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 수학적 추론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 수학적 추론에 관해
1)
현존 추론의 일격은 E->B->A이다. 이격은 B->E->A이다. 여기서 첫 번째 소전제 E->B에서 B가 우연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세 번째 형식은 두 번째 추론 형식의 결론인 B->A를 대전제로 삼고 첫 번째 형식의 결론 E->A를 소전제로 삼는 것이다. 이제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두 전제에서 술어가 되는 A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곧 E->B인데, 이것은 첫 번째 형식에서 매개 없이 전제된 소전제가 이제 매개를 통해 나온 것으로 된다.
이로써 추론의 상호 매개가 완성된다. 세 가지 추론 형식을 통해 지금까지 추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 명제 E->A, B->A, E->B가 모두 직접적인 명제에서 추론을 통해 정립된 명제로 변화했다. 그러나 각 명제를 매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추론이 아닌 자기 밖의 추론이다. 세 가지 명제는 서로 순환적으로 타자에 의해 증명된다.
2)
세 번째 형식에서 추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민주당원이 한국인이고’ ‘국민당원이 한국인’이더라도, 민주당원이 국민당원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즉 A가 E에 우연성이고 B에게도 우연성이라면, B->A이고 E->A이더라도 E->B가 성립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매개자인 A가 어느 전제에서도 술어이므로, 즉 타자를 포섭하거나 타자에 내재할 뿐, 타자를 포섭하는 동시에 타자에게 포섭당하고 타자에 내재하는 동시에 타자를 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추론 형식도 특칭화를 통해 형식적 관점에서 추론의 일격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즉 E->A이고 어떤 B는 E라면, 어떤 B는 A가 된다. 이런 특칭화를 통해 형식적으로 타당하더라도, 결론의 특칭성은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성립하는 것 즉 무규정적인 것이 되므로, 헤겔은 이런 특칭화를 통한 정당화는 의미 없는 것이라 한다.
만일 두 번째 전제인 B->A를 부정 명제로 즉 ‘B는 -A가 아니다’로 바꾼다면, 형식적으로 추론은 성립할 수 있다. 이 경우 결론도 부정적으로 된다. A는 B는 배타적이므로 E가 A라면 ‘E는 B가 아니게’ 된다.
“이 추론은 추론의 일종으로서 이 추론에 부합한다면 여기서 E->A라는 한 관계가 이미 충분한 관계를 갖는 만큼, 다른 A->B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충분한 관계를 가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무차별한 판단 즉 부정 판단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하면 추론은 합법적으로 되지만, 결론은 필연적으로 부정적으로 된다.”(주관 논리학, GW12, 103)
이런 가정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세 번째 형식은 첫 번째 형식에서 대전제에서 술어 A 역시 우연성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추론에서 소전제의 술어인 B의 우연성은 이미 앞에서 두 번째 형식을 통해 폭로되었다. 이제 세 번째 추론 형식을 통해 첫 번째 추론의 형식에서 전제가 모두 우연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3)
두 번째, 세 번째 추론 형식을 통해 추론의 대표로 알려진 첫 번째 추론 형식이 사실은 우연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현존 추론에서 운동이 전개할 부정적 결과다. 삼격은 앞에서 보았듯이 형식적으로 성립하지 않지만, 삼격이 성립하는 특별한 경우가 있다.
즉 수학에서는 ‘두 사물이나 명제가 제삼의 것과 같다면 그 둘은 서로 같다’라는 법칙이 성립한다. 예를 들자면, 수학에서 a+b=c이고 x+y=c 라면, a+c=x+y가 된다. 또 기하학에서, 서로 질적으로 다른 도형에서 두 개의 도형이 세 번째 도형과 크기에서 동일하다면, 이 두 도형도 서로 크기가 동일하게 된다.
이는 수학적 추론이라 알려지는데, 헤겔은 이는 일반논리학을 완성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혀 몰랐던 격이라 한다. 헤겔은 이를 사격으로 규정하며 그 도식을 A=A=A로 표현한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사격(즉 특별한 삼격)이 성립하는 경우를 엄격하게 제한한다. 그것은 다만 양적인 것이나 수적인 것의 동등성이나 부등성을 다룰 때만 성립한다.
