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철학을 하는 데 있어 굳이 다른 사상가의 철학을 빌려올 필요가 없다. 내가 네이버 <지식 저술가> 프로젝트에 제출한 ‘에세이 철학’의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를 고려한다면 ‘에세이 철학’은 불교의 선(禪)과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선불교는 잘 알다시피 스님들이 염불하는 법당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죽은 경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에서 불법을 찾는 중국 불교의 새로운 정신이다. 일자무식인 6조 혜능은 홍인 선사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낸다)’란 금강경 강론을 듣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깨달음에는 번거로운 절차도 없고, 온갖 언어 수식도 필요 없다. 오로지 행주좌와 일심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홀연히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자 하는 창조적 정신만이 중요하다. 임제 선사가 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의 정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칼을 든 사무라이와 그 정신이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때 그 어떤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들, 동과 서, 옛날과 지금의 수많은 철학자에 올라타거나 그들의 사상을 빌려오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지금 이 순간'(hic et nunc)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상에서 부닥치는 모든 대상과 경험들을 철학적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비판하고 성찰하면서 철학적 통찰의 깊이를 드러내어 준다. 그러므로 ‘에세이 철학’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선의 정신처럼 모든 권위와 우상의 파괴를 시도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4대 우상, 즉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언어의 우상’ 외에도 ‘권력과 국가의 우상’ 등 일체의 권위와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모든 가치를 부정한 니체의 ‘망치의 철학’을 구현하고자 할 뿐 실체화되고 화석화된 이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저 너머의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추상개념들의 몰 주체성도 비판한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과 ‘선불교’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불립문자를 추구하는 선은 언어의 끝, 문자의 종언을 주장하는 데 반해, ‘에세이 철학’은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에세이 철학’을 굳이 선으로 표현한다면 ‘문자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21세기에 부활한 선불교의 변형된 형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자는 어떤 경우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문자를 버린다면 문자가 부재하는 그 세계는 이 세계가 아니고 이 세계와 무관한 세계이다. 이 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이 소수에게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이 세계의 다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의 궁극 목적[상구보리(上求菩提)]은 이 세상과 나누기 위함이고[하화중생(下化衆生)],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함(마르크스)이다. 이러한 정신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깨달은 이, 모든 인텔리겐차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밖으로 나가 빛을 본 계몽된 인텔리겐차는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동굴 속으로 귀환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선의 문자화, 선의 일상화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진리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가장 현실적인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에세이 철학은 그동안 이 땅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추구해 마지아니했으나 누구도 시도치 못한 ‘우리 철학’의 방법론이자 그 철학 자체이다. 지금까지 ‘우리 철학’을 모색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내 걸었으나 문전에서 머뭇거렸을 뿐 누구도 그것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칸트식의 물음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내가 수영을 할 수 있는가나 내가 말을 탈 수 있는가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백날 던져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속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면서 배우는 것이고, 말 등에 올라탔을 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명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다 보니 그간 ‘우리 철학’을 그렇게 탐구했으면서도 누구도 그런 작업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은 우리의 시대, 우리의 삶을 대상으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사유를 가지고 표현하고자 한 우리의 철학이다. 더 이상 그것 바깥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 자체를 사유하고 통찰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 철학은 ‘타자의 철학’이 아니라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우리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이종철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4월 월례발표회 영상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4월 월례발표회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1부에서는 2021년 2월부터 6월까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들’ 1]이라는 기획주제 아래 총 5번의 월례발표를 기획하였고 이번 4월이 세 번째 발표입니다.

 

기획 : 인민주권과 민주주의의 가능성

주제 :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발표자 : 한상원(충북대학교)

토론자 : 한길석(중부대학교)

일시 : 2021년 4월 29일(목) 오후 4시 – 6시

장소: 온라인 줌 회의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5X84rqeDiTI

가족 같은 세상 [내가 읽는 『자본론』]

가족 같은 세상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 이 글은 2021년 1월 초,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즈음하여 작성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가족을 참 좋아한다. ‘가족 같은 회사’, ‘가족 같은 분위기’, ‘한 국가를 살아가는 가족’ 등 가족이라는 단어를 어디에나 다 가져다 붙인다. 보통 가족을 이런 용법으로 사용할 때에 가족은 좋은 의미로 쓰인다. ‘가족 같은~’이라는 표현에서 가족은 화목하고 포근한 공간, 안전하고 끈끈한 집단(공동체)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가족이라는 수식어가 가지고 있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성격부터가 문제이지만, 이 글에서는 가족이라는 수식어로 은폐하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계약관계, 그리고 그 계약관계가 가지는 허구의 공정성에 집중해보자.

한때 대한민국 굴지의 모 대기업에서 국내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홍보 슬로건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 대기업은 해당 슬로건을 통해 좋은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실제로 대한민국 어느 가정을 보더라도 해당 기업의 제품 하나 이상은 찾아볼 수 있으니 이 기업은 대한민국에 한정된 또 하나의 가족이긴 하다.

이 기업은 반도체, 전자기기를 주력 상품으로 한다. 해당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직업병으로 죽거나 중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족’을 내걸며 자신을 알리던 이 기업에게 기업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가족이 아니었나 보다. 이 기업은 제품 생산 및 연구 공정과 질병 발병의 연관성을 계속해서 부정해왔다. 결국은 법적으로 산업재해가 인정되었지만 그러함에도 여전히 이 기업은 노동권 보장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개발독재 시대 얘기를 해보자. 대한민국은 독재자 대통령을 아버지[父]로 하는 하나의 가족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각하께선 국부(國父)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1 그러나 아버지는 ‘소자의 아픈 곳’을 외면했다. 수출 실적이 매년 사상 최대치를 찍을 때, 청계천 옆 의류 시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가 폐병에 걸리고 손가락이 잘려가면서도 해고될까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찬 바람 부는 서울 길거리에서는 아버지께 아픈 곳을 고쳐 달라고 하던 한 사람이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겼다.

이번 겨울 여의도의 쌍둥이처럼 생긴 빌딩에 일군의 청소노동자들이 농성 중이다. 농성 중인 노동자들은 외부에서 음식물을 반입하지도 못하고 전기를 사용하지도 못한다. 그 빌딩은 ‘인화(人和)’를 창업정신으로 하는 기업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가장 중시한다는 그 기업은 길게는 십여 년 동안 기업의 상징적 건축물을 관리하던 청소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참고로 그 청소노동자들을 관리하던 용역업체는 해당 기업 오너의 일가이다. ‘진짜’ 가족을 챙겨주느라 창업정신은 잠시 잊었던 것인가.

 

이런 현실에서 왜 노동자들을 가족으로 대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면 세태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속내를 드러낸다. 그들은 ‘다 알면서 그런 것 아니냐’, ‘근로계약서에 서명한 건 노동자 자신이지 않냐’, ‘자유롭게 계약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결국 ‘가족 같은 회사’나 ‘가족 같은 국가’는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 먹고 살자는 말로 자본가들은 자본을 불리기 위해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고,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다. 계약은 여기서 성립한다. 임금과 노동력이 교환되면서 양측은 각자의 필요를 충족한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고용하는 사람들과 계약을 맺을 때, 그것은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였을까? 만약 정말 그 계약이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였다면 왜 우리 사회는 ‘가족 같은 회사’, ‘가족 같은 국가’라는 수식어로 그 계약을 은폐해왔단 말인가. 왜 노동자들은 일하다 죽고 다쳐도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고 살아야 하는가. 왜 자본이 부당하게 계약을 파기하여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차디찬 겨울 음식물과 전기 공급이 끊긴 곳에 버려져 있어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했을 때의 계약은 그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처분한다는 사실을 이를테면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증명한 것이었다. 거래가 완결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자유로운 행위자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 그가 자유롭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은 그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판매해야만 하는 기간이라는 것, 사실상 흡혈귀는 착취할 수 있는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그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폭로된다.”2

 

이 문장은 비유적 서술이 아니다. 실제로 근대 유럽에서 노동자들은 근육, 힘줄, 피 한 방울까지도 자본, 그리고 자본과 결탁한 국가를 위해 쥐어 짜내야 했다. 그리고 또 대한민국에서도 노동자들은 그래야만 했다. 가족이라는 화목하고 포근한 이름 아래에서 이 착취는 ‘고귀한 희생’으로 세탁되었다. 시간이 흘러 기업이 말해온 가족이라는 개념의 허울뿐인 명분이 조금이나마 벗겨졌지만,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착취는 다시 ‘자유롭고 공정한 계약’이라는 하얀 가면을 쓰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제10장 노동일 파트에서 수많은 노동 착취 사례들을 서술한다. 이 사례들을 보면 당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갉아먹는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이를 막기 위한 제도적이고 법적인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항상 자본가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당연히 자본가들은 그 구멍을 점차 넓혀가며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그 구멍은 노동자들을 병들고 죽어가도록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렇고 유럽에서도 그렇고 세계 어디를 가봐도 “자본은 사회에 의해서 강제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3 북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대기업들이 대한민국 시장에 진출하면 처음에는 본국에서 노동자들을 대하듯이 대한민국에서도 기업을 경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헬적화’4 된다고 하지 않던가. 『자본론』 1권 제10장에 실린 수많은 사례와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서 우리가 목격한 사례는 자본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갑자기 최근에 국회 문턱을 넘어선 법 하나가 생각난다. 본래 이름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었지만 국회를 지나면서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이름이 바뀐 그 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산업안전보건법 등 기존 산업재해에 관련된 법의 허술함으로 인해 노동자가 죽고 중상을 입는 등 중대한 산업재해가 계속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이 추진되었던 법이다. 본래 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예방과 관리 책임이 있는 주체를 처벌하는 법안으로, 높은 수준의 벌금과 징역형을 통해 재해 예방 책임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내버려 두지 못하도록 경각심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 해 수백 수천 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나라에서 꼭 필요한 법이었다.

일하다 죽는 노동자가 없는 사회를 위해 나는 지난 10여 주 동안 아침마다 (가끔은 저녁에도) 길거리로 나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케팅을 거의 매일 했다. 그동안 여러 의제로 피케팅도 해보고 서명운동도 해보았었다. 그런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만큼 큰 호응을 얻은 일은 없었다. 전철역에서 피케팅을 할 때 보통은 피케팅을 하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역무원들도 ‘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보면 오히려 응원을 해주고 가셨다. 길을 가던 시민이 음료수나 귤을 주시기도 했다. 사람 목숨은 소중하니까, 뭐든 간에 사람을 살리려는 이 법안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나.

이런 시민, 노동자들의 여론에 떠밀려 요지부동이던 정부 여당을 포함한 거대 보수 양당도 진보정당에서 최초로 의제화한 이 법안 제정에 참여하였다. 결국, 법안은 통과되었다. 다만 정부와 여당, 제1보수야당이 협의한 끝에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이름의 누더기가 된 채로 말이다. 10여 주 간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나마 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기엔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기업’이 빠진 ‘중대재해처벌법’은 다섯 명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엔 적용되지 않고, 쉰 명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에는 수년 뒤에나 적용된다. 벌금 하한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법안 수정을 적극적으로 이끈 집권 여당은 정책위원회 명의의 홍보물에서 “법안의 미비한 부분에 대한 보완과 개선을 계속해 나갈 것임을 약속”5했다. 본인들도 미비한 법안임을 잘 알고 있다. 보통 법은 예측되는 미비한 부분을 모두 보완한 뒤 제정하고, 시행 중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문제점을 개정하는 식으로 고쳐진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5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 사업장 중 반을 넘는 게 현실이다. 이제 기업들은 5명 미만으로 따로 하청을 줘서 노동자들을 분리 고용하는 ‘합법적인 꼼수’를 쓸 것은 뻔하다. 만약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처벌과 마찬가지로 법원이 수백만 원 단위의 벌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달라진 게 뭘까. 여전히 노동자의 목숨값은 수백만 원이고, 이 미비한 법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너무나 많으며,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가족 같은 국가’의 ‘가족’에 노동자는 없는 것이 맞다. 그 가족 구성원에는 돈 많은 사람, 중대한 산업재해가 자주 발생하지 않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기업가들만 있나 보다.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서 한 해 2,000명 가까이 되는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대한민국이다. 죽음으로 내몰릴 이유가 없던 사람들이다. 죽을 이유가 없고 죽음에 이르지 않을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뒀다면 그것이 노동자들을 일부러 죽인 일과 무엇이 다른가.

