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박영균(한철연 기조부장)

 

증오를 부추기는 세상

 

2012년 여름과 초가을, 한국 사회는 온통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대외적으로 한국 사회는 이명박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기점으로 하여 반일감정에 휩싸여 있으며 대내적으로는 ‘묻지마 살인’과 ‘성폭행’이라는 흉악범들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여기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사건에는 사람들에게 공분을 자아낼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분’이 ‘증오의 정치’를 생산할 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보존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해치는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때, 그것에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분노가 특정 범죄자들, 특정 인물에 대한 ‘제거 또는 살해의 욕망’으로 전화할 때, 그것은 ‘위험’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 ‘위험’은 결코 ‘작은 위험’이 아니다. 그것은 흉악범죄가 지닌 위험보다 훨씬 위험한, 근본적인 위험이다. 이런 위험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된 박근혜의원은 “흉악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저지른 사람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 사형제는 필요하다”고 출입기자 오찬에서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이어 새누리당 박인숙의원은 재범 가능성이 큰 상습적 성범죄자에 대해서 물리적 거세를 실시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그리하여 흉악범들에 대한 분노는 그들에 대한 제거의 욕망으로 이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합리적인 토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나주 초등학생 납치 성폭행 사건 피의자 고아무개 씨가 2일 고개를 떨군 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그러나 이런 선의 절대성에 근거한 ‘제거의 욕망’은 본질적인 물음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이런 흉악범들을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면 범죄는 사라질 수 있는가이다. 그들은 모든 죄의 원인을 몇몇 흉악범들에게 돌린다. 그들이 보기에 범죄는 범죄를 저지른 자 안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애초 인간이 아닌 ‘괴물들’만을 제거하면 사회는 마치 깨끗해질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암세포를 돌려내면 암은 사라지기도 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암세포를 돌려낸다고 암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암세포를 이겨낼 수 있는 우리의 신체, 사회적 환경이다. 사회가 흉악범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와 같은 암세포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눈에 즉자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즉물성에 빠져 ‘혐오’를 증오로 바꾸어 놓고 있다.

‘악’에 대한 정당한 ‘분노’는 정의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는 ‘혐오의 감정’을 근거한 ‘분노’가 되어 버릴 때, 그것은 오히려 더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복수’는 정의의 감정에서 나온다. 하지만 악을 제거하고자 했던 복수의 감정이 오히려 자신을 더 흉측한 괴물로 만들어버리면서 ‘복수의 악순환’을 낳는 것처럼 그것은 ‘악’을 먹고 자라는 더 근본적인 ‘악’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증오의 정치학과 노예의 도덕

 

정념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스피노자는 이미 이와 같은 ‘악’의 악순환을 사유했었다. 그는 ‘원인에 대한 무지’가 부정적 정서에 근거한 악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문제는 이 악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정념에 붙잡혀, 이 ‘악’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현재의 정념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형제’와 같은 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그것을 처벌할 수 있는 더 강력한 권력을 요구한다.

최근 한 연예인(배우, 김규리)은 자신의 트위터에 “신체절단형 난 반댈세~ 유신이 부활하면 아무나 멍에 씌워 절단해버릴 수 있을 것 같음. 무서워~~”라는 글을 남겼다. 민주통합당도 박근혜의 사형제 옹호 발언에 대해서 유신정권 시절 ‘인혁당’으로 몰아 사형을 집행했던 과거의 역사에 들추어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이에 대해 ‘웬 뜬금없는 이야기냐’는 식으로 민주통합당을 몰아붙였다. 사실, 이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다. 하나는 흉악범에 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정치범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전쟁’, ‘범죄에 대한 전쟁’ 등, ‘?에 대한 전쟁’이라는 모토로 표현되는, 어떤 특정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 없는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식이었다. 박정희 구데타 정권은 ‘북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전두환 구데타 정권은 ‘범죄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면서 이에 대한 청산 작업을 벌였다. 유신독재시절에 정적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것도, 사회정화를 내세우며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런 ‘악에 대한 전쟁’이었다.

만일 독재를 만들어낸 것이 대중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악의 제거’라는 ‘선(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바디우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사이비 선에 대한 열정일 뿐이다. 그것은 실상, 선을 추구하는 정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확히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를 보라. 그들이 선교하는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신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옥’이라는 형벌의 참혹성에 대한 공포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폭력범죄자’들에 대한 공분 또한 정확히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물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포를 통해서 생산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보다 거대한, 근본적인 악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를 지배하는 권력’에 나를 위탁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보았듯이 폭군은 이와 같은 슬픔의 정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슬픈 정념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은 그것을 권력에 위탁시킴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켜버린다. 따라서 김규리의 이야기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권력은 ‘악’을 먹고 자라난다. 그들은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강화하며 법을 신성화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군주제의 커다란 비밀과 그것의 근본적인 관심은 인간들을 속박할 때 이용하는 공포를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하면서 인간들을 속이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예속이 마치 자신들의 안녕이기라도 하듯이 예속을 위해서 투쟁한다.”

 

지배의 정치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분단 문제가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와 대립으로, 지역 간의 갈등과 분열로 비화하는 것 또한, 바로 이와 같은 ‘증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북’을 악으로 불러내며 그것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파시스트적 권력을 만들어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거대한 권력이 되어버린 기독교는 ‘예수 믿어. 안 그러면 지옥 가!’라는 공포를 통해서 교회 내에서의 유일권력을 만들어냈으며 그 권력을 만들어준 대중은 스스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부정적 정서’와 ‘정념’의 포로가 되어 주인을 위해 싸운다. 따라서 문제는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해방과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투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투쟁은 단순히 부정의와 싸우는 것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아차’ 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그 스스로를 속이면서 빠져드는 ‘정념들’과의 투쟁 또한 요구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선’으로 포장하는 ‘정의’가 아니라 ‘정의’ 그 자체, ‘선’ 그 자체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나(대중) 자신의 성찰이자 권력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삐딱하게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은 나의 슬픈 영혼을 부추겨 그들의 지배적인 힘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고해의 삶에서 얻는 상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지배의 정치학은 우리의 고통을 파먹고 살며 우리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며 그 잔혹한 삶의 고통이 유발하는 분노의 정념을 파먹고 자라난다. 따라서 지배의 정치학은 나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나 자신의 밖을 향해, 타자에 대한 공격과 원한으로부터 출발한다. 민주주의가 가진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때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는, 5년 전에 그랬듯이 한편으로, ‘민생이니 사회통합이니’하면서 노무현-김대중-전태일기념사업회를 방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의 강력한 권력을 환기시키는 이중의 행보가 지닌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을 배신하고 또 다시 대중들 스스로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4.11 선거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시대와 철학]

4.11 선거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시대와 철학]

이 순 웅(숭실대 강사)

 

1. 집단주의의 뿌리

 

1980년대 초반에는 ‘NL(national liberation)’이니 ‘PD(people democracy)’니 하는 게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표면화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피를 먹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 그 정권을 감싸고도는 미국, 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바빴다. 북한에 관해서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친일세력을 청산했고 거지가 없을 거라는 정도라고나 할까.

1982년쯤일 것이다. ‘야비’(야학 비판)라는 문건이 돌고, 학생운동의 위상에 관한 논쟁이 조금씩 일었다. 그건 한국 사회에 관한 진단의 문제였고 변혁 방법론에 관한 문제였다.

정확히 몇 년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198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가 ‘외채 4강’에 들기도 했다. 한 번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4개 국가가 국제 축구 대회를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4개 국가는 외채가 많은 순으로 1~4위였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 ⓒ연합뉴스

당시의 변혁 노선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자본주의 파국론’에 입각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학생 운동보다는 노동운동에 기대를 일종의 ‘준비론’이었다. 자본주의 파국론에 따르면 학생운동은 일종의 기동전 같은 것으로서 도시 봉기의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1980년 광주, 강절도 사건이 전무했던 것으로 알려진 해방구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시민군 편이었고 ‘완벽한’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본주의 파국론에는 광주에서의 봉기가 확산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내지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봉기가 가능하리란 진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외채 비율이 높은 것은 일종의 경제 파국의 징표처럼 보였다. 경제 파국은 민중의 불만을 유발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러시아식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이 변혁 노선의 한 축을 형성했던 것이다.

한편 준비론은 광주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보다 근본적인 변혁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전두환 정권은 봉기를 진압했고, 각종 언론 등을 동원한 이미지 조작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계급에 기반을 둔 투쟁, 보다 근본적인 계급, 노동자 계급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은 일종의 특권 신분으로서 언제든지 변절할 가능성이 있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했다. 일종의 사상적 무장이 강조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사례도 있다. 광주 항쟁이 일어나기 전, 서울역에 모였던 대학생들은 만일의 경우 다시 거리로 나서겠다고 하면서 철수해버렸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작전 실패’였던 것이다. 군부 정권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서울의 학생운동은 군부 세력의 폭력적 각개격파에 무너졌으며 광주에서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광주 항쟁에서도 인텔리들은 투항을 결정한다. 주로 인텔리로 구성된 지도부는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자는 결정을 내렸으며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은 대개 못 배우고 가난한 민중들이었다.

비록 오래 전 얘기이긴 하지만 두 노선은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는 방법론이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어떤 노선이 옳은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노선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유다. 각각의 노선이 가진 논리적 정합성이나 현실 타당성이 아니라 내 선배가 어떤 노선을 선택했느냐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어떤 노선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선배들이 둘로 갈라졌다. 선배들의 판단은 무오류성을 지닌다고 생각했던 당시로서는 혼란이 적지 않았다. 어쨌든 나 역시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사실 그때의 내 기준은 좀 더 좋아하는 선배 편에 서는 것이었다. 어쩌면 논리보다는 인간관계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선택이 좀 더 쉬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중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만, 당시에는 일종의 현장 준비론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무서운 게 있다. 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당시에 이런 저런 노선상의 이유로 갈라졌던 이들이 ‘영원히 안 보는 관계’로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논리를 선택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배가 까라면 깠던 시절, 선배의 말은 다 옳은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파국론이나 준비론이나 둘 다 옳은 것처럼 여겨졌고 따지고 보면 어떤 노선이 옳은지 검증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일종의 혈맹 관계처럼 맺어졌던 그 인간관계를 누가 감히 깰 수 있었을까.

1980년대 후반의 학생 운동은 정파 간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던 노동 현장 운동과는 달리 통일운동 일변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NL파가 득세했다. 북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북한을 주력군 내지 동맹군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던 것 같다. 수령론이 어떻고, 북한 방송을 듣고 세미나를 한다는 등의 얘기를 간간이 들은 적이 있는데, 나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들이었다. 북한이 그 정도였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제법 길다. 박정희 정권 시절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40년이 넘는다. 봉건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민주화를 경험하지 못한 특수한 운동 환경은 민주적 의사소통보다는 가부장제나 권위에 의존하는 형태의 운동을 만들어냈다. 거기에다 학연, 지연 등의 요소는 같은 노선을 가진 운동권끼리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말은 노선이 다르면 원수처럼 지내기도 했다는 뜻도 된다.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의 내홍이 점입가경이다.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갈등이라 묘사되는 현 상황이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일종의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민통당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까. 2012년 5월 13일 현재, 이른바 당권파는 폭력적 상황까지 연출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기존의 제도권 정치를 통해서 보고 배운 것이기도 하기에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리고 통진당이 한국의 진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니 크게 기대할 것도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당 이름 치고 안 좋은 이름이 어디 있는가.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한나라당, 민주당, 새누리당 등 모두 좋은 이름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름에 걸맞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진보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서 곧 진보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태극기 머리에 두른 사람 중에서 제대로 된 애국자는 거의 없지 않은가. 어쨌든 현재의 통진당 사태를 볼 때 다음과 같은 판단은 가능해보인다.

아마도 비당권파는 이번 기회에 당권파의 (흔히 패권주의라 부르는) 집단주의를 일소하고 실질적인 헤게모니를 잡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일사불란한 전열을 갖춘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NL은 대중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대중 사업은 정치(精緻)한 논리적 토론이나 합의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교분과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때로는 이러한 문화가 일사불란하게 어떤 대응을 할 필요가 있을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지난번 선거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다분히 ‘성공적’인 결과를 낳은 이유 역시 오랜 대중 사업의 결과다.

