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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철학과 생성의 철학(1)-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이규성 철학과 생성의 철학(1)-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1)

이규성 선생(이하 이규성) 철학의 본령이 어디 있을까? 이규성이 지은 여러 저서를 읽는 가운데 항상 느꼈던 의문이 바로 이런 질문이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는 단순한 철학 연구자는 아니다. 그는 무언가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기 위해 고투했으니, 그의 글을 읽으면 누구나 이규성 철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철학은 기존의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일종의 논평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그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의 철학적 주장은 그가 쓴 글의 맥락에 따라서 제시되었기에 여러 차례 중복되는 발언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겹칠 뿐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그의 철학은 그런 논평 가운데 흩어서 말해졌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을 읽는 가운데 필자에게 든 의문이 그런 주장들 가운데 이규성 철학의 핵심, 본령이라고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2)

일단 그의 철학의 출발점은 시대 상황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여러 글 가운데 아마도 자신의 철학을 위해 체계화를 시도했던 유일한 글이 있다면, <한국현대철학사론-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이라는 책 3부 현실과 전망>이라는 글일 것이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철학에 도달하기 위해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도래하는 시대의 철학을 제시했는데, 다만 자기의 철학의 출발점과 극복해야 할 철학, 그리고 앞으로 기대하는 철학의 지향점만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최종적 결론 즉 그가 형성하려는 형이상학 자체는 이 글에서 빠져 있다는 점에서 미완성의 글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통해서 그의 철학적 의식만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 글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 그가 처했던 그의 시대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은 그가 철학을 개인적인 선호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대한 극복이라는 과제에 복무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하겠다.

이 글의 목적상 그런 비판을 상세하게 다루는 것은 생략하려 한다. 다만 그는 자기 시대를 외적으로는 서구의 지배 아래 종속되어 있으며, 내적으로는 억압과 불평등으로 가득한 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그가 70년대 이후 종속적 발전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는 사정을 안다면, 누구나 시인할 만한 시대 의식일 것이다.

그는 이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실천적 운동에 뛰어든 흔적은 찾기 어렵다. 몇몇 에피소드적 사건*을 제외하면 그는 시대 극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근원적인 실천에 종사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서 이 더 근원적 실천이 바로 철학함이다.

주*필자의 기억으로 이규성 선생은 아마도 73년경 정현백 선생 등과 함께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일주일 정도 활동했다. 그리고 그의 친구와 함께 그의 집이 있던 창신동(또는 동대문) 쪽 어느 교회 부설 야학 강사로 1년 정도 활동하기도 했다. 연도나 장소 등에 관한 필자의 기억은 불확실하지만, 그의 실천적 관심에 대한 증거로 소개한다.

3)

이 글은 그의 철학 가운데 그가 형성하려고 했던 형이상학을 찾아보려는 시도인데, 이런 형이상학이 어떤 맥락에서 제시되었는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을 읽어 볼 때 대체로 그의 철학적 정신은 다음과 같이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①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종속적 발전, 억압과 불평등의 근원은 서구 과학 기술의 지배에 있다고 보며, 이런 서구 과학 기술은 그 밑바닥에 서구의 전통을 이루는 형이상학 즉 초월적 실재론 또는 객관적 관념론이 존재한다고 본다.

② 그는 이런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 서구 철학 내부에서 일어난 비판적 철학에 주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이다. 하지만, 그는 쇼펜하우어나 베르그송에서도 어떤 한계(?)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③ 그가 쓴 논문의 순서만 가지고 보면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 80년대 초기에는 주로 맹자나 주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초월적 실재론이나 객관적 관념론의 전통에 부딪히면서 실망한다. 그는 이 시기 대진(1982)이나 강유위(2003), 이대조(1990)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④ 80년대 말에서 2000년까지 그는 두 권의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곧 황종희의 내재 철학(1994)이고 왕선산의 생성 철학(2001)이다. 여기서 그는 생성의 세계와 합일(천인합일)하는 가운데 심적 개방성과 소통의 가능성에 도달한다는 원리에 이른다. 그는 두 철학자에게서 자신이 발견하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어느 정도 찾은 것으로 보인다.

⑤ 그에게서 실재는 단순한 이론적 세계가 아니라 윤리적 세계이므로 형이상학적 혁명은 곧 윤리적 혁명이 된다. 그는 이런 내적 혁명을 통해 개방성과 소통성을 갖춘 위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실천적 혁명이 가능하다고 본다.(내성외왕의 정신) 그러나 그는 두 철학자가 제시한 윤리는 여전히 봉건적 윤리에 머무른다는 한계 때문에 고민한다.

⑥ 2011년 발표된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에서 그는 생성의 형이상학에서 발굴할 수 있는 저항정신, 시대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신적 혁명, 개방과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그는 그의 철학적 고투의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⑦ 그 이후 그는 쇼펜하우어에 관한 연구서, 한국이나 중국의 현대철학자에 대한 논평에 몰두하는데 이는 자신이 발전시킨 철학을 완성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 철학의 서술적 전개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 그의 철학의 핵심은 형이상학적 혁명에 있다. 그는 이 형이상학적 혁명을 생성의 철학에서 발견하며 이 생성의 철학을 통해 심적 개방성과 소통적 연대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논지는 사실 앞으로 논증되어야 할 테제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 가운데 특히 하나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려 하는데 바로 그가 몰두 했던 생성의 형이상학이다.  이규성의 철학의 주춧돌이라고 할 주장 즉 생성의 철학을 통해 내적 개방성과 소통의 연대성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성공적이었을까? 필자가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바로 그가 제시한 생성의 철학이 어떤 점에서 개방성과 소통의 근거가 되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에 있다.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김성우(대동평화연구원)

