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③-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대다수의 국민들은 국정원이 어떤 기관인지는 알아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분명히 알고 있는 점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그들은 막강한 권한을 국민도 모르게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회조차도 그 예산 집행 내역을 알 수가 없는 집단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사용한 권력은 한국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일에도 동원되었다는 점도 일부 밝혀진 바 있다.

이번 대선 정국에서 드러난 국정원 댓글 사건은 그들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집단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댓글 작업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직원은 종북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종북이라면 그들은 가장 위험한 종북 세력임에 틀림없다. 남북 대치 국면에서 북을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은 남한 사회의 국론 분열과 민주주의의 퇴행일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선과정에서 이루어진 국정원의 행위는 그 어떤 공작 정치보다도 유치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막대한 세금을 들여 무엇을 하나 했더니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댓글 작업이었다. 마치 값비싼 다이아 반지 사주었더니 집안 유리나 자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울러 박근혜 정부 역시 이번 국정원 댓글 사건의 피해자임도 드러났다. 왜냐하면 박근혜 정부가 처음부터 정통성을 잃은 실패한 정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출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법상 장물 취득죄는 미필적 인식의 성립만으로도 적용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불거진 이 문제에 대해 적어도 미필적 인식의 차원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이 훔친 민심이라고 하는 장물을 취득한 정권이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이 이번 문제에 대해 미봉적으로 대할수록 국민들은 그들의 인지 가능성에 대한 더욱 가능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가장 상식적인 국민들의 판단은 구린 구석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는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덮으려 하지 말고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과 같은 권력 기관이 더이상 민심을 우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역적 행동을 하지 않도록 철저한 개혁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보기관의 특수성이라는 수사를 동원해서 그들의 범죄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패한 정권 혹은 성공한 정권은 정권초기에 나올 말이 아니라 정권을 내려놓은 이후에 나와야 할 평가인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② –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아먹은 자 누구냐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아먹은 자 누구냐

강지은(한철연 회원, 웹진편집주간)

드디어 1954명의 언론, 출판계 인사들이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한국언론은 죽었다”고 비웃는 해외 언론들의 비난을 이제 면할 수 있을까. 아직 멀었다. 권력과 유착한 메이저 언론들은 ‘국정원 대선 개입’에 분노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왜곡, 유린하고 있다. 이들이 권력에서 독립해 국민을 위한 목소리를 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부터 작금의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지는 권언유착은 흡사 5공화국을 떠올리게 할 만큼 친정권적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은 누가 뭐라해도 권력에 의한 부정선거임을 피할 길이 없다. 부정선거로 권력을 쟁취한 자들이 앞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못할 짓이 무엇이겠는가. 권력과 유착한 국가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이 명확한 이 마당에 대한민국의 국민은 어떠한 미래도 꿈꿀 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죽은 꽃에서 어떤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배 열사들이 핏자죽이 아직도 선명하건만 이 시대의 민주주의는 죽은 꽃이 되어버렸다.

국정원의 선거개입만 문제가 아니다. 권력기관의 부패가 드러난 이 시점에 대선개표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시행되었어야 할 수개표가 진행되지 못했다.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확인되어야 할 투표용지가 오류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기계에 맡겨졌다. 민심은 천심이다. 천심을 기계에 맡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언론과 야당은 국정원대선 개입문제 뿐만 아니라 수개표까지 관철시켜야 한다.

언론을 타지 못하면 없는 일이 될 만큼 강력한 것이 언론이다. 언론은 오감을 곧추세워 헌정질서를 교란시킨 범죄자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역사에 늦은 시기란 없다. 언론은 권력의 하수 노릇을 집어치우고 국민과 민주주의 수호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① – 은밀하게 위대하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한길석(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교육부장)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장탄식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을 아끼지 않는 어느 국가 기관 종사자들의 전사적 열망 때문이란다. 하지만 난 그들의 순정을 믿는다. 그들이나 나나 ‘자유와 진리’를 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서, 그들은 내곡동 어느 골짝에서.

1960년대 이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던 이 은밀하던 기관은 구제금융기의 경제적 위기를 맞아 ‘정보는 국력’이라는 대단히 경제적인 모습을 잠시 보였다가 어느새 ‘진리와 자유를 향해 무명’으로 ‘헌신’할 줄 아는 위대한 변신을 하게 된다. 경제적 가치로만 폭주하고 있는 이 한심한 세상에서 참으로 고고하게도 ‘진리와 자유를 향한 무명의 헌신’을 외치다니…역시 그대들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사는구나.

‘자유와 진리’에 대한 이들의 이름 없는 헌신은 작년 이후 줄곧 너무도 교묘하게 수행되고 있다. 그들이 행한 ‘NLL 공작’과 ‘사이버 여론 조작‘이라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의 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찬란한 부활을 위한 ‘고육지계’다. 이건 ‘자유와 진리를 향해’ 헌신해 온 동업자만 알 수 있는 직감인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민주화 이후 민주화의 의미를 마구 ‘민주화’시켜 결국 ‘홍어 삼합’과 함께 좆으로 가공한 ‘우중’의 가공할 행태에 격분한 나머지 민주주의의 진리와 자유를 위해 악명을 뒤집어쓴 헌신의 가시밭길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죽어가는 민주주의의 회생을 위한답시고 이름과 명예를 걸고 싸우고 있는 데 반해 우리의 전사들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부활을 위해 이름 따위는 제쳐두고 달려든다. 상대가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름 없는 헌신은 민주주의의 번영을 위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진리를 들이대면서 반민주주의의 doxa를 물리치는 것도 방법이지만, doxa의 거짓됨을 분명히 드러내게 함으로써 진리에 기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997년에 세운 ‘북풍공작’이 그 좋은 예다. 이 황당한 계획에 꼬여들게 만든 그들의 교묘함이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사들을 욕하는 건 이제 그만 두기 바란다. 오늘은 저들의 품 안에 안겨 그들 입 안의 혀 노릇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일 이들의 무명의 헌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행동을 더욱 단련하는 데에 좋은 망치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대들이여 민주주의를 위한 반민주주의 행보에 더욱 표독스럽게 매진하기를. 그대들이 더러워질수록 민주주의는 더욱 아름답게 빛날테니…. 건투를 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성명서-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성명서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논란과 함께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나라가 시끄럽다. 나아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중·동 신문은 대화록의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왜곡보도를 일삼고 있다. 공개된 회의록만 보아도 이들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텍스트만 읽고 콘텍스트는 읽지 못하는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NLL포기 발언’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무마하려는 정치적 의도 속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이 ‘국정원의 자발적 댓글 공작정치’ 이상의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정상회의록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혹의 핵심에는 김무성 의원이 있다. 지난 6월 25일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총괄본부장이었던김무성 의원은 “지난 대선 때 이미 내가 그 대화록을 다 입수해서 다 읽어봤다”라고 발언하였다. 국가 기밀인 정상회의록이 특정 정당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사실로 확정된다면 박근혜 정부는 물론이고 국가의 위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가 정보기관이 특정 정치 세력에게 국가기밀을 넘겨 선거에 개입하였기 때문이고 국가의 공공성 그 자체, 중립성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원 수장은 “국정원의 명예와 직원의 사기 진작을 위해 공개했다”고 말하는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 땅의 국가가 ‘공적인 것’(res publica)으로서의 국가(Republic)인지 반문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묻는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일찍이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다중의 표현으로, 자유로운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로,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로 이해하였다. 즉 민주주의는 절대적 힘의 표현이며, 따라서 구성적 행위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은 자율적인 주체들의 정치적 행위라는 민주주의의 구성행위 그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 대중의 권능(potestas)을 무력화하고 민주주의를 실제적으로 생산하는 힘(potentia) 또한 상실하게 만든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조사 계획서는 조사범위를 “전 국정원장의 불법 지시 의혹 및 국가정보원 여직원 등의 댓글 관련 등 선거 개입 의혹 일체”로 한정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국정원 댓글 사건’이 아니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자율적 존재의 힘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대중의 힘을 드러내는 것 그 자체를 부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절대적 민주주의를 향한 집단의 힘과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을 통해서만 풀어낼 수 있다. 민중의 힘의 표현과 그 힘을 통한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이 민주주의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실제적인 민주주의를 구성하고자 하는 힘을 더욱 증가시킬수록 우리 모두는 더 많은 권리를 갖는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을 표현할 때 생긴다.

