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8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4)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제9권 576b) – (2)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자보다 행복한 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제2권부터 논의가 대문자 비유를 거쳐 국가 단위로 확대된 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서 철학자 왕정이 말을 통해 제시되었고, 이제 제8권부터는 앞서 살폈듯이 그 연장선상에서 그 비교 대상으로서 타락한 현실 정치체제가 그 또한 말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전자가 말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상승의 국면이었다면 후자는 그 나라가 말로 해체되는 하강의 국면이다. 그런데 이상국가가 해체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지성과 철학, 교육과 설득을 통한 수정과 극복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 한,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비교를 위한 논의의 방편 상 실제와 다르게 무사이 여신들의 입을 빌려 철학자 왕정에서 그 지성과 철학, 영혼의 이성 부분이 마비된 경우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제했을 경우 철인왕정으로부터 어떻게 명예정, 과두정정, 민주정으로, 그리고 각각 그것에 상응하는 개인으로 순차적으로 타락의 정도를 더해가며 해체 타락해갈 수밖에 없는지를 다각적으로 살핀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비교 대상으로서 최악의 정치제제로서 최종 도착지 참주정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도 앞서 수차례 밝혔듯이 제8권 이후 이상국가의 타락과 해체과정은 비록 정치제제 변동과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성찰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그 순서 그대로 정치체제가 변화해갈 것이라는 정치체제와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역사적 견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전 과정의 근간이자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성과 철학, 그것에 바탕한 교육과 설득이 덕과 제도로써 작동하고 있는 상태와 그 모두가 결여 또는 마비되어 있는 상태를 비교할 경우, 최악의 정체로서 참주정의 나라와 참주정적인 개인이 정의와 행복과 관련하여 얼마나 정반대의 귀결을 갖게 되는지를 이치의 측면에서든 심리적 측면에서든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566d-569c 제8권 끝]
* 이제 소크라테스는 행복εὐδαιμονία과 관련한 참주정의 실상을 살피기 전에 참주의 모습과 특징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참주τύραννός는 처음 얼마 동안에는 자신은 참주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적으로도ἰδίᾳ 공적으로도 δημοσίᾳ 많은 것들을 약속하고 채무χρέος를 탕감해주고 토지γῆ를 나누어 주며 모두에게 상냥하고 부드러운 척한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전쟁πόλεμος을 일으킨다. 부과된 전쟁경비 때문에 궁핍해져서 그날그날 먹고사는 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그만큼 참주에 대해 음모ἐπιβουλεύειν를 꾸미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리고 자유인다운ἐλεύθερος 생각을 갖고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의심되는 자들을 적에게 넘겨 파멸시킬 구실을 갖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566d-567a)
2) 참주를 비판하며 거침없이 얘기παρρησιάζεσθαι하는 자들 있다면 친구든 적이든 조금이라도 유용한ὄφελος 자들, 이를테면 용감하고 야심이 있고 현명하고 부유한 자들을 적으로 삼아 온 나라를 정화할 때까지 음모를 꾸며 모두를 제거해야만 한다ὑπεξαιρεῖν.(567b-c)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름다운καλός 정화καθαρμός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의사ἰατρός들은 나쁜 것을 제거하고 좋은 것을 남겨놓지만 참주는 그 반대로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축복받은μακάριος 필연ἀνάγκῃ이라고 언급한다.(567d)
3) 이에 따라 시민πολίτης들의 미움을 받게 되면 될수록 믿을 만한πιστός 경호창병δορύφορος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참주는 보수μισθός를 주면 저절로 날아드는 외래종 수벌들 즉 외국인 용병들과 시민들에게서 빼앗은 자국인 노예δοῦλος 즉 토종 수벌들로 경호창병을 구성한다.(567e) 이들은 신참 시민으로서 참주와 어울리겠지만, 양식 있는ἐπιεικής 시민들은 그를 미워하고 피한다.(567e-568a)
4) 그러나 에우리피데스 같은 비극τραγῳδία 작가들과 다른 시인들은 영리한πυκνός 생각διανοία에서 ‘참주들이 지혜로운 건 지혜로운 자들과의 어울림συνουσία 덕분’이라고 말하면서 참주정을 ‘신과 같은’ἰσόθεος 것이라고 찬양한다. 비극시인들οἱ τῆς τραγῳδίας은 지혜로워서σοφός 우리들이 그들을 참주정의 찬양자ὑμνητής들이라는 이유로 우리 체제 안에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들은 양해할 것이다.(568b) 그들은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군중을 끌어 모으고 목소리가 아름답고 우렁차며 설득력 있는 자들을 고용해서는 그 나라의 정치체제를 참주정이나 민주정으로 끌고 다니며 그에 대한 보수를 받고 또 존중도 받는다τιμῶνται.(568c)
5) 참주들은 신전 재물ἱερὰ χρήματα 같은 나라 재산과 자신들이 파멸시킨 자들의 재산으로 전쟁 경비를 쓰고(568d) 민중에게는 세금εἰσφορά은 낮게 부과하다가(568d) 결국 자금이 동이 나면 마침내 자신은 물론 그의 술친구συμπότης들도 그의 남녀 패거리ἑταῖρος도 모두 참주를 낳아준 아버지 즉 민중 δῆμος들을 수탈한다.(568e)
6) 아버지(민중)가 아들(참주)을 낳고 키운 까닭이 부자들과 소위 ‘아름답고 뛰어난’ καλῶν κἀγαθῶν 사람들에게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한 것임에도 반대로 이제 다 큰 아들이 어버지의 돈을 빼앗는 꼴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과 아들의 골칫거리 술친구들을 집에서 내쫓으려 해도 그들보다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어떤 짐승θρέμμα을 낳고서는 그를 반기고 키웠는지 알게 된다.(569a-b)
7) 그리하여 아들인 참주가 아버지에게 완력βιά을 쓰려 들고, 아버지가 자신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으면 때리기τύπτειν라도 하는 상황 즉 참주가 부친살해범πατραλοίας이자 가혹한 노인부양자γηρότροφος가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569b) 민중은 자유민이 노예가 되는 연기καπνός를 피하려다가 노예가 주인δεσποτεία이 되는 불 속으로 뛰어들고 만 셈이 된 것이다. 예전에 입었던 지나치고 철에 맞지 않는 자유 대신, 노예들의 노예가 되는 가장 가혹하고χαλεπωτάτην 쓰라린πικροτάτην 옷으로 갈아입은 처지 한마디로 참주정의 예속 상태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민주정으로부터 참주정이 어떻게 변화해 나오는지에 관한 전말이다. (56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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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7b ‘유용한hophelos 자’ ; 참주 비판에 가담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사람. 이어 나오는 용감하고 야심이 있고 현명하고 부유한 자들이 그에 속한다.
* 567c ‘계속 통치하려면 친구든 적이든 조금이라고 유용한 자는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제거해야 하네.’ : 이것은 참주가 왜 혼자 고립되어 황폐해진 영혼을 지닌 불행한 개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내적 필연성을 함축하고 있다.(헤로도토스<역사> 5권 92절,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 3권 13장 1284a 26 이하, 5권 10장 1311a 20 이하) 에우리피데스 <탄원하는 여인들>은 정적의 제거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들을 담고 있다.(445~449) 그 가운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코린토스의 독재자 페리안드로스가 밀레토스의 독재자 트라쉬불로스에게 ‘어떻게 해야 나라를 가장 안전하게 다스릴 수 있는지’를 전령을 보내 물었다. 트라쉬불로스는 말없이 전령을 밀밭으로 데려가 이삭들 중 가장 크고 유독 높이 자란 이삭들을 골라 잘라버렸다. 전령은 이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 페리안드로스에게 보고했고, 페리안드로스는 이를 ‘국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위협이 될 만한 엘리트)들을 처형하라’는 조언으로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서는 두 인물의 역할이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 567d ‘축복받은 필연’ : 앞서 설명한 내적 필연성 즉 평생 대중의 미움을 받고 살거나 죽을 수밖에 없거나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는 참주의 삶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567d ‘숱한 자들이 날아 들 겁니다. 외래종 수벌’ : <법률>에도 이들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거론할 가치가 있는 외국인들은 네 부류입니다. 첫째 부류 중 상당수는 돈벌이하러 다니느라고 한 해의 이맘때쯤 바다 건너 다른 나라로 그야말로 날개라도 단 것처럼 날아들지요.’(952e) 외국인 용병으로 구성된 경호대는 그리스 참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크세노폰의 <히에로>(Xen. Hiero 5.3), 특히 디오니시우스에 관해서는 그로트(G. Grote)의 저서 <그리스 역사>(History of Greece X P. 221)를 참조.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외래종 수벌은 비 그리스계 외국인을 말하고 토종 수벌은 전쟁 포로가 되어 자국 시민의 노예가 된 사람들로서 비(非) 그리스계 외국인, 그리스계 다른 폴리스 출신자 모두를 포함한다.
