노동자에게 다시 돈을 주는 것이 관례다’, 라고 하면 그 또한 처벌 방법도 기준도 없다. 도둑놈들이 행세하는 세상이니, 기회만 있다면 도둑들이 생길 것이다.

 

3. 기계와 함께 하는 노동

오전에는 하리 통을, 오후에는 슬래브를 제 자리에 위치시켰다. 크레인이 하리 통을 매달아, 이미 작업해 놓은 슬래브 양 옆에 이어 붙이는 작업이다. 지상에서 하리와 슬래브를 짜서 들어 올린다니, 사람들 참 똑똑하다.

평 반장이 슬래브를 크레인에 매달아 현장으로 유도하면 양 옆에 한 사람씩 서서 하리 통을 잡아 제 자리에 위치시킨다. 크레인이 잡시 멈춰 선 사이, 슬래브 아래에서 하리 통 아래에 삿보도(철제 지주대)를 받친다. 슬래브를 짜면서 베갯목에 대못을 박아 놓았다. 우선은 하리 양 끝을 받친 후, 중간을 받치고, 나머지를 받친다. 네 명이 삿보도 작업을 했다. 광 씨가 진두지휘를 하고, 김씨, 김 씨 친구 조공, 그리고 나 넷이서 작업했다. 크레인은 계속 하리를 날라왔고, 우리는 바삐 작업을 서둘렀다.

요령들이 없어 힘들게 삿보도 작업들을 한다. 삿보도 아랫부분을 직선으로 제 자리에 위치시킨 후, 속 강관을 끄집어 올려 베개목 못에 끼운 후, 겉 강관과 핀으로 연결한 후, 나사를 돌려 적절한 높이로 올리는 식이다. 그런 식으로 작업하면 무척 힘들다. 요령을 부리면 작업이 조금 쉽다. 삿보도 아랫부분을 제 자리에 위치시킨 후, 삿보도를 비스듬히 하여 속 강관을 뽑아내,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 수직으로 세운 후 못에 걸리도록 들어 올리면 조금 힘이 덜 든다. 중력 법칙에 적응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어렵기는 여전하다. 고개를 위로 향하고 작업하는 통에, 팔과 다리, 허리는 물론 목까지 아프다. 광 씨가 잠시 쉬는 시간에, 삿보도 받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일 듯 하다고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면서 목을 아래로 숙이고 걸어갔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정 벽화를 그리면서 항상 고개를 쳐들고 일했다. 그는 고개(목)가 아파, 쉴 때나 평상시에는 고개를 숙이고 다녔더란라.

오전에 하리 통 여섯 개를 걸었다. 오후에는 슬래브를 정치시키는 작업이다. 생 떽쥐베리의 아름다운 소설 『인간의 대지』에는 노동자로서 부럽기만 한 노동들이 나온다. “사막에 간다는 것은…하나의 샘을 우리의 종교로 만드는 것이다.” 정원을 가꾸듯 사막에 샘을 파는 행위이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물을 깃기 위해서는 며칠을 걸어야 하며, 우물이 있는 곳을 찾아낸다 해도 “낙타 오줌이 섞인 흙탕물이 나올 때까지” 모래를 파내야 한다. 그 샘을 찾기 위하여 “청춘이 스러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사막에 사는 이가 유럽의 수풀 우거진 샘을 보고는 말했다. 인간의 노력 없이 모든 풍요로움을 허락하는 신이란 “속이는 신”이다(6,사막에서).

노동자로서 더욱 부러운 장면이 있다. “하룻밤 동안 인간을 얼음덩어리로 만드는 안데스 산” 속에 불시착했다가 일주일 만에 살아 돌아온 기요메가 말한다. “동료들은 내가 걷고 있는 줄로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나를 믿는다. 그러니 만약 내가 걷지 않는다면” 나는 동료의 기대를 저버리는 “못난이다”.

