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사회적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사회적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구보씨는 명색이 사회철학 전공자지만 딱히 ‘사회적’이진 않다. 오히려 자신이 그다지 사회적이지 못하다는 걸 의식하다 보니 사회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게다가 한편으론 사회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부족한 사회성이 메워질 거라는 헛된 기대도 있지 않았을까… 하여튼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해서 다 사회적인 건 아니다. 그래서 칸트도 인간의 사회성을 일러 ‘비사회적 사회성’이라 하지 않았는가.
임마누엘 칸트칸트가 그런 표현을 쓴 데는 당시 부각되어 있던 인간의 이기성에 대한 관심과 긍정이 큰 몫을 했다.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근대의 인간상에 대한 관심과 긍정 말이다. 사실 이기적 인간과 사회적 인간이란 얼핏 보기에도 서로 모순되는 두 면모지만, 이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근대 유럽의 현실이었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부대끼며 어울려 사는 사회, 그런 사회가 유지될 뿐만 아니라 발전하기도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또 해명해야 했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런 현상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대답이다. 직접적인 이기심을 넘어서서 인간 사회를 지탱해 주는 이성적인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비사회적 사회성’에도 비슷한 면이 있다. 각자의 이익을 좇는 것이 인간 본성의 ‘비사회적’ 면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런 비사회성을 끌어안는 사회성이 작용하는 탓이다.
그러니까 이 사회성에는 개체의 자기 이익 이상의 무엇이 있다. 칸트는 이런 면모를 역사가 추구하는 이념(理念)과 관련시켜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개체를 넘어서는 어떤 실체(實體)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헤겔에 이르면 그와 같은 사회성은 정신(精神)이라는 이름의 실체로 등장하게 된다. 민족정신, 시대정신 같은 초개인적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어라, 잠깐! 구보씨가 이렇게 딱딱한 얘기를 늘어놓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 때나 현학적인 철학자 행세를 하려 드는 건 비(非)사회적이고 반(反)사회적인 짓임을 아는 까닭이다. 그건 구보씨에게 어울리는 사회적 스타일이 아니다. 언제 보아도 우아한 남녘의 오빠 스타일이 아닌 것이다. 구보씨가 말하려던 것은 다만, 사회성에는 우리의 직접성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는 것, 그 덕택에 우리의 삶에는 숱한 어려움이 가중된다는 것 정도였다.
아니, 또 잠깐! 그렇다고 구보씨가 자신의 비사회적인 면을 이기심과 등치하거나 그런 이기심을 인간 본성으로 생각한다는 말도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본래 이기적인 인간인데 필요에 따라 사회를 이루어 살려다 보니 이렇게 힘이 드는 거다, 라는 식으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이기성이 부당하게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 질서가 자리 잡아나가면서부터였다.
아담 스미스실은, 칸트는 물론이고 아담 스미스도 인간의 본성에 이기적인 구석만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아담 스미스는뿐 아니라이라는 두툼한 책을 썼고(우리말 번역본도 나와 있다), 동정심을 인간의 기본 감정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아담 스미스는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이자 역시 동정심을 통해서 인간의 윤리를 설명하려고 했던 철학자 데이비드 흄과 동향의 친구이기도 했다(둘 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나이는 흄이 열 살 가량 위였다).
인간을 순전히 이기적인 개체로만 보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생각으로는 그런 식의 견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마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이기심을 강조하는 것이 자본주의 하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데는 꽤 쓸모가 있다. 하지만 탐욕을 부린다 해도 그 탐욕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려면 최소한 그럴 수 있는 무대인 사회가 존립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이기심도 어떤 질서 속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잘 정돈된 질서 안에서 각자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는 얘기다.
현대 자유주의 정의론의 대가라는 존 롤스가 내세우는 정의로운 사회도 따지고 보면 이런 부류의 사회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의 원칙이라는 게 이른바 합리적 이기심을 가진 인간들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기적인 인간들이 모여 사는 조직인데, 서로가 자기 처지만 생각해서는 그 이기심이 공정하게 추구되기 어려우니, 각자가 다른 처지에 놓일 경우도 생각해서 이기심을 충족시키자는 것이다. 이기주의의 세련된 보편화(普遍化)라고나 할까, 이것은 말하자면 아메리카의 고상한 자유주의 스타일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에는 동정심이 필요 없다.
존 롤스하긴, 오늘날처럼 규모가 큰 사회가 동정심에 입각한 도덕으로 굴러가기는 어렵다. 동정심(同情心)이나 공감(共感)이란 건 원래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살던 시기에 생겨나고 정착된 감정일 테니 말이다. 농경으로 대규모 정착 문명이 일어나기 전,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100여명 정도의, 많아야 200명이 못되는 규모의 집단생활을 했다고 한다. 현생 인류로서의 기간만 해도 수만 년이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십만 년의 세월이다. 그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제 아무리 인간관계가 복잡하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백 명 남짓을 넘기 힘들다.
