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의 좌절, 51%의 승리? ;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② [시대와 철학]

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②[시대와 철학]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2) 집제(集諦): 왜 앓게 되었는가?

 

‘연가시’ 재난

 

경제 성장이라는 꿈은 사실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 부자 되겠다는 욕심을 점잖게 이른 말일 뿐이다. 솔직히 우리가 바란 것,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나와 내 주변만의 풍요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사회야 어찌되든 나만 풍요로우면 된다는 욕망은 성장에 대한 맹목적 기대를 낳게 한다. 우리의 욕심이 오늘의 재난을 불렀다. 수구 세력은 우리 안에 내재한 자기 보존의 맹목적 욕구를 부채질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중의 욕심을 이렇게만 보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사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기보존 욕구는 공포와 불안에서 비롯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에 대한 순수(?)하고도 능동적인(?) 욕망과는 다르다. 부자가 되길 바라는 서민들의 마음은 사실 ‘더 가난해지지 않겠다’ 혹은 ‘다시는 가난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이토록 필사적으로 빈곤을 거부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을까? 구제금융 위기 이래 형성된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가 그것이었다. IMF의 요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식민지 경험과 그것으로 유발된 전쟁의 악몽을 연상케 했다. 도처에서 발생하는 해고, 도산, 실업, 가정 해체는 처절했던 전후 사회 빈곤의 트라우마를 되살렸다. 신자유주의적 산업 구조화가 낳은 빈곤은 과거의 빈곤과 동일시되었다. 현재의 실업에서 그들은 적빈했던 과거의 지긋지긋한 악취를 맡았다. 토굴 같던 초가집, 주린 배를 움켜쥐며 잠든 밤, 동생을 위해 희생했던 누이의 뒷모습, 가난 때문에 접은 꿈의 불길한 체취가 그들의 코끝에 느껴지자 21세기의 현재는 어느새 과거의 그날이 되고 말았다. 개인적 근면과 성실만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재난을 이겨낼 수 없었다. 밤새워 일을 해도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외쳤다. ‘저기 가난을 물리친 그분이 오신다!’ 돌아보니 잊고 있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래, 그가 있었지. 그는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한 사람이었어.’ 너도 나도 그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보니 어느 기업인이기도 한 듯싶다. ‘하지만 대수랴. 또 다시 풍요를, 또 다시 가난에서의 해방을….’ 갈증에 허겁지겁 그가 제공하는 물을 마시고 그가 이끄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보았다. 마치 변종 연가시에 감염된 영화 속 인물들 같이 그가 제공하는 성장의 꿈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하지만 빈곤에 대한 공포와 부에 대한 갈증은 더해만 갔고 인간으로서의 삶은 멀어져만 갔다.

이렇듯 박정희 신드롬의 이면에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가 유발한 빈곤에 대한 대중의 공포가 놓여있다. 박정희 신드롬의 최대 수혜자인 기득권 세력은 이 신드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다. 그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입장에서 신드롬의 전염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를 하며 태극기를 쥐고 거리로 나가는 이들은 현재가 두렵고 미래가 불안한 서민들이다. 그렇다면 서민 대중의 현재적 빈곤을 막고 복지 시스템을 구비하면 이 현상이 해결될까?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를 수정하고 복지국가 모델을 도입하면 박정희 신드롬은 소멸될까? 일정한 성과는 있겠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의 심층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내면화된 개발 및 성장주의적 사고방식, 자기 생존의 생활양식이라는 ‘연가시’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조건이 형성되면 이 ‘연가시’는 언제든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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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 삶의 요구

 

따지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자기 생존 및 이익 보존의 욕구를 상대화하고 일정하게 거리를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지향을 갖든 보수적 입장을 취하든 상관없이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거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욕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몸에 익어버린 생활 방식 혹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생존과 안정의 절대적 추구라는 욕구를 어떠한 과정을 통해 내면화 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식민지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조국을 건설과 개발을 통해 다시 일으킨 성장의 역사 속에서 새겨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적 수탈과 전쟁의 참상은 한반도를 석기시대로 돌려놓았다. 전래의 가치와 인륜 구조는 무너졌고, 오직 생존과 이익의 안정적 확보만이 급한 과제였다. 국가도 이웃도 그 누구도 나와 내 부모 형제의 가난과 생명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았다. 국민 대중은 국가로부터 이미 여러 번 버림받은 기억이 있었다.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버리고 나라를 팔아버렸으며, 정부는 국민을 속이고 한강다리를 건너버렸다. 서민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와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잘난 지식인과 애국지사들도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기는커녕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만 벌이다가 온 천하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믿을 건 오직 나 자신의 노력과 힘뿐이었다. 전후 국민 대중의 의식 한 켠에 반지성주의적 평등의식과 지식 엘리트에 대한 반감이 자리한 까닭에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존재한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평등 문화는 군부정권에 대한 맹목적 지지, 비판적 문제 제기와 논의 문화에 대한 거부로 이어져 민주적 정치문화의 정착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혼돈과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자생존과 자력갱생의 준칙으로 무장해야만 했다. 먹이는 오직 투쟁하면서 스스로 확보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강력한 적자생존의 윤리와 자조(自助)의 준칙을 체화하면서 사람들은 집을 고치고, 돈벌이에 나섰다. 치 떨리는 가난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사람들은 온 힘을 기울였다. 식민지의 수탈과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들에게 나라란 생명의 보존과 안정된 삶을 제공하는 보호소의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민 대중의 상식에 깃든 정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노력에 의해 성취 가능한 필연적 삶의 요구를 문제없이 해소하는 것에 있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요구는 지극히 당연하며 문제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필연적 삶의 요구는 상당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당시 사람들은 필연적 삶의 요구를 충족시켜준다면 어떤 정부가 와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국민 대중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적극적 반대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강력하게 자리한 필연적 삶의 요구 때문이었다. 필연적 삶의 요구는 양식을 갖췄다는 지식인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상계]의 많은 필자들이 쿠데타를 환영하거나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그들의 의식에 가난의 질곡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필연적 삶의 요구가 그들의 내면 속에도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기 실존

 

박정희 정권과 국민 대중 간의 관계는 무척 이중적이다. 둘 사이에는 호응과 협력의 역사도 있지만, 긴장과 반목의 역사도 존재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둘의 역사는 한 가지 요소가 두 개의 상이한 모양으로 표출된 반응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기 실존의 주장이다.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조국의 근대화라는 프로젝트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자력갱생의 준칙이 몸에 익은 국민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협조적이거나 조건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민 대중이 박정희 정권의 프로젝트에 손을 빌려준 것은 전국가적 근대화라는 사명에서라기보다는 이러한 사업에 협조하는 것이 개인적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에 효과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국민 대중은 사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박정희 정권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이 공권력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한 사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공적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사적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는 한국인들의 특징을 역사적으로 설명해준다. 전략적 제휴는 박정희 정부가 필연적 삶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박정희 정권의 붕괴 과정은 이러한 거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고지된 ‘계약 해지’의 속성을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은 사적 삶의 욕구 혹은 필연적 삶의 욕구 실현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사적 개인들의 반발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반면에 국민과 박정희 정권이 호응과 협력의 역사를 이루어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의 갈급한 요구였던 필연적 삶의 요청에 대해 일정한 반응과 응답을 보였다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은 결코 허구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경부고속도로, 중화학공업단지, 포항제철 등의 토건사업과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국민 대중은 필연적 삶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실제적 경험을 얻게 되었다.

건설과 경제 발전의 과정은 국민들에게 당당한 사적 개인으로서의 존재 가치의 확인이라는 실존적 경험도 부여해줬다. 가진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었던 나라에서 단기간 동안 경제를 일으킨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못 먹고 못 배운 자신들이 오직 육체의 근면과 성실을 통해 이 커다란 업적을 이룩했다는 사실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식민지와 원조 경제의 경험에서 얻은 열패감 및 자기모멸 의식을 떨쳐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경제 건설과 근대화의 과정은 강제적 동원에 의해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강제와 강압의 결과 얻은 성과물이 개인적으로는 자기 긍정의 에너지로 작동하는 측면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새마을운동은 자기 노력에 의해 고난을 극복하는 긍정적 자아를 발견하는 계기를 농촌과 같이 소외된 영역에도 제공해주었다. 물론 새마을운동은 조국 근대화와 패배주의적 정신의 일소라는 순수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로 감지된 도시 지역 국민의 이반을 농민층의 지지로 견제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기획된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농민 지지의 안정적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날림으로 모방함으로써 진행되었다. 당시 과다 생산된 시멘트를 농촌에 선별적으로 보급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농촌에서의 건설 사업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농민들은 비협조적이었으나 새마을을 건설하기 위한 활동에 차츰 열성을 보였다. 열패감과 상실감에 시달렸던 농민들은 이 과정에서 일정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발견하였다. 마을 공동체를 위해 함께 일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공동체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고 찬사 받는 경험을 획득할 수 있었다. 공동체에서 모범일꾼으로 인정받는 경험은 그들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이 경험 속에서 자기의 삶과 인격이 고양되는 기쁨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이 기쁨을 지속하기 위해 그들은 새마을운동을 위한 자기희생과 적극적 협력을 자발적으로 감행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인들은 개발과 성장의 역사에서 자기 정체성 및 자기 실존을 확인했다. 그들은 조국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자기 인생이 빛나고 있음을 경험했다. 높은 빌딩과 쭉 뻗은 도로, 번듯하게 단장된 시골 마을은 사적 실존의 자부심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작업 결과물이었다. 이 집단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대중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를 건설한 진정한 국민으로서의 자격과 존재 가치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자기 경험의 역사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경제 건설 과정의 참여가 온전한 국민 자격의 획득을 의미하며, 경제 건설 과정이 곧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건설 활동과 동일하다고 해석하게끔 만든다. 그들에게 건설하고 개발하지 않는 사회란 한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고 실존적 자기 회의를 유발한다. 건물이 올라가는 등의 성장을 체감할만한 물리적 경험이 없으면 많은 한국인들은 이내 불안에 휩싸인다. ‘가난이 다시 오지 않을까?’, ‘나의 삶은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일까?’, ‘생산 활동이 아니면 내 존재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한국인은 ‘필연적 삶’의 집단운동에 몰두한다. 박정희를 개발 경제의 영웅으로만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숭배하는 박정희 신드롬은 사실 우리 몸과 정신에 깊숙이 훈습된 ‘필연적 삶’의 욕구와 생활방식에서 비롯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 -①[시대와 철학]

48%의 좌절, 51%의 승리? ;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①[시대와 철학]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이 글은 2012년 10월 19일에 열린 학술단체협의회 연합 심포지움 “2012년 오늘, 유신을 말하다”에서의 발표문을 수정한 것이다. 원래 이 글은 박정희 신드롬에 열광하는 대중의 망탈리테를 파악해보려는 의도에서 서술되었으나 대선이 끝난 지금에서는 그 반대편에 선 이들의 마음 상태도 가늠해봐야 할 것 같아서 조금 고쳐 써보았다. 채 익지 않은 생각의 파편들을 그러모은 것이라서 여러 곳에서 삐걱댈 듯하다. 눈 밝은 이들의 고언을 바란다.

 

(1) 고제(苦諦): 모두가 앓고 있다.

 

미신(?)에 홀린 대중

 

‘도대체 왜 대중은 박정희를 그리워하는가?’ ‘왜 51%는 박근혜를 선택했단 말인가?’ 이것은 단순한 의문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탄식과 ‘장군의 당집을 드나드는 대중’에 대한 지탄이 담겨 있다. 하지만 지식인들의 지탄에 아랑곳없이 대중은 갈 길을 갔고 아직도 가고 있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병리학적 명칭을 부여하면서 치료를 시도했다. 그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주로 언론에 의해 왜곡된 역사 서술로 인한 것으로 보았다. 동원된 치료법은 역사적 실증에 의한 인지적 교정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효험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실정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을 들이댈수록 ‘박정희 신드롬’은 격화될 뿐이었다. 치료 효과가 없다는 것은 그 질환의 원인과 작용 기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박정희 신드롬’은 단순히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만 비롯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의외로 인지적 의식 밑바닥에 단단히 뿌리내린 무의식적 심층에서 작동하는 질환일지도 모른다.

