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받는 자들의 전통과 미국대선 [나인당케의 단상들]

미국에서 트럼프 정권의 탄생은 분노와 좌절을 느끼게 한다. 많은 이들이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분노할 자격이 있다. 또 서로 위로해주어야 할 과제 역시 안고 있다.

그러나 현재 힐러리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몇몇 분들의 과도한 주장들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례로 지금 SNS나 인터넷에서는 힐러리를 비판하는 모든 종류의 주장들을 ‘여성혐오’로 몰아붙이며 극단적인 욕설과 원색적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여기서 여성혐오의 사례로 지적된 발언들은 ‘버니 샌더스가 나왔으면 이겼을지도 모른다’거나, ‘힐러리가 약자를 대변하지 못했다’는 등 근본적으로 ‘여성’혐오라기보다는 힐러리의 무능함을 질책하는 것들이었고, 이러한 발언은 정치인에 대한 비판의 자유로서 보장받되어야 한다. 단지 힐러리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고 해서 힐러리 비판이 여성혐오로 이어진다고 보는 견해는 굉장히 위험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러한 주장들은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의 모든 차별받는 사람들의 정치적 투쟁과 해방을 향한 과정들을 거대한 사기저하와 무기력함으로 고통받게 만든다. 나는 트럼프가 집권했다고 해서 미국의 시민사회가 곧바로 붕괴할 것이라고 비관하지 않는다. 작년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을 때 미국내의 열기, 그리고 그것이 전 세계에 준 신선한 충격을 기억하라. 단지 1년만에 트럼프가 집권했다고 해서 그들이 이 흐름을 하루아침에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힐러리의 패배를 자신의 패배와 동일시한다면, 그들이 트럼프의 공격으로부터 이러한 지난 사회운동의 성과들을 방어하는 투쟁에 곧바로 진지하게 대처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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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보운동 전체가 힐러리와 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며, 그녀를 비판하는 모든 주장들은 여성혐오라는 식의 주장은 매우 폭력적이다. 무엇보다도 힐러리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무능한 기성 정치인일 뿐이다. 물론 최초의 여성대통령 도전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유리천장의 존재가 그녀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숨기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미국 민주당의 보수적 고위관료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버니 샌더스가 일으킨 political revolution의 새로운 흐름을 차단해버리고, 샌더스 효과의 모든 모멘텀들을 대선으로부터 추방해버린 인물이다. 또 그녀는 국무장관 재직시절 미국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저지른 모든 형태의 전쟁범죄들에 가담한 인물이다. 수억대의 강연료를 받고 월스트리트를 옹호한 수십 년 경력의 ‘기성’ ‘주류’ 정치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이번 대선에서 그 어떤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 무능한 후보였다.

그녀에게 대선때 어떤 전략이 있었던가? 분명 그녀 역시 샌더스의 정치혁명이 일으킨 흐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었다. 샌더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한다든가, 무상교육 같은 샌더스의 대대적 복지정책을 수용한다든가, 젊은이들의 좌절스런 삶을 개선할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다던가 하는 전략 등.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펴지 않았다. 그저 트럼프의 역겨운 혐오발언에 반사이익을 누릴 생각 뿐이지 않았는가?

따라서 트럼프와 백인남성들의 혐오공세에 맞서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의 반격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내지 못한 것은 그녀의 무능함 때문이다. 그리고 대선에서 그녀의 패배를 직면한 진보적 유권자들이 그녀의 그러한 무능한 대응들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정치적 권리다. 이러한 비판들을 ‘여성후보’에 대한 공격으로 묵살해선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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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트럼프의 집권은 분명 하나의 예외상태다. 그것은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추구해왔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전략'(국내에선 개인의 자유를 강조, 국제적으로는 자유를 빌미로 한 군사개입)이 사실상 끝났음을 선언하는 사건이자, 미국 주류 사회가 국제적으로 ‘어메리칸 리버럴리즘’의 위대함을 선언하던 시절이 끝났음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트럼프는 분명 적(라티노, 무슬림, 성적 소수자)을 설정함으로써 백인남성 중심의 ‘우리’를 통합하려는 정치적 술수를 쓸 것이며, 장벽건설, 이민자 추방, 타국과의 외교단절 등의 예외적 조처들을 사용해 초월적 차르와 같은 주권자의 입지를 굳히며 지지기반을 다지려 할 것이다. 이러한 유사 전체주의적 트럼프의 지배에 맞서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에 서서 이러한 예외가 실은 ‘상례’라고 지적함으로써 ‘진정한 예외상태'(벤야민)를 전개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제인지도 모른다.

