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을’인 운명, 우리는 벌레다![철학자의 서재]

?카프카의 <변신>[철학자의 서재]

 

윤지선 (한철연 회원·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갑을관계 속, 을의 퇴행 관찰기

 

2013년 남양유업 사태를 시발점으로 하여 불평등하고 위압적이던 갑을관계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대한민국 사회의 뜨거운 논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팽배한 갑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는 전근대 불평등한 신분 사회로부터 얼마만큼 나아갔는가? 갑을관계란 본래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자율적인 두 계약 주체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이들 사이를 규정짓는 힘의 관계가 출발선에서부터 절대 강자와 절대 약자의 구도로 불평등하게 설정됨으로써 거기에서 파생되는 일체의 이익과 권리의 배분 또한 불합리한 방식으로 한쪽에만 편중되는 현상을 낳았다. 대한민국의 갑을관계 논쟁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난 상하종속의 위압적이고 불공정한 권력 구도 관계에 대한 충격적인 폭로로서, 과연 대한민국은 과거 전근대 신분 사회의 불평등을 갑을관계란 자본주의적 프레임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재편성하고 있진 않는지 심각히 되물어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변신>은 폭력적 갑을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노동자, 을-외판원 그레고르 잠자의 퇴행 관찰일지에 해당된다. 프란츠 카프카는 생전에 노동자 상해 보험회사에서 보험담당관으로 일하며 노동자들의 육체적·심적 고통을 생생히 목도해 왔으며 상해를 입은 그들이 망치를 들고 가서 회사에 항의하는 대신 오히려 회사 측에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자본주의라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그 어떠한 사회적 안전장치도 보장되지 않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카프카는 노동 소외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생지옥을 발현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묵시록을 써내려간 예언자이기도 하다.

▲ <변신·시골의사>(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고용주와 노동자, 임대주와 세입자, 남성과 여성, 프랜차이즈 대기업과 대리점주들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는 탐욕스러운 속도로 강자는 더 강하게 약자는 더 약하게 진화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약자, 을들의 도태·퇴화관찰지인 동시에 강자, 갑들의 괴물적인 몸 불리기에 관한 이면의 기록서이기도 하다. 매일 이른 새벽 출장시간을 맞추기 위해 선잠을 설치며 깨어난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로 변신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갑의 갖은 감시와 억압, 부당한 권력행위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의 무게마저 초경량화되어 취급되는 을의 처지가 점차 퇴화되고 도태되는 벌레로의 퇴행으로 그려지고 있다. 재벌 대기업들의 비대한 문어발식 확장과 가진 자들의 폭식증적 몸 불리기와는 반대로 뼈와 살이 노골노골해질 정도로 착취당하는 약자들에겐 뼈와 살이 한 겹으로 녹아든 것 같은 딱딱한 껍질만으로 이루어진 벌레로의 진화만이 남은 것인가? 일하는 벌레, 돈 버는 벌레, 착취당하는 벌레로의 고단한 삶에 두 눈을 꿈벅이며 곪은 상처를 핥으며 ‘억울하면 갑이 되어라’라는 문구에 세뇌되어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다만 나약한 자기 탓-못 배운 탓, 못 가진 탓, 못난 탓-으로 여기며 자기분노를 되삼키게 하는, 이 멋진 자본주의 정글에서의 약자 수난기가 우화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카프카의 <변신>이다.

사회경제적 생존게임에서 착취되고 도태된 약자가 유일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공간은 자신의 방이며 가정이다. 자기 방 안에 유폐되어 일체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된 히키코모리도 카프카적 의미의 벌레로의 퇴행의 한 형태이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영역인 자신의 방은 취업준비생,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명예퇴직자, 장애인, 노인들의 쉼터인 동시에 외부 활동 영역이 철저히 제한된 감옥으로서 기능한다. 벌레가 되어 피할 도리 없이 가족 구조 내에 산재한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 그레고르 잠자의 위기는 곧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위기와도 맥을 같이한다.
 
 

가계부채의 덫, 가족구성원의 무덤

 

“부모님이 지고 있는 빚만 갚아드릴 수 있는 돈만 모아진다면, 아마도 5~6년쯤 지나야 될 일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반드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결행할 것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은 일어나야만 한다. 기차가 5시에 출발하니까” (<변신·심판-세계명작131>(유한준 옮김, 대일출판사 펴냄) 16쪽)

벌레로 변하여 거동조차 불편한 그레고르 잠자의 고뇌에 찬 되뇌임을 읽으며 마치 현재 대한민국의 소시민의 걱정거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국내 가계부채가 1000조를 육박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부채를 권하는 사회, 부채가 필수악인 된 사회이다. 자녀 사교육을 위해, 대학 등록금을 위해, 내집 마련을 위해, 장가를 가기 위해, 노후 대책을 위한 사업을 하기 위해… 이른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남기 위해’, 영원한 약자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대출을 감행한다. 그레고르 잠자의 출근을 채근하러 온 지배인의 가정방문에 온 집안 식구들은 잠자의 결근으로 인해 행여 그가 해고를 당하여, 사장에게 진 부채를 갚지 못해 모두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부채의 도식은 포식자의 덫의 도식과도 유사하다. 포식자, 가진 자가 던져놓은 미끼인 고리대금을 자신을 위한 달콤한 미래의 양식으로 착각하여 다가오는 피식자, 못 가진 자들의 헛된 희망은 단시간 내 죽음과도 같은 깊은 절망으로 바뀐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출처: louisien.com


 

그레고르 잠자는 부채의 덫에서 온 가족을 살려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앙상한 다리들과 더듬이로 이루어진 낯선 몸뚱이를 이끌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직원으로서의 사명감에 대한 자기변호를 쉴새 없이 읊조리며 자기 방문을 열고 지배인과 가족들 앞에 출몰한다. 더 이상 쓸모 없게된 앙상한 벌레로 퇴화한 그의 출몰에 지배인은 아연실색하여 도망치고 가족들은 힘겹게 기어 나온 그를 다시 방 안으로 쫓아버린다. 그는 하루 아침에 한 집안의 가장에서 일할 수 없는 불구자로 바뀌어 방 안에 감금되어 버리고 만다. 벌레로서의 낯선 사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레고르에게 과연 어떠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다 퇴화한다. 그러나 복지 사각지대는 오롯이 가족이 책임진다?

 
‘인간은 항상 진화하고 성장하며 소통하는 존재’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25세를 기점으로 노화를 시작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체적·정신적으로 퇴화하며 그렇게 서서히 소멸의 시점으로 다가간다. 젊은이로 사는 것보다 노인으로 인생을 사는 시기가 훨씬 길어진 인간에게 육체적·지적인 퇴행은 명백한 자연의 이치이다. 소위 ‘정상인’으로 판명된 자들에게 신체적 운동 능력이 둔화되고 지적인 활성화가 더뎌지는 퇴행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더디게 진화하는 자들에게 유난히 혹독한 나라이다. 장애인들, 노인들, 무직자들,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우리사회에서 철저히 비가시화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방 안에만 숨어산다.

타인들과 소통하는 언어를 잃고 소위 ‘정상인’의 습성들을 망각해나가는 벌레로 퇴행한 그레고르 잠자는 현대 사회가 소외시키고 있는, 진화의 속도에서 이탈된 사람들의 처지를 빗대고 있다. 그레고르의 누이와 어머니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방의 벽과 천장을 기어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위해 방안의 모든 가구들을 들어내는데, 그레고르는 필사적으로 초상화 액자 하나만은 사수하고자 고군분투한다. 비록 모든 사회적 소통 수단-상호 대화와 자기 실현 가능성을 잃고 직립보행에서 기어 다니는 처지로 바뀐 그이지만,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가 가진 존엄성의 마지막 보루로서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그만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등을 가격당하고 만다. 진화의 속도를 거스르는 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주는 먹이를 먹고 조용히 순응하는 밥벌레로서 충실한 것이다.