조립식 노동, 삿보도를 받치는 노동에는 동료가 없다. 잠시잠깐 쉬면서 함께 모여 담배를 피운다. 그 뿐이다. 다시 흩어져, 불연속적이고 분리된 존재로 노동한다. 노동의 영감도, 창조성도 없다. 끝없는 노역으로서의 노동만 존재한다. 고독한 인간이 삿보도 사이에 끼여 있다. 생 떽쥐베리는 대지에 선 인간 노동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한다.

“우리가 이런 도구들을 통해서 찾아내야 하는 것은 자연, 정원사나 항해사, 혹은 시인의 자연”이다(3, 비행기). 시인의 노동, 정원사의 노동이라니, 얼마나 황홀한가. 그는 대지와 결혼할 것이다.

 

4. 진화의 과정과 의사의 노동

슬래브 작업을 마치자, 그 다음 날 부터는 일이 쉬웠다. 벽체 반생이를 조이거나 도리잡기, 즉 건물의 수직과 수평, 일직선이 되도록 형틀을 잡아주는 작업 등이었다. 평 반장 팀은 원래 옆 건물로 가서 작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곳 공기가 늦어지는 바람에 이곳 주차장 공사를 돕고 있다. 따라서 일감이 많지 않았다. 하루건너 하루 일 하는 식이라서 노동자들 불만이 많았다. 나는 몸을 만들 기회이므로 대체로 만족했다. 무릎이 아파, 쉬는 날 병원에 갔다. 의사가 말했다. “관절에 변형이 시작되었네요. 노동을 해야 하지만 관리의 차원에서 병원 자주 오세요.”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중력법칙을 이기고 두 발로 서도록 진화해 왔으니, 관절 변형이 오는 것도 진화의 과정이지.’

옛날 목수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젊었을 때 일 안하고 노는 것이 보약 한 첩과 같다.’ 물론 일을 많이 하면 관절이 빨리 달아 없어질 것이다. 덕수가 전화로, “힘든 일은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나는, “일하든 안하든 나이 들면 관절은 사그라지게 마련이야. 힘든 일이든 쉬운 일이든 크게 문제 안 돼. (다 진화의 과정에 있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 와중에,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의사를 만났다. 어금니를 뺏다. 마주대하는 이가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반대 편 어금니가 이가 솟아날 것이다. 여러 의사들에게, ‘솟아나지 않을 방법’을 문의하고 다녔다. 하나같이 임플란트를 하라고 했다. 아니면 빠진 옆 이를 삭감하여, 브릿지 형식으로 어금니를 하나 달아내라 했다. 이를 삭감한다고 생각하자 우울해졌다. 임플란트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죽을 먹고 살거나, (이가 새로 솟기를 기다릴 참이다). 발품을 팔고 다닌 끝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의사를 만났다. 솟아날 이를, 맞물리는 치아가 있는 옆 이와 한데 묶어놓는 것이다. 그 분의 노하우인데 공개해서 어떨는지… 만약, ‘기술이 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공개한다 해도 기꺼워하시리라.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 “저기…”[철학자의 서재]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 “저기…”[철학자의 서재]

마투라나·바렐라의 <앎의 나무>

김광식(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 소리 없이 내 맘 말해 볼까 / 울어보지 못한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 때론 느껴 서러워지는데 /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 주오 나즈막히 / 말없이 그대를 보며 소리 없이 걸었던 날처럼….

김광석이 부른 노래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이다. 이 노래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랑을 안고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여학생을 사랑했지만 ‘그저 그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가’ 없었던 남자, 광식이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어느덧 중간 시험 때가 다가왔다. 그때는 민주화 시위 때문에 수업을 빠지는 경우가 많아 시험 때 노트를 빌려 복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에게 노트를 빌리기로 결심을 했다.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노트를 빌렸고 돌려주며 데이트를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저기…” 그녀는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고 나는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고맙다는 말만 하고 다시 돌아섰다. 또 다시 멀리서 바라보는 일이 이어졌고 기말 시험 때가 되었다. 다시 용기를 내서 노트를 빌렸고 고맙다며 초콜릿을 건넸다.

