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의 좌절, 51%의 승리? ;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② [시대와 철학]

Spread the love

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②[시대와 철학]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2) 집제(集諦): 왜 앓게 되었는가?

 

‘연가시’ 재난

 

경제 성장이라는 꿈은 사실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 부자 되겠다는 욕심을 점잖게 이른 말일 뿐이다. 솔직히 우리가 바란 것,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나와 내 주변만의 풍요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사회야 어찌되든 나만 풍요로우면 된다는 욕망은 성장에 대한 맹목적 기대를 낳게 한다. 우리의 욕심이 오늘의 재난을 불렀다. 수구 세력은 우리 안에 내재한 자기 보존의 맹목적 욕구를 부채질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중의 욕심을 이렇게만 보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사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기보존 욕구는 공포와 불안에서 비롯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에 대한 순수(?)하고도 능동적인(?) 욕망과는 다르다. 부자가 되길 바라는 서민들의 마음은 사실 ‘더 가난해지지 않겠다’ 혹은 ‘다시는 가난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이토록 필사적으로 빈곤을 거부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을까? 구제금융 위기 이래 형성된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가 그것이었다. IMF의 요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식민지 경험과 그것으로 유발된 전쟁의 악몽을 연상케 했다. 도처에서 발생하는 해고, 도산, 실업, 가정 해체는 처절했던 전후 사회 빈곤의 트라우마를 되살렸다. 신자유주의적 산업 구조화가 낳은 빈곤은 과거의 빈곤과 동일시되었다. 현재의 실업에서 그들은 적빈했던 과거의 지긋지긋한 악취를 맡았다. 토굴 같던 초가집, 주린 배를 움켜쥐며 잠든 밤, 동생을 위해 희생했던 누이의 뒷모습, 가난 때문에 접은 꿈의 불길한 체취가 그들의 코끝에 느껴지자 21세기의 현재는 어느새 과거의 그날이 되고 말았다. 개인적 근면과 성실만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재난을 이겨낼 수 없었다. 밤새워 일을 해도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외쳤다. ‘저기 가난을 물리친 그분이 오신다!’ 돌아보니 잊고 있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래, 그가 있었지. 그는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한 사람이었어.’ 너도 나도 그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보니 어느 기업인이기도 한 듯싶다. ‘하지만 대수랴. 또 다시 풍요를, 또 다시 가난에서의 해방을….’ 갈증에 허겁지겁 그가 제공하는 물을 마시고 그가 이끄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보았다. 마치 변종 연가시에 감염된 영화 속 인물들 같이 그가 제공하는 성장의 꿈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하지만 빈곤에 대한 공포와 부에 대한 갈증은 더해만 갔고 인간으로서의 삶은 멀어져만 갔다.

이렇듯 박정희 신드롬의 이면에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가 유발한 빈곤에 대한 대중의 공포가 놓여있다. 박정희 신드롬의 최대 수혜자인 기득권 세력은 이 신드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다. 그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입장에서 신드롬의 전염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를 하며 태극기를 쥐고 거리로 나가는 이들은 현재가 두렵고 미래가 불안한 서민들이다. 그렇다면 서민 대중의 현재적 빈곤을 막고 복지 시스템을 구비하면 이 현상이 해결될까?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를 수정하고 복지국가 모델을 도입하면 박정희 신드롬은 소멸될까? 일정한 성과는 있겠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의 심층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내면화된 개발 및 성장주의적 사고방식, 자기 생존의 생활양식이라는 ‘연가시’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조건이 형성되면 이 ‘연가시’는 언제든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연합뉴스

?
필연적 삶의 요구

 

따지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자기 생존 및 이익 보존의 욕구를 상대화하고 일정하게 거리를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지향을 갖든 보수적 입장을 취하든 상관없이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거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욕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몸에 익어버린 생활 방식 혹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생존과 안정의 절대적 추구라는 욕구를 어떠한 과정을 통해 내면화 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식민지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조국을 건설과 개발을 통해 다시 일으킨 성장의 역사 속에서 새겨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적 수탈과 전쟁의 참상은 한반도를 석기시대로 돌려놓았다. 전래의 가치와 인륜 구조는 무너졌고, 오직 생존과 이익의 안정적 확보만이 급한 과제였다. 국가도 이웃도 그 누구도 나와 내 부모 형제의 가난과 생명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았다. 국민 대중은 국가로부터 이미 여러 번 버림받은 기억이 있었다.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버리고 나라를 팔아버렸으며, 정부는 국민을 속이고 한강다리를 건너버렸다. 서민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와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잘난 지식인과 애국지사들도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기는커녕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만 벌이다가 온 천하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믿을 건 오직 나 자신의 노력과 힘뿐이었다. 전후 국민 대중의 의식 한 켠에 반지성주의적 평등의식과 지식 엘리트에 대한 반감이 자리한 까닭에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존재한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평등 문화는 군부정권에 대한 맹목적 지지, 비판적 문제 제기와 논의 문화에 대한 거부로 이어져 민주적 정치문화의 정착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혼돈과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자생존과 자력갱생의 준칙으로 무장해야만 했다. 먹이는 오직 투쟁하면서 스스로 확보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강력한 적자생존의 윤리와 자조(自助)의 준칙을 체화하면서 사람들은 집을 고치고, 돈벌이에 나섰다. 치 떨리는 가난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사람들은 온 힘을 기울였다. 식민지의 수탈과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들에게 나라란 생명의 보존과 안정된 삶을 제공하는 보호소의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민 대중의 상식에 깃든 정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노력에 의해 성취 가능한 필연적 삶의 요구를 문제없이 해소하는 것에 있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요구는 지극히 당연하며 문제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필연적 삶의 요구는 상당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당시 사람들은 필연적 삶의 요구를 충족시켜준다면 어떤 정부가 와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국민 대중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적극적 반대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강력하게 자리한 필연적 삶의 요구 때문이었다. 필연적 삶의 요구는 양식을 갖췄다는 지식인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상계]의 많은 필자들이 쿠데타를 환영하거나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그들의 의식에 가난의 질곡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필연적 삶의 요구가 그들의 내면 속에도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기 실존

