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e)시대와철학에 실렸던 글들 중에서 편집자가 다시 뽑아올린 글

文-安 단일화, 민주주의 살릴 주문인가?[철학자의 서재]

文-安 단일화, 민주주의 살릴 주문인가?[철학자의 서재]

 

지젝·아감벤 등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조은평 (건국대학교 강사)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민주주의라는 신은 죽었는가?

대학 시절,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설명해 보라는 시험 문제를 접한 적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니체의 그 유명한 선언을 두고 힐난하듯 농담하던 기억은 남아있다. ‘원래 있지도 않았던 신이 어떻게 죽을 수 있단 거지?’ 혹시 니체는 ‘우리가 꿈꾸며 기대하던 그런 과거의 신이 죽었다고 말한 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던 건 아닐까?’ 뭐 이런 식의 생각들을 술자리에서 주고받던 기억 말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난장 펴냄)라는 책을 접했을 때, 불현듯 먼저 머릿속에 스치던 생각도 바로 이런 거였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하는 질문에도 역시 두 가지 방식의 답변이 가능하지 않을까? ‘원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죽긴 뭘 죽냐?’, 아니면 ‘우리가 꿈꾸며 투쟁해 왔던 민주주의는 이제 죽어버렸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발명해야 한다’는 답변 말이다.

물론 이 책의 원제목은 <민주주의는 어떤 상태에?>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회자되고 현실화되어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진단하려는 취지다. 이에 비해 번역서가 새로 설정한 제목은 다소 자극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 생각엔 오히려 더 적절해 보인다. 원래의 책 제목에 응답한 여덟 명의 사상가들(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다니엘 벤사이드, 웬디 브라운, 장뤼크 낭시, 자크 랑시에르, 크리스틴 로스, 슬로보예 지젝)이 제기한 문제의식도 단순히 민주주의의 현 상태를 진단한다기보다는 그 단계를 훨씬 더 뛰어넘어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 사회’ 자체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표


어떤 사상가들은 원래 ‘민주주의’가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거나 단지 사건이나 운동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 구체적인 실체가 없었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원래 없었기에 죽었다고 할 수도 없다고 본다. 또 다른 사상가들은 우리가 꿈꾸며 목도하고 있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그저 텅 빈 기표이거나 완전히 변질돼서 소수가 이끌어가는 과두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새로운 민주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민주주의자를 자처한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85쪽)인 셈이다. 더구나 이제는 이념의 갈등과 현실의 냉전으로 대표되던 20세기는 지나갔기에, 더 이상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도 자처한다. 하지만 바로 ‘탈-이데올로기 시대라고 자처하면서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또 다른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닐까?

▲(조르조 아감벤 등 지음, 김상운·홍철기·양창렬 옮김, 난장 펴냄). ⓒ난장

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또 우리 스스로가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할 때, 대체 ‘민주주의자’란 뭘 뜻하는 것일까? 자유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공화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식으로 수많은 수식어를 통해 각자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구분하려 하지만, 대체 이러한 수많은 ‘민주주의들’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공통 분모는 뭘까?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민주주의’의 본뜻에 주목한다. ‘인민(demos)의 통치(cratie)’라는 뜻을 지닌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단어에.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귀족정, 과두정, 참주정처럼 특정한 정체(통치 형태)와 통치 원리를 뜻하는 용어들과는 전혀 다르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순전히 정치적인 주장, 즉 인민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며, 일부나 어떤 대타자가 아니라 전부가 정치적으로 주권자라는 주장만을 담고”(87쪽)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인민의 자기 통치’를 뜻하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구체적으로 인민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지배해야 하는지, 또 자신들의 주권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주는 바가 없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나라가 대부분 민주주의라고 자처하지만, 그저 대의 민주주의, 입헌 정치, 정당 정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 아울러 자유로운 시장을 기반으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야말로 민주주의라고 서로 내세울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체적인 통치 형태가 정말로 ‘인민의 통치’를 보장해 주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에서는 전 지구적인 자본이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경제 질서뿐 아니라 한 국가의 경제 정책도 좌우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의 힘과 결탁한 전문 정치인들이 국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인민의 통치를 대신해 준다고 떠벌려 댄다.

인민의 통치’를 봉합해온 민주주의(?)


단지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근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쌍둥이 형제와 결합해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날개로, 여러 가지 배제를 통해 자신을 구성해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인민 통치’의 사건들과 기억들을 억압하고 봉합하면서 대의 민주주의나 공화정이라는 상징으로 정착되어 온 것이 바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브라운의 지적처럼, 자본과 신자유주의적 합리성만이 소위 자유 민주주의적 제도의 기반처럼 강조되면서 “국가는 공공연히 인민의 지배가 아니라 경영 관리 운용의 구현체로 탈바꿈”(90쪽)해 버렸다. 또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가 노예와 여성을 배제했던 것처럼 근대 민주주의도 경쟁에서 도태당한 빈민을 배제하면서 성장해 왔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서구 민주주의는 불법 거주자나 이주 노동자를, 또는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가정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성역을 보호하려 한다.

더구나 역사적으로도 ‘민주주의’는 정말로 ‘인민의 통치’를 실현하려던 사건들과 운동들을 억압하고 그 기억들을 봉합하면서 오늘날의 온건한 ‘대의 민주주의’로, 또는 ‘공화정’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로스가 ‘민주주의’라는 랭보의 시를 언급하면서 강조했던 1871년 5월 파리 코뮌의 몰락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당시 “파리 코뮌의 전사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 이들은 그동안 견고히 존재해온 위계적, 관료적 구조 대신에 모든 차원에서 민주주의적인 조직 형태와 절차를 도입했다.”(153쪽)

이런 면에서 파리 코뮌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사건이자 소규모로 코뮌을 실현했던 역사였다. 그럼에도 파리 코뮌은 당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참칭한 부르주아-공화주의 정부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게다가 가장 민주주의적인 사건의 패배를 가져온 이 대학살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제3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결국 랭보의 ‘민주주의’라는 시는 당시 파리 코뮌이라는 민주주의 실험이 어떻게 봉합되었는지, 또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어떤 식으로 ‘문명화된 나라(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로스의 말대로, “실제로 서구의 정부들은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완전히 통제하게 됐다. 그 단어가 예전에 간직했던 해방의 울림을 완전히 제거한 채 말이다. 사실상 민주주의는 극소수 사람들만의 통치, 그리고 말하자면 인민 없는 통치만을 허용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계급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161~162쪽) 과연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민의 통치’를 실현하려던 파리 코뮌이라는 민주주의적인 실험이 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억압되고 봉합된 것일까? 또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는 민주주의가 왜 역설적으로 ‘인민 없는 통치’가 된 것일까?

인민’은 정말 자기 통치를 원하는가?


물론 지배 세력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상징적으로 전유해 온 탓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 책에서 제기하는 가장 도발적인 질문은 바로 이 측면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곧 ‘인민은 정말 자기 통치를 원하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사회는 무슨 수로 자기-제도화하며, 제도화된 것의 자동 보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66쪽)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기-제도화된 현재의 역설적인 ‘인민 없는 통치’의 상황에서 사회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첫 번째 질문은 ‘민주주의’가 주체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바디우가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재해석하면서 비판하는 지점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힘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에 집중된다. 그런 유형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31쪽)

바디우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주체는 젊은 시절에는 ‘구속받지 말로 즐겨라’는 식으로 “자유로워지기를 상상하는 헤픈 탐욕”을 누리다가 늙어서는 “예산을 따지고 안전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변모한다(34쪽). 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만을 추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주체를 양산한다면, 이런 식의 순환의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다.

따라서 지금처럼 상징화된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모든 권위를 중지시키면서 플라톤의 비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습을 하고난 뒤에야 우리는 결국 그 단어를 본래 의미대로 복원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41쪽)

또한 두 번째 질문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주체나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아마도 이 지점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재점유하는 투쟁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랑시에르의 말대로 “정치적 투쟁들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131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현재의 ‘민주주의’에서 껍데기들을 걸러내는 체가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민주주의적인 권력이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공통 관심사를 실현할 행동 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150쪽) 말하자면 그 누구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등의 전제를 놓치지 않는 것! 그렇기에 “집단적인 의사 결정에 참여할 능력을 지녔다고 규정된 사람들(전문가, 정치인, 혁신적인 자본가)과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해지는 사람들”(150쪽)로 끊임없이 사회의 위계를 구분하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바야흐로 대선 정국이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기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명분 속에서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정권 교체를 원하는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정말? 혹시 우리는 어려운 나의 살림살이가 좀 더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누군가를 욕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분노와 불만 때문에, 새로운 대한민국을 꿈꾸며 이명박 대통령을 욕망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명박 대통령이 CEO의 마인드로 경쟁력 있고 살기 좋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욕망의 대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게 됐고, 그 때문에 절실히 후회하면서 절망에 빠져봤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욕망해야 할까? 좀 더 국민을 배려하고 함께 잘사는 사회를 이루어줄 수 있는 또 다른 지도자를? 제발! 이제는 어떤 지도자를 꿈꾸고 욕망하기보다는 시스템과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인민의 자기 통치’가 현실화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말이다.

