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상편. ‘더 이상 우애 정신은 없다 – 포스트 코로나 시기를 앞두고 우애적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1940년 영국에서 출생한 정치학자이자 여성학자이다. 1963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72년 시드니대학 정치이론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 정치과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페이트만은 이 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해 있다. 그녀는 민주주의와 관련한 여성이론과 정치이론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이자 교수이며,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입장에 서 있다.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은 1988년에 출간한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페이트만이 시드니대학 정치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했을 때 나온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인 1990년대 초중반에 그녀는 최초로 국제정치학회에서 여성 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he sexual contract로, 한국어로 번역한 제목보다 더 간략하다. 이 책의 내용은 페이트만이 미국과 호주에서 열었던 여러 강연과 토론을 바탕으로 하고, 참고 자료들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스탠포드대학 행동과학연구소에서 수집하였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프린스턴대학 사회과학연구소에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인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1

이 책은 홉스, 칸트, 로크, 루소 등의 근대철학 텍스트들에서 쉽게 간과하거나 가볍게 다룬 부분들을 골라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기존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페이트만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여러 가지 계약들에 관한 논의들이 정치이론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논의를 폄하하거나 과도하게 비난하는 입장을 피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전통적 정치이론과 현대적 정치이론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적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페이트만이 여성이론 분야에서,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를 정치이론 텍스트로 연구하고 논의하는 이유는 역사의 균열 속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가진 지속성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역사의 굴곡에서조차 없앨 수 없었던 삶과 존재에 대한 열망은 아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넓게 조망하고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내속적이고 존속적인 시간에 담긴 것이었다.

Carole Pateman(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Political Science, Distinguished Professor)  https://ucla.academia.edu/CarolePateman

페이트만에 따르면, 너무 잘 알려진 토머스 홉스, 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는 정작 여성들이 배제되어 있다. 정치철학 및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 논의들이 배제되었던 1970~80년대만 해도 여성의 정치적 의무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바라본 입장은 급진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보였다. 정치학이나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것도 낯설었지만,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사회계약설에 대항하는 입장을 내세우는 시도는 더욱 낯설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여성이 시민사회에서 혼인계약을 할 수 있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를 내세우지만, 여성이 시민의 자유를 획득하는 사회계약에 참여하지 않고 참여할 수 없는 신민(臣民)이라고 간주하는 실질적인 계약과 시대 및 사회적 한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2 홉스의 시민 계약론도 남성중심주의를 이상적으로 규정한 점에서 볼 때, 기존의 근대 철학자들의 입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시민들이 스스로 국가와 시민법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예속이 교환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루소는 시민을 자발적으로 지배하고 예속하는 사회계약설을 제시하는데, 시민의 지배 및 예속권이 가지는 자발성은 결국 사회계약을 교의적으로 만들어버렸고, 실질적이고 자유로이 실천가능한 모델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시민의 권리 문제는 루소의 사회계약설로 인해 진부한 논의로 치부되거나 더 나아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주제로 전락해 버렸다.3 로크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과 사회적 권력을 구분하고, 계약을 통해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페이트만은 로크의 사회계약설은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한다. 혼인계약은 매춘계약이나 고용계약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을 예속하는 수단이었고, 사회계약은 결국 인류사와 함께 지속되어온 성 계약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성적 계약은 가내 아버지의 정치적 권력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라진 후에 새로이 등장한 형제계약에 속한 가부장제에 기반해 있다. 가부장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권력이 중심되는 가족구조가 아니라 시민사회와 시민의 자유에도 영향을 주는 형제계약이다. 따라서, 형제계약에 속하는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사회에 예속되는 개인의 신분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가부장제 계약은 항상 국가, 자본과 노동 간의 협상에서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숱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임금에 의한 노예계약과 시장사회주의에서 수많은 페미니즘운동을 일으킨 신체상의 소유권 등이 그 예이다. 사회계약에 대한 노동자나 시민의 예속과 복종의 관계는 언제나 가부장제를 토대로 한다. 사회계약의 전반에 걸쳐 계약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은 가부장제에 있다. 그렇지만, 푸코가 제시한 바와 같이 사회계약이 사법제도나 교육상의 훈육, 통제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책의 제목과 같이 페이트만은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다루고 다양한 법적 계약 관계를 주제로 삼지만, 특정한 계약법을 다루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계약과 성 계약은 각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계약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상호대립관계에서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를 갖고 평등한 상태로 태어나고,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모든 인간을 토대로 사회계약은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자연에 가까운 원초적 계약의 상태는 남성과 여성 간에 커다란 차이가 남겨져 있다. 은연중이든 의식적이든, 편협적이든 포용적이든, 상징적이든 실재적이든 간에, 사회계약에서 자유를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남성으로 상징하고, 예속을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여성으로 대표하는 질서라는 것을 해체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성차는 인간의 원초적 계약상태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관계 차이인 것이다.

17~18세기 국가와 시민, 정부 간의 사회계약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발전이 있었으나 성적 계약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괄시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 성인은 시민이 되고 결혼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또한,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시민사회로 접어들면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성인이 획득하는 자유에 여성을 소유하는 것도 해당해 있다. 페이트만이 내세우는 여성과 관련한 핵심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회계약도 성적 계약에 기초해 있고, 시민이 얻는 자유도 이러한 성적 계약으로 인한 가부장제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성과 관련한 여러 가지 계약 형태를 고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논의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남성에게는 사회계약뿐만 아니라 성적 계약까지도 원시적 자연이자 자유라는 의견이 오래된 편견으로 남아 있고,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를 만든 법에도 남성중심주의가 지닌 오래된 파행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왜 가부장제를 문제시 여기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아버지의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구분하지 못한 데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아버지의 권력을 형제애로 탈바꿈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것은 남성의 성에 대한 권리가 근대적 사회계약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프랑스어에는 애인이나 연인을 가리킬 때에 사랑(amour)에서 비롯되는 연인(amant)의 표현 외에 우정(amitie)에서 비롯되는 ‘한 명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뜻하고, 엉(윈) 쁘띠(뜨) 아미로 발음하는 표현인 ‘un(e) petit(e) ami(e)’가 있다. 한 명의 친구를 프랑스어로 표현하면, un(e) ami(e)인데, 이 어휘에서 ‘petit(e)’와 같은 형용사가 들어가는 이유는 petit(e)가 ‘작다’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사랑스럽고 귀여우며 정답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다’는 의미를 가진 어휘에 ‘친밀한 감정’의 의미가 함께 포함된 이유는 주니어(junior)와 같은 ‘막내 형제’가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나의 애인을 가리키는 ‘쁘띠(뜨) 아미’는 마치 맏형이 막내동생을 대하는 태도나 시선 등에서 연유한다. 즉, 성적 계약에 기초한 애인을 표현하는 어휘는 가족애적인 가부장제가 우애적인 가부장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어휘임을 알 수 있다. 18~19세기 혁명기의 사회계약설에 기반한 새로운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나의 연인’과 같은 어휘에는 혈연관계를 뜻하는 형제애의 맥락과 의미가 비어있는 채 잔여물로 남아 있다. 근대 형제애는 여성이 남성에 종속된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형제계약은 고용계약, 매춘계약을 포함한 성적 계약으로 간주되어서 사회계약에 속한 결혼 계약과 구분된다.

