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시대와 철학]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정동훈(2018-시민대학 수강)

 

조인성 주연의 ‘더 킹’은 검찰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태수는 목포를 기반으로 하는 건달의 아들이며 동네에서 알아주는 ‘양아치’이다. 어느 날 태수는 한 주먹도 아까워 보이는 검사에게 아버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공권력의 무서움을 실감하며 검사의 꿈을 품는다.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된 태수는 결의를 다지며 정의로운 검사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과 막막한 현실의 벽에 굴복한 태수는 결국 정치검찰의 길을 선택한다. 영화는 주인공 태수라는 인물을 통해 그동안 현대사에서 검찰이 어떻게 권력과 유착하여 기득권을 수호하고 민중을 탄압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검찰의 모습이 마치 영화 ‘더 킹’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검찰의 문제를 요약하면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를 받지 않는 집단’이라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근대적인 검·경찰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경찰인력을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그대로 대거 활용했다. 친일파가 가득한 경찰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당시 한국의 제도를 만들던 인물들이 선택한 방법은 인원이 적은 검찰에게 강력한 권력을 주어 경찰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선택은 검찰을 막강한 힘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검찰은 총 2천여 명 남짓한 인원으로 11만 명이 넘는 경찰을 지휘·감독하며 수사, 영장, 기소, 공판 등등 사실상 법조의 전 영역에 있어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검찰은 견제 받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의회가 정부를 정부가 의회를 견제한다. 또 정치권력은 궁극적으로 시민의 선출이라는 방법을 통해 평가를 받고 감시를 받는다. 하지만 검찰은 선출직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거라는 민주사회의 가장 큰 시험으로부터 자유롭다. 형식상 법무부의 지휘·감독을 받지만 형식일 뿐이다. 검찰을 통제할 정치권력은 언제든 수사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기에 건드리기 어렵고 시민에게 검찰은 개인에게는 감히 저항조차 두려운 공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마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검찰이 검이라면 검을 쥘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지는 두 가지다. 협력 혹은 개혁이다. 전자는 보수정부의 선택이었다. 민주화 이전 독재정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난 보수정부만 생각해도 검찰이 얼마나 권력과 유착하여 공생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후자는 노무현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검찰에게 개혁은 개혁이라고 들리지 않는다. 전쟁을 하자는 말로 들릴게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힘을 없애겠다는 말이니까. 노무현의 검찰개혁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다시금 유착한 권력과 검찰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다시 검찰개혁을 선언한 정부가 집권했고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 그리고 검찰은 다시 한 번 전쟁을 시작했다.

 

현대적인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선 사적제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사적제제를 인정하는 순간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질게 뻔하다. 대신 국가는 ‘국가형벌권’을 인정하며 개인의 ‘복수’를 금지하는 대신 직접 나서서 범죄를 ‘처벌’한다. 검찰은 이러한 국가형벌권을 담당하고 실현하는 기관이다. 검찰은 선량한 시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며 악을 처벌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강력한 권한을 검찰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누차 말했듯 그동안 검찰은 자신의 권한을 사유화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결과적으로 국가형벌권의 남용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전직 대법원장의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이 사법부의 문제를 담고 있다면 스폰서검사, 떡값검사 등의 부패검사들 그리고 검사 출신 전관예우 변호사들의 모습은 검찰의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수사 과정부터 재판까지 하나의 사건에 있어서 검찰의 권한은 때로는 대통령의 그것보다 강력하기에 그 자체가 비리와 유착을 부르는 원인이다. 또한 견제 받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비리가 고발된다 한들 언제든 제 식구 감싸기가 작동한다. 설사 비리로 인해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다 해도 그 자체가 전관 출신 변호사가 되어 활개치고 다닐게 뻔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라고 헌법은 천명하고 있다. 국가기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던 상관없이 국민의 것이다. 국가기관은 국민을 향해야한다. 검찰도 예외일 수 없다. 검찰의 주인은 국민이고 검찰은 국민의 검찰이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 작용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민주국가의 헌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바로 권력분립이다. 국가권력을 나누어 견제와 균형을 꾀하고 그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기본원리이다. 권력분립의 입각해서 볼 때 검찰은 어떠한가? 너무도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견제 받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검찰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권한의 행사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과도하게 침해 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검찰개혁엔 다양한 쟁점들이 있다. 검찰 스스로가 개선해야할 부분도 있지만 제도 자체를 개선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검찰 권력의 문제가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 장치의 부재로 요약된다면 제도 개선의 쟁점도 ‘권한을 나누고’ ‘견제 장치를 만든다’로 요약할 수 있다. 전자의 대안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다. 이것은 2018년 행안부와 법무부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관련 법률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후자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이른바 ‘공수처’의 설치이다. 이것도 어려운 산이다. 제 1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지만 둘 다 얻기 어려운 아주 힘든 상황이다.

 

아직 검찰은 무서울 것이 없다. 검찰개혁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고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의 힘이 점점 빠져가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제 1야당이 아직 버티고 있으며 혹여나 그들이 정권을 탈환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승승장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칼은 칼이다. 내가 휘두르기만 하면 모든 것을 도륙할 능력이 있어도 휘두르는 사람도 얼마든지 베일 수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두 명의 전직 대통령들을 생각한다면 알 수 있다. 검찰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재벌도 차가운 감옥으로 아니 죽음으로도 내몰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정치인도 재벌도 무서울 게 없는 존재라면 그들만큼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나약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을지. 검찰개혁의 명분과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노무현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검찰이라는 거대한 권력기관 앞에 항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질 바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가짜뉴스와 혐오발언의 공통점 [시대와 철학]

♦ 아래 글은 [건대신문]  3월호에도 동시 게재되는 칼럼입니다.  칼럼으로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전임 편집주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들은 혐오스럽다. ‘촛불은 바람불면 꺼진다’ 당시 새누리당의 김진태 의원이 뱉은 막말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대통령의 이루 셀 수 없는 실정에 분노한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뜨겁게 촛불로 마음을 모을 때 도대체 김진태는 무슨 생각으로 막말을 쏟았을까. 막말의 정점은 박대통령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다. 김평우 변호사는 국민을 기만하는 막말을 마구 쏟아내며 탄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몇 가지 김평우의 막말을 되새겨보자.

