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
1)
개별적 현상에 내재하는 동일성이 곧 법칙이다. 이 법칙은 상대적이므로, 여기서 현상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가 구별된다. 전자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법칙의 세계이며 후자는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의 세계이다.
이런 추상을 통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을 넘어 가장 완전한 추상적인 일반 법칙이 출현한다. 가장 추상적인 일반 법칙에서 법칙의 두 요소는 완전한 동일성을 이루며, 지금까지 그 요소를 지배했던 개별적 내용은 제거되고 오직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형식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 법칙은 주관적으로 추상된 것이니, 현상에 대해 외면적으로만 관계한다.
이런 추상적인 일반적 법칙과 구체적인 개별적 현상이 통일을 이루면서 처음 출현하는 것이 곧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다. 이는 현상의 측면과 법칙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는 총체성이다.
그런데 상대적인 현상의 법칙은 자기 내에 법칙의 동일성과 상호 무차별적 개별적 현상이 공존한다. 헤겔은 현상의 법칙 내에 들어있는 현상의 내용을 비본질적 현상이라 한다. 반면,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는 나타나는 현상은 ‘본질적 현상’이다.
법칙 세계의 본질적 현상은 현상 세계의 비본질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고 각자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완전하게 통일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법칙을 이루는 양자의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이면서 자기 관계이다. 즉 자기를 타자로 삼아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다. 즉 “각자는 자신의 타자를 자기 자신에서 포함하는 동시에 자립적인 것이 되어 이 타자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으로”(논리학, GW11, 348) 규정된다.
이전의 현상적 법칙은 내용이 무차별적이므로 그 내용은 법칙 관계 속에서 다만 형식적 자기 내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정립된 존재는 자기 자신에서 내적으로 반성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경우 동일성은 형식적 동일성이 아니라 실질적 또는 ‘실재하는 동일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타자는 동일한 것이며 현상하는 것은 그런 가운데 사실상 타자 속으로 반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으로 반성된다. 정립된 존재가 자기로 이처럼 반성하는 것이 바로 법칙이다. 그러나 정립된 존재는 현상하는 것으로서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비존재로 반성되거나 그 자신의 동일성은 그 자체 본질적으로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정성이며 자신의 타자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자기 내 반성인 법칙은 현상의 동일적인 토대일 뿐만 아니라 현상은 그 법칙에서 자신의 대립물을 가지며 그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다.”(논리학, GW11, 347)
2)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가장 추상적인 일반성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구체적인 개별성을 동시에 갖는다.
여기서 근거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이전에 추상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양자는 외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자기를 구체적으로 정립하며 개별적 현상이 되고 현상은 자기를 지양하여 법칙이 되니, 양자는 본질과 가상 사이의 매개 관계가 되며 이런 점에서 앞에서 설명한 근거 관계가 회복된다.
본질과 종적 개체 사이의 반성 관계가 여기서 다시 출현한 것이다. 여기서 법칙이 형식으로서 근거가 되고 현상이 토대가 되면서 현상은 자기 부정을 통해 근거로 복귀하고 근거는 자기를 정립하면서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이제 법칙은 현상 세계의 총체적 반성이므로 또한 현상 세계의 본질을 결여한 다양성도 포함한다. 가변적이고 변화하는 계기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본질적인 계기로 되면서 그것은 절대적 부정성이거나 일반적으로 말해 형식 자체가 되지만, 그 계기는 그 자체적인 동시에 대자적인 세계 속에서 자립적이지만 반성된 실존이라는 실재성을 갖는다. 거꾸로 이 반성될 자립성은 이제부터 자기 자신에서 형식을 갖고 이를 통해 내용은 단순히 다양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와 합일하는 내용인 것과 같다.”(논리학, GW11, 348)
“나아가서 또한 본질 세계는 현상 세계를 정립하는 근거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형식을 자신의 본질 규정 속에 포함하는 가운데 이 세계의 자기 동일성이 지양되며, 자신을 정립된 것으로 만들어 정립된 직접성으로서 현상 세계로 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49)
3)
그러나 이런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아직은 피안에 머무른다. 그것이 지닌 본질적 현상은 구체적인 자립성을 가지지만, 아직은 현실이 아니라 피안의 세계에서 가진다. 그러므로 현상의 세계를 감각적 세계라고 한다면, 이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세계의 초감각적 세계이다.
이 초감각적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감각을 넘어서서 순수하게 동일한 법칙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법칙이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실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세계와 같다.
