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와 파묘의 정치학, 비난의 칼날인가 비판의 죽비인가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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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와 파묘의 정치학, 비난의 칼날인가 비판의 죽비인가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26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유현상(숭실대학교)

 

데이터는 AI산업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이용자의 명령 혹은 의도에 부합하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AI는 가능한 한 많은 관련 데이터를 검토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데이터 축적은 AI산업 발전을 위한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용량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상 자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데이터로 저장되는 정보의 상당량은 말과 글로 생산된다. 한번 생산된 말과 글이 디지털 세계에 등록되는 순간 영구히 저장된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에는 이를 ‘박제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편, 저장된 정보는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 다시 소환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일들을 최근에는 ‘파묘된다’고도 한다. ‘파묘’라는 단어는 동명의 영화가 화제가 된 이후에 빈번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파묘’라는 단어를 쓸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정치권의 말과 글들이 ‘박제’되었다가 ‘파묘’로 이어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다양한 종류의 SNS와 유튜브 같은 플랫폼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정치적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 주권자들이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밝히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니 그 자체가 나쁜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마이크를 잡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타인의 박제된 말과 글을 소환해 파묘하는 방법들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인들의 말에 많이 주목한다. 물론 주권자는 정치인들이 일관된 정치적 입장과 행보를 요구할 수 있다. 변절과 배신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으면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기 어려운 이유이다. 따라서 ‘박제’된 말과 글이 현재의 모습과 불일치하거나 모순되는 것으로 입증될 때 ‘파묘’는 매우 예리한 칼이 된다. 우려되는 점은 합리적인 비판을 통해 민주적 역량을 강화하는 약속 대련 정도로 그칠 논쟁이 잘 벼린 칼날을 휘두르는 진검승부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한때 동일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활동했던 정치세력이나 평론가들도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처럼 상처 주는 말들로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같은 진영에 속해 있었다는 말인가?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비판의 언어로 그쳐야지 비난의 언어로 치명상을 입히려 해서는 안 된다. 적을 만들기는 쉬워도 연대할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서로 상처를 깊게 주고 받은 사이는 더더욱 연대하기 어렵다. 비난의 언어는 비판의 언어보다 훨씬 주목받는 ‘박제’가 되고 너무도 손쉽게 ‘파묘’될 수밖에 없다.

‘박제’와 ‘파묘’는 정치인들이나 공개적으로 언급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신중한 언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의 아이러니가 예상된다. 그것은 박제된 타인의 말과 글을 파묘하는 방법으로 공격했던 사람들의 언행 역시 박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락가락하는 정치인들의 언사야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치는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판단은 수학적 판단이 될 수 없다. 정치가 상황과 시대 정신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으면 수구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명심보감>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내 몸을 베는 칼이다.” 비판의 죽비는 정신을 차리게 하지만 비난의 칼은 동지와 내 영혼을 베어버릴 수 있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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