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미학산책46-회화와 음악 그리고 시문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6-회화와 음악 그리고 시문학

 

1)

헤겔에서 예술 장르는 발전적이다. 조각은 부조가 출현하면서 회화로 넘어간다 회화는 색채의 마법을 통해 음악을 소환한다. 음악은 악극이 출현하면서 시문학[1]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시문학은 예술적 장르에서 최종적 형식이 된다.

시문학을 예술 장르의 최종적 형식으로 보는 관점은 시문학 이외에 다른 예술을 즐기거나 제작하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 것이다. 필자는 음악을 잘 모르는데, 시인인 필자의 한 친구는 음악을 모르는 필자를 약간 경멸적으로(?) 바라본다. 인간이 아니라 무슨 동물을 보는 듯한 표정이다. 그 친구는 음악이 예술의 최고 형식이다. 아마 그는 자신의 시가 음악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친구에게 헤겔 말을 전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만날지 모른다.

헤겔처럼 예술 장르가 발전적이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시문학이 다른 예술에 비해 탁월한 어떤 점을 지닌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동의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소개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화가 좀 식상해지기 시작했다.

영화는 음악과 회화, 드라마까지 포함하는 종합예술이지만, 핵심은 역시 눈에 보이는, 환상처럼 생생한 영화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눈에 보이는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힘드니, 그 세계는 아무리 풍성하게 만들어도 곧 진부해지고 만다.

이때부터 어릴 때 좋아했던 시가 다시 감동으로 다가왔다. 시인의 그 무한히 약동하는 상상력이 전율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에서 본다면 시문학의 탁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시문학처럼 아름다운 예술은 없지만, 거꾸로 시문학에서 한계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헤겔을 통해서 장르의 측면에서 본 시문학의 장단점을 논해 보기로 하자.

 

2)

시문학의 질료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호로서 언어 즉 문자나 음소가 아니라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로서 관념이 시문학의 질료가 된다. 기호로서 언어는 시문학적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2].

헤겔은 시문학의 질료는 다른 예술의 질료와 구분되는 독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시문학 이전의 다른 예술들은 모두 물질적인 자체를 질료로 사용한다. 회화에서 색이나 음악에서 소리를 헤겔은 이미 관념화된 물질[즉 빛이나 시간적인 것]이라 하지만, 그것은 물질성을 떠난 것은 아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은 그 자체가 물질성을 벗어난 관념적인 것이다.

헤겔은 회화와 음악을 다루면서, 질료의 관념화가 일어나면서, 낭만적 예술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낭만적 예술은 내밀한[innig: 자기 복귀하는] 주관성을 표현하는 예술인데, 주관성은 물질적인 질료(건축적 덩어리나 조각적 물질성)를 통해서는 표현되기 어렵지만, 관념적 질료는 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관념적 질료는 추상적 원소(음, 색)로 구분되면서 이 원소의 상호 관계를 통해 주관적 내면을 표현한다. 헤겔은 그 방식을 색채의 원근법이나 음악에서 화성을 통해 충분하게 보여주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 역시 그 자체로 분화되어 있다. 그것은 문장 속에서는 주어와 술어로, 형용사와 목적어로 관계하고, 다양한 문장형식에 따라서 고유하게 결합한다. 관념은 이런 복잡한 결합을 통해 거의 무한한 정신의 세계를 그려낸다.

회화에서 주관성은 사물을 보는 개별적 주관의 시공간적 위치, 입각 점에 머무른다. 회화에서 그려진 내용은 정신의 현상을 주관이 위치한 한 지점에서 일순간 보여줄 뿐이다. 음악에서 주관성은 심정적 수준인데 이는 상당히 일반적 수준(관습화된 감정)이지만, 감정에 한정된 수준이다. 회화나 음악에서 주관성은 감정을 통해 정신을 다만 간접적(상징적으로)으로 표현한다.

반면 시문학에서 모든 발화는 개인적 자아의 발화이지만, 이 자아는 이미 자기의식적이므로 자기를 넘어선 일반적 자아이다. 이 일반적 자아는 발화하는 자아를 규정하면서 발화하는 자아를 반성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므로 언어적 발화에서는 발화 주체와 동시에 언표 주체로 이중화한다.

시문학에서 이중적 자아는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 속에서 정신의 세계를 전개한다. 그것은 감정의 수준에서 일반적 사유의 수준에 이르는 포괄적인 정신의 세계를 표현핟다. 그런 점에서 시문학은 주관적 정신을 표현하는 가장 낭만적 예술이 될 수 있다.

 

3) 음악과 회화의 종합

회화는 색채를 통해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는데, 이런 형상은 정신이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현상이다. 회화는 이를 통해 정신을 명확하게 규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회화는 공간적 평면에 제약된다. 회화는 주관적 정신을 표현하더라도 공간적 평면에 나타나는 순간적인 모습일 뿐이다. 회화가 표현하는 순간적인 모습은 비록 내밀성[Innigkeit]을 지니더라도, 자기를 지양하는 운동을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회화는 한계가 있다. 회화가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벌이는 고투(예를 들어 몽타주 기법)를 생각하면 회화의 한계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시문학은 관념을 매개로 하고 이 관념은 그 자체에서 운동성을 지닌 것이므로 자기를 지양하는 정신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문학은 그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그 속에서 전개되는 드라마를 표현하니, 이런 점에서 회화보다 탁월하다.

 

“시 예술[Dichtkunst]은 회화처럼 어떤 특정한 공간에 제한되거나 어떤 상황이나 특정한 계기의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내적으로 심원한 대상과 그것의 폭넓은 시간적 전개가 표현될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3]

 

시문학의 탁월성은 음악과 비교해서도 드러난다. 음악은 음의 조합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지만 이런 감정적 표현은 정신을 다만 간접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건축물이 신상을 다만 둘러싸고 있을 뿐이듯이, 음악에서 감정적 운동을 통해 표현되는 정신은 모호하고 무규정적이다. 음악은 정신을 암시할 뿐이지 직접 표현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음악은 가사와 문학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려 한다. 음악의 출발점에서 가요로 시작했다. 고전 음악이라는 완성 단계에서 다시 악극으로 넘어간 것도 그런 감정의 모호성 때문이다.

시문학은 정신을 관념을 통해 직접 표현할 수 있으며, 정신이 내면 세계 속에 그려놓은 환상의 세계는 눈 앞에 있는 현실 세계보다 더 생생하고 명확하니, 그것은 자주 내면의 회화에 비유되곤 한다. 이 점은 시문학이 음악에 대해 갖는 탁월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정신은 [시문학을 통해] …감정에 그치는 내면성을 떠나되 그것을 여전히 판타지 자체의 내면에서 전개된 객관적 현실의 세계로 다듬는다.”[4]

 

회화와 음악과 비교해 볼 때 시문학은 한편으로는 내면의 회화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처럼 시간적 운동을 표현하니, 시문학은 회화와 음악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시문학은 ‟조형예술과 음악이라는 양극단을 한층 높은 단계에서 즉 정신적 내면성 자체의 영역에서 내적으로 통일하는 총체성이다”[5]라고 말한다.

 

4) 시문학의 한계

이상에서 시문학이 같은 낭만주의 예술 장르인 회화나 음악에 비해 갖는 탁월성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시문학은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니, 이 점에서 회화나 음악에 미치지 못하며 항상 회화나 음악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우선 시문학의 특징은 관념이 시간적인 계열을 이룬다는 데 있다. 조형예술의 경우 정신은 공간 속에서 동시에 표현되는 반면, 동일한 정신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시문학의 경우에서 그 표현은 시간적으로 계열화되어서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시문학은 조형예술에 비해 한계를 지닌다. 조형예술은 공존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으므로, 여기서 무한히 세부적인 요소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시문학의 경우는 관념은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만 표현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 관념은 아무리 구체적인 이미지의 수준으로 내려가더라도 일반성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문학이 아무리 시간을 들여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하더라도 공간적인 세부를 조형 예술처럼 세부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문학은 공간적으로 병존하는 것 가운데 필요한 요소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음악은 소리의 강도[强度: Intensity]를 통해 내적 감정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니, 감정을 산출하는 데서 가장 직접적이며 더구나 시대와 민족의 제약을 벗어나 보편성을 지닌다.

반면 시문학의 매체인 관념은 아무리 구체적인 이미지더라도, 감정을 직접 타격하지 못하는 관념적인 것에 머무른다. 그것이 울리는 것은 감정의 관념 또는 감정의 이미지이지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다. 만일 감정을 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시문학은 음악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진다고 하겠다.

시문학은 앞에서 말했듯이 회화나 음악에 비해 탁월성을 지니지만 반대로 한계도 지니고 있으니 시문학은 자주 회화나 음악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그림 책이 등장하는 이유나 시가 가요화하는 지점을 생각해 보면, 시문학의 이런 한계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보편 문학의 개념

시문학의 매체가 이처럼 정신을 정신 속에서 표현하는 관념이므로, 시문학은 모든 시대 모든 예술 형식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시문학은 정신을 수수께끼와 같은 암시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며, 정신이 현현하는 모습을 언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고전적 현상으로도 표현할 수 있고, 또한 현상이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 자체를 가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헤겔은 시문학을 보편적 예술이라 하는데, 그의 보편 문학 개념은 그와 동시대 예술 이론가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보편 문학 개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의미는 상이하다. 슐레겔은 자기 스스로를 넘어서는 아이러니 개념에 따라 문학은 문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문학은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우선 문학은 소설과 시, 극이 뒤섞일 수 있으며, 산문인 철학과 역사 자기 비평까지 포함한다.[6]

반면 헤겔에서 문학의 보편성이란 다양한 형식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문학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출현했다는 의미이다.

시문학이 이처럼 예술에서 정점에 이른 보편적 예술이므로 시문학은 동시에 정신의 표현이 예술을 떠나는 지점이기도 한다. 예술의 특수성은 곧 감각적 질료를 통해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이 자기를 지양한다는 것은 곧 특수한 감각적 질료를 넘어선다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회화와 음악을 통해 질료가 관념화되면서 시작했다. 마침내 문학에 이르러 감각적 질료의 관념화는 완성된다. 하지만 여전히 감각적 관념이 예술의 질료가 된다. 시문학은 예술의 특수성을 지양하는 가운데 보편적으로 된다.

이제 문학을 넘어서면서 정신은 감각적 관념의 지반을 떠나 일반적 사유의 지반에 이르게 된다. 정신은 사유의 지반에서 자기를 표현하니, 그것이 곧 철학이다. 예술은 자기를 넘어서 철학으로 넘어 들어가게 된다.   정신의 표현은 처음 종교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런 다음 예술로 넘어갔고 이제 마지막으로 정신에 대한 철학적 표현이 등장한다.


[1] 헤겔은 문학[Literature]이라 하지 않고 시[Poesie]라 말한다. 전자는 문자로 된 것을 다룬다는 의미이니 매우 포괄적이다. 역사 철학, 웅변 등 산문도 하나의 문학으로서 포함할 수 있다. 반면 시문학이라 하면, 그리스어 제작[Poesie]에서 나온 것이며, 이미 현실을 넘어서 어떤 형상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니, 여기서는 산문이 예술에서 제거되면서 시문학은 상당히 제한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시라고 하면 문학의 한 특수 분야를 말하나 헤겔은 극시나 서사시까지 포함하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번역상 시가 아니라 시문학이라 번역한다.

[2] 기호와 관념 사이의 관계는 언어 이론의 핵심 문제인데, 여기에 다양한 이론이 제시된다. 이 자리에서 이런 언어 이론을 충분하게 논의할 수는 없으나, 주를 통해 간단하게 헤겔의 입장을 소개하기로 하자. 기호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는 본질론자가 오랫동안 언어이론을 지배해왔다. 19세기 비교 역사 언어학자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벤야민 등의 이론이 그러하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훗셀 등 현상학자를 통해 의미가 의식의 지향작용에 내재하면서도 초월하는 존재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의식의 지향작용에 내재하는 측면을 언어의 언사[言辭]의 측면이라 하며 초월적 의미는 그런 언사측면을 둘러싸여 있다고 보면서 언어의 언사적 측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20세기 중반에 언어혁명을 일으킨 구조주의자는 언어의 의미가 구조적 관계를 통해 결정된다는 측면을 강조했으며, 이런 구조적 관계는 언어의 사용되는 삶의 공간을 통해 규정된다고 본다.

헤겔의 경우, 의미론은 여러 논의에서 분산적으로 설명되었다. 그의 논의는 아래 네 가지 측면으로 종합할 수 있겠다.

①그는 본질론적 언어 이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호와 언어의 의미는 상징적 관계이며, 의미는 관념 내에서 객관적인 것 즉 객관적 관념[reell]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며, 문화와 사회의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동시에 ②그의 언어 이론에서 단어의 의미가 주어 술어라는 문장의 구조 속에서 결정된다. 같은 단어라도 주어로 사용되는 경우와 술어로 사용되는 경우 그 의미는 다르며, 어떤 단어가 어떤 판단 구조 속에 들어 있는가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진다. ③세 번째로 헤겔에서 언사나 표현의 문제를 절대정신을 다루면서 설명했다. 절대정신 즉 종교와 예술, 철학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④헤겔은 발화주체와 언표 주체의 구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문장을 발화하는 자아는 자기의식이어서 스스로 자기 내 반성하므로 여기서 발화 주체와 언표 주체가 분열된다. 이런 분열 때문에 판단은 다른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다.

[3] 미학강의 3권, 232쪽

[4] 미학강의 3권, 233쪽

[5] 미학강의 3권, 231쪽

[6] 필자는 언젠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쿠의 ‘방랑자’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소설과 철학, 에세이, 논문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작품이니, 슐레겔의 보편문학에 가장 접근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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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5-수반음악과 자립음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5-수반음악과 자립음악

 

1) 시문학과 음악의 결합

앞에서 건축과 음악이 공통적으로 수학적 비례 법칙을 지닌다는 점에서 비교되었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고 음악은 생동하는 건축이다. 또한 헤겔은 음악을 시문학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시문학과 음악은 공통적으로 소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소리의 역할은 서로 다르다. 시문학에서 소리는 관념을 담지하는 상징적 기호, ‘독자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관념의 표시자’일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소리는 다른 소리와 변별성을 지니므로, 언어 기호로 사용될 수 있다. 반면 음악에서 소리는 그 자체가 질료 즉 형상화의 수단이다. 음악의 질료인 음은 양적 크기를 지닌 것이며, 이런 양적 크기 자체가 주관의 시간적 평면 위에서 일정한 청각적 인상을 남기면서 음악이 탄생한다.

