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이방인’에 관한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해석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카뮈 ‘이방인’에 관한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해석 관해
1)
기다리던 영화 오종 감독의 ‘이방인’을 보았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내게 특별한 소설이었기에 이 소설에 대한 오종의 해석이 궁금했다.
어릴 때 집에 아버지가 아마도 월부 전집 판매상인 친척을 돕기 위해 사놓은 카뮈 전집이 있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방인’을 읽었다. 그 때문이었을 텐데, 대학 시절 당시 프랑스에서 갓 귀국했던 김화영 교수의 ‘이방인’ 원서 강의를 문법만 아는 수준에서 들어가 들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카뮈에게서는 감각적인 느낌이 중요하다는 말만 기억되었다. 바다의 냄새와 차가운 파도 거품의 느낌, 여인의 살갗이 주는 감촉, 뜨거운 태양이 주는 아득한 감각을 이해해야만 카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인은커녕, 내륙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나, 당시까지(대학 2년생이었는 데도)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는 나로서는 김화영 교수의 감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태양이 뜨겁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그 후 나이 들어 학생들의 강요 아닌 강요 때문에 한 번 더 이방인을 읽은 적 있었고 그때는 그런 감각을 약간은 이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이번에 오종 감독의 영화를 기다린 것도 그런 의문 때문이었다. 오종 감독 역시 카뮈 ‘이방인’처럼 이해되지 않는 잔인한 살해를 소재로 한 영화로 유명하니, 어쩌면 잘 다루었으리라 생각했다.
2)
영화의 인트로가 시작되자마자, 프랑스 식민지 지배에 관한 대립한 주장이 등장했다. 하나는 식민 지배자의 라디오 연설이고 다른 하나는 담벼락에 쓰인 저항자의 구호였다. 그 외에도 감독은 원작에 그려지지 않는 도시 배경을 통해 식민지적 지배의 흔적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원주민 출입금지’라는 푯말이다.
감독은 원작과 달리, 뫼르소가 뜨거운 열기로 아른거리는 감옥 복도를 걸어, 어두운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감옥에 들어간 뫼르소의 회상을 통해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하기까지 과정을 그려내는데, 이 과정 자체는 원작과 다르지 않다.
감독은 원작 가운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두 인물 즉 개를 학대하는 남자의 이야기와 사건의 발단이 되는 아랍인 여자를 정부로 둔 친구 레몽의 이야기를 부각한다. 이 두 에피소드는 공통적인데, 즉 둘 다 타자를 학대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하고 심지어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사이에는 어떤 권력 관계가 드러나는 데 즉 표면적으로는 지배적이면서도 사실은 오히려 의존적이라는 관계다.
원작에서 카뮈가 이 두 에피소드를 소개한 것은 인간의 행위가 지닌 부조리한 측면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면서도 잔혹하게 대하는 것은 인간 심리의 이해 불가능한 집착이나 폭력성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종 감독은 다른 관점에서 이 두 에피소드에서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관계는 동물이나 여자에 대한 관계이지만, 감독은 여기서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인 원주민 사이에 관계를 읽어내는 듯 보인다. 이것은 영화에서 감독이 부여한 인트로나 식민지 지배 흔적이 해석에 미친 영향이다.
3)
사건에 관한 원작과 감독의 해석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 마지막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할 때의 장면이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마송의 별장에서 여자들의 울음소리(레몽이 다친 것 때문에)를 피해 나간다.
해변에는 여전히 태양이 내리쬐었고, 주인공은 바위 뒤 신선한 샘이 떠올라 그리 갔으나 거기서 레몽을 칼로 해친 아랍 청년을 만났다. 아랍 청년은 누운 채 칼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주인공은 주머니에서 손으로 총을 잡은 채 그에게 다가간다. 피할 수 있었는데도, 해변의 뜨거운 햇볕이 그가 돌아서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 한다.
