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시대와철학의 old&goodys

우리에게 ‘철학함’이란 무엇인가?[3월 월례발표회]

?[2013년 3월 월례발표회]

 

우리에게 ‘철학함’이란 무엇인가?

후기: 박영균 (건국대 HK 연구교수)

 

 

 

윤구병 선생의 <철학을 다시 쓴다> 강연을 들은 후 …

 

2013년 3월 8일 오후 5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에서는 <철학을 다시 쓴다>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열렸다. 이번 강연회는 윤구병 선생이 지난 2월 12일 보리출판사에서 출판한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라는 책에 담긴 그의 사유를 함께 나누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그의 책, <철학을 다시 쓴다>는 <시대와 철학>에 연재되었던 “있음과 없음에 관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 <있음과 없음>이라는 책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윤구병 선생은 한철연의 역사이기도 하다. 1987년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이고자 했던 젊은 소장 철학자들이 모여 보수철학계에 반기를 들고 한철연의 창립을 모색하던 시절, 그 주춧돌이었을 뿐만 아니라 1989년 한철연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그 후로 장시간 단독대표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당시, 청춘의 열정 속에서 반역의 철학을 꿈꾸었던 선배들도 이제는 머리 희끗한 장년이 되었으며 한철연의 회원들도 ‘출애굽세대들’로 채워졌다. 그것이 역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당에는 삼삼오오 모여든 40-50여 명의 청중들이 강연을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는 보리출판사 관계자들과 선생을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연탁자 위엔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었고 윤구병 선생은 탁자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칠판 위에 ‘時空間 四次元 連續體의 存在論的 根據’라고 썼다. 순간적으로 ‘뭐지?’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어 선생은 이렇게 써야 사람들은 유식한 철학논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우리말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수입된 언어라고 말을 하면서 다시 지웠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

우리말로 하는 철학, 그것은 윤구병 선생이 평소에 추구해왔던 길이기도 했다. 그는 ‘서양고대의 존재론’에 대한 탐색을 우리말 속에서의 사유하는 존재론으로 바꾸어놓았다. 존재와 무 대신에 ‘있음’과 ‘없음’의 철학을 사유하는 것도 모두다 이 때문이다. 우리는 평상시에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와 같은 말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있음은 있음이고 없음은 없음’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으로부터 운동과 생성, 그리고 ‘함’과 ‘됨’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참이며 ‘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거짓이다. 마찬가지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좋은 것이며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을 때’ 그것은 나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식민지 지식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로서,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을 가려낼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일깨울 수 있고, 거짓에 맞서 좋은 앞날을 가꿀 올곧은 뜻을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한철연의 정신 또한 이로부터 출발했었다. <시대와 철학> 두 번째 창간호에서 한철연은 “현실로부터 출발하되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 초월적인 선천적인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독백이나 철학자들끼리의 속삭임, … 외국에서 차용”하기만 하는 반시대적이고 현학적인 철학들을 비판하면서 “주체적 철학”의 길을 주창했다. ‘주체적 철학’은 근원적 실천이자 생산자적 철학이며 비판적 철학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보적 핵심을 포착해 내고 이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시대에 되돌려줌”의 철학이다.

그 선언이 있은 이후, 벌써 20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 동안 우리는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경험했으며 위로부터 진행된 수동혁명으로서 ‘포스트 87년 체제’와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맑스주의’, ‘포스트 구조주의’를 거쳐 다시 2013년 현재 1972년 ‘유신’의 퍼스트레이디가 또 다시 대통령이 된 2013년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한철연은 무엇을 했는가? 돌이켜 보면 한철연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신에 한철연은, 그 운동을 가능케 했던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으로 철학함의 의미를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윤구병 선생의 이번 강연과 2월에 있었던 이규성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사론> 강연은 바로 이런 ‘한국에서의 철학함’의 의미를 2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되살리는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1994년 내가 처음 낙성대역에 있었던 한철연의 문을 두드렸을 때, 비좁고 초라해보였던 한철연은 철학적 사유함을 추동하는 열정과 낭만, 분노와 깨워있음이 있었다. 그 때 우린 분노의 술잔과 탄식의 넋두리 없이 철학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때 시대모순에 저항하는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이라는 모토와 함께 ‘한국에서의 철학함’이라는 ‘주체적 철학함’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 이후, 한철연에서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도, ‘한국에서의 철학함’도 한철연의 기조가 되지는 못했다. 철학을 다시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은 ‘없어야 할 것들이 있음’에 대한 분노와 ‘있어야 할 것들이 없음’에 대한 탄식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간 우리는 밀려들어오는 서양철학과 옥죄여오는 현실 속에서 ‘있음’을 사유하고 ‘없음’의 부정적 몸짓이 가지고 있는 ‘일깨움’의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그 속에서 ‘없어야 할 것’과 ‘있어야 할 것’들, 그리고 ‘함’과 ‘됨’을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강연을 통해서 다시 부여잡아야 할 화두는 ‘한국에서의 철학함’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탄생했던 많은 진보학계들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늘날 명맥을 유지하기도 버거워하고 있다. 그들은 한철연보다 먼저 ‘비상’했으며 먼저 ‘추락’했다. 그러나 한철연은 가장 늦게 날개를 폈으나 아직도 그 날개짓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을 지나 어두운 ‘밤’을, 그것도 동 트기 직전에 가장 어두운 칠흑의 밤을 잠 못 든 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다시 ‘한국에서 철학함’을 보았다. 한철연의 20년 역사만큼이나 긴 시간이 흘러 이번에 우리는 다시 이규성 선생을 통해서 ‘시대모순’과 싸워야 했던 ‘한국현대철학의 사상사적 고뇌’를, 그리고 윤구병 선생을 통해서 서구의 존재론이 한국적 사유의 독특함과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주체적 철학함’의 열정과 길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1980년대 중반 한철연이 시작했을 때와는 다른 시작이며 다르게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그 다른 시작을 알리는 것은 ‘한국에서 철학함’이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그것을 오늘에 되살린 그들이 아니라 동일한 짐을 지고 있으나 그들과 다른 철학과 경험 속에서 살아왔던 한철연의 ‘동학들’이다. 거기에는 ‘하나(있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없음’에 빠져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디우가 말했듯이 ‘철학’은 항상 소피스트나 라캉과 같은 ‘반철학’과 함께 해야 한다. 왜냐 하면 다수만이 생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에 대해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단지 선언할 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 ‘선언’과 함께 이 새로운 시작을 사유해야 한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

이규성 교수의 『한국현대철학사론』출판 기념 좌담회를 보고[2월 월례발표회]

?[2013년 2월 월례발표회]

 

이규성 교수의 『한국현대철학사론』출판 기념 좌담회를 보고

후기: 김정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월 16일 저녁 이화여대 이규성 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최근 나온 『한국현대철학사론』의 출간기념 좌담회였다. 좌담회는 이름처럼 이병창 교수의 진행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필자 역시 전공이 한국철학이지만 좌담회의 주제는 낯설었다. 당연했다. 필자의 관심사는 주로 주자학과 조선에 머물러 있었고, 기존에 기술된 한국철학사 역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함께 더 이상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 싶어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분야였다.

이규성 교수의 문제제기는 너무나 명확했다. “한국 근현대에도 철학이 있었는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의 철학사는 보통 19세기 말에서 끝나고 만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와 침탈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형태의 연구’의 모습으로 남아있지는 않아도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이 어떤 사유도 전개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 흔적은 남아있을 것이다. 학계는 이러한 문제점을 항상 안고 있었음에도, 일부 연구들을 제외하고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저작이 거의 없었다. 사유의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되지 않으면 단절되고 만다. 이 단절은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끊어짐을 의미한다. 책은 이러한 사유의 단절된 공간을 채워줄 의미 있는 방대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강의에 귀를 기울이며 가장 먼저 들었던 느낌은 인물들에 대한 낯설음이었다. 상대적으로 익히 들어보았던 박종홍과 함석헌도 있었지만, 이돈화, 김원주, 신남철, 박치우 등의 인물들은 관련 시대의 전공자들이 아니면 자주 접하기 어려웠던 인물들이다.

 

이교수가 ‘관점’이라는 제목으로 좌담회에서 발표한 글은 19세기 말 이후 대내외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당시는 안으로는 노론 중심의 부패 무능한 지배집단과 민중의 불평등한 분열이 첨예화되었고, 밖으로는 중국의 아편전쟁이 보여주듯 제국주의 열강의 군사적 자본주의가 가하는 위협이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정치체제와 경제제도에 대한 고민과 군사적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1운동,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제기되었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사진: 강지은 정보자료부장

여기에서 나아갈 수 있는 철학적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관점은 자유민주주의와 과학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대유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적 해명을 통해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이상은 우주와 인생의 연관성을 사유하는 우주론적 인생관과도 결합할 수 있다.