“저기…” 머뭇거리며 다음 말을 차마 못 잇던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저, 다음 학기에 고급 과정을 들을 건데, 같이 들을래요?” 나는 뜻밖의 제안에 고마워하며 돌아섰다. 고대하던 다음 학기가 시작되었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 수업은 고급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지만 우리들의 진도는 제자리에 맴돌기만 했다. 멀리서 바라보고 노트를 빌리고 돌려주고, 또 멀리서 바라보고 노트를 빌리고 돌려주고.

“저기…” 나는 끝내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와 사랑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그녀도 다음 학기에 수업을 같이 듣자는 제안을 할 수가 없었다. 최고급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로 남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몸이다

 

현실 속 광식이와 같은 사랑을 하는 남자가 또 있다. <광식이 동생 광태>(2005년)라는 영화 속 광식이다. 그 또한 7년 동안이나 “저기…”만 되뇔 뿐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현실 속 광식이든 영화 속 광식이든 광식이가 자신의 삶을, 아니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는 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을 많이 했을 거다. 그녀와의 사랑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그 어리석은 생각만 딱 한 번 고쳐먹으면 그 사랑이 이루어졌을 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광식이 어느 날 아침 내 연애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그날부터 당장 365일 수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나눌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고맙습니다. 저기 커피 한 잔 어때요?” 라고 차마 잇지 못한 뒷말을 이어 사랑을 이룰 수 있었을까?

어느 날 아침 단 한 번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광식이가 카사노바 광태가 될 수 없다. 삶이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단 한 번 고쳐먹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삶이나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생각이 아니라 사는 방식이, 달리 말하면 머리가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이 몸에 밴 몸의 성향이 우리의 삶이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흔히들 머리로 행동을 선택하여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람은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행동을 선택하여 세상을 살아간다. “커피 한 잔 어때요?”라고 뒷말을 이어야 한다고 머리로 생각은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몸이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 거다. 그렇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아직 몸에 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다고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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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쓴 <앎의 나무>(최호영 옮김, 갈무리 펴냄)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설명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앎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을 안다’고 할 때의 앎과 ‘~을 할 줄 안다’고 할 때의 앎이 있다.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 앞의 것이고,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할 때의 앎이 뒤의 것이다. 앞의 것이 정보 지식이고 뒤의 것이 행동 지식이다. 하지만 정보 지식은 그것을 찾거나 만들거나 저장하거나 되찾을 줄 아는 행동 지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앎은 행동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 지식에 초점을 맞춘 행동 이론은, 행동이란 머릿속 정보 지식을 실현하거나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행동 지식에 초점을 맞춘 행동 이론은 행동을 몸에 밴 행동 지식이 실현되거나 표현되는 것이라고 본다. 정치 행동을 포함한 문화 행동도 마찬가지다. 정보 지식에 초점을 맞춘 문화 이론은 문화 행동을 머리 밖으로 표현된 정보 지식, 곧 텍스트라고 본다. 하지만 행동 지식에 초점을 맞춘 문화 이론은 문화 행동을 몸에 밴 행동 지식, 곧 행동 방식이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 본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정보 지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식 이론을 행동 지식으로 방향을 돌리고자 한다. 그들은 행동 지식으로 문자 그대로 지식과 행동의 일치, 즉 ‘지행합일’을 이루고자 한다. 옛말에, 제대로 알면 그대로 행한다고 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단지 머릿속 정보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몸에 밴 행동 지식으로 알고 있다는 걸 뜻한다. 그것은 지혜라고도 하고, 덕이라고도 한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인간의 문화 행동이 정보 지식의 표현이 아니라 몸에 밴 행동 지식의 표현인지를 그 생물학적 뿌리로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그들은 신기한 두 가지 앎의 현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첫 번째 현상을 직접 체험해보자. “왼쪽 눈을 감은 채 (아래 그림)의 십자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 약 40센티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얼굴을 앞뒤로) 움직여보라. 그러면 꼭 작다고는 할 수 없는 검은 점이 그림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26쪽)