아랍 청년은 “웃고 있는 듯”했고, 주인공은 혈관이 거칠게 뜀박질했으며 불타는 태양을 견딜 수 없었다. 주인공이 다가가자 아랍 청년은 여전히 누운 채로(이는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의미한다) 칼을 빼 들어 주인공을 겨눈다. 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번쩍였고 불타는 검처럼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바다는 소용돌이쳤고, 하늘은 불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주인공은 총을 꺼내 발사했다. 첫 발을 쏘고 이어서(이미 저항의 능력이 없는데도) 네발을 더 쏜다.
오종의 영화에서도 여전히 햇볕은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원작에도 바다의 소용돌이가 묘사되어 있으나, 그것은 최종 격발 순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별장에서 그의 마음을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포말을 통해 그려낸다. 어떤 분노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말해 준다.
원작과 달리 영화는 별장에서 나가기 전 주인공 마음속의 분노를 그려냄으로써, 이 분노를 진정하려 별장을 떠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랍 청년을 만난 것은 여전히 우연적인 사건이지만, 그의 마음에 분노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분노가 사건의 동기로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은 아랍 청년의 얼굴에 미소를 “웃고 있는 듯했다”로 모호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아랍 청년의 얼굴이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상당히 오래 강조해서 묘사한다. 그것은 경멸이나 조롱과 유사한 미소였다. 이 미소는 주인공의 행위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4)
원작에서 카뮈는 인간의 행위는 자유로운 선택이고, 주인공의 행위는 비록 부조리한 현실 때문에 파국에 이르렀지만, 어떻든 그 자신이 행위한 결단으로 설명된다. 자주 언급된 햇볕의 영향은 그의 행위를 지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다. 이 햇볕은 그의 합리적 지성을 혼란스럽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행위의 원인은 아니다. 그 행위는 동기도 없고 그 자신에 해로운 것이지만, 그는 결단했다. 그 행위는 이유 없는 행위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이유 없는 행위라는 개념은 2부에서 주인공이 감옥의 침대에서 찾은 기사를 통해 암시된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여관집 모녀가 해외에서 성공하고 돌아온 자기 아들을 모른 채로 살해하는 사건이다. 이는 돌아온 아들이 어머니와 동생을 놀라게 하기 위한 단순한 이유로 자기 신분을 가렸기 때문인데, 그 결과는 그의 죽음은 물론이고 모녀의 자살로 이어졌다.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인공의 행위를 이렇게 이유 없는 부조리한 행위로 해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오종은 이런 해석을 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오종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햇볕의 영향은 합리적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주인공을 이끈 동기가 있다고 본다. 그 동기는 곧 주인공의 분노와 상대의 비웃음과 조롱이다.
주인공 뫼르소를 분노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식민지 지배자의 일원으로서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아랍 청년이 해쳤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뫼르소 자신은 아직 자신에 대해 반성하지 못한 소박한 식민지 지배자층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 사실 회사에 고용된 자이고 선량하지만, 지배층으로서 오만은 버리지 못한 자로 해석된다.
그가 권총을 발사하게 된 최종적 결정 동기는 아랍 청년의 얼굴에 어린 조롱과 경멸의 미소가 아니었을까? 이 조롱과 경멸의 미소가 그의 심정을 치게 만든 이유는 사실 그가 이미 무의식적으로나마 죄의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래도 표면에서는 자신의 지배자로서 권리가 정당하다고 믿는다. 아마도 대부분의 식민지 이주민이 그런 상태일 것이다. 카뮈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이런 식민지 이주민의 대표로서 뫼르소를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에 대한 조롱과 경멸에 부딪혔을 때 발작적으로 행동한다. 이런 발작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나 나치즘적인 폭력 행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원작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1부에서는 뫼르소의 행위가 서술된다. 2부에서는 뫼르소의 사건을 둘러싼 재판이 그려진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재판에 임하지만, 마치 자기가 구경꾼인 것처럼 행동할 뿐이다. 원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자는 경관과 뜨거운 악수를 했다. 그 순간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부르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슷한 부류끼리 모여 즐거워하는 사교 모임 같았다. 그리고 내가 괜히 낀 사람, 잉여물 같다는, 마치 불청객 같다는 이상한 느낌이 마음을 맴돌았다.”
