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 내재적ㆍ심층적 의식의 생성과 변전으로서의 권능[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베르그송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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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 내재적ㆍ심층적 의식의 생성과 변전으로서의 권능[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베르그송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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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류종렬, 창원대 외래교수
후기-진보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도덕과 종교의 사기꾼들

악마들이 날뛰는 세계”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 높은 권좌에 앉아 ‘우매’하고 ‘무지’한 대중들을 굽어 살피며 모두 한결같은 ‘바른 삶’으로 계도하는 ‘그들’이 도덕과 종교적 신념이 불확실한 현시대를 안타까워하면서 내뱉는 탄식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악마는 도덕과 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속이고 사기를 치는 ‘그들’을 말한다. 이름 붙이면 ‘기세도명(欺世盜名)’하는 자들이다.

우리 역사에서 왜곡된 가부장적 유교주의 체계를 통해 탄생되었고, 그것을 통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을 만들어냈던 중국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서인-노론,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들이 만든 국가보안법, 그 바통을 이어받아 현실을 지배하는 미국 제국주의까지, 압제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면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봐야하며 어떤 철학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막연함에 부딪힌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던 서양의 역사가 있다. 1632년 갈릴레오(Galileo)가 하늘의 원리가 지상에도 있다고 말하면서 회부된 종교재판에서 가톨릭교회와 교황은 동일성의 원리 아래에서 변화와 생성의 사유를 해방시키려는 시도를 짓눌렀다. 이들이 바로 도덕과 종교를 연설하면서 전쟁과 공포를 말하고(전 미 대통령 조지 부시) 죽음 이후를 핑계로 다른 사람들의 돈과 영혼을 긁어모으는 ‘사기꾼‘들이다.

동일성의 철학을 반대한 베르그송

이 도덕과 종교의 이름으로 민중들을 탄압하던 자들이 주장하던 ‘동일성’의 원리는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이며 현실세상의 불완전한 존재들은 저 너머 상층 이데아의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을 모방해야한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이 동일성의 원리는 종교에서 절대적인 유일신을 상정하게 만들고 기독교의 종교적 입장을 굳건히 하는데 일조해 왔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세 번째 시간에는 동일성의 원리에 반대했고 변화와 생성의 철학을 주장했던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의 내재적인 심층의 철학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베르그송 철학의 길안내를 해준 류종렬 교수는 “공중에 붕 떠서 발 디딜 곳이 없던 추상적 이상주의 철학을 땅 위에 발붙인 것이 베르그송”이라고 하면서 베르그송이 이런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된 배경에는 프랑스의 역사와 사회적 현상들이 많은 영향을 주었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서구 철학사에서 도덕과 윤리를 사회 또는 국가와 연관된 문제로 삼게 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이고 이 혁명과 더불어 서구인들의 삶을 바꾼 것에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가 관련한다. 루소는 1600년 로마 교황청 광장에서 자연의 무한성을 얘기하며 화형 당한 르네상스 시기 자연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의 자연의식을 승계하여 “인간은 피조물이 아닌 그 자체로 자연 속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으며 “인민은 뛰어난 한 개인보다 중요하고 더 힘세다는 자는 없다”고 말했다. 베르그송 또한 루소의 발언과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 베르그송 ⓒ프레시안

베르그송의 네오칸트주의 비판

베르그송은 첫 저작 DI(『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인격”을, 그 다음 심리학작품 MM(『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을, 생물학적 작품 EC(『창조적 진화』)에서 “생명“을, 그리고 사회학적이고 종교적인 작품 MR(『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인류”(새로운 공동체)를 꼽고 있다 류종렬 교수에 의하면 베르그송은 자신의 첫 저작에서 칸트를 비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네오칸트주의를 비판했다고 한다. 또 칸트가 기본적으로 입자론자에 가깝다고 하면서 칸트주의자들이 세계와 인간, 신의 관념을 요소나 부분의 집합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베르그송은 비판적 견해를 제시했다고 한다. 요소나 부분들의 조합으로 어떤 하나가 된다고 보는 것은 ‘공간적 사유방식’이고 전체가 다양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점은 ‘시간적 사유방식’이다.

“내가 어제와 다르다는 것은 내가 어제의 나를 이루는 요소의 수와 오늘의 나를 이루는 요소의 수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고, 어제의 변화를 포함한 오늘의 변화가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는 ‘산술적’이며 ‘기하학적’인 것이고 후자는 ‘심리적’이며 ‘생물학적’인 것으로 양자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 차이는 매우 커서 이 둘은 전혀 다르다고 봐야한다.

