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랑 원한다면, ‘하나 되자’고 하지 말자![철학자의 서재]

뤼스 이리가레의 <사랑의 길>

 

김세서리아(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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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사랑, 하나가 된다는 것?

 

사랑해요”란 말이 아직도 서툴고 낯설게 느껴진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사랑’은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말이 되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홈쇼핑 교환인의 멘트에서부터 유치원 아이들의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재잘거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광고 카피 등은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고 그 대상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지만, 사랑한다고 할 때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의미는 가까움, 친밀함의 의미이다.

이러한 때문에 우리에게 종종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 이해된다. 너와 나 사이의 다름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 그리하여 ‘우리’로 뭉쳐지고 거듭나는 것, 내 것이 네 것 되고 네 것이 내 것 되는 경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이해하는 속에서는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리되는 것, 그들 간의 차이가 남아 있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 사랑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한 때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불완전하다. 자연히 우리는 완전하였던 상태로의 복원을 소원한다.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하나됨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의 추구이다.

▲(뤼스 이리가레 지음, 정소영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플라톤의 <향연>(천병희 옮김, 도서출판숲 펴냄)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사랑에 대한 논리는 하나됨의 사랑을 보여주는 전형일 것이다. 사랑은 둘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며, 사랑에 의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힘입어 사랑이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리된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힘이라는 생각은 매우 일반화되어 있다. 그래서 그만큼 혼자인 사람은 완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데올로기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민족애, 동포애, 형제애는 각 구성원이 하나임을 과시하는 사랑의 표식이며,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큰 거부감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한 몸 이미지를 지닌 상상의 공동체가 된다.

모든 것이 동일하다는 것은 자주 혹은 때때로 가장 최상의 원리처럼 생각되곤 한다. 동일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 안에 어떠한 대립도 나타나지 않는 통일적인 힘을 상정하며, 또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힘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한 몸 되기의 힘이고, 사랑은 소통의 힘이며, 한 몸이 되어야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차이, 사랑

 

하지만 통일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인’하나’의 원리는 사실은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그래서’하나’가 되는 방식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이룰 수 없다. ‘하나’라는 영원하고 통일적인 힘은 유일무이한 진리를 등장시키고, 그것과 다른 종류의 것들은 강제로 흡수해버리거나 아니면 미리 마련된 기준에 의해 나머지 것들을 지평 밖으로 내쳐 버리는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하나 됨은 가까움의 극단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움을 최극단까지 몰고 가면 결국 그 가까움에는 어떤 거리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사실 진정한 가까움이나 다가감이라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그런 속에서는 진정한 소통을 이룰 수 없으며, 그러한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내 방식대로 길들이거나 나에게로 동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항간의 말은 이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나 됨이 폭력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부자가난한 자, 어린이와 어른,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 기득권자와 소외된 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여성과 남성, 제1세계 백인 중산층 여성과 유색 무산자 계급의 여성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사실은 평등이 아니라 평등을 가장한 차별이며 온전한 소통도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든다.

소통을 가장한 하나 됨의 막힘 논리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을 동일화하는 의식은 종종 노인들이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능력이나 잠재력을 얼마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노인과 젊은이 간의 소통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인생의 어느 특수한 단계에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여러 가지 특별한 의미를 무시하고 간과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 사실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을 동일화하려는 사고는 노인들의 특수성이나 능력을 평가절하하게 만든다. 노인들의 가치를 젊은 사람의 기준에서 측정하기 때문에 젊은이에 못 미치는 체력 혹은 능력을 가진 노인은 유용성의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노인들이 갖는 혜안이나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니는 감정의 특수한 효과들은 무시되고, 노년은 개인적인 발전이 침체되는 운명으로 낙인찍힌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일화하는 것,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동일화하는 것, 예컨대 젠더를 고려하지 않는 것 역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빚어낸다.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어린이를 그저 작은 어른으로 취급해버림으로써 어른의 일에 어린이를 가담시킨다. 또 장애인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비장애인과 동일화하는 것은 장애인의 상황을 더 열악한 데로 전락시켜 버린다. 남녀의 같음을 강조하는 것 역시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동일성 혹은 통일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는 젠더의 관점에서 가장 비판받을 수 있다.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합리적 이성이 전제된 남성의 유형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요구하면서 여성의 특수한 경험을 무시하게 되고, 그러한 속에서 남녀 간의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간격, 소통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자와 나의 접촉이 핵심일 것이다. 이때 가까움, 친밀성을 뒤섞는다든지 융합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차이, 다름을 인정하고, 거리두기, 간극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접촉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타자가 나와 차이난다는 것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타자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각각을 우리 자신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우리가 닿아왔던 그 부분을 파괴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방식을 이리가레는 감각적인 어루만짐, 가까움을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움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에 다다랐다가는 다시 그것을 닫고 물러나야 함에서 찾는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접촉, 어루만짐, 가까움 이런 단어 옆에 간격, 차이, 다름이라는 단어들을 함께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간격이란 이미 드러난 것을 통해 한쪽이 다른 한쪽을 그저 삼켜버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자신을 재발견하고 타자를 재발견하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것으로서의 간격, 안-사이, 사이-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에게 향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즉 나에게 익숙한 공간-시간이 아닌 다른 공간-시간들을 만들어야 한다.

소통이라는 말에는 모든 것이 교환되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포기되어야 함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고, 전체를 교환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은 소통을 불가능한 상태로 모는 것이다. 한쪽이나 다른 한쪽의 내밀함을 침해하지 않고 자유로운 공간을 지킴으로써 사이의 친밀함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은 소통의 방식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타자에게 말을 하면서도 어떻게 타자를 놓아둘 것인가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타자가 타자로 존재하고 계속 그렇게 남아 있도록 북돋아 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기 때문이다.

관계, 머물기 그리고 사랑의 도(道)
사랑하는 데에도 지혜가 필요하고, 일종의 도를 터득해야 할까? 뤼스 이리가레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사랑의 길>(정소영 옮김, 동문선 펴냄)에서 제시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두 부분이 갖는 관계의 원래 자리를 일구어야 하며, 그 일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고, 이 책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 배경을 그려 보이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리가레에 의하면 이러한 방법은 우리가 현재 믿고 쓰는 묘사적이고 서술적인 언어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언어들로는 이미 존재하는 인물이나 사물, 이미 과거의 사실이거나 말해진 것을 통해 과거로 밀려난 인물이나 사물에 상응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무언가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일, 과거의 것과 현재나 미래의 것이 서로 만나는 장을 마련하는 일, 또 그것을 표현할 말이나 몸짓, 맞아들이고 축하하며 지금 현재와 미래에 그것을 일굴 만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리가레에게서 이러한 작업은 인간 되기, 관계 맺기의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은 유일하고 동일한 하나의 주체와 함께 전유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전체와의 연결이 아니다. 인간 되기, 관계 맺기란 맹목적으로 자신을 전체 안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를 공들여 만들어온 주체가 스스로 그 일을 해온 방식에 대해 질문하고, ‘어떻게’라는 방식을 모두 소진하지 않는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모종의 제스처가 없이 타자와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가레는 타자와의 관계를 이루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몸짓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 나아가 자신의 존재에 상응하는 실제적 내용을 표현할 제스처, 관계에 들어서기 위해 필요한 차별화된 세계를 타자에게 제안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체가 타자에의 친근함, 세계에의 친근함을 찾는 것은 거리를 극복함으로써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 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다르게 자신의 자율성 속에서 존재하는 능력을 통해서이다. 또한 이것이 생겨나는 데 있어서 타자의 역할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일어나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임을 밝힌다. 이러한 속에서 주체는 구성되고 타자 역시 구성된다. 주체는 자신을 인간으로 구성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주관성의 객관성을 구성한다. 타자를 위한 자리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자리를 자신 안에 마련하면서 인간다움을 이루어낸다.

이렇게 보면 사랑이란 인간 되기의 작업이며 이는 상호간의 차이를 존중하는 두 주체에 의해 건설된다. 나와의 관계에서 네가 생겨나려면 나는 타자가 신뢰할 수 있는 그의 존재에 대한 성실함을 확보해야 한다. 그 시간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는 너와 나 자신 모두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함께 전유하기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동반한다. 타자에게 다가가는 법, 우리 안의 타자와 우리 사이의 타자와 함께 갈 가까움의 장소를 마련하는 법, 그리고 자신 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그것이 사랑의 도이며, <사랑의 길>이 보여주는 하나의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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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6)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6)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2)

 

 

