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빌다’라는 뜻의 한자어, 빌 기(祈)에 빌 도(禱)로 이루어진 말, ‘기도’입니다. 종교의 유무에 따라 어쩌면 자칫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단어일 텐데요, 그런데 이문재 시인의 시 <오래된 기도>에서는 조금 다른 ‘기도’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것들을 보면, “어떻게 저런 게 기도가 될 수 있지?” 라고 반문이 드는 것들이 있죠. “음식을 오래 씹는 게 기도하는 거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이 시에서 ‘기도’라고 말하고 있는 행동들을 가만히 살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다름아닌 ‘잠시 멈춤의 상태’, 곧 일상의 빠른 흐름에서 순간의 시간, 일부의 시간을 떼어내는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노을이 지는 때라면 곧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찾아왔음을 의미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로 오늘을 보내버리기 전에, 잠시 멈춰 노을을 한 번 바라본다면, 그 짧은 순간만큼은 잠시 하루를 돌아 볼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음식을 오래 씹는 것 역시, 별 의미 없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한 번쯤 천천히 음식을 오래 씹는다면, 아무래도 그 순간만큼은 잠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갖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어떤 ‘멈춤의 상태’, 마구 흘러가 버리는 시간에 잠시 ‘매듭’을 지어보는 것. 시인은 그러한 시간이나 순간들을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또한 관심 없이 지나가버릴 수 있는 사소한 존재, 생명, 주변의 자연에 한 번 더 따뜻한 눈길을 주는 것 역시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버스에서 혹은 길에서, 아이들에게 눈 마주쳐 준 적 있으신가요? 피어있는 꽃을 잠시 바라보셨나요? 그럼 여러분도 기도를 하신 겁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기도라는 것이 과연 어떤 거창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며,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 주변에 숨쉬고 있었던 기도의 순간들. 그래서 시인은 이 기도를 ‘오래된 기도’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한 순간에도 이미 이 오래된 기도를 해오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문학과지성사, 2013)>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오는데요, “최고의 행복은 아름다운 것 곁에 사색에 잠겨 머무르는 데서 생겨난다. … 완전히 자기 안에 고요히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 이것이야 말로 인간을 신의 곁으로 데려간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사색적 헌신’은 이문재 시인의 시 속에 담긴 여러 모양의 ‘오래된 기도’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름다운 것 곁에 잠시 머무르는 것, 사색에 잠기는 것이 바로 우리가 누려야 할 최고의 행복이며, 우리들에게 필요한 오래된 기도인 것이죠.
어떻게 한 주가 흘렀는지 모르게 벌써 주말을 맞이하고, 어느새 4월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끼는 이유, 모든 것이 점점 가속도가 붙은 듯 흘러가버리는 이유. 한병철 교수의 표현을 빌면, 흘러가는 시간을 묶어주는 ‘사색적 헌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이 우리 삶에 기도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외출도 자제하게 되고, 어쩔 수 없는 멈춤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죠. 한 편으로는 그 동안 우리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 곧 친구와 만나 나누는 소소한 일상의 대화나, 반가운 얼굴들과의 악수, 계절마다 걸었던 벚꽃길 등..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일상들이 이제 와 보니 매우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멈춤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여전히 바쁜 하루, 분별없이 흘려 보내는 오늘을 살고 계신가요?
내일은요 잠시 가만히 눈을 감아 보시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보시고, 또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도 불러보고, 노을이 질 때 잠시 걸음을 멈춰 보고, 갓난아기와 눈도 맞춰보고, 차를 타지 않고 한 번 걸어도 보고,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바라 보는… ‘오래된 기도’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와 함께 들어볼 노래 소개해드릴게요.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ost 중 <나의 피아노> 라는 곡, 이병우 기타리스트의 연주로 들으면서 잠시 머무르는 것, 사색적 헌신의 시간을 한 번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코로나19로 여전히 많은 것들이 연기되고 멈춰 있지만, 가까이에 다가오는 봄기운마저 막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 산수유의 노란 꽃망울이 올라왔고, 햇빛 비치는 곳에 서 있으면 따스함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봄’이 성큼 눈앞에 와 있네요. 아직 바람은 조금 차갑긴 하지만 말입니다.
봄을 기대하면서, 오늘 함께 읽을 시는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게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 쳐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인생을 이야기 하거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을 비유적으로 이야기 할 때,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으로 비유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도 인생을 항해로 표현했죠.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도 생각이 납니다. 또 어떤 중요한 결단을 내린 후에 “우리 이제 한 배를 탄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 비유가 이 시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인생은 항해다’라는 표현을 하진 않지만,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어디 한두 번이랴”라고 하는 표현에서 그 비유가 드러나고 있죠.
우리가 살아가는 일속에는 기쁜 일도 많이 있지만,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죠. 생각해보면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한 두 번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 파도에 흔들리면서 그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나를 놓아버리지 말 것을 시인은 당부합니다. 오히려 그런 날은 ‘닻’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죠.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닻을 내린다는 건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요, 성난 파도가 일고 바람이 마구 부는 상황에서 배를 그냥 놔둔 채로 계속 항해를 한다면, 아무리 큰 배라고 하더라도 여기저기로 휩쓸려 버릴 것이고,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떠내려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다 떠밀린 후에 그제서야 다시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을 찾으려면 여간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시인은, 내가 이리저리 흔들릴 것만 같은 그런 날에는 조용히 닻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 ‘닻’의 의미에 대해서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배를 고정시켜주는 닻을 살펴보면 무게는 상당하지만 크기가 꽤 작습니다. 배보다 큰 닻 본 적 있으세요? 평소에는 배에 싣고 다녀야 하니까 배의 몸체보다는 훨씬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훨씬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몇 십 배의 큰 배를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닻이죠. ‘배’가 ‘나 자신’을 의미한다면, ‘닻’은 ‘작지만 나를 지탱해줄 힘이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배마다 닻이 하나씩 있듯이,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줄 수 있는 이 ‘닻’과 같은 작지만 큰 무언가가 우리 모두에게 하나씩은 있다는 의미로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닻’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친구와의 전화 한 통, 부모님의 격려의 말 한마디,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시 한 편, 맛있는 커피 한 잔 등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이 ‘닻’이 되는지 한 번 생각 해보세요)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뜻하지 않게 만나는 파도와 같은 일들, 바람과 같은 일들이 없을 수는 없겠죠. 그럴 때 그 파도와 바람에 흔들려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닻을 내리시고 그 일들을 잠시 묻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파도가 지나고 바람이 멎었을 때, 그때 다시 내 방향대로 나아가면 되는 거예요. 분노가 치미는 일이나,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을 때, 괜히 애꿎은 다른 사람에게 그 화를 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본의 아니게 괜한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그 순간 잠시 한 숨 쉬어 가면서 내 마음 속에 닻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만 바보같이 참으라는 얘기냐!”라고 말이죠. 똑같이 짜증나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나에게 상처를 줄 텐데, 나만 닻을 내리고 참으라는 거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럴 때 시인은 마지막 연으로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시인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상처받고 또 상처 줄 수 밖에 없는 삶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습니다.
겨울은 오게 되어있는데, 춥다고 아무리 불평해봤자 그만큼 시간이 빨리 흐르지도 않아요. 더 춥게 느껴질 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겨울’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요, 시인은 우리의 삶에 있을 그 아픔과 상처의 시간들을 덤덤하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는데, 그 시간 동안 나는 파도에 휩쓸려 더 긴 시간을 돌아 올 것인가, 닻을 내리고 내 방향을 지키며 그 시간을 버틸 것인가. 선택해야 하겠죠.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나요? 여러분 배의 닻을 내리고 그 시간들을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이제 곧 봄의 시간이 여러분 앞에 다가올 겁니다.