한편에서는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박정희의 유산을 이어받은 박근혜를 막기 위해서 지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나도 그럴지 모르겠다. 하지만 딱 그 이유 말고는 아직 다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리고 별로 기대하지도 않는다. 박근혜를 막아내고 이명박 정권을 심판한다고 해서, 새로운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실현해 주리라고는.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바로 스스로 해방된 자들이 될 수 있는 우리 인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체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 그 지도자가 민주주의를 실현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자. 그런 기대는 이미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일지도 모르니!

빈 집[노동이야기]-①

빈 집[노동이야기]-①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예전에 살던 집, 팔려고 내어 놓았으나 팔리지 않는 집이다. 엘리베이터 없는 구식 6층 아파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쩐지 편안하다. 씽크대와 가스렌지, 그리고 컴퓨터 책상을 빼고는 휑하게 비어있다. 배낭을 내려 집을 꺼내고, 거실에 텐트를 쳤다. 가을이 깊었다. 실내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침구가 없다. 배낭에서 옷을 있는대로 꺼내 입었다.
들어오면서 사온 맥주를 마셨다. 제과점에서 산 호떡을 안주 삼았다.
추석 전에도 여기 와서 머무르면서 목수 일을 했다. 신도시가 들어서고, 대공장이 들어서는 이곳은 일감이 많다. 빈 집에 온 이유도 일 다니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 봐야만 이 집에서 머무르며 계속 일할 수 있을지 알 것 같다.
해미와 고북 일대에는 공장이 없었다. 몇 년 전 홍성군에서는 경사라도 난 듯이 대기업인 Y전기 공장을 이곳에 유치하기로 했다는 계획을 홍보했다. 지역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리고 군수와 회사 간부가 계약서에 서명하는 사진이 실렸다.
Y전기에 일하러 다닐 때 어떤 목수가 말했다.
“공장이 들어오면 그 동네는 끝난거야.”
그는 환경오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Y전기에 일하러 갔던 날들을 잊을 수 없다. 아파트형 기숙사를 짓는 공사는 지하층을 마무리한 다음, 1층을 건설하고 있었다.
첫날은 하스라 통(기둥 거푸집)을 짰다. 오랫만에 하는 목수 일이었다.
기둥 폭은 80×80cm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다.
ⅰ) 기둥 위치를 표시해 놓은 먹 선에 미리 반장이 맞추어 놓은 수평 표시까지 네모도(수평표시 높이까지 바닥에 나무 각재를 높여주는 작업)를 깔아준 다음,
ⅱ) 측면 표시 먹선에 맞춰, 120×60cm 크기의 폼(철재 테두리에 합판을 댄 형틀재)을 을 세워 준다.
ⅲ) 세운 폼 양 옆에 아웃 코너(120×꺾어진 20cm의 철판 형틀)를 핀으로 고정시킨다.
ⅳ) 폼을 네 면에 세우면 우선 기초 형틀이 완성된다. 기둥 높이가 400cm이므로 높이에 맞춰 폼을 세워 올라간다.
이 때
ⅴ) 기둥 중간에 타이(중력에 의해 거푸집 변형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정해주는 철로 된 띠)로 폼과 폼을 연결시켜준다.
부분적인 작업이긴 하지만, 유능한 목수의 머릿속에는 부분과 부분을 합쳐, 건물이 완성되는, 이른바 구상력이 있다. 구상력이야말로 정교하게 집을 짓는 꿀벌보다 목수가 우월하다는 증거이다.
남쪽에서는 폭풍이 올라온다는 기상청의 보도가 있었다. 바람이 몹시 강했다. 나와 두 사람은 하스라통(기둥 거푸집)을 짜고, 몇몇은 야기리(벽체를 세우기 위한 형틀의 한쪽 면)를 크레인으로 떠서 세우는데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이 이토록 강한데 크레인을 쓰다니, 일하는 사람이나 시키는 사람이나 조심성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 켠 무섭기도 했다. 하나 짜 놓은 하스라통도 바람에 날려 넘어갈까 무서웠다. 나는 하스라 통 네 귀퉁이에 2미터 강관파이프로 지주대를 세웠다. 내가 짠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짜 놓은 것도 모두 지주대를 세우는데, 반장이, “그거 하지 말고 하스라통 짜” 라고 이르고는 부리나케 걸어갔다.
기둥 하나를 완성하고 두 번째 하스라통 짜기는 쉽지 않았다. 철근을 근 8미터 높이로 세워 놓았다. 이것이 기울어져, 수직이 안 맞으니 하스라 통 안에 넣을 타이(콘크리트 타설시 중력에 의해 형틀에 변형을 방지하기 위해 양 옆 기둥 형틀을 고정시키는 쇠로 된 띠장)를 밀어내는 바람에 도통 핀을 끼울 수 없었다. 철근을 바로잡고 간신히 끼우려는데 이번에는 외부 폼 코너가 맞지 않았다. 다른켠에서 하스라 통을 짜는 최씨에게, 이런 경우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현장에서 선임자의 경험은 중요하다. 잘 모르는 것은 무조건 물어봐야 한다. 최씨는 내가 짜던 하스라통에 올라갔다. 그가 잘 맞지 않는 타이와 씨름하는 사이, 나는 다른 기둥을 짜는 작업 준비를 했다. 빨리 일하는 요령은 미리 준비해 놓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한참 후 최씨가 하스라 통에서 내려왔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니, “외부 코너가 잘 안 맞는다. 긴 코너를 잘라서 다시 짜야한다”고 했다. 재료 새 것을 잘라 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하청회사 사장이 볼라치면 크게 봉변당할 수도 있다. 형틀 재료값이 무척 비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식당 쪽으로 갔다. 못주머니를 벗어놓고 그들 뒤를 따라 갔다.
일 할 걱정에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이빨까지 아팠다. 남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거나 드러누웠다. 나는 하스라 통 앞에 앉아,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했다.
한 시가 되면 일 시작한다. 나는 아웃코너 온 장(2미터 40센티)을 전동 커터를 사용하여 반으로 잘랐다. 하단 네 개는 잘 맞는 것으로 짜 올렸고, 2단 두 개는 잘 맞지만 다른 두 개가 맞지 않았다. 다른 것에 비해 조금(약 1cm) 컸다. 따라서 잘 맞는 사이즈의 코너를 두 개 준비하면 된다.
일하기 전, 기둥을 완성할 재료들을 모두 준비해 놓았다. 아웃코너와 폼, 타이, 핀 등속을 준비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가 작업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집어갔다. 그 누군가는 작업 재료는 풍족하지 않고, 빨리 일은 맞춰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은 가지만,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는 늙었고, 일을 잘 못하는 조공이다. 함께 일하는 목수가 빨리 재료를 구해 오지 못하면 그에게 핀잔 할 것이다.
자른 재료는 잘 맞았다. 참 다행이었다. 짜고 있는데, 반장이 지나가며 한마디 했다.
“빨리빨리 좀 짜. 이거 짜고, 저기 저것도 마무리 해. 목수 맞어?”
괜히 주눅 들었다. 오랜만에 하는 통에 일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도 많다. 처음 보는 재료도 있었다. 바싹 꼬리를 내리고 다른 사람들이 짜다 만 하스라 통을 노바시(하스라 통 도면 높이까지 올리는 일)했다.
목수 일은 시간이 잘 간다. 일이 잘되면 잘 되는대로, 일이 잘 안되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는 통에 하루가 금새 지나간다. 일이 끝날 때면 나도 모르게 들국화의 〈사랑한 후에〉를 흥얼거린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하루가 갔다는 뜻이다. 시몬느 베이유,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김나지움 교수를 하다가 르노 자동차에서 일한 그이는 작업대에서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다르다고 말했다. 일하는 하루 지나간 것이 그토록 고맙고 즐겁다. 사실 따지자면 귀중한 하루인데, 그 날이 지나간 것을 이토록 반가워하다니 역설이다.
용역회사로 가는 승합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우리를 태워준 목수가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렸다. 무심코 앞에 올라탔던 나는 혼비백산했다.
이씨가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 고향 근처 창리에서 왔다. 인사를 나누면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씨는 용역회사에 왔을 때 반짝반짝 빛나는 군화(워커)를 신고 있었다. 나중에, 자기의 전직이 밤무대 연예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승용차 기름값이나 운행 거리를 비교해 보고는 아예 창리 집으로 가지 않고 찜질방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씨가 찾아낸 식당이 〈밴댕이집〉이었다. 여주인은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그러나 손님들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그녀는 고향이 이곳이었다. 여성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으되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고향의 언어를 잊어버리고 타향의 사투리를 쓴다는 것은 그녀의 인생 역정을 알 수 있게 한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것을 짐작한 듯, 일당을 물어보던 그녀는 무척 놀래는 듯한 표정을 했다. 식당이 일당만큼 벌리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녀는 한 가지 오해를 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당을 한 달 30일 곱하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잘 나가는 목수도 일 년에 200일밖에 일할 수 없다. 하물며 늙은 노동자인 내가 일하는 날이라야 1년 60일이 고작일 것이다.
이씨는 여주인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소주를, 나는 막걸리와 맥주를 먹었는데, 여주인에게 와서 맥주 마시기를 청했다.
몇 일간 Y전기에서 일했다. 일을 다니는 와중에 반장이 노인 김씨와 손을 맞춰 일하라고 지시했다. 그 날은 속고(철근 콘크리트 보를 올릴 밑받침틀) 세 개를 자고, 벽체 눈썹(벽체와 천정 사이를 콘크리트로 보강하기 위한 작업)을 빼라고 했다.
김노인은 성미가 급했다. 하리 길이를 재는데, 마구 설쳐 댔다. 내가 하는 일이 어설퍼 보였는지, 데모도(조공) 대하듯이 이것저것 시켰다. 군말없이 그가 요구하는대로 기계톱 다이로 가서 합판을 45 센티로 잘라오고, 하리 받침목을 준비했다. 김노인은 걷는 것을 불편해 했다. 멀리 있는 기계톱 다이까지 갔다 오는 것은 그에게 힘든 일이다.
속고 세 개를 짠 후에는 눈썹을 뽑기 위해 벽체의 미진한 곳을 마무리했다. 마구리통(벽체 형틀 양 측면을 고정해주기 위한 판넬)을 붙이고는 형틀이 벌어지지 않도록 타이로 이어, 핀으로 고정시켰다. 그 때 뚱뚱한 목수(울산이 집이라 했다)가 와서 잠시 자기를 도와달라 했다. 무심코 따라가, 그와 함께 야기리에 타이와 핀을 설치하는데, 김씨가 나에게 와서 아주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이씨, 이리로 와요. 우리 둘이 반장이 시킨 것을 해야 한단 말이오.”
나는 울산 목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김씨에게 사정한다.
“조금만 도와주면 돼요. 좀 봐주세요.”
김씨는 굽히지 않았다.
“안돼요. 반장이 우리 두 사람에게 이것을 하라 했단 말이요. 이씨, 이리 오소. 일 못했다고 쫓겨갈 참이요?” 라고 했다. 뚱뚱한 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일했다. 잠시 후 뚱뚱한 이가 다시 왔다. ‘반장에게 나를 데려다 쓰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를 도와 벽체 타이 핀을 꽂았다. 뚱뚱한 이도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일하고 있었다. 근데도 기어코 나를 데려왔는가, 궁금해서 물으니 “저 사람은 빨리 벽체 폼 짜야 돼요”라고 했다.
김씨의 말이 사실인가 보다. ‘일 못해서 쫓겨간다’는 말이 능률을 못 올리면 쫒겨간다는 뜻인가 보다.
몇 일 후 김씨는 용역 소장으로부터 14만원에서 12만원으로 일당 조정한다는 통보를 들었다. Y전기 건설 현장 소장이 목수 몇 명을 찍어 일당을 조정하겠다고 알려왔다.
김씨는 속상해 했다. 나는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저씨. 그냥 다니세요. 12만원 받으면 적어도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잖아요. 편히 일할 수 있잖아요. 걍 다니세요.”
나는 김씨가 왜 일당을 깎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몇 일 전 여러 명이 크레인으로 속고를 들어 올린 후, 도면 먹선에 맞춰 올리는 일을 했다. 김씨와 내가 한 조가 되어 김씨는 나에게 아시바 대(철재 지지대)를 주면, 나는 그것을 받아 우마(1mm 높이의 발판) 위에서 속고 아래에 밭치는 일을 했다. 김씨는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속고를 올린 후, 김씨와 나는 속고 위에 폼을 받는 작업을 했다. 대개는 지상에서 속고를 콘크리트 보 원형대로 짜서 크레인으로 올린다. 그러나 이번의 작업은 지상에서 완성하기 곤란할 정도로 높이를 맞추기 여려운 면이 있었다. 폼을 눕히면 높이가 부족하고, 폼을 세우면 속고 바닥까지 약 30cm가 뜨게 된다. 이래저래 난감한 반장은 속고만 올린 후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서 보의 양 측면에 폼을 대고 못을 박아 완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폼을 사람 손으로 들어올리기 어려우니, 한 열 장씩 포개 싼 후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속고 위에 올려놓는 작업이 폼 받기이다.
4m 높이의 40cm 넓이의 공중에서 크레인으로 집어올린 폼을 받아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남, 나 할 것 없이 자세가 어정쩡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속고 양 옆에 도면 높이대로 폼을 못으로 밖아 고정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 역시 무거운 폼을 가누어 못 박기 쉽지 않다.
현장소장이 어디선가 작업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몇 명을 찍어내, 일당을 깎았다.