 

왼쪽으로 가는 의사, 오른쪽으로 가는 환자

 

무의식적 심층에 자리한 정신적 병리 증상을 치유하는 데에는 치료자의 태도가 무척 중요하다. 치료자는 환자를 도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치료에 나선 지식인들은 ‘박정희 신드롬’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린 채 계몽에 임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박정희와 영애’에 대한 대중의 애정은 끔찍한 불륜으로 보인다.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당신들이 독재자를 그리워한단 말인가?!’ 치료자가 환자의 잘못된 믿음을 도덕적으로 책망하면 환자는 치료를 거부한다. ‘당신들이 뭘 모르나 본데, 잘 봐라 박정희의 시대는 이랬어.’ 힐난조의 비판과 계몽은 대중을 토라지게 했다. 급기야 그들은 병원을 박차고 무당(?)에게 가버렸다.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을 뿐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일어났을 뿐이다. 지식인들이 그리고 48%가 ‘박정희적인 것의 복권’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것은 당위적 기대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로 당위를 배반한다. 배반된 당위를 붙잡고 원망의 눈물을 뿌려봐야 현실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일단 필요한 것은 당위적 비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는 태도다. 사람들은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그것도 ‘어머니화한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적나라한 사실이다. 일단 이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자. 당위적 판단은 그 다음 문제다. 사람들이 착오 상태에 빠질 수 있으며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박정희 신드롬에 빠졌는가? 박정희 신드롬 혹은 어머니 박정희로서의 박근혜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망딸리떼는 과연 무엇에서 기인한 것일까?

 

이상한 고해성사

 

‘박정희 신드롬’이 대중적 현상으로 자리하게 된 계기는 15대 대선 무렵 부터였다. 구제금융 사태 등의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당시 문민정부의 지지도는 최악이었고, 이것은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한국은 IMF의 구제 금융에 목을 매고 있었다. 한보, 한라, 기아 등 대표적 기업들이 쓰러지거나 인수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부족한 소득은 빚으로 돌려막으며 연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몇 해 전만 해도 자동차를 사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소비문화를 즐기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워크아웃과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라는 낯선 말들이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제야 비로소 지긋지긋한 빈곤의 굴레로부터 헤어 나와 살만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한민국은 부도가 나있었다. 빈곤의 재림이라는 불길한 소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제 회복을 지상 과제로 모시게끔 했다. ‘기업이 있어야 일자리도 있다’는 말이 슬그머니 ‘재벌 체제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국민의 세금은 재벌 생존 자금으로 사라졌다. 세금으로 살린 재벌 기업의 임자는 여전히 그들이었다. 재벌 개혁은 물 건너갔다. 정부 규제는 점점 약화되더니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때마침 15대와 16대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한 수구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세력과 개혁 정책을 약화시키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의 약한 고리는 경제 위기였고 ‘빨갱이 대통령’이라는 이미지였다. 이 이미지를 극대화 시키려면 대항 캐릭터가 필요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안성맞춤이었다. 수구 언론에서 그는 반공투사이자 경제 성장의 아이콘으로만 부각되었다. 독재자 전력은 감추거나 경제 성장을 위한 불가피론으로 비껴갔다. 이상이 사람들이 지적했던, 박정희 신드롬이 수구 언론에 의해 가공되고 전파된 사정이다. ‘좌파 대통령’ 정부가 시도하려던 경제 정책은 무조건 좌경으로 몰렸다.

다급해진 국민의 정부는 과거 세력을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이들로 추켜세움으로써 ‘빨갱이 대통령’의 이미지를 상쇄시키려 했다. 사실 국민의 정부는 박정희 체제를 함께했던 세력과의 공조를 통해 집권한 덕에 구세력에게 면죄부를 발부해야 하는 악성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재자 박정희의 자취를 없애고 ‘경제 건설자 박정희’로 이미지를 세탁하던 수구 언론의 작업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지원 약속이 상징적 사례였다.

수구 언론과 정치 세력에게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 신드롬에 의해 가공된 역사가 마침내 국민의 정부에 의해 승인된 셈이니 말이다. 죄의 고백 없이 이루어진 이상한 고해성사는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토탈 리콜’의 한국적 적용, 즉 국민적 수준에서의 기억의 세척과 선택적 기억을 이루어냈다. 놀랍게도 ‘토탈 리콜’은 대중뿐만 아니라 박정희 체제에 대한 비판자들에게도 해당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서 현재까지 ‘경제에서는 좋았지만, 역시 정치에서는 나빴다’라든가, ‘쿠데타와 독선적 정국 운영은 경제발전을 위해서 감행한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라는 평가가 진보적 지식인들의 입에서도 발설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른바 생계와 살림살이의 신화를 내세우는 ‘어머니화된 박정희’가 한국인 모두의 마음을 사기 시작한 때였다.

 

ⓒ오마이뉴스

모의재판의 추억

 

필자가 박정희 신드롬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인 1998년 무렵이었다. 수구세력이 주도한 박정희 복권의 노력은 ‘영애’의 국회 입성이라는 결실을 봤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필자는 학회원들과 함께 박정희 모의재판을 진행했다. 재판은 독재자 박정희의 행적을 강조하는 검사와 경제적 업적을 강조하는 변호사의 대결로 이루어졌다. 재판을 통해 박정희 옹호론의 허구성을 실증적으로 폭로하려는 생각으로 진행했는데, 다소 높았던 관심에 비해 반응은 의외로 냉랭했다. 당시 나는 그 이유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에서 찾았다. 참주의 폭압적 지배를 인식하지 못한 학우들의 어리석음이 학습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민주적 가치보다는 경제적 여유를 희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직과 부도를 맞은 집안은 부지기수였고, 취업 설명회는 어디에서도 열리지 않았다. 당장에 등록금과 생활비, 청년실업의 수난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민주적 가치를 유린한 박정희보다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박정희의 이야기가 귀에 착착 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이러한 사정은 한국의 시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실업과 부도, 얄팍한 소득과 과중한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장땡이었다. 대중의 속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던 박정희의 비판자들은 예의 이분법 논리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진행하였다. 이는 의도와는 다르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호감을 더욱 자극했다. 궁한 사정에서는 독재자로서의 박정희 이야기보다는 경제 건설자로서의 박정희 이야기가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중은 학문적 논거의 타당성과 질에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이성적 청취자가 아니라 경제적 낙오의 공포감에 떠는 이들이었다. 논쟁이 심화될수록 경제 영웅으로서의 박정희 신드롬은 강화됐고, ‘어머니 박정희 앓이’는 이명박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17대 대선과 함께 박정희 신드롬은 이명박 후보의 불도저 이미지와 합체하면서 CEO 대통령이라는 기업형 완전체로 진화하였다. 대중에게 박정희는 이명박이고, 이명박은 박정희였다. 토건을 통한 성장은 둘의 합체를 가능하게 만든 매개체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뚫은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도 운하를 뚫어 우리 사회를 널리 풍요롭게 하리라.’ 마침내 사람들은 이명박이라는 검은 고양이를 선택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든 말든 그저 돈만 잔뜩 벌어다 준다면 과거의 잘못은 용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잊은 게 하나 있었다. 맡긴 건 생선 가게였다.

(다음에 계속)

 

18대 대선, 분열되고 전치된 한국사회의 자화상-①[시대와 철학]

18대 대선, 분열되고 전치된 한국사회의 자화상-①[시대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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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균(한철연 기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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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투표율과 안철수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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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이 치러진 지난달 19일 한 유권자가 투표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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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이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진행된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는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박근혜 후보의 승리와 문재인 후보의 패배 요인을 다양하게 분석하고 있다. 처음에는 89.9%에 이르는 50대의 높은 투표율에 놀랐고 ‘50대 책임론’이 부상하더니 어느 사이엔가 50대 책임론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사라지고 민주당의 무능론을 비롯하여 다양한 책임론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분석들도 그다지 설득력이 있거나 명료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18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없기 때문이다.

18대 대선이 끝난 지 20여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진보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번 대선 결과에 의아해 하는 것은 이번 대선 결과들이 기존의 분석 틀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전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진보 대 보수의 프레임으로 단일하면 진보가 20-30대의 높은 지지율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투표율이 70%를 넘으면 진보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본 결과, 75.8%라는 높은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후보는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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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역대 대선 투표율의 증감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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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전체

16대 대선 투표율

56.55

67.55

76.30

83.70

78.70

70.8

17대 대선 투표율

47.9

54.9

66.3

76.6

76.3

63.0

16대 대선 대비 하락율

-8.65

-12.65

-10.00

-7.10

-2.40

-6.2

18대 대선 투표율

65.2

72.5

78.7

89.9

78.8

75.8

16대 대선 대비 상승율

8.65

4.95

2.4

6.2

0.1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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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번 대선의 높은 투표율이 늙은 세대에 의해서만 견인된 것은 아니다. 위 표 1에서 보듯이 이번 대선의 높은 투표율을 견인하고 있는 세대는 20대와 50대였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16대 대선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높은 투표율 상승을 보인 것은 20대였으며 그 다음이 50대였으며 40대 또한 2.4%나 올랐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20대의 투표율이 가장 낮다고 말하면서 ‘20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탓할지 모르지만 16대 대선보다 이번 대선에서의 투표율이 8.65%나 올랐다는 점에서 그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오히려 이런 높은 투표율 상승이 보여주는 것은 이번 제18대 대선이 진보 대 보수라는 양 진영 사이의 선택이 보다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이명박 후보가 승리한 17대 대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투표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무현 정권의 실정과 더불어 이명박 후보로 일치감치 대세가 결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7대 대선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대중적 실망이 낮은 투표율로, ‘반의회’, ‘반정당정치’와 같은 회의와 연결되면서 ‘탈정치적 성향’으로 나타났다면 이번 대선에서는 그와 같은 성향이 역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역전은 민주당이나 문재인 후보가 주도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안철수현상’이다. 후보 안철수가 아니라 ‘안철수’라는 코드로 상징화된 ‘안철수현상’은 노무현정권의 실정 이후 이반되거나 정치적 무관심층을 대선이라는 장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후보를 이 정도의 경쟁력을 가진 후보로 만든 것은 민주당도 노무현도 아니고 ‘안철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재인 후보도, 민주당도 ‘안철수현상’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중도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정치 전략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막연하게 그들은 후보단일화만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철수현상’은 이미 2004년 탄핵 정국에서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된 이후, 노무현정권이 ‘개혁’이 실패하면서부터 급속히 진행되어 온 탈정치화 현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후, 노무현정권은 이명박정권이 탄생한 2007년 대선까지 각종 선거에서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2007년 대선은 이런 참패의 지속적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것은 노무현정권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낮은 투표율이라는 ‘탈정치화’로 귀결되었으며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48.7%를 얻어 정동영 후보가 획득한 26.1%에 비해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득표율에서 역사상 가장 적은 득표로 대통령이 되는 오명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민주통합당은 결코 대중의 지지를 획득해본 적이 없었다. 민주통합당이 다시 대중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그들이 ‘민주단일후보’였을 때뿐이며 평상시에 당 자체가 20% 이상의 지지율을 획득하지 못했다. 이것은 민주통합당도, 노무현이라는 아이콘도 더 이상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에 대항하는 야당으로서의 세력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중들은 둘 다 신뢰하지 않았다. 따라서 문제는 둘 다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노빠’들을 정리하지 못했으며 대선의 프레임을 ‘보수 대 진보’, ‘죽은 박정희 대 죽은 노무현’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은 노무현의 완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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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갈등의 격화와 세대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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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죽은 노무현의 완패’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50대의 반란으로부터 온다. 40대까지 포함하여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은 노무현 후보의 득표율에 비해 각각 20대 8.0%, 30대 8.3%, 40대 11.3%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후보는 패배했다. 그것은 89.9%라는, 상상하기 힘든 50대의 투표율의 상승과 50대 이상의 세대가 박근혜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16대 대선에서 이회창후보와 노무현후보 간의 격차와 비교해 볼 때, 당시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율보다 50대 7.3%, 60대 이상 16.2% 더 많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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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2002년 대선과 2012년 대선의 세대별 지지율 변동

지지후보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이상

이회창

34.9

34.2

47.9

57.9

63.5

노무현

59.0

59.3

48.1

40.1

34.9

이회창/노무현 지지율 격차

24.1

25.1

0.2

17.8

28.6

박근혜

33.7

33.1

44.1

62.5

72.3

문재인

65.8

66.5

55.6

37.4

27.5

박근혜/문재인 지지율 격차

32.1

33.4

11.5

25.1

44.8

16대비 지지율 증감

8.0(문재인 지지)

8.3(문재인 지지)

11.3(문재인 지지)

7.3(박근혜 지지)