 

세계는 ‘빅테크 과두정’이라는 새로운 유령의 위협 앞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월가를 대신해 거대 IT 플랫폼 기업들이 경제를 넘어 정치 권력까지 장악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조차 “우리는 빅테크 억만장자들의 과두정으로 향하고 있다”고 경고했듯이, 이는 디스토피아 소설 속 시나리오가 아닌 우리가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사악한 생각’은 본질적으로 ‘은밀함’을 속성으로 한다. 공론장이 파괴되고 정보가 소수 권력에 독점될 때 사회는 어둠의 시대로 진입한다. 오늘날 알고리즘 권력은 겉으로는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이면에는 데이터 독점과 여론 조작을 통해 공공성(Publicity)의 기초를 잠식하며 공동선(Common Good)을 파괴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류에게 ‘재앙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낳고 있다. 사생활 침해, 차별적 알고리즘, 법적 책 임의 불명확성 등 인공지능이 야기하는 사회 문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AI가 학습한 편향된 데이터는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고착화하고, 딥페이크와 위치 추적 기술은 개인의 기본권을 상시적으로 위협한다. 확증 편향을 강화해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필터 버블’ 현상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위기의 핵심에는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빅테크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구글, 메타, 아마존과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사용자 데이터를 독점하고, 객관성과 중립성으로 포장된 알고리즘을 통해 여론과 정치적 선호까지 조작하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이 폭로했듯, 이윤 극대화를 위해 설계된 알고리즘은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불투명한 통제 체제로 변모시키고 있다. AI 기술의 상업적 권한이 빅테크 과두정에 집중되면서, AI는 인류의 번영이 아닌 소수의 사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그런데 가장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위협은 바로 ‘노동의 종말’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예견한 ‘노동의 종말’은 AI의 비약적 발달과 함께 가혹한 현실이 되었다. 정보통신기술의 진보로 세계 경제 규모와 생산성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고용 시장은 얼어붙고 실업의 공포는 전방 위로 확산 중이다. 이는 기술 혁신이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과거 자본주의가 가졌던 ‘기술 진보에 따른 고용 창출’이라는 선순환 기제를 완전히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모순이 드러난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간을 배제한 효율적 기술을 채택하지만, 그 결과로 해고된 노동자들은 구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즉, 생산의 효율성은 극대화되었으나 정작 그 생산물을 소비할 주체는 사라지는 ‘수요의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술 혁신의 파급 범위다. 과거의 자동화가 육체적 반복 노동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AI와 로봇이 의사, 변호사 등 고도의 지적 전문직 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다. 숙련된 경력자들은 일터에서 밀려나고, 청년층을 위한 신규 고용의 문은 아예 폐쇄되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가 고착화될 전망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의 결실은 플랫폼을 장악한 소수 빅테크 과두 세력에만 집중될 뿐, 대다수 시민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풍요에서 소외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정점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용 절벽과 수요 부족의 악순환이 심화되면, 과거 대공황과 같은 전 지구적 경제 참사가 재현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파국을 막고 자본주의의 자정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복지를 강조 하는 케인스의 복지경제학 아니었던가.

출처: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300


 

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한길석(중부대 학생성장교양학부)

 

개강을 맞아 울적한 기분으로 수업 준비 겸 책장을 뒤지다가 못 보던 찻잔 하나를 발견했다. 개강을 피하고 싶은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사과 한 알 크기의 포동한 녀석으로, 달항아리 같은 살결에 알록달록한 점과 별을 붙이고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고놈 참 이쁘네’ 하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뭔가 수상쩍어서 살짝 돌려 보니 고양이는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커다란 갈색 얼룩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뒷면은 페인트 총에 맞은 우윳빛 벽화처럼 흉측한 얼룩으로 가득했다. 세상에는 돌려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내 말로는 조카가 준 거라 했다. 친구와 함께 도자기 공방에 놀러 갔다가 처음 빚어보고 선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얼룩은 어찌된 거냐 물으니 “원래 고양이였는데 망친 거래”라며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 봤다. 흙을 빚어 무늬를 넣고, 유약을 발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마 앞에서 기다리는 조카. 그런데, 백사장을 총총 걷던 고양이는 간데 없고, 정체불명의 갈색 얼룩이 떡하니 박혀 있는 것이다. 가마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조카는 끔찍한 사고 현장이 담긴 이 오브제를 이모에게 넘기고 재빨리 사라졌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이 찻잔은 두 개의 얼굴을 한 녀석이다. 한 쪽은 귀엽고 상큼하지만, 다른 한 쪽은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 일그러져 있다. 인생도 비슷하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자기를 빚어내 제 나름의 무늬와 빛깔을 뽐내며 세상에 나오지만, 터져버린 고양이 신세를 면치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머리를 쥐어짜고 갖은 애를 써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봤자, 생각대로 착착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다. 마이크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타이슨은 탁월한 철학자임이 틀림없다. 다만 그 밑에서 배우는 건 조금 겁난다.

조카는 이십대 청춘이다.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길을 조마조마해 하며,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텨낸다. 맵고 신 나날을 살다가 도자기를 빚으며 모처럼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열에 터진 고양이와 만났다. 가히 ‘미지와 근접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라 할 수 있다. 인생은 잠깐의 위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의 유머다. 웃기진 않지만. 그 나이에 나는 어땠나 생각해 봤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 다만 도자기 공방은 없었다.

