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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삶인지 나의 삶인지? : 『장자』에서 보는 인간의 삶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4

나비의 삶인지 나의 삶인지? :?『장자』에서 보는 인간의 삶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4

전호근(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우언의 철학자,?장자

 

 

왜 우언인가?

[장자]는 전편의 대부분이 우언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우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장자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그렇다면 장자는 왜 이런 식의 우언 형식을 택했는가??우언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고,?저렇게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치적 박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기 때문입니다.?장자 텍스트의 행간에는 물음표가 많이 있습니다.?장자가 던지는 질문이 도처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피(彼)와 시(是)를 주제로 한 이야기에서 장자는?‘저것’과?‘이것’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바뀐다고 지적합니다.?이것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이것이고 저것이 저것이지만,?저것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된다는 거죠.?그리곤 다시 이것과 저것을 말하고 있는?‘나’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여기서 나는 피(彼)인가,?시(是)인가??이처럼 세상에서 원칙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할 뿐만 아니라 그런 회의를 하고 있는 자신마저도 의심하는 치열한 사유를 보여줍니다.

제물론의 유명한 호접몽 이야기도 그래서 가능한 것입니다.?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가볍게 날아다녔는데 그렇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워낙 꼭 맞아서 전혀 장자인줄 몰랐다지요.?그리고는 나비와 장주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터인데,?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이처럼 꿈을 통해서 현실까지 의심하는 방식은 장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서사구조입니다.?심지어 꿈 속의 꿈 이야기를 하지요.?한자?‘覺’은 잠에서 깬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교’로 발음하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 것은?‘각’으로 발음하는데요,?장자는 잠에서 깨는?‘교’를 통해서 잠에서 깬 사람이 꿈을 비로소 허상인 줄 알게 되는 것처럼,?깨우침 곧?‘각’을 통해서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삶도 사실은 허상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우리가 사는 세상을 꿈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올바른 것이 사실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그렇지만 장자는 이조차도?‘거짓일까?’하고 빠져나감으로써 끝까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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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느 편이야?

장자가 문헌이나 학자들에 따라 송나라 사람이나 위나라사람,?또는 초나라이라고 기록이나 주장이 엇갈리는 것은 장자가 활동한?‘몽(蒙)’이라는 지역이 이들 세 나라가 번갈아 가며 점령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그런 특수한 조건은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때그때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게 됩니다.?초나라가 다스리는 상황에서?‘초나라 고홈’이라고 외치면 생존하기 어렵겠지요??그렇다고 무작정?‘초나라 만세!’를 외치면 위나라가 점령할 때 어떻게 살겠어요.?생각이 많아질 수밖에요.?초나라가 들어와서 초나라가 좋으냐고 물어보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이처럼 여러 나라가 번갈아 지배하다 보니 한 나라를 꼬집어 좋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좋은가?’하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사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많은 분들이 이 나라의 불행한 현대사에서 장자와 같은 경험을 해 봤을 겁니다.?예를 들어 이청준 작가의 단편작품 중에서 점령군이 어둠 속에서 주민에게 총을 들이대며 어느 편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상대방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국군인지,?인민군인지 알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목숨이 걸린 대답을 해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칸트의 정언명령처럼 거짓말은 하면 안 되니까 사실대로 대답하시겠습니까??아니면 그냥 총든 편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사실 요즘도 달라진 건 없습니다.?다만 요즘은 총 들고 묻는 게 아니라 돈 들고?“너 어느 편이냐고”묻지요.?그러면 많은 사람들이?‘돈든 편’이라고 대답하지요.?총보다 돈이 더 무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이런 고민이 장자가 우언을 창작하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시공간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을 뿐 더러 때로는 말을 바꾸기도 해야 살아남는 세상이었던 겁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바로 이런 이유로 고도의?‘문학적 장치’가 필요하게 됩니다.?그러므로?[장자]는 글쓴이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열려 있는 텍스트’로 보고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식인의 운명

이처럼 장자의 우언은 지극히?‘정치적’인 이유로 탄생한 것입니다.?그러므로 단순히 재미를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생존을 건 정치적 고민이 담겨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참 어렵지요.?예부터 자신이 쓴 글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이른바?‘문자옥’이라고 하죠.?공자나 맹자처럼 하고 싶은 말 다하면서 천하를 돌아다니는 것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당시 권력자들은 사람을 너무나 쉽게 죽였거든요.?예를 들어 진나라 헌공은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음식을 개에게 먹인 후 개가 죽자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그 음식을 기어이 사람에게도 먹어보게 한 후 사람이 죽자 비로소 독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후대의 현군으로 알려진 당나라 태종도 아끼던 신하이자 당시의 문장가였던 장온고를 순간의 오해로 하루아침에 죽이고 말지요.?물론 그 뒤에 크게 후회하고서는 사형을 청할 때에는 반드시 세 번 주청하도록 한 이른바?‘삼복주제도’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오지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명망이 있는 사람의 경우는 오히려 늘 시대의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후한말기의 채옹은 동탁의 부름을 받고 몸이 더럽혀 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사람이 됩니다.?그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런 시대에 살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늘 질문을 하게 됩니다.?나는 과연 보편적 가치관을 지키면서 시대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갖게 되지요.?일제강점기 이 나라의 지식인들 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친일행위를 했다고 한 사람들이 많지요.?그런 지식인은 아주 작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시대적 상황에 대한 변명을 이해한다손 쳐도 그렇게 변절하면서 살아남든가,?아니면 죽든가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선택입니다.?물론 그 시대에 독립운동 자금도 조금씩 대주고,일본에 비행기도 만들어 바치고 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지요.?지금에 와서 그러한 친일행적을 처벌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이전에 그런 사실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지요.

장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런 시대적 배경 하에서?‘우언’의 방식으로 남겼습니다.?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우언은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고 저렇게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장자의 의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자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한 마디만 하고 끝내면 알 수 없는데 같은 이야기를 두 번,?세 번 반복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언의 방식을 취했더라도 자세히 읽으면 장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자]의 제1편 첫 장에 등장하는 우언은 물고기가 새가 되는 이야기입니다.?첫편의 제목은?‘소요유(逍遙遊)’인데?‘유(游)’는?‘논다’는 뜻입니다.?온 천하가 전쟁에 미쳐 날 뛰는 시대에 어떻게 노는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놀 뿐만 아니라 낮잠 자는 이야기를 합니다.?장자는 소요유편에서?‘소요’를?‘침와(寢臥)’?즉, ‘낮잠 잔다’는 말과 짝을 이루어 쓰고 있거든요.?결국 장자는 첫 편부터 낮잠 자면서 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노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가치 기준을 바꿔야만 가능해집니다.?만약 맹자라면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무슨 노는 얘기인가하고 비판했을 것입니다.?맹자는 절대로 노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사람이거든요.?소요유편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는 대붕(大鵬)의 이야기입니다.?이 이야기는 장자에 세 번 등장합니다.?그러므로 대붕의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읽다 보면 장자의 생각을 함께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묻다

 

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 이야기

[장자]?제물론편 제5장의 주인공은 그림자입니다.?아니 그림자의 그림자입니다.?그림자는 영(景)이고 그림자의 그림자는 망량(罔兩)입니다.?망량의 경우는 비슷한 명칭인 이매망량(?魅??)이 춘추좌씨전에 나오는데 이매는 산귀신이고 망량은 물귀신으로 풀이됩니다.?장자의 망량은 발음만 같고 장자가 그림자의 우의를 담아서 만든 말입니다.?망량(罔兩)의 망(罔)은 허망하다는 뜻인 망(亡)의 가차입니다.?양(兩)은 둘이라는 뜻이죠.?그러니 망량은 망이우망(亡而又亡),?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입니다.?그림자는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허망한 존재입니다.?그런데 그 그림자에 붙어 있는 곁그림자는 더더욱 허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마치 꿈속의 꿈처럼요.

곁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는 그대가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추고,?또 조금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서 있으니,?어찌 그다지도 일정한 지조가 없는가?”

그림자가 말했다.

“나 또한 무언가 의지하는 것이 있어 그리 된 것인가??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여 그리된 것인가??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 같은 것에 의지하는가??어떻게 그런 줄 알겠으며,?어떻게 그렇지 않은 줄 알겠는가?”

[罔兩이?問景曰 ?에?子行하다가?今에?子止하며??에?子坐하다가?今에?子起하니?何其無特操與요?景曰 吾는?有待而然者邪아?吾所待는?又有待而然者邪아?吾는?待蛇??翼邪아?惡識所以然하며?惡識所以不然이리오]

장자는 즐겨 여러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나무나 새종류가 자주 등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람의 신체 일부를 의인화하기도 하죠 소요유의?‘견오와 연숙’의 예도 그렇죠.?견오는 사람의 어깨를,?연숙은 도와 이어져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지요.?바로 앞서 읽었던?‘구작자와 장오자’의 예도 까치와 오동나무를 의인화한 것입니다.?여기서는 그림자를 의인화한 것입니다.?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허상입니다.?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그림자가 실체로 등장합니다.?이 실체에는 그림자가 붙어 있습니다.?바로?‘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일정한 지조[특조(特操)]’가 없다고 따집니다.?특조(特操)의 조(操)는 조행(操行),?곧 행실을 일정하게 지키는 것입니다.?흔히 조심(操心)이라는 말을 쓰는데 요즘은 조심이라는 말이 그저 신중한 태도를 뜻하지만 본래 조심은 맹자에 나오는 존심(存心)과 같이 마음을 붙들어 둔다는 뜻으로 쓰입니다.?존심이나 조심의 결과가 조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일정한 마음의 결과 일정한 행실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곁그림자는 그림자에게?왜 이렇게 일정한 지조없이 가다가 말다가 앉았다 일어섰다 하냐고요.?결국 당신을 따라하려니 피곤하다는 것이죠.?그러자 그림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어디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는가.나 또한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 무엇이 움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다고 말이죠.?사실 그림자니까 당연히 실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죠.?그래서 실물이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장자가?‘그림자의 그림자’를 등장시킨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보통 그림자는 부수적인 것이고 실물은 알맹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림자의 그림자’,곧 곁그림자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가 실체입니다.?곁그림자의 존재의 근거는 그림자라는 것이죠.?그런데 사실은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실물의 허상에 지나지 않지요.?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실체라고 생각했던 그림자가 사실은 실물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실물,?곧 우리의 몸뚱이 또한 또 다른 실체의 허상이 아니겠느냐는 거지요.?우리가 생각하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라는 주체가 사실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장자는 말하고 있는 겁니다.?제4장에서 장오자가 꿈에 술 마시고 즐겁게 놀던 자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 슬피 운다는 이야기를 했죠.?그리고 그 꿈을 깨어나는 것이 생리적인 깨어남이라면 우리의 현실,?곧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꿈같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대각’이라고 했습니다.?꿈 속의 꿈과 마찬 가지로 그림자의 그림자 또한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뿌리째 흔들어 놓기 위한 장자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장자는 궁극적으로 실체와 허상을 마주 세우기 위한 기획으로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실물조차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여기서 빛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묻습니다.?하지만 그림자라고 하면 빛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빛이 없고 그림자가 없다면 우리는 빛을 인식할 수 없을 겁니다.?마찬 가지로 그림자만 있다면 그림자를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요.?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따지는 과학적 사유는 이 대목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과학적으로 따지면 실물이나 그림자나 곁그림자나 모두 실체입니다.?모두 현상이니까요.그러니 과학적 사유는 잠시 내려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존재의 근거를 따져 묻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곁그림자→그림자→실물의 입장을 모두 성찰하는 내용입니다.?우리는 어떤 것을 존재의 근거라고 규정짓지만 그런 규정을 짓는 순간 그 존재의 근거라는 하는 존재의 근거를 또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존재의 근거,?존재의 근거의 근거,?존재의 근거의 근거의 근거,?이런 식으로요.?그런데 곁그림자는 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라서 망량,?곧 망이 두 번 겹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망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하지만 그보다 더 허망한 존재를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망망망,?망망망망,?이런 식으로요.?이런 식의 수많은 허망과 허망의 연속을 장자는 자생자화(自生自化)라고 하였습니다.?그런 자생자화의 또 다른 표현이 물화(物化)입니다.?장자의 다음 이야기는 스스로 체험한 물화의 경험담인 호접몽(胡蝶夢),?나비의 꿈입니다.

 

나비의 꿈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가,?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

111제물론편 제6장의 주인공은 장자 자신입니다.?아니 나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어떤 학자는 장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장주라는 이름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대목은 장자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사실?[논어]가 공자의 저작이 아닌 것은?‘자왈(子曰)’이라는 표현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자왈’은 선생께서 말씀하셨다는 뜻인데 공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 리는 없으니까요.?그런데?[맹자]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어떤 사람은 맹자가 스스로?‘맹선생’이라고 호칭했을 리 없으니?[맹자]는 맹자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맹자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요. [맹자]가 맹자의 자저가 아니라는 근거 중의 하나입니다.?하지만?[맹자]를 읽어보면?[맹자]는 아무래도 맹자가 직접 지은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맹자]의 문장은 직접 기술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의 생생함이 있거든요.?아무튼 장자가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목이?[장자]에는 여러 차례 나오고 그 때문에[장자]?또한 장자의 자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그러나 자연사물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 신체의 일부까지 의인화하여 즐겨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장자입니다.?장자는 단순한 대화록이 아니라 문학 작품입니다.따라서 얼마든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이 대목만 굳이 다른 이야기와 달리 볼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이런 식의 다양한 문학 장치가 등장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장자는 공자나 맹자와는 처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공맹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면서 잡혀 가지 않으면 좋은데,?장자는 자칫 잡혀가기 쉬운 처지였기 때문에 보호 장치가 필요했던 것입다.?그 중의 하나가 꿈입니다.?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면서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지요.이후 남가일몽,?일장춘몽,?구운몽 등과 같이 꿈을 매개로 신분차별이나 남녀의 차별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억압을 넘어설 수 있는 해방구로 삼은 이야기들이 많이 창작되었습니다.?꿈이라는 장치를 자유로운 공간으로 삼은 것입니다.?그래서 호접몽은 꿈 이야기의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이 대목을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연관지어 풀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데카르트의 경우는 애초에 회의가 목적이 아니라 회의를 어떻게 하면 끊어버릴까 하는 아주 불순한(?)?목적을 가지고 회의한 사이비 회의주의자입니다.?장자와는 다릅니다.?아니 반대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또 주체를 강조했던 데카르트는 인간 이외의 동물은 기계와 같다고 보았습니다.?동물을 발로 차면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은 종을 쳤을 때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장자와는 많이 다르지요.?일단 장자에게는 불순한 목적의 회의라든가 그런 게 없습니다.?동물을 기계로 보지도 않고요.둘을 비교하면 아마 서로 화를 낼 겁니다.?장자는 자신마저도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나비와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이야기의 말미에 등장하는?‘물화(物化)’는 장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물화란 내가 주체고 상대가 대상이라는 인식을 넘어선 결과입니다.?내가 온전히 상대와 같아진다는 것은 곧 나의 소멸을 의미합니다.?나를 버려서 상대를 이루는 것,?그것이 장자의 물화(物化)?개념에 가깝습니다. ‘물화(物化)’에서‘물(物)’자를 빼고?‘화(化)’자만 남기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소요유 제1장에서?‘화(化)’는 살아 있는 존재가 사멸하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던 것을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어젯밤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팔랑팔랑 가볍게 나비였는데 스스로 즐겁고 뜻에 꼭 맞았는지라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이윽고 화들짝 깨어 보니 갑자기 장주였다.?알 수 없구나.?장주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을 테지만 이처럼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것,?이것을 물화(物化)라고 한다.[昔者에?莊周夢爲胡蝶호니???然胡蝶也러니?自喩適志與라?不知周也호라?俄然覺하니?則??然周也러라?不知케라?周之夢에?爲胡蝶與아?胡蝶之夢에?爲周與아?周與胡蝶은?則必有分矣니?此之謂物化니라]

장자가 꿈을 꿉니다.?유명한 호접몽(胡蝶夢)입니다.?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닙니다.?사람이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을까요??그런데?‘적지(適志)’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뜻에 꼭 맞아서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자기가 장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비가 된 것이죠.?사실?난다는 표현은 인간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쓰이지요.?장자의 첫 이야기가 대붕의 플라잉 신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이 대목은 바로 장자 자신의 플라잉 신입니다.?대붕은 구만 리의 하늘을 타고 납니다.?그리고 장자는?‘물화’,?곧 나비가 됨으로써 하늘을 납니다.?구만 리의 하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나비의 날개는 아주 가벼우니까요.