변화는 운동을 수반하는데 주지주의-플라톤에서 칸트-헤겔에 이르기까지 운동의 의미는 정지 상태 ‘A’지점에서 정지 상태 ‘B’지점으로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베르그송은 기하학적인 점과 점을 연결한 직선이 운동을 표현했다고 보지 않는다. 연속선상에서 원과 곡선운동을 수반하는 계속적인 움직임을 운동이라고 본다.

베르그송의 ‘기억’이라는 개념도 칸트주의자 혹은 네오칸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네오칸트주의자들은 기억에 대해 설명할 때 예를 들어 인간의 나이를 ’10~20세의 기억’/ ’21~30세의 기억’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을 전체 기억이라고 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말하는 기억은 이것저것의 다양한 방면에서 분열적으로 발생하는 기억들을 섞어놓은 것이다.

이렇듯 부분의 결합(‘1’-‘2’-‘3’-‘4’-‘5’…)과 요소의 결합(‘점’-‘점’-‘점’-‘점’⇒’선’)이라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놓은 것이 기하학이며 리만(Riemann)이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정지 상태 ‘A’지점에서 정지 상태 ‘B’지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제출하기 전까지 통설로 인정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1632년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이후 시작된 종교의 기만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베르그송은 주지주의가 가지고 있던 2,500년의 신념을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부수기 시작한다.

이 세계는 ‘아자르(hasard)’ : 동일성의 체계 거부

동일성의 철학은 ‘체계의 철학’이다. 이 철학은 칸트와 헤겔에 들어와서 그 체계가 잡히는데 부분이나 요소로 하는 철학은 체계라고 할 수 있지만 베르그송에 있어 실제세계는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체계가 없는 것이 맞다 했다.

베르그송은 세상이 체계를 가진 채로 어떤 법칙이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지 않았다. 베르그송은 “내일 이 세상과 우리가 어떻게 변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주사위를 의미하는 아랍어 ‘al zahr’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아자르(hasard[azaː?])’는 ‘우연’ 또는 ‘운명’이란 뜻으로 확률성을 함축하고 있다.(독일어 ‘hasard[ha|zart]’ 도박;모험) ‘나’라는 존재의 안에는 수많은 ‘내’가 있어 어떤 ‘내’가 발현되고 밖으로 드러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고 그 가능성은 다양하다. 다시 말해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정해진 채로 박혀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 간에 연속되고 서로 상호 침투되며 흐르고 운동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실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완전하고 부동하며 절대적인 개념이지만 심층은 불완전하고 움직이며 어떤 경우에는 모자란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류종렬 교수는 “누구나 자기 얼굴에는 수많은 자기인생의 내용적 변화들이 담겨져 있다”고 하면서 이 내용적 변화들을 하나로 뭉쳐서 얘기한다면 ‘흐름’, ‘유동성‘이라고 한다.

베르그송은 이 세상이 이질적인 것들의 종합이라고 했다. 류종렬 교수는 “인간은 20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 인간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생물의 세포에는 ‘미토콘드리아’가 들어있어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런데 미토콘드리아는 식물세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질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방식은 다른 이질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수행되며 동일적인 체계로 계속 동일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을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식물-되기’, ‘동물-되기’라는 ‘되기’의 개념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두고 들뢰즈는 국가가 제약하는 사회적 인간보다 훨씬 자유롭고 더 인간다운 것이라고 한다. 들뢰즈는 우리 안에 이미 많은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다양한 양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대상도 필연성과 관련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연성과 관련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과 인륜 : 인격성의 문제

베르그송은 서양의 철학사를 ‘상층(上層)’, ‘평면(平面)’, ‘심층(深層)’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Plato)에서 1500년 까지 기독교주의가 지배했던 중세를 기점으로 상층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후 르네상스에 이르는 시기를 거치고 1632년 갈릴레오가 관성의 법칙을 끄집어낸 것을 데카르트(Descartes)가 철학적으로 정리하면서 평면의 철학으로 내려온다. 1809년에 오면 라마르크(Lamarck, 1744~1829)가 『동물철학』에서 동물 종의 변화에 대한 내용으로 책을 출간한다. 그 후 1830년까지 프랑스에서는 생물학 분야에서 학문적 전개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다. 심층에서 자연내재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동하는 자연의 진짜 모습과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1800년대 전후로 철학이 다시 상층으로 올라간다. 칸트(Kant)는 사회와 국가라는 인격성을 인륜 속으로 포함시켜 상층으로 올려버린다. 그리고 1831년 헤겔(Hegel) 이후 계속 독일철학은 상층의 철학 노선을 가게 되었다. 헤겔철학은 국가라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이것을 상층에 둔다. 류종렬 교수는 이 점에서 독일철학이 제국주의 철학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학문적으로 그리스 주제를 삼등분 할 때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시작하여 19세기 낭만주의는 에토스의 넓이를 확장하고, 파토스가 상호 침투하는 것이 주제로 부상한다. 한편, 개인의 품행과 행실이라는 면에서 개인의 ‘인격성(personnalit?[프랑스어])’을 다루게 되는데 다른 한편으로 사회 공동체도 인격이 있다고 제기한 것이 인륜성(die sittlichkeit[독일어])이다. 헤겔이 사회 공동체도 인격이 있다고 하면서 국가의 인격성을 말한 것이 이 맥락이다.

