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6년 봄 제70회 정기학술대회 ‘생성과 소통의 철학을 향해 : 이규성 철학 연구 심포지엄’ 20260613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2026년도 한철연 봄 제70회 정기학술대회는 故 이규성(1952~2021) 선생님의 철학 연구를 주제로 거행되었습니다. 선생이 남긴 학술적 유산을 후학들의 시선에서 되돌아보고,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철학계의 바람직한 연구 방향을 모색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주제 : 생성과 소통의 철학을 향해 – 이규성 철학 연구 심포지엄
일시 : 2026년 6월 13일(토), 오후 1시(13:00~18:00)
장소 : 숭실대학교 진리관 3층 304호
▷ 개회사 13:00 회장: 이병태(경희대학교)
【제1부 소통과 연대의 철학】사회: 이관형(강서대학교)
이규성 철학 연구의 출발점에 서서 발표: 이정호(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이규성 철학에서 의지와 소통의 공동체의 가능성: 쇼펜하우어, 박은식, 최제우, 최시형을 중심으로 발표: 연효숙(연세대학교)|토론: 이종란(성균관대학교)
‘심파테이아’에서 ‘영적 코뮤니즘’으로 – 이규성 사유의 특징과 지향 발표: 이병태(경희대학교)|토론: 박영미(한양대학교)
【제2부 이규성 철학의 정신과 그 계승】사회 : 이지(이화여자대학교)
이규성 철학과 생성의 철학[1] –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발표: 이병창(동아대학교)|토론: 최유진(경남대학교)
이규성의 정주학 이해와 생성으로서의 ‘자유’ 발표: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토론: 김정철(충북대학교)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의 방법론적 계승: ‘내외합일’과 ‘내외불화’의 긴장과 교차를 중심으로 발표: 박민철(건국대학교)|토론: 오주연(건국대학교)
유튜브 영상
【제1부 소통과 연대의 철학】https://www.youtube.com/watch?v=pnd4OAu5iUM
【제2부 이규성 철학의 정신과 그 계승】https://www.youtube.com/watch?v=ke2fr3Zou0E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6년 4월 월례발표회 영상 : “주디스 버틀러의 몸과 물질의 정치학: 인간주의와 구조주의 사이에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6년 4월 월례발표회 “주디스 버틀러의 몸과 물질의 정치학: 인간주의와 구조주의 사이에서”
일시: 2026년 4월 12일 일요일 2시 장소: 온라인(ZOOM)
주제: 주디스 버틀러의 몸과 물질의 정치학: 인간주의와 구조주의 사이에서
발표자: 이승준
발표 소개: 버틀러의 물질과 몸, 그리고 수행성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다. 버틀러는 이를 젠더와 수행성을 둘러싼 아포리아를 통해 접근하는데, 그 아포리아의 내용은 이렇다. 한편으로 젠더가 선택되거나 구성되는 것이라면, 선택하는 주체를 미리 ‘인간주의’나 ‘의지주의’적으로 상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근대가 상정하는 주체의 형이상학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젠더가 강제되는 것이라면, 수행성이나 행위성은 어떻게 젠더로부터 도출될 수 있겠는가? 젠더의 강제성을 강조하면 문화적 결정론의 덫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 버틀러는 ‘구성적 외부’를 통해 구성이나 수행성이 단순히 주체의 의지의 발현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수행적 반복이 권력 안에서 권력에 순응/위반/도전하면서 권력 및 몸과 물질을 구성한다는 테제를 제시한다.
유튜브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QEBCeZ8MtwI
카뮈 ‘이방인’에 관한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해석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카뮈 ‘이방인’에 관한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해석 관해
1)
기다리던 영화 오종 감독의 ‘이방인’을 보았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내게 특별한 소설이었기에 이 소설에 대한 오종의 해석이 궁금했다.
어릴 때 집에 아버지가 아마도 월부 전집 판매상인 친척을 돕기 위해 사놓은 카뮈 전집이 있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방인’을 읽었다. 그 때문이었을 텐데, 대학 시절 당시 프랑스에서 갓 귀국했던 김화영 교수의 ‘이방인’ 원서 강의를 문법만 아는 수준에서 들어가 들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카뮈에게서는 감각적인 느낌이 중요하다는 말만 기억되었다. 바다의 냄새와 차가운 파도 거품의 느낌, 여인의 살갗이 주는 감촉, 뜨거운 태양이 주는 아득한 감각을 이해해야만 카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인은커녕, 내륙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나, 당시까지(대학 2년생이었는 데도)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는 나로서는 김화영 교수의 감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태양이 뜨겁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그 후 나이 들어 학생들의 강요 아닌 강요 때문에 한 번 더 이방인을 읽은 적 있었고 그때는 그런 감각을 약간은 이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이번에 오종 감독의 영화를 기다린 것도 그런 의문 때문이었다. 오종 감독 역시 카뮈 ‘이방인’처럼 이해되지 않는 잔인한 살해를 소재로 한 영화로 유명하니, 어쩌면 잘 다루었으리라 생각했다.
2)
영화의 인트로가 시작되자마자, 프랑스 식민지 지배에 관한 대립한 주장이 등장했다. 하나는 식민 지배자의 라디오 연설이고 다른 하나는 담벼락에 쓰인 저항자의 구호였다. 그 외에도 감독은 원작에 그려지지 않는 도시 배경을 통해 식민지적 지배의 흔적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원주민 출입금지’라는 푯말이다.
감독은 원작과 달리, 뫼르소가 뜨거운 열기로 아른거리는 감옥 복도를 걸어, 어두운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감옥에 들어간 뫼르소의 회상을 통해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하기까지 과정을 그려내는데, 이 과정 자체는 원작과 다르지 않다.
감독은 원작 가운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두 인물 즉 개를 학대하는 남자의 이야기와 사건의 발단이 되는 아랍인 여자를 정부로 둔 친구 레몽의 이야기를 부각한다. 이 두 에피소드는 공통적인데, 즉 둘 다 타자를 학대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하고 심지어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사이에는 어떤 권력 관계가 드러나는 데 즉 표면적으로는 지배적이면서도 사실은 오히려 의존적이라는 관계다.