따라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이번 사태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다. 진정한 민중의 권력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정치를 민중의 사회적 힘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선열들의 피와 땀을 먹고 자랐다. 인간 존재는 고갈되지 않는 자유를 향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한 여정 역시 멈출 수 없다. 이 땅에서 철학은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주체가 바로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이 삭제될 수 없는 시간성 속에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힘을 조직하는 한편, 통치 권력의 부정성과 언론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관료적인 경직성과 이데올로기적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 어떤 권력도 억견과 위선으로 생성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다.

2013년 7월 16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응답하라! 학생들의 시국선언에 침묵하는 언론과 어른들이여![시대와 철학]

응답하라! 학생들의 시국선언에 침묵하는 언론과 어른들이여![시대와 철학]

?

한유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대학의 어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난 6월 18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국정원선거개입 관련 시국선언을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을 시작, 의견을 수렴해 다음 달 중 시국선언을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일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과 경찰 축소수사에 대한 총학생회의 입장’을 발표했다. 이어 20일에는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시국선언 추진을 공식 발표했다. 비운동권 성향의 서울대 총학생회의 이러한 행보는 곧 다른 비운동권 총학을 포함한 대학들의 동참 선언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종교계도 서서히 이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 시국선언 추진 운동은 SNS를 통해 확산된 것과 비운동권 총학, 총학이 아닌 ‘보통 학생’들의 적극적 참여가 특징적이다. 총학이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시국선언에 불참하겠다고 밝힌 성신여대는 SNS를 통해 하루 만에 자신을 ‘보통 학생’이라 밝힌 119명이 모여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119명의 학생들은 정치적 중립의 기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총학생회장의 직함으로 대통령 직속 기구에 소속된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 하면서 ‘사회문제에 학생 자격으로 목소리를 내는 시국선언’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주저하는 총학의 언행은 모순입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에서는 정치외교학과 학생 4명이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이렇게 대학가에서 운동권, 비운동권의 범주를 깨고 자발적 정치참여가 시작되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다. 대학 내의 운동이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교수나 재야인사, 종교계에서 시국선언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먼저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반면에 교수 등의 대학가의 ‘어른’들은 그 어떤 뚜렷한 제스처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침묵은 촛불로까지 번지고 있는 대학가의 시국선언과 지지호소의 열기를 식히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시국선언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해야만했던 그 교수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다른 선언을 준비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때 당했던 상처를 아직도 수습 중인가? 그도 아니면 시국에 대한 온도차가 있는 것일까,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주의에 빠져있는 것일까? 교수들도 개인적으로는 활발하게 의견개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집단적 입장 발표도 없는 작금의 상황에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20대는 88만원 세대, 혹은 삼포세대라고 일컬어진다. 기업은 그들에게 취업하고 싶으면 자신의 절박함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 절박함이란 것은 수시로 학점으로, 토익 점수로, 해외연수경험으로, 자기소개서로 바뀌건만 취업문은 절대 넓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정부는 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자신의 빈궁함을, 경제적 비참함을 만인에게 공개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그들이 정치에 등 돌리도록 종용한다. 그런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리고 그 노력에 지지를 호소하는 대학생들에게 지금 그 스승들, 멘토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

▲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왼쪽부터 네번째)과 학생들이 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규탄하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노골적인 언론의 권력앓이

?
이렇게 한쪽 날개로만 힘겹게 날아오르려 하는 대학생들을 언론은 노골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학생들의 시국선언을 파급력 없는 단순한 ‘선언’으로 끌어내리려는 언론은 침묵하는 방법으로 정치권력을 돕는다. MBC와 YTN의 메인 뉴스에는 시국선언에 대해 아직까지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또한 포털 사이트 ‘네이트(NATE)’에서는 21일에 ‘시국선언’ 단어를 검색하면 사이트가 먹통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논란이 커지자 네이트는 단순한 기술상의 오류라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시국선언’을 검색하면 검색어가 ‘시국의 선언’으로 자동으로 바뀌어 검색되는 기현상이 있었다. 또한 포털 사이트 ‘네이버’ 또한 21일에 ‘다음’과 달리 실시간 검색순위에 ‘시국선언’에 관련된 검색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이 시국선언을 검색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슈파이팅을 저지하려는 의도인지, 그저 단순 오류인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네이트와 네이버의 검색어 조작논란은 이러한 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매번 있었고, 그때마다 전문가들의 조작에 대한 근거제시와 함께 네티즌의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이보다 더 적극적인 언론들은 정치세력들과 함께 돌팔매질에 돌입했다. 조중동은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수사과정에 있는 사건에 대해 ‘시국’ 운운하는 것은 과잉행동이라는 자신들의 주장과 함께 따라서 ‘시국’에 대한 논쟁이, 선언에 찬성하지 않는 학생들의 반발이 학내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리고 특히나 학생들의 선언이 무게가 없다거나, 그저 또래의 유행 같은 집단행동이라는 등의 ‘권위 있는 교수’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파급력을 깎아내리고, 갈등요소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진부하지만 언제나 효과를 보장하는 ‘물타기 수법’도 등장하고 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이에 대한 수사 축소 및 은폐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 사건을 앞에 두고도, NLL 대화록을 공개하겠다는 유치하고 진부한 협박이 통하리라 생각하는 정부와 국정원, 집권여당의 수준이 개탄스럽다. 하지만 그보다 더 쓰라린 점은 이러한 방법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꾸준히 진행되어온 권력의 언론 잠식은 박근혜 지지율 70%라는 경이로운 효과를 드러냈다. 인사 참사와 외교에 대한 무능력이 여실히 드러났음에도 말이다. 그러니 권력이 학생들의 선언문따위야 묵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끝없이 ‘권력앓이’하고 있는 언론이 든든히 버티고 서서 적절한 어휘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국정원의 선거개입 정황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그 사안 자체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중대하고 위급한 문제임에도 언론은 애써 이것을 ‘민감한 정치적 문제’로, 따라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논조로 문제를 축소시키려 한다. 2008년의 촛불집회는 국민의 주권과 건강권이라는 이슈를 중심으로 공감대 형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뛰었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여론 형성과 의제 설정을 위해 제 4의 권력으로서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언론은 이명박 정부의 방통위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해고·해직의 칼날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괴사(壞死)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제 기능을 잃어버린 언론은 정권의 나팔수로 활동하던 지난 세월을 그대로 반복하려 한다.
?