* 568a-b ‘지혜로운 자들과 어울림 덕분’, ‘비극 시인을 체제 안에 받아들이지 않아도’ : 여기서 ‘지혜로운 자들’이란 참주와 어울리는 당대 비극 시인들을 말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참주 관련 부분에서 ‘지혜롭다sophos’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사용한다. 물론 그것은 참주들이 ‘부자의 문간’(489b)으로 몰려드는 현자들로부터 지혜를 얻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다. 하지만 플라톤은 여기서 그 말을 참주와 그 주변에 몰려드는 시인들에 대한 찬사로 바꾸어 그들 모두를 지혜로운 자들로 비틀어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이 여기서 인용한 말 중 ‘비극은 지혜롭다’는 표현 자체는 사실 에우리피데스가 아니라 소포클레스의 <작은 아이아스> 중 한 구절이다. 플라톤의 이 오류는 <테아게스> 125b에서도 반복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아마도 에우리피데스가 ‘지혜로운σοφός’이란 말을 상투적으로 과도하게 반복하고 있었던 탓에, 그런 오해가 발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에우리피데스가 참주정을 ‘신과 같은 것이라고 찬양했다’(568b)는 말도 사실 그것이 실린 <트로이 여인들>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진정한 비극은 아름답고 좋은 삶을 모방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기본적으로 당대 비극 시인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사실 5세기 아테네에서 전성기를 이룬 연극들은 비극과 희극을 불문하고 모두 부자들의 공적 기부로 유지되면서 권력을 비판하기보다는 당대 민주정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도구 즉 대중용 교육과 선전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장치로 이용되곤 했다. 이곳에서도 그들은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군중을 끌어 모으고 목소리가 아름답고 우렁차며 설득력 있는 자들을 고용해서 그 나라의 정치체제를 참주정이나 민주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568c) <법률>에서도 플라톤은 아테네 손님의 입을 통해 새로 세우는 나라에 비극시인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817a-d 참고)
* 568b ‘그들은 양해할 것입니다.’ : 비극시인들을 참주정 찬양자로 우리들이 배척해도 그들 중 일부는 왜 자기들이 그렇게 불리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의미. 이곳에서도 ‘지혜롭다sophos’와 ‘세련되다kompsos’라는 표현 모두 반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 568c ‘정치체제들의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숨이 차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들에 대한 존중timē은 그만큼 더 시들고 마네.’ : 시인들은 기본적으로 지혜롭고 영리하여 현실과 타협하여 참주나 민중들의 즉물적인 요구에 잘 부응하고 그들로부터 존중을 받지만, 옳고 그름만을 기준으로 나라가 운영되는 철학자 왕정에 가까이 갈수록 그 기준에 부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해 존중받기 힘들다. 이것 역시 당대 시인들에 대한 플라톤의 기본 시각을 잘 보여준다.
* 568c ‘옆으로 새서eksebēmen’ : 참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비극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새 나간 것을 말한다.
* 568d ‘신전 재물이 나라에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에는 그것을 쓰고, 또 자신들이 파멸시킨 자들의 재산을 쓰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 실제로 디오뉘시오스 1세는 신전들을 약탈함으로써 헬라스의 도덕관념에 큰 충격을 주었다.(그로트 <그리스 역사> X p. 300, 302) 시라쿠사의 기사 테오도로스(Theodorus)가 디오뉘시오스 1세를 고발한 탄핵서(Diodor. XIV 65)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자는 신전들을 약탈하고, 사유 재산을 그 소유주들의 목숨과 함께 빼앗은 후, 주인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 집의 종들에게 급료를 주고 있다.”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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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주tyrannos는 일반적으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이용하여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독재를 일삼는 사람을 말하지만 세습 참주를 비롯해 참주마다 집권 배경과 행태가 조금씩은 차이가 있다. 이곳에서 가장 타락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을 이끄는 참주는 민주정의 제멋대로의 자유가 초래한 위계질서의 붕괴와 그로 인한 계층 간 갈등과 빈부격차의 심화를 틈타 침 달린 수벌 즉 선도자가 대중의 이익을 내세워 환심을 얻은 후 민회 등 민주정의 의사 결정 체제를 무력화시키고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오직 자신만의 권력과 이익, 안위를 위해 오히려 민중을 노예로 삼아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자로 그려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멀게는 기원전 6세기 초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Periandros, 기원전 6세기 중후반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와 그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 기원전 5세기 시라쿠사의 히에론Hieron 1세와 겔론Gelon 등이 있었고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하기 전 만나거나 목도했던 참주들의 경우에는 기원전 404년 민주정의 혼란을 틈타 스파르타를 등에 업고 권력을 차지한 30인 참주들과 플라톤 자신이 시칠리아를 처음 방문했을 당시 목도한 시라쿠사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가 있다. 특히 플라톤의 <일곱 번 째 편지>를 보면 30인 참주정과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당시 민주정에 대한 절망적인 탄식과 함께 플라톤 자신 그러한 타락한 정체들이 철학자 왕정을 꿈꾸게 된 기본 배경이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326a)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품고 그의 나이 40세 때 방문했던 디오뉘시오스 1세 참주정 치하 시라쿠사 사람들의 타락상이 그 뒤를 이어 세세하게 그려지고 있다.(326b-c)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참주들의 행태는 이전 시대 참주들에 대한 전승도 일부 포함되어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으로는 그가 실제로 겪은 30 참주들과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의 폭압적 행태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불확실한 전승에 따르면 디오뉘시오스 1세가 그곳을 처음 방문한 플라톤을 초청하여 자신과 친교를 맺을 것을 강권하자 그에게 ‘강한 자가 덕에 있어서 뛰어나지 않는 한, 강한 자의 이익은 자족적이지 않다’고 입바른 소리를 하여 디오뉘시오스 1세에 의해 노예로 팔릴 뻔했으나 퀴레네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고도 전해진다. 그럼에도 그의 편지에는 정작 당시 시라쿠사의 타락상은 언급되어 있어도 디오뉘시오스 1세의 이름은 한군데에서조차 거론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주석가들은 시라쿠사에서 그가 겪은 수모가 플라톤 자신 얼마나 입에 담기조차 싫어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해석하기도 한다.(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편지들> 부록 ‘플라톤의 생애’ 참고)
*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완벽한 의미의 참주정을 ‘1인 지배자가 책임 추궁을 당하지 않으면서 지배 받는 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더 나은 사람들 모두를 지배하는’ 정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정치학> 1295a 20 이하) 아리스토텔레스의 참주정에 대한 위와 같은 규정은 다른 정치체제들에 관한 규정과 마찬가지로 지배자의 숫자와 지배 목적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다른 정치체제들을 다룰 때도 그랬듯이 그러한 외적인 양태나 지배 목적만이 아니라 지배 원리가 과연 철학과 지성에 입각해 있는 것은 아닌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에 더해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 상태 내지 내적 욕망구조까지 유기적으로 함께 고려한 상태에서 참주정과 참주정적 인간을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플라톤의 정치체제론은 복합적이다. 그에 따라 이곳에서 참주정은 외적 통치구조에서 계층 간 상호 분업적 조화와 공존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 즉 나라의 모든 권력이 오직 참주 한 사람만의 이익을 위해 집중되어 있는 체제로 규정됨과 동시에 내적 욕망구조에서 영혼의 조화가 완전히 마비된 상태 즉 영혼의 이성 부분이 자신의 사적 탐욕을 극대화하는 도구적 계산적 이성으로 전락하고 기개 부분과 욕구 부분은 그것에 철저히 예속된 상태로 규정되고 있다. 요컨대 철학자 왕정의 통치구조와 욕망구조 모두가 그야말로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와해된 상태가 곧 참주정인 것이다.
* 이곳 제8권 말미에서는 우선 참주정의 행태와 특징이 다루어지고 이어서 제9권부터는 참주정적 인간의 행태와 특징이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참주정의 행태와 특징만 보더라도 참주정이 철학자 왕정과 비교하여 얼마나 정반대의 위상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전형적인 특징들을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처음에는 채무 탕감과 토지 분배 등 대중을 위한 유화정책을 편다.
2) 민중이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처지에 놓이도록, 먹고 사는 일 외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그리고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파멸시킬 구실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한다.
3) 자신을 옹립하는 데 협력한 자들일지라도 참주를 비판하는 자들이 있는 경우에 친구든 적이든 조금이라도 유용한 자는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모두 제거한다.
4) 자신의 안위를 담보하기 위해 외국 용병을 끌어들이거나 내국 노예들을 빼앗아 자신의 경호창병으로 삼는다.
5) 자신을 지혜로운 자로 칭송하며 아부하는 시인들 세칭 지식인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시를 짓게 하고 목소리가 우렁차고 설득력 있는 자를 고용하여 참주정을 옹호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한다.
6) 신전 재물 등 국가 재산은 물론 자신들이 파멸시킨 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쓰고 민중에게 부과하는 세금은 낮추다가 그것마저 동이 나면 폭력으로 민중들을 수탈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고대 그리스 참주정의 자기 보존 방식을 이곳보다 훨씬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곳의 특징들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참주정이 얼마나 최악의 정치체제인지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그 주요 내용을 추려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정치학> 1313b 1-1314a 10)
1) 특출한 사람 높은 기상을 가진 사람을 제거한다.
2) 정치적인 모임, 사적인 잔치 등을 허용하지 않는다.
3) 자부심과 신념을 형성케 하는 모든 것을 경계한다.
4) 학파나 학문적 동아리가 생겨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5) 도성에 있는 사람들을 항시 보이는 곳에 있도록 한다.
6) 남자들에 대한 험담을 누설할 수 있도록 여성과 노예에게 선의를 베푼다.
7) 피지배자들의 말과 행위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도록 염탐꾼을 갖고 있어야 한다.
8) 일상에 매달려 음모를 꾸밀 수 없도록 여가를 없애고 피지배자들을 가난하게 한다.
