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생성 철학(8)-왕선산의 한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8)-왕선산의 한계
1)
위에서 황종희가 그의 형이상학과 달리 전통 유가 질서를 옹호하는 이탈을 범했듯이 왕선산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주성과 소통성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확립했으면서도 자신은 이를 통해 전통적인 유교적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자 했다.
왕선산의 형이상학에서 유교적 차별 질서가 어떻게 도래하는가? 이규성 자신은 이에 관해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① 먼저 마음의 본성과 신체의 기질 사이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계는 체용의 관계로 규정되었지만, 체용의 관계는 모호하다. 체용의 관계는 양자의 동시에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이지만, 동시에 그 가운데 더 중요한 가치는 어디까지나 체에 있게 된다. 또는 체는 순수하지만, 용은 불순하다는 정도의 차이를 인정하게 된다.
도심과 인심, 기질지성과 정욕의 체용적 관계를 사회적으로 적용해서 이를 남녀나 지배피지배층에 적용한다면 불평등한 사회질서가 나오게 된다는 점에서 체용 관계는 보다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② 또한, 의를 다루면서 이규성이 했던 발언도 주목된다. 여기서 의의 차별성은 각자에게 ‘각자에 마땅한 몫을 주어야 한다’는 객관적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선산은 의의 차별성에서 전통적인 유교적 차별적 질서를 정당화하려 했는데 이는 역사적인 차별을 자연 법칙화하는 물신주의적 견해라고 한다. 이규성은 그 때문에 왕선산 자신은 자기의 인간 본성론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객관적 정의관은 개인의 추상적 인격의 가치를 평등하게 긍정하는 주관적 정의관[추상적 인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과 대립적이다. 또한, 그의 인성론이 자유의 생명성에 기초한 개방적 인격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음에도 그는 그것을 정치학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 왕선산의 정의관은 사회의 구조를 자연 법칙화하는 물신주의적 견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생성의 철학, 300)
③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왕선산의 한계를 파악하는 데서는 이규성은 왕선산이 음양 가운데 양이 음에 대해 우위를 가지고 지배적이라고 보았다고 했다. 이를 윤리적 차원에 적용한다면, 인간성에서도 음양의 관계에서 양이 음에 대해 지배적으로 되는데, 여기서 불평등이 유래할 수도 있다.
2)
왕선산이 이처럼 형이상학적으로 양이 음에 대해 우위에 이른다고 본 것은 음양의 규정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껏 오해를 피하려 왕선산의 음양 개념을 음양으로만 소개했으나 사실 왕선산에서 음양은 ‘유순함’과 ‘강건함’이라는 특정한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아마도 주역의 건괘와 곤괘에 대한 해석에서 이런 성질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음양을 이렇게 규정한다는 것 자체에 이미 양의 지배라는 사고가 감추어져 있다.
“이렇게 순전한 양을 건으로 삼은 것은 음양이 합하여 운행하는 가운데서 그중 양이 왕성하고 광대하게 유행하는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다.“(왕선산, 주역내전, 생성의 철학, 140, 재인용)
음양 대립은 자체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그것은 다만 서로 대립하는 힘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기는 운동하는 가운데 기질을 지니니, 그 기질을 통해 대립하는 힘은 구체적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자연력에서 인력이나 척력, 전기력에서 +전기와 -전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유순함과 강건함은 엄밀하게 대립하는 힘은 아니다. 그것은 강약의 차이라는 정도의 차이이니 대립에 속하지 않아 음양을 규정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왕선산은 이를 음양의 성질로 규정하니, 강건함은 본래부터 유순함보다 더 강한 것이니 여기에 우위라는 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제 남녀가 음양으로 규정되면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우위가 되고 지배층이 양이고 피지배층이 음이면 마찬가지로 여기서 지배층의 지배가 도출되니, 음양의 규정 자체에 이미 불평등의 구조를 감추고 있었다.
“왕선산은 군주정을 자연적 질서로 간주한다. 건의 강건성이 세계의 주인이다. 건은 군음의 종주이다.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본성적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사물이 올바른 것이다. 건의 강건성이 구체적 사물이 능가할 수 없는 존재와 변화의 주인이다.”(생성의 철학, 172)
3)
황종희나 왕선산은 자신의 형이상학이 전통적 유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규성은 오히려 그들은 자기의 형이상학이 지닌 본래 가치를 망각했다고 한다. 이규성에 따르면 황종희의 기 일원론이나 왕선산의 음양의 상호작용은 평등하고 소통하는 연대를 이룰 수 있는 기초가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왕선산의 형이상학과 인성론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소통성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미 설명하는 가운데 언급되었지만,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여기서 황종희에서 형이상학의 세계는 기 일원론의 홀리즘적 성격이 강하다. 황종희에서 만유는 본체를 지니지 않는 우주적 기의 운동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다. 여기서 우주적 기와 마음은 혼연일체를 이룸으로써 마음은 만물과 소통한다. 이런 세계에서 아주 강력한 소통성이 출현한다. 그러나 만물에 아직 고유한 본성이 결여하므로 아직 개별자의 고유한 자주성은 결여한다.
황종희 자신은 이런 세계를 통해 전통적 유가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 이규성이 볼 때 이는 부당한 비약이었다. 이규성은 오히려 황종희의 형이상학은 이런 혼연일체를 통해 생겨나는 무차별적 평등의 세계이며 이는 태주학파나 이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고 한다.
황종희의 이런 철학을 이규성은 내재의 철학으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혼연일체의 강력한 소통성은 90년초반까지 전개되었던 운동권의 연대의식이라는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4)
그러나 왕선산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는 대립하는 음양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사물의 고유한 본체가 출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개별 사물은 음양 운동이 치우친 상태이며 다시 중정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을 전개하려 한다. 이를 통해 자기에 대립하는 개별자로부터 힘을 빌어오니 양자는 서로 상보적이고 이것이 왕선산에서 소통성의 토대가 된다.