날 수 없는 인간에게 난다는 것은 자유의 획득을 뜻합니다.?빌리 엘리어트라는 소년이 춤추는 것을 보고 로열 발레단 심사위원이 묻죠. “너 춤 출 때 기분이 어떠니?”?하고요.?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아요.”?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난다는 것은 춤의 가장 높은 경지가 아닐까요??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 그리고 하나의 몸뚱이라는 육체적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춤의 궁극적 경지임을 암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물론의 마지막 이야기 나비꿈은 소요유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바로 앞에서 장자는 그림자와 꿈 이야기를 통해서?‘곁그림자→그림자→실물’, ‘꿈속의 꿈→꿈→현실’의 대비를 통해서 모든 사물이 서로 종속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그리고 그런 종속의 맨 위에 있는 실물과 현실을 부정합니다.?겉으로 보기에 더 이상 종속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종속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겁니다.?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힘이 약한 자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그렇다고 힘이 센 자가 자유로우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힘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순간 더 큰 힘에 의한 지배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논리적으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죠.

이를 테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는 섬나라 멜로스를 정복했죠.?침공하기 전에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죽이겠다고 최후통첩을 합니다.?하지만 멜로스의 지도자들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합니다.?그 결과 멜로스는 아테네의 공격에 의해 멸망당합니다.?멜로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너희는 너희가 우리를 대한 방식대로 또 다른 침략자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외칩니다.?실제 그렇게 되었죠.?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멸망시켰으니까요.?적어도 멜로스 사람들은 아테네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자기들이 멜로스를 대한 방식대로 멸망당했으니까요.?이처럼 강약의 논리를 따르면 강자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장자는 자유란?‘상대를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때’?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비의 꿈에서 장자는 앞의 두 경우와는 다른 플롯을 제시합니다.?서로 종속되는 것으로 그렸던 그림자와 꿈 이야기와는 달리 나비꿈에서는?‘장자의 꿈↔나비의 꿈’?이라는 식으로 둘을 마주 세우고 있습니다.?제물론에서 자주 등장하는?‘저것’과?‘이것’의 논리를 문학적 장치로 활용한 것입니다.?저게 허상이면 이것도 허상이고 상대가 부정되면 나도 부정된다는 말입니다.?이 대목에 등장하는 장주인 줄 몰랐다[不知周也]?든지 알 수 없다[不知]는 식의 말은 우리가 확신하는?‘주체’라는 것이 사실은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표현입니다.?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장자는 주체고 나비는 대상입니다.?그런데 장자는 나비꿈으로 주체와 대상을 마주 세우더니 결국에는?“장주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주체와 대상의 역할을 전도시킴으로써 현실의 질서와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한 것이지요.

이 대목을 감상할 때는?‘나’와?‘나비’를 짝으로 마주 세우는 장자의 방식과 함께 소요유와 제물론을 짝으로 놓고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붕새의 어마어마한 비상과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을 함께 느끼는 것이지요.

번역을 살짝 바꿔서 읽어보겠습니다.?앞의 번역은 장자라는 인물을 삼인칭으로 놓고 번역한 것이고,?다음은 그것을 나라는 일인칭으로 바꿔서 번역한 것입니다.?나로 바꿔서 번역해야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마주 세우려는 장자의 의도가 더 잘 읽힙니다.

 

어젯밤 꿈에 나는 나비가 되었다.

팔랑팔랑 가볍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나에게 꼭 맞았는지라 내가 나인 줄 전혀 몰랐다.

이윽고 깨어보니 틀림없는 나였다.

알 수 없구나.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것인가?

 

끝.

이재원 단편소설-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설화산에 산재한 여러 암자와 굿 당,?그리고 절마다 모셔진 미륵들과 그 옛날 미륵에게 소원을 빌던 사람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고보살,?혹은 연화의 소원과 그녀에게 현신(現身)했다는 미륵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옛 사람들은 특별히 정으로 형체를 조성하지 않은 돌에도 미륵이라 이름 붙였다.?미륵 관찰자가 되어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 해도 미륵이라 지칭하는 돌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미륵은 미래 세계에 도래할 부처이다.?불자가 아니라면 우선 미륵이 도래한다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지도 모른다.?누가 이 태평성세에 미륵 세계에 관심을 가질까??그러나 현실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다면 미륵 부처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미륵은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사람들의 부처이다.?고통당하는 사람은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은 세계를 바랄 것이다.?이 때 미륵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더 나은 현실을 주관하는,?따라서 당대 세계를 주관하는 부처로 변모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 삶과 유리된 사상이나 종교는 없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그것이 교조화될 때에만 본래의 생명을 잃고 인간 삶과 유리하게 된다.?사실 봉건시대에 농민 혁명이 일어나면 그 중심에 미륵 사상이 있었다는 주장은 아주 흔하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용화사 미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다.?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도 아니다.?다만,?이야기꾼으로서의 어떤 직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

미륵님이 절을 세운 분에게 현신,?현몽하여 땅에 뭍혀 있던 부처를 찾아내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순전히 사람을 관찰하는 입장에서였지,?종교적 관심이 아니었다.?꿈에 미륵이 현신한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가장 컸다고 말 할 수 있다.?앞에서도 언급했듯이,?행복한 사람이 미륵을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바랐는가??어떤 염원을 하면서 살았길래,?삶에서 어떤 질곡을 만났길래 미륵불을 만났을까??이런 관심은 특히 사람들이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기도 했다.

나는 한동안 노동의 노역에서 벗어나 있었다.?설화산 월정사 밥을 얻어먹으며 책 읽거나 아무 일도 안 하거나,?잠자고 싶으면 자고,?취하고 싶으면 취하고,?걷고 싶으면 산길을 걷고는 했다.?그러다가 사람을 만나면 말 붙이기를 좋아했다.

월정사 주변 밭을 가꾸는 노인과도 자주 이야기했다.?노인이 쓰는 사투리로 보자면 이 지방 사람은 아니다.?그러나 노인의 이야기 내용을 보자면 동네에서 오래 살았다.?노인을 도와 함께 밭의 잡풀을 뽑기도 했다.?노인의 이야기는 줄거리를 잡기 쉽지 않았다.?그러나 내가 아는 월정사 정보는 모두 그에게서 들은 것이다.

노인에 의하면 원래는 만신이 월정사를 일으켰다.?그리고는 월정사를 팔고 안성 어디에 가서 절을 크게 일으켰다는 것,그 후임으로 오신 지금의 스님은 대단히 성실해서 아침,?저녁 예불을 쉬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말끝에 노인은?“용화사 시님 굿이야말로 보기 좋았지러”,?했다.?나는 한참만에야 그 이야기의 뜻을 알아 차렸다.?그리고는 되물었다.

“스님도 굿을 해요?”

“아,?하디.?굿 해 달래는 사람이 있으믄 하디.?미력(미륵)?앞에다?(음식)?진설 하고서리 밤새 했디.?사람덜이 백설치듯 했디.?미력 파내고서리.?거 박씨덜이 섬기던 미력이었거덩,용화사 짓고는 스님이 되었디.”

“미륵을 파내요??땅 속에 있었던 것을 파내었다는 말씀인가요?”

“파냈디.?미력이 현신(現身)해서 파냈디.?시집 갔더래서,?시님이.?미력이 자꾸 선몽하니끼니 시집 못살고는 나와서 용화사 지었디.”

“미륵이 현몽을 했다면 꿈에서 보았다는 뜻인가요?”

“꿈인디 생새인디는 모르디.?현신해서,?선몽해서리 절 지었디.”

“지금도 살아계세요?”

“몇 년 전 죽었디.?지금은 동생이 살고 있디.”

나는 미륵이 현몽하여 스님이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궁금했다.?그러나 할아버지에게 그 일을 상세히 듣기는 어려웠다.무엇보다도 할아버지의 이야기 내용을 선 후 순서를 맞추어 이해하기 어려웠다.?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기도 했다.?그러나 궁금증을 풀 만 한 상대가 별로 없었다.댓걸음에 용화사로 달려갔으나 절은 텅 비어 있었다.

월정사에서는 예불이 끝나면 신도 몇 명이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절에서의 식사라 하면 무엇보다도 조계사의 점심 공양이 생각난다.?점심 공양 법회에는 세 부류의 대중들이 있다.?법당에 모인 신자들은 찬불가 대원들이다.?법당 마당에 자리를 펴고 앉은 이들은 일반 불자들이다.?그리고 마당 한켠을 가로지르는,?공양간을 향해 길게 줄 지어선 이들은?<밥 줄>로 불리운다.?배식 받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식사는 물론 무료이다.?몇 천 명의 대중이 모두 불자는 아니다.?남루한 차림의 사람들도,?아주 지저분한 옷차림의 노숙인으로 보이는 이도 있다.?또는 수입이 없어 점심 얻어먹으려는 사람들도 있다.?그 동네만 아니라 인근의 빈민들에게 하루도 거르지 않는 조계사 점심은 유명짜하다.?한 끼니만 먹고 산다고 하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흔히 보고 들었다.?조계사에도 미륵이 있다.?북문 앞,?커다란 돌덩이가 미륵이다.

월정사 식사는 조계사의 그것만큼이나 소박하다.?공양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 동네,?박 씨 성 집안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이곳이 박 씨 집성촌이기 때문이다.?나는 대개 남자들과 함께 식사했다.?그러나 그 날은 구태여 할머니들 틈에 끼어 식사하면서 넌지시 질문했다.

“용화사 미륵이 땅에 묻혀 있었는데,?스님 꿈에 현몽하여 파내었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예요?”

할머니들이 질세라 한마디씩 한다.

“스님이 시집가 살았지유.?그런디 미륵님이 현몽하시더래유.”

“미륵님은 돌로 만들었으니 얕히 묻히면 넘어지거든.?그래서 넘어지지 않게 깊이 묻었거든.?그런데 스님이 미륵님 발 밑을 더 파낸 거지,?잘 보이도록.”

“토사 밀려있지,?나무랑 풀이 엉켜있지,?꼴이 아닌디,?스님이 파내고 다듬어 지금처럼 단장했지유.”

“우리 동네 사람 누구나 미륵님을 섬겼지유.?우리 큰시숙이 미륵뎅이거든유,?박치성씨라구,?치성 들여서 낳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유.?시어머니가 치성 디리구 미륵님이 선몽허셔 태어나셨대유.?그분두 무슨 일이 날라치먼 미륵님이 선몽허셨대유.”

“오호,?시숙님이 용화사 스님이 절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나요?”

“맞아유,?용화사 출입이 잦았지유.?그러나 저간 사정은…”

설화산 상봉 아래쪽에서 세 갈래 줄기가 뻗어내리다가 작은 봉우리가 다시 솟아올라,?돌머리 마을 뒤까지 이어져 있다.월정사와 용화사는 지척으로,?남쪽을 향한 첫 번째 봉우리가 완만히 내려앉으며 형성된 평평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설화산에 대한 또 다른 주장도 있다.?이 또한 우연히 들은, 환경운동 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설화산처럼 처참하게 뭉개지는 산은 호서 지방에서 그 하나로 충분했으면 좋겠다.?산신령도 떠났을 것이다.?그 산에서 어찌 살겠는가?”

설화산 동남쪽은 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그러나 북쪽은 완전히 망가져있다.?수십 년간 골재 채취하기 위한 석산개발 탓이다.?환경운동가의?<산신령>이란 말,?그리고 산신령이 떠났다는 말도 허투로 들을 일이 아니다.?이 또한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산이 인간 삶에 요긴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병 치료하러 산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무수하고 산에 들어가면 굶어죽지 않는다는 옛 사람들의 이야기도 산이 인간 삶에 꼭 필요하다는 반증이다.?북쪽 산은 사막처럼 망가지고 흉측해졌다.?멀리서 보면 천 길 낭떠러지만 드러내고 있다.

석산 주변에 분진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당대의 사람들이야 할 수 없이,?오갈 데 없어서 산다 하지만,?누구도 그곳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자의 반,?강요에 못 이겨 사람들은 떠났다.?사람들이 떠난 폐허가 된 곳에서 산신령으로 대변되는 일상적 신비로움도 떠나고 만다.

그러나 이 환경 운동가와 미륵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나의 바람은 참혹해졌다.

“천국에서야 모두 평등하다지만,?미륵이 미래 뿐 아니라 현세에서 용화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헛된 희망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일 뿐이다.”

나는 두 번 다시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용화사 미륵은 천 년의 이끼를 쓰고 있다.?두상은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그러나 신체는 별로 다듬지 않았다.?언뜻 보면 하체는 그저 평범한 돌덩이 같다.?그러나 여러 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미륵의 신체에도 정교하달 것까지야 없지만,?정성들여 다듬은 흔적이 있다.?이를테면 법복 자락을 표현하려 쪼은 선이 있다.?법복,?도포의 선은 어깨에서 무릎까지 흐르고 있다.?소맷동은 무릎 근처에서 다시 솟구쳐 가슴 앞,?두 손 모은 손목에까지 이어진다.?미륵을 쪼은 석공이 그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작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랬다.?과거 어느 한때,?설화산 골짜기 박씨 종산 어귀에 미륵이 숨 쉬고 있었다.?나무와 풀숲이 가리고 있었으나 거기 이토록 친근감을 주는 미륵,?돌덩이가 있었다.

용화사 주변을 둘러보다가,?법당 옆에서 앞서 보지 못했던 고연화보살의 행적을 기록한 현판을 찾아낼 수 있었다.?이름을 보자면 현판을 쓴 사람은 스님 같지는 않다.?현판에는 최보살의 약력이 적혀 있었다.

<속명 고연화,?법명 청심화(靑心花)는?1928년 충남 광천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명산대천을 찾아 기도하며 전통 종교를 섬기던 중 여기 용화사를 지어 부처님께 바치니 이를 축하하여 현판을 드린다.?오서산인 금천.>

현판의 내용은 할머니들이 한 이야기와 조금 다르다.?고보살은 시집을 나와 곧바로 여기 용화사로 온 것이 아니다.?명산대천을 찾아 수련했다면 면벽하는 스님의 공부 방식과도 다르다.?월정사에서 보게 되는 동네 할머니에게 용화사 오기 전의 스님의 행적을 묻곤 했으나,?더 이상 신통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그 대신에 근동에 미륵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나는 일삼아 미륵 순례를 시작했다.

어느 마을,?어느 산 귀퉁이,?어느 절에나 미륵이 있었다.?더러는 세련되어 보이기도,?더러는 그저 돌덩이와도 같았다.가장 세련된 형태의 미륵은 송암사에 있었다.