힐러리와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을 일치시키는 모든 시도들은 이러한 정치적 과정에 역행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이 무마되고 극우 혐오주의자 정권이 탄생한 것에 다른 모든 분들과 함께 분노하지만, 동시에 이 패배의 원인을 인식하고, 어째서 힐러리가 트럼프를 넘지 못했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울지도 웃지도 말고 다만 이해하라. 이것이 우리가 현 순간 취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한철연] 10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들과 독자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10월 월례 발표회를 공지합니다. 10월은 철학자의 서재 live로 진행합니다.

진행은 버틀러의 저서 『혐오 발언』을 가지고 유민석 선생님이 하십니다.

“혐오와 혐오 발언”은 일베, 메갈리안 등의 활동이 촉발시키고 쟁점화되며 최근 한국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주제인만큼 회원 선생님들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일시 : 10월 21일(금), 오후 6시

* 장소 :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 주제 : 버틀러의 『혐오 발언』 –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은 가능한가”

* 진행 : 유민석 선생님(서울시립대)

 


<아래는 유민석 선생님이 보내주신 철학자의 서재 live 내용 개요입니다>

법학자들과 운동가들은 혐오 발언이 말하는 것 뿐 그것이 행하는 것에 근거하여 혐오 발언에 대한 금지를 종종 추구해왔다 (랭턴, 1993).
그들에 따르면 혐오 발언은 일종의 언어적인 따귀로, 표현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 ‘그냥 말’이 아니며(매키넌),
수신자의 복부를 강타하고 종속적인 지위로 못박아 두거나(마츠다),
열등한 자로 서열을 매기고, 그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발언 불가능하도록 침묵시킨다(랭턴).

그러나 말은 의도된 대로 항상 행위하지 못한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주디스 버틀러는 잠재적으로 고통을 주는 말을 심문하고 수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말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말에 대한 반복에 위치시키면서 (1997)
“아무도 상처를 반복하지 않고서는 상처를 극복할 수 없다”(p.102)고 주장했다. (Eichhorn 2001)

『격분하기 쉬운 말Excitable speech』에서 버틀러는 포르노와 인종차별적 혐오 발언은 어떤 형태의 법적 제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들과 반인종주의 이론가들을 비판한다.
버틀러가 인용하는 이론가들―레이 랭턴, 캐서린 매키넌, 그리고 마리 J. 마츠다―는 모두 발화의 규제에 대한 “평등equality” 논증의 어떤 형태를 제공한다.
즉 만일 말이 억압된 집단 구성원을 종속시키고, 주변화하거나 피해를 준다면, 말은 규제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J. L. 오스틴의 언어 행위 이론을 사용하면서 그리고 말의 열린 본성을 강조하면서, 버틀러는 이러한 논증들을 거부한다.
궁극적으로 버틀러는 그 같은 규제는 그렇지 않았다면 혐오 발언을 “재의미화resignigying”하고 “재상연restaging”함을 통해
이러한 말에 대한 도전을 불러일으켰을 자들을 침묵시키도록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규제를 실행하는데 반대할 것을 조언한다. (Schwartzman 2002)

혐오 발언이란 무엇이며, 혐오 발화자는 누구일까?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은 가능한가?
버틀러는 어째서 혐오 발언에 대한 발화수반행위론에 반대하며,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 규제나 처벌을 반대하는가?
주디스 버틀러가 『혐오 발언 Excitable Speech』에서 개진한 발화효과행위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201608161942592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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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루스(phallus)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블로그진 안내] 본 지면은 회원들이 매달 약간의 후원회비를 납부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코너 제목을 개설하고 스스로 글을 업로드 하는 곳인 만큼, 본 코너의 저작권과 글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글쓴이 본인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우쑵니다.

 

저의 소개가 늦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뻑.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라 욕하지 마시고 당황스런 저의 난감함을 혜량해 주십시오. 언젠가 중국의 베이찡 거리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손짓발짓 해가면서 얘기를 나누었을 때 그들의 눈만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했던 것만큼 갑갑합니다.

오! 이타카의 왕이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딧세우스로부터 다이달로스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에서 메두사의 목을 자른 페르세우스~ 그리고 로마의 황제를 역임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까지.

근래 캔디와의 스캔들로 뭇 여성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테리우스(오, 나의 사촌 형님 ㅡㅡV) 그리고 열락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카바레의 죽돌이가 되어 우쑤 가문에서 파문당했던 제비우스(형! 왜 그랬어. 카바레가 그렇게 좋은 거야) 이 우쑤 가문의 영광을 빛냈던 우리의 조상 형님들 앞에서 저 허리우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테리우스

저의 난감함이란 베이찡 거리에서 느꼈던 갑갑함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도 느꼈다는 사실일 겁니다. 타인의 언어를 모르면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진정을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입죠. 그것은 여성의 언어도 모르면서 남성의 언어로 남성의 진정성을 얘기하려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이 현상의 핵심은 ‘정신병이 범죄의 원인이냐? 아니면 여성혐오가 원인이냐?’ 정도이더군요. 저의 당혹스러움이란 이 이분법적 논쟁의 핵심이 마치 생물학적 문제이냐 문화적 정치적 경향의 문제이냐를 따지는 듯한 느낌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런지요.