절대적 사회적 약자인 그들은 이렇게 일체의 사회적 삶에서 유리된 채 복지 사각지대에 내던져 진다. 오로지 가족 구성원의 희생과 조력 없이는 생존마저 위협받는 장애인들과 알츠하이머 환자, 노인들은 가족들과의 소통에서도 철저히 제외된 채 방목과 사육을 당한다. 그레고르의 늙은 아비는 수위로 재취업하고 눈이 어두운 어머니는 바느질삯으로 가정을 돕고 어린 누이는 학업을 이어나가지 않고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해서 빚을 갚고 가정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동시에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돌보야만 한다. 방 안에 유폐된 그레고르가 누이의 바이올린 연주에 홀린 듯 기어 나와 거실에서 음악을 향유하다가 집 안의 하숙인들에게 발각되었을 때, 벼랑끝으로 내몰린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존재 자체가 가족 공동의 평안과 미래를 좀먹는 위협 요소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예전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혀 곪고 부패하여 그가 숨을 거두게 되었을 때, 온가족은 오랜만에 나들이를 떠나고 한결 가벼워진 미래를 향해 기지개를 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한 사회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안위와 복지에 무관심하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때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가족은 그들과 함께 몰락하고 만다. 끝내는 가족조차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몰락하게 만드는 사회를 그린 카프카의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묵시록과도 같다. 약육강식의 사회, 가계 부채의 덫, 복지 사각지대의 유일한 보루로서의 가족의 희생, 사회적 약자들의 도태 등과 같은 화두는 탐욕스런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들이기에, 카프카의 <변신>은 오늘도 여전히 현대적이다.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번 강의 주제는 ‘함과 됨’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한 개인의 자각으로부터 싹트는 것은 도시사회에서입니다. 농경사회에서나 유목사회에서는 이런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는 노인들이 결정해주고, 유목사회에서는 유목민들을 이끌고 목초지를 찾아서 앞장서는 사람들이 결정해 줍니다. 도시사회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 개인에게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떠오릅니다. ‘뭘 할까?’ 레닌의 책으로 유명해진 질문이지요. ‘무엇을 할 것인가?’

‘함과 됨’은 둘 다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한다’ 하고, 어떤 때 ‘된다’고 하지요? ‘함’과 ‘됨’이 운동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라는 것은 분명하죠. 사람이 하는 것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 하는 것이든, 또 무엇이 어떻게 되든 ‘하는 것’, ‘되는 것’은 모두 운동을 나타내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능동성이 크고, 하나는 수동성이 큰 운동 형태입니다.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태초에 운동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운동이 뭡니까?”

“시간과 공간에서 뭔가 바뀌는 것이요.”

“원자론에서는 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를테면 고대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과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은 어떻게 다릅니까? 조금 더 쉬운 문제부터 접근을 할까요? 고대원자론자들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고대원자론자들 전통이 로이키푸스(Leucippus)에서 시작해서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에피쿠로스(Epicuros),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이렇게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 사람들이 밑에 깔고 있는 가장 큰 가정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원자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겁니다. 그 외에는 없다, 원자는 수적으로 무한하고 공간은 외연으로 무한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운동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죠?”

“원자들의 충돌로.”

“예, 충돌과 반동으로 이 세상이 생겨났다 그러는데, 그러면 원자들이 왜 충돌하게 됐는가? 원자에 무게가 있습니까? 있지요? 그런데 무게가 있는 것들은 현상계에서 모두 수직 하강 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현상적으로 보면 원자는 무게가 있고 무게가 있는 것은 외부의 간섭이 없으면 수직하강운동을 한다, 그런데 무한한 공간 어디에 앞, 뒤, 좌, 우가 있느냐? 그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을 하죠?”

“사방으로 낙하한다.”

“사방으로 낙하한다는 거, 제 갈 길이 있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거기서 충돌을 하게 되나요?”

“빨리 떨어지게 되면…….”

“저 친구는 지금 갈릴레오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질의 물리학은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뒤로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의 물리학인데, 현상계를 이루는 중요한 것들에는 저마다 제 자리가 있다, 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하고, 돌이나 흙은 밑으로 떨어지는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운동체의 본성상 그렇게 되어 있다고 질로 설명을 하는데, 갈릴레오의 실험이 있은 뒤로 그게 다 사라져 버립니다.”

말하자면 등질적인 운동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고전물리학’이 자리 잡게 됩니다. 뉴턴(Newton)이 앞장섰고 라플라스(Laplace)가 철학이론으로 뒷받침을 하죠. 등질적인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제가 뭡니까? 등질적인 공간과 등질적인 시간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등질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시공을 통틀어 꼭 같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초로 우주 공간을 등질적으로 보고 원자를 등질적인 실체로 본 것은 고대원자론자들입니다. 대단히 큰 혁명입니다.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어떻게 확보되는가? 그리고 정말 자연계에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실재하는가? 혹시 우리 의식에만 있는 시간과 공간은 아닌가?

아이작 뉴턴(1642~1727) / 출처: www.bbc.co.uk

데모크리토스 같은 사람은 원자들이 이합집산을 해서 이 우주가 생성된다고 이야기할 때 우연히 그 가운데 하나가 충돌을 하게 되면서, 여러 놈이 그에 대한 반작용을 하여 복합체들이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발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자가 운동의 주체다 하는 말이 겉보기엔 가장 무책임한 이야기 같고 어쩌다 그렇게 됐다는 말도 무책임한 말 같지만, ‘우연’이라는 것을 끌어들인 것은 서구 ‘운동’ 이론을 뒷받침하는 주춧돌을 놓은 것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처음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려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는데,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말 생각나요? 당구공을 예로 들어서 얘기했죠. 원자론도 로이키푸스에서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에서 루크레티우스로 오는 동안 그 나름대로 진화를 합니다. 이 이론이 날이 갈수록 세련된 모습을 띠는데,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로마의 시인이자 유물론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현상계에서 바람 없는 날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듯이 원자가 위에서 아래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경사운동을 한다, 무수히 많은 원자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중에 한 놈이 살짝 휜다, 그렇게 해서 충돌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로 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충돌과 반동을 일으켜서 형성되고 해체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복잡한 증명들을 합니다. 우주공간이 무한하고 원자가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 우주공간이 유한하고 원자가 무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우주공간과 원자가 둘 다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대해 질문하고 그런 경우에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서양 철학의 전통이 그리스 철학에 기원을 두고 있고, 그리스 철학은 인도철학과 중국철학과는 다릅니다. 물론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에도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동양철학의 전통은 증명에 약하고, 또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나 서양철학에서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책임지고 증명을 해서 다른 사람이 수긍을 해야 그 다음 단계로 진행을 합니다.

정지해 있는 것은 정지해 있는 것이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해 있는 것은 영원히 정지해 있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운동한다, 그 운동은 등질적인 수평운동이다, 수직으로 하는 중력에 의한 운동은 가속이 붙지요. 이 운동 관념이 교과서에 나오는 거의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우리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운동 관념인데, 운동과 정지는 다르고 운동하는 것은 정지하지 않고 정지하는 것은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한다는 식입니다. 여러분 공간은 운동을 해요, 안 해요? (대답 없음) 공간이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여러분들 여기서 수학이나 자연과학, 물리학 하는 분 계십니까? 없어요? 실제로 등질적인 공간이란 측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공간관념이란 것은 유클리드기하학 공간입니다. 이를테면 삼각형을 내각의 합이 180도인 세 직선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평면공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간을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양심, 본래적 자기로 회귀하는 실존적 결의[Q 선생의 閑談]

서영화의 하이데거론

 

이규성(웹진편집위원장, 이대교수)

 