 

“탄핵 인용시 시가전이 벌어지고 아스팔트 길이 피와 눈물로 덮일 것”

“요즘 우리나라 언론을 보면 소위 정계 원로, 법조계 원로라는 분들이 전부 무조건 헌재 결정에는 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조건 승복해라, 이게 조선시대입니까? 지금 우리가 양반이 복종하라고 하면 복종하는 노예입니까?”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대통령 그것도 여자대통령에게 뭐했냐고 한다. 이건 웃기는 일”

 

판사를 지냈다는 법조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또 스물스물 퍼져나가는 가짜뉴스들, 박사모 집회에서는 또 그 뉴스를 확인도 없이 너도나도 마구 쏟아내고 있다. 사실 시대적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막말에든 가짜뉴스에든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팩트와 진실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울 만큼 배운 저 엘리트들이 왜 저런 혐오발언들을 쏟아내며 막말 정치인, 막말 법조인이란 욕을 듣고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목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번갈아 두르며 광장에 나오는 박대통령 대리인단의 서석구 변호사, 막말 파문 때문에 부친인 소설가 고 김동리 선생까지 언론에 오르내리는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는 혐오발언들을 쏟아내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난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느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소위 엘리트인 그들이 막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가짜뉴스와 혐오발언의 목적이 행동을 생산하는 수행성의 정치이고 그만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발언>>(2016, 알렙, 265쪽)에서 ‘언어는 몸의 행위이며 수행문의 힘은 육체적인 힘과 절대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장(16쪽)에서 모리슨을 인용해 ‘언어의 폭력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포획하려는 노력, 따라서 그것을 파괴하려는 노력’이라고 쓰고 있다.

 

막말의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촛불민심에 대한 상처내기와 광장에 모인 박사모들과 숨어있는 박대통령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에 있다. 사실 이 두 효과 중 막말은 박대통령 지지자들을 더 열광하게 했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름의 마이크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 마이크에서 쏟아지는 혐오스러운 발언과 스멀스멀 SNS를 통해 퍼지는 가짜뉴스들은 팩트가 어떻든 자신들이 지지하는 권력에 힘을 더해주는 수행성의 정치를 열심히 하고 있다.

 

사진출처 – 프레시안

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유감과 분노 [시대와 철학]

이정호(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누군 3만원의 떡을 감사표시로 줘도 범법이고

누군 400억의 돈을 갖다 바쳐도 범법이라 단정할 수 없다니

형식논리적 법적용의 배후에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네요.

 

역사와 현실, 시대정신을 망각한 지식 모리배들에게

논리는 그저 탐욕의 노예일 뿐입니다.

역사는 그들의 부역을 심판할 것입니다.

 

2500년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플라톤의 <국가> 338c)라고 외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망령에 맞서

약자들이 싸워온 정의의 역사에

왜 피가 배어있는지 새삼 뒤돌아 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정의의 씨앗

열매를 맺지 않아도 이어지는 그  알 수 없는 신비!

아마도 불멸의 투쟁과 연대 그리고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정의의 열매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spes immortalis

-희망은 불멸이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박종성(호원대학교)

 

“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중에 황금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
폭리로 돈을 벌게 해 주고 국가를 뒤집어 폐허로 만들며
사람들을 파산하게 하며;
나쁜 물로 교화시켜 도덕을 등지게 만들고
올바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수렁에 빠지게 하며…….
죽을 운명의  그 육체에게 사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며
저주받을 일을 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시대에 대한 성찰: “이게 국가냐”

“정말 이건 사람 사는 나라가 아니지 않냐”, 집회 나온 할머니의 말이다. “순실”의 시대에 우리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는지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민중은 자괴와 상실만을 하지는 않았다. 상실의 시대에 민중들은 다시 촛불의 희망을 들었다. 7차 집회까지 연인원 700만을 넘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서울, 부산, 거제,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어린이, 대학생, 노인들에 이르는 민중의 모습은 우리의 시대에 대한 촛불의 거대한 시대의 성찰이자 주권자의 실천이었다. 촛불 혁명이었다. “오늘 이곳으로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나니, 우리는 바로 그 탄생의 현장에 서 있다.” 괴테가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발미 전투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우리는 촛불 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였고, 그 탄생의 현장에 시민들, 학생들, 노동자들이 있었다. 광장의 정치, 그 목소리는 다양했고, 정치의 참여는 자발적이고 평화로우며 축제 분위기였다. 가정주부는 답답하여, 학생들은 정유라 부정입학에 대한 분노로,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는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노동자도 그렇게 광장으로 나왔다.
촛불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이화여대 학생들은 정의롭지 못한 입학에 분노하였고 정의를 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정의(justice)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의 원리, 각자는 각자의 공헌에 따라 분배받는 것인 분배적 원리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 공헌에 따라 분배받지 못한 정유라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렇듯 시민들, 학생들은 자신의 시대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하였다. 광장의 정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이며, 유신 잔당들의 해체와 종식을 알리는 새로운 역사이어야 한다. 그런데 87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광장정치가 그야말로 텅 빈 기표로 남지 않기 위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역사의 탄생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는 공적인(publica) 것(res)의 파괴이다. 공적인 것의 파괴와 사적인 것이 지배하는 국가, 바로 그런 지금의 국가(republic)에 대한 성찰이 촛불 혁명을 만든 것이다. 촛불 혁명은 탄생하였다. 그 성장의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 철학은 논박(elenchos)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당혹스러운 상태(aporia)에 처하게 하여 무지를 자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현실에서 시민은 논박보다는 촛불을 들어 통치자의 무지 자각을 일깨우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박근혜는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죽음을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근원적인 물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의 유신 망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폭정, 불의, 강도 짓을 일삼던 자들의 영혼, 즉 오늘날 망령, 독재의 유령은 이들의 영혼이 정화되지 못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로 인하여 망령은 현실에서 배회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정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 그것을 성찰하고 행동으로 선택하였다. 민중들은 정의롭지 못한 국가, 사회에 대해 다시 물음을 던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현재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에게, 곧 부, 명성, 명예의 획득에만 혈안이 된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수백만의 민중들은 묻고 있다. 세월호 참사, 사드 배치, 국정원 선거 개입, 교육부 국정 교과서, 한일군사협정, 부정 입학, 국정 농단, 성과연봉제 등등 국정 전반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말이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총체적” 질문이었다. 민중들은 충분히 철학적이었다.
둘째, 탐욕과 시기는 나라가 망하는 두 요소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화폐였다. 요약하자면 이번 사태의 핵심은 사적인 인간의 화폐에 대한 탐욕이었고 이것을 정치권력이 두둔하고 은폐하였다는 것이다. 공적인 혈세는 사적인 인간의 부의 증대로 둔갑하였다. 맑스가 말하는 “치부욕”에, 곧 사적인 인간의 치부욕에 우리들의 혈세가 쓰인 것, 민중들은 이것에 대해 분노하였고 자신의 현실적 삶의 성찰을 통해 거대한 촛불 혁명을 만들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국민을 믿지 않고 재물의 신인 플루토스(Plutus)를 믿는다. 맑스는 재물의 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사회의 “경제적 · 도덕적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했었다. 그렇다, 국정을 농단한 결과는 도덕적 질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질서까지도 파괴하였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장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의 역할을 다시금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시대에 경제민주화를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는 것이다. 고삐 풀린 자본을 위한 국가는 변혁되어야 할 대상이다.
플루토스를 추구하는 근대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생활원리를 눈부시게 비춰주는 화신(Inkarnation)을 자신의 황금 성배(Goldgral)로서 환영한다.”고 맑스는 말한 바 있다. 맑스는 『자본』에서 화폐형태는 일반적인 등가형태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특정한 상품의 특수한 현물형태(Naturalform)로 전환되어 상품소유자들의 공동의 행위 때문에 특정한 상품의 배타적 기능이 되고,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한다. 화폐는 “추상적 부의 물적 현존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일은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오물을 흘리면 태어난 자본주의에서 민중들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민중이 권력을 갖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요구는 촛불 혁명이라는 광장의 정치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로 인하여 죽어간 구의역의 한 젊은이를 추모하는 발길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에서도 알 수 있다. 민중들은 자본이 생명의 가치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에 대해 성찰한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이들이 만들에 낸 국정농단 사태, 그곳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수백만의 민중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 민중은 철학적이었다.