왕선산은 이를 통해 개체의 자주성을 인정한 가운데서 상반상성의 상호 보완적인 소통성을 추구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소통성에서는 혼연일체를 주장하는 황종희보다 뒤떨어지지만, 이런 소통성을 개체의 자주성을 확보한 위에서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탁월하다.
왕선산의 이런 체계는 9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이후 개인의 자발성이 강조되던 시기의 시대 정신을 잘 반영한다. 물론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연대의 의식이 강했으니, 이규성은 자주성과 소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런 왕선산의 체계로부터 발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5)
이전에 살펴보았듯이 황종희의 일원적 기의 세계는 문제점을 지닌다. 황종희에서 음과 양은 운동의 양태로서 교체될 뿐이니, 현성파에서 보듯이 양이 지배하는 세계는 개방성과 소통성의 토대가 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그것은 천도의 교체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 왕선산에서 소통의 가능성은 본체의 자기 지속성과 회복력을 인정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세계를 단지 기다리지 않고 중정으로 복귀하려는 강한 실천적 동기가 마련될 수 있다.
그러나 이규성은 개인의 자주성보다 소통성을 더 강조하는 편이다. 그러기에 왕선산의 체계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강력한 혼연일체의 무차별적 평등적 세계에 강력하게 이끌린다. 그러므로 그는 왕선산의 글 가운데서도 왕선산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왕선산은 왕양명의 심즉리가 사실은 윤리적 가치가 심의 본체에서 자생하는 심의 내재적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주장된 것임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또한, 태주 학파와 이지가 기존의 이는 군자 집단의 특권적 지배 원리이기 때문에 서민적이지 못하며 따라서 보편적일 수 없다고 하는 비판적 발언을 한 데 대해서도 성찰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생성의 철학, 328쪽)
결국, 이규성은 왕선산의 철학을 떠나 다시 황종희의 기 일원론으로 돌아간다. 황종희의 철학에 기초해 평등한 소통의 세계를 확보하면서 그것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실천적 동기, 혁명적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이규성은 동학 최시형의 세계로 마지막으로 관심을 이동하게 된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7)-왕선산의 인간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7)-왕선산의 인간론
1)
왕선산에게서 인간의 본성은 그의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다른 자연과 구별된 고유한 기질을 지닌다. 그 기질은 맑고 유동적이어서 사물을 관통하는 것, 즉 청통의 기질이다. 이 기질은 우주의 원초적 기질이니 그것은 만물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기라고 불리지만, 구체적으로는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은 단순히 신기라는 기질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 신기와 더불어 동물적 기질도 지닌다. 동물적 기질의 특성은 신기에 가깝게 다가가지만, 그것의 관통 능력은 감각에 불과하고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욕구를 지닌다.
더구나 인간의 삶은 자연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자연 물체는 탁한 기로 이루어져 있고 융통성이 없지만, 역시 우주적 기의 산물인 한 부분적으로는 서로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과 신체 그리고 마음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문제다.
2)
먼저 자연과 관계해서 인간은 만물을 본질을 관통하여 인식하고 이를 삶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이는 단순히 자연을 파괴하여 소모하는 활동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방임하는 것도 아니며, 그 속에서 이용후생의 덕을 실현하고 예의의 문화를 건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본질을 파악하여 자연의 본질을 실현한다.
“.. 타고난 본성을 단순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지만,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본성을 개발하는 성취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생성철학, 272)
그런 점에서 이규성은 기존 성리학이 도덕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본다면, 왕선산은 “문명의 창조자로서 인간의 모습을 강조한다”(273)고 한다. 또한, 문명의 창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도가적 관점과 달리 “인간의 사회화에 따른 문화인으로의 발전은 인간다움의 필수적 조건이라”(273)고 한다.
왕선산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것은 아니니,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자. 더 중요한 것은 우선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문제다.
3)
인간의 본성은 그 기질이 청통의 기질, 신기 또는 마음이 벌이는 운동에서 나온다. 왕선산에서 이 운동은 두 측면에 걸려 있다. 하나는 지적인 인식과 실천적 행위 즉 지능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윤리적 본성에 관한 문제다.*
주*)지능의 관계가 일어나는 기질이나 윤리적 본성이 발생하는 기질이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아니면 크게 보아 하나이지만, 그 가운데 다시 음양으로 나누어진 부분인지는 불분명하다.
신기의 지와 능은 일단 나중에 언급되는 신체에서 나오는 감각과 욕망과 구별된다. 여기서 지와 능은 기의 음양과 관련된다. 지는 양기에 속하며 만물에 관통하는 능력을 지닌다. 반면 능력은 실천적 능력인데 도덕적 자유의지 개념에 가깝고 음기에 속한다.
우선 지적인 차원과 관련해서 인간의 기질은 마음이며 이는 맑고 유동적이기에 만물을 관통하는 소통적 성질을 지닌다. 이를 통해 지적 인식이 가능하다. 만물 역시 다양한 기질을 지니지만, 원초적으로는 마음이니, 지의 이런 능력은 외적 감응을 통해 일어나지만, 사실은 자기 인식이다.