둘째는 고상한 낭만주의적 경향이다. 19세기 말 유럽과 1920년대 한국의 개인주의 미학사조에서 보이듯, 감각적 표면 인상에 집착하는 미적 유아론으로 발전되어 갔다. 인상주의적 낭만주의는 모든 억압적 제도로부터 탈출극에 집착하는 무정부주의적이고 퇴폐적인 허무주의로 발전해 나아간다. 권력의 심리적 원천이 되는 책임성으로부터의 탈출은 낭만주의의 독특한 비애감과 결합하여 개체적 자아에 몰입하는 인격형성을 촉진하였다.

셋째는 급진주의이다. 한국의 급진주의는 신남철과 박치우에게서 나타나듯 인간성의 문화적 향상과 민주와 자주의 제도적 실현을 종합적으로 구성하려는 건국방략을 추구했다. 이는 자기변형과 사회변형을 지향하는 맹자적 내외합일적 의지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신칸트주의의 <파우스트적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인간적 완성을 지향하는 부정과 형성의 의비를 알려주었지만, 한국의 급진주의는 잠시의 수동적 타협을 허용할 수 있는 변증법적 종합보다는 부단한 능동성에 의거한 부정을 말하는 파우스트적 정신에 더 매료된다.

러셀은 과학적 세계상과 우주적 연대성[노장(老莊)사상과 유럽의 신비주의]의 결합을 통해 ‘어른스러운’ 인격을 함양하는 것을 ‘유치한’ 유럽인의 삶의 양식을 개선하는 길로 줄곧 주장했다. 이교수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송대 유학자인 주희(朱熹)의 체용(體用) 개념을 빌려 진정한 철학이란 무엇인지 정의한다. 진정한 철학은 자기변형을 통한 전인적 인간성의 형성을 체(體)로 하고 사회이상을 향한 제도적 구성을 용(用)으로 하는 세계상을 지향한다. 주희는 스승인 이연평(李延平)이 우주적 평등성(同)에 몰입하여 사물의 다양성(異)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자, 점차 용(用)의 영역에 관심을 두면서 유체유용(有體有用)의 세계를 지향한다. 여기에서 우주적 평등성은 곧 모든 사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체(體)의 측면을, 사물의 다양성은 용(用)의 측면을 말한다. 다만 주희는 춘추사관과 중화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주희의 유체유용의 정신에 대해 이 교수는 오늘의 급진주의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교수는 바로 이러한 유체유용의 정신을 20세기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해낸다. 신남철과 박치우, 박종홍과 함석헌은 물론이고, 신채호와 박은식 역시 마찬가지다. 신채호의 경우, 대종교가 중시한 독립적 자아관을 대승불교를 통해 발전시켜 우주의 무수한 사물들과 자아의 평등성을 체화한 원융한 자유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평등으로 이해하는 혁명적 실천을 통해 해방 한국의 건국방략을 모색했다.

이러한 유체유용의 관점은 한국 현대철학을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적 기준이 될 수 있다. 유체유용의 내외합일적 관점은 현대적 맥락에서 과학과 형이상학의 접점을 찾는 노력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주와의 연관에서 지고의 자유를 추구하는 의지를 체로 하고 유아론적 경험주의를 넘어서 사회변형을 도모하는 의지를 용으로 하는 의지의 철학을 형성하려 할 것이다. 이 ‘관점’은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존재의미를 추구한다.

단순히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을 재단하여 연대순으로 배열하는 데 급급한 기존의 사상사 저작들에 비해, 철학현대의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을 분석해내면서 유체유용이라는 공통된 정신을 발견하고, 이를 기준으로 21세기의 철학이 나아가야할 지평을 제시했다는 점은 <현대철학사상사론>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것은 첫걸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 저작을 시발점으로 다양한 ‘관점’이 나타나고 공유되어야만 한다. 물론 의문이 남는 부분도 있다. 이교수가 제시한 ‘유체유용’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서구에서 말하는 과학과 정신의 결합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혹 그 이상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 여부는 여전히 궁금한 부분이다. 좌담회의 시간이 짧고, 필자의 이해가 부족하여 발생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찬찬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팔자걸음 고치는 법, 걸어야 한다![철학자의 서재]

에스트라 테일러가 엮은 <불온한 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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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아(부산대학교 비정규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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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함께 걷고 쓴다는 것

 

지독시리 걷고 또 걷는 한 친구는 ‘엉덩이로’ 글을 쓰겠다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내보였고,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했던 것으로 보이는 또 한 친구는 ‘발로’ 글을 쓰겠다며 자신의 의지를 굳히는 말을 했다. 그들의 각오와 다짐이, ‘발’과 ‘엉덩이’ 또는 ‘길’과 ‘방’ 사이에서 한참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면서도 질책한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자리’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미 공유하고 있었고, 각기 자신의 색깔로 도구로 자신의 생활 방식과 공부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한다.

지난 2월 2일 부산 중앙동에 있는 ‘모퉁이 극장‘에서 니시야마 유지의 <철학에의 권리> 다큐멘터리 상영과 ‘문턱 없는 지식의 실험장’ 토론회가 있었다(☞바로 가기). 니시야마 유지와 함께 그 자리를 마련한 것은 ‘연구 모임 aff-com’이었고, 토론자는 ‘공간초록‘에서 활동하는 ‘연구 모임 비판과 상상력’의 이수경과 나, 부산과 광주를 오가며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기채생 감독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엉덩이로 글을 쓰는 일과 발로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친구들의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푹 하고 웃었는데 그건 말 그대로 그 부위로 글을 쓰는 친구들의 모습이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있으니 마음이 묵직했는데, 그건 그런 다짐을 하기까지 그들이 겪었을 일들과 고민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설렘이 무색할 정도로 앞으로 그들이 겪고 감당해야 할 노고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손’으로만 하던 일을 ‘엉덩이’나 ‘발’로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 고단함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이에 더해 손을 쓸 수 있는데 의식적으로 엉덩이나 발을 사용하는 것도 상상해보라. 손을 쓰고 싶은 유혹, 편한 대로 하고 싶은 유혹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표현이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참 힘든, 몸을 바꾸는 일. 대학의 공부방에 틀어박혀 오로지 자신의 전공 공부에만 급급해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닫힌 몸을, 가지각색의 경험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내뱉는 몸들을 향해 여는 일. 그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며 홀로 있던 몸이, 성가시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몸들 사이로 들어가 서로 부딪히고 섞이는 일. 그와 더불어 쓴다는 것은 그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았다’는 사실 자체에서 이미 상처받은 채로(그리고 어쩌면 그와 동시에 상처주면서) 함께-있고 또 함께-걷는 그 고단한 과정을 기록하는 일. 그날 내가 친구들의 말을 통해 공유한다고 생각한 것은 이러한 몸의 변화, 함께 걷고 쓰는 몸으로의 변화를 향한 욕망(또는 두려움)이다.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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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 이후 펴냄). ⓒ이후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찾다가 근처에 꽂혀 있던 이 책 <불온한 산책자>(에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 이후 펴냄)를 펼치게 되었고 결국 찾던 책 말고 이 책을 빌렸다. 제목에 혹했던 것도 같은데, 결정적으로 1년 전쯤에 (아마도)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기획한 강연 중에 조현준의 <젠더 트러블>(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 대한 강연이 있었는데, 그 강연에서 봤던 영상이 기억나서 빌렸다(☞바로 보기).

그리고 <철학에의 권리> 상영과 토론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도 이 책을 빌리는 데 한몫했다. 이 책은 제목(원제는 Examined Life : Excursions with Comtemporary Thinkers)에서 알 수 있듯이 8명의 철학자들과 산책하며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며, 그 산책을 담은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도 있다. 감독인 애스트라 테일러가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눈 철학자들(주제)은 코넬 웨스트(진리), 아비탈 로넬(의미), 피터 싱어(윤리), 콰메 앤서니 아피아(세계시민주의), 마사 누스바움(정의), 마이클 하트(혁명), 슬라보예 지젝(생태),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상호 의존)인데, 이 글에서 다룰 것은 마지막 장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의 대화뿐이다.