두 번째 현상도 몇 가지 장치만 준비하면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붉은색과 흰색의 두 광원을 가지고 (오른쪽 그림)과 같이 꾸며보자. (…) 전구에다 지름이 같은 마분지관을 씌우고 (…) 얇고 비치는 붉은색 종이를 필터로 쓰면 된다. 그런 다음 손 같은 것을 원뿔꼴의 빛 속에 넣고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살펴보자. 그림의 세 개 상황 가운데 (위의 손 그림자와 중간의 오른쪽 손 그림자)는 청록색으로 나타난다.” (28쪽)

외부 세계에는 분명히 ‘있는’ 점을 우리는 어떻게 ‘없는’ 것으로 보며, 외부 세계에는 ‘없는’ 청록색을 우리는 어떻게 ‘있는’ 것으로 보는 걸까? 도대체 외부 세계에 대한 앎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이 현상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우리의 특수한 인식 ‘행동’의 구조나 방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앎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행동 (방식)이다. ‘그곳에 아무 것도 없다’는 앎은 곧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인식 행동 방식(행동 지식)의 산물이며, ‘그곳에 청록색이 있다’는 앎은 곧 청록색이 있는 것으로 ‘볼 줄 아는’ 인식 행동 방식(행동 지식)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앎이란 우리의 인식 행동 방식, 곧 행동 지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36쪽) 행동 지식이 곧 앎이며, 앎은 곧 행동 지식이란 말이다.

우리의 인식 행동 방식 또는 구조가 우리의 앎을, 또는 우리가 아는 세계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들의 앎의 이론을 구성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20세기의 칸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나아간다. 우리의 앎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앎 또한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생명체의 앎과 우리의 앎은 근본에서 같다. 생명체든 우리든 어떤 세상(환경) 속에서 자신의 행동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행동’할 줄 알면’ 그 세상’을 안다’고 말한다. 신경계나 뇌의 발달은 그 행동 방식의 신축성과 다양성을 늘렸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장한다. “앎이란 곧 효과 있는 행위다.”(39쪽)

머릿속 앎이 아니라 몸에 밴 앎으로 행동을 한다

 

“생물을 특징짓는 것은 말 그대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52쪽) 생명체의 효과적인 행동은 자신의 세상(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생산하는 일이다.

자신의 환경과 상호 작용하며 스스로를 생산하는 그 일은 몸에 밴 고유한 행동 방식이나 구조(행동 지식)에 따른다. 단세포 생명체조차도 몸에 밴 자신의 행동 구조에 따라 환경으로부터 나트륨이나 칼슘은 받아들이고 세슘이나 리튬은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안다.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도 몸에 밴 자신의 행동 방식에 따라 먹이가 다가오면 가짜 발로 감싸서 잡아먹을 줄 안다.

그들에 따르면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뿐만 아니라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특정한 방식의 행동을 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오랜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몸에 배고 태어나서 살아오면서 몸에 밴 특정한 행동 방식(행동 지식) 때문이라고 한다.

아메바가 먹이를 감싸자는 생각을 해서 먹이를 잡아먹지 않듯이, 사람도 팔자 모양으로 걷자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걷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팔자 모양으로 걷지 말자고 생각을 해도, 그때만은 어찌어찌 되는 듯해도 똑바로 걷는 방식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팔자 모양으로 돌아와 있다. 자전거 타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행동 방식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타는 방법을 머리로 아무리 외운다고 탈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아메바와 사람의 행동이 같을 수 있을까? 사람의 행동 가운데 걸음걸이나 자전거 타기와 같이 습관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적인 단순한 행동만 그렇고 고도로 발달된 복잡한 문화적인 의식적 행동은 주인인 머리가 내린 명령을, 즉 머리가 복잡한 정보를 의식적으로 처리하여 만든 생각을 하인인 몸이 단순히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의 단순한 행동으로부터 다세포 생명체를 거쳐 인간의 복잡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진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그 신축성과 다양성만 늘어났을 뿐, ‘머릿속 앎이 아니라 몸에 밴 앎에 의해 행동을 한다’는 생명체 행동의 기본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과정이 책의 전부다. 여기서는 그들의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한 가지 과학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지금 왼손을 들어보라. 왼손을 들겠다는 의식적인 생각을 몸이 단순히 수행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신이 왼손을 든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스스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왼손을 들겠다는 의식적인 생각은 몸이 스스로 내린 명령이 의식이라는 스크린에 비쳐진 것에 지나지 않다.