원작에서 카뮈가 이 두 에피소드를 소개한 것은 인간의 행위가 지닌 부조리한 측면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면서도 잔혹하게 대하는 것은 인간 심리의 이해 불가능한 집착이나 폭력성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종 감독은 다른 관점에서 이 두 에피소드에서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관계는 동물이나 여자에 대한 관계이지만, 감독은 여기서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인 원주민 사이에 관계를 읽어내는 듯 보인다. 이것은 영화에서 감독이 부여한 인트로나 식민지 지배 흔적이 해석에 미친 영향이다.
3)
사건에 관한 원작과 감독의 해석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 마지막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할 때의 장면이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마송의 별장에서 여자들의 울음소리(레몽이 다친 것 때문에)를 피해 나간다.
해변에는 여전히 태양이 내리쬐었고, 주인공은 바위 뒤 신선한 샘이 떠올라 그리 갔으나 거기서 레몽을 칼로 해친 아랍 청년을 만났다. 아랍 청년은 누운 채 칼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주인공은 주머니에서 손으로 총을 잡은 채 그에게 다가간다. 피할 수 있었는데도, 해변의 뜨거운 햇볕이 그가 돌아서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 한다.
아랍 청년은 “웃고 있는 듯”했고, 주인공은 혈관이 거칠게 뜀박질했으며 불타는 태양을 견딜 수 없었다. 주인공이 다가가자 아랍 청년은 여전히 누운 채로(이는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의미한다) 칼을 빼 들어 주인공을 겨눈다. 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번쩍였고 불타는 검처럼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바다는 소용돌이쳤고, 하늘은 불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주인공은 총을 꺼내 발사했다. 첫 발을 쏘고 이어서(이미 저항의 능력이 없는데도) 네발을 더 쏜다.
오종의 영화에서도 여전히 햇볕은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원작에도 바다의 소용돌이가 묘사되어 있으나, 그것은 최종 격발 순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별장에서 그의 마음을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포말을 통해 그려낸다. 어떤 분노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말해 준다.
원작과 달리 영화는 별장에서 나가기 전 주인공 마음속의 분노를 그려냄으로써, 이 분노를 진정하려 별장을 떠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랍 청년을 만난 것은 여전히 우연적인 사건이지만, 그의 마음에 분노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분노가 사건의 동기로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은 아랍 청년의 얼굴에 미소를 “웃고 있는 듯했다”로 모호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아랍 청년의 얼굴이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상당히 오래 강조해서 묘사한다. 그것은 경멸이나 조롱과 유사한 미소였다. 이 미소는 주인공의 행위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4)
원작에서 카뮈는 인간의 행위는 자유로운 선택이고, 주인공의 행위는 비록 부조리한 현실 때문에 파국에 이르렀지만, 어떻든 그 자신이 행위한 결단으로 설명된다. 자주 언급된 햇볕의 영향은 그의 행위를 지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다. 이 햇볕은 그의 합리적 지성을 혼란스럽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행위의 원인은 아니다. 그 행위는 동기도 없고 그 자신에 해로운 것이지만, 그는 결단했다. 그 행위는 이유 없는 행위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이유 없는 행위라는 개념은 2부에서 주인공이 감옥의 침대에서 찾은 기사를 통해 암시된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여관집 모녀가 해외에서 성공하고 돌아온 자기 아들을 모른 채로 살해하는 사건이다. 이는 돌아온 아들이 어머니와 동생을 놀라게 하기 위한 단순한 이유로 자기 신분을 가렸기 때문인데, 그 결과는 그의 죽음은 물론이고 모녀의 자살로 이어졌다.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인공의 행위를 이렇게 이유 없는 부조리한 행위로 해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오종은 이런 해석을 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오종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햇볕의 영향은 합리적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주인공을 이끈 동기가 있다고 본다. 그 동기는 곧 주인공의 분노와 상대의 비웃음과 조롱이다.
주인공 뫼르소를 분노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식민지 지배자의 일원으로서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아랍 청년이 해쳤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뫼르소 자신은 아직 자신에 대해 반성하지 못한 소박한 식민지 지배자층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 사실 회사에 고용된 자이고 선량하지만, 지배층으로서 오만은 버리지 못한 자로 해석된다.
그가 권총을 발사하게 된 최종적 결정 동기는 아랍 청년의 얼굴에 어린 조롱과 경멸의 미소가 아니었을까? 이 조롱과 경멸의 미소가 그의 심정을 치게 만든 이유는 사실 그가 이미 무의식적으로나마 죄의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래도 표면에서는 자신의 지배자로서 권리가 정당하다고 믿는다. 아마도 대부분의 식민지 이주민이 그런 상태일 것이다. 카뮈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이런 식민지 이주민의 대표로서 뫼르소를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에 대한 조롱과 경멸에 부딪혔을 때 발작적으로 행동한다. 이런 발작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나 나치즘적인 폭력 행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원작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1부에서는 뫼르소의 행위가 서술된다. 2부에서는 뫼르소의 사건을 둘러싼 재판이 그려진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재판에 임하지만, 마치 자기가 구경꾼인 것처럼 행동할 뿐이다. 원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자는 경관과 뜨거운 악수를 했다. 그 순간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부르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슷한 부류끼리 모여 즐거워하는 사교 모임 같았다. 그리고 내가 괜히 낀 사람, 잉여물 같다는, 마치 불청객 같다는 이상한 느낌이 마음을 맴돌았다.”
“모든 게 나를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 가끔은 모두의 말을 가로막고 외치고 싶었다. 세상에, 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인도 중요합니다.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따져보면 할 말이 전혀 없었다.”
원작은 주인공의 이런 태도를 실존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소외되어 있다. 이런 소외된 구조에 관한 관심은 원작에서 감옥의 구조가 지닌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통해 암시한다. 또한, 이런 소외는 재판에 임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가 저마다 임하는 역할 상 불가피한 결과다.
이런 소외는 사형수를 처형하는 기계적인 무자비한 수단[기요틴]이나 구토를 하면서도 공개 처형을 구경 간 아버지의 심정[“독을 탄 기쁨”], 그리고 최후로는 어찌하든 사형수의 항복을 얻고자 말겠다고 결심한 사제의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6)
소외된 세계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는 일종의 무관심이다. 이 무관심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주인공은 낮에는 종일 상고를 생각하지만, 결국 포기한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사실 서른에 죽든 일흔에 죽든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당연하다. 어찌 됐든 다른 남성이나 여성이 살아갈 테니까”
주인공은 심지어 마리에 대해서조차 더는 마음이 아프지 않다. 그가 죽고 나면 다들 자기를 잊을 것이며 죽은 이상 그들과 그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는 마음이 아프지조차 않았다.