9) 지속적으로 지도자가 필요한 상태에 있게끔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한다.
10) 고분고분한 사람, 아첨하는 사람들에게 영예를 부여한다.
* 참주정이 갖는 이와 같은 특징들은 언론,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를 금지하고 시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일상으로 삼았던 20세기 인류가 겪은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파시즘과 나치즘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오늘날 나날이 득세하는 인종주의, 극우주의, 신종 매카시즘, 무한경쟁과 배타적 이기주의 및 그로 인한 각자도생의 삶도 그러한 피폐상이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준다. 게다가 절망스럽게도 초국적 기업들의 정보 감시 및 통제 시스템은 대중을 위한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환호를 바탕으로 더욱 정교함을 더해가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를 비롯한 현대판 참주들은 그러한 행태들이 초래하는 문명적 환경적 위해들에 눈을 감고 오히려 그것들을 경쟁 우위의 발판으로 삼아 군사적, 경제적 온갖 수단을 다해 끊임없이 전쟁과 침탈을 자행하고 있다. AI로 표징되는 현재 정보문명의 급속한 발달 또한 그것을 선도하는 일부 소수의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머지 대부분의 나라를 거의 불가역적인 양극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부 선진 소수의 나라에 속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그것의 선도적 개발에 목을 매고 있지만, 자칫 초인간 인공지능이 통제 불능의 수준으로까지 발달하는 경우 거꾸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설사 그것이 고도의 혜택과 효율성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어쩌면 속칭 부자 나라 잘난 사람들만 그것을 누리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과 사람들은 그들에 예속되어 가난과 억압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초국적 신종 계급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기후 및 환경파괴까지 더해질 게 필연이라면 인류의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만약 AI가 초고도의 인공지능을 갖고 있으면서 사람과 똑같이 자의식과 함께 생물에 준하는 생존 및 번식 욕구, 정치적 능력까지 갖추어 ‘자기를 무력화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힘의 개입’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른다면 또는 그런 AI를 최상위 수준으로 운용하는 초강대 국가들과 초국적 기업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그 자체 이미 참주적 특징을 내면화한 것들로서 필연적으로 상호 패권투쟁을 유발하면서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물론 위와 반대로 그에 대응하여 그 만큼 도덕적 AI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인류 전쟁사가 보여주듯이 그들 간 적대적 싸움 자체가 초래하는 피 흘림의 역사는 오히려 크기와 정도를 더해가면 더해갔지 결코 줄어들거나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비관적 상상들이 매우 극단적이고 단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지성의 결여가 초래한 고대 참주정의 폐해가 오늘날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고도로 발달한 기술 문명의 힘을 바탕으로 더욱 강고하고 보다 주도면밀한 방식으로 더욱 광범위하고도 심각하게 유포, 심화, 고착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은 오늘날 최선의 정치체제로서 평민 다수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체제를 강제로건 속임수로건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2500년 전 참주정의 참혹상을 겪은 플라톤은 아래와 같은 신념을 가슴 깊이 새기고 평생에 걸쳐 이상국가를 구상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 신념의 밑바닥에는 그 이상의 크기와 깊이에 못지 않게 신의 도움에 기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자신을 절망에까지 이끌었던 참담한 기억들이 무거운 근심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 “올바르고 진실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일곱번째 편지> 326a, <국가> 473d)
*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정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치체제의 변화를 논하면서 그러한 변화가 실제 역사에서는 플라톤의 말처럼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과 함께 참주정 또한 정치체제 변화의 한 국면인데도 그 참주정이 또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지는 다루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정치학> 1316B) 그러나 이것 역시 오히려 <국가> 제8권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정치체제 변동론이 정치체제가 실제로 어떻게 역사적으로 변화해가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다만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이 최선의 정치체제로서 철학자 왕정으로부터 행복과 정의와 관련하여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편적 논의 차원의 것임을 반증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번 언급했지만 플라톤의 철학은 역사철학이건 정치철학이건 바람직한 목적과 방향은 제시되어 있을지라도 그 실제 진행은 나라건 개인이건 능력에 따라 그렇게 갈 수도 있고 가다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전환할 수도 있는 이른바 양상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박홍규 선생이 플라톤의 철학을 목적론이되 동적인 목적론으로 부르는 이유도 플라톤 철학 자체가 그러한 변화의 역동적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박홍규의 존재론적 사유에 담긴 플라톤의 정치철학’,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 참고) 이런 의미에서도 오늘날 정치적 문명적 위기 또한 정치의 지성화를 강조하는 플라톤의 가르침대로라면 그것의 해결 및 극복 모두 우리 손 특히 현대 정치지형을 떠받치고 있는 시민들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지성의 힘을 어떻게 깨우치고 어떻게 함께 사회 변혁의 역량으로 모으고 키워 나아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경우 최고 권력자의 참주적 행태로 나라가 큰 위험에 처했을 때 평범한 일상의 시민들이 보여준 위기 극복의 모습들은 시대의 모순을 혁파하고 변화를 담보하는 민중의 지성, 집단지성의 발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평화적 시민 혁명으로서 촛불 혁명은 현대 문명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를 알려 주는 실로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이로써 참주정에 관한 논의는 제8권으로 끝난다. <국가>의 권수는 본 강해 서두에서 밝혔듯이 기본적으로 당대 파피루스 권당 기준 분량에 따라 나누어진 것이라 각 권이 꼭 주제에 맞추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참주정적에 인간에 대한 논의는 참주정과 쌍을 이루는 논의임에도 제9권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무리된 후(576b) 타락한 정치체제에 관한 논의의 최종 목표 즉 가장 최선의 정치체제로서 철학적 왕정과 철학자 그리고 가장 최악의 정치체제로 다루어진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사람과 가운데 과연 누가 왜 얼마나 더 행복한가에 대한 비교 판정이 이루어진다.(576b- 제9권 끝 592b)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제9권 576b) – (3)
백성과 민중이 수면 위로 [천 하룻밤 이야기]
백성과 민중이 수면 위로
2026 06 24. 하지(夏至)로부터 이틀 지나
우리나라도 19세기에 서서히 백성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명나라는 멸망했고(1644년) 청나라가 들어선 지 150여년이 지난 정조 시기에도 숭정이란 명나라 년호로 책력을 썼다. 몰락 양반의 두 계열이 있다. 실학과 동학, 더하여 이들과 연관의 제도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서얼이 있었다. 이들이 왕족도 훈구 귀족도 아닌 제3신분이, 원효의 육두품에서도 있었듯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의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둘 다 백성과 민중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맑스와 소비에트 사상이 들어온 1926년 이후였다. 백성과 민중 속으로, 즉 심층으로 들어간 운동은 우리 입말이 표면으로 나오는 시기가 되어야 겨우 수면 위로 오를 것이다.
표면 위에서 입말이 소통하고 일반화하는 과정은 시간이 필요하다. 프랑스가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프랑스어로 말하고 글쓰기를 한지 200여년의 과정을 지나서야 세계사적인 프랑스대혁명을 이루었다. 우리 입말이 1446년에 발명했으나 왕족과 사대부에 눌려서 400여년을 수면 아래에 침잠하여 흘렀다. 그런데 나라가 위급할 때는 백성과 민중이 일어났고, 19세기 후반에는 온나라에서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상층의 저항(억압)은 여전하여 프랑스의 인민처럼 솟아나기(용출선 만들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런 시기에 일제가 침략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자치를 가지려 할 때 미제가 들어왔다. 미제는 일제를 내보내기 위한 방식에서 한글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 기회로 우리 입말을 통한 사유를 전개하기 시작하여 80여년을 거치면서, 촛불시위와 불빛시위를 통해 민주제도를 확보하려고 하고, 이제 7공화정을 백성과 인민의 입말과 문자화로 이루고자 하는 시기에 도달했다.
