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사회 다시보기[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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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라 쓰고 ‘학벌’혹은 ‘낙인’이라 읽는다

한국사회에서 학벌 문제와 부동산 문제를 속 시원히 말하기 어려운 것은 집권자들과 시민 모두 자본의 이해관계를 내면화하여, 주로 그것을 자신들의 안녕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간주하고 이용하면서도, 그 욕망구조가 까발려지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그것은 국가의 교육과 주택에 관한 역할과 정책이 그 문제들을 완화하는데 거의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제의 현상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어떻게 하든 홀로 살아남기, 자본주의가 가르쳐 준 원리를 습득해서 보다 더 경쟁적이고 탐욕적인 사람이 되기로 드러난다.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에 관한 문제가 서열화, 사교육, 학벌의 문제로, 사람이 살아가고 서로 어울리는 주택과 토지의 문제가 과도한 대출, 투기, ‘먹튀’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 말이다.

그런데 학벌이라는 사회적 자본과 부동산-불로소득이라는 경제적 자본을 통해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든, 그것들에 대해서 기대할 것도 잃을 것도 없으면서 ‘나도 언젠가, 혹은 나의 자식들은 언젠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든, 모두 그 문제에 연루되어 있고 그 병폐를 공고화하는 공범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진 것이 많기에 잃어버릴 것이 불안한 자의 두려움과, 가진 것이 없기에 끊임없이 탐하고 불안한 자의 두려움은 그 근원이 같을까, 다를까. 학벌사회와 부동산사회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작동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인민들의 욕망구조는 대학을 학벌 혹은 낙인이라 부르게 만들고, 육아와 교육과 주거와 노후복지를 모두 ‘경제문제’라고 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굴레에 갇혀 악다구니하는 한 이 지루한 논쟁과 입시지옥이라는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사람을 도구로 여기며 이윤만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의 논리가 계속 강고해지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존재양식은 변함이 없는데, 혁신적인 제도 개선과 의식 개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서울대가 기초학문 연구중심의 대학원 체제로 재편되고 평준화된 국립대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 대학서열화가 사라질까. 대학서열화 문제가 완화되더라도, 높은 사교육비를 감당할 만큼 부모가 경제력이 있고 비교적 똑똑하고 성실하지만, 사회의 지배원리에 대한 의심은 희박한 아이들이 모이는 ‘유사서울대’가 다시 만들어지지 않을까. 얼마나 ‘경쟁력 있는’재단이냐에 따라, 즉 얼마나 대학교와 고등학교가 기업화되느냐에 따라 더 세분화된 서열이 매겨지지 않을까. 이렇듯 학벌 문제는 한국의 뒤틀린 경제성장 속에서 ‘괴물’이 된 입시교육이라는 암 덩어리의 대표적인 증상일 뿐이다. 그래서 학벌 문제는 교육 문제이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결코 교육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과 같은 대학 중심의 패러다임으로는 세부 교육정책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부모들은 한숨 쉬고 아이들은 더 피곤해질 뿐이며, 사교육산업 자본과 거기에 기생하는 스타강사만 덩달아 미친 춤판을 옮길 뿐이다. 교육 시장을 지배하는 이러한 원리가 우리를 훈육하고 규율하는 한 학벌에 의한 사회의 보수화,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과 입시교육열에 의한 개인적?가정적?국가적 ‘자해 쇼’는 계속 될 것 같다.

