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교수)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Y에게서 소식이 왔다. 벌써 오래 전에 구보씨가 보냈던 이-메일에 대한 답이다. 여행 중이어서 확인이 늦었다고 했다. 여긴 중국인데 말이야, 바쁘게 이동하다 보니 도무지 경황이 없지 뭐니. 게다가 인터넷 사정도 안 좋고… 중국은 아직 대도시와 시골이 천지 차이야. 그러나저러나 중국이 넓긴 넓더구나. 재밌고 신기한 일도 많고… 이제 여름이니 구보 너도 어디 여행이나 떠나 보면 어때? 더운 날씨에 괜히 인상 쓰고 있지 말고… 그럼, 이만… 짜이젠.

 

구보씨는 입맛이 썼다. Y가 누구와 같이 있을지 짐작이 가는 까닭이다. Y가 몸담고 있는 시민단체에 알아보니 말로는 취재 여행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휴가 비슷한 형태지 싶었다. 그녀 자신이 계획을 입안하여 형식적인 허락을 받았고, 경비는 비행기삯 정도로 최소한만 지급했다 한다. 그렇담, 먼저 베이징으로 갔을 거다. 아니, 어디에 기착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상하이면 어떻고 충칭이면 어떤가. 어차피 조만간 M을 만났을 것 아닌가.

 

M은 중국에 자주 머문다. 업무상 그렇다고 했다. 벌써 몇 년째다. 그래선지 얼굴도 몸도 더 둥글둥글해지는 게 제법 중국인을 닮아가는 것 같다. 이제 우리한테 중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야. 미국하고 일본에 대한 교역량을 다 합쳐도 중국에 한참 못 미친다구. 실질적으론 남한 정부가 중국의 비위를 거스르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지. 지난봄에 만났을 때, M은 큼지막하고 퉁퉁한 손아귀에 작은 빼갈 잔을 쥐었다 놨다 하며 열변을 토했다.

 

체…언제는 우리가 중국 눈치 안 본 적이 있었나. 유사 이래 중국의 영향력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압도적이었다. 이제 다시 우리에게 중국이 부각된다고 해서 새로울 것은 뭐고 반가울 것은 뭔가. 오히려 경계의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게 아닌가. 벌써부터 미국과 중국이 사사건건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이니, 가뜩이나 허리까지 묶인 우리네 신세가 자칫 등 터지고 배 터지는 새우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인 판이다.

 

“하하…근데, 그게 옛날과는 달라. 너 중국이 쥐고 있는 외환이 얼만지 아니? 자그마치 3조 달러가 넘어. 미국 국채만 1조 달라가 넘고. 작년에 미국은 중국 물건을 3000억 달라 가까이 사들였다구. 불황인데도 말이야. 이렇게 얽혀 있으니, 서로 충돌하긴 어려워. 물론 세(勢) 싸움이야 하겠지. 하지만 자칫하면 둘 다 구렁텅이로 빠진다구. 이제 세계는 누가 지고 이기고가 분명하게 갈릴 수 있는 상태가 아냐. 특히나 중국처럼 대국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구.”

 

“대국(大國)? 대국이라…그래, 그렇더라도 흥하고 망하는 데 크고 작은 게 결정적인 건 아닐 거야. 알잖아, 역사상 대국이니 제국(帝國)이니 하는 것들의 운명을… 중국도 다를 바 없지. 망하고 흥하고 한 게 그 동안 몇 번이야.”

 

“나라나 왕조야 그렇지. 하지만 문명은 다르잖아. 중국 문명권이 망한 적이 있냐? 서양의 침략을 받았지만, 그래서 아편전쟁 후에 일시적인 굴욕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백년 만에 다시 결집해서 백 오십년 만에 당당하게 다시 섰잖아. 이제 이백년이 되는 2040년경에는 아마 전세계의 패권을 쥐게 될 거야. 다시 명실상부한 중국(中國)이 되는 거지.”

 

“M 너, 완전히 중국파가 다 됐구나. 말하는 품새도 아연 중국인 같은데… 일단 단위부터가 말이야.”

 

“하하, 그래? 하긴 나 같이 이제 장사꾼 뒷바라지 하는 놈보다는 구보 너 같은 철학자가 스케일 크게 놀아야 하는 거잖아. 중국이라고 뭐 별 거 있겠어? 철학적으로 보면 사람 사는 덴 다 비슷하지. 근데, 스케일은 좀 달라. 얘들은 인구가 워낙 많으니까, 경제적으로 부유층이 기껏 10%가 안 되는데도 그 숫자가 1억이 넘는다구. 그러니 걔들만 해도 시장이 엄청난 거지. 중국의 소득 분포는 말하자면 호리병 형상이야. 못사는 애들은 또 엄청 많은데, 걔네들이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지. 그래서 얼마 전만 해도 중국에선 사업하기가 엄청 쉬웠어. 싼 노동력으로 생산해서 돈 있는 애들에게 팔면 되거든. 요즘은 좀 달라졌어. 중국도 이제 임금도 오르고 수지타산 맞추기가 쉽지만은 않아.”

 

“임금이 오른다는 건 좋은 거 아냐?”

 

“하하, 좋은 일이지. 하지만 일방적으로 좋은 게 어딨냐.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도 있고, 세상이 그런 거지. 걔들 편에서도 형편이 나아지는 건 좋지만 그게 또 요구도 많아지고, 그러면 갈등도 더 생기고 시끄러워지고, 그 와중에 얌체도 생기고 희생도 생기고, 언제나 그렇듯 못된 놈들이 더 해 처먹고, 그런 게 조직화되고… 암튼 일 풀어나가는 건 자꾸 어려워진다구. 어떻든 너 중국 오면 연락해라. 베이징엔 와 봤지?”

 

“한 10년 전쯤? 그때하고 많이 달라졌겠네?”

 

“그럼. 그새 올림픽도 치르고 그랬잖아. 꼭 베이징이 아니더라도 연락해. 나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이 많으니까. 장사꾼 딱까리 노릇도 힘들어. 하하…”
▲ 중국의 항공모함사실, M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상에, 화통한 면이 있는 친구다. 학생 시절에 Y와는 한때 잘 지내던 사이였는데, 서로 엇갈리게 감방에 들락거리는 바람에 멀어졌지 싶다. 하긴 서로 무슨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니, 특별히 헤어지고 말고 할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그저 학생운동 시절의 친구 사이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M 이야기를 했더니, Y는 걔, 요즘 엄청 쪘던데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그런데, Y가 중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구보씨는 반사적으로 M을 떠올렸다. 그 둥글둥글한 얼굴과 웃음을. 뿐만 아니다. 신문에서건 인터넷에서건 중국 이야기만 나오면 Y와 M이 겹쳐서 떠오른다. 뭐, 중국 이야기에 중국에 있을 두 친구가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그러나 문제는, 왜, 하필이면, 두 친구가 한꺼번에, 겹쳐서 떠오르냐는 거다. 겹쳐서 말이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구보씨는 중국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전이면 무심코 지나쳤을 사안들도 관심을 갖고 들춰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정말 중국에 한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크기의 문제가 구보씨를 사로잡았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크기, 한반도의 크기, M의 몸집의 크기, Y가 구보씨에게서 차지하는 비중의 크기, 또 구보씨 자신의 마음의 크기…

 

사실, 중국은 가깝고 큰 나라다. 면적은 남한 땅의 100배나 되고 한반도 전체로 쳐도 40배가량 된다. 인구도 말이 14억이지, 정확한 수는 누구도 모른다. 산아제한 정책 탓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인구가 많은 탓이다. GDP는 일본을 추월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수치상으로 그 규모는 전 세계 GDP의 10%고 미국의 절반 정도지만, 경제적 영향력은 이제 미국에 못지않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첨단기술이나 군사력 면에서는 아직 미국의 상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글쎄 그런 상태가 얼마나 갈까.

 

미국이 중국 항공모함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회만 되면 일본 기지의 항모를 우리 서해안까지 끌고 와 해상훈련을 빙자한 무력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 중국의 진출에 대해 여간 경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제주도 강정에 기를 쓰고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도 미국의 대중국 견제책의 일환임은 분명하다. 북한이 중국에 더욱 의존적이 되고 북한의 미사일이 평택이나 오산의 미군 기지를 위협할 수 있게 된 마당에, 미국으로서야 중국 본토를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보다 안전한 기지가 절실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정이니 중국을, 또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고려에 넣지 않고 한반도에서 맘 편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얼마나 잘 균형을 잡고 얼마나 잘 대처해야 허리 졸린 채 등 터지는 새우 꼴을 면할 수 있을까. 미국은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묵과했거나 사실상 도와주었다고 비난하면서 남한에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하겠다고 나섰다. 그럼에도 남이나 북이나 이런 판국을 조정할 능력이나 여유는 거의 없어 보인다. 북한은 고립된 처지에서 중국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 대중 무역이 전체 무역의 90%를 상회한다. 출구가 극도로 제한된 이런 봉쇄 상태에서 북한은 핵무기를 절대 포기할 수 없을 것이고, 중국으로서야 핵을 가진 북한을 이제 자신의 24번째 성(省)쯤으로 이용하려 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을 트집삼아 대중국 견제선을 분명하게 그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남한은 미국과 중국의 전략에 놀아나는 것 이외에 어떤 노력을 해 왔는가?

 

“통일?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거 가능할 거야.”

 

지난봄의 술자리에서 M은 망설이거나 근심하는 빛 없이 이렇게 단언했다.

 

“허, 어떻게?”

 

“당장은 안 되지. 무엇보다 중국이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북한을 붕괴시켜 통일한다는 건 중국이 먼저 혼란에 빠질 때나 있을 법한 일이라구. 그런 통일론이야 남한 내부용이지, 이제 그걸 진지하게 믿는 또라이가 어디 있겠냐. 북한 정권이 바뀐들 중국에 대신 줄 게 없거든.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도 말이지. 이쪽에서야 북한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테고…그러니 당분간 그대로 가는 거야. 뭐, 이 상태로 서로 긴장을 풀면서 장사나 하는 거지.”

 

“또 장사야? M, 너 정말 짱깨(掌?)가 다 됐구나.”

 

“하하, 구보야, 서로 안 싸울 수 있는 길은 싸우면 같이 손해 보는 관계를 만드는 게 최고야. 장사란 게 별거냐, 나만 이익을 보자는 게 아니라 서로 이득이 되게 얽는 거라구.”

 

“장사로 얽으면 통일이 돼?”

 

“그럼. 언젠가는 된다구. 초조하게 굴다가 바보짓만 안 하면 말이지. 유럽을 봐. 허구한 날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애들이 이제 같이 놀려구 하잖아.”

 

“얼씨구, EU가 깨지느니 마느니 하는 판인데…”

 

“하하, 그것두 단견이야. 조금 길게 보면 이런 게 다 과정의 일부라구. 지금이야 국지적으루 이해가 엇갈리니까 그런 거지만, 이제 쪼개지면 결국 서로 손해거든. 다 잘 될 거야. 적어도 2, 30년은 봐야 한다구.”

 

“하, 2, 30년? 통일도?”

 

“당근이지. 내 생각엔 2040년쯤이면 우리도 통일이 되지 싶어.”

 

“어디랑? 중국이랑?”

 

“하하, 그건 아니지.”

 

M이 통이 큰 건지, 구보씨가 속이 좁은 건지, 구보씨는 중국을 생각하면 대개 마음이 편치 않다. Y와 M이 서로 알고 지낸 것도 2, 30년의 세월이 아닌가. 통 큰 M과 Y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얽혀 있을까. 알량한 속의 구보씨는 자기도 모르게 상을 찌푸렸다.