페미니즘에서 연구한 가부장제에 관한 모호하거나 불명확한 특성으로 인해, 페이트만은 사회적 결사를 위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개인이 신체를 자유로이 소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재산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사회적 결사란, “시민들끼리의 개인적 우애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대를 도모하는 집단으로서의 복수 형태인 우애‘들’을 의미한다.”4 이 용어는 남성 중심적인 비밀결사단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모든 계약은 재산이나 권리의 상호교환과 이에 따른 평등이 전제해 있다. 그러나 한쪽이 “잠재적인 재산이 되면 불평등하게 된다.”5 재산은 기본적으로 물질에 기반하므로, 잠재성을 전제로 한다면, 반드시 현실화되는 실재가 동반한다. 이것은 물질에 이미 담겨 있는 가치상에서의 평등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상상적인 신체로만 여기고, 실재적 신체를 가상화하는 관계에 제한한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더 이상 합법적이거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여기에서 잠재성은 어느 행위가 현실화되는 가능성(계기나 준원인 등)을 의미하는 한에서의 가상성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실재하는 신체를 가진 남편이 현실에서 실재적인 아내의 신체를 특정한 가상 세계의 도구로 삼거나 특정한 성적 행위를 포함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만큼 아바타나 메타버스, 인터넷게임 등으로 가상화되어 있는 경우에 가상 남편이 가상 세계에서 연장된 현실의 실재적 아내에게 실질적 행위를 하는 경우 등, 전혀 현실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전적인 가상 세계에 의해 선택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언어와 행위의 실질적인 영향력 등의 경우에 남녀의 성적 차이는 가상과 실재 간의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지 자연적 성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남녀 간의 성차가 순수한 자연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가상과 실재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법적 지위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소유하는 권리를 가상과 실재의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박탈당하는 경우는 여성의 인권뿐만 아니라 성적 정체성을 박탈당하는 경우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민의 자발적인 신체 소유권 문제는 남성과 여성 간에 형제애를 토대로 한 형제계약에서 비롯된다. 이 계약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 이어온 자본경제의 역사와 관련된다. 자본경제는 남녀 간의 형제애를 이상적인 모델로 규정하여 현실과 신화 간의 간격을 모호하게 만들며, 그 틈에서 용암이 분출하듯이 남성에게는 오이디푸스의 신화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여성에게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뿜어져 나온다. 근대 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와 공화국 이념은 언제나 신화적 특성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이자 보편적인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는 프랑스어로 fraternite라고 하며, 우애 혹은 형제애라는 의미도 가진다.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이념인 박애 정신은 근대 시민사회 시민들끼리 강하게 유대하도록 이끌어 오늘날에는 관용 정신(똘레랑스)으로 불린다. 박애 이념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맡아왔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사회에서 관용 정신은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을 심각하게 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애나 형제애 정신으로 대변되는 다양한 사회계약, 특히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 매춘계약, 고용계약, 노예계약 등은 여러 유형의 가정폭력과 성범죄, 각종 중범죄, 빈부격차, 인종차별, 성차별, 난민수용의 문제 등을 초래하였다. 오늘날의 관용 정신이든 근대사회의 기반을 마련하고 공화국 및 민주주의를 형성한 주요 정치이념마저도 가부장제의 어두운 면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를 민주주의 공화국을 향한 혁명의 길로 이끌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시민들이 민중이 되어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 정치이념은 더 이상 사회통합의 계기가 아니라 사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근대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에 대해 살펴보았다. 페이트만은 이 책에서 사회계약론을 살펴보려면 우선 성적 계약을 논해야 한다는 페미니즘적 이념을 내세웠다. 그녀는 다양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이념을 연구하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성운동이 일어난 지 약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가부장제에 대한 개념과 범위 규정,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살펴보는 역사적 고찰, 사회적 권력의 구조화 문제, 사회의 보편성인지 특수성인지의 여부, 자본주의와의 관련성, 여성성과 관련한 식민제국주의의 역사적 고찰 등과 같은 연구 과제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페미니즘 연구는 현대 여성들의 사법 판결권을 개혁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자 작업이다. 4년 전 현 인류에게 느닷없이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른 현대적 우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 세계 통계상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한 자가 약 670만 명이 넘고,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었으며, 시민들의 경제 및 사회활동이 줄어들자 자영업자들의 소득이 크게 감소하여,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아 길거리 문화가 사라질 위기가 처해 있다. 또한, 20~30대 청년들은 사회의 양극화 구조가 심각해지고, 기존의 산업 패러다임이 해체된 가운데 일자리를 얻거나 정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이 늘고 있다. 2023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17세기 근대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 공화국의 이념과 시민의식, 인권사상, 자본주의 경제사회 등이 300년 넘게 이어온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계약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새로이 깨닫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시민사회는 또 다른 정치적 의무이자 권리, 자유를 실천하고, 논의를 확장 및 발전시키는 과제를 미래에 남겨두고 있다.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교의적으로 수용되었던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문제는 이제 허물을 벗었다. 우리는 신종바이러스의 발견과 감염경로, 방역 대책, 예방진료,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통계 및 이와 관련한 신기술들을 경험하면서, 진부하고 하찮게만 여겨졌던 근대 사회계약설을 재고찰하게 되었다. 끝내 사회계약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기만한 성적 계약의 진면모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성적 계약은 시민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3의 성이든 간에 어떠한 성(性)이라도 띠며 살고 있음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페이트만이 이 책에서 강조한 형제애적 가부장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꼭 고려해야 할 논의이다.

— 하편에서 계속


☞ 연재 바로가기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김성수 박사 지음,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서평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김성수 박사 지음,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서평 – 이병창

 

이병창(한철연 회원)

 

1)

2023년 1월 28일(토) 오후 2시, 천도교 본당에서 김성수 박사님의 저서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박사님은 출판에 즈음하여 소회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노래를 하나 하겠다고 하면서 가고파를 부르셨다. 박사님은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셨겠는가, 나 역시 박사님의 노래를 들으며 속으로 함께 울었다. 지금도 박사님이 부르던 ‘가고파’ 노래가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다.