두 차례에 걸친 그리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격노한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원정을 준비했으나 끝내 숨을 거두고 이후 기원전 480년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30만의 병력과 1000척에 가까운 군함을 이끌고 다시 그리스를 쳐들어 왔다. 이것이 3차 페르시아 전쟁이다. 그리스 북방의 마케도니아로부터 남하해 온 페르시아군을 맞아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라이(Thermopylai)에서 첫 방위전을 펼쳤다. 그러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 7000명 모두가 마지막 한명까지 목숨을 바쳐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페르시아 대군의 위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테르모필라이의 방위전을 돌파한 페르시아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마침내 아테네까지 함락되면서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전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아테네를 구한 사람이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s)이다. 페르시아군은 남쪽 해안 루트를 통해 해군력을 총동원해 아테네를 굴복시키기 위한 마지막 총공세를 펼쳤는데 데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한 아테네 해군이 페르시아의 대함대를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해 페르시아 해군력이 거의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기원전 480년에 있었던 유명한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다. 그런데 살라미스에서 아테네 해군의 대승은 단지 아테네 해군의 전술능력과 용맹성으로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사전 준비와 행운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1차 침공이후 해군력의 증강이 요구되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라우리온(Laurion) 광산에서 엄청난 양의 은광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얻어진 재화 모두를 군함건조에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고대 이래 나라건 개인이건 큰 부가 생길 경우 최대한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게 오래된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부유한 자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과도하게 요구되어 사회 문제가 된 공적 기부제(leitourgia) 또한 원래는 그러한 전통적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적 분배 대신 군함 건조에 자금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탁월한 설득과 그에 대한 시민들의 지혜로운 동의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군함의 건조를 계획하면서 특별히 해상에서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아테네 해군 고유의 삼단노 군선(tri?r?s)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해전에서는 상대 함정을 수직으로 부딪쳐 파괴하는 것이 최상의 전술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크기가 크면서도 기동력이 빠른 배가 필요했다. 적은 수의 군함으로 많은 적함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새로 건조되는 삼단노 군선은 당시로선 아주 큰 규모인 길이 40미터, 폭 4~5미터의 거대군함으로 만들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 노(櫓)의 숫자를 늘리고, 노수(櫓手)들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배의 하부를 3단으로 설계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해군이 주로 전투원으로 구성된 750척의 배를 구비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아테네 해군은 380척에 불과했지만 승조원의 절반이 노수들이었다고 하니 가히 군선의 기동력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200여척의 배를 잃고 크게 패전한 후 크세르크세스 1세의 뒤를 쫓아 퇴각했고 그리스 본토에 아직 머물러 있던 나머지 병력도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에 의해 기원전 479년 프라타이아에서 최종 격퇴되면서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데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5-459)

고대 아테네의 주력 군함 삼단노 군선(tri?r?s)

 

그런데 페르시안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계기가 된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대승은 흥미롭게도 차츰 아테네 정치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작용하였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아테네에서 정치적 발언권과 시민으로서의 긍지는 전쟁 기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시민의 수만 해도 4만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전쟁이 끝난 후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고양되어 있었을까 짐작이 가고 남는다. 게다가 승조원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노수들은 무구를 갖출 재력도 없어 그 동안 전쟁에 참전할 능력도 없었고 그에 따라 어떠한 시민적 명예도 누릴 수 없었던 무산 시민들이었으니 그들의 자부심은 가히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감격적이었을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러한 고양된 시민의식은 그대로 아테네의 정치 및 권력지형에 반영되어 마침내 아테네 시민이면 귀족이건 무산 시민이건 간에 어떠한 차별이나 제한 없이 모두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의 힘은 날로 커져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최고의 영웅으로 최고의 권력에 오른 테미스토클레스마저도 도편추방투표를 통해 국외로 추방할 정도로 그 위세를 발휘하였다. 물론 테미스토클레스의 탄핵이 정치적 음해가 개입되어 이루어진 누명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어쨌거나 정치적 사안과 관련한 결정과정에서 정치적 주체로 떠오른 시민의 힘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아테네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전 461년 급진적인 민주정을 펴다 암살당한 에피알테스(Ephialt?s)에 이어 아테네 민주정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페리클레스(Perikl?s)이다. 페리클레스는 이후 30년 가까이 오랫동안 아테네의 지도자로서 군림하면서 아테네의 민주정이 확고하게 제도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도편추방 당하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며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인격과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장군직에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플라톤은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의 정체를, 사람들은 민주정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민중의 찬성이 수반된 귀족정이라고 평하고 있다.([메넥세노스] 238c,d)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치세는 아테네로서는 최고의 번성기였을지는 몰라도 그리스 전체역사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의 몰락을 앞당긴 시대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 종전 이 후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인접 폴리스들을 끌어들여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맹주로 자처하고 군자금을 거둬 비축해왔으나, 그 비용을 아테네의 신전 건축과 정치수당을 지급하는데 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반발하는 폴리스들을 군사력으로 제압하여 그리스 사회를 아테네 중심으로 제국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상징으로 꼽히는 파르테논 신전 등 화려한 건축물도, 인류의 빛나는 유산으로 평가되는 여러 문학적·철학적 성취도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을 실질적으로 유지시키고 있었던 시민들의 여유와 경제적 번영도 실제로는 모두 다른 폴리스의 희생은 물론 시민들을 대신하여 아테네 경제를 떠받들고 있던 노예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민중최고재판소 재판관을 추첨하는데 쓰였던 도구들

 

페리클레스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패권적 제국주의의 경향은 결국 페리클레스 사후 스파르타의 반발을 야기하여 장기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휩쓸리게 함으로써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사회 전체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아테네의 민주정 또한 내전을 겪으면서 선동정치가의 득세 등 퇴행을 거듭하여 일시적으로 과거 정체로의 복귀를 꿈꾸는 과두주의자들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내전이 끝난 직후에는 30인 참주들에 의한 비극적인 폭압정치가 자행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참주정은 민주정으로 곧바로 복귀되었지만 아테네 시민들의 민주정에 대한 신념과 자부심은 이미 전성기를 이루었던 페리클레스 치세에 비해 현격하게 저하되어 있었다. 역사를 통해 부르크하르트 등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아테네 민주정의 치명적 과오로서 지적되고 있는 뮈틸레네인들에 대한 처벌을 둘러싼 민회의 결정, 아루기누사이 해전 장군들에 대한 처형사례, 니키아스의 주저가 빚어낸 시켈리아 해전의 참극,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처형 사례는 모두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또는 그 직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서 조차 아테네 민중들이 선동정치가(D?mag?gos)들에 의해 휘둘려 비합리적이고도 어리석은 판단과 광분으로만 일관했다고 여기는 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앞에서의 사례들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평가 또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이른바 선동정치가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수공업자·상인 등 평민 출신으로 처음 등장하여서는 원래 이름 그대로 민중(d?mos)의 의견을 대신 앞서서 표현하고 선도하는(ag?gos) 긍정적인 역할도 하였고, 민회의 결정과 관련해서도 민회가 일년에 40차례이상 수십 년에 걸쳐 수천 건 이상을 다루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위에서 알려진 몇 가지 사례들은 오히려 예외적인 소수의 오류들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 민중들이 보여주었던 민회에서의 열정과 전장에서의 헌신적인 용감성은 모두 맥동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움직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기간 동안 시민대중들 또한 의연하게 절제와 지혜를 발휘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특히 30인 참주들을 축출 직후 극심한 갈등국면에서 아테네 시민 전체의 평화를 위해 아테네 민중들의 화해 조치와 처신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아테네 시민의 성숙된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처형과 관련해서도 당시의 아테네 민중의 정서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정황상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라는 장기간의 비극적인 내전을 치르면서 아테네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종전 직후 들어선 30인 참주정은 아테네 민중의 비극적이고도 음울한 정서를 치유하기는커녕 폭정과 정적에 대한 대학살을 통해 민중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복구된 민주정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정황을 전환시켜줄만한 어떤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소크라테스만큼 호재가 될 만한 인물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들의 측근이었고 민주정의 이데올로그들인 소피스트들에게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그가 말하는 다이몬(Daimon)이라는 신령은 아테네인들의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이교(異敎)신이라 여겨질 만큼 아주 낯선 것이기도 했다. 결국 민주정의 지도자들의 기대와 의도대로 민중들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자신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취할 수 있는 희생 제물로서 암묵적인 교감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황이 시대의 현인 소크라테스까지 처형한 아테네 민중과 민주정의 처사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 등 일부 부정적인 사례들을 빌미로 아테네 민중들이 오랜 기간 이룩해온 정치적 이념 즉 ‘정치적 결정 및 재판에 대한 민중의, 민중에 의한 지배’까지 일거에 매도해버리는 처사 또한 부당하다. 플라톤의 [변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은 일단 절차상으로 보면 이른바 민주정이 이룩해온 전통적인 법적 절차에 의거해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피고인 소크라테스에게도 변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허용되었다. 아마도 [변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재판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발언을 기록하였다고 하면 우리는 인류역사를 통해 고·중세 시기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 고유의 공개적이고도 민주적인 재판과정의 전모를 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아테네 말기의 정치적 정황이 아테네 민주정과 재판에 대한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기 했지만 사실 아테네 민주정이 오랫동안 지향하고 견지해온 재판의 이념 자체는 고대 세계의 재판 그 어떤 사례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공정성을 수반하고 있었다. 민중 최고 재판소(heliaia)의 경우 기본적으로 재판관을 당일 추첨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의 전 과정에서 원고의 논고는 물론 피고가 의견과 이의를 제의할 수 있는 기회가 최대한 허용되었고 재판관들 또한 재판과정 내내 이의의 추가적인 존재 여부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면서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는 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아테네 민주정이 발전시켜온 또 하나의 민주적 이념과 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상 우리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래된 민주주의의 이념적 지표로서 다수 대중들에 의한 다수결의 원리를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꼽는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초에는 다수결의 원리에 앞서 본질적으로 다수 의결과 관련한 일체의 사안들에 대한 정보의 공유 그리고 그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토론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뿌리에는 다수결과 더불어 합리적이고도 공개적인 토론의 정신이 핵심적인 지배원리이자 이념으로서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하에서 죽임을 당했고 플라톤은 그 민주정을 비난하였지만 그들 사상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치열한 토론 정신은 다름 아닌 백가쟁명의 민주정 아테네의 토양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의 측면에서도 그와 같은 정보의 공유와 토론의 정신은 다수결의 원리의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필수적이고도 핵심적인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의 이념은 거대 이익집단의 정보조작에 의해 민중의 진정한 뜻이 왜곡되기 일쑤인 현대 민주주의에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준다. 진실은 다수결의 지지를 받지 않아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선과 덕을 가져다주지만 왜곡된 정보와 거짓에 기초한 다수결은 그 자체로건 결과적으로건 그 결의에 지배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정이 고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기 힘든 그와 같은 빛나는 이념과 지향을 가지고 있었을 지라도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비교해 보면 근본적으로 아주 많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간과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한계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차이는 현대의 민주정이 대의제에 기초한 간접 민주정을 취하고 있는데 비해서(물론 일부 국가에서 직접 민주정의 요소를 이용하고 있고 또 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직접민주정의 시도 또한 논의되고 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직접 민주정 체제였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아테네의 최고 결정 기관인 민회의 경우 18세 이상의 성년 남자 시민이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 누구든 제한 없이 평등하고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표결은 오늘날과 달리 비밀 투표가 아닌 거수로 정해졌지만 도편추방여부 등 일부의 경우는 비밀투표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민회는 1년에 40회 정도 열렸고 국가 중요사안 일체가 심의되었다. 아무리 직접민주정이라고는 해도 열흘에 한번 정도 열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아테네 민주정이 정치 기능에 있어 정책의 적극적 수립보다는 사법적(司法的) 성격에 크게 치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민회는 워낙 많은 사람들의 참석을 요하고 도심에서만 열려 처음에는 정족수를 채우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페리클레스가 민회 참석자들에게 일상인들의 하루 수입에 준하는 정치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이후 도심에 살든 시골에 살든 생업까지 접고 회의에 참석하는 등 참석률이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고 시민의식은 물론 정치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관심 또한 그 만큼 높아졌다.