시문학과 음악 사이의 비교는 정신과 관계해서 볼 수 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은 이미지와 상상, 환상 등과 같은 감각적 관념이다. 이런 감각적 관념은 사유의 추상적 관념을 비유적으로 즉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음악은 선율을 통해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지만 이런 감정은 정신을 ‘에워싸는 옷’에 불과하니, 음악을 통해서 정신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표현될 뿐이다. 헤겔은 음악은 정신에 대해 ‘무규정적인 공감’ 이상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예술의 목표가 정신을 드러내는 데 있다면 이런 점에서 내밀한 감정의 표현에 머무르는 음악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음악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직접 드러내는 시문학과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신을 직접 드러내는 시문학이 감정의 내밀성을 전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를 위해 음악의 도움을 빌리려는 시도와 맞물려 있다. 그 결과 음악과 시문학의 결합인 합창이나 악극이 출현한다.

그러나 음악과 시문학은 질료의 서로 다른 특성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충돌은 시문학과 음악을 통일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오페라가 다시 내부에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분열되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이런 차이 때문에 양자의 결합은 완전한 통일보다는 서로에 대해 종속적인 결과가 된다.

비극에서 합창, 악극에서 음악이 끌어들여질 때, 음악은 시문학을 위해 봉사하는 부수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경우 음악은 차라리 낭송에 가까워진다. 반면 노래에서 시문학이 끌어들여질 때 사실 가사는 음악에서 표현 불가능한 정신을 표현하여 내밀한 감정을 더 강화하려는 종속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경우 가사는 무척이나 단순하게 된다.

 

2) 음악의 두 유형

헤겔은 다른 장르의 경우에는 역사적 발전과정을 서술했으나, 음악 장르에서는 그런 역사적 서술을 생략한다. 대신 그는 음악적 표현 수단과 정신적 내용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이 절(음악 장 3절)에서 그는 음악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수반적 음악이며 다른 하나는 자립적 음악이다. 이런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시문학적 가사 즉 텍스트와 어떻게 관계하느냐이다. 한편으로 음악은 가사를 넘어서려 하며, 다른 한편으로 가사는 음악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기도 하니, 음악은 가사를 버리고 싶으나 버릴 수도 없다.

수반적 음악은 정신적 내용을 강조하면서 시문학과 관련을 가지는 음악이다. 헤겔은 이를 세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서정적 노래와 찬송의 노래 마지막으로 악극이다. 서정적 노래가 그 출발점을 이루며, 찬송의 노래(칸타타, 오라토리오 등)는 바로크 시대 정점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악극(오페라)은 근대 이후에 등장했다. 반면 자립적 음악은 음악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강조되는 음악이다. 여기서 음악은 시문학으로부터 독립하여 고유한 형식적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런 설명 속에서 어느 정도 음악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짐작할 수는 있다. 아마도 헤겔은 음악의 역사가 전 근대적 수반적 음악에서 근대적 자립적 음악으로 그리고 다시 근대적 수반적 음악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음악을 과연 엄격하게 역사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때문에 음악을 다만 유형적으로 분류하고 말았던 것 같다. 여기서는 헤겔의 입장에 따라서 종류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3) 수반적 음악

수반적 음악은 음악이 시문학과 관련하는 것이어서 수반적 음악이라 한다. 수반적 음악의 효시는 개인의 사랑의 기쁨과 헤어짐의 슬픔을 노래하는 서정시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이다. 시문학을 통해 완결된 내용에 내밀한 감정을 입히기 위해 음악이 사용되고 이미 단순한 낭송적인 것을 넘어선다. 따라서 음악은 화성보다는 선율을 따르며, 기악보다는 성악이 위주였다.

음악적 표현방식이 발전하면서 음악적 감정은 강화되며 순화된다. 이제 감정은 그 토대가 되는 자연적 감정 수준을 떠나서 자유롭게 자립적으로 울려 퍼지게 된다. 영혼은 음악을 통해서 “열정의 도취한 광란과 소용돌이치는 소란으로 찢기지 않으며” “기쁨의 환호와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로움을”[1] 느낀다.

음악이 더욱 자유롭게 되면서 이제 음악은 정신에 봉사하는 음악으로 발전한다. 음악은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처럼 텍스트에 맞추어 무한한 숭배나 경배의 감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한다. 구체적으로는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 음악에서 그 단초가 보이며 바로크 시대 교회음악에서 발전하였다.[2] 여기서 성악과 기악, 선율과 화성은 상호 균형과 통일을 이룬다.

음악의 내용과 형식 역시 하나로 통일된 최고의 수준에 이른다. 형식적 측면에서 “일체의 것은 제어된 형식 속에서 굳게 서로 결속하며” 내용적으로는 무한히 내밀한 감정이 지배하니, ‘정신의 고요’ 와 ‘지복의 평온’이 흐른다.

 

“고통이 영혼을 아무리 깊숙이 엄습할 경우라도 다양하게 펼쳐지는 음악들 자체의 향유 속에서 아름다움과 지복, 판타지의 단순한 위대함과 형상화를 발견한다.”[3]

 

여기서 음악은 “예술로서 예술의 향유, 자기 만족하는 영혼의 선율적 소리”[4]에 이른다.

 

“가슴은 … 자기 자신의 청취에 몰입하며 또한 오로지 그럼으로써 마치 순수한 빛이 자기 자신을 보듯이 지복의 내면성과 화해한다는 것에 관한 최고의 표상을 제공한다.“[5]

 

수반적 음악의 마지막은 오페라와 같은 악극의 형식이다. 이 유형은 근대에 음악이 자립적인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정신적 의미를 벗어나 형식적 아름다움에 심취해 들어간 경향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 근대의 절대음악의 출현과 동시에 오페라, 오페레타가 발전한다.

오페라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서창: 敍唱)로 이루어지는데, 아리아는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므로 선율적인 것이며, 음악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서창은 사건의 진행을 서술하므로, 음악은 낭송에서처럼 텍스트에 대해 종속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말의 특수한 내용이 음의 특정한 길이와 강약 고저에 각인된다.

그러므로 오페라는 “말에 대해 상대적으로 높이 떠 있는 선율적인 것”과 “말에 대해 최대한 가깝게 맞닿고자 하는 서창적인 것”[6] 사이에서 매개를 달성하고자 한다. 헤겔은 이 매개 과정에서 서창은 분산적이니, 통일성으로서 선율이 항상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그리고 각각의 내용 속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내밀성에 몰두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통일 속에서 정신화되어 있는 심정의 정조이다. 그런 정조의 자기 표현은 선율 자체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선율적인 것은 … [심정의 정조와] 동일한 통일성이며, 자기 내로 완결된 복귀이기 때문이다.”[7]

 

4) 자립적 음악

바로크 시대 성악과 기악, 선율과 화성,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통일 상태를 지나게 되면, 음악은 정신에서 풀려 나와서 거침 없는 자유 속에서 자립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성악보다는 기악이 중심이 되며, 음악적 선율은 화성의 법칙을 통해 화려하고 풍부하게 전개된다. 이제 음악적 향유는 음악이 담지하는 정신적 의미에서보다 오히려 음들이 자체 내에서 전개하는 어울림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음악의 고유한 형식의 측면은 완성에 이른다. 그 이전 음악은 시문학 텍스트의 강제적 지배 아래 있었고 종교음악에서 제의나 악극의 경우 다양한 연극적 요소가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고 만다. 이제 음악은 이런 비음악적 요소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한 상태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절대음악, 순수음악이라 불리는 자립적 음악을 추구한 모차르트는 베토벤 등 고전음악을 음악의 정점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헤겔은 자립적 음악을 완성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음악이 단순한 기교로 전락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순수 음악 또는 절대 음악에서는 음악적 정신적 의미는 더욱 모호하게 되고 심지어 전적으로 결여될 수도 있다. 이런 음악은 정신의 표현으로서 예술을 벗어나게 된다.

음악이 정신으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이제 음악은 전문가의 것이 되며 작곡가는 정신적 성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은 작곡의 재능이 아주 어린 나이에 발전할 수 있거나, 풍부한 재능의 작곡가가 의식 없는 빈곤한 인간의 상태를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음악은 이런 형식적 향유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음악도 예술이기 위해서는 정신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음악 속에 정신적 내용을 다시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출현하게 된다.

 

“한층 깊은 음악은 기악음악에서조차 내용의 표현과 음악의 구조라는 두 측면에 같은 주의를 기울일 때 성립한다.”[8]

 

5) 음악에 대한 구체적 평가

헤겔은 음악의 유형을 서술하면서 틈틈이 여러 음악에 대해 평가했다. 헤겔은 자신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관현악의 대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해서는 평가가 인색하다. 모차르트는 예로서만 언급하며, 베토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헤겔에게서 수반음악 가운데서도 내밀함 감정을 표현하는 종교음악이 최고인데, 그는 마태수난곡과 같이 오라토리오의 형식을 통해 한편으로 화성악적인 완성을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텍스트에 봉사하는 음악을 높이 예찬했다.

같은 수반음악이라도 이탈리아에서 주로 발전한 오페라나 오페레타의 형식에 대해서는 은근히 비판적이다. 그러면서도 음악이 앞으로 전개되는 방향은 그런 오페라적 형식이라고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란 장르 자체로만 본다면 이런 기악, 관현악, 절대음악이 가장 순수한 음악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헤겔이 절대음악을 최고로 간주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 장르의 자체 내 한계 때문에 시문학과 결합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다. 더구나 헤겔이 예술의 목표를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한 불가피했을 것이다. 여기서 헤겔에서 예술 장르론과 예술 형식론 사이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헤겔에서 음악의 미래는 오페라다. 헤겔이 바그너의 음악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헤겔은 화성악을 넘어서서 시문학에 다가가는 바그너의 음악을 바흐처럼 높이 평가했을까? 


[1] 미학강의 3권, 202쪽

[2] 헤겔은 이 시기 바흐를 대표적 작가로 거론한다. 미학강의 3권, 217쪽

[3] 미학강의 3권, 203쪽

[4] 미학강의 3권, 204쪽

[5] 미학강의 3권, 204쪽

[6] 미학강의 3권, 208쪽

[7] 미학강의 3권, 209쪽

[8] 미학강의 3권, 222쪽

헤겔미학산책44-화성과 선율 그리고 정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4- 화성과 선율 그리고 정신

 

1) 음악의 핵심

음악의 핵심은 무엇일까? 흔히 서양 음악이나 근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의 핵심은 화성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화성악적인 찬란함을 보여주는 기악이나 관현악을 음악의 최고봉으로 삼는다. 하지만 일반인에게서 이런 화성악적 음악은 어렵다. 많은 비 서양, 비 근대 음악은 화성악적인 요소가 드물고 주로 선율을 통해 전개된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율은 마음을 사로잡으니, 성악이나 오페라, 가요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화성이냐, 선율이냐 하는 논쟁에 대해 헤겔은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이런 물음이 헤겔의 음악 장르 분석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음악론을 읽어보면 누구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화성과 선율의 의미를 알아 보아야 하는데,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미리 사과하면서 시작한다. 음악에서 “세부 기교의 규정 즉 음의 양적 관계, 악기, 조성, 화음” 등이 중요하지만 자신은 “이 영역을 답사한 경험이 거의 없으므로, 일반적 관점과 단편적인 언급들에 그칠 뿐”[1]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가 음악의 구체적 기법을 잘 모른다는 것을 말할 뿐, 그가 음악을 즐기지 않거나 음악의 원리를 모르거나 음악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심지어 음악의 구체적 기법에 관해서도 일반인이 이해하는 간단한 원리 정도는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필자 역시 음악에 관한 한 헤겔보다 더 모르니 그저 그의 언급을 따라 살펴보는 데 그치기로 하겠다.

 

2) 음악의 형식

음악은 소리가 주관의 내면성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소리가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는 피타고라스 이래 일찍부터 탐구되어 왔다. 템포, 박자, 리듬을 거쳐 화성에 이르는 음들의 관계는 수학적인 비례를 통해 규정된다.

그 출발점에 있는 템포는 대체로 인간의 심장 박동의 규칙성에 따른다고 보는데, 헤겔은 이를 단순한 자아의 반복을 통해 자연의 흐름을 규제함으로써 인간의 자아가 “자기를 지양하여 객체로 되며 다시 대자존재로 되돌아 와서” “자기 관계하는 것”[2]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박자는 세부 단위로 템포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니 빠르고 느린 등 음악 전개의 속도를 규정한다. 헤겔은 이런 박자를 건축의 열주나 창문이 배치된 간격에 비교하면서 인간은 “이런 박자를 통해 자기를 재 발견하며 그 속에서 만족을 얻는다”[3]고 한다.

박자는 음의 강약 즉 악센트와 결합하면서 규칙적인 리듬이 된다. 리듬에 이르러 음악적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리듬은 인간의 활동의 리듬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삶의 다양한 형식, 춤추거나 의식을 거행하거나 행진하는 등의 리듬은 음악적 리듬과 합치한다.

리듬은 음색과 결합된다. 음색은 악기가 내는 음향학적인 배음들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배음의 관계는 악기마다 독특하며 여러 악기의 음색은 서로 어울리거나 대립한다. 헤겔은 교향곡에서 여러 악기들이 서로 응답하면서 교차하는 것이 마치 “연극적인 연주, 일종의 대화처럼”[4] 들린다고 말한다.

음악형식과 관련해 최후로 헤겔은 화성을 설명한다. 일정한 비율로 추상화된 음들의 관계에 따라 음계가 형성된다. 여기서 음정의 배치가 중요한 데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곧 으뜸음이다. 으뜸음에 따라 결정되는 음들의 배치 방식에 따라서 화성이 결정되고 이는 다양한 감정과 연결된다.

