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생성 철학(4) – 왕명 좌파와 그 한계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4)-왕명 좌파와 그 한계
1)
이규성의 책 황종희- 내재의 철학 가운데 뒷부분(6장)은 양명 좌파로 알려진 현성파의 철학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이지가 집중적으로 논의되는데(7장),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이 책이 쓰인 시기 즉 90년대 중반의 시대적 분위를 잘 보여준다.
89년 민주화 이후 그런 가운데 급진적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회적으로 평등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적 변혁의 전망에 들뜨기 시작했다. 이런 전망에 기초해 남북의 통일을 향한 염원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치적 실패(군부의 선거를 통한 재집권)로 좌절한 지식인들은 마침내 필사적인 투쟁을 전개했으니, 이 시기 많은 청년이 좌절과 분노 속에서 목숨을 던졌다. 다른 한편 국제적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기왕에 고조된 심정은 갈피를 잡지 못해 허둥거렸다.
이런 시기 이규성은 양명학의 형이상학에 기초하지만, 유교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황종희의 철학에 멈춰있을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양명 좌파를 통해 제시된 평등주의적 경향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식은 이규성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아래는 186-188쪽에 걸쳐 주장된 이규성의 논리를 정리한 것이다.
① “어느 경우에는 기존 문화의 전반적인 파괴가 지배적이고 어느 경우에는 문화의 비판적 계승이 지배적이다.”
② “모든 유형의 저항들의 인성론적 기초는 … 저 원융한 흐름을 추구하는 무의식일 것이다.” “서로 융통하는 우호성을 상징하는 행위를 그리고 이러한 문화를 요구한다.”(여기서 ‘원용한 흐름’ ‘서로 융통하는 우호성’은 현성파의 무차별성과 평등성을 의미한다.
③ “명대 이지의 급진주의도 분명 이러한 방향을 어렴풋이 암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④ “그러나 이러한 실마리 적 암시도 육상산과 왕양명 및 현성파의 예비적 전개가 있어야 했다.”
⑤ “황종희 철학의 외재적 근거는 저들에게 있는 것이 될 것이다.”(황종희는 현성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통해 자기의 보수적 논리를 확립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2)
현성파의 근본 입장은 무차별성이나 평등성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기가 운동한 상태라고 한다면, 각 사물은 발산하면서 수렴하고 다시 발산하니 어떤 고정된 본체를 지니지 못하고 서로 연결되며, 그런 가운데 만유는 이 기의 운동이 전개하는 하나의 매듭에 지나지 않으니 서로 무차별하며 평등하다.
이런 우주 개념에 따르자면, 인간에게서 성과 욕정도 하나의 운동 단계일 뿐이며 성을 대변하는 지배 계급과 욕을 대변하는 피지배 계급도 평등한 무차별적 존재일 뿐이다. 이미 세계는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은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존재하고 또 일정한 시기가 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각자는 우주적 기의 운동 속에 참여하여 자신의 현존 자체에서 만족하니 “현재의 마음이 곧 올바른 생각이며”(황종희, 197, 왕심재 재인용), 현재에 만족한다. 이것이 곧 현성 즉 ‘현재 이루어져 있다’라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욕망과 현재, 민중, 쾌락을 긍정하는 입장이 되며, 그런 만큼 지배 질서와 도덕을 거부하는 저항적 의식이 된다. 왕심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라.
“그러므로 도란 본질이며, 천덕인 양지여서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양지를 따라서 즐겨 타인과 같아지게 되면 마음이 충만하게 퍼져 열리게 되어 천지는 변화하고 초목은 번성한다.”(황종희, 197, 재인용)
이런 입장에 서면 도덕 질서라는 명분으로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입장은 거부된다.
“작위적으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을 최상의 진리로 삼는다. 새가 울고 꽃은 지며 산은 치솟고 냇물은 흐른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여름에는 시원한 갈옷을 입고 겨울에는 모피옷을 입는다. 지극한 도는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황종희, 198, 왕심재 재인용)
이규성에 따르면 황종희는 이런 현성파의 논리에 대해 비판했다고 한다. 현성파를 따르면, 자칫 “광기와 방탕이라는 하나의 길로 들어간다”라는 것이다. 황종희는 그 때문에 유행에 머무르지 않고 주재를 다시 회복하려 했으나, 이규성에 따르면 “현성론에 대한 황종희의 우려와 대항은 사대부 계급의 헤게모니 장악과 관련된 정치적 성격의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규성의 판단에서 이규성이 황종희보다는 차라리 현성론에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어떻게 보면 현성파는 기존 질서나 도덕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 이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나갈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기의 운동에는 이런 양태도 있고 저런 양태도 있으니, 우주적 기와 합일하는 인간으로서는 기의 움직임을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항한다는 행동 자체가 기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현성파는 내적 망명이나 현실 도피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활동을 전개한 철학자가 이지다. 그는 물론 이론적 활동에 그쳤지만, 적어도 그런 비판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특출하다. 이규성 역시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
이지의 비판은 곧 도리를 가르치는 것은 거짓된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는 입장에서다. 이는 사회의 지배적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오히려 동심 즉 자연적 마음을 그대로 두면, 기의 운동에 합일하여 살아가면서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독서인들은 겉으로는 도학을 하고 속으로는 부귀를 추구한다. 유자의 우아한 옷을 입었으나 행동은 개돼지와 같다. … 재주와 학식이 없는데도 성인 도학을 강학한다는 이름으로 부귀를 요구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빈곤하고 천할 것이기 때문이다.”(황종희, 226, 이지 재인용)
“도덕적 인격은 특권 집단의 비특권 집단에 대한 거리와 부정에 기초한 고립된 인격이라면, 동심은 인격의 자기 위세가 없는 ‘자기도 없고 타인도 없는’ 마음이다.”(황종희, 236)
4)
이지 자신은 도덕을 비판하면서 사회적 질서도 부정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동류이고 동체”라는 의식을 지녔으며, 제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부정한 대동 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런 비판적이며 동시에 평등한 의식은 아무런 실질적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이지가 기존의 도학을 비판한 것은 그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소위 회의주의의 역설에 붙들리게 된다. 회의주의는 어떤 주장도 진리가 될 수 없다고 회의하지만, 회의 자신은 스스로 진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회의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주장이며 회의주의 자신의 논리에 따라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런 회의주의의 역설은 기존의 도학을 비판하는 이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기존의 도학이 우주적 기에 대한 하나의 강요라면 이지의 비판 역시 하나의 개입이니, 그 역시 하나의 강요가 아닌가?