그러나 여성이나 거류외인 그리고 노예에게는 여전히 참정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인구분포로 보면 인구의 40%정도에 달하는 노예를 포함하여 이들의 수가 전체인구의 70-80 %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민주정이라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민주정은 사회경제적으로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노예들의 희생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시민들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인 아테네 경제활동의 대부분을 노예들이 떠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수당 또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상당부분 델로스 동맹 기금에서 유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정당성을 결여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아테네 민주정은 인접 폴리스의 희생은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기층 민중에 대한 착취를 기초로 성립한 특권화된 과두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제가 아테네뿐만 아니라 고대세계 전반에 유포된 제도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곧 아테네 민주정의 본질적 한계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에서는 대부분의 관직이 추첨으로 이루어져 정치참여 또는 권력행사에 철저히 특권화가 배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주요 행정직의 경우는 미리 기본적인 자질을 심사(dokimasia)했으며 특히 가장 중요한 군사직책 즉 장군(strat?gos)이나 재정업무에는 고도의 전문성을 인정하여 선거를 통해 선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임도 가능하였다. 페리클레스가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장군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최고 사법 기관으로서 민중 최고 재판소에서 판결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배심원(전문적인 재판관이 따로 없었으므로 이들이 곧 재판관(dikast?s))은 일관되게 그 재판 당일 즉석에서 추첨에 의해 선발하여 누구도 사전에 뇌물수수나 모의가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338)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정치 수당의 지급도 중지되고 아테네의 경제상황 또한 날로 악화되어갔다. 앞장의 논의들에서 살펴보았듯이, 특히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테테스 층의 귀족들에 대한 공공연한 기부요구, 상습적인 무고(誣告)를 통한 이권수수가 횡행하면서 점차 아테네의 공동체 정신도 사라져갔고 인접 폴리스와의 잦은 전쟁과 정책에 대한 대립과 분열로 민주정의 기본골조도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북쪽 변방국가에 불과했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새로운 강자로 부각되면서부터 아테네는 친(親)마케도니아파와 반(反)마케도니아파로 분열되어 끊임없이 정쟁만을 일삼다 기원전 350년쯤에는 제국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진해졌다. 그 싸움의 중심에는 마케도니아와 평화를 유지하면서 아테네의 재건을 도모하려는 이소크라테스(Isokrat?s)와,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자유를 위협하는 정복자로 간주하고 그와 싸울 것을 주장하는 데모스테네스(D?mosthen?s)가 있었다. 끝내는 데모스테네스의 주장에 따라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에서 필리포스(Philippos)왕과 전쟁을 벌이지만 처절한 패배를 맞이함으로써 해상왕국에로의 복귀를 꿈꾸던 아테네는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한 채 마침내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

고전기 그리스는 아테네의 패권적 제국주의가 빚어낸 내분으로 결국 몰락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것은 적대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군사적 팽창주의로 이어졌다. 도시국가의 철학 또한 오랜 전란기를 통해 안심입명의 개인주의로 해체된 이래 헬레니즘과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표징되는 또 다른 세계주의로 재편되었다. 때마침 근동 지방에서도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폐쇄성을 넘어 보편주의를 기치로 종교적 세계주의가 등장하였다. 우연찮게도 기원전후에 등장한 이러한 세계주의적 경향들은 마침내 하나의 세계사적인 흐름으로 통합되면서 제국주의 거대 로마로 흘러 들어갔다.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끝-)

 

우리에게 ‘철학함’이란 무엇인가?[3월 월례발표회]

?[2013년 3월 월례발표회]

 

우리에게 ‘철학함’이란 무엇인가?

후기: 박영균 (건국대 HK 연구교수)

 

 

 

윤구병 선생의 <철학을 다시 쓴다> 강연을 들은 후 …

 

2013년 3월 8일 오후 5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에서는 <철학을 다시 쓴다>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열렸다. 이번 강연회는 윤구병 선생이 지난 2월 12일 보리출판사에서 출판한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라는 책에 담긴 그의 사유를 함께 나누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그의 책, <철학을 다시 쓴다>는 <시대와 철학>에 연재되었던 “있음과 없음에 관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 <있음과 없음>이라는 책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윤구병 선생은 한철연의 역사이기도 하다. 1987년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이고자 했던 젊은 소장 철학자들이 모여 보수철학계에 반기를 들고 한철연의 창립을 모색하던 시절, 그 주춧돌이었을 뿐만 아니라 1989년 한철연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그 후로 장시간 단독대표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당시, 청춘의 열정 속에서 반역의 철학을 꿈꾸었던 선배들도 이제는 머리 희끗한 장년이 되었으며 한철연의 회원들도 ‘출애굽세대들’로 채워졌다. 그것이 역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당에는 삼삼오오 모여든 40-50여 명의 청중들이 강연을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는 보리출판사 관계자들과 선생을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연탁자 위엔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었고 윤구병 선생은 탁자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칠판 위에 ‘時空間 四次元 連續體의 存在論的 根據’라고 썼다. 순간적으로 ‘뭐지?’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어 선생은 이렇게 써야 사람들은 유식한 철학논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우리말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수입된 언어라고 말을 하면서 다시 지웠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

우리말로 하는 철학, 그것은 윤구병 선생이 평소에 추구해왔던 길이기도 했다. 그는 ‘서양고대의 존재론’에 대한 탐색을 우리말 속에서의 사유하는 존재론으로 바꾸어놓았다. 존재와 무 대신에 ‘있음’과 ‘없음’의 철학을 사유하는 것도 모두다 이 때문이다. 우리는 평상시에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와 같은 말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있음은 있음이고 없음은 없음’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으로부터 운동과 생성, 그리고 ‘함’과 ‘됨’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참이며 ‘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거짓이다. 마찬가지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좋은 것이며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을 때’ 그것은 나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식민지 지식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로서,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을 가려낼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일깨울 수 있고, 거짓에 맞서 좋은 앞날을 가꿀 올곧은 뜻을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한철연의 정신 또한 이로부터 출발했었다. <시대와 철학> 두 번째 창간호에서 한철연은 “현실로부터 출발하되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 초월적인 선천적인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독백이나 철학자들끼리의 속삭임, … 외국에서 차용”하기만 하는 반시대적이고 현학적인 철학들을 비판하면서 “주체적 철학”의 길을 주창했다. ‘주체적 철학’은 근원적 실천이자 생산자적 철학이며 비판적 철학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보적 핵심을 포착해 내고 이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시대에 되돌려줌”의 철학이다.

그 선언이 있은 이후, 벌써 20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 동안 우리는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경험했으며 위로부터 진행된 수동혁명으로서 ‘포스트 87년 체제’와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맑스주의’, ‘포스트 구조주의’를 거쳐 다시 2013년 현재 1972년 ‘유신’의 퍼스트레이디가 또 다시 대통령이 된 2013년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한철연은 무엇을 했는가? 돌이켜 보면 한철연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신에 한철연은, 그 운동을 가능케 했던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으로 철학함의 의미를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윤구병 선생의 이번 강연과 2월에 있었던 이규성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사론> 강연은 바로 이런 ‘한국에서의 철학함’의 의미를 2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되살리는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1994년 내가 처음 낙성대역에 있었던 한철연의 문을 두드렸을 때, 비좁고 초라해보였던 한철연은 철학적 사유함을 추동하는 열정과 낭만, 분노와 깨워있음이 있었다. 그 때 우린 분노의 술잔과 탄식의 넋두리 없이 철학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때 시대모순에 저항하는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이라는 모토와 함께 ‘한국에서의 철학함’이라는 ‘주체적 철학함’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 이후, 한철연에서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도, ‘한국에서의 철학함’도 한철연의 기조가 되지는 못했다. 철학을 다시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은 ‘없어야 할 것들이 있음’에 대한 분노와 ‘있어야 할 것들이 없음’에 대한 탄식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간 우리는 밀려들어오는 서양철학과 옥죄여오는 현실 속에서 ‘있음’을 사유하고 ‘없음’의 부정적 몸짓이 가지고 있는 ‘일깨움’의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그 속에서 ‘없어야 할 것’과 ‘있어야 할 것’들, 그리고 ‘함’과 ‘됨’을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강연을 통해서 다시 부여잡아야 할 화두는 ‘한국에서의 철학함’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탄생했던 많은 진보학계들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늘날 명맥을 유지하기도 버거워하고 있다. 그들은 한철연보다 먼저 ‘비상’했으며 먼저 ‘추락’했다. 그러나 한철연은 가장 늦게 날개를 폈으나 아직도 그 날개짓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을 지나 어두운 ‘밤’을, 그것도 동 트기 직전에 가장 어두운 칠흑의 밤을 잠 못 든 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다시 ‘한국에서 철학함’을 보았다. 한철연의 20년 역사만큼이나 긴 시간이 흘러 이번에 우리는 다시 이규성 선생을 통해서 ‘시대모순’과 싸워야 했던 ‘한국현대철학의 사상사적 고뇌’를, 그리고 윤구병 선생을 통해서 서구의 존재론이 한국적 사유의 독특함과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주체적 철학함’의 열정과 길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1980년대 중반 한철연이 시작했을 때와는 다른 시작이며 다르게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그 다른 시작을 알리는 것은 ‘한국에서 철학함’이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그것을 오늘에 되살린 그들이 아니라 동일한 짐을 지고 있으나 그들과 다른 철학과 경험 속에서 살아왔던 한철연의 ‘동학들’이다. 거기에는 ‘하나(있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없음’에 빠져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디우가 말했듯이 ‘철학’은 항상 소피스트나 라캉과 같은 ‘반철학’과 함께 해야 한다. 왜냐 하면 다수만이 생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에 대해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단지 선언할 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 ‘선언’과 함께 이 새로운 시작을 사유해야 한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

