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41-회화에서 구성의 문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1-회화에서 구성의 문제
1) 회화
회화의 질료는 색채다. 헤겔은 회화의 질료 자체가 이미 가상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즉 빛은 요소로 분화되면서 색채로 되고, 그 색채의 상호 관계를 통해, 대립과 조화를 통해 대상을 표현한다. 색채는 이런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자기 부정성을 지닌 가상적인 것이다.
질료의 특성상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평면적 형상은 특정한 주관적 시점에서 선택된 것일 수밖에 없고 색채의 대비 역시 주관적 심정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의 눈에 보이는 현실 즉 구체적 현실을 그려낼 뿐이다.
그 때문에 회화는 일반적 정신을 형상화하는 데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고대나 고전 시대에도 회화가 있었지만 이 시대 주된 관심의 대상인 신과 영웅 자신은 항상 조각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으니, 조각은 장르의 특성상 일반적 정신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회화가 만일 신과 영웅을 표현하게 된다면, 그것을 특칭적 주관으로 만들어 인간화해 버리고 마니, 이 시대 회화라는 장르는 기피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도 회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 무덤 벽화나 그리스 도자기 회화가 다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시대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이를 표현하는 무덤 벽화나 도자기 그림은 다만 장식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출현했다. 자기를 부정하고, 이행하고야 마는 그야말로 우연하고 허망한 현실이 이 시대에는 오히려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마치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듯이 이런 우연성과 허망함 속에 진정으로 실체적 정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회화는 그 표현 가능성이 돋보이게 되면서 건축과 조각을 대신하여 주도적인 예술로 등장하게 된다.
2)
낭만주의 예술은 구체적 현실 즉 우연하고 허망한 현실을 그 자체로서 만족스러운 현실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 예술은 구체적 현실을 통해 그 시대 정신을 드러내려 한다. 구체적 현실은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 가운데서 일반적 정신으로 복귀한다.
헤겔은 이런 자기 부정하는 운동 속에 있는 현실을 가상이라 규정했다. 구체적 현실에서 나타나는 이런 자기 부정의 운동성이 곧 ‘영적 생기[geistige Beseelung]’다. 이런 가상성은 개인의 주관적 모습 속에서는 그 속에 담긴 내밀한[innig] 심정으로 드러난다.
“회화는 색채들의 특수화를 통한 형상화, 평면으로의 확장이라는 감각적 요소 속에서 움직이며,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대상성의 형식은 정신에 의해 정립된 예술적 가상[schein]으로 변화하며, 회화에서는 이 가상이 실제의 형상 자체를 대신한다.”[1]
[외물의 현실적 현존재] “더 이상 그 자체로서 궁극적 타당성을 간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이 실재성 속에서 정녕 자체가 내적 정신이 단순하게 빛나는 가상[Scheinen]으로 격하되어야 한다.”[2]
조각에서의 고전적인 이상화에서와 달리 회화에서 외적 형상은 자연적 명랑성, 지복, 자족성을 지니지 않으며, 오히려 외적 형상은 “분열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자기 안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명랑성, 지복, 자족성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이어야 하며, “전체가 정신의 내면성으로 전이되어야 한다.”[3]
3)
그러나 회화에서 가상성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는 문제이다. 회화는 색채를 통해 만들어진 평면적 형상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그것이 지닌 색채의 음악과 색채의 마법은 어디까지나 공간적 평면 위에 펼쳐진 것이다. 평면적 형상은 일단 외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그 형상이 질료의 측면에서 보면 조각에서처럼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고 평면 위에 그려진 가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마치 외적인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회화에서 표현된 그 모습을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 모습이 부정적인 모습 즉 고통 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날 경우, 이는 단순한 고통과 죽음으로만 여겨질 뿐, 이를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는 모습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거꾸로 긍정적인 모습,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으로 나타날 경우 그 역시 단순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만 여겨지며 이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정신적인 아름다움이며 즐거움이라는 사실은 간과된다.
장르의 특성상 외적인 형상을 자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회화 그 자체는 외적 형상을 넘어설 수 없다. 회화는 시문학처럼 어떤 형상이 그런 자기를 부정해 나가는 운동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다. 그것이 하나의 자기 부정적인 가상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평면적 형상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회화는 구체적 현실의 가상성, 자기 부정의 운동, 영적 생기, 내밀한 심정을 그려낼 수 있을까?
우선, 관람객이 눈으로 또는 마음으로 외적 형상을 읽으면서 그 운동을 따라갈 때 비로서 음악과 마법이 출현한다. 이런 마음의 운동이 없다면 회화에서 영적 생기가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음의 운동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그런 운동을 암시하는 요소가 평면적 형상 속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회화의 다양한 특수한 기법이 출현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한 화면 속에 다양한 군상을 통해 또는 삼면화나 벽화 등 연속된 그림 통해 가능한 한 이런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화에서 이런 경향 때문에 회화의 구성의 문제가 등장한다.
4)
헤겔은 회화를 다루면서 색채라는 질료가 드러내는 가상의 측면 못지 않게 회화 속에 다양한 대상들 사이의 상황과 행위, 모티브 그리고 인물의 구성에 주목한다.
조각은 이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고요하게 머무르며, 아무런 배경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조각은 이념이 자기를 구현한 것이어서 자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각도 점차 생동적으로 되면서 상황과 운동 속에서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리고 다른 조각상과 함께 집단적인 군상을 이루거나 연속적인 부조로 발전한다.