이와 같은 피안의 법칙은 현상에 내재하는 법칙과 마찬가지 내용을 지니지만, 그 내용은 전도되어서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추어진 상처럼 현상 세계와 반대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피안의 법칙에 관해서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지성 장에서 자기의식 장으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제시한 바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설명된 전도의 내용은 여기 논리학에서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즉 현상에서 남극은 피안에서는 북극이 되고 현상에서 -전기는 피안에서는 +전기가 되며, 현상에서 범죄는 피안에서는 타자에게 베푸는 은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세계는 서로 관계하면서 현상 세계에서 긍정적인 것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인 세계에서는 부정적이고 거꾸로 전자에서 부정적인 것은 후자에서 긍정적이다. 현상 세계에서 북극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으로는 남극이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양전기는 그 자체로는 음전기이다. 현상 세계에서 악이고 불행 등은 그 자체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으로는 선이고 행복이다.”(논리학, GW11, 351)
헤겔이 이런 설명을 어디서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기독교에서 피안에 관한 서술에서 끌어낸 것이 아닐까 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유사한 설명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그것의 피안이라고 할 화폐에서는 전도된다고 한다. 상품에서 사용가치가 지배적이라면, 화폐는 교환가치가 지배한다. 이런 전도는 상품이 화폐로, 화폐가 다시 자본으로 발전하면서 계속해서 전도된 물신의 세계로 등장하는 데 헤겔의 피안 법칙,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라는 개념이 지닌 전도와 유사하다.
또는, 현대 물리학에서 쌍생성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하나의 에너지(감마선)는 서로 대립하는 두 물질로 분열된다. 전자와 양전자가 나오니, 만일 현실에서 전자가 나온다면, 그 이면의 세계에서는 양전자가 나올 것이다.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현상의 법칙과 피안의 법칙 사이의 관계와 서로 닮았다.
4)
현상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는 둘 다 현상과 법칙으로 이루어진 총체성이지만, 여기서 법칙의 측면은 서로 동일하고 현상의 측면은 서로 전도되어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으니, 이 모순을 통해 현상의 세계와 피안 세계의 대립은 해소된다.
“이제부터 법칙은 실재화하며, 법칙의 내적 동일성은 동시에 현존하는 동일성으로 되고, 거꾸로 법칙의 내용은 관념성[자기 동일성] 속으로 고양된다. 왜냐하면, 각 측면은 자기에서 다른 측면을 가지고 따라서 진정으로 다른 측면과 동일하며 그 결과 자기와도 동일하기에 이 내용은 자기 자신에서 지양된 내용이며, 자기 내로 반성된 내용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52)
양자의 대립이 해소되면서 법칙의 동일성이 이제 피안이 아니라 현상 속에서 출현하게 된다. 즉 피안의 세계가 현실에 실현되는 것이다. 이제 법칙은 반성된 총체성이고 현상은 직접적인 총체성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법칙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는 각자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대립하니, 여기서 자기를 넘어서서 자신의 타자로 끊임없이 이행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출현하는 것은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반발하여 두 가지 총체성으로 되는 총체성이다. 하나는 반성된 총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총체성이다. 양자는 처음에는 자립적인 것이지만, 다만 총체성으로서만 그런 것이다. 양자는 그런 한 각자 본질적으로 자기에서 타자의 계기를 갖는 것이다. 각자는 직접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동시에 반성된 것으로 규정되므로, 각자의 자립성은 이제부터 다만 타자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면서 자신의 자립성을 이런 양자의 통일 속에서 갖는 것으로서만 정립된다.”(논리학, GW11, 352)
법칙과 현상의 이런 관계가 앞으로 2편 3장 관계 장에서 전개될 전체와 부분, 힘과 외화,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 양자의 통일성은 내재하다가 마침내 마지막에 이르러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진다.
“세계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다양성의 형식 없는 총체이다. 이 세계는 본질적인 세계든, 현상하는 세계든 몰락한다. 왜냐하면, 다양성이 단순하게 상이한 것이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총체성도 아니고 우주도 아니며 본질적으로 관계로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52)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
1)
앞에서 실존에서 현상 즉 정립된 것으로 이행하면서 여기서 법칙 관계가 등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현상 세계는 실존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 내적으로 관계를 맺는 세계다. 이 세계에 내재하는 관계가 곧 법칙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법칙의 독일어 표현인 ‘Gesetz’가 ’정립된 것[Gesetztsein]‘에서 나왔다고 본다. 법칙은 곧 정립된 것이므로 이미 타자를 전제로 한다. 이런 전제가 상호적이므로 여기서 하나의 정립된 것은 다른 정립된 것과 관계하게 된다고 본다. 그것이 곧 법칙이다.
여기서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현상은 두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은 직접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며 다른 측면은 부정되고 정립된 측면이다. 현상 세계에서 자립적인 것들은 서로 무차별하며 반면 법칙의 세계에서 부정적인 것의 상호 관계를 통해 자기 동일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법칙은 현상의 반성을 통해 출현한 것이다. 현상의 무차별적 관계는 무실한 관계이고 이 반성을 통해 자기 동일성의 관계로 된다. 이런 반성은 아직 외적 반성이며 경험적인 추상화이며 일반화에 속한다. 이런 법칙은 아직 독립된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현상에 내재할 뿐이다.
2)
현상과 내재하는 법칙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 우선 자립적인 현상의 자기 매개를 통해 대립이 해소되며 긍정적인 동일성이 출현한다.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과 맺는 관계이다.