이규성 교수의 『한국현대철학사론』출판 기념 좌담회를 보고[2월 월례발표회]

?[2013년 2월 월례발표회]

 

이규성 교수의 『한국현대철학사론』출판 기념 좌담회를 보고

후기: 김정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월 16일 저녁 이화여대 이규성 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최근 나온 『한국현대철학사론』의 출간기념 좌담회였다. 좌담회는 이름처럼 이병창 교수의 진행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필자 역시 전공이 한국철학이지만 좌담회의 주제는 낯설었다. 당연했다. 필자의 관심사는 주로 주자학과 조선에 머물러 있었고, 기존에 기술된 한국철학사 역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함께 더 이상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 싶어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분야였다.

이규성 교수의 문제제기는 너무나 명확했다. “한국 근현대에도 철학이 있었는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의 철학사는 보통 19세기 말에서 끝나고 만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와 침탈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형태의 연구’의 모습으로 남아있지는 않아도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이 어떤 사유도 전개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 흔적은 남아있을 것이다. 학계는 이러한 문제점을 항상 안고 있었음에도, 일부 연구들을 제외하고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저작이 거의 없었다. 사유의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되지 않으면 단절되고 만다. 이 단절은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끊어짐을 의미한다. 책은 이러한 사유의 단절된 공간을 채워줄 의미 있는 방대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강의에 귀를 기울이며 가장 먼저 들었던 느낌은 인물들에 대한 낯설음이었다. 상대적으로 익히 들어보았던 박종홍과 함석헌도 있었지만, 이돈화, 김원주, 신남철, 박치우 등의 인물들은 관련 시대의 전공자들이 아니면 자주 접하기 어려웠던 인물들이다.

 

이교수가 ‘관점’이라는 제목으로 좌담회에서 발표한 글은 19세기 말 이후 대내외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당시는 안으로는 노론 중심의 부패 무능한 지배집단과 민중의 불평등한 분열이 첨예화되었고, 밖으로는 중국의 아편전쟁이 보여주듯 제국주의 열강의 군사적 자본주의가 가하는 위협이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정치체제와 경제제도에 대한 고민과 군사적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1운동,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제기되었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사진: 강지은 정보자료부장

여기에서 나아갈 수 있는 철학적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관점은 자유민주주의와 과학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대유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적 해명을 통해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이상은 우주와 인생의 연관성을 사유하는 우주론적 인생관과도 결합할 수 있다.

둘째는 고상한 낭만주의적 경향이다. 19세기 말 유럽과 1920년대 한국의 개인주의 미학사조에서 보이듯, 감각적 표면 인상에 집착하는 미적 유아론으로 발전되어 갔다. 인상주의적 낭만주의는 모든 억압적 제도로부터 탈출극에 집착하는 무정부주의적이고 퇴폐적인 허무주의로 발전해 나아간다. 권력의 심리적 원천이 되는 책임성으로부터의 탈출은 낭만주의의 독특한 비애감과 결합하여 개체적 자아에 몰입하는 인격형성을 촉진하였다.

셋째는 급진주의이다. 한국의 급진주의는 신남철과 박치우에게서 나타나듯 인간성의 문화적 향상과 민주와 자주의 제도적 실현을 종합적으로 구성하려는 건국방략을 추구했다. 이는 자기변형과 사회변형을 지향하는 맹자적 내외합일적 의지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신칸트주의의 <파우스트적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인간적 완성을 지향하는 부정과 형성의 의비를 알려주었지만, 한국의 급진주의는 잠시의 수동적 타협을 허용할 수 있는 변증법적 종합보다는 부단한 능동성에 의거한 부정을 말하는 파우스트적 정신에 더 매료된다.

러셀은 과학적 세계상과 우주적 연대성[노장(老莊)사상과 유럽의 신비주의]의 결합을 통해 ‘어른스러운’ 인격을 함양하는 것을 ‘유치한’ 유럽인의 삶의 양식을 개선하는 길로 줄곧 주장했다. 이교수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송대 유학자인 주희(朱熹)의 체용(體用) 개념을 빌려 진정한 철학이란 무엇인지 정의한다. 진정한 철학은 자기변형을 통한 전인적 인간성의 형성을 체(體)로 하고 사회이상을 향한 제도적 구성을 용(用)으로 하는 세계상을 지향한다. 주희는 스승인 이연평(李延平)이 우주적 평등성(同)에 몰입하여 사물의 다양성(異)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자, 점차 용(用)의 영역에 관심을 두면서 유체유용(有體有用)의 세계를 지향한다. 여기에서 우주적 평등성은 곧 모든 사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체(體)의 측면을, 사물의 다양성은 용(用)의 측면을 말한다. 다만 주희는 춘추사관과 중화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주희의 유체유용의 정신에 대해 이 교수는 오늘의 급진주의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교수는 바로 이러한 유체유용의 정신을 20세기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해낸다. 신남철과 박치우, 박종홍과 함석헌은 물론이고, 신채호와 박은식 역시 마찬가지다. 신채호의 경우, 대종교가 중시한 독립적 자아관을 대승불교를 통해 발전시켜 우주의 무수한 사물들과 자아의 평등성을 체화한 원융한 자유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평등으로 이해하는 혁명적 실천을 통해 해방 한국의 건국방략을 모색했다.

이러한 유체유용의 관점은 한국 현대철학을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적 기준이 될 수 있다. 유체유용의 내외합일적 관점은 현대적 맥락에서 과학과 형이상학의 접점을 찾는 노력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주와의 연관에서 지고의 자유를 추구하는 의지를 체로 하고 유아론적 경험주의를 넘어서 사회변형을 도모하는 의지를 용으로 하는 의지의 철학을 형성하려 할 것이다. 이 ‘관점’은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존재의미를 추구한다.

단순히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을 재단하여 연대순으로 배열하는 데 급급한 기존의 사상사 저작들에 비해, 철학현대의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을 분석해내면서 유체유용이라는 공통된 정신을 발견하고, 이를 기준으로 21세기의 철학이 나아가야할 지평을 제시했다는 점은 <현대철학사상사론>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것은 첫걸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 저작을 시발점으로 다양한 ‘관점’이 나타나고 공유되어야만 한다. 물론 의문이 남는 부분도 있다. 이교수가 제시한 ‘유체유용’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서구에서 말하는 과학과 정신의 결합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혹 그 이상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 여부는 여전히 궁금한 부분이다. 좌담회의 시간이 짧고, 필자의 이해가 부족하여 발생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찬찬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기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키워드 100가지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에 대해 함께 고민해 봅니다.

 

?현대 사회주의의 몰락 ?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 9?11 사태 이후 체제에 대한 관심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우리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 자본 ?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고 우리 일상과 주거, 우리 마을과 공동체, 우리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같이’하는 것의 ‘가치’를 키워드 100가지로 새롭게 인식해 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함께 디자인할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운영기간 : 2013년 4월 4일(목) ~ 7월 18일(목) (총 15강)?????? 매주 목요일 19:30~21:30
?????| 장?? 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1층 이야기방
?????| 대?? 상 : 성인, 50명
?????| 주?? 최 : 광진정보도서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건국대학교
?????| 주?? 관 : 문화체육관광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
?????| 후?? 원 : 알렙출판사
?????| 신청방법
???????- 신청기간 : 213년 3월 23일(토) ~ 마감 시
???????- 신청방법 : 선착순 방문 접수 및 전화접수
???????- 신청장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2층 종합안내
??????? 수강자에게 수료증 발급
??????? 보증금 : 30,000원(주관부서 지침 사항, 개강일 납부, 종강 시 환불)
?

???????※ 기타문의 : 02-3437-5092(내선 4107번) / http://www.gwangjinlib.seoul.kr

 

 

○ 커리큘럼 안내

강의일자 주제 주요내용 강사
4월? 4일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특징과 근대적인

???세계체계론

김성우 교수
4월 11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1 ?- 근대, 노동의 의미란?

?- 소비와 생산이란 무엇인가?

박영균 교수

(건국대 HK교수)

4월 18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2 ?- 물질노동과 비물질 노동이란?

?- 현재, 우리의 노동은 어떻게 열정이

???될 수 있는가?

4월 25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1 ?- 가치 vs 교환가치 vs 잉여가치 김우철 교수

(호서대 외래교수)

5월? 2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상품-화폐의 등장과 근대적 ‘개인’

?- 현대에서 가치 개념의 변화

5월? 9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1 ?- 노동의 가치와 소외, 가치와 가격 이재유 교수

(건국대 외래교수)

5월 16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2 ?- 노동의 종말인가 소유의 야만인가

?- 현대적 노동가치의 재구성

5월 23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1 ?- 화폐, 자본, 이윤을 발견하자

?- 권력이 자본주의를 만났을 때

이순웅 교수

(한철연 연구협력위원장)

5월 30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생산-화폐-권력의 결합체, 자본주의

?- 현대에서 자본주의 아닌 것(대안)은?

