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1)
* 안녕하세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편집부에서 알려드립니다.
6월부터 격주로 한철연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에 선정된 팀의 활동 상황을 웹진을 통해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을 소개하고 풀어내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
다자인多字人
1. <형이상학> 1(A)권
<형이상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은 본성상 알고 싶어 한다”라는 문장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이 앎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의 단계를 ‘감각’, ‘기억’, ‘경험’, ‘학문적 인식과 기술’ 네 단계로 구분하여 감각과 기억까지는 동물도 가능하지만, 경험의 단계 다음부터는 오직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말한다. 학문적 인식과 기술은 “경험에서 얻은 많은 생각들로부터 성질이 같은 것들에 대해 하나의 일반적 관념”이 형성될 때 생겨난다. 예를 들어 칼리아스나 소크라테스 같은 개별적인 개개인에게 이런저런 치료가 통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경험에 속하지만, 보편적 관점에서 개인의 체질을 분류하고 그에 맞는 치료가 어떤 것인지 판단하여 그에 맞는 치료와 그것이 통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기술(의술)에 속한다.
비록 실제 행위에 있어서 경험을 가진 자들이 경험 없이 이론을 가진 사람보다 더 능숙할 수는 있더라도 학문적 인식과 기술이 더 높은 단계인 이유는 경험만을 가진 사람들은 결과가 그렇게 된다는 사실은 알더라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반면, 학문적 인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은 이유와 원인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자들은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유경험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기술은 경험보다 우위에 놓인다.
나아가 기술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필요에 의해, 어떤 것들은 여유 있는 삶을 위해 있다. 그리고 앞의 기술보다 후자의 기술을 발명한 사람이 더 지혜롭다. 그들이 가진 인식들은 유용성이나 필요에 의해 있지 않고,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활동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에 종속된 기술보다, 그 자체가 목적인 학문, 앎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유로운 기술과 학문이 더욱 지혜로운 것으로 본다.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최고 단계의 앎으로, 어떤 원리들과 원인들에 관한 학문적 인식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지혜, 즉 철학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인 견해로부터 출발한다. 이에 따르면 지혜는 1) 가능한 모든 것을 알고, 2) 알기 어려운 것을 알며, 3) 엄밀하고, 4) 원인들을 뛰어나게 가르치며, 5) 자기 목적적이고, 6) 지배적 위치에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가장 보편적인 인식’이자 ‘첫째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이론적 학문’이라고 규정한다. 또 이 특성들에 따라 이 학문은 신이 소유하기에 가장 알맞다는 뜻에서 신적이며, 이것이 신적인 것들을 다룬다는 이유에서 신적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을 주재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고 일종의 원리라는 점에서 그러한 학문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성을 따지자면 어떤 학문도 그것보다 더 필요하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원인들에 대한 논의로 네 가지 종류를 제시한다. 첫째, 실체와 본질(형상인), 둘째, 질료이자 기체(질료인), 셋째, 운동이 시작되는 출처(작용인), 넷째, 그것과 대립하는 원인, 즉 지향 대상과 좋은 것(목적인)이 바로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제시한 네 가지 원인의 관점에서 그 이전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원리’ 혹은 ‘원인’에 대해 검토한다. 선대의 철학자들은 질료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원인들에 대해서 많은 주장과 논의를 내세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들의 방법은 적절치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그들이 내세운 논의가 어떤 한계와 문제가 있는지를 밝혀낸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대해 형상에 대해 말한 철학자들이 제일 본질에 가깝게 접근했다고 말하면서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플라톤은 질료인과 형상인 만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중점으로 비판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이데아론은 개별자와 떨어져 설명에 대상을 늘렸을 뿐이며, 그 자체의 증명에도 분명한 것이 없고, 운동과 변화에 관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혹여 이러한 이데아가 수라고 하여도 이것이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포함하여 선대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미숙했으며, 네 가지의 원인을 두루 파악하지는 못했다.
(계속)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1)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 안녕하세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편집부에서 알려드립니다.
6월부터 격주로 한철연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에 선정된 팀의 활동 상황을 웹진을 통해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을 소개하고 풀어내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1)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 『논어』라는 텍스트에 관하여
『논어』는 동양철학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고전 중 하나이다. 또한 그 내용은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쉬운 격언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렇기에 『논어』는 동양철학을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부담감 없이 시도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동양철학을 거대한 체계가 있는 철학 사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래전 사람의 삶의 지혜를 담은 명언 모음집으로 치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논어』는 단순히 오래된 격언 모음집이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논어』라는 텍스트 안에서는 일관된 사상적 체계가 있다.
본고에서는 4월 30일 진행된 『논어』 강독에서 논한 「옹야」11-20 강독의 내용에서 구성원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온 부분을 공유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그에 대한 추가적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강독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온 부분으로는 「옹야」13, 18, 19, 20이 있다. 구체적으로 「옹야」13, 18에서는 스터디 구성원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논어』 텍스트 안에서의 정합성을 바탕으로 해석의 타당성을 논하고자 하고, 「옹야」19, 20에서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논어』의 일관된 사상적 체계의 부분들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옹야」13
아래 인용은 「옹야」13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謂子夏曰:「女為君子儒,無為小人儒。」(자위자하왈:「여위군자유,무위소인유。」)
재국: 선생이 자하에 이르길, “너는 군자다운 선비가 되고 소인 같은 선비가 되지 말아라”
종범: 선생님께서 자하에게 일컬어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의 유학자가 되고 소인의 유학자가 되지 말아라.
서진: 선생님께서 자하를 가리켜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다운 유자가 되어야지 소인 같은 되서는 안 된다.”
수진: 선생님께서 자하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군자같은 선비가 되도록 하고, 소인같은 선비가 되지 말아라.」
「옹야」13에서 크게 논할 수 있었던 부분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군자유(君子儒)’와 ‘소인유(小人儒)’에서 ‘군자의’와 ‘소인의’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군자’와 ‘소인’을 ‘군자다운’과 ‘소인다운’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전자로 해석할 때는 ‘군자’와 ‘유’ 그리고 ‘소인’과 ‘유’ 사이에 소유격을 의미하는 ‘지(之)’가 생략된 것으로 판단한 것이며 후자로 해석할 때는 ‘군자’와 ‘소인’이 ‘유(儒)’를 수식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의미이다.