영상을 볼 당시에는 자막이 없어 거의 못 알아들었는데 책장을 펼쳐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의 대화를 읽으니, 그 사이 여러 장소에서 경험했던 것들과 그 경험이 가져다준 고민들이 떠오른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한때 머물렀고 여전히 머물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머물고 싶은 몇몇 장소들이 있다. ‘공간초록’과 ‘생각다방산책극장’과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산대학교 분회’가 그것이다(‘헤세이티’와 ‘모퉁이극장’도 빠뜨릴 수 없다). 장소들마다 만남의 성격도 색깔도 다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갖가지 대화(간단한 소개에서부터 내밀한 고민까지)나, 무언가를 함께 시도하면서 나눈 즐거움과 주고받은 상처와 괴로움이 끊임없이 나와 우리의 자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 고민들 중 하나. ‘철학’은 학교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입 밖으로 꺼내지만, 꺼내자마자 나에게도 뭔가 어색한 말인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무슨 골동품 가게에서 파는 물건인 것처럼 그것을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물을 때면(이런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오늘의 책 제목에 있는 ‘철학이 사라진 시대’라는 말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때때로 “철학이 뭔가요?”라고 웃으며 묻는 이들에게 나는 거의 항상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한다. 속으로 ‘지금 이렇게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인지도’라고 웅얼거리기도 하는데, 가장 골치 아픈 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묻게 되는 다음과 같은 질문. “전공으로 철학을 한다는 건 또 뭔가?” 학교에서 소위 철학 공부한다고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철학(哲學)’이라는 말이 꽤나, 그것을 발음할 때 특히나 더, 과장되어 있다고 예전부터 느꼈는데, 요즘엔 더 그렇다.

또 하나. 이 시대가 또는 우리 사회가 혼자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곳이라는 것을, 무섭지만, 많은 이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한 상식이 통용되는 곳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역시나’ 둘러보니 곳곳에 이곳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이들이 작은 섬들을 만들고 있다. 앞서 말했던 장소들이 그나마 나와 연이 닿은 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함께-사는-방식’을 생활 속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자본이라는 격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고집스레 그리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고, 고립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보이고 손을 내밀며 이 장소들을 지키고 있다.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이 만나면 조화보다는 갈등이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그곳에 오기 전의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던 사람일수록 더 즐겁게 활동하고 더 공고하게 모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뭐 어쨌든 무난하든 곤란하든 이 장소들에서 사람들은 서로 말을 나누는 방법을,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삶을 나누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그런데 그 어느 장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학교에서 사람들이 생활하고 말하고 만나는 방식을 살펴보니 이곳만큼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곳이 없다. 말을 하는데 말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적고, 인간을 고립시키는 사회 구조를 비판해서 그런지 자기 자신을 여는 방법은 전혀 모르거나 열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고, 삶이 아니라 살아남음만이 남아 있는 시대를 한탄하며 문을 잠그고 그나마 이곳에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 생산한다. 사는 곳과 사람은 닮는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 그런지 더 가혹하게 말하게 된다.

나는 대략 15년 동안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비정규교수노조 천막 농성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발이 아파 병원에 가니 신경이 눌렸단다. 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데 의사가 결정적으로 걸음걸이를 바꾸도록 노력하란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의식하지 않아도 발 바깥쪽이 아프니 힘이 저절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근데 좀 나아지니 걸음걸이는 원래대로 돌아가고, 그렇게 걸으니 또 아파서 요새는 열심히 안짱걸음으로 걸으려고 노력한다(15년 간 안짱걸음으로만 걸었으면 팔자로 걷는 연습을 해야 됐을까?). 아픈 것도 싫지만 걷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도, 아파서 다리를 저는 것만큼이나 괴롭고 귀찮다. 어쩌겠는가. 걷고 싶으면 괴로워도 다시 배우는 방법밖에 없다.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걷기 위한 조건

 

“나는 걸으며 지나치는 모든 것을 즐깁니다.” (314쪽)

수나우라가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움직이는 데서, 움직이면서 느낄 수 있는 변화들에서, 그 변화들이 주는 앎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게 누리는 모든 것들이, 무엇보다 그 움직임 자체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 자족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는 게 두 사람의 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움직일 때 외부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려면 특정한 종류의 표면과 신발, 날씨가 필요하죠. 심지어는 내면적으로도 특정한 방식의 보행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보행력은 우리 안에서 충분히 작동할 수도,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315쪽)

수나우라의 말에 보태어 그는 우리 내부의 보행력마저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적이라고, 자족적인 몸이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함께 있고, 함께 걸을 수밖에 없는데, 희한하게도 이 사회는 혼자 살아남으라고 윽박질하니 어찌 견뎌낼 거냐고, 거기서 버텨내기 힘드니 이런 곳을 만드는 것 아니겠냐고, 아까 말했던 장소들 중에 한 곳에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이런 장소들을 ‘피난처’로 여기고, 누군가는 ‘진지’로 여기는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특정한 목적 또는 정체성을 정하고 그에 맞게 움직이는 것보다도 우선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남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일들을 감당하고 즐기면서 서로의 생각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이게 가능해야 사람들도 다시 모이는데, 참 어려운 문제다. 모여야 방법도 익히는데, 모이려면 이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수나우라가 지적한 장애인 공동체딜레마와 유사하다. 우선 사회에 들어갈 수 있어야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 커브컷(훨체어 사용자를 위해 인도와 도로에 설치된 장치)이 대부분의 장소에 있어서 움직일 수 있는 등의 “물리적 접근성”에 대한 요구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도 줄어들어 “사회적 접근성과 수용성”도 높아질 것인데, 사회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다. 수나우라의 지적에 응수하며 버틀러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접근성이 보장된 다음에야 효과적인 주장도 할 수 있다.” (319쪽)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걷기 위한 조건을 갖춘 장소를 만들기를 바란다면, 괴로움을 감당하며 모일 수밖에 없고 오류를 반복하며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과 현실

 

부산에 있는 이 장소들은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만날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함께 있는 법을 배우기 힘든 사회에서 나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생겨났다. 이런 활동을 누군가는 제도의 바깥으로 나간다고 표현하지만, ‘공간초록’에서 만난 J가 항상 지적하듯이, 소위 안과 바깥은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또는 몸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방식에 따라 삽시간에 그곳은 안이 되기도 밖이 되기도 한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장소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타협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대로 머물러 있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피폐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피로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거나 ‘우리와 안 맞으니까 또는 우리는 여력이 없으니까 그들은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몸짓과 주장이 대표적인 것이다.

어떤 몸이 ‘우리에게 맞지 않게’ 움직인다고 내치는 일은, 그곳이 제도 안이든 밖이든 보수적이라고 내보이는 곳이든 진보적이라고 내보이는 곳이든,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것 같다. 특히 그 몸이 ‘우리보다 취약할’ 경우 그런 일은 더 쉽게 일어난다. 이런 극단적인 일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일을 함께 시작하고 진행시켜 나갈 때 어긋나는 의견들을 감당하는 일도 쉽지 않다. 아, 만나고 모이는 일을 시작하는 것도 힘들지만, 만들어진 장소를 열고 지키는 일, 즉 함께 걷는 과정은 더욱 힘들다.

버틀러와 수나우라의 대화를 보고 듣고 읽으면서 그 대화에서 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눈에 띈다. 그럴 때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곱씹으며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한걸음 더 밀고 나가는데, 이런 태도도 쉽게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버틀러가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사회적 공간에서 움직이는 일이에요.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움직임, 당신이 살 수 있게 돕고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을 표현하게 하는 그런 움직임 말입니다. 이 사회적, 공적 공간에서 당신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나요? 당신이 안고 있는 사회적 제약은 어느 정도인가요? 낙인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으로 승인된 어떤 움직임 같은 것들, 그러니까 당신의 장애 자체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사회적 제약 같은 것 말입니다.” (320쪽)

수나우라는 질문에 딱 맞는 대답 대신, 카페에서 커피 잔을 입에 물고 테이블로 옮긴 일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일의 어려움은 입으로 잔을 물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입으로 잔을 무는 데서 온다. 그는 그 일이 힘든 이유가 “우리의 움직임에는 규범화된 기준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손은 물건을 주거나 집어 들거나 악수를 하는 데 사용하고 입은 마시거나 입을 맞추거나 이야기하는 데 사용한다고 배웠습니다. 내가 카페에서 커피 잔을 손이 아니라 입으로 옮기게 되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가정을 벗어난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배운 내용을 엉망으로 만드는 거죠. 우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방식에 따라 몸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생각조차 잘하지 않죠.” (321쪽)

다시,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문득 술자리에서 누군가 반쯤은 비꼬듯이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 번역하면 이렇다. 함께 걷는 것은 온갖 어긋남을 수반하는 일이며 어긋남을 수용하기란 불편하고 힘든 일인데, 왜 혼자 걷지 않고 함께 걷는가? 당신도 편해지기를 원하지 않는가, 아니 편해지기 위해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며 뭔가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질문에 답하려고 하는데, 생각하니 질문만 하나 더 늘었다. 어긋나고 부딪히고 내쫓고 내쫓기고 상처받고 상처주면서도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는 바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1)

 

 