최근(2013년 2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와 무의 관계에 대한 연구](서영화)가 나왔다. 이 논문은 학위논문의 성격이 요구하는 대로 국내외의 주요한 1, 2차 자료를 넓게 활용하여 연구자의 논제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으며, 자신의 차후의 연구 과제를 언급하고 있다. 학위 논문의 성격상 자신의 과감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 것 또한 후일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평자(評者)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이데거의 주제이자 서영화의 주제인 존재와 무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저자가 잠시 미루고 있는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적 해명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1945년 해방 이전부터 특히 박종홍, 고형곤, 신남철, 박치우, 조가경과 같은 초창기 철학 연구자들의 논의의 범위 안에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박종홍은 존재의 문제를 역사철학적으로 발전시킨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운(歷運) 개념을 ‘우리의 철학’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천명(天命) 개념과 연관하여 재해석하고자 했다. 박종홍은 존재의 극치에서 만나는 무(無)를 이학의 무극(無極) 개념 그리고 불가와 도가의 공(空)과 무(無)의 개념과 연관하여 해석하고자 했다. 이 맥락에서 박종홍은 ‘무의 형이상학’을 20세기 주요 철학적 과제로 간주하고, <무>를 통과해서 존재의 역운에 동참하고자 했다. 한편 박종홍은 전통적 선비의 현실참여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요구를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빈곤을 극복하는 강력한 국가의 형성을 위한 실천적 개입으로 보았기 때문에 야스퍼스의 존재(포괄자) 개념을 포함하여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말하는 인간론을 무기력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신남철, 박치우는 현실 문제를 둘러싼 정치사상적 주제를 주요 과제로 설정했기 때문에 하이데거를 매력 있고 심오한 철학으로 보면서도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도 존재론이 갖고 있는 초탈적인 비역사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고형곤은 구체적인 사회적 연관들을 제거하고 존재론을 선불교의 마음의 현전(現前, 현전은 마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앞에 드러난다는 선종의 용어)과 연관하여 현상학적 해명을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서양의 현상학적 운동이 과학기술적 객관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극복하고자하는 활력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긴장을 상실한 도인의 수양론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나 동아시아의 선종을 고립된 실체로 다루는 정태적 태도에 빠져 있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그 후 하이데거 연구자들 가운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는 고통스러운 생명 현실의 존재[有]와 이에 대한 부정인 무(無)의 엄중한 차이를 관찰하라는 붓다의 단호한 태도([아함경],[가전연경])를 무색하게 하고, 고난과 참회가 갖는 수양론적 의의를 무시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영화의 [하이데거론]은 하이데거에 입문하거나 평가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논제들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평자는 대학시절 실존주의라는 이름 아래 알려진 하이데거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었으나, 대체 존재론적 차이가 무엇이며, 전기와 후기의 차이는 무엇이고, 해석학적 해명이란 무엇인지가 애매모호한 채로 군사독재 시절을 보냈다. 그 후 나이가 먹어가면서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인간의 이상적 모습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궁극적으로는 자유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동양철학, 가톨릭 신비주의나 카발라철학, 셀링을 비롯한 사변철학적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도교의 연금술적 자기변형의 기술, 심지어 도교와 불교에 바탕한 안토냉 아르또(Antonin Artaud)의 연극론에서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도 새로이 변형된 신체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주와의 일치에서 오는 자유 즉 신체 내 각 기관들의 속박에서 벗어난 연금술적 해방이다. 말(로고스)로 다하는 그리스적 전통의 예술이 아닌 동양의 연극이 보여주듯 행위의 상징을 통한 새로운 인간성의 형성이 예술의 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이데거의 철학도 비록 그가 가치론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비본래적 단계에 처해 있는 전락한 삶의 양식으로부터 본래적 실존을 통과하여 생성의 유희로서의 존재를 향유하는 삶 즉 자유를 지향하는 가치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혹은 신들이 있었던 태고적에 나타났다가 상실된 과거의 사상이면서도 결단을 통해 접근해야하는 미래적 가치이다. 이 점에서 결단의 순간은 신약성서의 구도처럼 결정적 시간(chronos)이며, 이 시간을 통해 선구적 삶을 살게 된다. 자유와 시간, 존재와 시간의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 존재와의 합치를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하려는 문맥에서 하이데거는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즉 존재 그 자체를 상실해 간 과정으로서의 서양 철학사를 비판하게 되었다. 존재자의 근거인 존재를 마치 존재자의 원인인 것처럼 보는 전통 형이상학, 특히 유대 기독교 전통과도 연관된 제일 원인으로서의 신의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철학, 심지어 유물론적 아르케(원인)를 근원으로 제시하는 자연철학도 어느 특정한 존재자를 존재로 오해하는 존재 망각의 사유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가 저녁의 나라(Abendsland) 서양의 자연과학을 전통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보고, 존재자를 물리적 객관으로 환원하여 객관성을 존재로 생각하는 습관을 비판적으로 본 것은 흥미로운 과학론으로 보인다. 형이상학의 완성태인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는 철학의 종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영화가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전 후기를 일관되게 바라보는 시야를 갖고자 하고, 헤겔, 니체, 들뢰즈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생성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 것은 하이데거의 중심 논제에 육박해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생성을 생과 죽음이 일어나는 과정으로 보아 생만을 강조하고 죽음이 없는 생명성에 집착하는 니체나 들뢰즈를 극복하려는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무(無)에 접근하려는 태도는 인상적이다. 평자의 관점에서는 하이데거 철학의 이러한 측면은 영국 학자 매기(Bryan Magee)의 언급처럼 쇼펜하우어의 관점과 공통된 것이다(The Philosophy of Schopenhauer, 1983). 개별적 존재자의 죽음을 수용하고,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무에 대한 긍정을 통해 존재와 무의 통일성을 사유한다는 사상은 존재와 무의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적 사고나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영화에 의하면 이러한 통일에서 존재와 존재자가 원인과 결과라는 신학적 혹은 과학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존재자에게 줌(Didonai, Lassen) 혹은 허여(Zugeben)의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는 하이데거의 견해가 고대 그리스적 연원을 갖는다하더라도 그래서 신학적 구도를 떠나있다 하더라도, 그가 결정적 결단의 시간을 중시한 것과 함께 줌이라는 말 자체는 쉽게 또 다시 신학적 은총의 관계와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운은 인간 현존재의 능력의 범위를 무한히 넘어서기에 인간은 단지 동경과 기다림의 상태에 있게 되는 기독교 종말론적 구원사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와 연관하여 데리다의 연구(Jacqes Derrida, [정신에 대하여], 박찬국 옮김, 동문선, 2005)가 보여주듯 서양 역사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헤겔처럼 하이데거도 기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정신’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주저에서 사용함으로써 사고의 불일치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서영화는 여러 군데에서 암시적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와 해석에 치중한 저자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있다.

또한 저자는 존재론적 (차이) 문제가 전 후기를 관통하는 하이데거의 관심임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세계와 인간이 맺는 관계의 현실적 국면을 해명하려는 데에 관심을 보이는 전기와 본격적으로 존재론적 문제에 개입하는 후기의 차이를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세계를 해명하는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의 발전사적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존재와 연관하여 세계의 문제를 둘러싼 여러 전문 연구가들의 입장을 소개하고 그들에 대한 간략한 비판을 통해 (전기의 인간관이 근대적 주체성이 아닌 현존재의 유한한 실존의 무력성과 절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슐츠와 헤르만의 입장을 지지하면서)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려는 저자의 자기의식적 태도는 연구자의 기본을 준수한 것으로 보인다.

평자가 서영화의 논문을 읽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관심을 일으킨 것은 저자가 제시하는 하이데거의 ‘양심(Gewissen)’ 개념이었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견디고’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스스로를 단독화하는’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는 존재에 귀의하는 진정한 삶의 양식으로 살기로 결의하는 키에르케고르적인 독자적 의지일 것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견해가 ‘유아론적 세계’(한나 아렌트)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양심 개념이 시회적 소통성을 무시한 원자적 개인은 아니라고 한다. 양심은 세인(Das Man)의 관심(도구적 삶)을 초월하여 본래적 자기로 회귀하는 실존적 결의를 가진, 그래서 현존재 자신을 목적으로 결단하는 자기성이다. 진정한 가능성을 향한 자기가 양심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견해를 서영화는 변호하고 있다. 평자 역시 하이데거의 이 견해는 현대인이 상실한 최대의 가치라고 본다. 진정한 본래적 소통적 사회성은 고독한 자기 관심에의 열정을 통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초인들은 언제나 텅 빈 광야로부터 왔다.

