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8-개념에서 판단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8-개념에서 판단으로
1)
일반적으로 개별성은 지성이 개념화하기 이전에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직관적 개별자다. 이런 구체적 개별자는 자기 속에 다양한 속성을 품고 있는 무구별된 즉 무규정적인 전체이다. 이런 개별자는 눈에 보이지만, 사실은 모호한 존재다.
지성은 한편으로 이런 구체적 개별자에서 공통성을 추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지성은 개별자의 다양한 속성 가운데 하나를 분리해 이를 정립한다. 그 결과 내포적으로 단순하고 외연적으로 일반적인 개념이 만들어진다.
이런 일반적 개념이 다시 통합되면서 개별자가 나온다. 이 개별자는 여러 규정성이 통일을 이루면서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인 일반성은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이렇게 해서 내포적으로는 복잡하고 외연적으로는 개별적인 개별성이 다시 돌아온다.
이 개별성은 처음에 개념화 이전의 개별성과 구별된다. 처음의 개별성은 무규정적인 일반성이면서 직관에 주어지는 개별자이었다. 다시 돌아온 개별성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개별자이지만, 규정성을 통일적으로 포함하는 체계화된 개별자이다. 이는 내부가 투명하게 보이는 명확한 존재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개별자이다.
2)
일반 논리학에서는 직관적 개별자와 일반성으로서 개념(‘규정된 개념’이라 한다)만이 다루어진다. 헤겔 논리학에서도 존재의 영역에서 개별자는 출발점이었을 뿐, 논리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본질의 영역은 아직 일반적 개념에 머무르면서 개별성의 출현은 다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마침내 개념의 영역에서 개별자는 구체적인 개별자로서 출현한다.
개념의 영역에서 개념의 개별성은 일반성과 특수성을 거쳐 나온다. 개념의 계기로서 일반성은 단순성 즉 자기 관계일 뿐, 그 ‘부정성’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그 부정성은 특수성의 계기에서 정립된다. 그러나 특수성은 특정한 것일 뿐, 아직 그것의 자기 부정은 아니다. 즉 이 ‘부정성의 자기 관계’는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마침내 개별성의 계기에 이르러 부정성의 자기 관계, 즉 부정적인 것의 부정이 정립된다.
그러나 일반성이나 특수성은 이미 자체 내에서 총체성을 지닌다. 일반성도 이미 일반성과 규정성의 통일이니 개별성이며 특수성 역시 규정성과 일반성의 통일이므로 개별성이다. 다만 일반성이나 특수성에서 개별성은 아직 정립되지 않는다.
거꾸로 개별성은 규정성의 자기 관계이니, ‘자기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미 일반성이며 그것이 ‘부정성’의 자기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특수성이다. 개별성은 양자의 통일이 마침내 정립된 것이면서 이 매개의 측면은 사라지고 하나의 직접적인 개별자로 등장한다.
“일반성과 특수성은 한편으로는 개별성이 생성하는 계기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미 제시되었듯이 이 양자는 각자 자기 자신에서 총체적인 개념이고 따라서 개별성으로 이행하더라도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개별성 속에서 이 양자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 정립될 뿐이다.”(주관 논리학, GW12, 49)
3)
앞에서 개별성에서 특정한 개념을 거쳐, 개념의 개별성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설명했다. 헤겔은 이 운동을 통해 개별성이 정립되면서 동시에 개념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동시에 개념은 자신을 상실하여 개념의 실재성 즉 판단으로 이행한다.
“개별성은 개념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개념을 상실하는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
개념의 일반성은 내포적으로는 단순한 속성이지만, 외연적으로는 하나의 일반자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개념의 일반성 즉 유[Gattung]는 두 가지 대립하는 방향에서 분화된다. 내포적인 차원에서 분화는 두 가지 서로 대립하는 속성으로 분화한다.
한편으로 속성 P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립하는 규정성[-P]이다. 전자는 그 개념의 종[Art]에 속하는 속성이며 후자는 그 개념의 유[Art]에 속하는 속성이다. 이런 대립하는 특수성에 따라서 개념적 실체는 두 대립하는 현존으로 분화된다. 하나는 속성 P를 실현한 현존이며 다른 하나의 현존은 속성 -P를 실현한 현존이다.
이것은 마치 척도 관계가 두 대립하는 속성(산성과 알칼리성)을 지니면서, 이 속성에 따라 두 대립하는 척도(산과 알칼리)로 분화되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어 인간의 개념을 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 할 때 인간에게는 종에 속하는 이성성과 유에 속하는 동물성이라는 대립하는 속성이 존재한다.
이때 인간은 두 대립하는 현존으로 분화되는데, 하나의 인간은 이성적인 인간이며 다른 하나는 비이성적 동물적 인간이다. 전자는 개념의 종차가 실현된 현존이며 후자는 무규정적인 유적 개념이 그대로 현존하는 것이다.
개념의 특수성이 이처럼 이중적으로 분화되므로 이 특수성에서 개별성으로 나가는 반성도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하나는 규정성이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으로부터 자기 내로 반발하면서 규정성이 독자적으로 자립적인 규정성으로 된다. 이는 곧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질적인 규정성이다. 헤겔은 이를 ‘질적인 일자’[독립적 성질]로 규정한다.
속성이 두 대립하는 속성이므로, 각자 타자로부터 반발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규정성이 나오지만, 이 두 규정성은 이런 상호 반발을 통해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규정성은 서로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규정성이다.
“그러므로 개별자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인 한에서 부정적인 것이 자기와 직접 동일한 것이다. 개별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는 개별자는 추상이지만, 이 추상은 개념을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관념적 계기에 따라서 직접적 존재로 규정하는 추상이다. 그러므로 개별자는 질적인 일자이거나 이것[Dieses]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
“첫 번째로 이것[Dieses]는 이런 질에 따르자면 자기를 자신으로부터 반발하게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여러 가지 다른 일자가 정립된다. 두 번째로 이것[Dieses]은 이제 이 전제된 타자에 대립하여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그런 한 개별자는 배타적인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
4)
다른 하나의 반성은 규정성이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과 통일하면서 구체적인 개별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부정성의 자기 관계이면서 일반적 개념이 실현된 구체적인 일자가 되니 이것은 개별적인 것이더라도 질적인 개별성이 아니라, 이제 지시하는 대상으로서 반성적 개별자가 된다.
이런 통일은 하나의 개별자만이 아니라 다양한 동일한 개별자를 낳으니, 여러 가지 다른 일자가 출현한다.
“이것[Dieses]은 자기 내로 반성된 일자인 한에서는 독자적이고 반발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는 이런 반성 속에서 반발은 추상과 결합하여 반성하는 매개를 이룬다. 이 반성하는 매개는 이 개별적인 것에 존재하는 데 그 결과 이것[Dieses]은 정립된 직접성 즉 외적인 것에 의해 지시된 직접성이 된다. 이것[Dieses]은 존재하며 직접적이다. 그러나 이것[Dieses]은 지시되는 한에서만 이것[Dieses]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52)
여기서 ‘지시한다는 것[monstrieren]’의 의미를 헤겔은 반성적으로 규정한다. 즉 규정성이 통일되면서 더는 분석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므로, 이는 지시의 대상으로 된다는 것이다.
“지시란 반성하는 운동인데, 자기를 자기 내로 끌어모아서 직접성을 정립하지만, 이를 다만 자기에 외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운동이다.”(주관 논리학, GW12, 52)
특수성은 반성을 통해 이것[Dieses]이 되는데, 이때 나오는 이것[Dieses]은 이상에서 설명한 대로 두 가지 종류다. 하나는 ‘질적인 이것[Dieses]’이며 다른 하나는 ‘반성된 이것[Dieses]’ ‘지시되는 이것[Dieses]’이다. 전자는 질적인 규정성이며 후자는 개별적인 대상이다.
두 가지 개별자는 모두 특수성의 반성을 통해 동시에 나오는 것이므로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서로 관계한다. 이 두 이것[Dieses], 질적인 이것[Dieses]과 대상으로서 이것[Dieses]이 관계하면서 판단이 이루어진다. 판단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지는데, 처음 출발점에서 주어는 지시되는 대상으로서 개별자이고 술어는 질적인 규정성이다.