다시금 촛불은 번져나갈 것인가?

?
수도권 지역 대학생들은 21일부터 광화문에서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돌입했다. 주말인 23일에는 시민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이 광화문에 모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날, 경찰은 최루액을 분사하였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고교생의 얼굴에 최루액을 분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첫 촛불집회에서 경찰은 집회의 양상을 고려하지 않고, 진압수위를 높이는 충성심을 보인 것이다.

‘민감한 정치적 문제’라는 용어로 국민을 주춤하게 만들고, ‘종북좌파’라는 틀거리로 학생들을 옭아매면서, 국정원의 NLL 대화록 공개라는 눈가리개를 통해 박근혜 정부는 촛불을 꺼버리고 싶어 한다. 이명박의 정치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박근혜 정부는 촛불을 두려워하는 것 또한 닮아있다. 하지만 2008년에 비해 보다 더 정부에게 유리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미온적인 태도의 교수들과 어른들, 일베로 대표되는 젊은 ‘넷(net) 극우파’들의 극성스런 방해로 이번 학생들의 촛불은 채 자신을 다 태우지도 못하고 사그라져갈지도 모른다. 다시금 촛불이 번져갈 수 있을까? 그것은 ‘정상적인 나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싶다는 학생들의 절실한 바람과 정당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답하고, 자발적으로 응하는 태도에 달려있을 것이다.

 

과잉의 시대-적절함의 가치를 조롱하다[시대와 철학]

과잉의 시대-적절함의 가치를 조롱하다[시대와 철학]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불편한 진실-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과잉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이라도 지나치면 칭찬을 듣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안겨 준다. 나에 대한 과도한 칭찬은 늘 몸 둘 바를 모르게 하고 칭찬하는 이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상 어느 정도의 칭찬이 적절한지는 늘 칭찬의 대상자 자신이 정확하게 알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과잉이 야기하는 문제는 비단 칭찬에 관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기야 ‘과잉’이라고 하는 표현 자체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 법한 자태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가난’ 이외의 과잉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수많은 과잉의 숲에서 숨 쉬고 있다. 문제는 과잉의 상태가 긍정의 요소마저 부정적 상황으로 치닫게 만든다는 점이다. 친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프렌차이즈 식당에서는 주문을 받을 때 종업원들이 거의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는 듯이 자세를 낮추어 주문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경제적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친절의 과잉으로 느껴져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 겪는 불편함은 서비스 혹은 친절의 과잉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문제 중 아주 사소한 점에 불과하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사자들도 자발적이기보다는 고용주의 요구에 따른 것이기에 편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친절이든 칭찬이든 적절함을 잃어버릴 때 그것은 즐거운 감정의 형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찜찜한 뒷맛을 남기기 마련이다. 최근에 벌어진 대한항공 승무원 폭행 사건이나 전화 상담 업무에 종사하는 직원들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는 친절 과잉 사회의 폭력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과잉의 ‘감정노동’에 도사린 이중의 착취

 
최근 각종 언론에서 우리나라의 생산성 향상율 저하가 경제 성장을 더디게 한다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특히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이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뒤진다는 보도는 서비스 산업 종사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빌미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한다. 이러한 분석들은 1차적으로는 기업의 생산성 강화 노력을 촉구하는 근거로 작용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 강화로 이어질 개연성도 결코 낮지 않다. 특히나 서비스 산업의 최일선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분석이다.
 

그림출처: http://hook.hani.co.kr/archives/33293


 
감정노동의 문제를 대하는 언론의 보도 태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열악한 근무 조건에 시달리는 감정 노동자들의 근무 실태를 다루는 기사들 대부분이 이른바 몰상식한 고객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기업 임원에 의한 대한항공 여승무원 폭행사건에 대한 보도에서도 몰상식한 가해자의 행위와 대한항공의 대응 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서비스의 과잉의 근본적인 책임은 자본에 있다.
 
소비자들이 감정노동자들을 향한 과도한 친절 요구에도 분명 문제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잉의 서비스에 익숙해진 결과이지 소비자가 먼저 요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른바 서비스 경쟁이라고 하는 경영방침이 종업원들에게 지나친 감정노동을 강요하고 소비자들의 태도는 그러한 대우에 익숙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소비자가 먼저 밥 먹으러 가서 무릎 꿇고 주문 받는 서비스를 기대했을 리 없고, 허리 깊숙이 숙이는 절을 요구하는 고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잉의 서비스는 고용주들이 친절을 명백히 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우리가 이만큼이나 극진하게 서비스를 제공했으니 소비자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을 못박아두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동일한 제품이 백화점에서 훨씬 비싸게 판매되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도 극진한 친절 비용까지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상 그러한 서비스의 제공자는 기업이 아니라 일선의 감정노동자이다. 그러므로 감정노동의 착취는 자본이 노동자들의 감정을 이용해 이윤을 극대화하면 감정노동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는 것으로 자본의 전형적 노동 착취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또한 소비자들로부터는 선택의 여지없이 불필요한 비용까지 지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소비자에 대한 착취 구조마저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마치 과대 포장으로 제품 가격을 부풀려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과 다름없다.
 
 

여러 겹의 질곡

 

현재 우리나라에서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리고 감정노동으로 분류되는 직종들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전문성을 요구하지도 않고 진입 장벽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역으로 말하면 노동 강도가 세고, 저임금일 가능성이 높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신분의 불안전성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필연적으로 여러 겹의 질곡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한다.
 
우선 감정노동자의 상당수가 여성이라는 점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가 산업의 영역에서 강고하게 전이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여성의 노동을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산업화 시대에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에 종사했던 상황이 서비스업으로 전환되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또 다른 질곡은 고용주와 소비자 어떤 쪽으로부터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장치를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감정노동자들에게 고용주의 권력과 소비자의 권리는 이중의 족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감정노동 자체가 이미 상품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공하는 감정노동자의 인격적 지위는 원천적으로 상실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노동자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에 더해 고객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소외까지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염려되는 점은 감정노동이 근본적으로 노동자 자신이 스스로에게서 겪는 자기 소외를 경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자신의 본래 감정과 정서를 어느 정도는 감추어야 한다는 점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가장된 감정을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 견딜 수 없는 질곡이며, 지속적으로 자존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트레스 이상의 부담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과잉의 억압은 일상을 왜곡한다

 

과도한 친절에의 요구는 일상의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사례가 존칭 사용의 왜곡이다. 고객에 대한 지나친 존칭 사용의 관례가 이제는 상품에 대한 존칭으로 굳어지고 있다. 티셔츠 한 장을 구매하려는 순간에 우리는 매장 직원으로부터 “그 제품은 세일중이세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상품에 존칭을 붙이면 우리는 그 상품을 떠받들어 사야 한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일부러 그러한 어법을 사용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을 텐데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말을 할 때 ‘다’, ‘나’, ‘까’로 문장을 맺으라고 하는 어법을 요구한 결과 “다음 주에는 제가 휴가를 가지 말입니다.”와 같은 어색한 표현이 굳어지고 있는 현상과 같다. 존칭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부담이 모든 말에 존칭을 붙이는 식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산업 구조에서의 비중이 제조업에서 서비스 산업으로 급속하게 확대되는 추세에서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제도적인 보호책 마련은 서비스 산업 생산성 향상보다 시급한 문제이다. 감정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단지 감정의 착취만이 아니라 미래마저 착취당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존중은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격적 존중의 태도를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산업 사회에서처럼 노동자들이 그러했듯 감정노동자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서기 전에 국가와 사회가 먼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말이 힘을 잃은 시대의 한반도[시대와 철학]