프랑스 혁명은 개인의 자유를 기반으로 일반의지와 닮은 사회[공동체, cit?]의 인격을 다루기도 하지만, 사회 인격은 개인 인격처럼 주체로서 이루어지기보다 집합으로서 인격화(personnifier)이다. 헤겔은 변증법적 통일에 의해 사회성의 최고단계로서 국가는 인륜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고, 그 인륜성 속에서 개인의 자유가 실현될 것으로 보았지만 베르그송은 이 변증법적 통일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합의와 연대가 개인의 자율성 없이 이루어질 경우에 그 통일은 강압과 폭력일 수 있으며, 이를 은폐하려는 수단으로 외부에 전쟁을 거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류종렬 교수는 참고로 당시 헤겔을 반대했던 네 명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거론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중요한 시기에 독일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독일철학이 상층으로 올라가던 시기에 그 철학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덴마크 사람으로 국가보다 개인의 결단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자아의 실체성과 실존성에 대해 강조했고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1845년에 이미 독일을 떠나 자본론을 쓸 때는 영국에 있으면서 영국의 모습을 통해 본 자본제의 현실을 파악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철학의 국가 윤리적 동일성이 이항대립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게 되면 이것이 사회의 폭력성을 양산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도 일찌감치 독일을 떠나 스위스에 있었는데 『비극의 탄생』에서 독일 철학이 상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면서 그렇게 흠모해 마지않았던 바그너(Wagner)와 결별한다.

그런데 그의 ‘힘에의 의지’와 ‘짜라투스트라’, ‘영원회귀’와 같은 개념들은 프랑스화 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는 자연이라는 거대 속에서 되돌아와 새로운 사물이 되는 것으로 프랑스적 관점이다. 그래서 힘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프랑스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권능에의 의지’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니체와 베르그송의 공통점은 상층의 실체성이 아닌 평면의 현존성을 중요시 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무의식이 의식보다 더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우리들의 삶의 현실들이 밖으로 드러난 것 보다 내재성이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의식은 빙산의 일각처럼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헤겔의 동일성에 대해 반대하는 경우와 유사한 주장이다. 이 당시 프로이트는 비엔나에 있었다.

베르그송의 철학과 도덕론

베르그송은 독일의 체계철학과 상층의 철학을 비판했다. 상층에서의 명령과 계율의 철학은 전쟁의 철학이고 저 밑 심층에서 솟아나는 철학은 연대의 철학이고 공생의 철학이다. 류종렬 교수는 “다시 말하면 전자는 이른바 가부장적인 철학으로 절대의 철학이며, 후자는 생산의 철학으로 여성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에는 두 원천이 있다고 했다. 주지주의 철학과 내재성의 철학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수 밑의 음수도 수(數)라고 볼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네오칸트주의자들은 이것들을 동일성의 논리로 통합시킨다. 이를테면 무리수 ‘π’와 ‘√2’는 사실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같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주지주의의 동일성의 논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류종렬 교수는 베르그송이 주장하는 내재성의 철학이 주지주의자들의 철학보다 더욱 실재성이 있다고 본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단한 공과 같은 것이라 여겨지던 ‘원자(atom , 原子)’를 쪼개면 쪼갤수록 원자핵과 전자에서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눠지고 더 작은 미립자와 소립자로 나누어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물질의 내부로 갈수록 그 양태는 훨씬 더 다양해지고 그것이 실재와 더 가깝다는 것이다. 동일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 실재성의 한 부분 껍데기만을 강조하며 심지어 통일성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전체로 통일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도덕성과 종교에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주지주의-상층의 철학에서 동일성을 생각하는 자들은 완전을 모방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이 세상의 여러 현상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마치 기독교에서 완전한 신과 반대되는 불완전한 인간에게 원죄를 멍에를 씌우듯이 완전한 것을 가지지 못했기에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하지 못한 ‘빚’을 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핍되어 모자라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 존재들은 빚을 상부에 갚아야 한다는 것이 주지주의적인 판단이며 동일률의 원칙이 된다.

