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소통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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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세상이 안개 속처럼 뿌옇다. 이제 봄이 오려는가. 촉촉하게 땅이 젖고 마음도 따라 젖는다. 구보씨는 비를 맞으며 잠시 걸어본다. 참 좋구나, 혼잣말을 되뇌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구보씨의 얼굴에 작은 빗방울들이 싱그럽게 와 닿는다.

 

비오는 걸 유난히 좋아하던 친구가 생각난다. 비만 오면 마냥 나가 뛰어다녔다. 장가가서 아이들을 낳은 뒤론 애들과 함께 빗속을 누볐다. 아이들도 아빠를 닮아 비를 좋아했다. 어지간한 날씨면 웃통을 벗어던지고 아이들과 빗속에서 물총싸움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강사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 처가 식구들을 따라 캐다나로 이민을 가 버렸다. 하긴, 그 친구에겐 그곳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비가 왜 그렇게 좋은데?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느닷없는 질문에 그 친구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듯이 닦다 말고 구보씨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냥. 비 맞으면 좋잖아?

구보씨가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 그 친구의 표정 때문이었을 거다. 거기에는 더 이상의 추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이야 다르다지만 예전의 구보씨에겐 비 맞는 것도 비 오는 것도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질척질척한 골목길과 스산하고 축축한 날씨가 뭐 그리 좋단 말인가. 구보씨는 빗속으로 뛰어나가려는 충동을 느껴본 적도, 그러한 충동을 느끼는 심정을 진정 이해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구보씨는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수긍했던 셈이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수긍을 한다? 언뜻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적지 않은 법이다.

물론 이유를 따져 보지 못할 까닭은 없다. 이 경우엔 아마 진정성의 전달이 큰 역할을 했을 거다. 구보씨는 비 맞기를 좋아하는 심정을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그 친구가 정말 비 맞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앎도 일종의 이해가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하면서 수긍한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대부분의 강제에도 이해가 수반된다고 해야 한다. 가령, 총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는 강도를 생각해 보라. 이런 상황에서 지갑을 털리는 사람은 강도짓을 하는 이가 내게 총을 쏠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 처지를 받아들이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이 상황을 수긍한다고 할 수 있는가?

강도짓이 성립하기 위해서도 이해는 필요하다. 상대방이 강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강도 노릇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강도를 당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강도짓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게다가 그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수긍하는 경우도 있다.

“구보야, 네 말은 앞뒤가 안 맞아. 강도의 경우에도 진정성이 있을 수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강도짓을 수긍할 수 있는 건 아니라구. 근데 넌 좀 전에 네 친구에겐 진정성이 있어서 수긍할 수 있다고 했거든.”

Y였다면, 이런 식으로 끼어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Y는 오늘 나타나지 않는다. 곁에 없어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니, 그녀는 정녕 무서운 존재다 싶다.

그러나 구보씨가 보기에 Y와 같은 생각은 다분히 직선적이다. 진정성이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진정성이라는 말에는, 뭐랄까, 스스로가 어떤 사태의 참된 원천이 된다는 뜻, 그런 의미에서의 진짜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강도의 진정성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어색하게 들린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강도짓의 참된 원천이 된다는 건 어째 좀 이상하지 않은가. 강도짓을 하는 사람은 보통 이러저러한 외적 이유 때문에 강도짓을 한다. 정말 그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의 본래 모습에서 우러나 강도짓을 하는 것이라면 그땐 강도의 진정성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일까?

구보씨가 친구의 표정에서 받았던 것은, 아, 이건 진짜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건 어떻게든 전달되는 법이다. 무릇 소통의 기본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얼마 전에 구보씨는 소통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런 주제가 요즘 자주 거론되는 건 ‘소통 부재’라는 지적이 잔소리가 되어버리다시피 한 작금의 현실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학회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을 질타하는 소리가 높았다.