빈 집에서 자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온통 옷을 끼워 입고 가디건을 덮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찌뿌둥했다. 일하러 가기 싫었다. 그러나 빈 집은 마음이 편안했다. 배낭에는 등산장비와 반찬이 들어있었다. 꺼내어 찌개랑 밥을 해 먹었다. 주인 몰래 다락방에서 살던 〈나가사끼〉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기억났다.
“누구든 자기가 살던 집에 들어가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텐트를 접고 짐을 꾸리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경상도로 내려가세요. 팀장의 전화번호를 메세지로 보내겠습니다. 내려가서 (팀장에게) 전화하세요.”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청춘의 서재]

, 에드워드 사이드, 김석희 역, 살림 2001.

김운하 / 소설가. 건국대 몸문화 연구소 연구원

인생을 다룬 소설이나 전기를 읽는 것은 타인의 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생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기서 기쁨과 슬픔, 실패와 방황과 좌절, 꿈과 현실의 마찰과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고뇌들, 예측 불가능한 행운과 불운들을 읽으며 인간적인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는 굳센 의지와 신념, 치열하거나 심오한 사유가 드러내 주는 인간성의 고귀한 높이에 찬탄하며 경외심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젊은 시절에 전기류를 더 많이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해 크게 후회스럽다. 대학에 다니던 80년대, 그 암울하고 잔인한 시대를 살아가며, 오직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바깥의 문제에만 온통 몰두한 나머지 정작 한 개인으로서 ‘나는 무엇인가?’ 이라는 실존의 문제에 관해선 사실상 거의 도외시해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자아 정체성의 문제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삶의 정체성 문제라고 해도 상관 없다. 나는 마치 무조건 물에 뛰어들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기만 하면 그것이 수영인줄로만 아는 사람처럼, 세상이라는 바다에 겁 없이 몸을 던져 넣었다. 그런 이유로 내 청춘의 방황은 남들보다 더 길어졌고, 더 힘들었고, 더 우스꽝스런 한 편의 연극 같은 것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 만일 내 청춘기에 타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기록들을 거울삼아 더 깊이 좀 더 자주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토록 무모하고 어리석게 좌충우돌 하지는 않았을까?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커튼 Le Rideau』이라는 책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그는 특히 젊은 사람들의 특징을 방황이라고 보는데, 방황 가운데서도 특별한 방황이라고 쓰고 있다. 청춘의 방황이 하필 왜 특별하단 말인가? 그 이유는 청춘은 방황하면서도 방황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방황하기 때문이다. 또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첫째 청춘은 인생을 산 경험이 너무 짧기 때문에 아직 삶과 세상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둘째 아직 삶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 거기에 딱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 싶다. 가엾게도 청춘은 자신이 이중적인 무지에 빠져 있다는 그 사실조차 모른다. 쿤데라는 청춘의 방황을 방황 자체로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오직 청춘이라는 터널을 통과한 후에 거리를 두고 뒤를 돌아보게 될 때다.

나 역시도 그랬던 것 같다. 길을 잃고 헤매는 방황과 표류의 긴 시간의 끝에서야 겨우 그런 모든 경험들이 갖는 의미를 뼈아프게 이해하게 되었으니. 내가 처음『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원제 Out of place)』을 읽으며, 무엇보다 그 책의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그런 이유였으리라.