“이 추론[수학적]이 직관적으로 명백하다는 장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장점의 근거는 규정이 지닌 모든 질적 상이성을 추상하고 오직 그 규정의 양적 동등성이나 부등성만을 받아들인다는 것 즉 이 추론의 형식주의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주관 논리학, GW12, 104-105)
동등성이나 부등성은 산술적 계산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수학적 계산에서는 이 삼격이 성립한다. 그런데 기하학적으로는 그 외의 다른 관계도 있다. 예를 들어 비교의 관계 즉 ‘크다’나 ‘작다’라는 관계를 보면, 여기에서는 이런 수학적 추론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A가 C보다 크고’, ‘B가 C보다 크다’라고 할 때 A와 B 가운데 어느 것이 큰지는 알 수 없다.
수학적 동등성은 모두 ‘=’ 의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헤겔이 이 수학적 삼격을 A=A=A로 표현한 것은 이처럼 =의 관계에서 삼격이 성립하기 때문일 것이다.
4)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추론 형식이 일격에서 이격, 삼격으로 바뀌면서, 특수성에서 개별성을 거쳐 일반성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개념 계기가 매개로 되었지만, 단지 자리를 바꾸었을 뿐, 그 자신이 내적으로 타자로 이행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추상적인 규정이 매개로 남아 있었다.
현존 추론은 서로 타자의 전제가 되어 각자는 입증된 전제로부터 매개를 통해 끌어낸 결론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그 결론은 완전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로 전제가 되면서, 선결문제의 오류를 범한다. 하나의 추론 형식에서 전제는 입증된 것이어야 하지만, 그 전제를 입증하는 것은 그런 전제로부터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완전하며, 즉 자기의 결론은 입증된 전제로부터 끌어냈다는 주장은 오히려 기만이며 그런 추론은 가장 불완전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현존 추론의 운동을 통해 전제에서 동일성의 조건이 출현한다. 이격을 통해 소전제에서 E=B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시되었으며, 삼격을 통해 대전제에서 B=A임이 드러났다. 이런 긍정적 결과를 통해 현존 추론에서 항이 지닌 추상적 질적인 성격은 사라지고 오직 단일한 성질이 지닌 양적인 것이 매개 항으로서 추론에서 등장한다. 이를 통해 현존 추론은 반성 추론으로 이행한다.
“그런 변증법적 운동의 단순하게 부정적인 결과는 단순한 양적인, 수학적 추론을 통해 질적 형식 규정성이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출현하는 긍정적 결과는 즉 매개가 개별적인 질적인 형식 규정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질적 규정성의 구체적인 통일성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고찰된 세 가지 추론 격이 지닌 결함이나 형식주의는 그러한 개별 규정성이 추론의 격에서 중심을 이루어야 했다는 데 있다.”(주관 논리학, GW12, 106)
헤겔 논리학 개념운동22-현존(형식적) 추론의 모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운동22-현존 추론의 모순
1)
E-B-A라는 추론 형식은 현존 범주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추론 형식이다. 이를 명제로 표현하자면, 대전제 B->A와 소전제 E->B로부터 E->A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된다. 결론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 곧 두 전제이며, 매개 항은 두 전제에서 주어와 술어에 동시에 관계하면서 결론을 매개한다.
여기서 추론을 이루는 세 가지 항, 소개념(결론의 주어 E), 대개념(결론의 술어 A), 매개 항[B]는 각기 고립적인 추상적 규정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판단을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로 분석할 수 있듯이 이 추론 형식 역시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로 분석된다. 외연적으로 본다면, 개별자가 특수자에 포섭되고, 특수자는 일반자에 포섭된다. 그러나 내포적으로 본다면, 개별자가 지닌 성질 가운데 하나가 특수자이며 이 특수자가 지닌 성질 가운데 하나가 일반자이다.
현존 추론은 내포적인 의미에서 현존 판단에서와 마찬가지로 특수성이 개별성에, 그리고 일반성이 특수성에 우연적으로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성은 특수성 외 여러 성질을 가지며 그들은 서로 무차별하다. 따라서 이 특수성이 개별성에 속하는 것은 우연적이다. 또한, 특수성 역시 일반성 외 여러 성질을 가지고 그들 사이에 서로 무차별하다. 여기서도 일반성이 그 특수성에 속하는 것은 우연적이다.
여기서 특수성은 한편으로 개별성에 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성을 자기에 귀속시키므로, 개별성과 일반성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우연적이므로, 특수성을 통해 개별성과 일반성을 매개하는 것은 사태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추론하는 제삼자의 주관적 반성에 속할 뿐이다.