정치권에서, 혁명이 아니었지만, 수구파(훈구파)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스스로 엎드려 빌어야 하는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표면의 세력으로 민주당과 진보계열이 있다. 그런데 집권한 민주당이 수구파로 회귀하려는 움직임과 진보계열과 연대하려는 세력 사이에서, 하버마스의 용어로 숙고, 또는 니체의 경합(아곤 ἀγών, Wettkampf), 루소의 사회권(정치권)의 담론방식들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다. 흥미롭게도 제도 속의 이원론을 전개했던 유시민이 어느 정당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3계열에 속할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 전에 제3신분을 자칭했던 신부 시에예스(Sieyès)가 혁명에 가담하여 다양체(왕족, 성직자, 법관 귀족, 백과전서 지식인, 자유사상가) 속에서 제3신분으로 인민의 정부를 세우는데 기여했다. 유시민이 두 세력과는 다른 세력으로 등장할 때, 학계는 어떤 반응을 할까? 이미 흥미로운 반응이 나왔다. 한인섭 교수가 형사소송법을 제기하면서, 정부와 정당과 달리 시민사회에서 입법권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다음 공화정에서 중요한 것으로 인민의 발의권을, 그리고 공직자에 오류가 있을 때 국회가 청문회를 주제하기도 하지만 인민이 제기하는 소환권을 가지는 것이리라. 이번 진행과정에서 유시민이 15년 만에 나왔다고 하는데, 삼원의 벤다이어그램과 제3신분처럼, 혁명의 흐름에서 용출선을 만들 수 있을지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백성과 대중은 입말로 소통하고 평결을 내릴 것이다. (59QMD)
공화국이란 어떤 체제를 말하는가?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도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인민이 주목하였으나, 왕권과 그에 붙은 여론주도자(법복지식인)들은 이 두 책을 파리에서 화형식에 처했다. 그럼에도 대혁명은 루소의 학설에 따라 인민의 “자연권”과 “정치권”을 실행하였다. 이런 전통에서 프랑스 인민에게 헌법 발의권, 공직자의 소환권 등이 있다. 앞으로 다음 선거까지 2년 동안에 잘못한 공직자 소환권과 헌법과 법률의 개정에서 발의권을 시험하는 노력과 과정이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백성이 민주주의를 더 잘 실행할 것이고, 제7공화국의 토대를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59Q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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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이든 절대[참주]정이든 백성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세종대왕이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백성이 지닌 오랜 불교문화를 유교문화로 바꾸기 위한 토대로서 백성과 대화를 시도했다. 훈민정음(1446)이다.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문자(한자)로 서로 통하지 않아서
그런 까닭으로 우리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러나 그 뜻을 (글로)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이에 대하여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나날이 쓰는데 편리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왕정은 상층의 추리사고와 논리이지, 백성의 의견 수렴이나 평결은 아니었다. 프랑스 중세에 종교의 무오류 시절에도 신앙인들 사이에 평결이 있었다(13세기). 이를 주도했던 이들은 플라톤을 받아들이는 프란체스코파였다. 그러나 반동은 곧바로 카톨릭 교황[참주]제 중심으로 바꾸어 놓은데, 도미니크파의 아퀴나스를 끌어들여 다시 절대권을 행사하려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
종교의 독단이 종교재판으로 딱지 붙이기가 심할 때, 프랑스가 흥미롭다. 인민의 의사소통이 프랑스어로 등장한 것은 몽테뉴(1533-1592)에서였고, 이어서 데카르트(1596-1650)가 등장하여 철학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쓰기 시작했다. 이로서 인민이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자아“의 개념이 태어났다. 그리고 “빛들세기(18세기)”에 백과전서파, 루소, 뷔퐁, 수학자들은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의 시대). 특히 자아가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을 루소는 “에밀”에서 교육론처럼 썼으며, 인민의 자연권, 정치권(조국이 사회권으로 번역했다)을 말했다. 그리고 1789년 대혁명으로 왕권과 교황권을 단두대에 이슬로 보내고, 공화정이 등장했다. 인류사의 사건이었다.
*
이 시기를 우리나라와 유비적으로 비추어(감鑑)보자. 정치를 비평하기 위해, 유시민은 두 개의 원에 의한 벤다이어그램을 이용했다. 우리는 세 개 또는 여러 개 원의 벤다이어 그램을 생각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적용해 볼 수 있다.
– 훈구파 ‥‥ 사장(詞章)파 ‥ 서인 ‥ 노론 ‥ 주자학 – (외세 의존파)
–신진사류 ‥‥ 사림(士林)파 ‥ 동인 ‥ 남인 ‥ 실학(서학 수용) – (자주 독립파)
— (니르고자 홀배 있어도) 백성 대중 인민 민중, 국민 (3중으로 그린다면)
— 심층의 다양체. (벤다이어그램을 4중으로 그린다면, 포함되어야 한다.)
∴ 여기서 한편에서는 셋째부류로 동학을 넣어서 민중의 등장을 이야기 한다.
∴∴ 넷째 부류는 남녘, 북녘, 여러 재외 동포들, 국적취득자들 합하여, 다발(la gerbe)이다.
∴∴∴ 21세기에 이 다발이 인민들의 입말의 소통, SNS소통이다.
일제가 바이마르 헌법을 모방하고, 그것을 일제에 심고, 해방 후 남녘을 지배하기 위해 일제부역자를 이용하여 그 뼈대를 남겨두었다. 이제 백성의 발의권에 의해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프랑스의 “빛들세기”의 학문인 서학(西學)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림파의 남인들이 조선 왕정에 들어갔으나, 서학(西學)을 천주학(天主學)으로 딱지를 붙여서, 마치 마녀사냥(종교재판)하듯이 악마화하여 제거하려 했다.
이 흐름은 일제 시대에 조선인의 억압과 통제에도 있었다.
+++일제부역자 ‥‥ 일제에서 미제로
+++ 독립운동가 ‥‥ 공화제와 민중운동
그리고 미국의 지배하에서도 두 개의 원으로 설명할 수 있다..
—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 이명박 ‥ 윤석열
— 조봉암 ‥ 인혁통혁 ‥ 김대중 ‥ 노무현 ‥ 문재인 … 이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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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대혁명 이래로 여러 차례 혁명을 거쳐서 파리꼬뮌(1871년)까지 거쳐 간다. 그 파리꼬뮌 시절에 우리나라에서 동학이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민중 속으로 퍼져나갔다. 파리 꼬뮌은 인민이 성장하는 시기인데, 입말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바로 회복되었고, 게다가 맑스가 전하기도 하였지만 세계사의 한 사건이 되었다. 입말이 소통되지 않고 일제 지배를 받은 땅에서는 한 세기가 지나서야, 인민의 입말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조명되었다.
내가 프랑스철학사와 수학사를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경세유표(經世遺表, 1818-1827)”를 쓴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824? 초고)”를 쓴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이다. 서학을 받아들인 실학파라 한다. 하나는 유배로 열여덟 해를 유배지에서, 다른 하나는 권력에서 밀려나 열여덟 해를 초야에 있다가 다시 정승으로 등장했다. 실학을 프랑스 철학의 실증주의에 비추어 보면, 우리에서 관학을 하는 쪽이 독일에서 칸트의 비판론과 헤겔의 절대주의와 상층 이기론과 연관이 클 것 같다. 그 관학이 일제의 독일철학의 수용을 받아들인 것은 서울의 노론이었다.
박정희가 총맞아 죽고, 민주화를 하려는 대중들은 노력했지만 암초에 부딪혔다. 박홍규 선생님이 1980년 전두환이 들어서는 시기에 수업을 하면서, 시대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고 한탄하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 지도 모른다.
실학은 백성의 의사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기록하는 문자화였다. 불가에서 팔리어로 말한 부타의 입말을 산스크리트 언어로 바꾼 것이 문제라고 한다. 서양에서도 지식인이 르네상스 이후에도 라틴어로 글을 쓴 것도 인민을 배제한 것이었다. 푸꼬가 새로이 전한 “삐에르 리비에르”(1835)의 사건에서도 본인의 입말과 백성의 문자화가 아닌, 법원의 문서와 문헌화가 나은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
어린 시절에 왜 농가월령가를, 그것도 정본도 아니고 동네에 맞게 부르는 노래처럼 알려졌는지 궁금했다. 공부를 해보니, 24절후가 주나라 시대의 태양력(太陽曆)이라 한다. 태양력을 중심으로 사유하자고 하면, 사람들은 서양의 지배에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며 태음력(太陰曆)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들은 태양력(太陽曆)을 양(陽)자를 서양(西洋)로 착각하는 것 같다. 문자화에 영향일까?
우리말 농가월령가는 정약용의 둘째아들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맏아들은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은 의학을 배워서, 백성의 뜻을 파악하면서 왕권의 주요권력자의 사랑방을 기웃거리며 백성의 뜻을 전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유배해제를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실학파에서 백성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과 동학이 서학에 반대하여 백성 안으로 들어간 것인데, 바깥으로 표출하는 원인 제공과 방향이 달랐더라도, 프랑스 철학사와 수학사가 전하듯이, 1830년 이후에 거의 모든 학문이 사물의 내부로 들어갔다. 이 말은 칸트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빙 둘러서 보았다고 자랑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이다. 우리에서 실학파와 동학파 이후에, 일제 강점기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으로 인민 속으로, 민중 속으로 운동도 있었다.
유시민은 노무현 이래로 15년을 스스로 야인이었다고 한다. 유배도 아니고 몰락도 아니다. 이미 김대중 시절에 IT를 기반으로 만들어, 인민의 입말의 소통시대가 열려있었다. 인민에게 행운이었고, 세종대왕 이래로 한글의 활성화, 팽창의 시기였다. 실학과 동학의 시대가 일제와 미제를 거치면서 새로이 얼굴을 내민 것, 자아의 자치적이고 자율적 모습을 표출한 것은 21세기 코로나 시기였다. 유시민은 오랜 기간 학습(열)과 붕우 속에서(열)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제 7공화국을 만들 시기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기대해 보자.
***
그는 유배도 감금도 아닌 15년을 지나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것 같다. 응원한다.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의 의지를 응원한다. 현 시점에서, 정치권력의 측면에서, 두 개의 원인 벤다이어그램 식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2026년 6월 중순에 떠도는 소문이다. 믿을 것이 못되지만 그나마도 ‘안주가 있어야 술 맛이 나듯이’ 자료가 여러 방향과 방식으로 떠들 수 있다. 입말의 시대이다.
-*- 아래 분류에서 A(C)B 도표에 준해서 나누어 본 것이다.
검찰개혁을 보는 입장:
— 추미애, 최민희, 박주민, 김기표 + 이성윤, 문정복
— 이언주, 강득구, 황명선, 송영길, 한준호, 김종혁, 박원석, 전현희, 김남희, 이건태
합당 반대자: 정민철(한겨례: 하어영 권태호)
-*-
—-이동형, 이상호, 함돈균, 김용민 목사 + 박진영, 신인규, 강미정
—- (패널들) 오창석, 오창익, 전계완(스픽스) 장성철(국힘) 이정주,
+ 김진애
김어준, 최강욱, 박시영, 최욱,
– 장인수, 봉지욱, 이명수[욱수수], 강성범(1974) 김대호, 송명훈(송작가 TV, 새날)
– –제3의 지원 행보: 이병철
* 입말과 이미지가 그래픽을 그리듯이 변환하고 있다.