송암사 미륵은 대웅전 앞 반듯한 터에 자리잡고 있었다.?그러나 분위기는 용화사 미륵과 완전히 달랐다.?송암사 미륵은 아주 잘 다듬어진 것이었다.?이목구비가 뚜렷했을 뿐 아니라,?신체의 균형도 적절했다.?한눈에 보아도 불교가 번성했던 시기의 것이요 솜씨 있는 석공이 정성들여 다듬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자주 송암사에 들렸다.?여러 번에 걸친 묘각(妙覺)?노스님과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다.

송암사는 고찰이 아니다.?노스님에 의하면 송암사가 생긴 것이 육십 년 전이라고 한다.?그렇다면 이토록 오래 된 미륵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스님이 추측하는 미륵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았다.

이곳 송암사는 원래 큰 절터였으리라는 것이다.?이처럼 뛰어난 조각품은 대단히 드문 것으로,?대규모 불사가 있던 시절에나 형성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불교를 중시하던 시대가 지나고 절은 점차 쇠락하다가 드디어 없어졌다.?특히 이조 말엽,?한양에서 큰 벼슬을 하던 이 씨 성을 가진 양반이 이 근처에 자리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자,?절터 돌들마저 마을을 세우는 데 쓰였다.?이 씨 집성촌 마을을 돌아가며 조성한 석축을 볼라치면 부도에나 쓰였음직한 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짐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송암사 노스님은 자신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평생 선방을 떠돌다가 칩거할 토굴을 찾았다.?평소에도 기도 발 잘 받는대서 설화산을 맴돌았으며,?마침 처분하기를 바라는 이 절을 인수해서 개축했다는 것이다.

노스님과 절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돌아가신 용화사 스님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고보살!?잘 알아.?내가 여기 오기 전 보살 한 분이 송암사에 있었지.?그분하고 고보살이 함께 동사(同事)한 적이 있었지.그래서 내가 고보살,?잘 알지.

동사하다가,?언제부터인가 고보살이 여기는 인연이 아니라 하고 여기서 나가 용화사를 지었지.?용화사 가서도 한참 머리를 쪽을 진 채로 살았어.?나중에야 머리를 깎았지.”

“쪽지고 살았다니,?그게 무슨 말이예요??스님이라면 당연히 머리를 깎고 살지 않나요?”

“보살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거든.?불자 여신도를 가리키는 의미지.?그런데 스님은 아니지만 수도하는 여자에게 붙이는 이름이기도 하지.?고보살이 신 기운(神氣),?무당들한테 있는 신기운이 있었다는 것이지.?그러니까 불교 승려라기보다는 불교와 무속을 혼합하여 섬기는 사람,?보살이었다는 거지.”

“이를테면 무당 같은 것인가요?”

“무당과도 다르지.?무당은 절에 와도 산신당에만 가거든.?고보살은 부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거든.?무당은 신 기운을 가지고 있지.?보살수업은 아주 다양해서 불교와 무속 모두 수용하기도 하지.?일종의 종교 혼합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그래서 보살이라 부르면 무당과는 차별화되는 것이지.”

“고보살이라고 해야 하나,?아니면 현판에 적힌 대로 청심화스님이라고 해야 하나,?하여튼 그 용화사 스님이 신기가 있었다는 말이군요.?그렇다면 시집살이를 안하고 나온 것도 신기운 때문이었나요?”

“저간의 사정은 확인할 수 없지.?그러나 시집살이를 못 한 것은 남편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었지.?그러나 신기가 있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시집살이 할 수 있겠어??지금도 자주 결혼생활 청산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보잖아?”

“그렇겠네요.?부잣집이라서 며느리 병치레를 할 수 있는 집이라면 몰라도.?그런데 고보살은 여기 송암사에서 왜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무엇인가 갈등이 있었겠지.”

“이를테면 어떤 갈등인가요?”

“원래 땅주인은 고 보살이 아니었거든.?여기 송암사 계시던 보살이 남편과 사별한 후 이곳 땅을 마련했지.?고보살은 자식이 없었지만 어린 남동생이 있었고,?송암사 보살은 자식이 둘 있었거든.?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자 의견이 잘 안 맞았겠지.”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죠?”

“원래 무슨 일이든 다 그래요.?입에 풀칠은 해야 하는 게 우선이지.?처음에는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었을 거야.?그러나 아이들 커지고 점점 더 입에 들어갈 것,?몸에 걸칠 것이 커지겠지.?자연히 보살 두 사람 머물기에는 이모저모로 절이 좁았겠지.?그러니까 두 동사자의 의견이 맞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고 보살은 이곳이 인연이 아니라고 떠난 거겠지.”

“그렇다면 고보살은 이곳 송암사 재산 형성이나 불사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나요?”

“송암사 자리가 원래는 미륵님만 계신 산이었겠지.?두 동사자가 풀을 치우고 마지(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식)나 올릴 만큼 미륵님 주위를 다듬었지.?매일 기도하러 오르고 내리기 힘드니까 아예 초막을 짓고 기거했을 것이고.?미륵님이 영험하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초막에서 서까래 올린 집을 지을 수 있었거든.?또 신도들을 주로 상대한 것이 고보살이었거든.?그러니까 고보살이 송암사를 일으키는 데 기여한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고보살이 쫓겨난 셈일 수도 있겠군요.?아니면 독립해서 돈을 혼자 만지고 싶었나?”

“뭐 그렇게 돈,?돈 할 것은 없고,?인연이 아닌데 어쩌겠어.”

“조금 어려운 질문인데,?이런거예요.?돌머리 마을 사람들은 고보살 꿈에 미륵이 현신해서 절을 지었다고 알고 있거든요.그런데 왜 하필이면 미륵님이 고보살한테만 현신했나??현신하는 데 특별한 매카니즘은 없는가,?또 어떤 연유로 그렇게 평생 염불하며 살았는가??이런 것이 궁금해요.”

“아 그야 우리 모두 다 불심이 있는 것 아닌가??공덕을 드리면 미륵님도 현신할 수 있는 것이고.?우리 모두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거지.”

“그게 납득되지 않아요.?고보살이 꿈에 미륵을 보았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거예요.?그 이유가 뭘까?”

스님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그래 처사는 왜 그런 일에 관심이 많우??무슨 일을 하우?”

내 직업이 뭘까??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수입과 신분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강사도 직업에 들어가나??나는, ‘강사예요’?라고 말했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을 강의해요?”

나는 우물거리는 소리로, “철학이요”라고 답했다.

스님이 말했다.

“고보살 전쟁으로 남편이 일찍 죽었지.?가족 잃은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려워.?사람마다 틀릴 수 있지만서두.?이런 이야기는 참 곤란하지만,?가족 잃고 실성한 사람 여럿 봤어.?고보살이 탈속하게 된 계기를 여러 번 들었지.?남편 여의고 나서 정신없이 걸었다는게야.?목적도 없이,?밥 먹는 것도 잊은 채…?닿은 곳이 오서산이었다지.?고보살 친정이 광천이거든.?오서산은 광천에 있고.?아는 곳이란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니,?실성한 듯,?친정 동네로 갔는지도 모르지.?그곳 산에서 보살 수업을 하면서 어느 정도 아픔을 치유했는지 모르겠어.“

나는 박치성에 대해서 동네 할머니들한테 들은 것이 있었다.박치성이 박 씨 종 터를 고 보살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였다.?나는 노스님에게 마을 할머니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짧게 하고 나서 박치성이고 보살에게 땅을 나누어 준 이야기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노스님이 말했다.

“종산을 잘라 파는데 웬 말들이 없겠어??박치성씨가 나서서 자기 종친들을 설득했겠지.”

나는 갑자기 어떤 묘한 생각이 나서 다시 스님에게 물었다.

“박치성씨가 용화사 스님을 좋게 생각하셨나보죠?”

“고보살이이 총명하기야 짝이 없었지.?송암사 동사자와 헤어져 시집으로 들어가서는 동생을 공부시키며 인근 아이들을 함께 모아 가르쳤지.?박치성씨가 고보살을 예뻐했던 것은 사실이지.?그러나 박치성씨가 막되어 먹은 사람이 아니지.?고보살을 박치성씨가 많이 도와준 것은 사실이로되,?어떤 흑심으로 도와준 것은 아닐 거야.”

나는 다시,?용화사에서 본 현판을 생각하고는 오서산인 금천에 대해서 물었다.

“용화사 현판을 쓴 이가 오서산에서 살던 사람인가 봐요,?오서산인 금천이라고 썼거든요.?고보살과 금천이 어떻게,?어떤 관계였는지 혹시 아세요?”

“잘은 몰라.?뭐 친정 사람들이 금천이라는 사람 소문 듣고 그와 딸 병세 의논했을 수도 있고,?연화가 금천으로부터 일편 병 치료 받고 일편 수업 하구,?그런 식의 관계였는지 모르지.”

송암사 노스님의 대답이 그럴 듯 하고 또 자신감이 있는 어투여서 나는 미륵이 현신했다는 고보살의 꿈을 끈질기게 화제로 꺼냈다.?그리고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물었다.?노스님은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로 괴로워한단 말이지??그 사람이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아 잠자고 일어났더니 조금 괜찮네,?그러거든??꿈도 그런 거야.?그러니까 꿈이란게 감정을 누구려 주는게야.?고보살두 그런 경우가 아니겠나??송암사에서 고보살이 과부보살과의 관계가 바늘방석이라면 당연히 꿈꾸겠지.?괴로우니까 괴로움을 눅이려고.?과부는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읇었을 게고,?고보살이 귀찮었겠지.?그런 눈치 알고 고보살이 고민한다지만,?마땅히 수도할 곳이 없다??여기 저기 토굴 자리를 찾다가는,?들었거나 알고 있었거나,?용화사터 미륵님을 기억해 냈겠지.?그리고 고 보살은 자기 갈망을 꿈으로 보게 되겠지.”

나는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말했다.

“그러니까,?꿈에 미륵이 현신한다는 것은 현재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요,?동시에 현재의 소망을 꿈으로 표출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무엇인가 미진했다.?이야기꾼으로서의 내 상상력을 보탠다 해도 미진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친정에서 돌아와 미륵 앞에 토굴을 꾸린 연화의 변한 모습에 박치성은 놀란다.?특별히 영민했던 연화는 눈에만 이상한 광채를 발할 뿐 초췌하기 짝이 없다.?그러면서도 연화는 애잔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박치성은 미륵 앞에 앉아있던 연화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박치성은 꿈을 꾼다.

미륵 앞에 연화가 앉아 있다.?박치성이 그 자리에 함께 있다.미륵이 연화에게 묻는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연화가 대답한다.

“누구에게 나를 빼앗기지 않고 살도록 도와주세요.”

박치성은 몸 둘 바를 모른다.?연화의 소원이 자기의 속마음을 드려다 보는 것 같지 때문이다.?혹시나 박치성의 열정 때문에 수도생활을 하지 못할는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연화가 미륵에게 그런 소원을 말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그는 자기의 감정이 새삼 두렵다.?혹시 어떤 식으로든,?착취적 의도는 없었는지 새삼 자신을 돌이켜 본다.

미륵이 연화에게 대답한다.

“내 너를 불쌍히 여겨 소원을 들어주마.”

박치성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리를 뻗고 다시 잠에 빠진다.?미륵이 옆에 있으니 자기가 어떤 두려운 행동,?이를테면 연화를 안아 본다거나 하는 행동은 안 하리라고 안심하는 것이다.

나는 고 보살이 틀림없이 미륵님과 만났으리라,?친견했으리라 생각해 본다.?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아내,?실성한 여인은 정신을 차리자 송암사 미륵 앞으로 돌아왔다.?전쟁 없는 세계가 미륵의 세상이다.?미륵이 그를 불렀을까,?그녀의 소망이 미륵을 현몽하도록 했을까?

어쨌든 그녀는 다시 미륵 앞으로 돌아왔다.

연화가 동사자 과부와 송암사를 일으킨다.?몇 년이 지나 과부와 갈등을 빚어 고민하던 연화는 지금의 용화사 터 미륵을 만난다.?그리고는 미륵을 찾아 소원을 빈다.?연화의 처지는 다급하다.?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과부 보살과 대면하기 정말 괴롭다.?이제 연화는 매일 용화사 자리 미륵을 꿈꾼다.?이 터가 꼭 필요하지만 근동에 쩡하게 세력을 떨치는 박씨 문중을 향해 땅을 팔거나 나누어 달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다.?꿈에 현몽하는 미륵만이 연화의 위로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연화는 날마다 눈뜨면 미륵 터로 달려간다.?기도하는 연화의 몸은 땀에 젖는다.?인적이 드문 저녁나절이면 연화는 미륵 옆 개울에서 목욕한다.

무료함을 달래려 산천경개를 구경하러 산책길에 오른 박치성은 우연찮게 목욕하는 연화의 벗은 몸을 본다.?연화는 여전히 그 빛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박치성은 이제 아득히 그의 정념 속에서만 잠자던 연화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난다.?박치성은 연화의 주위를 맴돈다.?용기를 내어,?그리고 견딜 수 없어 연화에게 다가간다.?그리고 연화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날이 갈수록 박씨 종손의 고통은 더해 간다.

이윽고 연화의 소원을 알게 되자 박씨 종손은 이제는 더더욱 사랑을 고백할 수 없다.?박치성은 자기네들 종 터를 염원하는 연화에 대한 자기의 우월한 지위를 결코 이용할 수 없다.그의 양심과 그가 가진 사상이 그의 내면의 감정을 다잡아 주는 것이다.

박치성은 이제 밤마다 꿈을 꾼다.?연화가 미륵과 함께 있다.박치성이 옆에 있다.?연화는 그를 향하여 자세를 바로잡는다.?그러고는 말한다.

“제가 비록 쪽을 지고 살되,?출가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선생님 또한 이를 모를 리 없소.?어려서는 남편 잃은 제가 병들었고,?어른이 되어서는 수도에 몸을 들인 터라 남자를 알 기회가 없었으되,?저 또한 목석은 아니외다.?선생님을 원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선생님과 연을 맺게 되면 간신히 다잡은 나의 수도생활을 포기해야 하오.?그리고 수도생활을 포기한다면 내가 정상인으로 살 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오.?그러니 어쩌겠소.?고통을 알지만 선생님이 나를 잊을 수밖에.”

박치성은 꿈속에서 눈물을 철철 흘린다.?연화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고마워서,?그리고 연화 자신의 처지가 딱함에도 불구하고 연화를 사랑하는 자기의 고통을 알아주는 것이 고맙고,?또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애닯아서이다.

박치성은 문중의 어른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몇 평 안 되는 땅을 나누어준 들 박씨들이 묏자리 쓸 곳이 없는바 아니요,?우리 박씨들이 섬기던 미륵이라 하나 누가 더 가까이서 보살핀다 하면 우리 문중에 득이 되면 될지언정 손해볼 리 없다는 식이다.

