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시대 [시대와 철학]

전호근(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불의의 시대라 계절도 더딘가 싶더니 어느덧 겨울이 문턱이다. 예전 이맘때면 나뭇잎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가난한 이들의 창에는 서리가 하얗게 서려왔다. 그러나 추운 계절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겨울이 깊으면 봄을 기약하는 낭만이 있었고 가난한 삶에도 따뜻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 어느 구석에도 겨울의 낭만은커녕 봄이 올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바로 푸른 기와집에서 귀신과 작당하는 너희 때문이다.

 

너희는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하나 나는 믿지 않는다.

옛날의 간신은 군주를 속였는데 지금의 간신은 백성을 속인다.

옛날의 탐관오리는 백성을 마소로 여겼는데, 지금의 탐관오리는 백성을 개돼지로 여긴다.

옛날의 무당은 뒷문으로 드나들며 주문을 외웠는데 지금의 무당은 정문으로 드나들며 연설문을 고친다.

옛날의 어두운 군주는 충신을 죽였는데 지금의 어두운 군주는 아이들과 농민을 죽인다.

 

이러니 지금의 간신이 옛날의 간신만 못하고 지금의 탐관오리가 옛날의 탐관오리만 못하고 지금의 무당이 옛날의 무당만 못하고 지금의 어두운 군주가 옛날의 어두운 군주만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는 너희의 말은 거짓이 아니더냐. 내말이 틀렸느냐?

 

자고로 나라가 망하려면 귀신의 말을 듣는다했다. 그래, 너희의 귀에 귀신이 소곤거리는 말은 들리고, 자식과 부모를 잃고 찢겨진 가슴, 피눈물로 울부짖는 민초의 모습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단 말이냐?

 

두말 할 것 없다. 당장 너희 모두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그 자리는 백성의 아픔을 돌보기 위해 있는 자리다. 그러니 너희 같이 무능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귀신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이제 이 땅의 백성은 드러내놓고 너희를 죽이려 할 것이고 너희가 믿는 귀신조차 어둠 속에서 너희를 죽이고자 모의할 것이다. 신라 때만 최치원이 있는 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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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절망을 환상의 횡단으로 [시대와철학]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10년간을 상실의 시대로 규정하고 집권한 뉴라이트 계열의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10년간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의 시대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뉴라이트는 기존의 보수주의보다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만능주의를 지향하며 대기업과 금융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새로운 보수주의이다. 뉴라이트의 이러한 면모는 MB의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박근혜 대통령의 신탁적 표현인 “규제는 암 덩어리”라는 말로 대변된다.

 

MB 정부는 뉴타운 열풍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투기 붐이 만든 환상적 매트릭스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는 초거대 인공지능이 광대한 컴퓨터 네트워크로 만든 가상 세계에 대한 명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트릭스는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전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을 배터리로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설정은 매트릭스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온 국민의 부동산 욕망이 MB 정부를 지탱하는 에너지였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환상을 연장하고 싶은 노장년층과 보수층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는 매트릭스였던 것이다. 물론 인간 박근혜는 생물학적인 존재자로서도 아니며 검증된 사회적인 인물로서도 아닌, 영화 <향수>에 나오는 절대 향수와 같은 숭고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 영화에서 절대 향수는 욕망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이다. 즉, 스타 철학자 지젝이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말을 빌려 표현한 ‘오브제 프티 아’(작은 대상 a)인 것이다. 지젝 식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 후보로서의 박근혜는 도올 선생이 그렇게나 외친 스펙을 통한 지도자로서의 능력 검증을 거칠 필요가 없으며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한계와도 무관한 환상적인 매트릭스가 된다. 물론 이러한 매트릭스를 만들고 확장하는 데에 새누리당과 아울러 보수 언론과 보수 인사들이 지대하게 기여했다. 다시 말해 이들이 공모하여 자신들의 권력 연장을 위해 MB 정부의 실정에 실망한 국민에게 새로운 환상의 매트릭스를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매트릭스는 처음부터 대단히 깨지기 쉬운 연약한 것이어서 이를 방어할 방패막이 필요했다. 그래서 종북과 안보는 현 정권의 마법적인 부적이 되었다. 이 부적을 내세워 국가의 공익과 국민의 안전은 뒤로 한 채, 권력의 사유화가 극도로 진행되어 국가 시스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로 인해 국가 시스템이 심각하게 마비되고 현 정부가 극도로 무능한지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국민은 국가의 부재를 느끼며 ‘각자도생’이라는 웃기도록 서글픈 신조어가 탄생했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서 옥시 같은 회사의 가습기 살균제로 소중한 아이들이 죽어가도, 폭스바겐 같은 회사의 연비조작으로 환경이 오염되더라도, 대기업의 이윤을 위해 차별과 착취의 비정규직이 늘어가더라도 정부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세월호 사건 때나 농민 백남기 님의 죽음 앞에서 실제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한, 궁극적인 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이나 실무 책임자들도 유가족과 국민에게 슬픔과 책임감을 표하기는커녕, 책임 회피를 위해 비정한 태도로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드디어 최순실과 관련된 박근혜 대통령 게이트가 터지면서 온 국민이 설마설마하면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던 현 대통령의 트라우마적인 리얼한 민낯에 직면하고 말았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매트릭스에서 분리되어 인간이 배터리가 되어 매트릭스에 봉사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지젝은 이를 ‘리얼(실재)이라는 사막’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환상에서 깨어날 때 만나게 되는 진실이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로 무의미한 폭력적인 야만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정신분석학에서 치유란 환상에서 벗어나 불편한 진실인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용기 있게  대면하는 것이다. 지젝은 여기서 더 나아가 환상의 횡단과 아울러 프레임의 재구성이나 변형을 추구한다. 환상은 주체의 욕망을 유지하는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지젝에 의하면 현실이란 리얼한 것이 아니다. 현실이란 환상의 프레임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그동안 숭고한 대상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바라본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환상을 제거해버리면 현실까지 상실되고 만다. 아마도 지금 우리 국민이 느끼는 ‘상실의 시대’는 이러한 상태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환상은 제거가 되지 않는다. 횡단이 요구된다. 환상을 횡단하는 것은 헤겔 식으로 표현하면 부정적인 것을 감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원인대상을 먼저 상실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는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라는 숭고한 대상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가 부정의 과정이다.