“나아가서 이 구별된 것은[술어와 주어, 질적인 이것[Dieses]과 반성적 이것[Dieses]] 단순히 서로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들이 아니다. 그런 다수성이라면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자기를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하는 이것[Dieses]은 자신을 외적으로 구별된 것으로 정립하지 않으며 개념적으로 구별된 것으로서 정립한다. 그러므로 개별자][주어]는 일반자[술어]를 자기에서 배제하지만, 이 일반자는 개별성 자신의 한 계기이므로 일반자는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이 개별성에 관계한다.” (주관 논리학, GW12, 52)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7-특수성으로서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7-특수성으로서 개념
1)
개념은 세 가지 계기를 갖는다. 앞에서 일반성이라는 계기는 무규정적 단순성 측면을 말한다고 했다. 반면, 특수성의 측면은 개념이 지닌 구별, 규정성의 측면을 말한다. 이런 특수성은 개념의 일반성을 토대로 하니, 그런 점에서 자기 속에 일반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하겠다.
개념은 일반성이므로 그 속에 여러 특수성이 출현한다. 이 특수성은 서로 구별되면서 이 특수성을 외연에서 집합하면 하나의 일반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특수성은 일반성을 실체로 삼는다. 이런 점에서 일반성과 특수성은 유와 종의 관계를 이룬다. 종의 완전성 즉 전체 집합은 유를 이룬다.
특수성은 외연적으로는 일반성의 한 부분이지만, 내포적으로는 일반성이 지닌 단순성 위에 자기의 구체적인 규정성을 지니니, 일반성보다 더 구체적이며 복잡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목재 책상’은 하나의 특수한 책상이다. 외연적으로는 일반적인 책상보다 작지만, 내포적으로는 ‘책상’의 규정 외에 ‘목재’라는 규정을 덧붙이니 더 구체적이다.
특수성의 집합이 일반성을 이루는 방식, 즉 특수성을 서로 구별하는 내적인 척도나 원리는 다양하다. 그것은 이 특수성이 개념이 운동하는 논리학의 어느 영역에서 출현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2)
규정성은 존재의 영역에서는 실재성이며, 하나의 실재는 자기의 한계에서 다른 실재와 접촉한다. 하나의 실재가 지닌 규정성은 하나의 실재에서 한계이지만, 마치 점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듯이 이 한계도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실재는 그 규정성의 한계에서 다른 실재로 이행한다. 하나의 실재가 지닌 규정성은 다른 실재가 지닌 규정성으로 이행하지만, 두 실재 자신은 단순히 접촉할 뿐, 서로 무차별하다.
반성의 영역에 이르면, 규정성은 서로 외면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미 규정성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이 일반성을 통해 본질이 출현한다. 여기서 개체적 규정성은 본질적 규정성에 자기를 비추며 거꾸로 개체의 규정성에는 이미 본질의 규정성이 비치고 있다.
이와 같은 반성 관계에서는 관계를 끌어내는 것은 규정성에 대해 외적인 반성이다. 반성이 아직 외적이므로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통일적인 관계도 규정성에 외면적이다. 전체와 부분, 원인과 결과 등은 반성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특수성이 지닌 이중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규정된 것은 본질이 비친 것이지만, 서로는 상이하며, 이런 규정성을 끌어모아 이룬 전체는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전체일 뿐, 그것은 필연적으로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떤 원리나 척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종을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으로 구별할 때, 그 구분은 외적인 상이성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이 이루는 전체 집합은 완전하지 않다. 예를 들어 홍인종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개념의 탈자태[Aussersichsein]’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유 속에는 두 가지 종보다 더 많은 것이 발견된다. 이 여러 종은 심지어 제시된 상호 관계를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자연은 무기력하게도 개념의 엄밀성을 고수하고 표현할 수도 없고 개념을 결여한 맹목적 다양성 속에 부대낄 수밖에 없다.”(주관 논리학, GW12, 39)
3)
개념의 영역에 이르면, 규정성은 개념이 스스로 규정한 것이 된다. 이미 개념의 영역에서 일반성을 설명할 때 그것이 규정성과 어떻게 관계하는지 보았다. 여기서는 개념의 특수성의 측면에서 규정성이 일반성과 어떻게 관계하는지 보자.
여기서 하나의 규정[P]은 다른 규정[-P]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립한다. 이런 대립하는 것은 완전한 전체를 이루며, 그것의 원리나 척도는 개념 자신이므로 이 대립하는 규정이 중첩하여 존재하는 것을 배제한다.
개념이 규정된 특수성은 규정성이지만, 그 규정성은 자기에 대립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 한, 타자를 통해 자기와 매개하면서 자기 관계하는 것 즉 일반성이다. 즉 개념의 특수성은 이미 내적으로 그것의 일반성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남자’는 ‘여자’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므로 이미 인간의 일반성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특수성은 개념의 한 계기이면서 동시에 이미 내적으로 일반성의 계기를 포함하는 총체성이다.
일반성과 특수성은 총체성으로서는 서로 통일되어 있다. 일반성은 규정성의 부정을 통해 출현하는 자기 관계이며, 부정성은 자기를 부정하는 타자에 대립하는 규정성이다. 그러므로 일반성은 이미 특수성을 배후에 포함하며 특수성은 일반성을 배후에 이미 포함한다.
“이 다른 규정성은 다만 주관적 견해로만 떠도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 다른 규정[일반성]은 직접 사라지면서 타자로서 자신[일반성]의 타자[즉 특수성을 말한다]이어야 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주관 논리학, GW12, 40)
그러나 일반성과 특수성은 개념의 계기로서는 서로 대립한다. 일반성은 자기 관계하는 측면이며 특수성은 규정성의 측면이다. 일반성에서 특수성은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지만, 아직 정립되지 않았으며, 특수성에서 일반성은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지만,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이런 계기로서 일반성과 특수성은 서로의 밖에 존재한다. 일반성은 “특수성 속에서 자기를 벗어난다. 왜냐하면, 개념은 그 특수성 속에서 탈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특수성은 일반성에 대해 “배타적으로 관계하거나, 자기의 부정성 즉 다른 규정성을 지양한다.”(주관 논리학, GW12, 40)
앞에서 개념의 일반성이 형식과 내용의 모순이라고 했다. 그 내용은 일반적인 것 전체이지만, 형식은 규정적인 것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특수성 역시 모순이다. 특수성의 내용은 규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형식은 자기의 타자에 대립하는 것, 이중 부정 다시 말해 자기 관계하는 일반성이기 때문이다.
4)
헤겔은 지성의 능력은 이런 개념의 특수성을 확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성에서 나온 것이 이런 특수성은 개념이 내포하는 전체가 자기를 분화한 구별된 규정성이므로 일반성에 비해서 보면, 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성에 의해 분화된 규정성은 존재의 영역에서나 본질의 영역에서 가지지 못하는 특성을 지닌다. 즉 지성은 내용상으로는 규정성을 분리하지만, 이 분리된 규정성은 일반성의 형식을 가지므로 이제 이 규정성은 영원하고 부동하고 불멸적인 것이라는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 때문에 철학은 이런 지성을 비난하고 다시 특수성을 떠나 일반성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반성은 직관에 주어진 무구별적인 전체에 머무른다. 이는 풍요하기는 하지만, 모호한 전체일 뿐이다.
그러나 헤겔은 지성이 규정성에 머무르는 것은 지성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 한다. 지성은 본래 직관에 주어진 무구별된 전체를 분리하여 이런 구별된 규정성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은 진정한 총체성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단계다.
구별된 것을 넘어서 다시 그것에 내재하고 있는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은 이성의 능력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별된 것에 머무른다면 지성의 잘못이 아니라 아직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니 그 책임은 오히려 이성의 무능력에 있다.
헤겔은 지성을 비난하면서 직관으로 되돌아가려는 낭만주의적인 철학은 다만 다시 잠속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정신현상학>에서 잠속에서 얻는 것은 다만 꿈일 뿐이라고 하면서 비판한다.
지성을 구체적인 전체를 벼려서 분화된 규정성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하면 이성은 그런 벼림의 정점에서 구별된 규정성을 해소하면서 다시 총체성으로 복귀하게 한다. 이 총체성은 더는 풍요하지만 모호한 감각적 총체성과 달리 명확하면서도 동시에 풍요한 총체성이다. 이런 개념의 명확하면서도 풍요한 총체성이 곧 개별성이다.