무관심한 주인공의 태도에서 보면, 감옥을 찾아온 신부에게 터뜨리는 분노는 특이하다. 사제가 집요하게 믿음을 강요하자, 그는 마침내 사제의 깃을 부여잡고 소리친다. 이때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분노”가 뒤섞였다.
“[당신의 확신은] 그래 봤자 여성의 머리카락 한 올 값어치도 없는 확신일 뿐이야, 자기가 살아 있긴 한지도 모를걸? 산송장처럼 지내잖아.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보여? 그래도 난 내게 확신했어. 모든 것에 확신했지.”
원작은 두 세계를 대비시킨다. 사제의 삶과 주인공의 삶이다. 사제의 삶은 의미가 부여된 것이지만, 그 의미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산송장의 삶이다. 사제의 삶만이 아니다. 결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마리나, 개나 여자를 학대하면서도 집착하는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반면, 그의 삶은 순간에 자기가 확신하는 느낌에 따라서 산 삶이니 충만하고 아무리 짧다더라도 더 풍요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모든 의미란 무의미해진다.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살며, 그건 그의 특권이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균등해진다. 그러기에 인간은 살아 있는 순간, 그 순간의 확실성, 느낌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모든 삶이 이런 죽음 앞에서 결국 사라질 무의미한 것이란 점에서 그는 더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니, 마음의 평온을 느낀다. 이제 죽음 앞에서 악도 사라지고 물론, 희망도 사라지니, 이 무차별한 평등의 세계 “징조와 별로 가득한 밤 앞에서”, 그는 오히려 다정함을 느끼게 된다.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씻겨내고 희망을 비워냈다는 듯, 징조와 별로 가득한 밤 앞에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이와 같은 발언은 사실 주인공의 발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가가 개입한 작가의 말로 보인다. 그런데 부조리한 세계에서 소외된 자가 느끼는 자기 확실성이 과연 이렇게 목청 높여 강조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1부에서 태양 때문에 살해했다는 뫼르소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해되지 않는 말이지 않을까?
7)
원작이 실존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주인공의 태도를 이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재판에 관한 묘사에서 영화와 원작 역시 유사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을 보여준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은 어떤 ‘키가 작은 여자’에 주목한다. 카뮈는 주인공이 그녀를 식당에서 봤던 여성이라고만 소개한다. 다만 주인공은 그녀가 입은 재킷을 기억하여 단호한 표정을 기억한다. 이 여성을 주인공이 왜 기억하는지, 그녀가 왜 이 재판정에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여성을 친구 레몽의 정부였던 아랍 여자로 소개한다. 재판이 휴정하는 중에 주인공의 여자인 마리가 그녀를 찾아가서 대화한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녀는 마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마리가 자기도 여기가 고향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마리를 비웃는다.
또 하나, 원작에서 주인공이 처음에는 여러 아랍인 죄수들과 함께 거주하는 방으로 끌려가는데, 아랍 죄수들이 그에게 냉담하게 대한다는 말은 없다. 그리고 이어서 “수감자들이 어떻게 거적을 이용해서 잠자리를 만드는지를 알려줬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크게 주목받을 만하지 않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가 아랍인을 죽였다고 하자, 그에게 냉담하다. 그는 밤에 거적도 없이 돌바닥에 누워 자고 있었다. 한참이나 어떤 아랍인이 거적을 가져와서 그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준다. 이것은 아랍인 하나가 그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이었으나(그가 저지른 행위에 비추어 본다면 절대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친절인데) 이 행위가 주인공 뫼르소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는 것으로 묘사된다.
8)
2부에서 영화가 원작과 차이가 있는 또 다른 점은 예심 판사가 주인공에게 물은 질문이다. 원작에서 예심 판사는 권총을 연이어 발사했는지 아닌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주인공은 솔직하게 말한다. 첫 발을 쏜 조금 뒤에 다음 네 발을 쏘았다고 했다. 예심 판사는 첫발을 왜 쏘았는지는 묻지 않으면서, 왜 쓰러진 육신을 또 쏘았는지 물었다. 예심 판사는 그게 아주 중요한 물음이라면서 다그쳤다.
아마도 예심 판사가 보기에 첫발은 위협에 대한 대응일지 모르지만, 뒤의 네 발은 가혹한 행위이니 명백히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대답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시뻘건 해변과 이마 위에 타오르는 태양을 떠올렸다.” 즉 주인공에게 첫발이나 나머지 네 발이나 모두 태양 때문이었기에 차이가 없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은 다르게 그려진다. 예심 판사가 아랍 청년이 칼을 빼 들고 위협했는가를 묻는다. 이 사건에서 주인공이 아랍 청년이 칼을 빼 들고 그를 위협했다고 말한다면, 앞서서 레몽이 그의 칼에 의해 상해를 받았으니, 어느 정도 정상을 참작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주인공은 예심 판사가 이를 물었을 때, 솔직하게 대답한다. 즉 아랍 청년이 그를 위협했는가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주인공이 마음만 먹으면 위협받았다고 해도 될 일이다(그 장면을 본 목격자는 없다). 그런데 그가 그냥 솔직하게 말한 것은, 그가 법을 몰랐다기보다 어쩌면 그가 이미 자기를 구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재판에 대한 주인공의 자포자기적인 태도는 다른 점에서도 드러난다. 마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면회를 왔을 때, 마리는 나오면 결혼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과연 그렇게 될까?’라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뭐라도 말하려고 한 말이었다.”라고 말한다. 즉 자기가 나가지 못할 것은 안다는 것이다.