2)
추론의 형식은 사태 자체에 무관한 외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어진 동일한 개별자에 속하는 여러 성질 가운데 어느 것을 매개로 하고, 또 이 매개자의 여러 성질 가운데 어느 것을 술어로 할 것인지는 주관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일한 형식이 여러 내용을 지닌 추론을 가능하게 하며 심지어는 이를 통해 서로 대립하는 추론, 모순적인 추론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어인 개별자는 대립물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동물적인 동시에 정신적이니, 어떤 주관은 ‘사람은 정신적 존재이며 따라서 선악을 안다’라고 추론하지만, 다른 주관은 ‘사람은 동물적 존재이며, 따라서 선악을 구별하지 못한다’라고 추론한다.
따라서 이런 형식을 거쳐 나온 결론은 한편으로는 전제로부터 나온 매개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의 선택에 좌우되는 우연한 결론이며, 주관은 추론 이전에 이미 그런 결론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추어 전제나 매개를 선택한 것일 뿐이다.
이런 추론 형식이 독자적으로는 타당한 추론이지만, 그 내용상 모순에 빠진다는 것은 이 추론 형식이 담고 있는 내용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추론 형식 자체의 성격 즉 추론 형식에서 각 항이 우연적이며 서로 무차별하다는 성격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즉 그런 추론 형식 때문에 그런 모순적인 내용을 담게 된다.
“이제 형식적 추론에서 항들은 질적인 본성을 지니므로 구체적인 것[E]이 그에게 귀속되는 여러 규정 중 하나에 따라 파악됨에 따라서 추론이 [결론에서] 구체적인 것에 부여하는 술어는 매개 항에 상응한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추론은 그에 반대되는 규정에 이르므로 그 전제와 그것의 결론 자체는 완전히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 추론은 그 때문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주관 논리학, GW12, 96)
3)
이 추론이 모순에 부딪힌다는 사실은 아직은 정립된 것은 아니다. 이 추론의 표면적인 형식을 가지고 본다면, 이 추론은 타당한 추론이며, 자주 모든 추론의 대표적인 추론으로 여겨진다. 다른 모든 추론 형식은 이 대표적인 추론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 한에서만 올바르다.
이제 이 추론 형식을 반성해 보면, 곧 그 추론이 지닌 모순이 출현한다. 우선 추론에서 전제는 증명된 것이 아니다. 추론의 전제 자체 즉 대전제든 소전제든 직접적인 판단이며,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각 전제의 술어는 주어에 대해 우연적으로 관계한다.
전제가 증명된 전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 자체가 매개된 증명된 것이어야 한다. 우선 이런 증명은 그 전제가 동일한 추상적 추론 형식에 입증되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면 이 추론 형식의 전제가 되는 두 전제는 각기 두 전제를 통해 증명되며, 새로운 두 전제는 각기 또 두 전제를 가지게 되는 등, 무한한 진행 즉 악 무한이 일어나게 된다. 이 악 무한은 전제가 추상적인 직접적 존재라는 것과 입증된 것이어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 벌어지는 모순을 보여 준다.
이런 악 무한을 피하려면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 추론을 통해 증명된 결론을 전제로 삼는 방식이다. 즉 대전제인 B->A를 증명하기 위해 결론 E->A를 전제로 삼거나 소전제인 E->B를 증명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결론 E->A를 전제로 삼는 방식이다.
그렇게 결론을 전제로 삼아 그 결론을 끌어낸 전제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순환을 이루는 데 따라서 이런 방식은 추상적 추론 형식의 결함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상적 추론 형식이 지닌 한계나 모순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된다.
4)
첫 번째 추론 형식의 전제를 매개하는 두 번째 추론 형식은 우선 대 전제를 첫 번째 추론 형식을 통해 매개된 결론 E->A으로 삼고, 소전제 E->B는 그대로 두는 형식이다. 이렇게 되면, 두 번째 추론 형식에서 매개가 되는 것은 개별자 E이다. 첫 번째 추론의 대전제였던 B->A가 이제 결론이 되는데, 이제 매개를 통해 나온 결론이다. 결론의 술어는 여전히 A이지만, 주어는 변화되었다. E 대신 B가 주어다.
E와 B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형식에서 서로의 자리를 교환한다. E는 결론의 주어이었다가 이제 B가 했던 매개의 자리에 들어서며, B는 매개였으나 이제 결론의 주어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 E는 각자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규정을 가지며 마찬가지로 B 역시 특수자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규정을 가진다.
이처럼 E, B가 이중적 규정을 가지면서 개념 규정이 총체적이어야 한다는 추론의 요구 또는 목표에 조금 다가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규정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즉 하나가 다른 것의 자리에 들어서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그 자체에서 타자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니, 아직 개념 규정과는 거리가 멀다.