6월 13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

니스를 생각한다 1

?- 당신에게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인가?

?- 당신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박민미 교수

(동국대 외래교수)

6월 20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

니스를 생각한다 2

?- 주식회사 vs 조합회사(노동조합)

?- 공동체 자본, 지역화폐 등등

6월 27일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세계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 삶-정치의 대안들 : 네트워크 정치, 이웃

???과의 연계, 인권주장하기 등

이정은 교수

(연세대

외래교수)

7월? 4일 여성 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 한다 ?- 비자본주의적 경제들의 유령 불러오기

?- 여성의 관점에서 본 대안도시는?

이현재 교수(서울시립대

HK 교수)

7월 11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 ?- 생활 속에서 ‘협동’이란 무엇인가

?- 한국형 협동조합의 본산지인 원주 사례

???분석

최종덕 교수

(상지대 교수)

7월 18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2 ?- 육아와 여성

?- 협동성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2013년 1학기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 시민대학] 참가자 모집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기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키워드 100가지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에 대해 함께 고민해 봅니다.

현대 사회주의의 몰락 ?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 9?11 사태 이후 체제에 대한 관심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우리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 자본 ?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고 우리 일상과 주거, 우리 마을과 공동체, 우리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같이’하는 것의 ‘가치’를 키워드 100가지로 새롭게 인식해 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함께 디자인할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운영기간 : 2013년 4월 4일(목) ~ 7월 18일(목) (총 15강)?????? 매주 목요일 19:30~21:30

| 장?? 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1층 이야기방

| 대?? 상 : 성인, 50명

| 주?? 최 : 광진정보도서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건국대학교

| 주?? 관 : 문화체육관광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

| 후?? 원 : 알렙출판사

 

?????| 신청방법
???????- 신청기간 : 213년 3월 23일(토) ~ 마감 시
???????- 신청방법 : 선착순 방문 접수 및 전화접수
???????- 신청장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2층 종합안내
??????? 수강자에게 수료증 발급
??????? 보증금 : 30,000원(주관부서 지침 사항, 개강일 납부, 종강 시 환불)

 

※ 기타문의 : 02-3437-5092(내선 4107번) / http://www.gwangjinlib.seoul.kr

 

 

○ 커리큘럼 안내

강의일자 주제 주요내용 강사
4월? 4일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특징과 근대적인???세계체계론 김성우 교수
4월 11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1 ?- 근대, 노동의 의미란??- 소비와 생산이란 무엇인가? 박영균 교수(건국대 HK교수)
4월 18일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 2 ?- 물질노동과 비물질 노동이란??- 현재, 우리의 노동은 어떻게 열정이???될 수 있는가?
4월 25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1 ?- 가치 vs 교환가치 vs 잉여가치 김우철 교수(호서대 외래교수)
5월? 2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상품-화폐의 등장과 근대적 ‘개인’?- 현대에서 가치 개념의 변화
5월? 9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1 ?- 노동의 가치와 소외, 가치와 가격 이재유 교수(건국대 외래교수)
5월 16일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보자 2 ?- 노동의 종말인가 소유의 야만인가?- 현대적 노동가치의 재구성
5월 23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1 ?- 화폐, 자본, 이윤을 발견하자?- 권력이 자본주의를 만났을 때 이순웅 교수(한철연 연구협력위원장)
5월 30일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2 ?- 생산-화폐-권력의 결합체, 자본주의?- 현대에서 자본주의 아닌 것(대안)은?
6월 13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1 ?- 당신에게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인가??- 당신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박민미 교수(동국대 외래교수)
6월 20일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2 ?- 주식회사 vs 조합회사(노동조합)?- 공동체 자본, 지역화폐 등등
6월 27일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세계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삶-정치의 대안들 : 네트워크 정치, 이웃???과의 연계, 인권주장하기 등 이정은 교수(연세대외래교수)
7월? 4일 여성 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 한다 ?- 비자본주의적 경제들의 유령 불러오기?- 여성의 관점에서 본 대안도시는? 이현재 교수(서울시립대HK 교수)
7월 11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 ?- 생활 속에서 ‘협동’이란 무엇인가?- 한국형 협동조합의 본산지인 원주 사례???분석 최종덕 교수(상지대 교수)
7월 18일 지역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12 ?- 육아와 여성?- 협동성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 그렇다면???어떻게 살 것인가?

팔자걸음 고치는 법, 걸어야 한다![철학자의 서재]

에스트라 테일러가 엮은 <불온한 산책자>

?
양창아(부산대학교 비정규직 교수)

?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함께 걷고 쓴다는 것

 

지독시리 걷고 또 걷는 한 친구는 ‘엉덩이로’ 글을 쓰겠다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내보였고,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했던 것으로 보이는 또 한 친구는 ‘발로’ 글을 쓰겠다며 자신의 의지를 굳히는 말을 했다. 그들의 각오와 다짐이, ‘발’과 ‘엉덩이’ 또는 ‘길’과 ‘방’ 사이에서 한참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면서도 질책한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자리’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미 공유하고 있었고, 각기 자신의 색깔로 도구로 자신의 생활 방식과 공부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한다.

지난 2월 2일 부산 중앙동에 있는 ‘모퉁이 극장‘에서 니시야마 유지의 <철학에의 권리> 다큐멘터리 상영과 ‘문턱 없는 지식의 실험장’ 토론회가 있었다(☞바로 가기). 니시야마 유지와 함께 그 자리를 마련한 것은 ‘연구 모임 aff-com’이었고, 토론자는 ‘공간초록‘에서 활동하는 ‘연구 모임 비판과 상상력’의 이수경과 나, 부산과 광주를 오가며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기채생 감독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엉덩이로 글을 쓰는 일과 발로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친구들의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푹 하고 웃었는데 그건 말 그대로 그 부위로 글을 쓰는 친구들의 모습이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있으니 마음이 묵직했는데, 그건 그런 다짐을 하기까지 그들이 겪었을 일들과 고민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설렘이 무색할 정도로 앞으로 그들이 겪고 감당해야 할 노고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손’으로만 하던 일을 ‘엉덩이’나 ‘발’로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 고단함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이에 더해 손을 쓸 수 있는데 의식적으로 엉덩이나 발을 사용하는 것도 상상해보라. 손을 쓰고 싶은 유혹, 편한 대로 하고 싶은 유혹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표현이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참 힘든, 몸을 바꾸는 일. 대학의 공부방에 틀어박혀 오로지 자신의 전공 공부에만 급급해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닫힌 몸을, 가지각색의 경험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내뱉는 몸들을 향해 여는 일. 그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며 홀로 있던 몸이, 성가시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몸들 사이로 들어가 서로 부딪히고 섞이는 일. 그와 더불어 쓴다는 것은 그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았다’는 사실 자체에서 이미 상처받은 채로(그리고 어쩌면 그와 동시에 상처주면서) 함께-있고 또 함께-걷는 그 고단한 과정을 기록하는 일. 그날 내가 친구들의 말을 통해 공유한다고 생각한 것은 이러한 몸의 변화, 함께 걷고 쓰는 몸으로의 변화를 향한 욕망(또는 두려움)이다.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

▲(에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 이후 펴냄). ⓒ이후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찾다가 근처에 꽂혀 있던 이 책 <불온한 산책자>(에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 이후 펴냄)를 펼치게 되었고 결국 찾던 책 말고 이 책을 빌렸다. 제목에 혹했던 것도 같은데, 결정적으로 1년 전쯤에 (아마도)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기획한 강연 중에 조현준의 <젠더 트러블>(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 대한 강연이 있었는데, 그 강연에서 봤던 영상이 기억나서 빌렸다(☞바로 보기).

그리고 <철학에의 권리> 상영과 토론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도 이 책을 빌리는 데 한몫했다. 이 책은 제목(원제는 Examined Life : Excursions with Comtemporary Thinkers)에서 알 수 있듯이 8명의 철학자들과 산책하며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며, 그 산책을 담은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도 있다. 감독인 애스트라 테일러가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눈 철학자들(주제)은 코넬 웨스트(진리), 아비탈 로넬(의미), 피터 싱어(윤리), 콰메 앤서니 아피아(세계시민주의), 마사 누스바움(정의), 마이클 하트(혁명), 슬라보예 지젝(생태),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상호 의존)인데, 이 글에서 다룰 것은 마지막 장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의 대화뿐이다.

영상을 볼 당시에는 자막이 없어 거의 못 알아들었는데 책장을 펼쳐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의 대화를 읽으니, 그 사이 여러 장소에서 경험했던 것들과 그 경험이 가져다준 고민들이 떠오른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한때 머물렀고 여전히 머물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머물고 싶은 몇몇 장소들이 있다. ‘공간초록’과 ‘생각다방산책극장’과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산대학교 분회’가 그것이다(‘헤세이티’와 ‘모퉁이극장’도 빠뜨릴 수 없다). 장소들마다 만남의 성격도 색깔도 다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갖가지 대화(간단한 소개에서부터 내밀한 고민까지)나, 무언가를 함께 시도하면서 나눈 즐거움과 주고받은 상처와 괴로움이 끊임없이 나와 우리의 자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 고민들 중 하나. ‘철학’은 학교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입 밖으로 꺼내지만, 꺼내자마자 나에게도 뭔가 어색한 말인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무슨 골동품 가게에서 파는 물건인 것처럼 그것을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물을 때면(이런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오늘의 책 제목에 있는 ‘철학이 사라진 시대’라는 말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때때로 “철학이 뭔가요?”라고 웃으며 묻는 이들에게 나는 거의 항상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한다. 속으로 ‘지금 이렇게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인지도’라고 웅얼거리기도 하는데, 가장 골치 아픈 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묻게 되는 다음과 같은 질문. “전공으로 철학을 한다는 건 또 뭔가?” 학교에서 소위 철학 공부한다고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철학(哲學)’이라는 말이 꽤나, 그것을 발음할 때 특히나 더, 과장되어 있다고 예전부터 느꼈는데, 요즘엔 더 그렇다.