 

본래 상실이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므로 슬픈 사건이다. 상실의 시대란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어 국가가 더는 국민의 안전망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통치 권력의 무능이 드러나고 통치자의 권위가 사라짐과 아울러 국민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숨짓고 절망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상실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절망한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배신과 몰락을 경험한 구 유고슬라비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상실을 순전히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러한 상실의 부정성을 견디며 박정희 시대라는 환상을 횡단하고 환상의 기존 프레임을 다시 변혁하고 재구성해야 함을 지적한다.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박근혜 대통령과 그 리얼한 사막인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과 관련된 기존 제도와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인가라는 프레임에 지배받지 않고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통치의 방향과 이념을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 시대라는 숭고한 대상에 대한 포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침 그 숭고한 대상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이에 공모한 공모자들에 대한 준엄한 사법적 처벌과 역사적 심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인 과제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존의 숭고한 매트릭스의 배터리인 우리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서구화의 욕망, 상업화의 욕망, 부동산 투기의 욕망, 승자독식의 욕망, 차별적 구별 짓기의 욕망 등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상실의 시대가 꼭 나쁘지는 않다. 박근혜 정부는 우리의 뉴라이트적인 욕망이 공모한 환상의 매트릭스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실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이랴! 이제 문제는 뉴라이트라는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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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시대정신: 국정 교과서와 첫사랑

음란한 시대정신: 국정 교과서와 첫사랑

 

이지영(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첫사랑은 그것이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때에 아름답다. 그것의 과거 시제가 현재를 침범할 때,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비루한 현재만 부각된다. 피천득은 <인연>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뜬금없이 철학 웹진에 첫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은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드라마들에 등장하는 이상 징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첫사랑은 불치병이나 출생의 비밀 못지않은 한국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치병, 출생의 비밀, 재벌가 실장님 등이 등장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짜증섞인 반응에 비교한다면, 첫사랑은 늘 모두를 설레게 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단골 소재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몇년 간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첫사랑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예전과는 좀 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첫사랑 드라마 <겨울연가>의 경우만 해도, 고등학교 시절 만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십여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충분히 납득할만 하다. 다만 거의 서른이 된 주인공들이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과의 에피소드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매우 놀라워 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시절이 잘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부 시절의 일들도 매우 어렴풋하게 중요한 몇몇 장면들만 기억날 뿐, 그렇게 생생한 강도로 선명하게 디테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몇 년만 지나도 요새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뭐, 기억력의 경우 개인차가 심할 수 있을테니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드라마들은 뭔가 수상하다. 첫사랑의 나이가 아주 어려졌다. 첫사랑인지 아닌지도 잘 분간하기 힘들만큼 어린 시절, 초등학교나 심지어는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로 연령대가 낮아졌다.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그녀는 예뻤다> 역시 초등학교 시절 첫사랑을 15년만에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몇 달 전 방영되었던 <킬미 힐미>에서는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 만나서 함께 지내던 아이 둘이 트라우마로 둘 다 그 시절 기억을 잃어버렸으나 뭔가의 끌림으로 다시 시작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였다. 그와 동시에 방영되었던 비슷한 소재의 다중인격을 다룬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에서도 10대 초반 시절의 강렬한 인연이 바탕이 되어 성인이 된 주인공들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현재 방영중인 조선 건국을 다룬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이방원 (유아인) 과 러브라인을 형성하게 되는 분이 (신세경)의 인연 역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온 주인공들의 사랑 (<풍선껌>, <너를 사랑한 시간>,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의 경우에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첫사랑 아니면 무엇인지 확인하기 힘든 인연이 성인이 된 이들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드라마적 요소로 등장한다. (작년 드라마 <힐러>의 두 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이 외에도 아마 당장 기억나지 않는 드라마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이야기를 시작하기엔 충분할 만큼 많다.