그러나 저자도 주석에서 소개하듯이 한나 아렌트의 비판 즉 하이데거가 유아론적 관점에 빠짐으로써 동료와의 분리를 추구한 결과 전체주의적 국가 사회주의 정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이 문맥에서 평자는 양심의 정의를 칸트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평자는 하이데거와 인도의 우파니샤드(Upanishad) 철학을 비교하여 인도인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하이데거는 데리다도 비판하듯 동물을 세계 개시성이 없는 본능적 충동에 의거해서 사는, 그래서 인간과는 단적으로 구분된다는 ‘인간 중심주의적’ 착상을 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동물학을 싫어하는 기독교적 습성을 가지고 당시의 동물학적 정보를 이용하여 나방과 같은 곤충들이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언급한다. 그러나 현대 동물학은 동물의 인지 구조에 대한 풍부한 전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동물도 환경 세계를 갖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우주 중심주의적 사고를 중시하는 하이데거가 그러한 편견을 고집하고, 나아가 동물과의 연속적 유대성을 무시한 양심 개념을 자명한 전제처럼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역설이다. 그리고 존재 중심의 역사철학은 절대정신처럼 역사에 대한 숨 막히는 지배력을 갖고 세계를 누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에 비해 우파니샤드 철학은 광물, 식물, 동물, 인간, 천상의 존재들은 전체로서의 우주와 하나임을 자각한 초인적 존재가 자신의 우주를 단계적으로 상실하여 가장 작은 세계를 갖게 된 존재가 광물과 같은 존재라는 관념을 전제하고 있다. 동물은 인간 보다는 협소한 세계를 갖지만 세계를 인간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같을 뿐만 아니라 우주를 최대한 광대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초인의 관점을 근본적이고 무의식적인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유를 원한다. 이러한 관념은 태고적 영웅시대의 잔혹한 투쟁사를 겪고 만유의 우주적 유대를 최상의 진리로 깨닫게 된 전사 계급의 자각의 결과였다. 불교의 만유 불성론은 여기에 기원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의거하여 ‘양심 불안(Gewissensangst)’([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V 1 ,65장, 1818)을 다른 생명체를 식용으로 삼는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된 죄의식에 연원하는 것으로 본다. 이 죄의식이 우주와의 분리를 불안의 근거로 보는 철학을 창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우주적 불안의 극복은 우주와의 합치에서 오는 ‘평정(Gelassenheit, 방하放下)’에서 이루어진다. 우주적 연대성의 상실에 인간의 근본 불안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불안을 감지하고 다시 우주적 유대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양심이 아닐까. 그리고 이 양심을 사회 정치적 평등의 이념으로 전개는 것이 동서양의 신비가들의 희망이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그들의 언행에 관한 서적들이 증언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수도회 소속인 둔스 스코투스도 성인 프란시스코의 정신에 따라 고독과 우주적 유대를 결합하는 자각을 사랑으로 보았다. 하이데거의 절박하고 강렬한 본래적 실존은 바로 이와 같은 평등의 유대와 결합했을 때 정치적 잔혹성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달달볶는 개신교적 내면성이 갖는 불건강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평자는 동양의 지혜를 정치사상적 문맥에서 발전시키려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이데거 철학의 절박한 성실성을 매력 있는 것으로 수용하면서도 그가 갖고 있는 어두운 측면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영화의 [하이데거론]을 유심히 읽었으며, 평자의 생각을 정돈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논문의 후반에서 무의 문제와도 연관된 생성의 문제를 후속 연구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로서 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윤리적 의미도 갖고 있다. 오늘 날 군산 복합체의 기술과학 권력과 정치가들과 결탁한 화폐 권력은 생사의 의미를 움켜쥐고 있으며, 자신을 호위하는 많은 과학적 철학과 언어규칙 철학을 생산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생사의 의미를 추구하고 양심에 의거하는 생성의 철학은 이러한 권력의 철학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동시에, 귀부인이 넘보는 돌쇠의 유혹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듯 고고한 자태를 유지할 것이다.

 

2013, 8, 23.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 철학자의 착상은?[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2. 삶-정치의 대안들:

네트워크 정치, 이웃과 연계하기, 투명성 요구하기, 인권주장하기/12강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무한 경쟁으로 형성된 현재의 경제적 결과물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인간 존엄성 차원에서 인정하는 프랑스 혁명과 맞물리는 산업혁명을 근간으로 한다. 산업혁명 전후의 자본가는 청교도적 성실성에 기초하여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와 자본주의 노동 윤리를 엮어서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루터나 캘빈의 소명론을 직업 소명론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촉발시키는 자본주의는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출발점을 지닌다.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루터의 발상이나, 그 속에서 형성된 ‘신의 소명’으로서 직업 소명은 어떤 경제 활동이든지 간에 신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정신적 기반이 된다.

무조건 부를 축적하고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기의 순수한 노동 행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겨나는 빈부 격차 문제는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를 통해 서로 나누게 된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이 만민 평등을 정치적으로 보편화하기 위해 부르짖은 개념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점을 상기해도 이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자유와 평등만을 부르짖은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박애’라는 용어도 동시에 작동한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집단들이 중인 계급들이었고, 그들은 중인 계급의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라는 발상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더불어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존’의 공동체를 배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통해 빈부 격차가 생겨도 ‘박애’를 통해 ‘공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는 발상이 이미 프랑스 혁명에 담겨 있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중인 계급들이 결국 초기 자본가로 탈바꿈하며,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팽창하는 자본주의를 야기하지만, 그 근간을 만든 초기 자본가들이 ‘박애’를 인간다움의 기본 개념으로 지녔다는 점을 상기하자.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처럼, 삶의 공동체로서 경제 공동체의 가능성, 공존 공동체의 가능성을 소규모 집단의 행위를 통해 보편화하자는 발상은 역사적 문맥을 지닌다. 오늘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세계경제는 공동체적 삶, 공존의 삶을 거부하지만, 그 출발점에서 원래는 공존의 삶을 근간으로 한다. 그런 측면들이 희석되고 망각된 채 여기까지 흘러왔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계속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진행되는 세계 경제의 방향은 그런 발상들과 배치되는 길을 걸었고, 그 결과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빈부 격차가 어떤 상황으로까지 이어질까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계속해서 경제가 악화된다면, 민주주의도 무기력해질 가능성이 높다.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조차 유린당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일찍부터 이것을 통찰한 사람 중의 하나가 철학자 칸트이다. 칸트는 그의 정언명령의 근간인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말이 현실에서 철저히 관철되기를 바랐던 철학자이다. 그런데 당시에 펼쳐지는 상인 자본주의를 목도하면서, 그의 정언명령에 철저히 위배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임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게 되리라 예측했다.

물론 이와 더불어 칸트는, 비록 어떤 사회가 아무리 민주적이어도, 경제적 빈곤이 심하면 동시에 인간다움이 파괴된다는 점도 간파한다. 민주적 요소가 파괴되어도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며, 민주적 요소를 실현해도 경제적 빈곤이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된다는 것을 철저히 고민한다. 그래서 칸트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적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며, 정치 역할이 경제 민주화를 이루는 데도 결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칸트는 공존하는 경제적 삶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시민사회로서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칸트는 왜 자신이 그런 대안을 설정하는지를 역사철학 관련 글들(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을 참고하라.)에서 보여준다. 경제를 끌고 나가는 개인 하나하나의 본성을 살펴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이기심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이기적 본성을 ‘공존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형태로 유도할 수는 있다. 물론 그 유도는 인간 이전에 이미 자연이 그렇게 인간을 조직했지만, 조직화된 프로그램을 실현하려면 정치적 노력으로서 ‘국가’의 역할, 국가들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국제연합’ 그리고 ‘세계시민사회’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발상을 고진이 칸트로부터 이어받아서 ‘세계공화국’으로 발전시킨다. 고진은 팽창하는 세계경제의 위기 가운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소시에이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는 경제 공동체이다. 판매자와 생산자가 일치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고진은, 이런 대안은 자본주의가 없는 공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태도로는 이런 대안이 생겨날 수 없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대안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소시에이션은 고진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그에게 영향을 준 칸트에게서 이미 나타난다. 중세 교회가 지니는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는 근대 도시 국가에서는 ‘자유 도시’로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파리 꼬뮌, 즉 꼬뮌 같은 정치 공동체 형태로 논의되다가, 근현대의 협동조합이나 직업단체로 변형된다. 칸트와 헤겔의 어소시에이션은 협동조합 내지 직업단체와 유사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 프루동이나 마르크스에게서도 고진의 어소시에이션,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나타난다.

현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존 공동체’라는 발상을 가지고서 철학사를 거슬러가면, ‘어소시에이션’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포인트는 ‘경제와 정치의 연결’이며, 그런 연결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 문제는 전적으로 경제로만 해결할 수 없다. 정치적 역할이 필요하며, 그래서 국가의 역할을 재고해야 한다. 이렇듯 고진이 주장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어소시에이션의 주도자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 민간,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규모 공동체이다.

현재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 세계경제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이론가들이 주장한 방식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이론가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인터넷 세상이 생겼고, 그로 인해 펼쳐지는 사이버 공간은 새로운 경제 활동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기존의 경제 문제 속에서 생겨나는 반 민주주의적 행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대안들, 정치적 삶의 공동체를 만들고, 정치적 네트워크를 현실 공간과 가상 공간 모두에서 야기하는 새로움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공존 공동체의 유형은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자본주의에 적용하려고 했던 대안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염두에 두면서, 특수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학자들이 제시한 대안들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1980년 이래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변화 양상을 간단하게 훑어보자.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여파로 1990년대에 각 분야에서 시민단체가 다양하게 형성된다. 여러 유형의 시민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때 형성된 많은 NGO들은 한국 사회의 삶을 공존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이웃과 연계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를 실현하고, 인간 존엄성과 인권을 실현하는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그런 노력의 뒤 끝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후세들이 양산되었다. 사실 1980년대 이래로 진행된 많은 정치적 노력으로, 한국의 인권이 개선되고, 공권력이 우리네 삶을 마음대로 흔들 수 없는 장치들도 마련되었다. 그에 반해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진행되면서, 무한 경쟁이라는 압박감을 낳았다.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노동 구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은 널뛰기를 하며, 불행 지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쏟고, 경제에 더 매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기만 하면 된다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처럼 보인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정치적으로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가치관이 만연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왜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켰을까? 그것이 곧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 문제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덕적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사회 정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들 스스로 이미 반증하고 있다.

