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 박종성, <막스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의 소유>, 커뮤니케이션북스, 2026
[신간 소개] 박종성, <막스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의 소유>, 커뮤니케이션북스, 2026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어떻게 우리의 삶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외부의 힘에 종속되지 않고 나 자신을 창조하며 소유할 수 있을까? 막스 슈티르너는 개성을 짓밟는 교리와 신념, 개인을 둘러싼 뿌리 깊은 고정 관념에 타협하지 않는 자기중심주의로 맞선다.
대의의 근거를 ‘창조가 깃든 무’에 두고 나에게 이질적인 모든 신성한 것을 파괴하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자기사랑과 자기해방의 철학은 우리에게 유일자가 되는 방법, 즉 정신과 정신세계의 창조주이자 소유자로 우뚝 설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 책은 슈티르너의 주저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중심으로 슈티르너 사상을 열 가지 키워드로 살핀다. 자기중심성이 어떻게 종교·철학·도덕 배후의 공허함을 폭로하고 서로가 서로를 향유하고 이용하는 ‘유일한 개인들의 연합’으로 나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슈티르너가 어떻게 니체에 앞서 허무주의로의 전환을 포착하고 ‘창조가 깃든 무’를 반본질주의적인 자아 개념으로 세웠는지 확인할 수 있다.
슈티르너를 둘러싼 평가는 다채롭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슈티르너 철학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이는 슈티르너가 마르크스와 헤겔 좌파들에게 미친 막대한 영향을 방증한다. 이후에도 슈티르너는 시대에 따라 니체의 선구자, 실존주의의 선구자, 초기 포스트구조주의자, 개인주의 아나키즘의 시조로 재평가받았다. 그만큼 슈티르너의 사유는 지속력과 여러 세대에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이제 그 사유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는 1806년 바이에른주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07년 4월 19일, 37세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약사와 재혼했고, 서프로이센의 쿨름에 정착했다. 20세가 되었을 때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문헌학, 신학,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헤겔의 강의에 출석했다. 1841년 베를린에 머무르는 동안 자유인 모임에 참여했다. 주저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있으며, 이 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슈티르너 비평가들’을 써서 반박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와 장바티스트 세의 글을 번역했다. 1852년에 ‘반동의 역사’를 썼고, 1856년 벌레에 물린 뒤 열병을 앓다가 그해 6월 25일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브루노 바우어와 루트비히 불만이 참석했다.
지은이 박종성은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2014)’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논문으로는 “슈티르너의 ‘자유주의’ 국가 비판의 현대적 의미”(2011),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2020, 제8회 소송학술상 수상), “유일한 사람의 사랑”(2021),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 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2022), “철학자를 조롱하는 철학자”(2023)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이고, 한신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의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글은 <매일일보>에 게재된 신간 소개를 재인용한 것입니다.
https://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1401362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건국대학교 다자인 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
(이어서)
2. 『형이상학』 8(Η)권 (1장~6장)
8(Η)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실체들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간다. 모든 감각적 실체는 질료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질료 또한 실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대립적인 변화 모두의 근저에 놓여있는 어떤 기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생성과 소멸이 수반되지는 않는데, 어떤 것이 있는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생성하거나 소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체와 질료가 일반적으로 실체라 일컬어지지만, 이것이 아직 가능적 실체이기 때문에, 감각적 실체 중 무엇이 현실적인 실체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있는 것들이 그 합성구조에 따라 있거나, 결합에 따라,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있기 때문에, 질료가 다르면 그것의 현실태가 다르고 정식이 다르다는 논의는 분명하다. 한편, 문지방에 대하여 ‘방과 방 혹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물건’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실적인 문지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고, 앞선 질료와 더불어 말한다면 돌로 이루어진 복합실체를 말하게 된다. 이로써 감각적 실체가 있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질료는 가능적 실체이고, (2) 형상(형태)은 현실적 실체이며, (3) 이 둘이 결합한 복합실체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실적 실체는 바로 형상이다.
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부를 때, 이 이름이 합성실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현실태나 형태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은 때가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 형상과 현실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현실태로서의 집은 합성구조(즉 형태)이지 이 합성구조에 속하게 되는 벽돌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4장과 5장은 질료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고 있는데,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적 실체에 대하여, 각 사물엔 그 고유한 질료가 있음을 논한다. 예를 들어 ‘이것’의 질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것’이 불이나 흙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답해서는 안 된다. 모든 질료들이 궁극적으로는 불이나 흙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의 질료 또한 불과 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흙이 사람의 고유한 질료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6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나 수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복합실체를 이루는 첫 번째 부분들은 질료와 형상이다. 최종적인 질료와 형태는 동일한 것이자 하나이고, 감각적 실체가 하나인 이유는 질료와 형태가 하나이기 때문에 차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질료로부터 형태로의 운동에는 제작자 이외의 다른 원인이 없다. 한편, 질료를 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그 즉시 하나인 것이다.
3. 『형이상학』 9(Θ)권 전반부 (1장~8장)
9(Θ)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론적 탐구를 수행한다. ‘가능태’와 ‘현실태’는 본래 변화 및 운동을 설명하는 개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개념들의 사용 범위를 넓혀 자신의 존재론적 탐구에 도입한다. 먼저 그는 가장 주도적인 뜻에서의 ‘가능태’에 대해 규정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뒤나미스’(가능태)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것 안에 또는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안에 있는 변화의 원리”이다. 따라서 ‘뒤나미스’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능동적 능력), 어떤 작용을 받을 수 있는 능력(수동적 능력), 어떤 힘이 가해질 때 변화를 겪지 않는 능력, 어떤 작용이 잘 이루어지는 능력 모두를 일컫는 말로 이해된다.