오늘 이 시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로, 홍이삭의 ‘봄아’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홍이삭이 제 24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던 곡인데요, 따뜻한 목소리와 가사가 봄기운을 느끼게 해 주는 곡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과 잘 어울리는 것 같죠? 여러분, 조금만 더 힘 내시기 바랍니다! 꽃 필 차례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습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요즘 서로 거리를 두어야만 하고, 불필요한 외출도 삼가야만 하는 유례없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예민하고 불안하죠. 매일 TV와 신문을 뒤덮는 뉴스들에 촉각을 세우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무래도 ‘두려움’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두려움에 정복당하지 않고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될 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바로 박노해 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시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프로필을 찾아보시면 시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데요, 박노해 시인은 군사정권 때에 반국가단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998년 김대중대통령의 특별사면을 통해서 석방된 시인입니다. 그 이후 시인은 시집 출간을 뒤로하고 약 12년 동안 아프리카, 중동 등 세계의 빈곤 지역과 분쟁 현장을 돌면서 사진과 시를 남기는 활동을 시작했고, 그 시들을 모아서 12년 만에 신작으로 출간한 시집이 바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제목의 시집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시는 동명의 시집에 실린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입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트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네, 박노해 시인의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들어봤습니다. 메시지의 울림이 큰 시죠. 시인이 직접 경험했던 사건을 시로 표현한 것이어서 그런지, 한 장면 한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뒤덮인 산속을 혼자 가고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볼까요? 앞도 잘 보이지 않아 두려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내딛는데, 저 멀리서 작은 불빛이 하나 나타난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쁠까요?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던 찰나에 나타난 불빛은, 아무리 작고 희미하더라도 그 순간 그 어떤 빛보다도 더 강렬하고 강력한 생명의 빛으로 다가올 겁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어둡고 두려운 때가 분명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코로나19사태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겪어왔던 어떤 인간관계의 문제, 학업의 문제, 취업, 경제상황, 가정문제 등 답답한 사건들 앞에서 ‘내 인생은 왜 이렇지?’ ‘난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지?’ 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누군가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또 누군가는 자신감이 부족해서 등등, 각자 자신의 능력의 한계점을 만나고, 그것 때문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암흑과도 같은 상황을 만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당장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어둠, 나를 짓누르는 그 커다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내게 필요했던 것이 결코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었음을, 그저 작은 불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눈 앞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그런데 우연히 등불을 들고 그 길에 있었던 케로족 청년은 자신의 등불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의미가 될 줄 알았을까요? 아마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청년의 불빛은 겨우 주변 1미터 반경 정도만 밝힐 법한 희미한 호롱불에 불과했죠. 호롱불을 가지고 숲의 어둠을 다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 어쩌면 케로족 청년도 덜덜 떨면서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청년이 그 등불을 갖고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던 한 사람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가 2017년이었는데요, 한국에서는 국정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이 벌어지고 있었고, 당시 저는 호주에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호주와 비교되는 비효율적이고 공평하지 않은 우리나라의 사회 시스템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들던 차에, 국정농단 사건까지 터지면서.. ‘앞으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실망하고 절망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시를 읽고 스스로 많은 힘을 얻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큰 메시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었죠.
여러분은 이 시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으셨나요?
저는 이번에 다시 한 번 이 시를 읽으면서, ‘나의 등불’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등불’이란 뭘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볼 때, 나의 ‘지식’일 수도 있고, 내가 가진 ‘물적 재산’, 나의 ‘경험’, 혹은 나의 ‘능력’ 등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또 ‘내가 맡은 어떤 사명’이라고 생각해 볼 때, 각자가 맡은 직업이나 역할, 각자가 지켜야 할 규칙이 될 수도 있겠죠. 내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이 보잘것없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내 자리에 서 있을 때, 케로족 청년의 ‘희미한 빛’이 박노해 시인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 준 것처럼, 나의 작은 ‘등불’이 어둠 속에 두려워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생명의 빛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이 시의 표현처럼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 만약 여러분이 희미한 등불로라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서 있는다면, 끝내 꺾여지지 않을 한 사람으로 존재해 준다면, 바로 여러분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우리의 희미한 등불은 어둠을 이길만한 넉넉한 빛이 될 겁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말합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대가 아무리 작은 불빛이더라도.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나의 등불이 희미해 보이나요?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자리에서 나만의 등불을 밝히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등불을 밝히십시오. 여러분의 불빛이 어둠에 갇혀있는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요 생명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이 시기에, 서로를 향한 격려와 사랑의 말을 건네는 것도 칠흑 같은 어둠에서의 밝은 불빛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는 만큼, 마음으로 서로에 대한 관심과 격려를 더 쏟아야 하지 않을까, 더욱 열심히 전화와 메시지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삶은 기적이고, 인간은 신비이고, 희망은 불멸이다! 이 시의 메시지 기억하시면서, 요즘처럼 응원이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한 시기에 곁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이 시를 나눠보면 어떨까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연주곡을 하나 가져왔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입니다. 레비 파티(Levi Party)의 <아픔을 지날 때>라는 곡인데요, 반노네온 연주자인 고상지 씨가 함께 협연한 곡이기도 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어둠을 지날 때’ 만났던 작은 빛처럼, 지금 혹여 아픔을 지나고 계신 분들, 어둠을 지나고 계신 분들 계시다면, 이 곡이 그 분들께 작은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듣고 싶습니다. 그럼, 저는 2주 후에 또 다른 시와 음악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힘내시고, 건강 유의하세요!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2020년도 어느덧 1월이 지나고, 2월의 마지막 주를 맞게 되었습니다.이번에는 굉장히 오랜만에 여러분을 만나는 기분이 드네요.잘 지내셨어요?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와 세계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데요,이럴 때 일수록 몸과 마음 잘 챙기시고,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친구’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예전에는 ‘친구’하면 주로 학교 친구, 동네 친구, 동아리 친구를 떠올리기 쉬웠는데,요즘은 SNS를 많이 하다 보니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도 친구처럼 소통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또 ‘원데이 클래스’ 같은 다양한 모임들이 주변에 많이 생기다 보니,그곳에서 알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는 경우들을 적지 않게 봅니다.과거에 비해 ‘친구’라는 개념이나 경계가 확실히 넓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이의 개념도 과거보다는 덜 중요시되는 것 같고,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오늘은 ‘친구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시 한 편을 준비해 보았어요.
첫 번째로 여러분께 들려드릴 시는, 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이라는 제목의 시예요. ‘우화’라는 말은 “인격화한 동물 등을 주인공으로 하는 풍자와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라는 뜻의 ‘우화(寓話, 이솝우화)’도 있지만, 짝 우(偶)에 말 화(話)로 이루어진,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 함’이라는 뜻의‘우화(偶話)’도 있더라구요. 마종기 시인의 시 제목은 이 두 번째 우화에서 왔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하는 강’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겠죠.
시인은 이 시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을 강과 강물에 비유하고 있는데요, 여러 번 읽을수록 정말 와 닿는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눈 앞에 넓은 강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시면서 들어보시죠.
偶話(우화)의 江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이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네,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들어보았습니다.이 시를 들으면서 넓은 강을 한번 떠올려보자고 했는데요, 그 전에 먼저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모래밭 어딘가를 상상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물이 흐르기 시작할 때, 그 부분에 흙이 조금씩 파이면서 작은 물길이 터지게 됩니다.그리고 그 한 곳으로 물이 계속 흐르다 보면 점점 굵고 깊은 물길이 터지게 되죠.
이 시의 첫 시작이 그러한 비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처음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평평했던 땅에 물길이 생기는 것’ 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을 함께 연결 지어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쪽과 저쪽 사이에 처음 물길이 생겼을 때, 그 사이로 자주 물을 보내야 그 자리가 조금씩 깊게 파이면서 물길이 유지될 수 있죠. 그렇지 않으면 얕기만 한 물길은 깊게 파이기 전에 금방 사라지고 말 겁니다.
물길이 오가야 그 물길이 점점 깊어질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도 서로 친해지려면 자주 만나고 이야기가 자주 오가야만 합니다.물론 처음에는 어색할거예요.아무리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와 처음 만나는 순간은 아무래도 조금 어색하기 마련이죠.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지금은 매우 친한 친구가 있는데,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서로 존댓말도 썼고, 겉으로 내색은 안 하더라도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던 상황도 있었죠. 내 개인적인 얘기를 어디까지 꺼내야 될지도 잘 모르고 말이죠.하지만 지금은 서로 말도 편하게 하고,척 하면 착 알아듣고 많은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습니다. 고민거리도 서로 얘기하고 들어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 있죠.여러분도 아마 그런 친구 한 명씩은 있을 겁니다.
시인은 처음 물길이 생기고, 물이 자주 오가고 서로 섞여야 하는 수고를 거친 후에는 “넘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는 강물”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서로 전혀 모르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만나서 서로 친해지기까지는 쉽다손 치더라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 서로의 내면적 고민까지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사이까지 된다는 것은 진짜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진실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죠.