 

 

구보씨, 렛미인을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렛미인을 말하다

문성원(부산대)

세상일이 뜻 같지 않다. 요즘은 매사가 그렇다. 하긴 모든 일이 뜻대로 될 바에야 굳이 뜻이 필요하겠는가.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기에, 우정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리라. 이 좋은 봄날에 웬 허접한 소리냐고? 글쎄 말이다. 구보씨 딴에는 선거 뒤끝의 착잡한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구보씨가 사는 남쪽 동네엔 어제까지 흐드러지던 벚꽃이 이제 꽃잎을 하냥 떨구는 중이다. 저 꽃잎 하나하나에도 뜻이 있을까? 문득 구보씨는 생각해 본다. 꽃잎들에 얹히는 저 햇살과 향기를 나르는 저 바람에도? 그래,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뜻은 인간의 뜻과는 상관이 없을 터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뜻이라는 표현을 앞세워 세상 속으로 교묘히 파고든다.

뜻이라는 말은 같아도 그 뜻은 다르다. 인간의 뜻과 자연의 뜻이 다르고, 너의 뜻과 나의 뜻이 다르다. 그러나 원체 뜻이란 나를 통하여서야 그 뜻함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모르는 뜻은 엮이지도 풀리지도 못하니 내게 뜻으로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뜻이 있다 싶으면 나름으로 짐작하고 해석하기 마련이다. 그 덕택에 뜻은 곧잘 오해된다.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이 실제로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도 가설을 세우고 설명을 하려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뇌생리학이 밝혀 놓은 바에 따르면, 우리의 좌뇌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그럴 듯한 설명을 찾아 늘어놓는다.

우뇌와 좌뇌를 잇는 뇌량(腦梁)이 분리된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우뇌에 주어진 정보가 좌뇌에 제공되지 않는다. 가령 오른쪽 뇌와 연결된 시야에 “웃어보세요”라는 쪽지를 보여주면 이 사람은 거기에 따라 웃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왜 웃는지 모르는 채 자신이 웃는다는 사실만 의식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지금 왜 웃고 있나요?” 라고 물어보면, 그는(정확히 말해 그 사람의 좌뇌는) 모른다고 하지 않고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낸다. “당신이 재미있어서요.”라고 답하는 식이다.

 

틀린 답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가장 그럴듯한 답을 찾아 제시한다. 어차피 우리가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면, 이렇게 주어진 한계 내에서 가설을 만들고 이론을 찾는 것이, 미지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효과적으로 살아가는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움은 제한적이다. 또 부작용도 있다. 신화적 세계관의 역할이나 문제점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삶에서 신화나 신화와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뜻으로 얽힌 우리의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신화적 면모를 갖는다. 넓게 보면, 불명료한 사안에 뜻을 제공해 주는 이야기의 얼개가 곧 신화다. 세상이 한층 복잡한 것은 이런 신화적 뜻의 세계가 여럿이고 또 그런 세계들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나름의 세계를 갖는데, 그런 세계에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 포함된다. 여러 뜻들에 대한 해석이 내 뜻의 재료가 된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 읽기는 우리 마음의 일부다. 덕분에, 우리의 삶은 부분적인 이해와 부분적인 오해들로 얽혀 있다.

그러니 세상일이 뜻대로 잘 될 리 없다. 우리의 시도는 무수한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해석의 얼개를 수선하고 뜻의 가닥들을 다시 풀어 엮는다. 내가 받아들인 자연의 뜻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뜻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나의 세계는 매번 개축되고 그때마다 다른 세계의 요소가 내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사정이 좋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럼 나쁠 경우에는 어떤가?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뜻을 세계에 덮어씌우려 한다. 제 뜻이 아닌 내 뜻을 앞세워 세상을 해석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그런 뜻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다른 세계의 요소를 받아들이려 한다. 수용의 거름망이 그만큼 강고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밖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건 무조건 좋고 안의 세계를 고수하려드는 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고집스러움이라고 다 해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제나 소재에 대한 구보씨의 작은 고집, 이를테면 요즘 들어 반쯤 장난스레 드러내는 뱀파이어 영화에 대한 고집 따위는 그런 대로 봐줄만 한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구보씨는 <렛미인>이라는 뱀파이어 영화가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살기의 방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글쎄, 어느 쪽이겠는가?

<렛미인>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독특하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에 따르면, 원래 이 뱀파이어의 정체는 소녀가 아니라 거세된 소년이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분화한 성적 매력이 나타나기 전 연약한 모습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도 소설 속에선 명확히 드러나는 아동성애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건 짚고 넘어가자. 아동성애 도착(페도필)은 무력하고 핍박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면서도 쉽게 지배욕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잘 나타난다.

그런데 <렛미인>의 소녀(또는 소년) 엘리는 뱀파이어다. 연약해 보이지만 실상은 초인간적 존재다. 물론 흡혈의 어두운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것을 기꺼워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피를 필요로 할 뿐이다. 이 어쩔 수 없음이라는 조건은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호응한다.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가련한 존재,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중적 존재가 뱀파이어 엘리다.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의 한 장면
이 뱀파이어 소녀 엘리와 가까워지는 건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소년 오스카다. 둔하고 약한 오스카는 힘이 지배하는 또래의 세계에서 기를 펴지 못한다. 영화에선 가냘픈 금발의 소년으로 나오지만 원래 소설에선 뚱뚱한 아이로 묘사되어 있다. 돼지 소리를 내보라고 놀림을 당하는 것은 그 탓이다. 그런데 이 오스카는 바보처럼 착하기만 하지 않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 그는 밤에 아파트 정원으로 칼을 품고 나가 애꿎은 나무를 찌른다. 가상의 응징인 셈이다.

이 가상이 현실이 될 수는 없을까? 오스카의 뜻이 실현될 수는 없을까? 그건 나름으로 정의의 구현일 텐데 말이다. 엘리는 당하기만 하지 말라고 오스카를 부추긴다.

“받은 만큼 돌려줘. 더 세게. 그래야 걔네들은 그만 둘 거야.”

“하지만…걔들이…”

“그 때엔 내가 도와줄게. 나는 그럴 수 있어.”

오스카는 이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대응을 하고 아이들은 움찔한다. 브라보!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만만할 손가. 뜻밖에 한방 먹은 악동들은 더 크고 더 폭력적인 지원군을 부르고, 오스카는 속절없이 극한의 궁지에 몰린다. 이때 엘리가 나타나 섬뜩할 만큼 충격적인 폭력의 응징을 가한다. 그것은 어쩌면 정의로워 보인다. 핍박을 당하는 약한 자를 돕는 응징. 피의, 어둠의 응징. 여기서 뱀파이어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영어판 포스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LET THE RIGHT ONE IN.” 이것은 정의로운 뱀파이어의 탄생인가?

오스카는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걸 안다. 선택의 여지는 있다.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못하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어둠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장치다. 오스카가 엘리를 초대하는 것은 왜일까? 초대 받지 못한 채 오스카의 방으로 들어온 엘리는 온 몸에서 피를 흘린다. 정수리에서도 눈에서도 피가 스며나온다. 이 모습을 본 오스칼은 황급히 초대의 말을 내뱉고 엘리를 껴안는다.

“넌 누구니?” “난 너와 같아.”

“…. 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아.”

“하지만 그럴 힘이 있다면 그러고 싶어 해. 복수를 위해서. 그렇지?”

“그래.”

“내가 해. 내가 해야 하니까.”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
물론 오스칼이 엘리를 좋아하게 된 건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걸 알기 전부터다. 그러니까 엘리를 받아들이는 건 어떤 이해관계나 바람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일 수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듯, 사랑은 모든 것을 넘어서므로. 그러나 이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렛미인>에는 뱀파이어 엘리를 사랑하는 또 한 사람이 나온다. 호칸이라는 인물이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이 사내는 엘리가 마실 피를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러다 붙잡힐 위험에 처하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자기 얼굴에 염산을 붓는다. 엘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마지막 죽어가면서까지 그는 자신의 피를 엘리에게 준다.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엘리는 백년 넘게 계속 12살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호칸이 있었을까? 오스카가 트렁크에 담긴 엘리를 기차에 싣고 함께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또 한 사람의 호칸이 되리라는 걸 강하게 시사한다.

무릇 뱀파이어란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산물이다. 엘리와 같은 뱀파이어 역시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살기의 한 방편이다. 우리는 뜻대로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찾고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대가가 따를 수 있음을 어렴풋하게 예감한다. 그것이 우리의 거의 모든 신화가 해피엔딩을 보장하지 않는 여운을 진하게 남기는 이유다. 뜻이 여럿인 세상을 뜻대로 사는 손쉽고 안락한 길은 없지 않을까.

그렇지, Y? 구보씨는 웬일인지 한동안 소식이 없는 Y의 속뜻을 헤아리며 혼자 멋쩍게 물어보았다.

 

 

구보씨 다시 뱀파이어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Y가 비아냥거린 대로 구보씨가 말이 많아진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어, 하고 구보씨는 고개를 젓는다.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없이 지낼 때도 있는 걸. 그래도 별로 불편한 줄 모르겠던데…어쨌든 나는 쓸데없이 떠들어 대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구. 오히려 어쩔 수 없어서 한 동안 말을 계속하고 나면 금세 목이 쉬거나 잠겨 버린다니까. Y야말로 말이 많지. 아무 때나 끼어들어 말을 시키고 말이야.

그런 주제에 나보고 말꼼수라구? 쳇… 이 구보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린가. 난 꼼수라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꼼수 아닌 수를 생각하기에도 벅차고 힘든 처진데 말이야. 게다가 생각해보지도 않은 걸 무슨 수로 말하느냔 말이지. 하긴, 철학자들은 예로부터 그런 오해를 받아왔잖아. 기껏 생각한 것을 풀어놓으면, 생각하기 싫어하는 치들은 그걸 궤변이나 꼼수로 여긴다니까. 근데 내가 이런 말을 할라치면, Y는 이것도 또 꼼수라고 할 거 아냐. 그게 아니라고 변명을 시작하면, 그것도 또 꼼수에 대한 꼼수라고 할 거고. 그런데 어떻게 말을 하냐. 야, 안 돼!

그리고 말을 하는 것과 꼼수 부리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구. <나는 꼼수다>의 ‘나’는 어디까지나 가카지, <나는 꼼수다>의 멤버들이 아니거든. <복수는 나의 것이다>에서 ‘나’는 구약의 여호와지, 그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아닌 것처럼. 그러고 보니, <나는 꼼수다>의 박찬욱 버전은 <꼼수는 나의 것이다>가 되겠군. 꼼수는 나만의 것이니 너희 어린 백성들은 감히 꼼수를 부릴 생각은 말아라, 이렇게 가카께서 하교(下敎)하신다는 말이 될 테니까.

여기까지 혼자 너스레를 떨다 구보씨는 아차 하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철학자 구보씨가 이렇게 경망하게 굴어서 되겠는가 싶어서였다. 어쩌면 이게 다 Y에게 전염된 탓인지 몰라. Y는 내가 옆에 있을 때에도 가끔 <개그 콘서트>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거나, <나꼼수>를 듣다가 키득거리기도 하니까 말이야. 매스 미디어의 전염성, 이것이야말로 수평적으로 확산하는 뱀파이어적 전염의 한 전형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Y에게 목덜미를 여기저기 가볍게 물린 것일 수도 있어.

하여튼 대중적 전염의 문제는 그 수평성이 자칫 초래할 수 있는 일차원성에 있지, 하고 구보씨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생각해 본다. 그것을 극복하여 운동의 평면에 굴곡과 회절(回折)을 도입하고, 나아가 도약과 초월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정성에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짐짓 고투(苦鬪)를 수반하는 까닭이다. 그것도 어떤 승리나 구원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고투를.

고투라니…장난스럽게 말을 시작해서 갑자기 너무 심각하고 비장(悲壯)해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우리 삶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삶의 다양성이란 유형(類型)의 평면적 수다성(數多性)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깊이의 요동(搖動)과 착종(錯綜)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문화적 고안물은 이런 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뱀파이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뱀파이어야말로 그런 점을 잘 보여줄 수 있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구보씨는 박찬욱의 <박쥐>가 뛰어난 영화라고 여긴다. 알려진 대로 <박쥐>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토대로 했다. 줄거리와 사건뿐 아니라 인물의 이름까지 빌려왔다. 김옥빈이 연기한 태주는 테레즈, 신하균이 맡은 병약한 남편인 강우는 까미유, 눈동자 연기가 인상적인 김해숙의 라여사는 라캥 ? 이렇게 노골적으로 차음(借音)을 할 정도로 원작에 진 신세를 분명히 한다. 그러나 정작 <박쥐>의 강점은 다른 데 있다.