말이 힘을 잃은 시대의 한반도[시대와 철학]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1. 아무도 믿지 않는 말잔치의 풍경

 

작년의 대선 결과가 충격으로 다가온 사람들, 그 이후에도 일련의 정치적 ‘꼬락서니’들을 넋 놓고 보아야만 하는 우울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봄’ 기운은 참으로 간절했었다. 그런데 연일 계속되던 북한의 ‘악다구니’와 그것을 교묘히 활용하는 남한의 위정자들은 이 ‘꽃샘추위’가 더 지속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2013년 봄 연일 계속된 한반도 긴장 국면이 그 정점을 찍고 서서히 ‘대화 재개와 신뢰 구축’이라는 예정된 각본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북한 내부의 불안 요인을 잠재우는 거짓말과 남한 내부의 불안 요인을 증폭시키는 거짓말이 서로 교차하며 이익을 얻는 집단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거짓말 잔치의 풍경이 지금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파국’으로 치달을리가 없다고 모두 암묵적으로 전제했던 이 위험한 ‘쇼’의 각본은 사실 상호의 이익이 어느 수준을 넘어섰을 때 ‘불장난을 멈춘다’는 연출자들의 보이지 않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이 정도 수위에서 북한, 남한, 미국, 중국 모두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내부세력을 단속하고 강성 군부를 통해 독재 리더쉽을 과시했으며, ‘핵 보유’와 도발의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는 점진적 개방과 투자를 위한 협상력을 강화했다. 남한의 박근혜 정부는 이 ‘북풍’을 통해 ‘낯 뜨거운’ 직무수행 능력을 덮어버리고, 뒤숭숭한 민심을 불안감과 외부 관심으로 얼기설기 솎아 내고 안보상황을 유리하게 환기했다. 물론 개성공단의 위기가 남북한 경제에 실제적으로 미치는 파급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은 양자가 서로 큰 부담 없이 다음 절차를 위해 이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미국의 공고한 군산복합체 지배계층은 최신 무기를 전시하고 판매할 수 있는 ‘모터쇼’를 성황리에 열었으며, 북한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방어하는 향후 ‘칭얼대는 아이 달래고 혼내기 액션’을 보다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북한이 쏟아내는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언사들은 실상 그들의 공포심과 두려움을 은폐하고 있으며, 그 ‘위험한 악동 코스프레’는 고립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산된 행동의 일부일 뿐이다. 물리적 전쟁으로 결코 승리할 수도 없고, 전면전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북한의 군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호기롭고도 가련한 무기-핵무기를 빌미로 한 심리전쟁, 말의 전쟁-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당국의 언사가 호전적이면 호전적일수록 그 말의 진정성은 떨어지고 현실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

그런데 무슨 사고만 터지면 ‘북한의 소행이다’라고 몰아가는 남한 정부와, 중국조차 믿을 수 없는 무기력한 힘의 대결에서 거짓말을 남발해서라도 작은 통제력을 갖추고자 하는 북한 당국의 몸짓은 어쩐지 서로 닮은 데가 있다. 이러한 북한 지배층의 위악(僞惡)의 포즈는 남한 지배 권력의 위선(僞善)적 포즈와 쌍을 이루어 전후 한반도의 인민들을 통치하는 가장 중요한 기만 술수였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한반도의 이 기묘한 호혜적인 관계는 2013년, ‘3대 세습권력’과 ‘독재자의 딸’이라는 최악의 조합이 갖고 있는 상호 필요성으로 인해 이 땅에서 다시 재현될 조짐을 보인다.

사실 남과 북의 권력자들이 모두 원하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을 하고 아무도 신뢰할 수 없는 이미지를 연출하면서도, 인민들로 하여금 마치 그 말과 이미지가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고 싶게 만드는 ‘연극적인 상황’이 아닌가. ‘거짓에 의해 지속되는 공동체’가 남과 북에서 모두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도록 한반도의 현대사는 모질게 흘러왔다. ‘능수능란한 사기꾼은 속고자 하는 사람들을 항상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조언이 오용되면 위험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기표가 함의하는 바를 모르고 ‘속은’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스스로 ‘속고 싶어서’ 그녀를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면 향후 제도권 정치를 통한 삶의 개선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show’를 쑈인줄 알면서 그것을 적절한 수위에서 소비해주는 것과, 쇼가 아닌 삶과 역사의 문제를 쇼처럼 관람하고 방관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미 숱하게 속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속아 넘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끝내 자기 자신의 양심까지도 속이려 들것이다. 말 같지 않은 말도 반복적으로 들으면 고유한 세뇌 효과를 얻기 마련이고,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기 때문이다. 탈출구 없는 불안한 민중들이 상징조작과 선동의 효과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출 때의 참혹한 광경을 우리는 이미 20세기 전반의 파시즘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2. 불신시대의 언어와 무기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은 오늘날 정치와 경제 두 영역의 교차지점을 꿰뚫는 핵심적인 테제이다. 또한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지도자 마르코스의 메시지는 이제 전혀 다른 맥락에서 지금-여기 상황에 적용된다. 진실을 거의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전체주의 체제 독재자의 말은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이데올로기를 실현한다. 늘 속셈을 숨기면서도 국가와 민족, 국민과 국익을 주워섬겨야 하는 선출된 권력자의 말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축한다. 자신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말을 확신에 찬 어조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서 내뱉는 것은 이제 국회의원에게도 필수적인 자질이 되었다. 필자는 “음란물의 유통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 중에 “누드사진”을 검색했다고 뒤늦게 수습하는 새누리당의 어느 중진 의원을 보면서 시궁창 똥물을 뒤집어 쓴 ‘공공언어의 무덤’을 목도했다. 공적 권력에 의해 공표된 말이 가장 의심스러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대의민주제 정치가의 기본적인 레토릭마저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남한의 위정자들을 보면, 혹시 그들이 쏟아내는 말은 스스로의 권위를 자해하는 무기이거나 스스로의 수준을 까발리는 풍자의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새 대통령이 정성들여 쓴 수첩에서 비밀스럽게 나온 비리 인사(人事)들이 만들어내는 저 지리멸렬한 가관을 보라. ‘4대 중증질환 진료비 100% 보장’이라는 대선 공약(公約)을 첫 번째 보건복지부 장관인 그녀의 최측근이 “그것은 선거 캠페인용 문구”였다고 말하는 ‘셀프 공약(空約) 인증’을 보라. 실상 재벌과 부자들만을 위한 나라를 만들 작정이면서도 선거에서는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거짓말할 수밖에 없고, 서민들과 노인들에게 어떤 식이든 복지 떡고물을 나눠주는 액션을 취해야 하지만 결코 재벌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을 수 없는 자승자박(自繩自縛) 딜레마에 빠진, 구중궁궐 홀로 고고하고 불쌍한 ‘근혜 언니’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이 청와대 발(發) 불신지옥-퇴행의 정치를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허허.