– 문조털래유 [이동형 킬러(시사건건)]
– 한강새똥돼주길 [한준호, 강득구, 김민석, 이동형, 김용민, 이언주, 송영길] (59QMA)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2원 벤다이어그램이 있듯이, 공화국의 실질적 주인이 되는 백성들이 표면 위로 올라오면 3원 벤다이어그램이 될 것이다. 다양체란 깊은 심성을 공유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느끼리라.
(3;27, 59QMA) (4:21, 59QMD) (4:34, 59QME)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파스칼 길렌 지음,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갈무리, 2026.5) 서평|글: 전솔비(시각문화 연구자) [철학자의 서재]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 서평
전솔비(시각문화 연구자)
신자유주의 시대 예술적 실천의 조건을 묻다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 전 지구적 예술, 정치 그리고 포스트포드주의>(파스칼 길렌,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26)-
올 초 처음으로 제안받은 일을 거절하는 경험을 해보았다. 언제부턴가 속도감 있는 예술 노동의 생산 루틴이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일들과 흐르는 시간을 열심히 따라잡으려 해도 항상 뒤처지는 기분이 불안했고, 어딘가 심각하게 아플 때까지 이 속도를 멈추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쌓이고 있었다. 정확한 출근과 퇴근 개념 없이 늘 읽고 쓰고 듣고 말하며 계속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감각, 즉 ‘한계를 모른다는 감각’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조건이자 동시에 자신을 갉아먹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소진(번아웃)은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다는 느낌보다는, 뇌의 회백질 속에 언제든 활성화될 수 있는 미개발된 수동적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좌절감에서 기인한다.” 파스칼 길렌의 신간에서 읽은 이 문장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예술가의 작업 방식과 노동 환경을, 어쩌면 나와 우리의 일상에 감춰진 진실을 너무나도 잘 묘사하고 있었다.
예술적 웅성거림의 두 가지 목소리
예술가의 노동 방식과 예술계의 작동 메커니즘은 이미 사회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많은 이들이 소진되지 않는 자신의 창조성을 증명하기 위해 번아웃이 올 때까지 일하고, 임시 계약 혹은 무계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끊임없이 이동한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해내는 오늘날의 예술가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 비물질 노동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고전적 자연주의와 달리 자신이 표방하는 자유를 불신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통제, 측정, 관리하려 하는 억압적 자유주의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논리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기업가적 마인드에 녹아들게 만든다. 저자는 포스트포드주의 노동 환경의 최전방이자 완벽한 모범이 된 예술의 양가성에 대하여 비판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나간다.
이 책은 포스트포드주의로 세계화된 예술계의 제도적 층위 분석에서부터 민주주의와 예술의 관계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 ‘웅성거림’이라는 용어는 영어 단어 murmuring에서 왔다. 일반적으로 ‘중얼거림’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번역가는 저자의 의도와 사회학적 맥락을 반영하여 ‘웅성거림’으로 옮겼다고 말한다. 여기서 ‘웅성거림’은 비결정적인 집단적 소음이며, 복수의 소리이자, 전정치적 에너지로서의 사회적 활력을 의미하고 있다. 고립된 개인의 인간적인 뉘앙스를 띄는 ‘중얼거림’과 달리, ‘웅성거림’은 광장과 같은 넓은 공간에서 복수적이며 비인간적인 주체들을 포괄하는 의미를 불러낸다. 저자는 오늘날의 “예술계는 서로를 부정하고 침식하며 동시에 소환하는 역설적인 의미들로 가득 찬 장”이라고 말하며, 예술적 웅성거림이라는 현상 속에는 “할 수 없음”과 “하고 싶지 않음”이라는 두 가지 목소리가 들어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책에는 강조표시가 없지만 이 부분은 분명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다. ‘할 수 없음’과 ‘하고 싶지 않음’이라는 두 가지 중첩된 목소리로 현실을 비틀고 미래를 끌어오는 것이 예술가의 정체성이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두 가지 목소리의 역학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예술의 정치성, 실천성을 말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억압적 자유주의는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들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부정할 자유 또한 완전히 닫지 못한다. 가능성의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건 자유를 통제받는 억압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혹은 자신도 모르게 탈출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저항이기도 하다는 점을 여기서 읽어낼 수 있다.
유동하는 ‘우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저자는 예술 사회학과 비판적 사회 이론을 결합하여 이론적 뼈대를 세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집단적 가치 체제와 그의 제자 나탈리 하인리히의 단수적 체제를 병치하고, 여기에 빠올로 비르노의 비물질 노동론을 붙여 정체된 예술사회학을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저자는 포스트포드주의 노동 환경의 대표적 속성이 비물질 노동이라면,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이 예술가라고 보고 있다. 저자는 빠올로 비르노의 비물질 노동론을 참조하여 비물질 노동자는 유능한 연행자(수행자), 즉 퍼포머와 같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당장 물질화할 수 없음에도 말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성과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이러한 끊임없는 연결 상태는 고도의 관계 맺기 역량을 요구하며, 대화나 메일, 문자에서도 끊임없이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한 섬세한 감정 노동을 지속시킨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5장 ‘노마데올로지: 유목적 존재의 미학화’에서 저자는 오늘날 미술 비엔날레가 열리는 곳과 망명 센터의 지리적 인접성에 주목하며, 자발적인 노마드로서의 예술가와 원치 않는 조건에 의해 노마드가 된 노숙인, 난민, 이주민들이 서로를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유동하는 ‘우리’라는 말로 예술가들은 자신의 유목적 삶을 쉽게 수많은 소수자와 동일시하지만, 노마드적 존재로 쉽게 동일시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간극을 예술이 종종 감추거나 못본 체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술가들이 반드시 정치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노마드적 소수자들의 삶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한다면 그러한 예술적 전략으로서의 노마디즘은 반드시 코뮤니즘적일 때만 유의미하고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예술적 실천의 조건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비판하는 자본의 논리가 결국 자신들의 경력을 쌓게 해준다는 점에 대해 ‘냉소’하면서 시스템을 떠나지 못하며,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예술계에서 고도의 적응력으로 ‘기회’를 찾는다. 하지만 저자는 예술가들을 단지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비르노의 관점을 빌려, 긍정이나 부정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초도덕적 관점에서 기회주의를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자신의 존재 방식을 성찰하고 거리 두며 끊임없이 발언의 자리를 찾아내는 행동의 가능성 또한 열어두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할 수 없음’과 ‘하고 싶지 않음’의 진동 속에서 분명 작은 저항의 수행성이 발현되고 있으며 그것은 기회를 포착하는 순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적 실천이란 ‘할 수 없다’라는 무기력함을 ‘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으로 만들어내는 전환의 지점에서 생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의 초반에 언급된 중요한 문장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
“개별 예술가가 더욱 선명한 단수성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수많은 타자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수많은 동료와 더불어 웅성거리는 다중 속으로 흡수될 수 있는 것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며 창작하는 예술가의 실천은 그가 참조하고 의존하는 수많은 관계를 통해 비로소 웅성거림의 현장 속에서 살아 숨쉴 수 있다. 이는 타자에게 의존적이기에 역설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고, 독립적이기에 다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확장해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술가의 자율성이나 개인의 실천처럼 보이는 목소리들이 사실은 늘 타인의 실천과 흔적을 경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웅성거리는 현장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이 반복해서 말하듯, 자율성은 늘 타율성을 경유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유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웅성거림일지 모른다. 예술적 실천으로 물질화되지 않은 경유지 안의 이야기들, 그곳에 남겨진 반복적인 시도와 실패의 기록들, 갈등이 남긴 사유와 감정들을 풀어내는 작업들을 더 적극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5-절대적 무제약자에서 실존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5-절대적 무제약자에서 실존으로
1)
앞에서 형식과 직접적 현존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한편으로 형식이 정립한 내용에서 현존은 그 내용의 요소(소재나 계기)가 된다. 현존하는 조건은 이를 통해 자기를 지양한다. 그런 점에서 조건은 근거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존은 유기체(척도 관계의 계열)적 방식으 내용을 구성하고 이 내용이 그 기능인 형식으로 반성하니, 직접적인 존재로서 현존은 근거의 출발점 (헤겔적 용어로 ‘그 자체 존재’)이 된다. 앞의 측면에서 근거(형식)는 조건을 정립하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근거(형식}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나아가 직접적 현존은 근거의 전제하는 반성을 통해 조건이 될 뿐이다. 이 직접적 현존은 근거의 자기 동일성이거나 근거가 자신에 대립하게 하는 고유의 내용이다. 따라서 현존은 단순히 형식 없는 질료로서 근거 관계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기 자신에 이런 형식을 가지므로 형성된 질료이고 동시에 자기 동일성 속에서 이 동일성에 무차별한 것인 한에서 내용이다.”(논리학, GW11, 318)
한편으로 근거인 형식과 조건인 현존은 유기체적 조직으로서 내용을 매개로 결합한다. 척도 관계의 계열로서 내용은 일정한 요소로 구성되며, 그 위에서 일정한 기능을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일정한 형식의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꽃나무가 일정한 크기로 자라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근거인 형식과 조건인 직접적 현존은 각자 직접적인 것이고 상호 전제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서로 무차별하니 꽃나무의 현존으로서 일정한 크기로 자라나는 것은 꽃나무 근거인 형식과는 무관하다.