에밀 졸라는 27살이던 1867년에 이 소설을 내놓았고, 그 때문에 도덕적인 논란도 겪었다. 당시로서는 치정 살인을 살인자의 견지에서 묘사한 소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못 껄끄러운 일이었나 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을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잣대에서 읽지 말고 인간에 대한 ‘자연주의적’ 탐구로 읽으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견지에서 이 소설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졸라 식의 자연주의적 평면은 이미 진부해져서일까.

영화 <박쥐>가 <테레즈 라캥>을 빌려와서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아마 칸느에서 얻은 점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라 하더라도 외국감독이 예를 들어 <장화홍련전>을 차용해서 만든 영화를 들고 온다면 아무래도 점수를 더 주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경우에조차 차용을 빛나게 하는 것은 단순한 차용 자체일 수 없다. 빌려오지 않은 요소가 빌려옴에 생명력을 준다. <박쥐>에서 그것은 뱀파이어 신부의 설정이다.

사실 <테레즈 라캥>과 <박쥐>에서 현저하게 큰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송강호가 분(扮)한 상현이다. 졸라의 소설에서는 테레즈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그 남편 까미유를 살해하는 로랑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박쥐>에서 상현은 그것과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이름도 전혀 다르다. 로랑과 상현, 두 이름엔 유사성이 없다.)

상현은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여 구원을 찾으려는 젊은 사제다. 그가 읊조리는 기도 말은 기복적(祈福的) 자기중심성의 반대 극으로 비친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섬뜩할 정도다. 이 기도는 배경으로 깔리는 바흐의 칸타타 <이히 하베 게누크>(저는 만족하나이다)의 선율과 어울려 비현실적인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 코멘트를 달면서 그러한 희생과 자기 파괴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오만함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를 희구하는 것, 일종의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는 나의 것이 아니다. 희생은 고통스럽고 회피하기 어려운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 파괴로 살 수 있는 피안(彼岸)의 입장권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려고 하는 존재다.

뱀파이어는 가질 수 없는 것의 한 귀퉁이를 훔친 괴물의 모습, 말하자면 욕망과 초월의 키메라다. 영화 <박쥐>에서는 오만함의 대가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욕망을 떠날 수가 없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죽음을 무릅쓴 희생이 꼭 성자(聖者)를 낳는 것은 아니다. 성자의 외양(外樣) 속에도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비틀릴 수 있다. 그 비틀림을 증폭시켜 보여주는 것이 뱀파이어의 힘, 뱀파이어가 가진 초능력이다. 욕망에 갇혀 타락한 초월의 열망, 상승의 반대급부인 추락의 깊이.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욕망에 휘둘리면서도 초월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욕망을 제어하고자 하며, 착한 뱀파이어가 되고자 한다. 착한 뱀파이어, 타인을 배려하는 흡혈?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이것이 이 영화를 코미디로 만드는 아이러니의 기본 구조다. 모두가 욕망을 쫓아 뱀파이어의 힘을 탐하는 세상에서 상현은 선과 악의 구분을 놓지 않는다. 그것이 태주와 함께 욕망을 쫓던 상현을 다시 파멸로 이끈다. 또 그것이 상현을 단순한 코미디의 대상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헤겔의 말처럼, 가치로운 것의 몰락이 비극을 이룬다.

“태주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

“죽으면 끝. 그 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상현과 태주의 생각은 파멸의 순간에서도 다르다. 욕망이 지배하는 수평적 공간이 태주의 세계라면, 가치가 만드는 상승과 하강의 깊이가 상현의 무대다. 내재(內在)와 초월(超越)은 부딪혀 얽히지만,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발산(發散)한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가의 문제는 아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쾌락과 영원성의 약속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욕망의 허망함과 이데올로기의 속박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박찬욱이 내놓는 답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그것은 낡은 구두의 이미지로 잘 드러나는 사랑이다.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못 이겨 ‘행복 의상실’ 앞 밤거리를 속옷 바람으로 달리던 맨발의 태주에게 벗어준 상현의 구두, 그 구두를 태주는 마지막 순간에 꺼내 신는다. 동트는 햇빛에 까맣게 타버린 두 몸뚱이는 재로 부서지고, 그렇게 얽혔던 사랑의 자취가 떨어져 남는다. 달리 어찌 하겠는가.

알겠지만, 이 사랑은 문제를 없애거나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또한 이 사랑은 내재의 허망함으로 녹아 버리지도 않고 초월의 기만으로 휘발해 버리지도 않는다. 사랑은 이 둘의 얽힘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며 그렇게 끊어지듯 지속한다. 사랑은 고투(苦鬪)하고, 또 고투한다.

물론 이런 고투에는 여러 버전이 있다. 박찬욱의 <박쥐>가 초월에 대한 열망의 과도함을 냉소(冷笑)하면서도 그 열망을 떨쳐내지 못하고 짐짓 거기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뱀파이어 영화인 <렛미인>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는 강렬한 사랑을 제시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거래의 세속적 효과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엔 이 정도로 하자. 구보씨가 속절없이 또 이렇게 많은 말을 늘어놓게 된 것은 지난번에 Y가 느닷없이 말을 자른 데다가 말꼼수 운운하고 끝났던 여운이 영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개운치 않다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 아니니? Y라면 틀림없이 또 이렇게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이가 튼튼한 편이다. 다른 건 몰라도 구보씨를 비웃을 때조차 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가지런하고 하얀 이는 매력적이다. 그건 아름다움과 선함이 합치하지는 않는다는 유력한 증거다.

오늘 세상을 뒤덮은 하얀 눈과 같은 차가운 아름다움, 그것은 이면의 온갖 것들을 가린다. 그 미봉적(彌縫的) 차폐(遮蔽)가 아름다운 것은 아마 그것 또한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겉치레고 허식이라며 마다할 것인가.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 그것이 주는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이 숨기는 모든 지저분함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눈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은 삶의 유혹이다. 그러한 한, 뱀파이어는 이곳에도 파고든다. 순백의 눈 위로 스미는 혈흔, 그 뚜렷한 색채의 대비?<렛미인>(2008)을 보라.

구보씨 뱀파이어가 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아벨 페라라 감독의 영화 <어딕션>(1995)은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철학과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영화다,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우선 여주인공 캐서린(릴리 테일러 분)이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철학과 대학원생으로 나온다. 철학을 전공하는 인물이 영화에 등장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러나 대개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철학교수나 철학과 학생은 어딘지 어설프고 몽상적인 캐릭터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캐서린은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녀에게 철학은 배경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특히 현실의 참혹한 모습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실질적 통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월남전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들로부터 시작한다. 중간엔 홀로코스트의 장면들도 비춰진다. 이 악행은 어디에서 비롯하며 또 누구의 탓인가?
영화가 내놓는 답은 ‘중독’(어딕션)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악에 물들어 있고 악행의 공모자인데, 중독에 의해 무감각해져 있을 뿐이다. 평범한 미국 시민이 낸 세금이 월남 전쟁을 위해 쓰였고 또 이라크 전쟁을 위해 쓰이지 않았는가. 우리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우리도 이미 약자를 침탈하고 핍박하는 데 알게 모르게 한 몫을 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는 이런 면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뱀파이어를 끌어들인다. 어느 날 캐서린은 뱀파이어에 물려 뱀파이어가 된다. 그녀는 괴로워하지만 중독된 자신의 욕망을 떨쳐버릴 수 없다. 당당하게 맞서 대항하지 못하고 두려움 때문에 목을 내맡긴 탓이다.

“나를 똑바로 봐. 그리고 말해. 꺼지라고. 애원하지 말고, 당당히 말을 해.”

“제발, 제발…”

“겁쟁이. 너도 공모자야.”

이 영화에 따르면, 우리는 비겁함 때문에 중독된다. 아니, 이미 중독되어 있지만 비겁함 때문에 이를 직시하고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뱀파이어임을, 남의 피를 빨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 부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다.

이런 귀결이나 메시지는 사실 상투적이고 진부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 영화를 요약하고 마는 것은 아마 이 매력적인 흑백 영상물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그 영화 별루야. 지나치게 사변적이라구. 네 말대로 흑백으로 찍었기에 망정이지 칼라 영화였다면 진짜 어색했을 거야. 무엇보다 웬 설명조의 대사가 그렇게 많아. 니체에, 키에르케고르에, 사르트르에, 포이어바흐에, 또 뭐야, 결정론이 어쩌구, 윤리적 상대주의가 어쩌구, 게다가 영원이니 구원이니…어휴, 그럴 바엔 차라리 논문을 쓰지.”

“어, Y야, 그래도 이 영환 평이 좋았다구. 통찰이 훌륭하잖아. 뱀파이어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고. 박찬욱의 <박쥐>가 깐느에서 상 받을 때, 사람들이 비교하여 거론했던 영화가 이거라구. 괴로워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닮았거든. 뱀파이어의 이빨을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는다든지, 주사기로 피를 빼서 흡혈한다든지 하는 것도 이 영화에 먼저 나와. 말하자면, 우리를 뱀파이어로 해석하는 작업의 선구라는 거지.”

“그것도 웃겨.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왜 뱀파이어니? 그렇게 보는 건 사람들을 저주받은 운명으로,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놓는 거야. 그러구선 거기다 회개니, 용서니, 구원이니, 온갖 그럴싸한 말들을 들이대는 거잖아. 전에 어떤 다큐 보니까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입에 돌을 물린 채로 파묻힌 유해가 발굴됐는데, 그게 흡혈귀 취급을 받고 죽은 여자 유골이라는 거야. 뭐, 죽은 자가 피를 빨아먹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거라나… 기가 막힐 일이잖니? 그거 마녀 사냥의 일환 아냐?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 도니까 뒤집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고,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을 뱀파이어로 몰아서 죽인 거라구. 그러니까 구보야, 그 뱀파이어에 대한 집착 좀 집어쳐. 재수 없다구.”

“근데, Y야, 그렇게 단선적으로 볼 필욘 없지 않을까. 네 말대로 뱀파이어엔 원래 그런 면이 있어. 뱀파이어는 경계 밖으로 밀어내야 할 경계 외적 존재였던 거야. 하지만 그건 체제 내적 관점에서지. 그런 견지에서는 뱀파이어 같은 괴물이 체제의 선이나 순수와 대비되는 악과 오염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 거야.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봐. 이제 그런 체제 자체가 문제거든. 더 이상 문제를 밀쳐내 바깥의 적에게 덮어씌울 수 없단 말이야. 그런 식의 호도(糊塗)로는 위기만 더 키울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구.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 밖으로 밀어냈던 악이 반향(反響)하여 내적인 것으로 삼투(?透)하기 시작해. 내부의 균열과 재평가가 생겨나고 말이지. 우리가 밀어냈던 그 악은 바로 우리 내부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의 배타(排他) 자체가 그 악의 주술(呪術)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반성이 일어나는 거야. 그리고 그 반성은 선악의 구분 자체에까지 이르게 되지. 말하자면 이런 거야. 이전의 배타가 ‘악’을 내던지고 그럼으로써 바깥을 지시하는 것이었다면, 적어도 그렇게 지시된 바깥의 일부는 그 배타의 악을 열어젖히는 힘을 담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전환에는 당연히 뱀파이어도 포함된다구. 그렇지 않겠어? 가령 들뢰즈가 뱀파이어를 다루는 걸 좀 봐. 거기에는 자연스레 ‘악’의 문제가 결부되는 거야. 물론 그 ‘악’은 이제 더 이상 기피의 대상이 아니지. 일종의 전도(顚倒)가 일어나니까 말이야.”