16.2(박근혜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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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 2에서 보듯이 20대, 30대는 투표율뿐만 아니라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율도 노무현 후보 지지율보다 각각 8.0, 8.3%가 올랐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40대는 무려 11.3%나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대의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7.3%, 60대 이상은 16.2%나 올랐다. 따라서 16대 대선과 비교하여 보면, 이번 18대 대선에서 40대까지는 더 많은 사람이 ‘보수후보(?, 보다 정확히 수구후보)’를, 50대 이상은 더 많은 사람이 ‘진보후보(?, 보다 정확히 중도보수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특징은 세대 간의 분열이 과거 지역적 분열에 대신하면서 더욱더 명확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선 이후 어떤 사람들은 ‘세대 간 갈등’으로 이번 대선을 보는 코드가 잘못되어 있으며 ‘50대 책임론’을 말하는 것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 대선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명백하다. 40대 이하는 더욱더 좌로, 50대 이상은 더욱더 우로 이동했으며 그 격차는 훨씬 더 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세대 간의 갈등이나 분열론’은 50대 책임론이나 책임 전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 조건과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서 출발해야 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런 ‘세대 간의 분열’은 이번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적어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15대 대선 이후 점차적으로 증폭되어 온 경향이기도 하다. 15대, 16대, 18대 대선에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지지율을 보면 20대 50.4→59.0→65.8%, 30대 42.7→59.3→66.5%, 40대 33.5→48.1→55.6%로 더욱더 올라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면, 50대 이상의 지지율은 더 떨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15대 대선에서 50대 이상은 33.7%만이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반면 16대, 18대에서는 각각 50대 40.1→37.4%, 60대 이상 34.9→27.5%로 떨어지면서 반대편의 후보를 지지율은 상승해왔다. 따라서 세대 간의 분열은 증폭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세대 간의 분열 양상을 항간에서 회자되듯이 생물학적인 연령의 상승,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보수화되는 것의 효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구별하지 않지만 ‘연령효과’와 ‘세대효과’는 다르며 생물학적 나이 먹음과 보수화를 등치시키는 것은 ‘연령효과’만을 보는 것이다. ‘세대효과’는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적 경험에 대한 공동체험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런 세대효과는 지난 15대 대선 이후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40대 이하의 세대와 50대 이상의 세대 간의 분열을 설명해줄 수 있는 코드이자 40대 이하의 세대가 더욱더 좌로 움직이는 변동을 설명해줄 수 있는 요인이다.

이번 선거에 투표를 한 20대는 1982-1993년 출생자로서 현재 대학생들이 주축이며, 30대는 1972-1983년 출생자로서 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으며 한국의 대중소비사회를 향유한 세대이며, 40대는 1963-1972년 출생자로서 80년대 서울의 봄과 6.10민주항쟁과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이어받은 주역들이었으며, 50대는 1953-1962년 출생자로서 1972년 유신 시대에 대학을 다녔으며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 사이에 IMF를 겪었으며, 60대 이상은 1953년 이전 출생자로서 어린 시절 6.25를 경험했거나 그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세대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 결과에서 드러나듯이 기점이 되는 것은 40대이다. 소위 486세대(이전, 386)라고 하는 집단은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니고 현재 나이가 40대인 사람들을 통칭한다. 그러나 이런 세대별 특징으로 본다면 이번 대선에서 50세부터 53세까지는 486세대에 속하며 87년 민주화운동의 주역들 중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대를 동질적인 집단으로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5세 단위로 조사한 2012년 12월 12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를 보면 50대 전반과 후반의 정치적 성향은 다르다. 50대 전반은 진보 25.0, 보수 33.9, 중도 36.5%인 반면 후반은 진보 9.7, 보수 53.8, 중도 31.4%였다. 따라서 연령효과와 세대효과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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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대통령과 억압된 자들의 전치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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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 결과를 보면 특징적인 것은 40대 이하와 50대 이상 사이의 세대 간의 분열이 확연하게 갈라지고 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력별, 계층별로도 역전된 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상위소득자들은 일관되게 보수후보를 지지한 반면 하위 소득자들은 더 강력하게 보수후보를 지지하며 학력이 낮을수록 보수적인 투표행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난 2012년 12월 11일 동아일보와 ‘리서치앤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신뢰수준 95%, 오차범위 3.1%P)에서 드러나는 바이다. 여기서 박근혜 후보는 45.3%를 얻었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41.4%를 얻었다.

직업별 지지율

월(月) 소득별 지지율

학력별 지지율

*농림어민: 朴 55.2-文 37.1%

*자영업: 朴 50.2-文 37.1%

*화이트칼라: 朴 32.7-文 53.5%

*블루칼라: 朴 43.1-文 48.1%

*가정주부: 朴 55.6-文 32.3%

*학생: 朴 27.9%-文 57.7%

*무직: 朴 60.4-文 19.3%

*200만 원 이하: 朴 56.1-文 27.6%

*201만~300만 원: 朴 40.1%-文 47.6%

*301만~400만 원: 朴 43.5-文 47.3%

*401~500만 원: 朴 39.4-文 50.6%

*501만 원 이상: 朴 40.8-文 46.4%

*중졸 이하: 朴 63.9-文 23.5%

*고졸 이하: 朴 52.8-文 33.1%

*대재 이상: 朴 37.4-文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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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투표 성향은 이번 대선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지난 3차례 대선에서 저소득층과 저학력층은 그들의 계급적 조건과 무관하게 보수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해왔다. 이것은 계급 배반적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후보를 지지한 것은 중간층과 고학력층이었다. 반면 상위 소득자들은 일관되게 보수후보를 지지했으며 그들만이 한국사회에서 유일하게 계급투표를 해왔다. 특히, 저학력과 고학력의 차이는 1980년대 이후, 대학이 늘어나면서 대학생의 숫자가 늘었다는 점에서 50대 이상과 이후 간의 투표 성향의 차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 나타난 독특하게 드러난 현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별에 따른 지지 성향이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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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남녀-세대별 지지율 격차

박근혜/문재인 지지율 격차

전체

20대

24.9(문재인 더 지지)

38.4(문재인 더 지지)

32.1(문재인 더 지지)

30대

36.6(문재인 더 지지)

30.4(문재인 더 지지)

33.4(문재인 더 지지)

40대

18.7(문재인 더 지지)

4.2(문재인 지지)

11.5(문재인 더 지지)

50대

19.0(박근혜 더 지지)

31.5(박근혜 더 지지)

25.1(박근혜 더 지지)

60대 이상

44.2(박근혜 더 지지)

45.2(박근혜 더 지지)

44.8(박근혜 더 지지)

하지만 이런 성별 지지 성향의 차이는 모든 세대에 동일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대별 정치적 지지 성향의 분화는 여성의 분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박근혜 후보에 대한 남/여 지지율은 49.1 대 51.1%였고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49.8 대 47.9%로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그렇게 크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위의 표 3에 남/여 간의 박근혜 대 문재인 지지율 격차를 보면 세대별에 따라서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30대부터 여성은 남성에 비해 박근혜 후보를 더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여성대통령’이라는 구호가 먹혀들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40대까지만 하더라도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표 3에서 보듯이 50대 여성에 이르면 완전히 바뀐다. 50대 남성은 59.4 대 40.4%로 박근혜 후보를 더 지지한 반면 50대 여성은 65.7 대 34.2%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문재인 대비 박근혜 지지율의 격차는 50대 남성의 문재인 대비 박근혜 지지율보다 22.5%(31.5-19.0)나 높다. 물론 60대 이상의 여성의 박근혜 지지율은 50대 여성보다 높다. 하지만 이 경우, 50대 남성의 문재인 대비 박근혜 지지율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50대의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율 상승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50대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60대 여성의 높은 박근혜 후보 지지율을 상쇄하고 있는 것은 20대 여성이다. 20대는 모든 세대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박근혜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대 여성은 박근혜 30.6 대 문재인 69.0으로, 37.3 대 62.2%로 문재인 후보를 더 지지하고 있는 20대 남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20대 여성의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50대 여성의 박근혜 후보에 대한 남녀별 격차를 해소하면서 전체적으로 남/여의 지지율이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 결과를 놓고 분석되어야 할 것은 세대별 격차와 40대 이하와 50대 이상 사이의 분열에 대한 양상뿐만 아니라 ‘20대 여성과 50대 여성의 차이가 어떤 세대별 경험이나 사회구조와 관련되어 있는가?’일 것이다. 게다가 20대와 50대는 서로 모녀지간의 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대선 결과가 남긴 분석적 과제는 이번 대선의 반란을 만들어낸 50대의 세대경험이 역사적으로 그들의 어떤 정치-사회적 경험 및 욕망과 관련되어 있는지와 더불어 ‘박근혜 후보’의 지지를 통해 표출된 50대-20대의 여성성의 대립이 과연 어떤 역사적 체험 또는 정서체계와 관련되어 있는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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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산 가스가 뒤덮은 죽음의 그림자와 정치 [시대와 철학]

불산 가스가 뒤덮은 죽음의 그림자와 정치?[시대와 철학]

박종성(한철연 대외협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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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양과 공기는 이상이 없다”, 그러나 농작물은 죽어갔다

 

추석 전인 9월 27일 오후 3시 넘어, 경북 구미시 산동면 봉산리 마을은 구미국가산업단지 4단지에 자리하고 있는 화학제품 제조업체 (주)휴브글로벌에서 유출된 ‘불산가스’로 뒤덮였다. 불산가스가 마을을 뒤덮은 이후에 마을 주민들은 마을 이장으로부터 유독가스라는 말을 듣고 대피를 하였다. (주)휴브글로벌은 LCD액정 세척제를 제조하는 업체이며, 이날 20톤의 불산가스를 옮기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5명이 사망하였다. 이날 오후 8시 구미시는 사고지점 1.3km 이내 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고 다음날 대기 중에 불산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가조치를 했다. 그러나 이번 국감에서 이러한 대처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먼저 소방방재청은 16시 20분에 행안부, 환경부에 FAX통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구지방환경청은 불산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 후 1시간 15분이 지나서야 상황을 접수했다고 밝히고 있다.

▲ 4일 경북 구미시 산동면 봉산리의 한 밭에 있는 콩 잎이 누렇게 말라 죽고 있다. ⓒ연합뉴스

또한 노동부가 산업안전보건법 ‘화학물질노출기준’(2012-31호)에 따르면, 불산의 작업장 기준치는 0.5ppm이고 사고 현장 반경50m안 오염도가 1ppm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주민들이 대피한 상황에서도 공장은 정상 가동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사고 현장에서 50m떨어진 노동자들을 대피시키지 않았다. 구미공단 4단지 내의 14,400여명의 노동자들은 사고 이후에도 자본의 이익을 위해 생명을 걸고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과 효율성을 제1의 가치로 간주하는 사회의 내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자본 앞에서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은 언제나 무의미하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자본과 권력기관이 빚어낸 참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용 노동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공장 가동여부를 감독해야만 했다. 더구나 이 사건과 관련되어 현장방문을 나온 의원의 요청에 고용노동부 직원은 “개입하고 싶지 않다”며 도망가는 사태를 보였다. 그러나 농작물은 죽어 가는데, 주민들은 고통을 호소하는데 여전히 공장은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고용 노동부의 무개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들은 추석 연휴에 일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 벌이지는 것은 구미시와 무관하지 않다. 구미시는 ‘투자유치’ 1위를 내세우며 해외기업은 노조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민주노조를 억압하였다. 이번에 사고가 난 구미국가산업단지 4단지는 무노조지역이고 비정규직 비중도 상당히 높은 지역이라고 한다. 자본과 권력은 인간의 생명보다는 이윤창출이 보다 중요한 가치임을 이번 사건을 통해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사고 이후에 농작물과 나무가 죽어갔고 마을 주민들도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을 호소했지만, 사고 후 일주일이 지난 10월 4일에서 이동검진 차량이 와서 진료를 했다고 한다. 그것도 오후 2-4시까지이고 토 · 일은 진료를 하지 않았다. 이틀 후 진료시간은 6시간으로 늘었지만 접수된 사람이 많아서 이들을 진료하면 업무시간이 끝난다는 이유로 진료를 못 받는 이들도 있었다. 10월5일, 정부 재난합동조사단 한상권 단장이 마을회관을 찾아 “토양과 공기는 이상이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식물들은 죽어갔다. 주민들의 고통은 여전한데 유영숙 환경부 장관, 김태환 국회의원, 남유진 구미시장이 주민을 만나 악수하고 사진을 찍었다. 가식의 정치는 죽음의 그림자가 마을을 뒤덮어도 죽음과 고통을 뒤로 한 채 여전히 일관성 있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존재 자체는 인간의 생존권을 제일 먼저 고려해야만 그 존재 가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조차도 절대국가를 지향하지만 그 전제는 인간의 생존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국가의 존재 자체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10월 8일, 정부는 봉산리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참으로도 ‘너무’ 빠른(?) 대책이 아닐 수 없다. 노동자 5명이 사망하고 10월10일까지 공무원과 소방관 등 7000여 명이 검진을 받았다고 한다. “토양과 공기는 이상이 없다”는 정부의 주장과는 다르게 전문가들은 불산은 신경조직을 손상시키고 피부에 침투하면 칼슘을 손상시켜 뼈를 녹이고 불산을 없애는 완전한 물질은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위험하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지방환경청은 고가의 간이 측정장비와 탐지측정장비, 보호복과 공기호흡기, 소석회 살포기와 분말 소석회 등을 갖추고 있었으나 불산을 물로 씻어냈을 뿐이다. 10월11일 봉산리 주민 200여 명이 구미환경자원화시설로, 임천리 주민 230여명도 해평면 청소년수련원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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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고와 함께 살아가기

 

이번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정부의 유독물질 관리체계가 엉망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주민과 노동자는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주)휴브글로벌은 이미 2009년부터 2012년 10월까지 3건의 산업재해가 발생했던 곳이라고 한다. 2009년 6월 30일에 일어난 가스 분출로 노동자 박모씨가 얼굴과 가슴에 화상을 입었고 치료 후 근무가 불가능해 퇴사했다고 한다. 더욱이 구미시에 총 60여 곳의 불산 취급 사업장이 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앙을 품고 사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충분히 예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부는 연간 불산 취급량이 10톤 이상인 업체, 그리고 노동자 30인 이상인 업체를 대상으로 ‘화학물질 배출 · 이동량 정보 조사 · 공개 시스템’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주)휴브글로벌은 불산의 양이 20톤이지만 노동자 30인 이상이라는 조건에 해당되지 않아서 관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대구노동청장은 불산 유출 사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그렇다고 노동부가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도 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이 인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제도개선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러나듯이 이와 같은 재앙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리대상의 기준 또한 변경해야만 할 것이다.