 

2주 전쯤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어떤 노년의 여성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전태일을 왜 기념하는지 몰라. 그냥 일하기 싫어서 떼쓰던 사람인데 말이야. 예전에는 나라가 가난해서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어. 내가 해외에 물건 수출하던 기업 운영했던 사람인데 말이야…” 물론 전태일은 ‘일하기 싫어서 떼쓰던 사람’이 아니다. 기업이 해외에 수출할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안 그래도 좁은 공장에 널빤지로 칸칸이 쪼개어 환기도 안 되는 곳에 밀어 넣어진 여공들이 폐병으로 죽어가던 현실에서, 그들이 먹고 살아갈 방법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사람이 전태일이다. ‘가족’들이 아프니까 ‘아버지’였던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편지도 써봤다. 그러나 노동자 전태일의 말을 들어주는 권력자, 자본가는 없었다. 전태일은 아무도 듣지 않는 목소리를 더 크게 내야 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외치기 위해, 그래서 분신을 선택했다.

『자본론』에는 ‘워클리’라는 소녀의 죽음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워클리는 환기가 안 되는 밀폐된 공간에 수십 명의 소녀와 갇힌 채 일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죽음은 밀폐된 공간에서의 초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엔 화력발전소에서 탄가루가 수북이 쌓인 채 혼자서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다가 목이 잘려 죽은 청년이 있다. 그 죽음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 청년의 어머니가 단식 투쟁으로 이뤄내고자 했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누더기가 되어 중대재해처벌법이 되었다.

마르크스의 책에서 고발하는 사례들은 문자로 박제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바로 여기,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유예되고 제외된 사람들이 진정 우리 사회의 가족이었을까. 아니면 공정한 계약의 당사자였을까. 그보단 예전 신분 사회 때 하나의 화목한 가족을 지탱하는 데에 필요했던 수많은 노예에 가깝지 않을까. 신분제도는 철폐된 지 오래고, 계급론은 철 지난 구닥다리 이론이라지만 오히려 현실은 ‘책으로만 내려 전해지던 옛날이야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정말 가족 같은 세상이다.


  1. 월간조선, 『(사료)해방40년』(월간조선 1985년 신년호 별책부록), 조선일보사, 1985, “박정희 대통령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전태일의 편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항목 (검색일: 2021. 01. 29)에서 재인용,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20308&tabId=01&levelId=hm_160_0020>

  2.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Ⅰ-上』,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410~411쪽.

  3.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Ⅰ-上』,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365쪽.

  4. 대한민국 사회를 자조적으로 비하하는 표현인 ‘Hell(지옥)조선’에 ‘최적화’라는 단어를 합쳐 만든 신조어이다. 대한민국 밖에서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대한민국 안으로 들어오자 대한민국 수준으로 망가졌다고 평가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5.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1월 8일 본회의 ‘중대재해처벌법’ 법안통과!”(2021.01.08 18:46:46) 웹포스터 홍보물 문구 중 인용, <https://theminjoo.kr/board/view/policyreference/396924>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3-1.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3-1.

이상하(한철연 회원)

 

 지난 글에서 다룬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 나오미수녀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기독교의 해방서사스러운 스토리텔링의 전형이었습니다.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을 거듭한 주인공이 도피와 고난과 시련끝에 현재를 극복하고 삶의 행복과 영광을 얻는 이야기였죠. 그렇다면 오늘 다루는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주인공 야엘은 어떨까요. 이전의 주인공 나오미수녀는 사회나 국가와는 별개로 그저 자기 삶의 의미란 행복이란 대체 무엇인지 찾아 헤매는 수녀 한 명이었습니다. 반면에 행성 네게브의 최하층 천민 피코로 자라난 야엘은 어린 초등학생 시절에 남들보다 키가 작고 다리가 짧기에 밥부터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고 이에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부당한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무척이나 사적이면서도 너무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자라온, 헤겔의 말을 빌려보면 한 세계사적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본격적으로 야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조금 서글픈 진실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진부하고 뻔하고 슬픈 말이지만, 억압과 차별이 없는 시대는 인류의 역사상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람마다 날 때부터 능력과 신분과 계급이 다른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애초에 가문에 유전자에 타고난 게 사람마다 다른 법인데 대우를 다르게 받는 게 뭐가 문제고 대체 뭐가 차별이냐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런 스스로가 행하는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와 집단을 만들고, 심지어 제도권 내에 극우 정당을 만들고 떵떵거리며 차별을 조장하고 합리화하는 정치를 하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이 국가, 네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라고. 괜히 선동과 말장난으로 세상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좀 받아들이라고.

 

 허나 이런 불행한 역사의 진실에 대응하는 힘도 역사상 존재해왔죠. 과연 너희들이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건 언제 어디에 존재하냐고, 만약 있더라도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의 눈으로 그걸 어떻게 알고 느낄 것이냐고. 시대가 변해도 살아남는 진정한 문학과 예술은 항상 그러한 현실에 맞서서 상상력의 힘으로 날아오르며 니체의 말처럼 현실이라는 대지의 중력에 맞서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양영순의 웹툰 덴마-야엘로드 편도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전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흔한 전형의 스토리텔링은 아니고 약간 비틀린.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29&weekday=tue

 국회의사당에서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다가 테러로 국회가 무너진 상황에서, 택배를 전하러 온 주인공 덴마와 함께 야엘은 목숨을 건 탈출 중에 자신이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합니다. 작중에서 행성 네게브의 가장 가난하고 몸도 작은 최하층 계급 피코로 태어난 주인공 야엘은 다리도 짧아서 느리기에 어릴 때부터 인간의 가장 기본중의 기본인 밥 문제부터 선착순이라는 능력주의의 가면을 쓴 차별을 겪습니다. 심지어 이를 도와주고 해결해줘야 마땅한 보육시설의 선생도 넌 최하층 계급이니까 불평하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며 누가 봐도 부당하게 야엘을 윽박지릅니다. 이러면 당연히 사람으로써 어이가 없고 화가 나지만, 야엘은 그럼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식사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힘들어도 자신을 더 짜내고 더 힘내서 뛰어봅니다. 이는 이전 나오미수녀의 기독교적 믿음과 비슷하면서도, 마치 볼테르 이후 헤겔 맑스를 비롯한 근대 계몽주의의 후손들이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렇기에 우리가 더 열 배 천 배 힘내야 한다는, 그러면 역사의 법칙은 미래엔 반드시 우리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선형적 진보사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에 대해선 우리가 계속 덴마와 함께 읽어온 한상원을 말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맑스는 하나의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특정한 시대의 사회적 관계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유물론자였다. 그리고 맑스 자신과 그의 사상 역시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맑스의 역사철학적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지적 풍토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갔는가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맑스의 계몽주의, 독일 고전철학 상이의 연관성 속에는 19세기까지 서구의 모든 역사적 사유를 사실상 지배해 왔던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기독교 종말론적 역사관의 흔적들이 공명하고 있다. 물구나무 선 사변적 세계를 뒤집어 인간의 두 발이 땅을 향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철저한 유물론자 맑스의 역사적 사유에 기독교 종말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맑스 자신이 언급한 적이 있듯이,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이 언급은 맑스뿐 아니라 볼테르 이후 역사의 진보와 이성의 최종적 승리를 주장했던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한상원 저), 101-102쪽 인용.

 

 이렇게 불합리하고 부당한 현재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행성 네게브의 계급차별에 대해 항의하고 더 힘내서 분투하려는 야엘은 마치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에 대한 억압을 잘 이겨내며 씩씩하고 당찬 야엘조차도 버티기 힘든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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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억압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도 있고 괜찮지만 나의 거울이나 다름없는 내 친구나 가족에 대한 욕은 나에 대한 모욕보다 더 참기가 어렵지요. 심지어 연주자라는 꿈에 대한 좌절에 겹쳐, 죽은 자에 대한 모욕이라는 친구에 대한 이중적 차별을 그냥 듣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친구의 쇼크사를 모욕했기에 자신이 정신놓고 떄린 인간이 재단 이사장 아들인지 아닌지는 적어도 야엘에겐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종종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일도 아닌데 타인의 고통에 관심가지는 사람들을 관심종자니 정치병이니 심지어 위선자니 몰아세우고 적극적으로 조롱하지만, 어쩌면 야엘의 경우처럼 우리는 타자의 고통과 부당함에 민감할때만 진정으로 차별적 구조를 깨뜨리는, 현재의 반복을 중단시키는 강력한 저항과 혁명의 원동력이 생겨나는 걸지도 모릅니다. 자신에 대한 차별에는 적당히 참고 넘어가던 야엘이 자신이 잠시나마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듯이, 그리고 대다수 한국인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그러했듯이. … 어쩌면 벤야민이라면 이런 순간을 ‘지금시간’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불러와서 그 힘으로 지옥같은 현재의 동일한 반복을 깨뜨리는 ‘지금시간’ 이에 대해선 천천히 더 깊숙히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힘을 동원한 저항의 순간은 당연히 기존 체제의 강력한 억압에 부딪칩니다. 체포되어 소년원에서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는 중 참고 참다가 참다못한 야엘이 죽은 소녀와 같은 방식으로 자살을 결심하려 하는 차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미래를 본다는 데바림 종족의 선생님이 남겨준 과거 예언의 기록을 꺼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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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많은 정서들을 함축하는 피코 야엘의 저 웃음과 울음.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건축물을 패러디한 행성 네게브 영웅의 전당. 만화 나루토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물이 나온 적이 있죠. 당연히 원 모티브는 미국의 러쉬모어 산에 있는 4인의 거대한 조각상입니다. 과거의 역사에 이 위대한 전당에는 피코가 아닌 상류 계급 출신만이 조각되었지만, 데바림 선생님은 이 전당의 가장 높은 곳에 바로 최하층 계급 피코인 야엘이 올라갈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자살 직전까지 갔던 야엘은 이 예언을 통해 더더욱 놀라운, 혼신에 헌신의 노력을 다하게 되어 국회 보좌관까지 올라갑니다. 마치 한국에서 가난한 비수도권의 흙수저 출신이 사법고시를 통과한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물론 거기서도 상위 계급 출신들의 온갖 차별과 억압을 받지만, 예언을 통해 미래에 대해 확신이 생긴 야엘에겐 이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야엘이라는 개인의 갈등과 투쟁이 행성 전체를 의외의 결과로 이끌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계사적 개인에 대해선 또 한상원과 헤겔을 참조해보며 숙고해볼만 만합니다.

 

 헤겔에게서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는 자유를 향해 진보한다. 역사 속에 발생하는 수많은 희생, 고통은 이러한 자유를 시련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 세계사의 전체 과정은 이 충동을 의식적으로 도달하도록 하려는 노동이다. 이를 위해 역사에는 갈등과 적대가 불가피하다. 세계사는 대립이 표출되는 전장과도 같다.

 

 적대와 갈등, 폭력이 자유를 향한 진보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은 다시금 역사 속에 존재하는 섭리의 신비를 보여준다. 헤겔은 세계사를 행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역사를 움직이는 세계사적 개인에 관해 언급한다. 세계사적 개인 혹은 영웅의 창조적 행위는 새로운 사태와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를 추동한다. 그런데 이때 영웅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실은 정신 자신의 본질에 의해 작동하는 현실이다. 세계사적 개인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는 그저 자신의 충동대로 행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행위를 추동하는 개인적은 특수한 욕망과 열정, 의지를 통해 세계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성은 교활한 책략을 통해, 행위하는 개인의 의식이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끌고 나간다. 이성이 지닌 간지는 역사를 진보하게 하는 섭리의 구체적 형태다.