“지는 힘에서는 자발성, 폭에서는 광대성, 깊이에서는 관통성을 가진다. 그것은 ‘만상 가운데 들어가 장애를 받지 않는’, 허명하고 청허한, 하나이자 거대한 신묘성이다.”(생성철학, 285)
이규성은 마음의 이런 능력으로부터 소통성의 근거를 확보하려 한다. 앞에서 황종희에서 마음은 우주와 직접적 합일을 통해 소통하지만, 여기서는 마음의 외적인 감응을 통해 소통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외적 감응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해 추론하거나 귀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적 감응은 마음이 소통하는 통로일 뿐이니, 그 인식은 마음이 마음과 통하는 것으로서 자기 인식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질적 능력에서 이러한 실천의 관심을 넘어서 스스로를 이완시킴으로써 사물의 내적 본성에 침투할 수 있는 이완적 유동성을 갖는다. 심적 능력의 이완성은 게으름의 이완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 진입하여 세계의 통일적 본질을 체험하는 초월적 자기 수렴의 운동성이다. 그것은 자기 중심성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만유의 소통적 본성에 자신을 여는 개방적 자기 인식이자 세계 인식이다.”(생성철학, 306)
“허명하여 조감하는 것은 신의 밝음이다. 태허는 형체에 막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편재적인 밝음이다… 조감이란 살피고 관찰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능력을 말한다.”(생성철학, 285) “이목은 견문에 그치지만, 오직 마음의 신묘성만이 모든 공간을 RnpoEnf고 장구한 시간을 관통한다.”(생성철학, 285)
나아가 왕선산에서 지와 능은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지에는 능이 저절로 따른다고 본다. 물론 이 조화는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조화가 될 것이다. 즉 지능의 부조화가 항상적이지만, 이는 늘 균형을 향해 나가는 운동 속에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양명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양지양능의 즉각적인 무조건적인 일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와 능의 관계는 왕선산의 기본 공리 가운데 하나인 음양 각자가 극이 아님이 없으면서도 치우친 극은 없다는 원칙 즉 극이 없으면서도 위대한 극이라는 도식에 따라 파악되고 있다.”(생성철학, 292)
4)
그런데 이런 지능의 관계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윤리적 본성의 문제다. 그 윤리적 본성은 인의의 상호작용이다. 인은 상통성을 지향하며 의는 차별성을 지향한다. 인의가 양과 음이라면,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져서는 부조화의 운동 상태에 있을 뿐이다. 양자는 함께 상호 작용해야만 조화로운 윤리적 인격이 이루어진다.
이런 인의가 개별적으로 본다면, 운동의 치우친 상태가 되며, 양자의 균형이 인간의 본성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규성은 인을 우위로 본 주희나 의를 우위로 본 담사동과 달리 왕선산은 인과 의가 “상보적 균형”(301)이며 상호작용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인의의 상호작용은 추상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 자체는 구체적으로 본다면 신기, 마음의 음양 운동을 통해 형성된다*. 이 가운데 양의 운동이 측은지심에 해당하며 음의 운동이 시비지심에 해당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기에서 두 대립하는 마음의 운동인데 이를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인의가 된다. 여기서 천지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별이 발생한다. 전자는 추상적이며 후자는 인간의 기질에서 출현한 본성이다. 그런데 주희는 천지지성이 독자적으로 존립한다고 보고 이를 본연지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왕선산에서 천지지성은 추상적인 것일 뿐, 구체적으로는 기질지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5)
이제 인간을 다룰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이 마음과 신체의 복합체이라는 것 때문에 발생한다. 마음이 고유한 기질을 지니듯이 신체 역시 고유한 기질을 지닌다. 그것은 동물적 기질이니, 여기서 감각과 정욕이 발생한다.
신기의 지적 능력과 달리 감각은 한정적이며 그것이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표면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욕망이다. 욕망은 이기적이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에 대해서는 즐거움을 느끼며 그렇지 못한 것에는 혐오를 느끼니, 이는 감정에 속한다. 감각과 욕망 역시 음양의 관계를 지니며, 즐거움과 혐오 역시 음양의 감정을 지닌다. 이런 음양의 관계를 통해 일정한 질서가 즉 신체적 기질의 질서가 출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 되는 것은 마음의 기질에서 출현하는 도심 즉 본성과 신체의 기질에서 출현하는 인심 즉 욕망 사이의 관계다. 일단 양자는 모두 자연적 기질의 산물이므로 천성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양자는 서로 대립하니, 신기의 감응과 감각의 지각이 대립하며 마음의 본성과 신체의 욕망이 대립한다. 전자는 인식론과 관련된 문제니 제쳐 두고 후자만 여기서 살펴보기로 하자. 본성과 욕망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 관계는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그 관계는 앞에서 말한 도와 기의 관계에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양자는 ① 동행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욕[公欲]이 곧 이가 된다. 그보다 자주 이 관계는 ② 전통적인 양분법인 체용 관계로 설명되기도 한다. 체용은 상호 공속하니, 그 어느 것도 동시에 필요한 것이며 이런 점에서 평등성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도심과 인심은 ③ 음양이 층간에서 서로 교차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즉 신체의 음기과 마음의 양기, 신체의 양기와 마음의 음기가 상호작용하니, 마음을 통해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거꾸로 신체를 통해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주, 정신을 수련하여 육체의 허약함을 보완할 수도 있고, 신체의 강건함이 정신의 허약함을 보완할 수도 있다.
6)
전체적으로 본다면, 황종희는 인간에서 본성을 규정하려 했다. 그는 이 본성을 마음의 기질이 이루는 음양 운동을 통해 설명했는데, 이렇게 본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개인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 회복하려는 운동이 곧 개인의 자주성이다. 이 자주성은 단순히 자의적인 자의가 아니라 본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양심 또는 도덕적 자유의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에서 인과 의의 관계, 마음과 신체, 도심과 인심의 관계는 음양의 운동 상태이다.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곧 중정을 회복하려 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 한쪽은 자기에 대립하는 다른 쪽을 통해 보완된다. 즉 인간은 고유한 본성을 지니면서도 소통성을 지닌다.
인간의 곧바로 사회적인 관계로 규정될 수 있다. 한 개인의 내적 갈등은 사회적 갈등의 압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인자와 의자 또는 남녀, 정신적 노동자와 육체적 노동자 사이에서도 상반상성의 관계가 나온다. 즉 그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보완적이다.
이규성의 생성철학(6)-왕선산의 코스모고니[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6)-왕선산의 코스모고니
1)
형이상학이란 자연의 질서를 기초하는 원리를 밝히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의 핵심 원리는 최종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는가를 통해 정당화된다. 따라서 자연이 음양의 동정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왕선산의 주장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형이상학이 설명하려는 질서는 과학이 다루는 구체적 사물의 질서가 아니라 일반적 질서다. 그 가운데 핵심은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범주 또는 층위에 따라 구별하고 그 생성을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자연에는 물체와 생물 그리고 인간이 있는데 그 생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가 형이상학의 성패가 달린 문제다.