<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③-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대다수의 국민들은 국정원이 어떤 기관인지는 알아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분명히 알고 있는 점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그들은 막강한 권한을 국민도 모르게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회조차도 그 예산 집행 내역을 알 수가 없는 집단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사용한 권력은 한국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일에도 동원되었다는 점도 일부 밝혀진 바 있다.

이번 대선 정국에서 드러난 국정원 댓글 사건은 그들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집단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댓글 작업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직원은 종북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종북이라면 그들은 가장 위험한 종북 세력임에 틀림없다. 남북 대치 국면에서 북을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은 남한 사회의 국론 분열과 민주주의의 퇴행일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선과정에서 이루어진 국정원의 행위는 그 어떤 공작 정치보다도 유치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막대한 세금을 들여 무엇을 하나 했더니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댓글 작업이었다. 마치 값비싼 다이아 반지 사주었더니 집안 유리나 자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울러 박근혜 정부 역시 이번 국정원 댓글 사건의 피해자임도 드러났다. 왜냐하면 박근혜 정부가 처음부터 정통성을 잃은 실패한 정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출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법상 장물 취득죄는 미필적 인식의 성립만으로도 적용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불거진 이 문제에 대해 적어도 미필적 인식의 차원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이 훔친 민심이라고 하는 장물을 취득한 정권이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이 이번 문제에 대해 미봉적으로 대할수록 국민들은 그들의 인지 가능성에 대한 더욱 가능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가장 상식적인 국민들의 판단은 구린 구석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는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덮으려 하지 말고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과 같은 권력 기관이 더이상 민심을 우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역적 행동을 하지 않도록 철저한 개혁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보기관의 특수성이라는 수사를 동원해서 그들의 범죄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패한 정권 혹은 성공한 정권은 정권초기에 나올 말이 아니라 정권을 내려놓은 이후에 나와야 할 평가인 것이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⑦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⑦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학생들은 모처럼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를 시작하나 싶더니 중동무이를 하고 마는 나에게 못내 불만스럽고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모르는 척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변화의 필요는 있을 것이 없고(거나) 없을 것이 있는 상황에서 생겨납니다.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왜 때매김이 미래로 되어 있는 있을 것이라는(또 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야 할 것(없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지 간단하게나마 밝혀 놓는 게 좋을 듯하군요. 지금 있는 것, 곧 현재는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텅 비어 있습니다. 지금 있는 것은 하나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이 하나는 모든 관계에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크기가 없는 것, 따라서 지속도 변화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헤겔의 말마따나 지금 있는 것(헤겔 식으로 말하면 순수 존재)은 지금 없는 것(헤겔 식으로 말하면 순수 무)이나 마찬가지로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의 처지에서 보면 지속이냐 변화냐는 살아남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하는 선택의 기로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속해 왔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러저러한 변화를 거쳐 왔다는 기억 내용만으로서는 삶에 도움이 되는 지침이 될지 모르나 삶의 보장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은 걸러진 것, 곧 규정된 정보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직 없는 것인 미래는 규정되지 않은 것, 무엇이라고, 어떻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속된 것, 또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변화된 것을 구체적인 자료〔data〕를 통하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있었던 것이 없다, 없었던 것이 있다, 없었던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을 기초 삼아 정보 철을 만들지만 그 기억된 정보의 사용 가치는 미래의 상황이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에 저장된 정보 철을 뒤지는 인간의 의식이 따르는 통상 경로가 있습니다. 원칙은 간단합니다. ‘간단한 것에서 먼 것으로’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라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자료들을 뒤져 나갑니다. 생명 유지는 시간 축을 따라 이루어지니까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과거가 일차 탐색의 대상 영역입니다. 시간 축에 따라 현재로부터 더 먼 과거와 더 가까운 과거 사이에는 이런 대응 관계가 성립합니다.

 


 

가장 가까운 과거의 시점에서 보면 현재는 있을 것(없을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체의 지속과 변화를 통한 생명 유지의 처지에서 살피면 늘 있을 것(없을 것)을 중심으로 있는 것(없는 것)에 대한 정보를 기억에 저장하고 정보 철을 만들고 찾아왔다는 말이 됩니다. 있을 것(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이 다 있고, 없을 것(생명 유지에 장애가 되는 것)이 다 없다면 생명의 유지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테니까 기억도 정보도 필요 없는 생명의 순수 지속만 있었을 것입니다. 생명체가 생명 유지를 위해 지속이냐 변화냐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데에는 이 세상이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있을 것이 없기도 하고, 없을 것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는, 결핍과 위협이 때로는 간헐적으로 번갈아 들기도 하고 때로는 집중적으로 한꺼번에 몰아닥치기도 하는 세상이라는 까닭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 것과는 달리 생명체에게, 그리고 특히 본능으로 전화한 생체 기억에 의존해서 살 길을 찾는 생명체들과는 달리 의식에 주어진 외부 세계의 기억에 의존해서 살 길을 찾는 인간에게 가치 판단이 사실 판단에 앞선다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합니다.”

이쯤 해서 물의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렇다면 미래가 현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윤구병 도서출판 보리 대표. 출처:http://news.kyobobook.co.kr/

“그렇지요. 생명체에게는 그렇습니다. 생명체에게 현재란 무엇입니까? 살아 있음 아닙니까? 이 살아 있음이 이어지느냐, 끊어지느냐, 다시 말해서 목숨이 앞으로도 붙어 있을 것이냐, 떨어질 것이냐가 문제지 우리가 지금 여기 살아 있음에 무슨 주의를 기울여요? 지금 여기 살아 있음에만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면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 다 부질없어져요. 우리가 왜 하나에다 존칭을 덧붙여 하나님〔唯一神〕이라고 해요? 지금 여기 있음이 바로 하나이고,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 무엇은 과거도, 미래도, 시간도, 공간도, 다 여의고 자기 자신에게만 주목하는 자라는 뜻에서, 불교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번뇌 망상을 벗어던졌다는 뜻에서 하나님, 유일신, 부처님 뭐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경지는 존재론의 탐구 영역을 벗어나요. 그런 경지에 이르면 학문이고 철학이고 다 필요 없어요. 그야말로 똥 친 막대기만도 못하지요.

이런 말을 하면 지나치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사실 판단이 가치 판단에 앞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모두 하나님이나 부처님 경지에 있거나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멍청이들이에요.”

제 말이 지나쳤나요? 아마 지나쳤을 겁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지금 ‘있을 것이 없다.’(이 말은 곧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라는 것은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고 아우성인데, 점점 심화되는 결핍감이 끝간 데 모를 탐욕으로 전화되는 판에 지금 있는 것에만 주목하자는 말이 당키나 하나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없을 것이 있다.’는 게 세 살배기 아이도 알 만큼 산더미를 이루고 있어서 물질세계에만 국한하더라도 온갖 산업 쓰레기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판에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하여 이른바 선진되었다는 나라에서 국가 정책으로 복제 인간까지 만들어 내려는 꿍꿍이셈을 품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지금 여기 있는 것에만 넋을 팔고 있다는 게 말이나 돼요?

어느 시대에 누가 맨 먼저 그 말을 썼는지 모르겠으되,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리더군요.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 철학자의 착상은?[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철학자의 착상은?-12강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1. 세계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21세기 우리네 한국인들의 삶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 어떤 단어가 금새 생각날까? 언론에서도 일상적 대화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경제 위기, 지하경제 활성화와 같은 말일 게다. 비록 현 정부가 지금은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지만, 대선 기간에는 복지 정책을 강조하고 통합진보당이 이슈화한 ‘서민들을 위한 복지정책과 경제 활성화’를 부각시켰었다. 여야 모두가 그때는 복지 이슈를 선점하려고 했었음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화두는 경제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볼 수 있다. 도대체 경제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경제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인가? 경제만 잘 되면 모든 일이 잘 된다고 할 수 있는가? 경제 문제 이외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없는가? 다른 문제가 해결되면, 경제 문제도 해결되고, 우리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될 수도 있는가?