그리고 마침내 연화는 박씨 종산 미륵 터 옆에 자리를 잡는다.?비록 고연화가 절 이름을 내세를 뜻하는 이름이되 미륵님이 가진 현세적 의미와도 통하는 용화사라 붙였지만,?미륵은 연화와 박치성 측에서 보자면 현세에서 분명한 도움을 준 부처이다.?연화와 박씨 종손은 삶의 고통과 사랑의 고통을 미륵님 덕분으로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다.?혼자 사는 여자를 차려진 밥상으로 아는 현실에서 남 녀 간의 우정이 비록 에로스의 유혹을 받을지라도,?평등 세상을 향한 걸음일 터일 것이니.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2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2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크기변환_그12

열쇠가 너무 많아 박물관의 열쇠를 찾아내기가 어려웠어.
그런데 아침해가 방긋하고 올라오자 열쇠 하나가 빤짝하는거야.
문을 열자 죽어 있던 그림자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살아났어.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1?[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1?[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나이를 먹을수록 자주 가는 곳이 있다. 하나는 결혼식장이고, 다른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젊은 시절에는 친구들 결혼식장을 다녔지만, 이제는 친구 자녀들의 결혼식장이다. 결혼식장은 선남 선녀가 사랑을 다짐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하는 자리이니까 보는 사람도 즐겁다. 젊었을 때는 나도 그런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즐거웠고, 나이를 먹어서는 나도 저런 사랑과 결혼을 한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추억을 되돌릴 수 있어 기쁘다. 하지만 장례 식장을 다녀올 때는 마음이 무겁다. 축하해주러 가는 길이 아니라 슬픔을 위로하고 함께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래도 부모님 연배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경우가 많지만, 드물지만 주변 친구들이나 그 부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주고 위로해주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자식 세대들의 죽음을 대할 때는 그 아픔이 더 크다.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듯, 그런 고통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친동생의 딸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을 때, 올 해 친구의 다 큰 아들의 죽음을 대했을 때는 그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참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깝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중학교 시절부터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얼굴들, 오래 전이어서 이제는 그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부모의 죽음, 세월호의 죽음들… 아, 생명은 이렇게 죽을 밖에 없는 것인가? 일전에 대학 동기의 모친상을 다녀오고서 잠시 잊고 있었던 죽음을 생각해본다.
 
오래 전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암송하던 시 <제망매가>이다.
 
죽고 사는 길이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이파리처럼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월명사, 제망매가)
 
그 당시는 별 생각 없이 외웠지만 지금 다시 보니 죽음에 관한 성찰이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우발성,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 같은 생명의 유한성, 태어난 곳은 하나이고 분명해도, 죽고 난 후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후의 세계는 과연 있는 것인가? 죽음 이후에 대한 인간 지식의 완벽한 무지, 죽음 이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극락과 천국에서의 만남을 위해 도를 닦고 선을 행하겠다는 윤리적 결단,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극락정토는 있는 것일까? 죽음은 삶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이 짧은 시 안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배에서 태어난 누이가 먼저 간 것을 슬퍼하며 쓴 시이지만 어찌 이것이 오누이만의 사별에 한정될 수 있겠는가?
 

1. “죽고 사는 길이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두운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람들의 통속적인 생각을 넘어선다. 만물이 유전한다는 그의 철학은 변증법의 시작을 알린다. 그의 잠언은 이렇다. “삶은 죽음이다.” “시작은 끝이다.” 만물의 시작에서 종말을 이야기하고,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어두운 철학자의 말을 사람들이 깨닫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죽음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고, 시작이 없다면 끝도 있을 수 없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오직 사물의 한 면만을 보려고 한다. 탄생과 소멸,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그는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불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지혜를 더 깊게 해준다. 불교의 가장 기본 철학인 사성제(四聖諦)는 고(苦)에서 시작한다. 고는 어디서 오는가? 생명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모든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데서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이 탄생하면서 이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먹어야 되고, 먹기 위해서 일해야 되고, 이 몸이 힘들다 보면 병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결국 이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모든 고통은 이 몸을 타고 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자연법칙과 같은 필연성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사물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꽃이 영원히 피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이런 생명의 고통을 해결하려 한 것이다. 난세에 몸과 생명을 보존하려 했던 중국의 도가들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양생을 위한 수련에 힘쓴다. 하지만 열심히 수련해 동안을 유지하고 장생불사의 건강하던 도인의 몸도 한 순간에 호랑이의 먹이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양생법이 해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몸과 생명이 낳고 죽는 그 까닭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장자』 외편에는 부인상을 당한 장자가 죽은 부인의 시신을 앞에 두고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 혜자가 문상을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 한다. 아무리 부인이 죽으면 사내들은 뒷간에 가서 웃는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춤까지 추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이 때 장자가 말을 한다. “그렇지 않네, 아내가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본래 삶이란 게 없었네.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던 것이지.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氣)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죽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흐름과 맞먹는 일. 아내는 지금 ‘큰 방’에 편안히 누워 있지.”(『장자』) 삶과 죽음에 관한 우주의 영원한 이치와 작용을 깨달은 장자가 어찌 곡을 할 것이고, 어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토아의 현인들도 죽음에 대한 이런 깨달음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엄연한 진실과 그로 인한 고통의 감정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헤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통렬하게 일깨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모든 생명은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 이 고통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오직 우리를 창조한 신에 귀의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철학과 종교는 죽음이라는 엄연한 사실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려는 몸짓의 표현이리라. 아침 이슬과 같은 이 생명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법을 깨닫게 하거나, 이 유한한 생명을 창조한 무한한 신의 존재에 귀의하거나 이다. 혹은 우주의 영원한 이법 속에서 삶과 죽음의 물리적 법칙을 깨닫는 것이다. 가을 날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당신은 눈물이 흐르는가? 돌이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모습을 보면 당신은 슬픈가?
 
2. 죽음은 어떻게 오는가? (죽음의 우발성과 우연성)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천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신 분을 문상 갈 때는 비교적 마음이 가볍다. 모든 죽음의 이별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천수를 누리고, 갈 때를 알면서 돌아가신 경우에 우리는 호상이라는 말을 한다. 이런 호상을 맞이할 때는 산 사람들의 마음도 무겁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예측한단 말인가? 아침에 잘 다녀오겠다고 나간 사람이 사고로 갑자기 죽을 때처럼 죽음은 종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를 ‘위험 사회’로 규정한다. 이런 위험은 곳곳에 널려 있다. 거대 도시에서 교통사고, 건물 붕괴, 화재 등의 재난은 다반사다. 재난 사고에 취약한 우리의 경우는 이런 사고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이다.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 재해도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로 더 빈발해진다. 미국 같은 경우는 종종 총기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 행위로 멀쩡한 시민들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고는 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간다. 우발적인 죽음으로 인한 갑작스런 이별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떤가? 벌써 두 달이 넘도록 전국을 난타하고 있는 세월 호 대 참사는 갑작스럽게 닥쳤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 죽음을 대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산자들은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산자들은 자신들의 이 비통한 마음을 죽은 자들에게 투사를 한다. 그래서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은 영들은 필시 구천을 떠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영혼결혼식도 하고 천도 제를 지내기도 한다.
 

울리히 벡/ 출처: blog.joins.com

울리히 벡/ 출처: blog.joins.com

 
이런 우발적인 죽음과 달리 자발적인 죽음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가 세계 제 1위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살을 자발적인 죽음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록 자신이 선택한다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기 결정은 아니다. 자살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선택할 수밖에 없는 타살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선택에 관한 라캉의 유명한 예가 있다. 밤길 골목에서 강도를 마주친 어떤 사람이 “죽을래 돈을 내 놓을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외양은 선택의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상으로 그가 선택할 다른 여지는 없다. 돈을 내놓기 싫다고 하면 죽을 수도 있고, 죽고 나면 돈도 뺏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할 때는 그것 외에는 달리 선택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으로 봐야 옳다. 때문에 높은 자살 율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자율의 형식을 가장한 타율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인 죽음도 있다. 이른바 영웅적인 죽음이 그렇다. 설령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죽음과 대결하고 그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이다. 자기 생을 통해 타인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영웅들의 죽음이 그렇다. 생명보존의 욕구는 모든 생명체의 자연적 본능이다. 그런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한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이루어지는 영웅적 선택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형태의 죽음은 죽음을 미리 앞서 예비하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결단’으로 묘사한다. 이런 결단은 오직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인간만이 자신의 신체가 소멸되는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 아마도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이런 자발적이고 영웅적인 죽음에서 드러나지 않겠는가? 그의 신체는 소멸해도, 그의 정신은 산자들의 기억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지 않겠는가?
 
 

삶의 고통에 대처하는 법: 에피쿠로스의『쾌락』<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3

삶의 고통에 대처하는 법:?에피쿠로스의『쾌락』<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3

한길석(한양대)

 

 

아래 글은 앙드레 보나르의?『그리스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구성한 것이다.?

 

편견과 오해

에피쿠로스(Epikouros,?기원전?341년~기원전?271년)는 종종 사람들에게 무분별한 쾌락에 빠지도록 유혹한 악마로 여겨진다.?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그는 유물론을 가르치고,?신에 대한 믿음을 조롱했으며,?즐거움의 교리를 가르치는?‘돼지들의 학교’를 만들었다.?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오해다.?그는 난봉꾼의 성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금욕적 삶을 추구한 인물에 가깝기 때문이다.?물론 그가 인간 삶에 있어서 쾌락을 추구한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그가 말하는 쾌락이란 말초적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거듭된 고통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살아가며 얻게 되는 기품있는 쾌락이다.?그런 까닭에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기원전?99년~기원전?55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인간의 실존을 수많은 폭풍과 암흑에서 끌어내어,?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 속에,?이루 말할 수 없는 빛의 세계 속에 정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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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시대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가 된 까닭은 그의 시대와 삶이 고통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그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아테나이는 그리스의 맹주에서 알렉산드로스 왕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필립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왕에 의해 폴리스 체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기원전?307년~261년까지 아테나이는?46년 간 전쟁과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이 혼돈의 시기에 면면히 유지되었던 시민적 연대의 정신은 대부분 사라졌다.?칼과 강간의 시대였으며,?살육과 방화,?살해와 약탈이 일상화되던 폭력의 시대였다.

하지만 폭력의 시대는 이미 펠로폰네스 전쟁기부터 시작되었다.?전쟁은 중산층의 삶을 무너뜨렸고 양극화는 극심해졌다.?전쟁으로 인해 노예는 증가했고 자유시민의 삶의 터전은 좁아지기만 했다.?수많은 노예를 거느린 이들의 거대한 생산력에 경쟁할 수 있는 중산 시민이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중산층에서 날품팔이 노동을 하는 자유시민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늘어나기만 했다.?이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무료 노동을 하는 노예가 흔한데 굳이 노임을 지급하면서 자유시민에게 노동을 시킬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이리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 일도 얻지 못한 채 떠도는 빈민이 늘어나기만 했다.?한 때 폴리스는 빈곤한 자유시민들의 생계를 위해 식량과 임금을 보전해주었다.?그러나 국가의 재정은 곧 고갈되었다.?아테나이는 인구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늘어나는 빈민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기민정책을 취하기도 했다.?이민을 강요받은 이들 중 일부는 할 수 없이 무장 조직을 만들어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이 되기도 했다.?이 모든 일의 근원에는 제국주의적 확장 정책과 노예제가 있었다.?그중에서도 노예제는 폴리스를 유지하는 중요한 원천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좀먹는 재앙이기도 했다.

아테나이의 위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점령이었다.?그리스 세계에 존재하던 폴리스적 삶의 문화를 붕괴시킨 마케도니아는 노예제 폐지 금지 정책을 관철시켰다.?이는 그리스 민족이 처한 재앙적 위기를 타개할 마지막 탈출구마저 봉쇄해버린 조치였다.?이로써 양극화는 돌이킬 수없이 악화되었다.?폴리스의 붕괴와 함께 그들의 인생을 지탱해주던 모든 가치와 삶의 문화들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전쟁과 폭력,?기아와 기근을 막아주던 폴리스라는 보호처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적 삶을 지속할 수 없었다.?이제는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안정적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 의식은 사적 개인의 각자도생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폴리스 체제의 멸망과 경제 위기로 인해 발생한 모든 불행 앞에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졌다.?모든 것은 인간의 판단과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우연의 손에 좌우되는 것 같았다.?그리하여 신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두려움이 기승을 부렸으며,?우연의 여신인 튀케(tyche)를 숭앙하는 풍조가 일반화되었다.?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연과 사회를 움직이는 법칙을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는데,?이제 인간들은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세계와 인간의 삶을 신적 힘과 우연에 기대 해명하고자 했다.?삶의 안전판이 결여되자 불안의 고통에 휩싸인 사람들은 종교적 미망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되었고 어리석음은 세상을 뒤덮게 된 것이다.

 

개인의 구원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는 고통의 시대를 건너기 위한 처방으로 사회 개혁 보다는 개인적 구원을 제시했다.?이것은 그의 시대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이미 시대의 역사는 너무도 참혹한 처지에 있어 사회적 진보나 정의의 회복을 통해 타개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다.?사회적 개혁과 정의를 외쳐도 호응해줄 사람들과 가치는 소멸한 지 오래였다.?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어 나 아닌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고,?공동체적 삶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사람들은 그저 저마다의 극심한 고통과 비참에서 해방되고 싶었다.?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꿈꿀 수 있는 해방이란 애석하게도 이처럼 개인적인 것이다.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쁜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하지만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기쁜 인생을 향유하지 못한다.?인생이 기쁘지 않은 까닭은 자기 삶에 대한 불안감이다.?불안의 고통은 두려움으로부터 온다.인간의 가장 근원적 두려움은 자기 삶의 최종적 파멸로서의 죽음이다.?그런데 죽음이란 살아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작용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감각에 의존하는데,?죽으면 이러한 감각을 잃게 된다.”?즉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쁘게 되지도 않고,?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 된다.?우리가 죽게 되면 죽음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없다.?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죽음에 대한 고통이란 죽음을 경험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한 고통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죽음이 닥쳤을 때라도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기에 죽음이 두려운지 조차도 느낄 수 없다.?그러니 죽음이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우리는 한순간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동요란 귀신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의 공포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죽음 다음가는 공포는 신에 대한 공포다.?모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불행해진 이유가 신이 불경한 자기 행동에 분노하여 징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인간들은 제사장들에게 재물을 제공하면서 신의 전조를 읽어줄 것을 요청한다.?그리하여 엄청난 비합리성이 판을 치는 불의한 사회가 되어버린다.?종교적 권고는 심지어 자기 자식을 신에게 공양하는 범죄를 신성한 의례로 여기게 하는 미혹을 유포시키기도 했다.?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종교로 인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악의 심연(Tantum religio potuit suadere malorum)”은 인간의 삶을 고통에 휩싸이게 만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인간의 행위에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등의 감정을 함부로 남발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신은 불멸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따라서 그의 불멸성과 축복에 어울리지 않는 속성들,?즉 걱정,?근심,?분노 등을 신에게 갖다 붙이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신은 인간과 같이 근심하거나 걱정에 휩싸이고 분노하는 존재가 아니다.?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에게 악한 자들은 신의 징벌을 통해 불행해지고,?자기에게 선한 자들은 신의 축복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하지만 이런 사고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인간이나 하는 것이지 지성적 존재인 신이 취하는 것일 수 없다.?따라서 신은 우리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런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며,?아무런 징벌도 상도 내리지 않는다.?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오직 지상의 일에만 관심을 기울인 유물론자

에피쿠로스는 자연의 변화에 대해 신의 개입이나 영혼의 작용 등의 설명 방식을 거부하고 오직 물질적 관계로만 설명한다.?그는 원자론을 받아들여 원자들의 이합집산과 상호 작용에 의해 자연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불경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이 과격한 입장은 고대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는 신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데에 훨씬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였다.?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져야 자연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면서 우리의 문명 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자연학이 없다면,?우리는 순수한 쾌락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자연의 느닷없는 변화를 이성적 연구를 통해 합리적으로 해명하려 하지 않고 신의 분노로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쾌락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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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쾌락주의자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해서 죽음에 이르기 전에 겪게 되는 신체적 고통을 부정할 수는 없다.?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체적 고통은 결코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왜냐하면?“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 뿐이다.?극심한 육체적 고통도 여러 날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그러니 참으면서 살아가게 된다.?설사 고질적인 질병이 있어서 고통이 계속 된다하더라도 그러한 고통은 그것보다 큰 쾌락의 경험에 의해 잊혀질 수 있는 것이다.?격심한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여 마음이 흔들리도록 놔두지 않고 그것이 지나가도록 의연히 기다린다면,?어느덧 다른 육체적 쾌감에 의해 그 고통에서 놓여나게 된다.?한번쯤 그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우리가 겪는 고통이 그 정도의 것이라면,?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견뎌낼 역량이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고통의 순간을 견뎌내고 다가올 쾌락을 기다리는 의연함과 용기일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이러한 초연함은 결코 관념적인 허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그는 평생동안 극심한 위장 장애를 앓았으며(하루에 음식을 두 번씩 토하곤 했다),?오랫동안 방광염에 시달리다가 결국 심한 결석 질환으로 인해 절명했다.?너무나 병약한 나머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지내야만 한 적도 많았다.?육체적 고통에서 자유로운 적이 거의 없었던 그였기에 쾌락에 대한 의지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극심한 고통의 순간이 잦아들 때 불현 듯 경험하는 싱그러운 바람과 향긋한 공기,?그리고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한모금의 물과 한조각의 빵은 그 어떤 기물과 성찬이 주는 쾌감보다도 컸을 것이다.?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데에는 그러한 소박한 쾌감으로도 충분했다.?그래서 그는 신체의 단순한 필요,?기초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얻게 되는 쾌감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일단 제거되면,?육체적 쾌락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단지 형태만 바뀔 뿐”이기 때문이다.