박사님은 1936년 태어나셨으니, 지금 86세, 거의 아흔에 가깝다. 연대 철학과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유학을 떠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으니, 보통은 한국에 돌아와 어느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시다가 이제 은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과 박정희 독재 체제는 박사님의 인생을 한꺼번에 바꾸어 버렸다. 1973년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와 관련된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73년부터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역만리 독일에서 망명 아닌 망명자의 신세가 되어 외로이 떠돌게 되었다.

박사님은 그 후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창립하면서 90년대 김대중 정권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가 일어나기까지 유럽 전역에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한 생을 바치셨다. 80년대 초 일부 회원들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박사님에게 그런 길은 열리지 않았다. 박사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동경대전』을 독일어로 번역하셔서 유럽에 한국의 사상을 전하는 데 진력하였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2003년 9월 마침내 국내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으나, 정권이 바뀌면 다시 귀국이 금지되었다가 문재인 정부 시절 다시 귀국이 허용되었다. 그 사이 이미 유럽에 삶의 지반이 펼쳐져 있는지라, 박사님은 가끔 귀국할 수 있었을 뿐이니, 그러다 이번에 저서를 국내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얼마나 크셨겠는가.

박사님을 아는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출판기념회는 성황리에 끝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내에서 박사님과 같이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후배들이 박사님의 출판을 마음으로 후원하였으니, 박사님도 무척 고맙게 여기시는 듯했다. 이제 박사님의 책을 미리 읽어본 후학으로서 박사님의 저서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 김성수 박사 / 출처: 도서출판 바람꽃 https://blog.naver.com/windflower_books/222992521925

2)

이번에 발간한 철학서 <서양철학의 역설>이라는 책은 제목에서 밝혀진 대로 서양철학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질적으로 사로잡혔던 역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역설이란 무슨 문제인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역설이라고 한다면, 영어로는 ‘paradox’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주장이 서로 평행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A를 주장하게 되면 그것과 대립하는 주장인 B가 A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그것은 거꾸로 B라는 주장 역시 필연적으로 A라는 주장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사님은 이를 상호전환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뜻은 대립하는 두 주장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paradox’는 한자어로 역설[逆說] 즉 대립하는 주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박사님은 이런 역설의 형태로 딜레마, 이율배반[Antinomie], 자가당착, 무한 진행, 순환론과 같은 다양한 형태를 거론하고 있다.

이 역설의 문제는 근대 철학에서 고전주의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 변증론에서 다루었으나 결국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이전해 버리고 말았던 문제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역설의 문제를 철학적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 때문이라고 보고 역설을 해결할 명확한 철학적 언어를 끝내 찾지 못하였다.

칸트와 러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남겨놓은 역설의 문제를 박사님이 자신의 책에서 포괄적이고도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학문의 길에서 어디서나 그렇듯이 문제를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은 문제를 극복하는 가장 지름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자리에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역설의 종류나 형태를 일일이 열거하고 소개하는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서양철학에 대한 약간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던 것일 것이다.

 

3)

박사님의 책 가운데서도 이채로운 것은 문학에서 역설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박사님은 다양한 서양 문학 작품 속에 이런 인간론적 역설이 어떻게 등장하는가를 보여준다. 박사님은 이것을 통해 철학적 역설이 단순히 철학자만의 고답적인 고민에 그치지 않고 사실은 인간 자신의 삶 속에서 그때마다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박사님은 여기서 괴테의 <파우스트>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소개한다. 철학적 역설의 문제는 철학자의 소관이니 일단 그들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문학 작품에서 나타나는 역설의 문제는 철학적 고민이 삶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이 자리에서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파우스트>에 관해서 약간 상세하게 소개하였으면 한다.

박사님에 의하면 파우스트는 이성과 회의(성찰)을 상징하는 파우스트와 악과 행동을 상징하는 메피스토펠레스 사이의 대립을 그 기본 구도로 한다. 행동 없는 성찰에 지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감각적 자연 충동을 부여받게 된다. 파우스트는 이성과 감각적 자연 사이의 통일을 확신하면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저주를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 1부에서 파우스트는 감각적 충동에 의한 행동으로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충동으로 살아가는 그레첸을 사랑하게 되고 이를 통해 쾌락을 얻다. 하지만 감각적 자연 충동은 자연 자체의 자기모순으로 파괴되고 만다. 파우스트는 사랑을 방해하는 그레첸의 오빠를 살해하고 순진한 그레첸은 자기의 죄 없는 아이를 살해하면서 파국에 이른다. 순진한 자연 충동에 의한 삶은 자기모순을 통해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파괴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감성과 이성의 통일은 여기서 불가능하게 된다.

» 2부에서 파우스트는 고전적 미(美)의 이상인 그리스로 시간 여행을 한다. 그는 고전 그리스에 이르러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다. 헬레나는 고전적 미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마침내 이성과 감성적 미의 통일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의 미는 이성적 질서인 자유의 이념을 직접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며, 여기서 개인의 자각적인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폴리스만이 자유롭고 개인은 어디까지나 폴리스를 대신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도 모순이 해결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파우스트와 헬레나의 아들인 오이포리온이 하늘을 날려다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통해 상징된다.

» 3부에서 파우스트는 근대 세계로 돌아와 제후가 되어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국가를 세우려 한다. 파우스트는 황폐한 자연의 개간을 통해 이성적 질서인 자유와 물질적인 행복이 함께 하는 사회에 이르려 한다. 자연의 개간이 끝나자, 마침내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지금 멈추어라’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 마지막 부분은 파우스트가 바라던 이성과 행복의 통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박사님은 이런 자연의 개간 과정에서 파우스트가 자연 속에 살아가는 노부부를 살해하는 데 주목한다. 노부부는 아마도 자연 자체 곧 신적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님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곧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니 여기서도 이성과 감성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4)

이상에서 박사님은 서양철학사에 등장한 다양한 역설을 소개한 다음, 서양철학이 이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발버둥을 쳐 왔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발버둥은 그만큼 역설의 문제가 서양철학을 괴롭혀 왔기 때문인데 박사님은 전반적으로 이런 시도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박사님은 이런 시도를 세 분야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 번째 사변론 분야에서는 사변적인 사유를 통해 역설을 극복하려는 시도인데, 여기에는 초월주의와 에소테릭(비의), 알레테이아(계시)가 속해 있는데, 그 가운데 에소테릭과 알레테이아는 종교적인 차원이니 생략하고 철학적으로는 초월주의가 주목할 만하다. 초월주의란 곧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역설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박사님이 자신의 저서에서 주목한 것은 화이트헤드, 하르트만, 하이데거와 같은 20세기 형이상학자이다. 유기체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부분과 전체의 대립을 해소하여 부분이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박사님에 의하면 화이트헤드의 유기적 철학은 다시 비유기적인 철학에 대립하면서 역설을 극복하기보다 역설을 다시 새로운 영역으로 이전했을 뿐이라 한다.