여기서 현상은 법칙을 내용으로 갖는다. 이 내용은 상호 관계를 통해 출현하는 본질적 내용이다. 동시에 현상은 그것 외에 직접적인 내용을 지닌다. 그러므로 법칙은 일반적이지만, 그것이 출현하는 현상 세계는 다양한 개별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낙하 법칙은 지구에서와 달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Grundlage]가 된다. 왜냐하면, 일반적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다만 외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현상이 지닌 개별적 내용은 그 법칙이 지닌 본질적 내용에 내적인 관련을 지니지 않는다. 이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적용되는 추상적인 공통성일 뿐이다.
“법칙은 토대 자체이며 현상은 동일한 내용을 지니지만, 그에 더해서 그 직접적인 존재가 지닌 비본질적 내용도 포함한다. 현상 자체가 법칙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현상이라는 형식 규정조차도 하나의 내용이며 더욱이 법칙의 내용으로부터 구별되는 내용이다.”(논리학, GW111, 345)
이런 법칙은 현상의 피안에 독립된 세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내재하며 “현상에 직접적으로 현현한다.” 그것은 “실존하는 또는 현상하는 세계의 고요한 모사”(논리학, GW111, 345)이다.
3)
그러나 여기서 좀 더 생각해 보면, 법칙의 일반성은 사실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런 상대성 때문에 좀 더 일반적인 법칙과 좀 더 현상적인 법칙의 차별이 발생한다.
이제 현상적 법칙 세계를 헤겔은 간단히 현상 세계라 하고 일반적 법칙 세계를 간단히 법칙 세계라고 한다. 그러면 현상 세계에 이미 일반성으로서 법칙이 내재하며 거꾸로 법칙 세계도 완전한 동일성이 아니라 우연성과 개별성이라는 현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현상 세계 속에도 이미 법칙이 들어있다. 여기서 법칙의 관계는 개별적 요소에 대해 더욱 외면적이며 이 법칙은 제한적으로 적용되며 동일한 법칙을 내용으로 하는 개별적이며 서로 무차별한 법칙들이 출현한다. 법칙의 개별적 내용이 곧 현상 세계를 현상 세계로 만드는 형식 규정이 된다.
일반적 법칙의 세계는 현상 세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이 출현하지만, 완전히 개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법칙의 세계 자체가 나름대로 개별적인 현상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현상과 법칙은 각기 이중적으로 된다. 현상 내에서 일반법칙이 들어있으며 법칙도 개별적 현상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현상과 법칙은 모두 총체적이다.
“양자는 오히려 하나의 총체성을 이룬다. 실존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법칙의 왕국이며 이 법칙의 왕국은 단순한 동일한 것이지만,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 속에서나 실존의 자기 자립성을 스스로 지양하는 가운데서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논리학, GW111, 345)
4)
이런 법칙의 일반화의 과정에서 순수한 추상적인 법칙이 출현하게 된다. 순수한 법칙에 이르면,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더는 자립적 무차별한 내용을 상실하고 법칙 관계를 이루는 한 요소로만 규정된다.
그럴 때 헤겔은 법칙은 긍정적 통일이 아니라 ‘부정적 통일’을 이루며, 즉 두 요소는 더는 구별되지 않고 개별 자립적 요소의 ‘내용’이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형식’으로 되었다고 한다.
“[상대적] 법칙은 현상의 긍정적인 본질 규정일 뿐이며 그것의 부정적인 본질 규정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내용 규정이 형식의 계기가 되어서 그 자체로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며 자기 자신에서 자신이 아니라 타자가 될 것이다.”(논리학, GW111, 346-7)
예를 들어 전기에 관한 과학의 발전에서 처음에 전기는 유리 전기와 섬유 전기로 출현했다. 과학이 발전하여 추상화가 일반적으로 되면서 이런 물질 전기는 사라지고 + 전기와 – 전기로 규정되는데, 유리나 섬유는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전기는 그것에 외면적으로 관계할 뿐이지만, + 전기나 – 전기는 더는 구체적 내용이 없고, 여기서 +. -는 서로 상대적인 규정 즉 형식적 규정만을 지닐 뿐이다.
이런 순수한 추상적 법칙의 세계는 사유를 통해 가정되지만, 과연 이런 법칙이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유가 추상한 것은 주관이 개입하여 외면적인 것일 뿐이고, 현상의 객관적 본질이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상적인 법칙은 현상의 토대가 되기는 하더라도 현상의 근거라고 볼 수는 없게 된다.
“법칙은 현상의 자기와의 단순한 동일성이다. 따라서 현상의 근거가 아니라 그 토대이다. 왜냐하면,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 아니라 현상의 단순한 동일성으로서 직접적인 통일 즉 추상적 통일이다. 따라서 이 추상적 통일 옆에는 현상의 다른 내용이 발견된다.”(논리학, GW111, 347)
결과적으로 이런 추상적인 법칙을 현상 속에 집어넣는 또 제삼자 예를 들자면 플라톤적인 데미우르고스와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0-현상의 개념과 법칙의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0-현상의 개념과 법칙의 개념
1)
본질론 2편 1장이 실존 장이고 이것에 이어서 2장에서 헤겔은 현상을 다룬다. 2편에서는 전체적으로 종적 개체들 사이의 실재하는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관계는 점차 가능성이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다루어지는데, 최종적으로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서 그런 실재하는 관계가 완성된다.