부르크하르트가 전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말로는 자못 우울하고 냉소적이다. 아테네 민주정의 몰락과 그리스의 몰락이 함께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그의 시선을 더욱 그럴듯하게 해준다. 사실 부르크하르트는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독보적인 수준의 풍성하고도 세세한 데이터와 통찰력 깊은 해석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유독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 지배자 또는 기득권자들의 입장에 서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역사과정에서 정치적 강자, 사회 기득권자들에 의해 자행된 폭력적 억압과 그 피폐상에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역사 과정에서 가끔 눈에 띄는 민중권력에 의한 집단적 폭력과 그에 따른 혼란상에도 지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요컨대 그는 어떤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서든 반지성적 행태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집단적·정치적 폭력 일체를 혐오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에서 인류의 역사적 가치의 형성 토대를 정치사와 경제사가 아닌 지성사와 예술사를 통해 다시 구축하고자 하는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 이른바 문화사(Kulturgeschichte)의 영역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주의라기보다는 지성주의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고중세사에서는 지성이 오직 귀족들의 역량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는 여전히 보수적 엘리트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주의의 관점에서도 아테네의 민중이, 보통 생각하듯 그저 어리석은 민중에 불과했다는 생각은 매우 섣부른 판단이다. 아마도 그러한 평가는 주로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이 끼친 지대한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단 다수 민중이 정치적 주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적이 2000년 이상의 고·중세를 통해 아테네 민주정을 제외하면 언제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이미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인류 정치사의 위대한 성취이자 기층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준 매우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제로 아테네의 민주정의 초기 성립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비록 겉으로는 왕과 귀족 등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나긴 정치체제의 역사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틈바구니에서 민중 스스로 자신들의 욕구와 권리를 사회적으로 관철해내고자 하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있어왔고 아테네 민주정은 그 결과로서 등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그 일단을 살펴왔지만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특히 그 점에 주목해서 아테네 민주정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갈무리 해보기로 하자. 우선 아테네는 고대 폴리스 성립 이래 다른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왕이 지배하는 왕정(basileia)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동 지방의 왕들처럼 절대적인 권력은 가지지 않았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 중 한 사람이 대표로서 왕의 지위를 가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직접 물레를 돌리거나 농사를 거드는 왕의 모습도 보인다. 그 때문에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이르면 왕정은 귀족들의 집단 정치체제 이른바 귀족정(aristokratia)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전시공동체로서 고대국가의 성격상, 정치적 발언권은 나라를 방어하는 전투 능력 및 기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전투행태 상 중갑 기병(騎兵, hippikos)이 전투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를 하기 위한 기마 및 개인 무장 또한 자비부담에 의존하고 있었던 터라 자연적으로 전장에서도 귀족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 발언권 또한 그들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귀족들만이 비싼 가격의 말(馬)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 식민도시가 증가하고 그에 따른 교역량도 늘어나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부유한 평민이 나타났고 생산량의 증가에 따라 무기의 가격도 싸져서 평민 중에서도 무기를 스스로 조달하여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군의 핵심 전투력 또한 점차 평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갑 보병(hoplit?s), 사각밀집대형(phalanx) 전술로 재편되었다. 이후 그들은 당연한 권리로서 귀족에게 참정권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참정권을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이 충돌하는 일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민계층의 약화는 그대로 나라의 방어력 약화를 의미했고 나라의 위기는 귀족들의 위기와도 직결되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평민의 불만을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원전 621년에 제정된 ‘드라콘(Drakon)의 입법’은 귀족들의 자발적인 정치개혁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간의 평민의 정치적 성장이 가져다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 법률의 핵심은 관습법을 성문화 했다는 데에 있다. 즉 나랏일과 관련한 중요사와 그 결정 과정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대한 진전이었다. 그 때까지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결정 일체를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길 경우 그들이 행한 행태가 폭로되고 실정에 대한 변명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귀족이 결정한 정치적 사안과 법률의 내용이 기록으로 알려짐으로써 평민들도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귀족들도 더 이상 제멋대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평민에게까지 아직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거기서 양자의 조정자로서 등장한 인물이 솔론(Solon)이다. 시민들의 합의로 솔론은 계층 간 이해 조정을 위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594년에 실시된 것이 솔론의 개혁이다. 솔론 개혁안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귀족·평민을 포함한 시민 전체를 재산과 토지의 소유수준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각각의 의무와 권리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갑 기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귀족을 최상급의 시민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아르콘 등의 최고 관직의 임용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중갑 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부유한 평민을 두 번째 등급의 시민으로 규정하여 그 다음 등급의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최소 수준의 무장인 경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세 번째 등급의 시민은 민회나 재판에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아예 어떠한 무장도 갖출 수 없었던 네 번째 등급의 시민들은 아무런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다. 무기의 가격이 싸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무산 시민(th?tes)으로 불리어 졌다. 이와 같이 솔론의 개혁은 토지·재산에 의해서 관직을 정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평민들도 부를 쌓을 경우 최고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곧 금권정(timokratia)의 등장이다. 금권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재산이 좌지우지하는 정치라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 정치발전사의 측면에서 보면 마치 근세 시민사회의 성립이 그렇듯이 귀족들에 의해 독점된 정치 영역에 제한적이나마 평민계층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개혁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솔론 개혁안의 두 번째 핵심은 채무의 소멸과 채무 노예의 방지를 실시한 점에 있다. 솔론은 가난한 평민들의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평민이 빚 때문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또한 평민이 주력이 된 전투력을 보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화폐 경제의 발전에 의해서 평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그러나 그 만큼 몰락하는 평민 또한 늘어나 종국에는 토지를 상실하고 노예로 팔리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일단 빚을 지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토지가 채권자에게 압류되어 수확물의 6분의 1을 채권자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조차 체납되어 종국에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 노예로 팔리는 것이 당시의 관습법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말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채무 노예가 나중 빚을 갚게 되면 인간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빚을 탕감해주는 정책이 평민의 채무노예로의 전락을 막아 국방력을 보전하는 좋은 방책일 수는 있었어도 그 자체로 부유한 귀족들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불만은 날로 켜져 갔고, 다른 한편에선 채무의 소멸 후에 토지를 재분배 받기를 원했던 평민들까지 나름 자신들의 기대에 못 미쳐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난한 평민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평민임에도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참정권에 차별을 두는 것 또한 불만이었고, 급기야는 신체를 저당으로 돈을 빌리는 법마저 금지하는 바람에 당장의 생활이 어려운 무산자들에게도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처럼 솔론의 개혁안은 점차 귀족과 평민 양쪽으로부터 모두 원성과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후 30년간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 간에, 부자와 가난한 자들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이 혼란한 정세를 이용하여 귀족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stos)라는 인물이 나타나 대다수의 가난한 평민들을 등에 업고 기원전 560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권력을 차지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곧 금권정에 종말을 가하고 나타난 참주정(tyrannik?)이다.

참주(tyrannos)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이용하여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독재를 일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이긴 해도 온화한 인품과 노련한 정치술로 솔론의 개혁안을 유연하게 실행으로 옮겨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되 구테타를 피해 망명한 귀족이나 부패한 귀족들의 토지만을 몰수 하였고 그것을 평민들에게 분배하여 수공업의 발전을 꾀했고 해상 무역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참주가 된 장남 히피아스는 사리사욕에 빠진데다가 폭정까지 일삼아 아테네를 큰 혼란에 빠트렸고 결국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s)에 의해 국외로 추방됨으로써 반세기만에 아테네 참주정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 당시 참주 히피아스의 동생 히파르코스를 살해하고 순교한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이후 아테네인들에게 참주정의 폭압성과 자유의 이념을 일깨어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기원전 570-507)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해외로 도피했다가 히피아스를 타도하는데 앞장선 망명귀족으로서 기원전 508년 이른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에 획기적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런데 클레이스테네스는 원래 처음부터 민주정을 지지하거나 민중의 이익을 앞세웠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반대파 귀족을 누르고 히피아스를 타도한 후 귀족정체로의 복귀를 꿈꾸었고 다만 그 과정에서 민중의 힘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혁명과정에서 증폭된 민중의 욕구는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그는 영악하게도 그 욕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새로운 정권의 수립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표징 되는 아테네 민주정의 빛나는 성취 그 이면에는 이렇듯 아테네 민중들의 정치적 자각과 그에 기초한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훗날 아테네의 급진적 민주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는데 그 개혁의 급진성은 무엇보다도 도편추방제(ostrakismos)의 도입과 부족제의 혁명적 재편에서 잘 드러나 있다. 도편 추방제는 참주의 출현을 미리 막기 위해서 그럴만한 우려가 있는 인물을 미리 뽑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였다. 당시에는 아직 종이가 없었던 터라 기와 등 도기 조각에 이름을 써서 투표했는데 6000개 이상의 도편 가운데 가장 많은 표가 나온 인물의 경우 10년 간 추방명령이 내려졌다. 실제로 이 도편추방제에 의해 기원전 462년에는 키몬이, 444년에는 투퀴디데스가, 418년에는 클레온의 후계자이자 민중파 선동정치가였던 휘페르볼로스(Hyperbolos)가 추방당했고 제도수립이래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의 참주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정적을 합법적으로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유능한 정치가가 추방되는 부작용도 야기 시켜 휘페르볼로스 추방 이후 폐지되고 만다.

