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길렌 지음,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갈무리, 2026.5) 서평|글: 전솔비(시각문화 연구자) [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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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 서평

 

전솔비(시각문화 연구자)

 

신자유주의 시대 예술적 실천의 조건을 묻다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 전 지구적 예술, 정치 그리고 포스트포드주의>(파스칼 길렌,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26)-

올 초 처음으로 제안받은 일을 거절하는 경험을 해보았다. 언제부턴가 속도감 있는 예술 노동의 생산 루틴이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일들과 흐르는 시간을 열심히 따라잡으려 해도 항상 뒤처지는 기분이 불안했고, 어딘가 심각하게 아플 때까지 이 속도를 멈추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쌓이고 있었다. 정확한 출근과 퇴근 개념 없이 늘 읽고 쓰고 듣고 말하며 계속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감각, 즉 ‘한계를 모른다는 감각’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조건이자 동시에 자신을 갉아먹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소진(번아웃)은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다는 느낌보다는, 뇌의 회백질 속에 언제든 활성화될 수 있는 미개발된 수동적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좌절감에서 기인한다.” 파스칼 길렌의 신간에서 읽은 이 문장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예술가의 작업 방식과 노동 환경을, 어쩌면 나와 우리의 일상에 감춰진 진실을 너무나도 잘 묘사하고 있었다.

예술적 웅성거림의 두 가지 목소리

예술가의 노동 방식과 예술계의 작동 메커니즘은 이미 사회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많은 이들이 소진되지 않는 자신의 창조성을 증명하기 위해 번아웃이 올 때까지 일하고, 임시 계약 혹은 무계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끊임없이 이동한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해내는 오늘날의 예술가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 비물질 노동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고전적 자연주의와 달리 자신이 표방하는 자유를 불신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통제, 측정, 관리하려 하는 억압적 자유주의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논리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기업가적 마인드에 녹아들게 만든다. 저자는 포스트포드주의 노동 환경의 최전방이자 완벽한 모범이 된 예술의 양가성에 대하여 비판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나간다.

이 책은 포스트포드주의로 세계화된 예술계의 제도적 층위 분석에서부터 민주주의와 예술의 관계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 ‘웅성거림’이라는 용어는 영어 단어 murmuring에서 왔다. 일반적으로 ‘중얼거림’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번역가는 저자의 의도와 사회학적 맥락을 반영하여 ‘웅성거림’으로 옮겼다고 말한다. 여기서 ‘웅성거림’은 비결정적인 집단적 소음이며, 복수의 소리이자, 전정치적 에너지로서의 사회적 활력을 의미하고 있다. 고립된 개인의 인간적인 뉘앙스를 띄는 ‘중얼거림’과 달리, ‘웅성거림’은 광장과 같은 넓은 공간에서 복수적이며 비인간적인 주체들을 포괄하는 의미를 불러낸다. 저자는 오늘날의 “예술계는 서로를 부정하고 침식하며 동시에 소환하는 역설적인 의미들로 가득 찬 장”이라고 말하며, 예술적 웅성거림이라는 현상 속에는 “할 수 없음”과 “하고 싶지 않음”이라는 두 가지 목소리가 들어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책에는 강조표시가 없지만 이 부분은 분명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다. ‘할 수 없음’과 ‘하고 싶지 않음’이라는 두 가지 중첩된 목소리로 현실을 비틀고 미래를 끌어오는 것이 예술가의 정체성이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두 가지 목소리의 역학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예술의 정치성, 실천성을 말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억압적 자유주의는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들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부정할 자유 또한 완전히 닫지 못한다. 가능성의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건 자유를 통제받는 억압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혹은 자신도 모르게 탈출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저항이기도 하다는 점을 여기서 읽어낼 수 있다.

유동하는 ‘우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저자는 예술 사회학과 비판적 사회 이론을 결합하여 이론적 뼈대를 세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집단적 가치 체제와 그의 제자 나탈리 하인리히의 단수적 체제를 병치하고, 여기에 빠올로 비르노의 비물질 노동론을 붙여 정체된 예술사회학을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저자는 포스트포드주의 노동 환경의 대표적 속성이 비물질 노동이라면,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이 예술가라고 보고 있다. 저자는 빠올로 비르노의 비물질 노동론을 참조하여 비물질 노동자는 유능한 연행자(수행자), 즉 퍼포머와 같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당장 물질화할 수 없음에도 말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성과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이러한 끊임없는 연결 상태는 고도의 관계 맺기 역량을 요구하며, 대화나 메일, 문자에서도 끊임없이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한 섬세한 감정 노동을 지속시킨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5장 ‘노마데올로지: 유목적 존재의 미학화’에서 저자는 오늘날 미술 비엔날레가 열리는 곳과 망명 센터의 지리적 인접성에 주목하며, 자발적인 노마드로서의 예술가와 원치 않는 조건에 의해 노마드가 된 노숙인, 난민, 이주민들이 서로를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유동하는 ‘우리’라는 말로 예술가들은 자신의 유목적 삶을 쉽게 수많은 소수자와 동일시하지만, 노마드적 존재로 쉽게 동일시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간극을 예술이 종종 감추거나 못본 체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술가들이 반드시 정치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노마드적 소수자들의 삶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한다면 그러한 예술적 전략으로서의 노마디즘은 반드시 코뮤니즘적일 때만 유의미하고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예술적 실천의 조건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비판하는 자본의 논리가 결국 자신들의 경력을 쌓게 해준다는 점에 대해 ‘냉소’하면서 시스템을 떠나지 못하며,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예술계에서 고도의 적응력으로 ‘기회’를 찾는다. 하지만 저자는 예술가들을 단지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비르노의 관점을 빌려, 긍정이나 부정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초도덕적 관점에서 기회주의를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자신의 존재 방식을 성찰하고 거리 두며 끊임없이 발언의 자리를 찾아내는 행동의 가능성 또한 열어두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할 수 없음’과 ‘하고 싶지 않음’의 진동 속에서 분명 작은 저항의 수행성이 발현되고 있으며 그것은 기회를 포착하는 순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적 실천이란 ‘할 수 없다’라는 무기력함을 ‘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으로 만들어내는 전환의 지점에서 생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의 초반에 언급된 중요한 문장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

“개별 예술가가 더욱 선명한 단수성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수많은 타자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수많은 동료와 더불어 웅성거리는 다중 속으로 흡수될 수 있는 것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며 창작하는 예술가의 실천은 그가 참조하고 의존하는 수많은 관계를 통해 비로소 웅성거림의 현장 속에서 살아 숨쉴 수 있다. 이는 타자에게 의존적이기에 역설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고, 독립적이기에 다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확장해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술가의 자율성이나 개인의 실천처럼 보이는 목소리들이 사실은 늘 타인의 실천과 흔적을 경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웅성거리는 현장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이 반복해서 말하듯, 자율성은 늘 타율성을 경유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유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웅성거림일지 모른다. 예술적 실천으로 물질화되지 않은 경유지 안의 이야기들, 그곳에 남겨진 반복적인 시도와 실패의 기록들, 갈등이 남긴 사유와 감정들을 풀어내는 작업들을 더 적극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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