▲ 3월 21일 박근혜 대통령이?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청와대

이처럼 ‘거짓말’이 일상이고 진정성이 예외가 된 정치권력의 언어가 탐욕만이 승리를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의 언어와 쌍둥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된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듣기 힘든 이 사회를 풍자하며,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공유하는 우스개 소리도 당연히 출현했다. 개그콘서트의 ‘현대레알사전’에서는 어휘의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이해되는 현실의 진짜(real)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 코너에서는 “직장인들에게 회식이란?” “‘사장님, 회식비로 차라리 월급이나 올려주세요’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 또 다른 뜻으로는 사장님이 카드만 주고 가셨으면 하는 것”이라고 폭로하며 시청자의 호응을 이끌어낸다.

한편 최근에 필자가 인터넷에서 재미있게 본 어느 댓글에서는 현실을 이렇게 조롱한다. “자유주의란? 돈에 구속당하는 것. 신자유주의란? 돈에 더 구속당하는 것.” 물론 원장님의 지침에 따라 편향된 정치적 댓글을 다는 것이 주된 업무인 국정원 일부 직원들에게는 언어의 의미와 변용 따위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말이 가진 해방의 힘은 제거되고 구속력만이 작용할 뿐이다.

이제는 ‘텅 빈 개념’이 된 민주주의, 주권이라는 말이 그 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로 인식되는 사회에서는 불신 관계가 더욱 강화한다. 특권층과 기업을 위한 조치가 국민들을 위한 조치로 둔갑하는 사회에서 ‘점령당한 방송사’의 뉴스를 볼 때는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국가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신봉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성경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는 신앙인과 대화할 때만큼이나 답답해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현대의 고사성어를 잊을만하면 상기시키는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결을 보며, 인민들은 공권력이 집행하는 정의(正義)와 국가가 보장하는 생존에 대해 기대감을 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이렇게 당당히 외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나는 오직 돈만 믿는다.”

더 많이 누리고 가진 자의 말일수록 믿을 수 없는 시대, 서로의 말이 말 같지 않아 말이 무기력한 사회, 음모론과 증권가 찌라시가 존중받는 시대, 곧 말뿐인 시대. 그래서 믿을 거라곤 내 재산밖에 없는 피곤한 사회, 돈이 있어도 고민, 없어도 고민이지만 어쨌든 돈이 무기인 사회, 곧 너도나도 ‘힐링’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서 잠이라도 푹 자고 싶은 프로포폴 권하는 사회. 불신-불안-공포가 대중의 가장 강력한 정서이자 가장 강력한 지배수단이 된 시대. 이것이 작금에 들어 더욱 퇴행할대로 퇴행한 저잣거리 정서이자 대중이 가진 시대정신의 실체라고 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인식일까.

 

3. 불감증: 소통이 어려운 사회의 질병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 이런 말을 남기고 자살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전교 1등’이라고 언론에 보도된 학생의 유서를 보았다. 이 유서에는 공표된 말과 실제 현실의 괴리가 심한 우리 사회의 가장 처절한 단면이 예리하게 드러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보장된다는 행복한 미래에 관해 말씀하시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만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현재를 만드는가. 그 권위 있는 말이 사실과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갈 때, 말은 거품이고 성적만이 실체인 학교에서 조숙한 그 아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타인과의 정서적 교류나 연대가 몰가치하며 불필요한 것으로만 폄하될 때 우리 내면은 얼마나 쪼그라드는가.

서로 다른 저마다의 생각은 효율과 성장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강요했던 ‘박통시대’의 시즌2가 그의 딸에 의해 도래했다. 전인교육, 감성교육 이런 말은 이제 중등교육 현장에서 구호로 외쳐지기도 민망해졌다. 공교육에서 외면한 역사교육, 시민교육으로 대학생들의 역사적?정치적 감수성도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다. 필자는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가고 있는 젊은 파시스트들이 이런 현상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부터 서열화와 폭력이 상식이 되면 민주(民主)와 다양성은 낯설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진다.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 그렇게 훈육되고 있는데 학교폭력이 어찌 학교와 부모의 문제일 수 있겠는가. 이 사회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가 이미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자신은 감당하기 싫은 고통과 폭력을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만들어갈 한반도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 안전한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작년 대선 이후 가속화된 ‘늙은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젊은이, 젊은이를 믿지 못하는 늙은이’의 사회가 도착할 터널의 끝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에 담긴 파시즘적 상황보다 더 끔찍하다. 남한 내부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남과 북이 서로 대화하고 교류할 수 있는 각 영역의 광장들이 쉽게 열릴 수 있을까. 평화를 위한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도 서로의 이익이 확대될 수 있는 조건의 확장이 아니라, 먼저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조건의 확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짓’이 일상이고 ‘진실’이 예외적인 상황이 되면 말 자체는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 고립감을 키우는 개인적 정서의 문제라면, 불감증-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고 공공의 문제를 공적으로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자체를 상실하게 만드는-은 사회적 정서의 문제이다. 말의 힘이 무너진 시대에는 어차피 합리적인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시민의 정치력이 쇠퇴하고 공공의 문제에 대한 불감증이 커지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 힘을 가지는 관계, 즉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관계가 확산된다면 사람들의 약속과 상호연대는 보다 강력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인민들은 비로소 자율성과 감수성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사회의 한 조건은 공적으로 뱉은 말이 자발적인 권위를 갖출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서로의 말을 경청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말을 뱉은 자들이 자신의 말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 말이 가진 가치와 의미를 행동으로 실현하고 그 관계의 망들이 서로 엮여져 그것이 가장 강력한 권력이 되는 정치, 아니 그런 말과 말의 선순환 관계가 일상이 되는 사회. 그것이 현재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거짓말’이 아닐까.

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운지, 앙망, 전땅크…

 

요즘 인터넷 상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말들이다. 이는 극우적 인터넷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이하 일베)’를 중심이 펴져나가는 인터넷 비속어들이다. 일베는 특정인에 대한 악플과 극우적 콘텐츠 생산으로 최근 여러 언론에서도 조명을 받고 있는 화제의 커뮤니티다. 운지는 고 노무현대통령을 죽음을 모TV광고에 빗대 조롱하는 것이며, 앙망은 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사형선고 이후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에 나오는 단어로 이를 고 김대중 전대통령을 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 전땅크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격상시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용어는 50~60대의 보수층이 아닌 10~2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인터넷을 넘어 일상적인 비속어로 자리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커뮤니티의 규모가 커지면서 단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정치인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넘어 독재찬양,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 외국인, 노동에 대한 혐오와 극단적 지역감정을 내보이며 파시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로 여겨지고 개별적 인성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악플의 수준을 넘어 이들이 뉴라이트나 조갑제 등 극우적 인사들의 인식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내용들을 생산하는 사이트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머를 빙자하여 인기를 끌면서 상당한 규모로 성장함에 따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일베저장소 사이트 캡처(http://www.ilbe.com/)

 