또 하나. 이 시대가 또는 우리 사회가 혼자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곳이라는 것을, 무섭지만, 많은 이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한 상식이 통용되는 곳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역시나’ 둘러보니 곳곳에 이곳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이들이 작은 섬들을 만들고 있다. 앞서 말했던 장소들이 그나마 나와 연이 닿은 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함께-사는-방식’을 생활 속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자본이라는 격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고집스레 그리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고, 고립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보이고 손을 내밀며 이 장소들을 지키고 있다.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이 만나면 조화보다는 갈등이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그곳에 오기 전의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던 사람일수록 더 즐겁게 활동하고 더 공고하게 모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뭐 어쨌든 무난하든 곤란하든 이 장소들에서 사람들은 서로 말을 나누는 방법을,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삶을 나누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그런데 그 어느 장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학교에서 사람들이 생활하고 말하고 만나는 방식을 살펴보니 이곳만큼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곳이 없다. 말을 하는데 말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적고, 인간을 고립시키는 사회 구조를 비판해서 그런지 자기 자신을 여는 방법은 전혀 모르거나 열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고, 삶이 아니라 살아남음만이 남아 있는 시대를 한탄하며 문을 잠그고 그나마 이곳에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 생산한다. 사는 곳과 사람은 닮는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 그런지 더 가혹하게 말하게 된다.

나는 대략 15년 동안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비정규교수노조 천막 농성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발이 아파 병원에 가니 신경이 눌렸단다. 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데 의사가 결정적으로 걸음걸이를 바꾸도록 노력하란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의식하지 않아도 발 바깥쪽이 아프니 힘이 저절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근데 좀 나아지니 걸음걸이는 원래대로 돌아가고, 그렇게 걸으니 또 아파서 요새는 열심히 안짱걸음으로 걸으려고 노력한다(15년 간 안짱걸음으로만 걸었으면 팔자로 걷는 연습을 해야 됐을까?). 아픈 것도 싫지만 걷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도, 아파서 다리를 저는 것만큼이나 괴롭고 귀찮다. 어쩌겠는가. 걷고 싶으면 괴로워도 다시 배우는 방법밖에 없다.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걷기 위한 조건

 

“나는 걸으며 지나치는 모든 것을 즐깁니다.” (314쪽)

수나우라가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움직이는 데서, 움직이면서 느낄 수 있는 변화들에서, 그 변화들이 주는 앎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게 누리는 모든 것들이, 무엇보다 그 움직임 자체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 자족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는 게 두 사람의 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움직일 때 외부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려면 특정한 종류의 표면과 신발, 날씨가 필요하죠. 심지어는 내면적으로도 특정한 방식의 보행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보행력은 우리 안에서 충분히 작동할 수도,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315쪽)

수나우라의 말에 보태어 그는 우리 내부의 보행력마저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적이라고, 자족적인 몸이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함께 있고, 함께 걸을 수밖에 없는데, 희한하게도 이 사회는 혼자 살아남으라고 윽박질하니 어찌 견뎌낼 거냐고, 거기서 버텨내기 힘드니 이런 곳을 만드는 것 아니겠냐고, 아까 말했던 장소들 중에 한 곳에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이런 장소들을 ‘피난처’로 여기고, 누군가는 ‘진지’로 여기는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특정한 목적 또는 정체성을 정하고 그에 맞게 움직이는 것보다도 우선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남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일들을 감당하고 즐기면서 서로의 생각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이게 가능해야 사람들도 다시 모이는데, 참 어려운 문제다. 모여야 방법도 익히는데, 모이려면 이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수나우라가 지적한 장애인 공동체딜레마와 유사하다. 우선 사회에 들어갈 수 있어야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 커브컷(훨체어 사용자를 위해 인도와 도로에 설치된 장치)이 대부분의 장소에 있어서 움직일 수 있는 등의 “물리적 접근성”에 대한 요구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도 줄어들어 “사회적 접근성과 수용성”도 높아질 것인데, 사회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다. 수나우라의 지적에 응수하며 버틀러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접근성이 보장된 다음에야 효과적인 주장도 할 수 있다.” (319쪽)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걷기 위한 조건을 갖춘 장소를 만들기를 바란다면, 괴로움을 감당하며 모일 수밖에 없고 오류를 반복하며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과 현실

 

부산에 있는 이 장소들은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만날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함께 있는 법을 배우기 힘든 사회에서 나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생겨났다. 이런 활동을 누군가는 제도의 바깥으로 나간다고 표현하지만, ‘공간초록’에서 만난 J가 항상 지적하듯이, 소위 안과 바깥은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또는 몸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방식에 따라 삽시간에 그곳은 안이 되기도 밖이 되기도 한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장소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타협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대로 머물러 있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피폐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피로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거나 ‘우리와 안 맞으니까 또는 우리는 여력이 없으니까 그들은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몸짓과 주장이 대표적인 것이다.

어떤 몸이 ‘우리에게 맞지 않게’ 움직인다고 내치는 일은, 그곳이 제도 안이든 밖이든 보수적이라고 내보이는 곳이든 진보적이라고 내보이는 곳이든,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것 같다. 특히 그 몸이 ‘우리보다 취약할’ 경우 그런 일은 더 쉽게 일어난다. 이런 극단적인 일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일을 함께 시작하고 진행시켜 나갈 때 어긋나는 의견들을 감당하는 일도 쉽지 않다. 아, 만나고 모이는 일을 시작하는 것도 힘들지만, 만들어진 장소를 열고 지키는 일, 즉 함께 걷는 과정은 더욱 힘들다.

버틀러와 수나우라의 대화를 보고 듣고 읽으면서 그 대화에서 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눈에 띈다. 그럴 때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곱씹으며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한걸음 더 밀고 나가는데, 이런 태도도 쉽게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버틀러가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사회적 공간에서 움직이는 일이에요.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움직임, 당신이 살 수 있게 돕고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을 표현하게 하는 그런 움직임 말입니다. 이 사회적, 공적 공간에서 당신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나요? 당신이 안고 있는 사회적 제약은 어느 정도인가요? 낙인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으로 승인된 어떤 움직임 같은 것들, 그러니까 당신의 장애 자체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사회적 제약 같은 것 말입니다.” (320쪽)

수나우라는 질문에 딱 맞는 대답 대신, 카페에서 커피 잔을 입에 물고 테이블로 옮긴 일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일의 어려움은 입으로 잔을 물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입으로 잔을 무는 데서 온다. 그는 그 일이 힘든 이유가 “우리의 움직임에는 규범화된 기준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손은 물건을 주거나 집어 들거나 악수를 하는 데 사용하고 입은 마시거나 입을 맞추거나 이야기하는 데 사용한다고 배웠습니다. 내가 카페에서 커피 잔을 손이 아니라 입으로 옮기게 되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가정을 벗어난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배운 내용을 엉망으로 만드는 거죠. 우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방식에 따라 몸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생각조차 잘하지 않죠.” (321쪽)

다시,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문득 술자리에서 누군가 반쯤은 비꼬듯이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 번역하면 이렇다. 함께 걷는 것은 온갖 어긋남을 수반하는 일이며 어긋남을 수용하기란 불편하고 힘든 일인데, 왜 혼자 걷지 않고 함께 걷는가? 당신도 편해지기를 원하지 않는가, 아니 편해지기 위해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며 뭔가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질문에 답하려고 하는데, 생각하니 질문만 하나 더 늘었다. 어긋나고 부딪히고 내쫓고 내쫓기고 상처받고 상처주면서도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는 바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1)

 

 