반면에 PD는 견결한 계급성을 강조하지만 ‘영 아니다’ 싶은 대상과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성공적인 대중 사업과 거리가 멀다. 선거판에서 PD나 좌파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다. 얼마 전 좌파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진보 전략 회의’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에 관한 토론회를 열었다. 좌파의 총체적 실패를 두고 ‘반성하자’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나는 그 평가가 ‘우리도 NL처럼’으로 들렸다. 기왕에 선거판에 끼어들 것이라면 NL을 비판하기 전에 NL처럼 하지 못한 것에 관해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비당권파는 일사불란한 전열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NL적 성향의 당권파와 달리,다소 어중간한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어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다. 더욱이 민심을 배반했다고 평가받는 유시민 그룹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좌파로부터의 심정적 지지를 얻는 데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3.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

 

진보 운동 진영이 선거에 뛰어드는 것은 부르주아 제도들을 활용하면서 부르주아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극복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활용과 관련해서는 이미 부르주아 지배 계급이 고수다. 선거판은 일종의 포커 게임이기도 하다.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면서도 자기 패를 모두 보여 주지는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진보 좌파는 패를 너무 많이 보여준다. 자금도 딸리고 경험도 없기 때문인지 속을 다 드러낸다. 그만큼 진보 좌파가 선거판에서 기득권 세력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국민들이 진보적 좌파에게 표를 주는 이유는 수권(受權) 능력 때문이 아니다. 보수 여당이나 야당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순수할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순수함이 훼손된다면 씻을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 불순함으로 본다면야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이 훨씬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간인 사찰 사건은 그야말로 탄핵을 해야 마땅한 사항 아닌가. 보수 여당의 정책을 일정 부분 계승한 보수 야당도 정권을 잡았던 적이 있다. 국민들이 그들의 부도덕함이나 반(反)민주성을 유야무야 대충 넘기는 이유는 그래도 그들은 권력을 잡고 무언가를 할 능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능력이 있든 없든 어쨌든 그들은 국민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보수 야당과 선거 제휴할 때도 이른바 ‘당선 가능성’이라는 것이 늘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제 통진당은 기존 정치권에서 보여줬던 행태를 그만 보여줬으면 한다. 이제 그만 주목받았으면 한다. 그리고 비당권파는 자신의 현실적 한계를 일단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당권파는 결코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정치에서는 논리가 힘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집단적 연대가 힘이다. 전두환 대통령도 자기 부하들을 절대 충성파로 만드는 데 능했다. 누가 뭐래도 ‘존경하옵는 각하’다. 한편 그 시절에는 언론 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는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시대다. ‘모두가 정치가요, 모두가 정치 평론가다.’ 현재의 상황이 계속되는 것은 통진당에게 이롭지 않다.

당권파에게는 비당권파의 모습이 ‘조직적 기반도 없으면서 날로 먹으려는 태도’로 보일 것이다. 어떻게 이룬 결과인데 이렇게 줄 순 없다고 볼 것이다. 나아가서는, 당권을 준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당권을 가질 수도 없을 거라는 판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례대표 선거과정에 오해가 있다고 하니 좀 더 조사를 해보는 것도 이미지 연출과 관련해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것이다. 투표 부정은 관례대로 한 것이거나 과장된 것일 수 있다. 문제는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인데, 불분명하면 불분명한 대로 그때 가서 국민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보여줄지 고민했으면 한다. 그래서 통진당이 아니라 통진당의 일부를 포함한 ‘실질적인 진보적 좌파’가 정치에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거나 장관 정도라도 만들고자 하는 단기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으면 한다. 아마도 이 길은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 모두에게 실망한 이들의 마음을 얻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고, 진보라는 말이 누더기처럼 보이지 않을 때 좀 더 활짝 열릴 것이다.

 

핵 패권주의 확인의 장, 핵안보정상회의[시대와 철학]

핵 패권주의 확인의 장, 핵안보정상회의[시대와 철학]

강지은(ⓔ시대와철학 편집주간)

 

 

7~8만명이 8월 6일 사망, 그 해 말까지 9~14만명 서서히 사망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이후 히로시마의 이야기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집계 : 직접 피폭 사망자 56명, 최고 4000명 암으로 사망 예상
그린피스 집계 : 20만 명 사망 추정, 9만3000명 암으로 사망 예상
핵전쟁 방지를 위한 의사회 집계 : 54만 명 불구자, 최소 5만 명 사망 예상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3분 이후 체르노빌의 이야기이다. 히로시마 원폭 500배 규모의 방사능이 유출된 그곳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아직 집계조차 되지 않는 피해가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
2011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지금 대한민국은 53개국의 정상이 참여하는 핵안보정상회의(26, 27일)로 들썩이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명박 정부가 들썩이고 있고, 차량2부제 시행으로 서울시민들이 들썩이고 있다. 핵안보정상회의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09년 4월 미국의 핵정책에 관한 프라하 특별연설에서 궁극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지향해 나가되, 우선적으로 향후 4년 내 전 세계의 취약 핵물질을 안전하게 보호(secure)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적 노력을 추진할 계획임을 천명한 데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2010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회의가 궁극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하여 세계정상들이 모이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회의의 의제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회의의 주요 의제들은 핵물질 통제 강화 및 최소화, 시설보안 강화, IAEA와 유엔1540위원회 등 국제 핵안보 체제간의 협력·조정 강화, 불법거래와 밀수 방지 및 국경통제 강화, 핵안보와 원자력 안전간 시너지, 방사성 테러방지를 위한 방사성 물질 안보 등이다. 여기 제시된 어느 의제에서도 핵무기 보유국의 구체적인 핵무기 감축 계획은 들어있지 않다.

대신 언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과 200여차례(24~29일)의 양자 회담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데에 열을

▲ 이명박 대통령이 27일 폐막된 핵안보정상회의에서 각 국 정상들과 함께 하고 있다. ⓒ뉴시스

올리고 있다. 특히 언론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오바마 미국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등 6자회담 당사국 정상들이 북한의 최근 장거리 로켓 발사 의지에 관하여 논의할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이번 핵안보정상회의는 세계의 패권을 쥔 나라들이 동북아의 긴장에 긴밀하게 연관되고자 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야야 한다. 더군다나 언론은 핵안보정상회의의 정식 의제는 아니지만 ‘북한의 로켓 발사 계획’과 관련하여 북핵문제가 거론될 것임을 흘리고 있다. 여기에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핵안보정상회의는 핵테러, 핵전쟁 없는 평화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노골적으로 세계의 패권을 확인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핵안보정상회의 공식 의제는 ‘비국가행위자에 의한 핵물질과 방사성물질 탈취 또는 관련 시설에 대한 공격 등을 예방하고 대응하는 핵안보(nuclear security)’ 문제다. 그러나 도대체 그 비국가행위자는 어디에 있는가? 세계 53개국 정상이 모여서 의논하면 비국가행위자가 적발이 될까? 오바마는 9.11을 상기하라고 한다. 9.11은 끔찍한 기억이다. 9.11이 의문 한 점 없이 정확하게 밝혀졌다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전세계의 시민들은 실체 없는 비국가행위자를 향해 핵무기를 겨누는 정상들을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자국의 핵무기 감축과 핵발전 중지에 목소리를 모아야 하며, 핵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평화를 우리 모두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희망을 먹는 인민과 ‘탐(貪)’이라는 자본 [시대와 철학]

희망을 먹는 인민과 ‘탐(貪)’이라는 자본 [시대와 철학]

 

박종성(한철연 대외협력부장)

 

-한진중공업, 그 야누스의 얼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촉구 및 경찰 강경진압 규탄 농성 중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최종덕장맛비가 다시 시작되었고 그 빗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던 여름밤, 화면에서는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언과 오버랩 되어 피겨 여왕의 눈물 어린 얼굴이 비춘다. 환호와 기쁨의 눈물이다. 그러나 전자 신문 다른 한쪽에는 숨죽이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본의 탐욕과 싸우는 이들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절망과 분노의 눈물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건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에 머물지 않는다. 기륭전자, KTX, 이랜드,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아산공장 등의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태는 우리에게 이중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그 하나는 맑스,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마지막 구절이다. 다른 하나는 이 슬로건이 “만국의 자본이여 자유로울 지어다”로 버전업되어 들려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난 3년간 수주실적이 없어 정리해고라는 명분 쌓기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한진중공업은 결국 경영난을 이유로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였다. 올해 초 700여 명이었던 노동자는 6월 말 100여 명으로 줄었다. 나아가 한진중공업은 노조 파업 철회 직후 아시아 선사로부터 컨테이너선 4척(총 2억5000만 달러), 방위사업청으로부터 해군의 해상작전 지원 및 물자보급용 군수지원정 2척을 수주했다고 6일 밝혔다. 자본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은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이것이 수주실적이 전무하다고 말하면서 정리해고의 명분을 만들고 실행한 한진중공업의 얼굴이다. 한진중공업은 정리해고 발표 다음날 174억 원 주식 배당금을 챙겼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수빅조선소이다.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은 2008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수빅조선소 선소 건설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수요 받았다. 수빅조선소는 한중 해외 계열화사 7개중 하나이다. 허민영 박사에 따르면 수빅조선소는 한진중공업이 3년간 수주 실적이 없던 시기에 18척을 소화했고 2011-2012년에도 35척이 인도될 예정이라고 한다. 수빅조선소의 임금 수준은 국내의 10%수준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를 했다는 한진중공업의 주장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듯 수빅조선소로의 수주 집중이라면 그것은 경영전략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정리해고의 요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정리해고의 요건을 대폭 완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의 악화는 한중의 지분 1%를 가지고 있는 조회장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에게는 삶의 공포 그 자체이다.

이렇듯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 신자유주의, 즉 자본의 지구화는 인간의 생명을 벌거벗은 존재로 전락시키고 그 생명 아닌 생명의 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자본의 지구화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노동의 유연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을 위한 정리해고의 유연화이고 이는 결국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귀결되고 만다. 한진중공업이 다시 수주물량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정리해고로 부족한 노동자를 불안정 노동자로 채울 것도 불 보듯 자명할 것이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의 유장현 교육선전부장에 따르면 수주 물량을 제대로 생산하려면 3000~4000명 정도가 필요한데, 현재 영도조선소에는 정규직 비해고자 620명과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700~800명만 일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자본은 자신의 안정된 잉여가치 운동을 위해 불안정 노동자라는 생명의 불꽃을 희미하게 만든다. 타워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크레인에서 쓰는 마지막 글’에 따르면, “임금은 다른 조선소의 60-70%밖에 안 된다. 반면에 영업 이익은 타 조선소 평균의 3배이다.” 이렇듯 자본의 무한한 소유의 집착은 인간의 관계를 사물의 관계로 전화하며 임대주의적 관계로 전락시킨다.

-자본에 의한 삶의 분열, 주권의 상실

 

인간의 삶이 사물의 관계로 전락되면 될수록, 자본이 인간의 생명을 처리하는 방식은 야만의 상태를 지향할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간의 사물화에는 윤리와 인륜의 자리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관계를 사물로 전락시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통제와 처분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보다 자본의 활동을 비호하는 법원의 판결은 생명에 대한 죽음과 공포의 폭력이다. 예를 들어 해고 노동자들의 삶은 부산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구제 신청이 기각되어 노조원의 사원아파트 퇴거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받아들여지면서 삶의 희망을 급속하게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파업 참가자들의 동료에 대한 미안함에도 불구하고 그 수는 줄었다. 아이들과 가정 때문에 파업에서 이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해고자와 비해고자, 파업 참여자와 비참여자로 분열된다. 이렇듯 분열의 정책은 동료, 이웃, 아이들의 친구마저 갈라놓는다.

자본에 의해 분열된(?) 이들의 가족 또한 서로 마주치는 것에 대해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자본에 의한 분열과 그로 인한 인륜성의 상실이 자본의 탐욕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죄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적 허구가 자본의 정치이다. 자본은 언제나 자본이라는 가치만을 최선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 밖의 다른 가치는 배제하는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이다. 이는 결국 자본의 가치를 증식하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의 문화를 강요한다. 그리고 이 문화에 인간의 욕망을 빠뜨리고자 한다. 자본의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의미와 삶의 지평을 상실하고 도덕적 차원의 질적인 하락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 속에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는 희석되고 만다. 따라서 자본의 권력 획득의 증가만큼 인간은 상호간의 교류와 협동, 그리고 타자와의 공동체적 공감이라는 삶의 목표를 상실하고 정치로부터 소외되어간다.