하르트만은 다양한 존재자를 인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수, 문화 등과 같은 제3의 존재자를 인정하면서 관념적 존재자를 물질적 존재의 반영으로 보는 유물론과 관념적 존재자를 초월적 존재로 보는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하려 했으나, 박사님은 이런 시도 역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라 한다. 왜냐하면, 제3의 존재 내에 다시 관념적인 수와 같은 것과 물질적인 문화와 같은 것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는 명제의 진리 이전에 존재의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명제가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면서 사실을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서양철학은 오랫동안 존재 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하이데거는 이제 존재를 이르는 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이르는 길은 이미 존재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존재[Da-Sein] 즉 실존[Ex-Sistenz]을 거쳐 나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박사님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역시 역설을 근본적으로 극복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이데거 역시 언어의 이분법적 성격을 철학의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님은 첫 번째 초월주의 분야에 이어서 협동론 분야에서 등장한 시도를 소개한다. 박사님은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통섭론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론이며, 세 번째는 삼분법론이다. 여기서 통섭론이나 통합론은 다양한 과학의 결합을 통해 전체 자연을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자연과학에서 등장한 주장이니 생략하고 세 번째 삼분법론은 철학에서 등장한 이론이니 주목할 만하다.

이는 관념과 물질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시도인데 스피노자는 물질 실체와 관념 실체를 넘어 무한 존재라는 세 번째 실체를 도입하였고 포퍼는 앞에서 소개한 하르트만처럼 문화의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관념적이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가정했고, 프레게는 의미의 세계를 상정하면서 기호나 지시체와 달리 의미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세 번째 분야는 반이성주의이다. 여기서는 비합리주의와 반합리주의적 경향이 거론되고 있다. 쇼펜하우어, 니체 등 직관주의적 철학이 그 예이며 비판이론 역시 아도르노에서 보듯이 직관주의를 광범위하게 도입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해체론과 같이 아예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인정하려는 시도를 들어볼 수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분야에서 전개된 역설 극복의 방식과 그 한계에 대해 박사님은 상세하게 분석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이상 다양한 주장은 서양철학이 역설을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를 보여주는 주장이지만 전체적으로 박사님은 이런 모든 시도 역시 근본적으로 역설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5)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서양철학을 괴롭혀온 역설의 문제를 박사님 자신은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제1부 3절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박사님은 서양철학에서 역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단지 인간의 사유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박사님은 이런 역설을 유럽의 삶과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서양철학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역설의 문제에 사로잡혔지만, 특히 근대에 들어오면서 역설은 광범위하게 모든 분야에서 펼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박사님에 의하면 근대의 서양은 한편으로 산업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계를 식민지화하게 되었다. 상세한 과정이야 다 알고 계실 것이니 여기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런 과정에서 서양은 자연과 비서구를 지배하는 가운데 유럽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가 등장하면서 자연과 감성을 인위와 이성을 통해 지배하려 했고 그 결과 자연과 감성이 인위와 이성에 대립하는 이분법적 사유, 역설적 사유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박사님은 역설은 이런 유럽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극복될 수는 없다고 한다.

박사님은 이런 점에서 거꾸로 서구의 지배를 극복하려는 동양의 사회 속에서 이런 이원론적 역설을 극복할 싹, 단초가 놓여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박사님은 먼저 우파니샤드의 ‘여여[如如]’ 사상에 주목한다.

이런 여여 사상은 범아[凡我 ]일치 사상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든 분별을 부정하는 이론이다. 박사님은 스와미시바난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아는 것과 알려진 것은 하나다. 신과 나는 앎 속에 하나다. 시바와 브라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고양이와 쥐의 영혼은 하나이다. 해와 달의 본질은 하나다. 오래된 형식 속에 하나의 동질적인 본질만 있을 뿐이다. 이 본질은 절대적이며 사멸되지 않는다. 이 본질이 아트만, 브라만, 무한한 것이다.”

박사님에 의하면 이런 여여 사상은 유럽의 이원론적 사유와 대조되는 것이며 후일 불교의 근본사상이 되었다고 한다. 흔히 불교에서 돌에도 부처가 있다고 하는데, 여여 사상이란 무차별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님은 또한 도가의 무위 사상에도 관심 가진다. 도가에 따르면 도의 인식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수단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도의 이식은 이분법적 사유를 좌망[坐忘]을 통해 극복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도의 내용은 비이분적인 무위의 성격을 가졌다.”(137쪽)

좌망이란 곧 <장자, 대종사> 편에 나오는 심재좌망[心齋坐忘]을 말한다. 그것은 곧 “자기의 신체나 손발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눈이나 귀의 움직임을 멈추고, 형체가 있는 육체를 떠나 마음의 지각을 버리며 모든 차별을 넘어서 대도에 동화하는 것“을 뜻한다.

 

6)

역설과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려는 박사님의 고투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박사님은 결국 동양사상에서 역설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길을 발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아쉬움을 느낀다. 헤겔과 같은 변증법적 사유도 역설과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하는 한 길이 되지 않을까 보는데, 박사님은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박사님은 우리 후학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긴박하고 절실한 요구라는 사실을 박사님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박사님의 문제 제기에 따라 철학하는 후학들도 이런 역설과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적 지배를 끝장내는 길에 나서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2년 12월 제3차 정기세미나 영상 “이규성의 程朱學 이해와 쇼펜하우어의 生철학 (1)” 2022.12.16.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 연구회] 세 번째 정기 세미나입니다.

(이번 세미나는 사정상 동영상이 아닌, 음성파일로 올립니다.)

이번 세미나는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2016)의 ‘Ⅶ. 아시아 철학과 선험적 구성론’에서 ‘1. 주희朱熹와 쇼펜하우어’의 내용을 중심으로 저자 이규성의 程子와 주희에 대한 연구논문의 일부를 참조하여 정리한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합니다.

다음 세미나는 2023년 2월 16일(목) 16시 잠정 시행 예정으로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선생님의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자세한 평론(가제: 쇼펜하우어로 본 이규성의 소통과 혼융의 철학)으로 진행합니다.