회의주의가 결국 판단중지에 이르러 현실을 방임하고 말았듯이 이지 역시 마찬가지로 방임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현성파의 근거는 곧 우주와 합일한다는 것에 있는데, 이는 결국 우주적 기의 운동이 되는 대로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수동적 태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이지는 결국 현실을 벗어나 중이 되고 말았다.
이규성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현성파가 주장하는 무차별성과 평등성은 이규성이 철학적으로 추구하던 개방성과 소통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성파에 따르면 그저 우주적 기의 운동이 흘러가는 대로 그것이 발산하고 수렴하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이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거꾸로 현실을 옹호하는 이론이 되어 버린다. 이규성으로서는 이런 현실 방임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규성은 현성파에 대립하는 황종희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없다. 황종희는 현성파와 동일한 형이상학적 전제 즉 기 일원론에 기초해서 전통 질서를 옹호하고자 했는데, 일단 여기서 질서는 하나의 양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주희와 같은 주리론자에게서 보이는 것과 같은 강력함을 발휘할 수 없다. 더구나 이규성 자신이 90년대 초반에 가졌던 평등주의적 성향은 황종희에게서 나타나는 억압적 질서를 인정할 수도 없었다.
현성파나 황종희나 모두 양명학적 형이상학에 기초한다. 그것은 하나의 기가 운동하여 전체를 관통한다는 형이상학인데 이런 입장은 황종희처럼 정통 질서를 한정적인 방식으로 옹호하던가 아니면 현성파처럼 비판적이지만, 방임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기 일원론은 이규성이 바라는 대로 개방성과 소통성의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회를 지향해 나가는 적극적인 힘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좀더 적극적으로 개방성과 소통성을 옹호하는 형이상학을 발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90년 중반 그가 기울어졌던 양명학을 떠나게 된다.* 그 후 그는 왕선산의 기철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 이규성은 베르그송의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베르그송에 대한 언급은 그의 저서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나 양명학의 형이상학은 많은 점에서 베르그송을 닮았다. 이규성이 양명학을 떠난 것은 베르그송을 떠난 것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한국의 어떤 베르그송 학자는 회고하기에 말년에 이규성이 베르그송에 대해 비판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그의 저서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규성이 빠졌던 딜레마는 어쩌면 90년대 중반 지식인이 부딪혔던 딜레마와 닮았다. 평등한 사회주의에 관한 관심은 고조되었으나 정작 사회주의 진영은 무너지고 만 그 황당함 앞에 지식인은 당혹에 빠졌는데 이규성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지속론 대 공간론 :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천 하룻밤 이야기]
지속론 대 공간론 :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 자연배후학으로서 자연론 대 문명론
– 2026 04 20. 우수(雨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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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하늘에 나는 새와 저 산의 짐승들을 누가 만들었어요? + 하나님이 만들었지
–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과, 해와 달은 누가 만들었어요 + 하나님이 만들었지,
– 선생님과 아버지 오마니는 누가 만들었나요? + 물론 하느님이 만들었지
–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요? + 그게 하나님이지.
–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드네요, + 학문적으로 동어 반복이라 하지.
= 벩송은 이것을 악순환이라고 하고, 논리상으로 선전제미해결의 오류라고 부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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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기원에는 무엇이 있는가? 생각한다는 인간의 사고 또는 사유를 우선 뒤로 젖혀두자. 우주든 상상작용의 대상이든, 원리든 기원이든 하나에서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를 통일성 또는 단위라고 부르자. 가(A)가 있다. 가 이외의 것을 하(Z)라 하자. 그런데 논리적 사고에서는 A가 있고 A아닌 것(non-A)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누가 어떻게 나누느냐? 논리주의자들은 가와 하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든 하이덱거든 진리를 발견한다고 할 때, A 아닌 것이 아니라 A이라는 동일성의 논법에 있다.
| 가(존재, 진리, 긍정, 단위), A |
:: 하(non- A, 나눌 수 없는 것)
[동일성이라는 원리를 먼저 있고, A는 non-A아닌 것이라는 모순율, 그리고 A와 non-A사이에 둘중의 하나 A는 맞고 non-A는 맞지 않는다는 배중율을 조작해 낼 것이다.]
동양에서는 가와 하를 음과 양이라 부르고 꼭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밤과 낮, 하루, 한해 등처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이라 한다. 다른 한편, 여와 남처럼 나누어지는 것은 둘 사이의 조화와 교감이 있다고 하지만 하나의 생명에서 나왔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인데도 나누는 것에 문제가 생기니 불이(不二)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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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사회적 견해들에서 A와 B도 있고 AB교집합 C도 있다고 한다. A는 가치(공공)를 B는 탐욕(이익)에 선후 중경을 두고, 사람들은 한편으로 공공에 다른 한편으로 사적 이익에 관심으로 양명성을 지닌 쪽을 AB가 있다고 한다. 이런 견해를 철학사적으로 19세기에 공시태에서 본 사실을 평면적으로 구별하는 차이의 설명이다. 그 19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탐문하는 수학–논리학자들은 존재의 근거가 A에 있다고 보았으며, 사고의 대상이라 하고, 논리의 상위(류개념, 신개념)를 버릴 수 없었다는 점에서 스콜라적이라 한다.
이런 수학–논리를 확장하면서 벤 다이아그램을 2차원(평면)의 4경우, 3차원(공간)의 8경우, 4차원(무슨 위상?)의 16경우 등에서 항상 순열을 나열해보면, 이상하게도 각 조합들에서 공집합(여집합)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 물론 4차원 이상을 경험과 구체성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의 추론작업에서 상상작용은 무한히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4차원이상의 경계(한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인간의 지성의 역량의 한 방편으로 정의(규정, 한정)한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고대 사유에서 유한과 무한의 논리적 차이가 있고, 근대에서 한계와 비한계의 미분화 또는 세분화에서 차히가 있으며, 이 차이와 차히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대수학과 알고리즘이 분리된다. 전자에서 우주의 기계적인 정적 통일성을 주장하고 후자에서 파동역학, 열역학, 전자기학 등의 동역학에서 지속의 통일성(정체성)의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19세기 말에 프왕까레는 공간의 차원이든, 추론의 차수의 등급이든, 세분화의 과정에서 중첩적 기억의 위상이든, 인간의 지적 역량의 협약(합의)이지,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고 했다.