우리는 보통 얼룩을 감춰 놓는다. 눈에 띄지 않게 치워두면 삶은 다시 쾌적하고 매끄러워진다. 실패한 기억은 장 속 깊숙이 넣어두거나, 잘 안 보이는 곳에 쳐 박아 놓는다. 그러나 그렇게 얼룩을 감추다 보면 고양이를 빚던 그 오후도, 가마 앞에서 느꼈던 설렘도 함께 지워진다. 결과만 기억하고 과정은 잊는 것. 실패의 흔적을 지우면서 그 안에 담긴 노력과 애정까지 지워버리는 것. 우리가 너무 자주 저지르는 잘못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갈색 얼룩이 보이도록 찻잔을 비스듬히 놓아두었다. 귀엽기보다는 아름다운 찻잔이 되었다. 얼룩과 점들이 찻잔을 완성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삶이란 영광과 얼룩을 함께 응시하는 것일 테다. 잘 구워진 면만 드러내려 하지 않고, 터져버린 면도 슬쩍 내보이는 것. 그렇게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 적어도 이 찻잔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삶의 얼룩이 늘어날 때마다 이 찻잔을 쳐다봐야겠다. 조카야 선물 고맙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8352


 

헤겔 형이상학 산책63- 헤겔과 베르질리우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3- 헤겔과 베르질리우스

1)

베르질리우스(1779-1848)는 헤겔과 동시대에 살았던 스웨덴 화학자이다. 그의 업적은 많다. 그는 달톤, 라부와지에의 원자가설을 옹호했으며, 엄격한 실험을 통해 많은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다. 특히 그는 동위원소[isomorphe]나 동소체[isomerische]의 발견으로 유명하다. 그는 오늘날 스웨덴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헤겔은 선택적 친화성을 논하는 실재하는 척도 A절 c항의 주석에서 이 탁월한 화학자 베르질리우스를 맹공하고 있다. 헤겔이 근대 과학자에 대한 비판은 유명하다. 앞에서 미적분을 논하면서 헤겔이 뉴턴을 어떻게 비판했는가를 소개했다. 헤겔에 따르면 뉴턴이 미적분에서 무한 개념이 비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지키지 못하고 다시 무한소 개념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비판했다.

후일, 미적분의 토대를 확립했다고 알려지는 바이어스트라스는 헤겔의 무한 비율 개념이 무한 수학의 토대가 된다고 말했으니, 헤겔이 논리학을 통한 과학의 이해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스웨덴의 국가적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베르질리우스를 헤겔이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문제의 핵심은 화학적 결합을 전기적 힘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베르질리우스는 당대에 볼타가 발견한 전지에 주목했다. 그는 볼타의 방식대로 구리판과 아연판을 쌓아서 전지를 만들어 화학적 실험에 도입했다.

이런 실험 끝에 그는 모든 화학적 결합이 전기력에 의한 것 즉 +전기와 -전기 사이에 작용하는 힘 때문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산과 알칼리의 결합은 예를 들어 H+와 OH-의 결합에서 보듯이 전기력에 의한 견인으로 보이므로 베르질리우스의 주장은 광범위하게 옹호되었다.

그러나 헤겔은 화학적 결합을 전기적 힘으로 설명하려는 베르질리우스의 주장을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원자론에 대한 헤겔의 비판과 연결되며 이를 통해 헤겔은 상호 침투라는 개념을 확립하는데, 그는 이를 주석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니, 이제 주석에서 헤겔이 전개하는 내용을 따라가면서 헤겔의 주장을 이해해보자.

2)

헤겔 당시에 라부와지에의 원자 가설이 확립되었다. 이는 원자량이 일정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어서 리터와 피셔는 실험을 통해 물질의 결합에서 원자량은 일정한 비율로 결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예를 들어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물을 만드는 비율은 1:8이다. 여기서 수소의 원자량이 1이고 산소의 원자량은 8인데, 물은 수소와 산소가 2:1의 비율로 결합하니, 그 질량의 비율은 1:8이 될 수밖에 없다. 일반화하면, 원자량 a와 b의 결합은 결합비율 x:y의 비율이 곱해져야 한다. 그러면 결합비율은 a:(b*y/x)가 된다.

베르톨레는 실험적으로 같은 결합에서 질량 비율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소위 동소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결합에서 질량 비율의 차이는 외적인 상황에 의존한다고 생각했지 이를 결합 이율의 일정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보지는 않았다.

“결국 그[베르톨레]는 이런 배제 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사정 예컨대 응집의 강도나 고형화된 염산의 물속에서의 비용해성은 작용 인자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정은 그밖에 또 다른 사정 예컨대 온도를 통해서도 그 작용이 지양될 수 있음을 밝혀 놓았다.”(논리학 재판, GW21, S. 356)

그러므로 이런 외적 상황을 제거한다면, 리터나 피셔가 주장한 대로 물질의 결합에서 질량은 일정한 비율에 따른다고 보았다.

3)

헤겔은 베르톨레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갑자기 베르젤리우스를 끌어들인다. 베르젤리우스는 베르톨레*가 일정 비율의 법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주장했는데, 이는 베르젤리우스가 베르톨래를 곡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 베르질리우스는 1818년 파리에 들러 베르톨레의 실험실을 방문하여 그와 교류했다. 그러나 베르질리우스는 베르톨레의 견해를 비판한 결과 둘 사이는 서먹해졌다.

