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삶인지 나의 삶인지? : 『장자』에서 보는 인간의 삶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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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삶인지 나의 삶인지? :?『장자』에서 보는 인간의 삶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4

전호근(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우언의 철학자,?장자

 

 

왜 우언인가?

[장자]는 전편의 대부분이 우언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우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장자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그렇다면 장자는 왜 이런 식의 우언 형식을 택했는가??우언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고,?저렇게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치적 박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기 때문입니다.?장자 텍스트의 행간에는 물음표가 많이 있습니다.?장자가 던지는 질문이 도처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피(彼)와 시(是)를 주제로 한 이야기에서 장자는?‘저것’과?‘이것’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바뀐다고 지적합니다.?이것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이것이고 저것이 저것이지만,?저것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된다는 거죠.?그리곤 다시 이것과 저것을 말하고 있는?‘나’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여기서 나는 피(彼)인가,?시(是)인가??이처럼 세상에서 원칙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할 뿐만 아니라 그런 회의를 하고 있는 자신마저도 의심하는 치열한 사유를 보여줍니다.

제물론의 유명한 호접몽 이야기도 그래서 가능한 것입니다.?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가볍게 날아다녔는데 그렇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워낙 꼭 맞아서 전혀 장자인줄 몰랐다지요.?그리고는 나비와 장주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터인데,?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이처럼 꿈을 통해서 현실까지 의심하는 방식은 장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서사구조입니다.?심지어 꿈 속의 꿈 이야기를 하지요.?한자?‘覺’은 잠에서 깬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교’로 발음하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 것은?‘각’으로 발음하는데요,?장자는 잠에서 깨는?‘교’를 통해서 잠에서 깬 사람이 꿈을 비로소 허상인 줄 알게 되는 것처럼,?깨우침 곧?‘각’을 통해서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삶도 사실은 허상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우리가 사는 세상을 꿈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올바른 것이 사실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그렇지만 장자는 이조차도?‘거짓일까?’하고 빠져나감으로써 끝까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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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느 편이야?

장자가 문헌이나 학자들에 따라 송나라 사람이나 위나라사람,?또는 초나라이라고 기록이나 주장이 엇갈리는 것은 장자가 활동한?‘몽(蒙)’이라는 지역이 이들 세 나라가 번갈아 가며 점령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그런 특수한 조건은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때그때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게 됩니다.?초나라가 다스리는 상황에서?‘초나라 고홈’이라고 외치면 생존하기 어렵겠지요??그렇다고 무작정?‘초나라 만세!’를 외치면 위나라가 점령할 때 어떻게 살겠어요.?생각이 많아질 수밖에요.?초나라가 들어와서 초나라가 좋으냐고 물어보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이처럼 여러 나라가 번갈아 지배하다 보니 한 나라를 꼬집어 좋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좋은가?’하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사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많은 분들이 이 나라의 불행한 현대사에서 장자와 같은 경험을 해 봤을 겁니다.?예를 들어 이청준 작가의 단편작품 중에서 점령군이 어둠 속에서 주민에게 총을 들이대며 어느 편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상대방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국군인지,?인민군인지 알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목숨이 걸린 대답을 해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칸트의 정언명령처럼 거짓말은 하면 안 되니까 사실대로 대답하시겠습니까??아니면 그냥 총든 편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사실 요즘도 달라진 건 없습니다.?다만 요즘은 총 들고 묻는 게 아니라 돈 들고?“너 어느 편이냐고”묻지요.?그러면 많은 사람들이?‘돈든 편’이라고 대답하지요.?총보다 돈이 더 무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이런 고민이 장자가 우언을 창작하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시공간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을 뿐 더러 때로는 말을 바꾸기도 해야 살아남는 세상이었던 겁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바로 이런 이유로 고도의?‘문학적 장치’가 필요하게 됩니다.?그러므로?[장자]는 글쓴이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열려 있는 텍스트’로 보고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식인의 운명

