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뭐 대단한 존재라고! 절망이 오히려 희망이라네! [철학자의 서재]

Spread the love

? 마크 트웨인의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김의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내가 보기에 진화는 엉터리다. 인간은 정말로 한심한 실패작이다.”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19쪽)
 
 

아동 작가에서 신랄한 독설가로

10년 전만 해도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모험 소설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70년대를 유년 시절로 보낸 또래들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읽은 추억담이 있을 것이다. 소설만 아니라 TV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도 방영됐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아동 모험 소설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사회 비판가, 아니 독설가로 더 유명하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대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는 유년기의 기억 외에 그에 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실상을 알고 크게 놀랐다. 오히려 사회 비판가로서의 말년 행보가 그를 이해하는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마크 트웨인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작가 커트 보네거트를 통해서였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직한 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나라 없는 사람>, 126쪽)

커트 보네거트의 소개에 따르자면, 마크 트웨인은 노년기에 이르러 미국이란 나라와 나아가 인류에게 희망을 잃은 듯하다. 실제로 그의 책 번역본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시기는 60세를 바라보는 시기였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부인 올리비아는 책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은 책 출간을 만류했다. 그래서 1904년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906년 처음 발간되긴 하였으나, 특히 성직자들의 반응이 두려워 250부만 찍어 주변 지인들만 돌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 사후 7년이 되어서야(1917년) 정식 출간되었다.” (마크 트웨인,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 할까>(박영선 옮김, 북인 펴냄) 203쪽, 내용 요약)
 
 

선행은 자기만족에 불과

그런 마크 트웨인이 보기에 애초에 인간은 기계에 가깝다. 이 기계가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아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이때 외부의 힘은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 그리고 교육도 외부에서 받은 영향의 결과물인데 그 영향의 대부분은 인간관계다(위의 책 90쪽). 즉 기질 차이만 제외하면 인간은 소속된 사회의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판단과 행동이 좌우된다. 여기서 인간관계는 사회적 관계로 풀어도 무방할 듯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구절이 연상된다.
 

마크 트웨인(1835~1910)


 
기질은 타고난 성질인데 이것만은 아무리 교육을 해보아도 없앨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기질에 압력을 가해 살짝 눌러 놓을 뿐이라는 것(위의 책 103쪽)이다. 프로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인간의 공격 충동을 영구히 없앨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조절하는 노력은 가능한데 그게 바로 (교육을 포함한) ‘문화’다.

“인간의 공격적 충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격적 충동을 전쟁으로 발산할 필요가 없도록 그 충동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입니다.” (…) “문화 발전은 어떤 종의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비교할 수 있고, 신체적 변화를 수반하는 게 분명합니다. (…) 문화 발전에 수반되는 ‘신체적’ 변화는 두드러지고 명백합니다. 그것은 본능이 지향하는 목표를 차츰 다른 데로 돌리고, 본능적 충동을 억제합니다.”

프로이트가 볼 때 본능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방향을 조절할 뿐이다. 마크 트웨인이 볼 때 타고난 성질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관리할 뿐이다. 그래서 양자 공히 인간 형성의 주요 기제로 문화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격렬한 논란은 선행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무릇 선행이란 누구에게나 지지와 동의를 얻는 보편적 행위, 즉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우하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힐링’하는 그런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의 의미를 굳이 궁색하게 말하는 건 당시 미국 사회상과 관련 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 종교계의 비난이 두려워 초판 간행수를 최소화했다는 게 단서다. 19세기 미국은 청교도 영향 하에 있었으니까, 사고방식과 행동 전반은 종교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주홍글씨>(1850)가 그렇고,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 <크루서블(The Crucible)>(1998)의 어처구니없는 마녀사냥도 그렇다. 행동강령이 외부에서 주어지면 행동을 규제하는 건 당연지사고 규제의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니까.

“오로지 타인을 위해 선의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네, 온전히 우선 의무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 자기희생의 행위를 하라는 식의 요구를 내놓는 거야. (…) 인간의 내부에 깃든 절대 최고의 군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 인간들 모두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서 그 절대군주에게 호소하는 것이지. 그런데 거기가 틀리지. 다른 무리들은 교묘하게 속여서 몸을 바꾸니까.”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108쪽)

때문에 애써 밖에서 찾지 말고, 나를 진정 기쁘게 하는 행위를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타인이 느끼는 감사함, 고마움은 부차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일단 선행의 이유가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야 한다. 나아가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행에서 만족감(일종의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유도해야 한다.