문제는 화학적 결합에서 일정 비율의 법칙이 아니다. 헤겔이 베르질리우스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화학적 결합에서 일정 비율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원리다. 베르질리우스는 이런 화학적 결합은 결합된 원자가 결합하는 다른 원자에 의해 둘러싸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둘러싸인다는 것은 결합하는 원자가 결합된 원자가 지닌 원자 사이의 공간에 끼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사이의 공간에 있다는 것은 결합하는 원자가 결합한 원자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결합은 외면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한다고 본다.

“이 말은 곧 용해된 것이 용해 매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는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용해 매체의 사이 공간은 용해 매체가 비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해된 실에는 용해 매체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비록 그 용해 매체가 그것을 둘러싸고 에워싸고 있든가 아니면 그것에 의해 둘러싸이고 에워싸여 있든 간에 용해 매체 밖에 그러므로 확실히 그 용해 매체에 의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357)

헤겔은 이런 주장을 통해 베르질리우스가 외면적 관계에 머무르는 입자론 철학을 옹호하면서 역동론적 철학을 부정했다고 한다. 역동론적 철학은 화학적 결합을 상호 침투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인데, 이런 역동론은 물체의 결합에서 적어도 일정 부분적으로는 단순히 외면적 결합에 그치지 않고 내적인 통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베르질리우스는 상호 침투에 기초한 역동론적 결합 개념을 받아들이면, 물질의 결합에서 원자량이 보존되고, 그 결합이 항상 일정한 비율에 따른다는 비율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 원자량 보존이나 결합 이율의 법칙은 이런 불면의 원자를 가정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화학적 결합에서 역동론적 개념은 사물의 부분에의 합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 사물의 모든 면에서 합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화학적 결합에서 원자량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다만 부피에서 변화가 생겨남으로써 비중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4)

화학적 결합을 이처럼 외면적 결합으로 보면, 이제 화학적 결합을 유지하는 힘이 문제가 된다. 베르질리우스는 이런 결합하는 힘을 전기적 힘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미 앞서 말했지만, 산은 + 전기를 띄고 알칼리는 -전기를 띠니, 양자의 결합은 마치 전기적 힘에 의한 결합처럼 보인다. 이를 일반화하면 모든 화학적 결합은 전기력에 의한 결합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베르질리우스는 이런 전기적 힘은 물질의 질량과는 무관한 것이며, 따라서 화학적 결합에서 일어나는 외면적 결합을 설명하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더구나 그는 이 화학적 결합이 “다수간의 거리에서 작용하는 것이며 결합 직전의 견인과 결합을 통해 발생하는 연소의 현상을 잘 설명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360)고 본다.

그러나 알다시피 화학적 결합에서 전자가 매개 역할을 하지만, 그 결합이 전자 공유에 의한 것이더라도 그 힘이 전기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전자가 궤도를 이탈하거나 다른 궤도로 넘어가는 것에는 다양한 힘이 작용한다. 어떤 에너지라도 전자를 원자로부터 이탈해서 다른 원자의 궤도로 옮겨가게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전기의 힘도 작용할 수 있지만, 자주 화학적 반응에서 열을 가하거나 빛을 비추어서, 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헤겔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화학적 결합으로서 전자 공유를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기적 힘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았는데, 그는 이를 여러 가지 논증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이제 그가 제시한 논증을 열거해 보자.

① 전기적인 결합력은 중화되면 사라지는데 화학적 결합은 지속한다. 그것은 결합 후에도 지속적으로 결합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는 더는 전기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② 전기가 결합의 원인이더라도, 화학적 작용은 결합에 의거하는 것이다. 화학은 물질의 결합 때문에 변화하는 성질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전기력 외에 다른 결합을 일으키는 원인(열에너지나 빛 에너지, 심지어 운동 에너지 등)이 있을 수 있다.

③ 전기는 물체의 외면적 결합(일종의 혼합)을 이루지만, 화학은 질적 변화를 다루는데 그 질적 변화는 외면적 결합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질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내적 연관성이 출현해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전제다.

④ 실험적으로 전기력에서는 같은 전기를 지닌 물질이 결합하는 경우가 대립하는 전기를 지닌 물질의 결합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황과 산소의 결합이 산소와 구리의 결합보다 더 강한 예를 들고 있다.

5)

이상 설명했듯이 화학적 결합은 여러 힘으로 일어날 수 있다. 전기나 열, 운동 에너지, 빛 등도 화학적 결합을 일으킨다. 이런 결합을 통해 물질의 상호 침투가 일어나게 되며 그 결과 물질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헤겔은 라브와지에, 리터, 피셔 등이 원자량이 보존되고, 물질의 결합에서 일정 비율의 법칙이 있다는 주장은 올바른 경험 과학의 길이라 한다. 그런데 베르질리우스가 이를 원자론적 철학과 결합하고 다시 전기력을 결합 원인으로 끌어들인 것은 입자론적 철학에 사로잡힌 결과로 주장한다.