“이따금 나 자신이 한 줄기 흐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체처럼 충일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보다는 한 줄기 흐름이 나는 더 좋다….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보다 거기서 엉뚱하게 벗어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된 것은 그만큼 내 인생에 불협화음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

어쩌면 이 한 문장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자서전에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이드의 자서전은 독특하게도, 어린시절부터 삼십대 초반 청춘의 나이에서 끝난다. 그는 백혈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중인 94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하여 5년만인 99년도에 가서야 힘겹게 책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책이 되었다. 2003년 9월, 백혈병이 끝내 그의 삶을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68년 동안의 한 생이 그렇게 마감되었다. 치명적인 병과 싸우는 와중에도 2000년에는 이스라엘의 무력사용에 항의하기 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달려가 레바논 국경의 이스라엘군 초소에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그는 이 회고록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로 “현재의 생활과 당시의 생활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공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고 싶은 욕구였다.” 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간격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따지고 가치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초연하고 객관적으로, 오직 명백한 사실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영원히 지나가버린 역사와 상황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지만 추억이나 대화를 통해 이따금 되살아날 뿐 기본적으로 회상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역사와 상황은 또 얼마나 허약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시간과 이야기의 관계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한 시간조차도 기억과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는 것. 인간의 삶은 비록 시간 속에서 허망하고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지만, 이야기를 통해 망각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삶은 절대적인 소멸이 아닌 어떤 지속성을 얻게 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시간과 죽음을 의식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고 근원적인 욕망인지도 모른다.

사이드는 고통스런 병상 위에서 이 책을 기록해 나갔지만, 지나온 먼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망각의 위험에 처한 기억의 간격들에 글쓰기라는 수단으로 연약한 구름다리를 놓으면서 삶이 가져다 주는 여러 곤란들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삶을 사랑했는가를 다시 깨달았다고 썼다.

사실 에드워드 사이드란 이름은 무엇보다 그가 1978년에 발표한 책『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이라는 저서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 책에서 그는 동양은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의 유럽-서구 중심적 음모와 편견의 역사적 기원을 밝혀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그 책 이후 서구에서나 한국 같은 비서구 사회에서도 역사와 세계를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 나 역시 그의 책을 읽고 나 자신의 무의식 속에 깊이 틀어박혀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이후 서구 문화와 제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서구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을 자신도 모르게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내면화 해왔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그가 맞서 투쟁하고자 했던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움직이는 책’ 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의 책『오리엔탈리즘』은 사실 끊임없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 자신의 삶의 편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책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도 그런 인간적인 면들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영국 치하의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 출생했다. 1947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가족들은 모두 이집트로 이주했고, 1950년대 말에그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의 가족은 아랍인이지만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었다. 이집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아버지 덕에 윤택하게 살았고, 프린스턴과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의 교수로,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게 되지만,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이자 카톨릭 세례를 받은 미국 국적을 가진 그의 삶은 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이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며, 경계인일 뿐이라는 불안은 젊은 시절 내내 그를 사로잡았다. 그에게 팔레스타인은 평생 이중적인 감정을 안겨주게 되는데, 어린 시절부터 “해결되지 않는 슬픔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의 근원” 이었던 그 문제는 회고록을 쓰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에게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분열된 감정, “비통한 느낌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자아” 내는 원천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아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혼란스런 균열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묘하게도 영국의 한 왕자 이름에서 딴 에드워드라는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식 성이 조합된 그 이름에서조차 그가 평생 살게 되는 그런 ‘경계인’ 적인 삶의 정체성이 마치 운명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경계인으로 생각했고, 또 끝까지 한 명의 경계인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조화를 이루는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쳐 투쟁했다. 억압과 배제가 없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꾸며 온몸을 던져 그 꿈을 위해 싸웠다. 제국주의나 서구 중심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했지만, 삶과 인간성을 억압하는 어떤 권위나 권력, 경계 짓기에도 순응하길 거부하는 비타협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자서전에서 고체처럼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나 정체성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대신에 한 줄기 흐름, 끊임없이 경계를 벗어나 바깥에 머무르려는 도저한 흐름의 연속으로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나 자신도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어떤 통일된 단일한 정체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정체성이란 것을 현재 주어져 있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 혹은 창조를 통해 형성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낯선 미지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시절의 모든 방황과 표류를 수락하고 긍정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방황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형성하고 실패와 오류를 통해 끊임없이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탐색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인용했던 12세기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의 한 문장을 기억한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결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끝까지 당겨진 활처럼 팽팽한 긴장감, 집중력, 위험의 감수, 이 모든 것을 견뎌낼 의지와 신념이 필요하다. 내가 사이드의 자서전에서 새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세상 뿐 아니라 자기에게조차 이방인이 되길 거부하지 않았던 한 정신의 편력.

[공지사항]10월 26일 이준모 선생님 강연- 생태위기와 체계철학의 변증법적 지양

이준모 선생님의 강연을 10월 26일에 개최합니다[공지사항]

 

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한결 서늘해진 바람결이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10월에는 월례발표회 대신 8월 예정이었던 이준모 선생님의 초청강연을 개최합니다.
강연주제는 으로 이준모 선생님의 오랜 문제의식과 연구성과가 강연에 담아질 것입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배우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래에서 강연개요와 이준모 선생님의 약력& 저서를 안내합니다.
그리고 강연 당일 현장에서 최근 출간된를 할인된 가격에 판매합니다.

?강연일시: 10월 26일 금요일 오후 5시 30분
?강연장소: 태복빌딩 2층 강의실(한철연 연구실 건물 2층)
?강연주제 : 생태위기와 체계철학의 변증법적 지양 ? 동학의 방법적 지평에서
?강연개요 : 오늘날 생태적 종말의 위기는 농성 노동의 논리가 상공성 노동의 논리로 전이된 역사와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생명체들이 살아가려면 자연의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철학사적 반성과 전환이 필요하다. 이 강연은 자연과 인간의 생태적 상응성을 드러내는 생태노동의 관점에서 헤겔 철학의 지배적 주체성의 논리를 자연의 주체성의 논리로 지양하고, 성리학의 노동의 논리를 반성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지양과 반성은 동학의 방법적 지평에서 조명된 것이다.

?이준모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튀빙겐 대학 및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신학, 철학, 교육학을 연구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교육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 8월까지 한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자문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저술 소개
? 〈Zwischen Tradition und Universalit?t(전통과 보편 사이에서)〉 (1985, 프랑크푸르트)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시대의 철학체계는 그 시대 자연과 인간의 관계, 곧 인간이 자연에 가한 노동의 양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필자의 가설을 동양철학 특히 성리학을 중심으로 논증한 저술이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

? (한신대출판부, 1990)
필자의 위의 가설을 서양 근대철학에 비판적으로 적용하여, 루소, 칸트, 셸링, 헤겔의 철학에서 노동의 논리와 교육의 논리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육철학 방법을 모색하였다.

? (한국신학연구소, 1994)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의 노동이 자연의 노동(밀알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데서 기인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독일 근대철학, 서구 신과학 운동, 그리고 동학사상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밀알노동의 변증법을 동서 철학사에 적용함으로써 생태학적 민중교육학의 방법과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 (시대와 민중, 1996)
헤겔 철학, 특히특히 『정신현상학』의 총체적 사유체계가 지닌 원환적(圓環的) 폐쇄성과 그 논리를 비판한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을 헤겔 철학에 적용하여 열린 총체성(한울)과 개체 존엄성으로 되살려냄으로써 개체가 총체적 개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교육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 (다산글방, 2000)
1990년대에 쓴 11편의 글을 엮은 논문집으로, 생태적 위기가 재생의 전환점이 되려면 서구의 이성이 도달한 두 계기, 곧 지배주의적이며 자기집중적인 자기의식과 첨단 과학기술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자기집중적 자기의식은 나―자기성―자연의 분산적 자기의식으로 변화하고, 첨단의 기술은 동양의 농사 철학이 간직해 온 자연의 생명노동 범주와 만나야 한다는 것을 철학?교육학?종교학?노동의 측면에서 피력하고 있다. 동서고금의 인문학 자료를 토대로 생태노동의 논리가 반성되고 있다.

? (문사철, 2012)
이상에서 소개한 저자의 저술을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하고 새롭게 편집하여 주제별로 재출간하는 시리즈이다. 2012년 7월 현재, 제1권 『생태철학』, 제2권 『종교생태학』, 제3권 『생태교육철학』, 제4권 『생태노동』이 출간되었다. 추후 제5권 『생태노동과 우주진화』, 제6권 『생태교육학』, 제7권 『노동의 철학과 인간교육』, 제8권 『무엇을 할 것인가』(가제)가 출간될 예정이다.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12월 19일, 대선이 불과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5년 만에 치르는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누구에게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또 누구는 절대 안 되는지 또 어떤 정당은 국민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줄 수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정국이다.