사회적 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목적성을 “함께 존재함의 행복”이라고 하였다. 곧 한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을 창출하거나 보존하는 행위를 하려는 경향을 정의로 보고 있다. 맑스의 진지한 고민은 “사회 구성원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풍요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함께 존재함의 행복은 신자유주의와 상반된다. 신자유주의는 소득 불평등의 확대와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귀결된다. ‘일자리를 줄이는 경기회복’(Jobloss Recovery)이라는 사이렌의 소리는 새로운 불안한 계급들을 유혹하여 그 존재를 난파시키고 불안정한 삶으로 그들을 구속하며, 끝끝내 삶 자체를 침몰시켜버린다. 경제적 불안은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고 그러한 불평등은 불안한 자들의 불안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불만으로, 자신의 좌절을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적대로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유대는 깨져 버린다. 이 시대의 철학은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이번 촛불혁명은 바로 사회적 유대의 강화를 보여준다.
플라톤이 말하는 “고상한 거짓말”을 대한민국에서도 확인하였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국가의 태도에 민중들은 분노하였다. 청와대의 국정 운영의 방식에서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로 규정했다. “창조경제”, “국민행복 시대”라는 고상한 거짓말, 먼저 이 고상한 거짓말이 정치에서 의미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도시를 결속시킬 만큼 강력한 힘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끊임없는 고상한 거짓말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력을 약화하면서 보수단체를 이용하여 참사의 본질을 은폐하거나 희석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그러한 사유 틀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반사회성이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자신의 안락인 이기주의, 타자의 고통인 악의를 버리고 타인의 안일을 원하는 동정(Mitleid)을 주장하였다.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루소 또한 동정(pity)을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적 유대는 비단 이성만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여러 추모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동정의 사회적 유대이다.
민주주의를 선점한 자본으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을 파괴하고 집어삼킨 국가의 모습에서 새로운 민주적 국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증오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부정적 계열에 속하는 정념인 증오를 사회적 유대를 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라는 정념들의 양가성을 인정한다. 공동선에 대한 사랑, 하지만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가 그것이다. 정의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증오이다. 촛불 혁명은 바로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사회적 유대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할 것인가? 그 정념의 역량을 분출하고 시민의 권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

결국 민주주의의 다시금 회복시켜 자본에 종속된 권력을 민중에게로 재전유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병사로서 참여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민주주의이다. 이후 민주주의는 “좋은 외투, 좋은 모자를 쓰고 온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권리”로서 나타난 “보통 선거권”의 확대에서 드러나듯이 자원의 배분과 관련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그렇다, 주권(sovereign)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superus) 최고의 권력(power)이다. 그러나 현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불일치, 그 틈을 메웠던 것이 촛불혁명이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에서 이 틈은 여전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메워진 틈을 더 좁히는 일이다. 결국, 대표성을 강화하는 것, 이것을 모색하여 더욱 더 민주주의의 본래성을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결국 민중의 삶은 자원배분의 문제, 곧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사실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갈등을 없애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노가 투표를 통해 정부를 정당하게 해임하는 것이다. 결국, 갈등은 민주주의에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그러한 갈등을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는 반면에, 민주주의 질서에서는 갈등을 드러내고 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촛불은 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쟁점은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이다. 이는 마치 호남 vs. 비호남과 같은 지역적 문제로 정치적 쟁점을 대체하거나 조직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민주화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결함인 대표성과 주권 원리의 불일치, 그 틈을 더욱더 메워 주체화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더욱 더 자본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국민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를 넘어서는 시대에 계급 간의 불평등은 정치에 있어서 너무나도 강력한 정치적 갈등이므로 더욱더 지역을 넘어선 철저한 계급투표를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삶의 문제이다. 주권의 대표성을 강화하여 자원의 재분배에 참여하는 것, 그리하여 그야말로 민중(demos)의 권력(kratia)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촛불로 “죽 쒀서 개주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살려내는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 민주주의를 탈(재)전유(exappropriation)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재전유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고유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될 민주주의라는 미래를 위하여, 자본이 선점한 민주주의를 재전유하기 위하여 민중들은 민주주의라는 현재를 잡은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비전유(expropriation)할 때의 지배성의 위험을 너무나 쓰라리게 경험하였다. 플라톤의 말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잡아라)

 

신이 침묵하는 시대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신이 침묵하는 시대

 

이병창(동아대학교 명예교수)

 