“구보야, 내 생각엔 네가 뱀파이어 같애. 뭐? 전도? 맞아, 딱 그래. 전도된 뱀파이어. 옛날 뱀파이어는 너처럼 그렇게 말이 많지 않았거든. 거칠든 부드럽든 그저 조용히 물어뜯었지. 차라리 그게 더 나았는지도 몰라. 요즘 뱀파이어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야. 뱀파이어 이빨이 정말 ‘이빨 까는’ 이빨이 된 거 같아. <박쥐>의 송강호도 봐. 첨부터 중얼중얼, 무슨 기돈지 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되뇌고, <어딕션>에서 그 여자도 아주 연설을 하잖아. 거기 나오는 치들은 다 그래. 중간에 남자 뱀파이어로 나오는 그 배우, 이전 영화들에선 꽤 괜찮더만, 이번엔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결국은 닥치고 피 빨아먹을 거면서. 하여튼 말 많은 것들은 재수 없어. 대체 무슨 영화를 이미지가 아니라 말로 만들려 드냐.”
“Y야, 그게 전형적인 체제 내 수법이야. 말이 막히면 말 많다고 내치는 거. 말로 대응이 안 되니까 하는 얘기거든. 이를테면, 말 많은 놈은 빨갱이라고 하는 식이지. 실은 자기네가 허용할 수 있는, 또는 허용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는 거야. 아니, 그렇게 화 내지 마. Y 네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니까… 여하튼 그래서, 금지된 말이거나 파열된 구멍에서 나오는 말이 흡혈하는 피가 되고, 또 그런 말의 전달 수단이 뱀파이어의 이빨이 되는 거야. 물론 이 뱀파이어는 이제 내부의 뱀파이어지. 밖에서 들어오고 안에서 발산(發散)하는 괴물?물려서 전염되는 흡혈의 욕망이 바로 그 발산의 이미지라구. 예컨대 <나꼼수>를 봐. 그게 일종의 내화(內化)한 뱀파이어의 모습일지도 몰라.”

“구보야, 넌 그냥 말만 많은 게 아니야. 네 말은 아예 말이 안 돼. 아까 넌 비겁함 때문에 뱀파이어가 된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나꼼수>가 뱀파이어라면, <나꼼수>가 비겁하다는 거잖아. 그럼 그치들이 만날 외치는 ‘쫄지 마!’가 비겁의 신호라는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이 그래?”

“하, Y야, 비겁은 문젯거리인 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의 일면이야. 우리가 이런 사회를 허용한 거라구. 말하자면 이명박을 뽑은 건 우리란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이미 뱀파이어인 거야. 흡혈의 욕망을 지닌 존재인 거지. 그런데 이런 걸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뱀파이어란 마치 우리 밖의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밀쳐내야 할 괴물에 불과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돼. 그게 바로 전통적인 뱀파이어의 이미지라구. 그걸 Y 네가 싫어하는 위정자들이 줄곧 써먹어왔던 거고. 거기에 습관처럼 파묻히는 것, 그게 바로 중독이야. 자각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중독, 그것이 정말 위험한 거지. 스스로가 뱀파이어인 줄 모르는 뱀파이어. 이게 비겁의 산물이야.

그렇지만 일단 우리가 이런 점을 깨닫고 절감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지. 이때 뱀파이어의 전화(轉化)가 일어나는 거야.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돼. 무엇이 거기에 얽혀 있는지도. 그래서 전통적 뱀파이어에게 거울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야. 햇빛도 마찬가지지. 두려움, 이걸 완전히 떨칠 수 있을까. 그 두려움은 기성(旣成)의 체계가 항상 준비하고 부추기는 것이거든. 생각해 봐. 자각이니 절감이니 하는 말은 쉽지만, 그건 언제나 대가를 치르는 거야. 내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햇빛에 살이 타는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지. 자기 현시(顯示)와 자기 소외(疏外)와 자기 파괴를, 적어도 나의 근본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거라구.

‘쫄지 마’라는 구호는 그러니까 내화한 뱀파이어의 증식 수단인 셈이야. ‘씨바, 쫄지 마’, 이것은 비겁을 돌파하여 균열을 비집는 내파(內破)의 구호고, 또한 두려움을 넘어, 그렇지만 아직도 두려움 가운데서 흡혈을 약속하는 구호지. 흡혈이라고 하면 다들 끔찍해 하는데, 왜 계속 이런 말을 쓰느냐고? 그건 한편으론 끔찍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실상 끔찍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 끔찍함의 이면에는 효율이 도사리고 있어. 피의 이미지와 상징성을 생각해 봐. 그건 엑기스, 곧 정수(精髓)고, 순환이고 전달이야. 또 흥분이고 두려움이지. 피는 안에서는 활기지만 밖으로 터져 나오면 두려움의 대상이 돼. 흡혈이란 그 활기와 함께 두려움을 먹는 거야. 그렇잖아? ‘쫄지 마’는 쫄 필요가 없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구호라구.”

“잠깐, 구보야. 너 아직도 할 말 많이 남았지?”

“아니, 거의 다 했어. 몇 마디만 더 하면 돼.”

“그럼, 그 몇 마디 아껴 뒀다 다음에 해. 내가 한 마디만 할께.”

“치, 뭔데?”

“넌 말이야, 구보야, 내가 보기엔, 덜떨어진 말로 꼼수 부리는 뱀파이어 같애. 말꼼수 뱀파이어, 어때? 그래두 말꼼수라니까 어감은 귀여운 데가 있지?”

구보씨 뱀파이어를 만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문성원(부산대)

구보씨는 비록 내세울 것 없는 철학자지만 그 나름의 줏대가 있어 세간의 유행이나 풍조 따위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지낸다. 생각 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건 정말 철학자가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요즘 말하는 트렌드에 하릴없이 뒤지기만 할 순 없다. 세태에 휩쓸리지는 않아도 그 물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무감해선 곤란한 까닭이다. 그래서 구보씨에게는 오늘날처럼 트렌드를 말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버린 상황이 오히려 궁구의 대상이다.

다소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하긴 요샌 뱀파이어도 트렌드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혹자는 오늘날 뱀파이어 영화나 뱀파이어 드라마가 ‘뜨는’ 것과 세계적인 불황 사이에 연관성을 찾기도 한다. 불안한 시대일수록 그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초인간적인 영생의 힘을 갖춘 존재가 각광을 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뱀파이어는 <트와일라잇>에서처럼 꽃미남으로도 등장하지 않는가.

하지만 철학자 구보씨가 이렇게 피상적인 연관만으로 뱀파이어에 눈을 돌릴 리는 없다.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주목한 건 꽃미남 뱀파이어나 검사 뱀파이어가 등장하기 전부터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정에는 이십세기 후반의 한 유명한 철학자가 관련되어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질 들뢰즈가 그 사람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뱀파이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혹 구보씨는 들뢰즈가 사실은 뱀파이어였다는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들뢰즈의 인상이 뱀파이어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점을 새삼스레 지적하려는 것인가?

 

그럴 리 없다. 철학자 구보씨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주장을 할 사람도, 또 겉보기의 유사성에 그렇게 쉽게 현혹될 사람도 아니다. 비록 얄팍함과 꼼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아도 구보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구보씨가 들뢰즈와 뱀파이어를 관련짓는 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정확히 말하면 가타리와 함께 쓴 저작들)에서 뱀파이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지, 세간에 횡행하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의해서가 아니다. 들뢰즈는 뱀파이어를 철학적 논의에 끼워 넣은 보기 드문 철학자고, 구보씨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후대(後代)의 성실한 철학자일 뿐이다.

그런데 무릇 성실함은 혼자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뱀파이어와 들뢰즈가 구보씨와 엮이는 데는 페이스북으로 친구의 친구가 다시 친구가 되듯 매개 역할을 한 이들이 있었다. 사실 구보씨는 원래 뱀파이어나 들뢰즈에 별 관심이 없었고, 그닥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몇 년 전, K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카프카와 뱀파이어와 들뢰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걸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카프카와 들뢰즈와 K를 거치는 인연을 통해(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땅 속의 감자 줄기와 같은 리좀적 연결을 통해) 구보씨에게 이른 셈이다.

“카프카는 스물아홉에 펠리체를 처음 만났어. 친구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말이지.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거야. 거의 매일 같이. 그리고 매번 답장을 요구했지. 당시 편지는 카프카가 살아나가는 힘이었어.”

“대단하군. 굉장한 여성이었나 보지?”

“글쎄… 사람은 보기에 따라선 누구나 다 굉장하지 않아? 펠리체 바우어의 사진이 남아 있긴 한데, 그 사진을 보면 미인이라고 하긴 어려워. 들뢰즈는 카프카가 오히려 펠리체의 근육질 팔과 육식동물 같은 큰 이빨에 매혹되었다고 하지. 카프카는 채식주의자였는데 말이야.”

 

“들뢰즈라면, 철학자 들뢰즈 말이야?”

“맞아, 그 들뢰즈가 가타리와 함께 <카프카>라는 책을 썼잖아. 거기 나오는 얘기야.”

“어, 그래? 나도 그 책은 대충 봤는데, 그런 건 기억이 안 나.”

“니네 철학자들은 워낙 감성적인 디테일에 약하잖아. 하지만 나 같은 문학쟁이들한테는 그런 게 먼저 다가온다구. 매력이나 감흥은 논리 이전이고 또 논리 이상의 것이거든. 그런데 들뢰즈에게는 그런 게 있어. 하긴 들뢰즈는 이런 디테일을 흡혈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지만 말이야.”

“흡혈이라구? 흡혈이 개념이야?”

K는 구보씨를 잠시 쳐다보다, 반쯤 남은 소주잔을 마저 들이켰다.

“때로는 음주도 개념인 거야. 그게 현실에 대한 어떤 관계를 얽어매준다면 말이야. 술 마신다는 건 현실을 대하고 현실과 접촉하는 한 방식이잖아. 그런 점에서 음주는 오히려 살아 있는 개념인 거지.”

“그래, 들뢰즈도 술에 대해 얘기하긴 하지. 정확히 말하면, 알콜 중독에 대해서… 근데, 그건 좋은 거라고 하긴 어려워… 그건 시간을 멈춰 자신을 딱딱한 껍질 안에 가두는 거고, 기껏 그 안에서 안온한 추억의 반복에 빠지는 것이거든. 들뢰즈 자신이 알콜 중독자였던 적이 있으니까 이런 상태를 그럴듯하게 표현하기도 했던 거지. 뭐, 그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하지만 흡혈이라…그게 어떻게 개념이 되지?”

“아니, 알콜 중독 말고 그냥 술 마시는 거 말야. 알콜 중독이야 일종의 도피지만, 일반적으로 술 마시는 건 그런 것만은 아니거든. 대개 우린 혼자 마시지 않고 이렇게 같이 마시잖아. 그건 세상을 담고 넘어서는 방편일 수 있어. 현실을 견디고 극복할 에너지를 주니까 말이야. 흡혈은 조금 더 처절하지. 에너지를 얻기 위한 공포가 더 커. 술 마시는 데도 두려움이 있잖아. 우리는 사실 크고 작은 두려움 때문에 술을 마신다구. 술과 술자리가 주는 쾌감은 확실히 두려움을 상쇄하는 효과가 있지.

그러나 흡혈은 극단적인 두려움을, 공포를 수반해. 사람들은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를 공포스럽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있어서 공포스러워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공포심을 갖기 때문에 그런 존재가 있게 되는 거야. 그렇잖아? 이런 건 너희들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체험의 전형적인 효과거든. 아무튼 그래서 뱀파이어는 공포와 한 몸이야.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빛을, 십자가를, 마늘을 두려워 해. 현재의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를, 제도를, 처방을 두려워하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항상 비루먹었지. 살찐 뱀파이어를 본 적이 있어? 살찐다는 건 흡혈의 개념에 어긋나는 거야. 흡혈은 공포의 산물이니까 말이야.”