B->A라는 결론이 E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이 이 두 번째 격이 지닌 의미인데, 이는 내포적으로 보면, 곧 B가 A라는 성질을 가지는 것은 B에 속하는 원소 E가 그런 A라는 성질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A가 가운데 B가 아닌 B’는 A인지 아닌지는 판단에서 배제된다. 만일 B 가운데 E가 아닌 E’가 있다면, 그 경우는 이 추론 형식에서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다. 즉 그런 경우라면 B가 A라는 성질을 가질지는 보장할 수는 없다.
이 두 번째 추론은 형식적으로 보면, 성립하지 않는다. 매개자 E가 대전제와 소전제에서 동시에 주어이므로 여기서 매개자는 결론의 주어와 술어를 매개할 수 없다. 매개라면 한번은 포섭하고 한번은 포섭되거나 한번은 타자가 자기에 내재하고 다른 한 번은 자기가 타자에 내재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대머리다’라는 전제로부터 ‘대머리가 철학자다’가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없다.
“첫 번째 추론의 매개는 그 자체로 우연적인 것이었으나 두 번째 추론에서는 이러한 매개의 우연성이 정립된다.”(주관 논리학, GW12, 102)
4)
이때 ‘E->B’를 특칭 명제 즉 ‘약간의 B는 E이다’로 바꾸면 이 추론 형식은 성립하지만, 결론 역시 특칭화 되어야 한다. 즉 ‘약간의 B는 A다’로 된다. 그러나 이런 특칭 판단은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다. 즉 ‘약간의 B가 A라’면, ‘약간의 B는 A가 아니다’는 동시에 성립한다. 그러므로 이런 특칭 판단은 무규정적인 판단이라 하며, 그런 무규정적인 추론을 끌어낸다는 것은 추론으로서는 의미가 없다고 보면서 헤겔은 그런 특칭화를 통해 추론을 정당화하는 가능성을 무시한다.
“따라서 이런 이격의 결론은 특칭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특칭 판단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므로 이러한 결론에는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주관 논리학, GW12, 101-102)
만일 이 결론을 성립하게 하려면, 매개자인 E와 B가 같아야 한다. 헤겔의 말로 하자면 “부정적 통일성이 특수성이라는 규정성을 그 특수자로부터 제거해야”(주관 논리학, GW12, 100) 한다. 즉 오직 E=B일 때, E->A라는 대전제에서 결론 B->A가 나올 수 있다.
즉 대머리가 소크라테스의 내적 고유성이어야 한다. 즉 대머리가 아니면 소크라테스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E가 곧 B와 같다는 것은 단순히 외연적으로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포적으로 E의 고유한 속성이 B라는 말이다.
이격에서 요구되는 동일화는 나중에 나오는 삼격에 요구되는 동일화와 더불어 현존 추론이 추상적 우연성이라는 규정성을 벗어던지고 고유성을 항으로 갖는 반성 추론으로 이행하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1- 추론 형식의 발전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1- 추론 형식의 발전에 관해
1)
앞에서 말했듯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의 형식 즉 대표적인 삼단 논법은 헤겔에서는 이성의 형식인 추론이 아직 자기를 전개하지 못한, 따라서 아직 ‘현존’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추론 형식이다.
이 형식의 대표적 예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예 즉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이며 헤겔은 이것의 일반적 형식이 개별자[E]-특수자[B]-일반자[A]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를 삼단 논법의 형식에 따라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B-A
E-B
그러므로E-A
일반 논리학에 따르면 이런 형식이 추론을 대변하는 형식이며 나머지 모든 다른 추론은 적어도 타당한 것인 한에서, 이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며, 다시 말해 이 형식에 속하는 명제들을 대당 관계(부정이나 특칭화)를 통해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는 추론의 형식 사이에 사태의 진리를 인식하는 데서 어떤 발전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추론 형식이란 사태 자체의 내용과는 무관한, 다만 형식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헤겔은 위와 같은 대표적 형식은 최초의 출발점에 등장한 형식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최초의 형식 잘못된 형식이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이런 형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다만 추상적인 형식, 개념을 결여한 형식으로 파악한 것이 잘못이라고 본다.