1) 이행의 시기
최근 이 나라에서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의 길거리에 무려 200백만 명의 시민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트럼프가 정권을 거머쥐고 말았다. 그는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단파 출신이라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연합을 파괴하는 그렉시트, 브렉시트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자는 불발로, 후자는 작은 미동에 그쳤다.
이 모든 사건들이 지진의 고리처럼 연이어 발생하니, 그 밑에 거대한 지진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아직은 예진에 그치지만, 이것이 앞으로 얼마나 큰 지진으로 발전하게 될지 사람들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한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혼과 여명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가는 시대라면 신자유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 같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자유주의가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시대는 설렘보다는 당혹감이, 기쁨의 노래보다는 오히려 절망의 비명이 더 크게 들리고 있다.
도대체 이런 대지진 끝에 어떤 세계가 도래할 것인가, 예측은 어렵지만, 추측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헤겔은 역사가 ‘규정적인 부정(die bestimmte Negation)’에 의해 지나간다고 한다. 그것은 앞의 시대가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의 시대를 지배했던 핵심 규정이 부정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앞의 시대가 지닌 지배적인 규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다가오는 시대가 어떤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2) 신자유주의 경제적 위기
그렇다면 우선 신자유주의 시대부터 검토해보자. 대체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1986년 수립된 WTO체제는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징표가 된다. 흔히 WTO체제는 자유무역 체제라 간주되며, 전 세계가 자유무역을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고 찬양되고 있다. 소위 국가를 넘어선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아름다운 환상이 신자유주의를 미화해 왔다.
자유무역 체제라는 측면만 본다면 WTO체제가 굳이 그 이전의 국제통상체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굳이 신자유주의 시대로 새롭게 규정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특별하게 규정한다면 그 이유는 WTO체제가 가진 다른 고유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 특성은 무엇인가? 바로 금융자본의 재갈이 풀렸다는 것이다. WTO체제는 개별 국가가 자본의 출입에 대해 가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하도록 했다. 특히 국제 금융자본은 주로 개도국에게 강력한 금융개방을 요구했으니, 개도국의 자본시장 즉 증권과 채권시장이 국제금융자본의 새로운 먹이가 되었다.
그 후 세계는 글로벌리제이션, 세계화라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동안 은밀하게 활동을 전개하던 금융자본이 자신의 전모를 폭로하게 된 것은 그 뒤 20년이 지난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였다. 이 사건을 통해 폭로된 금융자본의 행태를 보면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금융사기라고 말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금융자본은 대중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채권을 미리 할인해서 다시 자본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 자본으로 다시 돈을 빌려주고, 이런 식으로 되풀이 하여 가공자본을 늘렸다. 이런 가운데 악성채권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이런 악성채권을 양성채권 속에 끼워 넣어 패키지로 팔아먹었다. 그 결과 엄청난 가공자본을 창출했으니, 모든 것의 목적은 엄청난 금융수입이었다. 이 금융수입은 제조업이 사라진 미영 금융제국의 부를 증식시켰다.
이 간단한 금융사기 뒤에는 여러 가지 부대조건이 있었다. 우선 금융자본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는 누구인가? 미영 금융자본은 이미 가진 자본으로 자국 내에서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 자국 내에서 은행이 투자할 만한 성장가능성 있는 기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이 부동산 투자에 나서게 되자 부동산의 가격이 상승되었다. 미영의 일반 대중들도 덩달아서 여유의 돈을 여기에 투자했고 나중에 가서는 금융자본으로부터 빚을 내서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다. 부동산 가격의 폭등 때문에 대중은 자신의 투자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은행 역시 자신이 획득한 채권이 얼마나 악성인지 알지 못했다.
한편으로 금융자본은 대규모 이익을 얻었고 이를 통해 소위 금융자본에 종사하는 노동자 역시 혜택을 보았다. 그러나 금융자본이 부동산에 투자되고, 자국의 제조업을 기피하는 동안 국제 금융제국의 국내 제조업이 몰락했다. 남은 국내용 기업의 일자리도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으니, 자국의 노동자를 스스로 기피했다. 그 자리를 찾아 이주노동자가 급증했다.
그럼, 미영 금융제국이 획득한 가공자본은 어디에 투자되었는가? 미영 금융자본은 자국에 투자를 기피하면서 개도국에 투자했다. 이런 투자는 제국주의 시대처럼 개도국에 직접 공장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투자는 주로 개도국의 증권 및 채권 시장이라는 자본시장에 투자되었다.
개도국으로서는 부족한 자본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국제 금융자본의 자본이 저절로 굴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개도국 자본은 쉽게 대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수출산업을 육성했다. 수출산업 종사 노동자들은 성장하는 수출산업 덕분에 생활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국제 금융자본이 이윤율이 높은 수출 산업에 투자되는 동안 국내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하청기업화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중소기업 제품은 또 다른 개도국에서 쏟아져들어 오는 값싼 제품들과 경쟁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으니, 금융제국과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여기서도 중소기업은 몰락하면서 중소기업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도국 자본이 일정 정도 성장하면 이윤율이 떨어지게 되어 있고 그러면 자동적으로 금융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다른 이웃 개도국에 투자되기 시작한다. 이제 개도국은 이중으로 위기에 빠진다. 한편으로 자본이 빠져나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웃 개도국과 경쟁이 격화되면서 기존의 수출 산업조차 무너지고 총체적 경제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3) 신자유주의 정치적 위기
결국 이 국제 금융사기는 언젠가 터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2008년 미국 금융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어느새 8년이 지났지만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미국 국민이 세금으로 금융자본의 손해를 보충함으로써 일단 봉합될 수 있었으나 이제 위기는 국가로부터 착취당한 대중으로 전가되고, 경제적 장을 넘어서 정치적인 장으로 확산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브렉시트이고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다. 이런 정치적 사건들이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와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정치적 영역에서 전개된 특이한 계급 대립구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대립을 일반화하자면 미국이나 영국이나, 전통적으로 대립의 축을 이루던 보수와 진보라는 틀이 깨졌다는 것이다.
보수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보수의 주류는 국제 금융자본을 옹호하는 세력이다. 이에 대항하여 보수의 이단파가 등장했다. 이 파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자국 제조업의 보호, 이주노동 반대 등을 외친다. 이 이단파의 주요 지지 기반은 자국의 제조업의 부활을 꿈꾸는 몰락한 제조업 자본가 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보 역시 두 파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진보의 주류는 이미 영국의 토니 블레어나 미국의 빌 클린턴 등으로 대표되는 세력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옹호하면서 주로 금융산업에 종사하는 고급전문 노동자층에 기반을 둔다. 이에 대립해서 진보 좌파가 부활했다. 진보좌파는 몰락한 전통 제조업을 그리워하는 실직자, 남아 있는 국내용 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층을 바탕으로 하면서 주로 복지 담론을 중심으로 재규합된 세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과거 계급연합은 프랑스 혁명 이래 혁명적 공화파와 노동계급의 연합이며 흔히 인민전선 또는 민주진보 연합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연합세력이 독점부르주아 세력과 대항하는 것이 전통적인 계급대립 구도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이 연합이 깨졌다. 이제 새로운 계급적인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보수 주류와 진보 주류가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 옹호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반면 보수의 이단파와 진보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더구나 이런 새로운 계급 대립구도에서는 진보좌파의 세력도 쉽게 보수 이단파의 주장에 협력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에는 아마 샌더스를 지지했던 세력이 트럼프를 지지한 결과도 한몫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브렉시트가 가결된 배경에도 노동당 좌파 즉 코빈 지지 세력이 노동당 주류인 블레어 세력에 대립해서 오히려 브렉시트를 암암리에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급 대립의 현상을 보자면, 그 바탕에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변동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의 본산인 영국과 미국을 금융자본 중심으로 재편시켰다. 그 결과 국내 전통 제조업은 몰락했으며, 해외로 이전했다. 금융자본 종사자에게는 초과이윤이 배분되었고 그들은 금융자본의 존속에 사활을 걸었다. 반면 전통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는 몰락하면서 이들은 차라리 인종적 색채가 다분하지만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하자는 보수 이단파에 협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위기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몰락하면서 문화 이데올로기적인 지형도 변화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극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과거 근대 자유주의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자유의 개념에 기초한다. 즉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자유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근대적 자유주의가 일정한 정도 사회현실의 법칙적 제약을 인정하는 반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한 어떤 제한도 인정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자유를 긍정한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현실을 전제로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는 파편화되면서 한 사회의 차원에서 어떤 법칙적 제약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 무제한적 자유가 긍정된 것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여러 철학적 이론이 그 사이에 발전되었다. 대표적이 논리가 바로 푸코나 데리다가 중심이 된 후기 구조주의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적 인식을 강조하면서 이 구조가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더구나 하나의 텍스트에는 다양한 구조가 중첩되어 있어서 서로 알레고리적인 관련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런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게 되면 객관적 진리나 가치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전기 구조주의에 남아 있던 칸트적 보편과학조차도 사라지고 만다.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이론에는 독일의 하버마스나 미국의 존 롤스가 미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즉 인권에 기초하여 재구성하려 하였다. 사회적 제도는 모두 합의에 기초하는 것이어야 하며 다만 이런 합의가 공정하고 또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이론을 전개하고 롤스는 공정한 합의의 조건으로서 무지의 베일을 제시했다. 이미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가 폭로되기 전에,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무엇보다도 자유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자유라는 개념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선택은 다만 머릿속에서 그치는 자유가 아닐까?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변덕스러운 힘이다. 욕망은 자연발생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배하면서 그가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 욕망의 힘은 의지를 통해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속 사유 자체도 지배하고 만다. 즉 욕망의 힘은 마치 그것이 마음속으로 자유롭게 원한 것이라는 자기기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사실은 변덕스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된 것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는 환상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자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이런 한계는 자유가 무제한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이르면 더욱 노골화된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유행하는 가운데 오히려 파시즘적인 폭력과 외적인 침략이 난무했다는 것은 미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라크 침략이 미국이 욕망이었으며, 백인 경관의 흑인 살해가 또 미국의 욕망이었다.