(주)휴브글로벌 불산 가스누출 사건과 같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업체가 구미시에 60여 곳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재앙을 안고 있는 지역이 울산시이다. 울산시 불산 취급 사업장은 6곳이다. 그런데 그 용량이 1만 5,110톤이다. 따라서 이번 구미 사고에서 누출된 불산 8톤의 2,000배 가까운 양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울산은 구미에서 일어난 사건이 현실화 될 수 있는 재앙이 매우 높게 잠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2011년 8월 17일 현대EP 울산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숨지고 5명이 크게 다쳤고 같은 해 세진중공업에서도 12월 30일 폭발사고가 나 4명이 숨졌으며, 2012년 5월 6일, 태광산업에서 화재로 10명이 온몸에 1~3도의 중화상을 입었다. 울산지역 위험물은 전국 저장량의 35%을 차지하고 이러한 공단은 도심과 1∼5㎞ 거리에 있으며 대부분의 업체가 60, 70년대 건설돼 사고 위험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안전보건공단의 석유화학단지 내 131개 업체 조사 결과 20% 가량이 폭발, 화재 위험이 있으며 사업장이 주택가와 멀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 노동자와 그 주변의 주민의 생존을 항시적으로 위협하는 인재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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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정치에 가려진 생존권

 

성범죄에 대해 직접 대책을 지시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던 MB와 이와 발맞추어 공포를 조장하는 언론은 이번 불산 유출 사건에 대해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있으면 언론들은 너도나도 그 지시에 대해 보도하느라 분주하였다. 나아가 박근혜 대선 후보는 MB에게 대선 기간 내내 ‘안전확립기간’을 요구하였고 언론의 자유를 봉인한 권력은 치안을 강조하면서 공포를 조장한다. 주폭과의 전쟁도 그것의 일종이다. 실제로 MB정부 들어서 성범죄와 같은 강력범죄에 대한 보도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정치 프레임을 사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응징과 복수의 정치 프레임은 보수당에 유리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사실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의 프레임을 조장하는 정치는 다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차단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념을 기획하는 이러한 정치는 공포에 대한 응징에 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스피노자 말하는 정치 개념이 이러한 구조이다. 이러한 결과 우리들은 이번 사태와 같은 노동자의 문제, 유독성 물질의 노출에 심각히 노출된 상태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문제 등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지난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사망한 산모와 영 · 유아들에 대한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사건과 관련되어서 공포의 정치를 조장함으로써 공포의 이미지가 대중의 정신을 사로잡길 원한다.

물론 권력은 이러한 공포의 이미지가 사라지면 새로운 이미지를 보충적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이번 불산 유출 사건을 계기로 공포 정치에 강박적인 특징을 보이는 권력에 대하여 숙고할 필요가 있다. 정치의 핵심적 요소가 인간의 정념을 기획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은 공포의 프레임이라는 단일관념, 예들 들어 공포의 절대적 군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공포 정치의 이미지와 연합되는 고통스런 노동의 이미지, 공포 정치에 의해 탈취된 직접적인 향유의 이미지를 복원시키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응징이라는 공포정치에서 누락되는 이미지를 복원시키는 것이다. 즉 범죄는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불산사고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사건을 수습했던 국립환경과학원 화학물질안전관리센터는 총인원 13명 중 11명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복원시키는 것이다.

또한 공포 이미지에 대한 강조에서 간과되는 노동자의 생명, 주민들의 생명에 대한 권력과 자본의 태도를 직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공포정치 편집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은 인간의 생명보다 자본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회의 토대가 흔들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점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자본과 권력이 바라보는 인간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이번 사태로 드러나듯이, 불산으로 인하여 식물이 말라가며 죽어가듯이 인간도 충분히 그렇게 되어도 된다는 것이다. 자본에게 그리고 그것과 결탁한 권력에게는 차가운 이윤의 논리만이 있을 뿐이다. 대선의 계절이 돌아왔다. 우리에게 새로운 정치는 인간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그러한 권력일 것이다.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박영균(한철연 기조부장)

 

증오를 부추기는 세상

 

2012년 여름과 초가을, 한국 사회는 온통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대외적으로 한국 사회는 이명박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기점으로 하여 반일감정에 휩싸여 있으며 대내적으로는 ‘묻지마 살인’과 ‘성폭행’이라는 흉악범들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여기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사건에는 사람들에게 공분을 자아낼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분’이 ‘증오의 정치’를 생산할 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보존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해치는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때, 그것에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분노가 특정 범죄자들, 특정 인물에 대한 ‘제거 또는 살해의 욕망’으로 전화할 때, 그것은 ‘위험’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 ‘위험’은 결코 ‘작은 위험’이 아니다. 그것은 흉악범죄가 지닌 위험보다 훨씬 위험한, 근본적인 위험이다. 이런 위험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된 박근혜의원은 “흉악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저지른 사람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 사형제는 필요하다”고 출입기자 오찬에서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이어 새누리당 박인숙의원은 재범 가능성이 큰 상습적 성범죄자에 대해서 물리적 거세를 실시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그리하여 흉악범들에 대한 분노는 그들에 대한 제거의 욕망으로 이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합리적인 토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나주 초등학생 납치 성폭행 사건 피의자 고아무개 씨가 2일 고개를 떨군 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그러나 이런 선의 절대성에 근거한 ‘제거의 욕망’은 본질적인 물음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이런 흉악범들을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면 범죄는 사라질 수 있는가이다. 그들은 모든 죄의 원인을 몇몇 흉악범들에게 돌린다. 그들이 보기에 범죄는 범죄를 저지른 자 안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애초 인간이 아닌 ‘괴물들’만을 제거하면 사회는 마치 깨끗해질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암세포를 돌려내면 암은 사라지기도 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암세포를 돌려낸다고 암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암세포를 이겨낼 수 있는 우리의 신체, 사회적 환경이다. 사회가 흉악범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와 같은 암세포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눈에 즉자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즉물성에 빠져 ‘혐오’를 증오로 바꾸어 놓고 있다.

‘악’에 대한 정당한 ‘분노’는 정의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는 ‘혐오의 감정’을 근거한 ‘분노’가 되어 버릴 때, 그것은 오히려 더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복수’는 정의의 감정에서 나온다. 하지만 악을 제거하고자 했던 복수의 감정이 오히려 자신을 더 흉측한 괴물로 만들어버리면서 ‘복수의 악순환’을 낳는 것처럼 그것은 ‘악’을 먹고 자라는 더 근본적인 ‘악’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증오의 정치학과 노예의 도덕

 

정념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스피노자는 이미 이와 같은 ‘악’의 악순환을 사유했었다. 그는 ‘원인에 대한 무지’가 부정적 정서에 근거한 악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문제는 이 악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정념에 붙잡혀, 이 ‘악’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현재의 정념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형제’와 같은 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그것을 처벌할 수 있는 더 강력한 권력을 요구한다.

최근 한 연예인(배우, 김규리)은 자신의 트위터에 “신체절단형 난 반댈세~ 유신이 부활하면 아무나 멍에 씌워 절단해버릴 수 있을 것 같음. 무서워~~”라는 글을 남겼다. 민주통합당도 박근혜의 사형제 옹호 발언에 대해서 유신정권 시절 ‘인혁당’으로 몰아 사형을 집행했던 과거의 역사에 들추어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이에 대해 ‘웬 뜬금없는 이야기냐’는 식으로 민주통합당을 몰아붙였다. 사실, 이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다. 하나는 흉악범에 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정치범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전쟁’, ‘범죄에 대한 전쟁’ 등, ‘?에 대한 전쟁’이라는 모토로 표현되는, 어떤 특정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 없는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식이었다. 박정희 구데타 정권은 ‘북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전두환 구데타 정권은 ‘범죄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면서 이에 대한 청산 작업을 벌였다. 유신독재시절에 정적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것도, 사회정화를 내세우며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런 ‘악에 대한 전쟁’이었다.

만일 독재를 만들어낸 것이 대중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악의 제거’라는 ‘선(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바디우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사이비 선에 대한 열정일 뿐이다. 그것은 실상, 선을 추구하는 정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확히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를 보라. 그들이 선교하는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신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옥’이라는 형벌의 참혹성에 대한 공포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폭력범죄자’들에 대한 공분 또한 정확히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물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포를 통해서 생산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보다 거대한, 근본적인 악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를 지배하는 권력’에 나를 위탁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보았듯이 폭군은 이와 같은 슬픔의 정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슬픈 정념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은 그것을 권력에 위탁시킴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켜버린다. 따라서 김규리의 이야기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권력은 ‘악’을 먹고 자라난다. 그들은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강화하며 법을 신성화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군주제의 커다란 비밀과 그것의 근본적인 관심은 인간들을 속박할 때 이용하는 공포를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하면서 인간들을 속이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예속이 마치 자신들의 안녕이기라도 하듯이 예속을 위해서 투쟁한다.”

 

지배의 정치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분단 문제가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와 대립으로, 지역 간의 갈등과 분열로 비화하는 것 또한, 바로 이와 같은 ‘증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북’을 악으로 불러내며 그것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파시스트적 권력을 만들어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거대한 권력이 되어버린 기독교는 ‘예수 믿어. 안 그러면 지옥 가!’라는 공포를 통해서 교회 내에서의 유일권력을 만들어냈으며 그 권력을 만들어준 대중은 스스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부정적 정서’와 ‘정념’의 포로가 되어 주인을 위해 싸운다. 따라서 문제는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해방과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투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투쟁은 단순히 부정의와 싸우는 것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아차’ 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그 스스로를 속이면서 빠져드는 ‘정념들’과의 투쟁 또한 요구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선’으로 포장하는 ‘정의’가 아니라 ‘정의’ 그 자체, ‘선’ 그 자체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나(대중) 자신의 성찰이자 권력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삐딱하게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은 나의 슬픈 영혼을 부추겨 그들의 지배적인 힘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고해의 삶에서 얻는 상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지배의 정치학은 우리의 고통을 파먹고 살며 우리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며 그 잔혹한 삶의 고통이 유발하는 분노의 정념을 파먹고 자라난다. 따라서 지배의 정치학은 나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나 자신의 밖을 향해, 타자에 대한 공격과 원한으로부터 출발한다. 민주주의가 가진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때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는, 5년 전에 그랬듯이 한편으로, ‘민생이니 사회통합이니’하면서 노무현-김대중-전태일기념사업회를 방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의 강력한 권력을 환기시키는 이중의 행보가 지닌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을 배신하고 또 다시 대중들 스스로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4.11 선거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시대와 철학]

4.11 선거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시대와 철학]

이 순 웅(숭실대 강사)

 

1. 집단주의의 뿌리

 

1980년대 초반에는 ‘NL(national liberation)’이니 ‘PD(people democracy)’니 하는 게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표면화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피를 먹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 그 정권을 감싸고도는 미국, 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바빴다. 북한에 관해서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친일세력을 청산했고 거지가 없을 거라는 정도라고나 할까.