질문을 던지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번 강좌의 전체 제목이 떠오른다. 역시 경제이다! 공존 경제를 위하여! 물론 여기에서 강조점은 경제가 아니라 ‘공존 경제’이다. 그러므로 ‘공존’을 화두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는 경제가 모든 것의 척도가 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경제 문제에 집착해 왔다. IMF 때문이기도 하고, WTO 여파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철저한 경제 개방인 FTA를 단행하는 가운데서 세계화를, 신자유주의를, FTA를, 중도 실용주의를 순차적으로 진행시켜 왔다.

http://blog.daum.net/j73lp7d3td/24

그러나 이 와중에 전 세계를 뒤흔드는 금융 사건을 겪게 되었으니, 바로 모기지론이다. 미국인도 어엿한 자기 소유의 집을 마련한다는 꿈을 실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세일즈 맨의 죽음’이라는 소설 내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자기 집을 마련하려고 은행 융자를 평생 동안 갚아 나간다. 그러나 마지막 빚을 갚기가 어려워지자, 자살을 하고 그 보험금으로 빚을 완전히 갚으면서 집은 그의 소유가 된다. 그 부인은 주인공의 무덤가에서 혼자 넋두리를 한다. ‘이제 빚을 다 갚아서 우리 집이 되었는데, 그 집에 살 사람이 없네!’

소설의 결말은 슬프지만, 현대인 모두가 일생을 그렇게 죽음으로 마감하지는 않는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 융자를 받고, 몇 십 년에 걸쳐서 갚아나가는 방법으로 손쉽게 집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이것을 악용하여, 한 사람이 여러 채의 집을 구입하고, 집값이 오르면 다시 되팔아서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금융권에 문제가 생기면서 융자 금리가 오르고, 집 한 채도 건지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는 소박한 소비자들도 있다. 소위 한국에서 유행하는 깡통 전세라는 말도 이와 연관이 있다. 은행 융자를 악용하여 여러 채의 집을 장만하는 사람들도 모기지론 사태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여러 채의 집을 융자로 장만하는 사람들의 욕심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모기지론을 언급한 것은 비난보다는 금융 상품의 허구성, 소위 버블(bubble), 거품이 어떻게 인간을 망치는가를 지적하고 싶어서이다.

모기지론과 관련하여, 융자를 받은 시민들이 이자를 끊임없이 갚아나가면 금융권에 돈이 쌓이게 된다. 그러면 금융권은 쌓인 돈을 활용하여 금융 상품을 만든다. 금융 상품을 파는 과정에서 은행들 간에, 국가와 국가들 간에 파생 상품이 생겨난다. 금융 상품이 금융 파생 상품을 낳는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모기지론은 집장만을 위한 융자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금융 상품 내지 금융 파생 상품의 역학 고리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은행과 은행의 관계로, 은행과 타국가의 관계로, 국가와 국가의 관계로 전개되면서 전 세계 금융권에 영향을 미치고, 전 세계 경제 활동에 파급 효과를 낳는 시스템이다.

모기지론 때문에, 미국 금융권이 흔들렸고, 그래서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이 역학 구조로 작용하면서 한국에도 그 여파가 있었다. 오마바 집권 초기, 이명박 정권 초기에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알았다.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우리 네 삶은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다.

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미국 경제 이론가들은 서로 상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미국에 만연해 있는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가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고 하면서, 자유 규제, 금융 규제를 강화하라는 목소리가 한동안은 높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미국의 기존 정조를 깨는 것이라서, 시장 구조뿐만 아니라 경제 구조를 포함하여 삶의 구조 모두가 궤도 전환을 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규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여러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금융 파생 상품 문제이다. 우리가 자본, 즉 돈을 가지고 공장을 건설하면, 거기에서 ‘유형의 상품’이 만들어진다. 이 상품이 어떤 유통 경로를 통해 팔리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벌어들이는 돈을 금융권에 투자하여 신용 상품이 만들어지면, 금융 파생 상품을 낳는데, 파생 상품은 또 다른 파생 상품을 낳는 과정으로 이어지며, 공장을 짓는 돈과 동일한 흐름이라 해도 이 과정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금융 상품으로 전환된 돈의 흐름은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돈이 돈을 낳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통제를 하여 원활한 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할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냥 앉아서도 돈이 돈을 벌어서, 그냥 앉아서 수천 억 부자가 되기도 했다가, 그냥 앉아서 수천 억 돈을 날리기도 한다. 공장을 지어서 물건을 만들면, 부도가 나도 그 물건은 남는다. 그러나 금융 상품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한 경제 흐름, 자본 흐름, 금융 상품 흐름은 경제인들 스스로도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국가가 그 흐름을 규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통제 아래 경제가 움직인다기보다는 경제가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체 연결고리를 만들어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 FTA, 등은 국가 간의 장벽을 약화시키다 못해, 국가 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국가를 넘나드는 경제 활동을 가능케 한다. 비록 그 사업체의 출발점은 뉴욕 내지 미국이라고 해도,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 때문에, 그 사업체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전 세계에 문어발식으로 확장되는 경제는 정부가 통제하기에는 힘들 만큼 연결망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 걸친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특정 국가가 그 사업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완벽하게 규제하거나, 완벽하게 미국 내 사업체로 흡수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오늘날 경제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경제 권력이 국가 권력이 되고, 경제가 국가 권력을 능가한다고들 한다. 경제가 곧 국가라는 착각까지 일으킨다. 자본은 팽창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산업 혁명을 통해 한 나라 안에서 팽창을 시도하였다. 한 나라 안에서 할 수 있는 팽창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자, 다른 나라로 팽창을 시도했고, 이것이 제국주의 행태를 낳았다. 그 팽창이 유형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 국한된다면 팽창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금융 상품이다. 무형의 상품으로서 금융 상품은 유형의 상품과 달리 파생 상품을 연속해서 만들어낼 가능성을 지닌다.

경제 팽창은 결과적으로 여러 문제를 야기했는데, 처음에는 ‘빈부 격차’로서 ‘빈익빈 부익부’가 대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80 대 20 사회’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말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정규직이 점차 줄어들고, 비정규직이 활성화되더니, 이제 파트 타임, 단순 아르바이트가 일상 유행어가 되었다. 예전에는 ‘투잡’, ‘쓰리잡’이 익숙했는데, 이제 ‘알바천국’이라는 광고가 익숙하다.

우리네 경제적 삶의 구조는 계속 악화된다고 느끼는데, 각 국가들은, 각 국가의 정부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손을 놓고 있는가? 경제 문제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정책들을 펼치고 있는가? 어떤 국가이든, 노력하지 않는 국가 내지 정부는 없다. 그럼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제 경제가 중심이며, 국가는 자립성이 없는 상황, 즉 국가가 경제에 예속되는 구조라고 말한다. 팽창하는 속성을 지니는 자본의 흐름에 종속되고, 자본을 도와주는 국가로서 역할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경제 팽창 속에서 국가 역할이 약화되고 경제에 종속되는 행보를 계속할 것인가? 동등한 기회와 자유 경쟁을 인정하는 자유시장주의 구조에서 평등 또는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국가는 경제와 별개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재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경제에 의해 재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국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가라타니 고진이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박자 도식(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한다], [세계공화국으로]와 같은 책들을 보라.)을 통해 국가는 자본보다 더 오래된 기원을 지니며,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고유 기능이 있어 왔다고 강조했다. 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단지 경제 문제나 자본주의 팽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이해관계가 우선적으로 작용하며, 국가의 이해관계가 경제 상황을 재편하는 모습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국가와 경제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와 경제는 서로 독립된 항이면서 동시에 상호 작용하면서 변수들을 만들어낸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경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정치 문제와 경제 문제를 같이 아우르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은 다음 질문과도 연결된다. 즉 자유시장주의에서 기회 균등, 평등,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빈익빈 부익부’나 ‘80 대 20 사회’ 같은 말이 풍미하는 상황에서 부를 획득한 사람들 모두가 기회가 불균등하게 주어진 상황에서 특혜를 받거나 불공정 거래를 주도했기 때문에, 거부가 된 것은 아니다. 자유시장주의가 주장하는 것 또한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지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가운데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부를 획득한 것이라서, 현 경제적 상황이 기회 균등이나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단지 경쟁에서 이기거나 진 것이며, ‘무한경쟁’ 구조로 진행되면서 발생한 일들이라는 것이다. 무한경쟁 자체가, 아니면 팽창하는 자본의 속성 자체가 평등과 민주주의를 침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설령 이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해도, 문제는 그런 구조에서는 ‘공존’이 힘들다는 것이다. 자본이 팽창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할 때,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은 – 유형의 상품이든, 무형의 금융 상품이든 –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현재 구조로 진행된다면 판매자는 있는데, 구매자는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하듯이, 정당한 경쟁을 통해 부를 획득했어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 사회적 부담 내지 책임을 지려는 가치관이 필요하다. 자유지상주의 내지 자유시장주의를 택하는 미국 안에서도 분배정의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하게, 낯설지 않게 강조하는 내용이다.