 

“열정의 특수 이익은 보편자의 실행과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특수한 것, 한정된 것, 그리고 그 부정으로부터 보편자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투쟁하며 그중 한쪽이 몰락하는 것은 특수한 것이다. 보편적 이념은 대립과 투쟁 속으로, 위험 속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은 공격과 손실로부터 물러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이를 이성의 간지라 부를 수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한상원 저), 114-115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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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미래가 있으니까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기니 어떠한 어려움도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야엘은 이런 말을 하는 것에서는 단순히 개인적 신념이 아니라 종교적인 수준의 신앙이 느껴집니다. 그 누가 현재의 나를 억압하고 조롱하고 나에게 고통을 주든 나는 반드시 내 구원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서사. 이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전형적인 기독교적인 구원의 서사이자 계몽주의적 역사관입니다. 

야엘로드는 분명히 계급 갈등과 경제적 차별이라는 흔한 진보주의 또는 유물론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적인 지점과 결합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바로 이렇게 이질적인, 섞이기 어려워 보이는 유물론과 신학을 결합시켜서 나치가 득세한 2차대전중의 독일인으로서 자신만의 새로운 역사철학을 펼쳐나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인, 신학적인 자세로 과연 괜찮은 걸까요? 혹시 작중의 야엘처럼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게 되면 기존의 신학은 오히려 없으니만 못한 거짓된, 허무한 낙관주의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이 또한 헤겔이 말한대로 적대와 투쟁을 통한 이성의 간지일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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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내가 읽는 『자본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최재식 (경희대 철학과)

 

혹자는 말한다. 공상에 젖은 좌파들은 성공할 수 없다고. 나는 스스로 꽤 좌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비판에, 냉소에, 조소에 쉽게 반박할 수 없다. 마르크시즘에 미래가 있을까? 분명 현실사회주의는 실패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가 21세기에, 그것도 한국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지하게 그를 ‘패션좌파’1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다. 68혁명이 남긴 신좌파적 상상력은 더 이상 강력하지도, 도발적이지도, 유혹적이지도 않다. 적색(사회주의)과 녹색(생태), 보색(여성), 무지개(퀴어) 등2의 성장과 강화는 서로의 조화(연대)에서 가능하지만 지금 연대의 정신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좌파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 마르크시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정치(精緻)한 설계도를 제시하지 못한다. 일단 기존 사회를 해체하는 게 곧바로 새로운 질서의 정립으로 이어지지 못함을 많은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결정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전(全)지구적 폭격은 우리의 삶 속에서 대안사상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황폐화시켰다.

 

노동은 계속해서 액화(液化)되어간다. 플랫폼 노동자, 초단기계약직, 프리랜서들은 노동하지만 온전한 노동자로 규정되지 않고, 그렇게 노동계급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제 ‘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계급투쟁’은커녕, 노동계급의 단결, 아니 노동계급의 형성도 어려운 세상이다. 계급의식의 자각이 불가능해진 세상에서 인간들은 파편화, 개인화, 원자화된다.3 공동체 밖에서 인간들은 자유롭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자유는 자본에 착취당할 자유이다. 다시 말해 이 자유는 하루 12시간, 주 6일, 정해진 작업장 없이 일할 것을 강제하는 계약서에 ‘자발적으로’ 서명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공상에 젖은 좌파들’은 아직도 대공장시대에나, 혹은 전후(戰後) 호황경제 때나 가능했을법한 대안들을 내놓는다. 그들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도 하지 않는다. 2020년 현재 정치경제학은 주류경제학과 비교하여 어떠한 우위도 점하고 있지 못하다. 변화한 시대에 발맞추지 못한 소위 구좌파들은 시쳇말로 ‘빻았고’4, 정체성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신좌파들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토대를 볼 줄 모른다. 정말 이 시대의 좌파적 대안은 지금의 주류에 유효한 타격을 가하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좌파들이 무력해지고, 공상적이라고 비판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정확한 분석의 부재와 참신한 상상력의 실종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분석과 상상력의 부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가치를 해석하는 방법을 지금의 지배적 사상에 빼앗긴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한다.

 

자유는 원래 좌파의 것이 아니었고, 평등한 세상이 자유로울 수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자유는 인간들의 평등한 상호관계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 자유가 ‘인간 존재의 자유’라면 말이다.

 

자본주의가 뿌리박은 자유주의는 신체에서 뻗어 나온 소유권이라는 사고에 천착하여 재산의 축적과 사용이 자유로운 사회가 진정 자유롭다고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은 결국 돈 많은 사람이 돈 쓸 자유에서 시작해 자본이 무한정 자가 증식할 수 있는 자유를 정당화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당노동행위를 강제하는 계약서에 서명할 자유만 가지게 된다. 이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다. 그저 자본의 자유이다. 그리고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를 착취하여 성장하는 자본의 자유는 불평등을 낳는다. 또한 불평등 없이는 자본의 자유가 제대로 실현될 수 없기에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 이상의 불평등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용인한다.

 

그렇기에 차라리 그 옛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얼핏 언급하고 넘어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association of free individuals)’부터 시작하자! 낡은 유물을 다시 꺼낸다고 여기지 말아 달라. 지금의 문제제기는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평등’이라는 좌파의 기본정신에서 어긋나, ‘자유와 평등’을 ‘자본의 자유와 소유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사이의 평등’으로 해석하는 통념5을 깨기 위한 것이니 말이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먹고사는 걱정을 떨쳐버려야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당연하게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자기가 먹을 몫을 스스로 소유해야 한다. 여기서의 소유는 자신이 소비할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즉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당장 내가 먹을 만치 밥을 할 수 있는 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소비재의 소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내가 갓 지은 밥을 남이 먹으면 나는 당연히 배가 차지 않는다. 내가 소비할 것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유는 어떠한가? 앞문단의 논리대로라면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 즉 자본의 자유 역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단지 자신이 소비할 것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긴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임노동자와 소상공인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이다. 이 임노동자들과 소상공인들의 소유는 자본의 부스러기로 구성된다. 생산수단에서 생겨난 가치가 일부 임노동자들에게 돌아가고, 그 가치가 다시 소상공인들에게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사용가치의 이전이 일어난다. 그 사용가치를 일부 소유하는 게 대다수 사람들의 소유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생산수단에 노동을 투하하여 나오는 가치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가져간다. 그리고 그 가치는 다시 자본에 축적되어 규모가 커진다. 가치가 나오는 구멍을 쥔 게 자본가들이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영위할 사용가치들은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에 자본의 사적 소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다른 사용가치의 소유나 가치의 부스러기의 소유가 종속된다.

 

앞에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다. 그 목구멍으로 넘길 밥을 만들거나 혹은 교환해올 사용가치, 또는 가치가 자본에 종속된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본에 매달려야 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평등’이라는 언명에서 소유의 평등은 ‘생산수단 소유의 평등’이어야 한다. 생산수단을 평등하게 소유할 때 우리가 소비할 사용가치도, 교환의 척도로 이용할 가치도 평등하게 나눠지고, 그래야 인간이 자유로워진다.

 

생산수단을 어떻게 평등하게 분배할 것인지 의문일 수 있다. 생산수단을 전부 쪼개어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산업의 집적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생산력, 효율성의 향상이 불가능할뿐더러, 큰 산업을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생산수단 소유의 평등은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로 가능해진다.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가능해진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공동의 생산수단을 다양한 개인들이 함께 활용하며, 자신의 노동력을 개인적 노동이 아닌 사회적 노동으로 의식하며 사용하는 사회구성체이다. 여기서 구성원들이 생산한 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사회적 노동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회구성체의 총생산물 일부는 다시 공동의 생산수단을 보충하는 데에 쓰이고, 나머지는 사적으로 분배된다. 이 분배의 기준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얼마나 노동하였는지’로 결정된다. 이 사회구성체에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억압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모두의 자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걱정은 줄어든다. 자신이 일한 만큼 가지기 때문에, 일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이 소비할 사용가치를 얻을 수 있다.6

 

위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자유와 평등’을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평등’으로 해석할 때 가능하다. ‘자본의 자유와 소유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사이의 평등’에서는 불가능하다. 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유와 평등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사용가치의 소유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류의 기반에서는 주류적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파, 또는 대안사상은 자신들이 공상적이라는 냉소를 받게 된 배경을 두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주류가 독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거꾸로 주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좌파와 대안사상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보다 세련되고 과학적이기에 지금 주류의 시선이 주류가 되었고, 좌파가 세상을 보는 눈은 주류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주류의 논리적 기반에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기에 사태의 근원을 발본색원할 수 없게 한다. 새로운 기반을 다져야 한다. 아무리 마르크스가 철학이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고 했을지라도, 그 말의 전제에는 ‘과학적이고 엄밀한 분석’이 있다. 대안사상만의 과학적인 기반이 필요하다. 그것이 ‘좌파는 공상적’이라는 냉소를 떨쳐버릴 가장 근원적인 방법이다.

 

앞 문단이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더 과학적이고 정밀한 좌파의 논리적 기반과 세계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기존의 것이 모두 쓸모없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또한 그 위에서만이 상상력이 자유롭게 날개를 펼 수 있다는 것이다. 저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해서는 공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안은 체제 밖에서 체제를 조망하고, 체제 안에서 체제를 타격할 때 실현된다. 토대의 변화에 상부구조의 변화가 연동된다고 하지만, 거꾸로 우리가 허위의식을 벗어던질 때 토대의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가 평등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탈피하여 평등에서 자유가 비롯되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본론』은 나에게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하나의 무기를 제공했다. 인간의 자유는 소유의 평등에서부터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서두에 서술한 냉소에 맞설 정확한 분석과 참신한 상상력의 부활을 위해, 지금까지 자본의 자유에 억압당한 인간 존재를 위해, 아래와 같이 외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위해. 인간에게 자유를, 자본에게 억압을.

 


  1. 명확한 계급적 의식과 실천 없이 좌파적 생활양식 및 정치적 지향을 단지 유행하는 패션을 따르듯 멋으로만 소비하는 사람들을 에둘러 비꼬는 말이다.

  2. 당연히 이 정체성들과 가치의 연대에는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정체성들과 가치(장애, 인종, 평화 등)가 포함된다.

  3. 혹은 인간이 파편화, 개인화, 원자화되는 사회에서 계급의식의 자각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4. 예의 없거나 낡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un-PC한, un-Political Correctness) 사람들을 형용하는 속어이다.

  5. 심지어 ‘좌파’들조차도 이러한 해석을 벗어나지 못한다.

  6. 다만 일할 수 없는 구성원들에게의 분배 방식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2020.04.05.

 

이상하(한철연 회원)

 

 

“자신의 과거를 강압과 궁핍에서 태어난 산물로
고찰할 줄 아는 자만이, 현재의 순간에 과거를
자신을 위한 최고의 가치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중에서 발췌)

 

 

1.