주    제 : 이규성의 程朱學 이해와 쇼펜하우어의 生철학 (1)
발표자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    시 : 2022년 12월 16일(금) 오후 4시~6시
장    소 : 서소문로 45 소재, 이병창 교수 ‘정치학교’ 연구강의실
방    식 : 대면+비대면 zoom 회의

♦ 동영상 출처 : https://youtu.be/mqXvRjLUvrg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9월 월례발표회 영상 “지젝과 하이데거 사태 -잘못된 방향이지만 올바른 발걸음-”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9월 월례발표회 “지젝과 하이데거 사태 – 잘못된 방향이지만 올바른 발걸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하반기(8-11월) 월례발표회는 발표를 신청한 회원들의 발표로 이어집니다.
이번 9월 발표는 두 명의 토론자가 참여하여 풍성한 발표회가 되었습니다.
9월 월례발표회 개최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주 제: 지젝과 하이데거 사태 – 잘못된 방향이지만 올바른 발걸음
발표자 : 김성우(상지대학교)
토론자 : 서영화(서울대학교), 김민수(동서울대학교)
일 시 : 2022년 9월 27일(화) 오후 6시 – 8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FnL0XtLOwqs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학술대회 영상(《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故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학술대회(《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故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62회 정기학술대회는 2022년 6월 11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에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라는 주제와 더불어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를 같이 진행하였습니다.

주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장소: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 (온라인 동시진행)
시간: 2022년 6월 11일 (토) 오후 1시

—————————————————————-
– 학술대회 순서 –

개회사: 박정하 회장(성균관대)
축 사: 김교빈 이사장(성균관대)

1부 논문발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 사회: 이지영(이화여대)
– 발표1 – 김성우(상지대): 코로나 19 팬데믹과 푸코 생명정치의 문제
– 논평1 – 조은평(건국대)
– 발표2 – 김범수(숭실대): 바이러스, 도래한 시대 : 들뢰즈를 중심으로
– 논평2 – 김은주(서울시립대)
– 발표3 – 정유진(서강대): 쏠루세와 코비드 19 – 해러웨이를 중심으로
– 논평3 – 이현재(서울시립대)
– 1부 종합 토론

2부 《이규성 선생님 추모 학술제》 – 사회: 이병창(한철연)
– 발표1 – 이지(이화여대): 중국 현대 ‘신철학’ 재검토 – 이규성의 『중국현대철학사론』 비판적 독해
– 발표2 – 박민철(한철연): 한국현대철학사 방법론의 확장 : 이규성의 『한국현대철학사론』과 그 논쟁들의 재검토를 중심으로
– 청중과 함께하는 좌담회

 

<‘메타버스’ 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 이광석의 『피지털 커먼즈』(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메타버스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손보미(다중지성의 정원)

 

올해 국내 구글 사용자가 가장 많이 찾은 검색어는 ‘로블록스’였다고 한다. 로블록스는 주식회사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제작하고 배급하는 온라인 게임의 이름이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정리된 이 게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로블록스는 사용자가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다른 사용자가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 및 게임 제작 시스템이다.”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은 엄밀히 말해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기보다는 온라인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이고 따라서 ‘로블록스’도 온라인 게임 플랫폼의 이름인 셈이다.

구글 코리아의 검색어 순위 발표에 이어, “어서 학원 가서 게임 배워야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도 떴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로블록스’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제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과 수강생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로블록스를 ‘게임계의 유튜브’라 칭하며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주식이 올해 ‘메타버스 대장주’로 불렸었다는 사실로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로블록스를 검색하고 또 이 플랫폼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먼저 이 책 『피지털 커먼즈』부터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책에 따르면, 현재 특정 기업들의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은 자본의 가두리치기(인클로저)용 장치들이다.

 

“오늘 ‘메타버스’라 불리는 기술문화 차원의 신생 공간은 또 다른 기술 세례와 축복에도 불구하고 바로 피지털계의 본격적인 인클로저를 알리는 서곡으로 볼 수 있다.” (7)

 

<‘온라인 플랫폼달콤한 신개념 가두리>

 

저자는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을 양봉장에 비유한다.

 

“플랫폼은 입주자와 이용자에게 차별 없이 놀 자리를 깔아 주고 각종 서비스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듯 보인다. 이들 입주자와 이용자 누리꾼은 마치 플랫폼에서 꽃밭 속 꿀벌처럼 자유롭게 데이터를 생성하고 주고받으면서 ‘화분’과 꿀 채집 활동을 한다. 누리꾼은 형식상 자유로워 보이지만, 내용상 플랫폼 임차인에 가깝다. 그날그날 본능에 이끌려 꿀을 채집해 플랫폼 벌통에 채우는 일벌과 같다.” (25)

 

공통의 에너지와 부를 기업의 이윤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 가두리를 치는 일이 물론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과거와 지금의 다른 점은 그 포획 방식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작업장에서는 그야말로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생산공정을 통해 착취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서 신개념 작업장은 마치 양봉자가 벌통으로 꿀벌을 유혹해 수확물을 거둬들이듯, 플랫폼 앱 장치를 통해 일꾼들을 유혹해 억압 없이 자발적 노동을 끌어낸다.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노동은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즐거운 놀이와도 같아서 『제국의 게임』의 저자 다이어-위데포드는 이를 ‘놀이노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꿀벌이 꿀을 모으는 일이 애초에 양봉장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듯이 현재 온라인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활동들, 심지어 놀이라고 불릴만한 즐거운 활동들도 애초에 기업 주주들에게 이윤을 안겨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여기에 달콤한 신개념 가두리의 핵심이 있다. 지금 활발히 작동 중인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은 수많은 유인책을 통해 놀이를 포함한 생명의 다양한 활동들, 심지어 생명 활동 그 자체를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을까?

 

<데이터 사회>

 

책의 표제어로 쓰인 ‘피지털’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피지컬’(물질)과 ‘디지털’(비물질)이 혼합된 지금의 현실을 ‘피지털’이라 부르고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세계를 ‘피지털 계’라 부른다. 그런데 ‘피지털’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이 피지털 계에 가두리를 치고 우리의 생명 활동을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자본주의는 플랫폼이라는 장치를 통해 … 인간 산노동은 물론이고 인간 의식과 생체리듬의 데이터 활동을 사유화된 가치 체제로 흡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6)

 

자본은 무엇 하나 평등하게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피지컬과 디지털이 혼합된 피지털 계가 자본주의를 만나면 디지털 세계의 기술 논리로 피지컬 세계의 지형과 배치를 좌우하는 데이터 사회가 된다.

산업사회는 인간의 피지컬 에너지(물리적 힘)가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원으로 포획되는 사회였다면, 데이터 사회는 인간의 피지털 에너지(물리적, 인지적 힘)가 주요 동력으로 포획되는 사회다. 즉 데이터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된 피지털 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데이터 사회, 즉 디지털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왜곡된 피지털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 질서를 향한 강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로운 피지털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안 실천들을 통칭하는 이름이 바로 ‘피지털 커먼즈’다.