나아가 국가의 모습은 어떠한가! 일찍이 홉스는 근대국가의 절대적 폭력성을 『리바이어던』에서 정당화했다. 그는 ‘공화(republic)’, ‘공적 부(commonwealth)’ 등으로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오늘날 정권은 ‘국가경쟁력’, ‘부자 되세요’라는 구호 속에서 21세기 한국의 ‘리바이어던’을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의 홉스적 광기를 보는 듯하다. 홉스는 보상과 처벌을 리바이어던의 수족과 관절을 움직이는 신경과 힘줄과 같은 것으로 비유했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온갖 법적이고 물리적인 처벌로 자신의 존립을 운동시켜 나간다. 홉스가 말하는 리바이어던은 절대적 주권자이기 때문에 이 주권자에 대한 어떤 항의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직 인민 복종의 의무만이 허용될 뿐이다. 집단행위 금지 규정과 성실의 의무, ‘복종’의 의무 등. 따라서 ‘주권’의 원천이었던 개인들은 오히려 그 권력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소위 ‘국민(subject)’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통제권력 안에서의 개인들일 뿐이다. 이 때 국민은 리바이어던이라는 절대적 주권자에게 복종을 전제로 안전을 보장 받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 리바이어던은 모든 국민의 복종을 요구하면서 홉스조차 인정한 최소한의 인간의 생명 보호와 안전조차 보장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현실이다.

-일상화된 죽음의 정치를 넘어 공감의 정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집단 심리에 상담을 하고 있는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에 따르면, 쌍용차 가족들의 고통은 죽음의 기운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상담결과에 따르면, 해고자 아내는 “내내 울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옷장에서 넥타이를 꺼내서 묶고 안방 쓰레기통을 뒤집어서 그 위에 올라가 (내가) 목을 매고 있더라”거나 어떤 해고자는 “술 먹고 몸에 휘발유를 부은 적이” 있다고 한다. 정혜신에 따르면 상담을 하면서 쌍용차 가족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을 유형을 8가지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에 “죽음이 가까지 있다.”, “끝없이 무기력하다”, “내가 무능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등이 있다.

‘절망’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뜻은 절망하면 죽는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절망’이라는 병이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절망이라는 병을 치유하는 방식은 ‘단독자’로 ‘하느님 앞에’ 홀로 설 수 있는 자각이다. 이를 통해 신앙에 대한 확고한 결단이 한다면 이 절망이란 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절망에 대한 실존철학자의 방식이 유일한 치유의 방식이거나 모든 것을 열수 있는 열쇠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절망의 치유는 그들의 상처에 공감하는 것이다. 라캉의 말로 하면, 아마도 타인의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일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가 말하듯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 거울은 애덤 스미스적 인간, 즉 호모 이코노믹스를 넘어선 인간의 거울일 것이다. 잠재적이건 현실적이건 간에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렇듯 자신을 넘어 타인에 대한 걱정을 만들어 낸다. 한진중공업 농성장에 남아있는 한 비해고 노동자는 파업을 이탈하는 것에 대해 “이해한다. 다만 다음엔 우리 차례라는 걸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가난한 계급으로의 전락, 그 속에서 언제든지 우리 모두가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삶의 공감(sympathy)이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형성은 이 점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의 정치가 아닌 인간의 정치, 보다 정확히 인민의 정치일 것이다.

인간을 ‘호모 이코노믹스’로만 규정하여 인간의 다양한 가치 지향성을 단일한 것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단일한 세포로 구성된 재벌에게는 자본의 가치를 추구할 뿐이다. 이들에게는 인간의 정치는 부재하다. 어찌 그들에게 유적이고 공동의 인간을 사유하며 반성하는 것을 기대하겠는가. 맑스가 말하듯이 자본가가 악인 이유는 그들이 자본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천적 인간배제 재벌 사회에는 희망이라는 단어는 흔적조차 없다. 코나투스(conatus)는 인간이 생명을 보존하고 지속하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인간의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 이를 위해 김진숙 지도위원은 자신을 외롭고 단절된 공간인 85호 크레인에 자기를 구속하였다. 이는 샤르트르가 말하듯 자신 스스로 선택한 쪽으로 자기를 구속하는 것, 곧 자유이다. 자기를 구속한다는 것은 바로 책임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은 다시금 그들의 삶에 대해 보다 더 공감하지 못했던 나 자신의 반성의 시간기도 하다.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삶이었다는…

-여전히 모순은 노동과 자본이다

 

몇 달 전 감자를 먹기 위해 도려낸 감자 조각을 베란다에 심었더니 얼마 뒤 감자 싹이 나오고, 꽃이 피었다. 혹시나 하여 살며시 흙을 뒤집었더니 콩알보다 조금 큰 감자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이렇듯 조각난 감자에서 작은 또 다른 감자로 생성되는 것처럼, 자본에 의해 도려낸 해고 노동자들, 정치적 · 생산적 활동에서 배제된 이들은 자기 창조(autopoiesis)적인 ‘가능성의 존재’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능성의 존재는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고자 하는 힘인 에로스와 이익이 없어도 희생하는 아가페의 결합일 것이다.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죄의식을 만들어내는 자본의 책략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사회적 부의 축적을 가로막는 죄인으로 만든다. 이렇듯 노동자를 고대 유태에서 속죄일에 많은 사람의 죄를 씌워서 황야로 내쫒던 ‘속죄양’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작동방식이다. 이는 노동과 자본의 내부적 적대의 관계를 노동자 내부로 해소하는 방식이다. 지젝이 말하는 누빔점이란 바로 이것일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자본이라는 적대적 모순의 관계를 노동자 내부로 해소하고자 하는 책략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는 자본의 탐욕에 대해 투쟁하는 이들, 즉 타자라는 존재의 긍정이다. 그런데 자본과 노동은 각각 모순의 유지와 폐지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자본과 임금노동은 서로 상대방을 전제하고 부정한다. 이렇듯 양 극단을 서로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부정하는 것만이 ‘모순’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 극단의 존재에 부분적인 조건이 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정규직 노동자라는 존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정규직 노동자 자체가 없다면 ‘정규직 노동자’라는 존재는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의 관계가 갈등의 관계에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순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해고 노동자와 비해고 노동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순의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은 나와는 다른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생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문제는 타자의 자리에 화폐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때 화폐의 기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타자들의 계열이라는 가상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직 현실적으로 가능한 타자와의 만남은 화폐를 욕망하는 것이다. 화폐에 대한 욕망은 구체적인 타자와의 만남이 아니다. 단지 화폐와의 만남, 화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그 화폐가 변환되어 욕망 가능한 것을 욕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신체는 화폐를 욕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체는 구체적인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환가치를 먹고 배부르지는 않다.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화폐라는 공허한 타자와의 만남만이 존재한다. 생성은 물질과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것은 더 이상 공허한 타자와의 만남을 중지하고 살과 피로 이루어진 실질적인 만남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화폐라는 공허한 타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종식은 비단 인식의 단절 혹은 전환을 통하여 그 근원적 비판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본주의라는 구조 속에서 알면서 어쩔 수 없이 사물화 된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의 전복은 화폐가 아닌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 자본이라는 일자의 원리를 파괴하는 다수의 현실적 부정의 힘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간의 실존은 다른 실존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실존을 만들어 낸다. 불안정 노동자라는 양태는 자본과 국가라는 다른 양태와의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네 역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의 교훈처럼 역사는 정치의 열쇠인 것이다. 여전히 모순은 노동과 자본이다.

-탐(貪)

 

공자의 가르침 중에 ‘탐’(貪) 이라는 상상속의 동물이 있다. 머리는 용, 뒷부분은 원숭이 꼬리, 전신은 긴 털로 덮여 있는 기린의 가죽, 발굽은 소의 형상인 괴상한 동물이다. 흙, 광물, 산, 바다 할 것 없이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탐’은 이 시대의 자본과 권력의 형상과 너무나 닮았다. 4대강을 난도질하여 먹어치우고 그것도 모자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명, “밤에 잠 좀 자자”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희망을 먹어치우고 그 아가리로 희망의 연대에 물대포와 최루액을 토해낸다. 어디 그뿐인가 교사와 공무원 1900여명에 대한 수사를 진행 중인 검찰은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을 먹어치운다. 권리 표현과 결사의 자유 그리고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를 집어 삼킨다. 그러나 여전히 ‘비정규직 없는 공장만들기 희망버스’ 저 멀리 필리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희망버스, 1, 2차 희망의 버스가 존재했고 3차 존재할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창조물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탐’, 이는 마치 산노동의 착취를 통해 만족할 줄 모르는 잉여가치 창출의 욕망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과 같다. 마치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처럼 운동하는 자본이라는 욕망이 이와 같지 않은가! 맑스는 자본을 영원한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즉 그는 자본 또한 “불멸의 죽음”(mors immortalis)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맑스의 변증법의 핵심적 기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의 형상을 닮은 인격은 인간의 죽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잉여가치의 파티를 욕망한다. 이러한 욕망의 흐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자기보존’(conatus)을 최우선의 가치로 실현해야만 ‘국가’는 그 존재 자체가 무기력해 보일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자본의 욕망 흐름과 이 흐름을 위해 노동력을 한편으로는 포획하고 재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방치하고 배제하는 국가를 긍정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은 부정의 힘이다. 이 부정의 힘은 희망을 먹고 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밥이고 생명이다. 공자가 말하는 탐, 그 추악하고 탐욕적인 ‘탐’은 결국에는 태양까지 먹어버린 후에 어둠을 남기고 자기 자신 까지 먹어 치워, 결국 무(無)가 된다고 한다. 결국 공자는 탐이라는 동물을 통해 이 천박한 자본의 시대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자본이여, 인민의 희망을 탐하지 마시오, 인민이여, 희망이란 욕망을 탐하시오”

 

마지막으로 김진숙 위원의 글에서 다음의 구절이 가슴에 맺힌다. “84호를 움직이면 85호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특공대가 투입된다면 여기서 혼자 163일을 매달려 있던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건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제발 그의 말처럼 “선택의 문제”가 아니길 바란다.

오늘 따라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의 가사가 가슴 속을 떠나질 않는다.

“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 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의 화사한 첫차를 기다리며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걷혀 개는 새벽 길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오키나와(沖繩) 평화여행[시대와 철학]

오키나와(沖繩) 평화여행[시대와 철학]

김재현(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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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월 중순 내가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인 ‘마산 YMCA 시민사업위원회’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3박4일의 짧은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왔다. 평화답사 여행이라는 테마로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실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일본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2004년 8월에 오키나나와의 국제(國際)대학 교내에 미군 헬리콥터가 추락한 사건이 일어나고 마을 안에 기지가 있어 위험하니 기지를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한참일 즈음에, 한중일 국제세미나가 있어 오키나와에 갔던 적이 있었다. 이 때 세미나에서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었고 당시 참가한 일행들과 함께 기지 이전 계획 장소인 오키나와의 헤노코(?野古)에 가서 잠시 미군기지 이전 반대농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의 여행은 오키나와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첫날 오후 나하(那覇)에 도착하여 수리성을 관람하면서 류큐왕국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았고 이튿날 오전에는 츄라미 수족관을 구경한 후 오후에는 사키마(佐喜眞) 미술관 방문이 있었다. 사키마 미술관은 오키나와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그림을 통해 전달하는 역사와 평화교육의 현장이다. 서경식 교수는 “역사와 평화를 성찰하는 이런 연수여행에도 반드시 예술감상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오키나와에 갈 기회가 있다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사키마 미술관을 찾아가 마루키(丸木)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戰圖)>를 관람하기”(2010. 10월 29일 한겨레신문)를 권한다.사키마 미술관에서 루오의 여러 그림들을 보았고, 마루키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1984)를 미술관 직원의 전문적인 해설을 들으면서 관람했다. 이 작품은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에 따른 일본 주민의 집단자결(자살) 사건을 묘사한 기록화인데, 여러 곳에서 일어난 전쟁의 비극과 집단자결의 과정에서 처참하게 죽이고 또 죽어가는 인물들의 모습, 눈을 부릅뜬 사체들의 모습이 처절하고 참혹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루키 부부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오키나와전쟁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생존자들과 같이 통한(痛恨)의 현장에서 증언을 들었으므로 “저 그림은 오키나와전을 체험한 오키나와 사람들과 우리의 공동제작”이라고 말한다. 미술관 직원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후세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들이 맡아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설명해 주었는데 ‘불의에 순응하지 않는 미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미술관 옥상에서 후텐마 기지를 직접 보고, 미술관의 배려로 수장고에 있던 케테 콜비츠(독일, 1867-1945)의 판화도 볼 수 있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의 일본 기지를 폭격하는 미국 전투기. ⓒwikipedia.org

2. 이어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0),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의 저자이자 환경운동, 평화운동가로 알려진 더글라스 러미스의 강의가 같은 장소에서 있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강의하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최근일본지도]라는 책에 있는 한 장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

‘이것은 소화3년(1928년)의 지도인데 류쿠(琉球, 오키나와), 대만, 조선은 이미 일본제국의 영토이고, 만주도 앞으로 일본 영토화하려는 의도가 나타나 있는 지도이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 정복은 대만, 조선, 만주에서는 결국 실패하고 오키나와에서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계속해서 오키나와는 일본에 의해 지배된 식민지라는 사실과 일본국가의 동등한 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혼재하면서, 오늘날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다.