클레이스테네스의 또 하나의 급진적이고도 혁명적인 개혁은 종래의 귀족의 권력 기반이 되고 있던 낡은 혈연적인 4부족제를 혁파하고 순전히 기계적으로 지역을 열 군데로 갈라 10 부족제로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귀족 원로중심의 아레오파고스회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무산시민을 제외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민회(ekkl?sia)를 구성하고, 민회에 올리는 의안을 미리 토의하기 위해 지역 마다 50명씩, 재임할 수 없는 임기 1년의 위원을 추첨으로 뽑아 500인 평의회(boul?)를 구성하였다. 특히 민회와 평의회 위원은 물론 장군직과 일부 재정관 이외의 아르콘을 포함한 고위 관직까지 추첨으로 선발하였다는 것은 정치가 더 이상 엘리트 귀족들만의 독점영역이 아님을 상징하는 일종의 혁명 선언이었다. 이와 같은 추첨제가 가능했던 것은 아테네의 시민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테네인들 스스로가 정치적인 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왜 처리하는지를 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민의 지혜와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아테네가 시민을 정치 활동에 참여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임할 능력을 갖추지 않은 무산 시민은 여전히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무산 시민까지도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하였다. 그것이 곧 기원전 492년에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때 크게 발흥하여 소아시아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그리스 식민도시를 지배하에 두었는데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식민도시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한데서 비롯되었다. 발칸반도까지 진출을 꿈꾸고 있었던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1세는 그것을 빌미로 아테네에 진군을 명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로 향하는 도중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폭풍우 때문에 300척의 군함만 잃고 제 발로 물러났다가 그로부터 2년 후인 기원전 490년, 국외로 추방된 히피아스의 안내로 군사를 이끌고 바닷길로 다시 아테네를 쳐들어왔다. 이것이 2차 페르시아전쟁이다. 이 때 벌어진 전투가 유명한 마라톤 평야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는 1만명의 중갑 보병의 활약으로 3만명의 페르시아 대군을 대파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침략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전투가 끝난 후 한 명의 전령이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 승전보를 전하고 바로 숨을 거두었는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가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침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0년 후 세 번째 침략이 이루어졌고 그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 역사는 물론 아테네 정치사의 새롭고도 중차대한 전기가 찾아왔다.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그 의의와 한계(2) 다음에 계속)

 

세상 바꿀 청춘에게 ‘구라’ 치지 말자![철학자의 서재]

존 홀러웨이의 <크랙 캐피털리즘>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체제의 균열을 이해하고, 탐구하고, 넓혀 나가기

 

지난 5년의 삶이 너무나도 신산했기 때문인지 좌절감, 상실감, 분노, 환멸, 체념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마음속에서 시커먼 우물이 되어 고여 가는 것 같다. 48퍼센트의 국민들이 지지했던 ‘그’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사실 세계의 지배 권력이 우리들의 삶과 노동과 생각을 움직이는 방식은 달라질 게 없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정계에서 은퇴한 유시민의 다시 회자되는 말처럼 “군부 세력과 피 흘리도록 싸워서 투표권 찾아왔더니 국민들은 그 투표권으로 노태우를 뽑”았는데, 25년이 지나서도 51퍼센트의 사람들은 금방 깨어날 환각제 주사를 다시 맞으려고 했다.

시민과 다중이 활동할 정치 영역의 ‘틈’은 안개 속에 더 가려졌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지만, 여전히 대의 민주제에 대한 의존은 심하고 국민 주권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다. 그렇다. 이 세계의 ‘지배 원리’는 절대로 쉽게 안 변하는데, 사람들의 상상력은 침체되고 행동력은 세월에 못 이겨 쇠락해 간다. ‘멘붕’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 위안이나 새로운 상품이 된 ‘힐링’이 아니라 다시 토론하고 행위하고 연대하는 것임을 어찌 모르랴만, 사람 노릇하려고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도시에서 발버둥 치다 보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존 홀러웨이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대선 이후 나 자신과 진보 진영의 지리멸렬과 무기력함이 혐오스러워질 때쯤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의 저자 존 홀러웨이의 신작, <크랙 캐피털리즘>(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을 꺼내 들었다.

홀러웨이는 지금과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자고 설득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 견고한 자본주의 체제에 끊임없이 ‘균열’을 가하자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신중하면서도 명쾌하며, 토론을 부추기는 그의 이론은 힘차고 논쟁적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강력한 논거들은 학자들의 이론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반자본의 실험, 조직, 행동에서 산출된다. 저자가 말하는 ‘체제의 균열’이다.

홀러웨이가 보는 지금의 세계는 “이 매우 불공정하고 파괴적인 사회 조직의 변화를 상상하는 것보다 인류의 완전한 절멸을 생각하는 것이 더 쉬운 단계에 도달”한 곳이다. 숨 막히는 자본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원한다면 기존의 것을 부수어야 한다. 그 부수는 행위보다 더 평범한 것도, 더 분명한 것도, 더 단순한 것도, 더 어려운 것도 없을 만큼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벽을 그 견고함이나 강력함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위기, 모순, 취약함, 균열에서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그 모순들인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이 여행은 어디로 갈지 잘 알고 있고 손에 지도가 들려 있을 때만 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멈춰 서 있지 않고 그릇된 방향이더라도 계속 걸으면서 질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또한 거의 식별할 수 없을 것 같은 터널 밖의 풍경과 소리를 보다 잘 보고 듣기 위해 우리 안의 공포와 의심을 깨뜨리는 것이다. 매일 떠날 수 있는 이 여행은 “균열들로부터, 갈라진 틈들로부터, 찢어진 곳들로부터, 반란적 부정-과-창조의 공간들로부터, 총체성으로부터가 아니라 특수한 것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동시에 창조하는 존엄의 反-정치

 

그렇다면 그 균열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균열은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다른 유형의 행위를 천명하는, 어떤 공간 혹은 순간의 아주 일상적인 창출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불복종이지 미래를 위한 기투가 아니”며, 우리의 활동과 삶을 자본의 지배에 종속시키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뭔가 다른 것을 할 수 있고 또 할 것이고 할 수 있다”는 현재적인 기획이다. 그래서 그 균열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면서 존재하며 마치 ‘발 빠른 춤’처럼 우리들과 만난다.

그런데 자본에 대항하는 그 기획은 새로운 사회 관계를 창출하고 그 관계망 속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동료애, 존엄, 연정, 사랑, 연대, 우애, 우정, 윤리, 이 모든 이름들은 자본주의의 상품화되고 화폐화된 관계들과 대립”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예상하고 창조하는 것에 기여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들이 어떻게 조직화로 번역되는가인데, 일반적으로 주요한 강조점은 관계의 ‘수평성’이다. 그것은 자신을 타인의 의사 결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수직적 구조와 명령 사슬에 대한 거부이며, 특정한 지도자가 없이 모두가 평등한 기반 위에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평의회 형식의 조직이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 맺음이 실제로는 절대적으로 관철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수평성을 절대적 규칙으로서가 아니라 수직성에 대한 부단한 투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존엄의 반-정치는 이제 ‘자본주의의 사회적 종합’, 즉 “자본주의 사회의 매우 단단한 사회적 응집의 논리”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이나 정의롭지 못한 권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내면화되어 반자본적 활동들 가운데서도 재생산되려고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이다. 그래서 점차 벌어지는 ‘균열’은 자본주의가 규정한 우선적인 가치들의 지배와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라는 권력, 싼 상품의 매력, 화폐의 오만함, 이윤이 남는다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욕망, 가난하면 불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대항 정치는 비국가적이고 틈새적인 지평에서 자유롭게 활동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존엄의 확산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은 도시에서 딱딱한 마음으로 더 많은 지지자를 등록시키는 문제나 설교나 연설의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감화, 모방, 공명 같은 단어들이 주는 느낌을 떠올려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했던 지난날의 ‘투쟁’들이 쇠파이프 대 곤봉, 스크럼 대 방패, 화염병 대 최루탄, 구호 외치기 대 체포의 싸움이었다면, 균열들을 벌려가는 새로운 반란에서는 연극과 시와 춤과 유머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 그런 것들은 과거엔 운동의 도구였지만 이제는 운동 자체의 중심적 요소가 되었다.