그래서, 군대로 따지면 중대(中隊) 규모의 집단이 정서적 교감을 지니고 가장 큰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 단위가 된다. 아니, 그렇기에 중대의 크기가 그 정도로 정해졌다고 해야 맞는 얘기일 것이다. 집단이 이 크기를 넘어서면 서로 속속들이 알기도 어렵고 정서적으로 일체감을 느끼기도 곤란해진다. 직접적인 접촉으로 유지될 수 있는 집단의 크기가 생래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삶을 꾸려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자, 그렇다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마음과 사회 환경, 심정과 사회 조직 사이에 괴리가 생겨난다. 오늘의 도시 생활에선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충실할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다. 기억을 동반하는 이지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기억이란 것이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상당 부분 감정과 엮이기 마련이니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큰 규모의 사회 속에 산다 해도 결국 우리가 믿고 결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무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령 일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관계하는 일차적인 집단의 크기는 백여 명 남짓이다. 물론 각각의 사람들이 관계하는 일차 집단은 서로 같지 않게 중첩된다. 그러나 이런 중첩적인 관계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퍼져가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틈새들을 따라 서로의 간극은 크게 벌어지며 집단들끼리의 엮임도 쉽게 적대적인 선들로 균열된다. 심정적 집단의 크기와 실제의 사회적 관계로 얽힌 집단의 크기 사이에서 온갖 문제들이 생겨난다.
“그런데 구보야, 그거 구닥다리 문제제기야. 그렇게 해서는 노자(老子) 식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얘기밖에 더 나오겠어? 사대주의에 시비를 걸더니 아예 거꾸로 가는구나.”
C는 아무래도 강북의 영감탱이 스타일이다. 구보씨랑 나이는 같은데, 너댓 살은 더 먹은 것처럼 군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아니, 그런 것만은 아니야. 이거 보기에 따라서는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라구. 자치(自治)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느냐의 관건이지.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도외시하잖아. 걔들은 한편으로 기계적이라구. 말하자면, 분해-결합의 스타일이야. 인간을 일종의 레고 조각처럼 보고 필요에 따라 이어다 붙이면 어떤 규모의 어떤 사회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까. 레고 조각만 깨뜨리지 않으면 된다는 거지. 그 조각이 완성된 사회의 어디에 붙어 있건 다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거야. 그 치들은 공동체 단위에 대한, 그러니까 코뮨 단위에 대한 생각이 없어.”
“하지만 그런 문제야 지방 자치나 지역 사회 단위를 통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잖아. 지금 백 명 이백 명 단위의 공동체로 생활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고… 내가 보기엔 요즘 공동체주의라는 것은 알맹이 없는 수세적(守勢的)이고 수사적(修辭的) 논의에 불과해. 적어도 산업 사회 이후의 코뮨이라는 건 경제까지 공동체로서의 사회가 장악할 때 유의미해지는 거야. 그게 코뮤니즘이지. 그걸 포기한 공동체주의는 그냥 공화주의일 따름이고, 자유주의의 일파야. 자유주의적 공화주의란 말이지.”
“그런데 그게 개인주의는 아니거든. 골수 자유주의는 개인주의고. 개체를 우선적인 것으로 놓고 인간 사회를 바라보느냐 아니면 공동체적인 사회 속에서 개체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느냐는 큰 차이라구.”
“너희 철학자들한테야 그렇겠지.”
“허, 아니라니까. 예를 들면, 경제민주화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때, 그래서 개인의 소유권과 재분배를 통한 복지가 충돌할 때, 그런 입장 차이가 큰 역할을 한다구.”
“글쎄, 그럴까? 미국만 해도 그 구별이 선명치 않을 걸. 공동체주의자들 가운데 민주당파도 있고 공화당파도 있을 거야. 우리도 봐, 지금 박근혜에 붙어 있는 김종인 같은 이들이 순수한 개인주의자는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그거 개와 고양이의 차이보다도 못한 것 같아.”
“개와 고양이?”
“그래, 개와 고양이. 개는 사회적인 동물이고 고양이는 안 그렇다고 하잖아. 공동체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나누느니 차라리 개 닮은 놈과 고양이 닮은 놈을 나누는 게 낫겠다. 구보, 넌 어느 쪽이냐?”
“나야 뭐 대체로 자유주의에 비판적이니까… 근데, 너 지금 나보고 개 같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