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성찰[시대와 철학]

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성찰[시대와 철학]

홍영두( 경희대 외래교수)

 

‘거리의 정치’는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전면 개방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권력에 맞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는 그 당시 정치학자들에 따르면 6월 민중항쟁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라고 평가되었다. 87년 6월 항쟁은 거리의 정치를 보여주는 대명사였다. 하지만 87년 6월항쟁과 비교해 볼 때 2008년 촛불 집회는 새로운 양상의 거리 정치였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가운데 평화적 방식으로 집회와 시위가 진행되었던 특징이 있다.

그 당시 정치학자들은 거리의 정치가 ‘일탈’이 아니라 ‘정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시각을 가진 정치학자들은 거리의 정치가 한국 정치 변화 과정에서 파국을 초래하기보다는 정치 발전의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고 평가했다. 이와 반대되는 시각도 있다. 지난 5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사를 통해 “권위주의 정치가 종식되고 자유가 넘치는 나라가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민주사회의 자유에 걸맞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말하기 어렵다”며, “법을 무시한 거리의 정치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기대는 일이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에 대한 이 대통령의 불편한 심경을 직접 드러낸 것이라고 프레시안 인터넷 뉴스기사가 보도한 바가 있다. 거리의 정치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 차이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정반대의 견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2008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요구하는 촛불 시위가 방방곡곡에서 벌어졌다. 그로부터 4년 후인 2012년에도 미국에서 네 번째 광우병 소가 발견되면서 다시 촛불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은 2012년 5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중단’ 촉구 시위. ⓒ프레시안(최형락)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협상에 시민이 거리의 정치를 통해 직접 나섰다. 촛불집회·시위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한계를 표출시키고 이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촛불시위로 인해 이명박 정부는 재협상을 거치면서 “한국 소비자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민간 수출업자의 자율규제를 도입하였다. 이는 국회 안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을 거리의 정치를 통해 달성한 시민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촛불집회는 보수정당이 지배하는 ‘정치권’이 갈등의 중재·조정에 실패하면서 시작된 ‘거리의 정치’ 현상이며, 그 점에서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임’이자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당 정치와 거리의 정치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또 양자는 민주주의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거리의 정치가 성숙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법을 무시하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했다. 거리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하등의 관련을 맺고 있지 않는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존재한 이래 합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가 상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립된 의미를 갖는다는 관념을 합의했다는 정도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란 인민의 지배를 뜻했다. 반면에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정부 형태가 아니라 그저 제멋대로 하길 바라는 사람들의 전제(專制)일 뿐이라고 말했다. 근대에 들어와서 앞에서 말한 합의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근대 자유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통치형태 또는 통치 기술을 가리키며, 권력을 정당화하는 형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권력행사의 양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 정치는 대의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 기반한 정당 정치란 제도권 안의 권력 정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유민주주의의 대의제에 기반한 정당 정치는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적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정치를 공동체의 삶을 지도하는 기술, 민주주의적 다자의 법을 공동체적 삶의 원리로 전환하는 기술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당 정치의 본질은 하나임, 공통되게 있음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근대 자유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한 인민의 지배라는 어원적 의미와 거리가 멀다.

반면에 거리의 정치는 제도권 밖의 정치이다. 제도화된 공간, 관습적 사고에서는 나타나기 힘든 창조의 공간이 거리에서 형성되고 있다. 이 거리의 정치에서는 과거의 조직적 위계적 운동에서 자발적이고 다양한 운동으로, 거대담론의 정치에서 생활정치로 전환하는 추세를 보이며 인터넷의 정치적 역할이 부각되고 엄숙함보다는 발랄함이 지배하는 분위기 등이 주목받고 있다. ‘거리’의 의미가 과거 가두투쟁보다는 훨씬 확장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 거리의 정치야말로 인민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리의 정치란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공동체를 지도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견(異見)을 제시하는 인간 행동 행태이며, 인간 집단의 결집과 명령을 작동시키는 규칙들에 대한 예외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통치 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거치는 주체화의 양식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법을 무시한 거리의 정치’라는 발언은 치안의 논리에 따라 행해진 것이다. 치안의 논리는 정치가 아니다. 치안의 논리는 일반 국민을 통치의 수동적 대상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간주한다. 국가는 인민주권을 구현한다거나 인민의 의지를 실행한다고 자처하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 이는 민중 없이 통치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민중의 분열도 없다는 뜻이므로 정치 없이 통치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이런 사례를 수없이 목격해 왔다.

87년 이후 선출된 민주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상화를 목표로 삼았을 뿐이지 사회경제적 영역에까지 민주주의를 확장시키지 못했다. 이런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는 민주 정부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수용과 최근 FTA 협상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IMF 위기 이후 민주 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시장지상주의 이념과 가치를 수용한 것은 외부적 압력의 강제에 의해 선택의 여지가 완전히 닫혀 있었던 상황의 산물이라기보다 민주 정부 스스로 적극적으로 그것을 선택한 결과였다. 민주 정부의 선택이 성장주의, 시장 효율성, 시장합리성, 시장주권의 이념과 가치를 강력한 헤게모니로 자리잡게 만든 가장 큰 요인중의 하나이다. 그런 선택의 결과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 전체에 대해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민주 정부들이 시장원리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탈정치화와 정치의 축소에 앞장섬으로써 스스로 권력과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퇴행했던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커다란 역설이다. 그런 점에서 87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배반당한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은 현 정권에 들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촛불을 통해 거리의 정치로 한국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 거리의 정치는 일탈과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다. 여기서 정치란 곧 민주주의, 즉 인민의 자기 통치다. 따라서 거리의 정치를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선동 정치형태로서의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거리의 정치는 민주주의를 그 주체에게 돌려주며, 이는 정치 주체에게 정당 정치가 행하지 못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거리의 정치는 가시적인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입이며, 이러한 개입을 위해서 요구되는 정치의 중대한 작업은 정치 주체들의 세계, 그리고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이처럼 거리의 정치는 두 세계가 하나의 유일한 세계 안에서 현존하는 불일치와 불화를 현시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거리의 정치는 단순히 정당 정치의 한계라는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거리의 정치의 정당성을 묻는 물음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2008년~2009년 들어 정부 기관이 촛불시민들에 대한 민형사상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소송은 촛불시민을 상당히 위축시키는 전략적 봉쇄소송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전략적 봉쇄소송이란 그 소송이 수반하는 비용, 시간 및 정신적 부담 등을 그러한 발언을 하고 참여한 시민들에게 부과하여 결과적으로 한 시민에게 제기된 소송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발언과 참여를 위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소송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 집회나 시위 과정에서 생긴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가 민법 해석에는 충실할지는 모르지만 헌법의 원리에는 위배되며 민법질서라는 것도 헌법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손해배상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결사, 집회, 시위의 권리는 민주적 삶의 방식을 조직화할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 즉 국가의 지배권역으로부터 독립된 정치적 삶의 방식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촛불집회 및 그 참여는 공익적 성격을 갖는 시민의 권리로서 보장받아야 하며, 손해배상 소송 자체가 위헌적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란 기이하고 불안정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통해서 지금 이곳에 평등지향적 관계들의 총체를 그려낸다. 앞으로 거리의 정치를 민주적 공간으로 지켜가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거리의 정치가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통해 거리의 정치는, 시민 사회의 의사를 조직해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당 정치의 역할을 계속 변화시킬 것이며 탈권위주의를 향한 중요한 매개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