그 가운데 처음 나타난 실존 장에서 실존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실존은 오직 심연 위에 떠돌고 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관계는 아직 내면에 즉 가능성[an sich]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실존은 서로 상이한 것일 뿐이다. 판단 형식으로 본다면 이는 정언 판단 형식에 속한다. 여기서 실존은 주어에 해당하고 술어는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는 단순한 이름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진달래다”라는 판단이다. 여기서 술어 ‘진달래’는 단순히 어떤 실존하는 것을 지칭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현상 장에 이르면 종적 개체는 서로 상이한 것을 넘어서서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이르게 되고, 판단 형식으로 보자면 그 관계는 곧 가언 판단의 형식으로 된다. 가언 판단은 법칙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p이면 q이다’라는 형식이다. 여기서 p, q에 해당하는 것이 현상이고, 양자의 관계를 이루는 전체가 법칙이다.
실존 장에서 나왔던 ‘성질’과 ‘질료’ 개념이 존재론에서 ‘질’과 ‘실재성, 규정성’(긍정 판단 형식)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면, 현상 장에서 전개되는 ‘현상’ 개념은 존재론에서 전개된 ‘부정성’라는 개념(부정 판단 형식)에 상응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현상을 ‘반성된[즉 부정된] 실존’이라고 한다.
2)
우선 실존이라는 범주에서 어떻게 현상이라는 범주가 출현하는가를 보자. 현상은 실존이 물질로 해체되고 이 물질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나온다.
즉 현상 장에 끝에 여러 가지 물질이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다. 이 물질은 규정적[bestimmt]이면서도, 독립적이기에 서로 대립적이다. 이런 대립적인 물질이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으니, 이 물질은 서로 침투한다고 생각된다.
즉 어떤 물질은 다른 물질이 비어 있는 곳[poros]에 들어가 있고 거꾸로 다른 물질은 이 물질이 비어 있는 곳에 들어있다. 이런 물질은 자기가 존립하는 가운데 이미 자기의 비 존립 즉 구멍이 존재한다.
“사물 속에 포함된 구별된 것이 자립적인 물질이다. 이 물질은 모순적인 것이니, 왜냐하면 이 물질은 직접적으로 존립하면서 동시에 다만 낯선 것이 자립성 속에 그러므로 그 자신의 존립이 부정당하는 것 속에 자신의 존립을 가지며 다시 말하자면 바로 그러하므로 또한, 다만 자기에게 낯선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또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가운데서만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학, GW11, 342)
이런 상호 침투를 통해 물질과 물질 사이의 관계가 출현한다. 이 관계가 곧 법칙이다. 실존은 자립적인 것인데, 이것이 이런 관계 속에 하나의 계기가 되면 자신의 자립성을 부정당하게 된다. 여기서 법칙 속의 계기는 한편으로는 전체 속에 존재하므로 타자에 의해 정립된 즉 부정된 계기(-p)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직접 존재하는 것[존립하는 것:ㅔ]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중성을 지닌 것 즉 존립하는 것이 동시에 부정적일 경우 헤겔은 이를 ‘현상’이라고 한다.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했던 실존에서 이런 관계가 출현한다는 것이 실존이 감추고 있는 근거인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아직 현상에서 본질로의 복귀는 중간에 머무른다. 왜냐하면, 여전히 실존이 가지고 있는 무차별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은 우선 본질이 그 실존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본질은 직접 실존에 현현한다. 실존이 직접적인 실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된 실존으로서 존재하게 되면서 이 사실이 실존에 나타나는 본질의 계기를 이룬다. 달리 말하자면 실존이 본질적 실존일 때 현상이다.”(논리학, GW11, 341)
3)
헤겔에서 현상은 자립적인 존재[긍정성]과 정립된 존재[부정성]이라는 이중적 계기를 동시에 가진 것이다. 반면 가상은 부정적인 현상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면서[이중 부정성, 정립된 존재로서 정립된 존재]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본질론의 순서로는 가상이 먼저 나온다. 1편 본질의 반성 운동을 설명할 때 헤겔은 개념적으로 가상을 제시했다. 즉 종적 개체를 매개하는 것이 본질인 종인데, 본질은 종적 개체를 정립하고 이 개체의 부정을 통해 다시 본질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종적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종적 개체는 자기 부정적인 것, 정립된 것이 다시 정립되는 것 즉 가상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이 앞에서 설명한 본질과 가상[Schein]의 관계였다.
1편에서 다루어진 본질과 가상은 본질론 전체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본질론에서 생성하는 운동 과정의 진정한 출발점은 ‘실존’인데, 이 직접적이고 자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이런 실존이 해체되어 물질의 법칙 관계로 되면서 이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현상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현상은 직접적인 실존에서 본질이 처음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현상에서 법칙은 자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한 물질들의 관계이므로, 외적인 관계이다. 여기서 반성은 아직 “낯선 외적인 반성”에 머무른다. 이 관계가 관계하는 요소들에 내재하게 될 때 이 현상은 마침내 자립성과 무차별성을 잃어버리고, 가상으로 되면서 본질이 본래대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헤겔은 이런 본질의 본래적 모습을 즉 가상을 3장인 관계 장에서 다룰 것이다.
