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기억과 유물론적 구원의 유토피아 ? 벤야민[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⑦
고통의 기억과 유물론적 구원의 유토피아 ? 벤야민[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⑦
강사 : 연효숙(중앙대 외래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포기되지 않는 구원, 그러나 다른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구원을 꿈꾼다. 그리고 그 구원을 위해 기존의 정치, 경제체제와의 투쟁은 물론 학문과 신학에 대해서도 맹렬한 투쟁을 진행해 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은 내세나 관념의 혁명이 아닌 현실의 혁명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마이키아벨리식의 노선을 꿈꿔왔다.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집합적 의지를 모아내는 것이 정치라 하며 그를 위한 현실적 힘에 대해 그의 관심을 집중했다. 레닌의 전위정당과 로자의 자발성은 이러한 맥락을 함께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구원을 꿈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있다. 때문에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7번째 시간의 주인공인 발터 벤야민(1892~1940)이 바로 그이다. 그는 인간의 구원을 꿈꾸지만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으면서도 관념적이지 않은 유물론적 구원을 꿈꾸는 마르크시스트이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사상사’에서 다룬 사상가들과 확연히 다른 그는 혁명을 혁명하고자 한 혁명가가 아닌 듯싶다. 이번 강연은 연효숙 중앙대 외래교수가 발터 벤야민과 우리를 이어주며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발터 벤야민은 1892년 부유한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 태어나 1940년 나치를 피해 탈출하다 스페인 국경에서 피할 수 없는 나치의 추격이 다가오자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여 이른 나이에 사망한 불운의 지성인이다. 그는 베른대학에서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교수자격시험논문으로 제출한 이 탈락하자 학계에 머물기를 포기하고 문화평론가로서 지적 작업을 지속하였다. 이후 그는 잘 알려진 과 ,,등을 저술했다.
연 교수는 그의 글쓰기와 사유방식의 독특함을 설명하며 그러한 파격이 당시 근대적 논증방식에 익숙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았고 그것이 교수자격시험논문의 큰 탈락사유였을 것이라 말한다. 그의 자유롭고 파편적인 글쓰기 외에도 연 교수는 그의 또 다른 파격으로 사유의 독특함을 뽑았다. 그는 전통과 전통의 문법을 어기는 것 둘을 종합하여 사용했는데 겉으로는 충돌되는 것을 절묘하게 결합시켜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연 교수는 벤야민의 이러한 이종적 종합의 대표적인 것으로 심미성과 사회성, 예술과 정치, 예술과 종교, 신화와 계몽 등을 뽑으며 그의 양면성의 사유를 설명했다. 벤야민의 이러한 사유의 독특함이 벤야민으로 하여금 마르크스와 그의 혁명을 도식적인 프레임이 아닌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싶었다.
진보로서 역사? 파국으로서의 역사!
연 교수는 벤야민의 사회철학적 사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의 마지막 글인 를 중심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이 저작은 18개의 짧은 테제로 구성되어있으며 벤야민의 사후에 출간된 글이다.
그는 이 저작에서 종교와 정치의 결합을 시도하는데 연 교수는 이를 유대인인 벤야민이 유대교의 시오니즘과 메시아니즘을 버리지 않는 한편 역사적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를 거기에 결합시키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한다. 연 교수는 벤야민이 억압된 계급, 집단적 주체, 노동자 계급을 강조하며 현재 상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려는 정치적 의식을 유지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 맥락을 잇지만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긴 마르크스와 달리 유대교적인 메시아니즘을 벤야민이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벤야민이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을 연 교수는 역사와 시간에 대한 관점을 뽑았다. 벤야민은 역사주의와 헤겔과 같은 목적론을 강하게 거부하며 역사적 연속성과 뉴턴식의 직선적 시간론을 비판했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은 낙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역사주의를 비판했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이 이러한 진보에 경도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벤야민은 진보주의가 오히려 현재의 고통에 대해 눈을 감는다고 보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나타난 그 당시는 도무지 역사의 진보를 신뢰할 수 없는 시기였다. 이에 벤야민은 오히려 파국(Katastrope)을 주장한다. 이는 니힐리즘적 역사관으로 흐를 소지가 있으나 연 교수는 벤야민이 과거와 지금시간(Jetztzeit)의 인식 가능성이 결합함으로써 시간이 정지하는 구원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연 교수는 벤야민이 세계의 연속성을 부정하며 단절적인 역사관을 내세움으로써 지금의 고통을 비로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은 인과적이며 직선적인 객관적 논증이 아니라 주관적 심미로서 나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 가장 중요한 관심인 현실의 고통을 벤야민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 그림은 1780년 볼프강 폰 켐펠렌이라는 사람이 고안한 자동 장기기계이다. 이 기계는 명령자가 지정하는 쪽이 이기게 되는 신기한 자동으로 장기가 둬지는 기계이다. 하지만 오른쪽 그림과 같이 사실은 장기명수 난쟁이가 숨어 승부를 조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연 교수는 벤야민이 여기에 아이디어를 얻어 정통 역사유물론을 비판하다고 하는데 벤야민은 진보를 믿는 역사유물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난쟁이를 고용한 장기의 명령자와 같이 신학이라는 난장이를 고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신학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신화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기며 진행한 비판으로 보인다.