“스스로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이웃과 넓게는 사회에도 선을 뿌리는 행위가 있어야 해. 그래서 그런 행위 속에서 우선 최대의 기쁨을 발견해낸다는 경지에 오르도록 뜻을 두어야겠지.” (위의 책, 106쪽)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선행에서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은 일정 수준의 도야를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기쁨이 반드시 선행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일상다반사니까.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자기만족의 전제 – 타인의 행복, 상호 존중

그런데 읽으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선행의 원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어떤 행위를 해야 나도 만족할 수 있으며, 또한 타인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타적 행위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주도적 행위라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 될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배님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가져왔다. 다소 길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어서 인용한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묻는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

이 가르침은 이미 서(恕)라는 글자 안에 다 들어 있다. 서(恕)는 마음(心)이 같다(如)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는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라’는 식의 긍정형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형으로 표현했을까? 공자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의 가르침 거의 모두가 부정형이다. 우선 긍정형으로 가르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자가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했다면, 세상 끝장나게 돌아간다. 알다시피 우리는 그리 도덕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힘이 센 나쁜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가진 좋은 것을 빼앗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공자가 거기에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하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빼앗게 될 것이다. 착한 사람은 자기 것을 남을 위해 내놓고 싶을 것이다. 마침 착한 사람과 게임을 하게 되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돌려받겠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을 만나서 자기 것을 내놓으면 그것으로 거래는 끝이 난다.

반면에 부정형으로 하면 사정이 바뀐다. 누구도 자기 것을 남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 따라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대로 남을 대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부정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나쁜 사람이 더러운 게임을 하고 싶더라도, 이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런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나쁜 짓을 그만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부정형은 무엇보다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남이 나에게 해를 끼쳤을지라도, 내가 보복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줘라’는 말의 숨은 뜻이다.”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박사), ‘철학 강의(15) 사람의 도움원리’ 중에서 인용, ☞바로 가기 다음(DAUM) 카페 ‘fridaybeer’)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인류사에 등장한 모든 참혹한 반인륜 사건, 인권침해의 공통점은 이 가르침과 상반된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강요에 의해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친위대장교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강제로 타인의 강압에 의해 성행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광주 인화학교 직원은 장애인 학생을 성추행한다.

결국 자기만족은 타인에게 억압이나 폭력이 아니어야 하며 타인의 행복이 전제될 때 비롯한다. 그리고 타인의 행복은 내 즐거움을 원해서 나 스스로가 선택한 행동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 주도적인 선행은 타인의 행복을 동반할 수 있다. 결국 이 원칙은 상호 존중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인권침해 예방의 원리로서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착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책 전반에서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변변치 못한 존재임을 누차 강조한다. 허나 책을 읽고 나서는 그 일관된 냉정한 태도야말로 인간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 위한 역설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정녕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다면 그런 주제에 관한 책을 쓸 의욕조차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마크 트웨인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붙어 있는 화려한 수사와 막연한 믿음을 제거해야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 섣부른 희망은 결국 착각인데 이 착각이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조급한 희망의 결과는 상반된 현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직면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결과적으로는 절망의 과잉 상태에 빠진다.

지난 대선에서 나는 정권의 변화를 염원했다. 하지만 야당이 실력 없고 긴장감 없고, ‘허당’이라는 인식은 이미 지난 총선과정에서 확인됐고, 그 불안의 전조는 민선 5기 지방선거의 승리를 해석하는 당시 야당지도부의 태도에서 조짐이 보였다(기존 여당이 싫어서 반대급부로 찍어준 것뿐인데 자기들이 잘해서 이긴 거라고 자화자찬 하다니!). 하지만 이 정권 하에서 사는 게 하도 고통이라 이번만큼은 무조건 야당 단일 후보에 ‘올 인’했다. 그 후 회자되는 단어는 ‘멘붕’이다. 대선 이후 한 달 넘게 미디어의 정치면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나는 뉴스를 다시 보는데 2주일 걸렸다).

어떻게 보면 멘붕은 좀 더 냉정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선택한 착각의 결과일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해서 조급히 선택하는 미완성의 희망은 후폭풍이 거세다. 그럴 바에야, 냉정을 유지하는 것, 그 버티는 힘이 오히려 희망의 싹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버팀의 시작은 나와 타자가 동시에 행복해지도록, 거기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 프로그램으로 제안해야 한다. 상호존중과 연대 그리고 냉정! 마크 트웨인의 독설에서 얻은 교훈이다.

1 reply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