이처럼 장자의 우언은 지극히?‘정치적’인 이유로 탄생한 것입니다.?그러므로 단순히 재미를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생존을 건 정치적 고민이 담겨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참 어렵지요.?예부터 자신이 쓴 글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이른바?‘문자옥’이라고 하죠.?공자나 맹자처럼 하고 싶은 말 다하면서 천하를 돌아다니는 것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당시 권력자들은 사람을 너무나 쉽게 죽였거든요.?예를 들어 진나라 헌공은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음식을 개에게 먹인 후 개가 죽자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그 음식을 기어이 사람에게도 먹어보게 한 후 사람이 죽자 비로소 독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후대의 현군으로 알려진 당나라 태종도 아끼던 신하이자 당시의 문장가였던 장온고를 순간의 오해로 하루아침에 죽이고 말지요.?물론 그 뒤에 크게 후회하고서는 사형을 청할 때에는 반드시 세 번 주청하도록 한 이른바?‘삼복주제도’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오지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명망이 있는 사람의 경우는 오히려 늘 시대의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후한말기의 채옹은 동탁의 부름을 받고 몸이 더럽혀 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사람이 됩니다.?그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런 시대에 살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늘 질문을 하게 됩니다.?나는 과연 보편적 가치관을 지키면서 시대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갖게 되지요.?일제강점기 이 나라의 지식인들 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친일행위를 했다고 한 사람들이 많지요.?그런 지식인은 아주 작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시대적 상황에 대한 변명을 이해한다손 쳐도 그렇게 변절하면서 살아남든가,?아니면 죽든가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선택입니다.?물론 그 시대에 독립운동 자금도 조금씩 대주고,일본에 비행기도 만들어 바치고 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지요.?지금에 와서 그러한 친일행적을 처벌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이전에 그런 사실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지요.

장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런 시대적 배경 하에서?‘우언’의 방식으로 남겼습니다.?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우언은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고 저렇게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장자의 의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자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한 마디만 하고 끝내면 알 수 없는데 같은 이야기를 두 번,?세 번 반복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언의 방식을 취했더라도 자세히 읽으면 장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자]의 제1편 첫 장에 등장하는 우언은 물고기가 새가 되는 이야기입니다.?첫편의 제목은?‘소요유(逍遙遊)’인데?‘유(游)’는?‘논다’는 뜻입니다.?온 천하가 전쟁에 미쳐 날 뛰는 시대에 어떻게 노는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놀 뿐만 아니라 낮잠 자는 이야기를 합니다.?장자는 소요유편에서?‘소요’를?‘침와(寢臥)’?즉, ‘낮잠 잔다’는 말과 짝을 이루어 쓰고 있거든요.?결국 장자는 첫 편부터 낮잠 자면서 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노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가치 기준을 바꿔야만 가능해집니다.?만약 맹자라면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무슨 노는 얘기인가하고 비판했을 것입니다.?맹자는 절대로 노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사람이거든요.?소요유편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는 대붕(大鵬)의 이야기입니다.?이 이야기는 장자에 세 번 등장합니다.?그러므로 대붕의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읽다 보면 장자의 생각을 함께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묻다

 

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 이야기

[장자]?제물론편 제5장의 주인공은 그림자입니다.?아니 그림자의 그림자입니다.?그림자는 영(景)이고 그림자의 그림자는 망량(罔兩)입니다.?망량의 경우는 비슷한 명칭인 이매망량(?魅??)이 춘추좌씨전에 나오는데 이매는 산귀신이고 망량은 물귀신으로 풀이됩니다.?장자의 망량은 발음만 같고 장자가 그림자의 우의를 담아서 만든 말입니다.?망량(罔兩)의 망(罔)은 허망하다는 뜻인 망(亡)의 가차입니다.?양(兩)은 둘이라는 뜻이죠.?그러니 망량은 망이우망(亡而又亡),?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입니다.?그림자는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허망한 존재입니다.?그런데 그 그림자에 붙어 있는 곁그림자는 더더욱 허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마치 꿈속의 꿈처럼요.

곁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는 그대가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추고,?또 조금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서 있으니,?어찌 그다지도 일정한 지조가 없는가?”

그림자가 말했다.

“나 또한 무언가 의지하는 것이 있어 그리 된 것인가??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여 그리된 것인가??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 같은 것에 의지하는가??어떻게 그런 줄 알겠으며,?어떻게 그렇지 않은 줄 알겠는가?”