과학에 관한 왕선산의 입장에 관해 이규성은 왕선산 대신 방이지의 ‘질측지학’을 소개한다. 이규성은 “방이지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관점은 왕선산의 관점과 같다”(129)고 단정한다. 방이지의 말은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과학은 ‘일체를 모두 궁극적 원리인 것으로 집착하여 사물의 개별적 영역을 멋대로 덭어 가려 구체적 원리들에 대해 정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생성의 철학, 127쪽)
“물에는 그것의 원인이 있다…그 불변적 측면과 변화의 측면을 추론한다. 이것을 질측이라 한다. 질측은 곧 통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생성의 철학, 128)
질측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탐구다. 통기는 그것의 원리에 대한 탐구이니 곧 철학이다. 이런 관점은 우주와 합일에 머물렀던 황종희와는 구별된다. 왕선산은 철학이 과학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2)
자연은 누구나 알다시피, 물체의 세계와 생물의 세계, 그리고 인간의 세계로 이루어진다. 그 차이점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이런 것은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에 속할 것이다. 물체와 달리 생물은 재생의 능력을 지니며 인간은 인식과 자유의지라는 정신의 능력을 가진다.
왕선산이 제시한 형이상학 원리 즉 음양이라는 두 가지 기체의 동정이 이런 자연이 물체에서 인간으로까지 발전하는 생성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단 사물은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사물이 물체냐 생물이냐, 인간이냐는 그것을 이루는 기의 질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태허 가운데 응취한 것은[무기적 물질] 무겁고 혼탁하여 다른 사물이 침투할 수가 없다.”
“식물은 땅에 뿌리박고 있어서 오행이 결합한 땅의 유형적 기를 받아서 성장한다. … 다만 형질만 있고 성은 없다.”
“동물은 땅 위로 나와서 오행의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않은 기를 받아 태어난다. 형체가 신으로써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각기 자신의 성을 머금고 있다.”(생성의 철학, 267-268 요약)
“인간만이 순수한 형태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청통의 기 즉 신기 혹은 신리를 그대로 자신의 내적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의 본체가 영민하면 할수록 그 작용도 더욱 광대하다.”
이상 인용문을 볼 때, 기질에 관한 왕선산의 특별한 설명은 없지만, 자연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는 청탁과 경중, 대소* 등과 같은 기질의 성질에 대한 설명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물체는 대체로 탁하고 무거우며 큰 기질의 운동이며 반면 인간은 맑고, 가볍고, 작은 기질의 운동이어서 전자보다 후자는 훨씬 유동적이어서 영묘하다.
주*) 대소에 관한 직접적 표현은 발견할 수 없으나, 기의 취산이라는 말은 존재한다. 그리스 원자론자에서 원자의 취산은 곧 크기를 결정하는 것처럼 왕선산에서도 취산이라는 표현은 크기의 대소와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3)
그런데 기는 하나이다. 그 기는 사실 음양 두 기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상호작용한다는 면에서 하나라고 한다. 이 하나의 기가 어떻게 해서 위와 같이 자연의 범주나 층위를 구분하는 기질로 나누어지는가? 이에 관한 설명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현상 세계도 ‘수많은’ ‘다양한’ 이라는 규정을 갖는다. 이 다수성의 출현 과정은 음양의 상징인 양효와 음효가 6열로 배열되어 64괘를 형성하며 이의 순열 조합에 의해 수가 증가되는 방식으로 확산된다.“(생성의 철학, 149)
“단순한 본체는 순열조합적 과정으로 현상화한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하게 증가한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음양의 재출현에 불과하다.”(150)
이상의 설명은 왕선산의 주역에 대한 설명을 이규성이 정리한 주장이다. 이규성의 설명을 검토해 보면, 음양의 운동이 중첩되면서 하나의 음양 위에 또 다른 음양이, 그리고 그 위에 또 음양이 운동한다.
그 중첩되는 정도만큼 질적 차이가 나타난다. 이런 질적 차이가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처음에 탁하고 무겁고 큰 기질은 점차 맑고 가볍고 작게 되며 점차 유동화되고 영묘해진다. 전자가 물질적 기질이라면 후자는 심적 기질이다.
이런 설명이 정확하게 왕선산의 자연 설명에서 나오는지 필자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규성의 설명을 따르자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설명이라 하겠다. 사실 이런 설명은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음양으로 오행을 설명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발상에 속한다.
음양으로 오행이 설명된다면, 이때 오행은 4괘로 설명된다. 즉 음양이 중첩되면서 4괘가 생기고 그 각각에 오행이 대입되는데(예를 들어 물은 소음이며, 불은 태양이다. 나무는 소양이라면 쇠는 태음이 된다), 이런 발상을 확장하면 운동 상태에 있는 만물은 각 층위에서 음과 양의 중첩적으로 조합하여 이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이규성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 과연 왕선산이 그렇게 보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규성이 이해하는 한 왕선산은 그렇다. 왕선산에 관한 다른 책 예를 들어 안재구의 책에서는 이런 설명이 없다. 이규성에게서만 이런 설명이 나오는 것은 이규성이 형이상학에서 이런 범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설명은 일단 개별 사물의 상이 지닌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물이 이처럼 여러 층위의 음양이 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 즉 상이라면, 자연의 같은 범주에 속하는 물체들이 지닌 질적 차이들도 이런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물은 최종 층위에서 음양을 달리하더라도 나머지 층위에서는 음양을 같이 할 수 있으니, 이런 차이를 통해 개별 사물이 범주나 층위로 구별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이런 범주나 층위에서 작용하는 음양의 기질적 차이를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4)
이런 발상에서 이규성의 철학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개별 사물은 마치 남녀와 같이 자기의 층위에서 음양이 운동하는 치우친 상태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개별 사물은 중정으로 복귀하려 하는 운동을 전개하려 하며, 그 때문에 자기와 대립하는 것에서 힘을 빌려오는 상보적 관계를 맺는다. 이를 상반상성의 관계로 규정하였다.