“뭐, 정말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면이 없진 않군. 문학적인 개념도 개념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들뢰즈가 이미지를 활용하는 데 능한 철학자라는 점도 쉽게 인정할 수 있어. 그런데 카프카는 뭘 두려워했다는 거야?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잖아. 하지만 실제로 카프카의 아버지가 억압적이었던 건 사실 아냐?”

“그건 그렇지. 하지만 펠리체와의 관계에서 카프카가 두려워 한 건 무엇보다 결혼이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육욕의 관계고.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천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어. 그러나 정작 만난 건 몇 번 뿐이라구. 그리고 두 번이나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하거든. 나는 들뢰즈가 카프카의 편지를 흡혈과 관련지은 건 탁월하다고 생각해. 육식 동물에 대한 채식주의자의 흡혈. 이건 세상에 대한 카프카의 관계를 잘 형상화하고 있거든. 카프카는 세상의 살을 뜯어 삼킬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기에는 이 현실이 너무 탐욕적이고 맹목적이며 공포스러웠던 거지. 그래서 그는 항상 출구를 꿈꾸면서 외설적 세상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흡혈을 하는 방식을 택했던 셈이지.

너 혹시 우리가 어렸을 때 추송웅이 공연했던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을 기억해? 최근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 나온 추상미가 그 딸이라구. 뭐, 몰라? 하여튼 너는 디테일에 문제가 있어. 어쨌든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이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잖아. 거기서 카프카는 원숭이의 입을 빌어 말하지. 그 대산 알지? ‘저는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구를 찾았을 뿐입니다.’ 카프카가 흡혈의 에너지로 연명하려 한 건 자기의 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면 탈주하기 위해서라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레메디오스 바로) 물론 구보씨가 그 때 안주삼아 들었던 K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구보씨는 나름 줏대 있는 인간이어서, 비록 술에는 취했어도 다른 사람의 견해에까지 쉽게 취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맨 정신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허다한 꼼수들이 판치는 세상에 산다고 해도, 구보씨는 절대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K는 석 달이 멀다 하고 주종(酒種)과 화제와 애인을 바꾸는, 줏대 없는, 또는 줏대가 여럿인 친구가 아니던가.

그래도 그 이후로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관련된 사안을 그냥 흘려보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뱀파이어 영화도 기회가 닿으면 챙겨 보고, 자기도 모르게 흡혈이라는 틀로 세상사를 해석해 보다 혼자 멋쩍어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에 보지 못했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주변에 뱀파이어를 닮은 인간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에 구보씨는 가끔 놀란다. 그들은 탐욕스런 현실에 대한 공포와 선망을 모순적으로 품고, 두려움이 배인 웃음을 때로 수줍게 흘리지만, 그 웃음 사이로 깊게 감춰진 갈구(渴求)의 송곳니를 일순 번뜩이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뱀파이어적 현상이 증식하는 방식이다. 사실 이것이 뱀파이어와 트렌드 사이의 중요한 관계다. 뱀파이어는 자연적이거나 계통적으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염에 의해 늘어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점을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뱀파이어는 부모가 뱀파이어라서 뱀파이어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수직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까닭에 자식을 낳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를 절멸시킬 수 없는 흡혈의 욕망은 수평적으로 번져나간다. 뱀파이어는 생식세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세포의 혈류를 타고 확산된다. 이들의 번식은 신경을 급속히 외장(外藏)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명을 배양액으로 삼는다.

고전적으로는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뱀파이어가 된다. 오늘날 뱀파이어의 이빨은 기술적으로 세련되어서, 사람들의 눈망울이 공포와 욕망으로 번뜩이는 순간 미세한 빨대처럼 그들의 목덜미에 파고든다. 인터넷은 그 좋은 매개체다. 카프카가 오늘에 살고 있다면, 그는 자못 심각한 <나꼼수>와 같은 이-메일을 매일 밤 수많은 펠리체의 목덜미에 박아 넣고 있을지 모른다. K, 그도 위험하다. 그는 능히 뱀파이어의 그런 방식에 전염됐음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구보씨는 다르다. 구보씨는 나름 줏대가 있는 철학자라서, 결코 그런 일에 휩쓸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알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절대 아니다.

구보씨 뱀파이어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

 

이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09)에 나오는 대사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김옥빈 분)가 자신을 책망하는 상현(송강호 분)에게 내뱉는 말이다. 상현도 뱀파이어다. 그는 가톨릭 신부였는데, 수혈을 받고 뜻하지 않게 뱀파이어가 되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지만,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의 피나 자살하는 사람의 피를 받아먹는다.

반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당당하다. 그녀는 신선한 피를 위해 거리낌 없이 인간을 죽인다. 그녀는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녀가 인간을 죽이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태주는 상현의 어정쩡한 태도를 비웃는다.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주는 건 그렇게 아깝냐?”

이것도 <박쥐>에 나오는 대사다. 눈 먼 노(老)신부(박인환 분)가 자길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길 거부하는 상현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서라도 다시 이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렇게도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상현은 그러한 욕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피를 탐하는 노신부를 찔러 죽인다. “가서 쉬세요.” 그러면서 상현은 그가 죽인 노신부의 심장에서 솟아나는 피를 빨아먹는다.

상현은 스스로의 욕망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면서도 그런 욕망의 탐닉을 막으려 든다. 그는 뱀파이어지만, 윤리적이고자 하는 뱀파이어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정녕 윤리적일 수 있는가? 상현의 말과 행동이 블랙 코미디가 되는 바탕은 여기에 있다. 그는 비닐 팩에 피를 담아 냉장고에 두고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조금 빨아먹다 버리는 건 일종의 인명경시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블랙 코미디의 무대는 영화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틀림없는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게다가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물질적 지배와 안락만이 아니라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돈의 위력을 가진 이들은 이제 인간 세상의 한 부류로 자리 잡는다. <트와일라이트> 시리즈의 뱀파이어가 어둠과 경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인간 사회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닭을 잡아먹는 여우가 동네에 내려와 닭들과 동거하며 닭들을 관리하기에 이른 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닭이 아닌 여우가 되고자 한다. 기왕이면 멋지고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한다. “뱀파이어면 어때?” 사람들은 피를 탐하는 <박쥐>의 노신부처럼 되뇐다.
영화 ‘박쥐’의 한 장면구보씨가 DVD로 영화를 여기저기 돌려보아 가며 여기까지 얼기설기 썼을 때다. 어느 틈엔가 옆에 와 있던 Y가 끼어든다.

“구보야, 너는 어떻게 영화를 봐도 그렇게 기괴한 영화만 보니? 그 박쥔지 생쥔지 하는 영화는 벌써 몇 번째 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참 취미도 괴상하다, 너.”

“어, 미안. 시끄럽다면 헤드폰 끼고 볼께. 난 곧 이 영화로 강의도 하고 글도 써야 하거든. 이제 겨우 한 페이지 썼어. 강의 노트는 아직 시작도 못했고…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영화 진짜 볼 만한 영화야. 박찬욱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다구.”

“글쎄, 난 박찬욱 좋은지 모르겠더라. 그 사람 영환 어딘지 좀 구겨진 것 같애.”

“하하…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어딘가 구겨진 마음이 없다면 영화건 문학이건 불가능하지 않겠어? 구겨진 주름에 세상이 이렇게 또 저렇게 담기고, 그걸 풀어내는 데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치, 그럼, 주름 많은 사람은 다 예술가겠네? 박찬욱은 그것도 아니고 이제 쉰이 다 된 얼굴이 뺀질 통통하던데?”

“유심히도 봤다. Y, 너 은근히 박찬욱 좋아하는 건 아냐?”

“아니라니까. 난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 싫어해. 그런 걸 왜 우리가 영화에서도 봐야 하니?”

“외면한다고 그런 면이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그런 걸 극적으로 제시해서 우릴 자극하고 정화(淨化)하는 게 필요한지도 몰라. 거기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것이고 말이야.”

“기껏 뱀파이어가 그런 거야? 덜떨어진 서양 귀신이 피 빨아먹는 게?”

“Y야, 그게 꼭 그렇진 않다구.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어.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런 걸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원래 뱀파이어는 경계적 존재였어. 이런 존재에게는 정상적 존재에게선 찾기 힘든 갈등과 문제가 있다구. 생각해 봐. 뱀파이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라구 할 순 없어. 그렇다구 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네 말대로 귀신인 것도 아냐. 분명히 몸뚱이를 가진 생명체라구. 그러나 짐승이라고 할 수도 없어. 말하자면 일종의 괴물인 거지. 경계적 괴물. 그래서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흥미로운 얘기들이 나올 수 있는 거야. 박쥐라는 동물도 원래 경계적 존재잖아. 그런 점에서 이 영환 우리말 제목이 영어 제목보다 나아.”

“영어 제목은 뭔데?”

“Thirst. 갈증… 너무 평면적이지. 하긴 뭐, 저주스런 갈증, 그런 정도의 뜻이고 이미지겠지만.”

“저주스런 갈증? 거기 저주는 왜 붙어?”

“Y야, 이거 뱀파이어 영화라구.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 살잖아. Y 네가 뱀파이어가 됐다고 생각해 봐. 피를 빨아먹는 게 기꺼운 일이겠어? 근데 이걸 욕망 일반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 욕망이라는 게 대부분 희소성이 있는 대상을 향하는 거고, 그래서 누군가를 밀쳐내야 충족될 수 있으니까. 때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해서 말이지. 그거 일종의 피 빨아 먹는 거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고 또 만일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면 저주스런 거지. 저주스런 욕망, 저주스런 갈증.”

“구보야, 그건 정말 난센스고 오버센스야. 네 말은 우리 모두가 일종의 뱀파이어란 말이잖아. 그게 말이 돼?”

“내 참, Y야, 그건 내가 좀 전에도 했던 말이야. 넌 대체 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한 거니? 내가 그랬잖아, 뱀파이어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다른 생물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꼭 사슴피를 받아먹고 곰의 쓸개즙을 빼내먹는 인간들만 뱀파이어가 아니라구.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해 먹어치우는 방식은 정말 잔인한 거야. 뱀파이어가 차라리 고상할 정도지. 입가에 피 안 묻히고 점잖은 척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한다고 해서 잔인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당하는 동물 입장에서는 더 기가 막힐 노릇 아닐까. 사람들이 사는 부근엔 사육당하는 동물 이외엔 대형 동물들이 남아나질 않아. 특히 육식 동물들은 거의 멸종이야. 경쟁자가 없는 뱀파이어가 인간인 거지. 그뿐만 아니라구. 인간은 인간도 사육하고 착취하잖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말이지. 서로가 서로 피를 빨아먹는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이 박쥐라는 영화에는 서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이 있어. 상현이 제 피를 태주에게 먹이면서 태주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 말이야. 실은, 박찬욱이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머리 속에 그려뒀던 장면이 바로 그거라는 거야. 그걸 중심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거지. 재밌잖아?”

“재밌다구? 구보야, 넌 정말 이상해. 잔인하다고 하더니 재밌다는 건 또 뭐니? 잔인한 게 재밌다는 거잖아. 도대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소리야? 박찬욱이나 너나 괜한 과장을 해서 잔인한 면을 만들어내고는 그걸 재밌다고 즐기는 거 아냐? 그건 가학 취미라구. 니들이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거구,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여기는 거야. 니들이야말로 뱀파이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도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겠어? 안 그런 척 하는 너희들도 다 뱀파이어다, 이렇게 세상에 대구 외치는 거잖아. 그거 꼬리 잘린 여우 심정인 거야.”