세계경제의 위기 상황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경제와 국가는 서로 독립된 항이며, 국가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면, 정치 차원에서 펼쳐지는 대안이 필요하다. 정치와 경제를 아우르는 대안 개념으로, 고진은 어소시에이션 공동체를 주장한다.

마이클 샌들은 그런 것을 야기하는 도덕적 차원과 종교적 가치에 대한 주목을 요구한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도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는 가치의 중요성을 천명하고, 공동체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미덕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자유 경쟁, 무한 경쟁이 철저히 기회 균등, 개인의 능력 계발에 따른 공정 경쟁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악화일로에 있는 빈부 문제를 방치한다면,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누릴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침해하게 될 것이다. 위기의식을 독려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공존’을 위한 대안들을 ‘공동체’ 안에서 마련하려고 한다.

-다음에 계속-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8월 월례발표회 후기]

?[2013년 8월 월례발표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후기: 박은미 (건국대)

 

 

 

어렵다. 책 제목 너무 멋있는데 멋있는 만큼 내용이 어렵다. 토론 사회를 맡은 죄(?)로 6만원이 넘는 거금을 책값에 투여하고 두꺼운 책을 마주 했다. ‘으와 좋겠다, 광제형은…이렇게 멋있는 강해서를 내시다니! 나는 흉내도 못 내겠는 걸!’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막상 강연회에서 나는 사회를 보느라 내 질문을 삼켜야 했다. 열띤 질문을 비집고 사회자가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은 후기라기보다 사회자의 못 다한 질문을 하는 글이 될 것이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나의 이해가 맞는가 하는 확인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후설 연구서로 『의식의 85가지 얼굴』(그린비), 퐁티 연구서로『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학사)등을 써오신 내공으로 이제 퐁티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사르트르 강해까지 쓰셨으니 현상학을 거의 다 훑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으로는 쓰지 않으셨지만 하이데거와 푸코에 대한 연구를 거쳐 사르트르에까지 이르셨으니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철학의 제 1의 물음이 ‘도대체 이 모든 것은 왜 존재하는가?’임은 철학에 관심 가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그리고 이 문제가 궁금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사실은 이 질문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리도 외로운 것이다.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든 모르든 말이다. 자기 안의 어두움이나 막막함을 외면하고 회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 도대체 왜 존재해서 이렇게 고통스럽냐는 말이닷!

모든 철학자들의 철학은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특히나 이 질문을 상당히 성실히 물고 늘어진 역작이라 생각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즉자 존재의 우연성’을 열심히 입증하고 있다. 존재는 단적이다. 존재가 왜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은 인식에서 나온다. 이 놈의 존재는 인식과 상관없이 ‘그저 있다’.

ⓒ 박영미

“존재는 그 자신으로 꽉 차 있고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존재는 그 자신에게 불투명하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존재는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는다. 존재가 스스로를 의문시한다면 이미 그 존재는 그저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광제 선생님은 강해에서 “사르트르는 즉자를 무한한 밀도를 지닌 존재의 충만으로 보고, 그 존재의 감압에 의해 의식 즉 대자가 생겨난다고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쉽게 표현할까?

생각해보자. 우리 아이를 기를 때 나는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행복하다’고 의식하지 못했다. 지나놓고 보니 행복했다. 아이가 걷고 말을 하고 재주를 하나씩 늘려 갈 때마다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 성장에 순수하게 기뻐하면서도 나 스스로 기뻐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 때도 생활비 걱정, 어르신들 걱정이 있었으니 다른 걱정거리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기뻤던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 인식은 늘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늦게 찾아오기 때문인 것 같다. 행복은 사라진 후에야 빛을 낸다는 영국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정말 행복하면 자신이 행복한지 어쩐지 판단할 새 없이 그 순간 충분히 행복해서 행복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행복하기에 바빠 행복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참으로 인식에로 저주 받았다. 행복할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행복이 달아날까봐 무서워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을 순간에 대한 걱정을 미리 당겨 함으로써 행복을 상실한다. 행복할 때 그저 행복하면 좋을 것이다. 슬플 때 그저 슬프면 될 것이다. 왜 나는 슬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편할 것이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 말이 맞다. 인간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표상 때문에 괴롭다! 존재는 그저 존재하면 되고 존재는 누군가에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데 인간은 특이하게도 중뿔나게도 그 놈의 인식을 해댄다.

그러니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이라는 책 제목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나에게는 이렇게 이해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충만하다, 그런데 인간 인식이 존재를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즉, 존재로만 충만하지 않게 되는 순간, 간극이 현상적으로 존재해버린다. 그래서 이 간극으로 인해 인식이 가능해진다. “즉자라는 존재 속에는 최소한의 공백(le moindre vide)도 없다. 즉 무가 끼어들 수 있는 최소한의 틈(la moindre fissure)도 없다.” 존재에 이 놈의 무를 집어넣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다. 이 놈의 무를 집어넣지 않고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두면 될 것을!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로 살면 될 것을! 그게 바로 해탈일 것인데 말이다….

무를 집어넣지 않으면 현존과 존재가 분리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괴롭지 않을 것이다. 즉 그 순간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즉자대자적인 신적인 경지에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의 삶을 이끄는 우리로서는 끝없이 존재와의 완연한 일치를 알게 모르게 추구한다.”는 조광제 선생님의 설명은 해탈 열반의 경지에 오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나도 잊고 너도 잊고 나와 너의 관계도 잊는 순간을 인간은 영원히 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한, 우리는 이런 순간을 단지 순간으로서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저주받은 인간의 존재양식이므로!

제가 제대로 이해했나요?

P.S. 조광제 선생님께서는 박은미 선생님의 질의에 대해 ‘잘 이해했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학술1부장)

못다 한 이야기들[치유시학]

못다 한 이야기들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다시 찾은 할머니의 집

 

시간은 간다는 말도 없이 흘러갔다. 흐르는 시간 동안 할머니는 언제나 내 마음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거나 길을 걷다가도 문득 떠오르면, 나는 괜히 눈을 부벼댔다. 어쩌다 한적한 곳으로 가게 되면 꼭 할머니 집으로 가던 그 길 같아서 주위를 돌아보며, ‘우리나라는 도심지만 벗어나면 풍경이 똑 같다’고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임종 소식도 듣지 못했다. 혹시 일이 생기면 연락해달라고 내 연락처를 적어 놓았지만 소용없었다. 한 동안 전화연락이 두절되었지만, 박사학위 논문 심사 중이라서 한 동안 할머니를 잊고 있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지나 겨울 문턱에서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집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시 찾은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할머니 집 뒤 공터에 매여 있던 누런 개만 컹컹 짖었다. 마을 입구의 교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비탈길을 계속 내려오면 할머니의 집이 나온다. 할머니의 집은 동네 끝, 가장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비탈길 끝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야 한다. 대문이 없는 집의 마당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집이 보인다.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은 적막했고 잡풀의 흔적마저 보이지 않았다. 담이 없기 때문에 겨울 바람은 마치 예전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빈 마당을 돌아나가고 있었다.

집은 기역자로 되어 있다. 원래는 일자형 집이었는데, 간단히 몸을 씻을 수 있고 보일러를 들여놓을 수 있는 공간을 이어서 기역자가 되었다. 현관문을 열면 작은 쪽마루에 방문이 연결되어 있다. 미닫이문을 열고 방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화장대와 그 옆에 작은 창문이 있었다. 화장대와 창문 사이 벽에는 작은 텔레비전이 낡은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방문과 마주 보이는 벽에는 옷장과 이불장이 연결되어 있는 오래된 가구가 있다. 그 옆 벽면에 작은 미닫이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창고 겸 작은 방이 나온다. 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 옆에 있는 또 다른 미닫이문을 열면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밖으로 나오는 문이 있는 욕실 겸 보일러실은 안에서 부엌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곳이 할머니가 거주하는 공간의 전부였다. 그 공간 뒤로 돌아가면 작은 방과 간단하게 식사준비를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는데, 그 곳에는 외지의 직장에 다니는 젊은이가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 젊은이를 만나지 못했지만, 할머니를 통해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을 지니게 되었다. 그 젊은이는 할머니의 집 여기저기를 고쳐주기도 하고, 가끔씩 할머니의 손발이 되어 준다고 했다.