9)
재판과 관련하여 영화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감옥에서 아랍인이 그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 주인공에게 깊은 울림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잠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단순한 잠자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1부에서 아랍인을 살해할 때 느껴지던 어떤 분노가 진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결국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즉 살해 위협이 없었다는 증언)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그에게 재판은 위선적이었다. 재판에서 주로 장례식과 다음날 마리와의 관계가 초점을 이룬 것은 사실 아랍인의 살해는 당시 지배층이었던 프랑스인에게는 일상이었고 변호사나 마리의 이상한 무죄라는 확신은 이런 일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검사 역시 이를 건드릴 수 없었기에 주인공의 인성을 주로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이 점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에게 자신의 재판이나 처형은 일종의 속죄 과정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굳이 자기를 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 물론, 이 속죄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속죄는 아니다. 이 속죄는 지배자로서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속죄이며, 그가 바다나 신체에 대해 느끼던 감각적 확실성과 같은 연대 의식에 대한 느낌이 아닐까 한다. 이 연대의식은 개와 사람, 남자와 여자, 프랑스인과 원주민 사이의 연대의식일 것이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사제에게 자신에 대한 확실성을 느낀다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오종의 해석은 결말에서 죽음 앞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다정한 무관심’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성이라는 개념만큼은 오히려 더 분명하게 부각시켜 준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9- 판단에서 추론으로[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9- 판단에서 추론으로
1)
헤겔에서 개념 판단 형식은 단정 판단에서 개연 판단으로 그리고 자명한 판단으로 이행한다. 우선 단정 판단에서 주어는 눈앞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개별자이다. 술어는 ‘좋다’, ‘나쁘다’와 같은 양상어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 집은 나쁘다’라든가, ‘이 행위는 아름답다’ 등과 같은 판단이다.
여기서 어떤 것의 일반적인 개념이 판단자의 마음에 전제되어 있다. 이 일반적 개념은 앞에서 선언 판단을 통해 출현하는 일반적 본성이다. 이런 일반적 본성은 아직 ‘실제적[wirklich]’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므로 다만 주관적 사유 속에 있는 것이며,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당위로서 존재한다.
주어는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이 개별자는 “어떤 상태이거나 외적인 실존으로서 존재하므로””(논리학 2부, GW12, 85) 특수한 것[Besonderheit]이지만, 아직 그 특수성이 정립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판단하는 주관은 이 눈앞의 개별자가 그런 일반적인 개념 즉 당위에 속하는 상태를 지닌다고 단정하지만, 사실 이 개별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지는 주관적 단정에 속할 뿐이다.
단정 판단은 직관적으로는 주어와 술어가 통일되었지만, 이런 단정은 제삼자인 주관에 의한 것이며 이 개별자의 상태가 아직 무엇인지 명확하게 되지 않았으므로, 이 통일성은 잠재적[an sich]이고 내적일 뿐이며, 아직 정립되거나 드러난 것은 아니다.
단정 판단에서 개별자와 일반적 개념의 통일성이 양상어로 표현된다. 개념 판단의 주어 자체가 하나의 판단 즉 개별자와 일반적 개념이 결합한 판단이므로 이미 자기 내에 계사를 지니고 있다. 양상어는 주어에 속하는 판단이 지닌 계사가 이 주어에 대한 이차적인 판단이 지닌 술어로 출현한 것이다.
이런 단정 판단에서 주어가 직접적인 한, 그것과 일반적 개념의 구별이 들어 있으니, 이런 단정 판단은 곧 부정적 판단이다. 그러므로 단정 판단은 개연적인 판단으로 이행한다.
“따라서 이런 단정 판단이 지닌 확신에 대해 바로 그런 동일한 권리로 대립하는 판단이 서 있다. ‘이 행위가 좋다’라는 판단이 확실하다면 대립한 판단 즉 ‘이 행위는 악하다’라는 판단도 여전히 동등하게 평가된다.”(논리학 2부, GW12, 86)
2)
‘개연 판단’은 ‘의문스러운[problematisch]’ 판단이라는 뜻이다. 단정 판단에서 주어는 직접 눈앞에 있는 것이며 아직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다. 주어의 개별자가 어떤 것인지, 어떤 상태에 있는지가 파악되면서 개연 판단이 등장한다. 이 개연 판단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것이 좋다’라고 할 수 있다.
개별자가 지닌 상태 때문에 한편으로 이 개별자는 이 상태를 통해서 일반적 개념에 합치하는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이 개별자는 항상 이 상태 즉 합치하는 측면과 반대되는 상태를 동시에 지닌 것이기에 그런 측면에서는 일반적 개념에 합치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개연 판단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 즉 긍정인지 부정인지 무규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반성 판단에서 마치 단칭 판단이 하나의 임의의 개별자이므로 곧바로 특칭적인 판단이 되며, 이 긍정적인 특칭 판단에서 ‘몇몇이 그러하다’라면, 곧바로 ‘그런 몇몇과 다른 것은 그러하지 않다’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으니, 긍정적 특칭 판단이 부정적 특칭 판단으로 곧바로 이행하는 것과 같다.
가언 판단 역시 의문스럽기[problematisch]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가언 판단은 ‘P이면 Q다’라는 판단인데, P를 존재하게 하는 것 즉 주어는 ‘P가 아닌 것’도 포함하고 있기에 이 주어는 항상 다른 결과 R과 관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법칙 관계는 항상 부분적으로만 성립할 뿐이니, 이런 법칙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관계할 뿐이다.
특칭 판단이나 가언 판단이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갖는다는 점에서 개연 판단과 같지만, 개연 판단은 이런 무규정성이 판단 자체의 형식에 내재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주어인 개별성은 일반적 개념에 비추어서 판단되기 때문이다. 개별성은 개별성인 한에서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연 판단 자체에서 이런 긍정과 부정의 정립은 언급된 판단[특칭 판단이나 가언 판단]에서보다 더 내재적이다. 왜냐하면, 개연 판단에서 술어의 내용은 주어가 개념에 어떻게 관계하는가이며 따라서 이를 통해 직저적인 것이 하나의 우연적인 것이라는 규정이 그 자체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86)
개연 판단의 계사는 ‘이다’가 아니라 ‘일 수 있다’ 즉 가능적인 것이다. 이 가능성은 즉 긍정인지 부정인지 무규정성은 술어 때문은 아니다. 술어는 이미 일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어는 개별적인 것이고 직접 어떤 상태 속에 있는 것이기에, 이로부터 무규정성이 나오게 된다.
3)
주어의 상태가 술어의 일반적 개념, 당위와 합치해야, 자명한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어의 상태가 개념에 합치하는 일반적 상태로 고양되어야 한다.