그래서 시인은 이야기 합니다.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 있겠는가.수려한 강물이 된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하고 말이죠.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되었다는 것은,다시 말하면그만큼의 물길이 오간 세월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고,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여러분 곁에는 그러한 사람이 있나요?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긴 세월과 많은 노력을 통해 이제 큰 강이 되었다면,물을 계속 보내거나 굳이 수고스럽게 섞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자체로 계속 큰 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큰 강은 얕은 물길처럼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 시를 거듭 읽을 수록,강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우리도 정말 친한 친구와는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마치 며칠 전에 보고 다시 만나는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가 않잖아요?정말 친한 친구라면,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대화가 어색하지 않은 사이일 것이고,긴 말을 전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친구의 한숨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무게를 알 수 있는 그런 사이일 겁니다.마종기 시인의 말의 표현을 빌면, 그러한 두 사람의 사이에는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강이 존재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한 편으로는,이 만남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끝나게 될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시인도 그 부분을 인정하고 있어요.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시인은그 시작과 끝은 모를지라도,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이미 시작된 인연과 만남이라면 그 만남이 맑고 투명하기를, 시원하고 곱게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이 시를 읽으면서,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맑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힘들 때 곁에서 든든히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또 누군가가 나를 생각 할 때 마냥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만나고 싶고 가까이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샘킴이 부른 <Your Song>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샘킴과 K-Pop Star 방송동기이자 같은 회사 소속가수인 권진아 양을 위해 만든 곡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권진아 양이 매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샘킴이 직접 만든 곡이라고 하는데요, 가사가 참 위로가 되는 노래입니다.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은 ‘가족’을 주제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여러분은 평소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시나요?얼마 전에 설 연휴도 있어서,아마 오랜만에 친척들과 부모님들을 뵙고 온 분도 있을 것 같아요.저도 평소에는 학업에,직장에 바쁘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별로 없지만,명절이나 연휴만큼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저는 2016년에 친척을 방문하러 호주에 갔다가, 약 2년간 호주 브리즈번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그곳에서 느낀 것 가운데 한 가지는, 호주 사람들은 참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호주에서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퇴근시간 이후에 추가로 야근을 하면 추가수당을 받아요.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휴일이나 주말에 근무하면 기존에 받던 시급이나 주급의 몇 배를 추가로 받는 것이 법으로 제도화 되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해 볼 때, “기존 시급의 몇 배를 더 준다고 하면,서로 휴일에 근무하려고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쉬울 텐데요,대부분의 호주 사람들은 돈을 좀 덜 벌더라도 그 일할 시간에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흔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의 경우,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추가 근무 대신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 보내는 것을 선택하더라구요.호주 사람들에게 차지하는 가족에 대한 부분이 정말 크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물론 나라마다 복지의 조건과 상황이 다르겠지만,호주 사람들의 그런 사고방식이 때론 부럽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사실은 결국 가족들을 위해서 야근도 하고, 가족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것일 텐데, 그 희생이 당연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그 희생이 가족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은 특별히 자녀들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나는 시를 각각 한편씩 골라보았습니다.이 시들을 읽으면서,오랜만에 가족들을 좀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싶어요.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유안진 시인의 시 <배꼽에 손이 갈 때> 입니다.우리가 알다시피 배꼽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와 어머니의 자궁을 연결시켜주는 탯줄이 있던 흔적을 의미합니다.
그 탯줄을 통해서 태아가 어머니로부터 영양분을 받아서 자라나죠. ‘배꼽’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분이지만, 우리가 태어난 이후로 자라나면서 또한 평소에 살면서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체부위이기도 합니다.
유안진 시인의 <배꼽에 손이 갈 때>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기왕이면 배꼽 위에 손을 얹으시고 이 시를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배꼽에 손이 갈 때
유안진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만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유안진 시인의 시 <배꼽에 손이 갈 때> 들어보았습니다.제목만 들어서는 무슨 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시를 읽고 나니 이 시가 어머니에 관한 시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시의 첫 부분에, 생각할 게 있으면 누군가는 가슴에 손을 얹기도 하고, 뒷머리를 긁는 사람도 있는데, 난 ‘배꼽에 손이 간다’라고 시작합니다.그렇다면 이 시의 화자는 뭔가 생각할게 있었다는 이야기겠죠.시의 화자가 생각하고 있는 게 뭘까요? 시를 끝까지 읽고 나면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낯선 이들과 가족 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말,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산다는 그 말을 한 번 생각해볼까요? 이 시의 화자는 어쩌면 지금 참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저도 외국에 나가서 가족들과 떨어져있었던 경험이 있다 보니까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어요. 물론 외국에서도 좋은 분들을 만나서 외롭지 않게 가족같이 잘 지냈지만, 정말 결정적인 어느 순간에는 ‘진짜 가족’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겠죠.
회사나 학교에서도 거의 친언니나 친동생과 같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터놓고 지내는 좋은 동료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더라도 실제 친언니와 친동생과 똑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진짜 가족보다는 그래도 뭔가 조심스럽고 약간의 거리는 있을 수 밖에 없어요.이 시의 화자도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면서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지금 한국의 20-30대 청년들의 모습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제 주변에도 취업 때문에 혹은 고시나 진로 때문에 부모님 집을 떠나 홀로 서울이나 지방에 나와있는 친구들이 많은데, 처음에는 독립했다는 설렘이 앞서지만 점점 혼자 지내는 게 쉽지 않고외로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아마도현실의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지치기도 하고,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들보다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는 거겠죠.그런데 어디에도 그런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데가 없다면, 스스로를 더 외롭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이 많아지는 어느 날 밤, 가만히 배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데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한 거죠.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말들,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라는 말은 아마도 어머니의 말투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한 번쯤은 이런 기억이 다 있으실 겁니다. 어렸을 적에 배가 아프면 어머니가 “엄마 손은 약손!”하면서 배꼽 주변을 쓰다듬어 주고, 배를 만져주던 기억.한 번쯤은 있으실 텐데, 사실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손’ 자체는 아무 치료제도 아니고 그냥 ‘손’일 뿐이죠.하지만어머니가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말하니까, 신기하게 무슨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아팠던 배가 싹 나았던 기억이 있습니다.어머니의 손에 무슨 힘이 있던 것일까요,아니면 어머니의 말에 어떤 힘이 있던 것일까요?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손과 말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그만하면 배부르단다’, ‘그만하면 따뜻하단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괜찮다’라고, ‘너는 지금도 충분히 괜찮단다’라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음성으로 다가옵니다.그리고 마지막 행에 와서, 배를 쓰다듬고 있는 손이 내 손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이 된다는 이 표현에서, 시의 화자는 영원한 내 편인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현재의 힘듦과 외로움을 견뎌낼 만한 위로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주변 누구의 말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을 때, ‘어머니’라는 존재,나를 향한 그 어머니의 위로의 말이야말로 정말 진심 어린 격려와 충고가 되겠죠.
어머니의 말이 때로는 잔소리로 들릴 때도 있죠. 사실은 그 모든 말들이 다 나를 위한 말일 텐데,자녀들은 그걸 쉽게 놓칠 때가 있는 것 같아요.이 시를 통해 영원한 내 편인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유안진 시인의 시 ‘배꼽에 손이 갈 때’와 함께 소개해드릴 곡은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라는 곡입니다. 예전에 TV방송에서 악동뮤지션과 양희은씨가 함께 부르면서 유명해졌던 곡인데요, 오늘은 그 곡의 원곡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몰랐던 엄마의 속마음과 딸의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곡입니다.함께 들어보시죠.