「옹야」13에서 논할 수 있었던 다른 부분은 ‘유(儒)’의 의미이다. 스터디 구성원의 경우 이에 대한 해석으로 ‘선비’, ‘유학자’, ‘유자’의 번역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는 총 3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하나는 가장 떠올리기 쉬운 의미로 조선 시대 선비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논어』라는 텍스트가 만들어질 시기에 그 선비들이 공부할 사서가 아직 성립되기 이전이므로 조선 시대 선비의 이미지로 ‘유’가 해석될 수는 없다. 두 번째 의미는 많은 동양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제사 전문가로서 ‘유’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의미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그저 글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군자유’와 ‘소인유’에 대한 해석과 ‘유’의 의미는 그 둘을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 의미가 더 잘 드러난다. ‘군자유’와 ‘소인유’를 ‘군자의’와 ‘소인의’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유를 제사 전문가로 이해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럽다. 제사 전문가로서 제사를 지낼 때 그 제사를 실제로 지내는 사람이 군자인 것을 추구하고, 소인인 것을 거부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해하면 「팔일(八佾)」6과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팔일」6에서는 계씨를 모시는 염유에게 계씨가 태산에 제사를 올리려고 하자(분수에 맞지 않은 제사를 올리려고 하자) 제사를 말릴 수 있는지 묻지만 염유는 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위 문장에 따르면 염유가 계씨를 모시는 것은 소인의 유인 것이며 이는 추구할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군자유’와 ‘소인유’를 ‘군자다운’과 ‘소인다운’의 의미로 해석하면 유를 제사 전문가로 이해해도 글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정확히 ‘군자다운’ 것과 ‘소인다운’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관련하여 「이인(里仁)」11과 16에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두 구절에서 군자는 ‘덕(德)’과 ‘의(義)’를 강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이와 대비하여 소인은 ‘편안함’과 ‘이익’을 강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군자유’와 ‘소인유’의 의미는 ‘덕’과 ‘의’를 강조하는 글공부 혹은 제사 전문가가 되고 ‘편안함’과 ‘이익’만을 위한 글공부 혹은 제사 전문가가 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계속)
제국의 쇠퇴: 삶의 창발 [천 하룻밤 이야기]
제국의 쇠퇴: 삶의 창발
2026 05 21 소만(小滿): 모내기가 한창일 때, 어제 오늘 비가 내리다.
나로서는 70년대 초에서부터 우리나라의 변역의 시기들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환국으로부터 단군,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일제강점, 미국점령 하에서 변전의 과정 등은 할배들께 들어서, 그리고 여러 역사서술을 보면서, 말하는 이들마다 관점들이 왜 다른지 궁금하였다. 철학이란 학문을 공부하면서 세계관의 차이, 사상의 입문에서 차이, 풍토의 차이 등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아왔다.
철학을 학문으로 공부하겠다는 시기에, 이미 서울 중심이 되어있었지만,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었던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지만, 일반인에게 널리 읽히는 사상은 니체의 허무주의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정권시절에는 진리치를 따지는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이 주류로서 나오면서, 이 분과들이 진위 구분을 위해 다루는 대상으로서 현상이 그대로 이어져서, 현상학과 과학철학이 한편을 이루고 있었다. 그 이유도 모르면서, 공부란 그렇게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따라가는 중에, 박정희-전두환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산업화가 궤도에 오르면서 노동이 중요문제로서 제기되었고, 맑스-레닌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공부를 하는 이들이 표면으로 올라왔다. 이미 이시기에 미국 제국의 금본위제도가 달러본위로 바뀌었다.
1953년 이래 규소의 시대가 열렸지만, 서구 산업사회의 250년 여년처럼 세대를 지나가면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 사이에 변곡점을 달리하고, 변곡점의 형성의 속도가 빨라서 같은 세대에도 년도의 차이에서 달라지는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 산업이란 용어가 성립하자, 바로 컴퓨터를 통한 정보교환의 시대를 열었다. 천리안과 하이텔을 아는 세대가 이어서, 곧이어 정보소통의 토대는 마그네틱 저장과 달리 USB의 저장으로 넘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후진국이었던 중국에서는 마그네틱시대 없이 바로 USB로 바로 넘어갔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시대에, IT 산업의 거의 대가 없는 투자는 다음시대에 어떤 귀결들이 이루어질지 그 당시에는 잘 가늠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세대를 바꾸지도 않고서도, 바둑에서 알파제로가 이세돌을 이기면서 정보자료의 독해와 이용이 인간의 두뇌를 떠나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심었다. AI에 의한 산업화의 속도가 증기기관에서 모터로 변환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제국이, 철기산업시대의 기계화의 기준과 규소시대의 AI를 다루는 기준이 잘 이우러지지 않는다는 알아챈다. 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냉전시대에 미국이 뒷배로서 개입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아챘다.
미국이 1975년 브레튼우즈 시대의 막을 내리고 2008년 리먼 브라더즈의 파산으로 미국 패권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했었다. 게다가 이번 중동전쟁의 지형은 지리적, 역사적, 종교적 문제와 함께 경제적, 군사적 문제가 겹쳐있다는 것인데, 소위 말하는 진리와 허위라는 진리론에 근거한 과학과 분석이론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이 1999년 말에 제시했듯이, 세계의 연관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문명론이 아니라 문화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 문명론에서 2천 500여 년이 지나서 성찰하는 것 같다.
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이야기가 많아졌다. 미국이 1991년 소비에트연방을 무너뜨리면서 자본주의 군수산업의 승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한 무기가 철기산업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아마도 미국도 러시아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생각하기에 한 나라에서 2-3년 전쟁하면 마치 우리나라 전쟁에서 일본이 복구하듯이, 베트남전쟁에서 우리나라가 복구하듯이, 우크라이나 전쟁 후 재건에서 동유럽이 서유럽처럼 되살아날 것으로 생각했다고들 한다. 그런데 IT에서 AI의 지능을 이용한 소품의 전쟁무기가 전쟁의 전략뿐만 아니라 전술을 바꾸어 놓았다. 드론뿐만이 아니라, 전자장치를 탑재한 여러 장비들의 이용, 좀 더 중요한 인공위성을 통한 전쟁 지형의 실시간 관전이 있다.
기술 면에서 철기산업시대에는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한 세대를 거쳐 가야 했었다. 그런데 이 IT 산업에서는 공장제가 필수적이라기보다, 인력(재능있는 인간)이 주축이라 한다. 미국이 실리콘벨리를 통해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을 장악한듯하지만, 인공지능 기술론에는 수학처럼 국경이 없다. 전 세계의 인재들이 실리콘 벨리로 유학가거나 돈 벌러 가는 시대가 지나갔다. 이미 인도와 중국의 일류의 인재들은 자국에 남고, 노동자처럼 돈 벌러 가는 이들은 이류들이라 한다. 제국이 철기산업의 무기들이야, 핵무기를 포함해서 우세하지만, 전 지구적으로 확장된 규소시대의 무기에서 제국이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문은 경계가 없다. IT와 AI의 자료는, 마치 인류 복지를 위한 DNA의 공유화처럼, 수학과 물리학이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듯이, 누구의 어느 나라의 자료가 아니다. 그것을 다루는 최상의 인재가 다수의 나라에서 미국보다 자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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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일부로서 IT와 AI의 학문도 경계가 없다. 철학도 학문의 경계가 없다. 철학과 종교가 경계를 갖지 않았던 시기에, 화두로서 오랫동안 가장 큰 문제는 “삶”이었다. 삶에서 먹거리 그리고 잠자리였다. 고대 문명들은 이런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생존의 연관으로서 입는 것이 제도의 이야기거리가 되면서, 공공선을 위해 치장하지 말라고 한다.
삶과 죽음은 대립이 아니라 반대 또는 모순이다.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죽음 이후를 논하지 않는다는 것, 퀴니코스-스토아학파 이래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삶에서 공감하고 동화하며 살았다는 관계들 사이의 잔상이 남아있어서 죽은 자에 대해 설화 또는 신화를 남긴다. 이런 이야기는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기억과 유전이라 부른다.