고백하건대, 나는 드라마 매니아이다. 거의 종류를 막론하고 왠만한 건 다 본다. 영화 철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온갖 드라마들을 매일 본다고 이야기하면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유치하고 식상한 클리쉐들로 가득 찬 수준낮은 드라마를 아방가르드한 영화를 연구하는 인간이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하곤 한다. 사실 드라마는 나에게 내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복잡한 철학적 미학적 논의들과 피곤한 세상사를 잊게 해주는 마취제이자, 머리를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비워서 다시 일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치하고 빤한 클리쉐들도 나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즐거운 드라마들이 이상한 징후들을 내뿜으며 나에게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첫사랑 판타지가 꼭 미취학 아동 시절, 아니면 최소한 청소년기 이전에 이루어져야만 그 순수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 시절의 첫사랑은, 요즘 아이들의 조숙함을 생각한다면 너무 늦은 때묻은 사랑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중년의 사랑이나 노년의 사랑은 뭐란 말인가. 흉측하게 때묻은, 순수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냥 그런 너저분한 남녀상열지사란 말인가? 아, 이건 뭔가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생각이 넘실거린다. 개개인에게 있을법한 원형적인 첫사랑의 기억은 물론 소중한 것이지만, 이에 대한 집착은 ‘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랑 역시 어차피 일종의 정신병 아닌가. 이런 개운하지 않은 기분은 그저 이 사회가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중년이나 노년을 배제하고 있다는 그런 에이지즘(Ageism)적 차별 때문일까 라고도 생각해 보았으나,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는 첫사랑에의 집착은 그렇다고 보기엔 도가 지나치고 뭔가 더 이상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이 현상에 대해 이렇게 원인을 말했다.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피상적인 인간 관계만을 맺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에서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대상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맞는 말일 것 같다. 이런 측면 역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어투를 빌어 표현하자면,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뭔가 그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말해야겠다.