여기서 이런 합치가 일어나려면, 주어의 개별자가 지닌 어떤 상태 즉 특수성이 추상적인 특수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헤겔에서 특수성은 이미 정립된 것인데, 그 자신이 다시 부정되면서 구체적인 개별성이 된다. 이 부정의 부정으로서 구체적 개별성을 통해 개념의 일반성이 회복된다.
그러므로 개별자의 자기 부정적인 상태가 곧 술어인 일반적 개념이나 당위에 합치하는 것일 수 있으니, 여기서 일반적 개념은 “자기의 대립물인 개별자를 통해서 자기와 연속된다.”
“주어와 술어는 서로 상응하고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 이 내용은 그 자체 일반성이 구체적으로 정립된 것이다. 즉 이 내용은 두 가지 계기를 지닌다. 한편으로 객관적 일반성 또는 유[일반적 개념]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별화된 것[구체적 개별성]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반적인 것은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기의 대립물을 통해서 자기와 연속되는 것이며 이 대립물과 통일로서 비로소 일반적인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88)
따라서 헤겔에서 자명한 판단에 이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런 자기 부정성을 결여한 것은 자명한 판단에 이를 수 없다. 예를 들어 ‘집’과 같은 것은 자기 부정성이 없으므로 자명하게 좋을 수 없으며, ‘행위’는 자기 부정성이 있으므로 자명할 수 있다.
자기 부정성을 지닌 것이 곧 주체이므로 결국, 자명한 판단의 주어가 되는 것은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주체가 되는 것이다.
4)
자명한 판단에서 술어는 일반적 개념이며 곧 실체이다. 반면, 주어는 주체이며, 개별자이다. 양자는 모두 구체적 일반성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이를 통해 판단에서 지속 출현했던 구별이 사라지고 개념이 지닌 동일성이 회복된다.
지금까지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것은 계사였다. 이 계사는 주어, 술어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존재였다. 이 존재가 제삼자, 판단하는 주관이다. 그러나 이제 자명 판단에 이르게 되면, 주어와 술어는 동일하게 되면서, 양자를 연결하는 계사가 주어, 술어와 통일된다. 계사는 주어 속에 있는 주체, 선험적 통각이며 동시에 술어 속에서 양상어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판단의 형식이 몰락한다. 그 이유는 우선 주어와 술어가 본래 동일한 내용이기 때문이지만, 두 번째로는 주어가 자신의 규정성을 통해 자기를 넘어 술어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셋째로 이런 관계가 술어로 이행했으며 다만 그 술어의 내용을 이루며 따라서 정립된 관계로 되거나 판단 자체가 된다. 그러므로 개념의 구체적 동일성은 선언 판단의 결과이었으나 개념 판단의 내적인 토대를 이루면서 전체적으로 자기를 회복한다. 이 내적 토대가 이제 처음으로 다만 술어 속에서 정립된다.” (논리학 2부, GW12, 88)
이제 주체인 주어 자신이 자기를 전개하여 자기를 술어화하고 이를 통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바로 이런 계사인 주체 자신이 전개하는 운동이 곧 추론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8-개념[양상] 판단 형식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8-개념[양상] 판단 형식에 관해
1)
흔히 ‘양상 판단’이라 알려진 것을 헤겔은 ‘개념 판단’이라 부른다. 양상을 표현하는 언어로 여러 종류가 있다. ‘좋다’, ‘나쁘다’와 같은 평가어 ‘해야 한다’나 ‘말아야 한다’와 같은 당위의 표현, ‘진리’나 ‘허위’와 같은 표현, 나아가서 시제를 나타나는 언어, 그리고 ‘아름답다’, ‘추하다’와 같은 미적 평가어 등이다.
이런 양상어는 어떤 대상이 지닌 성질이나 상태가 아니다. 양상어가 부가되더라도 어떤 것이 질적이거나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양상어는 흔히 어떤 대상에 대한 주관의 평가를 즉 진, 선, 미와 관련된 평가를 포함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양상어는 잘 보면, 어떤 사태에 관한 판단에 속하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판단’ 또는 ‘명제’의 속성이라 말해진다. 이미 판단이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런 하나의 판단이 다시 주어가 되어 여기에 양상어가 술어가 되면서 새로운 고차적인 판단이 만들어지면서 양상 판단이 형성된다.
진리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하나의 ‘명제’ 또는 ‘판단’이 주어가 된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나머지 경우에 양상 판단은 흔히 단순한 판단으로 다루어지면서, 주어로서 대상이 술어로서 양상어가 결합한다. 예를 들자면, ‘이 집은 좋다’라거나 ‘그 행위는 아름답다고’ 말해진다. 그 결과 마치 양상어가 대상의 속성이나 상태로 여겨진다.
헤겔은 이런 양상 판단이 진리 판단처럼 하나의 ‘명제’나 ‘판단’이 주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즉 여기서 주어는 ‘어떤 대상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하면서 일어나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즉 위에서 언급된 예는 곧 ‘(이런 상태에 있는) 이 집은 좋다’거나, ‘(그런 상태에 있는) 그 행위는 아름답다’라는 판단이 생략된 또는 암시된 판단이라는 것이다.
2)
더구나 이런 양상 판단에서는 이미 평가를 위한 개념이 전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집이 좋다’라고 할 때, 이미 ‘좋다’라는 평가는 어떤 것[‘집’]의 일반적 본질 즉 당위나 개념이 전제되고 있다.
이런 당위나 개념은 물론 평가자의 주관적인 생각에 그친 것일 수도 있으니, 이런 점에서 양상 판단은 흔히 주관적인 평가를 담고 있으며, 사태에 대한 주관의 관계를 즉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외적 반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개연[problematisch] 판단’은 주관이 임의적으로 내리는 것이며, ‘실연[assertorische: 단정] 판단’은 경험적 진리와 같이 개념에 적합한 우연한 현실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필연[apodictishc: 자명] 판단’은 수학적 진리와 같은 주관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판단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헤겔에서 이런 당위나 개념은 앞에서 나온 [배타적] 선언 판단 형식을 통해 밝혀진 객관적인 개념이다. 즉 선언 판단에서 일반적 유는 배타적인 선택지의 통일[P or -P]로 규정된다. 이 배타적 선택지를 규정하는 원리가 곧 일반적 유의 객관적 본질, 개념이다. 헤겔은 이 원리는 P와 -P의 [미분적] 관계로 규정된다.