5) 박근혜 정권의 몰락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이란 신자유주의 경제적 붕괴를 알리는 경고이다. 이 경고는 신자유주의의 축이라할 금융제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한국과 같은 개도국에서도 출현했으니, 그것이 곧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게 된 근본 원인일 것이다.
그동안 금융자본의 지배 아래 한국은 소위 수출 산업 중심으로 또한 10대 산업(전자, 자동차, 조선 등)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수출 산업은 국제 금융자본이 요구하는 이윤율을 달성하기 힘들어졌다. 이미 국제금융자본은 한국의 증권, 채권 시장을 버리고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한국은 성장하는 중국산업과의 경쟁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에 밀어닥친 구조조정, 해고의 바람이 바로 그 증상이라 하겠다.
이런 수출산업의 위기는 노동자의 대량실업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정치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차적 현상이 지난 총선에서 영남수출산업 벨트에서 새누리당의 몰락이었다. 영남의 대체세력인 민주당은 수출산업을 옹호하는 노동자층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리고 수출산업 중심 발전에서 배제된 중소기업과 농민 역시 한미 FTA 이후 지속적으로 분노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국민의 당이 부상한 기반이다. 이 두 세력은 모두 재벌 중심 새누리당 세력에 반발했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지와 반대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상호 대립적이니 분열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지진은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또 하나 거대한 지진이 폭발했으니, 그게 바로 이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라 하겠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는 엽기적인 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분노를 부채질한 감정적 원인에 속할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재벌과 권력의 유착관계이다. 사태의 본질은 재벌이 생존을 위해 권력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그만큼 재벌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더구나 박근혜 정권이 벌린 그 이상한 문화산업이란 것도 사실은 10대 수출산업의 몰락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호도하기 위한 권력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제 한계에 처한 수출산업은 이미 획득한 부를 달리 사용할 데가 없었다. 이 부는 거의 대부분 부동산으로 투자되었다. 박근혜 정권 시대 부동산 거품은 생활비용을 앙등시켰으니, 이미 대중은 여름에 전기값조차 지불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대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적 박탈감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이런 여러 원인들이 겹겹이 충첩된 가운데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국민의 이런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라 하겠다.
차라리 박근혜 개인의 실정이나 최순실의 국정농단 때문에 박근혜가 몰락했다면 이는 일시적이고 정권의 교체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위기가 근본적으로 한국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단순한 정권교체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6) 철학의 시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아무도 새로운 시대가 어떤 시대가 될지 알지 못한다. 다만 더 이상 금융자본의 국제적 지배라는 체제는 사라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금융자본의 지배가 사라진 이후, 과연 브렉시트나 트럼프가 원하듯이 국제 금융제국은 자국의 산업, 제조업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렉시트를 포기하고 국제 금융자본의 지배체제 아래서 재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유럽 국가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 포르투갈, 이태리는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때는 복지담론으로 우르르 달려갔다가, 또 한때는 안철수 식 공정성장이 각광을 받다가 또 한때는 다시 박정희 식 경제개발이라 해서 이명박, 박근혜를 향해 달려갔다. 그 어느 것도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없으니, 국민의 절망은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 시대는 과거 20세기 초 반복되는 경제공황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시대와 마찬가지 시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했고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시대는 바로 묵시록에 예고된 신이 침묵하는 시대이다. 이 침묵 그리고 그 앞에서의 절망감은 항상 파시즘의 온상이 된다. 이미 브렉시트나 트럼프를 보면 파시즘적인 인종주의가 상당히 위협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이미 박근혜 정부 초기에 국민들에게 종북몰이라는 현상으로 이런 절망감이 표출된 바가 있다.
다행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이 기회는 보수가 정권을 잡은 브렉시트나 트럼프와 달리, 민중이 주도가 된 혁명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남유럽 국가들처럼 다시 신자유주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때야말로 다가오는 존재의 소리를 경청하는 철학자와 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불의의 시대 [시대와 철학]

전호근(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불의의 시대라 계절도 더딘가 싶더니 어느덧 겨울이 문턱이다. 예전 이맘때면 나뭇잎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가난한 이들의 창에는 서리가 하얗게 서려왔다. 그러나 추운 계절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겨울이 깊으면 봄을 기약하는 낭만이 있었고 가난한 삶에도 따뜻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 어느 구석에도 겨울의 낭만은커녕 봄이 올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바로 푸른 기와집에서 귀신과 작당하는 너희 때문이다.