운동 및 변화의 원리들은 어떤 경우 생명이 없는 것 안에 내재하고, 어떤 경우 생명이 있는 것들, 즉 영혼이나 영혼의 이성적 부분 안에 있다. 이성을 동반하는 능력은 동일한 것이 반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가령 의술의 경우 본성에 따라 다루는 것은 건강이지만, 부수적인 뜻에서는 질병을 다루기 때문에 질병과 건강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 비이성적 능력은 단 하나의 결과만을 낳는다는 단순성을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참으로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 즉 가능태 혹은 능력을 부정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메가라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집을 짓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집을 지을 능력이 없다는 불합리한 결과가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주장이 결국 운동과 생성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어떤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그것을 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적 존재에서 현실적 존재로 이행하는 것에 아무런 불가능한 점이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과 관련된 능력, 즉 가능태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를 진행해 왔다면, 6장에서 그는 현실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 본성이 어떤지를 규정한다. 먼저 그는 ‘가능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어떤 대상이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현실태라고 말한다. 예컨대 집을 지을 수 있는 자에 대해 집을 짓고 있는 자, 잠자는 자에 대해 깨어있는 자, 눈을 감았지만 시력이 있는 자에 대해 보고 있는 자 등등의 예시에서 앞의 것은 가능태에, 후자의 것은 현실태에 분류된다.
이후의 논의는 “가능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것이 앞선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측면, 즉 정식(로고스)과 시간과 실체에서 현실태가 가능태에 앞선다고 말한다. 첫째, 가능적인 것은 그것의 정식 안에 이미 현실적인 것을 포함한다. 능력은 어떤 ‘현실적 활동’을 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가능적인 것이다. 둘째, 시간의 관점에서 씨앗은 곡식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가능적인 곡식으로써 씨앗이 곡식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씨앗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들에 시간적으로 앞서서 다시 곡식이 현실적으로 있어야 한다. 이처럼 종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시간적으로도 현실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에 앞선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 현실적인 것은 실체에서의 선행성 또한 갖는다. (1) 먼저 생성 과정은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 뒤에 오는 것은 앞에 오는 것보다 더욱 완전하다. (2) 또한 모든 생성이 어떤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진행된다고 할 때, 현실적인 것은 목적으로서 이 생성의 과정 전체 가장 앞에 놓인 시초이다. (3) 질료가 가능적으로 있는 것은 그것이 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즉 현실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가능적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4) 모든 현실적 활동은 목적이거나 목적에 가깝다. 그런 뜻에서 활동은 단순한 가능성이나 능력에 앞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영원한 것들을 논의에 끌어들여, 보다 주도적인 뜻에서 현실적인 것이 갖는 선행성을 논한다. 영원한 것들의 경우, 그것들은 실체의 측면에서 가멸적인 것들에 앞서며 영원한 것은 결코 가능적으로 있지 않다. 또한 가멸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거치면서도 이 세계 자체는 유지되는데, 이는 바로 태양의 운행이나 천체 운동과 같은 영원한 운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 속에 있는 것들은 이 불멸하는 것들을 모방할 뿐이다.
(끝)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1)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그리고 군자(君子)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오서진
1. 서론
『논어』에는 여러 인간상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군자(君子)가 있다. 『논어』 내에서 군자는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덕목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백성을 이끌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흔히 ‘성인군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군자는 유가(儒家)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자 이상적인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다.
그런데 『논어』에는 군자 이외에 인자(仁者) 그리고 지자(知者)와 같은 인간상이 등장한다. 직관적으로 봤을 때, 군자는 이미 인자와 지자의 면모를 모두 갖춘 것처럼 보인다. 군자가 이상적이고 모범이 되는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라면 훌륭한 성품과 덕성 그리고 지적 역량을 모두 갖추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어』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군자가 인자와 지자를 포함하는 것처럼, 또 어떨 때는 군자, 인자, 지자가 각각 별개의 개념처럼 보인다.
한 개념은 다른 개념과 명확히 구분되며 문장 몇 줄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중국 고대사상에 접근하는 바람직한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개념이 함축하는 의미 그리고 그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사상가의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본문에서는 강독 모임 중 더 알아보고 싶었던 인자, 지자, 군자의 의미에 대해 모임에서 다룬 내용을 중심으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2. 본론
2.1. 인자(仁者)와 군자(君子)
우선 인자와 군자의 관계에 대해 의문이 생긴 구절은 「옹야」(雍也) 편에 있다.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는 공자에게 인자에 대해 질문한다.
재아가 물어 말했다. “인자는 누군가 그에게 ‘우물 안에 인(仁)이 있다’고 말하면 그 말에 따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군자는 (우물 앞까지) 갈 수는 있어도 (우물에) 빠질 수는 없다. 속일 수는 있어도 해칠 수는 없다.”
이 구절을 읽고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재아는 인자에 대해 질문했는데 왜 공자는 군자로 대답했는가?’이다. 마치 인자가 곧 군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재아의 질문 의도를 파악한 공자가 일부러 ‘군자’라는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 혹은 일상 대화이기 때문에 생긴 사소한 표현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인자, 군자 등의 개념 자체가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러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분명한 점은 인자와 군자는 아주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두 인간상 모두 『논어』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바람직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자가 곧 군자는 아니라는 근거가 『논어』 내에 있다. 「헌문」(憲問) 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이면서 인하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소인으로서 인한 사람은 아직 없다.”
위 구절에 따르면 군자 중에는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다. 반면 소인(小人)이면서 동시에 인자인 경우는 없다. 다시 말해 군자는 인자인 경우와 인자가 아닌 경우로 나뉘고, 소인은 인자가 아니다. 즉 군자이면서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으므로 인자와 군자는 동격으로 볼 수 없다.
위 구절처럼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언급하는 내용은 『논어』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리인」(里仁) 편을 보면 “군자는 덕을 마음에 두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하고 소인은 이익만을 바란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라는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군자가 철저하게 소인과 대비되는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소인이 땅(재물)을 생각할 때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이 이익을 바랄 때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한다. 또 소인이 이(利)에 밝을 때 군자는 의(義)에 밝다. 군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덕, 법도, 의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이자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가치이다. 소인이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물이라면 군자는 집단을 바로 세우는 인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군자는 인자와 구분된다. 군자는 덕이 충만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책임과 역할을 진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군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의(義)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도 사회 정의와 관련이 깊다. 의는 몫의 분배와 규범에 관한 덕목이다. 올바른 기준에 따라서 재화나 지위를 나누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칙과 제도를 제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또는 지키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의(義)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의를 행한다는 것은 제 가족을 보살피고 이웃을 돕는 일상적인 일보다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의 일일 수밖에 없다. 공자 이전 시기에 군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고 공자 역시 군자를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는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군자는 자신과 공동체 모두를 바르게 이끌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인자와 다르다.