대체 뭘까? 가끔씩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현듯 ‘그 이상한 기운’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왜 지금 알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때문이었다. 99 퍼센트의 국민을 좌파로 몰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을 좌편향 빨갱이로 몰고 있으며, 국정화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하는 이 황당하고 끔찍한 메카시즘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점이 바로 나로 하여금 ‘그 이상한 기운’을 파악하게 만들었다. IMF 이후 모두를 괴롭히고 있는 경제 침체와 경제적 불안정은 정치적 보수화를 가속화시켰고, 그 결과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고 있듯 현 정권은 역사의 시계를 1970년대로 되돌리고 있다. 국정화 문제는, 우리집 아이의 표현을 빌자면, ‘박근혜의 공약대로 전국민을 대통합시키고 있다’고 할 만큼 보수와 진보를 넘어 모두가 반대하는 문제임에도 강행시키는 저 대담함은 군사독재 시절에나 가능했던 추친력 아니던가. 모두가 다 아는 이런 시국에 나는 왜 첫사랑 드라마들 이야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첫사랑에의 집착이라는 전국민적 정서가 혹시 박정희에 대한 첫사랑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대통령이라는 중요한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박씨 왕조의 공주로 인식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를 선택한 국민들의 선택은 박정희의 경제 성장에 대한 첫사랑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현재의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 여자가 대통령으로 뽑힌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 아닌가. 결국 국민들이 선택한 것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이다. 박정희라는 첫사랑에 대한 집착이 결국은 박근혜 정권이라는 시대착오적 결과를 자아낸 것이다. 정치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첫사랑이라는 과거의 판타지에 대한 집착이 현재를 갉아먹는 것이 2015년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니. 이 첫사랑 판타지에 대한 집착은 더 이상 순수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이것은 병이다. 특히나 10세 이전의 첫사랑에 대한 집착은, 현재의 이상한 기운 속에서 박정희라는 판타지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생각하니, 그저 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점잖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집착이 너무나도 강해서 이는 음란한 도착증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10세 이전에 만났던 첫사랑 꼬마아이는 그 사이 많은 세상 풍파를 겪으며 더 이상은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며 나 역시 그 때의 내가 아니다. 6-70년대 경제를 살렸다는 (물론 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그냥 군말없이 일단은 인정하기로 하자.) 박정희 정권이 가고 우리나라 경제를 둘러싼 상황은 그때의 상황과 조금도 같지 않다. 이러한 모든 중요한 세상사의 변화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기억 속 판타지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은 거의 시체애호증(necrophilia)이나 소아성애자(paedophilia)의 변태적 도착증과 너무나도 유사하지 않은가. 징그럽다. 소아성애증 말이 나온 김에 최근의 아이유 ‘제제’ 논란이 떠오른다. 아이유의 해석이 소아성애를 부추기므로 음원을 폐지하라는 사람들이 3만명에 이른다는 기사를 보고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다. 소아성애증의 대상이어야 하는 아이유가 그 시선의 관계를 뒤집자 광분하는 꼴이라니.. 진정 사회에 해로운 도착증 환자들은 저기 다른 곳에 있는데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럼 과거는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그런 대상인가? 아니다. 우리는 늘 그 과거의 영향권 하에서 살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과거는 현재의 우리를 규정한다. 과거는 그저 아무 쓸데 없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굳이 철학자들의 이름과 논의들을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과거는 현재 속에 공존하고 있으며 현재를 규정하는 막강한 존재론적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거를 현재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면하고 인식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아니면 과거사이든 간에. 왜 우리 사회는 지금 과거를, 그것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과거를 현재에 아주 음란한 방식으로 반복하게 되었는가. 이 무슨 징그러운 반복강박인가. 어린 시절의 첫사랑에의 실패를 계속 반복하는 강박적 증상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그 원인 역시 과거에 있다. 지금껏 우리는 과거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의 개념을 조금 이용한다면, 과거에 대해 제대로 된 애도(mourning)를 하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첫사랑을 잃고 엉엉 울며 소주잔에 의지하는 것만이 애도는 아니다. 데리다에게 애도란 그저 지나간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애도란 과거를 현재에 불러내어 정당하게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 과거와는 다른 변화된 미래를 여는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는 과거를 정당하게 대우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은, 조선시대식 어휘로 표현한다면 역모를 꾀한 것이고 이는 3대를 멸해야 하는 중죄이거늘, 우리는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챙긴 부와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놔두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군정기의 혼란과 미국의 이익 때문에 시작이 되었건, 일본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던 전직 일본군이 나라를 18년이나 통치했던 이유 때문이었건, 그들의 자손들이 여전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건 간에 말이다. 바로 그 자손들이 이제 자신들의 더러운 과거를 맑고 깨끗하게 세탁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하여 유지하고 강화할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 그들에게 과거는 그 어떤 현재의 반대보다도 강력한 현재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시계를 4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 닥터 후(Doctor Who)의 타임머신 타디스(Tardis)도,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의 드로리안(Delorean)도 없는데 우리 모두가 원치않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 하수상한 도착적 정권은 전 국민을 원하지도 않았던 시간여행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타임머신의 시간을 어떻게 1970년대가 아닌 2015년으로 재조정할 것인가. 데리다가 말하는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은 대체 어떻게 열 수 있다는 말인가. 뻔한 답이지만 우리의 과거를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도 세탁하고 싶어하는 얼룩진 과거를 제대로 활짝 펼쳐서 김치국물 얼룩 하나까지도 모두가 볼 수 있게 하고, 그에 대해 정당한 대우 (doing justice)를 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아마도 페티쉬라 할 수 있을만한 첫사랑에 대한 도착적 정신병은 음란함의 정도를 넘어 우리 나라 자체를 거대한 폐쇄 정신 병동으로 변하게 만들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는 박씨 가문의 인물들을 현재까지 두 번 만났다. 피천득의 인연을 다시 떠올린다면, 우리에게 한번의 기회가 더 있는 것이다.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인 세번째 만남은 결코 성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⑨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박민미(동국대 강사)

 

품위 있는 사회를!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주장했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는 ‘이등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갈릿은 ‘이등 시민’에 대한 비판을 통해, 특권화된 시민과 그에 비해 차별 받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서구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느끼지만 여전한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령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이다. 만일 한 사회의 시민 부류에서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를 제도적이건 문화적이건 차별적으로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들을 문화적 차원에일지언정 특정인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함으로써, 주류적인 시민이 일등 시민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현상마저도 특권화라고 비판하는 정교한 자의식이다.