물론 선거에서 정당이나 정치인이 아무리 좋은 약속을 한다 하더라도 모두 지켜진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우리도 그것을 안다. 그렇다면 선거란 거짓말쟁이들의 잔치이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야 하며, 그 외면 자체가 정치적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는 별 의미 없이 진행되었던 선거의 역사를 숱하게 많이 경험했다.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지만 늘 결과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같은 색 정당 깃발로 뒤덮였다.

수십 년을 같은 색깔 표시로 뒤덮인 한반도의 지도는 언제나 절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지형도가 깨질 수도 있음을 이미 확인한 전례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보다는 희망이다.

공포의 사회, 전체주의 정치

한나 아렌트(1906~1975년)는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이다.(1951년),(1958년),(1961년) 등을 통해 격동의 20세기를 날카롭게 비판한 아렌트는 제1,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흑인 인권 운동, 1968년 학생 운동 등 세계사적 사건을 두루 겪으며 20세기를 사상적으로 성찰하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전체주의의 필수 요소로 공포(terror)와 이데올로기를 지목한 부분이다(역자 서문, 8쪽). 전체주의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과 건전한 상식에 의존하여 판단하지 못하도록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수용소나 집단 수용소와 같은 시설을 마련한다. 이렇게 대중화된 사람들에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본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은 지금의 정치가 전체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폭력의 공포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은 어릴 적부터 움츠리고 조심하며 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시간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안 된다. ‘묻지 마 살인’과 흉악한 범죄들 때문에 거리는 감시 카메라 속에 가두어졌다.

2012년 9월 12일 오후 1시 21분 현재 ‘네이버’에서 검색되는 ‘성폭행’ 키워드 기사는 8만1602건에 달한다. 같은 키워드의 기사가 2007년 한 해 동안 5167건, 2008년에는 7627건 검색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2011년 범죄 백서에 따르면, 강간(성폭력범 포함) 범죄 발생 건수는 2007년 1만3634건, 2008년 1만5094건, 2010년에는 1만9939건이었다.

범죄 발생 비율보다 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9월 6일자 인터뷰에서 여성학자 권인숙은 “성범죄 보도의 증가가 ‘공안 통치’를 향한 위정자의 욕망 그리고 언론의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정권은 성폭력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명분으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부활시키겠다고까지 하는 실정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의 전체주의적 정치 기조가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뒤를 잇겠다고 나선 박근혜 후보는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으니 현 정권과 크게 정치색이 달라질 여지는 없어 보인다. 아렌트가 살아있다면 21세기 한국이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할 것이다.

칸트의 미학은 정치학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펴냄)에서 칸트의 판단을 차용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교화한다. 이 책은 아렌트의 강의를 그의 제자 베이너가 모아 출간한 것이다. 완결된 형태의 정치 이론서가 아닌 까닭에 이 책의 구성은 열세 개의 강의와 이에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대한 각주를 겸하는 베이너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 강의의 대부분은 칸트의?<판단력 비판>에 대한 재구성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지만 칸트의 인간학 역사철학 등에서 보이는 정치사상을 고루 잘 소개하고 있다. 칸트가 미적 판단 대상을 예술작품, 자연과 같은 ‘사물’들로 한정시키는 것과 다르게 아렌트의 미적 판단 대상은 ‘정치 행위’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미 칸트의?<판단력 비판>에는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이 내재해있다고 보았다(첫 번째 강의).

아렌트는 자신의 관심사는 “복수의 인간(men)이며 진정한 목표는 사교성”(네 번째 강의)이라고 명확히 밝힌다. 이 복수의 인간에 관하여 칸트가?<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칸트의 미학이 단순히 철학의 한 분야로서 미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적 목표를 향해있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복수의 인간을 아렌트는 다음처럼 정리한다.

“지상의 존재,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음, 상식과 공통감(sensus communis)과 공동체 감각을 가지고 있음 ; 자율적이지 않음, 심지어 사유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동반을 필요로 함 =??<판단력 비판>제1부의 미적 판단.” (67쪽)

칸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단수의 인간을<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룬다. 칸트의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비판하고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는 원자적 인간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보기에 <판단력 비판>의 인간은 이미 앞선 두 비판서의 대상인 원자적 인간이 아닌 복수의 인간이다.

아렌트는 만약 칸트에게 왜 단수의 사람(Man)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men)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칸트는 그들이 서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일곱 번째 강의)이라고 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미를 향유하는 인간은 결코 자기 금고에 예술 작품을 가둬놓고 혼자서 음미하는 인간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하며 그 가슴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대상에서 타인도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서로 소통하는 순간 예술 작품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며 인간은 복수의 인간이 된다.

일곱 번째 강의에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미 정확하게 생각하려면 타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했음을 밝히고 있다.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나’는 불완전한 자아일 뿐이다. 아렌트는 아래와 같은 칸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비판적 사고를 위해 공공성이 필수임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게서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소통할 자유를 박탈하는 외부 권력에 대해 생각하는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90쪽)
그렇다면 인간에게 필수적인 공적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렌트는 칸트 철학을 가져와 인간 정신의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정신의 확장은 “우리의 판단을 타인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가상적 판단과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이 상상력이다. 칸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미적 공감을 위하여 필요하지만 아렌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정치적 사안을 공감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확장된 정신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도 바로 이 확장된 정신을 통한 공적 소통에 의해 가능했던 우리의 정치적 경험이었다.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만이 정치를 살린다

칸트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 핵심 사항 중의 하나는 ‘무사심적 관심(disinterested concern)’이다. 흔히 ‘무관심적 관심’으로 번역되는 칸트의 이 용어는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때는 나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이다. 내가 갖고 싶은 신상품에 자꾸 눈길이 가거나 땅장사가 전국의 땅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면 결코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무사심적 관심을 미적 경험을 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내가 재테크의 수단으로 거실에 걸어 놓는다면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내가 그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우리가 모나리자에게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모든 사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도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가 사심 없는 마음으로 미적 대상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과 함께 느끼는 일련의 미적 태도를 관찰자적 삶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112쪽). 관찰자만이 사태를 목격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다.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는 행위자는 결코 자신의 사적 이익을 떠나서 전체를 통찰할 수 없다. 마치 고대철학자들이 철학은 노동하지 않는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사유하는 삶, 관찰하는 삶, 관조하는 삶만이 전체를 볼 수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공적 사건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갈채를 보내는 관중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122쪽).

관찰자 앞에서 광경은 전체로서의 역사이며, 이 광경의 참된 주체는 어떤 “무한”을 향해 “진행하는 일련의 세대들” 가운데 있는 인류이다.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인류의 목적지는 영원한 진보이다.” (118쪽)
칸트의 역사철학의 중심에는 인간 종, 즉 인류의 영원한 진보가 그려져 있다. 비록 개별 인간은 후퇴하기도 하고 진보하지 못하는 듯도 보이지만 종으로서 인류는 진보한다는 믿음이 칸트에게 있으며 아렌트가 그것을 보았다. 그 종착지는 ‘누구도 자신의 동료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와 인류의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국가들 간의 평화’이다. 관찰자는 이러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자이다.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칸트는 사람들이 미적 대상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관찰자는 오직 복수로만 존재하며 관찰자는 행위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항상 동료 관찰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공통감이 있기 때문이다. 공통감을 잃어버린 인간은 칸트에게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공통감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갖는 것이며 초감각적인 세계의 구성원들이 갖지 않는다. 본래 공통감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소통하지 않고서는 공통감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공통감을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이다. 나에게 다가 오지 않는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는 버려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경제의 문제이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들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만사가 형통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역사 어디에서도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서 민중의 살림이 나아진 적은 없었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정치가 바뀌어야 먹고사는 것도 바뀔 수 있다는 데에 공감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표심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모두 경제를 정치 문제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리는 경제란 자본가들의 경제일 뿐이다.