삶의 대구(對句)로서 죽음이라고 여기면서, 학문에서 형이상학이라는 학과가 존재와 무라는 모순관계를 다룬다. 이 관계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 동일자와 타(율)자의 용어를 만들었다. 삶 다음으로 사변(사유)이 등장하여, 동일자의 인간에 대비되는 다른 사물들을 잘 다루어야 인간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여겼다. 대상들을 잘 다룬다는 것은 도구를 잘 만들고 이용하여 먹거리 생산과 잠자기 건물을 잘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작업의 여러 귀결들이 토지와 기후와 연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토지는 기후의 영향을 받고, 기후는 하늘의 운행에 영향을 받는다. 인간이 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24절후(12별자리)를 체계화하는 데 오래 걸렸을 것이다. 하늘의 운행에서 시간을 토지의 분할에서 공간을 사유했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는 것은 축적된 지식을 체계화하는 지자들이 한다고 하였고, 이것을 전수하는 학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현세에서 오래 살고, 그리고 죽은 자를 영웅과 신들로 만들었듯이, 살아서도 그렇게 대우받고 싶은 욕망으로 죽은 자 또는 죽은 자들의 세상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사후세계는 현재가 투영된 사유의 귀결이다. 이처럼 거꾸로 하늘의 운행이 지상의 운동에 투사된다고 보았던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학문의 역사에서 공간이 당연히 중심이었다고 하지만, 시간의 과정 없이 공간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래 산다거나 또는 영생을 바라고 사유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하늘에 영원(평상의 유지)을 지상에 무상(無常, 평상이 없음)을 대립시킨 투사의 사유가 있었으며, 이는 동일률에서는 모순율로서 무상 또는 허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정도였을 것이다. 무상은 구전의 이야기가 문자화되어 학문이 시작하던 시기의 주제(선문답거리)였다. 화두와 달리 선문답에는 모순율과 같은 부조리 파라독사들이 있음에도, 주제들을 다음 세대의 전승에서 필요한 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체계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신들을 만들기 한다. 그리고 하나의 신을 만들고 체계화에 완전성을 부여하려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간이 산다는 것이 중요했다. 천지인의 상식도 이에 준한다. 학문은 이 둘 사이의 인간이 생존도, 어쩌면 영혼과 신체라는 이중화 현상도, 하늘과 땅 사이의 유비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늘의 영광과 영원에 대한 욕망은 땅에서 아픔과 비참을 해소하기 위해 우화적 이야기를 무한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존재가 아니라 현존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죽어서 잘 살거나 하늘나라에 신과 나란히 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에 대한 선문답 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것은 혼이고 몸은 사라지는 것이 현존 세상이라 여겼다.
혼(魂)에다가 정신(오성, 지성, 이성)을 두고, 그 정신이 잘 생각하면 혼도 잘 살고 몸도 잘 산다고 여기면서, 정신이 잘한다는 것은 지성이 체계를 잘 만든다는 것으로 여겼다. 이 체계를 누구나 잘 이용하는 상식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이제에도 잘 이용하게 하는 양식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사유 체계에서 더불어 잘 산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라기보다 우선 자기와 맞는 사람들과 잘 산다는 것이 되었다. 그들 속에서 지식을 공유하고, 이용하며, 새로운 생산 방식을 바꾸어 가면, 그다음에 인간은 누구나 함께 다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우선 한편이라는 생각에서 역사는 개인주의를 만들었고, 게다가 자기들끼리 잘사는 국가주의를 만들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이들이 전승과 교육을 통한 과학적 지식의 소유하고서, 이들은 다른 문화에서 체계 없이 공감과 감화로서 살아가는 것을 야만인 취급하고, 자기들 방식으로 따르지 않으면 무지의 신앙을 갖는 것처럼 취급하였다.
이들은 타자들을 교화시키거나 훈육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국가주의 이후 제국주의에서 드러나듯이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저항하고 불복하는 이들을 악마화하고, 그리고 자기들에 반대하는 맑스-레닌 사상을 빨갱이라고 만들었다. 미국의 멕카시 선동이 그랬고, 이승만의 보도연맹학살과 박정희의 인혁당과 통혁당 사건을 조작하면서 빨갱이 사냥을 했다. 21세기에는 미국의 마가(MAGA)라는 집단의 광기와 윤석열의 계엄과 내란의 획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철학이란 학문은 모순율의 사고, 논리적 무모순, 종교의 무오류 등이 얼마나 많은 파라독사들을 생산해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학문은 이런 획일적인 사고의 광기와 유일신의 파라노이아에 저항하고 인류의 삶과 사유의 확장을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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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존재와 무, 영원과 현존이라 기본 문제, 그리고 학문적 대립 또는 선문답과 같은 대립적 사유가 있다. 자연 발생론 대 유일 존재론,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에피스테메 대 독사, 자연 대 신, 물질 대 정신으로 이어지는 해답 없는 논쟁(선문답)들이 있어왔다. 이런 논쟁에 대해 조주선사는, 무(無)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질문도 그런 논의도 안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삶이 화두이다.
그러면 오래 전승의 체계와 학문들(수학들, 철학들, 과학들)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승과 기억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달리 살기를 찾아가는 노력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상태에서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고, 다음으로 달리 말하기, 달리 문자화하기, 달리 실천하기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 대 상품자유주의자(le liberaliste), 인도주의자(huminitaire) 대 인문주의자(humainiste), 자연주의 대 인간주의,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조화중항 대 비례중항 등이 마치 대립(l’opposition)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우선 사유방향의 차히이다. 대립은 비교의 차이이지만, 방향의 차히는 삶의 태도와 대처에 있다. 지금까지 학문의 방향과 달리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데칸쇼의 유행이 일본제국주의에 영향 하에서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훈육과 통제의 지배 방식에 있었다면, 제도 측면에서 논리실증주의과 과학주의가 미국 제국의 영향 하에 있으면 신군부와 이명박으로 명령(지시)과 조작의 방식으로 상층에서 표면으로 지배하였다. 이제 심층에서 표면으로, 즉 세계사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치, 자주에서 자율과 자발성으로 만들어갈 때이다.
학문과 제도에서 문명사관이 아니라 문화관으로 보는 관점은 심층에서 표면으로 발현과 창안을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 입말이 문자화하고, 그 문자와 이미지가 빛의 속도로 전지구를 돌고 있다. 이런 시대에 민주당은 당원주권을 실현하려 하듯이, 다음 공화국은 프랑스 대혁명의 공화정 수립처럼 인민주권을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길을 나서야 할 것이다. 사상의 자유, 집회 결상의 자유를 토대로 하는 다음 7공화국을 건설할 차비를 해야 할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에서 길어 올린 문화와 기억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공자도 학습이 즐거움이라 하였듯이, 인민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학습과 동지들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교육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를 넘어서 기억과 전통에서 영구대계일 것이다. 이제 달리 말하기, 달리 문자화하기, 달리 실천하기, 이에 맞는 교육이 방향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항 대립에서 비례중항처럼 50 대 50이라기보다, 인습에 젖은 50 대 새로운 세계를 만들 50에서, 조화중항을 찾아가면서 서로 합의와 평결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속에서, 매일, 매달, 매년이 동일반복 같아 보이지만, 평생의 과정에서 보면 매일 이질반복을 하고 있으며, 그 성과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한다. 긴 시간에서 단 한 번의 성취를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기적, 은총, 음덕, 자비, 성덕 등은 같은 의미의 다른 용어일 뿐이다. 하늘의 번개는 기적과 같다. 그 번개는 수없이 많이 치지만, 모든 과정에서 번개는 인생처럼 딱 한번 뿐이라고 하고, 동일한 번개는 없듯이 동일한 삶도 없다. 산다는 것, 번개와 같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기적이 각자에게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기에 다른 이들이 전혀 모른다. 이질반복에서 평생의 노력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삶의 다양체를 느끼면 살다가 간다. 이럴 이해하는 벗과 동지를 만나 혁명도 하려하고 결사도 만든다.