이제 하나의 사물은 여러 층위를 지니고 각 층위에서 음양이 운동하는 것이라 한다면, 사물들의 상반상성의 관계는 층위를 넘어서까지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두 층위가 중첩되었다고 할 때, 아래층과 위층의 음양이 서로 교차해서 관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위의 층에서 음은 아래층에서 양을 끌어당기고 아래층에서 양은 위의 층의 음을 끌어당기는 관계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 층위의 복합체인 사물들 사이에서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관계가 성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예를 들어 오행의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물은 소음이니(위층의 음), 소양(아래층의 양)인 나무를 생성하며, 불은 태양(두 층 모두 양)이니 태음(두 층 모두 음)인 금을 생성한다. 소위 오행의 상생상극의 관계가 이런 층위에서 교차하는 음양의 운동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주역에서 이 층위 간 교차 관계를 왕선산이 설명하고 있는지, 설명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지는 필자가 알지 못하지만, 그런 이론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적어도 이규성의 ‘순열조합’이라는 말을 통해 그런 이론적 가설은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이제 사물은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고 층위 간에 음양 운동이 서로 교차할 수 있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사물의 상반상성의 관계를 만물 간에 층위를 넘어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층위에서 상반상성의 예 즉 남녀의 관계가 이규성이 추구했던 사물 간의 소통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만물의 층위 간에 음양의 교차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만물 사이에 상반상성의 관계 즉 상보적인 소통 관계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서 이규성은 소통성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앞에서 황종희의 경우, 사물은 본체를 결여한 채 홀리즘적 방식으로 소통했다. 그런데 왕선산은 위에서 보듯이 사물의 고유한 본체를 통해 자주성을 인정한 채 동시에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지금 저 현상은 하늘의 색과 땅의 색, 순수한 것과 잡된 것으로 인해 문채를 얻고, 장단과 종횡으로 인해 양적 한도를 얻는다. 견고하거나 약하고 움직이거나 멈추어서 그로 인해 형질을 얻고 대소와 동이로 인해 고유한 경향성을 얻는다. 일월성신으로 인해 광명을 얻고 진흙이나 흑색 토양으로 인해 산물을 얻는다. 초목과 꽃과 열매로 인해 재물을 얻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산과 평원으로 인해 절기를 얻는다. 귀는 구멍을 열어 들을 수 있으며 눈은 눈동자를 가지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로 통일되게 된다. 현상은 다양성으로만 언제나 있을 수 없으므로 역의 논리로 통일된다.”(232 재인용)
4)
사물의 본성이 출현하는 기질의 문제는 추상적인 차원이다. 이것은 추상적 차원에서 사물의 본성을 다룬다. 그런데 자연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복합체다. 인간을 예로 들자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의 복합체다. 그러므로 복합적인 사물은 본성이 출현하는 기질 말고 다른 물질의 기질도 동시에 가지면서 여기서 사물의 도와 기[器]의 관계가 출현하게 된다.
하나의 사물은 음양의 상호작용을 통해 본성을 지닌다. 이 본성은 운동 속에서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지만, 다시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니, 이 본성은 지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하나의 사물은 그 본성의 바탕이 되는 기질 즉 형질이 있다. 이것이 곧 기[器]이다. 사물의 본성은 그 바탕이 되는 형질의 음양 운동 위에 또는 그 속에서 출현하니, 여기서 출현하는 본성을 도라 한다.
여기서 도와 기[器]의 관계가 문제 된다. 앞에서 이규성은 기질의 관계를 기의 중층적 발전 개념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다시 도기의 관계는 기질 층간 관계가 더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그 관계는 우선 수용성 즉 담지자 개념이다.
“기가 토대가 되고 도는 그것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기는 추상적 원리가 의존하는 그릇이다. 그것은 기와 그것의 산물인 만물을 질서의 담지자로서 이해하게 하는 개념이다.”(생성의 철학, 256)
기[器]는 본성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 한계 때문에 본성이 다양하게 발생하며 여기서 하나의 사물에서 개별적인 다양성이 나타나게 된다. 즉 이 즉 도는 하나지만, 기[器]는 다양하다. 하나의 도는 순수하지만, 기 속에 받아들여진 도는 불순하다.
또는 이규성은 왕선산에서 도와 기[器]의 관계를 다시 체용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든, 여기서 두 기질의 관계, 본성과 기의 관계는 모호하지만, 대체로 두 요소의 동시적 필요성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느 것도 결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물체를 이루는 층위 간에 음양의 교차 운동이 가능하다면, 도와 기의 관계는 결국 하나의 사물 속에 복합되어 있는 두 사물의 관계로 볼 수 있으니, 여기서 도와 기의 관계를 앞에서 말한 층간 음양의 교차 운동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5)
황종희에서 개체는 본체가 없으며 만유는 기의 운동이 지나가는 매듭에 불과하다. 반면 왕선산에서 기는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각 층위에서 음양이 상호작용한다. 이를 통해 만물은 고유한 본성을 지니는 동시에 그 음양의 운동을 통해 상호 소통한다. .
그렇다면, 아직 중층적 운동을 전개하기 전 원초적인 기 즉 그 기의 가장 근본적인 본체는 무엇인가? 이규성은 왕선산의 체계를 범신론에 빗대어 범심론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심이란 곧 기체의 본질을 의미한다.
원초적인 기가 심적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는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마침내 심적인 기질에 이른다. 그 기질은 유동적이며 영묘한데, 이런 최종 발전된 기질이 곧 원초적인 기질이 될 수 있을까?