1982년쯤일 것이다. ‘야비’(야학 비판)라는 문건이 돌고, 학생운동의 위상에 관한 논쟁이 조금씩 일었다. 그건 한국 사회에 관한 진단의 문제였고 변혁 방법론에 관한 문제였다.

정확히 몇 년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198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가 ‘외채 4강’에 들기도 했다. 한 번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4개 국가가 국제 축구 대회를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4개 국가는 외채가 많은 순으로 1~4위였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 ⓒ연합뉴스

당시의 변혁 노선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자본주의 파국론’에 입각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학생 운동보다는 노동운동에 기대를 일종의 ‘준비론’이었다. 자본주의 파국론에 따르면 학생운동은 일종의 기동전 같은 것으로서 도시 봉기의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1980년 광주, 강절도 사건이 전무했던 것으로 알려진 해방구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시민군 편이었고 ‘완벽한’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본주의 파국론에는 광주에서의 봉기가 확산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내지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봉기가 가능하리란 진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외채 비율이 높은 것은 일종의 경제 파국의 징표처럼 보였다. 경제 파국은 민중의 불만을 유발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러시아식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이 변혁 노선의 한 축을 형성했던 것이다.

한편 준비론은 광주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보다 근본적인 변혁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전두환 정권은 봉기를 진압했고, 각종 언론 등을 동원한 이미지 조작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계급에 기반을 둔 투쟁, 보다 근본적인 계급, 노동자 계급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은 일종의 특권 신분으로서 언제든지 변절할 가능성이 있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했다. 일종의 사상적 무장이 강조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사례도 있다. 광주 항쟁이 일어나기 전, 서울역에 모였던 대학생들은 만일의 경우 다시 거리로 나서겠다고 하면서 철수해버렸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작전 실패’였던 것이다. 군부 정권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서울의 학생운동은 군부 세력의 폭력적 각개격파에 무너졌으며 광주에서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광주 항쟁에서도 인텔리들은 투항을 결정한다. 주로 인텔리로 구성된 지도부는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자는 결정을 내렸으며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은 대개 못 배우고 가난한 민중들이었다.

비록 오래 전 얘기이긴 하지만 두 노선은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는 방법론이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어떤 노선이 옳은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노선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유다. 각각의 노선이 가진 논리적 정합성이나 현실 타당성이 아니라 내 선배가 어떤 노선을 선택했느냐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어떤 노선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선배들이 둘로 갈라졌다. 선배들의 판단은 무오류성을 지닌다고 생각했던 당시로서는 혼란이 적지 않았다. 어쨌든 나 역시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사실 그때의 내 기준은 좀 더 좋아하는 선배 편에 서는 것이었다. 어쩌면 논리보다는 인간관계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선택이 좀 더 쉬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중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만, 당시에는 일종의 현장 준비론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무서운 게 있다. 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당시에 이런 저런 노선상의 이유로 갈라졌던 이들이 ‘영원히 안 보는 관계’로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논리를 선택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배가 까라면 깠던 시절, 선배의 말은 다 옳은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파국론이나 준비론이나 둘 다 옳은 것처럼 여겨졌고 따지고 보면 어떤 노선이 옳은지 검증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일종의 혈맹 관계처럼 맺어졌던 그 인간관계를 누가 감히 깰 수 있었을까.

1980년대 후반의 학생 운동은 정파 간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던 노동 현장 운동과는 달리 통일운동 일변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NL파가 득세했다. 북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북한을 주력군 내지 동맹군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던 것 같다. 수령론이 어떻고, 북한 방송을 듣고 세미나를 한다는 등의 얘기를 간간이 들은 적이 있는데, 나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들이었다. 북한이 그 정도였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제법 길다. 박정희 정권 시절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40년이 넘는다. 봉건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민주화를 경험하지 못한 특수한 운동 환경은 민주적 의사소통보다는 가부장제나 권위에 의존하는 형태의 운동을 만들어냈다. 거기에다 학연, 지연 등의 요소는 같은 노선을 가진 운동권끼리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말은 노선이 다르면 원수처럼 지내기도 했다는 뜻도 된다.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의 내홍이 점입가경이다.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갈등이라 묘사되는 현 상황이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일종의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민통당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까. 2012년 5월 13일 현재, 이른바 당권파는 폭력적 상황까지 연출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기존의 제도권 정치를 통해서 보고 배운 것이기도 하기에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리고 통진당이 한국의 진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니 크게 기대할 것도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당 이름 치고 안 좋은 이름이 어디 있는가.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한나라당, 민주당, 새누리당 등 모두 좋은 이름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름에 걸맞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진보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서 곧 진보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태극기 머리에 두른 사람 중에서 제대로 된 애국자는 거의 없지 않은가. 어쨌든 현재의 통진당 사태를 볼 때 다음과 같은 판단은 가능해보인다.

아마도 비당권파는 이번 기회에 당권파의 (흔히 패권주의라 부르는) 집단주의를 일소하고 실질적인 헤게모니를 잡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일사불란한 전열을 갖춘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NL은 대중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대중 사업은 정치(精緻)한 논리적 토론이나 합의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교분과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때로는 이러한 문화가 일사불란하게 어떤 대응을 할 필요가 있을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지난번 선거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다분히 ‘성공적’인 결과를 낳은 이유 역시 오랜 대중 사업의 결과다.

반면에 PD는 견결한 계급성을 강조하지만 ‘영 아니다’ 싶은 대상과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성공적인 대중 사업과 거리가 멀다. 선거판에서 PD나 좌파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다. 얼마 전 좌파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진보 전략 회의’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에 관한 토론회를 열었다. 좌파의 총체적 실패를 두고 ‘반성하자’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나는 그 평가가 ‘우리도 NL처럼’으로 들렸다. 기왕에 선거판에 끼어들 것이라면 NL을 비판하기 전에 NL처럼 하지 못한 것에 관해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비당권파는 일사불란한 전열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NL적 성향의 당권파와 달리,다소 어중간한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어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다. 더욱이 민심을 배반했다고 평가받는 유시민 그룹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좌파로부터의 심정적 지지를 얻는 데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3.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

 

진보 운동 진영이 선거에 뛰어드는 것은 부르주아 제도들을 활용하면서 부르주아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극복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활용과 관련해서는 이미 부르주아 지배 계급이 고수다. 선거판은 일종의 포커 게임이기도 하다.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면서도 자기 패를 모두 보여 주지는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진보 좌파는 패를 너무 많이 보여준다. 자금도 딸리고 경험도 없기 때문인지 속을 다 드러낸다. 그만큼 진보 좌파가 선거판에서 기득권 세력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국민들이 진보적 좌파에게 표를 주는 이유는 수권(受權) 능력 때문이 아니다. 보수 여당이나 야당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순수할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순수함이 훼손된다면 씻을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 불순함으로 본다면야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이 훨씬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간인 사찰 사건은 그야말로 탄핵을 해야 마땅한 사항 아닌가. 보수 여당의 정책을 일정 부분 계승한 보수 야당도 정권을 잡았던 적이 있다. 국민들이 그들의 부도덕함이나 반(反)민주성을 유야무야 대충 넘기는 이유는 그래도 그들은 권력을 잡고 무언가를 할 능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능력이 있든 없든 어쨌든 그들은 국민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보수 야당과 선거 제휴할 때도 이른바 ‘당선 가능성’이라는 것이 늘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제 통진당은 기존 정치권에서 보여줬던 행태를 그만 보여줬으면 한다. 이제 그만 주목받았으면 한다. 그리고 비당권파는 자신의 현실적 한계를 일단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당권파는 결코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정치에서는 논리가 힘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집단적 연대가 힘이다. 전두환 대통령도 자기 부하들을 절대 충성파로 만드는 데 능했다. 누가 뭐래도 ‘존경하옵는 각하’다. 한편 그 시절에는 언론 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는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시대다. ‘모두가 정치가요, 모두가 정치 평론가다.’ 현재의 상황이 계속되는 것은 통진당에게 이롭지 않다.

당권파에게는 비당권파의 모습이 ‘조직적 기반도 없으면서 날로 먹으려는 태도’로 보일 것이다. 어떻게 이룬 결과인데 이렇게 줄 순 없다고 볼 것이다. 나아가서는, 당권을 준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당권을 가질 수도 없을 거라는 판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례대표 선거과정에 오해가 있다고 하니 좀 더 조사를 해보는 것도 이미지 연출과 관련해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것이다. 투표 부정은 관례대로 한 것이거나 과장된 것일 수 있다. 문제는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인데, 불분명하면 불분명한 대로 그때 가서 국민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보여줄지 고민했으면 한다. 그래서 통진당이 아니라 통진당의 일부를 포함한 ‘실질적인 진보적 좌파’가 정치에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거나 장관 정도라도 만들고자 하는 단기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으면 한다. 아마도 이 길은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 모두에게 실망한 이들의 마음을 얻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고, 진보라는 말이 누더기처럼 보이지 않을 때 좀 더 활짝 열릴 것이다.

 

핵 패권주의 확인의 장, 핵안보정상회의[시대와 철학]

핵 패권주의 확인의 장, 핵안보정상회의[시대와 철학]

강지은(ⓔ시대와철학 편집주간)

 

 

7~8만명이 8월 6일 사망, 그 해 말까지 9~14만명 서서히 사망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이후 히로시마의 이야기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집계 : 직접 피폭 사망자 56명, 최고 4000명 암으로 사망 예상
그린피스 집계 : 20만 명 사망 추정, 9만3000명 암으로 사망 예상
핵전쟁 방지를 위한 의사회 집계 : 54만 명 불구자, 최소 5만 명 사망 예상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3분 이후 체르노빌의 이야기이다. 히로시마 원폭 500배 규모의 방사능이 유출된 그곳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아직 집계조차 되지 않는 피해가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
2011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지금 대한민국은 53개국의 정상이 참여하는 핵안보정상회의(26, 27일)로 들썩이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명박 정부가 들썩이고 있고, 차량2부제 시행으로 서울시민들이 들썩이고 있다. 핵안보정상회의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09년 4월 미국의 핵정책에 관한 프라하 특별연설에서 궁극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지향해 나가되, 우선적으로 향후 4년 내 전 세계의 취약 핵물질을 안전하게 보호(secure)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적 노력을 추진할 계획임을 천명한 데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2010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회의가 궁극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하여 세계정상들이 모이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회의의 의제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회의의 주요 의제들은 핵물질 통제 강화 및 최소화, 시설보안 강화, IAEA와 유엔1540위원회 등 국제 핵안보 체제간의 협력·조정 강화, 불법거래와 밀수 방지 및 국경통제 강화, 핵안보와 원자력 안전간 시너지, 방사성 테러방지를 위한 방사성 물질 안보 등이다. 여기 제시된 어느 의제에서도 핵무기 보유국의 구체적인 핵무기 감축 계획은 들어있지 않다.

대신 언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과 200여차례(24~29일)의 양자 회담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데에 열을

▲ 이명박 대통령이 27일 폐막된 핵안보정상회의에서 각 국 정상들과 함께 하고 있다. ⓒ뉴시스

올리고 있다. 특히 언론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오바마 미국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등 6자회담 당사국 정상들이 북한의 최근 장거리 로켓 발사 의지에 관하여 논의할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이번 핵안보정상회의는 세계의 패권을 쥔 나라들이 동북아의 긴장에 긴밀하게 연관되고자 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야야 한다. 더군다나 언론은 핵안보정상회의의 정식 의제는 아니지만 ‘북한의 로켓 발사 계획’과 관련하여 북핵문제가 거론될 것임을 흘리고 있다. 여기에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핵안보정상회의는 핵테러, 핵전쟁 없는 평화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노골적으로 세계의 패권을 확인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핵안보정상회의 공식 의제는 ‘비국가행위자에 의한 핵물질과 방사성물질 탈취 또는 관련 시설에 대한 공격 등을 예방하고 대응하는 핵안보(nuclear security)’ 문제다. 그러나 도대체 그 비국가행위자는 어디에 있는가? 세계 53개국 정상이 모여서 의논하면 비국가행위자가 적발이 될까? 오바마는 9.11을 상기하라고 한다. 9.11은 끔찍한 기억이다. 9.11이 의문 한 점 없이 정확하게 밝혀졌다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전세계의 시민들은 실체 없는 비국가행위자를 향해 핵무기를 겨누는 정상들을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자국의 핵무기 감축과 핵발전 중지에 목소리를 모아야 하며, 핵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평화를 우리 모두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희망을 먹는 인민과 ‘탐(貪)’이라는 자본 [시대와 철학]

희망을 먹는 인민과 ‘탐(貪)’이라는 자본 [시대와 철학]

 

박종성(한철연 대외협력부장)

 