18세기의 유산으로 자연수의 무한(infini)과, 19세기 후반의 집합론으로 0과1사이의 소수들의 비한계(illimit, 무한계), 푸앙카레의 협약에 의한 비결정(indéterminé) 사이에서 인간이 맞다 틀리다는 진위 규정에 대해 또는 도덕적으로 선악 규정에 대해 반성 한다. 앵글로색슨에서는, 푸앙카레의 수학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앵글로색슨 수학–논리학들이 설정하는 진위, 선악, 정부(정의 불의)라고 정의(la définition)를 기준으로 삼아서, 모든 단위들이 한정(définit)와 무한정(indéfini)로 구별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논리주의의 착각은 그들도 악순환, 파라독사, 불합리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조건 안에서라고 하는데, 그 조건이 논리의 요청이며, 원리와 공리의 선인정, 즉 선전제미해결이다. 이런 사고가 펼쳐진 것도 언어학에서 공시태가 우선한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자연배후학’에서 우주론이 우선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통일성의 우선을 선가정하면서, 이런 방법에 따르지 않는 통시태 사유, 우주발생론 사유, 그리고 인간에서도 자연생성론을 배제 또는 악의 축처럼 다루었다. 21세기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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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에서 자르기와 나누기의 문제가 올바로 제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대상을 자를 수 있는지 또는 나누기한다는 데 참여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에 플라톤의 인식에서 선분의 비유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분할의 선분분할의 설명은 자르기가 아니라 나누기(참여하기)에 있을 것이다.
| 이데아들 | Ideas | 에피스테메 |
| 수학적대상들 | Objets mathe | |
| 사물들 | Etres vivants | 독사 (견해) |
| 그림자들 | Images Ombre |
플라톤의 이런 도식에 대해 후대에 여러 다른 방식으로 변환을 거치면서 설명의 도구로 삼았다. 우리는 간단히 3가지 정도만 보자. 하나는 지식의 대상은 상위 둘(에피스테메)에 있고, 하위 둘(독사)은 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다루지도 않았다. 둘째는 경험적으로 보아 그림자를 보고 피라밑(사물)의 높이를 알 수 있듯이, 이런 유비로 추상적인 수학의 도형들을 보고 도형의 원형이 이데아를 안다고 해서 탐구의 단계로 보는 방식도 있다. 셋째는 상위의 인식은 지성(오성)의 대상이고 하위의 인식은 감성(미학)의 대상으로 여기며, 인식론적 구별을 인간의 역량에 대한 차이를 영혼과 신체에 대입시키는 방식이었다. 둘째의 계속성에서는 자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 첫째와 셋째는 잘라서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는 쪽이다. 문제는 자르다와 공간의 계속(시간의 연속)의 구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엉뚱하게 대상을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차이를 찾으려 했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이데아를 볼 수 없는 직관의 것이지만, 수학적 대상들은 땅위의 측량에서처럼 도형을 그릴 수 있다. 인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의 차이는 대상의 추상화에 있고 공간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에 비해 사물들로서 신체는 볼 수 있는데, 이를 움직이는 동력(심성)은 볼 수 없는 것임에도 얼 또는 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로서 상층의 이원성과 심층의 이원성이 전도된 사고방식이 아닌지에 대한 낌새를 알아차린 19세기 후반에 유기적 조직화로서 사회학과 심리학이 도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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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논리주의자들이 진위, 선악, 미추의 상위로서 진선비의 선전제로 인정하는 것은 선분의 분할(자르기)의 인정 위에 선의 이데아를 올려놓았다. 물론 신학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의 하늘나라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천국(에테르)를 만들었던을 것을 유추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 선의 이데아(원, 아름다움) | |
| 이데아들 | Ideas |
| 수학적대상들 | Objets mathe |
| 사물들 | Etres vivants |
| 그림자들 | Images Ombre |
소크라테스의 한 계열인 퀴니코스–스토아 전통의 유물론자들은 ‘선의 이데아’를 상징기고 기호(추상)일 뿐이며, 진실로서 얼과 혼의 움직임이 먼저이고 기원(아르케)이라고 보았다. 상층의 최고 지위(위상. 토포스)를 사고 알 수 있듯이, 깊이(심층)에도 마그마와 같은 불덩어리로 되어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생한 활동을 제시할 수 있었다. 순수유물론자들은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돌아다니는 원인, 노마드 원인)가 있다는 것이 실재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여긴다.
| 이데아들 | Ideas |
| 수학적대상들 | Objets mathe |
| 사물들 | Etres vivants |
| 그림자들 | Images Ombre |
|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아페이론, 무관의 제왕) | |
<위의 도표와 이 도표 사이에서 어느쪽을 실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 위의 것은 관념론으로 이것은 자연론 또는 순수 유물론이라 부를 수 있다.>
이로서 상위에서 직관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추상적 대상이 있고, 심층에서도 나눌 수는 없지만 실재성이 있다. 원의 아름다움과 기하학적 도형의 아름다움이 진리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발생하는 아름다움은 흔들리는 아름다움이며 회화에서 터너의 그림과 인상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 선의 이데아(원, 아름다움) | |
| 이데아들 | Ideas |
| 수학적대상들 | Objets mathe |
| 사물들 | Etres vivants |
| 그림자들 | Images Ombre |
|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아페이론, 무관의 제왕) | |
<무관의 제왕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9)”에서 능동적 의미에 아나르키(무권위주의)에 대한 명칭이다. – 우리나라에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것은 비하된 표현일 것이다. >
이로써 선분의 비유에서 자르기인지, 아니면 양면으로 나눌수 없는 이중성의 등장인지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사유는 양면으로 겹치기에 닮은 것은 같다. 들뢰즈가 파라노이아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스키조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영과 육은 동전의 앞뒤처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플라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의자, 유일신앙자, 스콜라주의자, 관념론자는 선의 이데아의 위계 도식에 열광하면서도, 자연에서 생명의 발생과 노마드의 발현의 발생론적 흐름을 악마 취급하였다. 그들이 미쳤으니, 푸꼬가 광기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파라노이아, 그르려니 하지.