그런데 단 한 명의 특권화된 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시민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킨 사태가 2012년, 버젓이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전체 시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철저하게 모욕당했다.

‘박 대통령은 일찍이 퍼스트레이디 훈련을 받은 덕택에 최고의 품위와 격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박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대화하기에 앞서 민심과 대화해야 하며 순교자주의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경향신문, 2013년 8월 25일 오피니언)고 말한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교수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품위’라는 말이 수사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념’의 어휘라는 것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선거에서 피선거권자가 누린 특권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순간, 이 땅에 사는 모든 시민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헌법 11조 1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헌법 제7조 1항의 규정대로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는 의무를 받아들인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누린 특권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이제는’ 늦었지만, ‘답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특권을 위해 전체 국민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시킨 이 모욕에 값하는 길일 것이다.

헌법과 현실의 괴리,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개인이나 사회마다 추구하는 목표나 가치가 있다. 이러한 목표나 가치를 개인은 좌우명이라 하고, 학교는 교훈이라 하고, 회사는 사훈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명문화하거나 구호화하여 붙여두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어릴 적부터 ‘내 꿈은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노력한 결과 실제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목표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고자 하고, 대한민국에서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무엇일까? 입헌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그 목표나 가치는 당연히 [헌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목표는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 존재인가? 대통령은 취임 당시에 자신의 목표를 선언문 형식으로 낭독하게 되어 있는데, 이 역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헌법] 69조) 즉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는, 즉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삼아야 할 존재다. 행정부 수장의 목표가 그러하다면, 대통령 소속이면서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국가정보원법] 제2조) 국정원의 목표 역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분명히’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행동일 것이며, 따라서 대통령은 마땅히 그 수장과 담당자를 질책해야 한다. 대통령 자신의 임무인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전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현 정권에는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정원의 만행은 대통령 개인의 목표나 가치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직분의 목표와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리고 전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의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 “제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는 건가요”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대통령이 분노해야 할 것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으로 선거가 부정하게 치러졌다는 사실 아닐까. 그러한 선거 부정은 자신의 목표인 민주주의 수호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적절한 말이나 대응이 없다. 이것은 임무 방기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호하고 그것을 목표로 나아가야 할 대통령이 그러한 가치와 목표를 짓밟은 행동에 대해서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의 수수방관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서 대통령이 방조하지는 않았나 의심을 불러온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행정부의 수장이 되고자 한 사람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서 자기 직속 기관이 될 조직의 불법행위를 방조했다? 그리고 당선 후에도 그러한 불법행위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우리 사회의 목표인 ‘민주주의’의 수호와 달성을 위해 노력하리라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이 심화된다면 대다수의 대한민국 구성원은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이상을 스스로 수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구호를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타도! 박근혜 정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⑦ 쥐구멍에 강제로 볕들게 하기

쥐구멍에 강제로 볕들게 하기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맑스의 저작 중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대단히 희귀하지만 주옥같은 정치 분석에 해당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60여 년간의 혼돈의 과정에서 겨우 획득한 의회공화정이 결국 4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독재체제로 붕괴되었다. 그것도 그토록 평범한 한 인물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양상을 분석하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다. “헤겔이 어딘가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세계사의 모든 거대한 사건과 인물은 말자하면 두 번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즉,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인민혁명당 사건은 1974년 4월 군사독재에 맞서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당시 중앙정보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을 구속기소했으며 법원은 이 중 8명에게는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 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자체 조사결과,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반국가 단체라고 발표된 인혁당은 서클 수준의 단체였으며 수사과정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됐다는 점이 인정됐다. 그리고 2차 인혁당 사건의 중심이었던 ‘인혁당 재건위’는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박문각) 결국 이 사건에 관해서 2007년 서울중앙지법의 재심 판결은 1975년의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번의 정권 교체를 이뤄낸 개명된 대한민국의 2013년 무더운 한여름에 인혁당 사건이라는 비극이, 맑스의 경구처럼 다시 희극으로 일어난다. 유신독재시대의 중앙정보부가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인혁당이 다시 이석기를 필두로 한 지하혁명조직(일명 RO)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이 사건이 희극적인 이유는 관련 당사자가 모두 현실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극소수가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환상을 논의하는 장면이 있다. 그들 스스로도 이를 농담이라고 변명한다. “국가안보 수호”에 전념하는 한 국가기관의 원칙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이다. 그래서 그 기관은 은밀하게 불법적인 정보조작으로 대선에 개입한다. 결국 그 국가기관은 자신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는 국민들의 잇따른 촛불 시위와 정치권에서의 조직개혁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수세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그 기관이 억압과 거짓을 향한 무명의 헌신에 전념한 까닭이다. 반전을 꿈꾸며 그 기관은 무명의 헌신이라는 원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번에는 유명(有名)의 헌신에 착수한다.