-한진중공업, 그 야누스의 얼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촉구 및 경찰 강경진압 규탄 농성 중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최종덕장맛비가 다시 시작되었고 그 빗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던 여름밤, 화면에서는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언과 오버랩 되어 피겨 여왕의 눈물 어린 얼굴이 비춘다. 환호와 기쁨의 눈물이다. 그러나 전자 신문 다른 한쪽에는 숨죽이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본의 탐욕과 싸우는 이들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절망과 분노의 눈물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건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에 머물지 않는다. 기륭전자, KTX, 이랜드,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아산공장 등의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태는 우리에게 이중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그 하나는 맑스,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마지막 구절이다. 다른 하나는 이 슬로건이 “만국의 자본이여 자유로울 지어다”로 버전업되어 들려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난 3년간 수주실적이 없어 정리해고라는 명분 쌓기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한진중공업은 결국 경영난을 이유로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였다. 올해 초 700여 명이었던 노동자는 6월 말 100여 명으로 줄었다. 나아가 한진중공업은 노조 파업 철회 직후 아시아 선사로부터 컨테이너선 4척(총 2억5000만 달러), 방위사업청으로부터 해군의 해상작전 지원 및 물자보급용 군수지원정 2척을 수주했다고 6일 밝혔다. 자본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은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이것이 수주실적이 전무하다고 말하면서 정리해고의 명분을 만들고 실행한 한진중공업의 얼굴이다. 한진중공업은 정리해고 발표 다음날 174억 원 주식 배당금을 챙겼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수빅조선소이다.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은 2008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수빅조선소 선소 건설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수요 받았다. 수빅조선소는 한중 해외 계열화사 7개중 하나이다. 허민영 박사에 따르면 수빅조선소는 한진중공업이 3년간 수주 실적이 없던 시기에 18척을 소화했고 2011-2012년에도 35척이 인도될 예정이라고 한다. 수빅조선소의 임금 수준은 국내의 10%수준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를 했다는 한진중공업의 주장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듯 수빅조선소로의 수주 집중이라면 그것은 경영전략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정리해고의 요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정리해고의 요건을 대폭 완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의 악화는 한중의 지분 1%를 가지고 있는 조회장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에게는 삶의 공포 그 자체이다.

이렇듯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 신자유주의, 즉 자본의 지구화는 인간의 생명을 벌거벗은 존재로 전락시키고 그 생명 아닌 생명의 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자본의 지구화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노동의 유연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을 위한 정리해고의 유연화이고 이는 결국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귀결되고 만다. 한진중공업이 다시 수주물량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정리해고로 부족한 노동자를 불안정 노동자로 채울 것도 불 보듯 자명할 것이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의 유장현 교육선전부장에 따르면 수주 물량을 제대로 생산하려면 3000~4000명 정도가 필요한데, 현재 영도조선소에는 정규직 비해고자 620명과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700~800명만 일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자본은 자신의 안정된 잉여가치 운동을 위해 불안정 노동자라는 생명의 불꽃을 희미하게 만든다. 타워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크레인에서 쓰는 마지막 글’에 따르면, “임금은 다른 조선소의 60-70%밖에 안 된다. 반면에 영업 이익은 타 조선소 평균의 3배이다.” 이렇듯 자본의 무한한 소유의 집착은 인간의 관계를 사물의 관계로 전화하며 임대주의적 관계로 전락시킨다.

-자본에 의한 삶의 분열, 주권의 상실

 

인간의 삶이 사물의 관계로 전락되면 될수록, 자본이 인간의 생명을 처리하는 방식은 야만의 상태를 지향할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간의 사물화에는 윤리와 인륜의 자리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관계를 사물로 전락시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통제와 처분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보다 자본의 활동을 비호하는 법원의 판결은 생명에 대한 죽음과 공포의 폭력이다. 예를 들어 해고 노동자들의 삶은 부산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구제 신청이 기각되어 노조원의 사원아파트 퇴거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받아들여지면서 삶의 희망을 급속하게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파업 참가자들의 동료에 대한 미안함에도 불구하고 그 수는 줄었다. 아이들과 가정 때문에 파업에서 이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해고자와 비해고자, 파업 참여자와 비참여자로 분열된다. 이렇듯 분열의 정책은 동료, 이웃, 아이들의 친구마저 갈라놓는다.

자본에 의해 분열된(?) 이들의 가족 또한 서로 마주치는 것에 대해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자본에 의한 분열과 그로 인한 인륜성의 상실이 자본의 탐욕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죄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적 허구가 자본의 정치이다. 자본은 언제나 자본이라는 가치만을 최선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 밖의 다른 가치는 배제하는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이다. 이는 결국 자본의 가치를 증식하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의 문화를 강요한다. 그리고 이 문화에 인간의 욕망을 빠뜨리고자 한다. 자본의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의미와 삶의 지평을 상실하고 도덕적 차원의 질적인 하락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 속에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는 희석되고 만다. 따라서 자본의 권력 획득의 증가만큼 인간은 상호간의 교류와 협동, 그리고 타자와의 공동체적 공감이라는 삶의 목표를 상실하고 정치로부터 소외되어간다.

나아가 국가의 모습은 어떠한가! 일찍이 홉스는 근대국가의 절대적 폭력성을 『리바이어던』에서 정당화했다. 그는 ‘공화(republic)’, ‘공적 부(commonwealth)’ 등으로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오늘날 정권은 ‘국가경쟁력’, ‘부자 되세요’라는 구호 속에서 21세기 한국의 ‘리바이어던’을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의 홉스적 광기를 보는 듯하다. 홉스는 보상과 처벌을 리바이어던의 수족과 관절을 움직이는 신경과 힘줄과 같은 것으로 비유했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온갖 법적이고 물리적인 처벌로 자신의 존립을 운동시켜 나간다. 홉스가 말하는 리바이어던은 절대적 주권자이기 때문에 이 주권자에 대한 어떤 항의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직 인민 복종의 의무만이 허용될 뿐이다. 집단행위 금지 규정과 성실의 의무, ‘복종’의 의무 등. 따라서 ‘주권’의 원천이었던 개인들은 오히려 그 권력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소위 ‘국민(subject)’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통제권력 안에서의 개인들일 뿐이다. 이 때 국민은 리바이어던이라는 절대적 주권자에게 복종을 전제로 안전을 보장 받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 리바이어던은 모든 국민의 복종을 요구하면서 홉스조차 인정한 최소한의 인간의 생명 보호와 안전조차 보장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현실이다.

-일상화된 죽음의 정치를 넘어 공감의 정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집단 심리에 상담을 하고 있는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에 따르면, 쌍용차 가족들의 고통은 죽음의 기운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상담결과에 따르면, 해고자 아내는 “내내 울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옷장에서 넥타이를 꺼내서 묶고 안방 쓰레기통을 뒤집어서 그 위에 올라가 (내가) 목을 매고 있더라”거나 어떤 해고자는 “술 먹고 몸에 휘발유를 부은 적이” 있다고 한다. 정혜신에 따르면 상담을 하면서 쌍용차 가족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을 유형을 8가지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에 “죽음이 가까지 있다.”, “끝없이 무기력하다”, “내가 무능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등이 있다.

‘절망’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뜻은 절망하면 죽는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절망’이라는 병이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절망이라는 병을 치유하는 방식은 ‘단독자’로 ‘하느님 앞에’ 홀로 설 수 있는 자각이다. 이를 통해 신앙에 대한 확고한 결단이 한다면 이 절망이란 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절망에 대한 실존철학자의 방식이 유일한 치유의 방식이거나 모든 것을 열수 있는 열쇠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절망의 치유는 그들의 상처에 공감하는 것이다. 라캉의 말로 하면, 아마도 타인의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일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가 말하듯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 거울은 애덤 스미스적 인간, 즉 호모 이코노믹스를 넘어선 인간의 거울일 것이다. 잠재적이건 현실적이건 간에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렇듯 자신을 넘어 타인에 대한 걱정을 만들어 낸다. 한진중공업 농성장에 남아있는 한 비해고 노동자는 파업을 이탈하는 것에 대해 “이해한다. 다만 다음엔 우리 차례라는 걸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가난한 계급으로의 전락, 그 속에서 언제든지 우리 모두가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삶의 공감(sympathy)이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형성은 이 점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의 정치가 아닌 인간의 정치, 보다 정확히 인민의 정치일 것이다.

인간을 ‘호모 이코노믹스’로만 규정하여 인간의 다양한 가치 지향성을 단일한 것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단일한 세포로 구성된 재벌에게는 자본의 가치를 추구할 뿐이다. 이들에게는 인간의 정치는 부재하다. 어찌 그들에게 유적이고 공동의 인간을 사유하며 반성하는 것을 기대하겠는가. 맑스가 말하듯이 자본가가 악인 이유는 그들이 자본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천적 인간배제 재벌 사회에는 희망이라는 단어는 흔적조차 없다. 코나투스(conatus)는 인간이 생명을 보존하고 지속하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인간의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 이를 위해 김진숙 지도위원은 자신을 외롭고 단절된 공간인 85호 크레인에 자기를 구속하였다. 이는 샤르트르가 말하듯 자신 스스로 선택한 쪽으로 자기를 구속하는 것, 곧 자유이다. 자기를 구속한다는 것은 바로 책임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은 다시금 그들의 삶에 대해 보다 더 공감하지 못했던 나 자신의 반성의 시간기도 하다.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삶이었다는…

-여전히 모순은 노동과 자본이다

 

몇 달 전 감자를 먹기 위해 도려낸 감자 조각을 베란다에 심었더니 얼마 뒤 감자 싹이 나오고, 꽃이 피었다. 혹시나 하여 살며시 흙을 뒤집었더니 콩알보다 조금 큰 감자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이렇듯 조각난 감자에서 작은 또 다른 감자로 생성되는 것처럼, 자본에 의해 도려낸 해고 노동자들, 정치적 · 생산적 활동에서 배제된 이들은 자기 창조(autopoiesis)적인 ‘가능성의 존재’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능성의 존재는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고자 하는 힘인 에로스와 이익이 없어도 희생하는 아가페의 결합일 것이다.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죄의식을 만들어내는 자본의 책략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사회적 부의 축적을 가로막는 죄인으로 만든다. 이렇듯 노동자를 고대 유태에서 속죄일에 많은 사람의 죄를 씌워서 황야로 내쫒던 ‘속죄양’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작동방식이다. 이는 노동과 자본의 내부적 적대의 관계를 노동자 내부로 해소하는 방식이다. 지젝이 말하는 누빔점이란 바로 이것일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자본이라는 적대적 모순의 관계를 노동자 내부로 해소하고자 하는 책략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는 자본의 탐욕에 대해 투쟁하는 이들, 즉 타자라는 존재의 긍정이다. 그런데 자본과 노동은 각각 모순의 유지와 폐지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자본과 임금노동은 서로 상대방을 전제하고 부정한다. 이렇듯 양 극단을 서로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부정하는 것만이 ‘모순’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 극단의 존재에 부분적인 조건이 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정규직 노동자라는 존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정규직 노동자 자체가 없다면 ‘정규직 노동자’라는 존재는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의 관계가 갈등의 관계에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순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해고 노동자와 비해고 노동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순의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은 나와는 다른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생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문제는 타자의 자리에 화폐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때 화폐의 기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타자들의 계열이라는 가상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직 현실적으로 가능한 타자와의 만남은 화폐를 욕망하는 것이다. 화폐에 대한 욕망은 구체적인 타자와의 만남이 아니다. 단지 화폐와의 만남, 화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그 화폐가 변환되어 욕망 가능한 것을 욕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신체는 화폐를 욕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체는 구체적인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환가치를 먹고 배부르지는 않다.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화폐라는 공허한 타자와의 만남만이 존재한다. 생성은 물질과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것은 더 이상 공허한 타자와의 만남을 중지하고 살과 피로 이루어진 실질적인 만남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화폐라는 공허한 타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종식은 비단 인식의 단절 혹은 전환을 통하여 그 근원적 비판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본주의라는 구조 속에서 알면서 어쩔 수 없이 사물화 된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의 전복은 화폐가 아닌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 자본이라는 일자의 원리를 파괴하는 다수의 현실적 부정의 힘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간의 실존은 다른 실존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실존을 만들어 낸다. 불안정 노동자라는 양태는 자본과 국가라는 다른 양태와의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네 역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의 교훈처럼 역사는 정치의 열쇠인 것이다. 여전히 모순은 노동과 자본이다.