*
유시민이 A, AB, B의 도식은 사회라는 평면에서 공익과 사익에 대한 관점정도 인데, 이에 대해 반응하는 이들은 오랫동안 앵글로색슨 철학의 계보에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우리 입말로 우리 사유를 발현하고 창안하고 창발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것도 코로나 이후로 누리소통 덕분이다. 알파고 시나씨가 말하듯이 우리 젊은이들 세계와 소통하고 프앙까레 같은 협약을 탐색하고, 프란체스코 학파처럼 평결론으로 계약과 합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전지구적 활동의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 유일신앙 (원리, 악순환) | ||
| A | C(AB) | B |
| 조화중항 : 점, 얼 | 역량 | 수, 원자 : 비례중항 |
| 공산사회 | 노력 | 탐욕사회 |
| 자연 발산 (원인, 자발성) | ||
[* 점들(points)과 얼들(Ames)을 같은 계열로 놓았던 철학자는 문헌적으로 라이프니츠였다. 참조: 브륑슈비크(1869-1944)의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p. 221] – [이 관점의 시초는 박홍규의 탁월한 견해대로 플라톤이었을 것이다. 참조: <류종렬: 20세기 철학자, 박홍규와 들뢰즈, https://cafe.daum.net/milletune/REMI/14>;]
[* 노력(코나투스)의 이중계열이 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상층에서 표면으로 전개에 노력하였고, 심층에서 표면으로 노력(conatus)을 보았던 이는 홉스와 라이프니츠였다. –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제10장 라이프니츠의 수학 철학, pp. 197-229]
[* 조화중항 대 비례중항의 기원은 퓌타고라스학파에 있으며, 이를 실질적으로 다룬 철학자는 플라톤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박홍규는 플라톤이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두고 다룬 첫째 철학자라고 평했다. – 참조 <마실에서 천사흘밤에서, 우수(雨水): 비례중항 대 조화중항, https://cafe.daum.net/milletune/REM0/148>;]
*
지구는 둥글다고 하고, 지구가 스스로 자전하고 그리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으며, 태양계가 은하계 안에서 소용돌이 속의 일부로서 기나긴 시간 지속 속에서 활동(생성) 중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초기에는 태양계의 회오리의 조성하는 경과에 따라 수많은 지구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가, 다음으로 은하계 안에서 아마도 회오리의 조성의 정 반대편에 우리와 사유방향은 다르지만 비슷한 조건에서 우리 같은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러다가 그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민을 하면서, 아마도 우주 안에는 저 먼 성단에서도, 수학적 우발성(포앙카레의 협약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과 같아서, 우주의 기나긴 지속 발생에서 45억년을 거쳐 온 지구와 같은 행성은 우주 안에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구 생명체도 유일한 것이라는 추론이다.
공시태, 우주론, 공간론으로 인식은 상식에서 중요하게 쓰이지만,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시기는 지나갔다. 인간의 생각하는 역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통시태, 우주발생론, 시간–지속론으로 아름다운 지구, 그 생태계를 역량이 높아진 인간이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이런 역량의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신학에서 자연이 묶여 있다가 브루노에 의해 우주가 무한히 열리고, ‘빛들세기’에 프랑스의 소박한 유물론자들이 자연의 자치성과 자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19세기 후반에서야 자연의 자발성을 생각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류가 제 나름대로 사유하기 시작하여 공동체를 만든 빙하기 이후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1만 2천년 정도이다.
생명체 상으로 이런 짧은 시기에 볼 수 없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을 구별하면서, 현자의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건데 고대 철학 이래로 볼 수 없는 것은 수, 원자, 점, 얼 등등이 있었다. 수와 원자는 자르기를 기준으로 하는 상층론자의 견해로 계속 이어가고, 점과 얼(온)은 자르기가 잘 안되기에 다루는 방식을 고민하던 심층론자들(내재적 참여론)은 과정과 연속에 자기 동일성(정체성)을 갖는 기억의 지속으로 설명하려 한다.
수학사에서도 철학사에서도 선전제의 정의(한정과 비한정)를 문제로 삼았지만 여전히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논리–산술적인 이들이, 수학적 논리에서도 무한(유한의 대비)과 비한계(한계의 대비)가 정의(한정과 비한정, 규정괴 비규정)에 연관 없이도 자기 충족이유를 갖는다는 생각을 하였고, 급기야 수와 원자의 소박한 유물론에 대해 점과 얼의 진솔한 유물론(자연론, 우주발생론) 사이에 차히를 갖는다고 설명하게 된다.
지구의 발생과 운동이 플라노메네아이티아라고 하였듯이, 인간의 삶과 사유도 노마드의 발현이다. 인간의 자각이, 맞는니 틀리느니라는 기준으로 지구상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달리, 이제는 기나긴 우주의 변역과정과 인간 삶의 역정의 기억에 적합하게 협약을 찾으며, 평결을 이루면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4:27, 59OLI) (5:28, 59O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3) – 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3)-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1)
기가 운동하는 두 양태는 물체의 형성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그 가운데 양의 운동은 전진적이며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 이것은 발산하는 운동이다. 반면 음의 운동은 후퇴하면서 자기를 보존한다. 이것은 수렴하는 운동이다. 이런 과정은 더 구체적으로 사계절의 흐름처럼 네 단계로 전개된다. 그것이 곧 생산, 성장, 성숙, 저장의 단계다.
발산하는 운동은 변화시켜 유행을 낳으며 수렴하는 운동은 보존하니 이를 통해 물체가 생겨난다. 발산은 생겨난 물체를 변화하고 수렴은 다시 물체를 회복하게 하면서 이 운동은 거듭 반복해서 일어나게 된다. 마치 계절이 오가고 해와 달이 교체하는 것과 같다. 이런 시간적 질서가 곧 이법이다.
이 이법은 자연의 운동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니 이를 곧 자연에 내재하는 질서 즉 ‘천’이라 한다. 질서가 운동에 의해 생겨나지만, 일정한 질서를 자연적으로 따른다는 점에서는 기는 이 운동을 주재한다. 그렇다고 이 기의 질서가 초월적인 것은 아니며, 자연의 운동에 맡겨졌다고 해서 다만 무질서한 것만도 아니다.