오늘 ‘가족’을 주제로 소개해 드릴 두 번째 시는 아버지가 생각나는 시를 골라보았습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에 대한 시는 유난히 슬픈 내용의 시가 많이 있더라구요.어머니에 관한 시도 물론 슬픈 시가 있었지만그래도 잔잔한 감동이 느껴지는 시들이 많았는데,아버지에 관한 시들은 유독 슬픈 내용들이어서 소개할지 말지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중에 한 편을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서 가져왔는데요,오늘 소개해드릴 시는 이상국 시인의 <혜화역 4번 출구>라는 제목의 시 입니다. 제목만 들어서는 ‘아버지’가 연상되지 않는 것 같죠. 저도 처음에 시를 읽을 때는 이 시가 아버지에 대한 시라고는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 읽은 후에 뭔가 가슴 한 켠에 묵직한 감동이 있었던 시 입니다. 여러분께도 그 감동이 잘 전해졌으면 좋겠네요.그러면 이상국 시인의 시 <혜화역 4번 출구>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 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 준다 아빠 잘 가
네, 이상국 시인의 시 <혜화역 4번 출구> 들어보았습니다. 시의 한 줄 한 줄에서 아버지의 무뚝뚝함이랄까? 그 무뚝뚝함 속에 담긴 진심과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첫 번째로 읽었던 시가 자녀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는 시였다면, 이 이상국 시인의 시는 아버지 입장에서 자녀를 향하는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이 시 속의 아버지도 그렇고,우리 아버지들은 왜인지 모르지만 다 큰 자녀들에게는 사랑표현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 한 방송에서 개그맨 이경규씨와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경규씨의 딸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아빠와 딸 모두 대화도 별로 없고 감정표현에 서로 서툰 서먹서먹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그 방송에서 자료화면으로 두 부녀의 옛날 모습이 함께 나왔는데, 이경규씨가 3-4살 된 딸을 너무 잘 안아주고, 계속 딸아이와 이야기도 하고 너무 잘 놀아주고, 뽀뽀도 해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지금의 대면 대면한 부녀 사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친밀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가정이 다 똑같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위 방송에서처럼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현재는 자녀와 부모님 사이가 다소 서먹한 가정이 적지 않은 것 같아요.생각해보면우리의 아버지들도 예전에는 우리들에게 감정표현을 잘 하셨을 텐데, 왜 지금은 그렇게 못하실까요?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도,어렸을 적에는 부모님께 애교도 부리고 모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했던 때가 있었을 텐데,언제부터 다소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을까요?아마도 자녀들이 크면서 사춘기도 오고, 또 각자 자기만의 활동영역이 생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자녀 사이가 멀어졌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시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오죠. 세 번째 연에서,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 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를 기억이나 하겠는가’하는 대목에서, 여전히 변함없이 딸을 사랑하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해도 마음으로는 옛날처럼 딸아이와 함께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겠죠.
또한 서울에 눈이 온다고 보낸 딸의 메시지에 ‘그거 다 아빠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아라’라고 답장을 보낸다는 그 대목 역시도, 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표현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이 시를 읽으면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 속의 진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문득 저희 아버지가 생각이 났어요.저희 아버지도 전화하면 늘 하시는 얘기가 있어요. “뭐하고 있었어?”“밥은 먹었고?”“피곤하지 않아?”“너무 무리하지 말고, 밤에 너무 늦게 자지 말고” 등등, 안부를 묻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나면 항상, “잠깐만 있어 봐,엄마 바꿔줄게” 하고 그것으로 아버지와는 통화가 끝납니다. 어머니하고는 기본 30분은 넘게 통화하는데, 아버지와는 늘 약 3분 정도 통화 했던 것 같아요.지금은 조금 더 길어지긴 했는데,그래도 여전히 “잠깐만 기다려봐,엄마 바꿔줄게”로 통화가 끝이 나죠.어렸을 때는, ‘하실 말씀도 없으신데 왜 전화 하시는 건가’ 싶기도 했었어요, 솔직히. 그런데 조금 크고 나니까 그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별 말씀도 안 하시고,통화하는 시간도 짧음에도 이렇게 전화를 하시는 것 역시 다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고,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던 것이죠.이제는 그걸 다 알고,제가 먼저 아버지께 전화 드리기도 하고,아빠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이 글을 준비하면서 어느 인터넷 페이지에서 읽었던 에피소드가 생각이 났어요.여러분께도 소개해드릴게요.
한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질문1] 사랑하는 남녀가 있는데, 여자는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그런데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에 심한 흉터가 생기고 말았다. 남자는 그녀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그리고 학생들은 세 가지 답안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요,
A.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B.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C.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답을 골랐을까요?이 [질문1]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은, A가 10%, B가 10%, 그리고 C가 80%였습니다. 압도적으로 C가 많았죠.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질문2] 사랑하는 남녀가 있는데, 남자는 사업에 크게 성공한 백만장자였다.그런데 그의 회사가 파산해 남자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여자는 그 남자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A.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B.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C.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결과는, A가 30%, B가 30% 그리고 C가 40%였습니다. 아까 첫 번째 질문보다는 ‘예전처럼 사랑하겠다’는 비율이 좀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라는 부정적인 대답과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대답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죠.
이 두 가지 질문을 마친 교수가 말했습니다. “모두들 이 두 남녀를 ‘연인관계’라고 생각했나?” 학생들은 “그렇습니다.”,“사랑하는 남녀라고 해서 연인관계로만 생각했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학생들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만약 첫 번째 질문의 남녀가 ‘부녀관계’이고, 두 번째 질문의 남녀가 ‘모자관계’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나?” 순간 교실 안이 조용해지고 학생들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잠시 후 교수는 앞선 두 질문을 다시 한 번 되물었고,그러자 이번에는 모든 학생들이 전원 ‘A: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를 답변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부모는 자식이 어떤 흉터를 갖게 되든 그 사랑을 포기할 수 없고, 자식이 어떤 실패를 겪더라도 내 자식이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죠.
어느 인간관계가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관계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고,쉽게 잴 수 없는 깊이와 넓이의 사랑이 부모님에게 넘치게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오늘 유난히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는 날이네요. 오늘 ‘가족’을 주제로 함께 했는데요, 이상국 시인의 시 <혜화역 4번출구>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는 홍재목의 ‘당신이 그대가’입니다. 이 노래는 사실 남녀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인데요,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시간이 점점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게 되는 추억들, 그 아쉬움과 그리움을 노래한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늘 곁에 계실 것만 같지만,사실 인간의 삶과 시간,기억은 유한합니다.언젠가는 이별하게 될 테고,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고 있는 이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죠.이 노래 들으시면서 더 늦기 전에 우리 부모님과의 추억들을 되새겨보고, 다시 한 번 그 사랑에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모두 건강 조심하시구요,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올게요.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시가 필요한 시간, 일곱 번째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안녕’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요, 여러분은 ‘안녕’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안녕’이 떠오르시나요? 우리는 친한 누군가와 만났을 때 ‘안녕’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친한 누군가와 헤어질 때도 역시 ‘안녕’이라고 말합니다. ‘안녕’이라는 이 친근한 말 속에 만남도 있고, 헤어짐도 있는 것이죠. 여러분은 제일 먼저 어떤 안녕이 떠오르셨을까요?
제가 알고 있는 몇 개 나라의 언어만 살펴보아도, 만날 때의 인사와 헤어질 때의 인사가 같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영어는 ‘헬로(Hello)’와 ‘굿바이(Good bye)’로 서로 다르죠. 중국어로도 니하오(你好)와 짜이찌엔(再见)이 다르고, 일본어도 만났을 때 ‘사요나라(さようなら)’하면서 만나지는 않습니다.
러시아어로도 친구끼리 서로 만났을 때 “안녕?”하고 인사하는 말은 ‘쁘리벳(Привет)’이구요, 헤어질 때는 ‘빠까(Пока)’라고 인사합니다. 완전히 다르죠. 이렇게 몇 가지 예시만 찾아 봤는데도, 신기하게 우리나라만 ‘안녕’이라는 하나의 말로 다른 뉘앙스를 나타내며 사용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편안할 안(安)에 편안할 녕(寧)이라는 한자로 구성되어 있는 이 ‘안녕’이라는 말 속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났을 때 ‘그 동안 편안했는가!’라고 안부를 확인하는 반가운 마음, 그리고 서로 헤어질 때 ‘다음에 만날 때까지 편안하고 편안하길 바란다!’는 다음 번 만남에 대한 소망까지 함축된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얼핏 헤어질 때에 말하는 인사로서만 생각했었는데, 만남과 헤어짐이 함께 깃들어 있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오늘 ‘안녕’이라는 주제로 이별에 대한 시를 두 편 준비 했는데요, 오늘 준비한 시 모두 완전한 이별을 노래한 시라기 보다, 방금 이야기했던 ‘안녕’이라는 두 가지 의미의 말처럼, 이별하지만 여전히 곁에 머무는 마음, 곧 다시 만나리라는 소망을 담아 이별을 노래하는 시로 준비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정호승 시인의 시 <이별 노래>입니다. 시를 들어보시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앞두고 있는 시적 화자의 애잔한 마음이 잘 느껴지실 겁니다. 시 먼저 듣고 오겠습니다.