“지성은 사실 그런 규정성에 추상적인 일반성의 형식을 통해 소위 경직된 존재를 부여하는데 이 경직성은 질적인 것의 영역이나 반성의 영역에서는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성은 이런 단순화를 통해 동시에 그런 규정성에 정신을 부여하며 이를 날카롭게 벼리니, 이 규정성은 바로 다만 그와 같은 벼림의 정점에서 자기를 해소하고 자기에 대립하는 것으로 이행하는 능력을 획득한다. 어떤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이런 최고의 성숙한 단계는 어떤 것의 몰락이 시작하는 단계이다.”(주관 논리학, GW12, 42)
헤겔 논리학 개념운동6-개념의 일반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운동6-개념의 일반성
1)
개념의 세 가지 계기 가운데 첫 번째 계기는 일반성이다.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간 지성의 산물이며, 이 지성은 주로 개별적인 규정성을 제거하는 추상화의 작용을 수행한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추상적인 단순한 것이다.
이 추상의 산물은 자기 내에서 다른 세부적인 규정성을 지니지 않는 단순한 추상적인 것이며, 여러 개별자에 공통으로 속하는 것이므로 일반성이라 한다. 즉 내포적으로는 추상적이며 외연적으로는 일반적이다.
이 과정은 앞에서 말했듯이 개별성에서 일반성이 생성하는 과정이며 일반성은 개별성의 근거이므로 곧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즉 생성된 것이 오히려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무규정성으로서 일반성은 존재의 영역에서 본질의 영역을 거쳐 개념의 영역에 이르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2)
헤겔은 이렇게 추상적인 것으로서 일반성이 지니는 의미를 차례로 서술하는데, 우선 존재의 영역에서 그것은 우리가 가장 흔하게 일반성으로 보는 단순한 것 즉 무규정적인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 규정성이 제거된다는 점에서는 무규정적이지만, 제거되고 남은 고유한 규정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단순하다.
예를 들어 책상의 개념이라 하다면, ‘앉은 책상’, ‘사무용 책상’, ‘목재 책상’ 등이 있는데, 이런 개별성 ‘앉은’, ‘사무용’, ‘목재’라는 개별적 규정성을 제거하면 책상의 단순한 개념이 얻어진다. 이 책상은 여러 책상을 자기의 외연으로 갖는 일반적 개념이다.
이 일반적 개념이 지닌 이 고유한 규정성은 이런 개념에 이르는 과정에서 제거된 개별적인 규정성에 대립하며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예를 들어 책상은 반드시 앉는 것일 필요는 없고 사무용일 필요도 없고 목재일 필요도 없다.
존재론 영역에서 출현한 단순한 일반적 개념은 고유한 규정성을 지니고 자기 바깥에 제거된 규정성에 대립하므로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 단순한 일반성을 ‘특정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 ‘특정한 개념’은 앞으로 설명할 ‘특수성’, ‘특수한 개념’과 구별되어 사용된다.
3)
일반성은 본질의 영역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일반성은 개체에 내재하는 본질로서 일반성이다. 개체는 자기를 재생산하면서 자기를 지속하니, 이렇게 지속하는 것이 곧 본질이다.
이런 본질은 추상적인 무규정성을 더는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구체적인 규정성을 지닌 일반성이다. 그러나 이 구체성은 제한적이다. 본질의 규정성과 개체가 지닌 개별적 규정성은 서로 구별되지만, 양자는 서로 따로 떨어져서 있을 수는 없다. 양자는 각자 직접적이고 자립적이면서 서로 비춘다.
이런 비춤[scheinen]의 활동 속에서 본질과 개체는 서로 관계하지만, 동시에 양자는 서로 자립적이거나 직접적이고 여전히 외면적이다. 헤겔은 양자 사이의 이런 이중성을 본질의 반성하는 관계로 앞에서 서술하였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생명체의 종적 본질이 가장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4)
존재의 영역에서 특정한 개념, 본질의 영역에서 반영된 본질은 일반성이 출현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아직 개념론에서 다루는 일반성이 출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일반성이 부분적으로 한정된 방식으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개념론에 이르러 출현한 개념 즉 ‘개념’은 일반적인 것이더라도 규정성의 자기 부정을 매개로 해서 출현하는 일반성이다. 여기서 규정성은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과 모순 즉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 이 두 배타적인 규정성 전체는 일반성을 이룬다. 기호로 이를 표현하자면 ‘p or -p =X’라는 관계에 있다.
“개념 속에는 일반적인 것의 부정태를 이루는 규정은 전적으로 다만 정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며 또는 정립된 것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다만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주관 논리학, GW12, 34)
이런 개념의 일반성은 이중적인 반성 관계에 있다. 하나는 외부로 향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로 향한 반성이다. 전자는 규정성이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과의 관계이다. 즉 p는 -p가 아니다. 후자는 일반성과 규정성의 관계다. 여기서 X는 p로 분화하고 다시 자기로 복귀한다.
“규정성은 개념 속에 있는 것인 한에서는 총체적인 반성이며 이중적인 가상이니 한번은 외부를 향해 비췬 가상이며 즉 타자로의 반성이며 다른 한 번은 내부로 향해 비췬 가상 즉 자기 내 반성이다. 전자 즉 외적인 가상은 타자에 대립하는 구별을 이룬다. 일반자는 이에 따라서 특수성을 가지며 이 특수성은 더 고차적인 일반자 속에서 해소된다.”(주관 논리학, GW12, 35)
그러므로 이 일반성에서 규정성은 더는 외면적이지 않으며, 일반성 자체가 자기를 규정하는 규정성이 된다. “실체 자체에 대해 우연적이었던 것이 여기서는 개념이 자기 자신과 고유하게 매개하여 나온 것이며 개념에 고유하며 내재적인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34-35)
규정성이 일반성에 대해 이런 관계에 있으면, 일반성으로서 개념은 이제 ‘구체적인 것의 영혼’이며 “일반자는 그런 구체적인 것에 내재하고, 그런 구체적인 것 속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그 다양성과 상이성 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된다.”(주관 논리학, GW12, 34)
5)
개념의 영역에서 일반자는 자기를 분화하여 자기를 산출하는 가운데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개념의 일반성은 “자유로운 위력”이다. 왜냐하면, 일반자가 규정성에 관계할 때 그것은 자기에 외적인 것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규정한 것 즉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반자는 “자기의 타자를 장악하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니 오히려 이런 타자는 그런 일반자 속에 고요하게 머무르며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다. 이런 일반자가 자유로운 위력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자는 또한 자유로운 사랑이며 한계 없는 축복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주관 논리학, GW12, 35)
이런 일반성이 ‘절대적 개념’, ‘창조적 위력’으로서 파악되는 일반자이다. 여기서 “정립된 것은 무한한, 투명한 실재성이니, 개념은 그런 실재성 속에서 자신이 창조한 것 즉 자기 자신을 직관한다.”(주관 논리학, GW12, 36) 즉 그것은 “자기 내에서 구별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주관 논리학, GW12, 36)이다.
일반성에 대해 규정성은 내재적이므로 일반성은 단순 일반성에 그치지 않고 규정성을 이미 포함하는 전체 즉 총체성이다. 일반성은 개념의 한 계기이며 개념의 모든 계기의 총체성 즉 전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일반자는 개념의 총체성이며 구체적인 것이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개념을 통해 규정된 내용을 갖는다.”(주관 논리학, GW12, 35)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5-개념이란 무엇인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5-개념이란 무엇인가?
1)
논리학 3부 개념론 1편 주관성은 흔히 ‘논리학’이란 이름으로 내려온 내용을 다룬다. 헤겔은 이 부분을 1장 개념, 2장 판단, 3장 추론으로 구성하는데, 이 가운데 개념에 관해서는 전통적으로는 논리학에서 다루기보다, 인식론이나 존재론에서 다루어 왔다.
존재론에서는 개념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다만 이름뿐인 것인 그리고 마음의 재현인지, 대상적인 실체인지 하는 문제가 다루어져 왔으며 인식론에서는 개념이 경험적으로 주어지는지 타고난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가 다루어졌다.
반면, 논리학에서는 개념에 관해 다만, 개념이 판단과 추론에 사용되기 위해서는 모호하거나 불명확해서는 안 된다는 요청이나 어떤 조건 아래서 개념이 분명하고 명확하게 되는지, 정도만 다루어질 뿐이다.