“모든 게 나를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 가끔은 모두의 말을 가로막고 외치고 싶었다. 세상에, 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인도 중요합니다.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따져보면 할 말이 전혀 없었다.”
원작은 주인공의 이런 태도를 실존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소외되어 있다. 이런 소외된 구조에 관한 관심은 원작에서 감옥의 구조가 지닌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통해 암시한다. 또한, 이런 소외는 재판에 임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가 저마다 임하는 역할 상 불가피한 결과다.
이런 소외는 사형수를 처형하는 기계적인 무자비한 수단[기요틴]이나 구토를 하면서도 공개 처형을 구경 간 아버지의 심정[“독을 탄 기쁨”], 그리고 최후로는 어찌하든 사형수의 항복을 얻고자 말겠다고 결심한 사제의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6)
소외된 세계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는 일종의 무관심이다. 이 무관심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주인공은 낮에는 종일 상고를 생각하지만, 결국 포기한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사실 서른에 죽든 일흔에 죽든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당연하다. 어찌 됐든 다른 남성이나 여성이 살아갈 테니까”
주인공은 심지어 마리에 대해서조차 더는 마음이 아프지 않다. 그가 죽고 나면 다들 자기를 잊을 것이며 죽은 이상 그들과 그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는 마음이 아프지조차 않았다.
무관심한 주인공의 태도에서 보면, 감옥을 찾아온 신부에게 터뜨리는 분노는 특이하다. 사제가 집요하게 믿음을 강요하자, 그는 마침내 사제의 깃을 부여잡고 소리친다. 이때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분노”가 뒤섞였다.
“[당신의 확신은] 그래 봤자 여성의 머리카락 한 올 값어치도 없는 확신일 뿐이야, 자기가 살아 있긴 한지도 모를걸? 산송장처럼 지내잖아.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보여? 그래도 난 내게 확신했어. 모든 것에 확신했지.”
원작은 두 세계를 대비시킨다. 사제의 삶과 주인공의 삶이다. 사제의 삶은 의미가 부여된 것이지만, 그 의미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산송장의 삶이다. 사제의 삶만이 아니다. 결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마리나, 개나 여자를 학대하면서도 집착하는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반면, 그의 삶은 순간에 자기가 확신하는 느낌에 따라서 산 삶이니 충만하고 아무리 짧다더라도 더 풍요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모든 의미란 무의미해진다.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살며, 그건 그의 특권이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균등해진다. 그러기에 인간은 살아 있는 순간, 그 순간의 확실성, 느낌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모든 삶이 이런 죽음 앞에서 결국 사라질 무의미한 것이란 점에서 그는 더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니, 마음의 평온을 느낀다. 이제 죽음 앞에서 악도 사라지고 물론, 희망도 사라지니, 이 무차별한 평등의 세계 “징조와 별로 가득한 밤 앞에서”, 그는 오히려 다정함을 느끼게 된다.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씻겨내고 희망을 비워냈다는 듯, 징조와 별로 가득한 밤 앞에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이와 같은 발언은 사실 주인공의 발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가가 개입한 작가의 말로 보인다. 그런데 부조리한 세계에서 소외된 자가 느끼는 자기 확실성이 과연 이렇게 목청 높여 강조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1부에서 태양 때문에 살해했다는 뫼르소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해되지 않는 말이지 않을까?
7)
원작이 실존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주인공의 태도를 이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재판에 관한 묘사에서 영화와 원작 역시 유사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을 보여준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은 어떤 ‘키가 작은 여자’에 주목한다. 카뮈는 주인공이 그녀를 식당에서 봤던 여성이라고만 소개한다. 다만 주인공은 그녀가 입은 재킷을 기억하여 단호한 표정을 기억한다. 이 여성을 주인공이 왜 기억하는지, 그녀가 왜 이 재판정에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여성을 친구 레몽의 정부였던 아랍 여자로 소개한다. 재판이 휴정하는 중에 주인공의 여자인 마리가 그녀를 찾아가서 대화한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녀는 마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마리가 자기도 여기가 고향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마리를 비웃는다.