“형식적 추론의 결함은 추론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 형식은 이성의 형식이지만, 그 형식이 단지 추상적이고 따라서 개념이 결여된 형식일 뿐이라는 데 있다.”(주관 논리학, GW12, 108)
그러므로 출발점으로서 이 형식은 자기 내에서 운동을 통해 다른 형식으로 나가는데, 이런 형식의 발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의 단순한 변형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 그 형식이 지닌 내용, 인식적 의미가 발전한다고 본다.
이런 발전은 마치 앞에서 판단을 다룰 때 칸트가 12개의 판단 형식이 각자 독자적으로 경험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는 데 반해, 헤겔은 이 12개의 판단 형식 즉 범주가 지닌 내용, 인식적 의미가 발전하는 것에 따라 전개된다고 보는 것과 같다.
그 때문에 추론 형식의 발전은 대체로 판단 형식의 발전과 같다. 판단 형식과 추론 형식을 단순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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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 |
추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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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범주 |
긍정 |
일격: E-B-A 이격: B-E-A 삼격: E-A-B 사격: A-A-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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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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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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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범주 |
단칭 |
전체->귀납->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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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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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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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범주 |
정언 |
정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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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언 |
가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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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 |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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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범주 |
단정[현실] |
객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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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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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필연] |
3)
각 범주마다 나타나는 세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네 개 범주의 전개는 동일하다는 점에서 판단과 추론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보인다. 위의 표를 보면, 관계 범주에서는 판단의 종류와 추론의 종류가 일치한다. 그러나 다른 범주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결정적 차이는 추론에서는 개념 범주가 없다는 것인데, 이는 개념 범주가 사실 ‘판단에 대한 판단’으로 이미 ‘판단의 판단에 대한 관계’로서 추론으로 이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굳이 찾자면, 차라리 주관성 장 다음에 나오는 객관성 장이 여기에 상응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현존 범주에서 추론의 변화는 매개 항의 변화에 따른다. 즉 매개항이 B에서 E로 그리고 A로 나간다. 반성 범주에서 추론은 통상적 논리학에서는 복합추론의 형식이라 불리는 것인데, 헤겔은 이를 반성 범주에 집어넣는다.
헤겔은 추론의 변화는 매개항의 변화에 따른다고 보며, 이 매개 항은 위의 세 가지 범주 모두에서 특수자에서 개별자를 거쳐 일반자로 나가는 방식(B->E-A)을 취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형식추론에서 일격은 전체 추론과 정언 추론에서 반복되며, 이격은 귀납법과 가언 추론에서 그리고 삼격은 유추와 선언 추론에서 반복된다.
이런 매개 항의 차이는 단순히 특수, 개별, 일반이라는 외연적 크기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E->B->A의 순서로 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니면, 내포의 차이로 본다면 거꾸로 A->B->E로 나가야 할 것이다.
4)
그렇다면, 추론이 나가는 길은 왜 이렇게 규정되는 것일까? 판단 형식으로서 범주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 경험의 길을 통해 제시했듯이 하나의 범주는 대상을 구성하고 여기서 현상 밖의 물 자체에 부딪히고 이런 모순 경험을 통해 범주는 자기 내로 반성하여 새로운 범주로 이행한다.
<논리학>에서 이런 범주 즉 판단 형식의 발전은 판단 형식이 지닌 내용 자체 즉 사태가 모순에 부딪히면서 다른 범주로 발전했다. 그런 점에서 이 <논리학>에서 판단 형식의 발전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 경험의 길을 전제로 하고 이것이 의식에 내면화되면서 일어나는 발전으로 보인다.
이제 추론의 경과를 보자. 추론이란 결국 주어와 술어를 매개 항을 통해 결합하는 것이다. 일반 논리학은 추론의 타당성을 문제 삼으면서 형식적 추론의 관계에 주목했다. 이는 추론을 이루는 항들의 외연적 크기의 비교를 통해(주연, 부주연의 관계) 이 추론의 정당성을 확립한다.