이것은 인격에게 사회가 강제하는 강요이며 칸트의 정언명법을 따르게 만든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이러한 사회는 생명의 본질을 배제하는 사회라고 하면서 이 습관이 배어버려 폐쇄된 사회(문명화 된 사회)에 저항하는 인간이 있다고 한다. 이 인간은 자기 홀로 저항을 위한 저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닫힌 사회의 ‘저항’에 새롭게 ‘저항’하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을 사회에서는 비정상이고 ‘별종’이라고 한다. 이것은 습관적인 사회가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자부하는 데서 나오는 현상이다. 베르그송은 이 저항하는 인간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이 ‘도덕적 영웅’은 사회의 일반성의 밑바탕에 있는 영혼의 심층에서 끌어낸 인격이다. 류종렬 교수는 이런 사람들의 내재적 본성에 대한 호소는 아마도 루소의 연민(la piti?), 예수사랑, 베르그송의 헌신(devoument)일 것이라고 한다. 이 공감은 정언명법처럼 순차적인 이어짐이 아니라 상호 침투하는 공감이며, 직관처럼 단번에 서로에게 관통하는 것이다. 이 관통하는 힘은 감동과 정서에서 생성하는 내재적 추진력이다. 인식을 주관하는 이성이 아닌 ‘의지’의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실천은 이 감동에 실려서 ‘확장’된다. 이 ‘확장’의 개념은 선적이고 단적인 개념으로서의 ‘진보’ 개념과는 다르다. ‘확장’이란 여러 관계를 만나고 자신을 확장시켜 더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과 모두를 ‘진화’시켜 나가는 측면에서의 개념이다.

동일률을 넘어 내재성의 확장으로

류종렬 교수는 현대 우리의 주변에는 아직도 동일률에 의거하여 우리 위의 아버지-아버지의 저 먼 아버지에게 부채(負債)를 지고 있다는 생각에 아직도 자신이 현존하는 근거를 상층에 갚기 위한 수행의 일환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동일성의 논리를 통해 인간을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집어넣는 사회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류종렬 교수는 강의록 말미에 『부채인간(인간 억압조건에 관한 철학 에세이』(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저, 허경_양진성 역, 메디치미디어, 2012)의 내용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일론자들이 씌어놓은 부채(원죄, 죄의식, 모자란 존재, 결핍존재, 유한존재)라는 것은 권력자의 피지배자에게 쳐놓은 덫과 같은 것이다. 동물원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소외로 죽고, 들어가면 피를 빨려 죽는 그 동물원에 인간을 몰아넣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에서 윗목이 따뜻하면 아랫목도 따뜻할 것이라고 믿는가? 야만의 제국, 자본의 제국, 권력의 제국, 권력의 제국, 전쟁과 공포의 제국에서 윗목(이익)은 항상 피라미드 체계의 윗부분에만 있지 그 외에는 없다. 이 위계의 체계에 저항하고 봉기하는 혁명의 길이 진정으로 인간성을 찾는 것이다. 이 위계의 밖에서 고립된 ‘덕후(별종)’들의 공연성(公然性)을 공명하는 다양체가 새로운 ‘인민의지’이다. 이 인민의 의지로서 봉기와 혁명이야 말로 부채인간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동일률에 반대하는 인민 다양체의 자기 확장(생성)의 논리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한 방법일 것이다” – 류종렬 강의록 중 『부채인간』(45VLF)

▲ 류종렬 교수 ⓒ프레시안

내재성의 확장이야 말로 새로운 생성이며 힘센 한 사람의 지배적 지성이 아닌 집단적 지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고 질서에 균열을 만들며 뚫고 나오는 것이 베르그송이 말하는 ‘도덕적 영웅’이다. 류종렬 교수는 ‘디시인사이드(DCinside)’의 집단지성이 보여주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하면서 ‘스키조(schizophrenic)’가 세상을 바꿀 것이며 신만 아는 편집증의 시대와는 고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후배가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생명존재의 마지막이다. 이 자각이 있으면 우리는 자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며 어떤 기준에 의해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기존에 만들어 놓을 것을 바꿔나갈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도덕이 살아있는 사회이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티끌 속에 온 우주가 깃들어 있어 티끌 하나도 반짝이는 금과 같은 존재’처럼 모든 인간이 다 소중함을 체득해야 한다. 우리의 내재성이 확장된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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