“춥고 더움은 자신의 법칙을 잃지 않고 만물은 각기 자신의 질서를 가진다. 평화와 혼란, 가득참과 텅빔, 사라짐과 생겨남, 흥성과 쇠망은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다. 일월성신은 번갈아 운행하면서 그 법도를 상실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어떤 인위적인 흔적을 보지 못하며 다만 자연에 따라 형상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속의 깊고 깊은 곳에 주재하는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른바 천이란 주재를 말한다.”(황종희, 70)
“유행 가운데 반드시 주재가 있으므로 주재는 유행의 밖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유행에 조리가 있다는 것이다. 변화의 관점에서 유행이라 하고 불변의 관점에서 주재라고 한다.”(황종희, 70)
기가 전개하는 운동을 통해 물체가 생성하고 운동의 이법이 성립한다. 이법은 자연 전체의 반복된 흐름일 뿐이므로, 이법은 기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황종희의 철학을 내재의 철학이라 한다.
기의 이런 운동으로부터 황종희는 여러 가지 자연의 원리를 끌어낸다.
① 이런 기의 운동은 발산과 수렴의 운동을 통해 자연의 다양한 물체를 낳는다. 여기서 다양한 물체는 서로 고립된 단절된 개체는 아니다. 개체를 개체로 유지하는 본질은 없다. 하나의 물체는 운동 속에 있는 한 국면, 양태이며, 개체란 여러 운동이 교차하는 매듭일 뿐이다.
“본체로서 기는 스스로를 확산 전개시키면서 다양의 세계를 생산한다. 다양의 세계는 기의 자기 변양태들이기 때문에 기에 근본하며 독자적 세계로 분리될 수 없다. 본체는 하나이다. 형체와 색깔은 본체의 변양된 사물들의 속성이지 본체가 될 수 없다.”(황종희, 100)
개체의 운동은 전체적으로는 더 큰 운동의 한 양태이며, 이 운동은 인과적 필연성에 따르는 것이 아닌 기 자체의 자발적 운동에 따르니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다. 전체 우주는 하나의 통일된 기의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우주적 기가 물체를 서로 연결하는 운동의 실체다. 그러므로 만유는 서로 개방되어 있고 서로 소통한다.
“이 형질 때문에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막혀 있지만, 본질의 차원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 있어서 전체적으로 하나이다.”(황종희, 101)
이와 같은 우주의 전체 모습은 베르그송이 전개한 우주와 닮았다. 우주의 본체인 엘랑 비탈은 비약적인 도약을 통해 다양한 우주를 전개하지만, 그 모든 것은 서로 공감한다. 이 본체가 없는 물체의 우연한 전체 연관의 체계가 우주적 진화의 모습이다.
“모든 물체나 우리의 신체도 무한성에 그 자체로 관여하고 있다. 신체는 그 형태적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무한성에 의해 이미 그리고 본성상 비호되고 있다.”(황종희, 80)
② 이런 변화와 보존은 모두 자연의 이법이며 선과 악이라는 판단은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악이 실체적인 것도 아니고 무가 영원한 것도 아니며 거꾸로 물체도 언젠가는 무너지니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신체와 물체를 억압하고 이법의 도덕을 강조하는 주희의 입장에 비해본다면, 신체와 물체를 인정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현실세계에는 본래적으로 초월적인 선의 결여라는 의미에서의 악의 실체는 없으며, 허무로 부서질 무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황종희, 80)
“그의 생성과 생의의 철학에는 우리의 신체성과 현상적 물체들과의 본래적 적극성과 긍정성을 강조하는 의의가 충분히 있다.”(황종희, 92)
2)
하나의 기가 전개하는 운동, 그것의 다양한 운동 양태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황종희의 형이상학에서 자연 물체와 생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응결과 유통이라는 양태가 다시 개입한다. 우주적 기 전체가 응결하여 무겁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자연 사물이 된다. 우주적 기가 약동하여 가볍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관념이 된다.
“천은 기의 변화 유행을 통해 사람과 사물을 생산하는데, 이것은 순전히 한 덩어리의 조화로운 기이다. 사람과 사물은 그것을 품수받으니 곧 인식하고 깨닫는다. 인식하고 깨닫는 능력 가운데 정수가 되는 것은 영민하고 밝아서 사람이 되고 인식하고 깨닫는 것 가운데 거친 것은 혼탁해서 사물이 된다.”(황종희, 99, 재인용)
그러나 황종희에서 이 양태는 하나의 기가 지닌 운동에 불과하니, 기의 운동 상태를 넘어선 기의 실체적 본질은 무엇인가? 마치 베르그송의 엘랑비탈이 관념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고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이미지이듯, 황종희에게서도 기의 본질은 마음인데 이 마음은 단순한 관념이 아닌 심적인 것 즉 관념적인 동시에 신체적인 것이다.
마음이 지닌 이런 본체로부터 인식과 도덕에 관한 주장이 도출된다.
① 마음은 가볍고 유동적이므로 관통하는 성질을 지니니 이를 통해 마음은 우주와 합일에 이른다. 이런 합일은 정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 일어나는 합일이며(천인합일) 이 합일은 곧 실천적 행동으로 출현한다. 이런 합일을 위해서는 마음의 가볍고 유동적인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지행합일) 즉 마음을 응결시켜 욕정화하는 물질적 운동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도덕적 실천이다(체인).
“왕양명과 황종희에게서도 마음은 실재를 능동적으로 비추는 비춤의 작용을 하는 광명의 존재이다. 그것은 항상 비추고 있는 존재다. 그것은 일종의 지의 힘인데 능동적으로 운동하지 않은 적이 없는 존재 즉 다른 존재에 의해 움직여진 적이 없는 존재로서 비추는 마음이다.”(황종희, 97)
② 이런 마음이 다시 다양한 운동 상태에 있으니 마음이 응결하면 욕정이 되고 마음이 유동하면 사단이 된다. 황종희는 마음의 운동 단계를 생기와 장기, 수기, 장기의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에서 출현하는 마음을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이라 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넘어 따로 인간의 본연지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본연지성에 속한다고 말해지는 인의예지는 다만 마음을 오랫동안 지킴으로써 얻은 덕에 해당한다.