오키나와인이 본토인과 다른 중요한 점은 본토에서는 ‘아사히(朝日)’, ‘마이니치(每日)’, ‘요미우리(讀賣)’신문 중 최소한 하나를 보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본토의 중앙지를 읽지 않고 ‘오키나와 타임즈’나 ‘류큐소보’를 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키나와인들이 일본 본토의 사람들(야마토인, 大和人)과는 분명히 다름을 보여준다.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틀을 잡아가던 일본은 1879년에 류큐왕국의 국왕과 왕세자를 도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키는 소위 ‘류큐처분’을 단행한다. 이는 근대국가 일본의 최초의 식민지화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기점으로 일본제국의 확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류큐사람들은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곳에 군대기지는 만들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왜냐하면 군대기지가 있으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 본토의 매스컴에서는 중국, 북한의 미사일 때문에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 영토의 0.6%에 지나지 않는데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군사력 집중은 군사전략 상으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미군기지가 전 세계적으로 700여 군데 있지만 이렇게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오키나와가 유일하다고 한다. 미군기지는 곧 미합중국의 일부이며 미제국주의의 기지이기도 하다. 이 미군기지에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노숙자(Homeless)가 없고 노인들이 없으며, 생산노동이 없다. 군대는 전쟁을 위해 존재하므로 어떤 바람직한 것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특별한 점은 미군 안에서의 오키나와인에 대한 인식 특히 미 해병대의 1/3이 오키나와에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또 이들의 언어 속에 있는 오키나와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병은 오키나와를 점령하였으므로 이들은 오키나와를 전리품으로 생각하여 오키나와 지배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1972년에 오키나와의 본토 반환이 이루어졌지만 미군기지는 그대로 있었으므로 미군기지에 있는 해병의 입장에서 보면 오키나와에서 나가고 싶지도 않고 바뀐 것도 없다.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도 평화헌법 9조를 지키면서도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하여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이 일본 본토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 생각은 모순적이지만 일본 국민은 이 모순을 별로 자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처럼 미군기지의 폐해와 이로 인한 전쟁의 위협을 늘 느끼며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전 총리였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는 후텐마(普天間)기지를 현외(오키나와현 바깥)로 옮긴다는 선거 공약을 하여 당선되었지만 미국과의 협상에서 결국 이를 실현시키지 못해 총리를 사임하게 된다. 일본에서 주민운동이 총리를 그만 두게 한 것은 두 번이었는데, 첫 번째는 1960년 미일안보조약 때 기시노부스케(岸信介)의 사임이고 두 번째는 2010년 하토야마의 사임이다. 두 번 다 오키나와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하토야마 총리가 그만 둘 당시 ‘일미안보조약이 동아시아 안전에 공헌하는가?’라는 여론조사에서 본토에서는60% 이상이 그렇다고 답한데 반해 오키나와 사람들은 7% 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한 지난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후텐마기지의 헤노코 이전에 반대하는 지사 후보들이 합쳐서 97%의 지지를 받았다. 일본 정부와 도쿄에서는 헤노코에로의 이전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고 중앙 일간지나 뉴스에서도 그렇게 보도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현장인 헤노코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반대투쟁을 2000일 이상 계속하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일본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차별’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쓰고 있다.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는 일본 국내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이자 오키나와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오키나와 주민들을 위해서 미군기지는 철수되어야 한다.’

3. 셋째 날, 우리는 카데나(嘉手納) 기지를 방문하여 그 규모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3층 학습실에 전시되어있는 내용들을 통해서 이 미군기지가 갖는 일본 본토에서의 위상과 오키나와에서의 위상이 매우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오키나와 요미탄(讀谷)촌에 있는 ‘치비치리’라는 동굴을 방문했다. 산호섬인 오키나와에는 수많은 자연동굴(일본말로 ‘가마’라고 한다)이 있는데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가마는 전쟁 때 주민들이 피난하였다가 ‘영미귀축(英美鬼畜)’으로 불리던 미군에게 굴욕적으로 살해당하기 전에 충성스러운 황민으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가족, 이웃, 전우끼리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한 집단자결의 장소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집단자결이 이루어졌던 이 현장에서 지역가이드연구회의 멤버인 히가료우코(比嘉?子)씨의 실감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에 대해서 온 몸으로 느끼며 전율하는 체험을 했다. 특히 마지막에 “평화라는 것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에게도 한국에 돌아가 이러한 평화운동에 앞서달라는 부탁을 진지하게 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1945년 3월 26일에 미군이 오키나와 본도(本島) 남서쪽에 있는 게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할 때 자마미(佐間味) 섬에서 ‘집단자결’이 발생했고 곧 이어 4월 1일에는 미군이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촌, 차탄(北谷) 촌을 점령한다. 이 때 요미탄 촌 치비치리 가마에서 집단자결이 일어나 140여명 중 82명이 죽었는데 그 가운데 47명이 12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들은 주민들을 지키지 않았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황민화교육을 통해 미군에게 처참한 꼴을 당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젊은이가 노인을 낫이나 면도칼로 죽이고, 또 수류탄으로 함께 죽는 아비규환이 벌어진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집단자살을 하였지만 사실은 이것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학살이라는 측면이 있다. 동굴견학을 한 후 우리는 오키나와 남단에 있는 히메유리 탑과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들렀다. 평화기념공원 전시관 앞에는 오키나와에서 죽은 식민지 조선의 군인, 종군위안부, 노역자를 포함한 약 만 명의 한국인 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다같이 어둡고 슬픈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일본인 약 19만명, 미국 군인 1만 2천여명, 조선인 약 1만명이 죽었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 본토에서 온 6만5천명의 군인들, 오키나와 출신의 군인 약 3만 명과 민간인 약 9만 5천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인구는 50만이 안 되었다고 한다.

4. 오키나와(현청지는 나하)의 위치는 동아시아의 군사거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필리핀의 마닐라, 대만의 타이페이, 대한민국의 서울과 일본의 도쿄를 연결하면 삼각형이 생기는데 오키나와는 그 밑변의 중점에 해당한다. 이것은 곧 오키나와가 세 개의 삼각형(도쿄-서울 -오키나와, 오키나와-서울- 타이페이, 오키나와 – 타이페이-마닐라)을 결합하거나 분단하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도미노이론에서는 오키나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공산주의 침투를 막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후부터 미군의 점령 하에 있었던 오키나와는 ‘기지의 섬’으로서 대일 감시기지, 미·소가 대립하는 냉전 중에는 ‘태평양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고 일본에 복귀된 현재에도 변함없이 미일안보의 거점 역할을 한다. 오키나와는 특히 미국의 세계전략, 특히 동아시아 전략을 반영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므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질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키나와에서는 동시에 이러한 국제정치적 군사적 지배, 일본 국가의 전략적 지배에 의한 ‘구조적 차별’에 저항하는 다양한 운동이 계속되어 왔다. 군대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여성의 인권, 환경보호, 동아시아의 역사경험, 선주민(先住民)의 권리 같은 우회로를 통해 이 운동은 국경을 넘어 넓어지고 있다. 오키나와와 한국의 관계에서는 미군기지를 둘러싼 경험이 접점이 되어 최근에 비판적 지식인 사이에 서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류도 확대되고 있다.

5. 2009년 8월 총선에서 집권한 일본 민주당의 ‘동아시아 공동체구상’이 최근에는 일본 외교정책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면서 ‘미-일 동맹’의 심화를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작년 6월에 취임한 칸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취임 직후 국회연설에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이웃 국가와 다양한 분야에서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장래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지만 2011년 1월 20일 도쿄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정권이 바뀌었어도 미-일 동맹은 유지 ·강화되어야 할 일본 외교의 기축”이라며 이의 ‘재발견’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 경제, 인재 교류를 심화시켜 올 봄 방미 때 오바마 대통령과 21세기 미-일 동맹의 비전을 내보이겠다”고 말했다.

칸 총리의 외교정책 기조 변화는 우선 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다 낙마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 해 9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우다오)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양순시선의 충돌사건 이후 일본에서 커진 ‘중국위협론’도 칸 총리의 미국 중시 노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탈아입구(脫亞入歐)’가 아닌 ‘친미입아(親美入亞)’를 내세웠던 하토야마 전 총리 중심의 민주당 외교노선에서 크게 이탈하는 칸 총리의 일방적 외교정책 노선은 당내 갈등의 또 다른 불씨가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명박정부의 대북한정책과 일방적 대일, 대미 외교노선으로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상은 더욱 멀어져 가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반전, 평화운동을 생각할 때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러미스씨는 칸 총리도 오키나와 문제로 낙마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견한다. 과연 그럴까? 중국의 부상을 고려함과 동시에 미-일 사이에서의 오키나와 문제를 주목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질서를 이해하고, 이와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평화, 우호, 연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의 사진자료로는 사키마 미술관의 <오키나와 전도>, 치비치리 동굴, 후텐마 미군기지 활주로 등 여러 사진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여행을 같이 갔다온 마산YMCA의 이윤기 부장의 블로그와 허은미선생의 블로그를 찾으시면 이번 여행과 관련된 글과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속한 이야기가 싫다![시대와 철학]

내가 속한 이야기가 싫다![시대와 철학]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잘못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자기정당화(self-justification)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기정당화 과정에서 나와 남, 나의 편과 남의 편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이야기에서 누군가를 배제하게 된다. 이 자기정당화와 배제를 통해서 우리는 삶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삶의 의미를 붙들고 다시 자기를 정당화하고 편을 갈라 남을 배제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속한 이런 이야기가 싫다.

잃어버린 10년!”도덕적 개인주의자는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떠맡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이 있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동의, 말하자면 나의 선택이나 약속의 결과이다. 따라서 나의 책임은 내가 떠맡은 일, 내가 선택하고 동의한 일에 한정된다. 이런 생각의 논리적 귀결은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나는 김대중, 노무현을 찍지 않았다. 나는 그 정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정부는 나와 무관하고, 그래서 그 정부가 집권한 기간은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다.”집권당인 한나라당 대표는 문자 그대로 집권당의 대표답다. 그는 “좌파정권 10년 동안에 나라의 여러 가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온갖 대못을 박고 또 망쳐놓았다. 이명박 정권 2주년은 좌파정권 10년 동안의 비정상적인 국정을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한 2년”이라고 자평했다. 여기서 나는 어느 편에 있는가?

# 장면 1 : 2008년 4월22일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이에 따른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2년 반 전에 차명계좌 불법자금과 삼성그룹 불법적 지배권 승계 특검 문제로 사퇴했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2010년 3월24일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말과 함께 삼성 회장직에 복귀했다. 사실 여기서 ‘복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복귀(復歸)는 본래 자리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데, 이건희 회장의 복귀가 본래 자기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건 그가 잠시 사라졌던 2년 반 동안에도 그 자리는 그의 것이었고 언제나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건희 회장은 “내가 스스로 떠났으니, 돌아오는 것도 내가 결정한다.”는 도덕적 개인주의를 정당화의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다. 더 인간적으로 보자면, “진심으로 사과했고,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도덕적 개인주의자 이건희 회장의 재취임, 왕의 귀환에 일제히 복귀환영이라는 깃발을 내거는 주류는 자연스레 다른 편을 만들어내었다. 그저 잠시 걱정을 끼쳐드렸던 국민 여러분이라는 다른 편을. 그는 이전처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기 자리에 다시 앉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는 그가 갈라낸 저편으로 분리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는 그의 짧은 재취임의 말과 함께.

# 장면 2 : 2010년 12월1일
기자 : “재벌그룹 총수신데 유독 자주 수사기관 조사를 받으신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승연 : “내가 팔자가 센 거 아닙니까?”

부당거래를 통한 비자금 조성, 부실계열사 지원, 차명계좌 운용, 주식 차명보유, 조세포탈 혐의를 받고 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검찰 조사에 앞서 기자와 주고받은 말이다. 한 인간의 삶의 흐름이 자신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라 생년월일시의 팔자(八字)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김승연 회장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의 말은 마치 봉건적 군왕이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를 두고서 ‘과인의 부덕의 소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 역시 이건희 회장과 다르지 않은 도덕적 개인주의자이다.