지난 시간에 두 폐허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엔 반대로 이 폐허 속에서 점화된 불꽃, 낙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을 듯하다. 낙원,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은 어느 시대에나 형태는 달랐지만 비슷한 면이 있다. 그리고 지금 21세기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또는 소비 자본주의 시대, 나를 가져봐! 나를 즐겨봐! 그러면 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거야! 라고 외치는 광고가 세상 천지에 깔려있고 돈만 된다면 자진해서 사람 피부에도 광고판을 새겨놓는 21세기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철학자가 자주 농담처럼 말하듯 이 소비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란 결국 모두에게 ‘즐겨라’ 라는 지상명령 외에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체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세상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재벌 이재용이든 서울역 노숙자든 원한다고 해서 모든 걸 즐기거나 가질 수는 없다는 건 명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으로 종종 화폐, 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시공간을 상상하고 꿈꾼다. 그리고 그런 시공간이 우리 인류의 역사상 분명 없지는 않았고 사실 지금도 존재한다. 그 실제적 사례를 들자면 역시 절이나 수도원같은 종교인들의 공동체가 대표적이리라. 또한 혁명과 해방을 외치며 영주에게 저항하며 도망친 농노들이 만들어낸 중세 코뮨 도시나, 러시아 혁명의 소비에트=평의회라든지 로버트 오언의 공동농장같은 유토피아적 사회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실험들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아 물론 나의 이 말에 대해 뉴스를 자주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고기먹고 술 먹고서 단체 도박을 하다가 검거된 땡중이나 헌금 경쟁을 장사하듯 부추기는 부패한 대형 교회의 폐허를 떠올리게 하는 뉴스를 떠올리며 종교인들의 유토피아라는 말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 공동체를 쉽게 다 타락했다고, 거기엔 아무런 해방의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하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그 자체일 뿐이다. 현대의 수도원 같은 공동체라고 해서 화폐, 돈 자체가 없는 곳은 아니지만, 분명 엄격한 계율 아래에서 사유재산 자체가 없다시피 하고 오로지 신의 이름으로 약자를 위한 봉사에 힘쓰는 신부님과 수녀님 종교인들은 여전히,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런 종교단체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종로의 조계사처럼,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려는 전 간부나 정권의 노동탄압을 막으려는 노동조합 회장이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하려 찾는 신성하고 현실 권력에 불가침적인 해방의 공간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자본주의가 아닌 해방의 공간을 찾으려고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떠났던 벤야민과, 한명의 전문가로서 뛰어난 약효를 입증한 만드라고라 마스터인데도 수도원을 향했다가 도피하고 방황하던 청춘, 웹툰 덴마의 나오미수녀에 대한 이야기다. 이 둘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는 도피와 삶의 행복의 사유-이미지에 대해 한번 고민해볼 수 있으리라.

 

 

-벤야민은 사유가 이미지와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미지가 가진 구체성, 즉 실제 생활들, 눈에 보이는 것들, 만지고 있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유 이미지가 학문이나 철학의 영역을 외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적 자유, 사유 이미지, 이미지 사유이자 변증법적 이미지입니다. 메트로폴리스,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이미지 사유가 구체적으로 총체화되어 나타납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근대성의 자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인데, 그 경제 논리가 아무리 첨예하고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육체성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성을 담지하고 있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고 김진영 선생님의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310p 중에서 인용.

 

 

2.

나와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지도 모른다. 수도원 같은 폐쇄된 작은 공동체가 이미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지 오래고, 막스 베버같은 사람이 말한 것처럼 탈주술화가 진행된 근대 이후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무슨 큰 상관이 있느냐고. 철학적 사상적으로 봐도 우리는 이미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에 살고 있고 19세기의 마지막에 니체가 선언했듯이 신은 죽었다고 봐야 되는 게 아니냐고, 지금 시대에 종교가 무슨 큰 현실적인 영향력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기존 종교의 유일신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현대인들은 종교로부터 멀어졌을까. 그렇다면 수도원같은 오래된 신의 성전에 대해 다루기 전에 지금 우리 시대의 신흥 유사종교, 영원한 경제성장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지난 글에서 말한 유시민/진중권과 웹툰-덴마라는 새해 첫날의 두 폐허를 목격한지도 벌써 세달 째, 이제 내가 사는 서울 홍대동의 날씨는 분명 겨울이 지나갔고 정말이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가정통신문처럼 진부한 말이지만 개나리와 벚꽃이 슬슬 기지개를 켜려고 한다. 허나 이런 계절의 순환과는 달리 매서운 코로나 사태는 종식은 커녕 글로벌하게 점점 장기화될 조짐이다. 세계경제의 침체는 확실시되고 선진국들의 예상 경제성장률은 거의 다 마이너스를 찍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믿고 있다. 지금이 이렇게나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결국 주가는 다 회복하고 경제는 다시 성장하리라는, 끝없는 성장신화라는 유사종교를. 도대체 이 근거없는 믿음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한상원의 저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을 참고해서, 천년도 더 전에 기독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413-426)에서 이런 끝없는 성장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찾을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한때 로마 제국은 지금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의 뿌리였고 거대한 영광 그 자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많은 고난 끝에 이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받았고 이천년뒤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심지어 세계의 달력과 시계는 모두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로 시간을 세고 있으며 21세기 근대화된 국가 중에 사실상 예외는 없다. 허나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에 이 로마의 국교는 심각한 위협에 시달렸다. 이교도이자 야만족으로 불렀던 서고트족의 군사적 침입과 패배로 로마는 엄청나게 흔들렸고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구원에도 당연히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역사철학의 창시자 또는 역사철학 일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존 그리스 철학의 원형적 시간관-즉 사계절이 순환하듯이 세계는 끝없이 반복된다는 시간에 대한 관점을 벗어난다.

그는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은 무한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설정한대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마지막엔 최후의 심판과 구원이 기다린다는 직선적(선형적)시간관을 전개한다. 이 최후의 종말, 심판 또는 구원이 예정되어 있기에 지금 현실의 어떤 고통도 사실 언젠가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미래의 영광과 구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현재의 비극을 견뎌낼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기에 이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몸으로 받아들인다. 허나 이는 어쩌면 언젠가 경제가, 내 주식은 언젠가는 오를 거고 내 살림살이가 좋아질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버틸 수밖에 없는 21세기 우리네 대다수의 삶과 구조적으로 과연 무엇이 다른 걸까.

 

 

3.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분명히 깨닫고 있다. 서른이 넘은 내 세대가 직접 겪어본 것만 하더라도 97년의 IMF구제금융 사태, 2008년의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공황, 그리고 2020년의 코로나로 인한 세계경제 침체까지. 영원한 경제성장이란 없으며 10년 정도 주기로 세계적인 불황, 경제위기가 닥친다는 것을 과연 누가 경험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 경제성장이라는 오래된(?) 믿음은 자신의 옷을 바꿔 입을 뿐 끝없이 현재 세계의 무대에서 퇴장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주가 폭락 사태를 대다수 개인들, 이른바 개미들이 스스로 국난을 극복하자며 동학 농민 운동을 패러디하여 ‘동학 개미 운동’을 펼치는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연극을 펼치는 중이다. 지금의 천도교인 동학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바로잡자며 백년 전에 펼친 그 운동을 이제 주식시장에서 다시 반복해보자는 이 우스꽝스러움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불황이 있음에도 여전히 경제성장이라는 불멸의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보며 겨우 재작년에 겪은 전국민의 휩쓸린 비트코인 폭등과 폭락 대란이 떠오르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이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희극과 비극에 대한 명언을 다시금 되새겨볼 즈음이 아닐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그리고 이 ‘영원한 경제성장’이라는 근거없는 사이비 종교스러운 언어처럼 지난 10년 사이 가장 그 의미 내지 뉘앙스가 변해버린 말로는 뭐가 있을까. 수많은 후보군이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2030세대에서는 아마 ‘청춘’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에 문학 교과서에서 ‘청춘 예찬’이라는 글의 주요 주제를 파악하는, 아니 외우는 병든 실험용 쥐 같았던 수험생들은, 대학생이 되어 서울대 소비자학 교수 김난도가 백만권 넘게 판매한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을 읽고서 한번 더 힘을 내봤지만, 당연히 그 책을 읽는 95퍼센트 이상은 서울대생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김난도 그의 행적과 젊은 세대에 대한 사회적 냉대에 실망한 수많은 리얼 청춘들의 반항 내지 저항은, 유병재라는 코미디언의 말 한마디로 종결된 듯하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나오미수녀의 고난과 도피는 그야말로 이런 우리 세대의 청춘과 행복에 대한 하나의 스케치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또한 그러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난 글에서 말한 벤야민의 사유-이미지의 실제적 사례를 수집하고 산책하고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재구성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칸트의 명언을 패러디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감히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감히 재구성해보라, 너 자신만의 감각을 표현할 용기를 가져라!

 

1927년 1월 30일. 모스크바 일기.

여기 베를린에 와서 비로소 분명해진 모스크바에 대한 몇가지를 더 적는다. (1월 29일부터의 일기는 2월 5일 베를린에서 쓰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베를린은 하나의 죽은 도시다. 거리의 사람들은 황량할 정도로 개별화되어 있고 한 명 한 명은 다른 사람들과 너무 떨어진 채 큰 거리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다. 동물원 역에서 그루네발트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지나야 했던 거리들은 마치 닦고 문질러 씻은 듯 지나치게 깨끗하고 편안해 보였다. 도시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그들의 정신적 사태를 반영한다. 이 도시에서 얻게되는 새로운 시각은 의심할 바 없이 러시아 체류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비록 러시아를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의식하면서 유럽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걸 배우게 된다. 그것이 분별력 있는 유럽인이 러시아에서 첫 번째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러시아 체류는 다른 한편으로 외국인 방문자들에게 정밀한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요구된다. 평균에서 벗어나 있거나 개인적인 사람,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체제에 덜 적합한 사람일수록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는 손쉽게 더 많은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상황에 더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유럽인들은 별 어려움 없이 다가서는 추상적 사유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금방 느끼게 될 것이다. … 모스크바는 다른 대도시에서 저항하기 힘든 멜랑콜리를 퍼뜨리곤 하는 교회 종소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 이것 또한 모스크바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인식되고 그리워지는 것 중 하나다. (257-258)​

 

 

4.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8&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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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웹툰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를 따라가보자. 덴마의 주 무대인 드넓은 제8우주의 행성 중 하나인 위노바, 한 작은 수도원의 막내로 보이는 나오미 수녀는 그야말로 군대의 이등병처럼 중노동에 하루종일 시달리는 아픈 청춘이다. 혼자서 수십명의 환자 간병에 청소에 빨래에 음식까지… 하루에 하나만 해도 사실 충분히 피로에 지칠 수십명분의 가사 노동인데 이 많은 노동을 나오미 수녀는 모두 떠맡고 있고, 심지어 이 와중에 같이 일하는 수녀들 사이에서도 나오미 수녀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이전에 나오미 수녀의 건의대로 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사회의 낮은 존재, 약자인 동네의 노숙자, 걸인들을 수도원에서 보살피게 되자, 기존 동네 신자들의 수도원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우주 액션 활극이자 현실에 대한 풍자극, 블랙코미디인 덴마에서 이런 수도원이 나오는 걸까. 이 가난한 수녀들의 수도원에 대해서 우리는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에서 한상원의 언급을 한번 살펴보고 해석해볼 수 있을 듯하다.