“이런 의미[부정성]가 현상의 본질적 측면을 이룬다. 그것은 곧 현상이 실존 자체에서 반성의 부정성 즉 본질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본질의 본성은 본질이 속했으며, 본질과 실존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이 실존을 현상으로 선언했던 낯선 외적 반성은 아니다.”(논리학, GW11, 342)
가상이 발전하여 드러내는 진정한 내적 관계를 통해 개체들을 전체로 묶는 일반적 본질이 출현한다. 이런 일반적 본질을 개체에 내재하는 종적인 본질과 구분된다. 이 일반적 본질은 개체들의 상호 관계를 통해 종적 본질이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헤겔은 이런 일반적 본질을 개체에 내재하는 본질 개념과 구별하여 개체들 전체를 의미하는 ‘사태’[Sache]라고 규정한다. 현상 장의 흐름은 이런 외적 관계가 내적 관계로 발전하면서 내적 본질이 외적인 관계, 즉 사태로 출현하는 과정이다.
4)
헤겔은 일단 위와 같이 실존과 현상을 개념적으로 구분한 다음 다시 현상과 법칙을 구별한다. 현상은 한편으로 실존이며 여기에 속하는 내용은 자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다른 한편 현상 속에는 이미 본질이 출현하니, 이때 현상은 본질적 내용을 지닌다.
이 본질적 내용은 실존의 부정성이며, 이는 다른 실존과의 관계 속에 하나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실존의 부정성, 즉 관계 속의 계기가 곧 현상의 본질적 측면인 법칙을 이룬다.
이 현상의 본질적 내용은 이중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이 본질적 내용은 비본질적 측면이 지닌 다양한 개별성,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연성에 비교해 보면, 그것은 자기와 동일하게 고요하게 불변적으로 머무르는 것이다.
현상의 비본질적 측면을 헤겔은 현상 세계라고 규정한다. 반면 현상의 본질적 측면을 법칙의 세계로 규정한다. 처음에 이런 법칙의 세계는 아직 현상 세계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현상 세계에 내재하고 있다.
이 법칙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본질적 내용은 현상의 비본질적 측면이 지닌 상호 무차별성과 달리 다른 본질적 내용과 맺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계기가 되니, 그것은 이 다른 내용에 대립하는 특정한 것이며 오직 이런 다른 내용과의 관계 즉 법칙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법칙 관계에서 한편으로 하나의 자립적인 것(존립하는 것)은 타자에 의해 정립되면서(부정되면서) 관계 속에 계기로(즉 정립된 것)으로 된다. 이런 관계는 상호적이므로 여기서 한편으로는 자립적인 것과 자립적인 것이 서로 우연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여기서 하나의 존립은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서로가 타자에 의해 정립되면서, 그 관계는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과 맺는 관계이다. 이제 이 관계는 필연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하나가 존립하는 것이 타자를 존립하게 만든다. 거꾸로 하나가 정립된다는 것은 동시에 타자가 정립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에 관계하는 것이며, 가상이 다만 가상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5)
이 가운데 다만 관계 맺는 측면만 보면, 하나는 타자를 통해 자기와 매개하며 자기는 타자가 존립하는 매개가 될 뿐이다. 이 두 측면이 법칙적 관계에서는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현상하는 하나는 타자로 반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다. 이런 매개를 통해 각자는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실존하는 것은 현상하는 것으로서는 타자로 반성되는 것이며 이 타자를 자기의 근거로 삼지만, 이 타자는 그 자체 다만 [다시] 타자로 반성되는 것일 뿐이다. 현상하는 것으로서 실존하는 것에 본질적인 자립성은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그 계기가 지닌 부정성 때문에 무가 무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실존하는 것의 자립성은 다만 본질이 빛 나는 것[Schein: 가상]이다.”(논리학, GW11, 343)
그러나 현상의 법칙 관계는 이렇게 순수하게 관계 맺는 측면만 가진 것은 아니다. 이 관계는 현상의 무차별한 관계 속에 들어있는 것일 뿐이다. 헤겔이 생각하는 이런 법칙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낙하 법칙과 같은 것일 것이다.