부르크하르트가 전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말로는 자못 우울하고 냉소적이다. 아테네 민주정의 몰락과 그리스의 몰락이 함께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그의 시선을 더욱 그럴듯하게 해준다. 사실 부르크하르트는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독보적인 수준의 풍성하고도 세세한 데이터와 통찰력 깊은 해석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유독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 지배자 또는 기득권자들의 입장에 서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역사과정에서 정치적 강자, 사회 기득권자들에 의해 자행된 폭력적 억압과 그 피폐상에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역사 과정에서 가끔 눈에 띄는 민중권력에 의한 집단적 폭력과 그에 따른 혼란상에도 지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요컨대 그는 어떤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서든 반지성적 행태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집단적·정치적 폭력 일체를 혐오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에서 인류의 역사적 가치의 형성 토대를 정치사와 경제사가 아닌 지성사와 예술사를 통해 다시 구축하고자 하는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 이른바 문화사(Kulturgeschichte)의 영역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주의라기보다는 지성주의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고중세사에서는 지성이 오직 귀족들의 역량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는 여전히 보수적 엘리트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주의의 관점에서도 아테네의 민중이, 보통 생각하듯 그저 어리석은 민중에 불과했다는 생각은 매우 섣부른 판단이다. 아마도 그러한 평가는 주로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이 끼친 지대한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단 다수 민중이 정치적 주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적이 2000년 이상의 고·중세를 통해 아테네 민주정을 제외하면 언제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이미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인류 정치사의 위대한 성취이자 기층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준 매우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제로 아테네의 민주정의 초기 성립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비록 겉으로는 왕과 귀족 등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나긴 정치체제의 역사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틈바구니에서 민중 스스로 자신들의 욕구와 권리를 사회적으로 관철해내고자 하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있어왔고 아테네 민주정은 그 결과로서 등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그 일단을 살펴왔지만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특히 그 점에 주목해서 아테네 민주정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갈무리 해보기로 하자. 우선 아테네는 고대 폴리스 성립 이래 다른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왕이 지배하는 왕정(basileia)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동 지방의 왕들처럼 절대적인 권력은 가지지 않았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 중 한 사람이 대표로서 왕의 지위를 가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직접 물레를 돌리거나 농사를 거드는 왕의 모습도 보인다. 그 때문에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이르면 왕정은 귀족들의 집단 정치체제 이른바 귀족정(aristokratia)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전시공동체로서 고대국가의 성격상, 정치적 발언권은 나라를 방어하는 전투 능력 및 기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전투행태 상 중갑 기병(騎兵, hippikos)이 전투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를 하기 위한 기마 및 개인 무장 또한 자비부담에 의존하고 있었던 터라 자연적으로 전장에서도 귀족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 발언권 또한 그들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귀족들만이 비싼 가격의 말(馬)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 식민도시가 증가하고 그에 따른 교역량도 늘어나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부유한 평민이 나타났고 생산량의 증가에 따라 무기의 가격도 싸져서 평민 중에서도 무기를 스스로 조달하여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군의 핵심 전투력 또한 점차 평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갑 보병(hoplit?s), 사각밀집대형(phalanx) 전술로 재편되었다. 이후 그들은 당연한 권리로서 귀족에게 참정권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참정권을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이 충돌하는 일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민계층의 약화는 그대로 나라의 방어력 약화를 의미했고 나라의 위기는 귀족들의 위기와도 직결되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평민의 불만을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원전 621년에 제정된 ‘드라콘(Drakon)의 입법’은 귀족들의 자발적인 정치개혁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간의 평민의 정치적 성장이 가져다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 법률의 핵심은 관습법을 성문화 했다는 데에 있다. 즉 나랏일과 관련한 중요사와 그 결정 과정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대한 진전이었다. 그 때까지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결정 일체를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길 경우 그들이 행한 행태가 폭로되고 실정에 대한 변명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귀족이 결정한 정치적 사안과 법률의 내용이 기록으로 알려짐으로써 평민들도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귀족들도 더 이상 제멋대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평민에게까지 아직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거기서 양자의 조정자로서 등장한 인물이 솔론(Solon)이다. 시민들의 합의로 솔론은 계층 간 이해 조정을 위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594년에 실시된 것이 솔론의 개혁이다. 솔론 개혁안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귀족·평민을 포함한 시민 전체를 재산과 토지의 소유수준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각각의 의무와 권리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갑 기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귀족을 최상급의 시민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아르콘 등의 최고 관직의 임용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중갑 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부유한 평민을 두 번째 등급의 시민으로 규정하여 그 다음 등급의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최소 수준의 무장인 경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세 번째 등급의 시민은 민회나 재판에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아예 어떠한 무장도 갖출 수 없었던 네 번째 등급의 시민들은 아무런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다. 무기의 가격이 싸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무산 시민(th?tes)으로 불리어 졌다. 이와 같이 솔론의 개혁은 토지·재산에 의해서 관직을 정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평민들도 부를 쌓을 경우 최고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곧 금권정(timokratia)의 등장이다. 금권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재산이 좌지우지하는 정치라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 정치발전사의 측면에서 보면 마치 근세 시민사회의 성립이 그렇듯이 귀족들에 의해 독점된 정치 영역에 제한적이나마 평민계층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개혁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솔론 개혁안의 두 번째 핵심은 채무의 소멸과 채무 노예의 방지를 실시한 점에 있다. 솔론은 가난한 평민들의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평민이 빚 때문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또한 평민이 주력이 된 전투력을 보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화폐 경제의 발전에 의해서 평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그러나 그 만큼 몰락하는 평민 또한 늘어나 종국에는 토지를 상실하고 노예로 팔리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일단 빚을 지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토지가 채권자에게 압류되어 수확물의 6분의 1을 채권자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조차 체납되어 종국에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 노예로 팔리는 것이 당시의 관습법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말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채무 노예가 나중 빚을 갚게 되면 인간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빚을 탕감해주는 정책이 평민의 채무노예로의 전락을 막아 국방력을 보전하는 좋은 방책일 수는 있었어도 그 자체로 부유한 귀족들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불만은 날로 켜져 갔고, 다른 한편에선 채무의 소멸 후에 토지를 재분배 받기를 원했던 평민들까지 나름 자신들의 기대에 못 미쳐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난한 평민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평민임에도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참정권에 차별을 두는 것 또한 불만이었고, 급기야는 신체를 저당으로 돈을 빌리는 법마저 금지하는 바람에 당장의 생활이 어려운 무산자들에게도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처럼 솔론의 개혁안은 점차 귀족과 평민 양쪽으로부터 모두 원성과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후 30년간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 간에, 부자와 가난한 자들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이 혼란한 정세를 이용하여 귀족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stos)라는 인물이 나타나 대다수의 가난한 평민들을 등에 업고 기원전 560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권력을 차지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곧 금권정에 종말을 가하고 나타난 참주정(tyrannik?)이다.

참주(tyrannos)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이용하여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독재를 일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이긴 해도 온화한 인품과 노련한 정치술로 솔론의 개혁안을 유연하게 실행으로 옮겨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되 구테타를 피해 망명한 귀족이나 부패한 귀족들의 토지만을 몰수 하였고 그것을 평민들에게 분배하여 수공업의 발전을 꾀했고 해상 무역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참주가 된 장남 히피아스는 사리사욕에 빠진데다가 폭정까지 일삼아 아테네를 큰 혼란에 빠트렸고 결국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s)에 의해 국외로 추방됨으로써 반세기만에 아테네 참주정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 당시 참주 히피아스의 동생 히파르코스를 살해하고 순교한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이후 아테네인들에게 참주정의 폭압성과 자유의 이념을 일깨어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기원전 570-507)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해외로 도피했다가 히피아스를 타도하는데 앞장선 망명귀족으로서 기원전 508년 이른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에 획기적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런데 클레이스테네스는 원래 처음부터 민주정을 지지하거나 민중의 이익을 앞세웠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반대파 귀족을 누르고 히피아스를 타도한 후 귀족정체로의 복귀를 꿈꾸었고 다만 그 과정에서 민중의 힘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혁명과정에서 증폭된 민중의 욕구는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그는 영악하게도 그 욕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새로운 정권의 수립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표징 되는 아테네 민주정의 빛나는 성취 그 이면에는 이렇듯 아테네 민중들의 정치적 자각과 그에 기초한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훗날 아테네의 급진적 민주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는데 그 개혁의 급진성은 무엇보다도 도편추방제(ostrakismos)의 도입과 부족제의 혁명적 재편에서 잘 드러나 있다. 도편 추방제는 참주의 출현을 미리 막기 위해서 그럴만한 우려가 있는 인물을 미리 뽑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였다. 당시에는 아직 종이가 없었던 터라 기와 등 도기 조각에 이름을 써서 투표했는데 6000개 이상의 도편 가운데 가장 많은 표가 나온 인물의 경우 10년 간 추방명령이 내려졌다. 실제로 이 도편추방제에 의해 기원전 462년에는 키몬이, 444년에는 투퀴디데스가, 418년에는 클레온의 후계자이자 민중파 선동정치가였던 휘페르볼로스(Hyperbolos)가 추방당했고 제도수립이래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의 참주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정적을 합법적으로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유능한 정치가가 추방되는 부작용도 야기 시켜 휘페르볼로스 추방 이후 폐지되고 만다.

클레이스테네스의 또 하나의 급진적이고도 혁명적인 개혁은 종래의 귀족의 권력 기반이 되고 있던 낡은 혈연적인 4부족제를 혁파하고 순전히 기계적으로 지역을 열 군데로 갈라 10 부족제로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귀족 원로중심의 아레오파고스회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무산시민을 제외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민회(ekkl?sia)를 구성하고, 민회에 올리는 의안을 미리 토의하기 위해 지역 마다 50명씩, 재임할 수 없는 임기 1년의 위원을 추첨으로 뽑아 500인 평의회(boul?)를 구성하였다. 특히 민회와 평의회 위원은 물론 장군직과 일부 재정관 이외의 아르콘을 포함한 고위 관직까지 추첨으로 선발하였다는 것은 정치가 더 이상 엘리트 귀족들만의 독점영역이 아님을 상징하는 일종의 혁명 선언이었다. 이와 같은 추첨제가 가능했던 것은 아테네의 시민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테네인들 스스로가 정치적인 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왜 처리하는지를 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민의 지혜와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아테네가 시민을 정치 활동에 참여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임할 능력을 갖추지 않은 무산 시민은 여전히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무산 시민까지도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하였다. 그것이 곧 기원전 492년에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때 크게 발흥하여 소아시아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그리스 식민도시를 지배하에 두었는데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식민도시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한데서 비롯되었다. 발칸반도까지 진출을 꿈꾸고 있었던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1세는 그것을 빌미로 아테네에 진군을 명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로 향하는 도중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폭풍우 때문에 300척의 군함만 잃고 제 발로 물러났다가 그로부터 2년 후인 기원전 490년, 국외로 추방된 히피아스의 안내로 군사를 이끌고 바닷길로 다시 아테네를 쳐들어왔다. 이것이 2차 페르시아전쟁이다. 이 때 벌어진 전투가 유명한 마라톤 평야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는 1만명의 중갑 보병의 활약으로 3만명의 페르시아 대군을 대파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침략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전투가 끝난 후 한 명의 전령이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 승전보를 전하고 바로 숨을 거두었는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가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침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0년 후 세 번째 침략이 이루어졌고 그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 역사는 물론 아테네 정치사의 새롭고도 중차대한 전기가 찾아왔다.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그 의의와 한계(2) 다음에 계속)

 

세상 바꿀 청춘에게 ‘구라’ 치지 말자![철학자의 서재]

존 홀러웨이의 <크랙 캐피털리즘>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체제의 균열을 이해하고, 탐구하고, 넓혀 나가기

 

지난 5년의 삶이 너무나도 신산했기 때문인지 좌절감, 상실감, 분노, 환멸, 체념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마음속에서 시커먼 우물이 되어 고여 가는 것 같다. 48퍼센트의 국민들이 지지했던 ‘그’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사실 세계의 지배 권력이 우리들의 삶과 노동과 생각을 움직이는 방식은 달라질 게 없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정계에서 은퇴한 유시민의 다시 회자되는 말처럼 “군부 세력과 피 흘리도록 싸워서 투표권 찾아왔더니 국민들은 그 투표권으로 노태우를 뽑”았는데, 25년이 지나서도 51퍼센트의 사람들은 금방 깨어날 환각제 주사를 다시 맞으려고 했다.