헤겔은 1장 B절 특수성 끝에 달린 주석에서 전통적으로 논리학에서 다룬 개념의 성격 즉 분명함[klart]과 명확함[deutlich], 적합함[adaequat]의 조건이나, 단순 개념과 복합 개념, 반대 개념과 모순 개념, 종속 개념과 상응 개념을 구별하는 방식 등을 다루지만, 지나가는 투로 다룰 뿐이며 개념에 관한 헤겔의 논의 전체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이 주석에서도 개념에 관해 전통적으로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문제 즉 개념이 어떤 존재인지에 관해서는 전혀 논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헤겔이 이 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이 문제를 다시 논하지 않는 것은 이 문제가 이미 논리학의 앞부분에서 개념의 생성을 통해 다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
헤겔이 개념을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논리학의 개념론 즉 주관 논리학의 한계 내에서인데, 그렇다면 개념론에서 개념은 어떤 논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일까? 개념에 관한 헤겔의 논의는 두 가지 점을 전제로 한다.
우선, 개념은 이미 개별자에 내재하는 것이다. 이 내재하는 개념은 존재론과 본질론을 거쳐 생성하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자기를 드러내니, 이렇게 자기를 실현한 개념이 개념론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이다.
존재론에서 사물의 고유한 일반성[형상]이 다루어지고 본질론에서는 생명체의 종이 다루어졌다. 이제 개념론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실체 즉 주체가 ‘개념’으로 규정되면서 논의의 주제를 이룬다. 이 ‘개념’에 속하는 대표적인 예가 곧 인간의 선험적 통각, 자기의식이다.
이런 ‘개념’을 다룰 때, 헤겔은 ‘개념’에 이르기까지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이 발전하는 과정을 다시 한번 서술한다. 여기서는 이 범주들이 ‘개념’을 이루는 계기로서 이미 이 ‘개념’에 지반을 두고 마침내 그 ‘개념’을 드러내는 과정으로서 다루어진다. 그 때문에 앞의 존재론과 본질론의 내용이 이 판단론에서 압축해서(그러나 개념적인 방식으로 서술되어) 다시 언급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개념’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논리적 범주는 이 장에서는 그저 개념으로 지칭된다. 헤겔은 1장 개념에서는 지금까지 논리적 범주 즉 개념이 지닌 일반적 의미를 다룬다. 모든 개념이 지닌 일반적 의미는 곧 마지막 범주인 ‘개념’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니, ‘개념’의 본성은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의 일반적 의미가 된다.
3)
1편 주관성 장의 1장 개념 장에서 다루는 것은 이런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의 일반적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개념’의 본성이기도 한데, 1장에서는 이 개념의 일반적 의미를 추상적으로 다룬다.
즉 여기서 개념을 이루는 계기는 아직 경험적 실재성을 지니지 않고 개념 속에 머무르는 내적 계기로서 다루어진다. 개념의 계기가 경험적 실재성을 지니게 되면, 개념의 계기는 판단을 형성한다. 이는 2장 판단론의 주제가 된다.
헤겔이 개념의 일반적 의미를 다루면서 우선 개념을 표상과 상징 또는 기호와 구별했다는 것은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표상은 아직 일반적인 개념이 되기 이전에 경험에 직접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직접적인 감각은 기억을 통해 내면화하면서 관념화하니, 직접 주어진 구체적 관념이 곧 표상이다. 기억이 이미 일반화, 추상의 과정이므로 이 표상적 관념도 이미 개념화가 시작된 것이지만, 아직 그 정도가 미약할 뿐이다.
논리학에서 개념은 근본 조건이 분명하고 명확하며 적합한 것이어야 하니, 표상은 아직 그런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헤겔은 논리학에서 그런 표상을 통해 사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추상적인 개념을 눈앞에 드러내는 구체적인 개념이 곧 상징이다. 상징은 하나의 기호[Zeichen]이다*. 상징이나 기호는 자기가 지닌 의미와 다른 것을 지시하는 것 즉 알레고리이니, 논리학에서는 이런 상징이나 기호의 사용은 판단과 추론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 헤겔은 <미학 강의>에서 이런 기호를 상징 외에 현상이나 가상을 포괄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쓰지만, 여기서는 상징과 기호가 같은 의미다.
헤겔은 주석에서 흔히 상징은 개념을 예감하게 하고 개념의 여운이 된다고 하지만, 개념이 상징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상징이 개념을 통해 이해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징을 둘러싸고 있는 감각적인 것이 제거되어야 한다.
4)
개념에서 헤겔은 이 개념을 주로 개념을 이루는 세 가지 계기의 측면에서 논의한다. 이 개념의 세 가지 계기란 곧 일반성과 특수성, 개별성이다. 헤겔이 개념을 왜 이 세 가지 계기로 나누었는지가 의문스럽다. 이 세 가지 개념의 연원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이 세 가지 개념 계기의 연원은 앞에서 실체의 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개념’의 관계는 그 이전 실체의 관계가 생성하여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다. 이 실체의 관계는 곧 절대자, 속성, 양상의 관계이다. 실체에서 절대자가 속성이 되고, 속성이 다시 양상으로 되면서 절대자로 복귀하는 운동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일어난다. 즉 자기도 모르는 낯선 힘에 의해 부정되고 다시 부정되는 가운데 이런 절대자의 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실체의 운동에서 낯선 외부의 힘이라고 여겼던 이 운동은 ‘개념’에 이르게 되면 주체가 자기를 실현하는 내재적 운동이 된다. 바로 이 내재적 운동이 개념을 통한 추론의 운동이며 이 추론의 운동을 이루는 고리가 곧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인 것이다. 여기서 일반성은 절대자에 상응하고, 특수성은 속성에 상응하며, 개별성은 양상에 상응한다.
그런데도 왜 헤겔이 절대자니, 속성이니, 양상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것은 헤겔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서 핵심적인 것인데, 사실 기존의 철학 전통에서 이런 방식으로 개념을 다루는 경우는 없었다.
이 세 가지 개념의 계기와 가장 가까운 논의를 전통 논리학에서 찾아본다면, 곧 추론을 이루는 세 개념일 것이다. 추론을 대표하는 삼단논법은 대전제, 소전제,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대전제의 술어를 대개념이라 하고 대전제의 주어이면서 동시에 소전제의 술어가 되는 것을 매개념이라 한다. 그리고 소전제의 주어를 소개념이라 한다. 결론은 소개념과 대개념으로 이루어진다.
개념의 세 가지 계기가 추론을 구성하는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면, 헤겔이 개념의 계기를 다룰 때 헤겔은 이미 개념을 판단과 추론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개념을 고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념과의 연관 속에서 규정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존재론에서 하나의 개념(논리적 범주)은 타자와 이행하는 관계 속에서 파악되며 본질론에서는 개념(논리적 범주)은 본질과 개체의 반영하는 관계 속에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런 관계의 밑바닥에는 개념의 일반적 관계 즉 개념의 세 가지 계기가 지닌 관계 즉 개념의 관계가 있다. 개념론에 이르러 이런 개념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의 주제가 된 것이다.
5)
그런데 개념의 세 가지 계기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전통적으로 대개념, 매개념, 소개념을 다루는 방식과 구별된다. 전통적으로는 이 관계는 외연의 크기에 따라서 구분된다. 외연의 크기에서 대개념은 매개념을 포함하고 매개념은 소개념을 포함한다. 이런 포함관계가 추론의 정당성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헤겔의 세 가지 개념 계기는 한편으로 외연적 크기의 구별을 포함하지만, 이것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또 다른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곧 질적 규정성의 차이이다. 질적 규정성은 단순하고 추상적이기도 하고 구체적이고 복합적이기도 하다. 그것에 따라서 추상적인 개념과 구체적인 개념이 구별된다. 이 단순한 추상적인 것을 헤겔은 개별적이라고도 하며, 복합적인 구체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이라고도 한다.
헤겔에서 개념의 계기는 이런 두 가치 측면에서 이중적으로 규정된다. 즉 내포적인 측면과 외연적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측면은 서로 교차하면서 외연적 일반성이 내포적 개별성을 지니기도 하고 내포적 일반성이 외연적 개별성을 지니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개념은 한 측면에서 일반적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개별적이기도 하다.
그 결과 개념의 계기는 마치 삼위일체를 다루는 것과 같다. 삼위일체가 성부와 성자, 성령이 각자 총체성이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개념의 세 가지 계기는 각자가 총체성이며 동시에 전체를 이루는 한 계기가 된다.