(4:16, 59PMA)(4:34, 59PMAA)
경제학 – 무기산업 (에너지)
IT 산업과 인간(기술자)
자료(le donne)
자정 능력의 상실
전통의 빈약성 – 극우의 서식지
기술정보
손흥민
현재 인간계 최고의 바둑 기사는 신진서 9단
게임계의 ….
BTS 공연 해외순회 공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권선징악(勸善懲惡),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 자업자득(自業自得),
새옹지마(塞翁之馬), 전화위복(轉禍爲福), 고진감래 (苦盡甘來), 어려움 좋은 일로
흥진비래(興盡悲來), 호사다마 (好事多魔), 좋은 일만 있지 않고 조심하라
인생무상(人生無常):
교복(제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모습을 줄달린 인형(마리오네뜨)
니체를 읽으며 허무주의로 읽어온 독해와 망치의 철학이라고 읽는
자연의 흐름과 황제(참주)제의 반대에 대해서 프랑스혁명의 공화국
이승만 박정희의 빨갱이 사냥은 종속권력이 자치와 자주 하나의 방향만이 맞다고 주장하는 편집증의 광기를 파라노이아라 한다.
Les technologies de l’information (TI), ou IT pour « information technologies »
Les technologies de l’information et de la communication ou techniques de l’information et de la communication (TIC, traduction de l’anglais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ICT) sont les outils et systèmes qui permettent de créer, transmettre, stocker et partager des informations.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8-외적인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8-외적인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
1)
앞에서 정립하는 반성[ㄴetzende Relexion]과 전제하는 반성[voraussetzende Reflexion]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판단이 지닌 두 측면이다. 한 측면은 본질에서 현존을 끌어내서 판단(정립)하는 작용이다. 이렇게 정립된 것이 곧 ‘그 자체 부정적인 것[an sich Negative]’인 가상이다. 다른 측면은 개별 현존에서 다시 그 근거가 되는 일반 본질을 찾아가는 판단 작용이다. 이는 현존을 전제로 본질에 이르는 길이다.
이 두 측면은 사실 동일한 판단의 두 측면이며 서로 이면이면서 교차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 두 측면을 인식의 발전 과정으로 설명했다. 현존하는 가상은 이미 본질에 의해 규정된 것 즉 정립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정립은 감추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정립이 의문시되면서 감추어진 본질을 자각하여 제시할 때 이것이 전제하는 작용이다.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은 서로 순환한다. 이런 순환은 인식의 운동에서 항상 일어난다. 인식은 어떤 주어진 개별자로부터 귀납하여 일반적 본질에 이르지만, 이런 귀납은 순환적이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것은 감추어진 일정한 본질을 통해서 이미 선택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귀납이란 자기가 이미 감추어놓은 본질에 다시 이르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전제하는 반성 운동을 통해 찾아진 본질은 주관적으로 미리 설정한 것에 불과하니 헤겔은 이런 반성은 ‘외적인 반성’에 그친다고 한다.
“반성이 지양하면서 자기에 전제하는 직접적인 것은 단적으로 다만 정립된 것이며 그 자체로 지양된 것이어서, 이는 자기 내로 되돌아옴[본질]과 상이하지 않으며, 그 자체 다만 이런 자기 내로 되돌아옴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정립된 것은 동시에 부정적인 것으로서 규정되니, 이는 일자[직접적인 현존]와 직접 대립하는 것이며 타자[본질]와도 직접 대립하는 것으로서 규정된다. 대립한다. 그러므로 반성은 특정한[bestimmt: 주관적인] 것이 된다. 반성은 이 규정성[Bestimmtheit]에 따라서 전제를 가지니 자신의 타자로서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니, 이런 반성은 외적인 반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이런 외적인 반성은 자신이 출발하는 지점이 “자신의 타자로서 직접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그것이 이미 그가 주관적으로 선택된 즉 이미 정립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2)
이런 외적 반성은 순환적이다. 외적 반성은 현존을 한번은 직접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한 번은 본질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는 그가 의식하고 있는 측면이다. 후자는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측면이다. 그는 진정으로 직접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미리 선택해놓은 것에서 출발한다.
“외적 반성은 이런 규정 속에서 이중화되어 한번은 전제된 것으로서 또는 자기 내로 반성하여 직접적이 되는 것으로서[현존] 존재하며 다른 한 번은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는[가상] 반성으로서 존재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2-253)
이런 외적인 반성은 직접적인 것을 전제로 해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앞에서 말한 전제하는 반성 또는 칸트가 말한 반성 판단과 같다. 헤겔도 그러므로 주석에서 “칸트가 특수자가 주어진 경우 그것에 대해 일반자를 찾으려는 것이라는 의미를 할당한 반성은 이미 밝혀지듯이 다만 외적 반성과 흡사하다”라고 말한다.
칸트의 반성 판단에 속하는 미적 판단은 칸트 자신은 순수하게 직접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믿었다.
“사유하는 반성은 외적인 반성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사실상 단적으로 주어진 것 즉 그것에 낯선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나가서 자신을 단순히 형식적인 활동으로 즉 내용과 소재를 외부에서 받아들이고 독자적으로는 다만 그런 내용에 의해 제약된 활동으로 고찰한다.” (헤겔 논리학, GW11, 255)
그러나 사실 헤겔이 말한 대로 이런 반성 판단 즉 외적인 반성은 이미 주관적으로 선택된 것에서 출발하는 순환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칸트 이후 철학자들은 반성 판단을 그런 외적인 주관적인 반성에 그친다고 보고, 진정한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반성을 떠나서 절대적인 고찰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낭만주의 철학자들은 절대자를 직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헤겔은 그들이 반성을 “절대적 고찰방식의 반대 극이며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간주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4-5)라고 말한다. 그러나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보듯이 절대자에 관한 이런 직관주의적 인식론을 밤에는 모든 소가 검게 보인다고 하면서 비판했다.
3)
헤겔은 인식이 개념을 통해 일어나는 선험적 인식인 한에서 반성적 인식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반성이 처음에는 외적 반성이더라도 마침내 절대적인 반성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절대적 반성은 곧 반성을 통해 얻어지는 본질이 단순히 외면적 주관적인 본질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고유한 본래적 본질 즉 객관적 본질이 될 수 있게 하는 반성이다.