“올바른 이상에 이르는 실험적 길이 그런 비율에 그리고 리터 이래로 전면적으로 획득된 확장에 있었다면 그런 짓[베르질리우스의 전기화]을 통해서 이 위대한 발견이 경험의 길 밖에 놓여 있는 소위 입자론의 송가와 뒤섞이는 일이 그 자체로 더 확인된다. 그 출발점에서 경험의 원리를 내던지는 것만이 동기가 되어서 이전에 리터가 특별하게 시작한 착상을 받아들여서 전기적 양의 물체와 전기적 음의 물체의 확고한 질서를 제시해서 화학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가정하게 되었다.”(논리학 재판, GW21, S. 361)

헤겔 형이상학 산책62-선택적 친화성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2-선택적 친화성

1)

앞의 글에서 척도 관계[또는 비례]를 다루었다. 그 대표적 예가 곧 음조다. 도미솔, 레파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외운 음조 즉 장조와 단조다. 도레미파… 각 음이 이미 하나의 척도 즉 두 정량의 비율이다. 이런 척도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관계가 이루어지니, 그것이 곧 장조와 단조다. 헤겔은 이를 척도 관계 또는 비례라고 한다.

척도 관계에서 음조와 구별되는 새로운 관계가 출현한다. 이제 예를 들어 화학적 결합을 보자. 예를 들어 산[H+]와 알칼리[OH-]은 서로 결합하며 물[H₂O]이 된다. 이 결합은 알다시피 전자 공유에 따른 결합이다. 수소와 산소는 그와 동시에 원자가를 지닌다. 그런 원자가는 결합에서는 무관하다.

산소와 수소의 화학적 결합에서 산소와 수소는 원자가에서 일정한 척도를 지닌다. 산소가 16이라면 수소는 1이다. 이제 원자가에서 두 척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데, 물론 이 관계는 전자를 매개로 하는 관계다. 이 관계는 앞에서 말한 음조의 관계와 다른 특징을 지닌다.

2)

예를 들어 장조 즉 도미솔의 관계에서 그 관계는 다만 외적인 관계다. 그것은 그저 동일한 주파수의 배음 관계일 뿐이다. 관계하는 음들은 그 고유성을 잃지 않으며, 다만 같은 주파수의 음이 도미솔 사이에서 배가 된 채로 반복된다는 것 때문에 조화로운 관계로 나타난다.

그러나 화학적 결합은 다르다. 일단 여기서는 이중적 관계가 출현한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에서 그 원자가는 단순한 더하기로 끝난다. 물의 원자가는 결합한 수소와 산소의 무게의 단순한 합산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두 물체는 자신의 척도인 무게의 고유성을 잃지 않고 보존된다.

그러나 결합한 물에서 산과 알칼리의 전자 값은 서로 상쇄되어 사라진다. 그것은 양자가 서로 전자들을 공유하면서 자기에게 부족한 전자를 상대방의 전자를 통해 채우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유를 통해 두 결합하는 물체는 자신의 전자 값(즉 이온 상태)을 잃어버리고 중화된다.

산과 알칼리와 같은 결합을 이제 일반화해서 화학적 결합으로 나가보자. 화학적 결합 역시 전자가 공유됨으로써 일어난다. 이런 결합은 일정한 비율로 이루어진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은 2:1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반면 황과 산소의 결합은 1:2의 관계다.

더구나 이런 관계는 단순한 비율 이상으로 배타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수소는 산소와 결합하지만, 황과 결합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런 화학적 결합은 일정한 배타성을 지닌다. 어떤 것끼리는 결합하지만, 다른 것끼리는 결합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화학적 결합은 배타적인 통일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런 배타적 통일은 물체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물체의 다른 측면 즉 원자가의 측면에서 두 물체의 결합은 없다. 그것은 다만 공존할 뿐이다. 이런 물체에서 일어나는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헤겔이 말하는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다. 그러나 선택적 친화성의 결합에서 결합은 물체의 전면에 걸쳐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결합은 물체의 원자와는 무관하게 다만 전자의 측면에서만 일어나는 부분적인 결합이다.

3)

우리는 오늘은 구체적으로 산과 알칼리의 결합, 일반화해서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는 이유를 위와 같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것은 원자의 구조가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관계는 전자 공유를 통해 일어난다.

각 원자는 핵 주변에 전자 궤도를 가지고 있고 각 궤도는 일정한 수의 전자가 채우고 있다. 각 궤도에 들어가는 전자의 수는 일정한 데 특히 마지막 궤도에서 전자는 넘치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다른 원자 사이에 서로 전자를 공유하면서 안정된 궤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화학적 결합이다.

그러나 헤겔 당시에는 아직 이런 원자 구조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다만 일정한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화학적 결합이 전자 공유에 의한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당시 과학의 지식에서 원자 구조니, 전자 공유니 하는 개념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원소들이 서로 배타적인 통일을 이룬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합에는 일정한 비중의 비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려졌다. 헤겔은 이 절의 주에서 이 비율 법칙에 관한 리히터와 베르톨레의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헤겔은 이런 화학적 결합을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설명에서 헤겔은 비중을 가지고 설명하는데 비중은 곧 무게와 부피의 비례다. 각 사물은 이런 비중에서 고유한 척도를 지닌다. 이제 두 사물이 결합하게 되면 이 결합 관계를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비중을 무게A/부피B로 표현하자. 하나의 물체(예를 들어 수소)가 지닌 비중을 a/b 라고 하고 다른 물체(예를 들어 산소)가 지닌 비중을 c/d 라고 한다면, 결합한 물체의 비중은 a+c /b+d 가 된다.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지만, 이때 결합한(물)에서 분자를 이루는 두 물체의 무게는 결합 전과 결합 후가 동일하다. 그러나 비중은 서로 달라진다. 이런 비중의 차이는 곧 부피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결과다.