“정립된 것이 개념 속에서는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하니, 개념의 계기 각각은 특정한 개념이며 개념의 한 규정성이자 그에 못지않게 전적인 개념이다.”(주관 논리학, GW12, 32)
시대: 용어와 항목 [천 하룻밤 이야기]
시대: 용어와 항목
2026, 09 23 처서(處暑)
시대가 인물을 낳고, 용어를 창안한다.
공자는 열락(悅樂), 소크라테스의 이뭣꼬,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논리학), 플로티누스의 일자(빛), 데카르트의 방법(분석학),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미적분), 루소는 자연, 꽁트는 실증, 칸트는 비판, 헤겔은 절대, 프왕까레는 협약, 레비브륄은 심성, 벩송은 기억, 푸꼬는 광기, 들뢰즈는 다양체 등등을 시대마다 중요 문제거리로 다루었다. 그럼에도 19세기 후반 인류학, 사회심리학, 생물학, 수학사 등에서 “이뭣꼬”의 중심은 인간이 삶의 터전에서 공통으로 사용한 용어의 근원 또는 기원인 수(1)의 발생을 다시 탐문하기 시작했다. 퓌타고라스가 다시 불려 나왔다.
*
단위 설정에 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옛날부터 알려져 왔다. 그럼에도 그 수가 개별적 사물의 대상에서 나왔는지, 또는 사유의 대상을 일반화하는 추론에서 나왔는지는 19세기 말까지도 문제 거리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수, 개별 대상, 일반 항목 등으로 구별하려고 할 때, 추론하는 지성은 단위 설정에서 논리가 먼저라고 한다. 그 단위 설정에는 동일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며, 그로부터 차이로서 단위와 단위가 아닌 것을 구별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단위와 동일한 단위들을 나열하고 구별하면서 둘(2)이라고 한다.
대상화된 항목의 경우에, A라는 단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통해서 구분한다고 할 때, 한 항목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이 나온다고 한다. 존재와 무. 그리고 두 항목, 즉 이런 추론을 따르면, 두 항목이 있을 때 그 항들의 분류에는 A, (AB), B 그리고 여분으로 φ(여집합, 무)가 있다. 항목들이 셋일 경우에 7개의 개별 항목과 φ를 보태어 여덟이라 하고, 항목들이 넷일 경우(x 4승과 유사함)에 15 개별 항목들과 φ를 보태어 열여덟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의 수는 벤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현상적, 표상적, 실재적인 논의에서는 세 항목일 경우 또는 3차원을 실재적 영역이라 한다. 그러나 x 4승은 방정식으로 풀 수 있으나, x 5승은 페르마 이래로 해답을 풀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2항을 대상화하는 논의에서 연속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가우스의 종(鐘) 모양의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으며, 벤다이어그램 도식에 의미를 부여하여 A는 가치 B를 잉여라고 유비적 사유를 할 수 있으며, 이런 방식을 논리적 구별로서 정치경제학적으로 보려고 하면 A쪽은 인민, B쪽은 자본가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도덕론적으로 A는 가치이며, B를 공중에 떠 있는 주사위 놀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배후학’적 사유에서 A와 B는 둘 다 서로 다른 연원을 지닌 시뮬라크르들이고 AB는 혼합의 종류에 따라 잡다한 현상들의 일부분이다. 이런 시뮬라크르의 논의를 중세 신학의 평결론에 비추어보면, B는 신의 절대 의지를 따르고 A는 경험을 통한 과학적 인식으로 자연의 발생을 따른다고 한다. 이를 근대의 이원론에 비추어보면 B는 혼(의식)의 활동이고 A는 몸(신체)의 운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AB를 함께하는 생명체들의 잡다성이 지닌 차이 나는 성질들(양이 아니라)을 드러낼 때, 특히 인간의 경우 B에서는 신성이 드러나고 A에서는 동물성이 드러나는 것으로 착각했다. 한 번 더 내려가서 고대에는 B에 하늘의 원리를 대입하고 A에 자연의 생산을 대입시키고서, AB에 해당하는 것을 인간의 의식 활동이라고 보았다. 이런 의식은 뚜껑 있는 하늘과 움직이지 않는 땅의 중간(또는 연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추론하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단위 항목의 독립성이 하나이든 둘이든 셋이든 각각이 주어진다고 하는 생각은 인간에게 있어서 태생적 또는 선천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항목들도 19세기 후반 이래로 오랜 삶의 과정에서 무매개적으로 합의 또는 협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항목들의 단위가 자연수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수들도 있고, 즉 무리수, 원주율, 허수, 복소수 등과 같이 자연수로 설명할 수 없는 수들을 무한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이원성의 구조를 인정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무한(무한계)을 무 또는 무처럼 취급하였고, 중세의 종교에서는 잘 모르는 것을 어둠이나 악으로 취급하였으며, 과도하게 악마 사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성립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여집합의 부분은 요소(현존은 아니라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항목으로서의 현존 지위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항목들과 단위들이 언어에서 표기와 입말로서 용어 또는 단어로 쓰일 때, 그것들에 당연히 어떠한 구조와 지위가 있다고 상상하였고, 또 심지어는 현존이니 실재니 말하기도 한다. 후기 중세 이래로 용어와 단어는 입말에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입말 또는 문자화가 인간들 사이에서 소통되고 전승되며, 그리고 삶에서 감화와 감동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 단위들 자체의 성격과 특성이 있기 때문일까, 또는 그보다 먼저 상호 공존의 심성에서 나온 공감과 공동의식의 협약이 있기 때문일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항목 또는 용어의 사용에 나타난 보편성, 일반성, 개별성, 특이성의 분류는 구조적인데, 이는 생성과 발산의 과정이 특이성으로부터 개별성, 일반성, 보편성으로 진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인다. 1900년 유전법칙이 재발견 되면서, 생성과 발산의 사유는 사물과 대상의 원리와 법칙(인과)을 우선하지 않게 되었고, 사유의 방향은 기원과 근원을 새롭게 탐색하면서 과거의 사고방식을 전도하거나 전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이를 백 년 가까이 지체시켰다. 이후 차이를 발생시킨 사유의 방식들을 다시 검토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
고대 그리스 철학이 신들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다룬다고 하면서, 신화를 벗어나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오니아의 사유와 엘레아의 사고가 대비되고, 아테네가 지중해의 맹주가 되면서 인간이 주제로 부상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라는 일반성과 소크라테스라는 개별성을 구별했던 것 같다. 그런 용어의 정의에 주목했던 제자들은 메가라 학파이겠지만,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플라톤은 용어 또는 항목에 대해 여러 방향으로 문제 제기하였다. 여러 측면으로, 즉 인식론과 존재론, 발생론 대 우주론, 폴리스 안에서 실천론 대 도덕론 등에서도, 마치 학문을 정초하기 위한 단위 설정처럼 용어의 정의(定義)는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는 언어상 용어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논의하고 규정하려 하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대상의 항목으로서 한계(페라스)와 비한계(아페이론)에 관심을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플라톤이 말한 크기라는 단어의 이중성을 고민해 왔다. 대상을 양으로 다루거나 질로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수(산술)와 소리(음악)에서 차이가 드러나는 것만큼 전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으로서, 양의 차이보다 질의 차이에 주목했던 것 같다.