[罔兩이?問景曰 ?에?子行하다가?今에?子止하며??에?子坐하다가?今에?子起하니?何其無特操與요?景曰 吾는?有待而然者邪아?吾所待는?又有待而然者邪아?吾는?待蛇??翼邪아?惡識所以然하며?惡識所以不然이리오]

장자는 즐겨 여러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나무나 새종류가 자주 등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람의 신체 일부를 의인화하기도 하죠 소요유의?‘견오와 연숙’의 예도 그렇죠.?견오는 사람의 어깨를,?연숙은 도와 이어져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지요.?바로 앞서 읽었던?‘구작자와 장오자’의 예도 까치와 오동나무를 의인화한 것입니다.?여기서는 그림자를 의인화한 것입니다.?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허상입니다.?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그림자가 실체로 등장합니다.?이 실체에는 그림자가 붙어 있습니다.?바로?‘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일정한 지조[특조(特操)]’가 없다고 따집니다.?특조(特操)의 조(操)는 조행(操行),?곧 행실을 일정하게 지키는 것입니다.?흔히 조심(操心)이라는 말을 쓰는데 요즘은 조심이라는 말이 그저 신중한 태도를 뜻하지만 본래 조심은 맹자에 나오는 존심(存心)과 같이 마음을 붙들어 둔다는 뜻으로 쓰입니다.?존심이나 조심의 결과가 조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일정한 마음의 결과 일정한 행실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곁그림자는 그림자에게?왜 이렇게 일정한 지조없이 가다가 말다가 앉았다 일어섰다 하냐고요.?결국 당신을 따라하려니 피곤하다는 것이죠.?그러자 그림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어디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는가.나 또한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 무엇이 움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다고 말이죠.?사실 그림자니까 당연히 실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죠.?그래서 실물이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장자가?‘그림자의 그림자’를 등장시킨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보통 그림자는 부수적인 것이고 실물은 알맹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림자의 그림자’,곧 곁그림자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가 실체입니다.?곁그림자의 존재의 근거는 그림자라는 것이죠.?그런데 사실은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실물의 허상에 지나지 않지요.?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실체라고 생각했던 그림자가 사실은 실물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실물,?곧 우리의 몸뚱이 또한 또 다른 실체의 허상이 아니겠느냐는 거지요.?우리가 생각하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라는 주체가 사실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장자는 말하고 있는 겁니다.?제4장에서 장오자가 꿈에 술 마시고 즐겁게 놀던 자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 슬피 운다는 이야기를 했죠.?그리고 그 꿈을 깨어나는 것이 생리적인 깨어남이라면 우리의 현실,?곧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꿈같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대각’이라고 했습니다.?꿈 속의 꿈과 마찬 가지로 그림자의 그림자 또한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뿌리째 흔들어 놓기 위한 장자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장자는 궁극적으로 실체와 허상을 마주 세우기 위한 기획으로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실물조차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여기서 빛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묻습니다.?하지만 그림자라고 하면 빛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빛이 없고 그림자가 없다면 우리는 빛을 인식할 수 없을 겁니다.?마찬 가지로 그림자만 있다면 그림자를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요.?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따지는 과학적 사유는 이 대목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과학적으로 따지면 실물이나 그림자나 곁그림자나 모두 실체입니다.?모두 현상이니까요.그러니 과학적 사유는 잠시 내려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존재의 근거를 따져 묻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곁그림자→그림자→실물의 입장을 모두 성찰하는 내용입니다.?우리는 어떤 것을 존재의 근거라고 규정짓지만 그런 규정을 짓는 순간 그 존재의 근거라는 하는 존재의 근거를 또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존재의 근거,?존재의 근거의 근거,?존재의 근거의 근거의 근거,?이런 식으로요.?그런데 곁그림자는 허망하고 또 허망한 존재라서 망량,?곧 망이 두 번 겹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망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하지만 그보다 더 허망한 존재를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망망망,?망망망망,?이런 식으로요.?이런 식의 수많은 허망과 허망의 연속을 장자는 자생자화(自生自化)라고 하였습니다.?그런 자생자화의 또 다른 표현이 물화(物化)입니다.?장자의 다음 이야기는 스스로 체험한 물화의 경험담인 호접몽(胡蝶夢),?나비의 꿈입니다.