허기와 갈증과 추위와 더위에 시달릴 때 그것의 욕구를 채워주면서 더 이상 배고프지도,?목마르지도,?춥지도,?덥지도 않게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더할 나위없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고통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곧 쾌락이다.시시해보이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소박한 사실이다.?우리가 커다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으려면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에 단호히 응답할 줄 알아야 한다.?진정으로 배고플 때 먹고,?정말로 목마를 때 마셔야만 한다.?자연적 필요가 아니라 인위적 충동에 의해 쾌락을 추구할 때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고통의 대가도 치러야 한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육체의 자연적 욕구를 충족시킨 이후에는 더 나은 생계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확보하느라 노력할 이유가 없다.?이러한 삶은 인위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이다.?하지만 그것은 삶의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할 만한 어리석은 짓이다.?현자는 삶이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날,?이날의 매 순간을 위한 것임을 아는 이다.?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단지 소박한 몇몇의 것들만 있으면 된다.?이러한 사실을 강렬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욕망의 어리석은 타력에 제 몸과 정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절제의 의식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있다.?에피쿠로스에 의하면 기쁨과 쾌락은 오직 인위적 욕구의 절제를 알고,?의연함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이만이 얻게 되는 보상이다.

그래서 한 고인은 에피쿠로스의 삶을 이렇게 평하였다. “밥 한 술 뜨고,물 한 모금 마시고,?등짝을 눕히고 자는 것,?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다.?그는 새벽이 되면 벌써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하고도 토론할 태세를 갖추었다.”?이것이 적잖은 사람들이 방탕의 화신이자 난봉꾼으로 몰아세운 이의 진면목이다.

 

우정,?최고의 기쁨

“행복을 얻기 위해 지혜가 일생동안 확보하는 것 중 지금껏 가장 큰 것은 우정을 얻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와 제자들은 그의 작은 안뜰에 모여 우정을 나누었다.?에피쿠로스의 안뜰은 폴리스의 몰락으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인간들에게 새로운 우정의 공동체를 선사하였다.?모름지기 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삶을 경험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대지 전체가 고통 속에서 산다.?그렇기 때문에,?이렇게 고통스러운 삶 때문에,?우리 인간들은 가장 많은 선물을 선사받았다.”?그것이 바로 우정이다.?고통의 보편성에 대한 각성은 모든 인간을 친구로 삼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우정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인 그의 정원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수많은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즐거움을 나누었다.?여성은 더 이상 남성들의 노예로 취급되지 않았다.?그의 정원에서는 노예들도 친구로 대우받았다.

우정은?“도움을 필요로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삶의 필요가 우정을 탄생”시키는 것이다.?우정은 이렇게 이익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우정이 반드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적 필요의 요구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다.?우정은?“이로움을 얻는 것보다 이로움을 주는 것이 더 즐겁기 때문에”?추구될 수 있다.?그런 면에서 우정은?“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될 수 있다.”?이러한 상승은 친구에 대한 믿음의 관계를 공고히 한다.?우정이 소중히 여겨지는 까닭은 흔히 우리는 친구들이 반드시 우리를 직접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그보다는?“친구들이 우리를 도와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이 도움의 믿음이 깨지면 세상은 고립의 고통으로 넘쳐난다.

“우정이 춤추면서 세상의 주위를 돈다.?그리고 소리친다.?모두 일어나라!?그리고 노래하자!?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에피쿠로스-

 

주인으로 살아가기 : 맹자의 호통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2

주인으로 살아가기?:?맹자의 호통?<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2

송종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지식인과 대장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지식과 권력은 불가분한 관계를 맺는다.?어떤 지식이 어떤 권력을 위해 역량을 발휘하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월호’사건이 발생한 뒤 한국이라는 국가 전반의 무능과 부조리가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다.?이 시각에도 정부는 여전히 중심을 못 잡고 그에 따라 민심은 심상치 않게 동요한다.?이 속에서도?‘지식인(지성인)’들은 무시 못 할 작용을 한다.?대다수 지식인이 정부의?‘재난관리 및 위기대처’의 총체적 부실을 비판한다.?특히 근본적 대책,?곧 정치,?사회,?교육,?문화,?심지어 경제까지 그 밑바탕부터 성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발언도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자주 나온다.?한 마디로,?철학과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그 반성이 잘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지식은 생활에 유용할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잠재적 권력이다. “배워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조차 하나의 권력이다.?그런데?‘사람구실’을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가방끈’?긴 지식인인가??아무리?‘지성인’으로 어여삐 치장해도?‘전문지식’을 앵벌이 수단으로 먹고사는 사람의 인생은 비루하다.?수입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지식인 스스로 초라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자괴감에 눌려 지내기 마련이다.?이런 자괴감조차 못 느끼는 동업자도 많다.?여기서 다룰 맹자(孟子)라는 인물도 전국시대 그 당시에 자유 직업인으로서 지식인[士]에 속했던 사람이다.?그런데 그는 비루하거나 굴욕적이지 않고?‘대장부’로 살다 죽었다.?어찌 그런 일이…??사람구실에 대한 성찰부터 나라 기초를 다시 놓는 일까지, 2,300년 전 맹가(孟軻)?선생의 호통을 들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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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儒家)의 원류

유가(儒家)의 학문적 맥락은 은상(殷商)시기 이래의 무(巫)?사(史)?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유가는 서주(西周)시기의?‘예악(禮樂)’의 전통을 이어받았고,?하?은(상)?주?3대의 선왕(先王)을 가치의 표준으로 삼았다.?언필칭 요순(堯舜)이요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을 추존했다.?아울러 혈연에 뿌리를 둔 인륜을 중시하고 현세에서의?‘일의 성취[事功]’를 추구했다.

은상 및 서주시기에?“학술은 왕실에 있었다.[學在官府]”?전적(典籍)과 문헌을 비롯해 천문역학,?의학?약학,?역사,?복서(卜筮)?같은 전문지식이 모두 왕실-관부에 속해 있었다.?전문지식을 도맡은 관원들은 무(巫)?사(史)?축(祝)?복(卜)으로 불린 문화 전문가들이다.?이들은 지위를 세습하면서 전문지식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독점했다.

이후 동주(東周)?시기에 철기문명이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사회경제적 대변동이 일어난다.?이 변동은?“학술이 민간의 전문가에게 있는[學在私門]”?결과를 낳는다.?서주시기 귀족계층의 말단인 사(士)들 가운데 일부는 봉지(封地)가 상징하는 계급질서로부터 일탈해 봉록(俸祿)을 받는 자유직업인이 된다.?이전까지 벼슬아치들[卿,?大夫]의 가신(家臣)이자 식전(食田)에 묶였지만 이제는 여섯 과목의 기예[六藝:?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배워서 무사 또는 문사로 일하며 봉록을 받았다.?예컨대 공자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무사의 기예를 배워서 하급군관이 되었고,?노담(老聃;?老子)은 문사의 기예를 배워서 주나라 왕실의 도서관 관장[守藏史]을 했다.?공구(孔丘:?孔子)는 회계[委吏]?일을 보았다.

주지하다시피 공자(孔丘:?서기전551-서기전479)는 유가를 창시했고,?그 학설은 제자들과 재전제자들이 정리한『논어』에 기록되어 있다.?공자의 사상은 흔히?‘예(禮)’와?‘인(仁)’으로 요약된다. (지난 시간에 공자를 다루었으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맹자(孟軻:?전371?-전238?)는 증자(曾參:전505-전436)?및 자사(子思:?전483-전402)의 사상을 이어받고 공자의 인학(仁學)을 사회적으로 발휘하는 데 주력했다.?또?“선왕을 본보기로 삼기[法先王]”를 힘써 주장하고?“왕도정치(王道政治)”와?“인정(仁政)”의 이상을 부르짖었다.?아울러 인간의 본성은 선(善)하다는 자신의 논지를 인정설의 기초로 삼았다.?맹자는 또?『상서(尙書)』에 보이는?“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民爲邦本)”라는 말,?그리고?『좌전(左傳)』의 중민경신(重民輕神:백성을 무겁게 여기고 신을 가볍게 여긴다.)의 사상을 자신의 논리로 흡수해서?“백성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民貴君輕)”라는 너무도 유명한 말을 했다.?유학의 민본주의는 맹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국가가 이익에 몰두한다면

맹자(孟子)가 양혜왕을 만났다.?왕이 말했다. “노인께서 천릿길을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맹자가 대답했다. “왕은 하필 이익(利)을 말씀하십니까??오직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왕께서?‘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까’?하시면 대부(大夫)들은?‘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을 이롭게 할까’?하고,?선비나 평민들은?‘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하여,?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利)를 취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만승(萬乘)의 나라(역자:?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天子國)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천승(千乘)을 가진 제후(諸侯)의 집안이요,?천승의 나라(역자:?諸侯國)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백승(百乘)을 가진 대부(大夫)의 집안이니,?만승에 천승을 취하고 천승에 백승을 취하는 것이 적지 않은 것인데,?만일 의(義)를 뒤로 하고 이(利)를 앞세운다면?(군주의 것을)?빼앗지 않으면 만족스럽지 못할 것입니다.?어질면서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고,?의로우면서 군주를 뒤로 하는 자는 없습니다.?왕께서는 인의(仁義)만을 말씀하실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孟子見梁惠王 王曰:???不遠千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孟子對曰:?王何必曰利??亦有仁義而已矣.?王曰『何以利吾國』??大夫曰 『何以利吾家』??士庶人曰 『何以利吾身』??上下交征利而國危矣.?萬乘之國弑其君者,?必千乘之家;?千乘之國弑其君者,?必百乘之家.?萬取千焉,?千取百焉,?不爲不多矣.?苟爲後義而先利,?不奪不?.?未有仁而遺其親者也,?未有義而後其君者也.?王亦曰仁義而已矣,?何必曰利???<梁惠王 上?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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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이 초(楚)나라에 가던 길에 석구(石丘)에서 맹자와 만났다. (…)?송경이 말했다. “내 들으니 진나라와 초나라가 교전을 벌이고 있다네.?초왕을 만나보고 달래어 싸움을 그만두게 하려고 하네. (…) ”?맹자가 말했다. “상세한 내용은 여쭙지 않겠지만 그 취지는 들어보고 싶습니요.?달래기를 장차 어찌하려 하십니까?” “교전의 불리함을 말하려 하네.” “선생의 뜻은 크지만 말씀은 안 될 말입니다..?선생이 이익을 가지고 진?초의 왕을 달래면 진?초의 왕이 이익을 좋아하여 삼군의 군대를 물릴 것인데,?이는 삼군의 군사가 기꺼이 군사를 물리되 이익을 기뻐하는 것입니다.?신하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여 군주를 섬기고 자식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여 부모를 섬기며 아우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하여 형을 섬긴다면,?이는 군신과 부자와 형제가 마침내 인의를 버리고 이익을 생각하여 서로 대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고도 망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하필 이익을 말씀합니까?”

(宋?將之楚,?孟子遇於石丘. (…)?曰:??吾聞秦楚構兵,?我將見楚王說而罷之. (…)???曰:??軻也請無問其詳,?願聞其指.?說之將何如????曰:??我將言其不利也.???曰:??先生之志則大矣,?先生之號則不可.?先生以利說秦楚之王,?秦楚之王悅於利,?以罷三軍之師,?是三軍之士樂罷而悅於利也.?爲人臣者懷利以事其君,?爲人子者懷利以事其父,?爲人弟者懷利以事其兄.?是君臣??父子??兄弟終去仁義,?懷利以相接,?然而不亡者,?未之有也. (…)?何必曰利????<告子 下?4>

 

민심은 곧 천하다.

맹자가 말했다. “걸주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다.?백성을 잃었다는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이다.?천하를 얻는 데는 방도가 있으니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것이다.?백성을 얻는 데는 방도가 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을 것이다.?마음을 얻는 데는 방도가 있으니 원하는 바를 주어서 모이게 하고,?싫어하는 바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孟子曰:??桀紂之失天下也,?失其民也;?失其民者,?失其心也.?得天下有道:得其民,?斯得天下矣;?得其民有道:?得其心,?斯得民矣;?得其心有道:?所欲與之聚之,?所惡勿施爾也….?) <離婁 上?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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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가 양혜왕에게 말했다.) “(…)?산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례 지냄에 유감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입니다. (…) 70살 먹은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젊은이들이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 (…)?

(?(…)?養生喪死無憾,?王道之始也. (…)?七十者衣帛食肉,?黎民不飢不寒,然而不王者未之有也. (…)?) <梁惠王 上?3>

 

왕도와 패도

맹자가 말했다. “힘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자는 패자(覇者)이니,?패자는 반드시 대국을 소유해야 하고,?덕(德)으로써 인을 실행하는 자는 왕자(王者)이니,?왕자는 대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탕왕(湯王)은?70리를 가지고 하셨고,?문왕(文王)은?100리를 가지고 하셨다.?힘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해서요,?덕으로써 남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속에서 기뻐하여 진실로 복종하는 것이다.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에게 심복(心腹)한 것과 같은 것이다. (…)”

孟子曰:??以力假仁者?,??必有大國,?以德行仁者王,?王不待大.?湯以七十里,?文王以百里.?以力服人者,?非心服也,?力不贍也;?以德服人者,?中心悅而誠服也,?如七十子之服孔子也. (…)?

<公孫丑 上?3>

 

인정(仁政)의 근거:?성선설

맹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仁心)을 갖고 있다.?선왕들이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기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仁政)를 행하셨으니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DSC09068-1정치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림은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사람들이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지금에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가지니,?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고,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명예를 구해서도 아니며, (잔인하다는)?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러한 것도 아니다.?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요,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요,?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시비지심은 지의 단서다.?사람이 이 네 단서를 가지고 있음은 사지를 갖고 있음과 같으니 사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요,?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다 넓혀서 채울[擴充]?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것이니,?만일 능히 이것(=사단)을 채운다면 족히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만일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孟子曰:??人皆有不忍人之心.?先王有不忍人之心,?斯有不忍人之政矣.?以不忍人之心,?行不忍人之政,?治天下可運之掌上.?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由是觀之,?無惻隱之心,?非人也;?無羞惡之心,?非人也;?無辭讓之心,?非人也;?無是非之心,?非人也.?惻隱之心,?仁之端也;?羞惡之心,?義之端也;?辭讓之心,?禮之端也;?是非之心,?智之端也.?人之有是四端也,?猶其有四體也.?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自賊者也;?謂其君不能者,?賊其君者也.?凡有四端於我者,?知皆擴而充之矣,?若火之始然,泉之始達.?苟能充之,?足以保四海;?苟不充之,?不足以事父母.?)