아렌트는 공통감을 공동체 감각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여기에서의 감각이란 몸으로 부딪히는 행위자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반성의 결과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건설하고 싶은 비전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반성하여 함께 소통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이다.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군 감축을 주장하는 것, 해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것, 교육은 사회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는 것, 그래서 대학 등록금은 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답게 살려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이는 나라의 기둥이기 때문에 나라가 돈을 들여 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소통할 공동체 감각이다. 관찰자로서 반성해서 얻을 수 있는 이러한 감각들을 함께 소통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이며 아렌트가 칸트에게서 얻은 교훈이다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1) [무세이온의 올빼미]

무세이온의 올빼미 – (1)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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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미(동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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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올빼미 /사진 : http://blog.aladin.co.kr/bootoyou

‘무세이온의 올빼미’는 음악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장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올빼미를 ‘음악을 듣는 귀’의 아이콘으로 삼고자 한다. 우리가 귀로 여기는 귓바퀴는 바깥에서 감지되는 진동을 증폭하는 장치이다. 흔히 튀어나온 귓바퀴가 없는 올빼미를 귀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림 속 ‘가면 올빼미’의 귓바퀴는 바로 얼굴 전체이다. 우리는 밤낮 없이 일하는 비효율적인 일꾼인 반면, 가면 올빼미는 얼굴을 돌아 증폭된 소리를 감지한 덕에 천부적인 사냥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잠깐 사냥하고 종일 노는 부러운 존재이다. 우리에게도 귓바퀴가 없었다면 인류는 종일 놀면서 얼굴로 음악을 듣는 예술가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지복(至福) 속에서 과연 노래가 만들어질까? 인간은 다행히 귓바퀴가 있었기 때문에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연주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건 올빼미이겠지만 자연이 주지 않은 음악을 구성하는 건 고통 속을 더듬거리고 있는 우리와 같은 존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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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은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내게 말했다.
“언니, 난 왜 눈을 보면 화가 날까? 내 마음속엔 음악이 없어서인가 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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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메일에 답을 쓰지 않았다. 지은의 말은 ‘눈’에 대한 것도 아니고, ‘화남’에 대한 것도 아니고 ‘음악’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내 지은의 말은 내 귓가를 맴도는 화두가 되었다. 이 짧은 두 문장을 진지하게 생각해서 답하기 시작하면 불어나고 불어나고 불어나서 우주가 꽉 차버릴 것 같았다. 그 메일에 답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순간순간 그 말이 떠올랐고, 그의 말은 어떤 시의 한 구절처럼 내게 각인되었다. 그리곤 이렇게 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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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그 말이 곧 노래야. 너는 이미 노래하고 있어. 우린 항상 이렇게 노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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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은의 글에 대한 뒤늦은 답장이다. 그리고 노래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이 글에는 지은과 키비와 나의 아들과 그리고 나와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얽혀 있다. 음악은 이렇게 사람들의 영혼에 다리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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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과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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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감지하는 지름길은 그가 듣고 있는 음악을 함께 듣는 일인 듯하다. 젊은 시절 녹음 테입에 일일이 좋아하는 곡을 담아 선물로 건네는 행위는 정성들인 고백에 다름 아니었다. 좋아하는 친구가 즐겨듣는 곡은 이내 내가 즐겨듣는 곡이 된다. 친구가 좋아서 그의 노래를 좋아한 것도 같고, 서로 좋아하는 것이 닮았기에 친구가 되었던 것도 같다. 친구는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아이들의 경우는 좀 다르다. 아이들은 어느 나이까지는 음악 향유에서 부모가 끼치는 영향이 크다. 나의 아이들은 내가 즐겨듣던 ‘자우림’ 김윤아의 솔로 앨범 ?유리가면?에 수록된 전곡을 외고 있다. 비틀즈의 ‘오브라디 오브라다(Ob-la-di ob-la-da)’가 나오면 두들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두들기며 따라 부른다. ‘렛잇비(Let it be)’, 그리고 생각난 김에 ‘케세라세라(Que sera sera)’도 함께 부른다. 그리곤 뜻을 전해준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라는 ‘오브라디 오브라다’의 뜻, ‘그것인 채 두어라’라는 ‘렛잇비’의 뜻, 그리고 ‘무엇이 될 것이든지 될 그것대로 될 것이다’라는 ‘케세라세라’의 뜻을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게 전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사춘기를 겪는 아들의 MP3를 듣다가 그의 영혼(아들에 대해 이런 말은 좀 간지럽기는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의 울림을 느꼈다. 다이나믹 듀오, 드렁큰 타이거, 화나, 가리온, 키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힙합 뮤직들이 아들의 가슴에 가득 차 있었다. 아들의 MP3에 담겨 있는 모든 노래를 즐기게 된 것은 아니다. 화나의 ‘엄마 지갑’ 같이 괴로운 주제를 다뤄 즐겨 듣게 되지는 않는 노래도 있다. ‘엄마 지갑’이 다루는 내용은 이렇다. 오락실 가고 싶은 국민학교 1학년생 병환이가 엄마 지갑에서 돈을 슬쩍한 뒤 엄마에게 고백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검은 옷의 낯선 형아의 말을 듣고 손을 댈까말까 망설이다 300원을 훔치려는 찰나, 엄마에게 들켰다는 내용의 가사이다. 여기서 병환이가 초등학생이 아니라 ‘국민학생’인 것으로 미루어, ‘어른, 너희도 엄마 지갑에 손 대며 크지 않았니?’라고 웅변하는 내용인 것이다. 내게도, 아들에게도 괴로운 주제이므로 패스.

화나의 음색은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화나가 피처링한 드렁큰 타이거의 ‘주파수’는 즐겨 듣는 곡 중 하나이다. 화나의 가늘고 떨리는 색다른 음색은 그 음색 자체가 자기 주장으로 들렸다. 드렁큰 타이거의 ‘난 창작의 노예, 창작의 고뇌’를 외치는 ‘몬스터’에서 반복되는 ‘발라버려’는 지난 몇 년간 즐겨 부른 크라잉넛의 ‘말달리자’의 ‘닥쳐’만큼이나 신나서 부르는 대목 중 하나가 되었다. 키비의 ‘소년을 위로해줘’는 은희경의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을 때 듣고 또 들었다. 가리온의 ‘소문의 거리’는 두 아들이 메타 파트와 나찰 파트를 번갈아 하며 부르는 틈에 나도 슬쩍 끼어 읊조린다. 이렇게 아들의 음악을 함께 즐기면서, 우리는 엄마와 아들에서 ‘친구’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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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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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eykorean.com

어떤 것을 즐기는 차원이 깊어지면, 대개 ‘이게 왜 좋게 느껴지지?’라는 질문이 슬슬 발동된다. 힙합의 묘미는 비트와 랩, 그리고 ‘힙합 정신’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묘미의 핵은 비트와 랩이라는 기술적인 요소보다 ‘힙합 정신’으로 수렴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팝에도 비트와 가사가 있다. 상대적으로 힙합에서 멜로디나 다양한 악기가 어우러진 화음 등의 여러 다른 음악 요소는 ‘뺄 수 있으나’, 비트와 랩은 힙합 음악에서 ‘뺄 수 없는 것’을 이룬다. 그런데 동시에 힙합은 비트와 랩만 있어도 ‘갖출 것을 다 갖춘’ 힙합 곡이 된다. 내면의 심장 박동을 표현할 수 있는 두들길 수 있는 무언가(심지어 아무것도 없을 때는 비트박스로)와, 하고 싶은 말을 들려줄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면 힙합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점, 그것이 힙합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음악 창작의 세계를 거대한 벽이라고 느끼지 않고 언제든 출입할 수 있는 세계로서 음악 창작을 향한 ‘오솔길’이 되어 주는 음악, 그것이 힙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트로트 정신’이라든가 ‘발라드 정신’이라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록 정신’, ‘힙합 정신’이라는 말은 록 뮤지션이나 힙합 뮤지션, 혹은 향유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추구되고 의미화된다. 록 정신이 기성 세대의 권위와 그 폐해에 도전하려는 청년 세대의 저항 의식과 결부되어 있다면, 힙합 정신은 주류 (백인) 사회의 사회적·문화적 질서에 도전하려는 비주류 (흑인) 사회의 저항 의식과 결부되어 있다.

힙합 정신의 첫 번째 면모가 바로 이처럼 악기나 전문성에 호소하지 않고 최소한의 음악적 요소만 갖추어도 음악의 창작을 통해 억눌린 것을 표출하는 자유로움일 것이다.