이런 객관적인 개념이 이미 선언 판단을 통해 출현했으므로 이는 평가자의 사유 속에 깃들어 있는 주관적인 것이더라도 객관적인 당위이며 개념이다. 이런 당위나 개념은 양상 판단의 술어에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판단을 흔히 말하듯이 양상 판단이라 부르지 않고 개념 판단이라고 부른다.
“오히려 개념 판단은 객관적인 판단이며 그 이전의 판단에 대립하여 진리가 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개념 판단에서 개념의 근거는 외적 반성 속에서나 주관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 즉 우연적 사유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개념으로서 그 자신의 규정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84)
3)
앞에서 본질론 3편 실제성 편에서 헤겔은 실제성, 가능성, 필연성과 같은 양상 개념을 다루었다. 이때도 헤겔은 이미 실체가 잠재적으로 출현한 것을 전제로 했다. 그 때문에 양상 개념은 극히 한정적으로만 사용되었다.
본질론의 양상 개념에 상응하는 것이 판단에서는 개념 판단인데, 이 개념 판단도 이미 일반적 개념이 출현한 것을 전제로 하므로, 상당히 제한적으로만 적용된다. 이는 일상적인 생각과는 대립한다. 일상적으로는 양상 판단은 주관적 개념을 전제로 하므로 예를 들어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이 집은 좋다’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이 ‘좋다’라고 판단할 때 이미 일반적인 개념이 전제되고 있다. 이는 선언 판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개념[양상] 판단은 개별자가 이 일반적 개념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이것은 좋다’라고 할 때, 이런 판단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양상 판단이기는 하지만, 개념 판단은 아니게 된다.
이런 제한성은 사실 다른 범주의 판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으로 양의 판단에서 ‘몇몇은 빨갛다’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헤겔에서 양의 판단에 대응하는 반성 판단에서는 이미 술어가 ‘빨갛다’와 같은 추상적인 성질이 아닌 일반적인 속성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몇몇은 무게를 지닌다’라는 판단은 가능하지만, 위와 같은 ‘몇몇은 빨갛다’와 같은 판단은 가능하지 않다.
다른 모든 범주에서도 마찬가지다. 헤겔은 판단이 경험의 발전에 대응하여 발전하는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각 판단이 한정적으로 사용되는데, 물론 여기서 발전된 경험에 대응하는 판단이, 저급한 경우에 적용되는 퇴화적인 용법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므로 헤겔은 사람들이 ‘몇몇은 빨갛다’라거나, ‘이것은 [주관적 개념에 따라] 좋다’라고 말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용법은 판단 형식이 지닌 논리적 범주로서의 의미와는 무관한 용법이다.
결국, 판단 형식이란 그 자체가 인식적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판단 형식은 경험에 관한 반성을 통해 인식이 이루어진 이후 그 인식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판단 형식 자체를 가지고 거꾸로 인식의 수준을 가늠할 수는 있어도 판단 형식이 그 인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4)
따라서 ‘이 집이 좋다’라는 단순하게 보이는 양상 판단은 헤겔에서는 상당히 복잡한 판단이 된다. 즉 ‘(이런 상태에 있는) 이 집은 (집의 개념에 비추어 보면) 좋다’는 판단이 된다. 여기서 주어에는 사태가 은닉되어 있으며, 술어에는 개념이 은닉되어 있다.
이제 헤겔을 따라 양상 판단 대신 개념 판단이라 지칭하자면, 개념 판단에서 양상어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상어는 대상의 속성이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양상어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헤겔은 양상어의 의미를 계사의 의미와 연관시킨다.
원래 계사란 주어가 지시하는 개별자가 술어가 의미하는 일반성과 일치 여부를 말해주는 것이다. 헤겔은 양상어가 사태와 개념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 역시 하나의 계사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개념 판단의 주어 자체가 하나의 판단이다. 이 판단은 곧 ‘어떤 상태의 것이 일반적 본질이다’라는 판단이다. 양상어는 이런 판단에 대한 술어인데, 이는 곧 기초 판단의 계사가 자기를 밖으로 드러낸 것이다. 기초 판단에서 주어, 술어의 합치한다는 것이 술어에서 진리라든가, 좋다라는 양상어로 표현된 것이다.
“좋거나 나쁘며 진리거나 아름답고 정당하다 등의 술어는 사태가 전적으로 전제된 당위인 그 일반적 개념에 비추어 측정되고 그런 당위와 합치하는가를 표현한다.””(논리학 2부, GW12, 84)
그런 점에서 양상어는 사실 없어도 되는 것이다. 이미 전제된 기초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가 합치한다면, 진리이며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상어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기초 판단에 대해서 이를 진리로 표현할 수도 있고, 도덕적 선이나 미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를 진리나 선이나 미와 같은 특정한 양상어로 표현했다는 것에 독특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는 전제된 기초 판단이 지닌 인식의 상태와 연관된다. 마치 절대정신이 이런 인식 상태에 따라서 종교, 예술, 철학으로 나누어지듯 양상어도 그런 상태의 차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5)
헤겔은 이런 개념 판단의 형식은 ‘단정 판단’에서 ‘개연 판단’으로 그리고 ‘자명한 판단’으로 나간다고 한다. 개념 판단 형식의 순서는 칸트와 구별된다. 칸트는 ‘개연 판단’, ‘실연[단정] 판단’, ‘필연[자명] 판단’으로 나간다.
이런 판단 형식의 발전은 본질론에서 3편 실제성 편에서 다룬 양상 개념과 상응한다. 거기서 ‘실제성’, ‘가능성’, ‘필연’성이라는 양상이 다루어졌는데, ‘단정 판단’은 ‘실제성’과, ‘개연 판단’은 ‘가능성’과 ‘자명 판단’은 ‘필연성’과 상응한다.