 

“”그것들의 으뜸음을 통해 특정한 특성을 갖는데, 이 특성은 다시 나름대로 특정한 방식의 감정 즉 한탄, 기쁨, 슬픔, 고무적 선동 등에 상응한다.”[5]

 

전체적으로 보아서, 리듬과 화성 등은 음들의 관계를 다루는데, 여기에는 수학적인 비례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이처럼 수학적 비례 법칙이 지배한다는 측면에서 헤겔은 음악과 건축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건축이 얼어붙은 음악이라면 음악은 생동하는 건축이라는 것이다.

 

3) 선율

음악의 리듬과 화성이 음악을 풍부하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 자체로서 감정적 즐거움이나 카타르시스를 주기는 한다.

하지만 헤겔은 음악에 이런 측면만 있다면 그것은 마치 내용이 없이 공허한 형식에 탐닉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 경우 음악은 본격적으로 예술이 될 수 없으며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요소 안에 정신적 것이 표현될 때 비로소 참된 예술로 고양된다는 것이다.

 

“화성은 … 박자나 리듬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이미 본격적 음악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유로운 영혼이 산책하는 실체적 토대이자 합법칙적 마당이며 터일 뿐이다. 음악의 시적인 요소인 영혼의 언어는 내면의 열락과 심정의 고통을 음으로 분출한다.”[6]

 

“이런 분출 속에서 감정의 자연 폭력을 완화하여 자신을 그 너머로 제고한다. 까닭인즉 그 언어는 당장의 감동에 휩싸인 내면의 상태를 내면 자체의 청취, 자신 곁의 자유로운 머무름으로 만들며 또한 바로 이를 통해 심정을 기쁨과 고통의 핍박으로부터 해방하기 때문이다.”[7]

 

즉 음악은 그 속에 영혼의 언어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음악은 자연적 감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며,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 음악은 정신적 높이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 높이에 도달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선율 즉 멜로디의 역할이다. 이 선율은 음의 운동이지만, 그 운동은 이제 수학적 비례 법칙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런 선율은 수학적 비례 법칙에 엄밀하게 종속하는 음악의 형식 즉 리듬, 화성을 넘어서 독립적으로 떠돈다.

음악은 “영혼의 가장 내적인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삶과 운동을 내용으로 삼으므로 자유로운 내면성과 양적인 근본 관계 사이에 가장 심각한 대립으로 분열된다. 하지만 음악은 이런 대립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을 자신 속에 수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난제도 지닌다.”[8]

이제 “일체의 모순과 불협화음이 호출되면서”, 이런 모순 대립 속에서 다시 조화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가운데, “선율적 평온의 승리를 축하한다.” 헤겔은 이런 투쟁은 “화성적 관계가 지닌 필연성”과 “비상[飛翔에 자신을 맡기는 판타지의 자유의 투쟁”[9]이라고 한다. 이런 투쟁을 통해서 정신은 감정에 지배되는 “우연적 자의의 주관성을 벗어나” “자기의 참된 독자성을 드러낸다”[10]고 한다.

리듬과 화성의 법칙을 따르는 음악은 엄밀하게 수학적이다. 그러나 선율에 이런 불협화음과 우연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음악은 산만성을 지닌다. 마치 만화경이 무한히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은 자유롭게 유희하는 듯 보이며 그 결과 산만한 느낌을 준다. 음악의 자유로움은 재즈나 산조와 같은 비정형 즉흥적 음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체로 음악은 통일성을 준수하거나 주관적인 생동성을 띠고 나가면서도 자의적으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가 하면, 같은 방식으로 이리저리 구부러져 가다가 변덕스럽게 정지하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갑자기 삽입하기도 하며, 다시 흐르는 듯한 음조 속에 자기를 내맡기기도 한다. …음악은 이미 주어진 형태들 밖에서 움직이므로 음악을 붙드는 그러한 자연의 영역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법칙과 형태의 필연성은 주로 음들 자체의 영역에 해당한다.”[11]

 

음악은 선율 때문에 산만성을 가지지만 이런 요소는 다시 극복되면서 선율의 평온이 회복되어야 한다. 헤겔은 선율과 화성의 관계를 ‘자세와 골격의 관계’에 비유한다. 즉 견고한 골격이 부적절한 자세와 운동을 막고 적절한 자세와 운동을 지지하듯 화성은 선율 움직임의 자유를 위해 지지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4) 선율과 정신

문제는 이런 선율과 정신의 관계이다. 헤겔은 선율은 근본적으로 닮음이라는 고전적 형상화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헤겔은 오히려 그 관계를 상징적인 관계로 보면서 건축과 음악을 다시 한번 비교한다.

건축의 공간은 외적인 형태를 갖는다. 이 형태는 자연법칙에 구속되지만 형태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 즉 덩어리는 정신과 관계해서 상징적인 관계를 가진다. 건축은 기능적 합목적성에 따라서 신전이며 왕궁이나 주택이 된다.

음악의 경우 헤겔은 그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차라리 감정의 요소만을 표현할 수 있으며 건축이 자신의 영역에서 신상을 오성적 형식의 열주들 … 로 에워싸듯이, 그 자체로 언표된 정신적 표상을 감정의 선율적 음향으로 감싼다.”[12]

 

“지극한 깊이의 내면성과 영혼뿐만 아니라 극히 엄격한 오성 역시 음악을 지배하며, 그리하여 음악은 서로에 대해 독립적으로 되기 쉬운 이 두 극단을 자신 속에서 통일한다.”[13]

 

여기서 건축이 정신을 에워싸듯이 음악 역시 정신을 에워싼다고 말한다. 에워쌈에서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은 곧 선율이다. 즉 선율 자체는 리듬이나 화음을 넘어서 전개된(불협화음까지 포함한) 음의 특정한 관계이며 이로부터 어떤 감정이 출현한다. 이렇게 선율에서 표현되는 감정은 자체 내에 어떤 정신적인 것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에워싸는 방식을 통해 정신을 표현하니, 건축과 마찬가지로 상징적 관계를 갖는다.

감정적 선율이 정신적 표상을 어떻게 에워쌀 수 있을까? 헤겔은 음악이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을 다루면서 세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첫 번째 방식은 감정을 무한하게 즉 내밀하게 만듬으로써 정신적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음악은 [조형예술처럼] 가시화를 위해 작업하려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내면성을 내면에 포착하는 일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음악은 내용 자체의 실체적 내적 심연이 심정의 심연으로 파고들도록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내용의 생명과 역동을 개별적 주관의 내면에서 묘사하되, 주관적 내밀성 자체를 그 본격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다.”

 

여기서 헤겔은 음악은 오직 감정만을 묘사하는데 그치지만 다만 그 감정은 자연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무한히 순수하게 되니, 헤겔은 이를 곧 내밀한 감정이라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승리의 기쁨을 무한히 고양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며, 영웅의 죽음 앞에 느끼는 연민을 가장 깊게 표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와 음악 사이의 연관성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는 “영혼상태의 … 생생하기 그지 없는 직접적 표출이자, 심정의 ‘아’와 ‘오’이며” “영혼의 자기 생산. 영혼의 영혼으로서의 객관성”[14]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감정적 언어는 음악적 선율의 출발점이 된다.

이런 관점을 확대하면, 관념을 표현하는 언어의 청각적 특징이 음악의 출발점으로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사실 많은 노래는 특히 오페라에서나, 판소리 등에서 보듯이 언어의 청각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론 언어의 리듬과 화성이 음악의 리듬과 화성과 완전하게 평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는 대립 속에서도 평행한다.

이런 점에서 노래는 가사에 옷을 입힌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음악과 내용의 관계는 표상과 언어의 관계로 환원된다. 표상과 언어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기호적 연관일 뿐이니 이 역시 상징적이다.

세 번째는 음의 전개와 내용의 본성이 상응하는 경우이다. 어떤 면에서는 내용의 본성은 조형 예술의공간적 방식보다는 시간적인 음악적인 방식이 더 적합하게 상응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내용은 서사적 시간적 요소를 가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음악은 내용을 내용의 내적 관계와 친화적인 음의 관계 속에 감응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용이 빠르게 전개되는 경우, 음악도 빠르게 나가는 경우를 말할 것이다.

 

5) 음악의 한계

위의 세 가지 경우 가운데 음악에서 핵심적 방식은 역시 첫 번째 방식이다. 음악은 감정을 순수하고 무한하게 표현하면서 정신을 표현하니, 그런 한에서 음악 자체는 낭만적 예술이 된다. 주관의 내밀한 감정은 낭만주의 시대 와서 비로소 예술적 표현의 주요 내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이 표현하는 내용은 주로 낭만적 정신이고, 그 질료 역시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낭만주의 시대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음악은 주관의 내밀성이라는 낭만적 정신을 무한한 감정을 통해 표현한다. 무한한 감정 자체는 낭만적이지만, 그 감정과 그 시대의 정신적 실체 사이의 관계는 상징적이다. 양자 사이에는 직접적 관계는 없으며 그 관계는 모호하다. 이 경우 내용과 감정은 비밀스러운 상징처럼 서로 구분할 수 없게 얽히게 된다. 내용은 감정 속에서 “비밀스러운 심연으로서 살아간다.”[15]

음악은 한편으로 고양되고 순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서 그 어느 예술보다 탁월하다. 다른 한편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정신의 내용은 감정에 그치고 그 나머지 실체적 내용은 수수께끼처럼 감추어져 있으며, 정신의 풍부한 내용을 모호하게만 표현된다.

그 결과 음악에서 아주 짧은 테마는 무척이나 깊은 감동을 주지만, 조금만 길어지면 같은 것이 되풀이 되는 것과 같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고전 관현악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신적 실천적 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것은 음악이 지닌 장점과 한계는 음악가를 대표하는 오르페우스의 신화에서 잘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하데스까지 감동시켜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해내지만, 그의 음악은 자기 내에 머무르면서 음악의 정신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디오니소스 신도 바카이에 의해 살해된다. 음악이 지닌 한계 때문에 음악은 불가피하게 시문학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1] 미학강의 3권, 145쪽

[2] 미학강의 3권, 171쪽

[3] 미학강의 3권, 172쪽

[4] 미학강의 3권, 182쪽

[5] 미학강의 3권, 186족

[6] 미학강의 3권, 190쪽

[7] 미학강의 3권, 190쪽

[8] 미학강의 3권, 168쪽

[9] 미학강의 3권, 194쪽

[10] 미학강의 3권, 192쪽

[11] 미학강의 3권, 150쪽[번역은 필자 자신이 수정한 것임]

[12] 미학강의 3권, 146쪽

[13] 미학강의 3권, 148쪽

[14] 미학강의 3권, 157쪽

[15] 미학강의 3권, 159쪽

헤겔미학산책43-심정의 예술로서 음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3-심정의 예술로서 음악

 

1) 음악의 질료

낭만주의적 장르의 두 번째 형태가 음악이다. 많은 사람이 음악 장르가 특별하다는 점에 대해 언급한다.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 마음을 직접적으로 흔든다. 음악은 시대와 민족을 뛰어넘어 감동을 준다. 음악은 심정을 무한히 고양시켜 탈아 상태에 이르게 한다. 등등. 이런 음악의 일반적 독특성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 질료 또는 매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음악의 질료는 소리이다. 헤겔에서 이 소리는 물체의 진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체를 이루는 부분은 응집된 상태에서 고정되어 있다. 물체의 부분이 충격을 받으면 진동하게 된다. 진동은 물체의 부분이 제 자리를 이탈하였다가 다시 제 자리로 복귀하는 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이다. 헤겔은 이를 자기를 부정하고 부정된 자기를 다시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헤겔은 진동이 물체의 공간적 고정성을 극복하는 운동이며 이를 통해 물체 내에 잠재하는 운동성이 밖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물체의 운동성이 해방된다고 말한다. 물체에 대립하는 순수 운동성으로서 빛이 물질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관념화라면, 물체의 진동은 두 번째 관념화에 해당한다. 진동은 빛처럼 물체에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운동이 아니라 물체 내에서 나온 운동이다. 헤겔은 진동을 ‘역학적인 영혼성[mechanische Seelenhaftigkeit]’[1]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질료를 통해 더 이상 정태적 질료적 형상이 아닌 최초의 한층 관념적 물질[ideelle[2]]인 영혼성이 나타난다. … 음은 진동 즉 공간적 상태의 지양이지만, 반작용에 의해 다시 자기를 지양하는 것이므로 이중적 부정이다. 따라서 이런 음은 발생 속에서는 외면성은 그 현존재를 통해 자신을 다시 폐기하여 그 자체로 사라지고 만다.”[3]

 

진동은 물체의 속성에 따라 다양하며, 또 전달되는 매질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는데, 그 가운데 음악적 소리는 가청적인 비교적 고른 음을 내는 진동이 공기 중에 전달되는 소리로 제한된다.

 

2) 소리의 가상성

진동은 운동성의 해방이기는 하지만 다시 물체로 복귀하고 마는 것이어서 그것이 내는 소리는 일시적이다. 소리는 공간적 형태와 같이 존속하지 않으며, 한번 울렸다가는 곧 바로 사라지는 것이니, 이런 일시적인 소리 그 자체로서는 음악의 질료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소리는 일시성 때문에 서로 끊어지면서 다양한 소리로 분화될 수 있다. 빛이 분화된 색채가 가상화되면서 회화의 질료가 듯이 소리도 분화되면서 비로소 예술적 질료가 될 수 있다. 색채가 다른 색채와 대비되어 의미를 지니듯, 소리는 다른 소리와 대비되어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빛은 타자적인 물체에 반사되면서 분화되지만, 태어나면서 이미 분화되고 결합 가능한 소리는 색채 이상으로 가상적인 질료가 된다.

가상적 질료는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할 수 있으니, 낭만적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소리는 색채보다 더 가상적이므로,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질료가 될 수 있다.