이별 노래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정호승 시인의 시 ‘이별노래’ 들어보았습니다. 시 속의 화자는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을 앞두고 있어요. 상대방이 곧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떠날 사람에게 조금만 더 늦게 떠나주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죠.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조금만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가 떠난 후에 그대를 사랑하겠다… 음… 이 시는 무슨 의미일까요? 누군가가 ‘떠난 후’에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사랑일까요? 시인은 그 사랑의 방식을 ‘노을이 되는 것’ 그리고 ‘별이 되는 것’으로 비유 합니다.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사람에게 조금만 늦게 떠나주기를 바라면서, 그 사이에 내가 먼저 그 곳에 가서 그대 뒷모습에 배경이 되는 노을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옷깃을 여밀 만큼 추운 날, 주위가 어둡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때에도 그대를 위해서 노래하는 밤하늘의 별이 되리라고 고백하고 있죠.
노을과 별은 모두 내가 인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 시간에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들이죠. 노을과 별처럼 그렇게 그대와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늘 그 자리에서 그대를 사랑하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별 노래’를 들은 사람은, 아마도 노을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밤에 별을 보더라도 그냥 별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겠다고 고백했던 그 사람이 왠지 생각날 것 같습니다.
이 시는 처음에 시작했던 연이 마지막에 한번 더 반복되면서 끝나고 있습니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어떤 이유에서 맞이하게 된 이별인지 시에 드러나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지는 이별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아마 마음으로는 늘 함께이지 않을까요? 주황빛의 노을과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노을이 되겠다고 고백했던, 그리고 별이 되어 노래하리라고 고백했던 그 상대방을 떠올리게 될 테니까요. 이 시야말로 헤어졌지만 그럼에도 함께 있는 그런 ‘안녕’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번에 이 시를 여러 번 읽으면서 생각난 노래가 있습니다. 가야금 연주자인 정민아가 작사작곡하고 직접 부른 <무엇이 되어>라는 곡인데요, 실제로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멜로디도 인상적이고, 가사도 독특해서 여러 번 듣게 되었던 곡이에요. 이 노래의 가사에는 “그대가 무엇이 되었어도 난 그대 가까이 있는 무엇이 되고 싶네”, 그리고 “그대가 무엇이 되었어도 난 그대와 나 사이 이별 안에 있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역설적이면서도 반복되는 이 가사가 비록 헤어지지만 늘 함께 있겠다는 정호승 시인의 시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함께 들어보시죠.
네, ‘안녕’을 주제로 시가 필요한 시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안녕’을 주제로, 이별과 만남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었던 두 번째 시는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입니다.
‘바람의 말’.. 뭔가 바람이 전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시를 먼저 듣고 이야기 더 나누겠습니다.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이 시는 마종기 시인에게도 의미가 있는 시라고 합니다. 마종기 시인은 의사이면서 동시에 시인인데요, 어느 날 병원에서 예순 살 정도 되신 분이 자신의 사연을 적어 마종기 시인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는데 바로 이 <바람의 말>과 관련이 있는 사연이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1년전 사랑하는 남편을 폐암으로 떠나 보냈던 보호자였다고 해요. 긴 투병 기간 중 점점 쇠약해지던 남편이 어느 날 종이 한 장을 내밀면서, 아내에게 시간 날 때 읽어보라고 했대요. 그런데 그 때는 정신도 없고 피곤해서 ‘그러겠다’고 하고 잊고 지냈었는데, 얼마 후 남편이 죽고 장례를 치른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남편이 죽기 전에 전해주었던 그 종이가 나온 겁니다. 그 종이에는 시 한편이 적혀 있었는데, 그 시가 바로 이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 이었다고 해요. 이 사연을 듣고 다시 시를 보면, 이 시가 실제로 떠나는(혹은 이미 떠난) 누군가의 메시지로 들리기도 합니다.
바람은 나뭇가지도 흔들고, 꽃나무의 꽃잎도 날아가게 하는데, 시적 화자는 그게 그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너의 곁에 머물고자 하는 나의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라고 있죠. 두 번째 연에는 이러한 시 구절이 나옵니다.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그대를 알았던 자리에 꽃나무를 심고, 그 꽃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면, 우리가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이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심었던 꽃나무가 꽃을 피울 때쯤엔, 우리가 서로 안다는 이유로 생겼던 괴로움들이 사라질 거라는 말인데…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좋지만… 이제 막 꽃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언제 자라서 언제 꽃을 피우겠어요? 그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꽃이 피고 꽃잎이 날리게 될 때까지의 그 오랜 시간은 계속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라는 말일까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세 번째 연에서 나옵니다. 시인은 마치 그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하죠.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이제 막 심은 나무에서 싹이 나고, 나무가 자라 꽃을 피울 날이 과연 언제 도래할 것인가.. 그게 참 아득한 일인 것 같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세상일은 우리의 생각으로 다 알 수가 없다고…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 내게 성숙의 시기가 찾아봤을 때, 즉 어떤 ‘때’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이해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죠.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는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가?” 등, 현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깨달을 수 있을 때가 되면, 이 시의 표현대로 나무에 꽃이 필 때가 되면, 그 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다라고 위로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에는 고통도 따르겠죠. 그럴 때, 시인은 귀 기울여 바람의 말을 들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착한 당신’, 너무나 착하기 때문에 홀로 남아 이별을 괴로워하고 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치 바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늘 곁에 있을 테니 힘내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저는 이 시를 읽고 또 듣는 동안에,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하고 그 팽목항에 매여있던 노란 리본이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바람에 꽃잎이 날린다는 시 구절과, 바람에 날리고 있는 노란 리본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는 것 같았고, 시를 여러 번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세월호 아이들과 유가족들이 많이 생각이 났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장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이 아닐까.. 언제쯤 꽃잎이 되어 이 괴로움이 다 날아갈 수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만남과 헤어짐이 함께 있는 ‘안녕’이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편의 시 만나 봤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가 노을과 별로 함께 머물겠다는 고백이었다면, 마종기 시인의 시는 이별하지만 여전히 ‘바람’으로 곁에 머물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시였습니다.
오늘 마무리하면서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과 함께 들으면 좋은 곡 소개해드릴게요. 김효근이 작곡하고 뮤지컬배우 양준모가 부른 <내 영혼 바람 되어>라는 곡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구전되던 작자미상의 시 ‘A Thousand Winds’라는 시를 김효근씨가 직접 번역하고 곡을 붙인 노래라고 해요.
저는 사실 이 노래를 2006-2007년쯤에 알게 되었는데, 양준모씨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즐겨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이 곡이 지금은 세월호 추모곡이 되어 있네요. 그 이유와는 상관 없이, 가사의 내용과 멜로디가 마종기 시인의 시와 너무 잘 어울리는 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정호승 시인의 시와도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즘 추운 날씨 탓에 움츠러들기 쉬운데요, 따뜻한 시와 좋은 노래와 함께 포근한 하루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2주 후에 돌아올게요.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오래 기다려보신 적 있으세요? 누군가를 기다릴 때의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설렘으로 느끼겠지만, 짜증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제가 한 번은 친구랑 대학로에 가기로 하고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길을 몰라서 그 친구와 꼭 같이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친구가 10분 후면 도착한다고 해서 카페에 있는 푹신한 쇼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를 기다렸죠.
그런데, 자꾸만 문을 보게 되는 거예요. 문이 열릴 때 ‘그 친구인가?’ 하고 보면 아니고, 또 누가 들어오길래 ‘내 친구인가?’ 하고 보면 아니더라구요.