-탐(貪)

 

공자의 가르침 중에 ‘탐’(貪) 이라는 상상속의 동물이 있다. 머리는 용, 뒷부분은 원숭이 꼬리, 전신은 긴 털로 덮여 있는 기린의 가죽, 발굽은 소의 형상인 괴상한 동물이다. 흙, 광물, 산, 바다 할 것 없이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탐’은 이 시대의 자본과 권력의 형상과 너무나 닮았다. 4대강을 난도질하여 먹어치우고 그것도 모자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명, “밤에 잠 좀 자자”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희망을 먹어치우고 그 아가리로 희망의 연대에 물대포와 최루액을 토해낸다. 어디 그뿐인가 교사와 공무원 1900여명에 대한 수사를 진행 중인 검찰은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을 먹어치운다. 권리 표현과 결사의 자유 그리고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를 집어 삼킨다. 그러나 여전히 ‘비정규직 없는 공장만들기 희망버스’ 저 멀리 필리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희망버스, 1, 2차 희망의 버스가 존재했고 3차 존재할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창조물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탐’, 이는 마치 산노동의 착취를 통해 만족할 줄 모르는 잉여가치 창출의 욕망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과 같다. 마치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처럼 운동하는 자본이라는 욕망이 이와 같지 않은가! 맑스는 자본을 영원한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즉 그는 자본 또한 “불멸의 죽음”(mors immortalis)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맑스의 변증법의 핵심적 기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의 형상을 닮은 인격은 인간의 죽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잉여가치의 파티를 욕망한다. 이러한 욕망의 흐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자기보존’(conatus)을 최우선의 가치로 실현해야만 ‘국가’는 그 존재 자체가 무기력해 보일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자본의 욕망 흐름과 이 흐름을 위해 노동력을 한편으로는 포획하고 재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방치하고 배제하는 국가를 긍정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은 부정의 힘이다. 이 부정의 힘은 희망을 먹고 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밥이고 생명이다. 공자가 말하는 탐, 그 추악하고 탐욕적인 ‘탐’은 결국에는 태양까지 먹어버린 후에 어둠을 남기고 자기 자신 까지 먹어 치워, 결국 무(無)가 된다고 한다. 결국 공자는 탐이라는 동물을 통해 이 천박한 자본의 시대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자본이여, 인민의 희망을 탐하지 마시오, 인민이여, 희망이란 욕망을 탐하시오”

 

마지막으로 김진숙 위원의 글에서 다음의 구절이 가슴에 맺힌다. “84호를 움직이면 85호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특공대가 투입된다면 여기서 혼자 163일을 매달려 있던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건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제발 그의 말처럼 “선택의 문제”가 아니길 바란다.

오늘 따라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의 가사가 가슴 속을 떠나질 않는다.

“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 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의 화사한 첫차를 기다리며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걷혀 개는 새벽 길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오키나와(沖繩) 평화여행[시대와 철학]

오키나와(沖繩) 평화여행[시대와 철학]

김재현(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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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월 중순 내가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인 ‘마산 YMCA 시민사업위원회’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3박4일의 짧은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왔다. 평화답사 여행이라는 테마로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실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일본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2004년 8월에 오키나나와의 국제(國際)대학 교내에 미군 헬리콥터가 추락한 사건이 일어나고 마을 안에 기지가 있어 위험하니 기지를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한참일 즈음에, 한중일 국제세미나가 있어 오키나와에 갔던 적이 있었다. 이 때 세미나에서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었고 당시 참가한 일행들과 함께 기지 이전 계획 장소인 오키나와의 헤노코(?野古)에 가서 잠시 미군기지 이전 반대농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의 여행은 오키나와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첫날 오후 나하(那覇)에 도착하여 수리성을 관람하면서 류큐왕국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았고 이튿날 오전에는 츄라미 수족관을 구경한 후 오후에는 사키마(佐喜眞) 미술관 방문이 있었다. 사키마 미술관은 오키나와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그림을 통해 전달하는 역사와 평화교육의 현장이다. 서경식 교수는 “역사와 평화를 성찰하는 이런 연수여행에도 반드시 예술감상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오키나와에 갈 기회가 있다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사키마 미술관을 찾아가 마루키(丸木)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戰圖)>를 관람하기”(2010. 10월 29일 한겨레신문)를 권한다.사키마 미술관에서 루오의 여러 그림들을 보았고, 마루키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1984)를 미술관 직원의 전문적인 해설을 들으면서 관람했다. 이 작품은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에 따른 일본 주민의 집단자결(자살) 사건을 묘사한 기록화인데, 여러 곳에서 일어난 전쟁의 비극과 집단자결의 과정에서 처참하게 죽이고 또 죽어가는 인물들의 모습, 눈을 부릅뜬 사체들의 모습이 처절하고 참혹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루키 부부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오키나와전쟁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생존자들과 같이 통한(痛恨)의 현장에서 증언을 들었으므로 “저 그림은 오키나와전을 체험한 오키나와 사람들과 우리의 공동제작”이라고 말한다. 미술관 직원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후세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들이 맡아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설명해 주었는데 ‘불의에 순응하지 않는 미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미술관 옥상에서 후텐마 기지를 직접 보고, 미술관의 배려로 수장고에 있던 케테 콜비츠(독일, 1867-1945)의 판화도 볼 수 있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의 일본 기지를 폭격하는 미국 전투기. ⓒwikipedia.org

2. 이어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0),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의 저자이자 환경운동, 평화운동가로 알려진 더글라스 러미스의 강의가 같은 장소에서 있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강의하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최근일본지도]라는 책에 있는 한 장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

‘이것은 소화3년(1928년)의 지도인데 류쿠(琉球, 오키나와), 대만, 조선은 이미 일본제국의 영토이고, 만주도 앞으로 일본 영토화하려는 의도가 나타나 있는 지도이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 정복은 대만, 조선, 만주에서는 결국 실패하고 오키나와에서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계속해서 오키나와는 일본에 의해 지배된 식민지라는 사실과 일본국가의 동등한 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혼재하면서, 오늘날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다.

오키나와인이 본토인과 다른 중요한 점은 본토에서는 ‘아사히(朝日)’, ‘마이니치(每日)’, ‘요미우리(讀賣)’신문 중 최소한 하나를 보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본토의 중앙지를 읽지 않고 ‘오키나와 타임즈’나 ‘류큐소보’를 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키나와인들이 일본 본토의 사람들(야마토인, 大和人)과는 분명히 다름을 보여준다.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틀을 잡아가던 일본은 1879년에 류큐왕국의 국왕과 왕세자를 도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키는 소위 ‘류큐처분’을 단행한다. 이는 근대국가 일본의 최초의 식민지화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기점으로 일본제국의 확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류큐사람들은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곳에 군대기지는 만들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왜냐하면 군대기지가 있으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 본토의 매스컴에서는 중국, 북한의 미사일 때문에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 영토의 0.6%에 지나지 않는데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군사력 집중은 군사전략 상으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미군기지가 전 세계적으로 700여 군데 있지만 이렇게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오키나와가 유일하다고 한다. 미군기지는 곧 미합중국의 일부이며 미제국주의의 기지이기도 하다. 이 미군기지에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노숙자(Homeless)가 없고 노인들이 없으며, 생산노동이 없다. 군대는 전쟁을 위해 존재하므로 어떤 바람직한 것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특별한 점은 미군 안에서의 오키나와인에 대한 인식 특히 미 해병대의 1/3이 오키나와에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또 이들의 언어 속에 있는 오키나와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병은 오키나와를 점령하였으므로 이들은 오키나와를 전리품으로 생각하여 오키나와 지배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1972년에 오키나와의 본토 반환이 이루어졌지만 미군기지는 그대로 있었으므로 미군기지에 있는 해병의 입장에서 보면 오키나와에서 나가고 싶지도 않고 바뀐 것도 없다.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도 평화헌법 9조를 지키면서도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하여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이 일본 본토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 생각은 모순적이지만 일본 국민은 이 모순을 별로 자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처럼 미군기지의 폐해와 이로 인한 전쟁의 위협을 늘 느끼며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전 총리였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는 후텐마(普天間)기지를 현외(오키나와현 바깥)로 옮긴다는 선거 공약을 하여 당선되었지만 미국과의 협상에서 결국 이를 실현시키지 못해 총리를 사임하게 된다. 일본에서 주민운동이 총리를 그만 두게 한 것은 두 번이었는데, 첫 번째는 1960년 미일안보조약 때 기시노부스케(岸信介)의 사임이고 두 번째는 2010년 하토야마의 사임이다. 두 번 다 오키나와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하토야마 총리가 그만 둘 당시 ‘일미안보조약이 동아시아 안전에 공헌하는가?’라는 여론조사에서 본토에서는60% 이상이 그렇다고 답한데 반해 오키나와 사람들은 7% 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한 지난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후텐마기지의 헤노코 이전에 반대하는 지사 후보들이 합쳐서 97%의 지지를 받았다. 일본 정부와 도쿄에서는 헤노코에로의 이전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고 중앙 일간지나 뉴스에서도 그렇게 보도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현장인 헤노코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반대투쟁을 2000일 이상 계속하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일본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차별’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쓰고 있다.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는 일본 국내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이자 오키나와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오키나와 주민들을 위해서 미군기지는 철수되어야 한다.’

3. 셋째 날, 우리는 카데나(嘉手納) 기지를 방문하여 그 규모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3층 학습실에 전시되어있는 내용들을 통해서 이 미군기지가 갖는 일본 본토에서의 위상과 오키나와에서의 위상이 매우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오키나와 요미탄(讀谷)촌에 있는 ‘치비치리’라는 동굴을 방문했다. 산호섬인 오키나와에는 수많은 자연동굴(일본말로 ‘가마’라고 한다)이 있는데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가마는 전쟁 때 주민들이 피난하였다가 ‘영미귀축(英美鬼畜)’으로 불리던 미군에게 굴욕적으로 살해당하기 전에 충성스러운 황민으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가족, 이웃, 전우끼리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한 집단자결의 장소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집단자결이 이루어졌던 이 현장에서 지역가이드연구회의 멤버인 히가료우코(比嘉?子)씨의 실감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에 대해서 온 몸으로 느끼며 전율하는 체험을 했다. 특히 마지막에 “평화라는 것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에게도 한국에 돌아가 이러한 평화운동에 앞서달라는 부탁을 진지하게 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1945년 3월 26일에 미군이 오키나와 본도(本島) 남서쪽에 있는 게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할 때 자마미(佐間味) 섬에서 ‘집단자결’이 발생했고 곧 이어 4월 1일에는 미군이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촌, 차탄(北谷) 촌을 점령한다. 이 때 요미탄 촌 치비치리 가마에서 집단자결이 일어나 140여명 중 82명이 죽었는데 그 가운데 47명이 12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들은 주민들을 지키지 않았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황민화교육을 통해 미군에게 처참한 꼴을 당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젊은이가 노인을 낫이나 면도칼로 죽이고, 또 수류탄으로 함께 죽는 아비규환이 벌어진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집단자살을 하였지만 사실은 이것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학살이라는 측면이 있다. 동굴견학을 한 후 우리는 오키나와 남단에 있는 히메유리 탑과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들렀다. 평화기념공원 전시관 앞에는 오키나와에서 죽은 식민지 조선의 군인, 종군위안부, 노역자를 포함한 약 만 명의 한국인 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다같이 어둡고 슬픈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일본인 약 19만명, 미국 군인 1만 2천여명, 조선인 약 1만명이 죽었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 본토에서 온 6만5천명의 군인들, 오키나와 출신의 군인 약 3만 명과 민간인 약 9만 5천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인구는 50만이 안 되었다고 한다.

4. 오키나와(현청지는 나하)의 위치는 동아시아의 군사거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필리핀의 마닐라, 대만의 타이페이, 대한민국의 서울과 일본의 도쿄를 연결하면 삼각형이 생기는데 오키나와는 그 밑변의 중점에 해당한다. 이것은 곧 오키나와가 세 개의 삼각형(도쿄-서울 -오키나와, 오키나와-서울- 타이페이, 오키나와 – 타이페이-마닐라)을 결합하거나 분단하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도미노이론에서는 오키나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공산주의 침투를 막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후부터 미군의 점령 하에 있었던 오키나와는 ‘기지의 섬’으로서 대일 감시기지, 미·소가 대립하는 냉전 중에는 ‘태평양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고 일본에 복귀된 현재에도 변함없이 미일안보의 거점 역할을 한다. 오키나와는 특히 미국의 세계전략, 특히 동아시아 전략을 반영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므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질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키나와에서는 동시에 이러한 국제정치적 군사적 지배, 일본 국가의 전략적 지배에 의한 ‘구조적 차별’에 저항하는 다양한 운동이 계속되어 왔다. 군대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여성의 인권, 환경보호, 동아시아의 역사경험, 선주민(先住民)의 권리 같은 우회로를 통해 이 운동은 국경을 넘어 넓어지고 있다. 오키나와와 한국의 관계에서는 미군기지를 둘러싼 경험이 접점이 되어 최근에 비판적 지식인 사이에 서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류도 확대되고 있다.