이것은 이분법적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 형님께서는 간파하셨지만 그것은 사실의 명제가 아니라 당위의 명제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가련한 동물이죠.

아뇨. 인간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동물성을 이성적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하고 외면하기보다는 직시하자는 쪽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혹은 이성적이어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동물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핵심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만, 생물학적 차원과 문화적 정치적 차원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놀라웠던 사실은 여성분들이 자신의 경험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토로했던 점입니다.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들 가운데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친척과 직장동료를 비롯한 아는 사람이죠. 여성분들이 당한 추행과 성폭력의 내용들은 대체로 그러한 내용들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크고 작은 성추행이나 폭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남성들이 외면할 뿐 아니라 무지한 채로 있지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강남역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단지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장애인과 어린이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약자들이 당하는 일들입니다. 강자들의 지배와 권력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현상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 억눌렸던 약자들이 그동안 말하지 못한 얘기들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얘기들을 겸허히 듣지 못하고 어떤 남성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지 말라는 핏켓을 들고 나온 일은 겁 많은 남성의 찌질한 행동이라고 귀엽게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전 이 문제가 남성과 여성의 혐오의 문제로 구별하기보다는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입니다만, 이것 또한 여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난감한 일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앞서는군요. 뻬이징 거리의 중국인을 대하는 당혹스러움입니다.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본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권력의 폭력적 지배에 취약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생물학적 차원의 동물들의 세계에서 남성성이라는 팔루스(phallus)가 있다면, 아! 전문용어 나왔군요.

팔루스

팔루스. 죄송합니다. 쿨럭, 넵, 팔루스는 페니스(pennis)라는 생물학적 자지와는 다른 용어로 흔히 남근으로 번역되더군요. 권력이고 폭력입죠. 상징적 의미에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권력과 폭력이지만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동물성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인류의 역사는 이 팔루스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무사(武士)에서 문사(文士)로의 변화, 그러니까 무(武)라는 폭력에서 문명이라는 문(文)으로의 전환이 핵심이 아닐까 싶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일들을 단지 남녀의 대립의 문제로 이해하기보다는 야만의 폭력성과 문명의 문화성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가하는, 네 그런 얘기입니다. 여성들의 성토는 아마도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의식하지 못하는 야만의 폭력성에 대한 성토일 수 있습니다. 네, 아직 남자들은 문명의 문화성으로 진화되지 못한 덜떨어진 인간들입죠. 물론 이 사회의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입니다. 직시하자는 것이죠.

문득 동방불패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영화에는 강호의 최절정 고수가 되어 절세 무공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적힌 비서(秘書)가 나오죠. 규화보전(葵花寶典)입니다. 규화보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작용은? 여자가 되어 한 남자를 지배하고 독점하려는 질투와 원한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규화보전은 원래 한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원문은 한글이고 번역본이 한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더군요. 한문은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를 한글 원문으로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좇 빠지게 연마하라.” 단언컨대 이것은 날조된 사실입니다.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 말은 한문 그대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규화보전

규화보전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적합한 비법입니다. 때문에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성화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팔루스의 폭력적 지배가 아닌 여성성의 헌신입니다. 핵심은 남성성을 죽이고 여성성을 강화해야한다는 사실입죠. 전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세 무공의 핵심은 여성성의 강화이다. 폭력적 지배보다는 부드러움의 헌신이다. 그렇습니다. 여성성은 이제 인류를 주도할 핵심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여성성의 핵심이 바로 거세(去勢)입니다. 이 거세는 성기를 절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문 그대로 해석하자면 세(勢)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자들은 어떤 세를 제거해야 할까요? 기세, 권세, 위세, 힘쎄. 남자들은 자신의 세(勢)를 가지고 명령하고 과시하고 공격하고 주도하고 지배하고 규정하고 거칠게 몰아붙입니다. 부드러운 방법을 모릅니다. 현실을 다룰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를 모으려고 몰려다니며 으쌰으쌰 술만 마십니다.

제거해야할 것은 성기가 아닐 줄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세(勢)를 과시하려는 남성적 동물성이고 세를 가지고 지배하려는 팔루스입니다. 갱년기는 여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남자들도 갱년기를 겪는다고 합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고 근력이 저하됩니다. 눈물이 많아진다고도 하구요. 애처로운 일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성화된다고 하더군요. 전 이미 술과 담배로 쩌든 몸이라서 팔루스가 발기되지도 않지만,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제 남자들은 규화보전을 연마할 시기는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