또 하나, 원작에서 주인공이 처음에는 여러 아랍인 죄수들과 함께 거주하는 방으로 끌려가는데, 아랍 죄수들이 그에게 냉담하게 대한다는 말은 없다. 그리고 이어서 “수감자들이 어떻게 거적을 이용해서 잠자리를 만드는지를 알려줬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크게 주목받을 만하지 않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가 아랍인을 죽였다고 하자, 그에게 냉담하다. 그는 밤에 거적도 없이 돌바닥에 누워 자고 있었다. 한참이나 어떤 아랍인이 거적을 가져와서 그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준다. 이것은 아랍인 하나가 그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이었으나(그가 저지른 행위에 비추어 본다면 절대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친절인데) 이 행위가 주인공 뫼르소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는 것으로 묘사된다.
8)
2부에서 영화가 원작과 차이가 있는 또 다른 점은 예심 판사가 주인공에게 물은 질문이다. 원작에서 예심 판사는 권총을 연이어 발사했는지 아닌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주인공은 솔직하게 말한다. 첫 발을 쏜 조금 뒤에 다음 네 발을 쏘았다고 했다. 예심 판사는 첫발을 왜 쏘았는지는 묻지 않으면서, 왜 쓰러진 육신을 또 쏘았는지 물었다. 예심 판사는 그게 아주 중요한 물음이라면서 다그쳤다.
아마도 예심 판사가 보기에 첫발은 위협에 대한 대응일지 모르지만, 뒤의 네 발은 가혹한 행위이니 명백히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대답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시뻘건 해변과 이마 위에 타오르는 태양을 떠올렸다.” 즉 주인공에게 첫발이나 나머지 네 발이나 모두 태양 때문이었기에 차이가 없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은 다르게 그려진다. 예심 판사가 아랍 청년이 칼을 빼 들고 위협했는가를 묻는다. 이 사건에서 주인공이 아랍 청년이 칼을 빼 들고 그를 위협했다고 말한다면, 앞서서 레몽이 그의 칼에 의해 상해를 받았으니, 어느 정도 정상을 참작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주인공은 예심 판사가 이를 물었을 때, 솔직하게 대답한다. 즉 아랍 청년이 그를 위협했는가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주인공이 마음만 먹으면 위협받았다고 해도 될 일이다(그 장면을 본 목격자는 없다). 그런데 그가 그냥 솔직하게 말한 것은, 그가 법을 몰랐다기보다 어쩌면 그가 이미 자기를 구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재판에 대한 주인공의 자포자기적인 태도는 다른 점에서도 드러난다. 마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면회를 왔을 때, 마리는 나오면 결혼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과연 그렇게 될까?’라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뭐라도 말하려고 한 말이었다.”라고 말한다. 즉 자기가 나가지 못할 것은 안다는 것이다.
9)
재판과 관련하여 영화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감옥에서 아랍인이 그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 주인공에게 깊은 울림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잠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단순한 잠자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1부에서 아랍인을 살해할 때 느껴지던 어떤 분노가 진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결국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즉 살해 위협이 없었다는 증언)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그에게 재판은 위선적이었다. 재판에서 주로 장례식과 다음날 마리와의 관계가 초점을 이룬 것은 사실 아랍인의 살해는 당시 지배층이었던 프랑스인에게는 일상이었고 변호사나 마리의 이상한 무죄라는 확신은 이런 일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검사 역시 이를 건드릴 수 없었기에 주인공의 인성을 주로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이 점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에게 자신의 재판이나 처형은 일종의 속죄 과정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굳이 자기를 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 물론, 이 속죄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속죄는 아니다. 이 속죄는 지배자로서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속죄이며, 그가 바다나 신체에 대해 느끼던 감각적 확실성과 같은 연대 의식에 대한 느낌이 아닐까 한다. 이 연대의식은 개와 사람, 남자와 여자, 프랑스인과 원주민 사이의 연대의식일 것이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사제에게 자신에 대한 확실성을 느낀다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오종의 해석은 결말에서 죽음 앞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다정한 무관심’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성이라는 개념만큼은 오히려 더 분명하게 부각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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