막상 문이 열리면 다른 사람들만 들어오고, 그럴 때마다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데 ‘아 왜 안 나오지’하고 ‘빨리 왔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으시죠? 가만히 있어도 어련히 알아서 도착 할 텐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문으로 눈이 가던 경험. 내가 쳐다 본다고 상대방이 더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얼마쯤 지났을까, 진짜로 그 친구 얼굴이 딱 들어오는데, 세상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문득 어떤 시 한 편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시가 바로 오늘 첫 번째로 들려드릴 시인데요, 직접 누군가를 기다려 보니까, 이 시만큼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잘 표현한 시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마음,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나의 마음의 심경 고백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시인데요,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입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이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들어 보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이 대목이 참 공감이 됩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꾸 문 쪽으로 눈이 갔던 그 경험과 참 비슷하죠.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이 부분도 참 멋진 표현이에요. 이 시 속의 ‘나’는 사실 계속 한 자리에 앉아서 상대방을 기다리는 중이지, 실제로 일어나서 움직이는 건 아니에요. 직접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상대방을 향하는 나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어요. ‘기다리다 지쳐서 차라리 내가 간다’ 그런 말이 아니라, 몸은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내 마음은 이미 오고 있는 너에게 가있다는 거죠. 그만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이죠. 그래서 마지막에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고 말하면서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서 너에게로 ‘가고’ 있고, ‘가슴에 쿵쿵거림’을 따라 너에게로 ‘가고 있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시인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두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 역시,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주먼데서나는너에게가고
아주오랜세월을다하여너는지금오고있다
아주 먼 데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을 다 해서 와야지만 서로가 만날 수 있다는 말인데요,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지 않나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주변의 친구들, 지인들을 생각해 봐도, 그들과 ‘지금’ ‘이 시점’에 ‘이 곳’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이 엄청난 확률이죠.
제가 한국에서 알게 된 스웨덴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사실 50대 아주머니셔서 우리 문화에서 친구라고 하기는 조금 멋쩍지만,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좋아하는 분이어서 서로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친구는 스웨덴에 있었어요. 아주 먼 데서 왔죠. 그리고 이 친구에게는 50년이 넘는 세월이, 저에게는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인 2019년이 되어서야, 우리가 한국에서 서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니까,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우리가 만난 것이겠죠.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웃에서 알고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을 생각해 봐도, 한 사람과 사람이 인연으로 만난다는 것이 이 시 구절이 잘 말해주듯 얼마나 어렵고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누군가와의 만남을 기다릴 때, 그 사람과의 인연을 이렇게 생각을 해 본다면, 아무리 오래 기다리더라도 결코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시간일 테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만남과 기다림이 결코 다른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만남이 있으려면 오랜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또 오래 기다린 만큼 그 만남이 값질 테니까요.
이 시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는 러블리벗이라는 프로젝트팀이 작사 작곡하고, 홍재목이 부른 ‘그늘 같은 늘 같은’이라는 곡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따뜻한 곳만 찾게 되지만, 여름 한 낮은 그늘이 정말 필요한 시간이죠. 여름에 햇빛이 뜨거울 때는 짧은 그늘도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 곡에서는 한 겨울에 여름이 되길 기다리면서, 여름이 되면 다시 그늘을 찾듯이 나를 잊지 말고 다시 찾아주기를 기다리노라고 노래하는 곡입니다. 오늘 읽은 기다림의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홍재목의 <그늘 같은 늘 같은> 듣고 오겠습니다.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은 기다림을 주제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들려드릴 시는 문병란 시인의 ‘호수’라는 시입니다. 사실 저는 이 시의 텍스트를 먼저 읽고 난 후에 제목이 ‘호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제목이 왜 호수일까 좀 생각을 하게 되는 시 였습니다. 시가 길지 않은데, 여러분도 시를 들어보시고, 왜 제목이 호수일까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그럼, 시 먼저 듣고 오겠습니다.
호수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무수한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문병란 시인의 ‘호수’ 들어보았습니다. 이미 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난 후, 집에 돌아온 밤. 하루를 마무리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이 때는 아마도 혼자 있을 때겠죠? 그런데 많은 사람을 다 만나고 난 후, 혼자가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런 고백은 흔하지 않죠. 그리고 이 시의 화자는 그런 사람을 지금 오래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라고 표현하고 있죠. 이것은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도 들립니다.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사랑하고 싶다고 하는 이 고백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 여러 거쳐가는 사랑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의 어떤 시행착오 없이, 가장 마지막으로 만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를 들으면 ‘끝사랑’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요. 첫사랑은 여러 명 일 수 있는데, 끝사랑은 딱 한 사람뿐이잖아요.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그런 지나가는 사랑이 아니라, 진짜 마지막 사랑이라는 건, 그 사람을 평생 사랑하고 살겠다는 이야기겠죠.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수많은 사람’ 또는 ‘모든 사람’에 속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 속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정말 긴 기다림이기에, 시인은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읽어주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나에게는 너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런 의미로 읽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나의 모든 사랑의 마지막이 너다. 내가 하루 종일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나의 고독의 시간에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존재는 너다. 와, 이런 고백은 참 멋지죠.
그런데 왜 제목이 ‘호수’일까요? ‘바다’도 아니고, ‘강’도 아니고.
저도 나름 열심히 고민해보고 유추해낸 결과가 있긴 한데, 제가 미리 말씀은 안 드리고, 처음으로 “애독자 퀴즈”를 내볼까 합니다.
이 문병란 시인의 시 ‘호수’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고, 왜 제목이 ‘호수’일까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댓글로 적어주시면 돼요.
시와 문학에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본인의 감상, 느낌 생각들을 짧게라도 적어주세요. 적어주신 분들에 한해서 소정의 상품을 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여러분들의 댓글을 기다리는 2주가 되겠네요. ^_^
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외로움’이다, 혹은 ‘그리움’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문병란 시인은 사랑을 ‘기다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긴 여정,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깨달음은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어깨와 무수한 눈길을 다 지나고 시간의 변두리로 물러나 혼자 있게 되었을 때,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서 있는 그런 순간에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죠. 기다림과 고독이 만나는 순간이네요.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독의 시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만 같은 그 외로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 끝 곡으로는 심규선 작사 작곡의 심규선이 부른 ‘강’이라는 곡 들려드릴게요. 이 노래는 심규선씨가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후 그 감정을 담아 쓴 곡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요,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만큼 긴 기다림이 있을까, 그것만큼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병란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많이 생각났던 곡이었는데, 여러분께도 나눌게요.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전태일을 잘 몰랐던 20대 청춘이 영화로 전태일을 만나고 돌아본 지금 우리 삶에 대한 단상 – 편집자 주
응!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도시인
아직 11월 말인데 거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빠져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길가와 카페를 채우고 방금 커피 주문을 받던 점원은 루돌프 뿔을 머리에 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로윈 데이였는데… 올해 할로윈의 주인공은 조커와 할리퀸이다. 영화의 힘일까? 귀신을 기리지 않고 캐릭터 인기투표의 장이 돼가고 있다.
마침 라떼가 나왔으니, 한잔 들이키고 내 어릴 적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때는 세계가 해리포터에 빠졌었다. 모두 마법사 망토를 두르고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윙가르디움 레비오사”라고 외치고 다녔었지. 물론, 지금처럼 활발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할로윈 데이 때는 다들 해리가 돼 이마 한편에 번갯불을 이고 다녔었다. 그런데 할로윈 데이에 볼드모트 분장을 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였기에 이름조차 부르면 안 되는 사람 분장을 하는 건 너무 끔찍해서일까?
하지만 이건 내 라떼의 이야기고 요즘 이야기를 하자. 이제 한국은 제법 문화적으로 풍부해진 것 같다. 할리우드, 일본 애니메이션을 들여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문화도 수출하고 있다. 가장 잘나가는 것 중 하나가 방탄소년단일 것이다. 여기 카페에서도 방탄소년단의 캐릭터가 새겨진 굿즈를 팔고 있다.
사실 난 보이그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뇌리에 깊숙이 박힌 한 장면이 있다. 음악프로에서 노래가 시작하기 전에 한 멤버가 말했다. “응! 어서 와~ 방탄은 처음이지?” 남자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여자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매혹적인 표현으로 속삭인다. 그 어떤 자기소개보다 짜릿했다.
전태일, 너는 나에게 부담감을 줬어.
최근에 본 영화 중 나에게 방탄소년단의 부담스럽고 낯부끄러운 인사와 같은 짜릿함을 준 게 뭘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나에게는 옛사람인 전태일(1948.8.26~1970.11.13)은 한국 현대사에서 큰 인상을 주고 떠나간 사람이지만, 정규 역사 수업에서는 배운 기억이 없다. 어르신들 얘기를 엿듣거나 책이나, 유튜브에서 가끔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클릭해 본 적이 없어,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작 옛날에 뭘 한 인물인지는 잘 몰랐다. 이러던 내가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를 보게 됐다.