 

너희는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하나 나는 믿지 않는다.

옛날의 간신은 군주를 속였는데 지금의 간신은 백성을 속인다.

옛날의 탐관오리는 백성을 마소로 여겼는데, 지금의 탐관오리는 백성을 개돼지로 여긴다.

옛날의 무당은 뒷문으로 드나들며 주문을 외웠는데 지금의 무당은 정문으로 드나들며 연설문을 고친다.

옛날의 어두운 군주는 충신을 죽였는데 지금의 어두운 군주는 아이들과 농민을 죽인다.

 

이러니 지금의 간신이 옛날의 간신만 못하고 지금의 탐관오리가 옛날의 탐관오리만 못하고 지금의 무당이 옛날의 무당만 못하고 지금의 어두운 군주가 옛날의 어두운 군주만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는 너희의 말은 거짓이 아니더냐. 내말이 틀렸느냐?

 

자고로 나라가 망하려면 귀신의 말을 듣는다했다. 그래, 너희의 귀에 귀신이 소곤거리는 말은 들리고, 자식과 부모를 잃고 찢겨진 가슴, 피눈물로 울부짖는 민초의 모습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단 말이냐?

 

두말 할 것 없다. 당장 너희 모두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그 자리는 백성의 아픔을 돌보기 위해 있는 자리다. 그러니 너희 같이 무능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귀신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이제 이 땅의 백성은 드러내놓고 너희를 죽이려 할 것이고 너희가 믿는 귀신조차 어둠 속에서 너희를 죽이고자 모의할 것이다. 신라 때만 최치원이 있는 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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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절망을 환상의 횡단으로 [시대와철학]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10년간을 상실의 시대로 규정하고 집권한 뉴라이트 계열의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10년간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의 시대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뉴라이트는 기존의 보수주의보다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만능주의를 지향하며 대기업과 금융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새로운 보수주의이다. 뉴라이트의 이러한 면모는 MB의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박근혜 대통령의 신탁적 표현인 “규제는 암 덩어리”라는 말로 대변된다.

 

MB 정부는 뉴타운 열풍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투기 붐이 만든 환상적 매트릭스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는 초거대 인공지능이 광대한 컴퓨터 네트워크로 만든 가상 세계에 대한 명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트릭스는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전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을 배터리로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설정은 매트릭스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온 국민의 부동산 욕망이 MB 정부를 지탱하는 에너지였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환상을 연장하고 싶은 노장년층과 보수층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는 매트릭스였던 것이다. 물론 인간 박근혜는 생물학적인 존재자로서도 아니며 검증된 사회적인 인물로서도 아닌, 영화 <향수>에 나오는 절대 향수와 같은 숭고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 영화에서 절대 향수는 욕망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이다. 즉, 스타 철학자 지젝이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말을 빌려 표현한 ‘오브제 프티 아’(작은 대상 a)인 것이다. 지젝 식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 후보로서의 박근혜는 도올 선생이 그렇게나 외친 스펙을 통한 지도자로서의 능력 검증을 거칠 필요가 없으며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한계와도 무관한 환상적인 매트릭스가 된다. 물론 이러한 매트릭스를 만들고 확장하는 데에 새누리당과 아울러 보수 언론과 보수 인사들이 지대하게 기여했다. 다시 말해 이들이 공모하여 자신들의 권력 연장을 위해 MB 정부의 실정에 실망한 국민에게 새로운 환상의 매트릭스를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매트릭스는 처음부터 대단히 깨지기 쉬운 연약한 것이어서 이를 방어할 방패막이 필요했다. 그래서 종북과 안보는 현 정권의 마법적인 부적이 되었다. 이 부적을 내세워 국가의 공익과 국민의 안전은 뒤로 한 채, 권력의 사유화가 극도로 진행되어 국가 시스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로 인해 국가 시스템이 심각하게 마비되고 현 정부가 극도로 무능한지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국민은 국가의 부재를 느끼며 ‘각자도생’이라는 웃기도록 서글픈 신조어가 탄생했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서 옥시 같은 회사의 가습기 살균제로 소중한 아이들이 죽어가도, 폭스바겐 같은 회사의 연비조작으로 환경이 오염되더라도, 대기업의 이윤을 위해 차별과 착취의 비정규직이 늘어가더라도 정부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세월호 사건 때나 농민 백남기 님의 죽음 앞에서 실제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한, 궁극적인 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이나 실무 책임자들도 유가족과 국민에게 슬픔과 책임감을 표하기는커녕, 책임 회피를 위해 비정한 태도로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드디어 최순실과 관련된 박근혜 대통령 게이트가 터지면서 온 국민이 설마설마하면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던 현 대통령의 트라우마적인 리얼한 민낯에 직면하고 말았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매트릭스에서 분리되어 인간이 배터리가 되어 매트릭스에 봉사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지젝은 이를 ‘리얼(실재)이라는 사막’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환상에서 깨어날 때 만나게 되는 진실이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로 무의미한 폭력적인 야만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정신분석학에서 치유란 환상에서 벗어나 불편한 진실인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용기 있게  대면하는 것이다. 지젝은 여기서 더 나아가 환상의 횡단과 아울러 프레임의 재구성이나 변형을 추구한다. 환상은 주체의 욕망을 유지하는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지젝에 의하면 현실이란 리얼한 것이 아니다. 현실이란 환상의 프레임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그동안 숭고한 대상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바라본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환상을 제거해버리면 현실까지 상실되고 만다. 아마도 지금 우리 국민이 느끼는 ‘상실의 시대’는 이러한 상태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환상은 제거가 되지 않는다. 횡단이 요구된다. 환상을 횡단하는 것은 헤겔 식으로 표현하면 부정적인 것을 감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원인대상을 먼저 상실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는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라는 숭고한 대상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가 부정의 과정이다.