그 때문에 벤다이어그램이 추론의 타당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이런 형식적 추론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이 매개 항으로부터 도출되는지 아닌지 하는 여부를 판단하는 것”(주관 논리학, GW12, 108)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설혹 형식적으로 그런 추론이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그 추론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매개 항이 주어, 술어로부터 고립된 특수한 것이라면, 매개 항은 주어 술어에 대해 무차별하므로, 동일한 형식이더라도 여러 매개 항을 가지면서 여러 술어가 도출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서로 대립하는 술어가 도출될 수도 있으니,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추론이란 양극단이 지닌 통일성이 그 매개 안에 설정되어 있다는 데 있다면, 그러나 이 통일이 한편으로는 특수성으로서 독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외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지면서, 비 통일성이 추론의 본질적인 관계로 설정된다면, 그 추론이 이성이라 할지라도 이성적 타당성에 기여하지는 못한다.”(주관 논리학, GW12, 91)
5)
헤겔은 추론이 발전한다는 것은 매개가 이처럼 형식적 매개에 그치지 않고 실체적인 매개로 발전하는 과정이라 본다. 이 과정에서 형식적 매개가 지닌 모순이 드러나면서 더 발전된 매개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이 과정이 세 개의 범주가 차례로 그리고 각기 B->E->A로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범주와 세 가지 추론 형식을 이루는 표를 대각선으로 읽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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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추론 |
반성 추론 |
관계 추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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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자B |
일격 |
전체 |
정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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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
이격 |
귀납 |
가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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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삼격 |
유추 |
선언 |
특수자[B]는 외적인 추상적 규정이며, 그러기에 매개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수 있다(예를 들어 현존 추론에서 일격이 그렇다). 개별자는 이 구체적인 것이니, 개별자[E]가 매개라는 것은 주어, 술어를 매개하는 것이 적어도 하나는, 그러므로 약간은 있다는 말이 된다.(반성 추론에서 이격인 귀납법을 생각해 보라.) 일반자[A]가 매개라면, 그런 종류의 모든 것에서 매개가 성립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 매개는 실체적인 매개이다.(관계 추론에서 삼격인 선언 추론을 통해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인 현존 추론(또는 형식적 추론)에서 일격에 관해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현존 추론이 그 자체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실은 그것들[항들]은 단순한 추상적 규정들이 아니라 각각이 타자에 대한 관계이며 중심은 양극단의 규정들에 대립하는 특수성일 뿐만 아니라, 그 양극단의 규정들을 자기에서 정립된 채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91)
이런 추론이 발전하는 목표도 미리 그려 놓아야 하겠다. 매개 항이 주어나 술어를 이미 내적으로 통일하고 있어서 그 주어나 술어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항 즉 주어나 술어, 그리고 매개 항이 각자 독자적인 규정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총체성이어야 한다. 그게 곧 추론의 마지막 형태인 선언 추론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0-이성[Vernunft]의 형식과 내용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0-이성[Vernunft]의 형식과 내용에 관해
1)
헤겔 논리학 2부인 주관 논리학의 1편 주관성 장은 개념-판단-추론으로 전개되면서, 전통적인 논리학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이다. 앞에서 개념과 판단을 살펴보았다. 이제 추론을 살펴볼 차례다.
개념은 이 개념을 이루는 내적 계기 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 아직 외적인 자립적인 존재로 출현하지 않는 상태다. 판단에 이르러 이 내적 계기가 외적으로 출현하면서 판단을 이루는 주어, 술어의 규정성이 된다.
판단은 주어, 술어의 개념 규정성이 아직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판단의 형식이 발전하면서, 서로의 관계가 점차 고양된다. 마침내 최종적 판단인 개념의 필연성[자명한] 판단에서 개념 규정성이 내적 관계를 이룬다.
이때 양상 술어는 하나의 주어에 속하는 술어가 아니라 하나의 판단에 속하는 술어가 되면서 이미 판단에 관한 판단이 된다. 이 ‘판단에 관한 판단’은 곧이어 ‘판단과 판단의 관계’로서 추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추론을 통해 개념의 계기들 사이의 연관 관계가 다시 회복되지만, 개념에서처럼 단순히 내적 계기로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이 추론은 개념과 판단의 통일이 된다.
“추론은 판단 속에서 개념이 회복된 것이다. …. 추론에서 개념의 규정들이 판단의 양극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규정된 통일 또한 정립된다.”(주관 논리학, GW12, 90)
2)
헤겔에서 판단의 능력은 지성이라고 불리며, 추론의 능력은 곧 이성이라 한다. 헤겔에서 이 두 능력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이미 개념의 계기는 내적으로 연관되고 이 관계가 추론이므로 개념은 내적으로 추론이다. 반대로 추론은 이미 말했듯이 개념의 통일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니, 지성과 이성은 서로 통일되어 있다.
지성은 이성의 한 계기이며, 지성이 전개되면 곧 이성이다. 그러나 지성의 차원에서 아직 이성은 감추어져 있으며, 이성의 차원에서 지성은 자신의 한 계기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추론의 능력으로서 이성은 이성의 형식과 관련된 이름이다. 이성은 일반적으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대체로 일반적인 법칙, 또는 법칙의 원천을 인식하는 능력이라 말해진다. 법칙의 원천은 곧 신이나, 일자, 초월자, 무한자, 자유, 영혼 등이니 바로 이런 대상이 이성적 대상이라 지칭된다. 이 이성적 대상이 곧 이성의 내용적 측면이다.