“이 두 가지 상대적인 무제약자(근거와 조건)는 우선 각자를 타자에서 비춘다. 직접적인 것으로서 조건은 근거의 형식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이 근거의 형식 관계는 정립된 것으로서 직접적 현존 속에서. 그러나 각자는 이런 자신의 타자가 자기에서 비추어지는 것 바깥에서는 자립적이며 독특한 내용을 가진다.”(논리학, GW11, 316)
“전체의 이 두 가지 측면 즉 조건과 근거는 본질적으로 통일이다. 그것은 형식으로서 통일인 동시에 내용으로서 통일이다. 양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서로 이행하니 양자가 이런 반성하는 것인 가운데 양자는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것으로 정립하면서 자기의 부정에 관계하고 서로 대립적으로 전제한다.”(논리학, GW11, 318)
2)
전자의 측면에서 근거와 조건은 직접적이며 후자의 측면에서 양자는 서로 매개되어 있다. 이 직접성의 측면과 매개의 측면은 서로 통일되어 있다. 양자를 매개하며 통일하는 것은 바로 종적 개체의 내용이다.
종적 개체의 내용은 근거인 형식과 조건인 현존을 통일하는 존재 즉 절대적 무제약자다. 헤겔은 이 절대적 무제약자를 곧 ‘사태[Sache]’라고 규정한다.
“절대적 무제약자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조건과 근거이다. 이것은 자기 내에 존재하는 자기의 계기이다. 절대적 무제약자는 이 두 측면이 복귀해 들어가는 통일이다.”(논리학, GW11, 318)
사태란, 직접적 현존과 구별된다. 현존은 아직 유기체적 구성이 없으므로 질적이거나 양적인 규정만을 갖는다. 그러나 사태란 유기체적으로 구성된 것이므로 이를 통해 자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본질적 형식을 갖는다. .
여기서 현존과 본질은 사태 즉 내용을 매개로 상호 연관된다. 현존의 자기 재생산을 통해 본질이 지속하니, 본질은 그 조건인 현존에 따라서 다양한 외면적 형태를 띠고 나타나며 반면 다양한 현존의 통일적 근거인 형식은 현존에 보이지 않은 내면에 존재한다.
“무제약적 사태는 근거의 측면에서는 부정적 통일이지만, 이는 자기를 반발하여 두 가지 계기로 나타난다. 우선 하나의 형태는 근거 관계가 지양된 결과 직접적이며 통일성을 결여하고 자기 자신에 외면적인 다양성의 형태이다. 이 다양성은 근거에 대해 그것을 자신의 타자로 삼아 관계한다. 다른 하나의 계기는 내적인 단순한 형식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니 이는 근거이지만, 자기 관계하는 직접적 현존에 대해 이를 자신의 타자로 삼아 관계하며 그런 직접적인 현존을 조건으로 규정하니 즉 이 자신의 그 자체 존재를 자기의 고유한 계기로 규정한다.”(논리학, GW11, 318)
앞에서 종적 개체는 근거와 조건을 지니는데, 이 근거는 자기의 근거로 끊임없이 거슬로 올라가며 거꾸로 조건 역시 자기의 조건을 거슬러 올라가니, 이 근거나 조건은 악무한이며 그런 점에서 상대적 무제약자였다. 그러나 이제 내용은 근거와 조건의 내적인 통일이며, 그런 점에서 진무한이다.
3)
여기서 처음으로 헤겔은 ‘사태’라는 말을 사용한다. 지금까지 헤겔은 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생명체의 종을 예로 들었다. 이제 본질이 사태라는 말로 바뀌는데 개념적으로는 방금 말한 것처럼 종적 개체의 내용을 의미한다. 이 사태의 구체적 예는 어떤 것일까?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사태[Sache]’라고 한 것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산물, 그런 다음 개인의 상호 작용에 던져져 서로 교환되는 물건[Sache]을 의미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여기서 사태라고 한 것은 어떤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행위가 가능한 것은 인간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단초는 이미 생물체(특히 동물)의 행동이 만드는 것이다. 생물체는 스스로 행동함으로써 자기를 만들어나가는 데, 그 때문에 헤겔은 이를 사태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에서 논리적 범주가 전개되는 출발점에 등장하는 것은 다만 단초[an sich]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실현되는 것[an und fuer sich]은 그 범주가 도착하는 종점이다. 그러므로 본질론에서 처음 시작한 근거로서 형식은 종적 본질의 단초이며, 이제 종적 본질(형식)이 조건을 통해서 구현되면서 종적 개체의 내용 곧 사태가 되었다.
이 사태는 물론 출발점에 있는 것이니, 그 최종점에 이르러 인간의 행위가 출현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단초적으로 존재하는 행위 즉 생물체 특히 동물의 행동을 의미한다. 헤겔은 이 동물적 행동이 이미 인간의 행위를 예고한다는 점에서 이를 ‘실존’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처음 단초적으로 출현한 행동이 자기를 실현하여 인간의 행위가 되면, 사태는 ‘사태 자체’ 곧 실체로 되고 그것이 곧 인간의 유적 본질인 사회다.
지금까지 종적 본질인 형식이 서로 부정적으로 통일되어 내용으로 나타나고 다시 개별적 현존을 자신의 소재로 삼는데, 여기까지가 정언판단의 형식에 속한다. 이제 사태가 실존으로 출현하면서 판단 형식은 가언판단의 형식으로 바뀐다. 실존은 현상을 거쳐 관계에 이르며, 관계에서 비로소 선언판단의 형식이 시작된다. 그 끝에 실체 즉 사태 자체에 이르면서 개념판단(양상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4)
조건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곧 생성의 운동이며, 이는 근거를 정립하는 운동이다. 근거가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면서 자신을 정립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내려오는 운동이며 정립하는 운동이다. 여기서 직접적 현존은 지양되고 근거의 계기가 된다.
양자는 상호적인데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 존재에서 본질로 이행하는 운동이 거꾸로 본질이 존재로 내려오는 운동이었던 것과 같다. 전자는 존재를 전제로 하여 본질을 생성하는 운동이며 후자는 본질을 전제로 하여 추상적 본질을 구체화하여 존재가 되는 규정의 운동이다.
이 두 가지 운동의 통일 속에서 무제약적 사태가 출현한다. 이는 절대적 사태이며 즉 근거인 형식과 조건인 내용이 통일되어 그 자신이 형식이자 곧 내용인 것, 근거이자 곧 조건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절대적 사태는 “그 형식이 자기 자신과 통일하고 자기 자신에서 그 내용을 갖는 것”이며 “형식이 거꾸로 본질이 없는 형식으로서 이런 자기 통일 속에서 존립한다는 직접성을 자기에게 부여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18)
“근거의 반성은 조건의 직접성을 지양하며 이 조건을 사태의 통일 속에 있는 계기에 관계시킨다. 그러나 조건들은 무제약적 사태 자체에 의해 전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태는 이런 전제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정립을 지양하거나 그의 정립은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그 자체 마친가지로 자신을 생성으로 만든다.”(논리학, GW11, 320)
무제약적 사태인 내용은 양자를 자기 속에 포함된 “두 계기로 정립하는” 총체성이며 두 계기는 이 총체성을 전제하므로, 이런 “총체성에 의해 제약된 것”이다. 내용은 양자를 조건과 근거로 삼아서 나온다. 그러나 두 측면은 무제약적 사태에 이르러 사라져서 “가상으로 격하된다.” 이렇게 직접적인 무제약적 사태가 곧 실존이다. (논리학, GW11, 318-319)
5)
무제약적 사태에서 근거와 조건 사이의 관계가 앞에서 규정되었다. 이 관계는 다시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 파악된다. 여기서 사태를 중심으로 하나의 근거는 여러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근거는 통일적인 형식이지만, 사태에 내재하며, 조건은 사태의 외면적 형태이면서 다양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사태를 이루는 다양한 조건이 모두 현존하게 되면, 여기서 “조건의 분산된 다양성은 자기 자신에서 내면화되면”, 현존은 몰락하며 이를 통해 근거가 정립된 것으로 된다. 거꾸로 내적으로 통일된 형식은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면서 “자기에 외적이고 근거 없는 존재의 형식을 부여”하니, 그것이 곧 실존이다.
“조건들을 내면화하는 것은 처음에는 직접적 현존이 몰락하는 것이며 근거가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거는 이를 통해 정립된 근거가 된다. 즉 근거는 근거로서 존재하는 것 못지 않게 근거로서 지양되고 직접적인 존재가 된다.”(논리학, GW11, 321)
실존에는 통일된 근거와 모든 조건이 서로 매개되고 있으나 외적인 실존은 직접적인 것으로 출현한다. 직접적 실존에서 이 실존이 근거와 현존을 통해 매개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은 사라지고 만다.