 

[소리 자체는] “이미 물질적 관념[ideell]이지만, 이런 물질적 관념의 현존을 포기하면서, 내적인 것에 적합한 표현방식으로 된다.”[4]

 

색채가 되려면 빛의 외부에 반사의 평면이 필요하다. 이 반사 평면에서 색채는 공존할 수 있기에 서로 대비되면서 주관성을 표현한다. 일시적인 음이 대비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음이 보존되면서 시간적으로 지속하는 지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지반은 무엇일까? 음이 서로 대비되는 평면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처럼 어떤 시간적 지속체가 있는 것이라면, 그런 지속 위에서 소리가 서로 대비될 수 있겠다. 하지만 헤겔은 시간적 지속체를 상정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헤겔은 시간적 지속이 주관의 내면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본다.  

소리는 인간의 주관적 내면 속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며 과거 보존된 소리는 현재 다시 받아들여지는 소리와 더불어 하나의 시간적 공존을 이루게 된다. 소리는 시간적 내면의 평면 속에서 보존되면서 서로 연관을 맺는다.

회화의 질료가 색채이지만 그 색채는 공간적 평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만큼 회화에서 공간적 평면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음악의 질료는 소리이지만, 그 소리가 지속되는 주관적 내면이라는 바탕이 없으면 소리로만은 음악의 질료가 될 수 없다. 그만큼 소리가 연관되는 주관적 내면성이 음악에서 중요하다.  

색채가 나타나는 평면은 외면적 공간이지만 음악이 나타나는 평면은 내면적 평면이다. 회화가 나타나는 평면은 주관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이 출현하는 시간적 평면은 주관 없이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음악은 소리를 받아들여 연결하는 바탕으로서 주관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음악의 표현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공간적으로 상존하는 객관성으로 만들지 않고 … 음악은 오직 내면적 주관적인 것에 의해 수행되며 또한 오직 주관적 내면에 대해서만 현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5]

 

3) 시간성의 종합

그렇다면 음악의 소리가 지속하는 지반인 내면적 시간 평면은 어떤 평면인가? 헤겔은 주관성의 차원을 다양하게 구분한다. 그 첫 번째 차원은 지각적 인상이 주어지는 차원이며 두 번째 차원은 표상[Vorstellung: 관념]의 단계이다. 관념의 차원은 이미지에서 상상(또는 환상), 기호를 거쳐 관념(언어)에 이른다. 세 번째 차원은 분석하고 종합하는 사유의 단계이다.

두 번째 관념의 단계는 나중에 나오는 시문학의 질료가 된다. 시문학은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나 상상이나 환상을 통해 추상적 사유를 표현한다. 이 첫 번째 차원 즉 외적 자극이 처음으로 직접 받아들여지는 차원이 음악과 관련된 주관적 내면이다.

이 첫 번째 차원에서 주관성은 외적 자극은 내적인 인상을 남기는데, 여기서 시각적 인상과 청각적 인상 등 다양한 인상의 구분이 일어나게 된다. 시각, 청각 등 각각의 감각 영역에서 한정해 본다면, 어떤 인상은 같은 영역의 다른 인상과 구별되는 질적 차이가 없으며 다만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양적 차이만 가질 뿐이다. 헤겔은 이를 ‘흥분[Affekt]’ 또는 ‘육체화한[Verleiblichung] 정신’[6]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시각적 인상은 명도나 온도, 채도의 크기 차이를 가지며, 청각적 인상의 경우, 고저와 장단, 강약 등의 크기 차이를 갖는다.

어느 감각의 영역에서든 인상이 완전히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미 주관적 자아가 움직이면서 일차적으로 관념화가 일어나니, 관념화는 주관의 자기 관계에서 나온다. 모든 인상이 동일한 주관 속에 들어오면서 주관은 그 인상에 대해서 자기 관계를 갖는다. 이런 대자성 때문에 지각인상은 관념화된 것이다. 빛은 색채감각을 남기며, 음파는 소리라는 소리감각[7]을 남긴다.   

지각 인상은 동일한 하나의 주관 속에 들어오므로, 이 관념화된 지각인상에서 이미 일차적 종합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지각 인상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繼起]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지각 인상이 하나의 주관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가 곧 시간성이다.

시간성 속에서 지각관념은 분석되거나 결합되는 법이 없이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만을 유지한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종합이며 가장 단순한 종합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동일한 시간적 주관을 “완전히 빈 자아”, “그 어떤 내용도 없는 자기”, “추상적 주관성 자체”[8]라고 말한다.

 

“자아는 시간 속에 있고 시간은 현존하는 자아 자체[Das Sein des Subjekts selber]이다.”[9]

 

헤겔은 시간을 ‘개념의 현존{Dasein des Begriffs}’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개념’은 자기 운동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자기를 구분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주관이 대상을 자기 내에서 분석하고 종합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개념이 여기 시간성의 차원에서는 단순히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일 뿐이므로 헤겔은 이를 ‘현존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감각적 인상의 첫 번째 주관화의 단계에서 등장하는 시간적 내면성 영역이 곧 소리가 받아들여져서 서로 공존하고 계기하면서 음악으로 발전하는 내면적 평면이다.

 

4) 심정의 차원

헤겔에서 지각적 인상에서 표상을 거쳐 사유까지는 이론적 인식의 영역이다. 반면 감정은 욕망 다음으로 일어나는 실천적 의지의 영역이다. 실천적 의지는 나중에 표상과 결합하면서 자유의지로 발전하는데, 감정은 욕망과 자유의지 사이의 중간 단계이다.

외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인상은 시간성 속에서 최초로 내면화된 것이다. 이런 내면화된 감각 인상이 실천적으로 연결되면서 감정으로 발전한다. 이 감정은 실천적 의지의 일종인데, 감각 인상과 감정 사이의 연결은 조건-반사적이다. 즉 감각은 특정한 주관이 가진 습관적 기제에 따라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욕망이 자극에 대해 직접 반응하는 본능적 행동이라면 자유의지는 전적으로 주관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반면 감각과 감정은 조건-반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감정은 다중적으로 분화된 반사 체계가 구축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반사 체계 속에서 주어진 조건에 따라 어떤 반응이 나타나게 될 때 이를 조건-반사적이라 한다. 여기서 반사 체계는 오랜 경험, 습관을 통해 학습된 것이다. 감정은 이미 학습된 체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능동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주어진 조건이 주어지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음악은 대체로 감정이라는 반응을 낳지만 때로는 이 반응이 직접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행진곡이나 춤곡을 예로 들고 있다.

이처럼 감각과 감정을 매개하는 주관은 다만 습관적인 체계일 뿐인, 헤겔은 이를 정신이 아니라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주관은 단순한 것이며, 헤겔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의 즉자적인 총체성이다. 영혼은 개체적이며 배타성을 가지지만 이는 자기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감정, 자기 정체성[Selbstgefuel]에 머무른다. 헤겔은 이런 자기감정을 지닌 주관 즉 영혼을 가슴[Herz] 또는 심정[Gemuet]이라고 규정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적 시간의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청각적 관념의 결합은 감정을 조건 반사적으로 즉 습관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의 주요 과제는 … 가장 내면적인 자기가 그 주관성과 추상 관념적[ideelle] 영혼의 면에서 내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방식을 반향하는[widerklingen] 데서 성립한다.”[10]

 

5) 음악의 독특성

음악에서 외적 자극이 지각을 거쳐 곧바로 감정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아의 활동이 시간적 종합에 머무르고, 감정은 습관성에 그치므로, 이 셋 사이에 수동적인 직접적 연결만 있을 때가 많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자극과 지각, 그리고 감정은 마치 하나로 결합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외면적 평면을 필요로 하는 회화가 독자성을 지니는 것과 달리 음악은 주관의 내면적 평면이 있어야 하므로 주관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예술로서 존재할 수가 없다. 악보에 쓰인 음악은 아직 아무런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연주자가 있어야 하고 감상자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주관이 살아서 움직이는 동안만 음악이 존재할 수 있다.

 

“음악을 통해 요구되는 것은 궁극의 주관적 내면성 자체이다. 음악은 심정 자체에 직접 호소하는 심정의 예술이다.”[11]

 

“음악이 목적과 내용으로 삼는 주관적 내면 자체는 … 주관적인 내면성으로 현상시킨다. 그런 한에서 음악적 외화는 … 생동적인 주관의 전달로서 제시되어야 한다.”[12]

 

이 주관적 내면이 시간적 종합의 차원이며 조건 반사적이므로, 이로부터 음악의 독특성이 생겨난다. 음악에서 주관적 내면은 표상 아래의 가장 단순한 차원이므로 음악은 문학과 달리 민족과 상관 없는 보편적인 예술이 된다[13]. 음악은 이 매개과정이 거의 수동적으로 일어나므로,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예술이 된다.

 

“음악은 의식을 사로잡는다. 의식은 더 이상 객체에 맞서지 않으며 자유의 상실 속에서 음 자체의 계속적 흐름에 의해 감화[fortgerissen]된다.”[14]

 

또한 음악에서 작동하는 내면성은 추상적 자아와 영혼의 차원이므로, 자기의식적인 관념의 차원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음악은 마치 사유하는 정신의 차원을 벗어나 감정의 차원인 영혼으로 되돌아가서 황홀경에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발생하게 된다.

이런 영혼이 동물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은 정신을 표현하면서 순수한 내밀성의 단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음악적 감정이 어떻게 무한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가? 이는 앞으로 살펴볼 문제가 된다.


[1] 헤겔, 철학강요, §300

[2] 헤겔의 용어 ‘ideell’ 이나 ‘reell’을 번역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관념적[ideal]’, ‘실재적[real]’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도 차별성을 지닌다. ‘ideell’ 이나 ‘reell’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본다면 양자는 실재하는 것과 관념적인 것 사이의 중간에 있다. 실재하는 물질이 물질성의 영역 내에서 관념화[ideell]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빛과 소리가 그렇다. 반면 관념적인 것이 관념의 영역 안에서 실재하면, 그것이 reell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의 의미나 수의 관념과 같은 객관화된 관념이 reell한 것이다. 그 의미를 살려 ideell은 ‘관념적 물질’로, reell은 ‘객관적 관념’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3] 미학강의 3권, 142쪽

[4] 미학강의 3권, 142쪽

[5] 미학강의 3권, 143-144쪽

[6] 헤겔, 철학강요, §401

[7] 시각이나 청각 인상이 시각이나 청각 관념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인상은 어디까지나 관념으로 존재한다. 인상이라 말할 때는 외부에서 자극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관념이라 말할 때는 주관 자신이 자기의 구별과 관계하는 대자적 관계의 측면을 말한다.

[8] 미학강의 3권, 143쪽

[9] 미학강의 3권, 163쪽. 여기서 시간이 자아 자체의 ‘존재’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시간이 개념의 현존이라 했을 때와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즉 아직 존재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자아, 개념이라는 뜻이다. 

[10] 미학강의 3권, 143쪽

[11] 미학강의 3권, 143쪽

[12] 미학강의 3권, 165쪽

[13] 엄밀하게 말하면 음악도 민족성이나 계급성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적 반응 체계는 습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습관적 체계는 모호하며 일반성을 가지므로, 음악이 민족과 계급을 뛰어넘은 가능성이 생긴다.

[14] 미학강의 3권, 160쪽

헤겔미학산책42-내밀성(숭고함)의 회화[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2-내밀성(숭고함)의 회화

 

1)

원시인의 동굴 벽화부터 따진다면 회화의 역사는 아마 가장 오래되었을 것이다. 회화는 고대, 그리고 고전 시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출현했다. 그런데도 헤겔은 마치 고대나 고전 시대에는 회화가 없었다는 듯이 낭만주의 시대 이후부터 회화를 다루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고전 시대 예술은 일반적 정신을 표현하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등장했다. 회화는 질료의 특성상 고대, 고전 시대의 관심을 충족하기 어려웠다. 그 당시 무덤 벽화나 도자기 그림은 다만 장식적이고 종속적인 역할만 담당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 회화는 구체적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 장르로 주목 받으면서 예술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낭만주의 시대 회화가 특히 고전 시대의 신화적 인물을 다루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르네상스 회화나 신고전주의 시대 회화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회화는 그 표현 내용을 더 이상 고전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고전 시대 신화조차도 낭만주의적 방식으로 즉 그 특칭적 주관성과 개별적 사건을 중심으로 표현하려 한다.

 

2)

헤겔은 회화의 내용을 설명할 때에는 낭만주의 시대 출현한 회화를 주제에 따라 세 가지 주제로 구분한다. 그것은 종교적 내밀성[innigkeit][1]과 실체적 내밀성, 그리고 현실 자체이다. 회화의 역사적 발전을 설명할 때는 시대적으로 세 단계에 걸쳐 구분한다. 이 세 단계는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낭만주의 시대가 발전하는 역사와 대체로 일치한다. 고딕 시대까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까지,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의 시대이다. 주제와 시대의 관계는 세 가지 주제별 분포 곡선이 약간 중첩되면서 시대적으로 중심을 이동하는 방식으로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시대적 구분보다는 주제별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

첫 번째 주제는 종교적 내밀성을 다룬다. 이는 인간인 동시에 신적인 존재의 주관성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주관성이다. 그 주관성의 내용은 성령의 정신이다. 성령은 곧 무한한 사랑의 정신이니 이는 주로 성서나 실제 역사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역사적 현실의 리얼리티를 살리면서, 신성한 존재의 내밀한 주관성이 표현된다.

언뜻 보면 신성한 존재의 모습은 고전 시대 영웅의 모습과 닮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나 마리아, 성인 등의 내밀한 사랑의 정신이 회화에서는 그 외면적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전 시대 영웅의 모습이 이상화된 표현이라고 한다면, 여기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건 속에서 사랑의 정신이 표현된다.

전자가 고요함과 지복에 머물러 있다면 여기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다. 이런 회화는 신성한 존재를 “인간의 죄악과 회한과 참회, 비열과 사악과 대비하여” 나타내거나 역으로 “경배자를 통해 가시화한다”[2].