<公孫丑 上?6>

 

군자는 도(道)에 뜻을 둔 사람이다.

맹자가 말했다. “공자께서 노나라 동산(東山)에 올라가시어 노나라를 작게 여기셨고,?태산(泰山)에 올라가시어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그러므로 바다를 구경한 사람은 큰 물 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훌륭한 말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물을 구경하는 데에 방법이 있으니,?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한다.?해와 달이 밝음이 있으니 빛을 받아들이는 곳은 반드시 비추는 것이다.?흐르는 물의 물건 됨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흘러가지 않는다.?군자가 도에 뜻을 둔 이상 문장(역자:?훌륭한 성취)을 이루지 못하면?(세상에)?나아가지(역자:?벼슬하지)?않는다.

(孟子曰:??孔子登東山而小魯,?登太山而小天下.?故觀於海者難爲水,?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觀水有術,?必觀其瀾.?日月有明,?容光必照焉.?流水之爲物也,?不盈科不行;?君子之志於道也,?不成章不達.?) <盡心 上?24>

 

영예와 치욕[榮辱]

맹자가 말했다. “인하면 영화롭고 인하지 못하면 치욕을 받나니,?지금에 치욕을 싫어하면서도 불인에 처함은,?이는 마치 습한 것을 싫어하면서도 낮은 곳에 처함과 같은 것이다.?만일 치욕을 싫어할진댄 덕을 귀히 여기고 선비를 높이는 것만 못하니,?현자가 지위에 있으며,?재능이 있는 자가 직책에 있어서 국가가 한가하거든 이때에 미처 그 정사와 형벌을 밝힌다면,?비록 강대국이라도 반드시 그를 두려워할 것이다…”

孟子曰:??仁則榮,?不仁則辱.?今惡辱而居不仁,?是猶惡?而居下也.?如惡之,莫如貴德而尊士,?賢者在位,?能者在職.?國家閒暇,?及是時明其政刑.?雖大國,必畏之矣…??<公孫丑 上?4>

자포자기(自暴自棄)

맹자가 말했다. “스스로 해치는 자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스스로 버리는 자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말할 때 예의를 비방하는 것을 자포라 하고,?내 몸은 인에 거하고 의를 따를 수 없다 하는 것을 자기라 한다.?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거처하지 않으며,?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애처롭다.”

(孟子曰:??自暴者,?不可與有言也;?自棄者,?不可與有爲也.?言非禮義,?謂之自暴也;?吾身不能居仁由義,?謂之自棄也.?仁,?人之安宅也;?義,?人之正路也.曠安宅而弗居,?舍正路而不由,?哀哉!??<離婁 上?10>

 

대인과 소인

맹자가 말했다. “대인이란 자는 말은 믿게 하기를 기필하지 않으며,?해설은 과단성 있게 하기를 기필하지 않고,?오직 의가 있는 데로 하는 것이다.”

(孟子曰:??大人者,?言不必信,?行不必果,?惟義所在.??<離婁 下?11>)

맹자가 말했다. “대인이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자이다.”

孟子曰:??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離婁 下?12>

맹자가 말했다. “예가 아닌 예와 의가 아닌 의를 대인은 하지 않는다.”

孟子曰:??非禮之禮,?非義之義,?大人弗爲.???<離婁 下?6>

맹자가 말했다. “(…)?몸에는 귀천이 있고 소대가 있다.?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해치지 말며,?천한 것을 가지고 귀한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하니,?작은 것을 기르는 자는 소인이 되고,?큰 것을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되는 것이다. (…)”

孟子曰:??…?體有貴賤,?有小大.?無以小害大,?無以賤害貴.?養其小者爲小人,養其大者爲大人. (…)???<告子 上?14>

공도자가 물었다. “똑같이 사람인데 혹은 대인이 되며,?혹은 소인이 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맹자께서 말했다. “그 대체를 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고,?그 소체를 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는 것이다.” “똑같이 사람인데,?혹은 그 대체를 따르며 혹은 그 소체를 따름은 어째서입니까?”?맹자가 말했다. “귀와 눈의 기능은 생각하지 못하여 물건에 가리어지니,?물건(外物)이 물건(耳目)과 사귀면 거기에 끌려갈 뿐이요,?마음의 기능은 생각할 수 있으니,?생각하면 얻고,?생각하지 못하면 얻지 못한다.?이것은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니,?먼저 그 큰 것에 선다면 그 작은 것이 능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이것이 대인이 되는 이유일 뿐이다.”

公都子問曰:??鈞是人也,?或爲大人,?或爲小人,?何也????孟子曰:??從其大體爲大人,?從其小體爲小人.???曰:??鈞是人也,?或從其大體,?或從其小體,?何也???曰:??耳目之官不思,?而蔽於物,?物交物,?則引之而已矣.?心之官則思,?思則得之,?不思則不得也.?此天之所與我者,?先立乎其大者,?則其小者弗能奪也.此爲大人而已矣.???<告子 上?15>

 

호연지기(浩然之氣)

(공손추가 맹자에게 질문한다.) “(…)?감히 묻겠습니다.?선생님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맹자가 말했다. “나는 말을 알고,?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감히 묻겠습니다.?무엇을 호연지기라 합니까?”?맹자가 말했다. “말하기 어렵다.?그 기(氣)?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정직함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이 호연지기가)?천지(天地)?사이에 꽉 차게 된다.?그 기 됨이 의(義)와 도(道)에 배합하니,?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역자:?기운이 축소)?된다.?이 호연지기는 의리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의DSC09066-1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엄습해 취해지는 것은 아니니 행하고서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으면?(호연지기가)?굶주리게 된다.?내 그러므로?‘告子가 의(義)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니,?이는 의를 밖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는 데 종사하고,?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며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서 송나라 사람과 같이 하지 말지어다. (…)

(…)??敢問夫子惡乎長????曰:??我知言,?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曰:??難言也.?其爲氣也,?至大至剛,?以直養而無害,?則塞于天地之閒.?其爲氣也,?配義與道;?無是,??也.?是集義所生者,?非義襲而取之也.?行有不慊於心,?則?矣.?我故曰,?告子未嘗知義,?以其外之也.?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勿助長也.?無若宋人然?(…) <공손추 상?2>

 

대장부(大丈夫)

(맹자가?景春에게 말했다.) “(…)?천하의 넓은 집(仁)에 거처하며,?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천하의 대도(義)를 행하여,?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며,?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빈천이 절개를 옮겨놓지 못하며,?위무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이를 대장부라 이르는 것이다.”

?(…)?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得志與民由之,?不得志獨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文公 下?2>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1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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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 1828년 ~ 1910년)은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사진출처: www.hemovac.com)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 1828년 ~ 1910년)은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사진출처: www.hemovac.com)

 

고뇌 없는 인생은 발전이 불가능하다. 고뇌야말로 정신이 향상되어가는 과정이다.

–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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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 그 스트레스를 조절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조절을 위한 방안을 강구해내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스트레스 관리에서 문제가 되는 유형의 사람은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 에너지를 쓰느라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때는 그게 힘든 줄도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는 견뎌내야 한다는 확고한 전제 때문에 힘들거나 말거나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소리가 된다. 이는 자기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 인식의 특성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은 항상 상황이 벌어지는 T1시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그 시점이 지난 T2시점에서야 이루어진다. 상황이 벌어지는 시점에는 당황해 ‘이게 뭐지?’ 하다가 상황이 종료된 시점에서야 ‘아 그렇구나!’ 하고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나 자신이 스스로를 ‘내가 이러이러하다’고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어렵게 말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기 어렵다. 타인에 대해서는 파악이 쉽다. 저 사람이 지금 이러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데 사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 쪽으로 편향적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구나 하는 것까지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한 객관적 파악을 하기 힘들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객관으로 두고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메타차원(상위차원)에서 자신에 대해 인식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현재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일이 벌어진 시점이 지난 지금, 어느 정도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즉 제대로 된 인식은 사건 발생 시점이 지나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인 부엉이를 말하는데 지혜의 상징이다. (출처:wikipedia)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인 부엉이를 말하는데 지혜의 상징이다. (출처:wikipedia)

그래서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되어서야 난다.”고 말했다.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을 지칭한다. 헤겔의 이 말은 ‘인식은 항상 한 발 짝 늦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일이 벌어지는 당시에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어떠한 문제에 얼마만큼이나 스트레스 받는지를 파악하지는 못하면서 타인의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상당히 객관적으로 인식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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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견디는 데에만 골몰하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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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타인의 스트레스에 대해 전해들을 때 보이게 되는 반응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뭘 그런 것 가지고 스트레스 받느냐’는 반응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나와는 다르게 반응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뭘 그걸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느냐 생각하지만 오히려 진실은 ‘그러한 것에 스트레스 받는 것이 그 사람의 특성이다’라는 것에 가깝다. 그 사람으로서는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받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도 그것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재방식 때문에 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는 저런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의문을 보이는 반응이다. 이 경우 ‘그 사람은 왜 그런 스트레스의 근원을 빨리 해결하지 않고 계속 견디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스트레스를 우선 견디려고 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그런 큰 스트레스를 받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스스로도 의심스러워지게 되곤 한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지금 그 때로 돌아가 그렇게 다시 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자신이 없는 그런 일들을 헤쳐 나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너무 힘든 것 아니냐?”고 말해주면 그 때서야 ‘정말 이게 힘든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 남들도 힘들어할 일이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내가 힘들다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힘들었을 일이었구나, 힘들어한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누구나 힘들 일이었다는 사실에 억울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힘들 수밖에 없었던 일을 내가 겪어내야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인내력이 부족하거나 어떤 나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힘들었다면 모르겠지만 누가 그 일을 겪어도 그 일은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내가 왜 그러한 일을 겪었어야 했는지 억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여하간 스스로 어떤 일에 얼마만큼의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남들 같으면 받지 않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고, 남들 같으면 많이 스트레스 받을 일인데도 잘 넘기는 경우가 있다. 본인이 너무 견디려는 사람은 아닌지 혹은 너무 견디지 않는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자. 너무 견디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좀 쉽게 쉽게 살아라.” 하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너무 견디지 않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 때문에 못살겠다. 생각 좀 하면서 살아라.” 하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하면 안 된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못 보는 나의 모습을 봐주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를 만나는 사람 세 명이 똑같이 말하면 그 말을 들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나보다 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그 말을 들어 넘기는 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말이 고통스럽다는 것 자체가 그 말이 진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려고만 해서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된다. 그 정도를 알 수 없다면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자.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나요, 아니면 너무 안 견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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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만 해도 안 되고 남 탓만 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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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타인의 잘못은 무시하고 자신의 잘못에만 골몰하면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 실수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 남 탓을 하고 싶은 심리구조상 남 탓을 자꾸 하고 싶게 된다. 내 탓은 생각하려고 노력해도 생각이 잘 안 나지만 남 탓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생각나는 법이다. 물론 우울증을 앓는 경우에는 반대가 된다. 내 탓만 생각나고 남 탓은 생각나지 않는다.

건강한 인식은 내 탓과 남 탓을 현실에 맞게 하는 것이다. 내 잘못이 어느 정도이고 남의 잘못이 어느 정도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남 탓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이고 내 탓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파악해놓고 나면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면 되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변화시킬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두고 왜 변화되지 않느냐고 원망해봐야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두고 변화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주어진 환경과 타인의 행동은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환경은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요청은 할 수 있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는 없다.

