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비리의 그림자 [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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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뿌리 자르기]

병역비리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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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태양 (건국대 석사수료)

* 본인은 본 글에서 ‘병역비리’의 이면을 고민하고자 했다.? 허나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너는 잘났냐는 어린 백성들의 본체없는 손가락들로부터 본인을 지키기 위해, 밝혀둔다. ?본인은 신체검사 1등급, 현역 육군병장 만기제대 예비역이다.

연예인과 정치인, 병역 비리자들을 대표해 뭇매를 맞는 그들

수 년 전 병역의무를 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게 된 연예인이 있다. 외모와 실력을 겸비해 많은 촉망을 받았던 그이기에 어쩌면 국민들의 분노는 더 활활 타올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서도 한창 주가를 올리던 연예인 한 명이 병역비리라는 지뢰를 밟은 것 같은데, 적어도 그 지뢰는 그의 발목을 잘라먹긴 할 것 같다. 연예인이라는, 공인이라는 이름아래 그들의 병역비리문제는 호사가들의 입에만 오르내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역비리는 사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스무살 남짓한 대한의 남아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삼겹살과 함께 얹어지는 얘기들은 여자 아니면 군대. 군대를 가게 된 친구들은 세상이 끝나는 양 사회의 전우들의 이별주를 받으며 미꾸라지 같은 친구들에게 부러움 반 비아냥 반으로 술잔을 넘긴다. 가기 전엔 가지 않은 친구들을 그렇게 부러워하다가도 막상 갔다 오면 그네들을 비웃게 되는, 군대가 대체 무엇인가.

병역비리라는 말 자체의 비리

비리라는 말이 붙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병역을 피하는 일이 그 자체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정직하게 느끼게 해준다. 고리타분해보이지만 국어사전을 보면, 비리(非理)는 ‘올바른 이치나 도리에서 어그러짐’이다. 이걸 빌미로 거꾸로 되짚어보면 병역을 행하는 것은 올바른 이치나 도리에 맞는 것이다. 이른바 ‘신성한 국방의 의무’. 우리는 이미 병역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병역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로 생각하도록’ 훈육당하고 있는 것 같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근대국가의 태동과 함께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지워진 그리고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의 깃발에 쓰이는 대표적인 문구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국방의 의무’라는 말 앞에 ‘신성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때, 우리가 그를 오른편에 세우곤 하는 것은 그 문구 자체가 가진 근대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근대적인 것이 모두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쁠 것이다. 보수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그를 ‘꽉 막힌 꼴통’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보수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나 판단’이 묶이지 않고 ‘그것 자체’를 봐야만 하지 않을까. 비록 ‘신성한’이라는 단어가 우리 앞을 가로막아 서지만 사뿐히 즈려 밟아주고 국방의 의무의 당위성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냐는 말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 썩히는 시간?

대한민국 헌법은 교육, 납세, 근로, 국방의 4가지 기본의무를 국민에게 부여하고 있다. 대한민국 병역법은 ‘대한민국 국민인 18세 이상의 남자’에 대해 제 1국민역에 편입시키고 19세에 징병검사를 받게 하며, 1급에서 7급까지 등급에 따라 병역을 지게 한다. 법에 따르면 병역의 의무는 모든 국민 – 정정하자 – 국민 중 모든 18세 이상 남자에게 지워진다. 그런데 신체검사 후 등급에 따라 구분되는 병역을 배분하는데 문제는 현역판정을 받을 수 있는 남자들이 이런저런 지혜를 짜내 현역 등급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물론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서 남성성을 찾지 못하여 고민인 분들의 문제는 또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네들에 대해서는 병역의 의무보다도 주민번호 뒷자리의 결정문제가 더 시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른바 종교적인 혹은 비종교적인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요점이 다른 두 가지 판단; 양심의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판단과 양심의 자유라는 가면 뒤에 숨은 비겁한 거짓말쟁이들이라는 판단 사이에서 각각의 케이스가 구분되겠지만 어찌되었든 전자로 판단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는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2년이라는 시간을 헐값에 팔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하루 일당도 안 되는 돈을 월급으로 받아가며 평소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XX파이에 침을 흘려야 하는가. 사실 이 문제는 근대국가와 국민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상호에 교환의 관계를 설정하면서부터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교환은 근대로 넘어서면서 국민에게 자유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국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들에 대해, 국민에게 의무로 부과하면서 그럴 듯한 이유를 갖다 대야 할 것 같은데 어떤 것도 적절하지 않아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는 꽤나 그럴 듯 해 보인다. 교환은 아주 익숙한 관계이고, 국가가 당신에게 딱히 해준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당신이 적어도 그 국가 속에서 살아가며 유익을 얻었다면 당신도 국가에게 무언가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해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잠깐. 당신이 만약 ‘어, 그런가.’ 했다면 당신은 방금 무언가를 놓쳤다. 교환은 어디까지나 공통된 기준을 가지고 상호가 비슷한 정도의 가치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땅에서 농사지어 이만큼 벌었으니 요만큼은 나에게 주라.’는 말은 그나마 낫다. ‘내 땅에서 농사지었으니 이만큼은 나에게 주라.’는 말은, 더구나 ‘내 땅에서 농사지었으니 이만큼은 세금, 이만큼은 보너스로 주라.’는 말은 글쎄, ‘내 구역에서 장사하면 보호세를 내야 할 것 아니야!’라는 동네 건달패의 대사의 유려한 표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의 가능성을 이른바 측정불가능의 무궁함으로 둔다면, 그리고 세상의 것들이 전부 돈으로 환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손 친다면 우리의 2년은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알 수도 없다. 우리의 2년은 대한민국에서 살아오고 살아갈 값의 부가세인가. 그보다, 우리는 그 교환을 꼭 해야만 하는가.