영화에서 말하는 그의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볼까? ‘세상과 대척점에 서서 노동자의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희생한 인물’ 물론, 한 인물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건 위험한 일반화지만 이 글은 전태일에 관한 글이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전태일이란 이름을 들으면 볼드모트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뭔가 큰일을 했지만, 지금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묘해질 수 있으니까 굳이 그 이름을 꺼내면 안 되는 사람 정도? 이른바 금기어에 갇혔다고나 할까.
어른들이 공통으로 하는 조언 중 하나가 ‘정치·종교·집안 문제는 말하는 게 아니여~’인데, 전태일은 이 중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이야기 주제일 것이다. 이 세 주제는 개인의 바뀔 수 없는 신념과 관련된 문제라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걸까? 반면에 신변잡기 같은 ‘small talk’이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재미있으면서 이렇든 저렇든 누구에게나 큰 상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문제를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나누면서 공감하는 건 도박에 가깝다. 모 아니면 도, 아니 마이너스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해야 하는 주제가 있긴 하다. 바로 정치적 올바름(PC)이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옳지만, 현대에는 약간 변질되지 않았던가. 이 문제의 뿌리는 언어적 제국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함은 옳지만,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금기되어 있다. 강자가 강해진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대까지 살아남은 이데올로기는 생활에 녹아내릴 수 있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식어버린 체다치즈 감자튀김처럼 우리는 무언가에 둘러싸여 끈끈하게 굳혀졌다.
굳혀진 끈끈함 중 하나는 쉬이 공감 받고 싶은 열망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나누고 싶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 쉽게 공감 받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예측 가능한 대화들은 늘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갑자기 분위기 미스터 션샤인
김태리와 이병헌을 필두로 <미스터 션샤인>이 대한민국을 휩쓸었을 때가 있었다. 어쩌면 고리타분한 소재인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아주 멋들어지게 드라마는 그려냈고, 이 드라마는 지금도 커지고 있는 반일본 정서의 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갑자기 <미스터 션샤인>에 매료됐던 걸까?
역사적 사건들은 과거의 일이다. 과거의 일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겐 발효된, 묵은 옛날의 이야기다. 그래서 다시 새길만 하다. 시대가 지날수록 정치·사회·문화 모두가 변해가므로 그 당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잘 다듬어진 교두보가 필요하다. 일제강점기를 이해하기에 <미스터 션샤인>은 매혹적인 교두보였다. 세대 차이가 나는 현대와 과거의 중간 지점에서 서로를 잊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문화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변한다. 조선말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은 그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부적응의 대가를 너무나도 아프게 치러왔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생각지 않고 지금 현실의 삶에 만족한다고 대화의 구심점이 되는 주제가 무미건조하게 언제나 듣기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게 과연 우리 자신에게 좋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금기어라고 느낄 수 있는 토론 논제가 어쩌면 우리 생활에서 서로를 단절하고 고립시키는 깊숙이 박힌 악순환의 고리와 맞물려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다고 말하는 피드백을 동반한다. 진정한 자유는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이해심과 스스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 금기어는 누군가에겐 상처일 수 있는 민감한 소재일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해도 타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자만심만으로 대화를 만들어가는 건 옳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를 지금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사실 너무나도 많다. 비싼 점심 메뉴, 비싼 커피값, 의미 없는 학교 수업, 실업 문제 등 과연 지금 우리의 생생한 삶을 둘러싼 이야깃거리는 아주 많다. 코를 뚫은 남자, 무릎 꿇고 구걸하는 걸인, 어제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보라. 생각보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한 가지 문제만 골라보자.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자. 내 의견뿐만 아니라 구글 선생님에게도 물어보고 책도 읽어보자. 겹겹이 자료를 쌓고 준비가 끝났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자.
항상 외국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공부하면서, 한국 아티스트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그런데 뭐랄까. 나에게 있어서 한국 인디씬은 참 아픈 손가락이다. 실망과 기대가 공존하고 있다라고 해야하나. 개인적으로 2000년대부터 다시 한국 인디씬이 대중들에게 주목 받고 장기하, 십센치, 혁오 등이 대중음악에 안착한 것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진성 덕후들은 난색을 보이겠지만, 이러한 성공 사례는 대중음악 전반의 퀄리티를 높여주는 중요한 요소이고 이러한 성공은 인디씬 활성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사례가 한편으로는 인디씬의 개성을 사라지게 만들고 흔히 ‘돈이 되는 인디’가 생겨나면서, 예전에 비하면 인디의 중요한 핵심인 ‘다양성’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나의 기대가 지나치게 큰 걸까? 물론 어느 시대에나 주류 흐름이라는 것이 있고, 인디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흐름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흐름 속에서도 자기의 색을 찾고 차별화를 줄 수 있는 음악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아쉬울 뿐이다.
좋은 인디 음악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좋은 인디음악이란 무엇일까? 완벽한 사운드 메이킹? 멋있는 가사 스토리텔링? 이러한 기술적인 부분들은 메이저 음악을 이길 수도 없으며, 이길 필요도 없다. 이미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음악’의 조류 속에서 한낫 물고기 한 마리가 파도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수는 적지만 그 파도 속에서 힘차게 자기의 길을 해엄치는 ‘대어’들이 있고, 우리는 그 대어를 낚을 때 월척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현재 인디씬에 머물러 있는 아티스트들을 응원하고 있다. 인디씬의 침체는 아티스트들의 역량들을 떠나서 환경적으로 너무나 열악하고, 음원 수익의 불공정한 구조가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솔직히 한국에 인디씬의 활성화를 떠나서, 살아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한국 인디씬에서 꾸준히 자신들의 색을 찾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분명히 있다. 연말도 됐으니, 이런 반골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음악 덕후로서 앞으로 주목할 만한 한국 아티스트들 소개하고자한다.
O.O.O(오오오)
이미지 출처, O.O.O 공식 페이스북
2018년 11월에 첫 정규앨범을 낸 4인조 밴드이다. 이들의 음악세계는 한 외로운 개인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의 전 미니앨범들인 [HOME] [CLOSET], [GARDEN]은 한 개인의 우울한 내면에 집중했다. 그들의 섬세하고 몽환적인 사운드는 갇혀있는 한 개인의 감정의 미묘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앨범 제목들은 ‘집’, ‘정원’과 같이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들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내면적인 공간이며, 떠나고 싶은 곳이었던 HOME에서부터 떠나기 전 마지막 준비를 하는 곳 CLOSET. 그리고 집 밖으로 나왔으나 완전한 밖은 아닌, 안이라고도 밖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간, 그 경계에 있는 GARDEN에 나왔고, 정규앨범 [PLAYGROUND]에 이르면서, 외부와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외로운 ‘나’와 ‘타인’ 사이에 있는 ‘우리’라는 흐름을 타고 나아가고 있다.
2018년부터 개최된 <서울블루스페스티벌>을 기점으로 재야의 블루스 뮤지션들이 참여하며 한국 블루스의 기준을 바꿔가고 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뮤지션이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이다. 2019년 ‘난 뚱뚱해’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부분’ 후보에 오르면서 한국 블루스 부활의 신호탄을 날렸다. 그가 만들어가고 있는 블루스는 기존 미국정서에 벗어나 예스러운 한국 정서의 블루스이다. 유머와 위트 대신 해학과 풍자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흔히 ‘아재감성’이 물씬 풍긴다. 블루스의 핵심적인 정서라면 특유의 끈적함인데, 그것의 근원은 멜랑꼴리한 감정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멜랑꼴리는 한국인들이 느끼기 힘든 정서이고 결국 블루스는 미국에서만 먹히는 음악인가 싶었다. 그러나 최항석은 멜랑꼴리 대신 ‘한’으로 끈적임을 만들어 벌렸다. 블루스하고 어울리는 것은 진한 커피였지만, 최항석에게 어울리는 것은 뜨끈한 국밥이다. 한국 블루스가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이 밴드는 2019년 최고의 발견이자, 극찬이 전혀 아깝지 않은 밴드이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인디 밴드로서 그들은 쟁글 팝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복고적이면서 세련된 사운드는 익숙하면서 새롭다. 기존 독법에 새로운 해석은 그들의 음악관을 잘 보여준다. 몽환적이면서 동시에 명료한 문제작 <3080>의 가사처럼, “삶은 누구에게나 실험이고 중독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실험은 경계를 부풀리는 새로움”을 전해줄 것이다. 이 가사말은 그들의 음악을 대변하고 있다. 익숙함에 멀어지고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익숙한 독법 속에서 그 익숙함을 벗어나고자 한다. 일상은 늘 반복되지만 영원하지 않는 것처럼, 익숙함은 영원할거 같지만 영원하지 않다. 그들의 음악은 익숙한 장르 안에서 이질적인 부분은 계속 끄집어낸다. 그렇기에 그들의 음악은 익숙하면서 이질적인 모순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규정되지 않는, 구분하지 않는 끝없는 감정의 재생산”이다.