헤겔은 고전적 영웅의 정신과 낭만적 종교적 내밀성을 비교하면서 전자의 예로 니오베와 라오쿤의 고통을 들고 있다. 니오베와 라오쿤은 신체적 고통 속에서도 “회한과 실망 속으로 스러지는 대신” “자신을 위대하게 보존한다”. 이런 자기 보존은 실체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일 뿐, “공허하며” “차가운 체념이 화해와 만족을 대신하며” 이 속에서 개인은 이 속에서 “자기가 집착했던 것을 포기하며” 그것은 “경직된 침착함일 뿐이며 운명에 대한 만족 없는[erfullungslos] 순응일 뿐이다”.[3]

반면 종교적 사랑의 정신은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내면의 고통을 표현하며, 감각적 고통을 참는 의연함이 아니라, 내면의 참회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의 감정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감당하기 벅찬 지복의 감정으로 남는다.”[4] 낭만적 회화에서 사랑의 정신과 개인적 특성은 서로 자유롭다.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사랑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으니, 그러면서도 양자는 서로 하나로 합일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 특성은 … 낭만적 예술 원칙에 따라 자유로워지며, 그럴수록 더 특성적으로 표출된다. 그런데도 이 특성적인 것은 내밀한 사랑을 흐리게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랑도 … 특성적인 것 자체에 매임이 없이 자유롭고 또한 그자체로서 진정 독자적인 정신적 이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5]

 

헤겔은 종교적 내밀성을 표현하는 대표적 회화로 주로 르네상스 시대 종교화를 들고 있다. 그 대표적 작품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상일 것이다. 헤겔은 특히 성모의 자애로운 모습 외에도 십자가 아래 성 식스토스 1세와 성녀 바르바라의 기도하는 모습과 대비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2)

낭만적 회화에서 두 번째 주제는 실체적 내밀성을 다룬다. 여기서 개인은 성스러운 존재가 아닌 세속적 존재이다. 그의 주관성 역시 무한한 내밀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은 종교적 내밀성처럼 사랑이나 자애, 경건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 내밀성은 인간의 특정한 성격으로 나타난다. 이 성격은 긍정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부정적인 성격도 있으니, 그것이 무한하다는 점에서는 종교적 내밀성에 못지 않는다. 르네상스 화가는 종교화에도 뛰어나지만 이런 실체적 내밀성을 표현하는 데도 탁월하다. 헤겔은 그 대표적 예로 무리요의 ‘거지 소년’을 들고 있다.

이런 내밀함은 군중의 혁명적 열정이나 전쟁이나 학살로 받는 고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곧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일 것이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이라든가, 고야가 그려낸 전쟁의 참화도 그와 마찬가지다.

회화의 경우 실체적 내밀성은 개인적 주관보다는 오히려 자연이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출현하니 “격랑을 일으키는 무한한 위력을 지닌 바다의 고요한 그 깊이”라든가 “폭풍우가 몰아쳐 울부짖고 솟구치면서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파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헤겔이 묘사한 것과 가장 닮은 화가라면 폭풍우 치는 바다를 자주 그린 윌리엄 터너가 아닐까?

알프스를 넘어가는 한니발의 군대, 자연 앞에서의 숭고함, 헤겔은 이를 실체적 내밀성이라 이름붙였다

3)

낭만주의 회화의 세 번째 주제는 현실의 긍정적 모습이다. 즉 “전적으로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저급하고 천박한 것으로도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삶의 장면들”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사악한 포주라도, 또는 단순히 식탁을 장식하는 꽃병이라도 이제 관심의 대상이 된다.

과거에는 이런 주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주제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 끝에 특히 근대 부르주아 질서가 형성되는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이런 우연적이며 천박한 것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으로 된다.

흔히 이런 예술은 사실주의로 간주되며, 여기서 구체적 현실을 얼마나 잘 모방할 수 있는가가 예술평가의 기준으로 된다. 하지만 헤겔은 이런 우연적이고 천박한 것에 대한 관심은 현실을 모방하려는 욕구 때문에 나온 것이라 보지 않는다. 이런 관심은 이 시대 정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즉 이 시대 정신은 가장 구체적인 것 속에 가장 일반적인 정신이 존재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 자체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구체적인 것을, 그것이 아무리 무의미하고 천박하더라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려 했으니, 사실 그것은 그것을 넘어 존재하는 초월적 정신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마치 근대 자연과학자가 자연 속에서 신의 흔적을 찾기 위해 자연을 연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예술작품이 이른바 자연성과 자연의 기만적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경탄될 만하다고 부추겨지더라도 이를 통해 [진정한] 향유가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부추김은 본래적 핵심을 호도하는 는 기만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모방의 경탄은 자연작품과 예술작품의 외적 비교에서 귀결할 뿐이며 … 여기서 … 본연의 내용과 예술적 요소는 표현된 사태가 사태 자체와 일치하는가 즉 실재에 영혼이 깃든 것인가 때문이다.”[6]

 

4)

우연적이고 무가치한 현실 속에서 영적 생기를 발견하려는 시도로 헤겔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독일과 네델란드 풍속화이다. 우선 이런 풍속화가 다루는 대상을 보자. 네델란드 풍속화는 “자연의 대상들과 자잘한 현상들, 가정생활의 품위, 평온함과 안빈낙도, 국경일의 행사, 축제와 행렬, 농부의 춤, 놀이공원에서의 재미, 흥청거림에서 얻는 기쁨” 등을 소재로 삼는다. 헤겔은 이런 작품이 단순히 세속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세속적인 것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건하며, 그 부에 오만함이 없이 만족하며, 가정과 주위에 대해 담백하고 기품 있고 순수하게 머물며, 그들의 모든 상태들을 철저히 염려하고 즐기는 가운데 독립성 및 진취적 자유로써 자신을 지킨다”[7]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적 삶 속에 정신의 생동성이 살아 있다는 것인데, 이 정신적 생동성은 바로 종교 혁명과 해방, 그리고 세계 무역, 바다의 간척 속에서 활동했던 네델란드인의 올바른 대담성과 끈기, 충직하고 평온하고 인정 있는 시민성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런 순간적 현실로 들어갈수록 단순히 공간적 형태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이런 순간적 현실은 색채의 마법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으니 헤겔은 네델란드 풍속화가 보여주는 이런 기법에 대해 주목한다.

 

“이 회화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최대한의 예술적 진리로 발전시킨 것은 한편으로는 ..선술집의 광경들, 결혼식 및 기타 농부들의 잔치…등에서 표현된 빛, 조명, 그리고 채색 일반의 마법 및 색채 마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히 생동적인 성격의 특성화이다.”[8]

 

여기서 다시 헤겔은 색채의 마법을 강조하는데, 이는 앞에서 회화의 질료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바로 그 색채의 음악과 색채의 마법이다.

 

5)

헤겔은 색채의 마법과 음악을 통해 구체적 형상을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색채의 마법은 단순히 색채원근법을 통해 입체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니다. 색채의 음악은 동시에 감정을 생산하니, 이를 통해 회화의 특칭적 주관성의 원리를 실현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헤겔이 칸딘스키가 주장했던 것처럼 회화가 형상의 창조를 넘어서서, 색채 자체의 음악으로 나간다고 보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색채가 색채의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이제 회화 장르를 넘어서는 음악 장르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1] 헤겔이 자주 사용하는 내밀성[innigkeit]라는 말의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내면성 또는 심정성을 의미하면서도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기 내 복귀라는 운동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항상 무한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무한성은 한없이 크거나 작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내볼 복귀하여,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규정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칸트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숭고성 가운데 특히 역학적 숭고성에 해당한다.

[2] 미학강의 3권, 53쪽

[3] 미학강의 3권, 47쪽

[4] 미학강의 3권, 48쪽

[5] 미학강의 3권, 49쪽

[6] 미학강의 3권, 69쪽

[7] 미학강의 3권, 135쪽

[8] 미학강의 3권, 136쪽

헤겔미학산책41-회화에서 구성의 문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1-회화에서 구성의 문제

 

1) 회화

회화의 질료는 색채다. 헤겔은 회화의 질료 자체가 이미 가상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즉 빛은 요소로 분화되면서 색채로 되고, 그 색채의 상호 관계를 통해, 대립과 조화를 통해 대상을 표현한다.  색채는 이런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자기 부정성을 지닌 가상적인 것이다.

질료의 특성상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평면적 형상은 특정한 주관적 시점에서 선택된 것일 수밖에 없고 색채의 대비 역시 주관적 심정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의 눈에 보이는 현실 즉 구체적 현실을 그려낼 뿐이다.

그 때문에 회화는 일반적 정신을 형상화하는 데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고대나 고전 시대에도 회화가 있었지만 이 시대 주된 관심의 대상인 신과 영웅 자신은 항상 조각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으니, 조각은 장르의 특성상 일반적 정신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회화가 만일 신과 영웅을 표현하게 된다면, 그것을 특칭적 주관으로 만들어 인간화해 버리고 마니, 이 시대 회화라는 장르는 기피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도 회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 무덤 벽화나 그리스 도자기 회화가 다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시대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이를 표현하는 무덤 벽화나 도자기 그림은 다만 장식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출현했다. 자기를 부정하고, 이행하고야 마는 그야말로 우연하고 허망한 현실이 이 시대에는 오히려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마치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듯이 이런 우연성과 허망함 속에 진정으로 실체적 정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회화는 그 표현 가능성이 돋보이게 되면서 건축과 조각을 대신하여 주도적인 예술로 등장하게 된다.

 

2)

낭만주의 예술은 구체적 현실 즉 우연하고 허망한 현실을 그 자체로서 만족스러운 현실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 예술은 구체적 현실을 통해 그 시대 정신을 드러내려 한다. 구체적 현실은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 가운데서 일반적 정신으로 복귀한다.

헤겔은 이런 자기 부정하는 운동 속에 있는 현실을 가상이라 규정했다. 구체적 현실에서 나타나는 이런 자기 부정의 운동성이 곧 ‘영적 생기[geistige Beseelung]’다. 이런 가상성은 개인의 주관적 모습 속에서는 그 속에 담긴 내밀한[innig] 심정으로 드러난다.

 

“회화는 색채들의 특수화를 통한 형상화, 평면으로의 확장이라는 감각적 요소 속에서 움직이며,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대상성의 형식은 정신에 의해 정립된 예술적 가상[schein]으로 변화하며, 회화에서는 이 가상이 실제의 형상 자체를 대신한다.”[1]

 

[외물의 현실적 현존재] “더 이상 그 자체로서 궁극적 타당성을 간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이 실재성 속에서 정녕 자체가 내적 정신이 단순하게 빛나는 가상[Scheinen]으로 격하되어야 한다.”[2]

 

조각에서의 고전적인 이상화에서와 달리 회화에서 외적 형상은 자연적 명랑성, 지복, 자족성을 지니지 않으며, 오히려 외적 형상은 “분열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자기 안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명랑성, 지복, 자족성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이어야 하며, “전체가 정신의 내면성으로 전이되어야 한다.”[3]

 

3)

그러나 회화에서 가상성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는 문제이다. 회화는 색채를 통해 만들어진 평면적 형상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그것이 지닌 색채의 음악과 색채의 마법은 어디까지나 공간적 평면 위에 펼쳐진 것이다. 평면적 형상은 일단 외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그 형상이 질료의 측면에서 보면 조각에서처럼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고 평면 위에 그려진 가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마치 외적인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회화에서 표현된 그 모습을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 모습이 부정적인 모습 즉 고통 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날 경우, 이는 단순한 고통과 죽음으로만 여겨질 뿐, 이를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는 모습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거꾸로 긍정적인 모습,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으로 나타날 경우 그 역시 단순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만 여겨지며 이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정신적인 아름다움이며 즐거움이라는 사실은 간과된다.

장르의 특성상 외적인 형상을 자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회화 그 자체는 외적 형상을 넘어설 수 없다. 회화는 시문학처럼 어떤 형상이 그런 자기를 부정해 나가는 운동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다. 그것이 하나의 자기 부정적인 가상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평면적 형상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회화는 구체적 현실의 가상성, 자기 부정의 운동, 영적 생기, 내밀한 심정을 그려낼 수 있을까?

우선, 관람객이 눈으로 또는 마음으로 외적 형상을 읽으면서 그 운동을 따라갈 때 비로서 음악과 마법이 출현한다. 이런 마음의 운동이 없다면 회화에서 영적 생기가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음의 운동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그런 운동을 암시하는 요소가 평면적 형상 속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회화의 다양한 특수한 기법이 출현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한 화면 속에 다양한 군상을 통해 또는 삼면화나 벽화 등 연속된 그림 통해 가능한 한 이런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화에서 이런 경향 때문에 회화의 구성의 문제가 등장한다.

 

4)

헤겔은 회화를 다루면서 색채라는 질료가 드러내는 가상의 측면 못지 않게 회화 속에 다양한 대상들 사이의 상황과 행위, 모티브 그리고 인물의 구성에 주목한다.

조각은 이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고요하게 머무르며, 아무런 배경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조각은 이념이 자기를 구현한 것이어서 자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각도 점차 생동적으로 되면서 상황과 운동 속에서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리고 다른 조각상과 함께 집단적인 군상을 이루거나 연속적인 부조로 발전한다.

회화의 경우 이런 측면을 더욱 발전시킨다. 우선 회화는 구체적 현실 속의 특수한 인격, 구체적 상황, 특정한 행위를 통해서 ‘극적 생명성[dramatische Lebendigkeit]’을 표현할 수 있다. 회화 속의 인물은 특정한 개성을 지니고, 외적 상황과 생생한 관계 속에 있어야 하며, 특정한 동기를 지닌 구체적 행위로 자기를 표현한다. 이 행위는 곧 전체적인 극적 운동 가운데 가장 극적인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외적 상황과 구체적 행위 속에 있는 특수한 인격은 불가피하게 여러 인물을 끌어들이니, 인물의 군상이 회화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회화는 하나의 평면 공간 속에 시, 공간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이 동시에 표현되며, 때로는 연속된 회화 장면(예를 들어 삼면화와 같이)을 통해 이 다양한 사건이 표현되기도 하니, 회화의 이런 기법은 조각에서 등장한 기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황 속에서 다른 인물과 관계 속에서 어떤 인물의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독특한 구성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서 근본적인 것은 정신의 운동을 공간적 구성 속에 표현하는 것이다. 그 구성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혼란 속에서 결정적 행위를 하는 인물로 집중되기도 한다.