10~20대의 보수화는 IMF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이슈였지만 최근 나타나는 이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90년대의 젊은 층의 보수화는 개별적 생존의 문제에서 비롯되어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양상을 뛰었다면, 2010년대의 보수화는 집단적 불안감 속에서 그것이 뭉쳐지고 파괴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민주적 의사과정이나 저항을 경멸하고 강렬한 리더십을 원하는 측면에서 파시즘의 초기 모습과 상당히 닮아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한국사회와 자본주의가 던져주는 무한경쟁과 낙오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이를 제압할 강력한 권위에 대한 추앙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사회계약론이 자연상태나 전쟁상태에 대한 불안감을 기초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근대사회계약론의 모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자연상태와 주권에 대한 해석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연상태가 전쟁상태를 유발할 수 있고 이를 방지하기위해 초월적 권력을 만들어야한다는 점은 홉스, 로크, 루소 등 근대사회계약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사회계약론의 요지는 개인은 계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고 초월적 권위에 스스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근대사회계약론에서 주목해야하는 점은 과연 실제 계약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개별의 보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초월적 권위에 의지하려한다는 점이다. 대개 개인은 자신의 보존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서 사회적 계약 속으로 들어가고 또 주권은 자신의 외부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함으로써 개인을 포섭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계약은 개인적 욕구와 그 자발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과 주권 사이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사회계약으로 인한 초월적 권위에 대한 인정이 개인이 주권에 포섭된 형식이 아니라 자발적 형태를 띠게 될 때 이는 파시즘으로 흘러갈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둘 간의 긴장관계는 종속으로 변한다.

 

출처: 블로그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lo9956&logNo=10153502640&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주권은 자연상태에 대한 공포를 매개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데 기존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자연상태는 북한과 관련된 전쟁, 적화통일과 같은 것이었고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확대 생산되어 왔다. 이러한 자연상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민으로 하여금 추상적 공포를 제시해왔다. 그 반면에 21세기 한국사회가 개인에 던지는 자연상태의 공포는 개인의 보존을 직접 위협하는 미시적 공포다. 개인적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 9%를 넘어서는 청년실업, 그나마 있는 직장들은 비정규직인 상황과 사회에서의 대화단절은 젊고 어린 학생들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추상적 공포는 젊은이로 하여금 그 실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여유를 주지만 개인의 실존과 관련된 공포는 이러한 상상력을 제한시킨다. 기존 한국에서 던져졌던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미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기성층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오지만 경제적, 사회적 인정과 관련된 공포는 젊은 층에게 훨씬 더 큰 위협을 안겨준다. 이러한 공포가 건강한 비판과 저항으로 나타나 경우도 많고 이를 20~30대의 대략적 정치적 성향이나 인터넷의 대부분 여론에서 확인 할 수 있으나 그 반대급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좌절 속에서 파국과 폭력적 권위를 기대하는 젊은 여론이 인터넷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일베’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일반적 용어와 다르게 사용된다. 민주화는 패배, 반대, 무엇에 당함 등의 의미를 지니고 산업화는 승리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는 인터넷공간을 넘어서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주화는 비속어 사용되고 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나는 것을 ‘민주화 당했다’고 표현한다. 민주화가 이렇게 경멸당하면서 반대급부로 ‘전땅크’는 추앙받는다. 이러한 ‘일베’의 회원은 100만여 명에 이르고 동시접속자는 2만여 명에 다 달한다. 이들은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적 커뮤니티에 쉽게 안착하지 못한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 응어리를 비뚤어진 형태로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이다. ‘일베’의 언어의 특징은 반말과 욕설이다. ‘일베’에서는 경어를 사용하면 욕설이 빗발친다. 그런데 이는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사회적 대화가 단절된 이들의 일종의 방언이다. ‘말할 수 없는 사회’에 그들은 가장 공격적인 대화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들끼리 공인한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를 통해 인정욕을 충족한다.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처럼 익명성 속으로 숨지 않고 정치적 조직화까지 꽤하고 있다. 파시즘은 이성적 영역이나 기존 기득층을 기반으로 하기보다 감성과 무산층을 기반으로 한다. 뉴라이트보다 일베가 더욱 우려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지난 대선의 결과를 단순한 세대대결로만 해석할 경우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집단적 불안감이 표출할 수 있는 폭력성에 대해 둔감해 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희망이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젊은 세대는 저항을 선택할 수 있지만 역으로 파시즘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한다. 20대의 투표는 30~40대의 투표와 다르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저항의식도, 사회정의에 대한 부채의식도 3040세대에 비하면 훨씬 흐리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실존적 입장에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박근혜정부의 독선이나 유신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이러한 자발적 파시즘이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매체를 매개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연예인에 대한 악플이나 음란성 등의 이유로 일베를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해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일 뿐이다. 공유될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은 일그러지기 쉽다. 이러한 감성을 위로받는 형태와 장소가 인터넷의 극우적 커뮤니티라는 것은 그들에게 일상 속에서 휴식과 위로가 될 공간이 제공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분노와 불안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오프라인에 만들어져야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젊은 파시스트들의 등장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될 수 있다.

 

18대 대선, 분열되고 전치된 한국사회의 자화상②-[시대와 철학]

18대 대선, 분열되고 전치된 한국사회의 자화상②-[시대와 철학]

민주화의 역설, 증오의 정치에서 희망의 정치로

?

박영균(한철연 기조부장)

?

산업화와 민주화의 대결, 민주화의 실패?

?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이후,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유권자 인구 구성비의 변화’였다. 그것은 20-30대가 50대 이상보다 많았던 이전 선거들과 달리 이번 대선에는 최초로 20-30대에 비해 50대 이상의 인구 구성비가 약 2% 정도 높았던 선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던 2002년 대선과 비교해 보면 50대 6.2%와 60대 0.1% 상승으로, 전체 평균 3.15%가 오른 반면 20대(8.65%), 30대(4.95%), 40대(2.4%)는 전체 평균 5.33%로, 5.0%라는 투표율 상승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30대의 노무현-문재인 지지율 또한, 2002년에 비해 각각 8.0%, 8.3% 상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2년 대선에서는 단지 0.2% 차이로만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40대가 이번에는 무려 11.3%나 오른 11.5% 차이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따라서 애초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주력했던 높은 투표율과 젊은 세대의 결집이라는 선거 전략이 먹혀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는 패배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유권자의 인구 구성비 문제를 제기하거나 나이가 들면 보수화한다는 ‘연령효과’를 들면서 이후로는 보수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놓고 있다.