“내가 자주 수사를 받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선택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수사를 받게 된 것은 팔자 때문이다.”김승연 회장은 이른바 인지부조화가 싫다. 왜냐하면 자기 판단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김승연은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나를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건 부당하고 옳지 않다. 그렇다면 이건 팔자야!”이제 고통은 사라지고 고난 받는 순결한 인간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 한 편에 운명처럼 달라붙어 그를 괴롭히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도 그냥 이렇게 저편으로 분리되고 만다.

# 장면 3 : 2010년 12월2일
“이천만원 주셨으면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아니 그것보다도요, 저 때문에 이렇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사회적으로 시끄럽게 돼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 질문한 기자는 논점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는 기자를 폭력행위 처벌법(집단, 흉기 등 상해)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으러 온 최철원 M&M 전 대표가 가르친다. 그는 “어이, 기자 양반. 문제는 때린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시끄럽게 됐다는 것이지.”라고 진심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철원 전 대표 주변에서는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이전에도 있었던 일인데, 왜 하필 지금 문제가 될까? 그는 이런 부조리, 부조화를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이게 사회적으로 시끄러워졌기 때문이야. 이건 나의 폭력적이고 반인간적인 성향이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아니야.”

물론 우리도 이 같은 아주 긍정적인 자기 개념을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일관적이지도 뻔뻔하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최철원 전 대표는 계속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하고 도덕적이며 인간적이다. 이런 나를 흔들어 놓는 무엇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더 나아가 인간적으로 흔들려서 몹쓸 짓을 했다면, 그건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사업을 방해했다. 나는 잘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차마 사람을 그냥 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을 주기로 했다. 한 대 맞아주고 돈을 버는 아르바이트도 있지 않은가? 그것도 큰돈을 주었다. 나는 자존감을 지켰고, 그는 돈을 벌었다.”이런 그의 상상 속에서 우리는 또 어느 편으로 나눠지는가?

# 장면 4 : 까마득한 옛날이자 가까운 어제
예수께서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勿施於人).”

예수가 긍정의 형식으로, 공자가 부정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이 내용은 모두 나와 남을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M. J. Sandel)이라면 아마도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호혜(互惠 reciprocity)나 공동선(共同善 common good)이라는 말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는 개인적 자유의 원심력이 사회적 공동체의 구심력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러한 공동선이 갖는 가치를 서로 다른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법한 가상적 이야기로 비아냥거린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말하자면 “연쇄살인자와 마주친 극단적인 상황에서 당신은 그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허락하겠는가?”그런데 이런 물음은 예수나 공자가 말하는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므로 논증은커녕 서툰 주장에도 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나 공자 그리고 샌델의 말은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비롯되는 사건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삶의 원칙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의 선택을 통해서 내가 되기로 한 개인적 존재다. 하지만 그 개인은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 구속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수동적 조건과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자 하는 능동적 나 사이의 관계 형성, 정체성의 확인이다. 나의 자부심과 수치심은 이런 관계 속에서 자라고 드러나는 사회적 속성이다.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소속된 나와, 내 인생을 나의 선택으로 꾸려나가고자 하는 나. 사회구성원이라는 구속된 나와, 내 삶을 나의 가치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나라는 현실조건이 만들어내는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바로 우리의 실존적 딜레마이다. 이런 딜레마를 예수나 공자, 샌델은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 MacIntyre)는 이런 실존적 딜레마에 ‘이야기하는 자아(narrative self)’를 가지고서 설득력 있게 접근한다. 그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고 말한다.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누군가는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할아버지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누군가는 부모마저 싹둑 잘라내고 시작한다. 어떤 부모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식 하나를 빼고서 자신을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잘려나가거나 빠져나가는 사람의 아픔은 자기정당화의 그늘에 가려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이전 세대, 이전 사회의 다양한 빚과 의무를 물려받는다. 운 좋은 몇몇 사람일지라도 유산과 기대만을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2010년 한국 사회라는 내가 속한 이야기가 더불어 사는 사회구성원이라는 큰 이름과 함께 나의 이야기 속에 당연히 자리 잡아야 한다. 그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같이 겪으면서 시대의 지혜를 함께 배워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 어머니의 이름은 자식이 자랑스럽게 입에 올리든 부끄럽게 올리든 간에 자식의 이야기에 등장해야 한다. 자식의 이야기에서 빠져나가는 부모의 이름은 사실 나의 이름을 부정하여 나만의 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면 1, 2, 3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는 한국 사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그리고 우리가 장면 4에서 느끼는 자부심과 공감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치심과 분노, 자부심과 공감은 가족과 시민처럼 ‘묶여 있는’존재가 느끼는 집단적 책임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선택과는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어떤 집단에 한데 묶여 있으며, 또 우리는 수치심과 자부심을 가진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거대한 서사(敍事)에 연관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 삶의 이야기는 나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굳건해지는 공동체의 이야기에서 분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만 책임을 지는 자유로운 존재를 넘어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존재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존재이고, 우리 정체성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장면들은 이런 이야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큰 이야기와 분리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는 다양해지고 개인의 원심력은 커졌지만, 그 다양성과 원심력은 편을 가르면서 다른 편을 겨냥하는 칼끝에 모아지고 있을 뿐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남의 삶의 이야기와 맞물려 있다. 우리는 과거의 빚과 유산과 기대와 의무를 안고 태어나고, 그걸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하는 자아’이다. 그 이야기에는 당연히 남의 이야기를 위한 몫과 자리가 있고, 그 몫과 자리는 내가 남의 이야기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고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도덕적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의 잘못과 분리하고, 또 나를 현재의 잘못과 분리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내가 얽혀 있는 과거와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자 미래의 관계까지 내 입맛에 맞게 미리 짜놓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재취임에는 그의 이야기, 삼성의 위기 이야기는 있지만, 다른 한 편에 서 있는 남, 즉 국민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김승연 회장의 팔자(八字) 이야기에는 그의 모든 잘못이 빠져 있고, 그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무시되고 있다. 최철원 전 대표의 변명에는 피해 당사자의 이야기며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 누군가를 넣고 빼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이 정당하다면,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빠지게 되더라도, 솔직히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들을 빼버리더라도, 그건 우리의 선택일 뿐이다. 물론 예수와 공자, 샌델은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이 아니다.

마이클 샌델(M. J. Sandel)은 삶에서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걱정하는 중요한 이유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공감과 연대의식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평등이 깊어질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삶은 점점 더 분리된다. 불공정한 사회일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가 따로 놀게 된다. 서로의 이야기에서 서로가 사라지고, 그 사라진 자리가 증오와 분노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날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날이겠지만, 아마도 그리 행복한 날은 아닐 것이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까마득한 이야기까지 나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십년 동안 있었던 일을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자기정당화의 이야기는 없어져야 한다. 식민지 지배나 억압의 당사자가 아니고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닐지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의 아픈 기억을 나의 이야기에 담아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에는 해방의 기쁨, 분단의 아픔, 새마을 운동, 폭압정권, 경제성장, 민주화운동, “잃어버린 10년”에도 나눠주는 몫과 자리가 있어야 한다.

부자가 된 가난했던 사람의 이야기며, 가난해진 부자의 이야기와 가난하게 태어나 더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우리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정당화를 향하는 도덕적 개인주의자의 뻔뻔한 변명과 배제의 이야기를, 남의 불편하고 비참하고 서러운 이야기를 기꺼이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풀어내고자 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로 넘어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빠져도 그만인 ‘나머지’가 아니라, 누구나 “기업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무엇이 도덕적 잘못인지, 사람은 어떻게 존중받아야 하는지” 잘 아는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시대와 철학]

정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시대와 철학]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유행이 되어 버린 정의(justice)

 

세상에는 지겨운 것들이 많다. 지겹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거나 버리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듣고, 듣고 또 들으면 나중에는 지겨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생각하면 지겹게 느껴지지만, 실상은 좋은 것이면서 실현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민주화, 자유, 평등, 평화, 인권, 통일, 정의 등등.

요즘 전국을 강타하면서 다시 회자되는 지겨운 것 중의 하나가 ‘정의’(justice)이다. 그렇게나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 정의인데, 왜 지겹게 느껴지는가? 지겨운 것이 다시 전국을 강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의가 전국을 강타하게 된 계기는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번역 출판 때문이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이 휴가를 갈 때 이 책을 들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더 결정적 이유가 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그렇게나 정의를 부르짖고, 그렇게나 정의를 위해 헌신하면서 무수히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정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나마 이루어 놓은 사회 정의마저 후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정의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재발하고 있다. 마치 부동산 투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투기를 조장하는 것처럼, 때로는 부정의가 정의로 둔갑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정의가 지겹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휴가 때 샌델의 책을 들고 간 행동에 걸맞게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국정 지표를 ‘공정한 사회’로 결정했다고 한다. 국민이 정색을 하면서 반겨야 할 결정인데, 왜 이리도 지겹게 느껴진단 말인가?

부정의한 대통령이, 부정의를 은폐하는 대통령이 오히려 정의를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BBK사건에서부터 병역 문제까지 해명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사정의 칼을 뽑은 셈이다.

4대강 사업 때문에 농토를 갈아엎어 생긴 배추파동을 해결한답시고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먹으라고 하니, 그가 어떻게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자신이 마치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고 말한 마리 앙트와네트라고 착각하는가 보다.

정의의 의미가 묘연하다

 

부정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논리는 일찍이 소피스트 시절에도 있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라는 주제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전개하고 이를 통해 정의관과 가치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한 자의 이익’, ‘강한 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부정의(불의)는 ‘약한 자의 이익’, ‘약한 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범하는 모순을 찾아내고 유도해 간다.

어처구니없는 소피스트 정의관이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뒤늦게나마 정의를 세우겠다고 마음먹었다니, 박수치면서 환영할 일이기도 한데, 왜 박수는 치지 않고 지겨움만 얘기하는가? 그의 발언 자체가 순수하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를 내세우는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순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정의관의 내용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강하고 가진 자가 약하고 못가진 자를 괴롭히고 그들의 것을 빼앗는 것을 막는 데 활용된다. 정치 권력이든, 경제력이든, 문화 권력이든,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부당하게 다룰 때 작동시켜야 하는 올바름이 정의이다.

그에 비해 한나라당 김희정 대변인은 공정한 사회의 구체적 내용을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회’,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 ‘사회적 책임을 지는 사회’로 규정한다. 이 속에서 모아지는 핵심 쟁점은 무엇인가?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용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끊임없이 강조해온 무한 경쟁의 논리가 함축되어 있다. 어떻게든 열심히 해서 성공하라고 한다. 성공하려면 창의적이어야 하고, 창의적이라는 것은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정의롭게 사는 것은 경쟁력이 있어서 성공하고 그로 인해 부를 거머쥐는 것으로 변질된다.

정의의 꽃은 사전, 사후 분배 정의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의와 관련하여 논쟁점이 되었던 것은 성공이나 무한 경쟁보다는 ‘분배 정의’였다. 그러나 분배는 경제 활동 이후에 행하는 ‘재분배’처럼 ‘사후 분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재분배만을 분배 정의로 오해하는 것도 오랜 관행이다.

이와 달리 활동 이전에 주어지는 ‘기회의 분배’도 분배 정의에 해당된다. 사전 분배나 사후 분배 모두 분배의 공정성을 내포한다. 그런데 사후 분배만을 분배 정의로 강조하다 보니, 가진 자의 것을 뺏어서 없는 자에게 나눠준다는 식의 재분배만 부각되고, 그래서 마치 재분배는 경쟁력이 없는 자가 경쟁력을 기르기보다는 경쟁력이 있는 자의 정당한 대가를 부당하게 취득하는 폭력이라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자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하려면 사전 분배에서부터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기회를 가로챌 때도, 가진 자가 없는 자의 결과물을 빼앗아 갈 때도 모두 사전 분배의 불공정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사전 분배가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고 용이 된다는 말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개천이라면 그 뒤로 이어지는 공정성은 이미 불공정에 물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우리는 재벌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이제 사전 분배의 불공정은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에 부장검사가 청탁 대가로 고급승용차를 받았지만 법조계에서는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경제뿐만 아니라 법조계에도 분배 부정의가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외교부 고위 공직자 자녀들을 특채한 사례들 때문에 전국이 들썩이고 있다. 사후 분배를 논하기 이전에 사전 분배에서부터 불공정이 작용하고 있다.