“그러나 반성에는 또한 절대적 반성의 개념도 있다. 왜냐하면, 반성이 자기의 규정 작용 속에서 다가가는 일반자, 원리 또는 규칙과 법칙은 출발점이 되는 그런 직접적인 것의 본질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직접적인 것은 무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런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 즉 규정하는 반성이 비로소 직접적인 것을 그 진정한 존재에 따라서 정립하는 것으로서 여겨지며 그런 규정하는 반성이 직접적인 것에서 수행하는 것 즉 그런 반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규정은 그런 직접적인 것에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래적 존재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4)
헤겔은 이런 객관적 본질에 이르는 반성을 ‘절대적 반성’이나 ‘내재적인 반성’ 또는 ‘규정하는 반성[bestimmende Reflxion]’이라는 개념으로 서술한다. 헤겔의 논리학 본질론에서 반성 운동의 명운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 규정하는 반성이며, 이는 본질론이 존재론과 개념론을 매개하는 장이니, 논리학 전체를 짊어지고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으니, 이제 이 개념이 지닌 정확한 의미를 탐구해 보기로 하자. 도대체 어떻게 반성 운동이 외적인 반성에 그치지 않고 규정하는 절대적 반성이 될 수 있는 것일까?
4)
헤겔은 1편 가상의 2장에서 반성을 다루다 그 3절에 이르러 규정하는 반성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는 지금껏 논의하지 않았던 ‘반성 규정[Refleionbestimmung]’이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이 반성 규정은 나중에 ‘본질 규정[Wesenheit]’이라고 하므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 절 바로 다음 1편 3장에서 다루게 될 ’동일성‘과 ’차이‘, ’대립‘과 ’모순‘이라는 규정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먼저 이런 반성 규정이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질적 규정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한다. 질적 규정에서 어떤 규정은 그 자체에서[an ihm selbst] 자신의 타자로 이행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그 자체에서 파란색으로 이행한다. 이런 이행은 질적 판단에서 긍정 판단에서 부정 판단으로의 이행이다.
“존재의 영역에서 현존은 그 자신에서 부정을 지녔던 존재이며 이런 부정은 그 자체 직접적인 것이었으니 존재는 그 부정의 직접적인 받침대이자 지반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5)
그러나 반성 규정에서 어떤 현존 즉 규정은 마찬가지로 타자와 관계하지만, 여기서 관계는 반성의 관계에 있다. 즉 어떤 것은 자신의 타자를 통해 규정될 뿐이다. 예를 들어 왼쪽은 오른쪽이 아닌 것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아버지이다.
“반성 규정은 존재, 질의 규정성으로부터 구별된다. 이 존재의 규정성은 일반적으로 타자에 직접 관계한다. 정립된 존재도 타자에 관계하지만, 이때 타자는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질의 부정성은 존재하는 것으로서 부정성이다. 존재가 그 근거와 지반을 이룬다. 그러나 그에 반해 반성 규정은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헤겔 논리학, GW11, 256)
즉 본질의 영역에서 하나의 현존은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자기 내 반성’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질은 자기 내에서 부등하며 따라서 이행하는 것이며 타자로 소멸하는 계기이다. 그에 반해 반성 규정은 부정으로서 정립된 것이며 그 근거에 부정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 부정이며 자기 내에서 자기와 부등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본질적이며 비 이행적인 규정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56)
“정립된 것은 자신을 규정으로 고정하는 데 그 이유는 반성이 반성을 통해 부정된 존재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성을 통해 부정된 존재는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규정은 존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동일성을 통해 성립한다. …반성의 자기 동일성은 부정적인 것[타자]을 부정적인 것으로 즉 지양되거나 정립된 것으로서[부정함] 가지므로 부정적인 것에 존립을 주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6)
5)
여기서 자기 내로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의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기가 규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질적인 규정과 반성 규정은 부정성의 차이가 있다. 질적 규정성에서 부정성은 타자로 이행, 특정한 부정[bestimmte Negation]이다. 반면 반성 규정에서 부정은 부정의 부정[die Negation des Negatives]이며, 자기로 복귀하는 것이니, 그런 한 타자와 관계하면서도 각자는 자유롭다.
“반성 규정은 이처럼 자기 내로 되돌아온 것이므로 자유로운 본질 규정으로 나타나니, 이 본질 규정은 공허 속에서 서로 견인하거나 반발하는 것 없이 떠도는 본질 규정이다. 이 본질 규정 속에서 규정성은 자기 관계를 통해서 고정되었으며 무한히 고정되었다. 그것의 규정되어 있음은 그 이행과 단순한 정립됨을 자기에 종속시키거나 그것의 타자로의 반성을 자기로의 반성으로 구부러지게 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6)
“반성 규정은 정립된 것이며 부정이지만, 이런 부정은 타자에 대한 관계를 자기 내로 구부려 되돌아오게 하니 이런 부정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의 타자가 통일된 것이 다만 이를 통해 본질 규정으로 된다.”(헤겔 논리학, GW11, 257)
하나의 현존과 다른 현존 사이의 이런 반성 관계 속에서 그들은 서로 동일하거나 차이를 지니며,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한다. 반성 규정은 본질론 영역에서 다루어진 현존 사이의 반성 관계를 규정하는 일종의 메타 규정성이다.
6)
이제 헤겔이 반성 개념을 두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나의 차원은 현존을 본질과 관계하여 반성 운동을 말한다. 이때 제시된 것이 외적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이다. 다른 하나는 본질의 영역에서 현존 사이의 차원에서 사용한다. 이런 현존은 서로 반성적 관계 속에 있으며 이를 통해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규정을 지닌다.
본질과 현존 차원의 반성 운동은 수직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현존과 현존 사이의 반성 관계는 수평적이라 할 수 있다. 양자는 그러면 어떤 관계인가? 현존 사이의 반성 관계는 다양한데(즉 차이와 대립, 모순 관계) 이 반성 관계를 통해 현존이 현존하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 현존의 공간은 존재론에서 질의 공간이나 양의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이며 반성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공간이다. 반성에 두 차원이 있다는 사실은 아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반성은 자기 내에서 지속하는 규정 작용이다. 본질은 이런 규정 작용 속에서 자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구별된 것은 단적으로 정립된 것이며 본질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구별된 것은 정립된 것이 아니고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다. 부정으로서 부정은 이런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 속에 있으며 자기의 타자 즉 자기의 비 본재 속으로 반성되는 것이 아니다.”(헤겔 논리학, GW11, 257)
여기서 헤겔은 정립의 측면과 자기내 반성의 측면을 구별한다. 전자는 본질과 가상의 차원이다. 후자는 현존 사이의 관계 차원이다.
그런데 두 차원은 서로 관계하는 것이 아닐까? 즉 본질이 열어주는 것이 바로 현존의 공간이 아닐까? 하이데거는 존재가 현존재가 살아가는 세계를 열어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헤겔에서도 본질이 현존의 세계를 개시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거꾸로 현존의 공간을 통해 그것이 열어준 본질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즉 그 본질이 내재적인지 외적인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은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이를 통해 반성 규정[반성 관계]은 규정된 가상을 즉 가상이 본질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인 본질적 가상[반성 운동]을 이룬다. 이런 이유로 규정하는 반성은 반성이 자기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은 지배적인 것으로 된 부정 속에서 상실된다.”(헤겔 논리학, GW11, 257)
여기서 헤겔은 규정하는 반성은 반성이 자기를 벗어나 더는 반성이 아닌 것으로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규정하는 반성을 통해 본질이 현존에 내재하게 되면 여기서 개념 운동이 시작되는 주체 개념이 출현하기 때문이다.이 개념은 자기 실현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며 이를 헤겔은 “지배적으로 된 부정” 즉 주체라고 한다.