개념 판단 형식의 출발점 즉 단정 판단 형식에서 이미 개념과 당위가 술어 편에 내재하고 있다. 좋다거나 진리라고 할 때 그 일반적 기존, 원리, 본질은 이미 확립된 것이다. 다만, 아직 주어는 개별적인 사태이므로 이런 개념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연하게 들어맞을 수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그 개념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선언 판단에서 개념은 일반적 본성과 그것이 특수화한 것 사이의 동일성으로 정립된다. 그것에 따라서 판단에 속한 관계가 지양되었다. [주어인] 일반성과 [술어에서의] 특수성의 이런 구체적 관계는 우선 아직 단순한 결과일 뿐이다. 이제 더 나가서 보자면, 우선 이 관계가 포함하는 계기들이 그 속에서 몰락했지만, 특정한 자립성을 지닌 채 서로 대립하기에 이르지는 못했다.”(논리학 2부, GW12, 84)
“이 특수한 것들의 부정적 통일성은 다만 전자 즉 객관적 일반성 속으로 되돌아갈 뿐이며 아직 제삼자 즉 개별성에로 자기를 규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결과가 부정적인 통일인 한에서 그런 결과는 사실 이미 이런 개별성이지만, 다만 이 하나의 규정성은 이제 그 부정성을 정립해야 하며, 자신을 양극으로 분화하여 이런 방식으로 완전하게 추론으로 발전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85)
여기서 객관적 일반성은 선언 판단의 주어인 일반적 유이다. 개념 판단에 이르면 이런 일반적 유가 실제적인 개별자 속에서 출현한다. 예를 들어 ‘집 일반’이 ‘이 집’ 속에 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판단의 운동은 주어인 개별적 사태가 일반적 유에 포섭되는 운동이다. 그러면 주어는 일반적 유가 되고 술어인 일반적 본성에 적합하게 되면서 자명한 필연적 판단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어나는 운동은 주어 편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따라서 반성[양] 판단에서 일어나는 주어의 포섭 운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7-배타적인 선언 판단 형식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7-배타적인 선언 판단 형식에 관해
1)
정언 판단 형식이나 가언 판단 형식도 이미 실체성을 전제로 한다. 정언 판단 형식에서 실체는 우연한 개체들이 이루는 무차별한 전체 즉 ‘외적인 개별성’의 관계이다. 가언 판단 형식에서는 두 존재 사이의 관계가 정립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다만 부분적이며 아직 두 존재에 대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부정적 동일성’의 관계라 한다.
이런 가언 판단 형식에서 하나의 존재는 이미 다른 존재에 대해서 특정한 것이다. 즉 A의 존재는 B의 존재를 전제로 ‘B가 아닌 것’으로 규정된 것이다. 가언 판단 형식에서 두 대립하는 규정성 사이의 관계가 출현했지만, 아직 두 대립하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A가 존재하면, B가 존재하게 되니, 이런 관계는 부분적이며, 여기서 무수히 많은 다양한 관계가 출현한다. A는 C와 관계하며, 또는 D와 관계하고 B는 F와 관계하면서 무수한 관계의 네트워크가 펼쳐진다. 정언 판단 형식에서 각 존재가 무차별한 것(객관 논리학에서 ‘실재성’, ‘실존’에 해당)이었으나 가언 판단 형식에서는 각 존재는 추상적인 특수성(객관 논리학에서 ‘유한성’, ‘현상’에 해당)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경험을 통해 배타적 관계가 출현한다. 이 배타적 관계는 A이거나 -A인 것의 관계이다. A는 이제 ‘-A가 아닌 것’ 즉 -(-A)로 규정되니, 규정성이 다시 정립된 것 즉 ‘정립된 규정성’이다.
이때 A와 -A 사이에 다른 것은 없으며(배중율) 그 결과 A와 -A가 전체, 총체성을 이룬다. 이처럼 배타적 선언지의 형태를 지닌 판단 형식이 곧 선언 판단 형식이다. 전형적인 예를 들자면, 생물체에서 암수의 관계이다.
이 선언 판단 형식에 이르면 주어인 일반적 유로서 본질은 술어의 총체성으로서 실체로 실현된다. 양자 사이에는 “개념의 동일성으로서 일반성”이 출현하니, 각자는 “개념 속에 정립된 특수성”이다.(논리학 2부, GW12, 80)
“규정성이 갖는 직접성을 통해서 규정성의 각 계기가 구별된 것으로서 존재하며, 동시에 그런 특수성은 규정성의 관계를 이루는 규정성의 통일을 통해 그 규정성의 총체성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2부, GW12, 80)
2)
이런 배타적 선언지의 판단 형식은 주어는 구체적 일반성이며, “단순한 형태 속에 있는 유”이다. 술어는 마찬가지로 유이지만, 이 일반적 유는 이제 “구별된 규정의 총체성” 즉 실체이다. (논리학 2부, GW12, 80)
양자의 관계는 동일한 유가 다른 방식으로 출현한 것이므로 그것의 내포와 외연은 동일하다. 다만, 그것이 출현하는 개념의 형식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주어에서 유 즉 ‘일반성’이라는 개념 형식을 가지지만, 이는 ‘자기 내로 반성된 일반성’이다.
반면 술어에서 유는 자기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이니, 이는 ‘특수성’이지만, 이 특수성은 서로 대립하는 특수성으로 분화되며, 유의 전체 영역을 전개하면서, 이 대립하는 특수성은 대립 속에서 통일된다. 즉 술어는 “주어의 전체 영역을 그러나 특수성의 대결 속에서 보존하는” “특수성의 총체성”이다. (논리학 2부, GW12, 80) 이런 술어는 곧 유[Gattung]가 분화된 종[Art]의 관계이다.
“즉 한번은 유의 단순한 규정성으로서 다른 한 번은 바로 이 동일한 규정성이 자기가 구별된 것들로 전개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그러한 방식으로 유는 종의 특수성이 총체화된 것이며 이 총체성이 곧 유의 일반성을 이룬다. 특수성이 전개되면 술어를 이룬다. 특수성은 주어의 전적으로 일반적인 영역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이 일반적 영역을 특수성의 대결 속에서 포함하는 한에서 주어보다 더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80)
선언 판단 형식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헤겔은 이중적으로 규정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무엇이면서 동시에 무엇이 아닌 것“[sowohl als]이다. 즉 선언 판단 형식은 주어이면서 동시에 술어이다. 여기서 주어와 술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일성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즉 객관적 일반성은 그 특수성의 총체성에서 자신을 완전히 보존한다.
그러나 이 선언 판단 형식은 다른 한편 술어의 측면에서 보면 상호 대립을 표현한다. 그것은 ‘무엇이거나 그것과 다른 것이거나, 그 중간은 없는 것’[entweder oder] 이다. 여기서 각자는 특정한 구별이며, 서로 부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주어인 일반적 유는 “규정된 특수자의 통일로서 통일”(논리학 2부, GW12, 81)이다.