분배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데, 출발부터 정의롭지 못한 개천이라면, 그런 개천에서는 아무리 뒹굴어도 높은 경쟁력을 가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한 경쟁을 한들, 창의력을 아무리 발휘한들, 출발점에서 지니는 낮은 신분 – 재벌이 아니라는, 법조계 인사가 아니라는, 고위 공직자가 아니라는 태초의 원죄 – 이 작동하여 나머지 과정에도 불공정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권리 분배도, 의무 분배도, 기회 분배도, 소득 분배도, 재산 분배도, 공직 분배도, 명예 분배도, 권력 분배도 모두 문제를 야기한다.

기회의 분배 정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무슨 무한 경쟁을, 무슨 경쟁력을, 무슨 성공 시대를 요구하고, 무슨 재분배 부당성을 지적하는가? 이 속에서 낮은 신분이 성공하고 싶다면 누구처럼 ‘강한 자’에게 들러붙어서 강한 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식을 취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 앞에서 무슨 공정 사회가 가능하겠는가?

공생을 망각하는 정의관은 버려라

 

정의는 본래 혼자 실현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혼자서만 잘 살겠다고 난리를 펴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가 언급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타인과 관계하는 공동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타인과 부딪치고 소통하면서 나아간다.

개천에서 배출되는 용은 혼자서 용이 되지 않는다. 타인과, 공동체 구성원과 상호 작용하면서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을 때 가능하다. 자기 혼자 잘나서가 아니라 공존, 공생 구조를 잘 실현해서 용이 되며, 정의 또한 공존, 공생의 정신을 지닐 때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 사전 분배이든 사후 분배이든 공존 가능성을 배면에 쥐고 있는 것이 정의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무한 경쟁의 개천에서 성공한 자만을 공정성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결국 경쟁을 통해 성공하라는 것이고, 성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부를 누리라는 것이다. 분명 여기에는 물질만능주의가 깔려 있고, 물질 만능을 실현하기 위해 실용주의를 견지하라는 강요가 숨어 있다.

현 정부는 약한 자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출발부터 약한 자의 이익과 기회를 가로채는 부정의, ‘분배 부정의’가 만연한 사회를 지향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왜 기회를 주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는가를 질책한다. 현 정권의 정의관을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세상에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못 살 수가 있지! 열심히만 살면 다 부자가 되는데!”

“나를 봐! 열심히 사니까 이렇게 부자가 됐잖아. 이 게으름뱅이들아!”

“열심히 사니까 권력까지 얻었는데, 그 사이에 너희들은 쓸데없는 일에 소일하다가 시간만 낭비했구나!”

그래서인지 청와대 대변인의 정의에는 사회적 약자에 관한 언급은 없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라는 소리가 높아지면, 마치 부지런한 자의 당연한 권리와 정당한 소득을 게으름뱅이들이 빼앗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들은 분배 정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치부한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한국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사전 분배조차 정립되지 않은 한국 사회, 정의관조차 왜곡하는 현 정부를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아마르티아 센 교수가 규정하는 빈곤의 의미를 인용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가치있는 삶을 선택하고 추구할 능력이 현실적으로 없다면 그것이 바로 빈곤이며 자유와 평등이 구현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의미의 빈곤은 사회 불의, 사회 부정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정의가 유행이 되어 버린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빈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지대 사태가 보여주는 우리의 퇴행사회[시대와 철학]

상지대 사태가 보여주는 우리의 퇴행사회[시대와 철학]

최종덕(상지대교수, 철학)

 

요즘 국내 정치적 현안 가운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을 들라치면 뭐니 뭐니 해도 막무가내로 강행하는 4대강 개발사업과 억지와 의혹 가득한 천안함 사태 및 부동산 문제이다.

그 다음으로 친다면 매스컴에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상지대 사태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상지대 사태는 어느 한 사립 학교의 내부 문제가 아닌 현 정권의 비상식적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퇴행사회의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지대학교 정이사 선임과정에서 드러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온갖 불법 행위는 사학재단의 현주소와, 나아가 대한민국 위정자들의 교육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1. 상지대 사태의 전모

김문기는 상지대학교 설립자가 아니다

상지대학교 사태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1962년 원홍묵 선생은 청암학원의 이름으로 상지대학교 전신을 설립하였다. 그 후 1974년 설립자로부터 학교재단을 인수한 김문기 씨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기반으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면서 상지학원을 전횡했다. 김문기 씨와 그 주변세력은 등록금 유용, 교수채용 비리와 부정입학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총학생회 학생들을 불온삐라 제작살포자로 모는 용공조작까지 했을 정도로 교육비리의 백화점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문기는 상지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대학을 자신의 권력 횡포지로 삼았다. 이 사실은 그가 20여 년 가까이 정식 이사회를 개최한 적이 없었다는 점으로 잘 드러났다. 이런 다수의 불법적 행위로 인해 결국 김문기는 1993년 교육부에 의해 이사 자격 원인 무효 판정을 받았다. 대법원은 같은 해 그를 복합적 교육 비리로 무려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 이후 그는 과거 역사를 조작하여 자신이 상지대학교의 설립자라고 우겨왔다. 그나마도 2004년 대법원은 김문기를 상지대학교 설립자가 아닌 것으로 최종 선고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법은 김문기가 상지대학교에 대하여 그 어떤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을 공표한 것이다.

사분위는 초법적 기구이다

그 후 2007년 사학이 개인의 사적 재산권 영역이 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사학법이 개악되었다. 쉽게 말해서 김문기 씨와 같은 교육비리 전과자들도 사학을 점유할 수 있게 약간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뜻이다. 그 준비단계로 종전 국회는 법적 기구인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줄여서 사분위라고 하는데, 사분위 초기에는 요즘 흔히 말하는 공정한 인사로 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한 흔적도 보였다.

그런데 현 정권들어 제 2기 사분위가 재구성되면서, 사분위는 그나마 있었던 소수의 공정한 인사들을 내몰고 사학의 사적 재산권을 주장하는 편향적 인사들로 채워졌다.

2기 사분위는 2010년 들어 많은 결정을 했다. 소위 분쟁 중인 사학을 정상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사학의 재산권자를 만들어 주기 위해 초법적 권력을 행사했다. 사분위는 원래 사학의 구재단 인사에게 학교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김문기 같은 경우에는 재단 설립자 자격이 없다는 헌재의 판정이 나오자, 사분위는 웬 뚱딴지 같은 ‘종전 이사’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끊임없이 과거 비리 교육집단을 옹호하고 나선다. 이런 방식으로 사분위는 상지대를 비롯하여 조선대, 영남대 등을 비리로 점철되었던 과거로 회귀시켰다. 대구대, 광운대, 덕성여대 등도 진행 중이다.

상지대의 경우 정이사 구성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어갔다. 김문기 측 종전이사 추천 4인, 교과부 추천 2인, 정식으로 추천도 하지 않은 상지대 측 추천으로 2인, 그리고 임시이사 1인으로 상지대학교 정이사를 그들 마음대로 결정해 놓았다. 이사회 반수 이상을 종전 이사 측에게 줌으로써 사학 학원법인의 의사결정권을 그들에게 쥐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문기 씨 아들을 이사로 선임하는 등 북한의 김정일 세습정권과 같은 전형적 악습구조를 공공교육 기관에 뿌려놓았다.

정상화된 상지학원을 김문기에게 고스란히 바치고자 사분위는 초법적 결정을 하였다. 그래서 사분위는 17년 동안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던 많은 대학을 다시 구렁텅이로 빠트려 놓은 분쟁 조장의 원흉이 되었다.

상지대와 시민사회는 끝까지 저항한다

학생, 직원, 교수, 동문 등 모든 상지대학교 구성원은 일치단결하여 김문기 사학비리세력의 학원 복귀를 반대하며 일 년여에 걸쳐 농성을 해왔다. 원주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도 비상대책위를 구성하여 지역사회의 자존심과 명예를 잃지 않기 위하여 공동투쟁하고 있다. 특정 대학교,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민의식이 고취되면서 전국적으로 ‘비리재단 복귀반대 대학 대책위원회’, ‘비리재단 복귀반대 학생 공동대책위원회’, 및 ‘비리재단 복귀저지와 상지대지키기 긴급행동’ 등의 사회단체가 구성되어, 비리세력 복귀반대 운동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불행히도 그런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이 사분위이며, 사분위의 그런 분위기를 선도하는 것이 교과부 및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여당 국회위원들의 참모습이다.

속기록까지 폐기하는 불법이 횡행한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폭거를 진행하면서도 2기 사분위는 그동안 한 차례도 회의록을 공개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위한 요약문만 공지했을 뿐 기록 자체를 공개거부한 사분위는 정말 총리실이나 청와대 회의실에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이다. 공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할 수 없기 때문에 숨긴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불법이 자행되고 있었다. 상지대 정이사 선임 관련 최근 속기록 자체를 폐기했다는 교과부의 답변이 있었던 것이다. 최악의 불법적 행위가 백주 대낮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위법 행위가 공공성의 심대한 파괴라는 상식조차 아예 무시하고 있다. 아무리 불법이라도 억지를 쓰면 다 넘어가는 요즘의 정치 현실에 막연한 기대를 하고 그런 위법행위를 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과부는 잘못된 상지대 정이사 선임 처분을 즉각 취소하라는 시민사회의 주장을 회피하고 있다. 교과부는 오히려 사분위의 잘못된 결정을 조장하고 있다. 교과부 사분위 담당부서는 9월 8일 민주당 등 야당 교과위원들의 자료 제공 요구에 대해 공문을 보내 “51∼52차 전체회의 속기록은 사분위 결정에 따라 폐기되었다”고 밝혔다.

사분위가 폐기한 것으로 알려진 해당 속기록은 지난 4월 29일 열린 51차 회의와 6월 29일 열린 52차 회의다. 51차 회의에서는 정이사 선임 관련 추천 비율에 대한 결정을 내렸고, 52차 회의에서는 이 결정에 따라 정이사를 추천하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9월8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사분위와 교과부는 야당 위원들의 당연한 요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회의록 공개는 커녕 속기록을 폐기했다는 뻔뻔한 답변이 왔을 뿐이다. 책임자인 사분위 위원장이나 전 교과부 장관 역시 증인출석을 거부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안하무인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사분위 결정은 무효일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으로서 법에 정한 기록물 보존기간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임의로 회의록을 폐기하는 것은 초법적 권력의 대표적인 위법이다. 속기록 폐기는 국가기록물관리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형사 처벌감이며 해당 교과부 장관과 담당 간부, 사분위원장, 사분위원 등이 고발대상이지만 그들은 정권의 무한권력에 취한 채 무작정 밀어붙이고 있다.

그들의 막무가내 행정의 결과는 대한민국 교육의 역사적 파행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불행한 사태의 핵심이다. 상지대 회의록 비공개 그리고 속기록 폐기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사분위의 의결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자 대상 요약본이 실제의 회의 내용 결과인지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과위 소속 여당 위원들은 “교육 현안이 무척 많은데, 민주당이 사사건건 상지대 사태를 걸고 넘어져서 회의를 방해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학비리의 온상을 더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상지대와 같은 반발의 요소 자체를 싹부터 싹둑 자르거나 혹은 아예 조금도 반발할 수 없을 정도로 현행 사학법마저도 바꾸려 한다. 2007년 개악된 사학법을 더 개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공공성이 부재한 사학의 사유화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려는 속셈이다.

 

2. 퇴행사회의 특징

 

상지대 사태는 교육계 기득권자들의 몰상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불행한 사건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교육 마피아들이 학교 운영권을 초법적으로 탈취한 상지대 사태는 상지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학의 퇴보와 대한민국 민주화의 퇴행이라는 병증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병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적 상식, 정치적 상식이나, 나아가 윤리적 상식이 모두 무너지고 있는 현장이 상지대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 정치적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주변에 횡행하는 불법과 비상식을 눈감고 넘어가는 무임승차 의식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화가 양화를 축출하는 그런 퇴행사회가 자리잡게 된다.

실은 이미 한국사회는 그런 퇴행적 관행이 자리잡은 불행한 병증을 보이고 있다. 퇴행사회는 다음과 같은 몇몇 전염병적인 공통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퇴행사회는 사회의 민주적 기반을 강제적으로 붕괴하려 한다.