“근거는 자신을 다만 직접 사라지는 가상으로서 제시한다. 따라서 이런 출현은 사태가 자신을 향한 동어반복적인 운동이며 조건과 근거를 통한 그 매개는 양자의 소멸이다. 따라서 실존으로 등장하는 것은 직접적이어서 이런 등장은 매개의 소멸을 통해서만 매개된다.”(논리학, GW11, 321)
“이를 통해 사태는 무제약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근거 없는 것이며 오직 근거로 되돌아가는 한에서만 근거에서 벗어난다. 이런 근거도 근거 없는 것 즉 자신의 본질적인 부정성 또는 순수한 형식에서 출현하지 않는다.”(논리학, GW11, 322)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 24-근거와 조건 그리고 악무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 24-근거와 조건 그리고 악무한
1)
지금까지 헤겔은 근거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 근거 관계는 아직은 다만 형식을 통한 관계이며, 여기서 근거인 형식은 종적 개체의 종차 즉 그 기능이며 근거지워진 것, 토대(기체)는 종적 개체라는 내용을 말한다.
이 형식 관계는 생물체의 분류에서 나타나는 관계에 불과하며 아직 생물체의 실질적인 상호작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형식은 아직 주관적인 것에 머무르며, 이런 분류는 여전히 주관적인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종적 개체는 여러 형식의 통일이며 이에 따라 그것의 기체가 되는 내용도 유기적으로 조직된 체계다. 그런데 하나의 종적 개체는 이처럼 지각적 일반성에 속하는 형식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에 고유한 개별적 성질을 가지니, 이는 종적 개체가 지는 질적이거나 양적인 것 즉 현존[Dasein]에 속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꽃나무는 일반적으로 유기체적으로는 잎과 꽃과 줄기의 통일체이며, 기능적으로는 광합성 기능, 양분 유통 기능, 재생산 기능을 통일적으로 지닌다. 그러나 각 개체는 개별적인 여러 질적, 양적 특징을 지닌다. 예를 들어 어떤 꽃나무는 붉은 꽃을 피우고 어떤 꽃나무는 노란 꽃을 피운다.
이제 헤겔은 지금까지 꽃나무에서 이런 형식과 내용, 근거과 근거지워진 것의 관계를 살펴본 끝에 그것을 넘어서 이런 근거인 형식이 개별적 현존과 관계하는 방식에 관해 서술하기 시작하는데, 이 문제를 헤겔은 ‘조건’이라는 범주를 통해 제시한다.
2)
종적 개체를 하나의 동심원을 통해 그려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인 형식에 토대가 되는 것이 내용이지만, 이 내용은 이제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현존의 측면을 가지게 된다. 내용은 유기적인 조직체이며 개별적 현존은 이 유기체적 조직을 이루는 개별 요소들이다.
여기서 유기체적 조직을 관계의 측면과 요소의 측면을 구별해 보면, 개별적 요소가 바뀌더라도 그 관계가 유지된다면, 종적 개체의 내용은 동일하게 머무른다. 이 동일한 내용은 종적 개체의 근거인 형식의 토대가 되니, 여기서 개별적 요소가 지닌 직접적 현존의 측면과 근거인 형식의 측면이 이런 유기체적 조직인 내용을 매개로 서로 연관을 맺게 된다.
“그러므로 조건은 첫 번째로 직접적이고 다양한 현존이다. 두 번째로 현존은 다른 것에 즉 근거에 관계된다. 이 근거인 것은 이 개별적 현존의 근거가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근거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존 자체는 직접적으로 존재하며 근거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15)
이 관계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① 하나의 관점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즉 개별적 현존의 유기체적 관계를 통해 내용이 출현하고 이를 매개로 해서(부정의 부정을 통해) 그 본질로서 형식이 출현한다. 이런 점에서 이 개별적 현존은 형식의 전제가 된다.
“현존이 조건으로 정립되면서 두 번째 계기에 따라서 무차별한 직접성을 상실하고 다른 것의 계기가 되는 규정을 얻는다. 현존은 이런 직접성을 통해서 그런 관계에 무차별하다. 그러나 현존은 이런 관계에 들어가는 한 근거의 그 자체 존재를 이루며 동시에 그런 근거에 대해서 무제약자가 된다.”(논리학, GW11, 315)
② 다른 관점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즉 일반적 형식이 자기의 고유한 내용을 정립하고 이 내용은 다시 개별적 현존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니, 이 점에서 형식은 이 현존을 규정하고 현존을 정립한다.
“따라서 조건이 근거 관계가 자기 동일성을 가지게 만드는 것인 한, 이 조건은 근거의 내용을 이룬다. 그러나 이 내용이 이런 형식에 무차별한 것이므로 내용은 다만 잠재적으로만 그 형식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즉 따라서 최초로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근거에 대해 소재를 이루는 것이다.”(논리학, GW11, 315)
3)
현존인 조건이 그 자체로 종적 개체의 근거는 아니다. 근거는 어디까지나 형식에 나오며, 현존은 그것이 구체화되는 조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은 근거의 정립작용에서 전제로 요구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조건은 ‘정립작용이 소외된 것 즉 지양된 것’이라 한다.
“이 매개작용은 정립하는 작용으로서 자기에 관계하는 가운데 이런 측면에서는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것이고 무제약적인 것이다. 매개작용은 자신을 사실 전제하지만, 정립작용은 외화되고 지양된다. 이 매개작용이 정립작용에 대립하여 자신의 규정상 지니는 모습은 곧 그 자체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an und fuer sich].”(논리학, GW11, 315-316)
근거인 형식의 토대가 되는 것이 내용인데, 이 내용은 한편으로는 형식을 갖춘 내용(관계)이며 다른 한편에는 조건에 속하는 직접적 내용(요소)이다. 이것은 그 내용의 관계를 구성하는 소재가 된다. 내용 즉 유기체적 조직은 이 양자의 결합체이다.
“근거 관계는 자기에 대한 자립적인 관계이고 반성의 동일성을 자기 자신에서 가지므로 근거 관계는 조건의 내용[직접적 현존]과 대립하는 본래적 내용을 갖는다. 이 본래적 내용은 근거의 내용이며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형식을 갖춘 것[formiert]이다. 그에 반해 조건의 내용은 다만 직접적인 소재[Material]이며 그것의 근거에 대한 관계는 이 소재가 근거에 대해 그 자체 존재를 이루는 만큼이나 외면적이다.”(논리학, GW11, 316)
4)
이처럼 근거인 형식의 전제가 되는 동시에 그 형식이 정립한 것을 헤겔은 조건이라 한다. 개별적 현존에서 출발한다면, 이 조건은 무제약적인 것이 된다. 반면 형식에서 출발한다면 근거가 무제약적인 것으로 된다.
“전체의 양 측면 즉 조건과 근거는 한편으로는 서로 무차별하고 서로 무제약적이다. 하나는 무관한 것[직접적 현존]이어서 그것이 조건으로 들어 있는 관계는 그런 무관한 것에 대해 외면적이다. 다른 하나는 관계나 형식[근거]이니 조건이 지닌 규정된 현존은 그런 관계나 형식에 대해 소재로서만 존재한다”(논리학, GW11, 316)
동시에 근거와 조건은 서로 매개되어 있다. 조건이 있으므로 근거가 규정할 수 있으며, 근거가 규정하므로 조건이 요구된다.
“나아가서 두 가지는 매개되어 있다. 조건은 근거의 그 자체 존재[소재]*다. 조건은 근거 관계의 본질적 계기이기조차 하므로 이 조건은 근거의 단순한 자기 동일성이다. 그러나 이 계기는 또한 지양되어 있다. 그 자체 존재는 다만 정립된 것이다. 그에 반해 직접적 현존은 조건이라는 것에 대해 무차별하다.”(논리학, GW11, 316)
주*) 여기서 ‘그 자체 존재’는 문맥상 소재라는 의미로 읽힌다. 헤겔이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그 자체 존재는 잠재적 가능성,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소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근거와 조건은 서로 모순적이다. 근거와 소재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서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또한 두 측면 각각은 무차별한 직접성과 본질적인 매개 사이의 모순이다. 즉 양자는 하나의 관계 속에서 통일되어 있다. 또는 자립적으로 존립한다는 것과 다만 계기라는 규정 사이의 모순이다.“(논리학, GW11, 316)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3-완전한 근거, 세계의 근거로서 신과 자연[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3-완전한 근거, 세계의 근거로서 신과 자연
1)
앞에서 형식적 근거와 실재적 근거를 다룬 데 이어서 헤겔은 완전한 근거의 개념을 제시한다. 완전한 근거란 앞에서 말한 실재적 근거가 지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즉 실재적 근거란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출현한 개체에서 근거의 내용과 다른 내용이 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이 개체가 근거에 의해 정립된 형식 외에 독자적인 형식을 지니고 있기에, 양자의 결합을 통해 그것의 토대로서 새로운 내용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체는 하나의 통일체이므로 근거에 의해 정립된 형식과 독자적 형식 사이의 결합이 요구된다. 이런 결합을 위해서는 그 결합을 위한 근거가 필요하다.
“실재하는 근거에서 내용으로서 근거와 관계로서 근거는 다만 토대이다. 전자는 다만 본질적인 것으로서 정립된 것일 뿐이며 근거로서 존재한다. 관계는 근거지워진 것을 상이한 내용의 무규정적인 기체로 만드는 어떤 것이니, 이는 근거지워진 것이 지닌 결합인데 자기 자신의 반성이 아닌 외적이며 따라서 정립된 것일 뿐인 결합이다.”(논리학, GW11, 312)
2)
여기서 하나의 개체에 두 가지 근거가 출현하게 된다. 하나는 어떤 개체의 형식을 결정하는 근거다. 다른 하나는 개체에 내재하는 형식들의 결합을 위한 근거이다. 이 두 가지 근거를 모두 가지고 있을 때 실재적 근거는 이제 완전한 근거가 된다.