플라톤은 차이들을 규정(또는 정의)하려는 노력 속에 혼과 소리와 같은 질적 차이에 더 관심이 많았고, 후대에도 그 주석자들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일반 용어보다, 소크라테스, 파르메니데스, 고르기아스 등 인물을 중심에 두어, 책의 제목들도 인격적 대상으로부터 조성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는 나라(폴리스) 안에서 인간들 각각이 무엇을 배우고 행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있었기에 <폴리테이아>를 썼을 테고, 인간이 세계 또는 자연에서 나왔기에 그 세계를 이루고 있는 구성(수의 방식)과 조성(운동의 방식) 방식이라는 이중적 관심을 풀어 <티마이오스>를 썼을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이 인간, 나라(터전), 세계(우주)라는 세 차원을 다루었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는 개인의 항에서 일반항으로 그리고 전체 항으로 확대하면서 사유를 넓혀 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승의 삶에서 실천과 그에 따른 독특한 사유를 잊을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실천과 사유에서 ‘훌륭타’와 ‘장하다’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인간은 폴리스 안에서 개별화되고, 세계 안에서 종별화 됨을 규명해 보려 했을까? 다시 말해 폴리스 안에서 개인들이 각각 역할과 성격이 있다면, 유비적으로 세계 안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차원에서 나아가 다른 동물(생명, 자연)과 차이를 통해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탐구하지 않았을까? 나는 플라톤이 두 번의 이집트 여행에서 당대의 수학과 천문학을 통해서 동심원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빌려왔다고 추측한다. 플라톤에서 보면, ‘이뭣꼬’에서 ‘인간’이란 대상 또는 용어를 언어로 규정하면서 양보다 질적으로 규정(정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간 개인의 단위에서 보면, 한 개인은 다른 어떤 이에게도 환원되지 않는, 즉 특이자가 아닐까? 그 질적 차원이 혼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이뭣꼬를 크기로 구별한다고 말했지만, 인간이 훌륭타 또는 장하다라는 말은 보다 더 현명하고 보다 더 잘 실천(운동)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 운동하는 질적인 요소(혼)들의 공통성은 뭣일까? 이는 후대의 철학자들이 삶의 터전에서 “조화의 정의”일 것이다. 이에 대해 수학과 원자에서 찾기보다, 천문과 음악에서 찾으려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두 부류를 공유하는 일반화의 틀은 기하학의 원 또는 공의 포섭 또는 포함 방식에서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늘(운동)의 조화가 삶의 터전에 대해 연대적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폴리스에서 사람들 사이의 조화에서도 언어보다 음률에서 보았을 것 같다.
*
이에 비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또는 왕국에서 인간의 실질적 삶이 주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터전에서 사람들과 타인들 그리고 사물들을 규정하면서, 왕국의 제도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 보았을 것 같다. 논리학에서는 언어의 항목들이 규정되어야 추론이 가능하고, 그리고 추론에 따라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하므로, 삶의 터전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한 삶이라 보았을 것이다. 또 이런 추론의 진위(眞僞) 구별을 통해 인간의 실천에서 바르고 틀림을 구별함으로써, 개인의 지식과 실천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요즘 표현으로 비유하면 사람들을 배치하고 배열하여 잘 실행되는 제도에서 잘 사는 것 또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을 보았을 것이다.
플라톤은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동물이나 사물들에서 류적인 것과 종적인 것을 구별하듯이 구별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현명한 자(지식인)과 그렇지 못한자(무식자) 사이의 차이도 추론(로고스)을 잘하는 이와 잘못하는 이를 구별하듯이, 삼단논법을 잘 이용하는 자와 오류를 범하는 자를 구별하고, 또 사물을 류와 종의 영역으로 구별하는 것처럼 지식(지혜)을 갖는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하였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을 구별할 때 류적인 항목(상위)과 종적인 항목(하위)을 구별한다. 그럼에도 식물의 예에서는 이런 류적과 종적 구별을 확대하여 류적 구별에는 완전체의 목적을, 종적 미완성에는 질료라는 차원을 보태어, 자연 체계를 탐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도 이런 네 단위로서 구별할 수 있을까?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유를 이용하여 신학에서는 비유적으로 인간에게 완전체인 신과 같은 완전하고 절대적 추론을 하는 능력이 있다고 상정하고, 그리고 생명도 없이 이리저리 힘을 받는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물체나 물질을 상정하여, 이중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 그는 추론을 확장하여, 자연계에서 물체들의 성질상, 하부에 무기물, 그 위에 식물, 그 위에 동물 그리고 추론하는 인간으로 네 단계로 구별할 것이다. 이런 것도 플라톤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선분의 비유와 닮았다. 그럼에도 그는 네 부분에 각각에 속하는 성질은 양으로 측정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도움 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 고정된 자리를 가지면서도 상향하여 움직이는 것,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생각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며 발명과 창작을 하는 인간이 있다.
플라톤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이든, 동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네 항목 또는 네 단락(계층) 등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려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중국에도 마찬가지로 사상(四象)이 있고, 불교의 염처경에서는 삶의 과정에 4단위가 있다. 그리고 구(舊)천문학에서 19년 주기를 따라 어린시절, 청년, 장년, 노년도 네 가지 구분을 한 것도 앞의 사례처럼 유비적으로 닮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구별은 인간이 오랜 삶의 과정에서, 또는 심성의 합에 의해 만들어진 지혜의 산물일 것이다, 19세기 말 인종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직관을 수용하면서, 생명의 과정과 오래 전승에 의한 심성을 우선으로 두고, 그 위에 감성, 인성, 지성(이성) 넷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
언어적 측면에서 사유의 대상이든 현실의 대상이든, 시대마다 각 학자들은 자신들의 용어를 창안했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플로티노스의 일자 등은 고유한 명칭이었지만 일반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학자에게 맞는 고유한 의미를 지닌 명사(용어)를 어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유명하고 또 작품이 많은 경우에 그 학자의 어휘(용어)를 그에 맞게 읽어야 한다고 하면서 따로 정리하기도 한다. 게다가 철학의 용어, 수학의 용어(어휘), 물리학의 용어, 사회학의 용어, 정치경제학의 용어 등에서 용어 이상으로 방법적 사용을 달리 구별한다. 그럼에도 학문들 사이 또는 학자들 사이에는 공통의 용어가 있다.
그럼에도 소중한 것은 백성이 심성이 서로 통하여 공유하는 공화성, 즉 공통성과 공공성의 언어이다. 심성의 공유성에 따른 입말은 삶의 터전에 따라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얼과 혼은 감동과 감화에 따라 나라 전체에서 공통성(일반성)과 공화성(추상성을 포함하는 일반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인(仁)이란 용어가 그러하고, 우리나라에서 ‘장하다’ 또는 ‘훌륭타’라는 입말이 그러하며, 소크라테스외 플라톤에서도 중요시되었던 아가톤(Ἀγάθων, 착하다 훌륭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양에서 공동체의 언어로 작용하여 쓰이는 단어들은, 문법적으로 명사 동사 형용사 등으로 나뉘는데. 거기에 더하여 전치사, 부사, 지시사, 관계사 등을 부가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 입말에서는 흥미롭게도 명사(실사)의 용도를 알리는 조사(은, 을, 에게)도 있다. 이처럼 문법학에서는 공공성(일반성)을 넘어서 더 세부적으로 분류하여 깊이 다룰 수 있다.
우리는 실사 중에서도 명사와 대명사에 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사람과 소크라테스는 명사와 대명사를 문법적으로 구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생물과 소(말)는 류와 종의 관계인데, 사람(인간)과 소크라테스는 류와 종의 관계와는 다르다. 이런 분류의 방식에는 층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거꾸로 되돌아가, 플라톤은 특히 사물에 관해서 층위가 아니라 발생(생성)을 분류하면서 이름(명칭)을 다르게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사회 안에서 소통하면서 류와 종 사이의 차이에 의해 용어가 설정(정의)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합의의 인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아동 교육에서 지식의 기초를 가르치고 전수하기 위해 체계화되었고, 문법학, 논리학, 수사학으로 구별했던 중세의 3학(trivium)과 같은 고착적 전수 방식이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글자 쓰기와 문장 만들기가 중요하다. 그 문장에서 일반성(공공성)의 용어는 대상과 단어 사이의 일치로서 고정되어 쓰이는 것이 편리하다. 마치 류와 종의 구별이 있듯이 사회에서도 상층과 심층의 구별이 은연중에 자리매김하는가? 학문과 교육이 계층을 구별하기 위해 제도화한 것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터전에서 성내(城內)와 성 밖이 다르듯이, 언어의 체계 속에서 쓰고 사유하는 자들과 사물을 대하면서 생산하고 제작하는 자들 사이에서 한 용어가 (사물에 대해) 지시하는 내용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문법과 제도의 일치를 편리하게 받아들이는 제도(행정, 사법, 통치)에서는 사물을 알기보다 언어 체계를 아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일상에서 사물들에 대한 용어는 생물에서 류와 종을 구별하듯 사용되지 않으며, 공동체의 삶에서 일반과 개별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편리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제도 속에서 일의 순서(선후先後, 중경重輕)에 따라 실행하는 경우에, 선중과 후경의 차이에서 상층과 심층의 차이가 눈에 띄게 드러난다. 예컨대 귀족과 평민, 성직자와 신앙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들 사이에 있는 사회 질서가 명령과 수행 정도만이 아니며, 다른 방식으로 자연의 질서가 있다는 것도, 자연의 백성들은 잘 안다.