그러나 인자와 군자는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많다. 군자는 잠재적 인자이다. 이 말은 모든 군자는 인자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와 의가 분리 불가능하듯 인 또한 군자가 품고 살아야 할,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덕목이다. 그러므로 인자와 군자는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지만, 유가 사상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을 설명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조각들이다.
(계속)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5-상호작용과 개념론으로의 이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5-상호작용과 개념론으로의 이행
1)
특정한 인과성은 실재적인 인과성이다. 이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가 인과 관계 외에 다른 독자적인 내용을 가짐으로써, 원인과 결과가 양방향으로 무한히 진행하는 것으로 된다. 이런 무한 진행이 자기로 되돌아오면서 상호작용적 인과 관계가 출현한다. 여기서 원인은 그 자신의 결과를 원인으로 하게 된다.
이런 상호 작용의 출발점은 서로 엇갈리는 관계다. 즉 한편에서는 원인은 직접적인 실존에서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원인으로 되어 결과를 자기의 결과로 정립한다. 다른 한편 원인은 자기의 기체를 전제로 하는데, 이 기체의 원인이 되는 것은 자기의 결과가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다.
여기서 원인과 그 기체의 측면은 서로 외면적이며 마찬가지로 결과에서 결과의 측면과 원인이 되는 측면은 서로 다르다. 여기서 원인이 결과가 되는 인과적 관계가 결과가 원인이 되는 인과 관계가 서로 엇갈린다. 두 측면은 상호적이지만,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할 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두 생산자의 교환을 생각해 보자. 하나의 생산자는 곡식을 만들어 팔고 다른 생산자는 옷을 만들어 판다. 곡식 생산자는 곡식을 옷 생산자에게 팔지만, 옷 생산자에게서 옷을 구입한다. 이 두 관계는 상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서로 엇갈리는 관계일 뿐이다. 즉 두 측면은 서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인과 관계는 상호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차례로 연결하여 인과의 연쇄로 삼더라도 무방하다.
“원인은 이제 작용한다. 왜냐하면, 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위력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원인은 자신에 전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자신을 타자로[기체] 즉 수동적 실체로 삼아서 자신에 작용한다. 따라서 원인은 수동적 실체가 지닌 타자성[기체]을 지양하여 이 수동적 실체[기체] 속에서 자기 자신[원인 실체]으로 되돌아온다.”(논리학, GW11, 405)
“두 번째로 원인은 이와 동일한 것을 규정한다. 원인은 이 수동적 실체의 타자성[원인에 대한 타자성]을 지양하는 것 또는 자기 내 복귀를 하나의 규정성으로 정립한다. 이 정립된 것은 동시에 원인이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므로 우선 그 원인의 결과이다. 거꾸로 이 원인은 전제하는 것인 한, 자기 자신을 자기의 타자[기체]로 규정하므로 결과를 다른 실체 즉 수동적 실체 속에 정립한다.”(논리학, GW11, 405)
즉 원인이 원인이 되려면 전제된 기체에 부정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결과는 원인에 의해 정립되면서(규정성을 지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체 즉 원인의 타자성을 지양한다는 것이다.
2)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상호작용적 인과 관계로 넘어가는 매개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가 있다. 작용과 반작용은 여전히 외적인 반성에 머무르는 것인데,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를 보는 관점을 전도한 것이다.
즉 원인의 측면에 서서 보면, 원인이 직접적인 것이고 결과는 그 원인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결과 자신이 원인이 되어 원인은 결과가 된다. 다만 여기서 작용하는 방향이 반대이다.
예를 들어 태양에 지구가 충돌한다면, 이는 하나의 관점에서는 태양이 인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반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가 태양을 밀어내는 척력이 발휘된 것이다. 여기서 작용하는 인력의 힘이나 척력의 힘은 양적으로 동일하며 다만 방향만 대립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태양이 능동적 실체로서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수동적 실체로서 결과가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관점을 달리해서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
이렇게 관점을 뒤집어 보면, 능동성과 수동성이 전환된다. 즉 수동적 실체로서 결과가 원인의 받아들이는 것은 이 결과 내에 이미 그런 것으로 정립될 가능성[An sich Sein]이 실제로 정립되는 것일 뿐이다.
이는 능동적 실체 역시 마찬가지다. 능동적 실체가 힘을 행사하는 것은 수동적 실체가 그런 힘을 받을 만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동적 실체는 강제당한다. 강제는 위력의 현상이거나 외적인 것으로서 위력이다. 그러나 위력이 외적인 것은 다만 원인이 되는 실체가 자기 자신을 [결과로] 정립하는 가운데 동시에 [타자를] 전제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양된 것으로서 정립하기 때문일 뿐이다.”(논리학, GW11, 405)
“수동적 실체가 타자에 의해 강제당하는 것은 수동적 실체에 다만 정당한 권리가 행사되는 것이다. 수동적 실체가 잃어버리는 것은 그것이 지닌 직접성이며 즉 그것에 낯선 실체성이다. 수동적 실체가 자기에 낯선 것으로서 획득하는 것 즉 정립된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규정이다.”(논리학, GW11, 406)
능동적 실체가 행사하는 것이 작용이라면, 수동적 실체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에 대한 수동적 실체 자신의 반작용이다. 그것은 수동적 실체의 잠재적 존재가 자기를 정립한 것이다.