미국의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독일의 생리학자 한스 코른후버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실험 대상자에게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무 때나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실험 대상자들이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생각한 순간과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인 순간은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뇌파 측정기로 측정한 결과,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0.8초 전에 이미 특정한 뇌파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냈다.

의식적인 뇌가 생각하기 전에 이미 무의식적인 뇌가, 즉 몸이 스스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무의식적인 뇌가, 즉 몸이 스스로 내린 명령을 손가락이, 즉 다른 몸이 수행한 것이다. 의식적인 생각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주인인 몸이 스스로 내린 명령을 의식이라는 스크린에 비쳐 알리는 앵무새 대변인의 역할을 할 뿐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화적인 의식적 행동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무의식적인 몸이고, 그 시나리오를 생각이라는 영화로 만들어 보여주는 영화감독이 바로 의식적인 뇌인 거다.

그러므로 이야기 흐름을 바꾸려면, 스크린에 비쳐진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영화가 아니라 먼저 시나리오를 바꿔야 하는 거다. 아무리 착하게 살자고 의식적으로 생각을 고쳐먹어도 착하게 사는 방식이 몸에 배어, 다시 말해 덕이 쌓여 무의식적인 몸이 스스로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착하게 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애 근육을 단련시켜라

 

얼마 전에 투표가 있었다. 착하게 사는 방식이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은 투표를 안 하고 놀러 가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도 투표장에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투표장에 갔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사람을 찍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에게만 이익이 되는 다른 사람을 찍었을 가능성이 많다. 생각 따로 행동 따로다.

투표 근육을 단련시키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을 한 번 고쳐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아예 생각이 몸에 배도록 몸을 만들자는 거다.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이 그렇게 강조했던,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인지 철학으로 정당화했던 ‘덕의 철학’을 역설하는 거다.

