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을’인 운명, 우리는 벌레다![철학자의 서재]
?카프카의 <변신>[철학자의 서재]
윤지선 (한철연 회원·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갑을관계 속, 을의 퇴행 관찰기
2013년 남양유업 사태를 시발점으로 하여 불평등하고 위압적이던 갑을관계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대한민국 사회의 뜨거운 논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팽배한 갑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는 전근대 불평등한 신분 사회로부터 얼마만큼 나아갔는가? 갑을관계란 본래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자율적인 두 계약 주체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이들 사이를 규정짓는 힘의 관계가 출발선에서부터 절대 강자와 절대 약자의 구도로 불평등하게 설정됨으로써 거기에서 파생되는 일체의 이익과 권리의 배분 또한 불합리한 방식으로 한쪽에만 편중되는 현상을 낳았다. 대한민국의 갑을관계 논쟁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난 상하종속의 위압적이고 불공정한 권력 구도 관계에 대한 충격적인 폭로로서, 과연 대한민국은 과거 전근대 신분 사회의 불평등을 갑을관계란 자본주의적 프레임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재편성하고 있진 않는지 심각히 되물어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변신>은 폭력적 갑을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노동자, 을-외판원 그레고르 잠자의 퇴행 관찰일지에 해당된다. 프란츠 카프카는 생전에 노동자 상해 보험회사에서 보험담당관으로 일하며 노동자들의 육체적·심적 고통을 생생히 목도해 왔으며 상해를 입은 그들이 망치를 들고 가서 회사에 항의하는 대신 오히려 회사 측에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자본주의라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그 어떠한 사회적 안전장치도 보장되지 않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카프카는 노동 소외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생지옥을 발현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묵시록을 써내려간 예언자이기도 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고용주와 노동자, 임대주와 세입자, 남성과 여성, 프랜차이즈 대기업과 대리점주들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는 탐욕스러운 속도로 강자는 더 강하게 약자는 더 약하게 진화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약자, 을들의 도태·퇴화관찰지인 동시에 강자, 갑들의 괴물적인 몸 불리기에 관한 이면의 기록서이기도 하다. 매일 이른 새벽 출장시간을 맞추기 위해 선잠을 설치며 깨어난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로 변신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갑의 갖은 감시와 억압, 부당한 권력행위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의 무게마저 초경량화되어 취급되는 을의 처지가 점차 퇴화되고 도태되는 벌레로의 퇴행으로 그려지고 있다. 재벌 대기업들의 비대한 문어발식 확장과 가진 자들의 폭식증적 몸 불리기와는 반대로 뼈와 살이 노골노골해질 정도로 착취당하는 약자들에겐 뼈와 살이 한 겹으로 녹아든 것 같은 딱딱한 껍질만으로 이루어진 벌레로의 진화만이 남은 것인가? 일하는 벌레, 돈 버는 벌레, 착취당하는 벌레로의 고단한 삶에 두 눈을 꿈벅이며 곪은 상처를 핥으며 ‘억울하면 갑이 되어라’라는 문구에 세뇌되어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다만 나약한 자기 탓-못 배운 탓, 못 가진 탓, 못난 탓-으로 여기며 자기분노를 되삼키게 하는, 이 멋진 자본주의 정글에서의 약자 수난기가 우화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카프카의 <변신>이다.
사회경제적 생존게임에서 착취되고 도태된 약자가 유일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공간은 자신의 방이며 가정이다. 자기 방 안에 유폐되어 일체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된 히키코모리도 카프카적 의미의 벌레로의 퇴행의 한 형태이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영역인 자신의 방은 취업준비생,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명예퇴직자, 장애인, 노인들의 쉼터인 동시에 외부 활동 영역이 철저히 제한된 감옥으로서 기능한다. 벌레가 되어 피할 도리 없이 가족 구조 내에 산재한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 그레고르 잠자의 위기는 곧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위기와도 맥을 같이한다.
가계부채의 덫, 가족구성원의 무덤
“부모님이 지고 있는 빚만 갚아드릴 수 있는 돈만 모아진다면, 아마도 5~6년쯤 지나야 될 일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반드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결행할 것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은 일어나야만 한다. 기차가 5시에 출발하니까” (<변신·심판-세계명작131>(유한준 옮김, 대일출판사 펴냄) 16쪽)
벌레로 변하여 거동조차 불편한 그레고르 잠자의 고뇌에 찬 되뇌임을 읽으며 마치 현재 대한민국의 소시민의 걱정거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국내 가계부채가 1000조를 육박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부채를 권하는 사회, 부채가 필수악인 된 사회이다. 자녀 사교육을 위해, 대학 등록금을 위해, 내집 마련을 위해, 장가를 가기 위해, 노후 대책을 위한 사업을 하기 위해… 이른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남기 위해’, 영원한 약자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대출을 감행한다. 그레고르 잠자의 출근을 채근하러 온 지배인의 가정방문에 온 집안 식구들은 잠자의 결근으로 인해 행여 그가 해고를 당하여, 사장에게 진 부채를 갚지 못해 모두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부채의 도식은 포식자의 덫의 도식과도 유사하다. 포식자, 가진 자가 던져놓은 미끼인 고리대금을 자신을 위한 달콤한 미래의 양식으로 착각하여 다가오는 피식자, 못 가진 자들의 헛된 희망은 단시간 내 죽음과도 같은 깊은 절망으로 바뀐다.