통상적으로 일반 법칙의 인식은 매개나 추론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또는 내적 심정을 통해 인식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추론 능력이라는 이성의 형식적 측면은 무시되기 일쑤이며, 중요한 것은 바로 이성적 대상 자체의 인식에 있다고 말해진다.
반면, 헤겔은 이성의 내용적 측면은 이성의 형식적 측면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심정을 통해 이성적 대상인 신이나 자유를 인식한다면, 이 신이나 자유는 이성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감각적 확실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성적 대상이 진정으로 이성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의 형식인 추론을 통해 인식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성의 형식이야말로 이성적 대상을 진정으로, 본래 대로 인식하게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헤겔에서 이성적 대상은 현실의 근원이나 현실 너머에 직접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외화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니, 이 운동 자체가 이성의 형식인 추론이다. 이성적 대상 자체가 추론적으로 자기를 전개하니 이를 인식하는 방식 역시 추론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3)
이성의 형식인 추론이 신이나 자유, 영혼조차도 인식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보는 데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된다. 신적인 것을 인식하는 이성이 고착 추론이라고 하면 어떤 반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반감은 추론적 이성을 낮춰보는 견해를 전제로 한다. ‘고작 추론이라는 것을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는 생각일 것이다.
사실 일상적으로 추론은 대체로 낮춰본다. 추론을 다루는 논리학이란 굳이 배울 필요가 없는 학문으로 여겨진다. 논리학은 배워본 사람은 알지만, 무척이나 까다롭고 번거로운 학문이다. 오늘날 형식 논리학에 이르러서는 거의 수학적인 증명에 가까워지며, 더 복잡한 양화 논리나, 양상 논리에 이르면 일반인이 아니라 전공자조차도 포기하고 만다.
또, 논리학을 배우면 사유를 논리적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사실 논리학을 배웠다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논리학의 법칙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논리학자보다 더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마치 해부학이나 생리학을 배우지 않더라도 소화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듯이 논리학을 전혀 모르더라도 건전한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사유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한다.
까다롭고, 배울 필요가 없는 논리학, 추론의 형식은 게다가 거의 무의미하기조차 한다. 삼단논법의 대표적 예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추론을 보자.
‘소크라테스가 죽는다’라는 사실은 이런 형식적으로 체계화된 추론을 거치지 않더라도 직접 알 수 있으며 게다가 굳이 이 결론을 추론을 통해 안다고 하더라도 그 대전제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명제는 결론에 해당하는 것 즉 ‘소크라테스가 죽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죽고’.. 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니 그 자체가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이다.
논리학, 추론이 아무리 그 이름은 ‘이성’이라 하더라도 그런 이성은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것이니 그런 이성으로 신과 영혼과 자유를 인식한다는 것은 오히려 신과 영혼, 자유를 낮춰보는 것이 될 것이다.
4)
그러나 헤겔은 이성과 추론을 낮춰보는 견해는 이성과 추론의 본성에 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그런 낮춰봄은 통상적인 논리학에서 다루는 이성이나 추론의 형식[삼단논법, 헤겔적 표현으로는 E-B-A]이 사실은 다만 이성과 추론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겨우 출발점에 불과한 것인데도, 마치 이것이 이성의 유일한, 본래 능력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나온 거라 한다.
헤겔은 추론에 관한 통상적 서술은 결코 ‘이성적 인식’이 아니며, “이성적 형식으로서 추론에 관한 서술”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잘못된 서술은 “‘추론의 지성적 형식’에 머물러서, ”개념 규정들이 ‘추상적 형식적 규정’으로 간주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07)라는 데 나온다고 한다.
즉 추론 형식에 관한 오해는 이 추론 형식에서 그 형식을 구성하는 항(즉 대개념, 소개념, 매개념)을 추상적인 규정성으로 보고, 각자 고립적이고 서로 무차별적인 것으로 보면서, 따라서 추론의 형식은 그 형식이 다루는 내용과는 무관한 것, 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추론 형식은 ①사태가 그 스스로 전개하면서 드러내는 형식일 뿐이며, 그 때문에 추론을 이루는 항은 개념 규정으로서 이는 ② 독자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이미 자기 속에 포함하는 총체라는 것이다.