생각해보라. 내 행동도 내가 고치기 힘든데 남의 행동이 나의 말에 의해서 고쳐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힘드니까 우리는 자꾸 남이 변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 편이 나에게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돌아가는 방식은 이렇게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방식이다.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은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은 수용하면 된다는 말이 너무 맞는 말이라서 진부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서 철학카운슬링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변화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을 나의 욕망에 맞추어 비틀어서 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을 두고 변화되기를 바라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렇게 바라기만 하고 있는 편이 나의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매한 일이다. 변화시킬 수 있는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으면서 변화시킬 수 없는 남만 붙잡고 통사정하는 우리 마음의 비논리를 잘 직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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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요즈음은 월드컵 시즌이다.?월드컵은 전 세계인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경기다.?지난 두 달 동안 짓눌렀던 세월호의 슬픔도 이 열광을 감출 수는 없다.?사람이 어찌 슬퍼만 할 수 있겠는가??월드컵의 열기가 전 세계를 덮고 있고,?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밤과 낮을 거꾸로 살고 있다.?특정 사건을 가지고 이념이나 인종,?빈부의 격차를 넘어서 열광하는 경우는 드물다.?올림픽 경기를 제외한다면,?단일 구기 종목으로 전 세계의 국가가 고루 예선과 본선에 대표 팀을 파견하는 경우는 축구가 유일하다.?야구는 미국과 동아시아 국가,?그리고 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다면 지구를 대표하는 종목은 아니다.?배구나 하키,?골프 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축구에 열광을 할까??축구에는 인종적?·문화적 차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을까??공을 차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행위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우리나라의 경우도 격구(擊毬)라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 공을 차는 경기가 있었다.?멕시코의 마야 인들도 공을 가지고 노는 오랜 경기 전통이 있다.?이런 전통은 다른 많은 민족이나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공을 발을 가지고 노는 이런 행동의 어떤 면이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 충실한가??축구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직 발로만 하는 운동이다.?골을 막는 골키퍼만이 손을 사용할 수 있으며,?공이 장외로 나가 경기장 안으로 공을 집어넣을 때만 예외적으로 손의 사용이 허락된다.?경기장에서 손을 사용하면 바로 프리킥 벌칙을 받고,?패널티 애리어 안에서 골 키퍼가 아닌 다른 선수들이 손을 사용하면 패널티 킥이라는 최고의 벌칙을 받는다.?혹시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발과 머리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 이런 본능적 행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손은 인간 문명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인류가 직립 원인으로 서면서 비로소 손이 해방된다.?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된 사건은 문명사의 발전에서 획기적 사건일 수도 있다.?이 손은 나무의 과일을 따고,?도구를 제작할 때 사용된다.?도구의 사용은 인간이 직접 몸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대상을 조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도구를 사용하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회 진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또 손은 손가락을 활용하여 셈을 세는 데도 사용된다.?하나 둘로 시작하는 셈은 추상 활동의 시작이다.?이 셈으로부터 숫자의 발견이 이루어진다.?숫자는 자연 대상을 단순하게 계산하는 추상 도구이다.?이 수자로부터 수들의 관계와 비율이 발견되고,?이를 통해 음들의 관계,?물리적 사건들의 관계,?천체의 운동의 법칙 등이 숫자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도구를 제작하고 추상 활동이 발전하는데 있어 그 출발은 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축구에서는 이 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인 규칙이다.?오직 발과 머리만을 사용하고,?그 발의 재간과 헤딩 기술만을 이용해서 공을 골대로 집어넣는 것이다.?이 발은 대지와 연결되어 있다.?가장 원초적인 대지를 딛고서 이 대지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수단이다.?때문에 발은 이런 원초적인 본능과 에너지에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축구가 동서고금의 인종과 문화,?노소와 경제적 빈부 차와 상관없이 고루 환영을 받는 것은 아마도 이런 원시적 본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야구의 경우 홈런을 치면 관중들의 환호를 받고 누상을 한 바퀴 돈 홈런 타자는 다른 선수들과 손을 마주치는 세리모니를 한다.?그 장면은 상당히 절제된 문화 의식과 같다.?하지만 축구에서 골을 넣는 순간 그 선수의 포효를 보라.그는 막장으로부터 올라오는 괴성을 지르면서 온갖 몸동작이 복합된 세리모니를 하면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도 축구의 경우 이런 괴성과 몸동작이 심한 편이다.그것은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수 만 명의 사라들이 운집해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보라.?과거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지 않는가??아니 그 이상이다.?로마인들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끼리 피를 흘리는 대결을 보면서 환호했다.?어떤 경우는 사자와 같은 야수와 싸우는 것을 보고 열광하고,?네로 황제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이 야수들의 밥이 되는 모습에 광분하기도 했다.?그들은 콜로세움에서 이런 원시적이고 야수적인 결투 장면의 피를 보면서 야수적 본능을 대리 충족한다.?아마도 현대의 축구경기는 그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대리 경험할 수 있는 데 가장 가깝지 않을까??그런데 이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발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사회학적으로는 이런 에너지나 정념의 발산 장치를?‘안전도관’이라고 말한다.?이런 도관은 내부의 에너지를 외부로 배출하는 도관의 역할을 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이런 안전도관으로 디오니소스 축제를 활용했다.?니체는?『비극의 탄생』이란 작품에서 그리스 사회를 본적으로 두 가지 판이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이 작품은 니체가?28살에 써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도 했지만,동시에 문헌학의 일반적 전통을 벗어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유명한 미학자 빈켈만은 그리스 정신을?‘아름다움의 정신’으로 간주한다.?아름다움은 무엇보다 수적 황금 비례에 기초한 통일성과 단순성의 미이다.?그에 따르면 그리스 사회는 이 아름답고 밝은?“아폴론적 정신”으로 대변된다.?그런데 니체는 빈켈만의 이런 일반화된 분류를 거부한 것이다.?그리스 사회는 밝은“아폴론적 정신”뿐만 아니라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도 있다는 것이다.?빈켈만이 밝은 아름다움의 정신을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서 보았다면,?니체는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을 주로 비극의 축제에서 확인한다.?비극은 그리스 사회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경제가 발전하는 등 최전성기에 유행한 드라마이다.?그리스의 시민들은 이 비극 공연에 열광하면서 공동체의 유대를 확인하고 정서적인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기도 한다.?이런 비극축제는 중세의 카니발로 이어진다.?니체에 따르면 밝은?“아폴론적 정신”은“개체화의 원리”이고,?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은?“전체와 집단의 원리”이다.?전자는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 구현되고,?후자는 비극이 공연되는 집단 축제(디오니소스 축제/중세의 카니발)에서 드러난다.?축구와 같은 운동경기나 혹은 대규모 집단 응원 행위도 이런 축제와 연관이 깊다.?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세 가지 장벽을 무너뜨린다고 한다.?즉 인간과 자연의 벽,?개체와 공동체의 벽,?의식과 무의식의 벽이 그것이다.?말하자면 디오니소스적 정신은 인간을 자연(무기물)으로 되돌리고,?개체를 공동체와 연결하고,?의식을 무의식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원시적 본능의 발산과 집단 에너지를 하나로 묶는 월드컵 축구를 현대판 디오니소스적 축제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2002년 월드컵 당시 수만의 인파가 거리에서?‘대~한민국,?따단 따 딴단’을 외칠 때 보여주었던 집단 에너지의 일체감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나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를 능가할 정도이다.?이런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은 신화의 세계와 연결될 터인데,?그 당시 동아시아의 오랜 전쟁의 신?‘치우 황제’가 마스코트로 등장한 것도 우연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축구를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운동으로 보거나 축구를 몸만으로 하는 경기라고 단순화하기에는 힘들다.?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발과 머리를 사용하고 있어 머리와는 상관이 없는 몸의 운동으로 보인다.?하지만 개인들의 기량을 쌓는 과정에서 발재간과 헤딩 기술은 몸에 기억된다.?몸은 의식이나 정신활동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 역시 두뇌의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현대 뇌 과학에 따르면 몸이 두뇌의 활동이고,?두뇌는 몸을 기억한다.?뇌의 발달은 다른 육체기관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손이 기억을 하고 몸이 기억을 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복잡하고 현란한 기교를 요하기 때문에 전문 피아니스트라도 연주가 쉽지가 않다.?그는 훌륭한 연주를 위해 반복적인 훈련을 하지만,?그렇다고 악보 전체가 그대로 머릿속에 암기되는 것은 아니다.?설령 암기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지휘자의 손동작과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정확히 어떤 순간에 어떤 건반을 터치하는 것은 암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터치는 기억하는 뇌의 독립적인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말하자면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기억하며,?정교한 손동작이 이루어지는 만큼 뇌의 발달도 이루어지는 것이다.?기억은 손과 뇌,?그리고 환경이라는 특수한 맥락의 합작품인 것이다.?이런 사정은 축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발재간과 헤딩 기술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축구 선수는 오랜 반복 훈련에 따라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능력을 몸과 뇌에 각인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축구를 본능적 활동과 에너지의 발산으로만 보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 될 수 있을 것이다.?축구에서는 다른 모든 경기와 마찬가지로 전술을 이해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과정은 두뇌 플레이가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반복적으로 훈련하면서 몸으로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토탈 사커를 지향하는 현대 축구에서는 고정된 포지션 속에서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 상황에 따른 임기웅변의 역할이 필요한 복잡한 경기라고 할 수 있다.?게다가 축구는 심판의 엄격한 규칙과 지도하에 진행되는 경기이다.?전술을 훈련하는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다른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이런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인지과정만이 아니고,?규칙을 내면화하고 적응하고,?더 나아가서 그것을 응용하는 과정이다.?그것은 끊임없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 타자와 소통하면서 몸으로 체득하는 고도의 훈련이라 할 수 있다.?더욱이 상업화된 프로 축구에서는 선수들은 다른 문화권과 언어권 출신의 다른 선수들과 소통하는 어려움도 필수적으로 겪게 된다.?이런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은 몸으로 익힌 고도의 두뇌 활동을 요구한다.?때문에 이런 경험을 거친 뛰어난 선수들이 은퇴 후 해설 경기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맡는 것을 보면 그들의 지능이 일반인들을 상회한다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이렇게 본다면 축구가 단순히 발재간과 헤딩기술을 활용한 원시적 운동이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오늘 날 현대 축구는 다른 어떤 경기들보다 대표적으로 상업화된 경기이다.?선수들의 몸값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고,?축구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웬만큼 재정이 뒷받침되기 전까지는 엄두도 내기 힘들다.?스타 선수의 몸값은 웬만한 중견기업의 수익을 넘어설 정도이다.?지역 간 격차도 심해 리그별 수준 차는 무엇보다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다.?세계축구협회(FIFA)가 유엔 못지않게 권력기관이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고, FIFA의 수장은 세계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월드컵을 유치하는 과정은 올림픽 유치 못지않게 국가 간에 사활을 건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렇게 보면 축구는 가장 자본의 영향을 받는 현대적인 운동 산업의 하나라 할 ??? 있다.?동시에 축구는 가장 원시적인 본능에 기초한 경기,?몸과 뇌 그리고 상황이 집적된 고도의 기억 메카니즘에 기초해 있고,?적과 아군으로 나누어진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게임이다.?그렇다면 축구는 원시와 현대,?본능과 이성,?몸과 정신,?자기와 타자,?선수와 관중 등이 종합적으로 집적된 경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가장 상업화되고 현대화된 경기 속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가장 원시적 본능과 에너지로 인해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축구를 보기 위해 일상의 스캐쥴을 무시하고,?축구를 보면서 열광을 하고,?이 축구의 승패에 실의와 환희를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

 

“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나가 7살에 병이 들었다. 내 우로 언니가 둘 있었는데, 큰 언니가 먼저 병이 들었다. 울 언니는 얼굴에 병 표가 마이 나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고, 나는 병 표가 얼굴에는 안 나고 다리에 나더라. 그것도 무릎 우로 나서 치마로 감추모 안 보였다. 큰 딸도 한스러운데 셋째 딸까지 그 험한 병에 걸리고 보이 울 아부지 엄마 맘이 어땠겠노. 내가 펄쩍거리고 뛰다가 행여라도 다리에 난 병 표가 들킬까봐 울 엄마는 나보고 뛰지도 못하게 했다.

7살에 병이 들어도 나는 내가 병든 줄을 몰랐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나를 환자 취급 안 했거든. 어린 기 병 걸린 게 맘이 아파서 내말은 무슨 말이든지 전부 다 들어줬다. 국민학교도 갔다. 집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학교를 가니까 자연적으로 알게 되더라. 나도 모리게 자꾸 손이 치마로 가서 잡고 있었제. 펄쩍 거리고 뛰다가 다리 병표가 들킬까 무서버서 체육시간이 되모 자꾸 뒤로 가는 기라.

하루는 공부 마치고 집에 갈라고 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부르더라. 가니까 손을 펴 봐라, 손을 뒤집어 봐라 하데. 요리조리 보다가 고마 치마를 걷어 보라는 기라. 나는 안 걷을라꼬 자꾸 움찔움찔 했다. 그래도 어짜겄노 그마 다리 병표를 봤는 기라. 담임 선생님은 아무 소리 안 하고 “내일부터 집에 있어라.” 하고 나가더라. 응, 그 말은 인자 학교 오지 말라는 기지. 혼자 터벅터벅 걸어와서 말하니까 울 엄마도 집에 있으라카더라. 그 길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다.

뭐라고? 원망스럽지 않냐고? 모리겄다. 그때는 내가 큰 죄를 지은 것만 같고 또 선생님이 오지 말라니까 가모 안 되는 걸로 생각했고. 그래도 그때는 울 엄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괜찮았다. 학교는 우리 아버지가 우기서 보내줬다. 엄마는 문맹이다. 내 우에 작은 언니는 나하고 큰 언니 때문에 참 마이 힘들었다.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밖에 나가모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랬다.

대성당 앞 벚나무

대성당 앞 벚나무

집에만 있으께 참 심심하더라. 학교를 안 갈 때는 몰랐는데 다니다 안 다니니까, 아이고 그 참 심심하데. 동네 아(이)들이 학교 갈 때는 집에 있다가 길에 아(이)들이 안 보이모 산으로 놀러갔다가 바닷가로 내리왔다가 그리 하다가 또 아(이)들이 학교서 올 때쯤 되모 집에 콕 들어왔다. 죄 지은 것도 없지만 어린 맘에 산으로 바닷가로 쏘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안 보일라고 애 마이 썼다.

큰 언니는 얼굴에 볼긋볼긋하게 나더라. 얼굴에 그리 나께 할 수 없이 학교도 못 가제. 집에 있으께 병이 나도 자연히 밥을 해 묵게 되는 기라. 작은 언니는 학교 가고 나는 어리고, 또 내 밑에 남동생은 마이 어린 기라. 아부지하고 엄마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밖에서 일을 했다. 그라니까 큰 언니가 엄마 노릇을 해 줬제. 병들어도 언니가 집에 있으께 부모님도 그리 부지런히 날뛰었고, 우리 식구는 밥 안 굶고 쌀밥도 묵고 했다.

하루는 언니가 물양동이를 이고 우물에 물을 뜨러 갔다 아이가. 근데 우물가에 있던 여자들이 언니를 보고 소리 지르고 물을 끼얹고 난리를 피웠는 기라. 와 그랬겠노. 물 못 떠가게 그라제. 병 걸리 갖고 물뜨러 오께나 저거한테 병 옮는다고 그 난리를 피웠제. 여자들이 떼거지로 달리 들어서 언니를 이리저리 흔들고 옹기를 집어 던지고 물을 바가지 채로 갖다 붓고 물담아 이고 다니는 옹기를 발로 차고…… 휴우 휴이….

물에 흠뻑 빠져갖고 혼이 나가서 들어왔는데, 그날로 언니가 병이 났다 아이가. 그만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하는 기라. 여자 셋만 있으모 그마 혼이 나가는 기라. 그마 셋이 지나만 가도 그래. 그라이 집에만 있는데 울 부모 맘이 어땠겠노. 어데 가서 따지지도 몬하고 누구한테도 말 몬했다. 그날 들일 갔다가 들어오셔서는 언니 그 꼴 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쉬지도 않고 일만 하더라.

나는 나이가 없어서 그때는 그 심정을 몰랐제. 한참 살고보이 인자는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이 병은 옮는 기 아이다. 우리 식구 여섯 중에 큰언니하고 나만 걸린 거 보모 모리나. 걸릴라 쿠모 다 안 걸맀겄나. 내 밑에 남동생은 나보다 나이가 마이 적었다. 엄마는 일 나가서 안 들어오고 동생은 배가 고파서 운다. 달래도 안 되고 배가 고프니까 자꾸 칭얼거리기도 하고……

암죽을 먹이야 하는데 나도 얼라 아이가.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생쌀을 입에 넣고 씹었다. 꼭꼭 씹어서 먹이기도 하고, 내가 씹은 쌀을 밥그릇에 담아 겨우겨우 불을 때서 끓여 먹이기도 했다. 내가 어리지만 생쌀을 그대로 주모 안 되겄고 굶길 수도 없고 그래서 그리 했는데, 그래도 내 맘 한 구석에 겁이 나서 엄마가 들어 오모 그 말을 못 했다. 말할 용기가 없는 기라. 혹시라도 어린 남동생이 병에 걸리모 어짜노 싶어서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그 동생은 병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잘 산다. 이기 옮는 병이모 우리 남동생은 걸리도 내가 쌀을 씹어 먹인 만큼 병이 걸리야 하는 거 아이가. 큰언니? 그때는 우물가에서 그 일을 당한 후로 병이 점점 들어서 그냥 멍하니 있는 기라. 아가 울어도, 그거를 암죽을 끓이가 먹이야 되는데 그것도 안 될 정도로 그리 병이 깊어가더라고. 내 맘에 쌀을 씹어 먹이모 그기 암죽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천방지축 뭐가 뭔지도 잘 모르고 날 새모 산에 간다. 산에 가모 봄이면 진달래가 온 천지다. 그거 뜯어서 입에 넣어 보모 싸~ 한 기 맛이 있었다. 맨날천날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다니다가 배고프모 집에 와서 밥 한숟가락 묵고, 동생 울모 업어주고 그랬다. 나는 별로 힘들지도 않고 학교 안 가는 게 그리 서럽지도 않더라. 심심한 거 하고 친구들 옆에 가기 힘든 것만 빼모 그리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 큰언니가 자꾸 문제가 생기는 기라. 우물가에서 그라고 온 뒤로 대문 밖을 안 나가는데 얼굴에 나는 기 더 표가 나. 점점 마이 나고, 나는 얼굴에는 안 나는데 왜 그리 얼굴에 나는지. 병 표도 마이 나고 정신도 나가고, 동네 사람들 눈에 우리 언니는 같은 동네에 있으모 안 되는 사람인기라. 저거 때문에 언니가 정신이 그리 됐는데……

내 눈에도 언니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더라. 집에 있다가도 갑자기 소리 지르고 벌벌 떨고, 그라모 나는 어째야 할지 몰라서 덩달아 겁이 나고 그랬다. 아마 우리 부모님 마음이 마음이 아니었을 기라. 지옥이 따로 있겄나, 그기 지옥이지. 하기사 그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는 걸 나는 몰랐지.

사람들이 처음에는 모린 척 하다가 점점 수군거리고, 언니를 소록도로 보내라는 기라. 우리 부모님은 애써 못들은 척 해도 마이 힘들었제. 가까이 지내서 걱정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니까 “인자 아(이)들을 그마 보내야 안 되겄나?”하고, 집에 오는 것도 좀 뜸해지는 것 같더라. 그때는 순경이 병자들을 잡아가기도 하고 그랬다.