“수동적 실체의 반작용은 이중적인 것이다. 즉 우선 이 수동적 실체가 지닌 모습이 정립된다. 두 번째로 수동적 실체가 그것으로 정립되는 것이 그것의 그 자체 존재로서 서술된다는 것이다.”(논리학, GW11, 406)
“둘째로 반작용은 최초의 작용하는 원인에 대립한다. 이전에 수동적 실체가 자기 내에서 지양한 작용은 바로 최초의 원인이 작용한 것이다. 이 작용이 지양되면서 그 원인이 되는 실체성도 지양된다.”(논리학, GW11, 406)
4)
이런 작용과 반작용을 거쳐서 마침내 원인과 결과의 상호 작용이 출현한다. 여기서 원인은 능동적 실체이며 동시에 수동적 실체 즉 결과이니, 원인과 결과가 단순히 엇갈리는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원인 자체가 곧 결과이다. 또한, 작용과 반작용처럼 단순히 관점의 전환에 의해 원인이 결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원인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결과이고 결과를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원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인과에서 원인과 결과라는 형식 구별은 더는 구별이 되지 못하고 투명하게 된다.
이전에 특정한 인과성에서 기체와 실체, 토대와 인과 관계가 서로 외면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구분 자체가 해소된다. 원인의 기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 자체가 자신의 기체이다. 그것은 결과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과도 결과가 아닌 독자적 기체가 있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자체가 자기를 원인으로 만드는 기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바이메탈을 보자. 열을 받으면 많이 늘어나는 물질과 적게 늘어나는 물질 즉 서로 대립하는 성질을 지닌 두 물질이 결합한다. 이 바이메탈에 냉장 콤프레서가 연결되면, 냉장고가 된다.
냉장고 온도가 올라가면 바이메탈이 굽어져서 냉장 콤플레서가 작동하여 온도가 내려간다. 온도가 내려가면 바이메탈이 반대로 펼쳐져서 냉장 콤플레서의 작동이 중지하면서 온도가 다시 올라간다. 이런 상호적 운동을 통해 냉장고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 여기서 냉장 콤플레서 작동의 원인이 미친 결과가 냉장 콤플레서 중지의 원인이며 이 중지의 원인이 미친 결과가 곧 작동의 원인이다. 원인이 곧 결과이고 결과가 곧 원인이다.
5)
원인은 결과를 통해 원인으로 되므로 자기 매개하는 것이다. 결과 역시 자기의 결과를 통해 결과로 되는 자기 매개이다. 곧 원인은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하고 결과는 자기 자신을 결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매개, 자기 근거를 통해 지금까지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일어난 상대적 필연성의 운동은 절대적인 필연성으로 발전한다.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하기에 더는 타자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니 항상적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필연성과 우연성이 통일로서 절대적 필연성이 출현한다. 즉 “한편으로 결합과 관계로서 직접적 동일성”과 다른 한편으로 “구별이 지닌 절대적 우연성”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런[특정한 인과성에서] 내적 필연성이나 잠재성은 인과성의 운동을 지양한다. 이를 통해 양 측면이 지닌 실체성[우발성]은 상실되며 필연성이 은폐를 벗어난다.”(논리학, GW11, 409)
이런 절대적 필연성은 동시에 자유(자발성)의 체계이다. 냉장고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므로 이 냉장고는 마치 목적론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목적을 추구하는 자발적 존재다. 그러나 사실 이 합목적적 운동의 구조는 서로 대립하는 물질의 상호 작용에 있다.
“거꾸로 동시에 우연성은 자유로 된다. 왜냐하면, 필연성을 이루는 측면들은 독자적으로 자유롭지만, 서로 비추는 실제성이라는 형태를 가지지 않으나 이제부터 동일성으로 정립되면서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이루는 총체성이 이제 또한 서로 동일한 총체성으로 비추거나 서로 동일한 반성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409)
6)
이와 같은 자유는 아직 단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자유는 마침내 개념 운동에 이르러 등장하며, 아직은 단순히 자발적인 합목적적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 개념 운동의 출발점이 놓인다.
능동적 실체는 개별적 개념이 된다. 이것은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 또는 “자기와 동일한 부정성”이다.(논리학, GW11, 398)
수동적 실체는 일반적 개념이 된다. 여기서 직접적인 것이 원인의 결과가 되면서, 단순한 동일성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규정성으로부터 자기 내로 반성하여”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정립된 것” 이다.(논리학, GW11, 398)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특수성으로서 개념이다. 이 매개는 구별된 개체다. 이 개체는 자립적이며 구별된 것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잠재적으로는 일반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며 상호 작용 속에 들어가 자기를 부정하는 것 즉 개별자로 된다. 그러므로 이 특수성이 곧 가상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구별된 계기이지만, 동시에 각자 자기 속에 이미 타자를 포함하고 있다. 개별성의 부정성은 자기 부정성이므로 곧 동일성이다. 일반성의 자기 동일성은 부정의 부정을 통한 동일성이다. 특수성의 자립적 개체는 이미 부정적인 것이며 앞으로 부정될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부정의 부정을 통해 통일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총체성은 동일한 반성이어서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면서 앞에서 말한 두 가지로 자기를 구분하지만, 그런 구별은 완전히 투명한 구별 속에 즉 특정한 단순성 속에 또는 양자에 동일한 동일성인 단순한 규정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념이고 주관성의 영역 또는 자유의 영역이다.”(논리학, GW11, 409)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4-법칙 관계와 인과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4-법칙 관계와 인과 관계
1)
앞에서 우발적 존재에서 반성은 실존에 머물러 있어서 아직 본질이 그런 우발적 존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또는 공허를 본질로 한다고 했다. 이제 인과 관계에 이르러 처음으로 반성이 내적으로 되면서, 개체는 본질이 그 속에 비친 것 즉 현상으로 된다.
헤겔에서 인과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이처럼 현상으로서 개체이니, 이 개체는 자립적인 동시에 타자와 관계한다. 이 개체가 지닌 양 측면이 곧 인과 관계의 핵심을 이룬다.
헤겔의 인과 개념은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인과 개념과 구분된다. 인과 관계는 철학상 법칙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지며 그 때문에 흄의 비판 이래로 부정되어왔다. 법칙 관계란 흔히 두 자립적 존재가 조건적으로 관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하나의 존재가 있으면 다른 존재가 있는데, 이것이 항상 반복되면 법칙이 된다.
그런데 인과 관계는 이 두 자립적 존재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데, 흄에 의하면 실제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고립된 개별적인 것이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지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과 관계를 부정하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개별적인 것들 사이의 법칙 관계 또는 조건 관계뿐이라고 한다.