 

나비의 꿈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가,?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

111제물론편 제6장의 주인공은 장자 자신입니다.?아니 나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어떤 학자는 장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장주라는 이름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대목은 장자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사실?[논어]가 공자의 저작이 아닌 것은?‘자왈(子曰)’이라는 표현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자왈’은 선생께서 말씀하셨다는 뜻인데 공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 리는 없으니까요.?그런데?[맹자]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어떤 사람은 맹자가 스스로?‘맹선생’이라고 호칭했을 리 없으니?[맹자]는 맹자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맹자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요. [맹자]가 맹자의 자저가 아니라는 근거 중의 하나입니다.?하지만?[맹자]를 읽어보면?[맹자]는 아무래도 맹자가 직접 지은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맹자]의 문장은 직접 기술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의 생생함이 있거든요.?아무튼 장자가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목이?[장자]에는 여러 차례 나오고 그 때문에[장자]?또한 장자의 자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그러나 자연사물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 신체의 일부까지 의인화하여 즐겨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장자입니다.?장자는 단순한 대화록이 아니라 문학 작품입니다.따라서 얼마든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이 대목만 굳이 다른 이야기와 달리 볼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이런 식의 다양한 문학 장치가 등장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장자는 공자나 맹자와는 처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공맹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면서 잡혀 가지 않으면 좋은데,?장자는 자칫 잡혀가기 쉬운 처지였기 때문에 보호 장치가 필요했던 것입다.?그 중의 하나가 꿈입니다.?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면서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지요.이후 남가일몽,?일장춘몽,?구운몽 등과 같이 꿈을 매개로 신분차별이나 남녀의 차별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억압을 넘어설 수 있는 해방구로 삼은 이야기들이 많이 창작되었습니다.?꿈이라는 장치를 자유로운 공간으로 삼은 것입니다.?그래서 호접몽은 꿈 이야기의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이 대목을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연관지어 풀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데카르트의 경우는 애초에 회의가 목적이 아니라 회의를 어떻게 하면 끊어버릴까 하는 아주 불순한(?)?목적을 가지고 회의한 사이비 회의주의자입니다.?장자와는 다릅니다.?아니 반대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또 주체를 강조했던 데카르트는 인간 이외의 동물은 기계와 같다고 보았습니다.?동물을 발로 차면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은 종을 쳤을 때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장자와는 많이 다르지요.?일단 장자에게는 불순한 목적의 회의라든가 그런 게 없습니다.?동물을 기계로 보지도 않고요.둘을 비교하면 아마 서로 화를 낼 겁니다.?장자는 자신마저도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나비와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이야기의 말미에 등장하는?‘물화(物化)’는 장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물화란 내가 주체고 상대가 대상이라는 인식을 넘어선 결과입니다.?내가 온전히 상대와 같아진다는 것은 곧 나의 소멸을 의미합니다.?나를 버려서 상대를 이루는 것,?그것이 장자의 물화(物化)?개념에 가깝습니다. ‘물화(物化)’에서‘물(物)’자를 빼고?‘화(化)’자만 남기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소요유 제1장에서?‘화(化)’는 살아 있는 존재가 사멸하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던 것을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어젯밤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팔랑팔랑 가볍게 나비였는데 스스로 즐겁고 뜻에 꼭 맞았는지라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이윽고 화들짝 깨어 보니 갑자기 장주였다.?알 수 없구나.?장주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을 테지만 이처럼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것,?이것을 물화(物化)라고 한다.[昔者에?莊周夢爲胡蝶호니???然胡蝶也러니?自喩適志與라?不知周也호라?俄然覺하니?則??然周也러라?不知케라?周之夢에?爲胡蝶與아?胡蝶之夢에?爲周與아?周與胡蝶은?則必有分矣니?此之謂物化니라]

장자가 꿈을 꿉니다.?유명한 호접몽(胡蝶夢)입니다.?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닙니다.?사람이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을까요??그런데?‘적지(適志)’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뜻에 꼭 맞아서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자기가 장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비가 된 것이죠.?사실?난다는 표현은 인간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쓰이지요.?장자의 첫 이야기가 대붕의 플라잉 신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이 대목은 바로 장자 자신의 플라잉 신입니다.?대붕은 구만 리의 하늘을 타고 납니다.?그리고 장자는?‘물화’,?곧 나비가 됨으로써 하늘을 납니다.?구만 리의 하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나비의 날개는 아주 가벼우니까요.