“개념 규정 사이에 내재와 포섭이 존재한다는 사실 속에 이미 … 개별자는 그 자체로 일반자이며 … 일반자는 그 자체로 개별자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으며, 더 자세히 말해 추론은 바로 이 통일성을 매개로 명시적으로 정립하고 추론이 지닌 규정[의미]란 바로 매개에 있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으며, 즉 개념 규정들이 … 오히려 그 통일성을 토대로 삼는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주관 논리학, GW12, 107)
그러므로 헤겔은 라이프니츠처럼 일반 논리학을 기호 언어로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경멸한다. 그런 시도는 논리학에 수학적 연산을 도입하려는 시도인데, 수는 개념이 없는 소재이며 계산은 외면적으로 합치하거나 분리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논리학은 “개념 자체를 유일한 내용을 삼는 대상”인데, 그런 논리학을 다루면서 “그토록 철저하게 비개념적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주관 논리학, GW12, 108-109)은 이성의 대상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6년 봄 제70회 정기학술대회 ‘생성과 소통의 철학을 향해 : 이규성 철학 연구 심포지엄’ 20260613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2026년도 한철연 봄 제70회 정기학술대회는 故 이규성(1952~2021) 선생님의 철학 연구를 주제로 거행되었습니다. 선생이 남긴 학술적 유산을 후학들의 시선에서 되돌아보고,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철학계의 바람직한 연구 방향을 모색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주제 : 생성과 소통의 철학을 향해 – 이규성 철학 연구 심포지엄
일시 : 2026년 6월 13일(토), 오후 1시(13:00~18:00)
장소 : 숭실대학교 진리관 3층 304호
▷ 개회사 13:00 회장: 이병태(경희대학교)
【제1부 소통과 연대의 철학】사회: 이관형(강서대학교)
이규성 철학 연구의 출발점에 서서 발표: 이정호(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이규성 철학에서 의지와 소통의 공동체의 가능성: 쇼펜하우어, 박은식, 최제우, 최시형을 중심으로 발표: 연효숙(연세대학교)|토론: 이종란(성균관대학교)
‘심파테이아’에서 ‘영적 코뮤니즘’으로 – 이규성 사유의 특징과 지향 발표: 이병태(경희대학교)|토론: 박영미(한양대학교)
【제2부 이규성 철학의 정신과 그 계승】사회 : 이지(이화여자대학교)
이규성 철학과 생성의 철학[1] –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발표: 이병창(동아대학교)|토론: 최유진(경남대학교)
이규성의 정주학 이해와 생성으로서의 ‘자유’ 발표: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토론: 김정철(충북대학교)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의 방법론적 계승: ‘내외합일’과 ‘내외불화’의 긴장과 교차를 중심으로 발표: 박민철(건국대학교)|토론: 오주연(건국대학교)
유튜브 영상
【제1부 소통과 연대의 철학】https://www.youtube.com/watch?v=pnd4OAu5iUM
【제2부 이규성 철학의 정신과 그 계승】https://www.youtube.com/watch?v=ke2fr3Zou0E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6년 4월 월례발표회 영상 : “주디스 버틀러의 몸과 물질의 정치학: 인간주의와 구조주의 사이에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6년 4월 월례발표회 “주디스 버틀러의 몸과 물질의 정치학: 인간주의와 구조주의 사이에서”
일시: 2026년 4월 12일 일요일 2시 장소: 온라인(ZOOM)
주제: 주디스 버틀러의 몸과 물질의 정치학: 인간주의와 구조주의 사이에서
발표자: 이승준
발표 소개: 버틀러의 물질과 몸, 그리고 수행성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다. 버틀러는 이를 젠더와 수행성을 둘러싼 아포리아를 통해 접근하는데, 그 아포리아의 내용은 이렇다. 한편으로 젠더가 선택되거나 구성되는 것이라면, 선택하는 주체를 미리 ‘인간주의’나 ‘의지주의’적으로 상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근대가 상정하는 주체의 형이상학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젠더가 강제되는 것이라면, 수행성이나 행위성은 어떻게 젠더로부터 도출될 수 있겠는가? 젠더의 강제성을 강조하면 문화적 결정론의 덫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 버틀러는 ‘구성적 외부’를 통해 구성이나 수행성이 단순히 주체의 의지의 발현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수행적 반복이 권력 안에서 권력에 순응/위반/도전하면서 권력 및 몸과 물질을 구성한다는 테제를 제시한다.
유튜브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QEBCeZ8Mtw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