칸트는 흄의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이런 고립된 개별적인 것이더라도 항상 계기해서 지각된다면, 선험적 주관은 이를 인과 관계로 파악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2)
헤겔은 힘의 관계를 인과 관계를 구분해서 다룬다. 법칙 관계 또는 힘의 관계와 인과 관계는 관계의 성격에서 구분된다. 전자는 현상 편에서 다루어지는 물체를 요소로 하는 관계이며, 후자는 실제성 편에서 다루어지는 실체적 개체를 요소로 하는 관계이다.
하나의 물체는 여러 성질을 지니고, 이 성질은 서로 관계한다. 이 성질이 다른 성질과의 관계는 양자 사이에 미분적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힘은 한편으로 발산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렴하면서 두 성질을 관계하게 한다. 이것이 힘의 외화라는 관계다. 헤겔은 이 힘의 외화를 통해 두 성질 사이의 법칙 관계가 성립된다고 본다.
반면 인과 관계는 유적 본질이 실체로 펼쳐지는 반성 운동을 매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종적 개체는 가능적인 것이며 다른 개체는 실제적인 것이다. 여기서 가능적인 것은 원인이 되고 실제적인 결과가 된다.
가능성의 실현은 앞에서 헤겔이 말했듯이 자기를 펼치는 운동이며 자기를 이중화해서 계시하는 운동이다. 여기서는 원인의 원인성이 결과에 전달되어 결과를 원인과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원인은 인과적 작용 속에서 자기의 원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과 역시, 인과 작용에 의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원인과 같은 것으로 정립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에 인과적 영향을 미치면, 하나의 당구공은 자신이 지닌 운동량을 잃어버리고 이 운동량을 다른 당구공에 전달한다. 즉 가만히 있던 당구공이 운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과 관계는 조건 관계와 달리, 원인과 결과가 인과 작용에서 스스로 변화한다. 원인은 원인성을 잃고 결과는 원인성을 띠게 되니, 이런 변화를 통해 우리는 인과적 관계를 단순한 조건적 관계 즉 법칙 관계와 구별할 수 있다.
3)
우발적 존재에서 일어난 반성 운동이 공허를 본질로 하는 것과 달리 여기서 일어나는 반성 운동은 일정한 본질을 설정한다. 인과 관계는 실체적 개체 사이의 반성 운동을 전제로 하지만, 이런 반성 운동은 아직 일면적인 것에 그치므로 인과 관계는 외적인 반성 운동에 그치고 장차 내적 반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과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전환한다.
헤겔은 인과 관계를 형식적 인과성, 특정한 인과성, 작용과 반작용 관계로 발전적으로 서술한다. 그 가운데 형식적 인과성은 인과의 단순한 개념만을 다룬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과성은 특정한 인과성에서 시작한다.
우발적 존재가 부정적인 것으로 되면서 타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통해 인과 관계가 출현한다. 개체가 맺는 동일성의 관계를 통해 가능적인 것이 실현되어 실제적인 것으로 된다. 이때 가능적인 것이 원인이고 실제적인 것이 결과다.
원인이 이런 원인이 되려면, ① 처음 직접적인 실존에서 자기 내로 반성하고, 가능적인 것[An sich Sein]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이렇게 지양된 것으로서 원인은 인과 관계 속에서는 오히려 직접적인 것, 근원적인 것이며, “자기로부터 시작하고 타자로부터 촉발되는 법이 없이 자기로부터 산출하는 자립적 원천이다.”(논리학, GW11, 398)
원인이 원인으로서 자기 내 반성과 원인이 결과를 규정하거나 정립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이다. 양자는 분리될 수 없이 통일되어 있다. 즉 원인이 원인이 되면 즉시 다른 것에 작용[wirken]을 해야 한다.
“원인의 근원성이란 원인의 자기 내 반성이 곧 규정하는 정립이며, 거꾸로 양자는[자기 내 반성과 규정이] 하나의 통일을 이룬다는 데 있다.”(논리학, GW11, 398)
② 자기의 위력을 통해 이 정립된 규정성을 결과 속에 정립한다. 원인은 결과 속에서 자기와 동일한 것 즉 “정립된 것으로서 정립된 것”(논리학, GW11, 398)에 이르므로 ③ 자기 관계하는 가운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이제 원인은 원인으로서 자기를 소실한다. 결과는 처음에는 ④ 직접적인 것이었으나 이제 원인의 결과가 되면서 정립된 것으로 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 속에서 “결과는 일반적으로 원인이 포함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으며 거꾸로 원인은 결과 속에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논리학, GW11, 398)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동일한 것인데, 이는 원인의 가능성이 펼친 것이며, 자기를 이중화한 계시이다. 이 계시는 단순한 이행도 아니고, 외화[형성]도 아니며 자기를 타자에 전달하는 것이니, 헤겔은 원인을 ‘위력을 지닌 것[Macht]’으로 규정한다.
4)
형식적 인과 관계는 인과 관계에 관한 개념일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과 관계는 특정한 인과 관계이다. 특정한 인과 관계는 원인과 결과가 각기 직접적인 실존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각자는 고유한 내용을 지니며, 그 가운데 하나의 내용에서 인과 관계가 맺어진다.
우발적 존재의 실체 관계가 추상적 필연성 즉 우연성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특정한 원인과 결과는 앞에서 논의한 상대적 필연성에 상응한다. 원인은 구체적인 가능성이며 결과는 구체적인 실제성이다.
인과 관계 속에서 개체는 실체로 규정된다. 원인과 결과는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실체의 형식을 지닌다. 그것은 서로 관계하여 실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원인과 결과가 인과 관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지닌 내용은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 토대가 되니, 곧 기체이다.
원인은 여러 내용을 지닌다. 원인이 원인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되는 기체에서 벗어나 원인으로서 정립되어야 한다. 즉 원인은 자기를 지양해야 한다. 이제 원인은 실체가 되며 이 원인이 작용하면서 원인이 되는 내용을 결과로 옮기면 원인은 이 원인이 되는 내용을 잃어버리면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다. 원인은 번래 기체로 복귀한다.