“아니, Y야, 난 가학적인 걸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욕망의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거야. 박찬욱은 그런 걸 영화로 표현해 보는 거고… 박쥐의 상현을 봐.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구.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수렁에 말려들어가면서도 거기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 그가 악을 행하는 건 다른 악을 막기 위해서야. 가령 뱀파이어가 되려는 신부를 죽인다든가, 태주를 학대한다고 생각하고 강우를 죽인다든가 하는 일이 그래. 그리고 그런 게 더 큰 악을, 파국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자 태주와 함께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하지. 물론 내 얘긴 그런 결말이 좋다거나 필연적이라는 건 아냐. 중요한 건 그렇게 벗어나려는 자세와 시도가 있다는 거지. 그게 일종의 희망 아닐까. 저주받은 갈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 같은 거…”

“구보야, 내가 보기엔 욕망을 적대시하는 네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된 거야. 구원은 무슨 구원이니? 그건 병주고 약주는 것일 뿐야. 옛날부터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작자들이 해 온 짓이라구. 욕망이 있으면 잘 충족시킬 길을 찾아야지, 억지로 억누르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그게 없어지니? 사실은 그렇게 해놓고 뒷구멍으로 지들만 즐기는 놈들이 따로 있잖아. 구보, 너 같이 정신 못 차리는 철학자나 괜히 구원이니 뭐니 하며 헛물켜는 종교인들이 거기 들러리를 서고 말이야.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 구겨지는 거야. 박찬욱도 철학과 출신이지? 그것도 가톨릭 계통 학교를 다녔잖아. 그래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

“어, Y야, 그거 인신공격이야. 그리고 근거 없는 얘기라구. 박찬욱이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철학과를 나와서 영화에 조금이라도 더 깊이가 있는 걸 거야. 박찬욱 영화는 생각보다 치밀하고 섬세하다구. 예를 들어 여기 이 장면도 봐. 장면 배치나 소도구 하나까지도 예사롭지 않아. 동양과 서양, 근대와 현대 따위를 섞어놓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구.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까지 경계적인 면을 찾아 표현하려 한 거야. 한 오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 자, 이걸 좀 볼래…”

“됐거든. 구보야, 나 바쁘거든. 그리고 그 영화엔 볼만한 남자 배우 하나 없이 다 구보 너처럼 칙칙한 애들만 나와서 관심 없거든. 그러니 너나 열심히 보셔.”

구보씨 무상급식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오세훈은 구보씨랑 나이가 비슷하다. 그럼 구보씨도 정신 연령이 다섯 살 인가? 뭐,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안철수도 구보씨랑 나이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구보씨가 안철수처럼 머리가 좋은 건 아니지 않은가. 동년배라는 건 그저 살아온 시절과 나날이 같고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기 쉬운 조건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보씨는 오세훈과 동질감을 느끼기 참 힘들다. 차라리 오세훈보다는 같은 오씨고 나이도 비슷한 오바마가 낫다.

구보씨도 때로 한 똥고집 하는 편이지만, 오세훈의 똥고집에는 욕이 절로 나온다. 지가 시장이면 모든 시정(市政)이 제 뜻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의 견해와 판단에 확신에 있다 해도 시의회의 결정을 거슬러서까지 끝내 자기 생각을 고집하려 하는 건 시정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식의 태도로는 온갖 쇼를 다 동원해봐야 그 다른 목적마저 이룰 수 없을 게 뻔하다.

구보씨는 물론 그 따위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구보씨가 서울시민이 아닌 관계로, 불참한다고 내세울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 일은 서울시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상급식 논란은 그 사안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어떻게 운영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방향과 직결되어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의 흐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도 무관하지 않다.

구보씨는 도시락 세대다. 알루미늄으로 된 사각형 도시락(그걸 당시엔 보통 ‘벤또’ 또는 ‘변또’라고 했다. 일본어 べんとう에서 온 말이다.)을 가방에 넣어 들고 다녔다. 겨울이면 그 도시락을 조개탄 난로 위에 겹겹이 얹어놓고 데워 먹었다. 반찬이라야 시큼한 김치와 콩나물, (역시 일본말로 ‘뎀뿌라’라고 하던) 어묵 조각 정도였고, 달걀부침이라도 하나 얹어져 있으면 진수성찬인 격이었다. 도시락 통에서 반찬 국물이 흘러 책이며 노트가 젖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도시락을 먹는 시간은 즐거웠다. 중고등학교 때는 대부분 점심시간 전 쉬는 시간에 까먹어 버리곤 했지만… 보통 두셋이 모여서 먹었는데 반찬이야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고, 때로 남의 도시락을 몰래 홀랑 먹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도시락에서 드러나는 빈부격차, 그런 게 없진 않았겠지만 심각하게 의식하지는 못했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못 살았으므로. 때로 도시락을 못 싸온 친구들이 있으면 나눠 먹었다. 국가적으로 쌀을 아끼느라 보리밥 혼식을 장려했고 그것 때문에 도시락 검사를 하기도 했던 시절 얘기다.

그러니 구보씨는 무상급식뿐 아니라 학교급식이라는 걸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세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무상급식이 못마땅한가. 하지만 오세훈말고는 다섯 살짜리 아이도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일을 받아들일 줄 안다. 그렇지 못해서야 무슨 성장과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오세훈이 보수의 아이콘을 자처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그렇게 발전을 거부하는 것이 보수라면 그 보수의 운명이 몰락이라는 건 보리밥 먹은 날 방귀가 잦다는 사실보다 더 명확한 일이다.

학교급식이 일반화하려면 경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건 맞다. 구보씨가 지나온 시절을 돌아봐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사회에 학교급식이 일반화한 지는 이미 오래다. 물론 그 전에도 단체 급식이 이루어진 곳은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군대다. 하지만 이것이 무상급식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군인들은 징병된 군인이건 자원한 군인이건 군인으로서 근무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많건 적건 보수를 받는다. 군대의 급식은 근무의 필요 때문에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공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학생들은 어떤가? 학생들이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 이들에게 공짜로 밥을 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게 문제다. 사실 이런 생각이 낡은 것이고, 극복해야 할 잔재다. 그럼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가? 학생들은 미래의 잠재적 일꾼이고 배운다는 건 일을 하기 위한 준비니까 그 준비 기간 동안 사회가 이들을 부양할 필요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게 맞는 얘길까? 아니다. 얼핏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도 아니다. 역시 낡은 생각이다.

이런 생각들에는 일하는 자만이 먹을 수 있다는 발상이 깔려 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거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적합하고 진보적인 때도 있었다. 시민계급과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노동의 중요성이 한껏 부각되던 시절, 봉건 귀족계급을 떨어내어야 할 기생충으로 취급하던 시절이 그랬다. 알다시피 초기자본주의는 노동의 가치를 앞세우며 성장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패권이 확립되면서 자본이 노동을 압도하는 가치의 근원으로 등장하게 된다. 돈이 돈을 낳는 사회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노동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닐까? 노동이야말로 경제적 가치의 근원이고 노동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체라는 점을 다시 부각시켜야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노동이 여전히 중요한 인간 활동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노동의 양태가 변하고 있고 기존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줄고 있는 까닭이다. 이미 진부해진 ‘노동의 종말’에 대한 논의를 다시 들먹일 필요도 없이,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일자리 부족이다. 자동화와 정보화 와중에서 줄어드는 일자리를 상쇄할 만큼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여기서 생겨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리고 사실, 모든 사람이 예전처럼 오래 일할 필요도 없다. 이건 크게 보면 좋은 일이다. 인간 사회를 꾸려가는 데 필요한 전체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자리와 노동시간을 제대로 나눈다면 누구나 조금만 일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법하다. 맑스가 꿈꾼 공산사회가 생각나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실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생산적인 자리는 소수가 차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잉여 취급을 당한다. 짐스럽거나 없어도 되는 존재로 전락할 위기에 놓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안정된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생겨나는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세대 간 갈등이다. 지속적 일자리가 늘기는커녕 줄고 있으니 새로 커 나오는 세대에게 돌아갈 몫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있는 자리는 기성세대가 차고 앉아 내놓질 않는다. 젊은 세대는 예전보다 더 심한 경쟁에 내몰리지만 그렇게 시달린 이들 가운데 극소수만이 상대적으로나마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이른바 대기업 일자리는 모두 합쳐 200만이 채 안 되고 공무원은 100만 정도다. 이 가운데 매년 새로 나오는 일자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구보씨는 요즘 TV에서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들을 볼 때도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는 듯해서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는 각광받는 소수와 그늘에 묻힌 다수의 대비가 전형적인 영역이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지는 않은가? 매번 다수의 탈락자를 만들어내는 이런 구조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조만간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혁명적 반발이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어휴, 답답해. 구보야, 그런 거랑 무상급식이 무슨 상관이니? 너도 오세훈처럼 갈피를 못잡고 옆으로 새는 거 아냐?”

“이크, Y야, 너 그럴 줄 알았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어수선하게 새롭지도 않은 얘기 늘어놓지 말고 그냥 핵심만 얘기하면 안 돼?”

“모든 일엔 다 준비가 필요한 거야. 핵심을 건드리기 위해선 충분한 전희가 필요하잖아.”

“너 그렇게 까불다 혼난다. 오세훈만 욕하지 말고 너도 나이 값 좀 해라.”

“쩝… 어쨌든 내 얘기의 요점은 이제 노동만을 내세워 삶의 경제적 가치를 정당화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거야.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지. 보편적 복지의 정신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거라구. 이 사회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그걸 권리로서 주장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는 마땅히 그걸 보장해 줘야 한다는 얘기야. 시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말이지. 그래야 1등 시민과 2등 시민, 생산적 인간과 잉여적 인간 따위의 차별이 생겨나고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구.”

“놀고먹는 사람한테두?”

“가능하면, 놀고먹는 사람한테두. 내가 아까 말했잖아. 일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구. 그리고 일을 안 하는 사람이 남들보다 더 풍요를 누리는 건 곤란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구나 당당하게 자기 삶을 살 수 있어야 해. 무엇보다 일에 대한 협소한 개념을 바꿔야 한다구. 자기가 좋아하고 보람을 느끼는 활동을 한다면 그게 다 일이잖아. 가령 노래를 부른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연극을 한다든지 하는 것 말이야. 이런 활동을 통해 꼭 많은 사람이 소비하는 결과를 생산하지 못한다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기본적인 물질적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거야.”

“구보야, 그거 너무 나간 거 아냐? 아직 우리 사회가 그 정도 기반은 없잖아?”

“뭐, 그렇긴 해. 그러니까 그런 걸 준비하면서 교육 영역에서부터 생각을 바꿔나가자는 거야. 아이들이 누구나 차별 없이 밥을 먹을 수 있게 한다는 건, 이 사회에 사는 사람은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기본 조건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체험하게 하는 거라구.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무상급식에 얼마가 들어가느냐 하는 식의 비용의 문제만이 아니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나가느냐 하는 철학의 문제라구. 오세훈은 이런 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거나 잘못된 거야. 전혀 미래 지향적이지 못한 거지. 그런 면에서 오세훈은 꼴보수가 맞아.”

“잠깐, 구보야. 넌 오세훈이랑 같이 도시락 세대, ‘변또’ 세대라며? 무상급식은커녕 아예 학교급식도 못 받아봤다고 했잖아. 그런 환경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너도 낡은 제도와 관념의 세례를 받았을 거 아냐. 그런데 넌 어쩌면 그렇게 시대를 앞서가는 척, 진보적인 척 할 수가 있어?”

“하하, 그게 바로 철학의 힘이라구. 믿거나 말거나 말이야.”

구보씨 여전히 소통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12]

문성원(부산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구보씨가 이런 말을 처음 들은 건 대학교 때였다. 항상 재기가 넘치던 한 선배로부터였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할까를 짚어보기 마련이다. 모든 걸 둘로 나누어본다는 건, 얼핏 생각하기에도 단순하고 마땅찮은 특성이다. 양분법이나 흑백논리처럼 좋지 못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나는 둘로 나누어 보는 쪽이 아니란 말이야’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즉시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나는 둘로 나누는 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람을 양분하여 보는 사고방식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사실 이건 배중률(排中律)이라는 논리적 법칙을 활용한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A이거나 A가 아닌 것이지 이도저도 아닌 그 중간은 없다는 게 배중률이다. 이 A의 자리에는 어떤 것이 들어가도 괜찮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쥐를 닮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고 해 보자. 이것 역시 참인 진술이 되지 않는가.