4)

이런 사실을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비중에서 무게와 같은 것을 내재 존재[Insichsein]라고 한다. 타자와 결합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내재 존재는 플라톤적 이데아 개념에 가깝다. 물체의 무게가 물체의 고유성이라는 생각은 그리스 원자론자로부터 유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받아들인 견해다.

“그러나 다만 무게는 결합 이전에 출현했던 무게의 합으로서 발견된다. 무게에 더해지는 측면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측면으로서 고정된 현존으로 되며 이를 통해 지속하는 직접적 정량을 지니게 되는 측면이다.”(논리학 재판, GW21, 348)

반면 부피와 같은 것은 외면적인 것이자 관념성[Ideelle] 즉 타자와 결합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다.

“두 특정화된 상이한 물질의 혼합에 따라서 더해진 부피에서 변화가 -통상적으로는 축소인데- 제시된다는 사실은 감각적 지각에서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공간 자체는 병존하는 등장하는 물질의 존립을 이룬다. 그러나 대자 존재가 자체 내에 포함하는 부정성에 대립하여 존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가변적인 것이다. 공간은 이런 방식으로 진정한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서 관념적인 것으로서 정립된다.” (논리학 재판, GW21, 348)

여기서 헤겔은 일반적 공간과 비중 속에 있는 공간[부피]을 구분한다. 전자는 병존하는 공간이며 서로 외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이 경우 두 공간을 합하면, 단순히 더해진 공간만이 나온다. 그러나 후자는 결합하면 가변적으로 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를 관념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비중의 부피는 공간인데 이처럼 가변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여기서 부피는 “대자 존재가 포함하는 부정성에 지배되는[gegen]” 것이기 때문이다. 즉 두 물체의 부피가 대자 존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대자 존재라는 것은 통일하는 힘이다.

헤겔은 비록 아직 이 부피의 변화가 전자 공유의 결과인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상호 침투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상호 침투란 곧 두 물체의 결합에서 각자의 한 부분이 서로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호 침투를 통해 두 물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이 결합하게 된다. 이런 두 물체를 결합하는 관계이므로 이 관계를 헤겔은 대자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화학적 결합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이를 대자 존재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즉 이 결합이 ① 사물의 내재 존재[사물의 이데아]와는 무관한 외면적 측면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 ② 또한 상호 침투의 결과라는 것만은 헤겔이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겠다.

4)

헤겔은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두 물체 사이의 관계에 상호 침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이를 오늘날 전자 공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상호 침투가 원자 핵이 아닌 전자 사이의 공유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런 전자 공유를 일으키는 힘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화학적 결합 가운데 산과 알칼리는 +전기와 -전기 힘을 보여주니, 이 결합은 전기적 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 당시에 스웨덴 화학자 베르질리우스가 이로부터 모든 화학적 결합은 전기적 결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에 대해 의문을 표명하며, 이 관계는 설명하기 위해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은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괴테가 문학적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1809년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에서 결혼한 부부가 서로의 친구를 초대함으로써 서로 교차적으로 재결합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그 재결합은 부부였던 남녀가 헤어지고, 이성적이지만 부드러운 여성과 이성적이며 힘이 있는 남자가 서로 결합하고 감성적이지만 열정적 남자와 감성적이지만 우아한 여성이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그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이런 자연적으로 출현하는 선택적 친화의 관계가 있어서 아무리 제도적 강제를 통해서도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소설을 통해 주장했다.

우리는 앞에서 두 대립하는 성질[Eigenschaft]의 상호 작용을 통해 양[Quantiaet]이 생성되는 것을 보았다.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비례 관계인 척도[Mass]가 출현한다. 이제 두 척도의 결합 관계를 통해 상호 침투가 작용하게 된다. 이 상호 침투를 통해 일어나는 결합 관계가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다.

질에서 양으로 이행할 때 두 성질의 통일적 관계를 대자 존재라고 했다. 이제 두 척도 사이의 통일적 결합 관계에서 대자 존재가 다시 출현한다. 물론 아직은 척도의 일면에서 일어나는 통일이며 부분적인 대자 존재가 되겠다. 이것이 선택적 친화성이다. 그러나 마침내 척도의 전면에서 이런 대자 존재적인 통일이 일어나게 되면 본질로 이행하게 된다.

5)

앞에서 헤겔은 화학적인 결합을 두 척도 사이의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이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을 통해 두 물체는 일정한 비율로 결합하게 된다.

헤겔은 이런 계열이 물체의 한 측면이 대자적인 존재에 의해 결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음정에서 장조와 단조는 동일한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서 화학적 결합은 상호 침투에 의한 결합이다.

헤겔은 이런 배타적인 통일의 관계를 중화[neutralisieren]라고 한다. 이 중화는 한 측면에서는 단순한 혼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 다른 측면에서는 대자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비중을 지닌 두 물체의 화학적 결합에서 무게는 단순한 혼합이었으나 부피는 대자적인 통일이었다.

이런 중화하는 배타적 통일에 의해 척도의 계열이 성립한다. 예를 들어 산소는 수소와는 2:1의 관계로 결합하고 황과는 1:2의 관계로 결합한다. 수소는 탄소와 1: 3의 관계로 결합한다. 이런 결합 관계는 수소를 단위로 본다면, 산소와 탄소가 각기 1/2, 1/3이라는 비율로 관계한다. 이제 산소를 단위로 본다면, 2개의 수소와 1/2의 황과 결합한다. 이런 비율을 헤겔은 비례 수라고 하며 이런 비례 수는 일련의 계열을 형성한다. 이것이 곧 척도 계열이다.