 

“조각적 구상방식을 이렇듯 포기하고 고요하고 부동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생생한 인간적 표현과 특성적 개성을 이렇듯 추구하고 각 내용을 주관적 특수성과 그 다채로운 외면성 속으로 이렇듯 투입하는 가운데 회화의 발전이 이루어진다.”[4]

 

헤겔은 회화에서 이런 공간적 구성이 단순히 공간적 형태의 구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구성은 동시에 색채의 대비, 조화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회화의 생명성의 화룡첨정은 오직 색채를 통해서만 표현 가능”[5]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색조들 및 서로를 비추고 서로 유희하는 그 조화와 대비의 단순한 향기와 마법 속에서 완전히 음악으로 건너가기 시작한다.”[6]

 

5)

회화는 정신의 운동을 색채로 만들어지는 공간적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아직 음악이나 문학과 같이 운동을 시간 속에서 생성하는 측면에서 파악하지는 못한다.

이런 한계 때문에 회화는 운동을 표현하는 시문학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헤겔은 이런 시도를 뒤셀도르프 화가의 시화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런 시화는 당대의 시인의 시를 회화로 그려냈는데 헤겔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이런 시도는 장르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써 혼란만 자아냈다고 한다.

시문학은 언어적 표상을 질료로 하면서 사태를 시간적인 계기를 통해 서술해 나간다. 반면 회화는 색채를 질료로 하여 공간적 형상을 공존적으로 가시화한다. 회화는 평면의 공간을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회화는 시간적 계기 가운데 어떤 극적인 장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과거나 미래는 동일한 평면 공간 속에 표현된 잔재나 암시를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다. ,

그에 못지 않게 더 중요한 것은 시는 추상적 언어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이런 감정이 전환하고 진행하며 고양하는 과정을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는 감정을 외적 형상을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추상적으로는 신체의 자세나 얼굴의 표정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행위를 통해서, 즉 특정 상황에서 일어나는 열정적 행위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열정은 색채의 대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뒤셀도르프 화가들은 시를 회화로 표현하려 했으니, 아주 단순한 장면을 선택했으며 감정을 주로 표정과 자세를 통해서 묘사하는 데 그쳤다. 대표적으로 헤겔은 샤도프의 미뇽을 예로 들고 있다.

헤겔은 이런 한계를 지적하는 가운데, 시를 회화로 표현하려면 공간 속에 과거와 미래의 상황을 보여주는 풍부한 감각적 형상이 필요하며, 심정은 색채의 마법을 통해 제시되는 행위의 열정을 통해서 표현하여야 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성서의 이야기를 회화로 표현하려 했던 르네상스 화가의 노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정신이 현실의 극적 생명성 속에 표현된 대표적 작품으로 헤겔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이나 팔마 베키오의 그림 ‘야곱과 라헬’을 들고 있다.

하나의 그림 속에 여러 장면이 구성되어 있다.

6)

회화는 이처럼 특수한 주관성을 통해 이념을 표현하는 한, 그것이 내밀하게 표현되든 아니면 운동 속에서 표현되든, 회화 속에는 이미 작가 자신의 주관성이 포함되어 있다. 회화가 그려낸 특수한 주관성이 곧 작가 자신의 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주관성은 곧 독자의 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니, 회화 속에는 이미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의 주관성이 전제되어 있다. 회화는 작품 속의 특수한 주관성을 통해 작가 자신의 주관성과 독자의 주관성 사이의 매개와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이점은 회화를 다시 조각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념이 자립적으로 출현한 조각의 경우 이 조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작가 자신의 주관적 관점이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조각은 무시간적 공간 속에 전시되며, 이 공간은 관객의 주관성 조차 배제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회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화는 주관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제 그 전체 표현방식을 보더라도 오직 주관을 위해, 감상자를 위해 현존할 뿐 독자적으로 그 자체로서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보여준다. 관조자는 말하자면 처음부터 작품에 같이 있으며, 함께 고려되고 있으므로 예술작품은 주관이라는 확고한 점에 대해서만 오로지 존재한다.”[7]


[1] 미학강의 3권, 27쪽

[2] 미학강의 3권, 27쪽

[3] 미학강의 3권, 45쪽

[4] 미학강의 3권, 92쪽

[5] 미학강의 3권, 92쪽

[6] 미학강의 3권, 93쪽

[7] 미학강의3, 32쪽

헤겔미학산책40-색채의 음악, 색채의 마법[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0-색채의 음악, 색채의 마법

 

1)

회화의 질료는 공간적 형태가 아니라, 색채이다. 헤겔은 빛이 어둠과 관계하여[즉 물체의 평면에 반사하면서] 색채가 출현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색채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물체의 평면을 떠날 수 없다.

그 때문에 회화가 처음 시작했을 때, 색채보다는 공간적 형태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조각이 삼차원적인 공간적 형상을 보여준다면, 회화의 경우 공간적 형태는 이차원 평면에 한정된다. 그런데 헤겔은 회화는 그 출발점인 평면화에서부터 동시에 특칭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조각과 같은 입체적 형상은 관찰자와 상관없이 자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객관성을 지닐 수 있으므로, 정신의 이상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화적 형상은 사물의 공간적 단면을 이루는 외곽선을 본 따서 만들어지는데, 사물의 외곽선이란 관찰자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사물은 입체적이므로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사물의 외곽선은 달라진다. 더구나 관찰은 단안 시각이 아니라 양안 시간이며 관찰자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에 있으므로, 사물의 외곽선을 객관적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 결과 주관은 자신의 관점에서 일정한 외곽선을 선택하게 되면서 회화는 이미 형상에서 주관성을 표현하게 되어 있다. 회화의 평면적 형태는 불가피하게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조각에서 작품은 그 자체에서 완결적이고 자립적이라면, 회화의 형상은 “내적으로 특칭화된 내면성”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

 

“회화의 대상은 공간적 현존재의 면에서 정신적 내면의 가상으로 존재할 뿐이며 그런 까닭에 공간적으로 현전하는 현실적 실존의 독자성은 해체되고 또 조각작품의 경우보다 관조자와 훨씬 밀접하게 관계한다.”[1]

 

2)

고전적 예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회화적 형태가 지닌 이런 주관성은 약점이자 한계가 될 것이다. 조각이 객관적인 형상을 드러냄으로써 정신적 이상을 표현한다면, 회화적 형상은 주관성을 항상 지칭하고 있으므로 그런 이상을 표현할 수 없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예술이 이제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면서, 조각을 대신해서 회화가 예술의 주도적 장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더욱 본격화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르네쌍스 시대 등장한 원근법이다.

여기서 사물의 형상은 관찰자와의 거리에 따라서 크기가 조절된다.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그려지면서 거꾸로 회화의 형상은 이제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성을 통해 관찰자를 지시하는 하나의 가상이 된다.

 

3)

회화의 공간적 형태가 원근법을 통해 관찰자의 주관성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관찰자 시점이 놓인 위치만을 드러낼 뿐, 비록 그것은 관찰자의 처지와 입장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직접 그 자체로는 관찰자의 주관적 내면성을 드러낼 수 없다.

헤겔은 여기서 회화가 공간적 형상을 떠나서 색채의 마법을 발전시키는 동인이 있다고 한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를수록 이제 중요한 것은 특칭적인 주관성이다. 이 특징적 주관성이 지닌 내밀한 심정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원근법적 공간적 형상만으로 불충분하다. 여기서 색채가 회화의 본질적 질료로 등장하게 된다.

색채는 빛이 분화된 것이다. 빛을 분화시키는 수단으로 다른 수단도 가능하지만 주로 물감(또는 벽화나 아상불라주 등에서는 물체 자체의 표면이 직접 이용되기도 한다)이 개입한다. 물감은 일정한 빛의 파장 외에는 반사하지 않으니, 이로부터 다양한 색채가 분화되고 화가는 이런 색채를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다. 공간적 평면 위에 색채들의 유희가 펼쳐지는데, 이런 색채의 유희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우선 공간적 원근법 대신 색채 원근법이 가능해진다. 밝은 색은 가까이 보이고 어두운 색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헤겔은 회화에서 원근은 선 원근법 즉 추상적 원근법보다는 “상이한 색채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고 즉 “빛과 그림자가 색을 지녀야 한다고”[2] 말한다. .

 

“빛은 이제 형상 거리 등과 같은 대상들의 차별성을 가상화함으로써.. 이 대상들이 인식되게끔 만든다.  왜냐하면 …명암 자체는 …가상화된 대상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에 관계하기 때문이다.”[3]

 

4)

색채가 명도를 통해 원근법을 만들어내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색채는 서로 대비된다. 색채는 서로 충돌하고 서로 조화됨으로써 하나의 색채 음악을 만들어낸다. 헤겔은 르네상스 화가 다빈치 등이 시도한 스푸마토 효과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대상을 결여한 채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색채의 유희가 등장하는데, 이 유희는 채색의 가장 극단적인 정점에까지 이르러, 색채가 서로 침투하고 빛[Schein]이 반조하니, 이 반조의 빛은 다른 가상 속으로 비추어 들어가면서 너무나 섬세하고 유동적이어서 영혼을 드러내며 음악의 영역으로 넘어 들어가기 시작한다.”[4]

색채의 음악

이 색채음악은 특칭적 주관이 지닌 감정을 촉발한다. “영혼적인 것은 회화가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생생하게 현상한다”[5]는 것이다. 헤겔은 색채가 전개하는 이런 마법을 여러 가지 예를 통해 소개한다.

 

“푸른색이 무저항의 어두움을 원칙으로 삼는 한, 그것은 비교적 온유한 것, 온당한 것, 비교적 고요한 것, 예민한 내면의 응시에 상응하며 반면에 밝음은 차라리 저항적인 것, 생산적인 석, 활기한 것, 명랑한 것이다. 녹색은 무차별적이고 중립적이다. 이러한 상징성에 따라서 예컨대 마리아는 대관을 한 하늘의 여왕으로 표상되는 곳에서는 종종 붉은 망토를, 반면 어머니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다.”[6]

 

네델란드 화가는 색채를 다루는 데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색채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이러한 마법사적인 예술가 특유의 정신에 의해 영혼의 빛남이[Schein]이 이러한 관념성, 이러한 내적 교호, 반사와 색채 빛남[Schein] 사이의 이러한 왕래, 이행의 이러한 변화와 유동을 통해 명료함, 광휘, 깊이, 색채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조명과 함께 화폭 전체에 퍼진다.”[7]

 

회화의 본질에 대한 헤겔의 설명, 르네상스 스푸마토 기법에서 발견한 색채의 음악, 네델란트 작품에서 보이는 색채의 마법은 20세기 등장한 모더니즘 회화를 헤겔이 미리 선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전개하면서 음악의 기법을 회화에 도입하려 했던 시도를 헤겔은 이미 르네상스나 네델란드의 작품에서 발견한 것이다.

 

5)

회화는 세잔느 이후 공간적 형상이 아니라 색채로 그 본질적 질료로 삼았다. 20세기 등장한 다양한 모더니즘 유파 즉 입체화나 추상화, 아상블라주, 꼴라주, 드립핑 등이 등장할 때만 해도, 회화는 색채와 평면이라는 질료적 한계 안에서 움직였다.

오늘날 개념 미술에 이르면 아예 평면과 색채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는 이제 문학적 표상을 질료로 삼는다. 많은 설치 미술의 경우, 회화는 조각을 닮아가며, 비디오 미술은 삼색화나 만화처럼 시각적 요소 속으로 언어나 운동이나 내러티브를 다시 도입하려 했다. 회화의 평면을 찌르거나 칼로 베면서 그 흔적을 남기거나 입체적 공간 속에 조명을 비추기도 한다.

이런 회화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통해 회화는 조각, 건축, 문학 장르로 넘어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색채와 평면이라는 질료적 특성을 떠나지 않는다. 회화 장르의 현대적 확장은 그런 점에서 장르의 경계선상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본다면 그 모든 시도는 색채와 평면의 확장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이 회화의 본질적 질료는 색채이고 이 색채는 평면을 떠날 수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보겠다.


[1] 미학강의 3권, 32쪽

[2] 미학강의 3권, 78쪽

[3] 미학강의 3권, 36쪽

[4] 미학강의 3권, 86쪽

[5] 미학강의 3권, 75쪽

[6] 미학강의 3권, 79쪽

[7] 미학강의 3권, 86-87쪽

헤겔미학산책39-괴테의 색채론과 헤겔의 색채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9-괴테의 색채론과 헤겔의 색채론

 

1)

회화의 질료란 무엇인가? 공간적 평면인가 아니면 색채인가? 헤겔은 회화의 질료가 일단 공간의 평면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평면화로부터 예술은 조각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구체적 물체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가 색채로 넘어가면서 색채를 본질적 질료로 삼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회화가 사용하는 물리적 요소가 어떤 종류인지 묻는다면 대상성 일반을 보편적으로 가시화하는 빛이 그것이다.”

“더욱 추상관념적인 이러한 측면의 성질로 인해 빛은 회화의 물리적 원칙이 된다.“[1]

 

역사적으로 볼 때-예를 들어 알타미라 동굴 벽화 등에서 보듯이- 회화는 처음에 아마도 사물의 외적 형태 즉 평면적 형상을 따오는 방식으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평면 형상은 조각과 달리 실재 물질을 통해 표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벽면이라는 공간에 다만 외적인 형태만 닮은 선으로 표현되었다. 물론 이때에도 색채가 그 외적 형태를 채우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색채는 아무래도 종속적이었다.

사물의 형태는 선이 아니라 색채로 만들어진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화가 세잔느는 평면적 외적 형태가 확고하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면서, 사물의 형태를 새롭게 창조하려 했다. 그는 수없이 다양한 색채의 중첩을 통해 하나의 외적 형태를 창조해 냈다. 세잔느의 이런 시도를 통해 회화의 본질이 평면적 형태가 아니라 색채에 있다는 사실이 확립되었었다. 그 후 모더니즘은 아예 형태 자체를 제거한 추상화로 나가면서 색채를 회화의 본질적 질료로 삼았다.