문제는 이 두 차원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논의다. 본질과 공간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 문제는 헤겔 논리학에서 핵심 문제인데 헤겔은 이 문제를 바로 다음 장 즉 본질 규정 장에서 다루고 있으니, 일단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후로 미루기로 하자.
6)
헤겔은 존재의 영역에서 직접 주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이런 반성적 관계를 통해 규정된 것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본다. 많은 철학은 이런 직접 주어지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가장 직접 주어지는 것을 찾아서 고대 철학의 지각 경험에서 근대 철학의 감각 경험으로 다시 현대 분석 철학 등에서 제기하는 요소적 감각 경험으로 나갔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직접 주어지는 경험은 지각이든 감각이든 요소적 감각이든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는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장을 읽어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이미 후일 콰인 등이 제시한 지시적 불확실성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헤겔은 칸트 선험적 인식론을 따라서 모든 인식은 개념의 체계를 토대로 출현한다고 본다. 칸트는 이런 개념적 인식이 물 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에 부딪힌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헤겔은 오히려 그 개념적 체계가 개별자들에 대해 외면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며 본래적이어서 물 자체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그는 이런 개념적 인식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본질에 즉 물 자체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정립된 것이 더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현존이 정립되면, 현존은 그것의 본래적 모습 즉 부정적인 것이며 단적으로 다만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에 관계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립된 것은 본질과 관계해서 정립된 것 즉 자기 내로 되돌아간 것[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56)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
1)
앞에서 본질과 가상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부정적인 것의 자기 부정 운동이 곧 본질이며, 이 부정의 부정이 자기 관계하면서 직접적인 가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 양자의 관계를 종과 개체의 관계에 비추어 이해했다.
본질과 가상은 서로 순환하는데, 이런 순환하는 운동의 양극단이 본질과 가상이라면 양극단을 매개하는 운동이 곧 반성이다. 헤겔은 반성하는 운동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우선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의 짝이 있다. 다음으로는 외적인 반성과 내적 반성 또는 규정하는 반성의 짝이 있다.
먼저 정립하는 반성[앞으로 정립으로 축약]과 전제하는 반성[앞으로 전제로 축약]을 살펴보자. 헤겔은 양자는 상호 작용적으로 보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했던 두 가지 판단 작용의 구분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설명한 적이 있지만, “이 장미는 빨갛다”라는 판단에서 한편으로 이 판단은 주어인 꽃이 지닌 여러 성질(빨갛고, 향기로운 것 등) 가운데 하나인 빨간색을 끌어내는 것이다. 빨간색은 개별 장미에 내재한다. 칸트는 이런 판단 작용을 구성적이라 했다. 이는 지성의 작업이다.
그런데 이 판단은 장미라는 개별 대상을 빨간 것들이라는 일반적 유에 포섭하는 판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개별자를 일반자에 포섭하는 판단은 전제하는 판단이며 이는 상상력의 작업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여기에 속한다고 했다.
“판단력 일반은 특수를 일반 아래에 포함된 것을 사유하는 능력이다. 일반이 주어져 있는 경우에는 특수를 이 일반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은 규정적이다. 그러나 오직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특수에 대하여 일반을 찾아내야 할 경우에는 판단력은 단지 반성적이다.”(칸트 판단력 비파], 서언, S. 27)
2)
칸트는 판단을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해서 서로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인식에서 구성적 판단도 구상력을 통한 도식을 매개로 하며 거꾸로 미적 판단도 필연적이려면 지성의 개입이 필요하다. 지성은 개별 대상을 가장 적절하게[필연적으로] 일반적 유에 포섭한다. 결국, 칸트 자신은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모든 판단은 구성과 포섭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헤겔은 논리학 3부 주관 논리학 판단론에서 판단을 내재와 포섭이라는 이중적 작용으로 파악한다. 이 가운데 내재란 칸트가 구성이라고 했던 판단 작용이다. 반면 포섭이란 칸트가 반성이라고 했던 판단 작용이다.
“그러나 이제 주어는 자립적인 것인 한 그런 동일성[계사로서 이다]은 술어가 그 스스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고 그 존립을 다만 주체 속에서 갖는다는 관계를 가진다. 술어는 주어에 내재한다.
….
그러나 다른 한편 술어 역시 자립적인 일반성이고 주어는 거꾸로 그 술어의 한 규정일 뿐이다. 그런 한 술어는 주어를 포섭한다.“(헤겔 논리학 2부, GW12, 57)
하나의 판단에서 이 두 가지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므로 주어는 내포 상으로는 다양한 규정을 잠재적으로 포함하는 것이고 외연 상으로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술어는 이런 내포적 규정 가운데 하나가 실현된 것이고 동시에 개별자를 포괄하는 일반자가 된다.
위에서 말한 판단의 주어 술어 관계는 모든 판단 일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루어지는 것은 질적 판단, 양적 판단을 넘어서 출현하는 반성 판단 또는 관계 판단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는 개체이며 술어는 종적 규정성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사유하고 있다”와 같은 판단이다. 이런 판단에서 여기서 주어가 곧 가상이며 술어가 곧 본질이다.
3)
반성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 가상과 본질은 판단하는 운동의 양극단이며 양자를 매개하는 운동이 곧 반성 운동이다. 이 반성 운동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립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전제하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은 판단을 구성하는 두 측면으로 보아도 좋지만, 헤겔의 반성 운동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이를 하나의 운동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올바른 이해가 될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 우리가 발견할 때 그것은 이미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직접 현존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미 그것을 나름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눈앞의 현존에 관한 이런 규정을 마치 자연적인 것으로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규정은 아직 어떤 판단으로 출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것은 선술어적인 규정이다. 이것을 헤겔은 직접적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곧 이것을 판단으로 구성한다. 즉 예를 들어 ‘이것은 개다’라고 판단한다. 선술어적 판단이 판단으로 이행한다. 이런 선술어적 판단에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규정이 판단에 이르게 되면, 주어 술어로 분화된다. 즉 판단이 성립한 것이다.
“가상은 반성과 본성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가상은 직접적인 것으로서 반성이다. 자기 내로 복귀한 가상, 따라서 그 직접성으로부터 소원화한 가상을 우리는 반성이라는 외국어로 표현한다.”(헤겔 논리학, GW11, 249)
“본질은 반성한다. 이 생성이나 이행이 자기 내에 머무르기에 여기서 구별된 것은 단적으로 다만 그 자체에서 부정적인 것[규정된 것] 즉 가상으로 규정된다.”(헤겔 논리학, GW11, 249)
가상은 최초에는 직접적인 것인데 이 가상이 직접성을 벗어나서[소원화하면서] 반성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반성하면서 가상은 정립된 것으로 된다. 이 과정이 곧 정립하는 반성이다.
4)
이렇게 판단 속에서 규정된 것이기에 이 직접적 현존은 더는 “출발점으로 되면서 그 자신의 부정으로 이행하는 최초의 직접적인 것[선술어적 직접성]이 아니며” 그렇다고 “반성을 통해서 운동해서 지나가는 존재하는”(GW11, 249-250) 불변하는 기체[Substrat]도 아니다.