“측은한 마음은 운동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생동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기쁨에 속하며 슬픈 감상이 아니다. 사양하는 마음은 질서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성징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에 속하고 엄숙이 아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극복의 양태인데 본질의 거두어들이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분노에 속하며 분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비의 마음은 안정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숨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슬픔에 속하며 분별이 아니다.”(황ㅈ봉희, 158)
“그렇다면, 인의예지는 본질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중용은 성의 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덕이라고 하면 괜찮지만, 성이라고 하면 안 된다. 문자적 의미에서도 낳음과 마음이 합해서 성이 된다. 성이 선하기 때문에 마음이 선하다.”(황종희, 160 재인용)
“우리의 의지가 마음의 본질상에서 투명하게 꿰뚫어 안정 상태가 되면 천기가 욕망을 발하므로 욕망이 다름아닌 천기이다.”(황종희, 177 재인용)
③ 욕정과 사단이 마음의 운동 양태이므로, 욕정조차 버릴 수 없다. 마치 음양이 자연의 기의 운동 양태이어서 그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황종희는 마음이 응결된 상태에서 활발한 유동적 상태로 이행하기를 기대하지만, 응결된 상태 역시 마음의 운동 과정에서 없을 수 없다.
3)
이상에서 이규성은 황종희의 형이상학을 통해 개방성과 소통성의 근거를 발견하려 했다. 만유가 기의 작용 속에 들어 있으므로 서로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황종희는 이런 기의 일원론 위에서 마음을 통해 우주와 합일하며 이를 통해 실천적 행동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마음이 우주와 합일에 이를 때, 이 상태는 평등하다. 우주적 기의 운동은 두 양태로 전개되며, 마음 역시 네 자기 운동 양태 속에 있다. 각 운동 양태는 운동의 과정상 불가피한 것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기의 우주적 생명의 리듬에 속한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황종희가 자신이 부딪혔던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그가 처했던 현실은 이민족의 지배이며, 지배층으로서 사족이 몰락하던 시기였다. 그는 이런 현실은 기의 운동 상 불가피하게 도래한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그는 지배층의 사족으로서 이런 단계를 지나가면 기의 운동에서 다시 긍정적 현실의 단계가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 희망은 그가 부딪힌 현실을 인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유행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 황종희의 생각이다. 유행은 천리로서의 구심점에로 회귀하는 수렴 운동에 의해 고정된 안정성을 찾아야 한다.”(황종희, 185)
“황종희는 철학사 연구와 대규모 반란에 대한 체험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인지하였다. 그는 유행과 발산의 힘에 대해 다시 주렴계의 주정론에 의거해서 그 힘을 주재와 수렴 쪽으로 휘려고 하였다. 그는 유행의 역동성을 받아들여, 그것을 타고서 그것을 순화지도하는 방향을 선택했다.”(황종희, 186)
그러나 지배의 질서가 운동의 양태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곧 지배 질서의 정당성을 의문시하게 만든다. 모든 양태가 기의 측에서 보면 불가피한 것이니 그것들은 무차별하게 된다. 이런 무차별성에 대한 자각은 소위 양명 좌파로서 현성파의 지반이 된다.
황종희는 양명 우파로서 앞에서 보았듯이 명의 멸망이 현성파의 무차별성에 기초한다고 보면서 전통적 지배 질서가 회복되기를 기대했으나, 그가 토대를 둔 형이상학 자체는 모든 현상을 하나의 양태로 만드니, 상호 무차별하게 되면서 현성파를 옹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규성은 이제 현성파의 논리를 다시 음미하게 된다.
이규성의 생성철학(2) – 주자학과 황종희의 내재철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2)-주자학과 황종희의 내재철학
1)
이규성은 서구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려는 형이상학적 혁명에 착수한다. 그는 서구 철학 가운데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의 철학에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이들의 철학이 실재의 본질을 생명의 약동하는 의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서구 철학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거기서 어떤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인데, 그 한계는 앞으로 논증돼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그는 이제 차라리 동양철학의 전통 형이상학에서 무언가 대안을 찾으려 한다. 그가 여기서 특별하게 주목했던 것은 송명 이학의 형이상학이다.
이규성은 그가 쓴 논문을 일별해 볼 때 90년대 걸쳐 여러 송명 이학자들에게 관심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그가 특별하게 주목했던 철학자는 두 사람이니 곧 황종희과 왕선산이다. 그는 이 두 사람에 관해 각기 하나의 책을 헌정했으니, 94년 쓰인 황종희-내재의 철학이며, 2001년 쓰인 왕선산-생성의 철학이다.
황종희와 왕선산은 명말 청초의 이학자인데, 양자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차이는 단번에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그런데 이규성은 전자에게는 ‘내재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후자에게는 ‘생성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책을 직접 읽어보면, 어느 책에서나 이규성이 형이상학을 통해 찾으려 했던 개방성과 소통성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보면, 그는 두 책에 걸쳐 개방성과 소통성의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발견하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전반적으로 보면, 94년 쓰인 황종희의 철학에 대해서는 실망감이 전체를 지배한다. 반면 2001년 쓰인 왕선산의 철학에서는 물론 그 한계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서술돼 있으니, 우리는 이렇게 결론 지어도 무방하리라 믿는다. 즉 이규성은 개방성과 소통성을 근거 짓는 형이상학을 처음에는 양명학파에 속하는 황종희에서 기대했지만, 실망하면서 기학파에 속하는 왕선산의 철학으로 기울어졌다고 말이다.
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두 철학자의 철학을 규정하는 말로 서술한 ‘내재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 사이의 차이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두 철학자의 차이를 앞으로 차례로 탐구할 예정인데, 우선 거슬러 올라가 그가 왜 송명 이학의 창시자라고 할 주자의 철학에 머무르지 못했는가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2)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송명 이학의 형이상학의 근본 축은 곧 이와 기의 관계다. 기는 음양으로 이루어지며, 음양은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한다. 그런 가운데 만물의 이법이 출현하는데, 이때 음양의 동정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기와 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이규성이 보기에 주희에서 음양의 동정은 무질서하고 부단히 운동하는 것이다. 그 자체 속에는 지속성과 통일을 지닌 이법을 발견할 수는 없으므로 외부에서 이법이 주어져야 한다. 이 이법의 원천은 음양 이전에 실재하는 태극에 있다.