마당에는 초록색 간이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문은 오래되어 완전하게 닫히지 않고 색도 바래져 있고, 할머니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가서 이용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한 곳이었다. 그 화장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비가 오면 어쩌나, 바람이 세게 불면 어쩌나,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울텐데 얼마나 불편하실까. 마음과 달리 헤어질 때까지 나는 할머니께 화장실을 지어 드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할머니만 안 계셨다. 예전보다 더 많이 어긋나 있는 화장실문을 보자 슬픔이 밀려왔다. 그 문에 덧대어 있는 얇은 판자가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시기 전 오랜 시간을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했다. 국가에서 보내주는 도우미의 도움으로 식사를 해결했지만, 그 도우미가 오지 못하는 날에는 이웃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때에도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괜찮다. 니는 공부 잘하고 있제? 너거 아는?” 하며 나를 염려했다. 괜찮다는 말을 나는 그대로 믿었다. 단 한 번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계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학위를 받으면 만나러 가야지, 학위를 받고 나면 소설을 써서 할머니께 감수를 받아야지 하는 부질없는 생각만 했었다. 골목을 돌아 나오며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너는 몰랐을 뿐이야”라고 되뇌이면 되뇌일수록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지 않아. 넌 어쩌면 일부러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것 아니야? 학위? 그런 건 변명이고 핑계야. 왔어야 했어. 절대로 괜찮지 않아.”

당신은 천상 여자였습니다.

 

할머니는 그 나이 대의 여느 사람에 비해 키가 컸다. 앉은 키가 나보다 훨씬 컸다. 결코 여리거나 가냘픈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10대 소녀의 감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초저녁에 울려오는 플루트의 음률 같은 감성은 할머니의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 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시로 읊을 수 있게 해 준 힘이기도 했다.

한 여름에도 한 겨울에도 나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수시로 옷매무시를 가다듬거나 머리카락을 곱게 쓸어내리곤 했다. 치마는 언제나 펼쳐져 있었다. 비록 나이 들고 병들어 있어도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형언키 어려운 감동과 함께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할머니는 이야기 도중이나 시를 읊을 때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 특히 밤에 혼자 누워 “지난날을 생각하며 시를 지으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어서 다음에는 안 한다 해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또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단순하게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할머니는 기를 소진하여 두통이 올 정도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칡넝쿨처럼 헝클어진 자신의 생을 정리하여 반듯하게 뉘어 놓고 가시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자신이 다니던 울산 병영의 초등학교를 시에서 세심하게 표현했다. 부산고녀, 항도고녀(현재의 경남여고) 등에 대해서도 교복과 머리 모양까지 기억했다. 이야기책(소설)을 좋아해서 일제 강점기 때 장날에 가서 책을 사거나 어른들로부터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야기책을 좋아했고, 한글과 일본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병에 걸린 이후로는 책을 볼 수 없었노라고 했다. 이제는 좋아하는 책을 맘대로 볼 수 있는데 백내장으로 책을 읽을 수 없다며 허탈해 했다.

특히 아들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하여 그 고통의 크기와 깊이를 짐작하게 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마르지 않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그리고 안타까움은 거대한 강물이 되어 할머니의 80년 삶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그 그리움이 크면 클수록 병든 자신에 대한 원망도 깊어갔으리라.

이웃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생전에 안 좋은 일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웃이 알고 있는 사실마저도 할머니가 스스로 말하거나 인정한 적이 없었노라고 했다. 또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조석으로 끼니가 힘들어도 신세지는 것을 꺼려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웃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자 자신을 향한 애정이었음을 안다. 19세에 꺾여버린 꿈, 이루지 못한 사랑, 어쩔 수 없었던 이별, 그 이후로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했던 삶, 60년 가까운 세월을 옆에서 지켜주고 사랑을 주었던 할아버지에게 차마 과거를 밝힐 수 없었던 죄스러움 등은 할머니를 옭아매고 있었지만, 그래도 놓을 수 없었던 것이 자기애였음을 나는 알고 있다.

몸은 내 것이면서도 내가 어찌할 수 없었지만, 자존심만은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할머니의 그 마음을 고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애가 아집이 되고 고집이 되었다 하더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 마음을 나는 안다. 그 마음으로 80 평생을 모질게 버텨왔음을 알기에 오늘도 할머니 생각에 젖어든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온 몸의 기를 소진하여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구상하고, 나를 만나 그 시를 들려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마 시를 생각하는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 자기 삶의 매듭을 푸는 과정이었기에 두통을 앓으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것이었지 싶다. 나에게 시를 읊어주고 그 시를 다시 나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할머니는 과거를 정리하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그 과거의 시간들을 서서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할머니와의 만남은 나의 실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할머니와의 만남은 ‘시가 과연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할머니도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 대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할머니와의 만남은 나 자신과 소통하는 길이자 우주로 통하는 길이 되어 있다.

예전에는 무심코 보았던 달이 이제는 나를 깨우는 북과 같다. 가득 차서 흠 하나 보이지 않는 보름달에서 초승달로, 다시 보름달이 되는 것을 보며 우리들의 삶이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가득 차면 내보내야 하고, 부족하면 다시 메우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걸 안다. 또 우리들 모두는 몸과 마음이 미병(未病) 상태라는 것, 그래서 언제든지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병에 걸렸든 미병 상태이든 인간은 귀한 존재이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은 평생이라는 시간 개념에서 본다면 극히 짧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할머니와의 만남 이후의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 알고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게 얻었다. ‘시는 마음을 치유한다.’ 그러나 실제로 치유는 시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덤으로 얻었다. 시는 치유로 가는 문이라는 걸 알았다.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 우리는 온전함에 가까워지기 위해 삶이라는 여행을 한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도 없고 쓸모없는 일도 없다. ([불혹의 문장들], 알렙) 그렇다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쓸모없는 생명도 없다. 할머니는 초기 구술시에서 자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 사람으로 비하했다. 나에게 할머니의 삶은 바람 같고 푸른 잡초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바람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흔들거나 풀잎을 흔들어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때로는 우리들의 몸을 빌려 자신이 우리 옆에 와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바람이 없는 곳은 없으며 갈 수 없는 곳도 없다. 잡초는 언제나 푸르다. 뿌리째 뽑히기도 하고 밟히기도 한다. 정원에 옮겨 심기는커녕 가까이 올까봐 온갖 약을 다 뿌린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자란다. 할머니의 삶은 바람처럼 잡초처럼 그렇게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왔다.

다소 불온한 의도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할머니를 통하여 내가 다시 깨달은 것은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으며, 바다로 가면 바다가 되고 돌틈으로 흘러 들어가면 맑은 샘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또 얻은 게 있다면, 나는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자각을 얻게 된 것이다. 나에게 있는 능력은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고통을 덜어주고자 시를 읊어주거나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할머니가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고 스스로 치유해갔던 그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은 그와 같은 힘을 찾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게 아닐까 한다.

 

*** 이말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끝을 맺고자 합니다. 그 동안 읽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삶을 산다고 들었습니다. 육신은 가고 없어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 분은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② –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아먹은 자 누구냐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아먹은 자 누구냐

강지은(한철연 회원, 웹진편집주간)

드디어 1954명의 언론, 출판계 인사들이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한국언론은 죽었다”고 비웃는 해외 언론들의 비난을 이제 면할 수 있을까. 아직 멀었다. 권력과 유착한 메이저 언론들은 ‘국정원 대선 개입’에 분노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왜곡, 유린하고 있다. 이들이 권력에서 독립해 국민을 위한 목소리를 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부터 작금의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지는 권언유착은 흡사 5공화국을 떠올리게 할 만큼 친정권적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은 누가 뭐라해도 권력에 의한 부정선거임을 피할 길이 없다. 부정선거로 권력을 쟁취한 자들이 앞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못할 짓이 무엇이겠는가. 권력과 유착한 국가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이 명확한 이 마당에 대한민국의 국민은 어떠한 미래도 꿈꿀 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죽은 꽃에서 어떤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배 열사들이 핏자죽이 아직도 선명하건만 이 시대의 민주주의는 죽은 꽃이 되어버렸다.

국정원의 선거개입만 문제가 아니다. 권력기관의 부패가 드러난 이 시점에 대선개표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시행되었어야 할 수개표가 진행되지 못했다.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확인되어야 할 투표용지가 오류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기계에 맡겨졌다. 민심은 천심이다. 천심을 기계에 맡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언론과 야당은 국정원대선 개입문제 뿐만 아니라 수개표까지 관철시켜야 한다.

언론을 타지 못하면 없는 일이 될 만큼 강력한 것이 언론이다. 언론은 오감을 곧추세워 헌정질서를 교란시킨 범죄자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역사에 늦은 시기란 없다. 언론은 권력의 하수 노릇을 집어치우고 국민과 민주주의 수호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