날 수 없는 인간에게 난다는 것은 자유의 획득을 뜻합니다.?빌리 엘리어트라는 소년이 춤추는 것을 보고 로열 발레단 심사위원이 묻죠. “너 춤 출 때 기분이 어떠니?”?하고요.?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아요.”?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난다는 것은 춤의 가장 높은 경지가 아닐까요??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 그리고 하나의 몸뚱이라는 육체적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춤의 궁극적 경지임을 암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물론의 마지막 이야기 나비꿈은 소요유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바로 앞에서 장자는 그림자와 꿈 이야기를 통해서?‘곁그림자→그림자→실물’, ‘꿈속의 꿈→꿈→현실’의 대비를 통해서 모든 사물이 서로 종속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그리고 그런 종속의 맨 위에 있는 실물과 현실을 부정합니다.?겉으로 보기에 더 이상 종속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종속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겁니다.?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힘이 약한 자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그렇다고 힘이 센 자가 자유로우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힘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순간 더 큰 힘에 의한 지배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논리적으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죠.

이를 테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는 섬나라 멜로스를 정복했죠.?침공하기 전에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죽이겠다고 최후통첩을 합니다.?하지만 멜로스의 지도자들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합니다.?그 결과 멜로스는 아테네의 공격에 의해 멸망당합니다.?멜로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너희는 너희가 우리를 대한 방식대로 또 다른 침략자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외칩니다.?실제 그렇게 되었죠.?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멸망시켰으니까요.?적어도 멜로스 사람들은 아테네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자기들이 멜로스를 대한 방식대로 멸망당했으니까요.?이처럼 강약의 논리를 따르면 강자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장자는 자유란?‘상대를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때’?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비의 꿈에서 장자는 앞의 두 경우와는 다른 플롯을 제시합니다.?서로 종속되는 것으로 그렸던 그림자와 꿈 이야기와는 달리 나비꿈에서는?‘장자의 꿈↔나비의 꿈’?이라는 식으로 둘을 마주 세우고 있습니다.?제물론에서 자주 등장하는?‘저것’과?‘이것’의 논리를 문학적 장치로 활용한 것입니다.?저게 허상이면 이것도 허상이고 상대가 부정되면 나도 부정된다는 말입니다.?이 대목에 등장하는 장주인 줄 몰랐다[不知周也]?든지 알 수 없다[不知]는 식의 말은 우리가 확신하는?‘주체’라는 것이 사실은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표현입니다.?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장자는 주체고 나비는 대상입니다.?그런데 장자는 나비꿈으로 주체와 대상을 마주 세우더니 결국에는?“장주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주체와 대상의 역할을 전도시킴으로써 현실의 질서와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한 것이지요.

이 대목을 감상할 때는?‘나’와?‘나비’를 짝으로 마주 세우는 장자의 방식과 함께 소요유와 제물론을 짝으로 놓고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붕새의 어마어마한 비상과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을 함께 느끼는 것이지요.

번역을 살짝 바꿔서 읽어보겠습니다.?앞의 번역은 장자라는 인물을 삼인칭으로 놓고 번역한 것이고,?다음은 그것을 나라는 일인칭으로 바꿔서 번역한 것입니다.?나로 바꿔서 번역해야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마주 세우려는 장자의 의도가 더 잘 읽힙니다.

 

어젯밤 꿈에 나는 나비가 되었다.

팔랑팔랑 가볍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나에게 꼭 맞았는지라 내가 나인 줄 전혀 몰랐다.

이윽고 깨어보니 틀림없는 나였다.

알 수 없구나.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것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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