색채가 본질이라는 생각이 세잔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색채가 회화의 본질적 질료라는 헤겔의 생각은 얼마나 시대를 앞선 통찰이었는가? 놀랍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2)

헤겔은 왜 색채가 평면적 형태보다 더 본질적이라고 보았는가? 색채(즉 빛)가 회화의 본질적 질료더라도 회화가 공간적 평면 없이 가능할까? 헤겔 역시 회화의 출발점으로서 공간적 평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에게서 회화에서 색채와 공간적 평면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먼저 색채라는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헤겔은 색채라는 개념에 괴테의 색채론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괴테의 색채에 대한 개념과 헤겔의 색채에 대한 개념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색채에 대해 괴테는 <색채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선 빛으로부터 노랑색이라는 색이 생겨나며, 또 다른 색은 암흑으로부터 생겨나는데, 그것은 파란색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된다.”[2]

 

우선 괴테가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나름대로 빛을 내는 광원이라고 본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둠이 내는 빛은 밝은 빛이 아닌 어둠이라는 빛이지만 그것도 역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빛에서 색채가 나온다. 빛에서는 노랑색이 나오며, 어둠에서는 파란색이 나온다.

그러면 빛(빛과 어둠)으로부터 색채(노랑색과 파란색)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색채론 4장, 색채의 속성에 대한 일반적 견해에서 찾을 수 있다. 괴테는 프리즘 현상을 알았지만, 빛이 분화되면서 색채가 된다는 생각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테는 빛이 색채로 변화하는 조건으로 굴절이나 반사라는 과정을 들고 있으며, 이런 과정이 흐린 매체를 통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즉 물체의 어떤 성질 즉 ‘흐림’이 빛이 색채로 나타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3].

여기서 매체의 ‘흐림’이란 어떤 의미일까? 괴테도 물체가 지닌 어떤 성질이 빛에 일정한 영향을 주면서 빛이 색채로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괴테는 자신의 짐작을 확대하여 물체의 압력, 회전, 열기, 입김 그리고 물체의 움직임과 변화, 물체의 구성성분조차 색채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4]

괴테는 일단 빛이 색채로 변화하면, 색채는 서로 대립된 것의 상호 작용을 통해 다양한 색채가 출현하는 것으로 본다. 빛에서 두 대립된 색채인 노란색과 파란색이 출현하면, 나머지 색채는 이 두 색채의 조합에 의해 출현한다. 이 두 색채의 작용이 중화되면 즉 “서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면”, 녹색이 출현하며, 두 색채가 조화로우면 즉 “두 색채의 순도를 높이거나 짙게 하면” 빨강색이 나온다[5].

 

“만일 그것들이 아주 순수한 상태에서 혼합되어 서로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면, 제3의 색을 낳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녹색이라 이름 붙인다. 그러나 앞의 두 색은 순도를 높이거나 짙게 하면 그 각각의 색으로부터 새로운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그것은 붉은 색을 띠게 된다.”

 

괴테는 색채 현상의 기본 원리로 세 가지 원리를 들었다. 양극성의 원리와, 상승의 원리, 총체성의 원리이다[6]. 이 세 가지 원리는 서로 대립하는 것 사이의 대립과 조화라는 관계라는 개념을 낳았다. 그의 색채론은 오늘날 보기에는 상당한 오류가 존재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자연을 대립물의 통일을 통해서 설명하면서 뉴톤적인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립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헤겔의 변증법도 괴테의 색채론의 영향권 아래 놓여질 수 있을 것이다.

 

4)

이제 헤겔의 색채론으로 넘어가 보자. 헤겔에 따르면 빛은 “가볍고”, “저항이 없으며”, “자기와 순수하게 통일되어 있어서” “최초의 관념적 존재”이며 “최초의 자아” [7]이다. 헤겔은 그 특성을 탈자성[脫自;Aussersichsein]에 두었다.

 

“물질의 추상적 자아로서 빛은 절대적으로 가벼운 것이며 물질로서는 무한한 탈자적 존재이다. 그러나 순수한 현현이고 물질적 관념성인 한에서 불가분적인 단순한 탈자적 존재이다.”[8]

 

상당히 관념적 언어로 서술되어 있지만 이런 표현은 빛이 질량[무게]을 지닌 물체와 대립하는 것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에너지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빛은 물체적인 것을 넘어선 관념적인 것이다. 빛은 여전히 물질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므로 최초로 관념화된 것 즉 물질의 자아가 된다. 즉 관념화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직 개인의 정신적 주관에 내재하는 관념은 아니라는 뜻이다.

 

“자연은 빛에서 처음 주관적으로 되기 시작하며 … 아직은 특칭성으로 나아간 것 개체성 및 점과 같은 내적 완결성으로 수렴된 것이 아니다.[9]

 

괴테와 비교해 볼 때 우선 헤겔은 괴테가 말한 어둠이라는 독자적 광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명시작용을 하는 것은 오직 빛뿐이다.

그렇다면 색채는 어디서 나오는가? 색채는 빛의 명시작용 즉 가시화 작용으로부터 나온다.

 

“빛은 명시작용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명시작용은 여기 자연에서는 가시화됨 일반으로서만 나타날 뿐이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의 특수한 내용을 자신의 외부에서 대상성으로 가진다. 이 대상성은 빛이 아닌 빛의 타자이며 이로써 어두움 속에 존재한다.”[10]

 

“어두운 것은 빛과 상이하면서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한, 빛은 다만 이 일단 불가침투적인 것의 표면에 관계한다. 그와 같은 표면은 빛이 관계하면서 현현하며, 마찬가지로 불가분적으로 자기를 현현하면서 즉 타자에서 빛나게 된다.”[11]

 

빛은 자신의 타자 어둠과 만나서 색채를 만들어낸다. 언뜻 보면, 여기서 괴테도 헤겔도 어둠을 빛에 대립하는 독자적 광원으로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겔이 말한 어둠이라는 광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어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빛을 어둡게 하는 것 즉 물체이다.

헤겔은 사물의 표면이 빛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는 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물의 표면이 빛에 대해 어떤 작용을 한다고 보았고, 그것을 어둡게 하는 작용이라 보았던 것이다. 빛이 이렇게 물체에 의해 어둡게 되면서, 색채가 나온다. 그러므로 빛의 명시작용은 “빛에 의해 드러나는 것의 특수한 내용[즉 색채]을 대상성으로서 갖는다.”[12]

헤겔은 색채를 빛과 물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려 했으므로, 괴테가 색채 사이에 설정한 양극성의 원리나 상승의 원리, 전체성의 원리를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빛은 색채로 변화하면서 다양한 색채로 분화된다고 본다. 이처럼 색채가 분화되면서, 색채는 서로 결합될 수 있다.

 

5)

헤겔은 빛이라는 광원만 인정했으니 어둠이라는 광원을 독자적 설정한 괴테에 비하면 현대 물리학에 좀 더 가깝다. 그가 역시 빛을 물질적인 것이지만 물체적인 것은 넘어선 것이라고 본 점도 장차 등장하는 빛 에너지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그는 빛 자체가 여러 파장의 빛으로 구성된다는 빛의 분화라는 사실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회화와 연관하여 중요한 것은 우선 헤겔에서 빛이 불투명한 물체의 표면에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회화의 질료가 색채라고 하더라도 이 색채가 표면적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잘 설명해 준다. 마치 조각의 질료는 물질적, 형상이지만 그 형상은 그것과 대립하는 물질의 덩어리를 떠날 수 없듯이 회화 역시 색채가 그 질료이지만 이 질료는 평면이라는 공간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마치 조각에서 공간이 형상의 이면일 뿐 그 자체가 질료가 아닌 것처럼, 회화에서 색채가 본질적 질료이며 공간적 평면은 이런 색채가 현존할 수 있는 조건에 불과하다.

또 하나 회화의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색채가 분화된다는 사실이다. 색채가 분화되면서, 그 자체가 가상화된다. 색채는 그 자체로서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직 상호 관계를 통해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상호 관계 속에서 어떤 색채는 다른 색채에 대해서 자기를 규정하면서 자기 부정적인 존재 즉 가상적 존재일 뿐이다. 색채가 지닌 이런 가상성은 회화가 색채의 마법, 색채의 음악을 통해 특칭적 주관성을 그려낼 수 있는 토대가 된다.


[1] 미학강의 3권, 35, 36쪽

[2] 괴테, 색채론, 장희창 역, 민음사, 2003, 43쪽

[3] 괴테는 구체적으로 밝은 빛이 불투명한 대기 속에서는 노랑색으로 보이며, 어둠은 불투명한 대기 속에서 파란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색채론, 앞의 책, 88쪽 §150 참조

[4] 이 부분에 관해서는 색채론, 앞의 책, 226쪽 §691 참조. 괴테는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매체가 빛의 일부를 흡수하거나(반사) 속도에 영향을 주면서(굴절) 색을 나타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매체가 지닌 물체의 성격이 빛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고 빛의 색으로의 변화는 일종의 변용으로 보았다.

[5] 그렇다면 청색에서 황색에 이르기까지 중간 색은 두 색의 혼합 비율에 따라 서로 달라지며, 노랑색에서 파란색에 이르는 다른 색은 순도를 조절하면 나오게 될 것이다. 괴테는 색채의 현상을 생리색(지각적인 색)이나 물리색(반사나 굴절에 의한 색), 화학색(물체 자체의 가열에서 생기는 색) 등으로 구분했다. 빛에서 색이 나오는 과정은 주로 물리색에서 다루어진다.

[6] 양극성의 원리란 색채에 노랑색과 파란색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상승의 원리는 노랑색과 파란색이 더욱 짙어지면서 둘 다 빨강색을 향해 상승한다는 뜻이다. 총체성의 원리는 어떤 색의 지각은 그것과 대립되는 색의 지각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강색의 지각은 그에 대립하는 녹색을 동시에 지각하게 만든다.

[7] 미학강의 3권, 36쪽

[8] 헤겔, 철학강요, §276

[9] 미학강의 3권, 36쪽

[10] 미학강의 3권, 36쪽

[11] 헤겔, 철학강요, §277

[12] 미학강의 3권, 36쪽

헤겔미학산책38-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8-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

1) 낭만적 예술 장르

헤겔은 예술의 역사적 형식을 예술이 표현하려는 정신과 예술 작품 사이의 기호적 연관관계를 통해서 규정했다. 세 가지 기호의 형식 즉 상징, 현상, 가상에 따라 세 가지 예술 형식이 출현했다. 그것이 곧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이었다.

 

헤겔은 심지어 예술 장르조차 세 가지로 나누어, 상징적 장르, 고전적 장르, 낭만적 장르로 구분했다. 그것은 작품과 정신의 관계와 유사하게 질료가 의미에 대해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에 따른 것이다. 앞에서 건축의 질료인 무규정적 매스는 그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니므로, 상징적 장르다. 조각은 구체적 물질성이 질료이니, 그 자체에서 정신적 형상을 표현할 수 있다. 조각은 고전적 장르이다.

 

그렇다면 낭만적 예술장르에서 질료는 무엇이며, 그것은 의미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그것은 낭만적 예술 형식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낭만적 예술 장르로 헤겔이 포괄하는 장르는 회화, 음악, 그리고 시문학이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예술 장르가 낭만적인 장르에 속하게 된다. 이런 다양한 장르는 언뜻 보기에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어떤 하나의 공통적인 질료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조차 든다.

 

2)

헤겔에서 회화의 질료는 색채이고, 음악의 질료는 음이다. 시문학의 질료는 음소나 문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언어적 관념[표상]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색채나 음은 물질적인 것이다. 반면 언어적 관념은 물질적인 것에 대립하는 관념이니, 그 사이에 어떤 공통성이 전혀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헤겔의 자연철학적 관점에서는 생각이 달라진다. 헤겔에서 색채나 음은 언어적 관념은 아니지만 일종의 관념적인 것이다. 우선 색채를 보자. 색채는 빛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에 반사되면서 색채가 된다.[1] 색채의 원천이 되는 빛이 물체의 질량에 대립하는 순수한 에너지라는 점에서 헤겔이 색채가 이미 관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음도 마찬가지다. 음은 사물 자체의 울림[Klang]이며, 그것은 마치 빛과 같은 것인데, 사물에 외적으로 존재하는 빛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나오는 빛 즉 진동[Erzittern]이다. 사물은 진동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만 다시 자기를 회복하니, 헤겔은 이런 진동을 물질의 관념적 운동이라 규정한다[2].  

 

헤겔은 색채와 음을 언어적 관념과 마찬가지로 관념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것들 사이에 일정한 단계적 구분이 존재한다. 색채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이 물체의 표면에 반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색채는 물체의 표면 공간을 떠날 수 없으며, 색채는 표면 공간에 의존하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3]

 

반면 물체의 진동인 음은 스스로 소멸하면서도 자기를 보존해 나가는 시간적 존재이며[4] 따라서 색채보다 더 발전된 의미에서 관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물질은 외재성{Aussereinandersein:  병존성}을 벗어나서 탈자적[Aussersichsein: 소멸성] 존재가 된다. 이런 탈자적, 시간적 존재조차 여전히 물질의 진동인 한에서, 물질성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언어적 관념에 이르러 음소나 문자와 같은 언어의 물질성은 관념을 지시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지시하는 관념은 물질성으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롭게 된 순수한 관념적 존재가 된다. 이런 관념성은 공간성뿐만 아니라 시간성마저 상실하고, 관념과 관념은 오직 논리적[언어적] 관계만 갖는다.

 

3)

낭만적 질료라 규정한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이 관념적인 것이라는 공통성을 지닌다고 해서 단순히 그런 공통성이 그런 질료를 낭만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아닐 것이다. 관념적인 것이 낭만적인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형식의 경우 그 기호는 가상이라고 규정되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가상이라는 것은 현상과 같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면서, 의미를 지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기 부정성은 달리 말하자면 자기 내 복귀를 말한다. 이를 통해 무한한 주관성으로서의 정신이 자기를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말해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인 주관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리얼하게 제시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서 부정되는 가운데 정신 드러낸다.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 주관성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운동성 속에 제시되기에 가상이라 규정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보카시오의 데카메론과 같은 모험 소설이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같은 성격 희곡일 것이다.  