낙하 법칙은 흘러간 시간과 경과한 거리가 관계 맺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과 거리는 서로 무차별한 것이므로 이 낙하 법칙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는 경험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낙하 법칙은 더 근본적인 본질적 관계 즉 힘의 관계가 지구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본질적 관계는 아직 감추어져 있고 낙하 법칙에 내재할 뿐이다.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20
아래 인용은 「옹야」20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자왈:「지지자불여호지자,호지자불여락지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앎이 있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 좋아하는 이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며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알기만 하는 자는 그것을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그것을 즐기는 자만 못하다.」
「옹야」20의 번역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부분은 ‘지지자(知之者)’와 ‘호지자(好之者)’, ‘락지자(樂之者)’의 의미이다. 『논어』 안에서 단계적으로 좋음과 나쁨을 설명하는 부분은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그 기준을 마음과 형식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은 「위정(爲政)」7, 「팔일」3, 4, 「양화(陽貨)」11이다. 네 구절 모두 형식만을 지키고,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하여 실제로 마음이 있는 것이 더 낫다고 공통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 이면에는 실제로 마음이 있으면서, 형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는 암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대응하여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를 해석한다면 ‘지지자’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방법만을 알 뿐 알고 있는 그것을 실제로 행할 마음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다음으로 ‘호지자’란 좋아하는 그것을 행할 마음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잘 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락지자’란 즐기는 그것을 행할 마음도 있으며, 그것을 잘 행할 방법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에 도움을 준다. 또한, 『논어』 안에서 다른 구절들과도 크게 모순이 되는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올바른 해석이라고 확언하기에는 부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논어』 안에서 단계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은 위의 예시가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씨(季氏)」9에서 공자는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사람의 단계를 표현하는데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가장 위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다음, 어려움이 있어 배우는 사람이 그다음, 어려움이 있지만 배우지 않는 자가 가장 아래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공자의 설명에 따른다면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는 충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논어』 안에서 ‘지(知)’와 ‘호(好)’, ‘락(樂)’이 앞서 설명한 단계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가?”라는 점이다. 적어도 ‘지’는 『논어』 안에서 방법만 아는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만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논어』 안에서 ‘지’는 72단락에서 117번 사용된다. 이 중 ‘지자(知者)’와 ‘지지자(知之者)’로 그 사용을 줄이면 ‘지자’는 「이인」2, 「옹야」23, 「자한(子罕)」29, 「헌문(憲問)」28, 「위령공」8, 「양화」24에서 그리고 ‘지지자’는 「술이(述而)」20, 「계씨」9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지지’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지지’의 사용은 크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인자(仁者)’와 ‘지자’를 대비하여 인자를 높이고 지자를 낮추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이인」2와 「옹야」23이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지자’와 ‘인자’, ‘용자(勇者)’를 병렬로 서술하여 이 셋의 특징을 서술한 것으로 「자한」23과 「헌문」28이 이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지자를 단독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며 지자를 높이고 있다. 「위령공」8이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은 제자의 발화 안에서 ‘지자’가 나온 것으로 이때 ‘지자’는 살피는 지혜로 여기는 사람으로 엄연히 말하면 아는 사람으로 ‘지자’가 사용된 것이다. 「양화」24가 이에 해당된다. 첫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지자’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두 구절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현은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이다. 이는 주로 ‘태어나면서 아는 자’로 해석되며 「술이」20에서는 공자가 ‘생이지지자’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고, 「계씨」9에서는 ‘생이지지자’가 가장 높고 그 아래로 순서대로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 즉 배워서 아는 자, ‘곤이학지(困而學之)’ 즉 부족해서 배우는 사람, ‘곤이불학(困而不學)’ 즉 부족하지만 배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지지자’의 해석은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의 근거가 되는 방법으로 해석을 할 수도 반대로 그 해석의 반례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해석에 근거가 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생이지지자’라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닌 방법만을 아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즉, ‘생이지지자’ 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이후에 노력이 필요하다. 반례가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자면 ‘생이지지자’는 태어나자마자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즉 이미 마음과 방법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지자’ 중에서도 이미 마음을 다 갖춘 상태를 말할 수 있으며 이는 ‘호지자’와 ‘락지자’와는 구분되는 ‘지지자’의 특징과 모순되는 것이다.
– 글을 마치며
이렇게 『논어』 「옹야」13, 18, 19, 20의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 논해보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논어』를 읽으면서 고민해보지 않았을 부분에 대한 것을 보고 새로운 시각을 경험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독자가 해보았던 생각일 수도 있으며, 이 글에서 독자의 견해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수많은 감상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전하고자 했던 『논어』가 단순한 격언 모음집이 아니라는 감상만큼은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이 독자들의 『논어』 읽기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끝)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7장~17장)
7(Ζ)권의 7~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에 대한 분석을 전개함으로써 형상이 생성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성 자체의 원인임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의 3가지 유형, 즉 본성적 생성, 기술적 제작, 그리고 자생적 생성을 구분한다.
본성적 생성이란 본성에서 시작해서 생겨나는 것들의 생성이다. 이때 생성의 출처를 질료라고 하고, 생성의 작용인은 형상이라는 뜻에서의 본성이며, 생성의 결과물인 목적인은 일반적으로 실체라고 불리는 것으로 사람, 식물 등의 것들이다. 반면 기술적 제작은 기술, 능력, 사고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기술적 제작에서 형상은 제작하는 자의 영혼 속에 있다. 자생적 생성은 그 자체로 최종적인 동시에 생겨나는 것의 부분으로 있는 것으로, 예를 들어 제작과는 달리, 건축가의 개입 없이 돌로부터 어떤 것이 생성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들의 생성 모두에서 먼저 주어진 것, 즉 질료는 생성의 가능성 자체를 조건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생겨나는 것의 정식에 있어서도 질료는 속해야만 하는가? 생겨나는 것들을 그 질료의 이름에 따라 부를 때 우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 된’이라 부른다. 생겨나는 것들은 그 질료에 따라 정식화되지 않으며, 생겨나는 것의 정식은 질료 외의 다른 요소로부터 형성될 필요가 있다.