 

본래 상실이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므로 슬픈 사건이다. 상실의 시대란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어 국가가 더는 국민의 안전망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통치 권력의 무능이 드러나고 통치자의 권위가 사라짐과 아울러 국민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숨짓고 절망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상실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절망한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배신과 몰락을 경험한 구 유고슬라비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상실을 순전히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러한 상실의 부정성을 견디며 박정희 시대라는 환상을 횡단하고 환상의 기존 프레임을 다시 변혁하고 재구성해야 함을 지적한다.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박근혜 대통령과 그 리얼한 사막인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과 관련된 기존 제도와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인가라는 프레임에 지배받지 않고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통치의 방향과 이념을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 시대라는 숭고한 대상에 대한 포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침 그 숭고한 대상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이에 공모한 공모자들에 대한 준엄한 사법적 처벌과 역사적 심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인 과제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존의 숭고한 매트릭스의 배터리인 우리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서구화의 욕망, 상업화의 욕망, 부동산 투기의 욕망, 승자독식의 욕망, 차별적 구별 짓기의 욕망 등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상실의 시대가 꼭 나쁘지는 않다. 박근혜 정부는 우리의 뉴라이트적인 욕망이 공모한 환상의 매트릭스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실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이랴! 이제 문제는 뉴라이트라는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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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시대정신: 국정 교과서와 첫사랑

음란한 시대정신: 국정 교과서와 첫사랑

 

이지영(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첫사랑은 그것이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때에 아름답다. 그것의 과거 시제가 현재를 침범할 때,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비루한 현재만 부각된다. 피천득은 <인연>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뜬금없이 철학 웹진에 첫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은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드라마들에 등장하는 이상 징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첫사랑은 불치병이나 출생의 비밀 못지않은 한국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치병, 출생의 비밀, 재벌가 실장님 등이 등장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짜증섞인 반응에 비교한다면, 첫사랑은 늘 모두를 설레게 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단골 소재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몇년 간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첫사랑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예전과는 좀 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첫사랑 드라마 <겨울연가>의 경우만 해도, 고등학교 시절 만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십여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충분히 납득할만 하다. 다만 거의 서른이 된 주인공들이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과의 에피소드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매우 놀라워 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시절이 잘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부 시절의 일들도 매우 어렴풋하게 중요한 몇몇 장면들만 기억날 뿐, 그렇게 생생한 강도로 선명하게 디테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몇 년만 지나도 요새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뭐, 기억력의 경우 개인차가 심할 수 있을테니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드라마들은 뭔가 수상하다. 첫사랑의 나이가 아주 어려졌다. 첫사랑인지 아닌지도 잘 분간하기 힘들만큼 어린 시절, 초등학교나 심지어는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로 연령대가 낮아졌다.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그녀는 예뻤다> 역시 초등학교 시절 첫사랑을 15년만에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몇 달 전 방영되었던 <킬미 힐미>에서는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 만나서 함께 지내던 아이 둘이 트라우마로 둘 다 그 시절 기억을 잃어버렸으나 뭔가의 끌림으로 다시 시작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였다. 그와 동시에 방영되었던 비슷한 소재의 다중인격을 다룬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에서도 10대 초반 시절의 강렬한 인연이 바탕이 되어 성인이 된 주인공들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현재 방영중인 조선 건국을 다룬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이방원 (유아인) 과 러브라인을 형성하게 되는 분이 (신세경)의 인연 역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온 주인공들의 사랑 (<풍선껌>, <너를 사랑한 시간>,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의 경우에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첫사랑 아니면 무엇인지 확인하기 힘든 인연이 성인이 된 이들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드라마적 요소로 등장한다. (작년 드라마 <힐러>의 두 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이 외에도 아마 당장 기억나지 않는 드라마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이야기를 시작하기엔 충분할 만큼 많다.

고백하건대, 나는 드라마 매니아이다. 거의 종류를 막론하고 왠만한 건 다 본다. 영화 철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온갖 드라마들을 매일 본다고 이야기하면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유치하고 식상한 클리쉐들로 가득 찬 수준낮은 드라마를 아방가르드한 영화를 연구하는 인간이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하곤 한다. 사실 드라마는 나에게 내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복잡한 철학적 미학적 논의들과 피곤한 세상사를 잊게 해주는 마취제이자, 머리를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비워서 다시 일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치하고 빤한 클리쉐들도 나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즐거운 드라마들이 이상한 징후들을 내뿜으며 나에게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첫사랑 판타지가 꼭 미취학 아동 시절, 아니면 최소한 청소년기 이전에 이루어져야만 그 순수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 시절의 첫사랑은, 요즘 아이들의 조숙함을 생각한다면 너무 늦은 때묻은 사랑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중년의 사랑이나 노년의 사랑은 뭐란 말인가. 흉측하게 때묻은, 순수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냥 그런 너저분한 남녀상열지사란 말인가? 아, 이건 뭔가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생각이 넘실거린다. 개개인에게 있을법한 원형적인 첫사랑의 기억은 물론 소중한 것이지만, 이에 대한 집착은 ‘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랑 역시 어차피 일종의 정신병 아닌가. 이런 개운하지 않은 기분은 그저 이 사회가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중년이나 노년을 배제하고 있다는 그런 에이지즘(Ageism)적 차별 때문일까 라고도 생각해 보았으나,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는 첫사랑에의 집착은 그렇다고 보기엔 도가 지나치고 뭔가 더 이상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이 현상에 대해 이렇게 원인을 말했다.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피상적인 인간 관계만을 맺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에서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대상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맞는 말일 것 같다. 이런 측면 역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어투를 빌어 표현하자면,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뭔가 그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말해야겠다.