과거 비리집단이 사학을 다시 장악하면서 학생이나 교직원 할 것 없이 종래의 민주적 학교 구성원들을 보복하기 위한 근거없는 고소 사태들이 무수히 벌어지게 될 것이다. 나아가 퇴행에 공조하는 해당기관은 기존 학교에 대해 각종 억지 감사를 무자비하게 실시할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과거 민주적 조직에 대해 해코지를 하려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설 자리를 확보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민주 집단을 붕괴하기 위한 비리집단의 자기 합리화를 위해 강행할 수순이 될 것이다. 작년 문화체육부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 관련 부서 인물들을 강제로 교체시킨 일이 그 사례이다. 비상식적 집단에 의해 자행되는 이러한 초법적 사태는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일종의 정치적 타살에 해당하는 일이 백주대낮에 벌어졌으며 앞으로는 그 이상의 비상식적 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전염병적 병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화의 가치를 떨어트리기 위해 악화의 분포를 최대화하려 한다. 결국 그들은 양화가 정말 양화가 아닌 양의 껍질을 쓴 최고의 악화라고 가짜선전에 광분하게 된다. 전교조를 빨갱이로 몰고 가고 싶은 그들의 속셈은 전형적인 악화의 광분에 해당한다.

둘째, 퇴행사회는 비상식을 상식화한다.

왕조의 왕권 승계하듯, 김정일의 정권 승계하듯, 기업의 소유권 승계하듯, 사학 역시 자손이 사학재단의 소유권을 승계해야 한다고 버젓이 천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 한국사회의 퇴행적 자화상이다. 악화의 주범인 그대들이 좋아하는 미국사회에서 이런 발언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학이 많은 미국사회에서도 사학의 공공성은 제일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사회는 자본의 권력이 자본증식의 범주 안에서 최대화하려는 자본의 내적 가치에 충실한다. 쉽게 말해서 돈을 벌고 싶다면 기업을 통해서 돈을 벌어야지 학교를 세워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에서조차 상식화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학교를 세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많다. 퇴행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정운찬 전 총리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 그는 학생들을 솎아 내는 일이 바로 입시교육이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었다. 문제는 정 전 총리만이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생각이 많은 기득권자들의 생각과 일치된 결과일 뿐이며, 예를 들어 강남 특구지역 땅부자들의 교육관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비상식이 상식으로 전도되는 퇴행사회의 단면이다.

셋째, 퇴행사회는 이념을 도구화한다.

퇴행사회는 보수와 진보, 좌우의 이념대립과 무관하게 기득권자의 사적 이익의 최대화만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그러한 목표 외에 모든 공적 가치들을 무시하려 한다. 물론 겉으로는 그럴듯한 공공적 표어를 내세우기는 한다. 그러한 수순의 전략적 절차로서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대립관계를 극한적으로 약용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목청 높여 외치지만 주변상황이 그들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경우, 기존의 자유 시장질서조차 드러내놓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맞춰 시장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를 비롯한 많은 과거(의) 비리 사학재단들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리 사학재단들은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그냥 비리의 집단일 뿐이다. 비리와 부정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건강한 사람들에 대하여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심하게는 빨갱이라고 몰거나 혹은 전교조 악마라는 등의 온갖 현혹적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비리를 마치 이념적 대립, 정쟁적 충돌의 부작용으로 비춰지도록 주변 전략을 실행에 옮긴다.

요약한다면 퇴행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그냥 자기집단적 이익에 눈먼 자들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데 있다.

상지대학교는 이런 단면들을 모조리 안고 가는 불행한 운명에 처해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만들어진 조작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육은 억지의 조작이 진실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념의 허상, 비상식의 전염이 득세해가는 퇴행사회에서 여전히 마취상태로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깨어 일어나 건강하게 살 것인지를 굳이 묻지 않고서도 우리와 후손의 행복을 찾아 당당한 행보를 할 것이다.

 

천박한 시대, 보수에 대항하는 진보의 정치[시대와 철학]

은폐된 진실, 선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문제

1990년대 초?중반 정태춘은 그의 노래 ‘건너간다’에서 우리 시대를 “천박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한국의 90년대 초?중반은 80년대의 민주화와 컬러 TV의 보급으로 10대가 소비의 핵심적인 주체로 부상하는 등 대중소비사회의 형성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차이와 개성, 쿨함 등 자신의 욕망에 대한 솔직함이 미덕이 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이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96년 경제위기도, IMF 구제금융 신청도 이것을 막지는 못했다. 바야흐로 소비 욕망은 80년대 대처와 레이건으로 표상되었던 신자유주의적 광풍을 자신의 몸에 내면화했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서 한국의 보수들이 주창했던 ‘잃어버린 10년’은 흔히 도덕과 법으로 상징화되는 보수의 부활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정확히 그것은 근대의 사적 소유에 기반하고 있는 이기주의와 개인적 성공이라는 사적 욕망의 부활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신화’로 변주된다. 마치 이번에 진행된 개각에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김태호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는 농민의 아들, 소장사의 아들로 태어나 1998년 경남도의원에 당선되었고 2004년 6?5재보선에서 최연소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명박정권은 이번에 다시 그를 김종필 이후 최연소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대선의 신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공신화에는 항상 감추어진 이면이 있다. 이명박대통령 본인의 BBK에서부터 고소영 내각까지, 그리고 심지어 ‘떡검’, ‘떡찰’에서 시작하여 ‘색검’과 ‘색찰’로까지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그러하다. 강남의 화려한 네온사인에 취해 흥청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깊숙이 은폐된 밀실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다른 한편의 욕망은 언제나 진실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성공한 자들이 누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 진실일 뿐이다. 총리로 지명된 김태호 또한 그러하다. 그 또한 이명박대통령처럼 ‘박연차 게이트’의 관련자로서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이번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출마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미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공식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한편의 성공신화에 이 정도의 구설수가 없겠는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능력의 징표라고 말한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위반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위반은 필연적이고 항상적이며 중요한 것은 그 위반을 감추는 능력,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신을 ‘선’으로 가장(假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차악을 감추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삶에서 ‘절대선’은 없다. 문제는 삶을 선으로 치장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따라서 문제는 ‘선’이 아니라 ‘욕망’이다. 그것도 우리의 ‘소비욕망’이다.

현대적 보수주의, 외설적인 아버지의 선

오늘날 한국의 보수만이 아니라 미국의 보수도 정확히 이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은 현실의 변화에 진보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며 계산적이다. 그들은 어차피 도덕과 법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무능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들은 기존의 도덕이나 법을 지키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변화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치장하는 법과 도덕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에게 관념적으로 지켜야 할 전통적인 가치나 법 따위는 없다.

반면 오늘날 무수한 지식인들, 특히 윤리학자를 포함한 철학자들, 흔히 맑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양심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은 바로 이 지점을 공격하면서 ‘전체주의’의 공포와 사물화의 즉자성을 환기시키면서 사유와 태도 양식의 변환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세계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보수’는 진보보다 더 진보적이며 현실적이다. 왜 그런가? 오늘날 세계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현대사회를 지탱해왔던 모든 삶의 양식들을 해체 또는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차원은 정치-경제-문화-윤리적 양식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방식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사회의 정치-경제-문화-윤리적 양식들은 ‘소유권’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의 소유권은 이미 로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의 인신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는 자기 노동에 따른 것이다. 사적 소유권은 자신의 인신이 투여된 노동에 근거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상은 이런 소유권을 해체하고 있다. 한편으로 과학기술혁명에 따른 생산의 자동화와 정보화가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지배를 전면화하며,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약을 넘는 다양한 네트워크들의 전면적인 접속망의 창출은 국경과 지역을 넘으면서 공장이라는 경계를 넘는 생산의 사회화를 전면화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윤리적 가치와 전통적인 삶의 양식들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불확실성과 가변성이 전면화하고 사람들은 ‘불안’을 넘어서 적이 명확하지 않는 ‘공포’, 바우먼이 이야기하는 실체가 모호한 기괴한 대상에 의한 공포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여기서는 불안을 야기하는 대상 자체가 모호하다. 국가도, 지방정부도, 기업들도 모두가 현재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더 이상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다. 단지 이 상황에서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미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소유권이다. 그들이 근대적 소유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들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지배력은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그들은 지키고자 한다. 그것은 변화된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전면적 지배력을 가지고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법적으로 그것을 확립하고자 한다.

경제적 강제력이 아닌 소유권의 경제외적 강제력의 부활! 이것이 바로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의 법 속으로 돌아온 외설적인 아버지라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카피본에 대한 지적 소유권이 그러하며 공적 자금 지원으로 이루어진 연구결과에 대한 사적 소유권 보장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1960년대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예를 들어 1962년 펜실베이니아대학 연구소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WI-38이라는 세포주를 유도하고 특허를 출원했다. 그러나 이것을 주도했던 헤이플릭은 연방정부의 재산을 훔친 혐의로 기소되었다.

반면 1980년대 이후 미연방정부는 연방자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발명과 발견들에 대해 특허출원을 허용하는 각종 법안, ‘베이돌법’, ‘스티븐슨 와일더법’, ‘연방기술이전법’ 등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은 명백한 당파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의 위기는 그들이 철저하게 당파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가치와 양식들을 고수한다. 관념적인 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이며 소위 관념과 가치-문화를 강조하는 관념론자들이 아니라 물질-현실-육체를 강조하는 유물론자들이다.

오늘날의 진보주의자들은 소심한 전통주의자들이며 급진주의자들은 히스테릭한 관념론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회의하며 기껏해야 ‘소통’, ‘협치’, ‘공정성’ 등등의 추상적인 가치들을 고수하고자 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보수주의자들을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를 가장한 낡은 가치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욕망, 진보주의자의 길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진정한 문제는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이 더 이상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이미 낡은 패러다임 위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세계상은 변화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주의로는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정치지형을 창출했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은 여전히 월러스틴이 이야기하는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의해 포획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진보주의적인 정치는 여전히 로크적이거나 루소적인 사회계약론의 모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응하는 좌파의 정치적 양식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제도적인 것들 속에서의 투쟁이, 다른 한편에서는 제도를 벗어난 반제도적인 투쟁이 전개된다. 하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현재의 세계상이 보여주는 한계와 틈새들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하지 않는다. 사유는 초월적인 외재성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내재성 그 자체의 표현력과 자생성에 주목하는 차원에서 멈추고 있을 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현행적인 것(the actual)’ 속에서 재현의 정치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잠재적인 것(the virtual)’ 속에서 삶의 정치를 반복할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의회-제도 내에서의 좌파적 기득권을 이용하여 ‘통일’을 가장한 ‘패권’을 행사할 뿐이며 ‘자유주의자들’과의 야합을 생산할 뿐이다. 반면 민주노동당에 대응하는 좌파들은 각기 가족적 집단성과 이데올로기적 선명성 경쟁을 할 뿐이다. 그들 중에서 진정으로 짐을 지는 자는 없다.

오히려 오늘날 이 짐을 적극적으로 짊어지고 가는 자들은 보수주의자들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대중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소비욕망’의 코드 속에서 그들의 욕망과 공포, 불안을 포획하는 정치를 창출하는 데 거침이 없다. 여기에 진실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정치는 ‘진실’을 생산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이것에 대응하여 기껏해야 그것은 ‘거짓이야! 당신은 속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대중의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을 사는 대중들에게 욕망은 사회 속에서 자기 가치를 실현하면서 자기 존재의 긍정성과 역동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그 어떤 비전도, 힘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짐을 지지 않는다. 그 짐은 추호의 흔들림도 죄악이 될 수 있는 결단과 선택을 요구한다. 마키아벨리가 이야기했듯이 정치란 권력의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가 이것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현실적이어야 하며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변화된 세계상과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드러내는 한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이 생존하기 위해서 기댈 수밖에 없으면서도 결코 그 안으로 온전히 포섭할 수 없는 것, 즉 노동과 자연에 있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언제나 노동의 형태로 재생산되며 자본의 에너지원은 자연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새롭게 기획해야 할 정치는 이 양자의 틈새, 간격, 모순을 드러나는 바로 이 지점이다.

오늘날 대중들은 소비욕망에 포획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풍요는 빈곤과 결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욕망이 소비욕망으로 전치되는 것은 그들의 욕망이 불순하기 때문이 아니다.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사회, 그래서 소비욕망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사회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이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구연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사유의 방식과 마음, 가치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가 이기적이 된다고, 그리고 노조가 실리화된다고 비판함으로써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요구되는 정치이다.

희망의 정치, 레닌을 반복하기

권력의지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지배세력들의 정치와 진보주의적 정치는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형식이다. 진보주의적 정치가 대중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공동체적 자치권력을 생산한다면 보수주의적 정치는 대표-재현의 정치를 생산한다. 이 점에서 오늘날 민주노동당이 생산하는 정치는 대표-재현의 정치를 반복할 뿐이다. 반면 반제도적인 대중의 역능에 주목하는 정치는 생활을 정치로 변환시키지만 역으로 권력의지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제도적 정치와 전혀 다른 형식을 가지지만 정작 그 힘을 생산하지 못한다.