시민과 다중이 활동할 정치 영역의 ‘틈’은 안개 속에 더 가려졌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지만, 여전히 대의 민주제에 대한 의존은 심하고 국민 주권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다. 그렇다. 이 세계의 ‘지배 원리’는 절대로 쉽게 안 변하는데, 사람들의 상상력은 침체되고 행동력은 세월에 못 이겨 쇠락해 간다. ‘멘붕’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 위안이나 새로운 상품이 된 ‘힐링’이 아니라 다시 토론하고 행위하고 연대하는 것임을 어찌 모르랴만, 사람 노릇하려고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도시에서 발버둥 치다 보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존 홀러웨이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대선 이후 나 자신과 진보 진영의 지리멸렬과 무기력함이 혐오스러워질 때쯤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의 저자 존 홀러웨이의 신작, <크랙 캐피털리즘>(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을 꺼내 들었다.

홀러웨이는 지금과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자고 설득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 견고한 자본주의 체제에 끊임없이 ‘균열’을 가하자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신중하면서도 명쾌하며, 토론을 부추기는 그의 이론은 힘차고 논쟁적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강력한 논거들은 학자들의 이론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반자본의 실험, 조직, 행동에서 산출된다. 저자가 말하는 ‘체제의 균열’이다.

홀러웨이가 보는 지금의 세계는 “이 매우 불공정하고 파괴적인 사회 조직의 변화를 상상하는 것보다 인류의 완전한 절멸을 생각하는 것이 더 쉬운 단계에 도달”한 곳이다. 숨 막히는 자본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원한다면 기존의 것을 부수어야 한다. 그 부수는 행위보다 더 평범한 것도, 더 분명한 것도, 더 단순한 것도, 더 어려운 것도 없을 만큼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벽을 그 견고함이나 강력함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위기, 모순, 취약함, 균열에서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그 모순들인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이 여행은 어디로 갈지 잘 알고 있고 손에 지도가 들려 있을 때만 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멈춰 서 있지 않고 그릇된 방향이더라도 계속 걸으면서 질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또한 거의 식별할 수 없을 것 같은 터널 밖의 풍경과 소리를 보다 잘 보고 듣기 위해 우리 안의 공포와 의심을 깨뜨리는 것이다. 매일 떠날 수 있는 이 여행은 “균열들로부터, 갈라진 틈들로부터, 찢어진 곳들로부터, 반란적 부정-과-창조의 공간들로부터, 총체성으로부터가 아니라 특수한 것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동시에 창조하는 존엄의 反-정치

 

그렇다면 그 균열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균열은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다른 유형의 행위를 천명하는, 어떤 공간 혹은 순간의 아주 일상적인 창출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불복종이지 미래를 위한 기투가 아니”며, 우리의 활동과 삶을 자본의 지배에 종속시키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뭔가 다른 것을 할 수 있고 또 할 것이고 할 수 있다”는 현재적인 기획이다. 그래서 그 균열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면서 존재하며 마치 ‘발 빠른 춤’처럼 우리들과 만난다.

그런데 자본에 대항하는 그 기획은 새로운 사회 관계를 창출하고 그 관계망 속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동료애, 존엄, 연정, 사랑, 연대, 우애, 우정, 윤리, 이 모든 이름들은 자본주의의 상품화되고 화폐화된 관계들과 대립”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예상하고 창조하는 것에 기여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들이 어떻게 조직화로 번역되는가인데, 일반적으로 주요한 강조점은 관계의 ‘수평성’이다. 그것은 자신을 타인의 의사 결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수직적 구조와 명령 사슬에 대한 거부이며, 특정한 지도자가 없이 모두가 평등한 기반 위에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평의회 형식의 조직이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 맺음이 실제로는 절대적으로 관철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수평성을 절대적 규칙으로서가 아니라 수직성에 대한 부단한 투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존엄의 반-정치는 이제 ‘자본주의의 사회적 종합’, 즉 “자본주의 사회의 매우 단단한 사회적 응집의 논리”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이나 정의롭지 못한 권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내면화되어 반자본적 활동들 가운데서도 재생산되려고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이다. 그래서 점차 벌어지는 ‘균열’은 자본주의가 규정한 우선적인 가치들의 지배와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라는 권력, 싼 상품의 매력, 화폐의 오만함, 이윤이 남는다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욕망, 가난하면 불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대항 정치는 비국가적이고 틈새적인 지평에서 자유롭게 활동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존엄의 확산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은 도시에서 딱딱한 마음으로 더 많은 지지자를 등록시키는 문제나 설교나 연설의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감화, 모방, 공명 같은 단어들이 주는 느낌을 떠올려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했던 지난날의 ‘투쟁’들이 쇠파이프 대 곤봉, 스크럼 대 방패, 화염병 대 최루탄, 구호 외치기 대 체포의 싸움이었다면, 균열들을 벌려가는 새로운 반란에서는 연극과 시와 춤과 유머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 그런 것들은 과거엔 운동의 도구였지만 이제는 운동 자체의 중심적 요소가 되었다.

“낡은 혁명적 확실성들은 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승리가 필연적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불확실성과 혼돈의 세계에 산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불확실성과 혼돈을 이해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역사에 확실성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균열들의 증식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노동에 대한 행위의 반란

 

먹고살기 위해 타율적으로 수행하는 소외된 노동과, 필요하다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구체적 행위를 향한 노력-저자가 ‘의식적인 삶-활동’이라고 말한 것-사이의 대립은 삶의 지형도를 은폐하는 노동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용 가치와 유용한 사물들을 생산하는 구체 노동과 구별되는, 우리에게 타율적으로 주어진 추상 노동을 뒤흔드는 구체적 행위가 관건이다. 추상 노동 내부에 존재하면서 그것을 넘어 자본주의적 노동 바깥에 서 보는 것이다.

“나는 교사이고 시장에서 팔 노동력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사회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나의 학생을 가르친다. 나는 민간 병원의 간호사이며 내 고용주를 위해 이윤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나의 환자들이 그들 삶의 가장 어려운 어떤 순간들을 살아내도록 도우려 한다. 나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일한다. 하지만 내 손가락이 자유로울 때에는 언제나 오늘밤 밴드에서 기타로 연주할 코드를 연습하느라 바쁘다. 나는 청바지를 만드는 바느질 기계에서 일한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언제나, 나 자신과 나의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방을 만들면서, 딴 곳에 있다. 나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러나 나는 내 공부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그리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것으로 전환시킬 방법을 찾길 원한다.”

우리는 추상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를 만든다. 저자가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이라고 말하는 그 과정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울타리 치고, 노동 착취를 낳고 노동 계급을 형성시켰으며, 자연을 객체로서 구성했으며, 우리가 다른 생각과 ‘딴 짓’을 못하도록 우리의 역량을 외부화해 시민, 정치, 국가라는 총체성의 구조를 창출했다. 또 추상 노동의 지배 과정은 우리의 짧은 인생을 규격화했으며 시간을 동질화시켰으며, 반자본주의 운동의 발목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노동 운동은 추상 노동의 운동으로 전락했다.

저자는 이제 추상 노동에 대적하고 그것을 넘어 구체적인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을 요청한다. 그것은 곧 추상 노동의 위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적대와 갈등과 모순이 미끄러지며 나는 소리들은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못나고 약하고 ‘빽’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벌여내는 ‘행위’의 멜로디가 될 것이다. 이제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존적으로 일어나는 행위와 노동 사이의 더 깊은 갈등이 있다. “이 모순은 살아 있는, 고동치는 사회적 적대이며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항상적이고 필연적인 투쟁이다.” 그 모순의 틈을 벌리는 행위의 연대는 총체성, 종합, 가치를 해체하는 숨어 있는 여성의 움직임이며, 근대적인 시간의 동질화를 해체하여 각자가 누릴 수 있는 각각의 순간을 열어젖힐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만들기를 중지하고 지연시키는 우리의 무기이자 행위의 원리가 존엄이라면,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시간, 관계, 가치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힘은 행위의 힘이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 앞에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을 세우는 것이다.” 거부하고 창조하여 자본주의를 균열시켜라! 이 미쳐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의 작동을 멈추게 만들자!

이 책의 옮긴이인 조정환의 말처럼 국가, 화폐, 자본에 의한 우리 삶의 모든 소외는 삶의 생생한 가치들과 생동력을 추상화시켜서 통제하고 통합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욕망 체계의 산물이다. 이 시대의 ‘꼰대’들이여! ‘멈춰서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속삭이며 역사와 사회에 대한 젊은이의 눈을 가리지 말자. ‘아파야 청춘’이라고 조금만 더 참으면 좋은 세상 올 거라고 ‘구라’치지 말자.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해 당신들의 낡은 가치와 경험으로 함부로 추상화시켜 말하지 말자. 그들은 공동체의 정치와 자신들 삶의 구경꾼이 아니라 각각의 주인공이니까. 우리 시대를 바꾸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일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