“실재는 유적 본성으로 구획되어 있지만, 그 경계선을 잘라서 볼 수 없는 것은 우주의 연속적 본성에 기인한다. 실재의 궁극적 구조는 고체성의 극한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 연속성에서 얻어진다.”(생성의 철학, 260)
“ 우주의 본질이 심리적 원리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대한 성찰에서 경험된 것을 본질로서 유추해낸 것이다. … 세계의 본질은 연속적 흐름으로서 하나의 생명 원리이다.”(생성의 철학, 258쪽)
이와 같이 사물과 인간을 이루는 우주적 기는 본질적으로 마음이다. 마음이 우주적 기의 본체라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지만*, 우리로서는 이규성의 주장대로 일단 우주적 기의 본체가 마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가자.
주*) 여기서 이규성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목적론을 상정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이런 목적론적 우주론이 왕선산에게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목적론적 체계를 인정하더라도 원초적 기가 심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확립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물론자처럼 원초적 기의 본질은 물질적이지만, 이로부터 정신적인 기질이 발생한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이규성은 왕선산의 체계가 목적론은 아니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왜냐하면, 왕선산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기질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세계일 뿐이며, 여기서 개별 사물은 곧바로 우주적 기와 통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규성의 생성철학(5)-왕선산의 존재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5)-왕선산의 존재론
1)
앞에서 말했듯이 이규성은 90년대 초반까지 황종희에서 발견되는 우주의 일원적 기라는 실재로부터 소통성의 가능성을 찾았다. 그러나 우주적 기의 음양이 교체하는 운동 양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규성의 판단에 따르지만, 우주적 기의 운동으로부터 황종희는 부당하게도 유가의 차별적 질서로 되돌아갔으며, 현성파는 무차별 평등 사회를 꿈꾸었지만, 다만 기의 흐름이 변화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일원적 기의 운동으로는 만물의 소통성의 토대를 마련할 수는 있지만, 홀리즘의 위험을 간직한다.
90년대 중 후반 이후 한국 사회의 시대적 정신이 변화했다. 90년 초반까지 연대를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던 운동 세력은 후퇴하고 서구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 불어닥쳤다. 이 사상은 여러 면모를 지니지만, 그 핵심은 개인의 자발성에 대한 강조였다. 그 때문에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한 소통적 연대라는 새로운 시대 정신이 출현했다.
2001년 이규성은 <왕선산-생성의 철학>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가 추구했던 형이상학을 왕선산의 철학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규성의 책의 서문에서 황종희의 철학은 내재의 철학인데, 그를 다루면서 생성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졌고 생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주*) 왕선산에 관한 논문(<동양철학의 재해석- 왕선산의 황서를 중심으로>)이 이미 1989년 발표되었다는 사실로 보건대 그가 왕선산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왕선산에 관한 저서를 발간하기 훨씬 이전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 연구의 완성은 역시 2001년 왕선산에 관한 책의 발간에 와서였다고 할 수 있다.
서문에 나오는 ‘내재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은 서로 동전의 이면으로 보이고 다만 강조점을 어디에 두었는가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종희와 왕선산에 관한 이규성의 해석을 면밀하게 비교해 보면, 두 철학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황종희의 ‘내재 철학’에서는 본체라는 개념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왕선산의 ‘생성 철학’에서는 본체라는 개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물의 본체 개념이 없으면, 홀리즘의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사물의 본체 개념을 전제로 하면 개체의 자주성이 확립되지만, 개체들은 서로 독립하여 연대 가능성이 약화된다. 이를 통해 이규성이 황종희를 떠나 왕선산으로 이행한 이유가 밝혀진다. 즉 이런 이행은 이규성이 시대 정신의 변화에 따라 소통성 못지않게 개인의 자발성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규성이 소통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소통성을 홀리즘적 단계에서 고양시켜 개인의 자발성을 인정하면서도 소통적 연대를 이룰 수 있는 단계에 이르고자 한다. 이것은 이규성 자신의 철학적 의식 자체의 발전을 의미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이규성의 철학적 정신은 이때부터 드러난다고 보겠다. 문제는 황종희의 철학에서와 달리 왕선산의 철학은 음양 두 기의 운동으로부터 본체를 확립하기는 하는데, 여기서 어떻게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는가이다. 이제 왕선산의 철학으로부터 소통 가능성을 찾기 위해 고투하는 이규성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신 유가 형이상학 전반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이다. 주희에서 태극의 동정이 음양을 낳는다. 황종희에서 음양은 하나의 기의 두 대립적 양태다. 이 음양의 동정이 교체하는 양상이 곧 이법이다. 그러나 왕선산에 이르면, 그 관계는 달라진다.
왕선산에서 음양 두 기(음양 대신 인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하나의 기이면서 동시에 둘로 나누어져 운동한다. 왕선산에서 음양 자체가 실체 자체이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상호작용하니 그런 점에서 음양은 하나의 기다.