“낡은 혁명적 확실성들은 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승리가 필연적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불확실성과 혼돈의 세계에 산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불확실성과 혼돈을 이해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역사에 확실성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균열들의 증식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노동에 대한 행위의 반란

 

먹고살기 위해 타율적으로 수행하는 소외된 노동과, 필요하다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구체적 행위를 향한 노력-저자가 ‘의식적인 삶-활동’이라고 말한 것-사이의 대립은 삶의 지형도를 은폐하는 노동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용 가치와 유용한 사물들을 생산하는 구체 노동과 구별되는, 우리에게 타율적으로 주어진 추상 노동을 뒤흔드는 구체적 행위가 관건이다. 추상 노동 내부에 존재하면서 그것을 넘어 자본주의적 노동 바깥에 서 보는 것이다.

“나는 교사이고 시장에서 팔 노동력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사회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나의 학생을 가르친다. 나는 민간 병원의 간호사이며 내 고용주를 위해 이윤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나의 환자들이 그들 삶의 가장 어려운 어떤 순간들을 살아내도록 도우려 한다. 나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일한다. 하지만 내 손가락이 자유로울 때에는 언제나 오늘밤 밴드에서 기타로 연주할 코드를 연습하느라 바쁘다. 나는 청바지를 만드는 바느질 기계에서 일한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언제나, 나 자신과 나의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방을 만들면서, 딴 곳에 있다. 나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러나 나는 내 공부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그리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것으로 전환시킬 방법을 찾길 원한다.”

우리는 추상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를 만든다. 저자가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이라고 말하는 그 과정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울타리 치고, 노동 착취를 낳고 노동 계급을 형성시켰으며, 자연을 객체로서 구성했으며, 우리가 다른 생각과 ‘딴 짓’을 못하도록 우리의 역량을 외부화해 시민, 정치, 국가라는 총체성의 구조를 창출했다. 또 추상 노동의 지배 과정은 우리의 짧은 인생을 규격화했으며 시간을 동질화시켰으며, 반자본주의 운동의 발목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노동 운동은 추상 노동의 운동으로 전락했다.

저자는 이제 추상 노동에 대적하고 그것을 넘어 구체적인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을 요청한다. 그것은 곧 추상 노동의 위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적대와 갈등과 모순이 미끄러지며 나는 소리들은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못나고 약하고 ‘빽’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벌여내는 ‘행위’의 멜로디가 될 것이다. 이제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존적으로 일어나는 행위와 노동 사이의 더 깊은 갈등이 있다. “이 모순은 살아 있는, 고동치는 사회적 적대이며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항상적이고 필연적인 투쟁이다.” 그 모순의 틈을 벌리는 행위의 연대는 총체성, 종합, 가치를 해체하는 숨어 있는 여성의 움직임이며, 근대적인 시간의 동질화를 해체하여 각자가 누릴 수 있는 각각의 순간을 열어젖힐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만들기를 중지하고 지연시키는 우리의 무기이자 행위의 원리가 존엄이라면,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시간, 관계, 가치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힘은 행위의 힘이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 앞에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을 세우는 것이다.” 거부하고 창조하여 자본주의를 균열시켜라! 이 미쳐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의 작동을 멈추게 만들자!

이 책의 옮긴이인 조정환의 말처럼 국가, 화폐, 자본에 의한 우리 삶의 모든 소외는 삶의 생생한 가치들과 생동력을 추상화시켜서 통제하고 통합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욕망 체계의 산물이다. 이 시대의 ‘꼰대’들이여! ‘멈춰서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속삭이며 역사와 사회에 대한 젊은이의 눈을 가리지 말자. ‘아파야 청춘’이라고 조금만 더 참으면 좋은 세상 올 거라고 ‘구라’치지 말자.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해 당신들의 낡은 가치와 경험으로 함부로 추상화시켜 말하지 말자. 그들은 공동체의 정치와 자신들 삶의 구경꾼이 아니라 각각의 주인공이니까. 우리 시대를 바꾸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일상이 아닌가!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는[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설렘과 기쁨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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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기억은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그 날로 돌아갔다. 할머니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눈은 고통의 기억이었다. 떠돌이 약장수에게 속아 한센인 집단촌으로 갈 때 눈길을 걸어갔던 기억을 고통스럽게 떠 올렸었다. 하지만 꽃이 가득했던 교정과 고향마을은 이제 하얀 눈이 마을을 뒤덮은 설날 아침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설렘과 기쁨 그 자체였다. 대문을 나서면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길가 곳곳에 피어 있었고,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던 것이 꽃과 나무였다. 산속에 버려져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사투를 벌일 때의 나무들은 할머니가 넘어야 했던 장애물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무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던 휴식처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기억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오래된 시간 속의 사물에 대한 기억은 이미지로 남는다. 그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정신 속에 살아남아 기억의 주인과 함께 태어나고 늙어가며 사라져간다. 즉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물이 반복하여 만나고 그 만남이 생의 전환점과 연관되어 있다면 기억은 이중의 잠금장치를 한다. 가장 오래된 기억이 뒤에 만난 기억에 의해 묻혀 잊히게 되는 것이다. 꽃과 나무 그리고 눈은 할머니의 유년기를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들이지만, 그 이후 할머니가 경험한 고통들에 의해 원초적인 기억은 사라졌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할머니를 들뜨고 행복하게 했던 기억들이 발병 후 이어지는 고난 속에서 기억 저 너머로 아득히 사라지고, 행복했던 기억의 자리에는 고통스럽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이별과 회한의 기억들이 자리 잡았다. 그 기억들은 너무나 단단하고 야멸치게 할머니의 삶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고통의 기억들을 걷어내고 행복하고 설레던 그 시절로 할머니는 돌아가고 있었다. 60여 년 동안 열리지 않는 문 안에 유폐되어 있던 그 기억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년기의 기억을 하나하나씩 읊조리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작은 심장박동이 나에게로 옮겨와 나는 온 몸이 떨리는 긴장 속에서 할머니가 읊조리는 시를 받아 적었다.

소록도 설경(출처: 블로그southern-se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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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아침에

 

정월 초하룻날 설날이 되었다

잠에서 눈을 떠

창문을 열고 보니 폭설이 내려서

온 바다를 흰눈이 덮었고

은빛 찬란함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더라.

눈 내리는 날에 가장 좋아하던

우리 집 바둑이는 천지를 돌아다니며

뒹구르며 좋아하며 짖는 그 소리가

노래같이 들리더라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랍더라.

장독 위에는 소복소복 쌓인 눈이

연꽃같이 희고 아름다웠더라

대밭의 댓잎에서는 흰눈이

소복소복 쌓여서 칼끝과 같이

쪼삑쪼삑 하였더라.

소나무에도 많은 눈이 쌓여서

목화같이 보이기도 하고

눈꽃같이도 아름다웠고

좋게 보이더라.

우리 집 지붕 끝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보기에 경치가 좋았더라.

나는 설날의 음식과 떡국으로 차려서

아랫마을의 할머니 집으로

세배를 나섰더니 눈 속에서

길을 몰라 헤맬 때

바둑이가 내 앞에 뛰어와서

길을 인도하였더라.

그 후에 사랑하는 임과 함께

큰 눈덩이를 만들어 굴리고

눈사람을 만들어

머리에는 고깔을 씌우고

임과 둘이서 어깨 손을 얹어

사진을 찍으며 기뻐하였더라.

그리고 눈덩이를 만들어

서로 던지며 때리며 싸움이 벌어져

어린아이 같은 동심으로

돌아갔더라.

넘어지며 엎어지며 미끄러질 때마다

사랑하는 그대의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우리의 정으로 더 깊이 들더라.

팔십 평생을 살아도

눈 나리는 이 날이

잊혀 지지 않고

옛 추억이 그립더라.

눈 나리는 어느 날.

-<눈 내리는 날> 전문-

 

시 <눈 내리는 날>은 할머니의 10번째 시이다. 이 시 속의 바다는 아이를 남겨두고 돌아오면서 자살을 기도하던 예전의 바다 대신 흰 눈이 뒤덮어 은빛으로 빛나는 눈부신 바다이다. “그거는 바다가 아인기라. 얼매나 눈이 왔는지 바다가 안 보이더라” 어린 시절 보았던 눈 온 날 아침의 바다는 할머니에게 은빛으로 빛나는 기억이었다.

오래 전에 마주쳤던 사물은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거나 희미해진 채로 기억된다. 이때의 사물은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이미지로 남게 되는데, 은빛의 바다 이미지는 살아야 할 의미를 상실하고 죽음을 시도했던 바다의 기억을 뭉개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꿈을 키우며 뛰어 놀았던 울산 앞바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실제로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려도 바다를 뒤덮지는 못한다. 바다의 색깔조차 바꾸지 못한다. 어쩌면 할머니가 은빛 바다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백사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나는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할머니의 얼굴에 피어나는 행복감을 논리적이며 건조한 이성의 언어로 파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기억이 있다. 몇 살쯤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었다. 눈길을 걸어 학교 운동장에 갔을 때, 그 곳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바다가 있었다. 나는 그 바다 위를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고, 강아지도 나를 따라 폴짝폴짝 뛰어 다녔다.