이를 도해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것 B에서 내재하는 두 형식 a와 b가 결합하는 근거는 이 두 형식을 결합하는 원리가 된다. 개체 내에 두 가지 형식 a, b를 결합하는 근거 즉 a->b는 결국, 어떤 것 A와 다른 것 B가 근거 관계를 맺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결합하는 근거는 근거의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B에 대해 근거가 되는 A는 “지양된 것으로서”, 또는 ”정립된 것으로서” 근거이며, “이제 다른 근거를 갖는 근거지워진 것”(논리학, GW11, 312)이다.
그런데 첫 번째 근거 관계 즉 A와 B 관계(또는 a, b의 관계)와 달리 이것의 근거가 되는 근거에서 ① a와 b는 일정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a, b가 단순히 혼합된 것이 아니라 양자가 결합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는 ② 관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직 법칙적인 것은 아니다. 법칙은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관계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일반성이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결합하는 원리를 단순히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의 관계 또는 ‘잠재적 관계[an sich]’로만 규정한다.
“두 가지 관계는 관계의 방식에 따라서만 구별되니, 그 관계 방식이란 하나의 관계 속에서는 직접적이고 다른 관계 속에서는 정립되어서 이를 통해 하나는 다른 것으로부터 형식에 따라서 다만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으로 구별된다.”(논리학, GW11, 313)
“두 번째 어떤 것[형식적 근거 관계]에서 내용규정이 지닌 근거 관계는 첫 번째 어떤 것[결합의 근거 관계]이 지닌 최초의 잠재적으로[an sich] 존재하는 관계를 통해 매개된다. 결론은 이러하다. 즉 어떤 것 속에 규정 B가 규정 A와 더불어 본래[an sich] 결합되어 있으므로 또한, 하나의 규정 A가 직접 속하는 두 번째 어떤 것에서 규정 B가 그 규정 A와 결합되어 있다.” (논리학, GW11, 313)
3)
여기서 이 결합의 근거가 일반적 법칙이 아닌 개별적 원리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와 관련해서 헤겔은 실재적 근거를 다룬 주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두 가지 근거가 상호 이런 근거 관계에 있으나 이 근거 관계는 법칙적인 것은 아니므로 “어떤 경우에 하나가 다른 것의 근거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 다른 규정이 다른 경우에도 또는 일반적으로 그 규정과 결합되어서 정립된다는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논리학, GW11, 310)
예를 들어 처벌의 근거는 자주 보복의 기능에 있다고 여겨지지만, 처벌은 그 외에도 범법의 방지를 자기의 기능으로 갖는다. 처벌이 보복으로 가해지더라도,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방지라는 결과를 자아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보복은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복을 위해 시행된 처벌이 방지라는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보복이 방지가 되게 하는 원리가 따로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 보복이 방지가 되게 하더라도 그 원리가 다른 경우에도 보복이 방지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법의 처벌이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실일 것이다.
또한, 이 점과 관련하여 헤겔은 세계와 관련하여 자연과 신이라는 두 근거를 살펴본다. 한편으로 자연은 세계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근거 관계를 통해 서로 합일하지만, 다른 한편 양자는 구별된다. 자연이 세계의 근거라고 할 때, 여기서는 세계의 추상적 본질의 측면만이 다루어지고, 세계가 지닌 구체적 측면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즉 자연은 세계의 실재적 근거일 뿐이다.
즉 “자연은 차라리 무규정적인 것이거나 적어도 세계의 본질 즉 다만 일반적으로 규정된 법칙 속에서 규정되어서 자기와 동일한 본질이므로 자연이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에 더 다양한 규정들이 외적으로 추가된다.”
그러므로 자연의 추상적 본질이 세계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근거가 필요하다. 이 근거는 추상적 본질을 구체화하는 힘이니, 이런 힘은 곧 신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과 달리 신은 세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는 제삼자이어서 이 두 가지 상이한 것[자연과 신]이 결합한다. 앞서 말한 근거는 근거[추상적 본질의 근거]과 구분되는 다양성의 근거는 아니며 더구나 그 근거가 다양성과 결합하는 근거도 아니다. 따라서 자연은 그 근거로서 신으로부터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하다면 신은 자연의 일반적 본질일 뿐이어서, 그런 본질은 규정된 본질이나 자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을 포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학, GW11, 310)
신은 추상적 본질을 구체화하는 즉 세계의 본질과 다양성을 결합하는 힘이지만, 신 자체는 법칙적인 것은 아니다. 신은 결합하는 원리지만, 유일할 수 있다.
4)
그런데 ③ 이 결합 관계에서 양자의 결합은 단순히 그러한 것으로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지적 직관에서처럼 직접 원리적으로 인식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서 a, b 의 관계는 상호침투적으로 매개된 것 즉 “정립된 것 속에 자기와 동일한 것” 또는 절대적 관계는 아니다.
“두 번째 관계는 형식상 구별된 것인 한에서 첫 번째와 동일한 내용[A-B, a-b]을 갖는다. 즉 그것은 두 가지 내용규정을 갖는데 그러나 양자[a, b]의 직접적인 결합이다. … 이 관계는 아직 자신의 진정한 절대적 관계는 아니다. 그런 절대적 관계라면 규정들 중의 하나는 정립된 것 속에 자기와 동일한 것이고 다른 것은 다만 이 동일한 것이 정립된 것일 뿐이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어떤 것은 그 내용규정을 지니지만, 그 내용규정이 지닌, 아직 반성되지 않고 다만 직접적인 관계를 이룬다.” (논리학, GW11, 312)
④ 이런 결합의 원리가 존재한다면, a와 b가 결합하는 것은 그것을 원리로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원리는 A와 B가 결합하는 것을 통해서 추상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파생된 결과를 근거로 해서 세워진 원리이므로 이 원리를 근거로 해서 결과를 끌어내는 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다.
앞에서 형식적 근거는 동일한 내용을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순환적인 것으로 도출되어야 할 결과를 전제로 그 원리를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완전한 근거에서 결합 근거는 사실 형식적 근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헤겔은 이런 완전한 근거는 한편으로 실재적 근거와 다른 한편으로 형식적 근거를 결합한 것이라고 말한다. 형식적 근거는 실재적 근거로 이행했으나 이제 다시 실재적 근거와 결합한다.
“두 번째로 이[일반적] 근거 관계는 형식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재적이다. 이미 보았듯이 형식적 근거는 실재적 근거로 이행한다. 형식의 계기들은 각자 자기 자신으로 반성한다. 이 계기들은 자립적인 내용이 된다. 또한, 근거 관계는 하나의 본래적 내용을 근거로서 그리고 하나의 내용을 근거지워진 것으로서 포함한다.” (논리학, GW11, 313)
그런데 이런 일반적 관계가 직접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이런 순환적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차라리, 이런 일반적 관계를 더 높은 일반적 관계를 근거로 해서 정립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하면, 이런 근거를 찾는 작업은 무한히 계속되어서 마침내 자기 스스로 결합하는 원리에 이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로 이 자기 스스로 결합하는 원리가 곧 이데아인데, 이는 현실 초월적인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일종의 악 무한이다.
“추론은 우선적으로 근거를 발견하고 전해주는 것에서 성립하는데 그 때문에 그런 발견과 전해주는 것은 끝이 없이 맴도는 일이라서 어떤 최종적 규정도 포함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립하는 것에 대해서 만큼이나 하나나 여러 가지 훌륭한 근거가 그 근거에 대립하는 근거만큼이나 가정될 수 있으니 한 무더기의 근거들이 출현할 수 있더라도 그런 근거들로부터 어떤 것이 끌어내어지지 않는다.” (논리학, GW11, 311)
5)
헤겔은 실재적 근거를 배후에서 가능하게 하는 근거의 근거를 제시한 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실재적 근거가 가능하려면 또 하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조건이다. 이 조건은 실재적 근거가 관계하는 토대에 관련된다.
이 토대는 한편으로 여러 가지 형식의 부정적인 통일이므로, 그 때문에 앞에서 근거의 근거가 발생했다. 그러나 여기서 관계하는 형식은 지각적 일반성을 지닌다. 종적 개체라는 토대는 이런 형식적인 일반성 외에 개별적 규정성, 질적 현존을 지니니, 이제 이 질적 현존은 근거 관계에서 토대가 존재하기 위한 직접적인 규정이 된다.
형식의 근거는 토대가 지닌 개별적 현존의 측면을 자신이 근거로 관계하는 관계의 전제로 삼으며, 이를 헤겔은 근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반발된 결과”이며 또는 “자기 자신을 타자로 삼아서 관계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형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반발하여 오히려 직접적인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런 가운데 자기 자신을 마치 타자로 삼아서 관계한다.”(논리학, GW11, 314)
이 조건은 어떤 것의 근거가 그런 근거로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니 여기서 어떤 것에 대해서 근거와 조건은 서로에 대해 근거가 되고 서로를 전제한다. 이 두 가지는 한편으로 서로 무차별하며 한편으로 서로 관계하며 타자를 통해 자기와 매개한다.
“이런 직접적인 것은 내용규정이며, 단순한 근거이지만, 이는 이와 같은 것으로 즉 마찬가지로 자기로부터 반발되어 자기를 타자로 삼아서 관계한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근거 관계는 제약하는 매개로 규정되었다.”(논리학, GW11, 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