이명박의 불통과 아집, 독단은 짐을 짊어짐으로써 대중이 요구하는 불안과 공포를 자신의 권력으로 총화시킨다. 반면 진보주의적 정치는 그런 선택을 거부함으로써 그 스스로 대중들과 멀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구화는 전통적인 공공적 아버지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해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네그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탈국민국가, 탈주권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역이 힘이 작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더 강력한 권력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존경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자신의 구차한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거대한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전치시키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이 그러하며 이명박대통령의 ‘불도저’가 그러하다.

따라서 오늘날 4대강 사업뿐만 아니라 지속적이고 일관적으로 진행되는 이명박정권의 불통과 아집, 그리고 독단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폭로하고 비판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실제적인 희망과 힘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의 정치는 더 이상 자본적일 수도 없으며 대표-재현의 정치일 수도 없다. 그것은 그 경계를 넘어서 질적으로 다른 사회-세계를 창출하는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나 사유, 행동 양식과의 적절한 타협이 아니라 오히려 레닌처럼 극한적으로 사유하고 극한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세계상은 이미 내재적인 자기 전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당시 맑스주의자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전쟁 반대, 평화’를 외칠 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는 성공했고 새로운 정치를 창출했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주의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레닌처럼 결단을 하고 짐을 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닌은 반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레닌이 반복되는 것은 구태의연한 과거의 방식이 아니다. 반복되는 레닌은 과거의 레닌이 아니다. 오늘날 반복되어야 하는 레닌은 새로운 레닌이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정세 속에서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는 레닌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들 사이에는 논쟁이 사라졌다. 그것은 누구도 이 시대를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권 좌파나 비제도권 좌파 모두 가릴 것이 없다. 논쟁 대신에 힘이 지배하고 책임 대신에 적절한 야합과 타협, 실리가 지배한다. 그래서 정치는 끊임없이 현행적인 것의 포로가 되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그람시식의 정치는 생산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상상력을 이야기한다. 물론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 그 결단과 책임, 짐을 지지 않는 상상력은 정치가 아니라 관념적인 공상, 또는 행위 없는 개념에 머물 뿐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 선택과 결단,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려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박영균(건국대 HK교수) /

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박민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이 유명한 알레고리를 다시금 떠올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을 듯해서이다. ‘하나의 유령, 붉은 악마라는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 붉은색이라면 마치 알레르기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던 나라에서 붉은색이 현 시기를 상징하는 색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볼 때, 이 유령은 19세기 초 유럽을 뒤흔들던 공산주의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전자의 알레고리는 그 동안 굉장히 많이 인용되어온 맑스의 말이다. 그는 19세기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전 유럽의 적대적 반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의 상황은 이와 좀 다르다. 이 유령에 대한,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열광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광적인 열광은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지고, 그만큼 위험해 보인다. 거대한 열광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의 자괴감인지 아니면 열광적인 응원이 요구하는 강요가 싫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불편한 감정은 맑스의 목소리가 전달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박노자는 월드컵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에서 파시즘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이 불순한 발언들로 인해 그는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지만, 그의 말은 ‘정확하게 얘기해서’ 맞는 얘기다. 역사적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예컨대 무쏠리니는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파시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 고유한 틀은 남아 있다.

월드컵 경기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총성 없는 전쟁으로 묘사되고, 그 속에서 우리 유령들은 ‘우리나라’인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인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를 밟아주길 고대한다.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강한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월드컵’이라는 의견은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중 하나이다.

또한 월드컵을 거대자본의 논리에 물든 공허한 행사로 바라보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수 십 개의 월드컵 공식 후원기업이 있고, 그들의 광고는 월드컵 경기장 안의 광고판에서 뿐만 아니라 띄엄띄엄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 TV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거대 기업들은 월드컵에 대한 열정 속에 은밀하고 치밀하게 자본의 논리를 집어넣는다. 그 결과, 월드컵에 대한 열정은 자본에 희석되고 마침내 자본을 위해서 열정이 존재하는 전도된 상황에 놓이고야 만다.

기업들은 점점 더 우리의 열정을 조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최신 과학기술의 집합체로 여겨지는 월드컵 공인구가 사실상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의 절실한 바느질로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즉 스포츠는 이제 그 고유한 순수성을 잃고 거대산업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윤을 창출하는 대리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 관점에서는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 역시 체제화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으로 코드화된 열광인 것이다. 예컨대, 서울 광장에서의 거리 응원전만 하더라도 월드컵의 후원기업인 현대자동자의 주관과 SK의 참여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 밖에도 고리타분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월드컵은 국가권력의 스포츠를 통한 우민화 장치라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이것 역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천안함 사건, 4대강 사업, 사회적 자본의 민영화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국가적 관심사들은 온갖 미디어가 주야장천 보도하는 월드컵의 내용에 묻혀 잊혀져버렸다. 월드컵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국가권력의 작업 속에서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월드컵에만 쏠려있다. 결과적으로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에는 이러한 국가적 관심사에 대한 무관심이 수반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순한 생각들을 통해 규정한 월드컵의 성격을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것일까? 누군가에겐 월드컵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선동방법이며 누군가에겐 거대한 자본의 시장이며, 누군가에겐 국가권력의 지배 장치임을 다시금 지적하고 강조하는 건 이제 별 쓸모가 없을 듯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다고 생각하여 개의치 않거나,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라는 식의 반응들을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들은 ‘월드컵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참여’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월드컵을 미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월드컵 행사 자체의 성격에 대한 거시적인 논의보다는,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열광을 인정하고 그 열광을 추동하는 우리들의 욕망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일탈의 욕망이 부추기는 강요된 열광

 

월드컵에 대한 미시적 관점은 내가 응원하고 있는 나라가 이기길 바라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미시적 관점은, 예컨대 파시즘에 동조하고 파시즘을 만들어가는 대중의 심리적 과정을 욕망과 관련시켜 분석한 빌헬름 라이히의 방식처럼, 월드컵과 월드컵 응원에 대한 우리들의 열광이 어떻게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공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조금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 그 열광을 부추기는 우리들의 욕망 자체를 알아보는 것이 더 절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은, 거리응원을 위해 유아기에 벗어던진 기저귀를 다시 차며 16강 진출의 감격을 한강 투신으로 표현하듯 이제 광적인 상태로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6월 23일 새벽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소리쳐 외치며, 입간판을 발로 차고, 온갖 괴성을 질러댔다. 이것은 마치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개개인의 욕망이 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 법, 성별, 나이, 정파, 계급, 신분, 지역 등의 정해진 틀과 그 틀에 의한 구속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탈의 욕망이 자라게 한다. 그리고 모든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추동한다.

다시 말해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은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일탈의 욕망이 현상적으로 가장 농도 짙게 표현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탈의 욕망에서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여 생긴,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일탈의 욕망 그 자체가 갖는 ‘무의미함’과 ‘거짓됨’이며, 둘째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이 역설적으로 포함하게 되는 ‘강제성’과 ‘유아성’이다.

일탈의 욕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일탈이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된 것이 아니라 일탈이 중심에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일탈이 목적이고 욕망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을 추동하는 욕망은 가타리의 말처럼 ‘탈 영토화되고 탈 영토화하는 유목적 욕망’의 해방적 가능성으로만 그려질 순 없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되고 그것에 맞는 내용과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될 때에만 욕망 자체가 담보하고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다. 욕망이 중심이 아닌 경우 ‘내’가 있을 공간이 없게 되어 욕망의 표현은 무의미한 반복행위로 전락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인 욕망의 고유한 흐름 역시 고정된 틀에 갇히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에 주목했던 우리들은 2002년 이후 그것이 어떠한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으로도 표현되지 않았던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던가.

또한 욕망이 포함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유사(類似)욕망, 또는 거짓욕망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이 욕망의 내용과 특징, 의미 등에 대한 강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욕망이 특정한 시점에 마주하게 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을 도외시하고, 욕망을 단순히 일탈에만 고정시킨다면, 생생한 흐름과 역동적인 가능성을 내포하는 욕망은 단순한 일탈의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 16강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한강에 뛰어든 사람들처럼, 거짓욕망은 극단적인 욕망 분출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반대로 ‘자유롭지도 못하고 서로 어울리지도 못하는 열망’으로 변하게 된다.

일탈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탈출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일탈의 욕망은 이내 자본, 국가권력, 미디어가 정해놓은 강요된 공간속으로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밀어 넣는다. 즉 일탈의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자유로움 속에 있지 못하고 다시금 정해진 틀과 구속에 의해 자리 잡혀지게 되면서 역설적이게도 ‘강제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은 내 의지와 욕망과는 상관없이 월드컵에 열광케 하고, 나아가 그 열광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마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매국노이거나 놀 줄 모르는 숙맥이거나 특이한 돌연변이로 취급한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붉은 옷을 걸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강요된 열광과 함께, 일탈을 욕망하는 주체들은 각 개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을 잃게 되고, 고립되고 독선적인 주체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 속에서는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거짓욕망의 거대한 장에서 타인의 특수한 욕망은 거짓욕망의 블라인드에 갇히게 되고, 단 하나의 욕망만이 허용될 뿐이다. 여기에는 ‘응원의’, ‘응원에 의한’, ‘응원을 위한’ 욕망만이 허용된다.

이 절대적인 강제성으로 인해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어지게 되면서 동시에 타자의 존재성, 타자의 타자성 역시 고려될 공간이 없다.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에는 주위 사람들의 존재를 배려하도록 허용된 공간이 없다. 기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무의미하고 거짓된 일탈의 욕망은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열광을 낳았고, 그것이 우려스럽게도 대한민국의 광적인 응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일탈의 욕망에서 욕망의 일탈로. 욕망의 상호인정으로서 월드컵

 

월드컵 기간 대한민국에서 나타난 광적인 열광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이 지닌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은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욕망의 일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일탈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이다. 욕망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일탈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욕망의 일탈에는 ‘욕망하는 내’가 중심에 있다.

욕망이 시작되는 최소한의 출발지점으로서 ‘나’는 내 삶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내용, 특징, 의미 등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내 삶의 내용과 특징, 의미를 통해 규정된 ‘나’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과정을 통해 보다 다양한 내용과 의미 등을 담보하게 된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이 광적인 월드컵 응원에서 그 목적을 다하게 된다면, 욕망의 일탈은 단순히 월드컵만을 위한 광적인 응원을 넘어서 일탈이라는 수단을 통해 금지된 다양한 의미와 가치 등을 욕구하게 된다.

또한 욕망의 일탈에는 타인과 타인의 욕망을 향한 배려가 자리 잡을 공간이 있다. 나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대상, 객체, 타자와의 매개를 통해 충족되기 때문이다. 욕망의 충족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타자가 요구된다는 것은 내 욕망이 충족되기 위해선 타인의 욕망도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때 타인의 욕망을 인정하면서 나의 욕망도 인정받게 되는 욕망의 상호인정이 가능하다. 욕망의 일탈이 추동하는 욕망의 상호인정 가능성은 일탈의 욕망이 갖지 못한 소통과 해방,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들의 강요된 열광을 조직하는 환상적인 틀, 즉 국가, 자본, 미디어로부터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고 이것들의 영향을 제한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전환했을 때 마련된다. 즉 우리자신들의 욕망이 갖는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할 때, 욕망이 갖는 해방의 가능성은 마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을 통해 월드컵은 ‘우리인 나, 나인 우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다. 내 욕망의 조건들 속에는 타인의 욕망이 전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각성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월드컵에 동참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차원의 공간을 마련해줘야만 한다.

‘붉은 악마’는 더 이상 ‘붉은 악마’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색을 담을 수 있는 ‘회색 악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욕망의 일탈이 유지되기 위해선 우리들의 욕망이 갖는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우리들의 순수한 욕망을 지키기 위해선 거대기업과 자본이 유도하는 거리응원도, 국가권력이 정해놓은 서울광장도, 미디어의 온갖 부추김도 단호하게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본, 국가, 미디어를 향해 이제 그만 사라져 주길 요구해야만 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월드컵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 동안 떨어져있던 타인을 부둥켜안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서로가 소통하고자 하는 몸부림. 극단적인 애정결핍의 또 다른 반작용으로서 타인과 부대끼고 싶어 하는 몸부림. 다시 말해 애초부터 이미 우리들은 월드컵을 통해 욕망의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