아무도 없는 그 곳을 뛰어다니며 강아지와 놀던 어린 나는 마치 그림 속의 풍경처럼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어른이 되고 세상사에 지칠 때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기억 속의 나를 멀리서 바라보며 위안을 받곤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나의 기억을 사실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없고,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없었으며 가족 중 그 누구도 어린 나를 아침 일찍 학교에 가게 내버려둔 적이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이 조목조목 아무리 많은 증거를 들이대며 나의 기억이 거짓이라고 논리적으로 말해도 따뜻하고 포근한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은 숨어 있는 진실처럼 나에게는 비밀스러운 기쁨이 되었다. 할머니의 시를 들으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연꽃같이 희고 아름답게

 

할머니는 오래 전의 눈 내린 날 정경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눈이 내려앉은 대나무 잎, 마치 목화처럼 보이는 눈 쌓인 소나무, 눈이 녹아서 흘러내리다 얼어붙은 처마 끝 고드름까지 그 모든 정경을 마치 오늘 아침에 본 것처럼 이야기했다. “눈이 그렇게 많이 왔는데 설날 세배를 혼자 가셨어요?” “흠흠흠”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어깨를 웅크리며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쪼끔만 기다리면 같이 갈긴데 내가 그냥 나섰제.” “그래서 길을 잃으셨어요?” “뭐 길을 잃었겠노. 눈이 하도 마니 와 놔서 좀 낯설기도 하고 강아지가 하도 날뛰니까 쫓아가다 딴 길로 가기도 하고 그랬제” 말하는 내내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할머니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 <눈 내리는 날>에서 눈에 띠는 것은 마쓰시타와의 추억이었다. 할머니가 시에 묘사하는 눈 오는 날의 정경이나 있었던 일은 분명 마쓰시타를 만나기 이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 가서는 마치 눈이 많이 온 그날 마쓰시타를 만나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함께 만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마쓰시타는 허무와 고통의 얼굴로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쓰시타와의 기억은 언제나 분명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눈 내리는 날의 빛나는 정경과 함께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기억이 포개어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질문했다. “마쓰시타와 눈사람도 만들었어요?” “응, 참 많이 엎어졌다. 그때마다 일으켜 주는 게 좋아서 또 엎어지고 했제”

눈 오는 날 마쓰시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과 마쓰시타와의 기억이 하나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마쓰시타와의 사이에 있었던 아픈 기억이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에 의해 조금씩 덮여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으며 보냈던 유년의 기억들이 발병 후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의해 시간 저 너머에 은폐되어 있다가 조금씩 모습을 내미는 것처럼 고통의 기억들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게 아닐까?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눈 오는 날의 기억은 ‘사랑하는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정으로 더 깊이 들’던 행복의 시간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팔십 평생을 살아도 잊히지 않는 그리운 시간으로 할머니의 사랑은 돌아오고 있었다. 이전에 구술했던 시에서 보였던 고통과 회한의 기억 대신 연꽃같이 희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운지, 앙망, 전땅크…

 

요즘 인터넷 상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말들이다. 이는 극우적 인터넷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이하 일베)’를 중심이 펴져나가는 인터넷 비속어들이다. 일베는 특정인에 대한 악플과 극우적 콘텐츠 생산으로 최근 여러 언론에서도 조명을 받고 있는 화제의 커뮤니티다. 운지는 고 노무현대통령을 죽음을 모TV광고에 빗대 조롱하는 것이며, 앙망은 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사형선고 이후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에 나오는 단어로 이를 고 김대중 전대통령을 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 전땅크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격상시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용어는 50~60대의 보수층이 아닌 10~2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인터넷을 넘어 일상적인 비속어로 자리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커뮤니티의 규모가 커지면서 단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정치인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넘어 독재찬양,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 외국인, 노동에 대한 혐오와 극단적 지역감정을 내보이며 파시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로 여겨지고 개별적 인성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악플의 수준을 넘어 이들이 뉴라이트나 조갑제 등 극우적 인사들의 인식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내용들을 생산하는 사이트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머를 빙자하여 인기를 끌면서 상당한 규모로 성장함에 따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일베저장소 사이트 캡처(http://www.ilbe.com/)

 

10~20대의 보수화는 IMF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이슈였지만 최근 나타나는 이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90년대의 젊은 층의 보수화는 개별적 생존의 문제에서 비롯되어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양상을 뛰었다면, 2010년대의 보수화는 집단적 불안감 속에서 그것이 뭉쳐지고 파괴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민주적 의사과정이나 저항을 경멸하고 강렬한 리더십을 원하는 측면에서 파시즘의 초기 모습과 상당히 닮아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한국사회와 자본주의가 던져주는 무한경쟁과 낙오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이를 제압할 강력한 권위에 대한 추앙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사회계약론이 자연상태나 전쟁상태에 대한 불안감을 기초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근대사회계약론의 모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자연상태와 주권에 대한 해석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연상태가 전쟁상태를 유발할 수 있고 이를 방지하기위해 초월적 권력을 만들어야한다는 점은 홉스, 로크, 루소 등 근대사회계약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사회계약론의 요지는 개인은 계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고 초월적 권위에 스스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근대사회계약론에서 주목해야하는 점은 과연 실제 계약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개별의 보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초월적 권위에 의지하려한다는 점이다. 대개 개인은 자신의 보존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서 사회적 계약 속으로 들어가고 또 주권은 자신의 외부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함으로써 개인을 포섭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계약은 개인적 욕구와 그 자발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과 주권 사이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사회계약으로 인한 초월적 권위에 대한 인정이 개인이 주권에 포섭된 형식이 아니라 자발적 형태를 띠게 될 때 이는 파시즘으로 흘러갈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둘 간의 긴장관계는 종속으로 변한다.

 

출처: 블로그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lo9956&logNo=10153502640&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주권은 자연상태에 대한 공포를 매개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데 기존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자연상태는 북한과 관련된 전쟁, 적화통일과 같은 것이었고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확대 생산되어 왔다. 이러한 자연상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민으로 하여금 추상적 공포를 제시해왔다. 그 반면에 21세기 한국사회가 개인에 던지는 자연상태의 공포는 개인의 보존을 직접 위협하는 미시적 공포다. 개인적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 9%를 넘어서는 청년실업, 그나마 있는 직장들은 비정규직인 상황과 사회에서의 대화단절은 젊고 어린 학생들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추상적 공포는 젊은이로 하여금 그 실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여유를 주지만 개인의 실존과 관련된 공포는 이러한 상상력을 제한시킨다. 기존 한국에서 던져졌던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미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기성층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오지만 경제적, 사회적 인정과 관련된 공포는 젊은 층에게 훨씬 더 큰 위협을 안겨준다. 이러한 공포가 건강한 비판과 저항으로 나타나 경우도 많고 이를 20~30대의 대략적 정치적 성향이나 인터넷의 대부분 여론에서 확인 할 수 있으나 그 반대급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좌절 속에서 파국과 폭력적 권위를 기대하는 젊은 여론이 인터넷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일베’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일반적 용어와 다르게 사용된다. 민주화는 패배, 반대, 무엇에 당함 등의 의미를 지니고 산업화는 승리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는 인터넷공간을 넘어서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주화는 비속어 사용되고 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나는 것을 ‘민주화 당했다’고 표현한다. 민주화가 이렇게 경멸당하면서 반대급부로 ‘전땅크’는 추앙받는다. 이러한 ‘일베’의 회원은 100만여 명에 이르고 동시접속자는 2만여 명에 다 달한다. 이들은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적 커뮤니티에 쉽게 안착하지 못한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 응어리를 비뚤어진 형태로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이다. ‘일베’의 언어의 특징은 반말과 욕설이다. ‘일베’에서는 경어를 사용하면 욕설이 빗발친다. 그런데 이는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사회적 대화가 단절된 이들의 일종의 방언이다. ‘말할 수 없는 사회’에 그들은 가장 공격적인 대화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들끼리 공인한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를 통해 인정욕을 충족한다.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처럼 익명성 속으로 숨지 않고 정치적 조직화까지 꽤하고 있다. 파시즘은 이성적 영역이나 기존 기득층을 기반으로 하기보다 감성과 무산층을 기반으로 한다. 뉴라이트보다 일베가 더욱 우려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지난 대선의 결과를 단순한 세대대결로만 해석할 경우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집단적 불안감이 표출할 수 있는 폭력성에 대해 둔감해 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희망이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젊은 세대는 저항을 선택할 수 있지만 역으로 파시즘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한다. 20대의 투표는 30~40대의 투표와 다르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저항의식도, 사회정의에 대한 부채의식도 3040세대에 비하면 훨씬 흐리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실존적 입장에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박근혜정부의 독선이나 유신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이러한 자발적 파시즘이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매체를 매개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연예인에 대한 악플이나 음란성 등의 이유로 일베를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해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일 뿐이다. 공유될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은 일그러지기 쉽다. 이러한 감성을 위로받는 형태와 장소가 인터넷의 극우적 커뮤니티라는 것은 그들에게 일상 속에서 휴식과 위로가 될 공간이 제공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분노와 불안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오프라인에 만들어져야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젊은 파시스트들의 등장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될 수 있다.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

-비정기 간행물 <숨>-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많이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쓴다. 며칠을 고민했다. 사랑하는 안해가 이 글을 읽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주책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다 사실인 것을. 나는 어린이(초등)학교 2학년 시기를 인천에서 보냈다. 하루는 어둑 어둑한 밤에 아버지가 나와 두 살 위인 형을 데리고 논 부근 물가로 가셨다. 자전거 뒤에 다라이를 싣고 가셨다. 그 다라이에는 불에 그을려 검게 탄 개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개를 더 작은 크기로 토막내기 위해서 논가 물 있는 곳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신 것이다.