5. 2009년 8월 총선에서 집권한 일본 민주당의 ‘동아시아 공동체구상’이 최근에는 일본 외교정책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면서 ‘미-일 동맹’의 심화를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작년 6월에 취임한 칸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취임 직후 국회연설에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이웃 국가와 다양한 분야에서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장래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지만 2011년 1월 20일 도쿄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정권이 바뀌었어도 미-일 동맹은 유지 ·강화되어야 할 일본 외교의 기축”이라며 이의 ‘재발견’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 경제, 인재 교류를 심화시켜 올 봄 방미 때 오바마 대통령과 21세기 미-일 동맹의 비전을 내보이겠다”고 말했다.

칸 총리의 외교정책 기조 변화는 우선 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다 낙마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 해 9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우다오)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양순시선의 충돌사건 이후 일본에서 커진 ‘중국위협론’도 칸 총리의 미국 중시 노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탈아입구(脫亞入歐)’가 아닌 ‘친미입아(親美入亞)’를 내세웠던 하토야마 전 총리 중심의 민주당 외교노선에서 크게 이탈하는 칸 총리의 일방적 외교정책 노선은 당내 갈등의 또 다른 불씨가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명박정부의 대북한정책과 일방적 대일, 대미 외교노선으로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상은 더욱 멀어져 가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반전, 평화운동을 생각할 때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러미스씨는 칸 총리도 오키나와 문제로 낙마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견한다. 과연 그럴까? 중국의 부상을 고려함과 동시에 미-일 사이에서의 오키나와 문제를 주목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질서를 이해하고, 이와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평화, 우호, 연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의 사진자료로는 사키마 미술관의 <오키나와 전도>, 치비치리 동굴, 후텐마 미군기지 활주로 등 여러 사진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여행을 같이 갔다온 마산YMCA의 이윤기 부장의 블로그와 허은미선생의 블로그를 찾으시면 이번 여행과 관련된 글과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속한 이야기가 싫다![시대와 철학]

내가 속한 이야기가 싫다![시대와 철학]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잘못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자기정당화(self-justification)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기정당화 과정에서 나와 남, 나의 편과 남의 편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이야기에서 누군가를 배제하게 된다. 이 자기정당화와 배제를 통해서 우리는 삶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삶의 의미를 붙들고 다시 자기를 정당화하고 편을 갈라 남을 배제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속한 이런 이야기가 싫다.

잃어버린 10년!”도덕적 개인주의자는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떠맡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이 있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동의, 말하자면 나의 선택이나 약속의 결과이다. 따라서 나의 책임은 내가 떠맡은 일, 내가 선택하고 동의한 일에 한정된다. 이런 생각의 논리적 귀결은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나는 김대중, 노무현을 찍지 않았다. 나는 그 정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정부는 나와 무관하고, 그래서 그 정부가 집권한 기간은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다.”집권당인 한나라당 대표는 문자 그대로 집권당의 대표답다. 그는 “좌파정권 10년 동안에 나라의 여러 가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온갖 대못을 박고 또 망쳐놓았다. 이명박 정권 2주년은 좌파정권 10년 동안의 비정상적인 국정을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한 2년”이라고 자평했다. 여기서 나는 어느 편에 있는가?

# 장면 1 : 2008년 4월22일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이에 따른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2년 반 전에 차명계좌 불법자금과 삼성그룹 불법적 지배권 승계 특검 문제로 사퇴했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2010년 3월24일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말과 함께 삼성 회장직에 복귀했다. 사실 여기서 ‘복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복귀(復歸)는 본래 자리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데, 이건희 회장의 복귀가 본래 자기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건 그가 잠시 사라졌던 2년 반 동안에도 그 자리는 그의 것이었고 언제나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건희 회장은 “내가 스스로 떠났으니, 돌아오는 것도 내가 결정한다.”는 도덕적 개인주의를 정당화의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다. 더 인간적으로 보자면, “진심으로 사과했고,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도덕적 개인주의자 이건희 회장의 재취임, 왕의 귀환에 일제히 복귀환영이라는 깃발을 내거는 주류는 자연스레 다른 편을 만들어내었다. 그저 잠시 걱정을 끼쳐드렸던 국민 여러분이라는 다른 편을. 그는 이전처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기 자리에 다시 앉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는 그가 갈라낸 저편으로 분리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는 그의 짧은 재취임의 말과 함께.

# 장면 2 : 2010년 12월1일
기자 : “재벌그룹 총수신데 유독 자주 수사기관 조사를 받으신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승연 : “내가 팔자가 센 거 아닙니까?”

부당거래를 통한 비자금 조성, 부실계열사 지원, 차명계좌 운용, 주식 차명보유, 조세포탈 혐의를 받고 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검찰 조사에 앞서 기자와 주고받은 말이다. 한 인간의 삶의 흐름이 자신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라 생년월일시의 팔자(八字)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김승연 회장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의 말은 마치 봉건적 군왕이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를 두고서 ‘과인의 부덕의 소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 역시 이건희 회장과 다르지 않은 도덕적 개인주의자이다.

“내가 자주 수사를 받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선택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수사를 받게 된 것은 팔자 때문이다.”김승연 회장은 이른바 인지부조화가 싫다. 왜냐하면 자기 판단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김승연은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나를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건 부당하고 옳지 않다. 그렇다면 이건 팔자야!”이제 고통은 사라지고 고난 받는 순결한 인간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 한 편에 운명처럼 달라붙어 그를 괴롭히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도 그냥 이렇게 저편으로 분리되고 만다.

# 장면 3 : 2010년 12월2일
“이천만원 주셨으면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아니 그것보다도요, 저 때문에 이렇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사회적으로 시끄럽게 돼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 질문한 기자는 논점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는 기자를 폭력행위 처벌법(집단, 흉기 등 상해)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으러 온 최철원 M&M 전 대표가 가르친다. 그는 “어이, 기자 양반. 문제는 때린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시끄럽게 됐다는 것이지.”라고 진심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철원 전 대표 주변에서는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이전에도 있었던 일인데, 왜 하필 지금 문제가 될까? 그는 이런 부조리, 부조화를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이게 사회적으로 시끄러워졌기 때문이야. 이건 나의 폭력적이고 반인간적인 성향이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아니야.”

물론 우리도 이 같은 아주 긍정적인 자기 개념을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일관적이지도 뻔뻔하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최철원 전 대표는 계속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하고 도덕적이며 인간적이다. 이런 나를 흔들어 놓는 무엇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더 나아가 인간적으로 흔들려서 몹쓸 짓을 했다면, 그건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사업을 방해했다. 나는 잘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차마 사람을 그냥 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을 주기로 했다. 한 대 맞아주고 돈을 버는 아르바이트도 있지 않은가? 그것도 큰돈을 주었다. 나는 자존감을 지켰고, 그는 돈을 벌었다.”이런 그의 상상 속에서 우리는 또 어느 편으로 나눠지는가?

# 장면 4 : 까마득한 옛날이자 가까운 어제
예수께서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勿施於人).”

예수가 긍정의 형식으로, 공자가 부정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이 내용은 모두 나와 남을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M. J. Sandel)이라면 아마도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호혜(互惠 reciprocity)나 공동선(共同善 common good)이라는 말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는 개인적 자유의 원심력이 사회적 공동체의 구심력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러한 공동선이 갖는 가치를 서로 다른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법한 가상적 이야기로 비아냥거린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말하자면 “연쇄살인자와 마주친 극단적인 상황에서 당신은 그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허락하겠는가?”그런데 이런 물음은 예수나 공자가 말하는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므로 논증은커녕 서툰 주장에도 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나 공자 그리고 샌델의 말은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비롯되는 사건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삶의 원칙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의 선택을 통해서 내가 되기로 한 개인적 존재다. 하지만 그 개인은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 구속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수동적 조건과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자 하는 능동적 나 사이의 관계 형성, 정체성의 확인이다. 나의 자부심과 수치심은 이런 관계 속에서 자라고 드러나는 사회적 속성이다.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소속된 나와, 내 인생을 나의 선택으로 꾸려나가고자 하는 나. 사회구성원이라는 구속된 나와, 내 삶을 나의 가치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나라는 현실조건이 만들어내는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바로 우리의 실존적 딜레마이다. 이런 딜레마를 예수나 공자, 샌델은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 MacIntyre)는 이런 실존적 딜레마에 ‘이야기하는 자아(narrative self)’를 가지고서 설득력 있게 접근한다. 그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고 말한다.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누군가는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할아버지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누군가는 부모마저 싹둑 잘라내고 시작한다. 어떤 부모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식 하나를 빼고서 자신을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잘려나가거나 빠져나가는 사람의 아픔은 자기정당화의 그늘에 가려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이전 세대, 이전 사회의 다양한 빚과 의무를 물려받는다. 운 좋은 몇몇 사람일지라도 유산과 기대만을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2010년 한국 사회라는 내가 속한 이야기가 더불어 사는 사회구성원이라는 큰 이름과 함께 나의 이야기 속에 당연히 자리 잡아야 한다. 그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같이 겪으면서 시대의 지혜를 함께 배워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 어머니의 이름은 자식이 자랑스럽게 입에 올리든 부끄럽게 올리든 간에 자식의 이야기에 등장해야 한다. 자식의 이야기에서 빠져나가는 부모의 이름은 사실 나의 이름을 부정하여 나만의 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면 1, 2, 3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는 한국 사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그리고 우리가 장면 4에서 느끼는 자부심과 공감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치심과 분노, 자부심과 공감은 가족과 시민처럼 ‘묶여 있는’존재가 느끼는 집단적 책임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선택과는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어떤 집단에 한데 묶여 있으며, 또 우리는 수치심과 자부심을 가진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거대한 서사(敍事)에 연관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 삶의 이야기는 나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굳건해지는 공동체의 이야기에서 분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만 책임을 지는 자유로운 존재를 넘어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존재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존재이고, 우리 정체성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장면들은 이런 이야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큰 이야기와 분리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는 다양해지고 개인의 원심력은 커졌지만, 그 다양성과 원심력은 편을 가르면서 다른 편을 겨냥하는 칼끝에 모아지고 있을 뿐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남의 삶의 이야기와 맞물려 있다. 우리는 과거의 빚과 유산과 기대와 의무를 안고 태어나고, 그걸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하는 자아’이다. 그 이야기에는 당연히 남의 이야기를 위한 몫과 자리가 있고, 그 몫과 자리는 내가 남의 이야기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고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도덕적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의 잘못과 분리하고, 또 나를 현재의 잘못과 분리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내가 얽혀 있는 과거와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자 미래의 관계까지 내 입맛에 맞게 미리 짜놓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재취임에는 그의 이야기, 삼성의 위기 이야기는 있지만, 다른 한 편에 서 있는 남, 즉 국민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김승연 회장의 팔자(八字) 이야기에는 그의 모든 잘못이 빠져 있고, 그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무시되고 있다. 최철원 전 대표의 변명에는 피해 당사자의 이야기며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 누군가를 넣고 빼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이 정당하다면,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빠지게 되더라도, 솔직히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들을 빼버리더라도, 그건 우리의 선택일 뿐이다. 물론 예수와 공자, 샌델은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이 아니다.

마이클 샌델(M. J. Sandel)은 삶에서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걱정하는 중요한 이유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공감과 연대의식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평등이 깊어질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삶은 점점 더 분리된다. 불공정한 사회일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가 따로 놀게 된다. 서로의 이야기에서 서로가 사라지고, 그 사라진 자리가 증오와 분노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날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날이겠지만, 아마도 그리 행복한 날은 아닐 것이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까마득한 이야기까지 나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십년 동안 있었던 일을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자기정당화의 이야기는 없어져야 한다. 식민지 지배나 억압의 당사자가 아니고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닐지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의 아픈 기억을 나의 이야기에 담아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에는 해방의 기쁨, 분단의 아픔, 새마을 운동, 폭압정권, 경제성장, 민주화운동, “잃어버린 10년”에도 나눠주는 몫과 자리가 있어야 한다.

부자가 된 가난했던 사람의 이야기며, 가난해진 부자의 이야기와 가난하게 태어나 더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우리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정당화를 향하는 도덕적 개인주의자의 뻔뻔한 변명과 배제의 이야기를, 남의 불편하고 비참하고 서러운 이야기를 기꺼이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풀어내고자 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로 넘어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빠져도 그만인 ‘나머지’가 아니라, 누구나 “기업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무엇이 도덕적 잘못인지, 사람은 어떻게 존중받아야 하는지” 잘 아는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