그라다가 인자는 순경이 우리 집으로 온다. 뭐하러 오겄노?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문디 있다고 신고하니까 순경이 나오지. 빨리 잡아서 보내라고 신고하는 거지. 아버지 엄마는 들일하다가도 멀리서 순경이 우리 집으로 가는 거 보이모 어떤 때는 소리치고 어떤 때는 쫓아온다. 그라모 나하고 큰언니는 뒷산으로 내빼는 기라. 그냥, 그냥 산으로 들어간다. 언니하고 쪼그리고 있다가 해지모 집으로 들어가제.

하루는 집에 있는데 순경하고 동네사람들이 몰리 오는 기라. 아버지가 대문 앞에서 “아(이)들 없다. 왜 이라노?”하고 두 팔을 쫙 벌리고 버티고 서서 큰 소리를 지르는 기라. 응, 우리보고 빨리 달아나라는 뜻이지. 언니하고 나는 뒷문으로 돌아서 또 산으로 간다. 가다가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앞으로 퍽 고꾸라지고 있는 기라. 순경이 집안으로 들어 올라고 아버지를 사정없이 밀친 기라.

성심원 산책로

성심원 산책로

마음이 아프고 눈물 나고 그런 것 보다 큰언니하고 나는 겁에 질려서 계속 산으로 산으로 들어간다. 정신이 나간 언니 손을 꼭 잡고 안 잡힐라고 정신없이 뛴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어데 나무 밑에 덤불 밑에 쪼그리고 그리 있다가 어두워지모 엉금엉금 내려 왔다. 해가 있으모 못 내리오제. 동네사람들이 우리 보모 그냥 안 두지. 어짜든지 우리를 동네에서 쫓아 버리야 저거가 병 안 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떤 때는 어두워져도 안 가고 우리 집 마당에 버티고 있기도 하고.

응? 아이다. 다른 집에도 병자가 있었다. 그때 그리 흔한 병도 아이지만 드문 병도 아니었다. 그 사람들? 다 소록도로 가든가 집을 떠나든가 했제. 우리는 아버지가 어짜든지 멀리 안 보내고 옆에 가까이 두고 병을 낫게 할라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큰언니하고 나를 어데 보내라고 해도 못들은 척하고 버틴 거지. 그라고 우리 집이 그래도 좀 먹고 살았거든. 그라니까 아주 함부로 하지는 못했제. 그래도 결국은 떠나왔제.

고향? 생각 마이 나제. 어릴 때 떠나와도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난다. 봄이 되모 도다리 쑥국이 일품이다. 니가 어째 도다리 미역국을 아노? 니도 거제도라고? 거제도 어데고? 고향 사람 만났네. 맞다. 도다리 넣은 쑥국하고 미역국은 지금도 생각난다. 희한하게 쑥하고 도다리가 어울린다. 된장 약하게 풀어 넣고 캐온 쑥하고 싱싱한 도다리가 있는 국은 봄이 되모 생각난다. 미역국도 도다리 넣고 끓이면 국물이 진하고 참 시원타.

하이고, 너거 할머니도 숭어 간 맛을 알았네. 숭어 간, 그거 안 묵어 본 사람은 모린다. 나도 어릴 때 숭어 어장이 옆에 있었다. 어린 마음에 숭어 간을 한번 훔쳐 묵어 봤는데, 맛있는 기라. 몇 번 훔쳐 묵었지. 하하 흠, 참 맛이 있다. 숭어 한 마리에 간은 한 개제. 꼭 밤톨 맨치 생긴 게 싱싱한 숭어 간은 탱탱하다. 소금에 콕 찍어 묵으모 쫄깃한 기 참 맛이 있다. 보통 탁주하고 같이 묵는데, 술도 사람에 따라 발효하는 기 다른 기라.

누룩도 보통 요새 파는 누룩이 아이다. 그 누룩이 곡식 아이가. 물에 불리서 만들어 윗목에 두모 한 3일 뒤에는 발효하는 기라. 어데, 3일 후에 발효되는 기 정상이다. 더 오래 두모 술맛도 없고 술 색깔도 안 좋다. 그런데 더 빨리 발효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 갖고 술을 담가도 담가는 사람에 따라 술이 잘 익기도 하고 잘 안 익기도 한다. 술이 사람에 따라 다리게 발효되는 기지. 말하자모 술이 사람 가리는 기라.

칼치 회 묵어 봤나? 그거는 안 묵어 봤고나. 칼치는 바다에서 올라 오모 바로 죽는다. 칼치 잡는 배에서나 맛볼 수 있다. 그래도 금방 잡아갖고 금방 들어 오모 묵어도 괜찮다. 칼치는 반짝반짝한다. 맞다, 그렇제. 칼치는 비늘을 벗기야 된다. 칼치 비늘은 호박잎으로 마무리 하모 된다. 호박잎으로 몇 번 쓱 문지르모 된다. 뼈채 썰어서 된장에 함께 묵으모 그 맛이 기차다. 고소하고 참 맛있다. 에이, 고등어 회는 비리다. 비리서 별로라.

내 노래 한 번 해볼까?. “서러운 내 인생 흐르고 흘러가도 잊혀지지 않고 이 내 몸이 서럽고 서러워 한 세상 살아도 서러운 세상”. 나는 노래하는 기 좋다. 가수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옛날에는 한 번 부르모 한 번에 몇 곡씩 연달아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모 서러움도 잊어뿌고 눈물도 안 나고 괜찮다.

니는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여게 뭐할라꼬 오노? 니가 차가 있어야 하는데, 그기 걱정이다. 저게 박카스 있다. 박카스 묵어라. 저게 마이 안 있나. 한 개만 묵지 말고 마이 가져가라. 고마 한 박스 가져가라. 목마르고 할 때 묵으모 좋다. 또 갖다 준다. 걱정하지 말고 가져가서 차 가면서 묵어라. 뭐 할라고 또 온다고, 안 와도 된다. 니가 너무 힘들다 아이가. 내 걱정 하지 마라.

과거 역사를 현재 역사에 써 먹지 못한다면 역사책 덮어라!: 김 갑수가 쓴『전쟁과 운명』

과거 역사를 현재 역사에 써 먹지 못한다면 역사책 덮어라!:?김 갑수가 쓴『전쟁과 운명』

 

나태영(한철연 회원)

 

 

김갑수와 최장집

이명박 정권 초기에 전국 수만 명 대학교수가 시국선언을 했다.이명박 정권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했다.?바로 이 순간 이명박 도우미가 나타났다.?최장집이 나타났다.?최장집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선거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이다.?히틀러도 선거로 총통 자리에 올랐다.?최장집이 헛소리해도 최장집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만큼 최장집 인맥과 학맥이 두텁다.?손호철,?정청래,?박상훈이 최장집 폐인이다.?김갑수 혼자서?<오마이뉴스>에서 최장집을 비판했다.

 

근대사를 통해 현대를 읽다.

김갑수는 백범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인정한다.?다만 백범 김구 선생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한다.?한독당 김구가 한민당 이승만 생각을 받아들인 사실을 비판한다.?김구 선생이 친일파 청산을 먼저 하고 국가 건설했어야 했는데 국가 건설을 먼저 하고 친일파 청산하자는 이승만 꼬임에 넘어간 사실을 비판한다.?결국 이승만 의도대로 친일파 청산은 물거품이 되었다.?김구 한독당은 사라지는 비운을 당했다.?김구 선생도 암살당하는 비운을 당했다.?이런 사실을 꿰뚫고 있는 김갑수는 함부로 통합하는 것을 반대한다.?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억지로 합치는 것을 반대했다.?김갑수 말대로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억지로 합치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과거 역사를 오늘 우리 문제를 푸는데 사용할 줄 아는 김갑수 안목을 높이 살만한 부분이다.

김갑수는 통합보다는 한 세력이 강해지면 다른 세력이 강한 세력으로 빨려 들어오는 게 낫다고 말한다.?한독당 김구 선생 실패를 보고서 품은 생각이다.?나는 속 마음으로 김갑수 의견에 반대했다.?나는 진보당과 노동당이 합쳐져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까닭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두 당이 똑같은 당이라는 것이다.?괜히 쪼개져서 보통 사람들이 볼 때 진보는 세력이 작으면서도 왜 쪼개지냐는 비난을 받기 때문이다.?조금 다르더라도 합쳐야 한다고 나는 주장했다.?그래서 진보정당 지지율을 높여야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생각보다는 김갑수 생각이 더 옳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한다.?민주노동당(진보당)과 진보신당(노동당)이 쪼개질 때 앙금이 크다.?북조선 관련 사건이 터질 때 입장 차이가 생긴다.?특히 북조선 핵 문제가 생기면 입장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래도 노동당은 정의당 보다는 낫다.?국정원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노동당은 정의당처럼 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국정원을 비판하고 진보당 편을 들어줬다.?다행이다.?어쨌든 두 당이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비판적 지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두 진보정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책 경쟁을 하면 좋겠다.?너무 급하게 통합을 밀어붙이면 일을 그르칠 것이다.

‘8·15?직후 김준연은 한민당 간부가 되어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그는 한민당의 선전부장이었다.?우리가 익히 알듯이 한민당은 친일지주와 친일 부역배들이 주축이 된 사이비 야당이었다.

같은 한민당 내에 장덕수라는 경쟁자가 있었다.?물론 장덕수는 화려한(?)?친일경력의 소유자였다.?하지만 장덕수는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 박사로서 세속적인 실력 면에서 김준연보다 우월했다.?장덕수는 한민당의 요직인 정치부장과 외교부장을 겸직했다.?동시에 장덕수는 김구와 황해도 동향으로서 김구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한민당과 한독당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었다.’

‘내부의 정적 장덕수도 제거하고 단정수립에 반대하는 임정 주도의 한독당까지 와해시킨다면?’?김준연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만났다.?얼마 후 장덕수는 혜화동 자택에 카빈을 들고 찾아온 경찰에게 피살되었다.?김구가 미군정 재판정에 나가 미군 장교에게 모욕적인 심문을 받은 것은 장덕수 암살 배후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이어 미군정 재판부는 한독당의 핵심인물인 김석황 조상항 손정수 등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것은 한독당의 와해와 김구의 죽음,?그리고 친일청산 실패로 귀결되었다.?결국 단정수립에 반대하던 통일세력,?요즘으로 말하면?‘종북세력’인 한독당과 지도자 김구를 거세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이지만 그 앞잡이에 야당을 자임하던 김준연이 있었던 것이다.

김준연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김준연과 닮았는가.?최고학부,?독일유학,?운동권 장식 이력,?제1야당 출신,?반공단정세력,?미군정·독재정권을 배후로 하여 경쟁자와?‘종북정당’을 파괴한 이가 누구인가??공히 김준연 그리고 유시민이 아니었던가?’‘우리는?1950년대 진보당 파괴와 조봉암 법살의 역사를 알고 있다.?이것은 조봉암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서상일계의 배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서상일(1887~1962)은 언제나 조봉암에게 날카로운 경쟁의식을 느꼈고‘진보?1인자’를 향한 야심이 만만치 않았다.?보성전문 출신인 그는 사사건건 조봉암에게 시비를 걸었다.

당권 장악을 위한 서상일계의 쿠데타가 벌어진 것은?1956년 대선 이후였다.?대선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이 민주당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수권정당으로 도약하자 미국과 이승만 집단은 진보당을 적출하려 들었다.?서상일은 여기에 앞잡이로 나섰다.?그는“조봉암의 주장은 너무 강하다(북에 가깝다)”고 하면서 진보의 혁신과 대중화를 표방, ‘혁신대동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서상일과 그 추종자들은 내부 쿠데타에 실패하자,?곧’민주혁신당’?창당에 나선다.?그러나 민주혁신당은 조봉암이 지향했던?’피해대중의 구제‘에는 관심이 없었다.?아무튼 민주혁신당의 창당은 조봉암 등의 진보세력을 고립시켰고 진보정당의 명맥을 끊어놓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봉암은 체포되었다.?서상일과?‘혁신’?세력들은?‘진보당 사건’?피의자들에 대한 재판에서,?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에게 교묘하게 불리한 증언만을 내놓는다.?즉?“진보당은 좌경사회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주혁신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나 진보당에 비해선 우경화한 정당이다” “그들이 평화통일을 이룬 후 노동자,?농민들이 주도권을 잡도록 하기 위해 공산당과 합작 내지 같은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래의 일이므로 나는 모르겠다”등이었다.

민주혁신당은 오늘의 어느 정당과 닮아 있으며 서상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그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서상일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서상일과 닮았는가.?진보의 선두주자 조봉암도 제거하고?‘종북정당’?진보당도 와해시키는 데 앞잡이 역을 자임한 사람은 공히 서상일과 심상정이 아니던가?’‘민주혁신당은 오늘의 어느 정당과 닮아 있으며 서상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그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서상일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서상일과 닮았는가.?진보의 선두주자 조봉암도 제거하고?‘종북정당’?진보당도 와해시키는 데 앞잡이 역을 자임한 사람은 공히 서상일과 심상정이 아니던가?’?(김갑수, <주권방송>?페이스북 단상, 2013년?10월?16일)

김갑수는?『전쟁과 운명』?이 책에서 우리나라 근대사라는 거울에 오늘 우리를 비춘다.?누가 진국인지 도대체 누가 껍데기인지 보여준다.?진국은 통합진보당이다.?껍데기는 민주당이다.?정의당이다.?새누리당은 껍데기 메카이다.?껍데기 생산공장이다.?아니다.?작것이다.?철학자 윤구병이 말했다.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져야 할 것이 없어진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다.’

껍데기는 더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하는 인간들이 껍데기이다.?저들은 국정원이 만든 놀이터에서 열심히 논다.?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논다.?국정원은 평범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었다.?평범한 사람을 억지로 감옥에 가두었다.?국정원이 저지른 나쁜 짓이 이 땅 현대사를 도배질한다.?국정원이 조작해서 만든?‘짜깁기 녹취록’은 절대로 증거가 될 수 없다.?그런데도 그?‘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하는 인간들이 많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진보언론이다.?그런 진보언론에서 증거가 되지도 않는?‘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터무니없는 연속 인터뷰 기사를?1면에 올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손호철은 스스로를 진보교수라고 말한다.최소한 손호철은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다.?책도 여러 권 쓴 사람이다.?그런 과정에서 많은 논쟁을 했을 것이다.?자주 자기 생각을 다듬었을 것이다.?그런 손호철이 증거가 되지도 않는?’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한다.?착잡한 상황이다.?배움이 무엇인지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결론부터 말한다.?통합진보당은 김구 한독당처럼 죽지 않는다.조봉암 진보당처럼 죽지 않는다.

1970년대, 1980년대 이 땅에서 행해졌던 일이 이미 일제 강점기 때 행해졌다.?박정희는 친일파이다.?이런 박정희를 존경하는50대 이상 분들이 너무도 많다.?그 분들께 이 책?『전쟁과 운명』과?『중경의 편지』,?『압록강을 넘어서』를 선물하고 싶다.

 

이재유 선생 한 번 찾아 뵙고 싶다.

그 당시에 이런 멋진 분이 계셨다니 기쁘다. ‘그는 이념보다는 민족의 생존권과 독립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는 부분과?’그는 조직원들을 지도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원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을 지원하는 투쟁 방식을 실천했다.’는 부분이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통합진보당과 노동당 사람들이 이 분한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전쟁과 운명』을 읽고 외친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친일파는 살아있다』!
남한과 북조선은 단군 자손 국가이다!
발해와 신라가 싸운 전철을 밟지 말라!
주한미군 물러가라!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