인디의 가치는 무엇인가? 사실 함부로 독단할 수 없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정의함 그 자체가 인디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음악덕후로서 인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상 속에서 나에게 새로움을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투박하지만 신선한 충격.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너무나도 잘 맞는 음악. 나에게 너무나도 와 닿는 음악. 그것이 인디의 매력이 아닐까.
연말을 기념할 당신만의 음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지만 좋은 노래를 찾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으니 말이다. 세상에는 들을 수 있는 노래는 많지만 나에게 다가오고 와 닿는 노래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오늘도 역시나 시 읽기 참 좋은 고독한 밤입니다. 오늘 함께 이야기 해 볼 주제는 ‘고독’인데요, 외로울 고(孤)에 홀로 독(獨), 이 두 한자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중국어로는 구두(GuDu)라고 발음하고, 일본어로는 고도끄(こどく) 라고 한다고 하네요. 같은 한자를 써서 발음도 비슷한가 봅니다. 러시아어로는 아진노체스트보(Одиночество)라고 하는데, 아진(один)이란 숫자 하나(1)를 뜻하고, 뒤에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추상명사형 어미 체스트보(чество)라는 어미가 붙어서 ‘혼자 있는 상태’라는 뜻이 되죠. 어느 나라에서든 고독이란 외로이 홀로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고독이란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고독이 필요하다!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홀로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온다고 하죠?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나만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죠. 사람들 만나서 얘기 듣는 걸 좋아하고, 왁자지껄 사람들이랑 모여서 놀면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혼자 방에 돌아와서 조용히 생각도 정리하고 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 틈에서는 내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거나, 하루를 곱씹어보거나 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가 어렵죠. 쉴 새 없이 일만 하는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도 사실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자기 개발적인 생각들을 하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독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고독하지 않고서는 시를 쓰기도 어려울 거에요.
오늘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도 고독해 보지 않고는 절대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오늘 먼저 만나 볼 시, 정진규 시인의 ‘연필로 쓰기’라는 시입니다. 혹시…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가 생각나시나요? 하하.
이 시를 읽으면, 홀로 있는 것의 힘이랄까, 고독한 사람만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감정들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시는 조금 길지만 천천히 한 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연필로 쓰기
정진규
한 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 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 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고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 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진규 시인의 시 ‘연필로 쓰기’ 들어 보았습니다. 연필로 쓰기와 우리 인생을 대비시켜서 표현을 하고 있죠. ‘연필로 글씨를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겁니다. 시를 쓸 때도 마찬가지로, 연필로 시를 쓰다가 시어 하나를 잘못 쓰거나 하면, 지우고 다른 단어로 고쳐 쓸 수가 있죠.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삶은 실수했다고 해서 그걸 지워내고 다시 그 시간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연필로 쓴 시를 고쳐 쓰다가 ‘내 삶도 이러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시 한 편 쓰는 것도 정말 쉬운 게 아니죠. 물론 시인마다 좀 다르겠지만, 창작의 고통이라는 게 거의 해산의 고통이랑 맞먹는, 그런 엄청난 노력으로 시 한 편이 쓰여진다고 하던데, 그렇게 어렵게 쓰여지는 시도, 쓰다가 틀리면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쓸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것조차도 안되니까,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지워버릴 수 없는 생애를 차곡차곡 살아내고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시인은 연필처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생애를 꿈꿉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간 길을 지울 수 있다는 얘기는, “떳떳했던 나의 길, 내가 살아온 진실의 길” 마저도 지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어요. 삶이 연필로 쓰는 것과 같다면, 잘못만 지우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것들도 같이 지워질 수 있겠죠.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떨 것 같으세요? 잘못은 지워지면 좋겠지만, 내가 이뤄낸 성과와 명성들까지 같이 지워진다면..?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지우고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럴지라도 괜찮다고 고백합니다. 잘못간 서로의 길을 고쳐서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살아왔던 길이 지워져도 좋다’ 라고 고백하고 있죠.
불가능한 것이지만 어쩌면 그 불가능함 때문에 계속해서 시를 써 나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은 다시 쓸 수 없기에, 이제라도 연필로 시를 쓰겠다, 시를 쓰듯 내 삶을 살겠다, 시가 곧 내 삶이다. 이러한 고백으로도 들립니다.
오늘, 고독에 관한 시 첫 번째 시로, 정진규 시인의 ‘연필로 쓰기’ 만나 봤는데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임재범의 <비상>이라는 곡 가져 왔습니다. 지금은 잠시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러 있지만, 그 고독을 원동력 삼아 이제 날개를 펴고 비상하리라 하고 노래하는 곡입니다. ‘고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 그 시간을 에너지로 삼아서 힘내시라는 의미로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 ‘고독’을 주제로 함께 하고 계신데요, 두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오세영 시인의 ‘바닷가에서’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여러분은 혼자 바닷가에 나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들과 다 같이 함께 바닷가에서 한 시간 노는 것과, 홀로 조용히 한 시간 바닷가를 거니는 것에는, 똑같이 한 시간을 머무는 것이지만 아마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늘 두 번째 시는 홀로 바닷가에 나갔을 때에만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세영 시인의 ‘바닷가에서’ 듣고 오겠습니다.
바닷가에서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오세영 시인의 시 ‘바닷가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홀로 나간 바닷가라고 해서 뭔가 굉장히 쓸쓸한 분위기일 것 같았는데요, 막상 시를 읽어보니 시 구절 하나 하나가 다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파도, 수평선, 일몰,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섬. 이 모든 것들은 바닷가에 가면 흔히 마주하는 것들인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스스로 낮추는 자의 평안’, ‘스스로 포기하는 자의 충족’, 그리고 ‘스스로 감내하는 자의 의지’를 읽어냅니다.
오늘 주제가 고독인 만큼, 이 시는 고독의 힘을 잘 얘기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지 않은 사람은 없거든요. 돈이 많든 적든, 얼굴이 예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한 번씩은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할 때가 있고,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로울 때가 분명 있는 법이죠.
외로움이 아예 없을 순 없겠지만,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그냥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흘려 보낼 게 아니라, 자신에게 좀 더 몰입하는 시간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더 발견하는 시간으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혼자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지 않으면, 아무 성찰 없이 하루를 살게 될 겁니다.
그런 고독의 시간이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곽재구 시인이 쓴 여행 에세이 중에,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충분히 견뎌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아파하고 방황한다. 이 점이 사랑이 찾아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요즘 쌀쌀한 날씨 탓에 고독에 찬 밤을 보내고 계신 분들! 내 인생에 귀한 시간이 찾아왔다 생각하시고, 견뎌 내면서 힘 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두 번째로 들려드릴 노래로 박효신의 ‘숨’을 가져왔어요. 가사와 멜로디가 참 위로가 되는 곡입니다. 이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힘 없이 멈춰있던 세상에 비가 내리고, 다시 자라난 오늘, 그 하루를 살아.”
여러분! 외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다 멈춰버린 것만 같은, 겨울 같은 때가 있죠. 하지만 그 시간들이 찾아왔을 때, 오늘 하루 쉴 숨이 있다는 것, 오늘 하루 쉴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 곁에 언제나 나를 변함없이 지켜주고 응원해주는 바다 같은 존재, 봄비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나눈 고독의 힘! 꼭 기억하시면서 하루 잘 마무리 하시길 바랄게요. 저는 2주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