6)

이런 척도 계열은 특정한 계열이며, 다른 계열에 대해 고유성을 지닌다. 척도 계열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것은 곧 이 척도 계열이 타자 즉 중화를 위해 결합하는 항과의 관계를 통한 것이다. 즉 이 중립화의 관계가 전개된 것이 이 척도 계열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비례 수 계열의 전체 속에 척도의 대자적으로 규정된 존재가 놓여 있다”라고 한다.

이제 척도 계열에서 항들의 관계를 보자. 앞에서 내포량을 규정할 때 그 정도는 비교되는 양을 지닌 다른 타자와 비교되면서 성립했다. 그것은 그저 크고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크고 작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동일한 양적인 측면에서 크고 작은 것이다.

반면 척도 계열에서 항들의 관계는 내포량의 관계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다르다. 내포량이 그 계열에 속하는 항들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 것이라면, 척도 계열에서는 자기 계열과 중화하는 계열에 있는 어떤 것과 관계하여 규정된다.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 산소와 황의 관계에서 척도 계열을 이루는 각 항의 비례 수는 산소를 단위로 해서 수소와 황은 1/2: 2의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이런 척도 계열에서 각 항은 서로 독립적이다. 여기서 수소의 비례 지수가 1/2이고 황의 지수가 2라고 하더라도 황이 수소에 비해 더 크거나 작다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비례 수의 크고 작음은 다만 비교되는 단위를 통해서 규정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비례 수는 다만 중화의 특정한 규정성을 의미할 뿐이다. 이 점은 수소와 황이 산소를 단위로 하지 않고 다른 원소를 단위로 한다면, 그 비율 즉 비례 지수가 달라진다는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가 중화라고 불렀던 결합은 내포성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그 지수는 본질적으로 척도 규정이며 이를 통해 배타적이다. 수들은 이런 배타적 태도의 측면에서 그 연속성과 상호 융통 가능성을 상실했다. 부정적 성격을 유지하는 것은 크다거나 작다는 것인데, 하나ㄱ의 지수가 다른 지수에 대해갖는 우월성은 이런 크기 규정성에서는 머무르지 않는다.”(논리학 재판, GW21, 353)

7)

양적인 것은 자기를 벗어나 타자 속으로 연속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척도 계열에서 등장하는 양적인 것에서는 이런 이행이 사라진다. 각 항은 다른 항으로 넘어가지 않으며, 자기 고립적인 것이니, 이런 측면에서 각 항은 다른 항에 대한 부정의 부정이다.

각 항은 양적인 것이면서도 이제 양성을 벗어나 질적인 차이를 가지게 된다. 헤겔 논리학은 질에서 시작하여 양적인 것으로 이행했다. 이제 양적인 것은 오랜 여정을 끝내고 척도 계열에 이르러 다시 질적인 것으로 이행하게 됐다.

“이 관계 속에 두 가지 특정화하는 것이 어떤 것 즉 제삼자인 지수에 대해 자기를 특정화하는데, 나아가서 이 관계가 함축하는 것은 일자가 그 속에서 타자로 이행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부정 일반일 뿐만 아니라 양자가 그 속에서 부정적으로 정립된다는 것이며 각자가 그 속에서 서로 무차별하므로 그 부정은 다시 부정된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51)

헤겔 형이상학 산책 61-척도 관계로서 음의 장조와 단조[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61-척도 관계로서 음의 장조와 단조

1)

헤겔 논리학 존재론 3편 척도 2장의 제목은 ‘실재하는 척도’(초판의 경우 ‘자립적 척도’)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존재론의 경우 헤겔은 재판을 작성하면서 초판의 많은 부분을 뜯어고쳤으나 그래도 대체로 2/3 정도는 초판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초판과 재판을 대응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양자를 비교해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존재론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실재하는 척도’ 부분에서 초판과 재판은 너무나 달라서 초판의 다만 몇몇 구절만이 재판에 이용되고 있어서, 양자를 축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행히 초판과 재판의 절 제목은 유사하고 내용도 읽고 또 읽으면 비록 말은 다르지만, 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아서 양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초판과 재판의 비교보다는 헤겔이 사용하는 예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선 초판과 재판의 내용상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재판

자립적 척도

실재하는 척도

A 자립적 척도의 관계

A 자립적 척도의 관계

1 중화

a 두 척도의 결합

2 중화의 특정화

b 척도 비례의 계열로서 척도

3 선택적 친화성

c 선택적 친화성

B 매듭 선

B 대듭 선

C 무-척도

C 무- 척도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면 ‘자립적 척도’가 ‘실재하는 척도’로 변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A 절에서 중심인 2항에서 초판은 화학적인 ‘중화’가 다루어지며 재판에서는 ‘척도 비례’가 다루어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장의 핵심은 ‘척도 비례’의 개념이며, 그것이 ‘화학적 중화’와 상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학적 중화는 산과 알칼리의 결합을 말한다. 더 넓게 말하자면 대부분 화학적 결합을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헤겔은 이런 화학적 결합의 개념을 척도 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화학적 중화와 연관된다는 사실만을 힌트로 삼아서 이제 척도 관계의 개념부터 이해해 보자.

2)

척도 관계(척도 비례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척도란 앞에서 규정했듯이 두 정량의 비례 관계다. 이 척도의 대표적 예가 비중이다. 사물마다 고유한 척도가 있는데, 어떤 사물의 척도가 다른 사물의 척도를 재는 단위로 사용될 때, 그것이 잣대[Regel]이다.