물론, 쥐를 닮은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 있는 한에서 그렇다. 또 모든 사람이 쥐를 닮은 사람은 아닌 한에서 그렇다. 사람은 모든 걸 세 가지로 나누어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 가지로 나누어 보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있고 또 모든 사람이 다 사물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면, 그 진술은 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는 말에는 그런 단서가 없어도 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이미 사람을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으로서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의 예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짓말쟁이 역설의 반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런 말은 자기 배반적이 된다. 말한 사람도 사람이고 그래서 거짓말쟁이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의 예가 됨으로써 적어도 반쯤은 자기 말을 확증하는 셈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사물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이 말은 거짓이 된다. 그런 경우엔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한 종류의 사람만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럴 리야 있겠는가?

사실, 이 말은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자신은 양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나머지 한 종류의 사례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런 다음, 자신이 양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양분법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서 듣는 사람에게 머쓱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게 이 말의 전략이고 재미다. 배중률을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처럼, 이 말이 숨겨 놓은 함정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실제로 우리는 둘로 나누어 보는 사고에 익숙하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내가 아닌 것도 내게 좋은 것과 내게 나쁜 것, 내게 유리할 것과 내게 불리한 것으로 나눠진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흐리멍덩한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도 집중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그렇지, 중요한 사안으로 떠오르면 도리 없이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가운데 한쪽에 속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사는 내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 두 가지로 나눠지기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 보는 사고방식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해 바로 나쁜 것이라고 대답하면 또 다시 함정에 걸려든다. 그런 대답 자체가 이미 모든 걸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보는 ‘나쁜’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좋은 경우도 있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모든 걸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양분하여 보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적응의 산물이다. 자연적 삶 속에서는 어떤 것이 나에게 위험한 것인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재빨리 판단하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렵다. 새로 나타난 놈이 먹이인지 천적인지 친구인지 적인지를 분간하지 못해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당해서 거꾸러지기 십상이다.

세상에 어디 나쁘기만 한 것이 있겠는가. 또 어디 좋기만 한 것이 있겠는가.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이 있고, 나쁜 면이 있으면 좋은 면도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여유 있는 상황에서나 부릴 수 있는 사치다. 야생의 삶에서는 빠른 판단과 빠른 대처가 생존을 좌우한다. 인류는 그 진화적 됨됨이가 형성되는 긴 시간을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야생이 아닌 문명 세계다. 여기서는 원초적인 이분법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랜 기간에 걸쳐 마련된 우리의 성향은 쉽게 지워지거나 통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번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은 보통 미워하거나 피하게 된다. 아, 그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고, 실은 저 사람에게도 괜찮은 면이 많아.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한번 구겨진 감정과 마음은 쉽게 펴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마음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 사람과 닮거나 유사한 특징을 지닌 사람들에게까지 연장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건, 어떤 면에선 유용한 반응 양태다. 솥뚜껑을 자라로 오인한 건 우스운 꼴일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그게 솥뚜껑이 아니라 자라였다면 어찌 하겠는가. 일단 경계하고 주의해서 열 번 오인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못해 한 번 물리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단, 이건 솥뚜껑처럼 숨어 있는 자라가 그렇게 드물지 않은 환경에서의 얘기다.

자라를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둥그런 물건만 봐도 깜짝깜짝 놀란다면, 그건 곤란한 일이다. 이런 증상이 심할 경우엔 교정이나 치료가 필요하다. 심각한 충격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은 그런 일이 마음에 남긴 상흔을, 이른바 트라우마를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 아픈 기억과 관련된 즉각적인 반응이 이유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놓인 상황과는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직접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나 감정을 조절하려고 애쓴다. 감정적으로는 아직 개운치 않은 상대에게도 짐짓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고 심정의 쏠림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평가하려고 자세를 다잡는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거의 본능적인 양분법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분법이 지배하는 현상을 쉽게 목도하곤 한다. 인터넷만 열어보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사안에는 대개 호오(好惡)의 입장이 선명한 댓글들이 달린다. 소위 악플들에는 노골적인 혐오나 증오의 감정들이 드러나고, 내편과 상대편이 전쟁터에서처럼 갈린다.

이것은 진화의 과정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잔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일찍이 초기 포유류에서 물려받은 변연계(邊緣系)의 감정 회로를 신피질(新皮質)의 이성적 계산이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용선, TV토론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구보씨는 어제 TV에서 본 토론을 생각해 본다. 으레 그렇듯 그 토론에도 말 잘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고 대부분이 대학 교수다. 대뇌 전두엽의 잘 발달된 신피질을 훌륭히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의견이 선명하게 갈린다. 그래서 세상에는 다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상하게 양분법을 사용하는 사람과 투박하게 양분법을 사용하는 사람. 도대체 왜일까?

“구보야,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물어볼 만한 걸 물어보는 사람과 물어볼 만하지 않은 걸 물어보는 사람. 너 같은 철학자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안 물어봐도 잘 알겠지?”

드디어 Y가 이죽거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다. 손톱으로 할퀴는 여자와 말로 할퀴는 여자. 아니, 한 종류가 더 있다. 손톱으로도 할퀴고 말로도 할퀴는 여자. Y는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 알고 있을까?

“하지만 Y야, 그런 걸 궁금해 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야. 또 철학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난 나름대로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데, 마치 쓸데없는 걸 물어본다는 식으로 그렇게 무시하려 들면 곤란하다구.”

“엥, 진지하게 묻는 거라구? 설마… 나도 교수나 언론인 같은 지식인들을 많이 만나 봐서 알지만, 그네들이라고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건 전혀 아니거든.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맑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길 듣고 있다 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구보 너처럼 스스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 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하지만 봐.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쉽게 말을 바꾸고 논리를 뒤집어 가며 자신의 이익을 쫓아갔는지를.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쫓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쫓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어, Y야, 너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무슨 일 있었으면 좋겠어?”

“네 말 하는 폼새가 좀 이상하잖아. 지식인 나부랭이라니…”

“그럼, 아니야?”

“Y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대화하자는 게 아니라 싸우자는 거라구. 감정이 실려 있는 말이잖아. 그래가지구는 소통이 안 돼. 기껏해야 자기만족적인 화풀이인 거지. 거기서 어떤 생산적인 결과가 나오겠어?”

“에그, 또 소통이야? 구보야, 너야말로 참 이상하다. 소통을 내세우는 게 무슨 만병통친 줄 아니? 고상하게 웃는 낯으로 얘기해도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침묵하거나 화내는 게 소통의 효과적인 방편일 때도 있어.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정해진 틀에 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구보씨 계속 소통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자연은 정녕 불인(不仁)한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의 글귀를 되새겨보게 하는 요즘이다. 하기야 인(仁)이건 불인(不仁)이건, 인간사의 문제고 인간의 생각이지, 자연이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더라도 우리는 알아서 자연을 섬겨야 할 처지다. 그 품에 깃들여 사는 건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방적 소통관계라 할 만하다. 어쩌면 소통이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소통이란 서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주체가 있을 때라야 성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그런 의도적 주체로 여길 수 없다면, 자연과의 소통이란 소통이라는 말의 비유적 확장에 불과할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추구(芻狗)로도 여기지 않는다. 지푸라기 개 운운하는 것 역시 우리를 보살피지 않는 자연에 대한 섭섭함이 배인 인간의 반응일 뿐이다. 물론 이런 반응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존 그레이(John Gray)라는 유럽의 학자는 Straw Dogs라는 책을 지어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했다(이 책은『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지푸라기 개, 추구(芻狗)의 함의는 무엇보다 이렇게 인간의 겸손함을 깨우치는 데 있는 것 같다.

(일본 대지진의 참상)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연과의 소통을 자연을 매개로 한 인간의 소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법하다. 자연을 통한 인간들 사이의 소통이거나 인간 자신과의 소통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자연이 인간에 대해 무관심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자연을 염두에 두고 삶의 태도를 다져야 한다. 우리의 하찮음을 자각한 위에서 문명의 위세를 뽐내더라도 뽐내야 하지 않겠는가. 지진은 막을 길이 없더라도, 지진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건물도 짓고 산업시설도 만들어야 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위험이 발생했다면, 거기에 맞추어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런 대책마저 뛰어넘는 재앙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거야 할 수 없는 일이다. 페름기에 있었다는 엄청난 기후변화나 백악기말에 있었다는 유성 충돌과 같은 사태가 닥쳐온다면, 현재의 인간 능력으로서는 속수무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태를 지레 우려하여 미리 손을 묶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을 넘어서는 짓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다시 짚어볼 만한 것은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는 식의 발상이 갖는 한계다. 맑스가 젊은 시절부터 내세웠던 이 명제는, 윤구병 선생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만드는 문명’의 소산이다. 워낙 만든다는 것은 일단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활동이기에, 이런 모델에 따르는 사고방식은 자칫 폐쇄성과 전체성을 띠기 쉽다.

‘자연의 인간화’가 만듦의 능동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자연화’는 자연에 의한 인간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이고 열린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연이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교호작용은 결국 인간이 주도권을 쥔 활동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한 한, ‘인간의 자연화’는 인간이 환경을 매개로 스스로의 본성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크게 보면, 인간이 세계를 만들고 그렇게 만든 세계를 스스로 의식한다는 서양 근대 문명의 틀, 이른바 자기제작과 자기의식의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구보씨는 아직도 맑스의 『경제학 철학수고』며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을 처음 읽었을 때의 흥분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나이에 그 내용은 충격이고 매혹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제 막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맑스의 테제들은 우리가 이르지 못한 합리적 사회의 이상(理想)과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구보씨가 이제 와서 보니 맑스가 틀렸다거나 과거 맑스를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사상이 있는 법이며, 그런 점에서 맑스의 사상은 나름의 역할을 한 셈이다. 어떠한 사상도 자기 시대를 넘어설 수 없다면, 맑스의 사상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만드는 문명’이 한창이지만,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은 이미 진부해졌다. 현대 철학의 주요한 흐름이 이 만드는 문명의 자기폐쇄성을 공격해온 지도 오래다. 목적을 설정하고 설계도를 만들고 수단을 마련하고 공정을 시작하여 제품을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큰 성과를 낳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 모델을 일반화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면에서 자연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 따지고 보면, 사회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그러나 제작 또는 생산이 모델로 자리 잡은 상황에선,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이 모델에 따라 해석되고 처리된다.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나 이데올로기, 지식도 생산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재료에 생산수단을 가해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구체적 과정은 각 영역마다 다르겠지만, 그 기본 형식은 비슷하다. 사람도 교육을 통해, 훈련을 통해, 일정한 형태로 생산되는 생산물로 취급된다.

물론 모두가 균일하지는 않다. 공산품에도 여러 규격과 품질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여러 종류와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때로 불량품이 나오는 것처럼 일탈적인 사람들도 나타난다. 그런 불량품을 처리하는 곳도 있다. 감옥이나 병원 따위가 그런 곳이다. 여기에도 나름의 생산과정이 작동한다.

이런 식의 ‘만드는 문명’에서는 역사도 인간의 생산물로 취급된다. 그 생산을 계획하는 것이 꼭 인간의 개별적 의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개개의 인간이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손’이나 ‘일반의지’일 수도 있고, ‘시대정신’이나 ‘이념’일 수도 있으며, ‘역사법칙’일 수도 있다. 어떻든 이 생산의 틀이 작동하는 것은 인간 집단에 의해서다. 그러니, 이 구조를 잘 파악만 한다면, 결과를 예상할 수도 있고 그 과정을 앞당길 수도 있다. 역사가 정말 일종의 만들기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사실, 근대 이후의 세계에는 이런 모델이 실제로 적용되어 온 셈이다. ‘만드는 문명’은 ‘기르는 문명’을 압도하고 잡아먹었다. 이제는 농작물도 가축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이 생산 과정에 종속되어, 그 수단의 일부로 취급받는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이런 모델을 잘 따르는 모범적인 사례다. 만드는 공정, 그것도 급속한 만들기의 훈련 속에서 만들어진 CEO 대통령을 내세워, 만들기로 온 땅과 물을 덮는 데 여념이 없다. 소통은 이런 만들기의 효율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이 놓이는 곳에는 언제나 그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그 생산을 조건 짓는 바깥이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바깥을 차단하거나 무시하고 싶어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생산의 모델이 설정한 폐쇄성은 결국 깨지기 마련이다.