류와 종, 일반과 개별로서 구별은 공동체의 활동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제도 안에서 계층의 차이는 상층의 원리, 지배와 심층의 수동과 저항(플라톤의 필연성)이 대립하는 양면성을 드러낸다. 이것은 결국 두 가지를 네 가지로 구별하여 사유하는 방식이 이미 은연중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류의 원리로서 상위류(上位類)를 설정하듯이, 추론으로서 심층의 하위종(下位種)을 설정할 것이다. 제도상으로 또는 추론상으로 상위 류를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사유에 대입하면서, 제도의 고착성을 유지하기 위한 체계와 논리를 전개할 수 있으리라. 이에 더하여 최상위의 선(善)에 반하는 심층의 최하위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쩌면 플로티노스의 빛이 멀어져 간 마지막 순간을 어둠으로 여겨, 암흑 또는 잘못(le mal)으로 추론할 수 있었으리라. 자연 발생에서 가지치기 분류가 아닌, 사유의 추론에 의한 위계질서는 질서와 지배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런 측면을 언어상으로 보편자과 개별자로 나누었을 것이다.
중세 초기에 그리스 학문에 대해 깊이 다루지 못했던, 중세 사유의 일반화는 포르피리오스(232?-305?)의 저서 <입문(이사고게)>에서 다룬 류(genre, genos), 종(l’espèce, eidos), 종차(la différence, diaphora), 고유어(le propre, idion), 우연(l’accident, συμβεβηκός), 이 다섯 가지 용어에서 문제 거리가 출발한다. 종의 상위 용어인 류는 현실적 대상이라기보다 추론상으로 상위 용어인 셈이다. 상위 용어가 하위인 종들을 덩어리, 무리, 모임, 집합 등을 추론을 통하여 (쁘왕까레 표현으로 협약으로서, 요즘 표현으로 잠정적 경계를 지어 합의로서) 일반화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포르피리우스의 나무 판화 (알렉산더 브룬츠비크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논고(Tractatus in Aristotelis logicam)'(1748) 수록, 부다페스트 헝가리 프란치스코회 도서관 소장)
용어의 일반화(보편화)가 현실적으로 실재하느냐는 문제가 그리스 원전을 좀 더 깊이 읽는 시절인 11세기 말, 12세기 초였다. 로스켈리누스(1050경-1121)는 물체와 사유를 구별하고, 사유에서는 소리와 기호화를 구별하였다. 파리 성 빅트와르 수도원 창시자인 기욤 드 샹뽀(1070-1121)는 류가 상위로서, 사물 속에서는 보편성으로, 종에서는 무차별적 보편성이라 하여 보편성의 이중성을 드러냈고, 아벨라르(1079-1142)는 상위가 신 속에서는 보편자(나무 관념)이고, 사유 속에서는 인간에게서의 보편자(나무 기호화)라고 하면서, 이 두 보편자 사이에 있는 개별적 사물의 보편자(참나무, 소나무, 잣나무)를 구별했다. 보편자의 양의성(이중성)에서 물질에 속하는 보편자는 밀려나고, 결국 추상의 극한에 있는 보편자와 일반화된 사유 속에 기호화된 개별자 속에 있는 보편자가 남는다. 개념화는 인간 지성의 사유에 속하고, 추상화의 보편자는 신의 인식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이는 20세기 초 수학의 논리주의에서 집합의 용어와 집합 속에 요소들(원자 단어)을 구별하면서 다시 전개될 것이고, 언어에서는 소쉬르가 기표과 기의는 실재성과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류적 보편자에 대해, 안셀무스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은 사물처럼 실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로스켈리누스와 샹뽀가 보편자가 지성 속의 기호화와 연관이 있다고 하면서 보편자는 사물로부터 추상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았다(post rem). 학문의 분류와 교육에서 소통을 위한 보편자라는 용어는 다의성의 문제가 제기되어, 도미니크학파의 아퀴나스 후배들은 보편자가 사물의 내부에서 형상과 더불어 발현한다고 하여, 보편자에게 사물의 현존성을 부여하였다(in re). 이에 대해 프란체스코학파에서는 류가 상위이듯이 보편자는 개별자의 상위 추론의 용어로 사용된 이름일 뿐이고, 그런 보편자는 사물들이 있기 전에 이데아처럼 먼저 상정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현존과 연관이 없다고 한다(ante rem). 이어서 둔스 스코투스(1266-1308)은 여기 지금 현존하는 것은 소크라테스라는 개인이며, 류와 종의 분류보다 세분화한 개인을, 특이자를 강조하였다. 즉 현존하는 것들은 개별자들, 또는 특이자들이다. 보편자는 이름일 뿐이고 추상화된 기호일 뿐이다.
이런 논의는 천국, 신이 현존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넘어서 그 실재성을 부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보편논쟁에서 프란체스코파의 논의 방식은 오캄 이후로 사라진다. 내가 읽은 바로는, 프란체스코파는 프란체스코 사후에 내부에서 좌파(걸승파, 평등파)와 우파(제도파, 학문파) 사이에 싸움이 있었고, 마침 이를 중재한다는 의미에서 교황청 교리성에서 우파와 결탁하여 좌파를 마남사냥하였다. 그러나 같은 뿌리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반성한 프란체스코 우파는 좌파를 종교재판하기를 포기하였고, 이런 종교재판의 권한을 도미니크파에게 넘겼다. 이 도미니크파는 프란체스코 좌파든 우파든, 게다가 신의 ‘존재’를 ‘현존’으로 바꾸어 생각하거나 교리와 조직에 저항하는 프란체스코파와 다른 파들도 이단으로 몰았는데, 사적재산의 소유권을 차지하는 데도 종교재판을 이용했다. 그래도 성자 프란체스코의 평등, 인류애가 남아서 지금도 그들 파의 수도자들이 사적 소유물(먹거리 잠자리 정도 이외)이 없다고 한다. 프란체스코파들은 도미니크파가 교황청이 재산을 소유하고 있듯이 사적 소유를 인정하였고, 소유권 유지를 위해 제국주의 전쟁(1차대전과 2차대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였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도미니크파는 전쟁을 막지 않고 항상 중재한다고 하는데, 이단들을 제거하는 호교론자들의 시대 이래로 교단이 (사적)이익이 되는 쪽으로 편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덧붙여 맑스주의자들도, 바울 이래로 재산증식(잉여착취)에 동의하여 종교의 조직화가 로마의 참주제(황제정)을 모방하며 따라갔다고 비판한다. 불교에서는 탐진치에 빠진 자들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챙긴다고, 이들을 마구니들이라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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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재판의 마남사냥은 점점 심해졌다. 스페인에 있었던 브루노는 도미니크파이다. 그는 무한이 보편, 완전, 제1 원인처럼 인간이 알 수 없고 신만이 아는 용어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실재로 망원경을 통해 하늘 뚜껑을 넘어서 우주(자연)의 무한(경계 없음)을 보았다. 교황청은 그를 잡아다가, 같은 파이기에 죽이지 않고, 로마에 데려와 학설을 스스로 폐기하도록 10년간을 설득했다. 브루노는 굴복하지 않았고, 그들은 그를 1600년에 바티칸 광장에서 산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사이비 신앙자들이 스스로 유일한 순교자를 세웠다.
용어, 항목 등에서 인간 지성은 대상을 다루면서 정의하고 한계 지었고, 이런 개념들을 사용해서 학문의 여러 길을 열었다. 근대에는 인간이 오성(지성 또는 이성)의 추론을 통해, 무한, 완전, 절대, 보편 등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현존한다’고 하듯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무한을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 또는 증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천국, 부활, 천사, 절대를 비판하는 것도 무위로 끝날 수 있었다. ‘이뭣꼬’의 주제가 인간에게서 사유의 대상인 없음(0)과 있음(∞)인지, 없음과 존재 단위(통일성)로서 1(하나)인지 등이 근현대 170여년 동안 주제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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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에게 모든 터전(지역)에서 통용되는 보편이 있는가? 근대성에서는 있다고 하고, 그것이 태생으로부터 또는 선천적으로 또는 삶의 터전에서 조건지워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보편이 있다(현존한다)라고 생각한다. 이 보편은 추상의 보편이 아니라, 개념으로서 보편이다. 신과 천국, 부활과 육신화는 이제 문제 거리가 아니었다. 단지 인간의 지성이 무한과 세계 전체를 아는 것에 대해 신적 지성과 같다는 정도로만 신을 인정한다. 이런 신관은 이신론이라 한다. 그럼에도 삶의 터전에서 인간들의 유대에서, 특히 신대륙의 인디언 사냥에서, 신앙의 신은 여전히 과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종교재판과 마찬가지로 권세를 누리고 위력을 발휘했으며, 1950년 맥카시 사냥에도 그리고 21세기 일베의 좌표 찍기에도 스며들고 있다.