기독교 전통은 이렇듯 공통의 정신적 가치뿐 아니라 물질적 재화의 공동 분배 역시 공동선의 원리로서 강조해왔다. <사도행전>에서는 초기 기독교 신자 공동체에서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한상원,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85p)

반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러한 초기 교회 공동체의 이념에서 벗어나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회 전체를 지적, 이데올로기적으로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질적으로도 지배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와 부패는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을 필두로 하여 교회의 혁신을 추구하는 수도원 운동과 직면한다. … (86p)

수도원 운동은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바티칸이 상실해버린 사도 바울의 공동선 이념을 복원하고자 시도했다. 그 시작점은 성직자들이 청렴한 삶을 살고, 수도원 내에서 자율적, 자족적인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면서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따. 수도원 운동의 교회 개혁 중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교회의 재산 소유와 상속(당시 성직자들 중에는 교회법을 어기고 자녀를 낳은 사람들이 많았다)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가 어디까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하는 신학적 논의가 펼쳐지면서 이러한 논쟁은 다소 정치적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87p)

현실 풍자적 요소가 다분한 덴마의 우주에서는 태모신교라는 종교가 굉장히 큰 세력을 쥐고서 실버퀵이라는 자체 회사를 통해 우주의 물류를 장악하고 있다. 물류, 유통을 장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마존이 지금 미국인들의 삶을 장악하고 쿠팡이 당일배송으로 한국인의 편리함을 장악하고 있듯이 경제의 대단히 큰 부분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경제력과 권력을 가진 태모신교에 비교해 마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에 나오는 고엘 종교회와 나오미수녀의 선행은 초기 기독교 수도원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렇게 헌신하면서 당연히 기존 지역사회의 헌금이나 십일조도 줄었으리라. 게다가 수도원 토지의 소송에서도 져버려서 신의 성전을 용역 깡패가 노골적으로 폭력을 쓰며 쳐들어오고 협박을 일삼는다. 이렇게 나오미 수녀는 안밖으로 압박을 받으며 삶에 지쳐가는 중에, 병환으로 누워 있는 원장 수녀님에게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려고 결심한다… 깡패가 얼릉 이 수도원에서 떠나라고 협박하며 그녀의 몸에 붙여놓은 빨간색 재산 철거통지서를 만지면서.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8&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재산권의 정당한 법적 행사라는 신성한 권리를 내세워서 종교라는 이전의 신성을 폭력으로 짓밟고, 심지어 생일날 수녀를 때리고 철거집행 통지서를 수녀의 몸에 붙이는 이 장면은 정말이지 인상적인 양영순의 연출이다. 세계 역사에서도 기독교는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유일신의 논리였지만, 지금 21세기엔 누가보아도 기독교보다 자본주의가 더 전세계적으로 우세한 유일한 신성의 논리가 아닐까. 물론 이렇게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벤야민적인 시선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벤야민이라면 오히려 20세기 자본주의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정신적인 종교와 물질적인 자본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의 알레고리, 우화야말로 마치 수천년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신 포도의 이솝 우화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고 말해줄 테니까. 여튼 나오미 수녀는 더이상 이런 고통과 억압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도피를 결심한다. 딱히 목적지도 없이 지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다는 마음으로 떠난 나오미수녀. 허나 떠난 곳에서도 부랑자에게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는 등 수난은 계속된다. 허나 수녀는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 경험도 없고 돈도 없어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른다. 유대인 말살정책을 펼치던 나치를 피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 나치가 득세하는 지금의 유럽을 피하기 위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으려던 벤야민도 마치 이런 심경은 아니었을까.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리고 그녀가 도착한 에벤에셀에 대한 자칫 놓치기 쉬운 복선을 한 독자의 매우 친절한 베스트댓글이 탁 하고 잡아준다. 나오미 수녀가 정처없이 떠나서 도착한 지역 에벤에셀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를 베댓처럼 나오미 수녀의 선행, 만드라고라 마스터로서 살아오고 베풀어온 그녀의 업이 이 먼 도시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풀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을 더해보자면, 나오미수녀는 그저 별 목적없이 그저 지금 여기, 고통스런 현재의 수도원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조차도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수녀를 인도한 것이고, 덕분에 나오미는 그동안 고생한 것의 보답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칼뱅의 예정설처럼, 나오미의 이 돌발행동마저도 신의 입장에선 다 예견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전에 나오미 수녀가 키워냈던 위노바 행성의 특산물인 건강식품 만드라고라. 이 식물은 가장 많은 애정을 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며 그 형상대로 꽃이 피는 신기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건 위에 나온대로 수도원에서 그 중노동을 나오미수녀가 감당하기 이전엔 농부로서 애정을 가지고 만드라고라를 키워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단순히 나오미수녀가 일반인 이상의, 앞선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처럼 엄청난 고통과 억압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초인에 가까운 존재인 걸까?? 아니면 야엘같은 초인이 아니라도, 벤야민의 표현을 살짝 빌려서 행복에 가까워지는 ‘메시아가 열어놓은 희미한 작은 문’ 은 존재할까??

 

계속…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악(樂)인열전]④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출처 : The Smiths, back in the glory days (Picture: Stills Press Agency/REX/Shutterstock) Read more: https://metro.co.uk/2017/09/21/the-smiths-30-years-since-the-split-and-still-the-best-british-band-ever-6904839/?ito=cbshare Twitter: https://twitter.com/MetroUK | Facebook: https://www.facebook.com/MetroUK/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국 밴드는 더 스미스(The Smiths)이다. 스미스는 오늘날 브릿팝(BritPop)이라고 정의 내려지는 장르의 아버지격이 되는 밴드이다. 오늘날 ‘락’을 논하면서 ‘브릿팝’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키델릭과 함께 브릿팝은 좋든 싫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요즘 인디씬의 주류는 브릿팝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음악적 스타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브릿팝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 감성이 (어쩌면 음악적 스타일보다) 후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줬다.

더 스미스는 비록 활동기간 동안 영국 이외에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블러나 오아시스로 대표되는 브릿팝 열풍 속에서, 모두들 자신들이 제 2의 스미스라고 자처했으며, ‘스미스’라는 망령은 다시 주위를 맴돌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대중들에게 주목 받고 있는 인디 밴드들인 ‘잔나비’나 ‘새소년’ 역시 브릿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브릿팝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브릿팝은 오늘날까 힘을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브릿팝’스러움은 ‘스미스’스러움의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브릿팝의 힘은 ‘스미스’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albumism

1984년 그들의 데뷔앨범 [The Smiths]가 발표될 때만 해도 스미스가 이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스미스의 최고의 앨범을 한 장의 앨범을 뽑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규 3집 음반 [The Queen Is Dead](1986)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밴드 스미스의 힘’은 오히려 [The Smiths]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앨범의 완성도 때문도, 사춘기 정서로 가득한 때문도 아니다. [The Smiths]의 힘은 당시 주류 팝으로부터 소외 되어왔던 ‘침묵한 다수’가 수면 위로 등장한 첫 시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복고적 측면이 강하다. 그들이 데뷔한 80년대는 락의 인기가 예전만큼 좋지 못했고, 신디의 발전으로 기타를 베이스로 한 전통적인 락 사운드가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니 마(Johnny Marr)의 징글쟁글(jingle-jangle)1) 주법은 기타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스미스의 노래들은 대체로 보컬이 아닌 기타를 통해 곡의 맬로디를 만들어간다. 그들의 작곡 방식은 먼저 기타로 주선율을 잡고 그 위에 보컬을 입히는 방식이다. 결국 노래이기 이전에 연주곡으로 완성된 이들의 곡에서 모리세이의 보컬은 상당히 제한된다. 하지만 모리세이의 보컬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보컬의 테크닉을 심하게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모리세이의 보컬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덕분에 그의 혀짧은 발음과 중성적인 목소리 톤은 성숙하지 않은 유아적인 웅얼거림으로 표출된다. 찰랑거리고 밝은 기타 톤과, 아이의 투정 같은 음색, 그리고 문학적이고 자기비하적인 가사는 모리세이를 ‘사춘기적 주체’로 재탄생한다.

모리세이의 ‘사춘기적 주체’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소외된 자아’를 전면으로 세운다. [The Smiths]의 화자는 성적으로 미숙한 사춘기 남자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Reel Around the Fountain”, “Pretty Girls Make Graves”)으로 대변된다. 이는 타자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에 기인한다. 이는 80년대 영국의 분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영국은 한 순간에 추락하게 되고, 새로운 질서를 마주하게 된 영국의 두려움이 이 곡에서 반영된다. 이는 자신의 자책감으로 드러낸다(“You’ve Got Everything Now”, “Still Ill”). 그리고 이 자책감은 완성되지 못한 나 자신(성인)에 대한 자책감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혼자 살기 힘든 이 더러운 세상에 대한 비난과 조소(“You’ve Got Everything Now”, “This Charming Man”),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이에 대한 원망,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세상에 대한 불만(“What Difference Does It Make?”, “I Don’t Owe You Anything”),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비하(“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를 통해 자신의 소외감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러한 더러운 세상을 한편으로 긍정하며, 누군가 자신을 이해하고 함께 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Hands in Glove”). 이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아이들’에 대한 ‘동일시’에 이른다(“Suffer Little Children”). 사춘기적 주체는 이 ‘동일시’에서 등장한다. 물론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 안에 변하지 않는 ‘유아성’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출처 : UNCUT

 

라캉이 말했듯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자아는 주체로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계 진입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언어’로서 드러내면서 동시에 (존재적 측면에서) 언어 뒤에 숨는다. (아마 라캉이라면, 정신병으로 규정하겠지만) 유아적 상태를 주체에 자리에 놓는다. 성인도 아니고 유아도 아닌 상태, 사춘기적 주체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잃어버린 존재를 복원하는 또다른 매듭으로서 기능한다. 사춘기적 주체는 원초적 자아의 주체화이며, 나의 원초적인 모습, 남들이 보기에 찌질한 모습, 숨기고 싶은 모습을 오히려 드러낸다. 가식을 던져버리는 행위, 자기비하를 당당하게 드러내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냄은 ‘비하로서 긍정함’이다. 이러한 ‘비관적 긍정’은 스미스 이후 블러, 오아시스로 이어진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성인적 숨김을 버리고 무분별한 사춘기적 드러냄은 브릿팝의 당당함의 시원이 된다.

스미스의 앨범은 ‘숨어있던 어른이 영혼’들을 위한 앨범이다. ‘어른’들은 스미스(와 모리시에의 가사)를 철부지들의 투정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미성숙’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던, ‘사춘기’라는 시기를 그자체로 삶의 한 형태임을, 그리고 그 시기의 예민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당당히 선언한다. 사춘기의 변덕스러움은 성인이 되면서 자제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변덕스러운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즐겁다고 우울해지는 감정은 우리와 늘 함께한다. 삶에 대한 긍정과 비관이라는 이중성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이다. 그럼으로써 스미스의 음악은 ‘누구나 겪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시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한 사춘기를 살고 있을지도.

 

The Smiths – The Smiths, 1984,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kZf-GN9RcAFVQFkPaWn9At

 

The Smiths – The Queen Is Dead, 1986,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nN_prwsxZUf745SVUz88MX


1)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서 징글쟁글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㊱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 ]

* <국가>는 크게 서론(제1권), 본론1(제2권-제4권), 본론2(제5권-7권), 본론3(제8권-제9권), 에필로그(제10권) 등 다섯 부분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제2권에서 제4권까지는 각 권들 간에 내용상의 단절 없이 이어져 있어서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제3권 역시 제2권 중간쯤(375a)에서 시작된 이상국가론의 서두 부분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아래는 제4권 끝(445e)까지 이어질 그 이상국가론의 전체 목차이다. 그곳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논의는 이제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에 진입하여 수호자의 교육론 가운데 시가 교육 부분을 다루면서 시인들이 시를 지음에 있어 지켜야 할 내용들로서 신들에 관한 것을 마무리한 후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을 다루기 시작한다.