아직도 말하지 못하는 사랑을 안고 비 맞은 채로 서성이고 있는가? 아직도 사랑했지만 그저 그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 설 수가 없는가? 당신의 인생을, 아니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인생이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그러한 행동 방식이 몸에 배도록 몸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저런 생각들만 잔뜩 늘어놓은 연애 지침서만 읽고 있지 말고 “저기…커피 한 잔 어때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연애 근육을 단련시켜야 한다. 당신의 연애 근육은 튼튼한가?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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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정(한철연회원)
이반 일리히의 상생 사회를 위한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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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2년 봄에 차를 팔았다. 차 안에서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의 사연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젊은 아내가 남편을 설득해 차를 판 사연이었다. 부부는 치솟는 기름 값과 교통체증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했으며 기껏해야 주말에 마트나 나들이를 할 때만 자동차를 사용했다. 그러나 자동차를 보유하기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자동차 할부금과 보험료, 세금 그리고 유지비와 보수비를 따져보니 자신들의 소득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했다. 세대 당 한 대의 자동차 보유를 당연히 여기는 요즘 시대에 그녀의 지혜로운 선택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가까운 거리도 차로만 움직이고도 늘 시간에 쫓기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소비에 의존했다. 나는 차를 팔고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차 없는 생활의 이로움을 발견하며 만족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이반 일리히(I. Illich)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리히는 오스트리아 철학자며 로마 가톨릭 수사였다. 그는 서양 문화의 제도들이 우리의 교육, 의료, 노동, 에너지 사용, 교통 그리고 경제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비판했다. 일리히는 인생 후반기에 얼굴에 자라는 암 때문에 고통 받았으나 전문적인 의료에 따르기보다 전통적인 방법들로 치료했다. 그는 종양에 의한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아편을 피우기도 했으며, 일리히는 종양이 진행 초기일 때,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의사와 상담했지만 종양을 제거하면 말하는 능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듣고 종양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했다. 일리히는 그 삶을 자신의 운명이라 말했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흥규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일리히는 『상생 도구 Tools for Conviviality』에서 우리 사회가 부정의한 이유는 극소수에게만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리히의 ‘도구 tools’와 ‘상생 conviviality’ 개념은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일리히는 “현대 기술이 관리자managers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사회”(Illich, p.?)를 ‘convivial’하다고 말한다. 관리자는 기업의 사장을 의미한다. 즉 현대 기술은 기업의 사장이 돈을 벌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게 하는 도구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면 일리히가 정치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리히에게 정치는 “에너지나 정보의 동등한 투입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최대의 산업적 산출의 분배”(Illich, p.?)를 다루어야 한다. 정치는 투입이 아니라 산출과 관련한다. 산출의 분배를 최대화하는 것이 정치의 목표다. 분배의 최대화는 곧 돈 많이 버는 것이고, 그렇다면 ‘convivial’은 사장이 아니라 개인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도구의 근본 독점을 비판하고 일리히의 ‘도구 tools’와‘convivial’ 개념을 분석한 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들을 평가한다. 일리히가 상생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정치 대안은 이상적이고 전 근대적이라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지구 환경과 생태 문제를 단순히 자연에 대한 존중과 인간과 자연의 화해 또는 조화라는 추상적인 답에서 찾는 것은 문제에 대한 원인을 잘못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리히의 사상은 산업 도구의 근본 독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상생 사회를 위한 개인의 노력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사회 개혁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더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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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본 독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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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 따르면 과도하게 효율적인 도구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관계를 조장하도록 응용하면 도구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면서 환경을 부패시킨다. 또 도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할 필요가 있는 일과 기성품이 필요한 일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후자의 파괴는 근본 독점을 낳는다. ‘근본 독점’이란 “하나의 상표가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형의 제품이 지배적인 것을 의미한다.”(Illich, p.55) 예를 들어 코카콜라가 아니라 탄산수들이 음료 시장을 독점하고 식혜나 수정과 같은 전통 음료와 차를 음료시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자동차도 이런 방식으로 교통을 독점한다. 자동차는 도시 이미지를 만드는데, 미국은 이미 1970년대에 도시의 자동차가 도보와 자전거의 이동을 배제했고, 대만에서는 자동차가 하천 교통을 배제했다. 이와 같이 한 상표의 자동차를 많이 타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의해 도보, 자전거, 배 등의 다른 교통수단이 배제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학교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부에 대해 근본 독점을 확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인가 대안학교나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 즉 ‘무교육자’로 낙인찍혀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않으면 교육 받은 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의료 행위도 학교 교육을 받은 의사일 경우에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일리히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 배제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근본 독점이 생기며 이 근본 독점이 강제적 소비를 강요함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보았다. 또 “근본 독점은 거대 제도가 공급하는 표준 제품의 강제 소비를 수단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회적 통제를 만든다.”(Illich, p.56) 거대 제도가 만든 강제 소비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아이를 낳는 곳은 병원이 아니고 가정이었다. 간호사 경력이 있는 산파는 아이를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때 드는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비용만으로 출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산모의 산후 관리도 지금처럼 큰 규모의 조리원에서 이루어질 필요 없이 가족의 도움으로 집에서 조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분만을 위해서도 병원에 하루나 이틀 입원을 해야 하고, 입원 절차에는 각종 검사가 따르며 그에 대한 부담도 소비자가 진다. 이것은 의료 제도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것이지 개인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집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들이 있지만 그녀들은 성가시고 불편한 방송 기자의 호기심 가득한 취재에 응해야하는 불필요한 관심을 감수해야 한다. 또 분만을 돕는 산파를 구하기도 어렵다.

장례 문화도 근본 독점을 낳았다. 멕시코에서는 한 세대 전(일리히가 책을 쓴 1973년을 기준)까지도 묘지를 파는 일과 죽은 자를 축복하는 일 외에는 모든 장례 준비를 가족이 했다. 가족이 모여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죽은 자를 보내는 슬픔을 터뜨리며 기분을 풀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숙명과 삶의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멕시코의 모든 장례 절차는 패키지 상품이 되었고, 장의사가 하는 장례 의례는 법률로 강제해서 장의사들이 시신을 통제하는 근본 독점을 낳았다.