▲ ⓒ뉴시스

그러나 현재 486세대 중 50대에 속하는 50-53세는 50대 후반의 정치적 성향과 다르다. 이것은 나이가 들어가면 보수화하는 ‘연령효과’가 특정한 세대의 역사적 경험에 따른 ‘세대효과’에 의해 상쇄하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2002년 대선과 비교해 볼 때, 2012년 대선에서 20-30대뿐만 아니라 40대까지 더욱 좌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인구 구성비의 변화가 아니라 50대 이후가 이런 40대 이하의 좌로의 이동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우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89.9%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50대와 더불어 50대-60대는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대 간의 정치적 성향의 분열이며 이 분열의 기점이 되는 것은 40대 이하와 50대 이상이었다는 점이다. 40대 이하는 전체적으로 좌향좌를 했다면 50대 이상은 우향우를 했다. 여기서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은 소위 486세대이다. 486세대의 역사적인 정치적 경험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민주화’이다. 그들은 80대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좌향좌를 한 40대 이하와 우향우를 한 50대 이상 사이의 분열은 역사적으로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두 개의 역사적 경험을 보는 정치적 성향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분석들에는 이런 역사적 경험을 통한 분석이 없다. 이것은 이번 대선의 책임을 50대의 보수적 결집에서 찾는 경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50대의 보수적 결집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50대의 보수적 결집이 이번 대선 결과 그 자체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50대는 2002년 대선에서 17.8%(이회창 57.9% 대 노무현 40.1%)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면 이번 대선에서는 25.1%(박근혜 62.5% 대 문재인 37.4%)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이전 대선보다 7.3%나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20대, 30대, 40대가 각각 2002년 대선보다 8.0%, 8.3%, 11.3% 더 많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50대 이상의 보수화 경향이 40대 이하의 반(anti)보수적 경향을 압도했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60대 이상을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60대 이상은 박근혜 72.3% 대 문재인 27.3%로, 2002년 대선 당시 지지율 격차 28.6%(이회창 63.5% 대 노무현 34.9%)보다 무려 16.2%가 더 많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따라서 20-40대의 좌로의 상승률을 전체적으로 상쇄시키면서 박근혜 후보의 승리를 이끈 세대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50대가 아니라 60대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50대의 높은 투표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보아야 할 것은 다른 어떤 세대보다도 가장 높은 비율로 우향우를 한 60대 이상의 보수적 결집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 결과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은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두 개의 코드이며 ‘민주화’에 대한 ‘산업화’ 세대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민주화’에 대해서 집단적인 반란을 꾀한 것일까? 그것은 소위 87년 6.10 이후 진행되었던, ‘위로부터의 수동혁명’에 의한 민주화, 그리고 소위 486세대가 주도했던 김대중-노무현정권 시절의 민주화가 ‘산업화 세대’의 욕망을 민주화의 흐름 속으로 편입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민주화’는 결국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 및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기간에 진행되었던 ‘민주화’가 그들의 삶을 바꾸지 못한 그 결과로 나타난 ‘반동’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

희망이 없는 사회, 증오심에 가득 찬 사회

?

2013년 신년 한겨레신문 기획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손수레로 1t 트럭보다 많은 폐지를 실어 나르는 ‘1t 리어카’ 정영배(56)씨.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정씨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운동 공로자에게는 보상을 해주는데 왜 자신처럼 평생 열심히 일하다 다치고 병든 이들은 충분히 돌봐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맞는 말이다. 특히, 그들은 1970년대 경제적 빈곤을 온 몸으로 때우고 살아온 세대이다. 1970년대 중반, 그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수출의 역군’으로, ‘산업화의 기수’로 바꾸면서 그 스스로 대한민국 국가 건설의 주체로 만들어왔다. 그것은 명백히 가해자 국가가 심어 놓은 환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동을 자본으로 바꾸어 경제 권력으로 바꾼 것은 국가였으며 그들은 그 국가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재벌이 대한민국의 최고위층 권력이 되어갈 때, 그들은 더욱더 가난해졌다. 하지만 그 때 유신독재국가는 그렇게 그들을 불러 세웠으며 그들 또한, 그 어려운 삶의 고통을 이 환상을 통해서 이겨냈다. 그 환상이 승리의 환호성으로 바뀐 것은 전두환 정권 때였다.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은 대한민국 사상 처음으로 무역수지를 적자에서 흑자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 당시의 경제성장률은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능가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1970년대였으며 그들은 전두환의 푸념과 달리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세워놓은 것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87년 6.10민주항쟁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주화는 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자유화와 더불어 ‘시장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우파 시장주의-신자유주의 좌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거쳐 온 그들이 40-50대가 되었을 때, 그리하여 비로소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안정적 삶의 기반을 찾고자 했을 때, 그들을 인내하게 하며 견디어 내게 했던 ‘미래’는 더욱더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다. 1997년 IMF는 ‘정리해고’의 광풍으로 되돌아왔으며 정보화 사회는 더 이상 구시대의 저임금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환상은 분노와 증오가 되었다. 내가 세운 나라, 내가 만든 경제적 풍요.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그것을 누리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그들을 원하지 않았다.

자동화와 정보화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잉여인간에 불과했다. 무너진 자존심. 그러나 다시 시작하기에 그들은 이미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화려한 쇼윈도를 펼쳐 놓은 상품들의 스펙타클한 세계를 즐기기에도 그들의 욕망은 너무 낡고 추했다. 1990년대 한국의 자본주의는 대중소비사회로 이동했으며 그 소비를 전유한 세대는 X세대였다. 대중가요의 주요한 소비층은 10대가 되었으며 문화적 감각의 향유 폭은 더욱더 넓어졌다. 어쩌면 그렇게 1970년대의 ‘산업화’ 세대의 반란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징후는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지하철 노약자 석에서 이루어지는 노인들의 젊은이에 대한 테러는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 대한민국’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더 많은 상품들 속에서 우리를 유혹하면서도 오직 능력 있는 자들, 스마트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세력은 다름은 김대중-노무현정권이었다. 따라서 노무현정권은 민주당과 함께 이미 청산되어야 할 역사적 구세력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정치는 여전히 한나라당(새누리당) 대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의 양당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무현정권의 실패와 더불어 ‘구 민주당 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는 급속히 떨어졌었다.

그러나 ‘노무현전대통령의 투신’과 민주노동당의 ‘진보단일후보’ 노선은 10% 내외의 지지율이라는 벼랑 끝에 서 있었던 구 민주당 세력을 기사회생시켰다. 지난 지자체와 총선에서 사람들은 진보단일후보가 아니었다면 구 민주당 세력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은 의회 진출에 성공했으며 나름대로 지자체에서도 성과를 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성공은 구 민주당 세력인 노무현정권에 대한 냉정한 정치적 평가와 청산에 대한 역사적 단절을 없애버리는 대가를 지불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투신’은 그에 대한 인간적 애도의 물결로 바뀌었으며 정치적 과오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사라졌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애도마저도 2011년 총선 직후 벌어진 통합진보당 사태는 소위 ‘진보’라는 세력에 대한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그것이 50대 이상의 결집을 불러왔다. 그들은 그 동안 ‘민주화’라는 명분 앞에서 밀리고 있었으나 그 이후 자신의 왜곡된 욕망과 ‘산업화’ 세대들의 ‘비도덕성’을 ‘증오심’에 근거한 정당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이번 대선 결과는 대한민국 사회가 극심한 정치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사실상 ‘계급이 없는 계급투표’, ‘여성이 없는 여성투표’로 귀결되었다.

노후의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노인들, 하우스푸어-렌트푸어인 50대들은 그들의 생존적 불안감을 ‘민주화세력’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무상보육, 무상급식’과 같은 ‘보편적 인권’의 권리에 오히려 분노했으며 새누리당이 제시하는 허구적인 ‘차별적인 복지’의 구호에 말려들었다. 또한, 가부장제적인 한국 사회에서 온갖 고난을 감내하며 청춘을 보냈으나 ‘민주화’와 더불어 여성의 권리에 눈뜨기 시작한 여성들은 박근혜후보의 여성대통령 구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20대 여성은 감성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산업화 시대’의 여성이 지니고 있는 정서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40대와 50대의 여성은 충분히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못한 한국의 남성들과 달리 박근혜의 ‘여성’대통령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

(다음에 계속)

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③[시대와 철학]

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③[시대와 철학]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4) 도제(道諦): 방법은 없는가?