그 기관은 극소수의 비현실적인 환상이 내란음모죄에 해당한다며 수사를 선언한다. 그것도 공익을 빌미로 불법으로 녹취한 자료를 가지고서 말이다. 내란이란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행위를 말하며 음모란 이를 위해 모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극소수의 비현실적인 환상의 담론이 이러한 폭동을 모의하는 구체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혹시 이러한 비상식적인 관점은 “국가안보 수호”를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여 자신의 불법 행위를 망각하게 하고픈 그 국가기관의 오래된 망상은 아닐까? 이와 같이 이번 수사에 대해 국민적인 의혹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 기관이 자신의 원칙인 무명의 헌신을 저버리고 국가의 정치판을 모조리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그 기관에 햇볕이 잘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에게는 커다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런 까닭에 국민은 역사적으로 반복된 이토록 웃기는 사건을 접하면서도 웃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⑥-잔적(殘賊)의 도당은 전복된다

잔적(殘賊)의 도당은 전복된다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국정감사가 끝났다. 결과는 뻔했다. 누구는 할 말을 당당하게 했지만 한 톨의 거짓 없이 사실을 실토해야 할 사람은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일은 없다하고 없던 일은 있다했다. 영혼 없는 공복(公僕)이라고 했던가. 영혼 없는 공복은 사복(私僕)이다. 이들은 이제 충성스런 사복을 자임하며 자신들의 과오를 한 여름 이슈로 마감하려 한다. 하지만 아직 추억의 사건이 되기에는 이르다. 누가 그만두라고 했나?

국정원 심판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는 아직 불탄다. 시내거리에 촛불을 든 시민들, 언론?지식인들, 각 처의 운동가들, 정치관계자들까지 모두 지난 대선의 진실을 폭로하고 이를 통해 상식을 벗어난 행정수반과 정치권의 행태를 리셋시켜 그들이 초심으로 귀환함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정치공작들과 교묘한 장난질에 실로 감탄(?)을 표할 일이 많아질 것은 예상되는 바이다.

그런데 그 장난질이 도를 넘었다. 고인을 관에서 끄집어내 시정에서 조리돌리듯 하는 것도 모자라 검증이라는 이유로 남북 국가정상의 회담내용까지 공개해버리고 이제는 유신정권에서 자행되었던 내란음모죄까지 부활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을 조장하고 국가를 전복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국정원의 행태다. 국정원이 자행한 결과로 발생한 조직 내부의 불안과 위기를 민주주의와 사회의 진보를 지향하는 시민, 인사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맹자는 “인(仁)을 헤치는 것을 잔(殘)이라 하고 의(義)를 헤치는 것을 적(賊)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지금 국정원은 국민들 사이의 믿음과 신뢰를 잃어버리게 했으니 인을 헤쳤고, 헌법을 유린하며 자행한 불법을 스스로 묵과하고 또 다른 정치공작을 벌이고 있으니 의를 헤쳤다. 인의를 뭉개버린 무리는 ‘시정잡배’일뿐이며 전복의 대상이다. 또한 그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는 박 대통령은 맹자의 말대로라면 필요 없는 지도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헌법질서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은 국정원과 청와대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조속히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정확한 수사와 진실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이고 시민이다. 민주주의에서 개혁의 대상이 개혁을 요구하는 주체를 역으로 공격한다면 맹자가 말한 잔적(殘賊)을 헛갈려 아는 것이다. 잔적은 민생을 돌보지 않고 국민을 기만하며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교활한 권력에게 붙이는 말이다. 잔학하고 교활한 권력은 개혁의 대상에서 곧 전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⑤-‘민주주의’라는 유령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민주주의’라는 유령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조은평(건국대 비정규직 교수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 유령에 맞서 집권세력들은 ‘종북’과 ‘안보’라는 낡아빠진 카드를 들이밀며 이 유령의 출몰에 대응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워 낡고 늙은 보수주의자들의 결집을 호소한다.

하지만 정작 ‘민주주의’라는 유령의 출몰을 초래한 것은 바로 집권세력 자신들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이 국정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며 분노하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절차에 국가 기관이 개입한 사건. 그래서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민주주의적 절차를 훼손한 사건.

이런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국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 긴 세월을 거쳐 비로소 민주주의 공화국을 탄생시킨 시민들은 민주화의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미 ‘민주주의’는 죽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저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보다 민주적인 현실이 실현되리라 기대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실재는 단지 ‘지연된 미래’에 불과하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었다.