힙합의 탄생은 1970년대 초 DJ들에 의한 것이었다. 디스코가 유행할 때 클럽에서 DJ가 간주 부분, 즉 가사 없이 비트만 나오는 브레이크(break)를 반복하여 틀어주면, 춤을 추는 사람들은 중앙으로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이들의 춤을 ‘브레이크 댄스’라고 하고, 이 춤을 사람들을 ‘브레이크 보이’, 즉 비보이(B-Boy)라고 불렀다. 이것이 거리 문화로 번져갔고, 거리 문화 중 낙서 그림, 즉 그래피티까지 결합되면서, 힙합 문화의 네 요소로 랩, 디제잉, 비보잉, 그래피티가 꼽히게 된다. 1970년대 말에 미국의 동부에서 시작되어 서부로 퍼져나간 힙합은 어느덧 청년 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한국에서 힙합 문화는 이들 넷 모두를 갖춘 조합보다는 선택적 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힙합에서 랩을 작사해 구사하고 이끌어가는 것을 엠시잉(MCing), 혹은 래핑(rapping)이라고 한다. 음반에 스크래칭을 하는 등의 조작을 통해 비트를 생산해내는 디제잉(DJing)과 함께 힙합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요소이다. 랩에서 시의 운율에 해당하는 라임(rhyme)을 갖추면 기술적으로 더 매혹적인 랩이 만들어진다. [한국 힙합-열정의 발자취]에서는 미국에서 힙합을 직수입해 영어로 된 랩을 하던 시대를 거쳐 이제 한국어 라임이 3차원 라임으로 진화했다는 것을 여러 가사를 통해 보여준다. 그 중 소개된 화나의 ‘웬 아이 플로우(When I Flow)’의 라임 구사를 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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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I flow 펜과 종이를 양손에 잡고 생각속 에 담겨내 각본에 맞춰 배짱 좋게 라임을 통해 마음껏 소리의 광폭한 파동을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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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가사에서 밑줄 친 부분은 ‘ㅐ/ㅔ, ㅏ, ㅗ’가 반복되는 라임이 흐르고 있다.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의 경지를 우리의 힙합퍼들이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라임은 랩의 기술적 측면으로서 계속 고민되어야 할 요소일 것이다. 힙합 내부에서 ‘영어 가사로 랩을 해야 하는가, 한국어로 랩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없는가?’ 하는 오랜 고민과 논쟁이 이런 경지를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표현 형식을 고민하는 정신이 힙합 음악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힙합에만 고유하지 않은, 더 폭넓은 예술의 정신, 즉 이전의 표현 형식을 모방하면서도 뛰어넘으려고 하는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힙합 정신의 구성 요소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랩 가사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가리온도, 키비도, 화나도 고민하고 있는 ‘삶’ 밀착적인 주제가 힙합이라는 문화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정신’으로 공유되고 있다. 사실 얼핏 들으면 ‘삶’이라는 것은 너무 뭉뚱한 주제로 들릴 수 있다. 힙합퍼들은 자신의 주제 의식을 때론 별다른 수식어 없이 그저 ‘삶’이라고 표현하지만, 무수히 많은 삶의 양식을 고려할 때,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삶은 그저 도처에 널려 있는 ‘자연의 삶’은 아니다. 래퍼의 혀를 자르고 래퍼의 자유롭고자 하는 영혼을 도려내는 거대 상업주의 문화와 얽혀있는 삶도 삶이다. 힙합퍼는 거대한 주류의 물결을 이루고 있는, 그러나 한낱 세인(世人, das Mann)일 뿐인 군상(群像)의 삶과 다른 삶 속에 있다. 세인의 삶의 논리는 ‘돈 벌어 먹고 살아남기’의 논리이다. 여기에 질식되지 않고자 자본의 논리와 상업주의 문화에서 뛰쳐나온 삶, 저 실로 다양한 삶의 흐름에 주목하고, 허락되어 있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낸 삶이 바로 힙합퍼들이 말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주류 사회가 살라고 하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기획한 삶을 살아 가는 삶’. 여기에서 느껴지는 고뇌, 고독, 고통, 낙담, 바람, 희망, 상상, 그리고 위로. 이것이 힙합 정신일 테다.

끝으로 또 하나의 힙합 정신은 ‘크루(crew)’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음악 장르에 비해 힙합퍼들은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음악적 교류와 유대 관계를 맺는다. 이를 ‘패밀리’라고도 하고 ‘크루’라고도 한다. 힙합의 구성 요소의 하나인 비보잉을 하는 비보이들은 같은 연습장을 써야 하는 이유에서, 래퍼들은 컴필레이션 음반이나 피처링 작업 등의 교류 이유에서 크루를 맺는다. 그리고 크루에 기반해서 음반 회사인 레이블을 설립하곤 한다. 크루의 정신은 ‘연대(solidarity)’의 정신이다.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하는 ‘카르텔’이 아니라, 다양한 처지에서 느끼는 질곡을 함께 헤쳐 나아가기 위한 공감의 정신이 힙합퍼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공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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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힙합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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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가 ‘문화 산업’이라는 말을 통해 ‘문화마저 산업화하는 데 대한 비판’을 수행할 때, 아도르노에게는 문화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이 수단으로 전락하여, 인간의 영혼마저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한 이 기능연관적인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최소한 문화만은 기능연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달라지고자 하는 시도, 그것이 아도르노에게는 문화의 핵심이었다.

‘인디 문화’는 아도르노의 문제의식대로 문화조차 더 많은 이윤의 수단으로 삼는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창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대안적 몸부림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인디 문화를 고수할 수 있는 사회 상황과 우리의 사회 상황은 많이 다르다. 서구 사회에서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정도의 복지가 이루어져 있다. 국가 차원에서 마련되어 있는 복지 외에도, 기업의 활발한 메세나 활동도 문화적 창의성을 키우는 모판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인디 문화를 지향하는 예술인들은 실로 살얼음판 위에서 문화적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젊은 날을 소위 돈벌이와 상관없는 ‘딴따라’로 대책없이 보내고 나면 노후의 삶이 암담하게 기다리고 있다.

2006년에서 2008년까지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의 공연을 이끈 힙합 춤꾼 이우재는[힙합, 새로운 예술의 탄생]에서 힙합의 정신은 자유를 원하는 정신이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퍼부을 수 있는 자신감이라고 말한다. ‘힙합인은 돈, 지식, 학벌, 권력,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당당하게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선언한다. ‘약한 사람에게는 무한히 따뜻한 자들이지만, 강요된 틀에는 타협하지 않고, 개인의 개성과 생각을 가로막는 틀에 저항하고, 어떤 도그마로써 자유를 억압하는 데 저항하는 자들이 힙합인’이라고 말한다. 힙합 정신은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강하고,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도전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힙합퍼를 ‘새로운 예술인’이라고 규정하며 예술이 어떤 불가해한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서 성립한다는 명쾌한 예술관을 펼친다. 그의 논의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춤꾼으로서 연습은 현재를 위해서 하는 것이며 춤을 추는 순간은 항상 현재이다’라는 대목이었다. 더 나이가 들거나 무슨 사고가 나면 더 이상 춤을 표현할 수 없는 제약 아래 운명적으로 놓인 춤꾼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현재와 현재 하고 있는 실천이 소중하다’는 의식이 웅변되고 있었다.

불교에서는 현재의 시간을 ‘찰나’로, 그리고 영원의 시간을 ‘억겁’으로 표현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란 1초의 1/75에 해당하는 순간이다. 수학으로 표현하면? 수학에서 가장 짧은 순간은 1초를 무한수로 나눈 값이다. 현재란 0, 즉 없는 것(無)에 근사한다. 현재를 ‘수학’으로 사고하면, 다시 말해 ‘이성’으로 사고하면 현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춤을 추는 사람의 현재는 춤추는 행위가 분출되는 순간으로 인해 참답게 현존하는 작품이 된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근원]이 떠오른다. 이 저서에서 하이데거는 라임을 구사하며 예술에 대한 철학을 펼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작품이 존재하는 것은 ‘충격(Stoß)이 열린 장에 들어서는 것으로, 어떤 섬뜩함이 우리에게 밀어닥침(aufstoßen)으로써, 지금까지 평온해 보이던 것이 무너진다(umstoßen). 작품 자체가 존재자의 열려 있음 안으로 순수하게 밀려들(entr?cken)수록 작품은 이러한 열려 있음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으면서(einr?cken), 우리를 습관적으로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우리를 떠밀어내는(herausr?cken) 변화(Verr?ckung)를 일으킨다.’