이 운동 속에서 음양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그런 균형 상태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균형 상태가 태극이며 태극은 운동이 발전하여 균형에 이른 상태라면, 아직 운동이 발전하지 않은 미발의 상태가 곧 무극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지에서 운동으로 다시 정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끊임없는 운동일 뿐이다. 음양의 균형 속에 나타나는 정지는 절대적 정지가 아니라 음양이 운동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정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태극은 음양의 기의 운동과정이 나타내는 매순간 조화의 극치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화에서의 조화의 극치이다. 따라서 l태극은 기라는 실체의 속성이다.”(생성의 철학, 155)
음양의 동정이 만물을 이루니 여기서 만물은 나름대로 고유한 본체를 지닌다. 그 고유한 본체는 기의 동정 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동정 자체가 이루는 균형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체는 동일하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질료적 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일월의 형체는 만고불변이다라고 했다. 형체란 그 규모와 겉모습을 말하며 질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질료는 날로 바뀌나[일신] 형체는 여일하다.”(왕선산, 사문록, 생성의 철학, 176 재인용)
3)
그러므로 왕선산에서 현상적 사물은 “양면적 성격과 조화로운 규칙성”을 지니며, 이는 음양의 “상호 교환 관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139)라고 한다. 양자가 균형을 이루는 모습 즉 ‘혼융한 합일’은 곧 ‘태화’이며, ‘충화’다. 또는 양자 관계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이기지 않는[불상리 불상승] 관계에 있다.”(159)
“그러나 그[태극]의 실제는 음양의 혼융한 합일일 뿐이기 때문에 음양이라 이름 지을 수도 없다. 그리하여 다만 그 궁극성 때문에 더할 것이 없는 것을 서술하여 태극이라 한 것이다…. 음양의 본체는 인온이 서로 얻고 동화하면서 변화하여 천지에 가득차 있으니, 이것이이른바 태화이다. 장자는 것을 위대한 조화라고 했다.”(왕선산, 사문록, 생성의 철학, 154, 재인용)
“음과 양이 적대함이 없는 것을 충이라 한다. 그것의 청탁이 작용을 달리하고 다수의 나뉨이 평등하지 않으나 공을 같이 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는 것을 화라고 한다. 충화가 천지에 유행하고 천지는 그것을 완비하여 서로 화합함으로써 소산물을 널리 풍부하게 한다.”(생성의 철학, 158)
이런 점에서 이규성은 왕선산의 철학을 변역의 철학이며 회통의 철학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음양과 동정, 태극과 무극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마치 촛불*과 같다. 촛불은 상승하는 힘과 하강하는 힘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고요한 촛불의 형태를 유지한다. 이 힘의 균형 속에 이루어지는 촛불의 모습이 곧 촛불의 형상이며, 그것은 정지한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가운데서 성립하는 균형을 의미한다. 이규성은 이런 왕선산의 도 개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립의 통일 개념과 닮았다고 한다.
주*) 253쪽 참조. 다만 이규성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르다고 한다. 이런 촛불의 비유는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나와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 학파로 계승되기에(필자가 보기에는 마침내 헤겔의 변증법에도 연결되는데) 이르기까지 서구 형이상학에서 태양의 비유와 맞먹는 또 하나의 철학적 비유로 사용되어 왔으니, 어떻게 보연 서양 철학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장이 된다.
4)
음양의 운동 속에서 운동은 항상 균형만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 운동은 상호 부조화하는 가운데 서로 침범하는 대립 한 가운데 존재한다. 그 균형은 곧 운동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시종도 없으며, 그 사이에 휴지나 틈도 없다. 이런 운동 속에서 사물이 형성되니 그 운동의 균형은 일정한 ‘수’를 이룬다. 사물의 운동 상태는 항상 부조화하고 서로 침범하는 대립 속에 있으므로 그것은 운동의 ‘상’을 나타낸다.
“태극은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에 있으면서 시초도 없고 종말도 없어 틈이 있을 수도 없다.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도 모두 그것의 상이며 하나에서 만 가지에 이르기까지 수는 모두 그것의 수이다.”(생성의 철학, 157)
음양의 운동이 조화의 균형 상태를 이탈하지 않을 때 중정이지만, 음양의 운동은 항상 대립 속으로 나가니, 이런 운동 상태는 균형으로부터 이탈한 시기이지만 동시에 중정의 상태로 돌아가는 시기이니 곧 변역의 시기다.
왕선산의 철학에 따르자면, 주역의 64괘는 사물의 균형 상태를 표현하지 않는다. 주역의 64괘는 사물이 중점으로부터 이탈한 상태 즉 변역의 상태를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은 다시 중점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탈과 복귀, 변역과 중정이 교체되는 이런 운동을 이규성은 “반대적인 것의 화이부쟁” 또는 “일지일지의 운동”(생성의 철학, 167)으로 표현한다.
5)
왕선산의 존재론은 두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하나의 관점에서 운동은 본체에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운동 상태 자체는 본체로부터 이탈한 상태다. “투쟁은 운동의 비본질적 성질이다. 그것은 극복되고 순화될 과정상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161)
이렇게 각 사물이 고유한 본체가 존재하는 세계는 한편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처럼 각자 자기의 이데아를 지켜나가는 세계다. 따라서 이 세계관에서 양명학의 일원적 기의 운동에서나 또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의 창조적 진화에서 보듯 “새로운 요소의 생기와 이것이 과거의 단순성과 결합하여 질적으로 좀더 복잡한 총체성을 생산해 나간다는 전진적 존재론은 나오지 않는다.”(생성의 철학, 161)
“이로써 그는 중국 특유의 유기적 세계관을 방대하게 형성했다. 따라서 그의 세계관은 기계론보다는 역동적이지만, 전진적 친화적 세계관에 비해서는 회귀적인 원환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생성의 철학, 164)
그러나 왕선산의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만물은 이런 균형을 본체로 하지만, 그 자신은 어떤 운동 상태에 있다. 즉 만물은 균형을 중심으로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고 다시 중심으로 복귀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의 상호 투쟁과 상호 보완이라는 관계가 나온다.
예를 들어 남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양에 치우친 상태이며 여자는 마찬가지 인간을 중심으로 음에 치우친 상태이니, 이렇게 각자 반대로 치우친 존재이므로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이미 자기 내에서 중심인 인간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그런 가운데 서로 복귀하는 힘을 빌려주고 빌려 받는 상보적 관계를 이룬다. 이 관계가 곧 상반상성의 관계이다. 이렇게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남녀는 사회적으로 중심의 통일을 이룬다. 이 중심의 통일은 남녀 각자가 자기의 중심으로 복귀한 것이며 동시에 남녀가 이루는 통일체이다.
자연에서 사물은 자기가 존재하는 범주나 층위 속에서* 각자 서로 대립하는 음과 양으로서 상호 투쟁하는 동시에 서로 보완한다. 사람에서 남녀가 그러하다면, 지배층과 피지배층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각층에서 이런 상반상성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늘과 땅, 물과 불, 꽃과 새는 서로 싸우고 서로 돕는다.
주*) 나중에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상반상성도 가능해진다. 이 점은 왕선산의 코스모고니를 다룰 때 살펴보기로 하자.
사물의 균형과 고유성의 측면에서 사물은 개별적이며 자주성을 지닌다. 그러나 사물이 운동 상태에 있어서 자기 내로 복귀하려 하며 상반상성의 관계에 있다는 측면에서 소통성을 지닌다. 이규성이 왕선산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런 자주성과 소통성이 동시에 가능한 형이상학적 토대이다.