“이것은 정립된 것이다. 즉 직접성이 순수하게 다만 규정성으로서 또는 자기 반성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이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본질]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직접성은 가상의 규정성을 이루는 직접성이며 이로부터 반성 운동이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헤겔 논리학, GW11,251 )
이와 같은 정립하는 반성에서는 이미 그런 근거 즉 개의 본질적 규정이나 종적 규정이 판단하는 자에게 알려져 있었고 그는 그런 근거를 통해 그것을 개라고 판단했다. 그는 예전에 그런 물음을 제기했고 나름대로 그 답을 알거나 배웠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져서 그 근거는 이렇게 판단할 때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마치 자전거나 수영하는 기술을 그가 알고 있으나 명확하게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 대부분은 이런 명확하게 의식하지는 않으나 이미 알고 있는 근거를 통해 내려진 판단이다.
5)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왜 그게 개야?”라고 물으면 그가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때 그는 나름대로 개의 본질, 즉 판단 근거로 간주했던 것을 제시할 것이다. 즉 저것은 개 머리를 지니고 있는데 개 머리는 개에게만 나타나는 것(개의 종적 규정성)이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런 근거를 제시하기를 요구받지도 않았고 그 근거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는다. 개 머리를 보는 순간 곧바로 “저건 개야”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판단하면서 그것은 이제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정립된 것이 된다. 이게 헤겔이 말하는 반성 운동의 첫 번째 과정인 정립하는 반성이었다.
그런데 개 머리를 하고 있는데 왠지 종종거리고 걷는 것이 꼭 고양이 같아서 저게 개인가 하고 의문스러워지는 때(또는 “그게 왜 개야?”하고 누가 묻을 때), 우리는 개라고 하는 판단의 근거를 묻게 된다. 이렇게 물음은 개에 관한 관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 물음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를 알게 된다. 그는 개가 어떻게 걷든 간에 개 머리를 하고 있으면 모두 개야라는 생각을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제 어떤 판단의 근거 즉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헤겔은 전제하는 반성이라 한다.
“반성은 부정적인 것[가상]을 지양하는 것이니 곧 반성의 타자[가상]를 지양하는 것이며 직접성을 지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은 되돌아온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 자기와 합일하는 것으로서[자기 부정으로서 본질] 직접성이므로 이 반성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가상]을 부정적인 것으로서 보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반성은 전제다.”(헤겔 논리학, GW11, 251)
“또는 직접성은 되돌아온 것인 한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며 직접성이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반성은 반성 자신을 부정하는 것[직접성의 정립]을 지양하는 것이다. 반성은 자기와 합일이니 반성은 그 자신의 정립을 지양한다. 반성이 자신을 정립하는 가운데 이런 정립을 지양하니 이런 반성이 곧 전제다.” (헤겔 논리학, GW11, 251)
이때 전제된 것은 현존에서 관찰된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개 머리의 모습이다. 그는 이 개 머리를 전제로 그러면 그것은 개라는 종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때 판단의 전제가 된 것은 개별적 현존에서 관찰된 현상이다. 이 현상을 전제로 해서 그 근거로 되돌아갔으니 왜냐하면 이 현상은 곧 본질의 종적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성은 자기가 넘어나가고 그로부터 복귀한 직접적인 것을 자기 앞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이런 되돌아옴은 이런 발견된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전제된 것은 생성되는 동시에 다만 버려진다. 그 직접성은 지양된 직접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거꾸로 지양된 직접성은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본질이 자기에 이르는 것이며 단순하게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본질]이다. 이를 통해 자기에 이르는 것은 자신을 지양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직접적인 것] 자신을 반발하는 것이며 [직접적인 것을] 전제하는 반성이다. 반성의 자기 반발은 자기 자신[본질]에 이르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7)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현존을 개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현존의 본질 규정성 때문이다. 최종적인 판단이 내려지는 과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런 정립하는 반성을 논리적으로 규정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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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본질 규정성은 곧 개 머리를 지닌 것이다. 이것은 개 머리를 지니고 있다. ——————- 그러므로 이것은 개다. |
반면, 전제하는 반성을 도해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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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개다. ——————— 왜냐하면, 개 머리를 지닌 것은 개의 본질 규정성이고 이 개는 개 머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위의 예에서 보듯이 정립하는 반성이나, 전제하는 반성은 동일한 것이다. 다만 그 방향만 전도되어 있다. 정립하는 반성은 ‘그러므로’를 통해서 근거로부터 규정된 것이며, 전제하는 반성은 ‘왜냐하면’을 통해서 근거를 찾아 나선 것이다.
결국, 정립하는 반성은 습관적으로 일어난 판단이며, 전제하는 반성이란 판단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자각적으로 그 근거 즉 본질을 밝히는 작용이다.
“따라서 반성하는 운동은 고찰된 것에 따라서 볼 때 자기 내에서 절대적으로 받아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자기 내로 되돌아옴[본질]이 전제하는 것[가상]은 본질이 그것에서 나와서 비로소 되돌아감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인데 이런 되돌아옴 그 자체 속에서[정립하는 반성]만 가능하다.”(헤겔 논리학, GW11, 252)
“반성이 출발한 지점인 직접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은 오히려 비로소 이런 넘어감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직접적인 것을 넘어가는 것은 그런 직접적인 것에 이르는 것이다. 운동은 앞으로 나가는 가운데 직접 자기 자신 내로 전환하여 다만 그런 방식으로 자기 운동한다. 정립하는 반성이 전제하는 반성인 한에서 자기에서 나온 이런 운동은 전제하는 반성인 한에서 단적으로 정립하는 반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6-라이프니츠의 표상에 관한 헤겔의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6-라이프니츠의 표상에 관한 헤겔의 비판
1)
앞에서 설명했듯이 본질과 가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존재론에서 질 즉 현존[Dasein]은 직접적 존재지만, 가상은 직접적 존재더라도 본질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가상에서 본질에 대립하는 규정성이 갖는 직접적 존재는 본질의 고유한 직접성일 뿐이다. 이 본질의 직접성은 존재하는 직접성이 아니라 단적으로 매개되거나 반성된 직접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7-248)
“가상은 존재의 규정성 속에 있는 본질 자체이다. 본질이 가상을 갖는 방식은 곧 본질이 자기 내에서 규정되고 이를 통해 그 자신의 절대적 통일로부터 구별되는 방식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8)
가상은 그 자신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상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니,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이 곧 본질이다. 이를 통해 가상은 자기 내로 복귀하여 본질이 된다.
본질은 부정성이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이런 자기 관계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가상이 된다. 그런 가상은 앞에서 말했듯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여 본질로 복귀한다.
“부정성은 부정성 그 자체이니, 이 부정성은 자기가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정성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 부정성은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자기 자신을 반발시키는 부정이다.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직접성은 직접성에 대립하는 부정적인 것이거나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성 자체는 절대적 부정성이며 규정 작용이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규정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것이며 자기 내로 되돌아옴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48)
마치 자기 관계로서 가상과 부정의 부정으로서 본질은 서로의 이면이며 마치 순환하는 듯하다. 그런 가운데 가상이나 본질은 모두 이중화된다. 가상은 직접적이면서도 자기 부정적인 것이며, 본질은 부정의 부정이면서 자기 관계이다.
2)
헤겔은 이런 가상을 회의주의에서 판단중지와 비교한다. 회의주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이 그 자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회의주의는 이런 부정조차도 다시 부정하니,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세계에는 풍요한 내용이 있다.