정치나 정권의 차원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이 어렵다는 불평은 이 사회에 차고 넘친다. 아마 말이 부족한 탓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제각기 자기 말만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면서 모두들 듣는 미덕을 상찬(賞讚)하고 들어줄 귀를 요구하기만 한다.

각자의 처지와 됨됨이가 다른 만큼, 거기에서 서로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소리들이 공명(共鳴)에 이르지 못하고 불협(不協)을 깔아뭉개는 불도저 소리로 커가거나 체념의 침묵으로 잦아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모든 일이 진정성이 없거나 부족해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진정성이라는 게 결국은 공명을 일으키기 마련인 어떤 내면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수많은 미사여구보다 단 한 마디의 진정성 어린 외침이 더 큰 울림을 낳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런 진정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공명하기 위해서는 같은 구조나 얼개가 필요하다.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고 현악기의 줄이 서로 공명하듯이 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진정성은 여럿이 공유하는 그 무엇에 바탕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나만의 것이란 사실 진정한 것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독특하고 다른 것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공통의 지반 위에 서 있을 때만이 아닐까. 그렇다면 구보씨가 친구에게서 느꼈던 그 진정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라는 그 막연한 것이었을까?

―빠빵~

갑자기 뒤에서 크락션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구보씨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얘, 구보야! 웬일이니? 이렇게 비를 맞고… 어서 타.”

Y다. 차창 밖으로 내민 얼굴에서 터져 나오는 쨍하는 목소리. 이번엔 진짜다.
“어머, 이 머리 좀 봐. 다 젖었네. 또 웬 청승이니?”

“Y야, 넌 꼭 내가 무슨 중요한 생각을 할라치면 나타나서 훼방을 놓더라.”

“중요한 생각? 그게 뭔데?”

“지금 막 공통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어. 사람들이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공통의 그 무엇…”

“공통적인 것? 중요한 것?”

“응,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

“뭘 말하는 거야, 돈?”

“뭐야?”

“아니야? 그럼, 사랑?”

“이그,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운전이나 잘 해.”

“걱정 말고 그 손이나 좀 내려. 그렇게 팔을 창에 괴고 있으면 그쪽 백밀러가 안 보인다구. 그리구 소통에서 중요한 거라면서 돈이나 사랑을 생각하지 않으면 대체 뭘 생각한다는 거야? 니들은 그래서 안 된다니까. 정작 중요한 건 빼놓고 고상한 척 하면 누가 알아준대? 그래서 소통에 실패하는 거라구.”

“내가 말하는 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공통적인 걸 얘기하는 거야. 설사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수긍하고 용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

“글쎄, 누가 뭐래? 돈이나 사랑이 그런 거야. 서로 다른 물건으로 바꿀 수 있는 공통적인 게 돈이잖아. 서로 이해는 못해도 거래는 되거든. 사랑도 그래. 서로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순 있거든. 그리고 사랑만큼 소통에 핵심적인 게 어딨어?”

“그렇지만…”

“거 봐. 할 말 없지? 니들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 그래야 소통이 된다구.”

“잠깐, Y야, 정말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담 그건 왜 그렇지?”

“쯔쯧, 구보야, 전에 너도 나한테 얘기한 적 있잖아.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끝 장면. 젊은 브래드 피트가 매력적으로 나왔던 그 영화 말이야. 말썽을 피우던 둘째 아들이 죽고 나서 아버지인 목사가 설교 때 말하던 거. 우리는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우리가 잘 모르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우리를 이어주고 엮어주는 것…”

구보씨는 ‘그래. Y, 너와 나처럼 말이지?’라고 습관처럼 대꾸하려다가, 멋쩍게 그냥 웃었다.

하긴, Y말이 맞는지도 몰라. 돈과 사랑이라…소통과 공통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려면 이걸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 돈이나 사랑이 소통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 어떤 돈과 어떤 사랑이 소통을 가로막기도 하는지…그건 그렇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친구와 나와의 관계는 뭐였지?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었을까?

구보씨는 다시 차창에 손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창 밖에는 아직도 뿌연 안개비가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문성원(부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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