하이데거는 이 대목에서 ‘부딪치다(stoßen)’와 ‘움직이다(r?cken)’의 두 표현의 여러 변형을 사용하여 예술 작품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다. 예술 작품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을 흔들어서, 가려져 있던 것을 떨쳐내고 우리를 열린 장으로 데리고 가 진리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시(詩)이든 회화이든 건축이든 힙합이든, 어떤 예술 작품은 팔리거나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도구적 사용으로부터 떠나, 우리의 습관적인 사고, 습관적인 행위를 흔들어 깨워, 그것 너머에 숨어 있던 진리를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순간순간을 아파하며 민감하게 느끼고 고민하고 있는 힙합 정신에서 미래를 본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을 추구하고 물질에 안주하고 물질을 위해서 오늘을 달리고 있을 때, 지하철 어느 모퉁이를 연습장 삼아 춤추었던 사람들, 비 새는 공동 작업실에서 물을 퍼내가면서 음악 작업을 하는 사람들, 이들의 젊음과 열정이 ‘돈 벌어 먹고 살기의 쇠 창살’에 갇힌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진실을 느낄 수 있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 키비라는 한 힙합 음악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시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함께하기 바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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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 [시대와 철학]

‘(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

일시: 2010년 6월 10일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철학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의 지배적 권세와의 관계방식을 반성하고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이 고전적으로 조용한 사유의 정원을 소요하거나 현대적으로 각종 하청업을 수행하는 데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없는 처지에 서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자신의 여유를 시대의 문제를 비켜가는 피신처로 삼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기 생존의 절박함에 추동되어 외래사조의 청부업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철학은 자기상실과 세계상실의 불행 속에 있다. 그러나 생의 위기를 사유하지 않는 곳에, 극복 의지가 없는 곳에 철학의 위기가 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유입과 군부독재의 등장에 저항한 광주항쟁은 진정한 자유와 연대의 삶에 대한 동경이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증명하였다. 고통이 피워낸 이 문제의식은 수많은 청년들을 도래하는 해방에 자신과 인류의 삶의 의미를 걸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철학계의 일부 소장학자들은 철학을 ‘시대의 진정한 혼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활동’으로 규정하고「한국철학사상연구회」(1989)를 창립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해방 전후의 우리의 스승들이 지난한 위기에 선 한국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생의 열정과 사색을 80년대의 정치 경제적 현실의 문맥에서 계승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의 사상의 교사들은 3.1운동의 자유와 연대의 정신을 계승하여, 신성한 가치의 조명 아래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현실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이 추상적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현실로 돌아오고자 하는 실천적 지성을 철학의 포부이자 양심으로 간주했다.

서양학술의 유입에 따라 자연사에 대한 우주적 이해와 현대 엄밀 과학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역사적 인생이 겪는 억압적 고통의 해결은 회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이 참여적 지성의 전통은 현실의 주요문제를 간과하는 지성은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려는 자존심과 자기의식을 저버린 비루한 정신이라는 것을 자각시켜 왔다.

유성의 머리 위에 태양이 빛난 이래, 머뭇거리던 생명체가 최초의 결단으로 눈을 뜬 이후, 인류 혁명사는 자유의 사상만이 인간을 세계와 화해하게 하는 것임을 감격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그 자유야말로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의 총괄적 변화를 위해 전진하는 고단한 시간의 삶을 기쁨으로 인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난 날 수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계급을 넘어서서 만인의 자유를 위해 민중 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소수자들의 정치 경제적 과두제를 전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의 등장, 문민정권 이후의 신자유주의 공세, 의회 민주제의 형식적 정상화 및 정보 문화산업의 일상화, 생존 경쟁 이데올로기의 선전 등은 민주의 이름으로 부르주아 독재를 공고하게 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과학적 유물론 철학의 교조주의적이고 사회 공학적인 성격이 자본주의의 통속적 유물론과 친화성이 있으며, 기계적 경직성을 갖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반성은 기존의 변증법이 갖고 있는 전체성의 원리가 개체성을 말살하는 억압의 원리라는 통념을 보급시키고, 무명의 평등한 개체들이 주권자라는 관념을 확산시켰다. 영상과 정보 상품의 폭발적 소비 흐름을 타고 개체들의 권력은 사회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광고판이나 말끔해진 공중 화장실에서도 떠다닐 수 있었다.

전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에 기반한 주체성도 죽었다는 표어로 유행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은 문화생활 양식으로 실증되는 것 같았다. 소외된 소수자를 포함한 개체들의 권리는 유연하게 된 사법부의 법제화에 의해 객관적으로 보장되는 듯했다. 이러한 상황은 참여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상품 정보화 조류와 명운을 함께했다. 이처럼 개체들의 권력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자본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갔다’. 그리고 그동안 무엇이 왔는가? 서양에서는 가장 흔한, 그래서 닳아빠진 자유 민주적 유물론이 ‘왔다’. 세계는 물건들과 그 관계들의 총체이다. 사회적 개체들은 그것에 의존해서만 자유롭게 존재한다. 이 얼마나 편리하고 내재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상인가? 그것은 초월적 종교와 예술과 진보주의도 그 앞에서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매혹되는 미끈한 속류 유물론이다. 그리고 그에 기초한 신나는 가상세계가 덤으로 주어졌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이것에 홀린 세계상을 세속적 유물론이라고 판단한 맑스의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총체적 물질화와 정신의 전면적 자기소외는 현상적 실재가 가상이라는 고전적 관념을 가상도 실재라고 뒤집는 데에서 경쾌하게 완성된다.

그동안의 한국사회가 누린 민주적 세계상은 정보 상품의 홍수와 개체의 권리, 금융 증권의 생활화와 사적 공간의 법제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경제 권력에 매료되고 국가권력에 호소하는 반(反)주체적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철학은 변증법의 전체성의 원리와 주체성을 두려워하여, 자유 민주적 과두제가 갖는 전체성의 원리와 폭력성에 대한 관심과 탐구를 포기했다.

이러한 무관심은 기존의 자유 민주적 사고가 전체적 일원성과 개체적 다원성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서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 전통철학이 논변의 편리를 위해 동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범주에 갇혀 버리기로 작정해온 것과 맥을 같이할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 사고는 변증법적인 전체성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현실에서 작동하는 독재적 전체성에 대한 탐구까지도 버리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간의 민주화 운동에 의해 부분적으로 되찾은 개체성의 권위를 국가와 자본이라는 유서 깊은 전체성에 기대어 회복하고자 함으로써 급진적 주체성을 기각했다.

개체성과 전체성은 사이좋게 공존한다. 지상의 대부분의 나라는 전체성의 위력 하에 개체가 보호받고 배려되는 것을 민주주의라 칭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제는 사회공학자들이 되어 버린 정객들과 기업가들이 뚜렷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사랑받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는 이 시대의 여러 군주들이 의회 민주제에 의해 등장하고 그것 위에 군림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적 유물론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진보적 학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의 상업적 관리 속으로 편입되고, 대학은 하청업체가 되었다. 학문 영역은 신자유주의적 정치화와 이데올로기화라는 심각한 재난을 만나게 되었다. 생존의 위협 속에서 국가가 규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어 주문 제작해야 하는 학자들은 생산량을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스탈린적 노동 생산성의 법칙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거대한 메뚜기 떼가 전진하는 원리가 서로 지체하면 뒤에 오는 자에 의해 먹이가 되는 위험성에 따른 흥분이라면, 우리의 이성은 분명 곤충의 변태적 욕망을 동력으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으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경영논리 속으로 변질된 지금, 이미 관행이 되고 법제화되어 어느 누구도 고치기 어려운 숙환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이러한 습관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비판에 의한 철학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미리 봉쇄하는 한국 학술체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시대의 사유로서의 잡지 『ⓔ 시대와 철학』을 사상의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우리의 시대는 밖으로는 정치·경제·과학·문화의 영역이 제기하는 여러 철학적 문제에 대한 탐구와 해결을 요구하고 있으며, 안으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고 실현하는 주체성에 대한 모색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성은, 세상의 바닥과 구석에서 권력이 가한 모든 참사가 전해주는 말없는 자유의 충동을 삶의 진실로 수용할 때, 물질과 생명이 갈등하는 가운데 펼쳐져 있는 세계의 심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더욱 우리 내면의 양심으로 다가올 것이다.

세계에의 즐거운 몰입 대신 세계에 대한 탐구와 사색으로, 세계를 벗어나는 영혼 대신 현실을 새로운 미래로 생성시키는 주체성을 찾는 데에서 사유는 그 깊이와 폭을 갖게 될 것이다. 시대와 사유가 넘어지느냐, 아니면 일어서느냐는 바로 이 깊이와 폭의 창조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일동

강지은 곽노완 구태환 권정임 김광호 김교빈 김문용 김세서리아 김성민 김성우

김수중 김시천 김우철 김원열 김인곤 김재현 김종곤 김호경 김홍경 문성원 박강수

박기순 박민미 박영균 박영미 박영욱 박은미 박정하 박종성 백충용 서도식 서영화

서유석 송석현 송종서 신우현 심의용 심혜련 연효숙 우기동 유현상 이관형 이규성

이병수 이병창 이병태 이상훈 이성백 이순웅 이재원 이정은 이정호 이지영 이철승

이현구 임재진 전호근 정준영 조광제 조민환 조은평 최유진 최종덕 최한빈 한길석

현남숙 홍영두 홍원식 황성혜

(이상 가나다 순 69명)

글: 관리자