6)
그러나 문제는 이 본체의 모습이다. 이규성은 본체에 대한 설명과 관련해서 왕선산의 오류를 지적한다. 왕선산의 음양이 동정하는 운동을 개념적으로 본다면 음과 양은 상호 평등할 뿐이다. 그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우위는 아니며 다만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하나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도 왕선산은 운동 가운데 양과 음의 역할을 분담하며 양이 음에 대해 우위를 가진다고 본다. 양은 강건하며 음은 유순하니, 건의 강건성이 만물을 창조하는 “존재와 변화의 주인이며” 음의 유순성은 리를 지켜나가는 것 즉 “변화를 수용하여 작용을 성취하는 것”(생성의 철학, 172)일 뿐이다.
양과 음의 통일이 사물을 이루지만, 그 가운데 양이 음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은 왕선산 자신의 형이상학으로부터의 이탈이며 결국 전통적 유가 질서로 복귀하려는 것을 정당화할 뿐이다. 이규성은 음양에 대한 이런 해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문맥에서 강건성은 집단을 응집하는 지배의 주체성이 된다. 그것은 집단을 새로운 미래로 열어젖히는 창조성이 아니라 군거 본능에 지배된 곤충적 주체성이 된다. 집단화된 음의 세력은 강건성의 주체에 의부해야만 자연 질서에 따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생성의 철학, 173)
[회원동정] 오주연 회원 <제2회 중천학술상> 수상(2026년 3월 14일) [한철연 소식]
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주연(건국대) 회원이 중천철학재단과 중국철학회가 선정하는 제2회 중천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안동섭 울산대 교수와 공동수상했습니다. 시상식은 3월 14일 원주 호텔인터불고에서 열렸습니다.
수상 논문은 「주희 철학에서 앎과 실천의 관계에 관한 고찰 – 진지(眞知)를 중심으로」(2025) 입니다. 한국중국학회에서 발간하는 『중국학』 제113집(2025년 08월 31일)에 게재되었습니다.
2024년 「주자학의 도덕실천동력에 관한 연구 : 주희의 진지와 퇴계의 리자도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오주연 회원은 2019년 즈음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세미나 활동을 시작하였고, 얼마전 출간된 단행본 『다시, 동학』(동녘, 2026.05.11)을 분과원들과 함께 썼습니다. 2023년 5월에 ‘고대 중국의 비극적 세계관과 인간의 조건-맹자의 명론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월례발표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학술논문으로 「다산 정약용의 현능론 연구 -상서고훈(尙書古訓)을 중심으로 -」(2026), 「덕 윤리와 정약용의 덕론」(2023) 등이 있으며 한중 전통철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자리에서 활발한 학술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주연 회원은 뜻깊은 상을 받게되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유학이 말하는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탐구하는 연구를 지속할 것’이라며 자신의 의지를 밝혔습니다. 앞으로 오주연 선생님의 활발한 연구와 활동을 기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원주투데이» 기사 링크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참조 : https://www.wonju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9576
박제와 파묘의 정치학, 비난의 칼날인가 비판의 죽비인가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박제와 파묘의 정치학, 비난의 칼날인가 비판의 죽비인가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26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유현상(숭실대학교)
데이터는 AI산업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이용자의 명령 혹은 의도에 부합하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AI는 가능한 한 많은 관련 데이터를 검토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데이터 축적은 AI산업 발전을 위한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용량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상 자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데이터로 저장되는 정보의 상당량은 말과 글로 생산된다. 한번 생산된 말과 글이 디지털 세계에 등록되는 순간 영구히 저장된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에는 이를 ‘박제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편, 저장된 정보는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 다시 소환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일들을 최근에는 ‘파묘된다’고도 한다. ‘파묘’라는 단어는 동명의 영화가 화제가 된 이후에 빈번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파묘’라는 단어를 쓸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정치권의 말과 글들이 ‘박제’되었다가 ‘파묘’로 이어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다양한 종류의 SNS와 유튜브 같은 플랫폼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정치적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 주권자들이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밝히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니 그 자체가 나쁜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마이크를 잡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타인의 박제된 말과 글을 소환해 파묘하는 방법들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인들의 말에 많이 주목한다. 물론 주권자는 정치인들이 일관된 정치적 입장과 행보를 요구할 수 있다. 변절과 배신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으면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기 어려운 이유이다. 따라서 ‘박제’된 말과 글이 현재의 모습과 불일치하거나 모순되는 것으로 입증될 때 ‘파묘’는 매우 예리한 칼이 된다. 우려되는 점은 합리적인 비판을 통해 민주적 역량을 강화하는 약속 대련 정도로 그칠 논쟁이 잘 벼린 칼날을 휘두르는 진검승부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한때 동일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활동했던 정치세력이나 평론가들도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처럼 상처 주는 말들로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같은 진영에 속해 있었다는 말인가?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비판의 언어로 그쳐야지 비난의 언어로 치명상을 입히려 해서는 안 된다. 적을 만들기는 쉬워도 연대할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서로 상처를 깊게 주고 받은 사이는 더더욱 연대하기 어렵다. 비난의 언어는 비판의 언어보다 훨씬 주목받는 ‘박제’가 되고 너무도 손쉽게 ‘파묘’될 수밖에 없다.
‘박제’와 ‘파묘’는 정치인들이나 공개적으로 언급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신중한 언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의 아이러니가 예상된다. 그것은 박제된 타인의 말과 글을 파묘하는 방법으로 공격했던 사람들의 언행 역시 박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락가락하는 정치인들의 언사야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치는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판단은 수학적 판단이 될 수 없다. 정치가 상황과 시대 정신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으면 수구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명심보감>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내 몸을 베는 칼이다.” 비판의 죽비는 정신을 차리게 하지만 비난의 칼은 동지와 내 영혼을 베어버릴 수 있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