(오른쪽이 난쟁이가 숨어있는 자동기계장치이다)
파국과 새로운 천사
연 교수는 파울 클레의 에 대한 벤야민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시간과는 다른 그만의 인식에 대해 소개했다. 벤야민은 의 9번째 테제에서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연 교수는 여기서 천사의 눈은 휘둥그레지고 날갯짓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마치 자기가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하는 듯한데 벤야민이 말하는 천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천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이라고 한다. 여기서 천국이 의미하는 것은 미래이며 폭풍은 진보를 말한다. 그리고 천사는 역사적 유물론자를 말한다. 보통 천국은 인간 뒤에 있으며 인간은 미래에 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즉 전통적으로는 과거-현재-미래의 직선적 시간 속에 항상 미래를 향하는 인간이 고려되지만 벤야민과 역사적 유물론자로서 이 그림의 천사는 현재를 구원하기 위해 미래의 공간(천국)으로부터 다가오는 진보를 부정하고 오로지 파국으로서의 현재 자체를 중시한다. 벤야민의 천사는 미래에 살지 않고 현재에 살고 있는 현재에만 역사적 유물론자로서 존재한다. 이 역사적 유물론자는 통상적인 유물론자처럼 역사를 진보의 아름다운 가상, 발전으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어두운 파국으로 보며 진보에 맞서고, 진보의 폭풍우에 맞서는 자이다. 연 교수는 이러한 해석은 역사를 파국으로 보고자 한 벤야민의 독특한 시선을 설명해 주며 그가 강조하는 것은 미래가 아닌 지금의 고통과 현재의 파국이라고 말했다.
▲ 파울 클레의 ‘새로운천사’ |
기억과 찰나적 시간으로서 역사
벤야민은 진보의 역사주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뉴턴식의 직선적 시간개념에 갇혀있다고 보았다.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시간 개념과 달리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에서 보여진 무의지적 기억으로서의 시간 개념에 근접하여, 갑작스럽게 과거가 현재에 무의도적으로 기억되는 새로운 현재의 시간을 발굴하고자 했다고 연 교수는 분석했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과거의 사건은 과거라는 기억의 박물관에 저장되어 있는 불변의 고정된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라고 연 교수는 이야기한다. 연 교수는 벤야민에게 기억은 현재의 순간과 함께 숨 쉬는 것이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시간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순간이며 찰나이다. 그래서 기억 역시 지금 매 순간 순간에 떠올려진 장면이며 그것이 현재에서 포착된 지금진리이다.
이어 연 교수는 벤야민을 계속 인용하는데 벤야민은 “억압된 자들의 역사는 불연속성이다. 역사의 연속성은 억압하는 자들의 연속성이다.”라고 한다. 이는 벤야민이 거대 시간에 의해 구조화될 수 없는 순간을 상상적이고도 현실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고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 교수는 그렇다고 벤야민이 객관적인 시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객관적인 역사적 사건이 순간적으로 나에게 어떤 식으로 사건이 이미지화되어 나에게 다가와 의미가 되고 파국에 이르렀는가를 벤야민이 중시한다는 것이다.
혁명의 시간에서 시간의 혁명으로
유물론과 유토피아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유물론은 현실성을 이야기하는 반면 유토피아는 어원상 ‘여기에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유토피아를 지금여기에 가능하게 하고자 한다. 벤야민은 “역사는 구성의 대상이며, 그 구성의 장소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으로서의 충만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즉 메시아적 시간은 연속성의 모델로서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시간(Jetztzeit)이라는 것이다. 벤야민에게 메시아적 시간은 마르크스의 계급 없는 사회와 동일시된다. 연 교수는 이러한 사유를 통해 비로소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가 중지된다고 보았다. 연 교수는 벤야민의 지금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비동시적인 시간이 함께 존재하는 역사적 시간이며 유일한 시간으로 보았다. 따라서 연 교수는 벤야민에게 직선으로서의 시간은 허구적이며, 비현실적이고, 운명적인 시간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벤야민의 시간관은 매순간 메시아가 역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즉 벤야민에게 메시아는 역사적 결론으로서 미래에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파국으로서 매순간 지금시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 교수는 마르크스가 ‘혁명의 시간’을 말했다면 벤야민은 ‘시간의 혁명’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시간이 주관적 시간이고 리얼리티가 쇠퇴하는 것으로 보여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연 교수의 말을 이해하자면 과거와 현재, 객체와 주체간의 유물 변증법적인 사고를 지향한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리얼리티인데, 이를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다른 계승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금시간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것을 잡으면서 리얼리티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 순간과 파국 그리고 구원이 주는 의미가 많이 있겠지만 강의를 들으면서 그 동안 한국에 팽배했던 발전주의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장밋빛 미래를 위해 당연시되어 왔던 현재의 희생과 고통이 벤야민의 생각들과 오버랩 된다. 장밋빛 미래는 언젠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한 줌 거리에 있으면서 항상 과거와 현재를 연료로써 태우기를 바랐다. 이러한 도식에서 과감히 벗어나고자한 벤야민은 여전히 많은 공감을 준다. 그래서일까 요절한 모든 선지자들이 그렇듯 벤야민이 좀 더 많은 이야기와 목소리를 우리에게 전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공상을 해본다. 오늘도 4대강은 미래를 향해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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