주희의 이런 이원론적 관점은 서양철학적으로 본다면, 플라톤의 철학과 흡사한데, 이에 관해서 이규성은 나정암의 주희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기초해서 이규성은 약간 주저하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주* 이규성은 주희에게도 “내재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기 자체의 힘에 의해 그렇게 구조화되는 것은 아니다”(황종희, 77)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주희는 궁극적으로는 이가 먼저 있은 후에 기가 있다.고 단언하였다. 이가 존재한 후에 기를 생산한다는 이생기[의 입장으로 귀결된다.”(황종희, 75)
“자연의 존재는 이에 의해서 부여된 것으로서 이의 존재 부여 능력이 없이는 소멸되고 말 본래부터 불완전한 존재이다.”(황종희, 77)
이와 같은 주희의 형이상학에서는 비록 주희에서 이미 천인합일의 개념이 나온다고는 하더라도 그 결과는 개방적 소통성의 윤리는 아니다. 주희의 형이상학에서 초월적 이의 지배는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위계적 질서가 나오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운명적으로 불완전성과 악에의 가능성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황종희, 78)
3)
이규성은 주자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양명학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양명학파 가운데 좌파라고 할 태주 학파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결국 그는 양명학을 계승하면서도 태주학파를 비판하는 황종희의 철학에 이르게 된다.
이규성은 황종희의 철학적 의도나 배경에 관해 왕양명의 제자인 호한의 말을 빌어 온다.
“송의 유학은 분별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주석과 그 해설에 노력하였다. 명의 유학은 총괄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종지를 세웠다. 그러나 명유는 훈고의 지리멸멸을 싫어하여 반드시 종지를 표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그 폐단은 훈고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도라는 것은 천하의 보편적인 도이고 학이란 천하의 보편적인 학이다. 어찌 따로이 종지를 표방할 필요가 있겠는가?”(황종희, 49)
호한의 말을 통해 황종희가 주희나 양명학을 동시에 넘어서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규성은 황종희의 형이상학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황종희에서 이는 기의 운동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기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데, 우선 그에게서 기는 하나의 기이며, 이 기의 양태가 곧 운동과 정지이며 이때 운동하는 상태를 양이라 하고 정지한 상태가 음이 된다.
“하늘과 땅을 관통하고 고금을 꿰뚫어 하나의 기가 아닌 것이 없다. 기는 본래 하나이다. 그러나 가고 오며 닫으며 열고 오르고 내리는 차이가 있기에 나누어져 운동과 정지가 된다. 운동과 정지가 있어서 나누어져 음과 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음양의 운동과 정지는 천 갈래 만 갈래로 변화하고 어지러이 얽히고 설키지만, 결국 혼란스럽게 되지 않는다. 영원히 이렇게 추웠다고 더워지며 영원히 이렇게 생산하고 성장하며 거두고 저장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변화한다. 이것이 곧 이른바 이이며 이른바 태극이다. 그것이 문란하지 않은 측면에서라 하고 그 궁극성의 측면에서 태극이라 한다.”(황종희 64, 재인용)
황종희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규성은 음양이 일기의 양태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음양이 독자적인 실체인 기가 아니라, 하나의 기가 운동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이를 ‘기의 변양태’(황종희, 66)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기를 황종희는 정명도의 말을 빌어 ‘생의’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약동하는 생명으로서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을 닮은 개념이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1) –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1) –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1)
이규성 선생(이하 이규성) 철학의 본령이 어디 있을까? 이규성이 지은 여러 저서를 읽는 가운데 항상 느꼈던 의문이 바로 이런 질문이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는 단순한 철학 연구자는 아니다. 그는 무언가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기 위해 고투했으니, 그의 글을 읽으면 누구나 이규성 철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철학은 기존의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일종의 논평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그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의 철학적 주장은 그가 쓴 글의 맥락에 따라서 제시되었기에 여러 차례 중복되는 발언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겹칠 뿐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그의 철학은 그런 논평 가운데 흩어서 말해졌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을 읽는 가운데 필자에게 든 의문이 그런 주장들 가운데 이규성 철학의 핵심, 본령이라고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2)
일단 그의 철학의 출발점은 시대 상황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여러 글 가운데 아마도 자신의 철학을 위해 체계화를 시도했던 유일한 글이 있다면, <한국현대철학사론-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이라는 책 3부 현실과 전망>이라는 글일 것이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철학에 도달하기 위해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도래하는 시대의 철학을 제시했는데, 다만 자기의 철학의 출발점과 극복해야 할 철학, 그리고 앞으로 기대하는 철학의 지향점만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최종적 결론 즉 그가 형성하려는 형이상학 자체는 이 글에서 빠져 있다는 점에서 미완성의 글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통해서 그의 철학적 의식만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 글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 그가 처했던 그의 시대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은 그가 철학을 개인적인 선호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대한 극복이라는 과제에 복무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하겠다.
이 글의 목적상 그런 비판을 상세하게 다루는 것은 생략하려 한다. 다만 그는 자기 시대를 외적으로는 서구의 지배 아래 종속되어 있으며, 내적으로는 억압과 불평등으로 가득한 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그가 70년대 이후 종속적 발전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는 사정을 안다면, 누구나 시인할 만한 시대 의식일 것이다.
그는 이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실천적 운동에 뛰어든 흔적은 찾기 어렵다. 몇몇 에피소드적 사건*을 제외하면 그는 시대 극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근원적인 실천에 종사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서 이 더 근원적 실천이 바로 철학함이다.
주*필자의 기억으로 이규성 선생은 아마도 73년경 정현백 선생 등과 함께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일주일 정도 활동했다. 그리고 그의 친구와 함께 그의 집이 있던 창신동(또는 동대문) 쪽 어느 교회 부설 야학 강사로 1년 정도 활동하기도 했다. 연도나 장소 등에 관한 필자의 기억은 불확실하지만, 그의 실천적 관심에 대한 증거로 소개한다.
3)
이 글은 그의 철학 가운데 그가 형성하려고 했던 형이상학을 찾아보려는 시도인데, 이런 형이상학이 어떤 맥락에서 제시되었는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을 읽어 볼 때 대체로 그의 철학적 정신은 다음과 같이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①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종속적 발전, 억압과 불평등의 근원은 자본의 탐욕과 서구 과학 기술의 지배에 있다고 보며, 이런 자본의 탐욕과 서구 과학 기술은 그 밑바닥에 서구의 전통을 이루는 형이상학 즉 초월적 실재론 또는 객관적 관념론이 존재한다고 본다.