국가와 학벌

과연 한국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세력은 땅값과 집값이 떨어지고 대학서열화가 약화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까. 서울시장은 학교의 무상급식은 퍼퓰리즘 정치일 뿐이고,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무차별적’복지이기 때문에 뭔가 두려운 것인가 보다. 그렇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격차와 차별, 불평등과 경쟁이 이 땅의 지배원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화법은 무척 단순해서 자신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말하기위해 늘 국가의 존립과 자유민주주의 정체성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가져다 쓴다. ‘그들’이 그렇게 목 놓아 외치는 국익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라는 것이 단지 그들의 지배체제와 이익구조에 대한 위협을 말하는 것임을 마치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듯이.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학벌은 ‘국가’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되어 왔다. 물론 현재의 학벌체제는 봉건시대의 엘리트를 규정지었던 족벌과 문벌의 근대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일제가 이식한 제국주의와 국가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국가를 위해 헌신할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고 국가권력에 종속된 엘리트에 의한 지배체제와 그것을 확대재생산할 교육체제의 마련을 위해, 그 피라미드 체제의 정점에 거의 무한대의 상징가치를 부여하는 것. 물론 이러한 원리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 시절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국가가 보증하는 학벌로서의 서울대는 오늘날 다른 대학에 비해 압도적인 수로 고등고시 합격자를 배출하는 것만 봐도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경성제국대학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필기시험에 가장 능한 인재들을 배출하는 최고의 학벌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학벌투쟁은 계급쟁투인가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대학이 달라질 경향이 크고, 졸업한 대학에 따라 소득의 격차가 여전히, 아니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면 이미 현재의 ‘학벌투쟁’은 개인과 가족의 사회적 자본을 쟁취하고 계급적 수준을 결정할 중대한 사명을 띤 계급쟁투의 현장이며, 더할 나위 없이 정치적인 사안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불공정한 게임에 참여하고 있더라도 그 게임의 룰을 벗어나는 것이 곧 그 세계에서의 회복불능을 뜻하거나, 게임의 진행방식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이 곧 지독한 패배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냥 그 불공정한 게임의 법칙을 용인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형식적 민주화를 견인했던 386, 이제는 486이 된 ‘그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들은 좋은 학벌도 대기업 취업에 바로 써먹히지는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20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그들은 양화된 격차에 따라 차등적으로 한정된 사회적 자본을 미리 배분받아 버리고 자신의 등급을 스스로 낙인찍게 만드는 이 불합리한 게임에 대리인으로 임하며, 그들의 자녀들이 (80년대의 그들처럼) 이의제기를 하기보다는 기꺼이 그 게임의 승자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물론 이 학벌 따기 게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 게임에서 승자가 될 확률이 높은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게임을 벗어나 또 다른 ‘게토’에 소속되더라도 대학졸업장을 요구하는 사회의 요구에 뒤늦게 그 게임 판에 한 발을 넣을 수밖에 없는 곳이거나 외국 대학을 준비하는 비싼 게토이다. 그런데 교육과 대학입시 문제, 나아가 취업을 위한 그 다음의 쟁투를 ‘제로섬 게임’과 ‘죄수의 딜레마’로 바라보는 이 모든 관점 자체가 우리의 지적?실천적 탈출구를 닫아버리고 있다.

입시교육의 상처와 신화를 응시하기

자의반 타의반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는 교수님들도 어느 순간에 경기고와 경북고를 따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입시전쟁의 ‘승자’로서의 우월감은 그들의 도덕적 삶과 학문적 업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리고 필자가 고교시절 경험했던 우열반과 보통반의 극심한 차별은 필자의 의식 깊은 곳에 어떤 열패감을 남겨 놓았을까. 일류 대학을 나온 부모들은 그 사회적 특혜를 잘 알기 때문에,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그 차별과 서러움을 알기 때문에 흔히 어느 집이나 ‘잘 키운 자녀’는 ‘좋은 대학에 들어간 자녀’가 된다. 학벌투쟁은 온갖 부당거래와 비리가 관행이 된 기업 중심의 사회체제를 혁신하는 동시에, 85%가 대학에 진학하면서도 학벌의 권능에 벌벌 떨어야 하는 우리 내면의 욕망과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여서 접근하기가 아주 어렵다. 가수 타블로의 학력 위조 문제를 제기했던 ‘타진요 사건’같은 해프닝을 검경?언론이 진지하게 다루고 뒤쫓을 만큼 우리에게 학벌 (혹은 누군가의 특권) 문제는, 우리 사회의 배후와 우리 내면에 깊은 생채기를 가져왔다. 저마다의 내면이 응시되고 조금씩 말과 행동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국가의 정책과 제도도, 학교와 교육도, 아이들과 우리 모두의 미래도 바뀌지 않는다.

자녀의 교육 문제를 자녀가 앞으로 살아갈 생존수단이자 혹시 모를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입시문제로 축소?환원시켜버리고 그 게임에서 충실한 플레이어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욕망을 먼저 성찰할 때 어린 세대들의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매만질 수 있지 않을까. 자율성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학교, 창의성이 피어나는 교실은 그 다음에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10대들의 삶을 저당잡고 그들에게 이것은 인생을 건 멋진 한 판 싸움이라고 사기 치는 건 이제 그만하자. 그들에게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비정규직의 실상과 그들이 장차 ‘교수님’이라고 부를 대학 시간강사들의 현실에 대해 알아가고 고민하고 토론할 시간 같은 것을 주면 10년 후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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