상대적 박탈감

이른바 병역비리자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에 있어서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자들에게 그 분노의 권리조차 분배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는 확실히 상대적 박탈감인 듯하다. ‘나는 갔다 왔는데 너는 안 갔냐!’라는 말에는 이미 ‘가기 싫은 곳’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가기 싫은 곳이라는 말에는 또 ‘가야하는 곳’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가야하는 곳’이라는 말에는 ‘모두’라는 말이 숨어있다. 곧 제대로 말하자면, ‘모두 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18세 이상 성인 남자) 가야하는, 그렇지만 가기 싫은 그 곳에 나는 갔는데 너는 안 갔다.’가 되지 않을까. 사실 이렇게 보면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가긴 가야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위에서 말한 것, 곧 군대를 가야하냐 갈 필요 없냐의 문제는 이미 병역비리에서는 얘기가 끝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병역비리의 그림자가 언뜻 보인다. ‘저 녀석 군대 안 가려고 버둥거렸어. 나쁜 놈.’이라는 분노 뒤에 ‘군대 말이야, 꼭 가야 하는 거, 너도 알잖아.’를 숨긴 것이다.

죄다 언론이 뒤집어 쓸 죄목은 아닐 것이다. 언론도 목적이 있을 것이고, 사실 그것은 언론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목적일 것이다. 이른바 ‘영감’님들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의 입맛에 병역은 (그 자신은 해당되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빠져선 안 될 소스일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병역비리’라는 떡밥이 어느새 굉장히 쫄깃쫄깃한 이슈거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언제,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새 ‘병역’은 그 사람의, 특히 공인인 경우엔 더더욱, 도덕성을 판단하는 잣대로까지 그 위상을 드높이게 되어버린 것이다. 병역비리 혹은 병역비리의혹이라는 낙인은 당시의 손가락질을 한 곳으로 모으는 과녁 같다. 마치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마냥 이젠 누가 굴렸는지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이 일단 걸리면 그 대상은 아마존에 던져진 고깃덩이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국민의 분노’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그 정당성문제는 이미 한 쪽 구석으로 치워진 느낌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며

예전에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을 읽으면서 끝에 책을 덮을 때마다 헛웃음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건 뭐지, 자기주장이 없어.’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파괴자’로 생각하며 살짝 미워했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위상을 올려다보기에도 허리가 휘는 나는 감히 그런 입장이나 위치를 자처할 수 없다. 다만 지금에 와서 보니 소크라테스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 글에서 문제를 삼고자 한 것은 ‘병역의 당위성’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병역의 당위성에 관한 입장들 중 심정적으로 쏠리는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고한 무적의 논리로 반드시 그러하다는 명쾌한 답을 스스로 도출해 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난, 부끄럽지만, 소심하게도 그에 대한 판단을 일단 유보해 둔 상태다. 하지만 뉴스에 간간히 그런 기사들을, 그리고 댓글들을 볼 때마다 생각했던 것이 있다. 돌멩이를 던질 때 던지더라도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던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던지라고 부추기는 이 사람들은 누군지.

언젠가 영화 을 다시 보면서, 사자왕 무파사를 죽게 만든 것이 대중의 알 수 없는 공포라는 것을 보고 그 섬뜩한 표현에 몸이 떨렸던 적이 있다. 디즈니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 장면은 나를 잠깐이나마 돌아보게 만들어주었다. 설사 같이 깔려버리게 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누군가 잠깐이라도 멈추었다면 그런 참사는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가 무파사이든 스카이든 간에 어쨌든 그런 식으로 남는 건 참혹한 시체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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