일리히는 치유하고, 위로하며, 이동하고, 배우고, 집 짓고, 죽은 자를 묻는 일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사람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상품에는 제한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는 풍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스스로 가능한 활동은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부여”(Illich, p.58)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사용가치를 부여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타고난 능력을 포기하고 우리를 대신해 ‘더 좋은’ 무엇과 우리의 능력을 교환할 때 근본 독점은 성립한다. 근본 독점은 가치를 산업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새 것들’의 희소성과 소비 수준에 따라 사람을 계급화 하는 틀을 만든다. 근본 독점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가치 있는 서비스 비용을 증가시켜 특권을 차별적으로 부여하고 자원에 대한 접근 권리를 제한하여 사람을 의존하게 만든다. 최근에 장례 대행업체 가운데 일부는 상당히 고가의 장례 예식 상품을 유족에게 권한다. 부자가 아니고는 이용할 수 없는 고가의 장례 예식은 결국 서비스에서 차별화 전략으로 또 다른 특권 의식을 낳으며 일부 계층만이 누리는 서비스 자원이 되고 만다. 우리가 근본 독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독점은 다원적으로 진행해 강제된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가 가진 인내의 한계를 파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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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생 도구?
1) 도구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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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게 도구의 범위는 넓다. “나는 (…) 단순한 기자재만이 아니라, (…) 거대한 기계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 생산시설도 포함시키고 교육, 건강, 지식, 의사결정을 생산하는 것과 같이 만져서 알 수 없는 상품의 생산 체계도 포함시킨다.” (Illich, p.22)

일리히에게 ‘도구 tools’는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마련한 장치인 ‘수단’을 의미한다. 그는 합리적으로 고안한 모든 장치를 하나의 범주로 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도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기술 도구만이 아니라, 학교의 교과 과정이나 결혼 법 같은 의도적으로 형성한 사회적 고안물도 도구에 속한다.

일리히에게 ‘도구’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다.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인 기계는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로 만들지만,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는 개인이 갖는 에너지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만들 수 있는 도구”다.(Illich, P.10) 동력 도구 가운데 몇 가지는 인간 에너지의 증폭기 역할을 한다. 가령 소가 쟁기를 끌지만 사람도 소와 함께 일하고 그 성과는 인간과 동물의 힘이 결합해 얻어진다. 전기톱과 기중기도 같은 방식이다. 반면에 제트기를 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 에너지는 제트기 출력에 의미 있게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트기는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 인간을 위해 일하는 ‘산업 도구’며 인간과 함께 일하는 소, 쟁기, 전기톱, 기중기는 ‘상생 도구’라 부른다. ‘상생 도구’는 사용하는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환경을 풍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게 최대의 기회를 부여한다. 도구는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상생을 진작시키는데 전화는 구조적으로 상생 도구다. 왜냐하면 관료는 사람들이 전화하면서 이야기한 개인 비밀을 간섭하거나 보호할 수는 있어도 전화로 서로 말하는 내용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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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3월 월례발표회-윤구병선생님 출간강연회[ⓔ시대와철학알림]

3월 월례발표회-윤구병선생님 출간강연회[ⓔ시대와철학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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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3월 월례발표회는 윤구병 선생님 <철학을 다시 쓴다> 출간 강연회입니다.

<철학을 다시 쓴다>는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좋은 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님의 철학 강의입니다.

강연회를 통해 ‘있음과 없음’의 존재론으로부터 ‘함과 됨’의 실천론을, 어떻게 쉬운 우리 말로 철학 할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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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는 윤구병 선생님의 강연과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책은 당일 20% 할인 된 가격에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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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철학을 다시 쓴다-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보리)

발표: 윤구병

사회: 김성민(건국대)

일시: 3월 8일 금요일 오후 6시 태복빌딩 202 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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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게 좋은 거고, 없을 것이 있거나, 있을 것이 없으면 나쁜 게 아닌가요?’ 이렇게 참과 거짓이 쉽게 가려지고, 좋음과 나쁨이 뚜렷이 드러나면, 우리는 그때 비로소 ‘참 세상’과 ‘좋은 앞날’을 꿈꿀 수 있습니다. 이 거짓 세상을 바꾸어 좋은 세상 만들 수 있습니다. ‘억압’ ‘착취’ ‘탐욕’, ‘전쟁’ ‘증오’ ‘이기심’은 모두 있는 놈들이 더 많이 가지려고 ‘힘센 나라’에서 들여 온 몹쓸 것, 몹쓸 짓, 없을 것들이고, 없애야 할 것들입니다.