이런 잣대는 아직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이런 잣대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실재하는 사물 밖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잣대는 구체적 사물이다. 즉 고유한 척도를 지닌 하나의 임의로 선택된 사물이 그런 잣대로 사용된다. 이런 구체적 사물로서 잣대가 특정화하는 척도[spezifische Mass]이다.

이 특정화하는 척도는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질을 지닌다. 예를 들어 온도계는 수은주로 이루어져 있다. 수은의 팽창 정도가 다른 사물의 온도를 재는 척도다. 그런데 이것은 수은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자신의 척도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서 다른 사물의 척도를 특정화한다. 예를 들어 비중병을 사용하여 사물의 비중을 잰다면, 물의 비중은 1이며 철의 비중은 10이며 나무의 비중은 0.1이다(이 숫자는 이해를 위해 상정한 임의적인 수치다) 이런 척도는 정량의 관계를 통해 나름대로 하나의 질을 이루니, 곧 무게/부피는 곧 비중이라는 철이나, 나무의 질을 낳는다.

3)

앞에서 이런 특정화하는 척도가 실재하는 척도로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비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물마다 고유하지만, 모든 사물에서 고정적이다. 철은 부피를 아무리 늘리더라도 그 비중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10이다.

그런데 사물의 온도의 경우 사물마다 고유한 온도 비례를 지니지만, 각 사물의 온도는 비례적으로 증감한다. 철[Fe]의 온도는 급격하게 상승하며 구리[Cu]의 온도는 천천히 상승한다. 이처럼 어떤 척도가 일정한 비례를 통해 증감할 때, 헤겔은 ‘실재하는 척도’ 또는 ‘자립적인 척도’라고 한다. 여기서 척도 비율의 증감은 직선적이라기보다 제곱 함수나 제곱근 함수처럼 곡선적이다.

사실 특정화하는 척도 개념과 실재하는 척도 개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 사물이 척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척도로 다른 사물이 규정될 때 사물마다 고유한 특정화가 이루어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특정화하는 척도에서 두 정량 사이의 비율이 고정되어 있다면(직선 함수), 실재하는 척도에서 그 비율은 가변적(곡선 함수)이다.

“이제부터 다루어지는 실재하는 척도는 우선 어떤 물체의 자립적 척도다. 그것은 다른 물체에 관계하여 이런 관계 속에서 동일한 물체를 특정화하며, 그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립적 물질을 특정화한다. 이런 특정화는 많은 다른 물체 일반에 외면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므로 다른 관계들을 즉 척도에서 다른 관계들을 산출하는 것이며 특정화한 자립성은 직접 비례 속에 머무르지 않으며 오히려 척도의 계열이라고 할 특정화한 규정성으로 이행한다.”

(논리학, 재판, 345-346)

4)

특정화하는 척도에서 실재하는 척도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런 발전을 통해서 출현하는 것이 척도 관계인데, 이제 이 척도 관계가 어떻게 출현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장 끝에서 온도를 통해 실재하는 척도가 설명되었는데, 헤겔은 2장에 들어오면서 실재하는 척도의 예로 흥미로운 예를 소개한다. 그것은 곧 음정이다. 음정은 알다시피 진동하는 현의 길이의 비례로 이루어진다. 도가 어떤 현의 길이라면, 미는 그 현의 1/2에 해당하는 길이며, 솔은 다시 1/4에 해당하는 길이다.(여기서도 숫자는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 때문에 임의적으로 설정했다. 그저 예라고만 이해해 주기 바란다.)

온도에서 외부 열에너지가 주어지면, 그것에 비례하여 물체의 온도가 증가한다. 온도의 증가는 비례(곡선 함수)에 따른다. 음정에서 도, 미, 솔도 온도처럼 비례하여 상승한다. 이 비례도 함수적으로는 곡선적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실재하는 척도로서 온도와 음정의 차이가 나타난다.

철의 온도가 상승하는 비례와 구리의 온도가 상승하는 비례는 서로 무관하다. 양자의 온도 상승이 그리는 곡선은 중첩되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질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음정의 경우는 다르다. 한편으로 모든 음정은 일정한 현의 길이 비율이다. 이 비율은 비례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비례를 지닌 음정들 사이에는 어떤 특정한 관계가 존재한다.

도, 미, 솔과 같은 음의 결합은 레, 파, 라와 같은 음의 결합과 구분되는 특정한 관계를 이룬다. 이 특정한 관계는 고유한 질적 차이를 낳는다. 전자는 장조이며 후자는 단조이다. 이처럼 장조와 단조로 구분되는 특정한 관계가 곧 척도의 관계이다. 간단히 말해서 척도 관계는 여러 사물을 일정한 척도로 비교했을 때 그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관계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5)

두 정량의 관계가 척도다. 다시 이런 척도들 사이의 관계가 바로 척도 관계다. 이제 두 척도가 어떤 특정한 관계를 이룰 때 그 관계를 구성하는 요인들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두 척도의 관계를 다루면서 헤겔은 비유의 무대를 화학의 관계 즉 산과 알칼리의 결합이나 화학적 결합과 같은 관계로 변경한다.

이런 척도들 사이의 일정한 관계는 화학적인 결합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음정에서는 그저 장조와 단조의 관계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화학적 결합은 더욱 특정한 관계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수소는 산소 2:1의 관계로 결합한다. 수소와 탄소는 1:3의 관계로 결합한다. 황과 산소는 1:2의 관계다. 반면, 철과 구리는 매개 없이는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척도 사이에서 화학적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는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