생성의 원인인 형상 자체는 생성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형상 역시 생성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 가정했을 때, 형상인을 형상인의 생성 원인으로, 즉 형상인의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으로 다시 나눌 수 있을 터인데 이런 결론은 무한 퇴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0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분들에 대한 정식이 전체에 대한 정식에 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규명한다. 만약 전체에 대한 정식이 부분들에 대한 정식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가정했을 때, 부분들에 대한 정식은 전체에 대한 정식에 앞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손가락이라는 동물의 부분이 동물이라는 전체로부터 따라 나오는데, 손가락은 동물과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지만 동물은 손가락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의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정식이 정의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떻게 하나인가? 실체는 ‘이것’, 즉 어떤 것 하나인 바, 정의는 실체를 말하므로 정의 역시 병렬적 나열이 아니라 하나여야 한다. 정의에는 유와 차이(diaphora)가 있다. 이때 유가 그 유에 속하는 종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질료적이며, 정의는 차이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적 차이는 유를 규정한다. 차이가 없는 것들에 이를 때까지 차이의 차이(tēn tēs diaphoras diaphoran)에 따른 분할은 진행되어야 하는바, 차이들의 수만큼 종의 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로 마지막 차이(teleutaia diaphora)는 각 사물의 실체이자 정의이고, 형상이며, 정의는 마지막 차이로 규정되는 정식일 것이다.
13~16장은 보편자와 개별자의 정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실체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고 있다. 보편자는 실체일 수가 없는데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실체는 고유하고 다른 것에 속하지 않아야 하지만, 보편자는 특정한 개체들에 대하여 있으며 그와 분리될 수 없다. 둘째로, 보편자는 여럿에 대해 술어가 되기 때문에 여러 개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이다. 한편으로 개별자는 정의될 수 있는가? 개별자로서의 복합체는 생성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감각적 실체들에 대해서는 정의도 없고 논증도 없다. 개별자는 질료적 우연성 때문에 정의될 수 없으므로, 실체의 정의는 복합실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질료 없는 형상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형상들이 실체라고 한다면, 이는 합당하다.
1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선 논의들로부터 실체에 대한 규정을 이끌어 내며 7권을 마무리 짓고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 자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으나,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러한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있다. 고로 탐구 대상은 질료를 특정한 것으로 만드는 원인으로서, 질료들을 ‘어떤 것’으로 있게 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이 곧 실체인 것이다.
(계속)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
1)
앞에서 물 자체의 외면적 규정이 일반적 규정 즉 성질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성질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물 자체의 내재적인 것의 표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타자[주관]에 반사하여 자기를 표현한 것이다.
즉 그것은 “외면성 속으로 이행해 들어가서 이를 통해 진정으로 자기 내로 반성된 근거”이며, “근거가 자신의 반발과 규정 속에서, 그 자신의 외적인 직접성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외적인 직접성인 동시에 본래적인 존재”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성질은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 모호하다.
이제 경험의 발전은 이런 성질을 하나의 독립적인 물질로 규정하게 한다. 그 과정은 주어 술어 관계의 전도를 통해 일어난다.
한편으로 사물은 이제 여러 성질을 지니면서 다른 여러 성질을 지닌 사물과 구별된다. (헤겔은 물 자체가 성질을 지니면서 표현을 바꾸어 ‘사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성질은 규정성을 지니고 서로 대립하지만,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므로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질은 이런 여러 사물에 공통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제 성질은 그 자체가 자립적인 존재로 된다.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면서 여러 사물을 자신에 귀속하는 성질을 헤겔은 물질이라 한다.
이제 성질은 사물에 속해 있는 속성이나 술어가 아니라 사물이 성질의 외연에 속하는 것이 된다. 여러 사물은 주어인 일반적 성질의 한 예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성질은 이제부터 사물의 일자를 이루는 무규정적이고 힘이 없는 결합에서 해방된다. 성질은 사물을 존립하게 하는 것인 자립적 물질이다. 성질은 단순하게 자기와 연속하는 것이므로 우선 그 자신에서 상이성이라는 형식을 갖는다. 따라서 그와 같은 자립적인 물질이 다양하게 성립하며, 사물은 이런 물질로 이루어진다.”(논리학, GW11, 334)
2)
헤겔은 성질로부터 물질로 이행하는 이 과정에 관한 예로 화학의 발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화학은 색깔이나 냄새, 맛 등의 성질을 물질적 원소로 규정해 색깔은 색소로, 냄새는 후각소로, 맛은 미소로 규정한다. 그 외 이런 물질로 열소나 전자기 물질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온도나 전자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성질을 자립적 물질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물질은 한편으로 성질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물질은 사물처럼 자립적으로 존재하니, 때로 물질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물질은 양극을 이루는 성질과 사물을 결합하며 양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것이다.