어떤 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도 그것의 부정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니, 여기서는 어떤 판단도 내려질 수 없으며 그 결과 판단중지 상태에 빠지는데, 헤겔은 가상이란 개념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라고 말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정은 곧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니 그것은 존재한다.
이런 이중적 상태는 근대 관념론에서 현상 개념도 마찬가지다. 칸트의 경우 현상은 물 자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부정된다. 하지만 현상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선험적 감성 형식을 통해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물 자체만이 모순이 아니다. 칸트에서 현상 자체도 이미 모순이다. 그것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으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회의주의에서 판단중지, 관념론에서 현상은 그것은 다양한 내용을 지니지만, 그것이 실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뿌리도 없이 다만 풍요한 내용만 나타나는 것은 마치 허공에 뜬 물거품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과 같다.
“이런[회의주의나 관념론] 내용에는 사실 어떤 존재나 어떤 사물 또는 물 자체가 밑바닥에 놓여 있을 수 없으며 내용은 독자적으로 내용이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머무른다. 다만 내용은 존재에서 가상으로 옮겨졌을 뿐이니 가상이더라도 자기 자신 내에서 직접 존재하고 상호 대립하는 다양한 규정성을 갖는다.”(헤겔 논리학, GW11, 247)
3)
가상과 본질의 이런 관계는 자주 거울과 사물 사이의 빛의 유희에 비추어진다. 사물은 거울에 비추어어서 자기를 보며 거꾸로 거울 역시 사물에 비추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본질과 가상의 관계는 거울과 사물 사이의 빛의 유희로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빛의 유희는 그야말로 사물이나 거울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거울과 사물에서 빛의 반사는 표면 배후에 마치 이와 무관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겔에서 본질과 가상의 관계는 차라리 종과 개체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종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은 개체가 자기를 복제하는 과정 중에서만 즉 그런 운동을 통해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개체는 직접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런 종의 자기 재생산을 매개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일시적인 존재다. 개체는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서만 그래서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서만 직접 존재할 뿐이다.
본질 역시 마찬가지다. 본질은 현존과 구별되는 현존을 피안에서 갖지 않는다. 본질은 오직 자기를 재생산하는 개체의 운동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런 가운데 본질은 시간상 지속해서 존재한다.
4)
이런 맥락에서 헤겔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에서 표상 개념을 소환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표상을 전개한다. 그러나 모나드는 생산하고 결합하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표상은 모나드 속에서 거품처럼 떠오른다. 표상은 무차별하며 직접 존재하니 서로에 대해 대립할 뿐만 아니라 모나드 자신에 대해서도 대립한다.”(헤겔 논리학, GW11, 247)
이 짤막한 구절은 곧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전체에 대한 헤겔의 긍정과 부정을 통시에 포함하는 말이다. 그 말의 구체적 의미는 헤겔이 철학사 강의에서 라이프니츠에 관해 설명한 것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표상을 본질의 가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단순 실체인 모나드는 어떤 질이나 규정을 지니고 있다. 이 질이 곧 모나드의 표상 또는 지각이다. 모나드가 질이나 표상을 지니지 않으면 이 세계의 다양성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나돌로기, 명제8 참조)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질이나 표상을 스피노자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본 것과 달리 자기 내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내부에서 주어지는 질과 표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헤겔이 말한 본질의 가상이 된다.
모나드는 단순한 실체이므로 이미 내부에 모든 질과 규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모나드가 지닌 하나의 질은 다른 질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모나드는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없으므로 이런 이행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내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모나드의 질적인 이행을 일으키는 힘이 곧 모나드가 지닌 욕망이다. 이처럼 모나드가 욕망하는 힘을 지닌다는 점에서 모나드는 원자론자의 원자와 다르다.
“변화를 일으키는 내적 원리의 작용(즉 하나의 지각으로부터 다른 지각으로의 전이)이 욕망이라 불리는 것이다. 욕망은 그것이 목표로 하는 전체 지각에 항상 완전하게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은 항상 어떤 지각을 획득하며 새로운 지각에 도달한다.”(모나돌로기, 명제 15)
5)
그런데 여기서 약간 혼란스러운 것이 있다. 욕망은 자주 자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나드는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필연적으로 변화한다. 여기에는 필연적 법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욕망과 필연 사이에 대립이 생기지 않을까?
이런 문제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욕망과 필연성을 화해시키려 한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자침의 비유를 든다. 자침은 필연적으로 북쪽을 향한다. 그러나 자침이 만일 의식이 있다면 자유롭게 북쪽을 욕망하지 않을까? 즉 법칙을 따르는 것이 자유라는 스피노자적인 개념이 여기서 되살아난다.
이런 이행은 단적으로 일어날 수 없고 연속적, 점진적으로 일어나니, 여기서 모나드는 다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갖게 된다. 모나드는 통일성 안에 다중성을 지닌다. (모나돌로기, 명제 13 참조)
헤겔은 모나드가 욕망을 지니고, 자기를 표상하며, 다수성 속에서 통일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아나 정신과 같다고 한다. 즉 모나드는 정신적 원리이며 관념적인 것이라 한다. 여기서 물체적 모나드는 아직 자각되지 않은 미소의 상태에 있는 의식적 모나드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여기까지는 헤겔이 라이프니츠에 찬탄하는 부분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보다 탁월한 지점이 이렇게 본질의 가상이라는 개념에 라이프니츠가 이미 이르렀다는 데 있다. 그러나 헤겔은 곧바로 라이프니츠는 본질의 가상이라는 개념을 아직 충분하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6)
여기서 우선 헤겔은 의문을 표시한다. 모나드의 질 즉 표상이 이행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기에 헤겔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의 질 즉 표상은 마치 “거품과 같다”고 한다. 이는 가상 개념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개별적 질이 거품과 같다면, 이는 욕망이 이를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은 자기가 정립한 질을 왜 다시 부정하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헤겔은 모나드는 각자 “자기 자신과 대립한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는 부정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긍정적인 것일 뿐이니 하나의 질이 다른 질로 이행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더구나 질의 이행과 관련해서 라이프니츠는 신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이렇다. 즉 모나드는 개별적인 모나드인데 서로 다른 질을 가지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외적인 영향을 주거나 받을 수 없으니 이들은 각자 자립적으로 다른 모나드와 무차별하게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와 전혀 무관하지만, 라이프니츠로서는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모나드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인데, 그런 필연성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면, 우주는 곧바로 무질서한 세계가 되어 맹목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통해 난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가 난파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나드의 질적인 변화가 각자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나드는 자립적이고 타자와 무차별하니 이런 모나드들 사이에 질적 변화를 서로 조절하여 통일하게 하는 힘은 모든 모나드를 넘어서서 모나드를 지배할 수 있는 존재 즉 신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라이프니츠에 따른다면 이 세계가 난파하지 않는 것은 신이 예정조화를 통해 모나드들 사이의 조화를 우주에 부여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라이프니츠에서 신을 상정하는 것은 마치 연극에서 기계 신을 도입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한다.
결론적으로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본질과 현존 사이의 수직적인 매개 관계를 생각해냈으나 아직 본질을 매개로 현존과 현존이 수평적으로 매개된다는 원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본다. 수직적 매개와 수평적 매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헤겔에서 본질의 반성 운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