“이 [원인이 되는] 실체의 작용은 외적인 것에서 시작하며 이 외적인 규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외적인 것의 [결과를 통해] 자기 내 복귀는 자신의 직접적 실존을 보존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인과성을 지양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402)
예를 들어 돌이 다른 것을 타격하는 원인이 되려면, 돌이 들어 올려져서 하나의 운동량을 지닌 것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돌은 다른 것을 타격하면서 운동량을 잃고 다시 땅으로 낙하하고 처음의 직접적인 존재로서 돌로 된다.
결과는 원인의 작용에 의해 그 자신이 지양되면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 결과는 이 정립된 원인을 다시 다른 타자에 정립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원인과 결과는 자립적인 내용을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무차별하지만, 어떤 인과 관계를 이루는 특정한 내용에서는 서로 동일하다.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서로 무차별한 측면과 서로 동일한 측면은 각기 독자적 내용을 지니면서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돌이 다른 것을 때릴 때, 여기서 원인이 되는 것은 운동량이다. 그런데 돌이 돌이라는 점에서 지닌 내용은 이 운동량과는 무관하다. 이 동일한 운동량을 돌이 지닐 수도 있고, 나무도 지닐 수 있으니, 돌의 구체적 내용은 원인으로서 내용과 서로 외면적이다.
형식적 인과성에서 원인과 결과는 서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분석적 명제를 이루며, 특정한 인과성에서 원인과 결과는 단순한 형식의 차이만은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인과적 내용 외에 독자적인 내용을 지니므로 양자는 내용상 차이가 있다.
6)
① 하나의 결과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여러 원인이 동시에 작용해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결과는 여러 형식을 가진 통일적인 내용이므로, 그 형식에 따라서 각기 다른 원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사고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자동차의 결함일 수도 있고, 도로 조건의 결함이나 운전의 미숙일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자주 중첩해서 작용하여 사고를 일으킨다.
② 특정한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가 지닌 내용의 차이 때문에 다양하게 발전한다. 우선 하나의 원인은 원인으로서 갖는 자신의 내용 외에도 다른 내용을 지니므로 이 내용을 통해 그 자신의 원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전투에서 아버지가 탄환을 맞아 전사하면서 아들이 각고 노력하여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여 성공했다고 하자. 아들이 성공한 원인은 각고 노력인데 이 각고 노력의 원인은 아버지의 전사이고 아버지가 전사한 원인은 다시 전투에서 맞는 탄환이다.
이런 관계는 무한히 펼쳐질 수 있으며 원인의 방향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결과의 방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계를 통해 인과의 사슬이 만들어진다.
③ 생명체나 정신에 이르면 하나의 원인은 결과에서 자기를 그대로 이중화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결과는 자발적인 힘을 지니고 이런 원인이 미치는 작용을 자기 나름대로 고유하게 변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오니아 기후가 미치는 영향은 호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며 시저의 명예욕이 공화국을 멸망시킨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호머나 공화국은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이런 원인의 작용을 변형하기 때문이다.
④
이상과 같은 예를 통해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작은 원인이 거대하고 심각한 사건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원인은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간접적 원인이거나, 여러 원인 중의 하나이거나 주체적으로 변형되는 원인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결과는 결코 원인보다 클 수 없다고 주장한다.
7)
원인의 사슬 가운데 원인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자기 자신 역시 다른 것의 결과이다. 하나의개체가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된다는 것에서 자기 자신이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가 되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결과는 원인과 관계하여서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내용을 지닌 기체이다. 이 기체는 인과적 동일성에 대해 다만 외면적인 것 즉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기체가 원인이 원인으로서 작용하게 하는 전제로서 규정된다. 다시 말하자면 결과가 원인이 되어 원인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특정한 인과성에서 어떤 것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외적인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원인이 자기의 결과를 통해 원인으로 되면서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이전에 동일성이 다만 잠재적으로 존재했던 것인 기체는 이제부터 전제로 규정되거나 작용하는 인과성에 대립해서 규정되며, 이전에 동일한 것에 다만 외적인 것이었던 반성은 이제 이 동일한 것에 관계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43-실체 관계와 공연한 존재[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43-실체 관계와 공연한 존재
1)
마침내 본질론 마지막 3편 3장인 ‘절대적 관계’의 장에 이르렀다. 이 장을 통해 1부 객관 논리학은 끝나고 2부 주관 논리학으로 이행한다. 이 장은 본질론 3편 ‘실제성’ 편의 마지막 장인데, 많은 내용이 3편 2장인 ‘양상’ 장의 내용과 중첩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도(2편 현상 편) 설명했듯이 본질론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본질론에서는 항상 먼저 개념이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여기서는 추상적인 것이 점차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 끝에 이르러 개별적 형태가 다시 일반적 형태로 전개된다. 이는 곧 역사적 발전의 길이다.
이 과정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정신현상학의 전개 과정과 거꾸로다.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논리의 평면에 투영된다. 헤겔은 이것을 내면화[Erinnerung: 기억]의 과정이라 했다. 논리학에서 본질론은 거꾸로 논리적 계기의 발전이 시간의 축에 투영되니 이를 헤겔은 ‘형태화’라고 한다.
그러므로 3편에서도 2장에서 양상 개념이 추상적 필연성에서 구체적 필연성을 거쳐 절대적 필연성으로 전개되었다. 이제 3장에 이르면 개체들의 우연적 관계(실체 관계)에서 개체들의 구체적 관계(인과 관계)를 거쳐 개체들의 절대적 관계(상호작용 관계)로 나간다. 여기서 논리적 계기와 역사적 형태가 상응하는데, 추상적 필연성이 실체 관계와, 구체적 필연성이,, 인과 관계와, 절대적 필연성이 상호작용적 관계와 상응한다.
시야를 좀 더 넓혀서 보면, 2편 ‘현상’ 편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는 먼저 현상이 논리적으로 전개되었는데, 2편 3장에서 이것이 시간에 투영되어 전체와 부분의 관계, 힘과 드러남의 관계, 외부와 내부의 관계가 전개되었다.
