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것(I-It)”의 관계가 압도하는 사회의 끝 – 자살[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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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소개된 임상심리학자 토마스 조이너의 “자살에 대한 오만과 편견”에 따르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과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는다는 ‘소속감 부재’의 두 심리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때 자살에 대한 생각이 강해진다고 한다. 특히나 핵가족화 및 개인주의화가 강화되는 시대가 됨에 따라 물질적인 문제보다는 관계성과 정체성의 위기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보고가 있다. 내가 ‘짐스런 존재’라는 것은 자신이 중심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이란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항상 주인공으로만 살 수는 없다. 살면서 맺는 수많은 관계에서 자신이 중심이 될 수도 있고 엑스트라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외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회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는 이런 상황이 감정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붕괴시켜 극단적인 결말에 치닫게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그의 저서 『나와 너』(I and Thou)에서 인간을 관계 속에 있는 존재로 보고, 살아가면서 맺는 관계의 형태를 크게 “나와 너”(I and Thou) vs. “나와 그것(I-It)”의 두 가지로 분류했다. 전자인 ”나와 너“는 한마디로 인격과 인격이 만나 서로 진정한 소통과 나눔을 통해 한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되도록 돕는 이상적인 관계다. 이러한 관계와 관계가 모여 한 인간의 삶을 견고하게 지탱시켜주기 때문에 삶의 위기가 와도 뿌리째 뽑히지 않고 오히려 ”비 온 뒤 땅 굳어진다“는 속담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반면 ”나와 그것”은 말 그대로 상대는 철저히 도구격이 됨으로써 그 상대 앞에 있는 “나“는 피상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은 수단이 되고, 효용가치로 스캐닝(scanning)이 되어 점수가 매겨지며, 어떤 필요에 의해 만남이 일시적으로 이뤄지는 관계기에 수명도 짧은 경향이 있다. 일명 안 보면 그만인 관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나-그것”의 관계, 다시 말해 도구적이고 외형적인 관계만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데 있다.

“나”의 실체와는 상관없는 외형적인 세상에서 사는 데 보다 익숙해져있기에 지속적으로 힘들고 우울할 때 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기보다는 그렇게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를 “짐스런 존재”가 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하고 혼자서 파괴적인 외로움을 겪다가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결국 “나와 그것”의 관계가 나와 나의 생명 사이의 관계까지를 지배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의 그것이고, 생명은 나의 그것이다. 사회가 짐이 되는 나를 떼어 놓듯이, 나도 짐이 되는 나의 생명을 떼어 놓게 된다.

산업사회를 지나 풍요와 풍족을 누리는 사회로 진입한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자살뉴스는 특별한 뉴스가 아니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뉴스로 다시 자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뜨겁게 달궈졌었다. 대부분의 자살자들이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다시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장기간 약물복용에 따른 역치현상 혹은 부작용으로 또 다른 의존을 낳아 본질적 치료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속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자살을 한 인간이 속한 관계, 그 관계의 나뭇가지들의 본류인 사회적 맥락을 간과하고, 생물학적인 관점에 치중하여 접근해 버리는 바람에 ‘약물만능주의’로 빠진 경우라 할 수 있다(물론 여기서 약물치료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용기간이 장기화가 될 경우의 치료계획은 다각적이고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별도의 치료계획 없이 약물치료에만 의존하는 이들을 보면 결국 관계적인 맥락을 통한 완쾌가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 치료가 비교적 보편화되어 있는 미국 등의 선진국에서도 심리치료는 약물과 인지행동치료 같은 여러 치료방법들이 병행되어 이뤄진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마음을 터놓는 치료과정이 쉽사리 생략되고,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배식 받듯이 약을 받는 경우가 빈번히 이뤄진다. 더욱 당혹스러운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치료과정이 정작 자살 시도나 자살 이후 이를 유일하게 설명하는 근거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당초 그를 자살로 몰고 간 실질적 동인(動因)과 망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보다는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기계적 설명만이 그의 삶의 마침표가 되어 버린다.

마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모든 인간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세밀하게 연결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라틴어는 ‘inter hominem esse’로 ’사람들 사이에 있음‘을 뜻한다. 반면. ‘죽다’라는 표현은 ’inter hominem esse desinere’로서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라는 의미이다. 건강한 유기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자기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병든 유기체는 그 연결고리가 단절되어 있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절된 유기체는 결국 죽음을 뜻한다. 그 유기체에 속한 모든 것이 죽는 것이지 개중의 우월(?)한 세포나 근육질은 살고 그렇지 못한 것만 선별적으로 죽는 게 아니란 말이다. 썩은 유기체 안에서 모든 세포는 어쩌면 이미 죽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실재를 지탱해주는 일차적 자양분은 개인과 긴밀히 연결된 다양한 “나와 너”의 관계를 통해서 얻어진다.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상황에 대한 재해석을 건강하게 수행하는 과정을 통한 근본적인 치료가 막혀버린 자의 자살선택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실패로만 치부하여 해석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 이것은 마틴 부버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철저히 대치한다. 다시 말해, 오로지 ”나와 그것“의 관점만으로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이뤄질 수는 없다.

“내 끝 속에 내 시작이 있다” – T.S Eliot

박진영(서일리노이대 심리학과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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