 

낭만주의의 말기 즉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 주관성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긍정성은 무한성, 즉 자기복귀라는 자기 부정적 운동을 잠재적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대체로 외적 자연, 즉 이런 자연의 개별화되고 특칭적인 것으로 된 대상들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 이것들은 아무리 충실하게 취급되더라도 이 경우 이런 대상들에게는 자기 자신에서 정신적인 것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런 대상은 이미 그 예술적 실현 방식을 통하여 정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또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생동적이고, 외면성의 최종적 극단에조차 심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함, 한마디로 내적 관념적 요소를 가시화한다.” [5]

 

이런 가상 개념을 생각해 볼 때, 헤겔이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과 같은 관념적 질료를 낭만적 질료라고 규정했다면 그 이유는 그런 관념적 질료가 자기 부정적이거나 자기 복귀라는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낭만적 질료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주관적인 것이 … 이 질료 속에 이입된다면, 내면은 내면으로서 비치기 위해 이 질료에서 한편으로는 공간적 총체성을 제거하고 또한 공간의 직접적 현존재를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 즉 정신에서 야기된 가상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형상 및 그 외적 감각적 가시성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내용이 요구하는 갖가지 특칭화하는 현상방식들을 추가로 도입해야 할 것이다”[6]

 

여기서 헤겔은 낭만적 정신이 무한한 주관성이라는 전제 아래서 이런 무한한 주관성을 예술적 질료가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질료에서 공간성을 제거하고 ‘정신에서 야기된 가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가상성 외에도 갖가지 특칭화하는 현상방식 즉 특수 기법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역시 전체의 핵심은 가상 개념에 있다. 낭만적 질료가 되려면 가상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4)

하지만 관념적인 질료가 가상적인 근거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관념적인 것이 가상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가상성이란 자기 부정성, 자기 내 복귀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관념적인 것은 이런 개념과 필연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여기서 헤겔의 관념성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겔이 물질은 외재적[Aussereinandersein]인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여 상호 내재적이 되면 관념적으로 된다. 즉 어떤 것이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에 의해 규정되면, 이 경우 타자는 자기의 부정이며 자기는 이 타자의 부정, 즉 이중 부정이 되면서 관념적인 것으로 된다.

“여기에 정립되는 관념성은 이중적인 부정으로서 변화를 의미한다. 물질적 부분이 상호 외부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부정되니, 그것의 상호 외부적 존재와 그 응집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관념성은 서로를 지양하는 규정성의 교체로서의 관념성, 물체의 자기 내부에서의 진동 곧 음이다.” [7]

 

이처럼 자기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 이제 의미는 개별적인 것 그 자체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관념적인 것은 오직 상호 관계를 통해 타자를 통해서 자기가 규정되니, 이것이 관념적인 것에서부터 가상적인 것이 출현하는 근거가 된다. 관념적인 것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이나 조각에서 물적 질료는 그 의미가 상징적이든 고전적이든 간에 개별적 질료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 개별적 질료는 서로 독자적인 것이며, 비록 외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그 관계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념적 질료인 색이나 음, 그리고 언어는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항상 타자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이런 질료는 개별자 자체로서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항상 서로 대립하는 질료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예를 들어 빨강색은 파란색이나 노랑색에 대해서 규정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빨강색은 이런 파란색이나 노랑색과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헤겔은 회화의 근본적 성격을 설명하면서 색채의 마법을 서술한다. 이 색채의 마법이란 곧 여러 가지 색채가 상호 대립과 조화를 통해 전체적으로 정신적 형상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음악의 음도 마찬가지다. 도미솔은 각자 고유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도미솔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되며 따라서 각자의 의미는 이런 음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헤겔은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 했듯이 음악은 음들로 이루어진 건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개별적 질료 사이의 반성적 관계는 언어적 관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개별 단어는 항상 다른 단어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단어가 그런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등장 이래로 일반 상식이 된 것으로 보인다.

 

5)

물론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 사이에서 각각이 갖는 상호 관계는 다르다. 색채는 다른 색채와 공간적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음과 다른 음은 시간적 관계 속에 있다. 색채나 음에서 그 관계는 마치 역학적인 인력과 척력의 관계처럼 대립과 조화, 또는 비례라는 단순한 수적인 관계에 머무른다. 이런 관계는 감각적 감정을 건드릴 수는 있지만, 이것을 통해 구체적 사태를 그것도 생성 소멸하는 운동 속에서 그려낼 수는 없다.  

 

반면 언어적 관념에서는 이제 주어와 술어라는 고유한 언어적 논리적 방식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관계는 가장 관념적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사태를 그려낼 수 있고 그 사태를 운동하는 것 속에서 그려낼 수 있으니, 예술 가운데 가장 풍부한 질료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관념적 질료는 반성적 상호 관계 속에 있다. 그것은 이제 그 자체로서 규정되지 못하며 타자에 대해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관념적 질료는 자기 부정성이나 자기 내 복귀라는 성격을 지니게 되니, 헤겔은 이런 관념적 질료를 가상적 질료라 하면서, 낭만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1] 이 빛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이미 물질적인 것이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니, 헤겔에 따라면 빛은 “물질적 관념성”, “불가분적이고 단순한 탈자태[Aussersichsein]”, “물질의 자아[Selbst der Materialitaet]”이다. (헤겔, 철학강요, S. 280)

[2] 이 진동은 “물체에서 나타나는 물체의 관념성[am Materiellen als dessen Idealitaet]” 또는 “역학적인 영혼성[mechanische Seelenhaftigkeit]”이다. (헤겔, 철학강요, S. 297)

[3] 아래 구절을 참조하라. “동시에 빛과 상이한 어두운 것[물체]은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한, 빛은 이런 일단 불투명한 것의 표면에 관계한다.” (헤겔, 철학강요, S. 280)

[4] 아래 구절을 참조하라. “규정성의 특수한 단순성, 이 우선 내적인 형식은 물질적인 외재성[Aussereinandersein] 속에 잠겨 있던 것을 뚫고 지나가면서 그의 외재성이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을 통해 물질적 공간성이 물질적 시간성으로 이행한다.” (헤겔, 철학강요, S. 297)

[5] 미학강의 3, 18쪽

[6] 미학강의 3, 18쪽

[7] 헤겔, 철학강요, S. 297

헤겔미학산책37-조각의 회화화[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37-조각의 회화화

 

1) 고전 이전

헤겔은 조각의 발전 과정을 건축처럼 예술형식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 로마 시대 고전적 조각을 기준으로 그 전과 그 후로 나누었다. 고전조각의 특징은 이상성과 생동성, 그리고 자족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전과 그 후의 조각이 지닌 특징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헤겔은 고전 이전의 조각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집트 조각을 들고 있다. 이집트 조각은 아직 정신이 자각되지 않은 상태이어서 정신은 동물적 형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적 형상이 출현하더라도, 머리는 여전히 동물적인 형상을 지닌 이집트 신이나 몸은 동물의 형상이지만 머리는 인간의 형상인 스핑크스에서 그런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형상은 경직되었으며, 양식적인 것에 머물렀으니, 구체적 생동성을 결여했다. 진지했으나 생동성을 결여했다. 그 결과 조각 작품과 그 의미 즉 정신과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었고 그 의미는 비밀스러운 것으로 남아 수수께끼적인 상징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가의 능력이 서투른 것 때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부분에서는 고도로 사실적인 모습도 출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경직성과 양식성은 그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인다.

이집트 시대 정신은 아직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므로 예술은 상징적 형식에 빠졌고 그 결과 경직성과 양식성이 출현했다. 즉 이집트 조각은 “신상과 그 비밀스러운 고요함에 관한 근원적 직관”을 반영하는 것이니 그런 작품에서 나타나는 부동성 즉 “상황이나 행위의 결여는 이런 [정신적] 부동성과 불가분으로 결부되어 있다.”[1]

헤겔은 이집트 사회와 유사한 그리스 로마 이전의 민족 즉 에기나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의 조각에서도 똑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2) 조각의 쇠퇴

조각은 구체적 질료를 사용하므로, 아무리 구체적이고 생동적이라고 하더라도 정신 자체의 특수한 주관적 본질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개인의 “고통과 고뇌, 가책과 참회, 죽음과 부활, 정신적이며 주관적 인격, 깊은 감정, 사랑, 가슴과 심정 등”[2]을 표현하는 조각은 발견하기 어렵다. 조각의 질료를 가장 잘 다루었던 고전 조각조차도 일반적 정신을 정지 상태의 형상 속에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니, 움직임을 표현하는 일이나 또는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해는 것은 쉽지 않다.

 

조각은 “다만 개별성이 지닌 일반적인 것만을 표현할 수 있으며, 즉 그것이 겉의 육체에 표현될 수 있는 한에서 비연속적인 특정한 한 순간 속에서만 표현할 수 있으며, 그것도 생생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행위가 아닌 부동자세로만 표현 할 수 있다”[3]

 

조각의 이런 한계 때문에 조각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쇠퇴하기에 이른다. 낭만주의 시대 예술은 개인적 주관성의 특수성을 생성하는 운동 속에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조각은 예술의 주도적인 역할을 상실하고 점차 다른 낭만주의적 예술 장르가 지배적으로 된다.

 

“이러한 [낭만적] 주관성은 비록 외적인 것 속에서 현상하지만 그것을 그 특칭성에 따라서 독자적인 것으로 둘 뿐, 조각의 이상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것과 내적 정신적 요소의 융합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4]

 

낭만주의 시대에도 남아 있는 조각은 그 시대 정신은 낭만적임에도 불구하고 형상화의 방식은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을 답습했다. 과거의 신과 영웅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와 성인이나 시민적 영웅의 형상이 등장하는데, 그 표현 방식은 그리스도와 시민적 영웅을 이상화한다.

그와 같은 시도는 르네상스 시대에서나 신고전주의처럼 그리스적 양식을 예술의 이상으로 삼았던 시대에 특히 유행했다. 성당을 장식한 성인 상이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나, 헤겔 자신이 찬탄을 금하지 않았던 라우흐의 괴테상 등에서 그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미학강의에서 헤겔 자신이 자기를 미혹했다고도 표현했던 미켈란젤로의 ‘나소 백장 능묘’도 이런 경향을 표현한다. 헤겔은 이 작품이 “고대인의 조형 예술의 원칙과 낭만적 예술의 영활 방식이 생산적 독창성으로 결합한다”[5]라고 한다.

 

3) 고전 이후의 조각

자체 내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각 역시 낭만주의 시대 리얼리즘적 경향을 따라 운동성과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헤겔은 그런 발전 경향을 명시적으로 서술한 바는 없으나 그의 서술 가운데 그런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런 발전은 청동과 같은 가소성이 풍부한 질료를 다루는 기술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졌다. 청동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조각의 질료로 다루어졌으나, “각종 표현에 쓰일 수 있으며, 또한 대단히 다양한 그 색조와 무한한 조형 가능성 및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능성은 근대에 들어와서 고도로 발전했다고 한다[6].

이어서 헤겔은 조각 표현방식의 발전을 설명하면서, 군상과 부조를 거론한다. 조각은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개별 입상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조각품이 함께 어우러진 군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고전 시대의 말기에 등장한 라오쿤 군상 등에서도 그런 경향이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아무래도 낭만주의 시대 이후다. 특히 고딕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조각상은 여러 성인의 집단적 인물군이다.

조각 작품은 부조를 통해 평면 위에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연속된 평면 위에 드라마틱한 역사적 이야기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같은 사건이 서술한다. 헤겔은 이런 부조는 조각이 “회화의 원칙을 향해 의미 있는 발걸음을 뗀 것”[7]이라고 평가한다.

고전 조각은 하나의 독립적 작품이었다. 그것은 고유한 공간에 자립적으로 서 있다. 그러나 군상과 부조는 이제 그 자체 자립적인 작품이 되지 못하고, ‘건축의 장식물’로 전락한다. “성자들은 대개 탑과 내력 벽의 벽감 속이나 현관문에 서 있는 반면, …[성서 속의] 위대한 광경은 그 내적 다양성으로 인해 즉시 교회 정문이나 교회의 벽, 성수반 합창대석 등등에서 부조로 표현되었다”[8].

낭만적 조각의 또 하나의 경향은 주관적 특수성을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헤겔은 조각 장 마지막 부분에 서술된 기독교 조각에 대한 서술에서 이를 설명한다. 그 결과 역사상 실제 인물을 닮은 초상화적인 조각상이 곳곳에 세워졌으니, 이런 작품은 인물이 지닌 특수한 주관적 정신을 표현한다. 헤겔은 그 예로서 뉘른베르크 시장의 거위상인이나 그 외 성 제발트 교회에서 발견되는 조각을 들고 있다.

조각은 채색되고 과장, 왜곡되면서 회화를 닮아간다

“고전적 조각에서는 객관적 실체적 개별성이 중심점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여기서 ..묘사된 인간은 온전한 인간 즉 모든 것이 구비된 구체적 인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개성이, 주관의 전 영역이 현실의 무한한 권역에서 내용과 표현방식의 원칙으로 현상하려면, 그는 ..객관적 보편성으로서의 인간성뿐만 아니라….주관적 개체성, 인간적 약점, 특수성, 우연성, 자의 직접적 개별성, 열정 등등의 계기 역시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9]

 

이런 초상화적인 조각은 회화를 닮아가면서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기 위해 과장이나 왜곡이 들어가게 되며, 무엇보다도 지금껏 배제되었던 색채와 눈의 시선이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주관화의 경향은 조각의 질료상 한계에 부딪히면서 예술적 표현의 또 다른 감각적 질료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곧 회화이다.


[1] 미학강의 2, 486쪽

[2] 미학강의 2, 494쪽

[3] 미학강의 2, 382쪽

[4] 미학강의 2, 495쪽

[5] 미학강의 2, 497쪽

[6] 헤겔은 구체적으로 프러시아에서 그런 기술이 발전했다고 말하면서 그네센의 청동교회문, 베를린과 블레슬라우에 있는 블뤼허 상, 비텐부르크의 루터 상, 쾨니스베르크와 뒤셀도르프에 있는 청동상 등을 들고 있다.

[7] 미학강의 2, 472쪽

[8] 미학강의 2, 496쪽

[9] 미학강의 2, 4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