대체 뭘까? 가끔씩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현듯 ‘그 이상한 기운’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왜 지금 알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때문이었다. 99 퍼센트의 국민을 좌파로 몰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을 좌편향 빨갱이로 몰고 있으며, 국정화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하는 이 황당하고 끔찍한 메카시즘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점이 바로 나로 하여금 ‘그 이상한 기운’을 파악하게 만들었다. IMF 이후 모두를 괴롭히고 있는 경제 침체와 경제적 불안정은 정치적 보수화를 가속화시켰고, 그 결과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고 있듯 현 정권은 역사의 시계를 1970년대로 되돌리고 있다. 국정화 문제는, 우리집 아이의 표현을 빌자면, ‘박근혜의 공약대로 전국민을 대통합시키고 있다’고 할 만큼 보수와 진보를 넘어 모두가 반대하는 문제임에도 강행시키는 저 대담함은 군사독재 시절에나 가능했던 추친력 아니던가. 모두가 다 아는 이런 시국에 나는 왜 첫사랑 드라마들 이야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첫사랑에의 집착이라는 전국민적 정서가 혹시 박정희에 대한 첫사랑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대통령이라는 중요한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박씨 왕조의 공주로 인식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를 선택한 국민들의 선택은 박정희의 경제 성장에 대한 첫사랑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현재의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 여자가 대통령으로 뽑힌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 아닌가. 결국 국민들이 선택한 것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이다. 박정희라는 첫사랑에 대한 집착이 결국은 박근혜 정권이라는 시대착오적 결과를 자아낸 것이다. 정치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첫사랑이라는 과거의 판타지에 대한 집착이 현재를 갉아먹는 것이 2015년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니. 이 첫사랑 판타지에 대한 집착은 더 이상 순수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이것은 병이다. 특히나 10세 이전의 첫사랑에 대한 집착은, 현재의 이상한 기운 속에서 박정희라는 판타지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생각하니, 그저 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점잖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집착이 너무나도 강해서 이는 음란한 도착증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10세 이전에 만났던 첫사랑 꼬마아이는 그 사이 많은 세상 풍파를 겪으며 더 이상은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며 나 역시 그 때의 내가 아니다. 6-70년대 경제를 살렸다는 (물론 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그냥 군말없이 일단은 인정하기로 하자.) 박정희 정권이 가고 우리나라 경제를 둘러싼 상황은 그때의 상황과 조금도 같지 않다. 이러한 모든 중요한 세상사의 변화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기억 속 판타지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은 거의 시체애호증(necrophilia)이나 소아성애자(paedophilia)의 변태적 도착증과 너무나도 유사하지 않은가. 징그럽다. 소아성애증 말이 나온 김에 최근의 아이유 ‘제제’ 논란이 떠오른다. 아이유의 해석이 소아성애를 부추기므로 음원을 폐지하라는 사람들이 3만명에 이른다는 기사를 보고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다. 소아성애증의 대상이어야 하는 아이유가 그 시선의 관계를 뒤집자 광분하는 꼴이라니.. 진정 사회에 해로운 도착증 환자들은 저기 다른 곳에 있는데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럼 과거는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그런 대상인가? 아니다. 우리는 늘 그 과거의 영향권 하에서 살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과거는 현재의 우리를 규정한다. 과거는 그저 아무 쓸데 없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굳이 철학자들의 이름과 논의들을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과거는 현재 속에 공존하고 있으며 현재를 규정하는 막강한 존재론적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거를 현재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면하고 인식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아니면 과거사이든 간에. 왜 우리 사회는 지금 과거를, 그것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과거를 현재에 아주 음란한 방식으로 반복하게 되었는가. 이 무슨 징그러운 반복강박인가. 어린 시절의 첫사랑에의 실패를 계속 반복하는 강박적 증상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그 원인 역시 과거에 있다. 지금껏 우리는 과거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의 개념을 조금 이용한다면, 과거에 대해 제대로 된 애도(mourning)를 하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첫사랑을 잃고 엉엉 울며 소주잔에 의지하는 것만이 애도는 아니다. 데리다에게 애도란 그저 지나간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애도란 과거를 현재에 불러내어 정당하게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 과거와는 다른 변화된 미래를 여는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는 과거를 정당하게 대우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은, 조선시대식 어휘로 표현한다면 역모를 꾀한 것이고 이는 3대를 멸해야 하는 중죄이거늘, 우리는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챙긴 부와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놔두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군정기의 혼란과 미국의 이익 때문에 시작이 되었건, 일본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던 전직 일본군이 나라를 18년이나 통치했던 이유 때문이었건, 그들의 자손들이 여전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건 간에 말이다. 바로 그 자손들이 이제 자신들의 더러운 과거를 맑고 깨끗하게 세탁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하여 유지하고 강화할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 그들에게 과거는 그 어떤 현재의 반대보다도 강력한 현재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시계를 4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 닥터 후(Doctor Who)의 타임머신 타디스(Tardis)도,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의 드로리안(Delorean)도 없는데 우리 모두가 원치않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 하수상한 도착적 정권은 전 국민을 원하지도 않았던 시간여행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타임머신의 시간을 어떻게 1970년대가 아닌 2015년으로 재조정할 것인가. 데리다가 말하는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은 대체 어떻게 열 수 있다는 말인가. 뻔한 답이지만 우리의 과거를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도 세탁하고 싶어하는 얼룩진 과거를 제대로 활짝 펼쳐서 김치국물 얼룩 하나까지도 모두가 볼 수 있게 하고, 그에 대해 정당한 대우 (doing justice)를 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아마도 페티쉬라 할 수 있을만한 첫사랑에 대한 도착적 정신병은 음란함의 정도를 넘어 우리 나라 자체를 거대한 폐쇄 정신 병동으로 변하게 만들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는 박씨 가문의 인물들을 현재까지 두 번 만났다. 피천득의 인연을 다시 떠올린다면, 우리에게 한번의 기회가 더 있는 것이다.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인 세번째 만남은 결코 성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⑨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박민미(동국대 강사)

 

품위 있는 사회를!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주장했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는 ‘이등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갈릿은 ‘이등 시민’에 대한 비판을 통해, 특권화된 시민과 그에 비해 차별 받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서구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느끼지만 여전한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령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이다. 만일 한 사회의 시민 부류에서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를 제도적이건 문화적이건 차별적으로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들을 문화적 차원에일지언정 특정인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함으로써, 주류적인 시민이 일등 시민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현상마저도 특권화라고 비판하는 정교한 자의식이다.

그런데 단 한 명의 특권화된 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시민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킨 사태가 2012년, 버젓이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전체 시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철저하게 모욕당했다.

‘박 대통령은 일찍이 퍼스트레이디 훈련을 받은 덕택에 최고의 품위와 격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박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대화하기에 앞서 민심과 대화해야 하며 순교자주의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경향신문, 2013년 8월 25일 오피니언)고 말한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교수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품위’라는 말이 수사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념’의 어휘라는 것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선거에서 피선거권자가 누린 특권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순간, 이 땅에 사는 모든 시민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헌법 11조 1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헌법 제7조 1항의 규정대로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는 의무를 받아들인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누린 특권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이제는’ 늦었지만, ‘답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특권을 위해 전체 국민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시킨 이 모욕에 값하는 길일 것이다.

헌법과 현실의 괴리,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