정신현상학에서 논리적 계기가 새로운 의식 형태를 토대로 새롭게 재구성되면서 그 이전의 계기와 평행하듯, 여기서는 논리적 차원이 발전하는 가운데 시간적 형태의 흐름도 재구성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새로운 이념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지만, 이전의 이념에서 구성된 역사와 새로운 이념에서 구성된 역사가 평행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시간의 축에서 2편 3장의 축은 3편 3장의 축과 상응한다. 즉 논리적 차원이 현상에서 실제성으로 이행하면서 시간의 차원도 재구성된 것이다. 그 때문에 2편 3장의 현상의 관계는 3편 절대적[실체의] 관계와 평행한다. 즉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실체 관계에, 힘과 드러남은 인과 관계에, 내부와 외부의 관계는 상호작용적 관계에 상응한다.
2)
앞의 장에서 양상은 가능성과 실제성 사이의 관계가 다루어졌다. 가능성이란 곧 유적 본질을 말하며 실제성이란 이것이 실현된 실체를 말한다. 이 관계가 개별적이면 우연성(추상적 필연성)이었고, 특수적이면 개연성(상대적 필연성)이었고 일반적이면 필연적(절대적 필연성)이었다.
헤겔은 가능성이 실현되는 운동은 자기 자신을 펼치는 운동[auslegen]] 또는 자기를 이중화하여 계시하는[Menifestation] 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 유적 본질과 실체, 즉 근거와 그 토대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개체들의 상호 관계이었는데, 이제 3장 관계 장에서는 이 개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 헤겔은 이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절대자의 펼침은 빛을 비추는 운동이며 이 빛남[Scheinen]은 곧 가상[Schein]으로서 정립되는 것이니, 관계를 이루는 양 측면은 총체성이다. 왜냐하면, 이 측면들은 가상이기 때문이다. 가상이 총체성인 까닭은 가상으로서 구별된 것들은 그 자신이며 동시에 대립하는 것 또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 구별된 것은 총체성이므로 가상이다. 그러므로 이 구별된 것 또는 빛을 비추는 절대자{scheinendes Aboslute: 즉 가상]는 자기 자신을 동일하게 정립하는 것일 뿐이다.”(논리학, GW11, 393)
이 구절에서 논의의 핵심은 곧 ‘가상’이 곧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대자와 가상(또는 양상)’, ‘가능성과 실제성’, ‘개체와 실체[개체의 관계]’의 개념을 서로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상은 무차별적인 실존이 아니라, 그 속에 절대자 즉 유적 본질이 자기를 비춘 것을 의미한다. 절대자의 비춤을 통해 실존은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이런 자기 부정성 때문에 가상은 곧 양상이라 규정된다.
실존적 개체에 본질의 빛이 비친다는 것은 곧 하나의 개체가 자기와 대립하는 타자와 배타적 통일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론 1편에서 설명했듯이 헤겔에서 본질로의 반성{수직적 운동)과 타자와의 관계(수평적 운동)는 상호 얽혀 있는 운동이다. 개체가 타자와 배타적 통일의 관계를 맺을 때 이 개체는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기의 대립물이니, 곧 총체성이라 한다.
개체가 타자와 맺는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실체이다. 이 실체는 유적 본질로서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한 것이다. 가상을 매개로 해서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하여 실체가 된다. 이런 가상을 통해 절대자가 실현되는 과정이 곧 가능성(유적 본질: 절대자)이 실현되어 실제성(실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상에서 가상과 총체성의 관계에 관해 설명했다. 이제 실제성 편 3장 절대적 관계 장에서는 논의는 개체들이 타자와 맺는 관계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로 옮겨진다. 이 관계가 발전하는 단계에 따라서 다양한 실체가 출현한다. 개체들이 서로 무차별하면 우발성의 관계이며, 개체들이 구체적으로 관계하면 그것이 곧 인과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개체가 상호작용하게 되면 그 관계가 곧 목적론적 관계이고 여기서 필연성은 자유로 발전한다.
3)
이런 실체적 관계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우발성[Akzidenz]의 관계로서 실체이다. 헤겔은 이를 단순히 실체 관계라고 하는데, 그 관계를 이루는 요소가 곧 우발적 존재*이다.
*주) 이 ‘우발성’은 앞에서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실현할 때 등장한 추상적 필연성으로서 ‘우연성’과 관련된 개념이다. 그래서 ‘우발적 존재’는 흔히 ‘우연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는 그때 나온 ‘우연성’과 구별하여 우연하게 등장한 개체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우발적 존재’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이는 실체적 집단을 이루는 한 원소로서 개체적 존재이다.
즉 어떤 것이 우연히 실제적으로 될 때, 그것이 곧 우발적 존재다. 이 우발적 존재는 자립적인 실존이며, 타자에 대해 무차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발적 존재가 서로 맺는 관계 즉 실체는 공허, 무일 뿐이다. 우발적 존재는 각자 특정한 내용을 지닌 것이지만, 형식상 서로 동일한 것이다. 동일한 것이 무차별한 내용의 측면에서 우발적이며 형식적 동일성의 측면에서는 곧 실체적이다.
우발적 존재는 마치 점이 들어 있는 공허한 공간과 같다. 이 공허한 공간은 긍정적으로 보면 모든 우발적 존재에 공통적인 동일한 것이지만, 동시에 모든 우발적 존재를 받아들이는 공허한 것이다. 이 공허한 공간과 같은 실체가 곧 우발적 존재의 토대가 되는 실체이다.
공허한 공간이 점과 구별되어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이 일반적 실체 역시 우발적 존재에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실체의 측면과 우발적 존재의 측면은 서로 대립하지만, 서로 동전의 이면과 같이 관계한다.
4)
이 관계의 구체적 예로서 앞에서는 형식 논리학에서 논리적 형식과 명제 내용 사이의 관계를 들었다. 논리적 형식은 명제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외면적인 동일성이고, 각 명제 내용은 서로 고립적이며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이제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우발적 존재와 일반적 실체의 관계는 마치 개별 인격과 추상적 법의 관계와 같다고 하겠다. 인격은 법적 인격이며 인격의 내용은 개별적이지만, 인격의 형식은 법적으로 인정되며, 모두에게 평등하고 동일한 것이다.