 

  1.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제2권 375a- 제4권 445e)

<제2권> 후반(375a-383c)

1.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376e-392c)

            1-2-1-1-1 어린이를 위한 설화와 허구(376e-377d)

            1-2-1-1-2 신들에 관한 것(376e-383c)

                    * 신은 선하다(376e-380c)

                    * 신은 단순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380d-383c)

<제3권>(386a-417b)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 정직과 절제, 경건(389b-391e)

            1-2-1-1-4 인간에 관한 것(392a-392c)

         1-2-1-2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투와 모방(392e-398b)

            1-2-1-2-1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1-3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412b-427c)

       1-3-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412b-414b)

       1-3-2 건국 신화(414b-415d)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제3권 끝)

<제4권>(419a-445e)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제3권에 이어 계속, 419a-421c)

       1-3-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1-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1 혼의 세 부분(434c-441c)

    2-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제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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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386a-417b)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386a-b]

*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신들과 어버이γονεύς를 공경하고τιμήσουσιν 서로 우정φιλία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신과 관련하여 어릴 적부터 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폈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그들이 용기 있는 사람들ἀνδρεῖοι이 되려면 그들 자신이 죽음θάνατος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저승Ἅιδης의 일들이 실제의 것들이고 또 무서운 것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전투μάχη에서 패배하여 노예δουλεία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사람은 결코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설화를 들려주는 사람들을 감독해야ἐπιστατεῖν 하며 그들에게 저승의 일들을 무조건 험하게 말하지 말고μὴ λοιδορεῖν 오히려 찬양ἐπαινεῖν 하도록 요구해야 한다δεῖσθαι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는 진실ἀληθῆ도 아니거니와 장차 전사들로 될 사람들을 위해 유익ὠφέλιμος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386c-387a]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설화 가운데 위와 같이 저승과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시구ἔπος 를 비롯해 그런 유형의 것들은 모두 삭제해야ἐξαλείφω 한다고 말하고 그 구체적 사례들로서 여섯 가지 시구들을 인용하여 열거하고 있다. 그 사례들은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한탄하는 장면은 물론 파트로클로스가 비명을 지르며 하데스로 사라지는 모습 등 하나같이 죽음과 하데스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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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시가 교육에 있어 내용적 규범과 관련한 부분은 신과 관련한 부분, 수호자 및 영웅과 관련한 부분, 인간과 관련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곳의 논의가 수호자 및 영웅과 관련한 논의로 시작되는 부분임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신과 관련한 논의가 앞에서 마무리되었다고 말한 후 불쑥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금까지의 논의 방식을 뒤돌아보면 크게 어색할 것도 없다. 앞서 보았듯이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을 다루면서 겉으로는 들려주어선 안 될 것과 들려주어야 할 것을 큰 틀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의 측면을 들여다보면 전자의 형식을 통해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고, 다른 한 편 후자의 형식을 통해서는 새로운 대안 내지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드러난 것이 신의 선성을 기초로 하는 플라톤의 새로운 신학이자 종교관이다. 플라톤은 이제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신들에 이어 영웅들에 관한 기존의 설화들을 비판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용기와 절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방식으로 정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논의 단계가 수호자 선발 이전의 기초 교육 단계라는 점에서 그 덕목들은 아직 지혜와 정의라는 덕목까지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덕목들은 수호자의 선발 이후 자세하게 논의하게 될, 이른바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갖추어야 할 4가지 덕목들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바탕이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이곳 서두에서 용기는 일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여 점차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387d), ‘웃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388e) 등 구체적인 행위 사례들로 표현되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용기를 다루는 제4권에 가면, 이러한 용기에 대한 구체적 예시들은 좀 더 일반화된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즉 ‘용기란 일종의 보전 즉 고통과 즐거움, 욕망과 공포에 처해서도 끝끝내 소신을 보전하여 지니는 것’(429c-d), ‘두려워할 것들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관한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의 지속적인 보전과 그런 능력’(430b)이다.

* 앞서 신들과 관련한 논의에서 언급되었듯이, 신들이 선하고 서로 다투지 않는 한, 젊은이들은 그 신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이곳 서두에서 젊은이들을 ‘신들과 어버이를 공경하고 서로 우정을 중시하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특히 어버이에 대한 공경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동양적인 정서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378b) 소크라테스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관련 이야기를 비판하면서 설사 아버지가 부정의한 짓을 저질러도 응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제5권에 가서도 수호자들은 자기가 만날 모든 사람을 형제나 누이,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과 딸, 자손 혹은 선대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면서 아버지들에 대한 공경aidos과 돌봄, 어버이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463c-d, 465b). 게다가 <법률>에서는 어버이를 살해하거나 때리는 불경한 자에 대한 처벌은 하데스에서의 처벌보다 결코 부족해서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비록 거류외인이라 할지라도 부모를 때리는 자를 막아설 경우 경연의 특별석에 초대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영구히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플라톤 역시 신과 어버이를 섬기고 이웃과 우애롭게 지내는 것을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플라톤의 가르침은 하늘을 섬기고 타인을 사랑하며(敬天愛人)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라(孝悌)는 동양 유가의 가르침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사실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 같은 농경사회에서는 경험이 생존의 기초이고 농사가 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나이 든 사람을 존경하고 이웃과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지냄은 자연스러움을 넘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전쟁에서도 경험과 협업이 승패를 좌우한다. 특히 고대 그리스 귀족들에게 명예가 다름 아닌 전쟁 영웅이 되어 후대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일반 시민들 또한 훌륭하게 살다 죽은 후 자식들과 형제들이 자신을 잘 기억해주는 것을 명예로 여겼을 것이고 그만큼 그것을 담보해줄 자식들과 형제들의 존재와 그들 간의 결속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 ‘저승의 일들을 무조건 험하게 말하지 말고 오히려 찬양하도록 요구해야 한다’는 말은 플라톤 자신이 저승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호메로스 시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죽은 다음의 세계 즉 내세에 대한 인식은 희박했고 다만 죽은 자의 망령이 때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믿었는데 저승은 그 망령들이 머무는 곳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교단을 위시하여 디오뉘시오스 신앙과 엘레우시스 비교(秘敎)가 아테네에 유입되면서 점차 아테네인들의 의식 속에 내세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생에서의 행위들에 대한 저승에서의 인과응보와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신앙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면 엘레우시스 비교에서 주장하는 이생의 죄에 대한 정화의식이 크게 유행하였다. 저승을 오히려 찬양하도록 요구해야 된다는 플라톤의 말은 이미 아테네에 뿌리내린 그와 같은 당대 내세관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10권에서 죽은 다음 다시 이생으로 돌아온 에르(Er)를 통해 저승에 존재하는 죽은 혼들의 모습과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영혼의 불멸은 물론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인과응보가 저승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요컨대 저승이 무조건 험한 것이 아니라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심판이 정의롭게 이루어지는 한, 저승은 그만큼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용기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저승조차 오히려 찬양의 대상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갖는 의미는 ‘죽음과 저승이 실제 두렵고 혐오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수호자라면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정도의 당위적 인내 수준을 이미 넘어서 있다. 오히려 플라톤은 대화편 여러 곳에서 죽음과 저승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죽음이 요구될 경우 기꺼이 다가설 수 있는 적극적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올바르게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죽는 것을 수행(연습)meletēma하는 것이고, 죽어 있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가장 덜 두려운 것’(67e)이며 그것은 곧 철학자들이 열망하는 것으로서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풀려남과 분리’λύσις καὶ χωρισμὸς ψυχῆς ἀπὸ σώματος(67d)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법률> 제5권에서도 ‘살아 있음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은 혼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고 저승의 일 모두가 나쁘다는 것도 그곳의 신들과 관련된 것이 우리에게 최대로 좋은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727d)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제8권에 가서도 하데스가 오히려 인간 종족에게 가장 좋은 신이라 여기고 존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혼과 몸의 결합이 그것의 분리보다 나은 점이 없기 때문이다(828d).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변명>에서 죽음에 대해 좋은 기대를 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41c). 혹자는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이 자살을 부추기는 것일 수 있다고 비판하지만, 플라톤에게 죽는 연습으로서 철학이 종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의롭게 사는 연습이다. 소크라테스가 <변명>에서 죽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을 때도 그 말의 취지는 저승에서의 삶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이승에서 부정의한 심판을 받아 죽은 자들과 서로 겪은 일들을 견주어보고 그가 지혜로운 자였는지 아닌지를 탐문 하려는데 있었다(41b). 흔히 말하듯 well dying은 well being에서 나오는 것이다. 혼과 몸의 분리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생에서 정의롭게 살지 않는 한, 죽어서 분리된 혼은 저승에서 결코 정복(淨福)을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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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b-387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와 다른 시인들에게 위와 같은 구절을 삭제할지라도 화를 내지 않도록μὴ χαλεπαίνειν 간청할 것이며 그러한 시구들이 시적일수록 그만큼 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로 하여금 듣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인ἐλεύθερος 즉 죽음보다는 노예 신세를 더 두려워할 사람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것들과 관련된 모든 무섭고δεινός 두려운φοβερός 이름들, 이를테면 코퀴토스Κωκυτος, 스튁스Στύξ, 지하세계에 사는 자들ἔνεροι, 송장ἀλίβας 등 모든 이들을 몸서리φρίκη치게 하는 것들도 거부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수호자들을 너무 조급하거나θερμότεροι 나약하게μαλακώτεροι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와는 반대되는 유형의 것들을τὸν ἐναντίον τύπον 이야기하고 지어야 한다ποιητέον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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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죽은 호메로스에게 간청한다는 표현은 시적 표현이거나 호메로스를 찬양하는 후예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코퀴토스와 스튁스는 하데스에서 흐르고 있는 강들로 전자는 통곡의 강, 후자는 증오의 강으로 일컫는다.

* 고대 그리스에서도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면 신분이 귀족일지라도 모두 적국의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노예들 가운데는 지적 수준이 높은 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귀족 집안에서 가정교사를 맡거나 대토지 소유주의 마름 노릇도 하면서 안정된 삶을 누리거나 부를 축적한 자들도 있었다. 또 일부는 이를테면 출판업 즉 원본 파퓌로스를 필사·복제하여 널리 배본하는 일을 맡아 후대에 고대 문헌들이 전승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실은 유명 파퓌로스를 보면 그것을 펴낸 주인의 이름과 내용을 필사한 노예의 이름이 말미에 적혀 있기도 하다. 어떤 노예가 필사했느냐에 따라 사본의 권위와 구매자의 욕구가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387d-e]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름난ἐλλόγιμος 인물들의 통곡ὀδυρμός이나 비탄οἶκτος 또한 삭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훌륭한ἐπιεικής 사람은 자신의 동료ἑταῖρος이기도 한 훌륭한 사람 역시 죽음τὸ τεθνάναι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οὐ δεινὸν ἡγήσεται 것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φημί. 그러므로 마치 무서운 일을 동료가 당하기라도 한 듯이 통곡하는 것은 동료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훌륭한 삶에 있어πρὸς τὸ εὖ ζῆν 스스로 가장 자족할 수 있는μάλιστα αὐτὸς αὑτῷ αὐτάρκης 사람이어서 누구보다도 타인 의존도가 적고 그에 따라 자식υἱός이나 형제ἀδελφός 또는 재화χρῆμα나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들을 빼앗기더라도 가장 덜 두려워ἥκιστα δεινὸν 할 것이고 어떤 불행한 사태συμφορά가 닥치더라도 덜 통곡하고 가장 온유하게πρᾳότατα 견뎌낸다φέρει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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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사람은 자신의 동료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믿는 한, 동료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하며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 살폈듯이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좋은 것 즉 혼의 해방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의 경우 동료의 죽음을 두고 그가 마치 당한 것으로 여겨 통곡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플라톤은 여기서 훌륭한 사람을 일컬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스승 소크라테스를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실제로 <변명>과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곳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의 경우 가장 자족αὐτάρκης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일컬을 때도 그가 염두에 둔 사람 역시 소크라테스였을 것이다. 여기서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제2권에서의 자족 개념(369b) 즉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사회 분업적인 기능을 다 잘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족이 아니라 여기 표현 그대로 불행한 사태συμφορά나 힘든 일을 맞이해도 타인에 대한 의타심 없이 자기 혼자 스스로 온유하게πρᾳότατα 잘 견뎌낼 수 있다φέρειν는 의미의 자족 즉 내적 조건으로서 자립심 내지 의지의 강함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자식과 형제, 그리고 재화는 삶의 외적 조건들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삶이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기보다는 자기를 도와줄 자식이나 형제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화의 결핍을 탓한다.