② 그는 이런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 서구 철학 내부에서 일어난 비판적 철학에 주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이다. 하지만, 그는 쇼펜하우어나 베르그송에서도 어떤 한계(?)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③ 그가 쓴 논문의 순서만 가지고 보면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 80년대 초기에는 주로 맹자나 주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초월적 실재론이나 객관적 관념론의 전통에 부딪히면서 실망한다. 그는 이 시기 대진(1982)이나 유기(1990), 이대조(1990), 정자(1999), 강유위(2003)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④ 80년대 말에서 2000년까지 그는 두 권의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곧 황종희의 내재 철학(1994)이고 왕선산의 생성 철학(2001)이다. 여기서 그는 생성의 세계와 합일(천인합일)하는 가운데 심적 개방성과 소통의 가능성에 도달한다는 원리에 이른다. 그에게서 실재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생성하는 세계이며 이는 단순히 실재를 인식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재를 온몸으로 채특하는 실천적 혁명이다. 그는 두 철학자에게서 자신이 발견하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어느 정도 찾은 것으로 보인다.
⑤ 그에게서 실재는 단순한 이론적 세계가 아니라 윤리적 세계이므로 형이상학적 혁명은 곧 윤리적 혁명이 된다. 그는 이런 내적 혁명을 통해 개방성과 소통성을 갖춘 위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실천적 혁명이 가능하다고 본다.(내성외왕의 정신) 그러나 그는 두 철학자가 제시한 윤리는 여전히 봉건적 윤리에 머무른다는 한계 때문에 고민한다.
⑥ 2011년 발표된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에서 그는 생성의 형이상학에서 발굴할 수 있는 저항정신, 시대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신적 혁명, 개방과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그는 그의 철학적 고투의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개방 소통을 토대로 해서 건설되는 새로운 사회는 공화주의(공화적 소유)에 기초한 민주주의 사회다. 이런 사회는 자유 민주주의와 구별되며 그렇다고 사회주의 혁명이나 무정부주의적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⑦ 그 이후 그는 쇼펜하우어에 관한 연구서(2016), 한국현대철학자(2012)이나 중국의 현대철학자(2020)에 대한 논평에 몰두하는데 이는 자신이 발전시킨 철학을 완성하기 위한 선배 철학자를 비판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 그의 철학의 핵심은 형이상학적 혁명에 있다. 그는 이 형이상학적 혁명을 존재가 아닌 생성의 철학에서 발견하며 이 생성의 철학을 통해 심적 개방성과 소통적 연대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논지는 사실 앞으로 논증되어야 할 테제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 가운데 특히 하나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려 하는데 바로 그가 몰두 했던 생성의 형이상학이다. 이규성의 철학의 주춧돌이라고 할 주장 즉 생성의 철학을 통해 내적 개방성과 소통의 연대성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성공적이었을까? 필자가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바로 그가 제시한 생성의 철학이 어떤 점에서 개방성과 소통의 근거가 되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에 있다.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김성우(대동평화연구원)
세계는 ‘빅테크 과두정’이라는 새로운 유령의 위협 앞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월가를 대신해 거대 IT 플랫폼 기업들이 경제를 넘어 정치 권력까지 장악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조차 “우리는 빅테크 억만장자들의 과두정으로 향하고 있다”고 경고했듯이, 이는 디스토피아 소설 속 시나리오가 아닌 우리가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사악한 생각’은 본질적으로 ‘은밀함’을 속성으로 한다. 공론장이 파괴되고 정보가 소수 권력에 독점될 때 사회는 어둠의 시대로 진입한다. 오늘날 알고리즘 권력은 겉으로는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이면에는 데이터 독점과 여론 조작을 통해 공공성(Publicity)의 기초를 잠식하며 공동선(Common Good)을 파괴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류에게 ‘재앙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낳고 있다. 사생활 침해, 차별적 알고리즘, 법적 책 임의 불명확성 등 인공지능이 야기하는 사회 문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AI가 학습한 편향된 데이터는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고착화하고, 딥페이크와 위치 추적 기술은 개인의 기본권을 상시적으로 위협한다. 확증 편향을 강화해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필터 버블’ 현상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위기의 핵심에는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빅테크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구글, 메타, 아마존과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사용자 데이터를 독점하고, 객관성과 중립성으로 포장된 알고리즘을 통해 여론과 정치적 선호까지 조작하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이 폭로했듯, 이윤 극대화를 위해 설계된 알고리즘은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불투명한 통제 체제로 변모시키고 있다. AI 기술의 상업적 권한이 빅테크 과두정에 집중되면서, AI는 인류의 번영이 아닌 소수의 사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그런데 가장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위협은 바로 ‘노동의 종말’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예견한 ‘노동의 종말’은 AI의 비약적 발달과 함께 가혹한 현실이 되었다. 정보통신기술의 진보로 세계 경제 규모와 생산성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고용 시장은 얼어붙고 실업의 공포는 전방 위로 확산 중이다. 이는 기술 혁신이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과거 자본주의가 가졌던 ‘기술 진보에 따른 고용 창출’이라는 선순환 기제를 완전히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모순이 드러난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간을 배제한 효율적 기술을 채택하지만, 그 결과로 해고된 노동자들은 구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즉, 생산의 효율성은 극대화되었으나 정작 그 생산물을 소비할 주체는 사라지는 ‘수요의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술 혁신의 파급 범위다. 과거의 자동화가 육체적 반복 노동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AI와 로봇이 의사, 변호사 등 고도의 지적 전문직 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다. 숙련된 경력자들은 일터에서 밀려나고, 청년층을 위한 신규 고용의 문은 아예 폐쇄되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가 고착화될 전망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의 결실은 플랫폼을 장악한 소수 빅테크 과두 세력에만 집중될 뿐, 대다수 시민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풍요에서 소외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정점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용 절벽과 수요 부족의 악순환이 심화되면, 과거 대공황과 같은 전 지구적 경제 참사가 재현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파국을 막고 자본주의의 자정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복지를 강조 하는 케인스의 복지경제학 아니었던가.
출처: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3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