언론이 제대로 된 말을 전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무참히 쫓겨나 자살을 택했을 때, 빈민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교육 현장이 더 이상 제대로 된 현실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을 때, 이미 ‘민주주의’는 한 걸음 씩 뒤로 밀려나 죽어가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지연된 미래’에 대한 기대감마저 철저히 무너져 내렸을 때, 오늘날처럼 ‘민주주의’라는 유령은 다시금 그 봉합된 틈새를 뚫고 출몰하는 법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 유령이 배회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더 의미심장하다.

집권 세력은 점점 더 초조해 하며, 이 유령의 출몰을 어떻게든 봉쇄하려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출몰한 유령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거리를 채우고 있는 촛불의 물결은 이제 점점 더 큰 물결로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그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을 경험한 우리들이 단지 책임 있는 사과나 국정원의 개혁만을 요구하며 머뭇거릴 때, 앞으로 또 다시 새로운 ‘민주주의’의 유령은 언제든 다시 출몰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국의 민주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각자의 민주주의 슬로건으로 이 유령의 출몰에 함께하라!’고. 아마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민주주의자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이 슬로건은 터무니없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유령의 요구가 무엇인지. 어쩌면 바디우가 말한 ‘모두의 귀족되기!’, 그래서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을 좌우하는 현실에 관여할 수 있기를 요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령이 요구하는 민주주의다. 당신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게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내라! 그리고 함께 이 유령의 출몰을 맞이하자!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시대와 철학]

예외상태와 합리성의 신화적 퇴행 : 한국 사회의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하여

 

?한상원(베를린 대학)

 

예외상태의 일상화. 벤야민과 슈미트를 이어받아 아감벤이 사용한 개념이다. 아감벤은 일상, 즉 규칙이 되어버린 예외상태 속에서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개념이 한국사회만큼 잘 적용되는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정치적 영역부터 사적 영역까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건 일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예외상태가 아닐까?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었고 내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선동하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호남인들을 죽이자고 선동해도 정상참작이 된다. 일상이 예외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예외가 일상을 지배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일상이 된 예외상태의 사례는 분단이다. 한국은 70년 가까이 남북간 준전시상황이고, 성인 남성은 2년간 전쟁훈련을 받으며, 실제로 북한정권은 핵무기 쏘겠다고 툭하면 협박해온다. 이러한 일상적 위기를 계기로 삼아 국가권력은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쟁취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해 공격을 감행한다. 2010년 북한이 연평도에 미사일 공격을 하자, 이 패닉상태 속에서 여당은 과감하게 예산안 날치기를 감행한 바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비판이 일자, 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했다면서 쟁점 전환을 시도했다. 툭 하면 등장하는 맹목적인 ‘종북’ 여론몰이를 보면, 이러한 낯선 타자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기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북한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몇 년간 구속과 압수수색 그리고 재판에 시달려야 하는 이 상황은 온라인 매체까지 스며든 일상화된 예외상태의 사례다.

분단 문제는 한국인들의 일상 속에 숨어든 병리적 심리항태의 사례 중 하나다. 외부의 적(북한)에 대한 공포와 이로 인한 내부의 적(우리 안의 간첩)에 대한 광기 외에도, 양적 경제성장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 외적인 국가적 상징(한류, 김치, IT 등)에 대한 과도한 우월의식 등, 한국인들의 심리상태는 그야말로 병적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경향의 사람들은 흔히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모토를 즐겨 사용한다. 이 용어는 한국 사회를 상식(형식적 민주주의와 법치)이 아니라 비상식(부패, 학벌, 권위주의, 지역감정 등)이 지배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여기서 ‘상식’이라는 단어는 철학적으로 볼 때 ‘합리성’이라는 단어와 조응하는 듯하다. 즉 이성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합리성이 아닌 비합리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이 겨냥하는 궁극적 목표는 따라서 ‘합리성이 그 순수한 형태로 관철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놓치고 있는 점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비상식’, 즉 ‘비합리성’이 실은 그 대립물인 ‘합리성’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합리성의 기획, 근대적 계몽의 기획은 매우 늦게 추진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5?16 쿠데타 이후 등장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물론 르네상스적 인문적 의미의 계몽주의와도, 유럽에서 시민사회와 보편선거권 이후 도입된 정치적 의미와도 구분되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지배한 경제적, 양적 합리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다시 말 해, 군부정권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합리성 기획은 합리성 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맥락을 추상해버리고, 오로지 양적 성장을 지상과제로 설정한 일면적인 합리성인 셈이다.