 

[388a-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시가에서 이름난ὀνομαστός 남자들의 애가(哀歌)θρῆνος를 가려내어 그것을 여인γυνή들이 노래한 것으로 돌려놓는다면, 그것도 진지한σπουδαῖος 여인들에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남자들 중 모든 못난κακός 자들이 그렇게 노래한 것으로 돌려놓는다면ἀποδίδωμι 그것은 옳은ὀρθῶς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수호자로 양육될 사람들이 그와 유사한 짓을 하는 것에 대해 경멸하게δυσχεραίνωσιν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 및 다른 시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일이 없도록 부탁할δέω 것이라고 말하고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여러 군데 인용하여 비판한다. 인용된 사례들 가운데에는 아킬레우스나 프리아모스Πρίαμος 같은 신들의 자손이나 훌륭한 사람들이 동료나 자식의 죽음을 두고 비탄하는 모습은 물론 신들 중 가장 위대한 신 제우스가 그의 아들 사르페돈Σαρπηδών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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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가(哀歌)θρῆνος는 말 그대로 망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노래이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시가에는 이름난 남자들이 노래한 애가가 많이 실려 있는데 정의로운 나라에서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삭제하거나, 굳이 실어야 한다면 진지하지 못한 여인들과 못난 남자들이 노래한 것으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플라톤이 기존 시가에 대한 검열과 변조를 용인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이미 훌륭한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그것은 있는 사실을 고의로 왜곡하고 변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 남자들의 애가를 여인들이 노래한 것으로 돌린다는 말에서 혹자는 여인들에 대한 차별을 읽어내기도 한다. 실제로 당대 아테네에서는 비록 귀족일지라도 여성은 시민권을 가질 수가 없었고 반드시 결혼하여 출산과 집안일을 맡아야 하는 기계 정도로만 여겨졌다. 플라톤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남성으로서 그 한계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민주정의 우상으로 여기는 페리클레스조차 여인들의 덕이란 다만 남자들의 입에 오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여기서 일반 여성들 외에 애가와 무관할 정도의 진지한 여성들의 존재도 함께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수호자의 자격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여성 또한 수호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조차 여성에게 참정권이 허락된 것이 20세기 이후의 일임을 고려하면 기원전 5세기 플라톤의 그와 같은 제안은 그야말로 상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 신들 중 가장 위대한 신 제우스조차 자기 아들 사르페돈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슬퍼하는 장면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운명관을 설명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즉 고대 그리스 신들은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가장 위대한 제우스조차 이미 정해진 운명moira을 거스르지 못한다. 가사자들의 죽음은 신들이 최초 자신들의 권한 영역을 분할 할 때 운명의 신 앞에서 맹세한 불가침의 서약 그대로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부여된 고유 영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게 서로에 대한 침범이 불가능adynaton하지는 않지만 침범할 경우 그들은 하나같이 복수nemesis의 신으로부터의 응징nemein을 각오해야만 한다. 요컨대 운명의 신이 정한 최초의 분배 즉 각자의 몫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각자의 운명이자 당위이며 동시에 또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지 않는 각자의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388d-e]

* 소크라테스는 들을 가치도 없는ἀνάξιος 이러한 이야기들을 젊은이들이 귀담아 듣는다면σπουδῇ ἀκούοιεν 그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나무라기는커녕 사소한 고난πάθημα에도 전혀 부끄럼도, 참는καρτερός 법도 없이 애가를 부르며 통곡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앞의 주장ὁ λόγος이 지적해주었듯이 결코 그래서는 안 되며 더 나은 다른 주장에 설득되기 전까지는 그 주장에 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388e-389a]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시가 속에서 신들이나 위인들이 죽음이나 불행을 비탄하는 모습은 물론 이제 그들이 웃음γέλως에 사로잡히는 모습까지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젊은이들을 ‘웃음을 좋아하는 사람’φιλόγελως으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심한 웃음에 자신을 내맡기게 하여 강한 변화μεταβολή를 유발시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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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8e에서 언급되고 있는 ‘앞의 주장’은 전후 맥락상 바로 앞에서 거론된 언급이 아니라 387d에서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주장 즉 ‘훌륭한 사람은 자신의 동료이기도 한 훌륭한 사람 역시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 위와 같이 용기의 구체적 예시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죽음이나 불행을 비탄하지 않는 것’, ‘웃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등은 하나같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안정된 혼의 상태를 가리킨다. 웃음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게 웃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수호자는 냉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용기와 관련하여 이곳에서 제기된 구체적인 설명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일종의 예비적 논의로서 제4권에서 보다 보편적으로 용기를 규정하기 위한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해 ‘용기란 일종의 보전 즉 고통과 즐거움, 욕망과 공포에 처해서도 끝끝내 소신을 보전하여 지니는 것이다’(제4권 429c-d) 이제 시가 내용 중 용기와 관련한 이야기는 절제와 관련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또한 나중에 다루어질 절제의 덕에 대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을 갖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게일 루빈(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4. <일탈>, 게일 루빈 (下)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S/M 레즈비언 권리 집단 ‘사모아’의 후원 파티, 게일 루빈이 DJ로 참여함)

 

  • 성전쟁

 

1980년대는 미국 여성주의 운동사에 있어서도 게일 루빈의 개인사에 있어서도 여러 모로 시련의 시기였다. 이 시기를 백래시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으로,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 의해 여성과 돌봄에 관한 예산이 전폭적으로 삭감되었으며, 평등권 수정 운동이 실패하고, 낙태권 반대 운동이 확산되어 갔고, 우익 기독교 집단이 반페미니즘, 반동성애를 기치로 삼아,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며 집결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자매애’를 더 이상 외칠 수 함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주의 내부에서도 인종적‧계급적‧지리적 차이들이 강조되면서 여성들이 손쉽게 ‘우리’라고 묶일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는 반포르노그래피 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운동은 광고와 음반, 영화산업 등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섹슈얼리티와 연결하는 데 반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지만, 점차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 전반을 문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포르노그래피에서의 S/M 코드의 사용이 가장 문제시되었다. 여성을 속박하고 때리고 물건처럼 취급하는 이미지가 여러 매체들에서 사용되는 데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분노는, 곧 S/M 섹슈얼리티에 대한 전반적인 비난으로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WAVPM(Women Against Violence in Pornography and Media, 포르노 및 대중매체의 폭력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모임)은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상업적 S/M뿐만 아니라 동의에 기반한 S/M이라는 개념까지 부정하며, S/M은 불평등한 권력 관계와 육체적‧정신적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페미니즘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S/M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한 게일 루빈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오명이 씌워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게일 루빈은 팻 캘리피아(Pat Califia)와 함께 S/M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권리 집단인 사모아(Samois)를 창립하여 레즈비언의 S/M도 페미니즘적 행위이며, S/M의 참여자들은 사회적 자본을 결여한 여성들로 그들은 놀이를 통해 권력 개념을 탐험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포르노그래피 규제를 둘러싼 페미니스트 사이의 갈등은 1982년 4월 24일 바너드 대학에서 개최된 컨퍼런스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제9차 바너드 컨퍼런스는 ‘성 정치를 향하여’라는 주제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주최 측은 의도적으로 반포르노 활동가들을 초청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들이 너무 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반포르노 활동가들을 격분하였고, 컨퍼런스 당일에 항의 시위가 벌였다. 바너드 대학 행정실은 컨퍼런스에서 배포될 예정이었던 섹슈얼리티 회의 일지 책자를 몰수하였다. 이 문제의 바너드 컨퍼런스에서 게일 루빈은 「성을 사유하기」를 발표하였다.

 

  • 반복되는 성 공포

 

「성을 사유하기」는 성 공포(sex panic)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 공포는 반복되는 사회적 현상으로, 그것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정부와 경찰은 시민들을 속박할 수 있는 법적‧규제적 무기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평소대로라면 반인권적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을 받았을 논쟁적인 법안들이 성 공포의 수사학 앞에서는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되며, 이에 따라 국가의 감시 체계와 경찰 권력은 강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 영국과 미국에서의 아동과 청소년의 자위에 대한 공포는 1873년 미연방 반외설법이 통과되도록 만들어 음란하다고 판단되는 그림이나 서적을 제작, 공고, 판매, 소지, 송부, 수입하는 행위 일체를 범죄화하는 데 기여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과 1910년대의 미국에서는 소위 ‘백인 노예’ 공포가 사회를 휩쓸었다. 이 공포에 의해 영국에서는 1885년 형법조항이 개정되고, 미국에서는 모든 주에서 반매춘법이 제정되었다. 이로 인해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과 아동에 대한 강력한 즉결 심판이 가능해졌고, 성인 남성들이 합의하에 행한 외설적 행위도 범죄로 간주되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성범죄 및 동성애 공포가 있었고,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결합하여 정부기관에 종사하는 동성애자를 소탕과 동성애자에 대한 조직적 사찰이 일어났다.

게일 루빈에 의하면 미국의 1980년대에는 아동-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였다. 동성애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 아이들을 구하자’라는 캠페인과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에 힘입어 ‘아동 포르노그래피’ 근절을 위한 법안이 속전속결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아이들을 기소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아동 안전과 복지 증진이라는 명목 하에 금욕이 홍보되었다. 또한 아동-포르노그래피 공포라는 또 다른 형태의 성 공포로 인해 오히려 아이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가 신중하게 검토되지도 못했으며, 아이들이 자기 나이에 맞는 알맞은 성적 정보와 서비스가 제공될 기회가 차단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느슨해졌던 성 관련 규제를 원상 복구시키는 계기가 되어 시민의 중요한 성적 자유를 폐기하는 데 일조하였다.

페미니즘 역시 성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즘 이데올로기는 S/M 이미지를 선동적으로 활용하여, 포르노는 S/M 포르노로 연결되고, S/M 포르노는 결국 강간에 이르고야 만다”는 논리로 성적 규제와 억압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처럼 성 공포는 만연해 있으며, 성 공포에 휩싸여 시민들은 투쟁을 통해 쟁취한 권리들을 자기도 모르게 다시 내주고 만다. 따라서 이제 성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성을 사유할 때가 왔다고 루빈은 말한다.

 

  • 성에 관한 사유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데올로기

 

성 공포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고정된 이데올로기 역시 성에 대한 사유를 가로막는다. 이 이데올로기들은 거의 의심받지 않으며, 새로운 수사적 표현과 함께 반복해서 출현한다. 문제가 되는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는 성 본질주의이다. 이는 성을 개인의 고유한 특성으로 분류하여 섹슈얼리티에는 역사도 사회적 맥락도 없는 것처럼 사고하게 만든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는 사회적‧제도적‧역사적 맥락에 결합되어 있다. 구두가 없었던 시대에는 구두에 대한 페티시즘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대처럼 기계와 인간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시대에 인간은 기계를 통한 섹슈얼리티를 꿈꾸기도 하듯, 섹슈얼리티는 유동적이며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 본질주의는 섹슈얼리티를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여 성에 대한 사유를 어렵게 만든다.

또 다른 이데올로기는 성을 위험하고 파괴적인 힘으로 간주하는 성 부정성의 경향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며, 서구 사회는 이 전통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때 출산만을 목적으로 맺는 혼인관계만을 성스럽다고 간주하며, 성해방과 관련된 논의를 차단하고 불경한 것이 된다. 이는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하고, 청소년들이 피임법과 성교육에 관해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이질적 성에 대해 저주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 섹슈얼리티 위계

 

「성을 사유하기」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성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섹슈얼리티 위계에 대한 지도를 그려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 위계에서 ‘좋은 성’은 “이성애여야 하고, 결혼 제도 내부에 있어야 하고, 일대일 관계여야 하며, 출산해야 하고, 비상업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세대에 속한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지되 집에서 해야” 하고, “포르노그래피, 페티시 대상, 그 어떤 성인 용품, 남녀 역할이 아닌 다른 배역” 등이 결부되어서는 안 된다. ‘나쁜 성’이란 반대로 “동성애, 혼인 관계가 아닌, 문란한, 출산하지 않는, 상업적인 성교”이며, “자위 혹은 난교 파티에서 일어나는, 세대 경계를 넘는, 공공장소, 적어도 덤불숲이나 목욕탕에서 하는 성교”이고, 여기에는 “포르노그래피, 페티시 대상, 성인 용품, 특수한 배역” 등이 결부된 것으로 상정된다.