 

<피지털 커먼즈>

 

자본주의의 플랫폼 장치들을 통해 왜곡된 피지털 질서는 20세기말 한때 디지털 혁명으로 크게 번성했던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을 빠르게 쇠퇴시키고 있다.

 

“동시대 플랫폼 질서는 무한 복제, 비경합성, 한계비용 제로, 익명성 등 아이디어와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과 크게 배치된다. 영원히 ”자유롭고자 하는“ 디지털 정보의 본성은, 인류의 잠재적 창작의 원천이 되고 복제와 공유를 독려하면서 디지털 ‘자유문화’를 확장하지 않았던가” (95)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대안을 고민할 필요를 역설하며 정부와 기업의 과도하고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을 제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요구와 감독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수집된 데이터에 대한 오, 남용을 막기 위해 다중 스스로 펼치는 문화정치 전술 또한 중요한데 대표적인 예로 핵티비즘(데이터 행동주의)이 있다.

데이터 행동주의는 기술시장 논리에 의해 몇몇 소수의 손아귀에서 자본의 구미에 맞춰 이용되고 있는 데이터를 원래 그 데이터의 주인들이 볼 수 있도록, 또 그 데이터들이 다른 질서 속에서 이용될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하는 활동이다.

 

“‘스노우든 아카이브’는 캐나다 기자, 대학, 시민단체의 공동 연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글로벌 시민 다중이 언제든 권력의 기록에 접근해 검색하고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통의 지식 커먼즈가 되었다.” (98)

 

<피지털 커먼즈는 생태 커먼즈>

 

자본의 인클로저의 다른 이름은 생태계 파괴다. 물론 지금 피지털 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클로저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기업들은 자유롭게 확산하고 다양하게 펼쳐져야 할 비물질적 에너지들을 데이터의 형태로 사로잡아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이터 센터에 가둬두고 있는데 이 를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얼마 전에 구글은 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데이터 센터를 바다에 집어넣는 실험을 했다. 한 플랫폼 기업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뭇 생명이 사는 터전인 바다에 뜨겁게 달아오른 거대한 쇳덩이인 자본의 수장고를 집어넣은 것이다.

지금의 플랫폼 기업들은 생태계의 파괴를 더 많은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고 있기도 하다. 공기와 땅과 물이 오염되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그래서 슬퍼야 마땅한 현실이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더 오랫동안 게임 플랫폼의 세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기쁜 현실이 된다.

따라서 디지털 사회를 넘어설 대안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은 곧 자본의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생태계 문제에 관한 관심 없이는 피지털 커먼즈 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피지털 커먼즈는 곧 생태 커먼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피지털 질서는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질서다. 이를 넘어서려면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즉 착취하고 수탈하고 결국 죽이는 질서가 아닌 살리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에 저자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생명 존중 없는 혁신 논리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위태로운 생태 약자들을 중심에 둔 공생기술 전망이 필요하다. 물론 그 시나리오에는 인간 중심의 지구 구출 시나리오를 넘어서 자본주의 현실에서 타자화된 인간 종을 비롯해 동물, 기계종, 돌연변이, 자연사물 모두를 살리는 공생공락의 차이 속 연대가 요구된다.” (377)

 

목초지에 울타리를 세우고, 강에 댐을 만들고,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고 또 자유로운 디지털 세계에 자본주의적 양봉장이 들어설 때, 자율적인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모든 활동이 자본을 위한 노동으로 전락해 생명을 강탈당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디지털 꿀통 걷어차기>

 

피지털 계는 인간의 감각을 바꾸었다. 각종 디지털 기기와 결합한 인간은 감각과 인식의 확장 속에 있다. 관건은 이 확장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객체들과 민주적인 힘을 더욱 확장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피지컬의 한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하는 ‘인간’ 의식 속에 모든 걸 가둬버릴 것인가.

로블록스 플랫폼에서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과연 어떤 확장 속에 있을까. 당연히 후자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의 삶 곳곳에는 늘 우연적인 만남이 존재하고, 그 어떤 척박한 곳에서도 예상치 못한 마주침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칭송하며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에게 그리 많은 여유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심각한 생태 재앙 속에 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디지털 꿀통이 선사하는 일시적인 안락함과 즉각적인 쾌락들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그 꿀통을 미련 없이 걷어차고 성공적으로 걷어치워 버릴 수 있는, “다른 삶과 범 생명 공존의 기획”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방법으로 모두와 함께.


 

피지털커먼즈-보도자료-Y  클릭~!

<에세이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철학을 하는 데 있어 굳이 다른 사상가의 철학을 빌려올 필요가 없다. 내가 네이버 <지식 저술가> 프로젝트에 제출한 ‘에세이 철학’의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를 고려한다면 ‘에세이 철학’은 불교의 선(禪)과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선불교는 잘 알다시피 스님들이 염불하는 법당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죽은 경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에서 불법을 찾는 중국 불교의 새로운 정신이다. 일자무식인 6조 혜능은 홍인 선사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낸다)’란 금강경 강론을 듣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깨달음에는 번거로운 절차도 없고, 온갖 언어 수식도 필요 없다. 오로지 행주좌와 일심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홀연히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자 하는 창조적 정신만이 중요하다. 임제 선사가 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의 정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칼을 든 사무라이와 그 정신이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때 그 어떤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들, 동과 서, 옛날과 지금의 수많은 철학자에 올라타거나 그들의 사상을 빌려오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지금 이 순간'(hic et nunc)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상에서 부닥치는 모든 대상과 경험들을 철학적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비판하고 성찰하면서 철학적 통찰의 깊이를 드러내어 준다. 그러므로 ‘에세이 철학’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선의 정신처럼 모든 권위와 우상의 파괴를 시도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4대 우상, 즉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언어의 우상’ 외에도 ‘권력과 국가의 우상’ 등 일체의 권위와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모든 가치를 부정한 니체의 ‘망치의 철학’을 구현하고자 할 뿐 실체화되고 화석화된 이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저 너머의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추상개념들의 몰 주체성도 비판한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과 ‘선불교’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불립문자를 추구하는 선은 언어의 끝, 문자의 종언을 주장하는 데 반해, ‘에세이 철학’은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에세이 철학’을 굳이 선으로 표현한다면 ‘문자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21세기에 부활한 선불교의 변형된 형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자는 어떤 경우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문자를 버린다면 문자가 부재하는 그 세계는 이 세계가 아니고 이 세계와 무관한 세계이다. 이 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이 소수에게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이 세계의 다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의 궁극 목적[상구보리(上求菩提)]은 이 세상과 나누기 위함이고[하화중생(下化衆生)],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함(마르크스)이다. 이러한 정신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깨달은 이, 모든 인텔리겐차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밖으로 나가 빛을 본 계몽된 인텔리겐차는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동굴 속으로 귀환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선의 문자화, 선의 일상화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진리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가장 현실적인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에세이 철학은 그동안 이 땅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추구해 마지아니했으나 누구도 시도치 못한 ‘우리 철학’의 방법론이자 그 철학 자체이다. 지금까지 ‘우리 철학’을 모색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내 걸었으나 문전에서 머뭇거렸을 뿐 누구도 그것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칸트식의 물음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내가 수영을 할 수 있는가나 내가 말을 탈 수 있는가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백날 던져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속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면서 배우는 것이고, 말 등에 올라탔을 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명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다 보니 그간 ‘우리 철학’을 그렇게 탐구했으면서도 누구도 그런 작업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은 우리의 시대, 우리의 삶을 대상으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사유를 가지고 표현하고자 한 우리의 철학이다. 더 이상 그것 바깥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 자체를 사유하고 통찰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 철학은 ‘타자의 철학’이 아니라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우리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이종철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4월 월례발표회 영상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4월 월례발표회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1부에서는 2021년 2월부터 6월까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들’ 1]이라는 기획주제 아래 총 5번의 월례발표를 기획하였고 이번 4월이 세 번째 발표입니다.