“성질이 물질로 이행하는 필연성 또는 성질이 진정으로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은 곧 이 성질이 본질적인 것이고 따라서 진정으로 자립적인 사물이라는 사실이다.”(논리학, GW11, 334)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이제 물 자체의 규정도 변화한다. 성질은 서로 대립하지만, 사실 이는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순을 회피하게 된다.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면서 그 밑바닥에 사물은 자기 관계하는 통일성으로서 개별자로 다만 그 자체로는 아무 규정이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질이 물질로 되면 물질이 자립적인 것으로 되면서, 하나의 사물을 벗어나 다른 사물 속에 연속되는 것이니, 이제 사물이 여러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물질이 존립하는 텅 빈 그릇과 같은 우연적인 존재이고, 그것의 물질로서의 규정 외 다른 규정들은 그 물질에 외면적이며 그것과는 무관한 개별적인 우연성으로 된다.
이 사물은 그 속에서 일반적 물질이 실현된 하나의 예로서 개별적인 사물로 된다. 예를 들어 열소라는 물질은 이런저런 사물 속에 있는 온도로 실현한다. 이때 온도를 지닌 개별적 사물이 지닌 다른 성질들은 모두 무의미한 우연적인 성질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단일한 물질로 이루어진 사물은 있을 수 없다. 물질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규정성을 지니는 한, 혼자서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규정성을 지닌 것은 다른 규정성과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물질은 항상 다른 물질에 대립하게 된다. 이런 대립은 부정성을 낳으니 서로 배척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런 물질의 대립적 관계가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성질은 한편으로 동일적으로 자기에 관계하는 단순한 자립성으로서 규정이니, 그 속에서 부정적 통일, 사물의 일자는 지양된다. 또한, 이런 성질은 다른 한편으로 타자에 대립하는 규정이지만, 마찬가지로 자기 내로 반성된, 본래 규정된 일자인 한에서 그러하다.”(논리학, GW11, 335)
3)
물질은 자립적이면서 다른 물질에 대립하는 규정적인 것이다. 물질들은 서로 밀쳐 내면서 자립적이니, 하나의 사물 속에는 여러 물질이 서로 물질들이 있다고 할 때,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공존한다고 설명된다. 이 경우 사물은 하나의 텅 빈 그릇에 불과하게 된다. 사물은 이런 물질들을 외적으로 결합하는 것이어서,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물질들이 어떤 것이고 어느 만큼 들어있는지에 의해 구별될 뿐이다.
하지만 사물은 지속하는 개별자이므로 이 속에서 물질들은 단순하게 공존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부정적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개별자를 이루어야 한다. 어떻게 여러 물질이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이런 통일 가능성을 위해 우선[주로 고대철학에서] 제시되는 이론이 곧 구멍 나 있음[poros]이라는 개념이다. 하나의 물질은 자기 속에 구멍을 지니고 있어서 그 속에 다른 물질이 끼어들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물질은 다른 물질의 구멍 속에 들어있다. 이와 같은 것을 상호 침투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서로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멍 나 있음의 개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질이 구멍 나 있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자기의 비존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물질은 자신의 절대적 타자 속에 자기의 존립을 가지며 자신의 비존재를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사물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신의 반대를 통해 즉 자신의 부정을 통해 자신과 자기 모순적으로 매개하는 것이 되며 또는 자립적인 물질이 다른 물질의 존립과 비존립을 통해 자기 모순적으로 자기와 매개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37)
이런 자기 모순적인 물질은 자기를 유지할 수 없으니 물질은 이제 자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물질이 자립성을 상실하면서 현상으로 된다.
“실존은 이제 사물 속에서 자신의 완전성에 도달한다. 즉 본래 존재하는 존재 또는 자립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본질 실존이 하나의 존재 속에 있다. 따라서 실존의 진리는 그 비본질성 속에 그 본래적 존재를 가지거나 타자의 존립 그것도 절대적인 타자의 존립 속에 자신의 존립을 가지거나 자신의 무실함을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은 현상이다.”(논리학, GW11, 337)
4)
헤겔은 주에서 표상이 이런 모순을 피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 방법은 무한소라는 개념이다.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모순은 여기서 존재를 무한소로 나누면서 이 무한소에서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무한소는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한소가 있다면, 모순은 회피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표상 작용은 이 안개 같은 대상 즉 구멍이나 작은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고찰할 때 그런 것들 속에 어떤 물질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물질의 부정을 인식하니, 여기 물질이 있고 그 옆에 그 부정 즉 구멍이 존재하며 그 옆에 다시 물질이 발견될 것이라는 말이다.”(논리학, GW11, 339)
“뿐만 아니라 그런 표상 작용은 이런 사물 속에 첫째 자립적인 물질과 둘째 그 부정 즉 구멍 나 있음을 지니면서 동일한 지점에서 다른 물질을 지니니, 이 구멍 나 있음과 물질의 자립적 존립은 서로 넘어 들어가 있어서 서로 부정하면서 침투를 침투한다.”(논리학, GW11, 339)
이런 주장은 수증기가 일정한 가스 속에 확산하더라도, 그 부피가 변함이 없다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입증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임시방편은 모순을 모순으로 보지 않는 방식인데, 이는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뒤로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은 오히려 모순을 모순으로 인정하고 여기서 운동을 찾아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