이 ‘좋은 성’과 ‘나쁜 성’ 사이에 일종의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혼인관계가 아닌 이성애 커플, 문란한 이성애자, 장기간 안정된 레즈비언과 게이 커플 등이 속한다. ‘최악의 성’에는 복장전환자, 트랜스섹슈얼, 페티시스트, 사도마조히스트, 상업적 성, 그리고 세대 간 성애가 속한다. 이처럼 ‘좋은 성’과 ‘나쁜 성’ 사이에는 경계선들이 존재하는데, 경계선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섹슈얼리티는 날뛰게 되면서 최악의 성으로까지 치닫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작용한다.

이 성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성에 대한 해방적 사유를 저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들에 대한 시민권 차별 경제적‧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성소수자들을 성 공포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무기가 된다.

 

  •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페미니즘의 한계와 퀴어 이론의 시작

 

페미니즘은 늘 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왜냐하면 “섹슈얼리티는 젠더들 간의 관계의 접점이며, 여성 억압의 상당 부분이 섹슈얼리티로 인해 발생했고, 그것을 통해 매개되었으며, 그 내부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사유의 경향은 성 해방론적인 것과 성 보수주의적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반포르노그래피 담론은 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존의 이성애적 섹슈얼리티 위계 구조를 그대로 반복한다. 다만 섹슈얼리티 위계에서 이성애 지위를 강등시키고, 일대일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를 상향시켰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계를 드러냈다고 게일 루빈은 평가한다. 더 나아가 페미니즘은 젠더 억압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나는 섹슈얼리티 이론에서 페미니즘이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거나, 그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전제에 도전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젠더 억압에 관한 이론이다. 이러한 사실이 자동으로 페미니즘을 성 억압의 이론이 되게 한다고 추정해버리면, 한편의 젠더와 다른 한편의 성애 욕망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여성 거래」「성을 사유하기」 두 텍스트 간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와 젠더 정체성 형성을 인과적으로 연결시키는 섹스/젠더 체계라는 개념을 구상했다면, 「성을 사유하기」에서는 섹슈얼리티 체계와 젠더 체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젠더 체계를 중심으로 보는 사유이기 때문에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조직을 온전히 망라할 만한 관점이 없다”고 평가하며, 이후 퀴어 이론의 전개를 암시한다. 마치 맑스주의적 분석으로 젠더의 사회적 구조라는 쟁점을 다룰 수 없듯이 젠더 억압을 중심으로 놓는 페미니즘의 분석으로는 섹슈얼리티 위계까지 포괄하여 억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거래」에서 주요하게 사용했던 개념을 「성을 사유하기」에서 철회하는 중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텍스트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성 거래」에서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곧 여성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을 사유하기」에서의 주요 목표 역시 섹슈얼리티의 궁극적인 자유와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성 거래」에서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젠더 정체성의 구속으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면, 「성을 사유하기」에서의 섹슈얼리티 해방은 궁극적으로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인해 숨어 다니지 않으며, 상대방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외로워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즉 섹슈얼리티 그 자체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게일 루빈의 사유는 섹슈얼리티를 남성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이자 여성에게는 위험한 것으로 상정했던 그 당시 페미니즘의 일방적인 흐름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성 전쟁에 참여하면서 페미니즘의 성에 대한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여, 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사유를 급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퀴어이론의 출현을 암시하였다. 성 전쟁 이후 등장한 제3물결 페미니즘은 기존의 제2물결 페미니즘의 한계를 넘어 섹슈얼리티를 다양한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성 해방을 주요한 의제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이때 게일 루빈의 사유는 큰 참조점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루빈의 「성을 사유하기」는 페미니즘 운동사의 한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여철분과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연재는 여기까지입니다.  🙂

게일 루빈(上)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3. <일탈>, 게일 루빈 (上)

여성 거래: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두 번의 커밍아웃

 

게일 루빈(1949 ~ )은 두 번의 커밍아웃을 통해 삶의 커다란 전환을 이뤘다. 첫 번째는 루빈이 미시건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즈음인 1971년에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1978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고 나서 사도마조히스트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것이었다. 첫 번째 커밍아웃보다 두 번째 커밍아웃이 루빈에게는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첫 번째 커밍아웃 때는 동성애자들을 향한 혐오 담론들이 깨져나가던 시기였기에 루빈은 새내기 레즈비언으로서 도덕적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커밍아웃 때에는 S/M에 대한 악마화 작업이 구체화되던 중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의 이미지가 하루하루 추해지는 걸 지켜보고, 체포를 두려워하고, 앞으로 얼마나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인지 불안해” 했다. 특히 자신이 한때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S/M을 가부장제의 사악한 산물로 여기는 바람에, 루빈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인해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배제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게일 루빈이 1971년에 발표한 「여성 거래: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를 첫 번째 커밍아웃이라는 맥락에서, 1982년에 발표한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를 두 번째 커밍아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두 텍스트 사이의 차이와 변화가 보다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두 텍스트 사이에는 게일 루빈이 놓여 있었던 정치적 상황 및 루빈 자신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공간적 이동과 연구 주제 및 연구 방법론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텍스트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라는 관점을 공통적으로 견지하지만, 「여성 거래」에서 주요 개념으로 제시한 ‘섹스/젠더 체계’를 「성을 사유하기」에서는 철회하는 식으로 게일 루빈 이론의 내용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게일 루빈의 주요 저작인 「여성 거래」와 「성을 사유하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각 텍스트가 갖는 의의와 함께 어떻게 게일 루빈이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조응하면서, 여성주의의 주요 논제에 응답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여성억압의 기원으로서 여성 거래

 

여성억압의 기원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앞으로 여성 해방을 위해 어떤 전략과 계획을 취할 것인지와 연결되는 문제였다. 게일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여성 억압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레비스트로스(1908.11.28 ~ 2009.10.31)의 구조주의와 프로이트(1856.5.6 ~ 1939.9.23)의 정신분석학을 배경으로 응답한다. 루빈 역시 그 당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는 별도로 기능하는 여성 억압의 기제를 상정한다. “생물학적인 여자를 억압받는 여성이 되도록 만드는” 억압 기제를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왜 “도무지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조차 여성들은 억압받고 있”으며, 왜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지”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을 이 글에서 시도한다.

게일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여성 억압의 시작을 친족의 기원에서부터 탐색한다. 이때 친족은 “생물학적 생식이라는 사실 위에 문화적 조직을 부여한 것”으로 근친상간 금기라는 최초의 섹슈얼리티 통제가 발생한 장소이다. 이 통제는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사건에 족외혼 및 혼인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부과”하여 “허용된 성적 파트너와 금지된 성적 파트너라는 범주들로 성적 선택의 세계를 분할”하는 기능을 한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근친상간 금기의 비밀은 어머니, 여자 형제, 딸들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낼 수 있도록, 즉 여성을 선물로 교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메커니즘이다. 이처럼 최초의 섹슈얼리티 통제는 여성 교환을 기반으로 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친족의 기원으로 여성이 거래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첫째, 여성은 물건처럼 교환의 대상인 반면, 남성은 거래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가 상정된다. 둘째, 남성들 간의 여성 거래는 결국 남성들 간의 연대와 호혜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남성중심적 사회는 여성 거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애초에 생물학적으로는 위계가 없던 성에 구별을 두기 위해서는 여성이 여성으로 길러지게 되고, 남성이 남성으로 길러지게 되는 특수한 가족 내 관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 거래가 일어나도록 하는 특수한 조건들의 체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게일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 섹스/젠더 체계

 

‘섹스/젠더 체계’는 “인간의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인 원자재가 인간의 사회적 개입으로 빚어지고, 아무리 기괴한 관습일지라도 그런 관습적인 방식으로 충족되는 일련의 제도들”로 규정된다. 즉 인간의 몸과 성적 욕망이라는 자연적 재료를 ‘젠더’라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 및 관습으로 바꾸는 시스템이 섹스/젠더 체계이다.

섹스/젠더 체계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가 젠더 정체성의 형성 및 생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상정하는데, 특히 여성의 몸에 이 섹슈얼리티 통제는 강력하게 작용한다. 거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섹슈얼리티가 본래 가지고 있는 능동성과 역동성을 수동적인 형태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게일 루빈은 정신분석학에서의 가족 서사를 ‘여성 거래’와 여성의 섹슈얼리티 억압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 오이디푸스 서사에 대한 재해석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갖는 강력한 이점은 인간의 정신 형성 과정을 가족 서사, 즉 오이디푸스 서사를 통해 설명한다는 데에 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엄마, 아빠, 아이의 관계를 들어다보면, 거기에는 서로에 대한 욕망과 질투와 좌절로 가득 차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미성숙한 아이는 이 과정을 충분히, 그리고 완전하게 견디고 겪어내야 성숙한 정신을 가진 ‘정상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정상적’ 인간이란 자신의 성적 욕망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수행해야 할 성 역할이 무엇인지를 완벽히 체현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정상적’ 인간이 되기까지 아이가 겪는 고된 역경의 과정을 신화적인 표현을 빌려 ‘오이디푸스’ 서사라 하는 것이다.

게일 루빈은 라캉을 따라 ‘남근 선망’이 아닌 ‘팔루스 교환’을 오이디푸스 서사의 중심에 놓으면서 팔루스를 잠재적 여성 교환을 위한 징표로 해석하여 레비스트로스의 ‘여성 거래’ 개념과의 접점을 찾는다. 이에 의하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각기 다른 과정을 통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어머니를 포기한다. 이때 남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긍정하는 대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팔루스를 확증해주며, 이 팔루스는 남자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여자를 교환할 수 있게끔 하는 상징적 증표가 된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거부당하면서 근친상간 금기뿐만 아니라 동성애 금기까지 경험한다. 그리고 팔루스를 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철회하고 팔루스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아버지에게로 사랑을 향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남자아이게 주었던 팔루스를 여자아이에게는 주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결국 남성에게서 받는 선물(성교와 어린아이)을 통해서만 팔루스를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게 된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단계가 여자아이에게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여자아이의 에고는 수동적이고 마조히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정체성이 형성되는 오이디푸스 서사를 급진적으로 해석한다면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자아이에게 억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이디푸스 서사와 이 서사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깨버려야 정신적인 해방까지 가능할 것이다. 첫 번째로 팔루스와 팔루스가 함의하는 여성 교환을 깨버려야 한다. 두 번째로, 애초에 아이의 욕망이 어머니에게로만 향하는 양육방식을 깨버려야 한다. 세 번째로, 가정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고 있는 아버지의 권위를 깨버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엄마, 아빠, 아이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가족관계의 구성을 깨버려야 오이디푸스 서사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을 것이다.

 

  • 젠더가 없는 사회

 

여성억압의 기원이 ‘여성거래’라면 여성해방의 기획은 자연스럽게 여성거래를 없애는 것이 될 것이다. 게일 루빈에 의하면 “만약 성적 소유 체계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최우선적인 권리를 가지지 않은 방식으로 재조직된다면(만약 여성교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이디푸스 드라마 전체는 유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친족 체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친족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스스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면,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경험하고, 레즈비언 아빠나 게이 엄마처럼 여러 형태로 가족이 구성된다면, 고통스러웠던 젠더 정체성의 형성 과정도 약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미 친족의 구속력은 약화되어 “가장 최소한의 뼈대인 섹스/젠더 체계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는 가능한 해방 전략이 될 수 있다.

게일 루빈은 섹슈얼리티의 해방을 통해 젠더 젠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진정한 여성해방으로 보았다. 비록 해부학적‧생물학적 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를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양성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의 상을 전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 억압의 철폐 그 이상을 꿈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강제적 섹슈얼리티와 성 역할들의 제거를 꿈꾸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꿈은 양성적이며 (섹스가 없진 않겠지만) 젠더가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이다. 그런 꿈속에서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은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할 것이다.

 

  • 하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