현대 철학은 이런 생산의 모델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모든 폐쇄적 체계는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애를 써왔다. 물론, 그 실질적 동기는 현실에서 드러난 생산 모델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환경 문제가 그렇고, 공장식 사회주의의 실패가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환경 문제를 단순히 관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잘못일 것이다. 그런 생각은 결국 자연을 우리의 통제 안에 놓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환경 문제가 생산의 단위를 좁게 설정하고 그 생산과정이 환경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못한 탓에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럴 경우, 이제는 그 단위의 범위를 넓혀 하나의 공장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더 나아가 하나의 지구에 이르기까지 생산이 작용하는 영역을 확장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맞는 생각일까?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지반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다시 고려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네 말은 우리가 ‘기르는 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야?”

Y가 못 참고 마침내 끼어든다. 그만하면 오래 참았다. 구보씨는 이런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지 않는가.

“아니, 꼭 그런 뜻은 아니야. 다만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지. 사실 그건 기르는 문명의 장점이기도 해. 사람들이 곡식을 재배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도, 그 곡식을 내가 만든 것이라고 여기진 않았잖아. 자연의 생장에 조금 힘을 보태고 이용할 뿐이라고, 그래서 결국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자연이라고 보았거든. 생각해 보면, 그게 옳은 태도 아닐까?”

“하지만, 구보야, 먹여 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는 게 자연이었지.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굶어죽고 휩쓸려 죽고 했던 것 아냐? 거기에 비하면 지금 형편이 훨씬 낫다는 건 분명해. 지진과 같은 재앙이야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거구. 아니, 어떻게든 지진 피해를 줄이고 있다는 면에서도 오늘이 낫잖아.”

“근데, Y야, 당장 원자력 발전소 문제를 생각해 봐. 나는 이게 단순한 관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는 거야. 사람들은 흔히 원전 사고가 관리나 설비의 문제라고들 하지. 이를테면 미국의 드리마일 원전은 사고로 핵연료봉이 녹아내렸는데도 격납장치 덕택에 방사능 피해가 없었지만, 소련의 체르노빌은 그렇지 못했다는 거야. 그러나 지금 일본의 상황을 봐. 우리가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거든. 그러니까 어떤 장치도 관리만 잘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위험하다는 거지. 이건 결국 철학의 문제고, 현실적으로는, 원전과 같은 생산물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라구.”

“나도 원전은 너 못지않게 반대해. 그런데, 그건 위험한 면이 있는 줄 알면서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그것도 일부 사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건설하니까 반대하는 거야. 정말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원자력 발전소건 핵융합 발전소건 그런 걸 만드는 게 왜 문제가 되겠어? 근데, 구보 네 얘기는 좀 다른 것 같아. 그건 마치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자연을 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처럼 들려.”

“섬긴다구? 글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 또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라는 거야.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의존해 산다는 점을 잊지 말자는 거지. 말하자면, 자연과 우리 문명의 비대칭성을, 자연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거야. 그게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연에 대하여 우리가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는 소통방식이라는 얘기지.”

“자연의 우위? 겸손? 그런 게 과연 문제를 해결해 줄까? 그거 사실은 일종의 도피거나 무책임한 태도 아냐? 차라리 더 안전한 발전장치를 개발하려고 노력하거나 지진을 예측할 수 있는 연구에 진력하는 게 현실적이고 제대로 된 태도일 것 같은데… 구보야, 미안한 말이지만, 내겐 여전히 너네들 철학자 얘기가 좀 공허하게 들려. 이것도 소통 부족이나 소통의 잘못 탓이니?”

“…..”

“엥, 구보야, 또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일단은 내 얘기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지. 그게 네가 곧잘 말하는 대로 타자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가 아니겠어? ㅎㅎ…”

구보씨 소통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비가 온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세상이 안개 속처럼 뿌옇다. 이제 봄이 오려는가. 촉촉하게 땅이 젖고 마음도 따라 젖는다. 구보씨는 비를 맞으며 잠시 걸어본다. 참 좋구나, 혼잣말을 되뇌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구보씨의 얼굴에 작은 빗방울들이 싱그럽게 와 닿는다.

 

비오는 걸 유난히 좋아하던 친구가 생각난다. 비만 오면 마냥 나가 뛰어다녔다. 장가가서 아이들을 낳은 뒤론 애들과 함께 빗속을 누볐다. 아이들도 아빠를 닮아 비를 좋아했다. 어지간한 날씨면 웃통을 벗어던지고 아이들과 빗속에서 물총싸움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강사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 처가 식구들을 따라 캐다나로 이민을 가 버렸다. 하긴, 그 친구에겐 그곳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비가 왜 그렇게 좋은데?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느닷없는 질문에 그 친구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듯이 닦다 말고 구보씨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냥. 비 맞으면 좋잖아?

구보씨가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 그 친구의 표정 때문이었을 거다. 거기에는 더 이상의 추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이야 다르다지만 예전의 구보씨에겐 비 맞는 것도 비 오는 것도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질척질척한 골목길과 스산하고 축축한 날씨가 뭐 그리 좋단 말인가. 구보씨는 빗속으로 뛰어나가려는 충동을 느껴본 적도, 그러한 충동을 느끼는 심정을 진정 이해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구보씨는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수긍했던 셈이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수긍을 한다? 언뜻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적지 않은 법이다.

물론 이유를 따져 보지 못할 까닭은 없다. 이 경우엔 아마 진정성의 전달이 큰 역할을 했을 거다. 구보씨는 비 맞기를 좋아하는 심정을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그 친구가 정말 비 맞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앎도 일종의 이해가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하면서 수긍한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대부분의 강제에도 이해가 수반된다고 해야 한다. 가령, 총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는 강도를 생각해 보라. 이런 상황에서 지갑을 털리는 사람은 강도짓을 하는 이가 내게 총을 쏠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 처지를 받아들이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이 상황을 수긍한다고 할 수 있는가?

강도짓이 성립하기 위해서도 이해는 필요하다. 상대방이 강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강도 노릇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강도를 당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강도짓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게다가 그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수긍하는 경우도 있다.

“구보야, 네 말은 앞뒤가 안 맞아. 강도의 경우에도 진정성이 있을 수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강도짓을 수긍할 수 있는 건 아니라구. 근데 넌 좀 전에 네 친구에겐 진정성이 있어서 수긍할 수 있다고 했거든.”

Y였다면, 이런 식으로 끼어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Y는 오늘 나타나지 않는다. 곁에 없어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니, 그녀는 정녕 무서운 존재다 싶다.

그러나 구보씨가 보기에 Y와 같은 생각은 다분히 직선적이다. 진정성이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진정성이라는 말에는, 뭐랄까, 스스로가 어떤 사태의 참된 원천이 된다는 뜻, 그런 의미에서의 진짜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강도의 진정성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어색하게 들린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강도짓의 참된 원천이 된다는 건 어째 좀 이상하지 않은가. 강도짓을 하는 사람은 보통 이러저러한 외적 이유 때문에 강도짓을 한다. 정말 그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의 본래 모습에서 우러나 강도짓을 하는 것이라면 그땐 강도의 진정성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일까?

구보씨가 친구의 표정에서 받았던 것은, 아, 이건 진짜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건 어떻게든 전달되는 법이다. 무릇 소통의 기본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얼마 전에 구보씨는 소통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런 주제가 요즘 자주 거론되는 건 ‘소통 부재’라는 지적이 잔소리가 되어버리다시피 한 작금의 현실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학회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을 질타하는 소리가 높았다.

정치나 정권의 차원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이 어렵다는 불평은 이 사회에 차고 넘친다. 아마 말이 부족한 탓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제각기 자기 말만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면서 모두들 듣는 미덕을 상찬(賞讚)하고 들어줄 귀를 요구하기만 한다.

각자의 처지와 됨됨이가 다른 만큼, 거기에서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소리들이 공명(共鳴)에 이르지 못하고 불협(不協)을 깔아뭉개는 불도저 소리로 커가거나 체념의 침묵으로 잦아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모든 일이 진정성이 없거나 부족해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진정성이라는 게 결국은 공명을 일으키기 마련인 어떤 내면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수많은 미사여구보다 단 한 마디의 진정성 어린 외침이 더 큰 울림을 낳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런 진정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공명하기 위해서는 같은 구조나 얼개가 필요하다.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고 현악기의 줄이 서로 공명하듯이 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진정성은 여럿이 공유하는 그 무엇에 바탕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나만의 것이란 사실 진정한 것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독특하고 다른 것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공통의 지반 위에 서 있을 때만이 아닐까. 그렇다면 구보씨가 친구에게서 느꼈던 그 진정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라는 그 막연한 것이었을까?

―빠빵~

갑자기 뒤에서 크락션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구보씨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얘, 구보야! 웬일이니? 이렇게 비를 맞고… 어서 타.”

Y다. 차창 밖으로 내민 얼굴에서 터져 나오는 쨍하는 목소리. 이번엔 진짜다.
“어머, 이 머리 좀 봐. 다 젖었네. 또 웬 청승이니?”

“Y야, 넌 꼭 내가 무슨 중요한 생각을 할라치면 나타나서 훼방을 놓더라.”

“중요한 생각? 그게 뭔데?”

“지금 막 공통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어. 사람들이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공통의 그 무엇…”

“공통적인 것? 중요한 것?”

“응,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

“뭘 말하는 거야, 돈?”

“뭐야?”

“아니야? 그럼, 사랑?”

“이그,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운전이나 잘 해.”

“걱정 말고 그 손이나 좀 내려. 그렇게 팔을 창에 괴고 있으면 그쪽 백밀러가 안 보인다구. 그리구 소통에서 중요한 거라면서 돈이나 사랑을 생각하지 않으면 대체 뭘 생각한다는 거야? 니들은 그래서 안 된다니까. 정작 중요한 건 빼놓고 고상한 척 하면 누가 알아준대? 그래서 소통에 실패하는 거라구.”

“내가 말하는 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공통적인 걸 얘기하는 거야. 설사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수긍하고 용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

“글쎄, 누가 뭐래? 돈이나 사랑이 그런 거야. 서로 다른 물건으로 바꿀 수 있는 공통적인 게 돈이잖아. 서로 이해는 못해도 거래는 되거든. 사랑도 그래. 서로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순 있거든. 그리고 사랑만큼 소통에 핵심적인 게 어딨어?”

“그렇지만…”

“거 봐. 할 말 없지? 니들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 그래야 소통이 된다구.”

“잠깐, Y야, 정말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담 그건 왜 그렇지?”

“쯔쯧, 구보야, 전에 너도 나한테 얘기한 적 있잖아.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끝 장면. 젊은 브래드 피트가 매력적으로 나왔던 그 영화 말이야. 말썽을 피우던 둘째 아들이 죽고 나서 아버지인 목사가 설교 때 말하던 거. 우리는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우리가 잘 모르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우리를 이어주고 엮어주는 것…”

구보씨는 ‘그래. Y, 너와 나처럼 말이지?’라고 습관처럼 대꾸하려다가, 멋쩍게 그냥 웃었다.

하긴, Y말이 맞는지도 몰라. 돈과 사랑이라…소통과 공통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려면 이걸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 돈이나 사랑이 소통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 어떤 돈과 어떤 사랑이 소통을 가로막기도 하는지…그건 그렇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친구와 나와의 관계는 뭐였지?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었을까?

구보씨는 다시 차창에 손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창 밖에는 아직도 뿌연 안개비가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문성원(부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