이른바 ‘지배계급’은 ‘언어의 폭력’을 ‘제도화’해서 ‘이데올로기적인 국가 기구’를 만들어 내는데, 이 일에 부림을 받는 이들은 ‘인문학’을 앞세우는 ‘지식인’들이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식민지 지식인’들이라고 부르는데, 이이들은 열에 아홉이 ‘폭력적인 국가 기구’의 앞잡이들입니다. 말로는 ‘민주화’를 부르짖어도, 이이들이 입 밖에 내는 말들을 들으면 ‘아니올시다’. 세 살배기, 다섯 살배기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을 가려낼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일깨울 수 있고, 거짓에 맞서 좋은 앞날을 가꿀 올곧은 뜻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책머리에서>)

선생님이 말해요…[2013년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선생님이 말해요…[2013년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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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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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8세를 위한 철학캠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내 안의 편견을 깨어내는 여정’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철학캠프 강의를, 더군다나 ‘에로스’에 대한 강의를 제안 받았을 때 나는 난감하고 곤란했다. 아니 왜 하필 에로스야? 나더러 18세와 에로스를 논하라니! 이번 철학캠프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이 시련을 어떻게 이겨내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더니, 나에게는 이번 캠프가 시련 그 자체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강의준비와 1박2일의 캠프를 통해 이러한 소감이 내 안의 편견에서 기인한 것들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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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에로스에 대하여 나 스스로도 편견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강의에 대해서는 당연히 만족스러움 보다는 부족함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 학문적 소득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다시금 가부장적 결혼제도와 이성애중심주의적 사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어 일종의 충일감(充溢感)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어서 기뻤다. 다만 강의에 참여한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주지 못하여 토론이 풍부하게 진행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했다. 캠프에서도 일정에 쫓겨 이러한 부분이 충당되지 못했기에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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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는 생각보다도 더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논산 상상마당 측의 매끄러운 진행 덕에 즐거웠다. 특히 최원혁(랩퍼 빌로우)선생님께서 뻣뻣하고 어색한 참여자들을 배려, 독려하면서 정말 재밌고 알차게 프로그램을 진행해주셨다. 다만 캠프 프로그램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면,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한 설문지에 이성애중심주의적 질문들이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은연중에 그러한 이성애중심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강사진들도 그 점에 대해 적절히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사실 이번에는 캠프 이전에 캠프 프로그램에 대해 긴밀하게 회의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만약 다음 캠프가 진행된다면 그때에는 프로그램의 세밀한 내용까지는 아니라도 전반적인 철학캠프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 사전에 공유해서 이런 부분을 조율하고, 협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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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내가 1박2일 동안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앞서 설명했듯 내 안의 편견을 극복하고 온 것이었다. 나는 캠프를 통해 내가 ‘18세’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았다. 일종의 ‘꼰대근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청소년이 단순히 계도와 지도의 대상이 아님을 내가 청소년일 때 그렇게 강하게 주장했으면서도, 정작 성인이 되고나니 나도 청소년들과 수평적 관계임을 깨닫지 못했다. 내 경험과 내 지식,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조력자로서 아이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로서 주입시키려는 알량한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꼰대’의 모습은 18세 때 내가 절대 닮고 싶지 않던, 되고 싶지 않던 어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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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자각과 반성, 즉 내면의 아이스 브레이킹이 이루어지자 나에게 캠프는 그저 극복해야할 ‘시련’이나, 일이 아닌 신나게 즐길 수 있는 ‘모험’이자 refresh의 시간이 되었다. 그림처럼 눈이 내리던 논산 상상마당을 떠나오면서 앞으로 나의 삶에 이러한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내 안에 18세 때의 그 순수한 열정이 타올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