 

박정희 정권과 국민 대중 간의 관계는 무척 이중적이다. 둘 사이에는 호응과 협력의 역사도 있지만, 긴장과 반목의 역사도 존재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둘의 역사는 한 가지 요소가 두 개의 상이한 모양으로 표출된 반응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기 실존의 주장이다.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조국의 근대화라는 프로젝트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자력갱생의 준칙이 몸에 익은 국민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협조적이거나 조건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민 대중이 박정희 정권의 프로젝트에 손을 빌려준 것은 전국가적 근대화라는 사명에서라기보다는 이러한 사업에 협조하는 것이 개인적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에 효과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국민 대중은 사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박정희 정권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이 공권력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한 사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공적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사적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는 한국인들의 특징을 역사적으로 설명해준다. 전략적 제휴는 박정희 정부가 필연적 삶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박정희 정권의 붕괴 과정은 이러한 거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고지된 ‘계약 해지’의 속성을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은 사적 삶의 욕구 혹은 필연적 삶의 욕구 실현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사적 개인들의 반발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반면에 국민과 박정희 정권이 호응과 협력의 역사를 이루어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의 갈급한 요구였던 필연적 삶의 요청에 대해 일정한 반응과 응답을 보였다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은 결코 허구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경부고속도로, 중화학공업단지, 포항제철 등의 토건사업과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국민 대중은 필연적 삶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실제적 경험을 얻게 되었다.

건설과 경제 발전의 과정은 국민들에게 당당한 사적 개인으로서의 존재 가치의 확인이라는 실존적 경험도 부여해줬다. 가진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었던 나라에서 단기간 동안 경제를 일으킨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못 먹고 못 배운 자신들이 오직 육체의 근면과 성실을 통해 이 커다란 업적을 이룩했다는 사실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식민지와 원조 경제의 경험에서 얻은 열패감 및 자기모멸 의식을 떨쳐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경제 건설과 근대화의 과정은 강제적 동원에 의해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강제와 강압의 결과 얻은 성과물이 개인적으로는 자기 긍정의 에너지로 작동하는 측면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새마을운동은 자기 노력에 의해 고난을 극복하는 긍정적 자아를 발견하는 계기를 농촌과 같이 소외된 영역에도 제공해주었다. 물론 새마을운동은 조국 근대화와 패배주의적 정신의 일소라는 순수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로 감지된 도시 지역 국민의 이반을 농민층의 지지로 견제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기획된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농민 지지의 안정적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날림으로 모방함으로써 진행되었다. 당시 과다 생산된 시멘트를 농촌에 선별적으로 보급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농촌에서의 건설 사업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농민들은 비협조적이었으나 새마을을 건설하기 위한 활동에 차츰 열성을 보였다. 열패감과 상실감에 시달렸던 농민들은 이 과정에서 일정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발견하였다. 마을 공동체를 위해 함께 일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공동체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고 찬사 받는 경험을 획득할 수 있었다. 공동체에서 모범일꾼으로 인정받는 경험은 그들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이 경험 속에서 자기의 삶과 인격이 고양되는 기쁨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이 기쁨을 지속하기 위해 그들은 새마을운동을 위한 자기희생과 적극적 협력을 자발적으로 감행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인들은 개발과 성장의 역사에서 자기 정체성 및 자기 실존을 확인했다. 그들은 조국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자기 인생이 빛나고 있음을 경험했다. 높은 빌딩과 쭉 뻗은 도로, 번듯하게 단장된 시골 마을은 사적 실존의 자부심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작업 결과물이었다. 이 집단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대중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를 건설한 진정한 국민으로서의 자격과 존재 가치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자기 경험의 역사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경제 건설 과정의 참여가 온전한 국민 자격의 획득을 의미하며, 경제 건설 과정이 곧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건설 활동과 동일하다고 해석하게끔 만든다. 그들에게 건설하고 개발하지 않는 사회란 한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고 실존적 자기 회의를 유발한다. 건물이 올라가는 등의 성장을 체감할만한 물리적 경험이 없으면 많은 한국인들은 이내 불안에 휩싸인다. ‘가난이 다시 오지 않을까?’, ‘나의 삶은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일까?’, ‘생산 활동이 아니면 내 존재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한국인은 ‘필연적 삶’의 집단운동에 몰두한다. 박정희를 개발 경제의 영웅으로만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숭배하는 박정희 신드롬은 사실 우리 몸과 정신에 깊숙이 훈습된 ‘필연적 삶’의 욕구와 생활방식에서 비롯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1 reply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