“빛들 세기”에 이르러 생산양식이 바뀌고, 노동 도구의 발달과 노동력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세상에서 ‘백성이 니르고자 ᄒᆞᆯ 배’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 18세기의 하고픈 이야기를 마구마구 하던 시대에, “요상한 것들의 박물관” 시대에 넘쳐나는 상상과 공상이, 넘쳐나는 만큼이나 신체를 통해 증거를 보여주거나 검증되는지를 점검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그리고 지성은 “백과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고 등록되었듯이 시간이 필요하다. 백성이 스스로 찾아볼 수 있는 정보체계의 성립, 자연이 드러내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기록, 인간이 자연 속에서 스스로 사유의 극한을 찾아가는 방식 등은 신을 통한 제도와 체제가 아니라, 인간이 평등과 자유를 기반으로 스스로 제도와 체제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의 대혁명에서, “제헌”하여 공화제를 만든다.
혁명이 4년 만에 좌초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제도와 체제를 만든다는 것의 한계는 인간 사이 생산양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든다. 맑스가 말한 생산력의 발달이 인간의 의식을 바꾼다는 것은 역사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산업화 시대에 생산력의 확대는 생산양식, 즉 생산도구의 사적 소유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종교의 권세, 제국의 권력, 논리 지식의 권위의 세 카르텔은 암묵적으로 전쟁을 묵인하였다. 게다가 20세기 내내 크게 보아 인민 대 자본이라는 두 세력의 대립이 있었다. 세 패거리는 여전히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패권 전쟁을 거의 현상적으로 부추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원화 또는 다원화의 상황에서 미국 대 중국, 러시아 대 나토(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대 이란 승패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모른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21세기에 디지털 기술의 말 그대로 비약적인 발전이, 역사에서 어떤 방식과 방향으로 진행할지 아직은 모른다.
비결정성, 불확정성의 시대이다. 논리의 틀, 언어의 구조, 사회의 제도 등에서 구성과 구축이 해결책이 아님을 세 패거리가 드러내고 있다. 중세 이래로 유일 신앙에 포로가 되고, 제국주의에 포획되고 또한 그 체제 안에서 제도에 포섭되어서, 인간의 사유를 구속하였다. 이런 실천의 방향을 전도시켰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스스로 도는 운동을 하고, 게다가 먼 거리의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 그리고 자연, 그 자연에서 운동하는 발생하는 자치성과 자발성을 사유하면서, 사회에서 공공성을 제도에서 공화정을 이루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6:13, 59SMA) (8:02, 59SMD)
참조: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은 10가지이다. 주어(토 위포케이메논, τὸ ὑποκείμενο)과 술어(토 카테고로우메논, τὸ κατηγορούμενον)라는 용어에서 주어에는 실체(Substance, οὐσία), 그리고 술어에는 양(la quantité, ποσόν), 성질(la qualité, ποιόν), 관계(la relation, πρός τι), 장소(le lieu, ποῦ), 시간(le temps, ποτέ), 자세(le position, κεῖσθαι 또는 πῶς ἔχειν), 소유(la possession, ἔχειν), 능동(l’action), 수동(la passion, πάσχειν).
그런데 삼단논법에서 대전제의 항(τὸ μεῖζον, ὁ μείζων; πρῶτον)(terminus maior)과 소전제의 항(τὸ ἔλαττον; ἔσχατον)(terminus minor)을 이어주는 항을 중간 항(le moyen terme, ὅρος μέσος)이라 한다.
“비가오면 땅이 젖는다”에서 전제절(πρότασις)와 귀결절(ἀπόδοσις)로 되어 있다. 이 항들이 사실에 기반한 명제적 차원이다. 그럼에도 삼단론법에서 대전제와 소전제 그리고 귀결에서 항들은 세 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죽을 운명이다(AII M-P).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AII S-M). 소크라테스는 죽을 운명이다(S-P).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삼단논법들을 설명하면서 세 항목을 주로 명사들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항목(ὅρος)는 용어, 개념 등으로 쓰이지만, 자연학에서 류와 종으로 나눌 때, 각각도 또한 항목인 셈이다. 소는 반추동물이다고 할 때, 소는 종(種)인 셈이고, 동물이 류(類)이다.
스티븐 샤비로의 『기준없이』 1장. 「기준 없이」[신유물론 분과]
스티븐 샤비로의 『기준없이』 1장. 「기준 없이」
한철연 신유물론 분과 세미나 리뷰
먼저 신유물론 분과에 관한 소개를 간단히 하려 한다. 신유물론 분과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세미나 분과 중 하나로, 2021년 공무 모임을 시작하였고 참여 인원이 늘고 모임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2023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정식 분과로 등록했다. 이현재 회원(이하 호칭 생략), 박민미, 현남숙이 먼저 공무 모임을 제안하였고, 이후 참여 시기는 다르지만 이승준, 정유진, 이지영, 정희수, 서영화, 최종덕, 김선영, 손미아 회원이 합류하였고, 현재 서영화 회원이 분과장을 맡아 모임을 이끌고 있다. 신유물론 계열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책을 주로 읽고 있지만 세미나 구성원의 추천이 있으면 그밖의 주제나 텍스트에도 열려있다. 각자 전공이나 관심사가 달라 생태주의, 과학철학, 여성주의, 존재론, 문화철학의 바탕 위에서 신유물론의 이론적 지도를 파악하고 각자의 연구에 접목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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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신유물론과 분과에서 올해 들어 함께 읽은 책 중 하나이다. 영문학 배경을 가진 학자인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1954~)의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은 여러 소주제들도 구성되어 있다. 샤비로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모두 칸트의 이러한 미학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수용한다는 친연성이 있다. 그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칸트 해석을 참조하여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을 단순한 미적 대상을 위한 판단을 넘어 세계를 이해하는 일반적 방법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통상 세계 이해의 영역에서 칸트의 미학적 판단(반성적 판단)은 학적 판단(규정적 판단)에 비해 사소하게 여기거나 예외적으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샤비로는 이러한 기존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학적 사례들이 기존의 규범들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범들조차 개별 사례들을 종합함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의 제1장 「기준 없이」에서 샤비로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유효한 기준과 비판적 기준을 확립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하면 혁신과 변화를 막는 그러한 기준과 표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다(p. 60) 샤비로에게 기준(criteria)이란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등장하는 ‘규정적 판단력’을 의미한다. 샤비로는 이러한 기존의 기준의 문제를 대신하여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취미 판단은 개념에 메이지 않고 대상을 단칭적으로 포착하며, 고유한 맥락과 상황에 맞는 세계 파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샤비로는 미적 판단 중에서도 취미판단에 더 주목한다. 그는 칸트 미학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들이 미에 대한 분석을 보수적이라 치부하고 탈근대적 관심에서 숭고 분석에 집중해 왔다고도 비판한다. 미적인 것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실제로는 정동과 독특성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며, 또한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판단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학은 더 이상 인식론과 윤리학의 규칙들에 대한 예외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의 실천을 위한 근거가 된다(p. 9).
규칙에 포섭되지 않는 단칭 판단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샤비로의 접근은 기존의 칸트 연구 전통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샤비로는 이러한 관점이 오히려 오늘날의 중요한 쟁점들을 다루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고 전망한다. “칸트, 화이트헤드 그리고 들뢰즈의 연계 속에서 발견한 비판적 심미주의는 현대 예술과 미디어적 실천들, 기술적 실천들(특히 뇌 과학과 생물 발생학 분야에서의 최근의 진전들),그리고 문화이론과 맑스주의 이론( [증략] 생성 혹은 자기-조직 시스템의 역할에 관한 이론, [중략])에서의 논쟁들을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전망한다(pp. 25-26).
샤비로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일지 또한 어떤 시대적 통찰을 줄 것인지는 책의 나머지 장들과 그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살펴보며 지속적으로 탐구해 나가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