집에 왔더니 어머니가 이미 개고기 요리할 준비를 해 두셨다. 어머니가 개고기 토막을 큰 솥에 넣고 부글 부글 끓이시는데 냄새가 참 좋았다. 된장냄새와 함께 구수한 개고기 냄새가 참 좋았다. 요리가 다 되었는지 어머니가 개고기 덩어리를 하나씩 꺼내어 칼로 잘게 썰어주셨다. 우리 식구는 한 점 한 점 맛나게 먹었다. 나도 맛나게 먹었다. 참 맛 있었다.

그 뒤로도 집에서 개고기를 몇 번 먹었다. 커서는 보신탕 집에서 지인들과 어울려 먹었다. 나름 친한 분을 내가 초대해서 함께 보신탕을 먹곤 했다. 최근 까지도 나는 보신탕을 먹었다. 숨이라는 무크지를 읽고 깊이 생각을 해봤다. 그 동안 내가 보신탕을 먹은 개인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 <숨> 2권에 나와서 더 더욱 그랬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도올 김용옥교수 책을 열정적으로 읽었다.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간절한 마음으로 그 분 책을 사서 읽었다. 그 분 책에서 보신탕 이야기가 나왔다. 청나라 위안 스카이 이야기를 곁들여서 보신탕 이야기를 했다. 88 올림픽 한다고 줏대없이 보신탕 집을 단속하지 말고 자신있게 전통 음식인 보신탕을 먹으라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신탕 집이 보양탕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음성화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당시 존경하던 석학이 보신탕을 자신있게 먹으라는 말을 들으니 나는 뿌듯했다. 나 자신이 보신탕을 먹는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녔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한테도 보신탕은 반만년 역사가 이루어낸 훌륭한 전통 음식이라는 말까지 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보신탕 문화는 야만적이라는 비난이 너무도 몰상식한 말이라고 힘주어 비판하기도 했다. 그이는 문화 상대주의를 모르는 몰상식한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비판을 하면서 말이다. 의사들이 수술환자에게 수술 부위가 빨리 아물도록 보신탕을 권한다는 아버님 말씀도 내가 보신탕 신봉자가 되게 하였다.

<숨>, 더불어숨 출판사, 2009.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 작은나무카페가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 말이다. 그 카페에서 숨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다. 그때는 내가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숨> 1권과 2권을 사서 집에서 쉬엄 쉬엄 읽었다. 안해가 요즈음 그런다. 내가 숨을 읽더니 여덟 번이나 그랬단다. “에이, 이 책 읽다 보면 앞으로는 보신탕 못 먹겠네.” 지인과 보신탕 빨리 한 번 푸짐하게 사 먹고 보신탕과 영원히 이별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수 없었다. 숨에서 개와 관련된 글을 읽고 숨에 나온 이쁜 개 사진을 본 내가 더는 보신탕을 먹을 수 없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개를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내가 지금 개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것 같다.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길렀다. 아버지가 강아지를 사 오셨다. 아버지는 어떤 강아지를 사오시던지 강아지 이름을 재동이라고 지으셨다. 재동이는 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내게 안기곤 했다. 혀로 내 손을 내 얼굴을 빨곤 했다. 아직도 재동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재동이 혀의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고, 재동이 선한 눈빛이 어른거리고, 재동이가 달려올 때 내는 핵핵거리는 소리가 바로 지금 들리는 듯하다. 재동이를 안을 때 느꼈던 따스한 체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뚜렷이.

우리 아버지가 네 형제에게 그랬듯이 나도 우리 딸 쌍둥이에게 보신탕을 먹게 했다. 어린 우리 쌍둥이가 보신탕도 먹을 줄 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부모로써 쌍둥이한테 미안하다. 큰 죄를 지었다. 앞으로는 쌍둥이에게 보신탕 먹을 기회를 만들어 주지 말아야겠다. 숨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내 글을 읽고 충격 받으실 것을 생각하면 내가 겁난다. 무안하다. 그래도 돌이켜 보니 내 주변에서 긍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잘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아버님이 약 15년 전부터 보신탕을 드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절에 다니시면서 차츰 개고기를 끊으셨단다. 우리 안해도 약 3년 전부터 보신탕을 먹지 않았다. 이제 나만 안 먹으면 된다. 다행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참 살기 힘든 곳이다. 불량한 사장 때문에 파업하는 일꾼들이 많다. 그 분들 삶은 참 팍팍하다. 하지만 <숨>이라는 책을 읽고는 그 분들이 그래도 동물들보다는 낫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동물들은 파업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부당한 짓을 해대는 인간을 상대로 시위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늘은 2010. 9. 21. 한가위 연휴 날이다. 내 삶에서 작은 혁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내게 다짐한다. 앞으로는 절대로 보신탕 먹지 말자. 앞으로는 되도록 고기 식사를 줄이자. 앞으로는 되도록 적게 먹자. 달님 저를 굽어 살피소서.

해님 제 가슴을 뜨겁게 해 주소서.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출간 기념 특강

기묘한 미술로 삐딱한 철학 하기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출간 기념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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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개요

 

인공의 눈을 벗어버린 “진짜 눈”으로 명화를 다시 보다

그 철학적 정체와, 외침의 감각을!

우리는 미술에서 무엇을 철학할 수 있는가?

고흐의 ?구두 한 켤레?를 두고 존재론을 사유한 하이데거,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에 내재된 남성적 시선을 파헤치는 여성 철학자, ?세한도?에 담긴 불굴의 정신을 읽으려는 시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은 철학을 낳은 미술 작품들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책입니다. 하지만, 미술 작품의 신비스러운 비밀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림의 감각적 충격과 느낌에 언어를 부여해서 그림이 스스로 말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철학자의 말을 거친 미술 작품은 화랑의 고고한 자리에서 나와 일상의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합니다.

나를 찾고 세계를 치유하려는 철학자의 삶과 고전 사상을 다채로운 미술 작품을 통해 성찰하면서 여러분도 행복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를 발견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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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자 : 서영화(한신대 외래교수), 전호근(경희대 교수), 이현재(서울시립대 교수)
주관 및 진행 : 정독도서관
후원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알렙 출판사
기간 : 2013년 4월 8일 – 2013년 4월 22일(매주 월), 총 3회
시간 : 오후 7시 – 9시(1시간 30분 강의, 30분 질의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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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리큘럼
1강 4월 8일 철학이 말하는 구두, 예술이 말하는 구두
고흐의 구두와 하이데거-서영화(한신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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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4월 15일 ?세한도?를 읽는다는 것!
김정희와 사마천 그리고 공자-전호근(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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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4월 22일 그래도 정복은 불가능하다!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과 여성의 몸-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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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시대정신을 통찰하고 현실 모순을 변혁하는 철학자 지식공동체입니다. 나아가 한국적 실천철학의 모형을 구현하며 더불어 철학의 대중화 사업을 위해 시대와 소통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은 독립?중도?심층의 모토 아래 ‘관점 있는 뉴스’, ‘깊이 있는 분석’ 기사를 만들어내는 시민지향적 독립 언론입니다.?

알렙출판사

알렙은 ‘언제나 시작’이란 뜻을 갖고서, 나눔과 느낌이 있는 인문 사회 교양 서적을 만들어 나가는 출판사입니다. 펴낸 책으로는 <철학자의 서재 1, 2>, <청춘의 고전>, <언지록> 등이 있습니다.?

정독도서관

정독도서관은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북촌에 위치하며, 사계절 아름다운 넓은 정원에 풍부한 장서와 다양한 인문학 강좌로 언제나 나를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시민 모두의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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