회화의 경우 이런 측면을 더욱 발전시킨다. 우선 회화는 구체적 현실 속의 특수한 인격, 구체적 상황, 특정한 행위를 통해서 ‘극적 생명성[dramatische Lebendigkeit]’을 표현할 수 있다. 회화 속의 인물은 특정한 개성을 지니고, 외적 상황과 생생한 관계 속에 있어야 하며, 특정한 동기를 지닌 구체적 행위로 자기를 표현한다. 이 행위는 곧 전체적인 극적 운동 가운데 가장 극적인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외적 상황과 구체적 행위 속에 있는 특수한 인격은 불가피하게 여러 인물을 끌어들이니, 인물의 군상이 회화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회화는 하나의 평면 공간 속에 시, 공간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이 동시에 표현되며, 때로는 연속된 회화 장면(예를 들어 삼면화와 같이)을 통해 이 다양한 사건이 표현되기도 하니, 회화의 이런 기법은 조각에서 등장한 기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황 속에서 다른 인물과 관계 속에서 어떤 인물의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독특한 구성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서 근본적인 것은 정신의 운동을 공간적 구성 속에 표현하는 것이다. 그 구성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혼란 속에서 결정적 행위를 하는 인물로 집중되기도 한다.
“조각적 구상방식을 이렇듯 포기하고 고요하고 부동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생생한 인간적 표현과 특성적 개성을 이렇듯 추구하고 각 내용을 주관적 특수성과 그 다채로운 외면성 속으로 이렇듯 투입하는 가운데 회화의 발전이 이루어진다.”[4]
헤겔은 회화에서 이런 공간적 구성이 단순히 공간적 형태의 구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구성은 동시에 색채의 대비, 조화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회화의 생명성의 화룡첨정은 오직 색채를 통해서만 표현 가능”[5]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색조들 및 서로를 비추고 서로 유희하는 그 조화와 대비의 단순한 향기와 마법 속에서 완전히 음악으로 건너가기 시작한다.”[6]
5)
회화는 정신의 운동을 색채로 만들어지는 공간적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아직 음악이나 문학과 같이 운동을 시간 속에서 생성하는 측면에서 파악하지는 못한다.
이런 한계 때문에 회화는 운동을 표현하는 시문학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헤겔은 이런 시도를 뒤셀도르프 화가의 시화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런 시화는 당대의 시인의 시를 회화로 그려냈는데 헤겔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이런 시도는 장르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써 혼란만 자아냈다고 한다.
시문학은 언어적 표상을 질료로 하면서 사태를 시간적인 계기를 통해 서술해 나간다. 반면 회화는 색채를 질료로 하여 공간적 형상을 공존적으로 가시화한다. 회화는 평면의 공간을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회화는 시간적 계기 가운데 어떤 극적인 장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과거나 미래는 동일한 평면 공간 속에 표현된 잔재나 암시를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다. ,
그에 못지 않게 더 중요한 것은 시는 추상적 언어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이런 감정이 전환하고 진행하며 고양하는 과정을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는 감정을 외적 형상을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추상적으로는 신체의 자세나 얼굴의 표정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행위를 통해서, 즉 특정 상황에서 일어나는 열정적 행위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열정은 색채의 대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뒤셀도르프 화가들은 시를 회화로 표현하려 했으니, 아주 단순한 장면을 선택했으며 감정을 주로 표정과 자세를 통해서 묘사하는 데 그쳤다. 대표적으로 헤겔은 샤도프의 미뇽을 예로 들고 있다.
헤겔은 이런 한계를 지적하는 가운데, 시를 회화로 표현하려면 공간 속에 과거와 미래의 상황을 보여주는 풍부한 감각적 형상이 필요하며, 심정은 색채의 마법을 통해 제시되는 행위의 열정을 통해서 표현하여야 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성서의 이야기를 회화로 표현하려 했던 르네상스 화가의 노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정신이 현실의 극적 생명성 속에 표현된 대표적 작품으로 헤겔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이나 팔마 베키오의 그림 ‘야곱과 라헬’을 들고 있다.
6)
회화는 이처럼 특수한 주관성을 통해 이념을 표현하는 한, 그것이 내밀하게 표현되든 아니면 운동 속에서 표현되든, 회화 속에는 이미 작가 자신의 주관성이 포함되어 있다. 회화가 그려낸 특수한 주관성이 곧 작가 자신의 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주관성은 곧 독자의 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니, 회화 속에는 이미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의 주관성이 전제되어 있다. 회화는 작품 속의 특수한 주관성을 통해 작가 자신의 주관성과 독자의 주관성 사이의 매개와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이점은 회화를 다시 조각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념이 자립적으로 출현한 조각의 경우 이 조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작가 자신의 주관적 관점이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조각은 무시간적 공간 속에 전시되며, 이 공간은 관객의 주관성 조차 배제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회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화는 주관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제 그 전체 표현방식을 보더라도 오직 주관을 위해, 감상자를 위해 현존할 뿐 독자적으로 그 자체로서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보여준다. 관조자는 말하자면 처음부터 작품에 같이 있으며, 함께 고려되고 있으므로 예술작품은 주관이라는 확고한 점에 대해서만 오로지 존재한다.”[7]
[1] 미학강의 3권, 27쪽
[2] 미학강의 3권, 27쪽
[3] 미학강의 3권, 45쪽
[4] 미학강의 3권, 92쪽
[5] 미학강의 3권, 92쪽
[6] 미학강의 3권, 93쪽
[7] 미학강의3, 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