3)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왜 일반적 유가 이와 같은 배타적인 선언지의 형태로 출현하는가이다. 헤겔에서 일반적 유가 개체의 추상적 일반성이라면, 이 유가 실현된 종은 서로 무차별하다. 이런 경우 선언지는 경험적인 선언 판단 형식을 이루며, 이런 선택지 사이에는 내적인 분류의 원리가 결여한다.
이 선택지는 그저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것일 뿐이며 그 사이에는 배타적 선택성[entweder oder]의 관계는 없다. 비록 여기서 선택지가 완전하더라도 이 완전성은 경험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헤겔에서 선택지가 ‘부정적인 통일’의 관계 속에 있으면, 이런 선택지는 개념 규정에 따라서 보면 자기를 부정한 것을 다시 부정하는 것으로서 개별적 선택지는 이런 전체 속에 자기를 해소하면서, 그런 선택지 전체는 자기 내에서 완결된 것 즉 실체이며, 그것의 총체는 일반적 유를 이루는 것이다. 이때 분류의 원리는 일반적 유 자체에 내재하는 필연적 원리가 된다.
“경험적인 선언 판단 형식은 본래 배타적으로 선택적[entweder oder]임을 언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은 다만 어떤 주관적 완전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타적 선택은 그 선택지 이상의 것을 배제하며 자기 내에 들어 있는 총체적 영역을 완결한다. 이 총체성은 그 필연성을 객관적 일반자가 지닌 부정적 통일 속에 갖는다. 이 객관적 일반자는 개별성을 자기 내에서 해소하고 구별된 종을 규정하고 관련시키는 단순한 원리인 한에서 개별성을 자기 내에 내재적으로 갖는다. 그에 반해 경험적 종을 구별하는 것은 어떤 우연성이며 이 우연성은 외적인 원리거나 따라서 유의 원리가 되지 못하며 이를 통해서 또한 유에 내재하는 규정성이 되지 못한다.”(논리학 2부, GW12, 81)
추상적인 유의 예로서 헤겔은 색깔을 ‘빨간색, 녹색, 노란색 등’으로 구분하는 것을 든다. 이런 구분은 상이한 것일 뿐, 부정적 통일의 관계를 지니지 않는다. 반면, 색깔을 명암으로 구분할 때 이 구별은 대립을 통해 규정되는 것 즉 부정적 통일의 관계를 지닌 것이며 따라서 명암은 일반적 유로서 색깔을 분류하는 내적 원리가 된다.
4)
일반적 유가 이처럼 배타적 통일로 되는 이유는 유가 분화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립하기 때문이다. 즉 A에서 P가 나오면 원래 A는 -P가 되니, 그 결과 A는 P와 -P로 즉 배타적으로 분화된다.
예를 들어 동물에서 인간[P]이 분화되면, 인간이지만 출발점에서 서서 여전히 ‘동물성을 지닌 인간[-P]’과 분화된 인간성이 발전하면서 ‘인간적으로 된 인간[P]’이 출현하게 되는 것과 같다.
“주어와 술어의 구별은 개념의 구별이며, 그러한 술어 속에서 나타나는 종의 총체성은 마찬가지로 이런 개념의 구별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선언적 선택지의 서로 대립하는 규정은 이런 개념의 구별을 통해 생겨난다. 그런 선택지는 개념의 구별로 환원되니, 왜냐하면 선언적으로 분지하고 부정적인 통일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런 개념의 구별이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82)
“개념 자체는 이를 통해 또한 직접적으로 그것이 전개하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즉 -P]이며 그러나 다른 선택지는 이 일반성을 그 특수성 속에 해소한 것이거나 개념이 규정한 것으로서 규정성[즉 P]이니 바로 그 속에서 일반성이 총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82-83)
이런 배타적 통일의 관계는 대립적이거나 모순적일 수 있는데, 본질론에서 헤겔은 반성 규정을 다루면서 대립이 어떻게 모순으로 나가는가를 설명했다. 대립은 예를 들어 흑백과 같은 것이며, 여기서 양자의 관계는 아직 배타적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반면, 이런 대립하는 것 가운데 양자의 배타성이 드러나면서 모순적인 것이 된다.
개별적인 선택지가 우연적이고 그 통일은 주관적이라면 이 원리는 일반적 유에 대해 외면적이니, 이때 일반적 유는 개별 선택지에 대해 최근 유가 되지 않는다. 반면, 일반적 유가 ‘배타적 통일’로 분화하면, 이 일반적 유는 개별 선택지에 대해 반드시 최근 유가 된다. 왜냐하면, 이 일반적 유가 자기를 분화한 것이 곧 개별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가 종으로 선언적으로 분지하는 것이 아직 이런 형식[배타적 통일]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자기를 개념의 규정성으로 고양하지 못했으며 그 개념으로부터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논리학 2부, GW12, 83)
4)
선언 판단 형식은 이미 말했듯이 개념의 이중적인 분지이다. 우선 그것은 주어와 술어로 분지하며, 술어는 다시 배타적인 선택지로 분지한다. 주어는 단순한 규정이며 술어는 서로 대립하는 구별의 총체성이다.
판단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다. 추론은 판단 형식과 판단 형식의 관계이다. 선언 판단 형식에서 주어의 일반적 유와 술어의 실제 즉 구별된 것이 이루는 총체가 합일한다. 그러므로 판단의 운동은 끝난다. 개념의 구별된 규정성이 마침내 다시 통일로 환원되면서 개념이 회복된다.
처음 판단에 들어가기 전 개념의 계기는 아직 분화하지 않는 내적 계기이었다. 개념의 계기가 분화하면서 판단이 성립되었다. 판단의 운동을 통해 분화된 개념의 계기가 다시 통일되니, 개념이 회복되었지만, 이는 단순한 주관적 개념이 아니라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
“이제 판단 형식의 계사인 이 통일성 속에 양극단은 서로 동일함을 통해 몰락하니, 이를 통해 그 통일성은 개념 자체가 되며 사실 여기서 개념은 정립된 것이 된다.”(논리학 2부, GW12, 83)
개념이 정립되면서 개념과 주관과의 관계가 출현하니, 그게 바로 개념 판단 형식이다. 개념 판단 형식은 판단에서 추론으로 이행하는 매개 과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