4?19 혁명의 주요한 요구 중 하나는 ‘자립경제 건설’ 이었다. 이것은 곧 미국의 원조에 종속된 국가를 근대적 자주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반영한다. 쿠데타 이후 집권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은 이승만의 자유당도, 4?19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도 수행하지 못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여 원조경제에서 탈출하고, 자립적인 근대적 산업국가를 만든다. 이 점에서 5?16은 4?19의 계승이라는 우파들의 역사관은 일부나마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그것이 5?16과 독재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한국 사회에서 유럽의 17~18세기 절대왕정 내지 계몽군주에 상응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종의 합리성 기획이라고 볼 수 있는 박정희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동시에 한국사회의 병리적 퇴행을 낳는 원인이기도 했다. 양적 성장에 대한 집착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결과론적 규범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장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배척당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담론은 성장의 논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으며, 이를 무마하고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경찰 수뇌부가 수사를 방해했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등장함에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멀리 보면 이러한 한국 근대화의 실패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계몽군주’ 박정희는 ‘신화'(일인숭배, 딸로 권력세습)로 퇴행했다. 이 퇴행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신화가 된 계몽’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부합한다. 합리성(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은 비합리(박정희 신화와 독재 정당화)로 변증법적으로 전화된다. 이러한 설명도식은, 한국사회의 비합리적, 병리적 심리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여러 각도의 이론적 설명 중 하나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병리상태를 “비합리성으로 전도된 합리성”으로 규정하고 그 배경에 1. 일상화된 예외상태로서 분단, 2. 지난 세기 이뤄진 합리성 프로젝트의 실패가 있다고 규정한다. 이를 개념규정하기 위해 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차용하였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 지적하는 급진적인 핵심은 합리성이 양적이고 도구적인 성격으로 후퇴하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합리성 프로젝트(계몽)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점에 있다. 교환원칙과 이윤축적 원칙에 기반을 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합리성이 지닌 여러가지 잠재력을 하나의 것 ? 경제적, 양적, 도구적 이성 ? 으로 환원하는 근본적 배경이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합리성 기획이 신화로 퇴행한 것은 애초에 합리성을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만 사고하게 만든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의 메커니즘이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특수한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한 진단은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이라는 보편적 구조에 대한 변화와 결부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보편적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당장 실현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닌 한에서, 어떻게 제한된 조건 하에서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우리를 무거운 고민 속으로 이끌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④-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이원혁(한철연 회원)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 연일 계속되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나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전·현직 정보당국의 책임자들과 또 그 연계가 의심되는 전·현직 대통령들은 그 어떤 책임 있는 행동이나 발언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여당은 대선불복이니 국론분열이니 하면서 적반하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뻔뻔함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지지하는 소위 콘크리트지지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국가권력의 강고함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국가라는 이름과 힘에 의해서라면 그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이 그들의 행동과 언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이번 사건이 유신시대를 연상시킨다고 말하는 이유기도 하다. 국가에 의해 진행되는 강압과 음모에 대해 그것을 행한 이들이 도덕적, 양심적 가책을 받지 않고 카메라와 국민 앞에서 저토록 당당한 것은 국가권력은 그래도 되고 그럴 힘이 있으며 그 힘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 덕분에 가능하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권력층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민주주의 정치와 가장 동떨어진 의식이다.

근대 사회계약론의 환상과는 달리 국가는 사람들의 합의로 구성,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신의 거대한 폭력성에 의해 국민을 구성하고 포섭하여 국가의 체계를 유지시켜온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난 세월 지난한 민주주의 투쟁은 이러한 국가 폭력을 견제해 왔으며 이를 통해 사회 공동체의 붕괴를 막아왔다. 근대 이후의 국가는 사회와 국민에 대한 수많은 폭력과 강제를 진행해왔지만 민주주의 본질에 대해서는 감히 범하지 못했다. 설령 범하는 국가권력이 있었더라도 패망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국가권력이었다는 점은 역사가 명백히 보여줘 왔다. 즉 국가권력과 그것에 심취한 권력자는 전제적 권력을 완성하기 위해 국민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까지 진행하지만 그것의 말로는 손에 잡히는 역사책 한권만 펼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여당과 청와대는 부정선거 발언이나 대선불복은 금도를 넘은 것이라 말하지만 정작 금도를 넘은 것은 정보기관을 통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보통선거의 근간을 흔든 권력이다. 이번 사건은 여당의 표현대로 금도를 넘은 사건이며 사회적 금기의 파기는 묻혀 질래야 묻혀질 수 없는 것이다. 무능한 야당의 무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이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 책임 당사자의 뻔뻔함이 이대로 계속간다면 뿌리가 흔들리던 민주주의는 오히려 들풀처럼 일어나 뻔뻔하게 흔들던 손을 날카롭게 베어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