명제의 논리적 형식이나 법적 인격은 긍정적으로 보면, 추상적인 동일성이며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형식이나 인격은 공허한 공간처럼 모든 명제 내용이나 인격의 모든 구체적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우발적 존재와 일반적 실체의 관계는 ‘현상’ 장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 같다. 다만 전체와 부분에서 부분은 지속성이 없는 개별자(물체)에 지나지 않았지만, 여기 실체적 관계에서는 실체를 바탕으로 전개되기에 이 우발적 존재는 그 자신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하나의 실체 즉 종적 개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헤겔은 이 우발적 존재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규정하는데, 이 우발적 존재는 하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이면은 공허이니,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실제성이고 실체이지만 공허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가능성이고 절대자이다.
이 두 측면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결합하니,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 공허와 개체, 본질과 존재는 직접 자기의 반대로 전도한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타자이며 이를 통해 서로 타자를 비춘다.
“이 빛남은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형식의 동일성으로서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은 최초에는 생성이며, 생성과 소멸의 영역으로서 우연성이다. 왜냐하면, 가능성과 실제성의 관계는 직접성의 규정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 양자가 서로 직접 전도하는 것이며 각자가 그에게 다만 타자인 것으로 직접 전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는 가상이므로, 가능성과 실제성의 관계는 또한 동일화하는 또는 타자에 자기를 비추는 반성이다. 따라서 우발성의 운동은 그 계기 모두에서 존재 범부과 본질의 반성 규정이 서로 비추는 것을 서술한다.”(논리학, GW11, 394)
5)
우발적 존재에서 가능성과 실제성은 끊임없이 교체한다.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이 창조인데, 이 창조의 근거인 가능성은 곧 공허 즉 심연이므로 아무 근거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직접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독자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므로 존재할 뿐’이며 자기를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이유 없이 존재하는 공연[空然]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우발적 존재는 공허를 그 근거로 하므로 자기 내에 부정성을 지니고,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다시 몰락하여 공허라는 가능성으로 되돌아간다. 그 존재는 헛되고 헛된 존재이다.
마치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감각적 질이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명멸하는 것이었듯이, 우발적 존재 역시 창조되었다가 다시 몰락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이런 우발적 존재의 창조와 소멸은 우발적 존재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 창조와 소멸은 실체가 되는 공허의 위력[Macht]으로 나타난다. 공허는 근거가 되어 창조하며 근거가 공허이므로 또 소멸한다. 공허가 근거이므로 갑작스럽게 출현하지만, 근거가 공허이므로 존재하는 즉시 사라질 운명이다.
“실체는 자기가 가능적인 것을 그 안에 옮겨 놓은 실제성이 지닌 내용을 통해 자기를 창조하는위력으로 계시하며 자기가 실제성을 그 안으로 옮겨 놓는 가능성을 통해서 자기를 파괴하는 위력으로 계시한다.”(논리학, GW11, 395)
가능성(몰락)과 실제성(창조)이라는 형식은 공허라는 실체를 내용으로 하며, 이 형식은 갑자기 출현했으나 이미 몰락하는 것이며, 몰락하는 가운데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다. 실체는 매번 임의로 특정한 내용을 산출하고 다시 회수하는 가운데 내용상 끝없이 변천하며 또한 형식상 가능성에서 실제성으로, 실제성에서 가능성으로 전복하기를 영원히 계속한다.
“그러므로 실체의 위력은 영원히 자기를 형식과 내용의 구별로 분화하며, 영원히 이런 일면성에서 자기를 순화하지만, 이런 순화 자체 속에서 규정과 분화로 도로 떨어진다.”(논리학, GW11, 395)
6)
실제적인 우발적 존재는 그 자체 우연한 것이기에 다른 우발적 존재도 가능하며, 그러기에 여러 우발적 존재가 출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용상 변천하며 형식상 전도한다. 이런 내용적으로나 형식상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원천은 우발적 존재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의 본질인 공허한 실체에 있다.
이 일반적 실체는 그 자체 내용상 공허한 것이고 다만 형식상 일반적이지만, 모든 개별적 내용을 창조하고 다시 몰락시키는 가운데, 이는 겉보기에 마치 하나의 우발적 존재가 다른 우발적 존재를 추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는 우발적 존재가 아니라 실체 자체의 위력이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한 생산자가 다른 생산자를 패배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겉보기의 모습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시장 자체가 자기를 전개하는 위력에 지나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또는 옛날 첩들의 싸움과 같다. 그들은 서로 죽어라 싸우지만, 사실 그들을 싸우게 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적인 남자다.
“그런 우발적인 것은 다른 우발적인 것에 대해 위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은 실체의 위력이 양자[우발적인 것]를 자기 내에서 포괄하면서 부정성을 지닌 것으로서 양자에 부등한 가치를 정립하면서 하나는 소멸하는 것으로서 다른 하나는 다른 내용을 지니고 발생하는 것으로서 규정한다.”(논리학, GW11, 395)
“하나의 우발적 존재가 다른 우발적 존재를 쫓아내는 이유는 다만 하나의 우발적 존재를 고유하게 존속하게 하는 것이 형식과 내용의 총체성[일반적 실체]이며 이 우발적 존재는 다른 우발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런 총체성 속에서 존속하는 것에 못지않게 몰락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95)
이런 실체의 위력을 통해 우발적 존재는 명멸하는 모순에 처하게 되며 이런 모순을 극복하면서 인과적 관계로 이행한다. 우발적 존재가 서로 무차별한 실체이었다면, 인과적 관계에서 개체는 한편으로 자립적이며 ‘단순한 자기 동일성’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이어서’ 서로 관계한다.
“이 우발성은 자기에 대립하여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서 규정되며 동시에 자기 관계하는 단순한 자기 동일성으로 규정되니 독자적[fuer sich]으로 존재하는 위력적 실체이다. 그러므로 실체 관계는 인과 관계로 이행한다.”(논리학, GW11, 3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