그레고르 잠자는 부채의 덫에서 온 가족을 살려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앙상한 다리들과 더듬이로 이루어진 낯선 몸뚱이를 이끌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직원으로서의 사명감에 대한 자기변호를 쉴새 없이 읊조리며 자기 방문을 열고 지배인과 가족들 앞에 출몰한다. 더 이상 쓸모 없게된 앙상한 벌레로 퇴화한 그의 출몰에 지배인은 아연실색하여 도망치고 가족들은 힘겹게 기어 나온 그를 다시 방 안으로 쫓아버린다. 그는 하루 아침에 한 집안의 가장에서 일할 수 없는 불구자로 바뀌어 방 안에 감금되어 버리고 만다. 벌레로서의 낯선 사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레고르에게 과연 어떠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다 퇴화한다. 그러나 복지 사각지대는 오롯이 가족이 책임진다?
‘인간은 항상 진화하고 성장하며 소통하는 존재’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25세를 기점으로 노화를 시작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체적·정신적으로 퇴화하며 그렇게 서서히 소멸의 시점으로 다가간다. 젊은이로 사는 것보다 노인으로 인생을 사는 시기가 훨씬 길어진 인간에게 육체적·지적인 퇴행은 명백한 자연의 이치이다. 소위 ‘정상인’으로 판명된 자들에게 신체적 운동 능력이 둔화되고 지적인 활성화가 더뎌지는 퇴행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더디게 진화하는 자들에게 유난히 혹독한 나라이다. 장애인들, 노인들, 무직자들,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우리사회에서 철저히 비가시화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방 안에만 숨어산다.
타인들과 소통하는 언어를 잃고 소위 ‘정상인’의 습성들을 망각해나가는 벌레로 퇴행한 그레고르 잠자는 현대 사회가 소외시키고 있는, 진화의 속도에서 이탈된 사람들의 처지를 빗대고 있다. 그레고르의 누이와 어머니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방의 벽과 천장을 기어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위해 방안의 모든 가구들을 들어내는데, 그레고르는 필사적으로 초상화 액자 하나만은 사수하고자 고군분투한다. 비록 모든 사회적 소통 수단-상호 대화와 자기 실현 가능성을 잃고 직립보행에서 기어 다니는 처지로 바뀐 그이지만,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가 가진 존엄성의 마지막 보루로서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그만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등을 가격당하고 만다. 진화의 속도를 거스르는 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주는 먹이를 먹고 조용히 순응하는 밥벌레로서 충실한 것이다.
절대적 사회적 약자인 그들은 이렇게 일체의 사회적 삶에서 유리된 채 복지 사각지대에 내던져 진다. 오로지 가족 구성원의 희생과 조력 없이는 생존마저 위협받는 장애인들과 알츠하이머 환자, 노인들은 가족들과의 소통에서도 철저히 제외된 채 방목과 사육을 당한다. 그레고르의 늙은 아비는 수위로 재취업하고 눈이 어두운 어머니는 바느질삯으로 가정을 돕고 어린 누이는 학업을 이어나가지 않고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해서 빚을 갚고 가정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동시에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돌보야만 한다. 방 안에 유폐된 그레고르가 누이의 바이올린 연주에 홀린 듯 기어 나와 거실에서 음악을 향유하다가 집 안의 하숙인들에게 발각되었을 때, 벼랑끝으로 내몰린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존재 자체가 가족 공동의 평안과 미래를 좀먹는 위협 요소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예전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혀 곪고 부패하여 그가 숨을 거두게 되었을 때, 온가족은 오랜만에 나들이를 떠나고 한결 가벼워진 미래를 향해 기지개를 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한 사회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안위와 복지에 무관심하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때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가족은 그들과 함께 몰락하고 만다. 끝내는 가족조차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몰락하게 만드는 사회를 그린 카프카의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묵시록과도 같다. 약육강식의 사회, 가계 부채의 덫, 복지 사각지대의 유일한 보루로서의 가족의 희생, 사회적 약자들의 도태 등과 같은 화두는 탐욕스런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들이기에, 카프카의 <변신>은 오늘도 여전히 현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