 

기억의 전이

 

구제금융기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거치면서 우리는 빈곤의 재림이라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공포에 직면한 51%들은 무의식적으로 박정희식 개발 모델을 대안으로 떠올렸다. 지금까지 효과를 봤던 익숙한 삶의 방식을 다시 한 번 적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몸과 정신에 깊숙이 각인된 개발주의적 기억은 성장 모델이 효과적이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의 51%는 필연적 삶의 욕구를 다시 한 번 집단화함으로써 이 환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업식(業識)에 끌려다니다가 호되게 당하고 있다.

현재는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현재의 고난은 과거의 어려움과는 다르다. 물론 그것의 겉모습은 실업, 부도, 빈곤 등과 같이 과거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출현한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은 과거와 같이 재화량의 절대 부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화량의 과도한 잉여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데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공포를 과거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고, 과거에 효과를 봤던 방법을 다시 사용하려다가 재난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현재가 과거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의 경제 위기를 과거의 그것과 동일하게 해석하게 된 이유는 현재의 빈곤에서 과거의 적빈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이 부당한 기억의 전이는 과거의 독재자를 경제적 영웅으로만 회상하게 하는 기억의 선택을 만들어냈다. 또한 한국의 대중은 이제는 낡아버린 시대의 욕구인 개발주의적 삶의 방식을 다시 한 번 관철해서 그때의 기쁨을 또 다시 맛보고자 했다. 기억의 부당한 전이와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 이른바 ‘응답하라 70년대’의 간절한 외침은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추억 놀이를 불러일으켰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정치적 세력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졌다. 기억의 부당한 전이를 교정하고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의 업식을 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그것은 필연적 삶의 악순환을 끊고 정치적 삶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성취될 수 있다.

 

무임승차를 넘어서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을 끊는 길은 정치적 삶의 양식을 다방면에서 시도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 현재 국민 대중의 관심사는 소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거주의 부담을 느끼지 않으며, 자식을 바르게 교육시키고, 안온한 노후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 경제 구조 혁신을 통한 질 좋은 일자리 확보와 복지 제도의 확충으로 호응하고자 한다. 성장 일변도의 경제 운영의 방식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흐름은 이미 거스르기 힘든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분화된 계층 및 세력과의 정치적 합의 과정을 요구한다. 과거에는 이 과정이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나 정당에 의해 추진되었다. 특정 정당이나 대통령에게 권력을 몰아줌으로써 국민의 요구를 대리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리인을 통한 추진 방식은 현대 복잡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현대 사회는 단일한 지도력을 토대로 사회적 갈등을 무마시킬 수 있는 단순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자기 기획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시민들이 경제 활동을 자기 삶의 중심축으로 삼던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민주적 참여를 자기 삶의 핵심으로 여기게끔 하는 정치적 삶의 수행을 요구한다.

하지만 국민국가적 규모의 정치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대의제적 방식을 채택해야만 하는 현실적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근대 민주주의의 선진국들은 의회 민주주의와 거대 행정 체제를 결합하는 국가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 체제는 사실 시민들의 자치적 활동과 그 활동의 역사에서 노출된 단점을 극복하면서 형성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의 정치 체제는 시민의 자율적 구성 활동의 오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법적, 행정적 요구에 직면하여 정치 엘리트들의 인위적 구상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짐으로써 시작된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한국 국민의 의식 속에는 자신들이 오늘날의 정치 공동체를 건립한 주인이라는 의식이 희박하다. 더구나 많은 한국인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폭력적으로 취급당한 상흔을 간직하고 있기에 국민국가라는 근대적 정치 공동체는 개인적 삶의 보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활용되는 수단으로서의 이해되는 경향성을 띤다.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군사 정부 는 국민들이 자율적 시민으로서 공적 활동에 임할 수 있는 공간을 아예 봉쇄했기 때문에 필연적 삶 외에 정치적 삶을 경험하는 것은 소수 예외적 인물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까닭에 대다수 한국인이 필연적 삶의 방식에 익숙할 뿐, 정치적 삶의 양식에는 이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자료사진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분명히 민주적 입헌국가 체제를 자율적으로 수립했던 경험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이 그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우리는 필연적 삶 이외의 공적 시민으로서의 자치의 경험을 끊임없이 늘려나가고 있다. 정치적 삶의 방식이 필연적 삶의 습관을 압도할 수 있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더구나 민주적 의사소통과 합의의 절차를 존중하는 삶의 양태는 온갖 꼼수의 방해를 헤쳐 나가고, 구성원 간의 지난한 이해의 과정을 참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민 자치라는 정치적 삶을 중단하고 특정 대리인이나 체계에 임무를 맡기는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민주적 헌정 체제의 수립 이후 한국 국민들이 범한 실수도 바로 이러한 유혹에 빠진 것이었다. 시민적 자치의 발걸음을 이어가지 못하고 대의적 기관과 정치인에게 정치적 업무를 맡겨버리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한국 사회의 복잡한 갈등과 요구는 특정 인물, 정당, 행정 기관 체계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선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 프로그램과 경제 구조의 혁신을 기획하는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답과 해결책을 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제안하거나 추종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한 한국의 대중은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잘 시행되는지 간이나 보려는 무임승차자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 엘리트들은 정책의 입안과 집행을 주도하는 역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노력들이 서로 소통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는 여건 조성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그들은 시민의 적극적 활동을 통해 제안된 대안들을 정부 정책과 연결하는 노력을 다양하게 시도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자신들의 이념이나 정책 방향과 부딪힌다 해도 정치 엘리트는 그것을 수용하는 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대리인 혹은 대리 기관들이 아무리 순정을 다 바쳐서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복잡사회로 접어든 한국 사회의 현실은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켜 버릴 것이다.

현대 한국은 숲의 왕을 옹립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황금가지적 주술시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대통령에게 모든 희망과 기대를 걸고 권력을 몰아주는 수동적 해결책을 고수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구원자 신드롬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51%의 승리감과 48%의 절망은 결국 100%의 배신감으로 보복할 것이다. 구원자가 추진하던 개혁이 기대에 못 미칠 경우 대중의 좌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절은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자극하여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회의하게 만드는 움직임을 낳을 수 있다. 이 움직임은 박정희 신드롬 정도로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전체주의 운동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튀어

 

황금가지적 민주주의, 즉 구원자적 대의제 민주주의를 정치적 삶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적 제도의 수혜자로 멈춰 서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활로서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시민들이 공동체적 협력을 통해 새로운 삶의 대안을 마련하고 기존과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노력을 어려워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야 말로 제도가 기획해주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기획하여 실현시키고 그것의 지속을 제도에게 압박하는 정치적 삶을 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영원토록 남한테 얻어먹는 신세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직접 해먹는 요리가 더 맛나듯이 직접 마련하는 삶의 양식이 더 빛날 수 있다. 제도가 우리가 원하는 일자리도, 교육도, 의료도, 주택도, 문화도 주지 않는다면 직접 만들어 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작고 빈약하며 불편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삶의 대안들은 늘어나기 마련일 게다.

체계의 시선에서 방치된 서민들에게 기존 제도 정치와 경제는 이미 ‘차가운 북쪽’이다. ‘북쪽의 제도’에서 얼어죽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난 앉아서 죽기 싫다. 어차피 버려진 몸, 자치의 삶을 상상하고 구현해보는 ‘남쪽’으로 튈 테다. 모든 버려진 이들의 동참을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