 

기획 : 인민주권과 민주주의의 가능성

주제 :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발표자 : 한상원(충북대학교)

토론자 : 한길석(중부대학교)

일시 : 2021년 4월 29일(목) 오후 4시 – 6시

장소: 온라인 줌 회의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5X84rqeDiTI

가족 같은 세상 [내가 읽는 『자본론』]

가족 같은 세상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 이 글은 2021년 1월 초,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즈음하여 작성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가족을 참 좋아한다. ‘가족 같은 회사’, ‘가족 같은 분위기’, ‘한 국가를 살아가는 가족’ 등 가족이라는 단어를 어디에나 다 가져다 붙인다. 보통 가족을 이런 용법으로 사용할 때에 가족은 좋은 의미로 쓰인다. ‘가족 같은~’이라는 표현에서 가족은 화목하고 포근한 공간, 안전하고 끈끈한 집단(공동체)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가족이라는 수식어가 가지고 있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성격부터가 문제이지만, 이 글에서는 가족이라는 수식어로 은폐하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계약관계, 그리고 그 계약관계가 가지는 허구의 공정성에 집중해보자.

한때 대한민국 굴지의 모 대기업에서 국내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홍보 슬로건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 대기업은 해당 슬로건을 통해 좋은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실제로 대한민국 어느 가정을 보더라도 해당 기업의 제품 하나 이상은 찾아볼 수 있으니 이 기업은 대한민국에 한정된 또 하나의 가족이긴 하다.

이 기업은 반도체, 전자기기를 주력 상품으로 한다. 해당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직업병으로 죽거나 중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족’을 내걸며 자신을 알리던 이 기업에게 기업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가족이 아니었나 보다. 이 기업은 제품 생산 및 연구 공정과 질병 발병의 연관성을 계속해서 부정해왔다. 결국은 법적으로 산업재해가 인정되었지만 그러함에도 여전히 이 기업은 노동권 보장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개발독재 시대 얘기를 해보자. 대한민국은 독재자 대통령을 아버지[父]로 하는 하나의 가족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각하께선 국부(國父)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1 그러나 아버지는 ‘소자의 아픈 곳’을 외면했다. 수출 실적이 매년 사상 최대치를 찍을 때, 청계천 옆 의류 시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가 폐병에 걸리고 손가락이 잘려가면서도 해고될까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찬 바람 부는 서울 길거리에서는 아버지께 아픈 곳을 고쳐 달라고 하던 한 사람이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겼다.

이번 겨울 여의도의 쌍둥이처럼 생긴 빌딩에 일군의 청소노동자들이 농성 중이다. 농성 중인 노동자들은 외부에서 음식물을 반입하지도 못하고 전기를 사용하지도 못한다. 그 빌딩은 ‘인화(人和)’를 창업정신으로 하는 기업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가장 중시한다는 그 기업은 길게는 십여 년 동안 기업의 상징적 건축물을 관리하던 청소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참고로 그 청소노동자들을 관리하던 용역업체는 해당 기업 오너의 일가이다. ‘진짜’ 가족을 챙겨주느라 창업정신은 잠시 잊었던 것인가.

 

이런 현실에서 왜 노동자들을 가족으로 대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면 세태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속내를 드러낸다. 그들은 ‘다 알면서 그런 것 아니냐’, ‘근로계약서에 서명한 건 노동자 자신이지 않냐’, ‘자유롭게 계약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결국 ‘가족 같은 회사’나 ‘가족 같은 국가’는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 먹고 살자는 말로 자본가들은 자본을 불리기 위해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고,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다. 계약은 여기서 성립한다. 임금과 노동력이 교환되면서 양측은 각자의 필요를 충족한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고용하는 사람들과 계약을 맺을 때, 그것은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였을까? 만약 정말 그 계약이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였다면 왜 우리 사회는 ‘가족 같은 회사’, ‘가족 같은 국가’라는 수식어로 그 계약을 은폐해왔단 말인가. 왜 노동자들은 일하다 죽고 다쳐도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고 살아야 하는가. 왜 자본이 부당하게 계약을 파기하여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차디찬 겨울 음식물과 전기 공급이 끊긴 곳에 버려져 있어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했을 때의 계약은 그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처분한다는 사실을 이를테면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증명한 것이었다. 거래가 완결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자유로운 행위자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 그가 자유롭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은 그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판매해야만 하는 기간이라는 것, 사실상 흡혈귀는 착취할 수 있는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그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폭로된다.”2

 

이 문장은 비유적 서술이 아니다. 실제로 근대 유럽에서 노동자들은 근육, 힘줄, 피 한 방울까지도 자본, 그리고 자본과 결탁한 국가를 위해 쥐어 짜내야 했다. 그리고 또 대한민국에서도 노동자들은 그래야만 했다. 가족이라는 화목하고 포근한 이름 아래에서 이 착취는 ‘고귀한 희생’으로 세탁되었다. 시간이 흘러 기업이 말해온 가족이라는 개념의 허울뿐인 명분이 조금이나마 벗겨졌지만,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착취는 다시 ‘자유롭고 공정한 계약’이라는 하얀 가면을 쓰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제10장 노동일 파트에서 수많은 노동 착취 사례들을 서술한다. 이 사례들을 보면 당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갉아먹는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이를 막기 위한 제도적이고 법적인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항상 자본가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당연히 자본가들은 그 구멍을 점차 넓혀가며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그 구멍은 노동자들을 병들고 죽어가도록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렇고 유럽에서도 그렇고 세계 어디를 가봐도 “자본은 사회에 의해서 강제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3 북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대기업들이 대한민국 시장에 진출하면 처음에는 본국에서 노동자들을 대하듯이 대한민국에서도 기업을 경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헬적화’4 된다고 하지 않던가. 『자본론』 1권 제10장에 실린 수많은 사례와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서 우리가 목격한 사례는 자본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갑자기 최근에 국회 문턱을 넘어선 법 하나가 생각난다. 본래 이름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었지만 국회를 지나면서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이름이 바뀐 그 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산업안전보건법 등 기존 산업재해에 관련된 법의 허술함으로 인해 노동자가 죽고 중상을 입는 등 중대한 산업재해가 계속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이 추진되었던 법이다. 본래 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예방과 관리 책임이 있는 주체를 처벌하는 법안으로, 높은 수준의 벌금과 징역형을 통해 재해 예방 책임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내버려 두지 못하도록 경각심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 해 수백 수천 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나라에서 꼭 필요한 법이었다.

일하다 죽는 노동자가 없는 사회를 위해 나는 지난 10여 주 동안 아침마다 (가끔은 저녁에도) 길거리로 나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케팅을 거의 매일 했다. 그동안 여러 의제로 피케팅도 해보고 서명운동도 해보았었다. 그런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만큼 큰 호응을 얻은 일은 없었다. 전철역에서 피케팅을 할 때 보통은 피케팅을 하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역무원들도 ‘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보면 오히려 응원을 해주고 가셨다. 길을 가던 시민이 음료수나 귤을 주시기도 했다. 사람 목숨은 소중하니까, 뭐든 간에 사람을 살리려는 이 법안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나.

이런 시민, 노동자들의 여론에 떠밀려 요지부동이던 정부 여당을 포함한 거대 보수 양당도 진보정당에서 최초로 의제화한 이 법안 제정에 참여하였다. 결국, 법안은 통과되었다. 다만 정부와 여당, 제1보수야당이 협의한 끝에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이름의 누더기가 된 채로 말이다. 10여 주 간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나마 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기엔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기업’이 빠진 ‘중대재해처벌법’은 다섯 명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엔 적용되지 않고, 쉰 명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에는 수년 뒤에나 적용된다. 벌금 하한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법안 수정을 적극적으로 이끈 집권 여당은 정책위원회 명의의 홍보물에서 “법안의 미비한 부분에 대한 보완과 개선을 계속해 나갈 것임을 약속”5했다. 본인들도 미비한 법안임을 잘 알고 있다. 보통 법은 예측되는 미비한 부분을 모두 보완한 뒤 제정하고, 시행 중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문제점을 개정하는 식으로 고쳐진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5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 사업장 중 반을 넘는 게 현실이다. 이제 기업들은 5명 미만으로 따로 하청을 줘서 노동자들을 분리 고용하는 ‘합법적인 꼼수’를 쓸 것은 뻔하다. 만약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처벌과 마찬가지로 법원이 수백만 원 단위의 벌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달라진 게 뭘까. 여전히 노동자의 목숨값은 수백만 원이고, 이 미비한 법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너무나 많으며,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가족 같은 국가’의 ‘가족’에 노동자는 없는 것이 맞다. 그 가족 구성원에는 돈 많은 사람, 중대한 산업재해가 자주 발생하지 않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기업가들만 있나 보다.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서 한 해 2,000명 가까이 되는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대한민국이다. 죽음으로 내몰릴 이유가 없던 사람들이다. 죽을 이유가 없고 죽음에 이르지 않을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뒀다면 그것이 노동자들을 일부러 죽인 일과 무엇이 다른가.

 

2주 전쯤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어떤 노년의 여성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전태일을 왜 기념하는지 몰라. 그냥 일하기 싫어서 떼쓰던 사람인데 말이야. 예전에는 나라가 가난해서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어. 내가 해외에 물건 수출하던 기업 운영했던 사람인데 말이야…” 물론 전태일은 ‘일하기 싫어서 떼쓰던 사람’이 아니다. 기업이 해외에 수출할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안 그래도 좁은 공장에 널빤지로 칸칸이 쪼개어 환기도 안 되는 곳에 밀어 넣어진 여공들이 폐병으로 죽어가던 현실에서, 그들이 먹고 살아갈 방법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사람이 전태일이다. ‘가족’들이 아프니까 ‘아버지’였던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편지도 써봤다. 그러나 노동자 전태일의 말을 들어주는 권력자, 자본가는 없었다. 전태일은 아무도 듣지 않는 목소리를 더 크게 내야 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외치기 위해, 그래서 분신을 선택했다.

『자본론』에는 ‘워클리’라는 소녀의 죽음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워클리는 환기가 안 되는 밀폐된 공간에 수십 명의 소녀와 갇힌 채 일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죽음은 밀폐된 공간에서의 초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엔 화력발전소에서 탄가루가 수북이 쌓인 채 혼자서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다가 목이 잘려 죽은 청년이 있다. 그 죽음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 청년의 어머니가 단식 투쟁으로 이뤄내고자 했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누더기가 되어 중대재해처벌법이 되었다.

마르크스의 책에서 고발하는 사례들은 문자로 박제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바로 여기,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유예되고 제외된 사람들이 진정 우리 사회의 가족이었을까. 아니면 공정한 계약의 당사자였을까. 그보단 예전 신분 사회 때 하나의 화목한 가족을 지탱하는 데에 필요했던 수많은 노예에 가깝지 않을까. 신분제도는 철폐된 지 오래고, 계급론은 철 지난 구닥다리 이론이라지만 오히려 현실은 ‘책으로만 내려 전해지던 옛날이야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정말 가족 같은 세상이다.


  1. 월간조선, 『(사료)해방40년』(월간조선 1985년 신년호 별책부록), 조선일보사, 1985, “박정희 대통령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전태일의 편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항목 (검색일: 2021. 01. 29)에서 재인용,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20308&tabId=01&levelId=hm_160_0020>

  2.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Ⅰ-上』,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410~411쪽.

  3.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Ⅰ-上』,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365쪽.

  4. 대한민국 사회를 자조적으로 비하하는 표현인 ‘Hell(지옥)조선’에 ‘최적화’라는 단어를 합쳐 만든 신조어이다. 대한민국 밖에서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대한민국 안으로 들어오자 대한민국 수준으로 망가졌다고 평가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5.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1월 8일 본회의 ‘중대재해처벌법’ 법안통과!”(2021.01.08 18:46:46) 웹포스터 홍보물 문구 중 인용, <https://theminjoo.kr/board/view/policyreference/396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